• 최종편집 2023-11-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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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성을 쏘다
    제목 : 경성을 쏘다 작가 : 박건웅 출판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은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진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였다. 올해는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정부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통해 독립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의 삶을 널리 알렸다. 극히 일부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의 일대기를 교육하고, 강조하는 것을 지겨워한다.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일제강점기 시기에 일본놈들에게 억압, 차별, 수난, 모욕을 당한 사실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유대인을 보라. 그들은 아우슈비츠로 상징하는 대학살의 기억을 수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유대인은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영화, 소설, 만화 등 대중이 쉽게 만날 수 있는 장르에서 유대인이 나찌 독일에게 핍박당하고 학살당한 사건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세계에 자신들이 당한 고통을 알리고 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어 7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당한 수난과 고통의 총체적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1945년에 해방은 되었지만 매국노를 처단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매국노들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면서, 현재 한국에는 친일매국노의 뿌리가 단단히 자리잡고 있고, 그들이 돈과 권력을 갖고 친일매국노 청산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30여 년의 세월은 한국이 민주주의를 확립해 나갈 시기였지만, 오히려 친일매국노, 군부독재의 폭력으로 민족정기가 위축되고 기운을 펴지 못했다. 일본특무경찰이 해방되고도 독립운동가의 뺨을 때리는 처참하고 참담한 나라가 된 것은, 매국노들의 발호와 권력의 비호 때문이지만, 민중이 어리석고 정치적 상황이 성숙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아주 느리지만, 시민의 피와 땀으로 민주주의는 성숙하고 우리는 친일매국노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고,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는 것이 왜 필요한가도 깨달았다. 우리는 비록 36년 동안 일본의 폭압에 시달렸지만, 모두가 숨죽이고 있지 않았다. 3.1만세운동은 아시아 식민국들의 해방운동이 되는 도화선이었고, 곧바로 해외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한 매우 드문 독립운동가의 삶을 그리고 있다. 김상옥 열사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한데, 그를 다룬 책은 2014년에 '김상옥 평전'과 '경성을 쏘다' 두 권에 불과하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삶이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작품은 이성아 작가가 쓴 '경성을 쏘다'를 바탕으로 한국역사와 인물을 그래픽노블을 그리고 있는 박건웅 작가가 재해석해 그렸다. 소설과 그래픽노블은 형식과 내용에서 많이 다르지만, 상호보완의 관계다. 소설은 문자 기호로 이야기를 만들고, 추상적 관념의 소설을 이미지로 전환하면서 공감각의 지평을 확장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문자는 고도의 추상적 이미지다. 이성아 작가의 소설은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 작품 속 세계 역시 높은 추상적 밀도를 갖는다. 그래픽노블에서는 소설의 추상적 묘사가 이미지로 전환한다. 그래픽노블의 이미지는 공간을 분할해 각각의 칸이 소설의 문장을 이미지화한다. 만화에서 인물의 대사는 소설보다 생생한데, 축소, 생략, 과장한 캐릭터는 독자의 감정에 인물(캐릭터)과의 동일시, 동질감, 감정이입의 여지를 풍부하게 남긴다. 박건웅 작가의 작품은 형식미가 뛰어나고, 기법이 독특하며 개성 있다. 드로잉이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판화처럼 그린 이미지는 두꺼운 외곽선으로 더욱 강렬하게 보인다.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 그림은 외국 작가들과 분명 다르다. 나라마다 작가들의 그림선이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보이는데, 한국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외국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듯, 자기 색깔이 분명한 그림체를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도드라져 보인다. 판화 기법의 작화는 단순하면서 강렬하다. 이런 형태의 그림은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효과가 있다. 박건웅 작가가 줄곧 역사와 사회적 인물을 다루는 것은 자신의 그림과 잘 어울리는 소재라는 점에서, 작가의 작품성을 발휘하기 적합한 소재를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그래픽노블로 재창조하는 작업은 어떤 면에서 오리지널 창작보다 어렵다. 소설 원작일 경우, 문장으로 묘사하는 풍경, 배경을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할 경우 더욱 힘들다. 따라서 원작을 그대로 압축 또는 재구조화를 통한 작업이기보다 원작을 바탕으로 하되 만화작가의 해석을 거친 새로운 작품으로 창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작품은 서점에서 구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정부지원자금으로 창작, 제작되었으며 한글,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로 번역해 그 나라의 주요 기관과 도서관 등에 배포한다. 이렇게 좋은 작품은 값을 낮게 책정해 많은 사람이 쉽게 사 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많은 사람이 보기를 추천한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자꾸 생각나
    제목 : 자꾸 생각나 작가 : 송아람 출판 : 미메시스 미메시스의 그래픽 노블. 만화책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만화가 예전과는 다른 갈래가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만화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며 창작물이지만, 그동안은 수준이 낮은 장르로 여겨왔다. 이것은 만화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다. 소설도 흔히 삼류소설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준이 낮은 모든 창작물은 비주류로 묶여 천대받아왔다. 그러던 만화가 언젠가부터 '그래픽 노블'로 분류되면서 당당하게 고급한 예술작품으로 팔리고 있다. 같은 만화임에 분명하지만 소위 말하는 '대본소 만화'나 '공장 만화'가 아니라 '작가주의' 만화를 지향하기 때문이고, 그만큼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래픽 노블은 특히 유럽에서 창작이 활발하다. 미국여행 때, 서점에 들러서 그래픽 노블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기대보다' 종류가 많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유럽과 한국, 중동,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의 그래픽 노블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어서, 나처럼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아닐까 한다. 그래픽 노블의 장점은 소설과 만화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이야기)의 구조와 만화(그림)의 수준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수준이 낮으면 그래픽 노블의 자격을 잃게 된다. 모든 만화가 다 '그래픽 노블'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야기와 그림의 수준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에서 핵심은 '그래픽' 즉 그림이다. 그림과 이야기가 모두 훌륭해야 하지만, 그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없다. 그래픽 노블 작가는 만화가와 소설가를 섞어 놓은 듯한, 그 둘의 장점을 모두 갖춘 부러운 존재들이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래픽 노블 작가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들의 능력이 퍽 부럽다. 이 만화는 송아람 작가의 장편 그래픽 노블이다. 웹툰으로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었는데, 그래서인지 만화의 특징인 네모칸이 없다. 게다가 무려 600쪽이 넘는 분량이어서 만화지만 읽기가 만만찮다. 내용은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다룬 것인데, 주인공들이 만화가라는 점에서 자전적 요소가 있어 보인다. 주인공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하고 진지한 시간들이겠지만, 시간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독자인 내 눈에는 찌질해 보인다. 청춘의 찌질함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리려 했다. 생각해보면, 청춘의 지난 날은 아름답기도 했지만, 어리석고 찌질한 부분도 많지 않던가. 자의식 과잉과 편견, 심각한 자기애, 오해와 독단 등의 감정이 분출되었고, 감정적으로 미숙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우습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영화를 만드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보인다. 즉 솔직한 감정 표현들이 민망하고 불편하지만 그런 감정과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청춘들에게는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 작품에는 여섯 명의 청년이 등장한다. 만화가 최도일, 백승태, 만화가를 지망하는 장미래, 최도일의 애인 유명지, 장미래의 애인 정상인, 백승태를 좋아하는 김겨자가 그들이다. 주인공은 장미래와 최도일로 두 사람의 만남과 감정의 얽힘, 헤어지고 만남의 반복이 드라마의 중심을 이룬다. 장미래와 최도일 모두 애인이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린다. 장미래의 애인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으로, 건실하고 모범적인 청년이다. 장미래가 최도일에게 끌리는 마음을 들여다보면, 지금의 애인 정상인과 비교했을 때, 성격과 태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최도일은 미래가 불안정한 만화가지만, 장미래에게는 자기 작품을 출간한 '작가'이고, 만화가를 꿈꾸는 장미래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최도일은 건실하거나 모범적인 정상인과는 사뭇 다르다.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연애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최도일과 유명지는 같은 집에서 산다. 최도일은 자기가 살던 집과 작업실의 보증금을 까먹고 유명지의 집으로 들어와 월세를 부담하며 살고 있는데, 유명지와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고등학교 이후 사귀기 시작한 '오래된 커플'이다. 유명지는 최도일과 결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최도일의 변심에 충격 받는다. 만화가를 지망하는 장미래가 최도일 블로그에 댓글을 남기고, 최도일이 장미래에게 비밀 메시지를 보내면서 두 사람이 만나는데, 장미래를 만나는 자리에 최도일의 후배 백승태가 나타나면서, 세 사람의 관계가 살짝 복잡해지지만, 백승태가 장미래에게 집적거리는 건 연애를 시작하는 젊은 남성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미시적이고 디테일한 개인의 생활과 감정을 깊이 천착하고 있어 독자가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기 좋은 작품이다. 독자의 시각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말과 태도는 독자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이 보기 좋거나, 바람직하다기 보다, 숨기고 싶고, 답답하고, 짜증나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일 수 있다. 창작에 몰입하는 이유는,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작품과 창작물은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의 위치, 시각, 가치관,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감정이입하게 된다. 이 작품이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어, 연애를 하는 청춘남녀라면 보편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사회적 맥락을 생각하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청년, 미래가 불투명한 청년, 사회적 입지를 다지지 못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한편으로 복잡한 연애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존재의 불안과 삶의 고민, 자아의 분열과 타자를 의식해야 하는 분열적 감정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열린 결말로 끝나는 것은, 주인공들이 가진 불안과 불투명한 삶, 미래를 보여준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바닥이 흔들리던 청년의 삶도 나이가 들면서 점차 단단해지고, 생활인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한편으로 안도하고, 한편으로 삶의 단조로움, 삶의 지겨움, 삶이 구질구질함을 떠올리며 한숨 쉴 때도 있을테다. 어떤 사람은 성공할 것이고, 누구는 여전히 단조로움 삶과 생활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것이며,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단칸방 월세에서 전세로, 아파트로 옮겨가며 중산층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멀지 않은 미래'가 다가오기 직전의 삶을 살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를 숨쉬고 있고, 자신의 예술행위를 '경제적 가치'로 인정받아야 하는 삶을 살지만, 그것을 의식하지는 못한다. 모든 문제는 '개인적'이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개인주의'는 '민주주의'와 같은 정도로 중요하며, 이 순간만큼은 체제나 구조보다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한 시기라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Sur-reslism)'의 면모를 보인다. 청춘은 이루지 못할 꿈을 꾸며, 구체적 현실을 감각하지 않고, 이상과 꿈을 좇아 달리는 추상적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는 물리적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지만, 청춘의 이상과 꿈은 비현실의 세계에 머문다. 작가는 리얼리즘을 구현하려 했으나, 작품 속 세계는 현실을 초월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주인공들은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작가와 결별하는 지점을 건너간다. 훌륭한 작품일수록 작품의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데,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전에 작품을 끝낸다. 이제 주인공들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할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이 열려 있는 상태로 끝나는 것은 작가가 만든 주인공들의 운명에 더 이상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미래는 최도일을 만나기 전의 모습과 최도일과 연애를 하면서 달라지는 모습에서 내면의 성장이 보인다. 질투와 초조함으로 자기 중심을 잃었던 과거와는 달리 최도일과의 관계가 삐걱거리면서 오히려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출간한 작가'라는 이름으로 외부에서 자기를 찾으려던 장미래가 멀고 먼 길을 돌아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장미래는 성장한다. 이제 장미래는 연애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 작가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뿌리를 내린다는 점에서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의 존재가 자기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새로운 길에 서는 모습을 보인다. 독자는 장미래가 걸어갈 미래를 응원하고, 희망을 생각한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와이 아트?
    제목 : 와이 아트? 작가 : 엘리너 데이비스 출판 : 밝은세상 독특한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는 그래픽노블이다. 제목부터 독자에게 질문한다. '왜 예술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도 아니고, '왜 예술인가?'라고 묻는데, 독자는 당연히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 미셀 푸코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두고 작은 제목으로 작은 책 한 권 분량의 비평을 썼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파이프 그림 아래 필기체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 있는데, 그림보다 이 글씨가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실제로 푸코도 그림으로의 '파이프'보다는 텍스트로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텍스트는 이미지 기호로 작동하는가, 아니면 문자 기호로 작동하는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작품(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파이프 그림과 글씨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기호이며, 둘 사이의 관계는 실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푸코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분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에 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지로써 파이프는 관객에게 '파이프'라는 시각적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관습과 경험에 따라 관객은 그 이미지를 '파이프'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파이프'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파이프'가 더 이상 '파이프'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익숙한 사물은 낯설어지고, 기존의 상식과 개념은 파괴된다. 이 책(와이 아트?)도 시작이 난해하다. '왜 예술인가'에 답하기 전에 예술 작품의 종류를 알아보자고 하면서, '색상'을 말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림은 흑백이다. 분명 주황색, 파란색, 주황&파란색을 말하지만 실제 그림은 흑백이다. 이것은 역설(irony)이다. 뒤이어 크기에 따른 작품, 가면, 가면, 거울, 먹는 것, 감추기, 끔찍함 등에 관한 설명이 나오고, 아홉 명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돌로레스, 리처드, 마이크, 주롱, 소피아, 마케일라, 트와이스투, 제니퍼, 호세는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퍼포먼스를 하는 돌로레스는 사람들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관객은 그 말에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하는 관객들이 생기고, 작품의 진실성이 사라진다고 생각한 돌로레스는 관객을 피해 여행을 떠나고, 상어에게 한쪽 팔을 잃지만, 다시 상어를 쫓아가 잡아먹자 팔이 자라고, 상어이빨이 생긴다. 이것은 분명한 은유(metaphor)다. 돌로레스의 팔을 뜯어 먹는 상어는 '예술'을 상징하며, 잃어버린 팔은 '예술성' 또는 작가의 창작욕, 상상력이다. 돌로레스가 상어를 잡아먹자 팔이 자라고, 상어이빨이 생겼다는 것은, 고갈된 작가의 창작성과 상상력을 되찾았다는 의미다. 아홉 명의 작가가 모였을 때, 이들은 전시 준비를 한다. 하지만 비가 쏟아지고, 전시장의 작품은 망가진다. 지붕과 벽이 바람에 날아가고, 하늘에서 거대한 손이 내려와 집을 들어올린다. 모두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 마이크가 작은 섀도박스를 들여다보고, 이들은 극적으로 구출된다. 안전하고 쾌적한 곳에 도착한 그들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돌로레스는 작은 인형을 만들기 시작하고, 다른 작가들도 작은 집 안에 들어가는 인형과 물건을 만들어 넣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었던 전시장의 작품을 작게 만들어 배치한다. 그 작은 인형-작가 자신의 아바타-들은 스스로 움직이며 더 나은 작품을 만들고,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어 간다. 이때, 돌로레스가 갑자기 그 작은 집의 지붕을 열고, 바람을 일으키고, 물을 뿌리고, 작은 집을 들어서 흔든다. 그리고는 작은 인형들을 향해 '용기가 무엇인지 보여줘'라고 말한다. 소설 형식에 '액자 소설'이 있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이 액자소설로 알려졌는데, 액자 소설은 보통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 가운데서도 이 작품처럼 이야기가 순환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순환적 액자소설'로, 이야기가 무한반복할 수 있는 구조다. 순환구조를 갖는 이야기는 주로 '시간'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시간 이동(time slip)을 통해 같은 환경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작가가 앞에서 '왜 예술인가?'를 말하면서 작품의 분야와 종류를 설명했는데, 작품 속 아홉 명의 작가가 경험하는 것은 자신들도 알 수 없는 운명이었고, 자기 작품을 망친 거대한 힘이 사실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창조와 파괴가 서로 다르지 않은 일련의 창작 행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었다. 아무 연락 없이 책이 도착해서 조금 의아했는데, 내가 그래픽노블 비평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출판사에서 알았나보다. 좋은 책을 읽는 즐거움에 대한 최소한의 답례로 리뷰를 쓴다. 이런 기회는 얼마든지 환영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평등은 개뿔
    제목 : 평등은 개뿔 작가 : 신혜원, 이은홍 출판 : 사계절 이 책을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은, 이 '만화책'이 페미니즘 교과서로 채택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이 '만화책'으로 기초, 기본수업하고,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은 요즘 페미니즘 책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교재가 부족할 걱정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을 리뷰하기 위해서 책을 따로 인용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 책에 얼마나 공감하는가를 잘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이 책의 작가 두 사람은 나와 같은 세대-몇 살 적다-를 살아온 사람이어서 내가 페미니즘을 배운 경로와 경험이 두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봐도 좋겠다. 작가 부부는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진보적 삶을 살고 있었고, 한국사회에서는 0.1%에 속하는 부자, 아니 '평등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들은 대학에서 '운동권'이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진보, 합리, 이성의 태도를 갖춘 청년이었다. 그들이 결혼하고도 이런 태도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 다짐하지만, 현실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남성인 이은홍은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진보적인 삶을 산다고 자부하지만, 알고보니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사회의 관습에 길들여져 기득권의 공기를 숨쉬며 살아온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나도 80년대 중반-군대에서 전역하고-부터 선배들과 함께 사회과학 공부를 했다. 그때 정치경제학, 유물론철학, 민중사학 등을 깊게 배웠지만 '페미니즘'은 따로 공부하지 못했다. 지금도 소위 '386 운동권 세대'가 비판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했지만, 정작 그들의 의식은 여전히 가부장, 남성우월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내 선배들도 그랬다. 그들은 누구보다 진보적인 사람들이었고, '언드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그래서 경찰의 수배를 당해 하루가 멀다하고 도망다니던 투사들이었지만, 그들이 나중에 결혼해서 보여준 태도를 보면서, 나는 그들이 얼마나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매몰된 사람들인가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들도 이론적으로는 남녀평등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 체화하지 못했다. 일상에 녹아들지 못하는 이론이나 주장은 오히려 독이 된다. 80년대에는 '페미니즘'을 배우고 싶어도 마땅한 교재도 부족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책이 바로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론'이었다. 이 책은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였지만, 아마 읽지 않은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마르크스, 레닌의 저작을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고, 여력이 없던 때였으니, '여성론'을 읽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여성론'을 읽고 페미니즘의 기초를 배웠으며, 이후 페미니즘 이론을 스스로 공부했다. 그때만 해도 '페미니즘'이라고 부르지 않고, '여성이론'이나 '여성학'이라고도 했는데, 어떤 이름이든 남녀평등에 관한 저서나 논문들이 발표되기 시작했고,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 같은 책도 번역되어 나오고 있었다. 남성으로서 페미니즘 이론을 배우는 것이 '진보적 태도'라고 한다면, 나는 이론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삶에서 '페미니즘'을 체득했다. 내게는 누나가 있는데, 처음에는 한 명이었다가 내가 결혼하고 나서 누나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매우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내게는 세 명의 배다른 형과 두 명의 누나가 있는데, 부모가 살아계시고,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을 돌보고, 살 수 있도록 온갖 힘을 쓴 건 누나였다. 큰 누나는 나와 13년 차이가 나는데, 실질적으로 '엄마' 노릇을 했다. 나는 자라면서 늘 엄마와 누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고, 남자로, 장남으로 아쉬움 없이 생활했다. 우리집은 매우 가난했음에도, 나는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밥하고, 반찬 만들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온갖 시시콜콜한 집안 일에서 해방된 상태로 지낸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큰 특혜였는지 전혀 몰랐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어머니가 모든 집안일을 했고, 어머니는 내가 50살이 될 때까지 비교적 건강하게 살다 돌아가셨다. 결혼을 하고도 집안일은 어머니 차지였다. 아내는 결혼 전부터 직장을 다녔고, 지금도 다닌다. 반면 나는 결혼 전부터 프리랜서였고, 결혼하고 나서 직장에 취직했다가, 그마져도 몇 년 지나서 다시 백수가 되어 집안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직장에 다니지 않는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나 역시 무려 50년을 어머니의 그늘에서 살며, 온갖 혜택만 받고, 살림은 해본 적이 없어서 서툴렀다. 게다가 내 의식에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은 남자가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고,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사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성문제 일반에 관해서는 비교적 평등하고 진보적 태도를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의 생활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성우월주의자, 가부장사회의 기득권을 누리는 남성이었다. 다행히 아내는 나를 이해해주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아내가, 집안일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일은 내가 맡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뉘었다. 내가 지금도 늘 마음에서 누나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것은, 누나들이 동생인 내게 베푼 것에 아무런 보답을 못하고 있는 것 때문이다. 누나들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사회적 존재로 인해 집안에서도, 사회에서도 이중, 삼중의 억압과 불평등, 착취를 당하며 살았다. 내 아내도 여성이면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데, 나는 어머니, 누나, 아내의 삶을 보면서, 세상을 실제로 이끌어 가는 것은 여성인데, 여성이 사회적으로 억압당하고, 불평등한 위치에 있으며, 남성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야 하는가 의문을 갖게 되었다. 페미니즘을 성(sex) 대결로 몰고가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청년 남성들이 여성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 학교교육이 근본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교육이라면, 어릴 때부터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으로서의 '젠더'를 구분해서 가르쳐야 하고, 성과 제더에 관한 어떠한 편견과 차별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이 현상-여성혐오-을 좀 더 본질에서 들여다보면, 이것은 사회구성원을 분리하고, 경쟁과 대립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가족제도를 해체하고, 여성의 사회참여-이 문제는 여성의 삶에 있어 장단점이 다 있다-라는 명목으로 여성의 노동력을 사회화하면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은 값싼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이며, 대가족에서 핵가족, 1인 가구로 이어지는 해체의 과정은, 노동자의 개별화, 파편화를 통해 결집하지 못하도록 하고, 실업예비군(실업자)을 유지하면서 노동자 서로가 경쟁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남녀의 성(sex) 대결이 아니라, 남녀가 평등함을 지향하고, 서로 연대하며,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남녀의 문제보다 더 절박한 계급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적이 여성해방을 통한 인간해방이라는 점에서, 노동해방을 통한 인간해방을 부르짖는 계급운동과 본질에서 같다. 다만 (노동자)여성은, 같은 노동계급 내부에서도 남성에게 차별당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노동계급 내부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계급의 단결을 목표로 할 때, 페미니즘은 남녀평등과 계급평등을 함께 달성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띄게 된다. 여전히, 페미니스트 내부에서는 '페미니즘'에 관한 전선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은 무지개보다 더 다양해서, 최초 페미니즘이 백인여성의 인권을 향상하는 것으로 시작한 것처럼, 여성 내부에서도 계급, 인종, 민족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남녀평등은 물론 인종, 민족의 차별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착취-자본가의 착취든 남성에 의한 여성의 착취든- 없는 세상에 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맞서야 할 상대는 거대한 적인 '자본(가)'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남성은 사회구조의 기득권자로 분류되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남성도 자신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여성은 남성이라는 기득권세력과도 맞서야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런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착취구조인 자본의 억압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의 고난을 겪고 있다. 많은 남성이 여성의 동지로 함께 싸우고 있지만, 강력한 체제권력(자본)을 움직이는 세력은 여전히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의 수호를 위해 법과 제도를 악용하고 있으며, 현실을 호도하고, 일부 남성을 끌어들여 여성을 적으로 만들고 있다. 봉건시대에는 '유교'라는 지배논리를 통해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를 옹호, 유지해 왔으며, 자본시대에는 형식적으로 남녀평등을 말하면서도 제도와 의식은 여전히 봉건제에 머물러 있는 남성들로 인해 여성은 현대 민주주의체제에 살면서도 실질적 삶은 봉건제적 억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 만화는 한국 현실에 맞는 페미니즘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적어도 유럽이나 북아메리카 나라에 사는 부부들과는 다른 인식을 갖고 있을 것이고, 그것이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덜 '개인주의적'이며, 덜 '민주주의적'이고, 집단주의와 유교의 찌꺼기가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물론, 남성까지도 자유롭지 못하게 옭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만화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부부, 남녀의 평등을 가로 막는 체제의 힘은 곧 남성지배권력과 '자본'의 결합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곧바로 거대한 남성지배권력과 '자본'에 대항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인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여행, 상상과 현실의 모호함
    제목 : 여행 작가 : 에드몽 보두앵 출판 : 새만화책 '새만화책'에서 펴낸 작품. '새만화책'은 나에게는 '로망'이다. 꿈을 꾸지만 이룰 수 없는, 영원한 신기루와 같다. 나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고, 무엇보다 만화를 그리고 싶지만, 그것은 그저 소망이고, 욕망일 뿐, 현실은 다르다. 만화를 그릴 능력이 없어서 만화를 좀 더 깊이 읽었고, 만화비평을 하게 되었다. '새만화책'에서 나오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글과 그림은 결코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학'의 범주에는 활자만 속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길가메시' 이후 문학은 '문자'로만 형상화되었다. 고대는 물론, 근대까지도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것은 지식인이었고, 지배계급에 속했음을 생각한다면, '문자'를 다루는 행위는 극소수 지식인과 지배계급의 행위였고, 이것은 다수 민중의 삶과 괴리되어 있었다. 문자 이전에 이미지가 소통 수단으로 등장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언어와 문자가 없던 시기에도, 인류는 자연의 모습을 흉내낸 이미지를 그렸고, 자연을 숭배하는 행위, 동물을 사냥하는 행위, 사냥을 잘 하길 기원하는 주술적 행위도 모두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미지는 인류에게 친숙한 대상이자 도구였으며, 문자 이전에는 중요한 소통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초기의 문자는 '표의 문자'가 대부분으로, 문자 하나가 하나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문자들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 이미지가 점차 '표음 문자'의 등장으로 분리되면서, 이미지는 문자와 언어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별개의 영역-예술-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미지가 문자로 바뀌는 과정은 인류의 지성이 발달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고, 문자의 확대는 지식의 보편을 이뤘다. 문학이 수천 년을 이어오면서 문자로 기록을 남기고, 대중의 삶에 깊숙히 스며들었다면, 만화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겨우 창작되기 시작했다. 인류에게 이미지는 문자보다 더 익숙한 매체였고, 실제 다양한 이미지가 창작되었으나 만화의 형식이 탄생하기까지 물적 토대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석기시대의 동굴벽화부터 인류가 그려 온 무수한 그림은 대개 단일한 이미지였으며, 만화처럼 칸과 프레임을 쓰면서 그림이 연결되고, 이야기가 있는 방식의 이미지는 이미지와 문자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각각의 이미지와 문자로 창작된 방식과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였다. 만화는 기존의 이미지가 표현하지 않거나, 못했던 방식으로 대상과 상황을 표현했다. 고전적 의미의 이미지는 어떤 한 순간을 고정시키지만, 만화는 이미지의 한 순간을 고정시키는 방식은 같아도, 그것을 과장, 축소, 왜곡, 변형시키면서 연속으로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만화는 다시 카툰, 코믹스, 그래픽노블 같은 여러 장르로 나뉘는데, 그래픽노블은 카툰, 코믹스보다 가장 늦게 나타난 장르다. 그래픽노블과 코믹스는 형식에서 차이가 없지만, 그래픽노블이 작가의 의도와 의지를 더 강하게 내포하고, 반영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작가주의 만화'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에서 '예술영화'나 '작가주의 영화'로 불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 책 '여행'은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 보두앵의 작품인데, 무엇보다 붓으로 그린 그림이 훌륭하다. 매너리즘에 빠진 주인공 시몬이 가족과 도시를 떠나 시골마을에 가서 겪는 새로운 경험과 시간의 흐름, 시몬의 의식의 변화를 몽환적인 기법과 함께 그린 만화인데, 붓으로만 그린 선이 마치 동양의 그림을 보는 듯 하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여행'이 실제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여행이기도 하지만, '메타포로써의 여행'이라고도 했다. 즉, 작가의 상상이라는 말인데, 작품에서도 사실묘사보다는 환상, 환각의 장면이 처음부터 나온다. 작품의 시작부터 45쪽, 올리비에를 만날 때까지 주인공은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이미지는 지극히 환상적이며, 비현실적인 풍경과 주인공이 환상에 시달리는 장면으로만 그려진다. 이때 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픽노블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한데, 지문 없거나 극히 최소한만 사용하면서, 이미지로 인물의 심리와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것은 문학(노블)과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 작품에서 '노블'은 '그래픽'만큼 중요하지 않아보인다. 주인공 시몬은 가족과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 형상이 바뀐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머리 위에 올라간 것으로 보이지만, 이내 머리에 철창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는 시몬의 머리에 쓰인 철창을 볼 수 있지만, 만화 속 인물들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이것은 2차원 이미지로 드러낼 수 있는 한계이자, 독자와 만화의 인물을 구분하는 상징적 장치다. 시몬은 집을 나와 회사로 출근한다. 그가 거리를 걸을 때, 도로의 이미지는 시몬의 머리와 연결된다. 건물, 비둘기, 하늘, 나무, 지하도의 천정, 지하철의 천정 등 그의 머리는 마치 열려서 기이하게 변형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다 전철 안에서 그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그들이 모두 죽은 사람으로 보이는 환각을 겪는다. 그의 머리에서 해골이 쏟아져나오고, 사람들의 머리가 해골로 바뀐다. 시몬은 지하철을 뛰쳐나와 회사로 들어가지만, 이내 뛰쳐나온다. 그는 거리를 걷다 센느강으로 나와 우연히 어떤 여성을 만나 고양이가 죽었냐고 묻는다. 그러자 여자는 고양이가 없다고 말하고, 오늘 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한다. 남편, 딸, 개, 일, 모두. 그러면서 '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시몬은 이 여자에게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냐고 묻는데, 여자는 '사랑이 뭐'냐고 되묻는다. 시몬은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 왜 뜬금없이 처음 만난 여자에게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냐고 묻는 걸까. 여자와 헤어지고, 시몬은 다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직원인 프랑수아즈에게 '나랑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느냐고 다시 묻는다. 이것은 작품의 뒷부분에서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는 걸로 보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시몬의 충동은 작가의 상상에 불과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요소이거나, 시몬의 피폐한 정서가 자신을 방기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해석인데, 이건 오로지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시몬은 홈리스 노인을 만나 그에게 돈을 준다. 노인은 여행 떠나기 좋은 날이라며 자신은 술을 마시는 것이 곧 여행이라고 말한다. 시몬은 거리를 방황하다 열차를 타고 낯선 곳에 내린다. 히치하이킹을 하다 만난 올리비에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가게 되고, 이때부터 시몬과 올리비에는 '정상적'인 대화를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뛰쳐나왔다. 올리비에도 우여곡절을 겪고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인형극을 하고 다닌다. 시몬도 올리비에를 도와 인형극 조수로 일하며 며칠을 보내다 올리비에의 친구인 마르크의 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마르크의 여동생 레아를 만나고 첫눈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이제 이야기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내용으로 이어진다. 처음 시몬이 환상과 환각을 보면서 시작했던 이야기는 도시를 떠나 낯선 시골로 장소와 환경이 바뀌면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시몬이 놓인 환경-가족, 직장, 도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마르크는 시몬에게 자신의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자고 제안하고, 시몬은 동의한다. 두 사람은 바다를 항해하고, 마르크가 갑자기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려는 걸 시몬이 저지한다. 마르크는 애인 이자벨이 폭풍우에 휩쓸려 죽은 장소에서 죽고 싶었노라고 말한다. 마르크는 살았지만 곧 날씨가 거칠어지면서 배가 침몰하고, 시몬이 물에 빠져 죽게 되는 상황에서 마르크가 다시 시몬을 살린다. 이런 극적 장치는 작위적으로 느껴져 진정성이 떨어지는데, 작가는 시몬이 죽을 고비를 넘겨 새로운 삶을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작위적인 설정을 감수한 것으로 보인다. 시몬은 마르크와 헤어져 선술집에 갔다가 시비가 붙고, 거리에서 습격 당해 얻어맞는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을 떠올리고, 곧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혼잣말을 한다. 이제 시몬의 공황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시몬은 우연히 홈리스 노인을 만나는데, 그 노인은 파리에서 봤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이 평생 한번도 이 마을(라로셀)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라로셀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400km 떨어진 항구 마을로 인구는 약 8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다. 빈털털이 시몬에게 노인은 적선을 베풀고, 한 노인을 소개한다. 시몬은 소개받은 노인의 집을 찾아가 임시 거처를 마련한다. 노인은 방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한다. 노인은 요정의 친구로 평생 아름다운 사랑을 했고, 사랑을 멈추자 갑자기 늙었다고 했다. 시몬은 다시 레아를 만나고, 두 사람은 노인이 빌려준 방에서 섹스를 한다. 레아는 시몬에게 산에 오르자고 제안하고, 두 사람은 산을 올라 다시 섹스를 하고, 레아가 먼저 산을 내려간다. 레아는 시몬에게 산에 조금 더 오래 남아 있기를 권하는데, 혼자 산에 남은 시몬은 아주 멀고 먼 과거, 지구가 생기고, 공룡이 뛰어다니고, 원시인류가 사냥을 하고, 시간이 거슬로 오면서 중세, 근대, 현대의 역사 속을 경험한다. 시몬의 환상은 그가 자신의 삶을 객관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역사 속에 투영, 투사하는 것은 자기를 성찰하는 자세이며,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은 결코 자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시몬은 산을 내려오다 미끄러져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 이것도 작위적인 느낌이다. 이미 바다에서 빠져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다시 산에서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위험을 그려 넣은 것은 작가의 치기가 보이는 장면이다. 산을 내려온 시몬은 올리비에를 만나고, 그와 고성에서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낯선' 집으로 돌아온다. 이야기의 구조는 좋지만, 주인공 시몬이 겪는 상황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 그가 회사와 집을 단조롭게 오가는 것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만, 가족과의 단절과 회사에서의 매너리즘이 모두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그의 태도는 매우 이기적이다. 결국 회사에서 무작정 뛰쳐나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목적지도 없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이동 인형극장 일을 하는 올리비에를 만나 그의 집까지 가고, 그곳에서 처음 만나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누군들 이런 여행을 꿈꾸지 않을까. 시몬만이 특별한 사람도 아닐테고, 그의 가족들도 온통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텐데, 마치 자신만이 유독 특별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듯한 과도한 설정이 조금 불편하다. 여기서는 주인공 시몬 한 사람의 시각과 입장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의 가족 아내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시몬의 아내와 아들은 갑자기 사라진 남편과 아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또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한다면, 그들의 입장도 뒷부분에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독자는 시몬의 상황은 이제 충분히 보고 이해했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시몬의 아내와 아들 피에르에 관한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편,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에게 무엇일까를 깊이 고민하게 되고,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부재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모자의 삶은, 정작 사라지길 원했던 시몬보다 더 절실하고 안타까운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시몬이 가족을 떠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오려고 할 때, 그는 집과 가족을 '낯선 집'이라고 말한다. 시몬에게 가족은 이미 피붙이의 애틋함이 사라진, '관계'로서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것은 관습적이고 당연한 클리셰이다. 너무 익숙해서 의문을 품지 않는 '가족'을 낯설게 느낀다는 건, 자기 존재와 가족을 분리하고, 객관화하며,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고, 또한 몽환적이었던 것처럼, 주인공 시몬이 실제로 여행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시몬의 상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몬이 겪었던 모든 시간과 공간이 오로지 '상상'이었더라도 시몬은 가족과 일정한 거리가 벌어진 것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은 시몬 뿐 아니라 아내와 아이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작품은 훌륭한 그림과 함께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 기법의 독특함으로 좋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펜이 아닌, 붓으로 그린 그림은 부드럽고, 선은 거친 듯 하면서 미려하다. 한 페이지에 여섯 칸을 기본으로 하고, 다양한 변형을 주었는데, 선의 굵기로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고, 여백과 생략을 과감하게 하면서, 드러내야 할 부분만 충실하게 묘사한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쥐, 아우슈비츠의 참혹함과 생존자의 고통을 그리다
    제목 : 쥐 작가 : 아트 슈피겔만 출판 : 아름드리미디어 이 만화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태인이 겪은 비참한 상황을 ‘만화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는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으로 그의 가족, 그의 아내와 아내의 가족이 겪은 비극에 대해 구술한다. 수십명의 가족, 친척들이 모두 죽고 결국 극소수의 형제와 부부만 살아남은 가운데 노년을 미국에서 보내는 유태인의 삶에 대해서도 현실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이 만화를 13년 동안 꾸준히 준비하며 그렸고, 이 책으로 퓰리처상과 구겐하임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래픽노블의 역사에서도 선구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작가 역시 전위적이고 진보적인 만화를 그리는데 앞장 선 인물이다. 이 만화의 특징을 몇 개의 주제로 분석했다. 먼저 줄거리를 요약했다. 작가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은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으로, 부유한 집안의 여성 안나 질버베르그를 만나 결혼한다. 이후 장인의 도움으로 직물공장을 운영하며 부유하게 살다 히틀러의 나찌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폴란드군에 징집되었고, 독일군에 잡혀 전쟁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 한동안 머물다, 독일 공장의 노동자로 자원한다. 땅을 파는 노동자로 몇 달을 보낸 다음, 갑자기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탄다. 나찌는 형식적으로 전쟁포로를 석방한 다음, 독일 영토로 끌고가 학살하고 있었다. 블라덱은 근처에 사촌이 있다고 말하고, 뇌물을 주어 무사히 수용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살던 집으로 돌아가 부모와 아내를 만난다. 하지만 나찌의 탄압은 더 심해지고, 1939년이 되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가스실의 정체가 유태인들에게도 알려지지만 대부분의 유태인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블라덱의 처가는 부유한 집안이어서 나찌에 협조하고 있는 유태인 위원회를 매수해 탄압의 속도를 늦추고 있었지만, 결국 살던 집에서 쫓겨나 게토로 옮겨가고, 이후 진행되는 과정은 은거, 도주, 체포, 도주, 은거를 반복하면서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이어간다. 폴란드인 가운데 선량한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유태인 가족을 숨겨주었지만, 블라덱 가족은 헝가리로 국경을 넘으려다 체포된다. 나찌의 유태인 분류에 따라 블라덱의 대가족은 뿔뿔히 흩어진다. 대부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들어가서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1944년 3월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블라덱은 카포(유대인 관리자)의 개인 영어교사로 차출되어 비교적 안전하고 좋은 대우를 받으며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 다음에는 함석공으로, 제화공으로 옮겨가며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다시 공사장 노동자로 돌아가서 극심한 고생을 하게 되고,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스실을 직접 보고 기계 설비 일부를 해체한 목격자가 된다. 이후 소련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까이 접근하자 독일군은 유태인을 독일 국내로 끌고가기 위해 열차에 태워 오랜 시간 이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유태인이 사망한다. 블라덱은 끝까지 살아남았고, 다카우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 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포로교환으로 스위스까지 가는 기차를 타게 되고, 이곳에서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마침내 독일군이 패퇴하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살아남는다. 이후 블라덱은 나찌에게 잡혀갈 때 살고 있었던 소스노비에츠로 돌아가 기적처럼 아내 아냐를 만난다. 쥐 작가는 유태인을 쥐로 그렸다. 유태인을 쥐로 설정한 것은 작가의 오리지널이 아니라, 이미 히틀러가 집권하던 시기, 나찌는 유태인을 쥐로 묘사하고 있었다. 나찌가 유태인을 쥐로 묘사할 때, 독일 국민을 비롯한 모든 유럽의 비유대인은 왜 반발하지 않았을까. 유태인을 차별하고, 학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결코 모르지 않았을텐데, 극우 나찌가 권력을 잡고, 유태인을 열등한 민족으로 폄하하고, 절멸해야 할 대상으로 찍었을 때, 비유태인들이 눈감고, 외면하고, 모른 척 한 까닭은 무엇일까. 작가는 1938년 상황부터 시작한다. 작가의 아버지가 결혼을 앞두고 만났던 여성과의 갈등과 새로운 여성과의 만남, 결혼부터. 작가의 부모는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 겪는 산후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체코로 휴양을 떠나지만, 그곳에서 나찌의 철십자 깃발을 본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이미 유태인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학살당하거나 추방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히틀러는 극렬한 반공주의자이자 반유태주의자였다. 히틀러의 가계에서 유태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거나 히틀러는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을 드러내려 했고, 유태인이 열등한 인종이며, 절멸시켜야 할 인종이라며 혐오했다. 이런 극단적 혐오의 감정이 유태인을 쥐로 표현하게 된 배경이다. 그렇다면, 유태인은 왜 히틀러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걸까. 히틀러는 권력을 차지하고, 권력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 유태인을 혐오의 대상으로 점찍었을 뿐이다. 이미 유태인은 유럽 전체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작가가 유태인을 쥐로 묘사한 것은 히틀러의 나찌가 유태인을 묘사한 것에 대한 반발의도와 자기비하를 통한 동정얻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아니, 작가가 의도적이지 않았다 해도 독일군을 고양이로 그린 것에서 그런 의도는 분명해진다. 애초 쥐와 고양이를 비롯해 동물의 의인화 작업은 진보적 만화가들의 주제 가운데 하나였고, 아트 슈피겔만은 흑인과 백인의 관계를 먼저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흑인도, 백인도 아니어서 흑백 인종차별에 관해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유태인이고, 부모가 아우슈비츠 생존자라는 것은 곧바로 유태인과 독일군의 관계로 이어졌고, 처음 몇 페이지짜리 만화로 시작해 장편 그래픽노블이 될 때까지 무려 13년의 시간을 이 만화에 투자했다. 쥐와 고양이는 그 자체로 천적이며, 약한 자와 강한 자를 상징하고, 전복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톰과 제리'에서 고양이 톰은 분명 강자이면서도 늘 약자인 쥐 제리에게 당한다. '심슨 가족'에서 호머의 가족이 보는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이치와 스크래치는 '톰과 제리'의 패러디이면서, 더 과장하고 왜곡된 형태의 '톰과 제리'를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한 '톰과 제리'의 패러디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에서 유통되고 있는 '톰과 제리'의 상징과 이미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가를 비트는 패러디다. 유태인을 쥐로 표현하고, 독일군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 쏘련은 곰 등 민족마다 다른 동물의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쥐는 인간이 혐오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유태인이 유럽(은 물론 아시아에서도)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혀 탄압을 받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인간에게 백해무익하다는 쥐를 유태인의 상징으로 그린 것은 작가의 탁월하면서 필연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유태인이 쥐로 그려진 것은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상황이었고, 이후 유태인은 다른 민족인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상황이 역전되어 고양이로 변한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유태인의 이중성과 아이러니를 드러낼 수 없다. 유태인 유태인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아이러니다. 그들이 믿는 신이 세계의 절반 가까이 지배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그 신의 아들이라는 인물을 부정한다. 유태인이 믿는 신과 기독교의 구교, 신교, 이슬람교의 신은 동일하지만, 신의 아들인 예수를 부정하는 것은 오로지 유태교 뿐이다. 유태인들은 유일신 야훼를 믿으며, 자기 민족만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믿는 선민사상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자신과 다른 모든 민족과 인종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기초가 된다. 2천년 전부터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로 인정받고, 로마의 힘을 따라 유럽 전체로 퍼져나갈 때도 유태인은 자신이 믿는 신과 구분했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를 성삼위일체로 받아들인 기독교는 유태인들의 배타적 태도와 행위가 거슬렸고, 그들의 선민의식이 아니꼬왔다. 유태인은 역사 속에서 소수집단이었으며, 한때 자신의 국가를 세우기도 했으나 외세의 침략으로 뿔뿔이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들의 디아스포라가 끝난 것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라를 이뤄 살고 있던 지역을 침탈해 '이스라엘'을 세웠다. 종교적으로 유일신을 숭배하고,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고, 강한 선민의식을 가진 집단이었던 유태인은 수천 년에 걸친 디아스포라를 통해 유럽 전역은 물론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이들은 소수민족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며,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금융업을 개발하고, 유통업 등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유태인이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이라는 말은, 그들이 대대로 교육-집단윤리와 종교-을 통해 자녀를 훈육하고, 소수민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들이 혹독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유일신 야훼의 존재와 선민의식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고, 그런 자기중심의 세계관이 또한 다른 민족들에게 탄압당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니, 유태인의 존재 자체가 아이러니인 것이다. 봉건시대 이전까지의 유태인은 다른 인종-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만드는 앵글로색슨, 게르만, 노르만, 이베리안, 켈트, 스코트 등 유럽의 주류 인종-에 비해 소수인종이었으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디아스포라 민족이어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생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류 인종들에게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었으며, 차별당하고 억압당하는 존재들이었다. 유태인 뿐아니라 '집시'를 비롯해 소수 유랑민족들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존재하고, 이들 소수민족, 인종은 늘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경제체제가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이행하고, 정치적으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17세기 이후 유태인은 소수민족이지만 부와 권력을 획득할 기회가 많아졌고,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갖는 다수민족, 인종은 이런 유태인을 보며 시기, 질투를 하게 된다. 이념적으로도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유태인 가운데 뚜렷하게 드러나는 인물이 있어 유태인을 탄압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유럽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유태인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특히 러시아 혁명에서 공산주의자 그룹의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수-약4%-가 유태인이었다고 추정한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극렬하게 혐오하고, 그들을 절멸하려했던 가장 큰 이유로 이념 전쟁을 들기도 한다.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자로, 공산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었고,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는 가장 먼저 제거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레닌이 권력을 잡았을 때, 볼쉐비키 그룹에는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이 많았고,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쟁 중에 러시아 혁명 소식을 듣는다. 전쟁에서 진 독일은 승전국들이 요구하는 과도한 전쟁비용에 고통당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전후 불안과 경제적 빈곤, 강대국의 억압 등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이것은 곧 파시즘의 대두와 소수인종의 탄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받아들여, 반공, 순혈주의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갔고, 소수인종, 민족인 유태인과 집시 등은 절멸의 위기를 맞게 된다. 생존자 히틀러가 유태인을 절멸하려는 이유로 '인종'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고, 실제로는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유태인 절멸을 통해 세 가지 이익을 보게 되는데, 하나는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을 내세워 독일국민을 단일하게 통합할 수 있는 명분을 세우고, 유태인을 공격함으로써 파시즘의 정당성을 획득하며, 히틀러에 대한 지지, 충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다. 유태인은 공장, 상가, 기업을 소유하고, 보석 유통 등 부가가치가 높은 상업을 하고 있었다. 유태인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자신이 살던 집에서 쫓겨났고, 그들의 재산을 독일정부가 몰수했다. 그들이 게토로 이동하거나, 수용소에 갇힐 때까지 가지고 있던 짐은 대부분 압수되었고, 몸에 지닌 모든 장신구, 시계, 반지, 목걸이, 보석 등도 몰수당했다. 유태인의 집에는 값비싼 미술작품을 비롯해 금고에는 돈, 금괴 등도 많았기에 나찌는 유태인의 집에서 압수한 이런 물건을 극소수만 아는 창고를 마련해 숨겨두었다. 전쟁 막바지에 미군이 히틀러의 요새를 점령해서 발견한 물건들 가운데 미국으로 반출된 것이 매우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유태인을 절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학살을 멈추지 않은 것은, 전쟁 막바지로 가면서 자포자기한 측면도 있고, 학살의 과정이 시스템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유태인을 죽여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많았다. 부자 유태인 가족이 사라지면 그들의 재산이 모두 누군가에게로 옮겨갔고, 그렇게 부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 비유태인이 유태인을 증오할 이유는 수백, 수천가지도 더 되었고, 유태인은 결코 정직하거나 선한 사마리아인도 아니었으며, 그들의 존재, 말과 행동, 신념, 종교가 증오를 부르는 원인의 일부였다. 그리고 시대상황은 유태인에게 매우 불리하게 움직였고, 많은 유태인이 가스실로 들어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유태인은 말한다. 왜 우리가 증오의 대상이 되고, 학살당해야 하는가라고. 아우슈비츠에서 죽었거나, 살아남은 유태인은 범죄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시대의 광기에 희생된 사람들일 뿐이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갈까.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지만, 작가의 어머니는 1968년에 자살한다. 작가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지만, 살아 있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 참기 어려울 정도의 강박증세를 보인다. 작가의 아버지처럼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수용소의 경험을 책으로 남긴 프리모 레비의 증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수용소에서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었다. 프리모 레비도 결국 자살하는데, 불과(?) 10개월의 수용소 경험이 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뒤흔들고, 다시는 과거의 '존엄성을 유지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유태인 개개인이 겪은 학살의 트라우마는 집단화한다. 융이 말한 것처럼, 집단무의식은 민족의 염원으로 드러나고, 다시는 같은 참혹함을 당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공포와 강렬한 의지가 시오니즘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유태인의 선민의식이 결합한 시오니즘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물리적으로 소수그룹인 유태인은 가장 강력한 집단인 미국을 등에 업기로 결정한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 자신을 투사하면, 자신도 가장 강하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약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우리가 약했기 때문에 당했으니, 약한 자는 당해도 싸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가하는 폭력은 아우슈비츠에서의 트라우마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며, 집단무의식의 발현이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 미국을 등에 업고 자신이 유럽에서 당한 따돌림과 폭력을 같은 소수민족인 팔레스타인을 향해 퍼붓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만화의 형식 이 작품은 한 페이지에 여덟 칸을 기본으로 하고, 칸의 변형을 통해 이야기의 흐름을 긴장감 있게 전달하고 있다. 칸 하나의 밀도는 매우 높아서, 그림과 글이 꽉 차 있다. 만화에 여백이 없거나 드문 것은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가 많거나, 스토리에서 여유를 부릴 만한 심리적 편안함이 없다는 걸 반증하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칸에 글과 그림이 빼곡하다. 대사와 지문은 너무 많아서 만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두꺼운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든다. 작가가 선택한 주제와 아버지의 과거 경험, 현재 아버지와의 관계 등이 작가의 작품에 생생하게 녹아들기 때문에 그만큼 해야 할 말, 하고픈 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아버지의 증언을 토대로 그림 작업을 했지만, 그림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증언이나 적은 기록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작가가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13년간 작업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도 아니고, 엄살도 아니다. 작가는 사실에 가까운 묘사를 위해 수많은 자료를 수집해 분석하고,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동물의 의인화를 제외하고 시대 배경-건축, 의상 등-을 최대한 당대에 가깝게 재현했다. 책 1권 90쪽에 유태인들이 디엔스트 스타디움에 모이는 장면이 있는데, 반페이지 칸에 수백 명의 유태인을 꼼꼼하게 그리고 있다. 스타디움 앞 광장에 동상과 전차, 자동차까지 배치해 현실감을 높였고, 계속 진행하는 장면들에서도 군중 씬에서 유태인들이 입은 옷과 게쉬타포가 입은 군복에서도 작가의 고증은 꼼꼼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 작가는 스크린톤을 쓰지 않고 모든 선을 직접 펜으로 그렸는데, 당연하면서도 신선하다. 스크린톤은 일본과 한국만화에서 쓰이는 특징인데, 그래픽노블에서는 스크린톤이 거의 쓰이지 않는다. 스크린톤은 일본에서 개발되어 주로 '공장만화'에 쓰이다 한국으로 넘어왔고, 한국에서도 만화가가 여러 명의 보조 인력을 데리고 일하면서 대량으로 만화를 생산하는 체제를 갖춘 곳에서 주로 쓰였다. 작가가 인종에 따라 동물로 형상화하면서 발생한 문제(?) - 작가가 분명 의도한 것이라고 보는데 - 는 '개인'보다는 집단의 문제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보인다. 유태인을 '쥐'로 표현하면서, 모든 유태인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즉, 개인의 '퍼스낼리티'는 이 만화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돼지로 표현한 폴란드인이나, 고양이로 표현한 독일인처럼, 그들이 인종대 인종으로써 학살하고, 학살당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 집단 학살 앞에서 개인의 존재는 무의미하며, 생존자는 오로지 '우연'과 '행운'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현재의 아버지와 과거의 아버지를 번갈아 만나는 방식이다. 여든이 넘어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수용소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아내의 자살이 자기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아들인 작가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민감한 문제인데, 현재의 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는 말라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말라 역시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오래 전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블라덱의 아내(작가의 어머니) 안나가 자살하면서 아무런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묵시적으로 남편을 비난하는 것으로 읽힌다. 안나 역시 수용소에서의 트라우마가 극심해서, 그 결과 자살을 결심한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 블라덱의 행동이 수용소 이전과 이후에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볼 때, 안나는 달라진 남편의 말과 행동을 견디기 어려웠고,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남편의 달라진 행동으로 인한 불안과 실망, 좌절이 겹쳐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아버지를 만나며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발화로 과거로 돌아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작가가 개입하면서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현재에서 발생하는 사고, 사건은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고, 현재의 '괴팍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과거에서 찾는다. 이 작품 속에서 아버지는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하는데, 작가는 아버지가 회상한 과거를 녹음했고, 녹음을 들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과거는 아버지의 기억에서 소환되거나, 아버지의 발화를 통해 기록되어 작가의 작품으로 옮겨간다. 이 만화는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지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충분하게 전하고 있다. 독일군-나찌-의 잔학함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분을 느끼게 하고, 유태인들의 무저항에 대해서도 어리석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문제는, 아트 슈피겔만처럼 별 ‘악의없이’ 자신의 가족사를 그리는 사람마져도 유태인의 전략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조직적으로 ‘유태인 학살’에 대해 끊임없이 여론을 환기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그 자신이 유태인의 피가 흐르는 스티븐 스필버그는 유태인의 수난사에 대해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돕고 있고,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분야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예술가를 지원하면서 재생산하고 있다. 유태인 학살을 거론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역사는 잊어서는 안된다. 인종을 말살하려는 인종우월주의자가 다시 나타난다면 인류는 존재의 의의마져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해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유태인은 소수라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실제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그것은 그들이 2천년동안 떠돌아 다니면서 배운 지혜의 결과겠지만, 그들의 생존을 위해 예전의 자신들과 같은 다른 민족을 말살하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찌들에 의해 독가스 등으로 학살 당한 유태인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면서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그보다 더 잔학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것은 어떻게 변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유태인’의 문제는 한 종족의 문제가 아닌, 세계 평화와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우익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미국의 이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방향으로 중동의 중심에서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태인이 자기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소리치는 것도 이제 귀가 아플 정도가 되었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유태인 학살에 대한 고발 장면-영화, 소설, 만화, 다큐멘터리 등-도 신물이 날 지경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촘스키와 같은 동족-유태인-이 이스라엘의 파시즘화를 노골적으로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지성인이라면 자기 종족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유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도 ‘친일매국노’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핍박받은 상황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유태인들처럼 집요하면서도 사실적인 증언과 복원의 결과물들이 훨씬 더 많이 나와야 한다. 고통받은 사람들의 증언이 영화, 만화, 소설,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야 하고, 그런 목소리가 사회에 크게 울려야 한다. 아직도 친일매국노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반민족행위자들이 출세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소위 진보를 말하는 자들이거나, 양심있는 자들은 ‘유태인’처럼 우리가 당한 수난의 역사를 우물처럼 자꾸 퍼올려야 한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엄마’, 욕망하는 여자
    ‘엄마’, 욕망하는 여자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분명 누군가의 ‘엄마들’이지만, ‘엄마’는 이들의 정체성이 아니다. 이들의 자식들은 이미 장성해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거나, 남편과 이혼(또는 사별)해서 따로 살고 있는 여성들이다. ‘엄마’와 ‘어머니’는 같은 기혼 여성 가운데 자식을 둔 여성을 지칭하지만, 의미는 다르다. 마영신 작가는 왜 ‘어머니’여야 할 자신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들을 ‘엄마들’이라고 했을까. 작가는 남성이고, 자신이 바라보는 ‘엄마’는 ‘어머니’이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엄마들’은 작가가 ‘아들’이자 ‘남성’의 시각을 투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엄마’는 남성(아들)의 시각에서, 늘 자기를 보살피고, 다정하고, 욕구-먹고, 입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뒷바라지 하는 모든 것-를 해소해 주는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 ‘어머니’는 보다 형식적이면서 존재가 분명한 이성(理性)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이 나이 들어도 여전히 ‘엄마’로 부르려는 것은 단순한 친밀감의 표현이 아니라(그렇다 해도), 그들이 어렸을 때 받았던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하지만 ‘엄마’도 인간이고, 여성이다. 엄마도 나이 들면서 변하고, 달라진다.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면서 이타적으로 행동한 존재이며, 사회는 ‘엄마’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퍼뜨려, ‘엄마’의 역할을 고정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회적 억압이다. ‘엄마’의 역할을 고정하려는 사회적 의도와 압력은 곧 여성 일반의 사회적 역할을 고정하고 억압하려는 가부장제, 남성 우월주의의 연장선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영신 작가는 ‘엄마들’이라는 감성적 제목과는 완전히 다른 ‘엄마’이자 욕망하는 여자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품은 표지부터 남다르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의도를 드러내는 가장 분명하고 좋은 방법은 표지그림인데,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한국적'인 표지그림은 이 작품이 아마도 최초가 아닐까. 표지그림은 그 자체로 역설이다. '엄마들'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보편으로 인식된 '엄마'라는 따뜻하고 편안하며 행복한 이미지의 추상이지만, 그 아래 두 중년 여성이 서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악을 쓰는 모습은 '엄마'라는 기존의 아름다운 추상적 이미지를 산산이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바탕의 빨강색은 중년들이 좋아하는 색깔로 알려졌는데, 빨강의 강렬한 색감과 흑백의 인물이 강조되면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풀어놓을 거라는 기대를 일으킨다. 주인공은 이소연이다. 중년의 여성이고, 아직 독립하지 않은 성인 아들과 함께 사는데, 자기 이름으로 남은 유일한 재산은 연립주택 가운데 한 채다. 소연은 스무 살에 중매로 남편을 만났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길렀지만, 남편이 도박에 빠져 집안을 망치고 빚만 늘어나자 소연은 빚을 갚기 위해 평생 가난과 노동에 허덕였다. 그러다 결국 이혼을 하고 지금은 건물 청소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집안을 망치고, 가족을 괴롭힌 것은 남성(남편)인데, 그 문제를 해결하려 고생하는 것은 여성(아내)이 되는 구조는 ‘사회적 스톡홀름 신드롬’에 해당한다. 가부장사회,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다. 여성은 늘 자신이 억압당하는 상태에 있음을 느끼고, 성폭행, 성추행, 폭행, 차별, 억압 같은 공포를 겪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성(사회)의 요구에 동의,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소연 역시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힘겨운 노동으로 보냈다. 이런 여성의 행동을 가부장 사회에서는 ‘현모양처’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한다. 이런 장치를 통해 여성의 욕망은 소거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다. 소연에게는 애인 종석이 있는데 술집 웨이터로 일하는 남자다. 종석의 아내는 다단계에 빠져 빚이 많은 데다 종석의 동창하고 불륜 관계여서 사실상 이혼한 상태로 생각하고 있다. 소연은 애인인 종석이 3년 전부터 꽃집 여자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는 종석에게 욕을 하며 헤어지지만, 이들의 삼각관계는 이어진다. 꽃집 여자 명희는 소연에게 종석과 헤어지라고 말하고, 소연은 '내 남자와 연락하지 말라'고 카톡을 하다 새벽에 길거리에서 만나 육탄전을 벌인다. 작품 속 엄마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성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이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진 그녀들의 모습은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사회적 약자, 가부장제, 남성 우월주의 체제 속에서 억눌린 채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피억압자의 모습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엄마들은 대개 부자도 아니지만, 많이 배우지 못한 여성들이어서 자기들의 삶이 왜, 어떻게 망가져 왔는지 깊이 성찰할 능력은 없다. 남자(남편을 포함한 애인까지)들이 저지른 일을 뒤치다꺼리하느라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면서도 자신보다 남자, 자식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던 여성이 바로 '엄마'다. 하지만 '엄마'도 나이 들면서 자기 욕망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오랜 시간 너무나 많이 참았고, 남자(남편과 애인)와 아이들에게 시달렸고, 자신의 행복을 유예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춤을 배우고, 나이트클럽과 콜라텍에서 낯선 남자들과 춤을 추고, 애인을 사귀고, 삼각관계에서 질투와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엄마들'의 다른 모습은 '여성 노동자'다. 그것도 비정규직의 불안한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한다. 소연은 빌딩 청소를 하는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그곳에는 소연과 비슷한 나이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함께 일하고 있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용역업체의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여성 노동자로 빌딩 청소를 하는 ‘엄마’는 그들이 집에서 살림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바로 그 모습을 빌딩 청소라는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있다. 즉, 여성 노동자로서, 엄마로서 가정과 사회에서 그들의 처지는 늘 낮은 곳, 가장 열악한 곳, 가장 힘들고, 대우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조적으로 억압 상태에 놓여 있는 여성 노동자이자 ‘엄마들’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욕망을 발산하고, 사회적으로 노동조합을 건설한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해 달라고 소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한 옥자 언니는 성추행을 당하고 해고된다. 옥자 언니는 여성가족부도 찾아가고 노동운동을 하는 여성도 찾아가지만, 실질적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이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용역업체 소장-남성-은 반장을 시켜 어용노조를 만들도록 하고, 16명 가운데 12명이 어용노조에 가입하고, 4명이 된 소연과 동료들은 따돌림을 당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여성)들이 어용노조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자기들만 고용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을 보면서 소연과 동료들은 배신감을 갖지만, 12명의 여성이 왜 권력의 그늘로 순순히 들어갔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드러나지 않는다. 동료와의 연대까지 외면하면서 더 중요한 건 ‘일자리’고 ‘임금’이기 때문이다. 빈곤은 동료 노동자와의 연대와 협력을 방해한다. 일자리를 잃게 되면 곧바로 들이닥치는 생존 문제는 이들이 노동착취와 차별에 저항하지 못하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다. 소연은 라디오 방송에 나가 일하는 회사에서 부당 노동행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고발한다. 라디오 방송의 파급 효과가 있어 소장은 소연을 비롯해 모두 해고될 거라고 협박하지만 결과는 용역업체와 소장이 바뀌고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남았는데, 소연과 연정 언니는 해고된다. 소연은 옥자 언니와 다른 업체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 예전 업체에서 반장을 했던 사람이 들어온다. 떡값을 빼돌리다 들통나서 해고되자 우연히 소연이 일하는 곳으로 취업한 것이다. 소연은 삼각관계였던 명희와 친구가 되고, 연순은 만남 어플로 연하의 남자를 만나고, 명옥이는 기자 애인과 계속 만나고, 연정은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고, 경아의 남편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모두 여전히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사회를 개혁할 여력도, 능력도 없지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 이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공모한 만화평론에 가작 당선한 저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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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1
  • 룸펜 프롤레타리아, 욕망의 리얼리즘
    룸펜 프롤레타리아, 욕망의 리얼리즘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발현하는가를 들여다보면, 좁게는 개인을 둘러싼 좁은 영역에서 발생하는 낮은 차원에서 사회의 구조를 아우르는 거대한 관계망까지 영향을 끼치는 폭넓은 스펙트럼이 있다. 권력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사회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과 개인의 욕망이 일치할 때, 그것을 ‘사회적 성공’과 ‘개인의 입신양명’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보편적 욕망은 자신이 놓인 삶의 물적 토대에 근거하며, 욕망의 크기도 개인의 환경에 비례한다. 욕망의 진화 역시 사회의 구조적 선택압을 받게 되며, 구조는 마치 거대한 계단처럼 개인의 욕망을 가로막는다. 욕망은 변증법적으로 진화하며, 질적 변화를 일으킬 때, 계단을 뛰어넘는다. 사람은 저마다 욕망을 지닌 채 살아간다. 대개는 ‘욕망’과 ‘희망’ 또는 ‘욕구’를 구분하지 않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객관적 조건과 거리가 먼 황당한 기대를 당연한 듯 품고 살기도 한다. 마영신의 ‘아티스트’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 신득녕, 곽경수, 천종섭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의 남성이자 예술가로 자처하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들이 가진 욕망의 발현을 ‘권력’이라는 배경에 투사해 해부한다. 한국사회에서 40대 남성은 그 자체로 권력을 가진 존재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인정받지 못했거나, 중심에서 멀어져 소외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의 존재가 ‘기득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주인공들은 자신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가난한 예술가이며, 주변부에서 소외된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계급으로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이며, 본질에서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집단에 속해 있다. 이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한국)사회의 계급구조와 집단의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풍자와 해학을 통해 개인의 욕망을 비판하지만, 표현은 결코 말랑하지않다. 작품에서 ‘계급’, ‘모순’, ‘갈등’, ‘대립’, ‘억압’ 같은 사회과학 용어가 등장하지 않을 뿐,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과 과정, 몰락에 이르기까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숨 쉬는 (자본주의)체제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이루지 못한 꿈(천종섭, 곽경수)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인물과 더 높은 곳으로 오르지 못하는(신득녕) 인물이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내면에서 인지부조화의 갈등을 일으키는 초반은 이들의 본성이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난다. 지식인(인텔리겐챠)은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이건 하나의 명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식인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학연과 스승, 동료, 제자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식을 자본화한다. 지식 자본은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세 가지 요소-토지, 공장, 노동력-처럼 토대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들-인텔리겐챠-의 발밑은 단단하지 않다. 지식 자본은 원래의 ‘자본’에서 파생한 것이므로, ‘자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 많은 경우, 지식 자본은 ‘자본’에 복종하며, 자본의 용병으로 복무한다. 따라서 지식 자본을 보유한 인텔리겐챠는 본질적으로 기회주의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기에,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경수, 득녕, 종섭은 남성 예술가 모임 ‘오락실’에서 만난 또래들이다. 각자 두 살 터울이지만 형, 동생의 위계를 지키는데, 이건 특히 한국의 병영 문화가 낳은 폐해를 드러낸다. 이들이 형, 동생으로 부르지만, 실제로 나이 먹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 먹어서 한심하다고 경멸할 때, 이들의 위계는 본질을 드러낸다. 세 명의 주인공이 모두 남성인 것은 작가가 남성이기 때문도 아니고, 남성 우월주의를 드러내려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다.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의 의도는, 한국사회에서 허리에 해당하는 40대 남성 가운데서도 노동자가 아닌, 인텔리겐챠이면서 룸펜 프롤레타리아인 이들이 ‘예술가’로 자처하지만, 실제 ‘예술가’의 정체성이 있는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들은 술자리에서 요절한 젊은 가수의 작품성을 폄하하고, 인간성까지 비난하며, 죽어서 대중에게 스타 대접을 받는 것까지 질투한다. 뮤지션 천종섭은 저작권을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신득녕에게 다른 가수의 음원을 불법으로 복사해 달라고 말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이중성은 기득권 남성의 멘탈리티를 본능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같은 ‘오락실’ 멤버 가운데 가수로 성공한 사람, 영화로 성공한 사람을 두고 실력도 없으면서 어쩌다 성공했다고 폄하하며, 조금 유명해졌다고 사람이 달라졌다고 비난한다. 이들의 비난은 근거가 없다. 그들의 일방 주장일 뿐이다. 그러면서 곽경수는 말한다. ‘우리 세 사람은 누가 잘 되면 무시하지 말고, 서로 진심으로 위하면서 살자’고. 이 대사는 이미 자기들이 무시당하는 걸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고, 누군가 성공했을 때, 서로 진심으로 위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을 드러낸다. 작품의 초반에 나오는 이 대사는 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질 것임을 예고한다. 작품의 발단에서 이들이 보이는 태도는 전형적인 룸펜 프롤레타리아다. 세 명 모두 일정한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았고, 지식 자본을 갖추었으나 그것을 상품으로 판매하지 못하는 소외된 상태에 있으며, 그렇다고 노동시장으로 편입하려는 의지도 드러내지 않는다. 세 명 모두 가족과의 유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득녕은 34세에 소설집을 출간한 작가지만, 집안에서 모두 득녕이 작가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가족들과 멀어졌다. 득녕이 종섭의 에세이집 출간을 적극 돕는 이유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명이 우연히 만나 어울리며 가깝게 지내게 된 배경에는 ‘예술’을 향한 그들의 고집이 집안의 반대로 현실의 벽에 부닥쳤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세 명은 자발적으로 가족 단위에서 스스로를 해체한다. 가족의 범위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면,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 개념에서 벗어난 이들은 ‘오락실’이라는 남성 예술가 모임에서 만나 유사 가족을 구성한다. 이들은 각자 독립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자주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공통의 화제를 찾아 이야기한다. 보통의 가족도 각자의 방에서 생활하며, 밥을 먹을 때는 주방에, 텔레비전을 볼 때는 거실에 함께 모인다. 이런 생활 방식은 약간의 물리적 거리만 있을 뿐, ‘오락실’의 남성 예술가들이나 기존의 가족 형태나 크게 다르지 않다. 세 명이 나이에 따라 위계를 갖추는 것 또한 한국 병영 문화의 하나이면서, 유교 전통에 따르는 보수적 가치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보수적 위계와 유사 가족의 결합이 긍정적으로 작동한 경우가 바로 득녕이 종섭을 위해 책 출간을 적극 돕는 것으로 나타난다. 득녕은 어려서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득녕을 폭행했고, 엄마는 득녕을 이기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득녕은 부모와 가족의 부정적 교육에서 벗어나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는 종섭이 뮤지션이면서 글도 잘 쓴다는 것을 발견하고, 종섭이 글을 꾸준히 쓰도록 지원하며, 출판사를 섭외하는 등 자발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욕망의 발현은 구체적인 물적 토대가 있을 때 가능하다. 이들이 드러내는 욕망의 크기는 자신이 이룩한 사회적 성공만큼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거대한 세계라고 그들은 착각한다. 득녕의 도움으로 책을 출판한 종섭은, 예상치 않은 성공으로 어리둥절한다. 인세나 받아서 생활비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정도였던 에세이집은 크게 성공하고, 종섭은 하루아침에 스타 작가가 된다. 종섭이 자신의 전공분야로 생각하는 음악이 아닌, 글을 써서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것은, 이들의 사회적 성공이 개인의 재능이나 철학과는 깊은 관련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다. 즉, 자신을 ‘예술가’라고 말하지만, 추구하는 예술을 향한 치열한 노력이나 열정은 보이지 않고, ‘예술’을 도구나 지렛대로 활용해 사회적 욕망의 크기를 키우려는 주인공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종섭과 마찬가지로 경수 또한 자신이 추구하는 미술 작품으로 사회적 욕망을 발현하는 것이 아닌, ‘통합예술진흥원’에서 중간 관리자가 되어 권력과 금력을 추구하는 것에 만족한다. 득녕 역시 문학작품으로 상을 받은 이후, 잡지사를 만들어 문학계에 영향력을 키운다는 점에서 ‘작가’의 정체성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던 돈과 명예, 권력을 누리지만, 그들의 본질인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저급한 인식에서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추락하게 된다. 여기서 필연적 배경은, 주인공들이 사회적 욕망에서 배제(소외)된 상태였을 때 스스로 성찰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던 요소들 즉, 남성 우월주의 사회, 남성가부장제의 한계, 남성 기득권의 문제, 인텔리겐챠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한계, 자신이 속한 예술 분야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 성 감수성과 페미니즘의 몰이해 등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거나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자기 세계를 만들기도 전에 사회적 욕망의 토대에 올라 돈과 권력을 휘두르면서, 이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의 재능으로 이룬 성공이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결과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들은 자기 전공이라고 여기는 예술 분야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민감하고 전투적인 태도를 보인다. 종섭이 음악하는 누나의 앨범 발매 축하연에서 만난 래퍼 ‘빅 라이스’와 자존심 대결을 하는 장면이나, 경수가 미술하는 선후배 모임에서 자격지심을 드러내는 장면은 아집과 열등감이 폭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전공 분야’라는 것도 처음에는 구체적 꿈으로 열정을 갖고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 이들이 쌓아 올린 탑이 아니라, 상상의 세계에서 구축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이들은 구체적으로 실천하거나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을 좇는 관념적 인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세 명의 주인공은 두 가지 성공을 거둔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드러난 ‘명예’로 종섭은 수필집을 출간하면서 스타 작가로 대접받으며 돈과 인기를 끌어모은다. 경수는 ‘통합예술진흥원’의 중간 관리자로 일하기 위해 원장 후보자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새로운 원장을 위해 개처럼 충성한다. 득녕은 마침내 문학상을 받는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가지고 있던 내면의 열등감과 과잉 자의식이 해소되는 것이다. 사실 이들에게는 사회적 성공보다 내적 갈등의 해소가 더 중요하지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 한다. 라캉은,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은 대개 상징계-이미 구성되어 있는 세계-에서 머물며, 실재계-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징의 세계-는 다다를 수 없는 ‘균열 없는 충만한 세계’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고 했는데, 세 명의 주인공이 머물고 있는 상징계가 곧 그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즉, 이들은 룸펜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적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술’이라는 다다를 수 없는 차원을 꿈꾸다 파멸한다. 이들이 얻는 것은 지극히 작은 권력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지킬 수 있는 훈련된 내면의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에 주어진 권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낯설어한다. 이들은 유사 가족이지만, 모두 자아가 성숙하지 못한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유치하고 치졸한 말과 행동은 세 명이 서로 상대방을 거울로 인식하고, 그 거울에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이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일 때,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난다. 세 명의 주인공은 누군가 한 사람이 우연이든, 노력에 의해서든 세속적 성공을 이루자 그것을 모방하려 한다. 이들의 모방은 질투와 시기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욕망의 실현이다. 따라서 본능에 가까운 욕망 즉 불안을 해소하려는 의지는 이성의 세계인 도덕과 윤리의 의지보다 강렬하다. 종섭이나 경수가 보이는 타락은 이성보다 강한 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종섭은 득녕의 도움을 받아 출판을 하고, 스타 작가가 되지만, 인터뷰에서 득녕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득녕이라는 거울을 모방했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의 존재가 여전히 유아적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섭이 획득한 권력-명예, 돈, 호감-을 주로 여성의 육체를 탐닉하는데 소모한다. 종섭은 스타 작가가 되자 곧바로 12살 차이 나는 여성을 선택하고, 음원저작권 협상을 주도하는 권력을 위임받은 다음, 어린 신인가수에게 접근해 육체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다시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을 성추행하다 발각되고, 무릎을 꿇고 사과할 때조차 권위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결정적으로, 강남에서 치과병원을 하는 의사의 딸이었던 애인에게도 결별 선언을 듣고, 종섭은 자신의 졸렬함과 비열함을 드러낸다. 경수는 추잡한 스캔들을 터뜨리겠다고 협박해 문화단체의 중간 관리자가 되지만, 방탕한 생활과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남용해 결국 자리에서 쫓겨난다. 종섭과 경수는 자신이 획득한 욕망을 지키지 못했다. 욕망은 어차피 다른 사람의 욕망이었으며, 자신이 추구하던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 채, 욕망의 결과만을 누리려 했던 두 사람은 자신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추락한 것이다. 득녕은 종섭과 경수와는 다른 세계를 구축한다. 그는 처음-룸펜 프롤레타리아 시절-부터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정도의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고,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공동체 의식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득녕은 소설로 데뷔해 문학상을 받고 성공의 문턱에 오르지만, 그는 오히려 창작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프로듀서의 능력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득녕은 자기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애인인 성희와 문학잡지를 만들 때부터 더 이상 창작-소설쓰기-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존의 시스템과는 완전히 다른, 협동조합 체제로 잡지 출판을 시작하고, 이 시도는 좋은 작품을 발굴하면서 사업으로도 성공한다. 이타적이고, 자기객관화가 뛰어나며, 헌신적인 데다 머리까지 좋은 득녕은 마침내 자기가 원하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종섭이 인기 작가의 명맥을 유지하지만, 글쓰기나 음악 모두 아무런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면, 경수는 조직에서 쫓겨난 이후 처음 등장했던 바로 그 위치-룸펜 프롤레타리아-로 돌아가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다 미국 만화 캐릭터를 그려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한다. 저작권을 위반하는 것도 알지만, 경수는 영세사업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면서 고집을 부린다. 이들과 다르게 득녕은 잡지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잡지는 문학계에서 힘을 갖게 된다. 득녕이 종섭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아내 성희와 나누는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성희는 종섭의 인터뷰에서 ‘천재작가’라는 타이틀은 지나친 표현이며, 그런 표현으로 종섭이 오히려 위축되어 작품 활동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득녕은 성희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해야 하며, 외부의 규정에 얽매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합리적이다. 그러나 득녕이 노린 것은 과연 ‘합리적’ 선택일까. 종섭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는 독자들이 종섭을 대중 작가에서 ‘예술가’로 격상하는 상찬을 하기 때문에, 당장 종섭에게 유리하고 이로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정작 종섭은 ‘천재작가’라는 타이틀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경수에게도 잡지 표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탁하지만, 정작 경수가 그린 그림은 표지로 사용하지 않는다. 경수의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겨울비’를 표절했고, 표절이 이유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경수의 그림을 실을 의도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경수는 자신의 그림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득녕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보복과 파괴의 욕망은,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 조건 없이 헌신해서 성공의 디딤돌이 되었던 노력을 종섭이 무시했다는 기억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종섭이 성공한 상업 작가지만, 진정한 ‘예술가’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득녕은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고, 종섭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종섭을 오히려 ‘예술가’의 반열로 올려야 한다는 것을 득녕은 계산하고 있었다. 득녕이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던 잡지사는 내부 반발이 발생하고, 득녕을 ‘문화권력’으로 규정한다. 득녕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신이 권력 지향적인가,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나, 욕망이 자신을 삼키지는 않았나. 득녕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지만, 그는 대학교 정교수 자리를 거절한다. 그리고 10년 뒤에 문화부장관이 되어 있을 거라고 아내 성희에게 상상을 주입한다. 득녕은 자신이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 말은 이미 거짓말이다. 득녕은 스스로를 기만한다. 자기가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합리화하지 않으면, 이미 인연이 끊긴 종섭과 경수처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때 비슷한 처지에서 서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거울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 우연이든, 실력이든 세속적 성공-욕망의 현현-을 이루자 곧바로 타락한다. 종섭과 경수의 몰락은 성공의 근원이 외부에 있었다는 것, 자신의 욕망을 직접 투사하지 못하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했다는 것, 욕망의 부피를 다룰 역량이 없었다는 것 등의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종섭과 경수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로 인한 불안이 욕망을 잠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득녕은 두 사람과 달리 성공의 근원이 내부에서 추동한 것으로, 득녕 자신의 주체적 욕망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무엇보다 유일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종섭과 경수와는 다른 존재다. 세 사람은 유사 가족으로 묶여 있었지만, 욕망의 발현-세속적 성공-추락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자아를 깨닫는다. 이들의 존재는 여전히 룸펜 프롤레타리아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는 거울을 모방하는 유아기에서 벗어나 스스로 발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들은 느슨한 인연을 유지하겠지만, 과거의 가부장적 질서, 유교적 위계 관계, 남성 중심의 기득권 유지는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한다. 세 사람이 겪는 사건들 가운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성추행, 성희롱, 위계에 의한 성폭력 등 범죄에 가까운 행위가 있었고, 종섭과 경수가 몰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더 이상 남성 기득권을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호흡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그들의 ‘예술’과 ‘아티스트’라는 존재 의의는 사회적 몰락과 함께 잊혀지게 된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이자 나약한 인텔리겐챠의 한계를 드러내는 필연적 결말이기도 하다. * 이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공모한 만화평론에 가작 당선한 저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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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화
    2021-11-18
  • 지슬
    제목 : 지슬 작가 : 김금숙 출판 : 서해문집 이 작품은 오멸 감독의 작품인 영화 '지슬 2'의 내용을 그래픽노블로 창작한 것이다. 이미 영화를 봤기 때문에 줄거리는 알고 있지만, 영화와 만화는 느낌이 다르다. 먼저, 김금숙의 그림은 거친 붓을 사용한 형식미에서 영화의 분위기를 강렬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투쟁 가운데서 죄 없는 제주의 가난한 백성들이 총칼로 잔인하게 학살당하는 과정이 김금숙의 그림을 통해 필연적으로 융합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하기 어렵다. 예전에 어린이 잡지 월간 '개똥이네 놀이터'에 '꼬갱이'를 연재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 그림과 이 작품의 그림이 같은 작가의 것인줄은 몰랐다. 김금숙과 같은 작가가 한국 만화계에 등장한 것은 만화계의 축복이자, 독자에게는 가뭄의 단비처럼 반갑고도 즐거운 소식이다. 작가 김금숙은 전라남도 고흥 출생인데, '지슬'의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의 집안 역시 한국 전쟁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가 깊은 듯 하다. 아직까지는 작가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내진 않고 있는 듯 한데, 그의 작품 가운데 '아버지의 노래'가 자전적 이야기지만, 한국전쟁의 참담함을 본격 다루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앞으로 작가의 집안 이야기가 창작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되면, 아마도 '지슬'과 같은 무겁지만 아름다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원작 소설이나 원작 영화를 그래픽노블로 재창작하는 것은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을까. 소설을 만화로 재창작하는 것은 활자의 상상력을 구체화, 사실화한다는 점에서 현실성을 높이고, 캐릭터와 배경, 사물을 익숙한 이미지로 만나게 되어, 독자는 활자를 읽고 상상하던 것을 시각으로 확인하게 된다. 이는 활자만으로 된 내용을 보다 쉽고, 재미있게 접근한다는 점에서 장점이지만, 독자와 그래픽노블 작가의 해석이 다를 때는 오히려 독자의 상상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실망할 가능성도 있다. 영화는 약 2시간 동안, 초당 24프레임으로 끊임 없이 상영된다. 이것을 5초당 1프레임으로만 바꿔도 1분이면 12프레임, 1시간이면 720프레임, 2시간이면 1440프레임이 된다. 만화는 한 페이지에 1-8컷 정도를 나누는데, 평균 5컷으로 계산하면 300쪽 만화는 1500컷으로 연출할 수 있다. 영화의 프레임과 만화의 컷을 이렇게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보면, 영화의 내용은 거의 다 담을 수 있겠지만, 만화는 정지된 장면들의 모음이기 때문에 영화보다는 세부 묘사와 동작의 섬세함을 표현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래픽노블이 영화보다 좋은 점 몇 가지가 있다. 만화는 영화에서 중요하게 보이는 장면을 이미지화 할 수 있다. 영화는 끊임 없이 장면이 흘러가지만, 만화는 수 많은 장면들 가운데, 중요한 장면을 이미지화하면서, 한컷, 한컷의 상징성을 만들어간다. 이 작품의 표지는 영화포스터와 같은 이미지로 보이지만, 영화포스터의 사실적 이미지와는 또다른 울림을 준다. 군인이 아무 죄 없는 주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은 민족의 분단과 분열, 이념으로 갈린 내전과 학살을 상징한다. 영화는 사실에 가까운 표현을 통해 그때의 비극 상황을 재연하지만, 만화는 생략과 과장을 통해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픽노블 작가의 그림은 그 자체로 회화 작품이고, 폭력과 공포, 죽음을 드러내는 거친 붓선과 먹의 농담으로 제주도 민중이 겪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제주4.3을 펜선이 아닌, 붓과 먹으로 그렸다는 것도 이 작품이 주목받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수묵화는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회화였으며, 그림은 물론 글도 붓과 먹으로 썼다. 화가들은 일상의 풍경을 담은 세속화를 많이 남겼고, 조선의 민중은 수묵화를 퍽 친근하게 여기고 있다. 수묵화는 조선(한국) 민중에게 친숙하고 낯익은 표현도구이며, 우리의 정서와 감성을 오롯이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제주4.3의 희생자 대부분은 제주 민중이고, 이들은 이념 전쟁에서 억울하고 참혹하게 죽는다. 제주 민중을 수만 명 학살한 서북청년단과 경찰, 군인은 공산주의자를 제거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북한에서 쫓겨내려 온 기독교도들 가운데 극우주의자들이 복수를 위해 결성한 단체-서북청년단-를 통해 이념적 복수를 제주 민중을 향해 저지른 것이다. 작가 김금숙은 이들 우익이 저지른 학살 만행의 참혹함을 수묵화로 표현하고, 그 표현 기법은 그래픽노블에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뛰어난 방식이다. 수묵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도 역사적 사건을 그린 그래픽노블이 많겠지만, 이렇게 내용은 참혹해도 형식은 아름다운 수묵화 그래픽노블은 찾아보기 어렵다. 참혹한 내용을 아름다운 형식으로 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희생자와 그 가족인 제주민중의 처지에서 보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그것을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미지 작업을 통해 기억하는 것을 기껍게 생각할 것이다. 참혹한 짓을 저지른 것은 가해자인 서북청년단, 경찰, 군인이고, 제주민중은 피해자였다. 참혹함과 반인륜, 반지성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무엇보다 희생자와 그 가족의 아픔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작가 김금숙의 작품은 형식미에 있어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본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예쁜 여자
    제목 : 예쁜 여자 작가 : 권용득 출판 : 미메시스 권용득의 만화는 처음이다.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아 미안하고 그래서 더 반갑다. 만화를 읽다 보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 같다. 세밀한 묘사와 감정의 선을 그려나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순간, 영화감독 홍상수와 그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권용득 작가가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만화와 영화에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니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홍상수의 영화를 만화로 그린다면 권용득의 만화가 되고, 권용득의 만화를 영화로 만들면 홍상수의 작품이 된다.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대화, 어색하고 기분 나쁜 상황에서 대처하는 모습, 소심함과 비겁함 따위의 사사로운 감정 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민낯의 얼굴이 많이 닮았다. 짧은 단편들은 모두 작가의 1인칭 주관적 시점의 경험담을 그리고 있고, 고향을 방문하고, 결혼식에 참석하고, 친구와 동기, 선후배를 만나고, 예전의 짝사랑했던 여자를 만나고, 그렇게 다시 이야기가 얽히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런 찌질함은 어찌보면 20대, 30대 남자들의 특권(병신짓도 특권이라면 특권이다)임에 틀림 없다. 이 나이의 여자들은 절대로 이런 짓을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권용득의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기들이 찌질이라는 것을 모른다. 모두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다른 사람을 흉보고, 욕하고, 비웃는다. 하지만 그런 모욕은 모두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시간이 지난 다음에서야 깨닫게 된다. 시간이 흘르고 나이가 들어 어느날, 잠자리에 들었을 때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발로 이불을 차고 싶도록 스스로가 쪽팔리고 한심했던 때가 있을 것이다. 없다고? 당신은 인생을 헛살았다. 얼굴이 화끈하도록 쪽팔림을 느낀다면, 당신은 성장한 것이다. 어리석은 찌질이에서, 세상을 조금은 알게 된 어른으로. 그러니 괜찮다. 이 만화를 보고 씁쓸하게 웃는다면 당신은 그때보다는 조금쯤 나아졌다는 것을. 마지막 단편 '예쁜 여자'를 보고 울었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려운 시절은 있을 것이고, 그것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앞길이 막막할 때, 어디에고 기대고 싶을 때가 있고 그 시기를 겪으면서 사람은 자란다. 엄마와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미워할 수 없는 가족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해와 공감은 사랑의 기본 조건이다. 이 작품집은 여덟 편의 단편을 모은 것이다. 작가의 말에도 있듯이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이다. 하지만 작가도 '사랑이 뭘까요?'라고 묻고 있듯이, 사랑이 무언지 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나머지의 진실]에서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문자를 받는다. 그것을 본 여자는 그 여자가 누구냐고 다그친다. 친구 결혼식장에서 만난, 문자를 보낸 그 여자(이기쁨)는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였고, 두 사람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진다. 택시를 타고 떠나는 여자의 표정이 좋지 않다. 짜증이 났거나, 기분 나쁜 표정이다. 조금 전까지 술을 마시면서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자의 마음이 상한 이유는 뭘까. 남자에게 온 전화를 남자는 받지 않았고, 그것은 당연히 남자의 애인일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자가 이 남자와 사귀던 때에도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고,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옛날 애인을 만난 남자를 보면서 여자가 울고, 남자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할게'라며 말한다. 이런 무신경과 뻔뻔함은 남자만의 전유물일까, 아니면 극히 일부 '멍청한' 남자들의 특수한 경우일까, 궁금하다. 옛날 애인을 '후배'라고 속이는 것도, 앞으로 들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도 뻔한 거짓말인데, 남자는 뻔뻔해서 그렇다해도 여자는 왜 속아주는 척하는 걸까,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단편 속 한 컷에는 권용득 작가의 아내이자 작가인 송아람의 작품 '자꾸 생각나'를 홍보하는 컷이 있다. 제목 위에 팔을 걸치고 있는 남자는 역시 작가이자 '새만화책' 대표인 김대중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이 단편이 2005년 7월 [계간만화]에 실렸던 것을 고려하면, '자꾸 생각나'가 레진코믹스에 연재하고 있을 때로 추정한다. 두번째 작품 [영원히 안녕]는 애인과 다투고 졸업한 학교의 축제에 온 남자가 옛날 애인 민주를 만나 '어쩌다' 함께 밤을 보내고 헤어진다. 남자는 여전히 옛날 애인 민주에게 마음이 있고, 그녀와 결혼하고픈 마음도 있지만, 지금 애인도 포기한 건 아니다. 남자의 마음은 갈대처럼 움직이고,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구분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고, 옛날 애인 민주가 찾아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고 말한다. 남자는 민주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고, 민주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그리고 다시 다퉈서 잠시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한다. 남자는 민주의 결혼식장에서도 마지막까지 농담처럼, '나에게 시집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남자의 분열적 감정이 담겨 있는데,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대한 질투와 원망이 담겨 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두고 비아냥과 투정을 하는 것이다. 그건 퍽 유치하고 감상적인 심리로, 남자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와나카의 추억]은 남자가 잠시 뉴질랜드 와나카에서 지낼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남자는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엄마와 전화를 하면서 알게 된다-친구가 있는 뉴질랜드로 간다.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지만, 딱히 할 일도, 하고픈 일도 없는 남자는 바에서 늙은 주민을 만나 서로 빗나가는 대화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남자는 바에서 만난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구입한 낚시면허증을 주려하지만, 통화는 실패로 끝난다. 바에서 만난 늙수그레한 주민은 결혼도 한 적이 없는 듯하고, 살고 있는 와나카 바깥을 나가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뉴질랜드가 천국이라고 말하지만, 그곳도 사람이 살고, 외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으며, 세상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는 걸 남자는 깨닫는다. [그만한 돈]은 만화가 용득권과 김응응이 만나 술을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원고료를 조금 더 달라는 용득권은 잡지사의 변명이 불쾌하고 짜증난다. 두 사람은 대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김응응은 '자갈마당'에 가자고 말하며, 용득권에게 '자갈마당'에 가봤는냐고 묻는다. 용득권은 두 번 가봤으며, 우연히 같은 여자를 만났다고 말한다. 여자가 있는 곳은 여관처럼 낯설고 지저분한 곳이 아니라,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었고, 여자의 일생 속으로 들어간 용득권은 낯설지만 편안한 감정을 느끼면서, 여자에게 돈을 주고 섹스를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여자는 용득권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다시 찾아오라고 하지만, 용득권은 다음에 한 번 더 갔을 뿐, 더 이상 여자를 찾아가지 않는다. 이유는 죄책감이 들어서라고, 용득권은 말한다. 그가 성매매 산업의 구조적 모순과 희생물로 전락한 성매매 여성의 처지를 얼마나 깊이 아는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가 막연하게 느낀 죄책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를 생각하면, 많은 남성들이 본능적으로 여성의 성상품화, 성매매에 대해 죄의식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금 상황-자본주의 체제와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 체제-에서 남성은 '남자다움'과 체화된 가부장제 의식으로 여성의 성상품화, 성매매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똑똑똑]은 친구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수도관이 얼지 않도록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의미하지만, 더 내밀한 곳에서는 엄마에 대한 안부인사와 방석집에서 만난 동향의 여자의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옥탑방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데, 안부전화를 한 엄마와 다투고 기분이 좋지 않다. 그때 친구가 찾아오고, 멀리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다. 가진 돈을 다 쓰려고 친구는 '좋은 데'를 가자고 택시기사에게 말하고, 그들은 철거 직전의 허름한 방석집에서 옷을 모두 벗고 '맥주와 섹스'를 두당 10만원에 거래한다. 그곳에서 만난 여자는 '나'와 동향이고, 무엇이든 만화로 그린다는 말을 들은 여자는 이런 장면은 그리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독자는 그렇게 말하는 내용까지를 포함해 그곳에서 오간 대화를 '관음'한다. 그렇게 친구는 쓰던 밥솥을 남기고 떠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섹스를 한 술집여자와 엄마를 생각한다. 그리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슬퍼서 약간 눈물을 흘리는데, 그건 '나'의 복잡하고도 서글픈 마음을 드러내는 진심으로 보인다. [막차]는 막차 시간을 다르게 알려준 여자 후배와 얽힌 이야기다. 서울에 살던 영수는 월세로 살던 집에서 월세가 밀려 보증금까지 날리고 잠시 고향집으로 내려온다. 그는 만화를 그리고 있지만, 형편이 좋지 않다. 학교 후배인 정태와 어울리며 졸업한 대학도서관에서 만화 작업을 하는데, 우연히 후배 선미를 만난다. 공대에서 여학생이 드물기도 하지만, 선미는 미인이라 인기가 많다. 세 사람은 자주 어울리며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데, 하루는 정태가 엄마와 함께 외갓집에 가고, 영수와 선미는 술을 마신다. 막차는 밤 11시라고 선미가 알려주고, 그 시간에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려도 막차 버스가 오지 않자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간다. 영수는 선미에게 키스를 하지만 선미는 거절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정태는 영수가 선미와 술을 마셨다는 걸 알고 '형은 씨발놈'이라고 욕하고 싸운다. 영수는 치킨집을 처분한 엄마에게서 돈을 받아 다시 서울로 올라오고, 가끔 선미에게 연락하지만 선미에게서는 답이 없다. 영수는 선미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선미의 육체만 원한 걸까. 남자는 사랑과 섹스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또는 일시적인 충동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정태의 말대로, 영수는 서울에 애인이 있으면서도 선미를 집적대는 것이다. 이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고, 선미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선미는 그걸 느꼈고, 다시는 영수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국화차와 소주] 만화가 영수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우연히 블로그를 방문한 팬이라는 여성 구외영을 알게 되고, 출판사에서 일하는 구외영은 영수에게 일을 부탁한다. 두 사람은 인사동에서 만나 국화차를 마시고, 술을 마신 다음, 구외영의 집에서 술과 함께 섹스를 하려 하지만, 구외영이 사귀는 남자와 전화를 하는 사이 영수는 집으로 돌아온다. 영수의 여자친구는 연락이 닿지 않던 영수를 추궁하고, 구외영과 있었던 일을 미루어 짐작한다. 영수의 친구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영수는 오래 전 사귀었던 첫사랑 민주를 떠올리고, 민주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을 두고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구외영에게서 전화가 오고, 혼자 다짐했던 마음과는 달리 택시를 타고 구외영을 만나러 간다. 두 사람은 섹스를 하고, 영수는 지금의 애인과 구외영과 구외영이 만난다는 유부남을 떠올리며 자괴감에 빠진다. 애인 앞에서도 비루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영수는 친구 결혼식에 가는 길에 첫사랑 민주의 연락을 받는다. 자기는 참석하지 못하니 대신 축의금을 내달라는 말이었다. 결혼식에서도 영수는 구외영에게 연락을 하지만, 끝내 구외영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첫사랑 민주 이름으로 한 축의금을 돌려받지 못했으며, 그의 애인과는 결혼을 했고, 이 모든 일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화하지 않은 영수의 일상은 창작이자 고백이다. 독자는 물론 영수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받아들이고, 작가 역시 영수의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고,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감정, 미워하는 감정이 냉온탕처럼 오가는 것은 욕망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욕망은 비단 나이가 젊기 때문은 아니다. 마영신 작가의 [엄마들]을 보면, 50대의 엄마들이 보여주는 적나라한 욕망의 퍼레이드는 나이와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게 된다. [예쁜 여자]는 구외영의 시각이다. 모텔에서 몰래 빠져나간 영수를 모른 체하는 구외영은 출판사에서 기획회의를 하며 편집장과 대립한다. 편집장은 유부남이고, 그와 내연관계지만, 남자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어렵게 대학을 마치고, 출판사에 임시직으로 들어갔다가 정식 사원이 된 것도 편집장의 배려였고, 편집장은 출판사 사장의 아들이며, 그 남자는 다른 남자와 달라보였다. 그건 물론 구외영의 착각이지만, 구외영은 자신을 합리화한다. 갑자기 병원에 입원한 엄마를 만나러 고향으로 내려간 구외영은 집에서 숨겨놓은 엄마의 일기를 발견하고, 과거를 떠올린다. 자기만의 방이 없었던 어린 시절, 제멋대로 사는 아버지와 자기 몸을 더듬던 오빠의 손길, 늘 고생하는 엄마의 삶이 지겨워 집을 떠나 서울로 왔지만, 그 역시 삶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온 엄마의 인생, 유부남인 편집장의 노리개처럼 전락한 자신의 삶이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숙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극복할 의지도, 최소한의 디딤돌로 없는 구외영으로서는 슬픔과 비애만을 느낄 뿐이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구외영은 출판사에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기로 결심한다. 부모의 삶도, 자신의 삶도 비난하거나 비난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누구의 삶도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 문화
    • 만화
    2021-11-18
  • 영순이 내 사랑
    제목 : 영순이 내 사랑 작가 : 권용득 출판 : 새만화책 영순이는 남자다. 게다가 무섭게 생겼다. 게다가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하다. 그의 친구는 미국이다. 미국이는 혼혈이고 기타를 잘 친다. 좋아하던 여자 정자는 미국이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 월세는 밀리고, 돈을 벌 방법은 모르겠고, 세상은 답답하다. 죽는 것 조차 한심하다. 맨주먹에 열정 뿐인 젊은이들은 세상과 맞서 싸우려 하지만, 그 대상은 모호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열심히 살려고, 뇌물까지 줘가며 애를 쓰지만 돌아오는 것 사기와 비웃음뿐. 청춘이 아름답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니, 거짓말이지만 진짜라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더 비참하니까. 권용득의 첫 장편 만화인 이 작품은 제작지원금을 받아 창작되었고, 이 만화를 계기로 권용득은 진짜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작가 스스로 말한다). 이 작품과 비슷한 수준의 외국 그래픽 노블이 한국에 소개되었다면, 아마도 이 작품보다는 훨씬 많은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외국의 그래픽 노블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으며, 오히려 뛰어난 작품성을 갖춘 작품이지만 단지 한국의 만화가라는 이유 때문에 홀대를 받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권용득 뿐 아니라 박건웅, 김한조, 앙꼬, 심흥아 등을 비롯해 많은 작가주의 만화가들이 놓인 현실이기도 하다. 만화를 그려 배를 곯지 않는 것이 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화를 그려서 갑부가 되는 일본처럼까지는 아니어도, 직장인들보다는 수입이 많아야 할 것이고, 그런 사회가 '문화'를 존중하는 사회이며,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권용득은 이 작품에서 '톤'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만화가라면 누구나 쉽게 톤의 유혹을 받을 것이고, 그것이 작업도 빠르고, 보기에도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용득은 펜만을 사용했다. 무수히 많은 선이 들어가는 작업에도 펜으로만 작업했기에 드러나는 손맛이 보인다. 공장 만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작가주의 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한국은 만화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지만, 이렇게 좋은 작가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어 감사하다. 이 작품은 2부로 구성되었으며, 1부 3편, 2부 5편으로 모두 8편의 단편 연작으로 구성하고 있다. 1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영순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에서 해고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순이는 인상이 험악하다. 머리는 빡빡 밀었고, 체격도 크다. 사람들은 영순이가 말하면 경계하고, 겁을 먹는다. 그건 영순이가 바라는 바가 전혀 아니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영순이를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영순이의 인상이 험악하다며 영순이를 해고하는 편의점 사장의 인상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렇게 일자리를 잃고,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지만 그것도 욕을 먹는다. 월세가 밀려서 쫓겨나기 직전이고, 사귀던 정자는 헤어지자고 말한다. 영순이에게는 총체적 난국이 닥쳤다. 길에서 할머니 젖가슴을 훔쳐봤다는 누명을 쓰고 할머니에게 얻어 맞기까지 하면서, 영순이라는 인물을 소개한다. 1부의 시작만으로도 이 만화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작가의 펜선의 핍진함과 굉장한 밀도는 인물의 대사-말풍선-뿐 아니라 그림 자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는 힘이 있다. 이별하자는 정자는 머리를 모히칸 머리로 깎았고, 입고 있는 티셔츠에 PISS라고 새겨 있다. 이 단어는 '오줌'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이 단어가 들어가는 용법으로 pissed off, piss someone off, piss off 등으로 쓰는데, '빡치다', '빡치게 하다', '꺼져' 같은 의미를 갖는다. 작가가 정자의 티셔츠를 클로즈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순한 풍자일 수 있고, 정자가 좋아한 사람이 정작 영순이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면, 이 단어는 영순이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보인다. 2화 '외계인 등장'에서 영순이는 치매를 앓고 있는 할아버지와 친구 미국이와 함께 살고 있다. 영순이는 할아버지를 '우리 용득이'라고 부른다. 어린아이같은 할아버지는 밥 달라고 칭얼거리고, 기저귀에 똥을 싼다. 영락 없는 아기다. 영순이는 미국이를 찾다가 옷장에서 벌거벗은 미국이와 정자를 발견한다. 영순이는 충격을 받아 집을 뛰쳐나가고, 어느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자살하려 하는데, 그때 자신을 영희라고 불러달라는 외계인을 만난다. 그 외계인은 평범한 여자로 보이고, 영순이가 가수라는 걸 알아주고, 응원한다. 영순이는 조금 전 죽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고,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고 노래한다. 3화 '영순이와 미국이'는 집을 뛰쳐나간 영순이를 걱정하며 미국이와 정자가 헤어지고, 미국이가 과거를 회상한다. 영순이 애인이었던 정자를 처음 만났을 때, 셋이 항상 어울려 다니며 놀지만, 어느 날, 정자는 머리를 모히칸처럼 깎고 나타나 미국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섹스를 하다 영순이가 집에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옷장 속으로 숨는다. 정자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미국이는 골목 담벼락에 서 있는 영순이를 만나고, 영순이도 자신이 질투심 때문이었다는 걸 인정한다. 두 사람은 다시 친구로 돌아오고, 마침 첫눈이 나린다. 2부에서는 본격 사건이 펼쳐진다. 1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월세가 밀린 영순이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써놓고 나간다. 영순이와 미국이는 고부장이 소개한 '벌떼촌 성인 나이트클럽'을 찾아가 오디션을 보지만, 락과 펑크도 구분 못하는 클럽 부장에게 쫓겨난다. 실망한 두 사람은 터덜거리며 거리로 나서고, 미국이는 기타를 영순이에게 맡기고 어디를 다녀오겠다고 하고, 영순이는 월세 걱정을 하며 집에 돌아오는데, 정작 주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월세는 이미 영순이 애인이 다 냈다고 하면서. 영순이는 애인이라면 정자가? 하면서 방으로 들어오는데, 거기에는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말한 영희가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 여기부터 미국이가 고부장을 찾아가서 벌어지는 사건과 영희가 영순이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영순이가 라디오헤드의 Creep을 미국이의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면이 몽타주 기법으로 펼쳐진다. 미국이는 자신들을 속이고 비웃는 고부장을 패죽이고 싶었지만 참는다. 그러다 고부장에게 변기뚜껑으로 맞아 쓰러지고, 영순이는 노래를 절절하게 부르고, 영희는 사라진다. 영순이가 부른 노래 Creep은 노래 가사가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어서, 이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영순이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네가 내게 다가왔을 때 너의 눈을 볼 수 없었어 너는 마치 천사같아 너의 살결은 날 눈물짓게 해 넌 깃털처럼 떠다니지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내가 특별했으면 좋았을텐데 너는 특별해 하지만 난 병신이지 난 이상한 놈이야 내가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난 이곳이 어울리지 않아 상처가 된다해도 상관없어 자제를 할 수 있엇으면 좋겠어 난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어 난 완벽한 영혼을 갖고 싶어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내가 주변에 없더라도 넌 정말 특별해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난 병신이야 난 이상한 놈이야 내가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난 이곳이 어울리지 않아 그녀가 도망친다 그녀가 또 도망치고 있어 그녀는 도망가네 널 웃음짓게 하는 모든 것 넌 정말 특별해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난 이상한 놈이야 난 병신이야 노래 가사는 영순이의 처지와 심리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영순이는 영희가 외계인이라는 걸 알지만, 그녀는 아름답고, 자신을 이해하는 영희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만, 감히 말을 꺼낼 처지가 아니다. 자신은 외모도 험상궂고, 가진 것도 없으며,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한심한 백수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영희와 자신의 거리가 너무 멀어 마음이 아프다. 절절하게 부르는 영순이의 노래는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움직인다. 2화 'Raging 영순'에서 영순은 영자가 달려와 미국이가 응급실에 있다고 알려주고, 둘은 미국이가 입원한 응급실로 달려간다. 미국이가 혼수상태인 걸 본 영순이는 고부장을 찾아가고, 그 자리에 조사장과 함께 있는 고부장에게, 미국이에게 사과하라고 말하지만, 고부장은 비웃기만 한다. 배경 설명은 없지만, 이 자리에 고부장, 조사장과 함께 강회장 심부름꾼도 등장하는데, 뒷부분으로 가면서 이들의 존재감과 역할이 커진다. 영순이는 화가 치솟고, 고부장을 창밖으로 밀어버린다. 사건이 본격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화 '외계인의 행방(1)' 미국이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다. 영순이가 갔던 나이트클럽에서는 여러 명이 죽은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형사는 CCTV를 보면서 영순이가 여러 명과 싸우는 장면을 보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영순이는 미국이와 영자를 만나 고부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순이 마음은 고부장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때 불쑥 나타난 영희가 영순이의 살기를 잠재운다. 실제 고부장을 죽인건 강회장 심부름꾼이라는 해결사였다. 4화 '외계인의 행방(2)' 경찰은 영순이 집을 찾아와 치매 할아버지와 실랑이를 하다 결국 영순이를 체포한다. 경찰은 강회장을 찾아가 고부장이 횡령한 장부를 보여준다. 강회장은 해결사에게 전화해 사건을 마무리하라고 명령한다. 경찰에 잡혀가던 영순을 구한 건 미국이었다. 미국이는 꾀병을 부려 영순이를 구하고, 영순이는 현장 목격자인 영희를 찾으러 나선다. 5화 '다시, 사노라면' 영희를 찾아다니던 영순은 경찰을 만나고, 경찰의 설득으로 함께 경찰서로 가려는 순간, 해결사가 나타나 경찰을 때려눕히고 영순과 싸운다. 칼을 든 해결사와 죽음의 사투를 벌인 영순은 해결사를 쓰러뜨리고 자신도 정신을 잃는다. 영순은 영희를 만나고, 잘 참고 살아온 영순을 격려하고 떠난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영순은 진범을 잡고 사건이 해결된 것을 알게 된다. 밀린 월세를 내준 것도 영자였고, 두 사람은 '사노라면'을 부르며 새로운 날, 그러나 달리 바뀔 것이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영순이와 미국이는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청년들이다. 그들이 술집에서 노래를 하는 것도 직업이라고 보긴 어렵다. 영순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도 인상이 험상궂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한다. 20대 청년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그들 자신도 알 수 없겠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매우 불평등하고, 자본의 착취가 격렬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청년들이 집단으로 사회에 저항하고,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청년의 권리를 쟁취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지만, 그건 나이 먹은 사람의 바람일 뿐, 변화는 청년 내부에서 일어나 시작해야 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영순이와 미국이, 영자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닥친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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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8
  • 심해수 - 오래된 이야기에 새로운 형식을 입히다
    제목 : 심해수 작가 : 이경탁, 노미영 출판 : 투믹스 심해수 - 오래된 이야기에 새로운 형식을 입히다 아포칼립스는 현실이 되는 순간 세상의 종말이자 멸망이기 때문에, 그것이 미래의 언제라는 예측 불가능함과 미지의 확률이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인류에게 처음, 최초가 있었듯이, 최후, 종말, 멸망의 이야기가 발생하는 것은 필연이다. 다만 인류의 최초가 신화와 전설, 설화였다면 인류의 종말은 인류가 이룬 과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즉 시작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그것은 인류의 초기가 미개했기 때문이었고-종말은 인류의 지성으로 예측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2천 년 전에도 인류가 멸망할 거라는 예언서는 존재했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고 불칼과 화염과 죽음이 땅 위에 가득할 거라고 했다. 고대 사람들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은 자연재해였다. 그들이 들판에서 야생동물과 사투를 벌이던 시기를 지나고, 집단으로 일정한 곳에 움막을 만들고, 농사를 짓고, 야생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와 외부의 위협으로는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지만, 지진, 화산폭발, 용암분출, 비, 바람, 눈, 천둥과 번개 같은 자연재해는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신의 영역에 속했다. 인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떠올렸다. 고대의 아포칼립스와 현대의 아포칼립스는 그래서 근본에서 다르다. 고대에서 바라보는 종말이 이제는 낭만적인 동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현대의 종말이 그리는 세계는 과학적 논리에 바탕한 추론 가능한 세계이기에, 낭만의 요소가 배제된 잔혹한 리얼리즘일 수밖에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처음 만든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에서도 인류의 종말로 세계는 바다 위에 겨우 떠다니는 섬만 남게 된다. ‘코난’에서 지구의 바다화는 인류의 전쟁이 원인이었다. 초자력무기는 대륙을 바다 아래로 가라앉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무기인데, 대륙이 가라앉으면서 발생한 해일로 땅 위에 있던 건물과 사람들도 모두 물속으로 쓸려 내려갔다. [심해수]는 [미래소년 코난]의 하드보일드 버전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라고 볼 수 있다. ‘코난’이 그림부터 이야기 전개가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라면 ‘심해수’는 극사실 묘사를 통해 이 이야기가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한다. ‘심해수’에서 죽음은 일상이다. ‘유니온’에 사는 ‘선민’(이 단어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배에 탄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선택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은 그나마 생존의 위협에서 안전한 편이지만, 난민-작은 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 심해수에게 잡아먹힐지 알 수 없어 늘 공포에 시달린다. ‘심해수’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심해수는 몸집이 매우 거대한데, 현재 심해에서 거대 생물을 발견하거나, 사체가 드물게 바다 위나 해안으로 떠오른 사진을 볼 때, 거대 심해어가 존재한다는 설정은 과학적 상식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심해어들이 왜 바다 위로 올라와 인간을 공격하는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심해어는 여러 종이 보이는데, 게, 뱀, 아귀와 비슷하지만 몸집은 몇십, 몇백배 큰 생물이 인간을 공격한다. 만화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이들 거대 심해 생물의 등장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돌연변이 가능성과 외계에서 유입된 물질에서 돌연변이의 생성을 떠올릴 수 있다. 비슷한 아포칼립스 만화인 [아들의 땅-지피]에서도 지구의 표면은 대부분 물에 잠긴다. 하지만 ‘아들의 땅’에서는 문명을 일으키려는 시도보다는, 인류의 지식과 문명의 발달이 결국 인류의 종말을 일으켰다는 자각으로, 인류가 미개의 단계에 놓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이 강한 내용이다. 생존하려면 동물의 수준으로 야생성을 키워야 한다는 내용은, 인류가 문명을 잃어버렸을 때 당장 맞닥뜨리는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두 아들은 글자로 대표하는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우정, 연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 [괴물-봉준호]에서도 괴물의 출현은 미군이 버린 독극물에서 비롯한 것임을 암시한다. 인류의 종말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때, 외계의 간섭보다는 내재적 원인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는데, 핵폭탄, 핵발전소와 같은 불가역 반응은 물론이고, 지진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도미노 붕괴현상,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도 인류 종말의 가능성을 높이는 현상들이다. 시간적으로, 심해어의 출현은 인류가 자연재해-만화에서 지구는 외계에서 날아온 얼음 유성으로 인해 멸망한다-로 지구가 물에 잠기게 되면서 나타나는데, 그 기간이 불과 100년이다. 그렇다면 100년 사이에 상상할 수 없는 진화적 돌연변이가 일어났다는 뜻인데, 그러려면 매우 극적인 물리적 환경변화가 발생해야 한다. 내재적 환경오염으로 인한 돌연변이는 지구가 물속에 잠기기 전까지 세계 여러나라에서 운용하고 있는 핵발전소와 핵무기, 플루토늄과 각종 독극물, 화학물질이 땅 위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대륙 전체가 물에 잠기면서, 그 위에 남아 있던 인류가 만든 모든 독극물과 화학물질, 방사능물질이 그대로 물속에 녹아들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물고기들이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며 급격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고 이해할 수 있다. 외부에서 유입된 돌연변이 가설은, 우주를 떠돌던 얼음 유성이 태양계 밖을 떠돌다 우연히 태양계 내부로 들어오면서 중력에 의해 태양 가까이 다가오다 달과 충돌하고, 그 파편이 지구로 떨어지면서 대기권으로 진입한 얼음 파편이 녹아 비가 되어 내리고, 얼음 속에 들어 있던 외계의 물질 속에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두 가지 가설로 심해어의 돌연변이를 설명한다해도 왜 하필이면 심해어들만 극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가에 대한 설명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나마 가능한 설명은, 유해물질과 외부의 바이러스가 바다의 가장 아래쪽,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심해 생물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심해수’는 고전적 의미에서 말하는 ‘영웅설화’의 구조와 서사를 답습한다. 영웅설화의 구조는 1)고귀한 혈통, 2)출생의 비밀, 3)비범한 능력, 4)어려서 고아, 5)죽을 고비를 넘기고 은인을 만남, 6)성장하여 다시 위험에 빠짐, 7)위기를 극복하고 영웅으로 거듭남이 핵심인데, ‘심해수’의 주인공 보타는 이 영웅설화 구조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물이다. ‘심해수’가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미래의 이야기지만, 그 구조는 오래된 이야기에서 가져왔고, 우리가 만든 수많은 이야기의 서사 구조는 영웅 설화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야기’를 소비하는 대중-수천년 전과 지금의 대중 모두-의 심리적 기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영웅 서사는 대중의 욕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몇천년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상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대중의 영웅 서사에 관한 욕망이 가장 극적이고, 격렬하게 투사된 것이 신의 존재다. 영웅은 신을 대신하거나,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로 투사되었으며, 대중의 욕망을 대리하는 존재로 작동한다. ‘심해수’에서 보타와 리타의 아빠는 작은배를 타고 바다 위를 떠돌며 두 아이를 돌보는 전천후 영웅이다. 적어도 보타와 리타의 입장에서는. 엄마에 관한 기억이 없는 두 아이는, 아버지가 엄마 역할까지 해야하는 한부모 가정에서도 결핍을 겪지 않고 자란다. 그 힘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하지만 보타의 가족이 탄 배가 심해어의 공격을 받고,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아버지는 두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위대한 전사, 작살꾼의 능력을 발휘한다. 보타는 아버지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본능으로 느끼지만, 정확한 실체를 알지 못한 상태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고아가 된 보타와 리타는 바다 위로 솟은 작은 빌딩에서 살아가려 하지만, 심해어에게 끊임없이 공격당하면서 위험한 상황에 놓이고, 죽을 위기에서 갑자기 나타난 여자 작살꾼 카나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심해어’에서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카나의 외모인데, 이는 나중에 같은 여성 작살꾼인 소니아의 외모와도 일맥상통한다. 즉 여성의 외모를 선정적으로 그리고, 심해어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카나의 행동을 외설스럽게 표현하면서, 이 만화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성을 상품화한다는 비판에서 비껴가지 못한다. 카나는 ‘유니온 부산’에서 가장 뛰어난 작살꾼인데, 작살꾼으로는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심해어와 싸우는 작살꾼은 고래를 잡는 포경선에서 고래의 급소에 작살을 던지는 전문 작살꾼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데, 심해어의 크기가 가장 큰 것은 흰긴수염고래보다 큰 것으로 그려진다. 보타의 아빠가 마지막으로 잡은 심해어가 바로 심해어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포악한 놈으로 켄트라시라는 이름의 50미터짜리였다. 이런 심해어를 혼자 해치웠다는 것을 최고의 작살꾼이라는 카나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시 카나의 외모로 돌아가면, 카나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매우 선정적인 외모를 지녀야 한다는 건, 만화 속 세계가 아닌, 만화를 소비하는 독자의 욕망(주로 남성 독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예술이 독자에게 아부하는’ 방식이며, 작가가 현실과 타협하고, 자신의 신념을 일정부분 포기하는 것으로 비친다. 그 근거로, 같은 작살꾼 가운데 남성의 외모는 철저하게 제복으로 감싸여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면, 작살꾼 가운데 최고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우연히 여성이고, 그 여성이 유일하며, 가장 선정적인 외모를 하고 있다는 설정은 작위적이다. 여성 작살꾼의 활약을 그린다면, 적어도 작살꾼들 가운데 일정 비율은 자연스럽게 여성이어야 한다. 여성을 뛰어난 전사로 그리는 것이 혹시라도 ‘페미니즘’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여지길 바라는 작가(들)의 의도였다면, 그것 역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외압에 굴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들)가 여성을 유일하게 최고 실력자 작살꾼으로 그려야 할 납득할만한 이유,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의 필연성을 만들지 않으면, 대중성을 염두에 둔 창작의 태만함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아포칼립스에서도 대중은 안전한 곳을 찾는데,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같은 존재로 ‘유니언’을 들 수 있다. 유니언은 거대한 배의 집합체이며 그 자체로 움직이는 도시이자 국가같은 존재다. 보타와 리타가 구조되어 간 곳도 ‘유니온 부산’으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앞서 작살꾼들이 제복을 입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 유니온은 작은 국가여서 누군가 권력을 휘두르며, 계급이 존재한다. 보타와 리타가 ‘유니온 부산’에 승선하고, 곧 두 아이를 둘러싼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카나의 비밀도 함께 드러나는데, 카나 역시 영웅 서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보타의 영웅 서사를 완성하는 멘토의 역할을 한다. ‘유니온 부산’에는 권력을 휘두르는 계급이 존재한다. 작살꾼은 봉건시대 일본에서 영주를 위해 일하던 ‘사무라이’와 매우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데, 작살꾼을 다스리는 계급은 누구인지 아직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유니온 부산’에 살고 있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경찰이자 감시자이자 재판관 역할을 하는 작살꾼들의 폭력-모든 권력은 폭력이므로-에 순응한다. 작살꾼들이 입은 제복은 ‘권위’와 ‘계급’을 상징하며, 이는 국가주의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작살꾼들의 권력 관계와 보타의 아버지가 반역자로 몰리는 상황은 만화 [설국열차]에서 계급 관계를 보여주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설국열차’ 역시 아포칼립스 이후 지구 표면을 도는 열차가 독립한 국가처럼 작동하는데, 이는 ‘유니온 부산’이 놓인 상황과 같다. 게다가 기차에 매달린 객차는 수직적 관계를 드러내고, 기차의 앞쪽부터 높은 계급에서 낮은 계급으로 이동한다. ‘유니온 부산’에서도 거대한 선체의 상층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지배 권력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타의 처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체의 가장 낮은 곳에서 배관공으로 일하게 되는 보타는 배관공 노동자들과 함께 낡은 파이프를 교체하는 작업을 하는데, 배의 밑바닥, 낡은 파이프, 더러운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는 이들이 피지배계급임을 상징한다. 이곳이 계급이 지배하는 상황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는 보타와 리타를 난민으로 받아준 관리자가 한 말에서 나타난다. 그는 난민일 때는 심해어에게 죽을 위험에 놓이지만, ‘유니온 부산’에서는 심해어의 위협보다는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돈은 물물거래의 수단이지만, 화폐 거래는 거래하는 물품이나 서비스에서 ‘이윤’ 즉 부가가치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아포칼립스 이후에도 여전히 ‘자본’의 힘은 인류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타와 리타가 레비아탄 슬레이어 마테온의 아들과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니온 부산’에서 있었던 10년 전 사건이 새롭게 떠오른다. 이와 함께 보타와 리타를 구한 카나의 과거도 오버랩되고, 이들이 서로 예사롭지 않은 인연으로 만났다는 걸 알게 된다. ‘유니온 부산’의 작살꾼들은 마테온이 자신들 조직을 배반하고 ‘유니온 부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라고 말하며 보타와 리타를 살해하려 한다. 이 무렵에 이미 보타는 자신의 아버지 마테온이 ‘유니온 부산’에서 가장 뛰어난 작살꾼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전설로 알려진 6성 작살꾼임을 알게 된다. 현재 가장 뛰어난 작살꾼인 카나가 3성 작살꾼임을 볼 때, 6성 작살꾼은 믿기 어려운 기록이다. 혼자 600마리의 심해수를 해치웠는데, 그런 영웅이 ‘유니온 부산’에서 탈출할 때는 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카나와 보타, 리타도 다시 ‘유니온 부산’에서 탈출한다. 이들의 탈출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폭력에 의해 축출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유니온 부산’은 하나의 국가로, 계급 사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보타와 리타는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의 자식들이고, 카나는 그런 반역자의 자식을 도와주는 사람이어서 체제에 위협이 되는 인물을 제거하는 집단의 폭력은 필연적 결과를 드러낸다. 체제-지구를 뒤덮은 바다는 단일한 시장으로 통합된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를 상징한다-위에서 존재하는 ‘유니온’은 국가를 은유하고, 작은배로 바다를 떠돌며 어떻게든 ‘유니온’으로 합류하려는 사람들은 난민이자 피지배계층이다. 이들은 ‘유니온’에 올라 입선 심사를 받고-이민 심사와 같다-합격한 사람만 ‘유니온’에 남을 수 있고, 불합격하면 다시 작은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한다.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은 보호해 줄 장치가 사라지고, 심해수에게 잡혀먹힐 확률이 높아진다. ‘심해수’는 현상적으로 바다의 돌연변이 괴물이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사회 체제의 구조 그 자체로 봐도 크게 무리가 없다. 바다(체제)에 사는 구조적 착취나 불평등이 괴물로 변해 난민을 잡아먹는 것은 이 만화가 의도했거나 하지 않았더라도 독자가 읽어낼 수 있는 메타포다. 아포칼립스를 그리고, 심해수와 죽음의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많아도, 이 만화에서 ‘가족’은 등장인물들이 가진 상처이자 희망이다. 보타와 리타는 심해수에게 아버지를 잃었고, 카나 역시 부모가 심해수에 잡혀먹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고아가 된 카나를 돌봐준 것은 ‘유니온 부산’에서 작살꾼으로 활약하던 보타의 아버지 마테온이었고, 세월이 흘러 마테온의 아들과 딸을 구한 것은 카나였다. 카나는 ‘유니온 부산’을 포기하면서까지 두 아이를 지키고, 보타와 리타는 카나를 누나나 언니처럼 여긴다. 가족의 부재는 그 자체로 공포다. 카나, 보타, 리타는 모두 어려서 부모를 잃는다. 생물학적 부모의 부재를 메우는 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어른들의 보살핌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나마 있던 울타리에서 쫓겨난다. 현실에서는 당장 죽음과 맞닥뜨리는 상황에 놓여 생존 본능이 앞서지만, 이들이 새로운 세계-세 명은 극적으로 살아나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에 도착해 심리적, 육체적 안정을 찾게 되면서, 각자의 내면에 가라앉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다스릴까도 중요한 과제다. 이들의 트라우마는 심해수를 향한 증오와 복수로 드러나지만, 그것은 그들 내면의 현상만을 볼 뿐이다. 보다 근본에서 부모를 그리워하는 결핍의 문제는 이들을 끝까지 괴롭힐 것이다. 카나가 최고의 작살꾼이 될 수 있었던 것과 보타 역시 아버지와 같은 전설적 작살꾼의 재능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유전적 이유보다는 증오와 복수의 감정이 동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슬픔, 외로움, 그리움, 결핍의 감정이 마치 심해수처럼 주인공들의 내면을 할퀴게 될 것이다. ‘심해수’는 스토리 작가, 그림 작가, 배경과 채색 작가가 모두 다른, 협업 구조로 제작하고 있다. 사물과 배경은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인물의 행동은 박진감 넘친다. 레이아웃의 제한을 두지 않는 자유로운 화면 연출로 웹툰의 장점을 살렸다. 캐릭터는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강하게 보인다. 특히 ‘카나’는 귀여운 얼굴에 무서운 전투력을 갖춘 여성으로 그려지는데, 그녀가 거의 나체나 다름없는 외모로 그려지는 것은 일본 만화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는 증거다. 다른 캐릭터 역시 한눈에 일본 만화의 캐릭터와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만화가 뛰어난 연출과 극사실 묘사, 진지한 서사를 다루면서도 그래픽 노블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만화의 핵심인 그림과 서사의 독창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그린 ‘아들의 땅’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림과 함께 앞에서도 언급한 ‘독자에게 아부하는’ 카나의 존재-선정적인 외모와 유일하면서 최고의 실력자인 작살꾼의 위치-는 작가가 구축한 작품 세계의 일부를 허무는 행위로 보이고, 창작의 진지함을 훼손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여성의 나체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몸을 드러내야 할 필연적인 이야기 구조가 아님에도, 선정성을 목적으로 그렸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형식은 내용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다. 작품의 완성도는 뛰어나지만, 본질에서 벗어난 캐릭터와 독창성이 부족하면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독자를 온전히 설득하지 못하게 된다. 만화에서 드러나는 형식과 내용의 문제는 작가에게 ‘작품에 관한 철학의 부재’로 귀결하게 되면서, 작품의 완성도에 흠집을 낸다. 만화가 예술 장르의 하나라는데 동의한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작품에 작가의 철학이 중심으로 자리잡아야 하는건 작가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이 아닐까. 그런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심해수’는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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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8
  • 나쁜 친구
    제목 : 나쁜 친구 - 앙꼬 작가 : 앙꼬 출판 : 창비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같지만, 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마다 삶의 밀도는 다르다. 얼마나 핍진하게 시간의 결을 살아왔는가 가늠하는건 쉽지 않지만, 밀도가 높을수록 시간이 지나면서 삶의 순도 또한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삶을 구성하는 ‘밀도’와 ‘순도’는 무엇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도스또예프스키는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당하고, 청년일 때 혁명가였지만, 그는 사형 직전에 황제의 명령으로 목숨을 건졌고, 나이 들어 도박중독자가 되었다. 빚더미에 앉아 평생 빚독촉을 받으며 써내려간 소설은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그가 사형 직전 살아남았을 때, 그의 삶은 강한 밀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고흐, 카프카, 천재 이상을 비롯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의 삶은 짧지만 강렬하다.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운 외부 환경과 내면의 욕망이 갈등을 빚으며 천재성을 드러냈다. 백살을 살아도 평범하게 살다 죽는 사람과, 30년을 살아도 역사에 남는 예술작품을 남기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지 천재적 재능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어떤 삶을 살든 자신의 내면에서 발산하고픈 강렬한 욕망을 표출하고, 여러 삶의 방식을 포기하며,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찾고 싶거나, 만들고 싶은 모습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스스로에게 묻을 때, 자신의 존재는 구체적 모습을 갖춰갈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앙꼬의 ‘나쁜 친구’는 청소년 시기 짧은 몇 년을 남다르게 보낸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면서, 과거 자신의 삶이 어떠한가를 객관의 눈으로 담담하게 바라본다. 그 과거의 시간은 평범하지 않았고, 짧지만 강렬하게 기억에 새겨졌다. 그 시간은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지나간 삶이지만, 그 짧은 시간이 주인공 진주에게는 미래의 자신을 만들어 갈 자양분이 되었다. 앙꼬는 그의 책 ‘열아홉’의 표제작 ‘열아홉’에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고등학생 경진이는 기성세대가 규정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비행청소년’이다. 이 단어로 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폭력인가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진짜 문제 집단이 누구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관습과 이해의 틀 안에서 청소년을 규정한다. 분류하고, 꼬리표를 달고, 인격을 재단하고, 품성을 평가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기성세대가 정상 또는 합격으로 평가한 청소년은 시험성적이 좋고, 부모와 교사의 말을 잘 듣고,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기성세대)가 요구하는 관습과 제도를 내면화한 사람들이다. [나쁜 친구]는 세 편의 단편으로 묶은 옴니버스 연작만화다. ‘열아홉’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로, 20대가 된 주인공 진주는 새벽 고요한 어둠 속에서 과거를 들여다본다. 진주(‘열아홉’에서는 경진)는 중학생 때 ‘노는 아이들’ 가운데 하나인 정애와 친구가 된다. 정애는 여학교에서 ‘일진’이었으며, 술과 담배, 고등학생 남자 친구를 사귀는 ‘날라리’, ‘양아치’였다. 그들은 평범한 학생들을 괴롭히고, 때리고, 돈을 뜯고, 밤에는 빈집에 모여 술을 마시며 논다. 그들은 자기의 행동에 죄책감이 없다. 진주와 정애에게 ‘왜?’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묻는 건, 왜 숨을 쉬고, 왜 밥을 먹으며, 왜 화장실에 가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삶을 방기한 진주, 정애 같은 청소년을 올바로 이끌지 못한 사회와 구조와 기성세대에게 있는 데, (그 안에 가정과 부모도 있다) 정작 기성세대는 자신의 무능과 가부장적, 제도적 폭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모든 책임을 진주나 정애에게 뒤집어씌운다. (진주와 정애가 후배들에게 휘두른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알 수 없는 일들’은 진주와 정애가 만나고, 술, 담배를 하며 학교생활에 관심이 없던 두 소녀가 가출해 술집에 다니는 친구를 만나 나이를 속이고 술집에 취직하는 이야기다. 진주는 아버지에게 맞아서 머리가 찢어지고, 몸에 멍이 들고, 팔다리도 상처투성이다. 정애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시달리고, 엄마는 가출했다. 불우한 가정에서 부모의 보살핌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이 모두 그렇지 않지만, 정애는 나이보다 일찍 세상에 눈뜬다. 두 소녀는 가출해 여관을 숙소로 삼고, 술집에 취직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가혹했으며 난폭했다. 술집에 오는 남자들은 어린 여자를 성적으로 소비했으며, 미성년자라는 걸 알면서도 술집 주인은 소녀들을 돈벌이에 써먹었다. 학교에서는 ‘일진’이었지만, 세상에 나오자 그들은 힘없는 미성년 여자아이들이었고, 돈과 권력 아래 놓인 희생양이었다. 그걸 깨닫는 건 금방이었고, 아버지의 폭력을 감수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들이 학교의 담장 안쪽과 바깥쪽의 공기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심각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애’에서는 학교로 돌아온 진주와는 다르게 정애는 어딘가로 사라진다. 중학교 졸업식 사진에 얼굴이 없는 정애의 삶과 진주의 삶을 돌아보며, 똑같이 자기를 때리는 아버지가 있어도, 진주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의무와 책임감 때문에 엇나간 자식을 체벌하는 것이고, 정애의 아버지는 이유 없는 폭력을 휘둘렀다는 점이 달랐다고 말한다. 진주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여전히, 아니 더 심하게 학교생활을 방기하고, ‘비행청소년’이 되었다. 더 많이 아버지에게 맞고, 학교에서도 선생에게 맞는다. 그러면서도 진주는 자기가 마음 내키는대로 살았다. ‘정애와 나’는 돌아오지 못한 정애를 기억하며, 진주가 정애에게 갖는 죄책감을 그리고 있다. 우연히 버스에서 마주친 정애를 발견하고 말을 건네지 못하는 진주는 친구를 두고 자기 혼자만 어둠에서 빠져나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작가는 청소년 시기의 모습을 돌아보며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는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행동과 그 결과까지가 모두 자신의 온전한 모습이라는 걸 인정한다. 작가도 고백하듯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똑같은 처지에 놓였던 정애와 달리 자신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고, 자기를 믿고 기다려준 부모와 형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작가는 직간접 경험과 상상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조합해서 보여줄 때 설득력을 갖는다. 앙꼬의 만화 ‘나쁜 친구’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상상력으로 창작한 것보다 더 묵직하고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건, 이 이야기가 과거를 미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주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가의 크기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맞아서 머리가 찢어지고, 선생에게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어 학교에 경찰이 출동할 정도가 되어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덤덤함은 그가 일부러 가지려는 태도가 아니라, 그의 내면 세계가 그렇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작가 ‘앙꼬’는 작품 속에서 드러내지 않지만, 학교 생활에서는 일탈하면서도 그가 진짜 좋아했던 그림 그리기는 숨 쉬는 것처럼 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손에서 연필을 놓지 않고, 청소년 시기를 거치면서 매우 높은 밀도로 그림을 그렸다. 20대의 ‘앙꼬’가 그린 그림은 긴 시간 그림을 그린 노인의 선처럼 노련하고, 깊이가 느껴진다. ‘앙꼬’는 친구들에게 그림을 그려 보여주고, 자신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잘 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혼란하고 불투명한 청소년 시기를 겪으면서 ‘앙꼬’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연필과 노트는 그의 삶을 지탱한 유일한 희망이자 힘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이 작품으로 앙굴렘에서 ‘새로운 발견상’을 받은 것은 이야기의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다. 작가주의 만화, 그래픽 노블로 분류할 수 있는 하나의 장르에서도 리얼리즘의 세계를 깊이 있게 보여준 앙꼬의 만화는 작가의 경험과 세계관을 세계의 독자가 공감했음을 확인했다. 형식과 내용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는 젊은 작가가 진화하는 모습을 보는 건 독자로서 행운이기도 하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제시이야기
    제목 : 제시이야기 작가 : 박건웅 출판 : 우리나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귀한 자료를 박건웅 작가가 만화로 그렸다. 독립운동은 우리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중국에 임시정부를 설립하면서 본격 시작되었다. 국내에서 하는 독립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이어나가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다른 나라들에게 조선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어도 여전히 독립한 국가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임시정부 활동은 꼭 필요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양우조, 최선화가 그들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훌륭한 인물들이 많지만, 이 젋은 부부는 임시정부에서도 가장 젊은 사람에 속했고, 아기를 출산해 육아를 하면서 임시정부의 일도 함께 하던 흔치 않은 경우였다. 젊은 부부가 첫번째 아이인 '제시'를 낳은 것이 1938년이었고, 이때부터 조국이 광복되어 중국에서 부산에 도착할 때인 1945년까지의 육아 기록이다. 이 책이 특이한 것은, 나라를 빼앗겨 외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가 중국에서도 내전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부부가 함께 육아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결혼도 김구 선생님의 주례로 조촐하게 했으니, 이들 부부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부부임에 틀림없다. 임시정부는 중국의 항주에서 시작해 가홍, 상해, 진강,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기강, 중경까지 옮겨가는데, 중국의 동쪽 끝에서 서쪽 깊숙한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중국 대륙을 전전한다. 그것도 그냥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폭격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건물이 파괴되는 공포의 상황에서 갓난아이를 보살피며 물도, 음식도, 풍토도 맞지 않는 중국 대륙을 전전하는 독립운동가들과 젊은 부부의 이야기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참혹한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도 아이는 태어나고 자란다. 세계의 역사는 지금까지 한 세대 이상 평온한 때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내전이 벌어지고 있고, 사람들이 죽어간다.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지만, 살아가는 일상은 별다를 게 없다. 혁명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은 혁명가들은 많았지만, 마르크스도, 레닌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두었다. 조선의 혁명가들도 인간이고, 조국의 운명이 아니었다면 평범하게 살아갈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당연하다. 작품에서는 어린 제시를 아끼는 젊은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아이와 함께 중국 대륙을 전전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겪고 있는 중일전쟁의 참혹함과 중국 민중의 삶도 보인다. 나라를 가릴 것 없이 전쟁이 발생하면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민중이 가장 큰 고통을 겪는다. 하물며 나라를 빼앗기고 다른 나라를 전전하는 독립운동가들은 어떨까. 그래도 이렇게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남긴 기록이 있어 우리의 어른들이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던가를 알 수 있으니 기쁘고 반갑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
    제목 : 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 작가 : 쥘리 다셸, 카롤린 출판 : 이숲 마그리뜨는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애인도 있고, 직장생활도 하지만, 날마다 일상을 꾸려가는 일이 힘겹다. 20대 후반의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은 매우 단조롭고 규칙적이어서 건조하게 보이지만, 정작 마그리뜨에게는 가장 편안한 삶의 방식이다. 직장에서, 애인과, 이웃과의 소통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자각한 마그리뜨는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고 자폐와 관련한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증상이 아스퍼거 증후군과 매우 비슷하다는 걸 알고는 정식으로 의사와 상담하고 진료를 통해 아스퍼거 자폐인이라는 판정을 받는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언어 지체나 지적 장애가 없는 가벼운 자폐의 일종이라고 정의한다. 1944년 오스트리아의 정신과의사 한스 아스퍼거가 처음 보고 했다는데, 한국에서는 2005년이 되어서야 이 증상이 자폐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아스퍼거 증후군과 관련해 '나무위키'의 내용을 보면, 정신과의사 아스퍼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를 지지하는 의사였고, 정신병자는 물론 유대인, 집시 등 당시 독일의 극우정당이 인종청소를 하려는 정책을 지원했다는 의심을 강력하게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명명한 사람은 정작 아스퍼거 본인이 아니라 영국 의사 로나 윙이었는데, 198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아스퍼거 증후군'을 보고했으며, 로나 윙이 인용한 '칼 융'의 정형화를 비판하면서 미셸 푸코의 책 '정신의학의 권력'으로 이어지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아스퍼거 자폐인은 일상 생활을 하는데 큰 문제는 없지만,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자폐 스펙트럼의 약한 쪽에 속해 있으며, 그동안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좀 별난 사람이라거나, 어딘가 좀 모자란 사람 정도로 취급 받는 사람이 검진을 통해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판정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 작품은 글을 쓴 작가 본인이 아스퍼거 자폐인으로 판정을 받기 전과 받은 이후의 삶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묘사하고 있다. 아스퍼거 자폐인으로 판정 받기 전의 주인공은 자신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사람들과의 소통에 고통받는다. 하지만 스스로 문제를 찾기 시작하고, 상담과 진찰을 통해 아스퍼거 자폐인 판정을 받은 이후부터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알게 되면서 삶에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이 작품이 작가의 경험을 다룬 것이라는 전제로 본다면, 퍽 부러운 부분이 많다. 주인공 마그리뜨는 회사에 다니고 있고, 자신이 아스퍼거 자폐인 판정을 받고, 장애인 등록을 한 다음에도 회사에서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장애인이니까 자신이 업무를 잘 볼 수 있도록 회사의 환경을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프랑스에서도 아스퍼거 자폐인 판정을 받는 것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임을 말하고 있지만, 일단 장애인 판정을 받으면 사회구성원들이 그 장애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편견을 갖지 않고 바라본다는 점은 선진국 문화의 장점이다. 아스퍼거 장애인의 경우,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장애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냥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다. 차라리 장애인이라는 판정을 받으면 당사자도 좋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도 확실한 구분이 되어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만, 장애와 정상의 경계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자신이 아스퍼거 증후군인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지나 않을까 생각한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거인의 역사
    제목 : 거인의 역사 작가 : 맷 킨트 출판 : 세미콜론 원제목은 '3Story'다. 세 개의 이야기인데, 한 남자의 삶을 두고 세 명의 여자-엄마, 아내, 딸-가 바라본 기록이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아이의 엄마 마지는 전쟁-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남편에게 독백한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마지의 남편은 전쟁에 참전했고, 그는 전쟁터에서 죽는다. 아이와 둘만 남은 젊은 엄마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애를 쓰지만 심한 우울증에 걸리고, 아이에게 냉담하다. 아이는 해가 다르게 키가 거지고, 비정상적으로 커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지역신문에 알려질 정도로 키가 커져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엄마는 그렇게 우울한 삶을 살다 요양원에서 죽고, 키가 계속 커지는 크레이그는 그 특이한 신체적 특징 덕분에 대학에 입학하고, 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대학을 다닌다. 그곳에서 여자를 만나고, 두 사람은 결혼한다. 키가 너무 커져 입고, 먹고, 자야 할 곳이 남달라야 하는 상태에서 곤란을 겪던 크레이그에게 CIA가 접근한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시대 배경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인데, 이때는 미국이 쏘련과 냉전 상태에 있었던 시기였고,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했으며, 쿠바에 쏘련 미사일이 들어와 미국의 코밑을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와 쏘련 사이의 첩보전쟁이 격렬했던 시기였기도 했다. 미국중앙정보부는 주인공 크레이그에게 접근해 먹고, 입고, 잘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조건은 미국중앙정보부를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던 크레이그는 미국중앙정보부의 제안에 동의하고, 그의 아내 조가 설계한 거대한 집에서 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세계여행을 하고, 사람들 앞에 서서 구경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거대한 인간을 보기 위해 몰려들고, 미국중앙정보부는 겉으로 거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행사를 치르면서 뒤로는 공작을 한다. 하지만 거인의 존재가 더 이상 미국중앙정보부에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판단에 따라 크레이그의 귀에 폭탄을 설치하고 행사장에서 그를 쓰러뜨린다. 설상가상으로 크레이그의 아내 조도 거대한 인간인 남편과의 생활에 날이 갈수록 고통스러워 한다. 그녀는 크레이그 모르게 불륜을 저지르고, 자기 만의 집을 만들어 숨기도 하지만 더 이상 거대한 인간 크레이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낀다. 크레이그는 그런 아내를 바라보면서, 또 자신이 계속 커지고 있으며, 이 상태로는 모두에게 짐이 될 뿐이라는 생각으로 집을 떠나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 크레이그의 딸이 거대한 인간인 아버지의 흔적을 추적하며 그가 숨을 거둔 자리를 찾아나선다. 이미 20여년이 지났기에 거인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여전히 곳곳에 거인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거인이 살던 시카고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이어진 흔적은 미국을 떠나 세계 여러 나라로 이어지고 있었지만 정작 거인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발견하지 못한다. 이 작품이 독특한 점은, 거대한 거인이 등장하는 사회를 미국의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과, 거인 자신의 발언이 아닌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세 명의 여성-엄마, 아내, 딸-의 증언으로 구성한 점이다. 거대한 인간은 '미국'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미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대한 나라임에 틀림없고,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세계의 경찰임을 자처한, 그 존재만으로 위협적인 깡패국가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자신의 조국이 '세계의 깡패'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약소국가에 살고 있고, 미국의 직접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우리나라는 거대한 국가 미국을 깡패국가로 인식한다. 거인이 직접 발언하지 않는 것은, 미국 자신이 발언하는 것은 상황을 객관으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기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미 편견과 왜곡이 전제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주변 사람이 바라본 거인을 판단하도록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거인에게 접근한 것이 미국중앙정보부라는 것은 미국이 세계 여러나라에서 정보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고, 미국중앙정보부는 남미의 여러나라에서 진보적 성향의 정부를 뒤집어 엎고, 군부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거인이 쓰러지는 사건도 미국중앙정보부의 의도였으며, 쓸모가 없으면 가차없이 버리는 냉정하고 냉혹한 태도는 정보전쟁의 특성이자, 미국이 역사적으로 정보전쟁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고, 전쟁을 유발하고, 군사쿠데타를 지원했어도 미국이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미국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고,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다. 결국 거인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 미국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영향력, 정치력, 군사력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고, 패권국가로서의 영향도 줄어들었다. 미국은 여전히 강한 국가지만, 단 한번도 존경을 받는 나라였던 적은 없었다. 오로지 힘으로만 최고의 자리를 유지해왔고,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미국의 태도는 세계 모든 나라에게 두려움은 주었을지언정 '친구'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었다. 그런 과거의 존재를 찾아봐야 세계 여러나라에 미친 흔적들만 있을 뿐, 미국의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는 은유를 발견할 수 있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그림자 소묘
    제목 : 그림자 소묘 작가 : 김 인 출판 : 새만화책 훌륭한 작품이다. 이 작품집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제작지원공모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출판한 작품인데, 작가의 이력이 독특하다. 대학에서 언어학과 회화를 공부했고, 서울애니메이션만화가 전문 과정을 수료했고, 2003년 제작지원공모에 당선되어 이 작품이 나왔다. 그는 만화가가 될 생각이 어려서는 없었지만, 김혜린의 '비천무'를 읽고 만화가가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는 20대 초반에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첫 작품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건, 작가가 주변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성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보통의 만화와 다르다. 만화의 대부분은 잉크와 펜으로 먹선을 그리는데, 이 작품은 콘테와 붓으로 그렸다. 작가는 2년 동안 이 작품을 그렸는데, 그래서인지 한컷 한컷이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그래픽노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가를 따진다면, 당연 그림이다. '그래픽'+'노블'이란 말처럼, 그래픽이 노블에 선행한다. 아주 단순한 예만 들어도 알 수 있는데, 그래픽노블 가운데 '도착'이라는 작품이 있다. '숀 텐'이 그린 작품인데, 여기에는 문자가 없다. '이야기'는 있지만, '문자'가 없고, 오로지 그림으로만 완성되는 작품도 그래픽노블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은 그래픽노블을 보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그림은 뚜렷한 개성을 보인다. 그래픽노블에서 흑백 그림은 무수히 많은데, 흑백 그림이라도 다 같은 흑백이 아니라는 걸 이 그림은 보여준다. 연필로만 그린 그래픽노블도 많다. 연필의 검은 선이 명암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흥미로운데, 잉크의 먹이 완전한 검은색이라면, 같은 검은색이라도 붓으로 표현하는 검은색의 농담은 연한 회색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단계의 무채색을 표현한다. 이 작품은 콘테의 질감이 흑백의 단조로움을 상쇄하며 깊은 흑백의 명암을 표현하고, 붓선의 자유로움과 붓으로 그린 먹선의 다양함이 흑백의 멋을 잘 드러내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흑백이지만 이 작품은 '빛'을 그리고 있다. 즉 깊거나 얕은 어둠을 드러내는 방식은 곧 빛의 밝기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작품에서도 '빛은 이미 그림자를 포함하고 있어'라는 말이 나오는데, 화실에서 정물화를 그릴 때, 그림자가 없는 그림은 깊이가 없다는 화실 선생님의 말이다. 이야기는 두 편의 단편이지만, 두 편은 독립된 이야기면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시골에 살던 주희는 이모와 함께 서울에 살게 된다. 전라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하는 주희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서 서울에서 공부하며 그림 공부도 함께 하고 싶다. 큰 길에 있는 크고 유명한 화실을 마다하고 골목에 있는 작은 화실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그 화실 앞에 해바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골의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살던 주희는 서울의 복잡하고 시끄럽고 어지러운 길거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길을 잃곤 한다. 자기만의 그림 지도를 그려 길을 잃지 않게 되고, 그 그림은 거리에 있는 나무와 화분과 담장의 나무와 꽃을 그린 것이다. 살아 있는 식물을 그림으로 그려 지도를 만든 주희의 마음은 도시의 복잡하고 어지러운 거리를 고향에서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는 주인공은 따돌림을 당한다기보다 자신이 다른 친구들에게 관심이 없다. 점심 때 도시락도 같이 먹자는 친구들의 말을 거절하고, 체육시간에는 다른 친구들이 상대를 하지 않아 외톨이가 된다. 친구도 없고, 늘 혼자 다닌다. 그러다 교실에서 전학 온 주희를 발견하고, 두 사람은 서로 안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전편에서 주희가 길거리에서 자동차와 부딪칠 뻔한 일이 있는데, 그때 스케치북에서 그림 한 장이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고, 그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본 사람이 주인공이었다. 주희는 그 아이를 눈여겨 보았고, 교실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고, 주희는 그 아이의 존재감을 느끼고, 주인공은 주희가 자신을 알아본 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자신에게만 그림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주희를 만남으로써 자신에게도 그림자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다. 두 여학생의 만남은 도시적이지 않다. 주희가 갖고 있는 풍요로운 감성과 따뜻한 마음은 삭막한 도시에서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그의 구수한 사투리는 도시의 삭막함과 다른 시골의 정서를 표현한다. 그림자가 없고,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던 주인공도 주희를 만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낀다. 우정은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똑똑, 리틀맨
    제목 : 똑똑, 리틀맨 작가 : 체스터 브라운 출판 : 미메시스 작가의 초기 작품을 모은 단편집. 여기 실린 작품들은 작가의 나이 20-35살 사이에 그린 작품들이다. 모두 27편의 짧은 만화가 실렸는데, 작가의 상상력이 독특한 시각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만화는 거의 모두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작품집에서 주목할 만한 사회적 발언을 한 내용이 있다. '반 검열 선전'의 작품은 예술 작품의 검열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여기 등장하는 두 사람은 캐나다 총리와 그의 부하인데, 두 사람의 모습이 기괴하다. 총리는 남자의 모습인데 가슴은 여성의 가슴을 하고 있고, 그의 부하도 여성의 가슴에 남성 성기를 길게 꼬리처럼 끌고다닌다. 이들은 벌거벗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 대화는 아래 내용이다. -교회 단체에서 포르노그래피를 금지시켜 달라는 편지를 몇 통 받았습니다. -잠깐, 사전 좀 찾아보고...'포르노그래피...주로 성적 욕구를 유발하기 위한 문학, 회화 등. -이게 뭐 어때서? 성적 욕구를 일으키는게 잘못됐다는 말인가? -신의 법에 어긋난다는 거죠. -그들의 종교가 그런 법을 규정한다...이 나라에서 종교는 개인 문제 아닌가. 만일 자신의 종교가 포르노그래피를 금한다면 자기만 그걸 사지 않으면 되잖아. -그걸 보는 애들에게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하는 거죠. -그 자들이 걱정하는 건 뭔지 알겠어. 만일 애들이 포르노그래피를 사지 못하게 하는 법령 같은 걸 자네가 만든다면, 그렇게 크게 벌어질 일은 아닐 거야. -포르노의 생산 자체를 금해달라는 뜻도 있답니다. -그렇지만 미성년자 성희롱이나 성행위는 이미 불법아닌가. 게다가 성적 자각이 사춘기나 그 이전에 시작된다는 걸 모른 척할 순 없는 문제라고. -포르노그래피가 남자들이 여자들을 강간하게 만든다는 말도 하더군요. -사진이 없고, 문맹이 들끓던 시절에도 강간은 있었네. 영화나 잡지를 봤다고 강간범이 되는 건 아니잖나. 사람들이 그렇게 즉각적으로 행동한다면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 같은 영화는 개봉도 못했을 걸세. -그렇게 단단히 답할 수 업슨 게 지금으로썬 큰 문제랍니다. -그래, 강간범을 잡는 건 어렵지만, 미디어의 성적인 요소를 이유로 출판사나 화가, 영화 제작자를 잡아들이는 건 지나치게 쉽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면 대중에게 우리가 여자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겁니다. -비록 실상은 예술가 나부랭이들이나 괴롭힐 뿐이겠지만 말이야! 젠장 레이! 이게 바로 언론을 쥐고 흔드는 방법이야! 얼른 뛰어가서 반포르노 법령을 빨리 써내! 결국 창작행위를 검열하는 법령이라는 건, 권력을 가진 자들이 예술가를 괴롭히고, 자신들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는 걸 작가는 정치가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작가는 오래 전 그린 이 만화의 내용이 유치한 수준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는데, '창작의 자유'와 '검열'의 대립을 두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여전히 한심한 수준인 만큼, 검열을 하려는 자들-권력을 가진 자들-의 멍청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은 더 날카로워져야 한다고 본다. 나중에 나온 체스터 브라운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퍽 온건하고 현실적인 내용인데, 작가 특유의 냉소적 태도는 이 작품집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작가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만화의 세계를 넓혔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너 좋아한 적 없어
    제목 : 너 좋아한 적 없어 작가 : 체스터 브라운 출판 : 미메시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청소년들의 미묘하고 까다로운 심리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체스터는 어릴 때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욕설 때문에 엄마한테 심하게 야단 맞는다. 그리고 그 뒤로 학교에서 욕설을 하지 않는 아이로 소문이 난다. 어릴 때는 대개 별 생각 없이 욕을 한다. 친구들은 체스터에게 욕을 해보라고 놀린다. 욕을 참는 것이 자존심과 연결되면서 체스터는 욕을 하지 않고, 친구들은 욕을 하라고 놀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체스터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체스터를 옹호하고, 그들 가운데 여학생 캐리는 체스터를 좋아하지만 정작 체스터는 캐리의 친구 스카이를 좋아한다. 체스터는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캐리를 보면서 부담스러워 하지만, 그렇다고 싫은 내색도 하지 않는다. 캐리의 언니 코니와는 친구로 지내고, 숨박꼭질을 할 때는 둘이 들판에 누워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체스터는 처음으로 스카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고백을 하고도 체스터의 마음은 복잡하다. 스카이도 고백을 한 체스터가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으니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의심한다. 체스터가 자기의 친구 스카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캐리는 체스터에게 화가 나서 '너 좋아한 적 없어'라고 말한다. 이런 일들이 체스터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 그의 엄마는 정신과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사망한다.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체스터가 잔디를 깎고 있을 때, 스카이가 찾아와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하지만 체스터는 거절한다. 청소년 시기는 불안정한 상태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가족과 원만하고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고, 학교의 친구들이나 이웃과 어려움 없이 지낸다면 불안정한 청소년 시기도 무사히 넘길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체스터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야했는데, 원하지 않고, 믿지도 않는 신을 찬양하기 위해 일요일의 행복한 시간을 버려야 한다는 건 몹시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체스터는 교회에 마지못해 나가고, 학교 생활도 묵묵히 해나간다. 체스터는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는 열정적으로 반항하기 보다는,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친구들이 놀려도 상대하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에게도 열렬한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런 냉소적 태도는 주인공의 타고난 성격이기도 하고, 그가 자란 환경의 영향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엄마가 정신병으로 입원해야 하는 상황은 그 전부터 집안에 우울함이 가득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물론 이 작품은 창작이므로 논픽션으로 생각하는게 이상하지만, 적어도 많은 부분에서 작가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고, 이야기를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아서 담담하고 심심하다. 마치 자기 이야기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무심하고, 냉소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작가의 특징이기도 하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하비비
    제목 : 하비비 작가 : 크레이그 톰슨 출판 : 미메시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린 전작 '담요'에 이어 이 책이 나오기 중간에 '만화가의 여행'이라는 여행 일기를 낸 크레이그 톰슨이 7년 동안 공을 들여 내놓은 작품이다. 그래픽노블로 이만한 두께로 출판한 것은 보기 드물다. 무려 670쪽이나 되는 이 두툼하고 묵직한 책은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호기심이 들게 만든다. 이렇게 할 말이 많다는 건, 작가가 수다장이거나, 진정 하고픈 말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렇게 두꺼운 책은 잘못 고르면 종이와 잉크, 독자의 시간 낭비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선택하게 된다. 이 책이 크레이그 톰슨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선뜻 믿고 구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이 놀라운 점은, 장편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과 함께 작가가 직접 매우 복잡하고 섬세한 이슬람의 문양을 그렸다는 점이다. 첫페이지부터 작가는 이슬람 전통 문양을 꼼꼼하고 섬세하게 그리는데, 이 문양을 직접 그렸다고 생각하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랍다. 크레이그 톰슨이 그래픽노블의 대가라고 말하는 것이 이 작품을 보면서 수긍될 정도로 한 페이지마다 들인 공력이 대단하다. 그런 면에서, 활자로 이루어진 소설과 그림과 글로 표현하는 그래픽노블의 차이와 의미를 이 작품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소설로도 이 작품을 묘사할 수 있지만, 그래픽노블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풍부한 정보와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일부러 밝혔듯, 이 작품은 순수한 창작이다. 작품의 무대는 이슬람 국가지만,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가 아니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시간의 흐름은 약 16년 정도라고 하는데, 독자가 느끼는 시간은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길고도 오래된 이야기다. 작가는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주인공으로 어린 여자와 흑인 아기를 내세웠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은 독립적 존재가 아닐 정도로 천대받는 존재다. 이슬람의 율법에는 여성을 존중하라는 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꼭 있는데, 이슬람의 현실은 율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다른 나라도 여성의 차별과 억압이 항상 존재하지만, 이슬람 사회에서는 여성의 위치가 더욱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어린 여자 주인공 도돌라는 가난한 집안에서 가족들의 식량을 구입하려는 이유만으로 낯선 남자에게 팔려간다.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은 듯한 남자는 필경사였고, 다행히 도돌라를 학대하지는 않지만 딸보다 어린 도돌라와 섹스를 하고, 도돌라가 처녀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필경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죽고, 도돌라는 노예시장으로 팔려간다. 그곳에서 갓난아이 '잠'을 만나고, 잠의 엄마도 다른 곳에 노예로 팔려나가자 도돌라는 잠을 데리고 사막으로 도망친다. 도돌라는 누나처럼, 엄마처럼 잠을 돌본다. 그들은 사막에 버려진 배에서 무려 9년 동안 숨어서 생활하는데, 도돌라는 먹고 살기 위해 사막을 횡단하는 상단에게 몸을 팔고, 음식을 얻는다. 잠이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점차 소년으로 자라면서 도돌라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내면에 성적 욕망이 들끓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다 도돌라가 식량을 구하려고 배를 떠날 때, 잠이 몰래 뒤를 밟는다. 도돌라는 자신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고, 잠은 처음 그 장면을 보면서 크게 충격받는다. 어느날, 식량을 구하러 나간 도돌라는 궁에서 나온 병사들에게 납치당해 술탄의 후궁이 된다. 갑자기 헤어진 잠을 걱정하면서, 술탄의 아이를 출산하지만 자기가 직접 낳은 아이를 외면하고, 헤어진 잠만을 생각한다. 그러다 아이가 3살이 되던 어느 날, 도돌라는 아이의 존재를 깨닫고 모성애가 발현하는 걸 느끼는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사라진다. 경쟁자 후궁들 가운데 누군가 아이를 납치해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와 애착이 시작되자마자 아이를 잃어버린 도돌라는 삶의 희망이 사라진다. 이 무렵 '잠'은 사라진 도돌라를 찾아 도시로 들어오고 거세한 남자들의 집단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도 성기를 거세하고 그들과 함께 돈과 음식을 구걸하며 다니다 왕궁에 잡혀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도돌라를 발견하고, 이제 가치가 사라진 도돌라를 죽이라는 술탄의 명령으로 그들은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간 다음, '잠'은 도돌라를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든다. 두 사람은 술탄의 성 바깥쪽 빈민가의 하수구에서 어부에게 발견되고, 도돌라는 자신을 살린 사람이 '잠'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어부의 보살핌으로 몸을 추스린 두 사람은 옛날의 그 사막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사막은 이미 사라졌고, 그 자리는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살기 위해 도시로 들어가 '잠'은 노동자가 되고, 폐허가 된 빌딩의 한 칸에 도돌라는 살림을 차리고 둘이 생활한다. 도돌라와의 관계에서 극심한 갈등을 일으키는 '잠'은 자살할 결심을 하지만, 그는 마음을 바꿔 도돌라에게 돌아온다. 숨어지내던 건물이 다시 공사를 시작하고, 두 사람은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어디론가 떠나는데, 시장에서 노예처럼 팔리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와 셋이 길을 떠난다. 이 작품은 신화와 현실이 뒤섞여 있다. 도돌라가 돈에 팔려 필경사 남자를 만나고, 그에게서 글을 배우게 되는 것, 나중에 도돌라가 '잠'을 데리고 탈출해 잠과 함께 지낼 때도 잠에게 글을 가르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이 서사가 신화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화에서 여신은 인간을 돕는다. 어린 '잠'은 인간의 상징이고, 자연에서 연약한 인간은 늘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여신이 그를 보호한다. 물과 음식을 주고, 말과 글을 알려주며, 모성의 사랑을 나눠준다. 작품에서는 도돌라가 술탄의 후궁이 되고, 다시 술탄의 미움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도돌라를 살리는 건 '잠'이다. 잠은 신이자 어머니, 누나이기도 한 도돌라를 잃고 고난의 시간을 보낸다.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스스로 거세하고(하지만 완벽한 거세가 아닌 걸로 보인다), 다시 만난 도돌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려 한다. 도돌라가 '잠'에 집착하는 건 어린 아이를 자기가 직접 키웠기 때문인데, 자신이 임신해서 낳은 아이에게는 오히려 냉담한 모습을 보이는건, 그 아이가 술탄의 아이이기는 해도 자신이 원치 않았던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도돌라는 나중에 자신의 냉담함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는다. 도돌라와 잠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날 때의 시간은 16년이지만, 이 작품에서 시간의 흐름은 두 사람의 나이보다는 사막이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하고, 작은 마을이 거대한 도시로 바뀌며, 고층 빌딩이 무수하게 들어서는 문명의 변화로 느낄 수 있다. 신화 속 주인공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결국 도시에서도 빈민이자 노숙자의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나마 '잠'이 노동자로 일해 번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데, 도시에서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시를 떠나 새로운 곳을 찾아나선다. 이 작품이 놀라운 점은, 서사의 독특함과 함께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인위적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만화를 그릴 때 패턴, 배경, 효과 등을 위해 많은 만화가들이 톤을 쓰는데, 크레이그 톰슨은 오로지 펜과 붓선만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특히 섬세한 문양과 패턴이 많이 들어가는 작품이어서 이것을 오로지 펜과 붓으로만 그리려면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가는데, 작가는 끈기 있게 자신의 손으로만 작업을 한 것이다. 이런 노력이 있기에 뛰어난 작가의 작품이 더욱 돋보인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만화가의 여행
    제목 : 만화가의 여행 작가 : 크레이그 톰슨 출판 : 미메시스 크레이그 톰슨이 2004년 3월 5일부터 5월 14일까지 프랑스, 스페인, 모로코를 여행한 기록을 담은 작품이다. 작가도 밝혔듯이 이 작품은 작가의 정식 작품이 아닌, 새 작품이 나올 때까지 독자들을 위해 만든 '간식' 같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여행기는 훌륭하다. 작가 자신의 사사로운 기록이지만, 그가 보고, 듣고, 먹고, 마시고, 경험한 이야기는 보편성을 갖는다. 작가는 그의 작품 '담요'가 크게 성공하면서 유럽의 출판사에서 출판이 이루어지고, 출판사의 초대를 받아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게 된다. 그 가운데서 주요 무대인 프랑스, 스페인, 모로코에서 지낸 나날을 그림 일기처럼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실린 그림은 작가가 온전히 기억에 의존해 그린 것이라고 밝혔다. 즉 카메라를 가자고 다니지 않았다는 말인데, 이 작품의 그림을 보면 그 장면, 구도, 묘사가 기억만으로 그린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고 뛰어나다. 작가는 프랑스에서 며칠 머물며 신문과 라디오 방송에서 인터뷰를 하고, 사인회를 한 다음 그가 가보고 싶었던 모로코로 가서 약 한달 정도를 머문다. 모로코에서 있었던 일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그는 열린 마음으로 모로코의 사회와 사람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모로코는 가난한 나라여서 외국인 여행자에게 어린이들이 달려들어 구걸을 하거나, 가이드를 해준다면서 쇼핑을 강요하거나 공공연히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혼자 왔지만 모로코에서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나 함께 지내기도 하고, 유럽에서 온 다른 여행객들과도-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친하게 지낸다. 작가는 날마다 스케치북에 풍경과 사람을 그리고, 일기처럼 기록을 남긴다.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고, 자기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작가는 어지간하면 이런 부탁을 들어주지만 이미 손에 관절염이 생겨 오래 펜을 쥐고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작가는 모로코에서 약 한달 가까이 지내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작가가 만나는 사람들은 같은 일을 하는-그래픽 노블-작가들이나 출판사 관계자들이 대부분인데, 이 작품에서도 유명한 그래픽노블 작가들이 많이 등장한다. 크레이그 톰슨이 언급한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는 것도 큰 재미가 될 것이다. 프랑스에서 싸인회, 인터뷰, 출판기념회 등을 하면서 친구와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어울리며 편안하고 따뜻한 나날을 지내던 작가는 스페인으로 간다. 그곳에서도 작가의 작품 '담요'가 번역 출판되어 만화박람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역시 싸인회, 인터뷰 일정이 여럿 잡혀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스페인에서의 추억을 특별하게 그리는데, 가우디의 사그라다 피말리아를 비롯해 가우디의 건축물들과 바르셀로나의 공원, 시내를 돌아다니고, 박화박람회에서 만난 동료 만화가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작가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데, 우연히 만난 여성과 짧지만 강렬한 사랑을 경험한다. 이런 내용은 만화적 장치일 수도 있지만 그의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은 사실적이다. 이 작품이 주는 의미는, 작가가 여행을 하면서 날마다 그림 일기를 꾸준히, 성실하게 그렸다는 사실이 아니라, 작가의 시각이 남다르다는 걸 느끼는 데 있다. 작가는 분명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훌륭한 작가일수록 그런 남다른 시각은 독특하고 개성 있게 표현한다. 크레이그 톰슨 역시 평범한 나날의 일기를 기록하면서도 그것이 작품이 되도록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이 진정한 '프로'임을 입증한다고 본다. 작가가 그린 그림을 보면, 밑그림을 하지 않고 곧바로 붓펜으로 선을 그려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밑그림 없이 한번에 그린 그림이라면 그 공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작가가 줄곧 손의 관절염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불과 30대의 청년이 펜으로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렸으면 관절염까지 오게 될까를 생각하면, 뛰어난 작가가 된다는 건 타고난 재능과 함께 다른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노력과 훈련이 바닥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담요
    제목 : 담요 작가 : 크레이그 톰슨 출판 : 미메시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까지 작가의 가족, 종교, 학교, 친구들 그리고 우연히 만났지만 주인공의 영혼을 따뜻하게 보듬었던 레이나와의 만남까지를 사실적으로 그린다. 처음 이 만화를 보고 느낀 감정은 주인공의 이기적 태도에 약간 짜증이 났던 기억이 있다. 여전히 주인공의 태도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그렇게 행동하기까지 그의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에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련 없이 부모를 따라 교회에 다녔고, 교회에서는 아이들에게 죄의식만 심어주었다. 이 만화에서도 그렇듯, 어린이가 종교의 일방적 세례를 받으면 정서적으로 피폐하며, 잘못된 생각을 주입당해 밝고 건강한 어린이로 자라지 못한다. 어린이를 종교의 굴레를 씌워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키우려는 부모의 어리석음과 무지는 결국 가족 모두에게 불행하다는 걸 잘 보여준다. 주인공은 학교에서도 힘센 학생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학교도, 집도 편안한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학대를 당하며 자란 것은 아니다. 그의 부모는 엄격하긴 해도 육체적 학대를 하지는 않았고, 학교에서도 힘센 아이들이 괴롭히긴 했어도 심각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은 오랜동안 종교의 특정한 이념에 노출되었고, 종교에서 말하는 '죄악'의 개념 때문에 자유로운 인간으로 성장할 기회를 빼앗겼다. 주인공은 고등학생이 되어도 생활에 변화가 없었다. 재미 없는 학교에 다니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고, 알 수 없는 죄의식과 답답한 나날을 이어가던 주인공은 여름 성경캠프에서 여학생 레이나를 만난다. 캠프에서 알게 된 둘은 캠프에서 돌아와 서로 편지를 나누고, 전화도 하면서 서로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마침내 부모의 허락을 받고 레이나의 집에서 두 주일을 보낼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은 부모님의 차를 타고 위스콘신과 미시간주의 경계에서 만난다. 위스콘신과 미시간 사이에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미시간 호수가 있다. 작가도 어린 시절 미시간주의 트래버스시티에서 태어났으니 미시간과 인연이 있었다. 주인공은 레이나의 집에 도착하고, 레이나의 가족과 인사를 나눈다. 레이나의 부모는 이혼을 준비하고 있어서 집안이 어수선하다. 레이나의 언니는 일찍 결혼해 집 근처에서 따로 살고 있고, 집에는 레이나의 오빠와 언니가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입양을 했는데 장애를 가졌다. 이 작품은 3분의 2는 레이나의 집에서 지낼 때의 추억을 그리고 있다. 두 주인공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도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부모의 종교적 편견 때문에 어린 시절을 죄의식과 공포, 두려움 속에서 자란 두 사람 모두 종교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도 같았다. 레이나의 부모는 아직 법적 이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레이나의 아버지는 따로 나가서 살고 있었다. 그래도 날마다 장애가 있는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역시 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 목재소에서 일을 한다. 레이나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장애가 있는 언니를 돌봐야 하고, 일을 하는 어머니 대신 집안 일도 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 주인공과 레이나는 짧은 시간을 내서 데이트를 하고, 산책을 하고, 눈쌓인 산에 올라 순수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시기가 마침 겨울이고, 그들이 살고 있는 위스콘신과 미시간은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마을은 항상 눈이 쌓였고, 눈도 자주 내렸다. 세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는데, 이건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어쩌면 의도했던-은유이기도 하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그들의 관계를 의미한다. 순수한 청년들의 마음, 순수한 사랑, 그들 둘만의 순수한 시간, 시끄럽고 불안하며, 일상의 시끄러움과 더러움으로부터 떨어져 깨끗하고 순수하게 둘만의 시간을 갖는 공간을 상징한다. 두 사람은 두 주일동안 함께 지내면서 친구이자 연인으로 가깝게 지내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처럼 덤덤한 시간들도 보낸다. 크레이크는 레이나와 함께 지내는 시간 속에서도 레이나와 둘이 집에 있을 때와 밖에 나와서 카페에 갔을 때나 집에서도 레이나가 집안 일을 할 때 느끼는 감정이 사뭇 다른 것을 느낀다. 크레이그는 레이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레이나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는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이어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이고,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도 낮고, 미래가 불투명하며, 집안의 형편이 복잡하고 가난해서 삶이 힘들고 괴로운 현실이다. 레이나는 특히 장애가 있는 언니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더 피곤하다. 크레이그와 레이나가 함께 한 두 주일이 지나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두 사람은 전화로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고, 크레이그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레이나와 함께 했던 모든 추억을 불에 태워 재로 만든다. 레이나에게 전화해 이제 인연을 끝내자고 말한 것도 크레이그였다. 레이나의 보이지 않는다. 레이나도 아마 예상하고 있었을까. 레이나의 반응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크레이그의 태도가 이기적으로 보인다. 크레이그는 스무 살이 될 무렵 집에서 나와 독립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집에 들르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는 집의 다락에서 비닐봉지에 담긴 담요를 발견한다. 그 담요는 크레이그와 레이나가 처음 만났을 때, 레이나가 크레이그를 위해 미리 준비한 선물이었다. 레이나가 여러 천을 짜집기해서 만든 담요는 정성을 많이 들인, 아름다운 담요였다. 레이나와의 추억이 담긴 모든 물건을 불태웠지만 담요만은 보관하고 있었다. 크레이그는 집을 떠나 도시(뉴욕)에서 생활하며 스무 살 이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고, 교회에서 금기했던 책들을 엄청나게 읽었다. 크레이그는 동생 필의 결혼식 때문에 집을 방문하고, 다시 몇 년이 지나 크리스마스 연휴에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때까지 온전하게 가족들은 잘 살고 있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며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때, 그는 혼자 눈 내리는 집 주변을 산책하며 과거의 삶을 돌아본다. 물론 레이나와의 특별한 추억도 함께.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작가의 다음 작품인 '만화가의 여행'에서, 옛날 여자친구와 통화했다는 내용이 가끔 나온다. 그 여자친구가 이 작품의 주인공인 레이나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 문화
    • 만화
    2021-11-15
  • 수중용접공
    제목 : 수중용접공 작가 : 제프 르미어 출판 : 미메시스 잭은 수중용접공이다. 그의 아내는 곧 출산을 앞둔 임산부로, 잭이 바닷속으로 들어가 특수용접을 해야 하는 현실을 걱정한다. 잭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고, 늘 해오던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일하러 나간다. 해안에서 멀지 않은 바다 위에 세운 구조물(시추선)의 물속 기둥에 균열이 생기면 용접공이 들어가 보수작업을 하는데, 물속에서 하는 용접은 특수용접이고, 산소통을 메고 헬맷을 쓰고 하는 일이라 육체적으로 몹시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수중용접에는 건식과 습식이 있는데, 잭이 하는 수중용접은 습식으로 건식에 비해 간편하고 설비비가 싸며, 응급처치를 할 때 활용한다. 수중 아크용접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일이 위험해서 임금이 높다. 한국에서는 하루 임금이 100만원에 가까울 정도라고 한다. 잭이 수중용접공으로 일하는 것도 임금이 높기 때문이고, 일을 적게 하고 아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위험해도 잭은 이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잭은 용접을 하다 갑자기 어디선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바닥에 놓여 있는 회중시계를 발견하고 그걸 집으려다 정신을 잃는다. 잭이 눈을 뜨자 그의 동료들이 그를 걱정스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소를 공급하는 장치가 고장나서 산소 공급이 끊겼고, 잭은 질식해서 기절한 것이다. 다행히 그의 동료가 일찍 발견해 끌어올렸다. 의사는 잭에게 정밀검사를 받고 당분간 일을 하지 말라고 권유하지만 잭은 당장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결국 잭은 집으로 돌아오고, 임신한 아내는 안심하지만, 잭은 목욕을 하다 환각을 본다. 피곤했던 잭은 아내와 잠이 들고, 그는 꿈을 꾼다. 어린 잭은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바닷가로 간다. 아버지는 침몰한 배를 인양하는 개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의 꿈은 바다에 가라앉은 보물선을 찾는 것이다. 잭이 10살이던 때, 아버지는 잭을 데리고 바다로 나와 보물을 찾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서는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나이 33살이었고, 시간이 흘러 잭이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잭은 엄마를 만나보러 가고, 만삭의 아내는 오후에 잭과 함께 조산사를 방문할 거라고 이야기한다. 엄마를 만난 잭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그가 찾는 회중시계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집으로 돌아오다, 바닷가에 앉아 잠깐 과거를 회상하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잭은 화난 아내에게 심한 비난을 받자 편지를 쓴 뒤 집을 나가 시추선으로 돌아간다. 그는 바다 밑바닥으로 내려가 회중시계를 발견하고 다시 시추선으로 올라오지만, 시추선은 망가져 있고,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그는 현재의 자신과 어린 시절의 모습을 오가며 현실과 과거의 기억이 뒤섞이며 혼란을 일으킨다. 그는 단골 술집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받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잭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잭은 아내가 사라진 걸 발견하고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시추선으로 돌아가 바다 밑으로 들어간다. 그가 깊은 바다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자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고, 아버지가 건네주는 회중시계를 받아들고 아버지와 진심으로 화해한다.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잭을 구하러 내려온다. 잭은 물속에서 정신을 잃어가며 앞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을 환각으로 본 것이고, 그가 환각 속에서 만난 아버지와 엄마, 아내 수지와의 대화와 갈등은 잭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마음의 번뇌였다. 이 작품은 한번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해는 하지만, 잭의 갈등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찬찬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잭의 행동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출산을 앞둔 아내를 지켜줘야 하지만, 잭은 자꾸 바다로 들어가려고만 하고, 이미 오래 전 죽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집착한다. 잭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삶을 들여다보자. 잭이 열 살 때 그의 부모는 이혼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 따로 살면서 일주일에 한번 잭을 만나러 왔다. 부모의 이혼으로 아이가 받은 충격을 잭의 부모는 알지 못했고, 공감하거나 이해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잭은 부모의 이혼으로 받은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스스로 끌어안고 살아야 했으며, 쌀쌀한 엄마와 다정하지만 알콜중독자 아버지 사이에서 마음을 편하게 내려 놓을 곳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어른이 된 잭은 수지를 만났고, 수지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이제 곧 출산을 앞두고 있다. 잭은 임신한 수지보다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기의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고, 아버지라면, 열 살 때, 보물을 찾으러 바다로 들어간 알콜중독자 아버지가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 인해 잭은 깊은 상실감을 갖게 되고, 트라우마가 되었다.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 아들이 열 살이 되었을 때, 잭 자신도 어린 아들을 두고 어디론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잭은 아버지가 된다는 현실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에 사라진 아버지로 인해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이혼으로 갈라진 부모, 사랑이 없었던 어린 시절,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등이 혼재된 그의 내면은 분열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모든 감정이 수중용접을 하다 사고가 발생하고,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서 질식해 가는 상태에서 환각과 환상을 보게 된 것이다. 동료에게 구조된 잭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고, 막 출산한 아내와 아기를 본다.
    • 문화
    • 만화
    2021-10-31
  • 내 가족의 역사
    제목 : 내 가족의 역사작가 : 리쿤우출판 : 북멘토 중국 만화가 리쿤우의 작품.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중국의 그래픽노블이 한국에 소개된 경우가 적어서 유럽의 그래픽노블보다는 찾아 읽기가 쉽지 않다. 이 작품은 한 중국인이 발견한 귀한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잔학함과 중국인의 희생이 얼마나 참담했던가를 밝히는 내용이다.작가 리쿤우는 (나는 잘 모르지만) 중국에서 유명한 만화가로 알려진 인물이라고 한다. 리쿤우는 1955년에 태어나 중국군으로 복무한 다음, 신문사에 입사해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지금은 만화창작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은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골동품 시장을 둘러본다. 그러다 어떤 골동품 장사와 손님이 다투는 장면을 보게 되고, 골동품 장사가 말다춤을 하는 가운데 '애국주의 국보'라는 말을 한 것을 주인공이 듣고는 골동품 장사에게 그 물건이 어떤 물건이냐고 물어본다. 골동품 장사는 '청일전쟁'에 관한 그림 자료라고 말하고, 주인공이 보고 싶다고 말하자 물건을 보관한 창고로 데려가 그 자료를 보여준다. 청일전쟁 관련 자료는 일본에서 만든 것으로 1894년에 만든 한 장짜리 화첩이었다. 주인공이 그 자료를 구입하려 하지만 너무 비싸게 불러 구입하지 못하게 되고, 대신 골동품 장사는 그 자료를 주인공에게 돈을 얼마간 받고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렇게 빌린 화첩을 주인공은 컬러 스캔으로 복사를 하고 돌려준다. 그러면서 골동품 장사에게 사실대로 말을 하고, 나중에 원본을 비싸게 부른 값을 다 주고 사겠다고 말한다.골동품 장사는 그 자료보다 훨씬 더 귀한 자료가 있다고 주인공에게 말하고, 그 사진 자료를 보여주겠노라고 제안한다. 주인공은 그가 말한 자료가 어떤 자료인지 궁금해서 날짜를 정해 두 사람은 마을 외각의 빈민가로 향한다. 그곳에는 골동품 장사의 스승이 살고 있는데, 옥탑방에서 매우 궁핍하게 살고 있는 노인을 찾아간 주인공은 골동품 장사가 어렵게 꺼내온 화보집을 보고는 몹시 놀란다. 그 자료는 일본군이 '중일전쟁'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으로, 일본군이 중국에서 활약한 내용을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사진집이었다. 주인공은 당장 그 자리에서 카메라로 화보집을 찍고, 찍은 사진을 일본어를 잘 아는 후배에게 보낸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 정리한 사진을 보며 화보에 찍힌 사진의 의미를 살핀다. 그가 찍은 화보를 소유한 노인은 죽어도 그 화보를 팔지 않겠다고 했고, 몇 달의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그 장소에 간 주인공은 빈민촌이었던 마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빌딩이 들어선 것을 알고는 난감해 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역사적으로 특별한 자료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가 발견한 화보집은 '지나사변과 무적황군'이라는 제목의 화집인데, 1939년에 발행한 책이다. 1937년에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중국에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그것을 자신들의 승리의 기념으로 사진까지 찍어서 화보로 만들어 홍보했다.중국에서 '중일전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만화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주인공이 발견한 화보집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정도를 넘어서는 호들갑을 떤다는 느낌이 강했다. 주인공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말한 '지나사변과 무적황군'은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다.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홍보하기 위해 중국 뿐아니라 당시 조선에서도 같은 화보집을 출판했는데, 주인공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대단한 자료를 발견한 것처럼 생각한다. 1939년에 부산일보사에서 발행한 자료로 '지나사변과 무적황군'이 있다. 이 만화에서 대단한 자료로 언급한 바로 그 화보집이다. 그러니 이 만화에서 언급한 자료의 가치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물론 그들 중국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을 수 있다-생각이 들었다.이 만화가 기대 이하였던 것은, 주인공이 발견한 자료의 가치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만화의 절반 이상을 이 화보의 사진을 그대로 실었다는 점이다.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자료가 역사적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서 그 사진을 그대로 만화에 실었다고 생각하지만, 만화의 절반 이상을 사진으로 채우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한다.이 작품을 그린 작가 리쿤우가 중국에서 얼마나 유명하고 위상이 높은 작가인지 알 수 없지만, 만일 똑같은 상황이 한국에서 발생했다면-즉, 한국에서 매우 유명한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절반 이상을 사진으로 채우는 만행을 저질렀다면-나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작가의 안일하고 무능한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을 것이다.솔직히 말해서, 이따위를 만화로 그리고 있는지 한심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화보 사진을 만화의 절반 이상 그대로 싣고는 그걸 자기 작품이라고 출판하는 태도가 용인되고, 또 그것이 마치 훌륭한 작품인 것처럼 포장되는 것을 보면, 중국의 예술 수준이 어떤가를 알 수 있고, 중국의 그래픽노블 수준의 천박함을 알 수 있다.작가는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작품(?)을 만들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만화는 만화도 아니고, 작품은 더더욱 아니며, 추천할 만한 책도 아니고, 만화의 수준도 매우 낮다고 판단한다. 중국사람들에게 이 만화가 의미는 있겠지만, '그래픽노블'로서의 작품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 문화
    • 만화
    2021-10-31
  • 엄마들
    제목 : 엄마들 작가 : 마영신 출판 : 휴머니스트 표지가 기막히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의도를 드러내는 가장 분명하고 좋은 방법은 표지 그림인데,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한국적'인 표지그림은 이 작품이 아마도 최초가 아닐까. 표지 그림은 그 자체로 역설이다. '엄마들'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엄마'라는 따뜻하고 편안하며 행복한 이미지의 추상이지만, 그 아래 두 중년 여성이 서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악을 쓰는 모습은 '엄마'라는 기존의 추상적 이미지를 산산히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바탕의 빨강색은 중년들이 좋아하는 색깔로 알려졌는데, 빨강의 강렬한 색감과 흑백의 인물이 강조되면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드라마틱한 사연을 풀어놓을 거라는 기대를 준다. 이 만화를 그린 작가 마영신은 엄마의 생활을 지켜보다 엄마에게 노트와 펜을 주고 엄마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자기와 친구 이야기를 솔직하게 썼고, 작가는 엄마가 쓴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니 스토리 작가는 마영신 작가의 엄마인 셈이다. 작품 속 주인공은 이소연이다. 중년의 여성이고, 아직 독립하지 않은 아들과 함께 사는데, 자기 이름으로 남은 유일한 재산은 연립주택 가운데 한 채다. 소연은 스무살에 중매로 남편을 만났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길렀지만 남편이 도박에 빠져 집안을 망치고 빚만 늘어나자 소연은 빚을 갚기 위해 평생 가난과 노동에 허덕였다. 그러다 결국 이혼을 하고 지금은 건물 청소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소연에게는 애인 종석이 있는데 술집 웨이터로 일하는 남자다. 종석의 아내는 다단계에 빠져 빚이 많은데다 종석의 동창하고 불륜 관계여서 사실상 이혼한 상태로 생각하고 있다. 소연의 친구인 연순, 경아, 연정, 명옥이 등장학고, 이들은 각자 나름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연순은 남자가 자주 바뀌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간, 쓸개를 다 빼주는 속없는 여자라고 친구들에게 욕을 먹지만, 연순은 순정이 있는 여자다. 연정은 남편이 성불구여서 늘 불만이 가득한데, 애인을 쉽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헬스장에서 만난 남자는 알고 보니 게이였다. 소연은 애인인 종석이 3년 전부터 꽃집 여자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는 종석에게 욕을 하며 헤어지지만 이들의 삼각관계는 이어진다. 꽃집 여자 명희는 소연에게 종석과 헤어지라고 말하고, 소연은 '내 남자와 연락하지 말라'고 카톡을 하다 새벽에 길거리에서 만나 육탄전을 벌인다. 작품 속 엄마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자들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진 그녀들의 모습은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사회적 약자, 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 체제 속에서 억눌린 채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피억압자의 모습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엄마들은 대개 부자도 아니지만 많이 배우지 못한 여성들이어서 자기들의 삶이 왜, 어떻게 망가져 왔는지 깊은 성찰을 할 능력은 없다. 남자(남편을 포함한 애인까지)들이 저지른 일을 뒤치닥거리하느라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면서도 자신보다 남자, 자식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던 여성이 바로 '엄마'다. 하지만 '엄마'도 나이 들면서 자기 욕망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오랜 시간 너무나 많이 참았고, 남자와 아이들에게 시달렸고, 자신의 행복을 유예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춤을 배우고, 나이트클럽과 콜라텍에서 낯선 남자들과 춤을 추고, 애인을 사귀고, 삼각관계에서 질투와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들'의 다른 모습은 '여성노동자'다. 그것도 비정규직의 불안한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한다. 소연은 빌딩 청소를 하는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그곳에는 소연과 비슷한 나이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함께 일하고 있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용역업체의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빌딩에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사무실에는 책상에 앉아 일하는 정규직 사무노동자들이 있지만, 빌딩 청소를 하는 중년의 여성노동자들은 그들에게 거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용역업체에서 나온 관리자의 눈치도 봐야 하고, 같은 처지에 있지만 '반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동료 노동자의 눈치도 봐야 하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여성노동자들도 모두 '엄마'들이다. 이들은 밥도 화장실에서 먹어야 하고, 편히 쉴 장소가 없어 계단이나 비품창고 같은 구석에서 쉬어야 한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해 달라고 소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한 옥자언니는 성추행을 당하고 해고된다. 옥자언니는 여성가족부도 찾아가고 노동운동을 하는 여성도 찾아가지만 실질적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이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용역업체 소장은 반장을 시켜 어용노조를 만들도록 하고, 16명 가운데 12명이 어용노조에 가입하고, 4명이 된 소연과 동료들은 따돌림을 당한다. 소연은 라디오 방송에 나가 일하는 회사에서 부당 노동행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고발한다. 라디오 방송의 파급 효과가 있어 소장은 소연을 비롯해 모두 해고될 거라고 협박하지만 결과는 용역업체와 소장이 바뀌고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남았는데, 소연과 연정언니는 해고된다. 소연은 옥자언니와 다른 업체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 예전 업체에서 반장을 했던 사람이 들어온다. 떡값을 빼돌리다 들통나서 해고되자 우연히 소연이 일하는 곳으로 취업한 것이다. 소연은 삼각관계였던 명희와 친구가 되고, 연순은 만남 어플로 연하의 남자를 만나고, 명옥이는 기자 애인과 계속 만나고, 연정은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고, 경아의 남편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모두들 여전히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50대와 60대 가난한 여성의 삶은 그렇게 구질구질하면서도 끈끈하고, 현실에 충실한 나날을 보낸다.
    • 문화
    • 만화
    2021-10-31
  • 빨간약
    제목 : 빨간약 작가 : 권용득, 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마영신, 한수자 출판 : 보리 작가주의 만화를 지향하는 만화가들의 단편 모음집. 한국에서 '작가주의 만화'는 곧 그래픽노블을 뜻한다. 이 책에 실린 작가들을 보면, 그동안 작가 자신과 사회에 관한 발언(작품)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기획부터 한국사회의 부조리에 관해 만화가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분위기를 표현해 보자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믿는 한국 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부조리, 부패, 악의적 왜곡, 탐욕과 사리사욕으로 뭉친 권력의 남용,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착취와 폭력에 관해 언론, 방송, 지식인들이 말과 글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렇게 만화가들이 작품으로 발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회 현실에 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작가들이 많을수록 창작과 표현의 자유는 커질 것으로 믿는다. 이 작품집은 모두 여섯 명의 작가가 그린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_ 김성희 나의 전교조 선생님_ 김수박 일베는 우리 동무_ 마영신 두 할머니_ 한수자 진짜 간첩_ 김홍모 최선의 선택_ 권용득 김성희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작가보는 세상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부모(기성세대)와 생각이 달라서 갈등을 빚고, 제주도 강정 해군기지 저지투쟁, 용산 철거민 침탈 사건, 종북몰이와 정의구현사제단의 활약 그리고 세월호 침몰 사건을 그리고 있다. 그 많은 사건들과 투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독단과 탐욕 때문이다. 박근혜의 당선 뒤에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독재를 한 박정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고, 독재의 권력 뒤에는 자본의 악랄함이 마치 일란성 쌍동이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김수박의 '나의 전교조 선생님'은 작가가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김동순 선생님을 회고하고 있다. 작가는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강연도 하는데, 마침 교사들 앞에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고, 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김동순 선생님은 나중에 알고 보니 전교조 선생님이었고, 전교조가 불법이라는 정부의 결정으로 교단에서 쫓겨난 김동순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과 친구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잔잔하게 말하고 있다. 마영신의 '일베는 우리 동무'는 작가가 일베 사이트를 폭파하기 위해 만화를 연재하려다 실패한 이야기와 함께, 일베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의 소수 의견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주장한다. 이 만화집의 주제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니까, 불편한 내용을 다루는 것은 당연한데, 일베의 성격을 너무 온건하고 순진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여 작가의 날카로움이 부족한 느낌이다. 일베는 이해나 동정의 여지를 갖고 바라볼 대상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일베에서 패륜을 저지르는 자들이 중학생이든, 초등학생이든 그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교화의 대상일 뿐, 이해와 연민의 시각으로 바라볼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일베가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이야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물론 그 전에도 패륜아들은 존재했지만-패륜을 부추기고, 조장한 권력의 탓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 법의 처벌을 받게 되겠지만, 일베충들에 대한 패륜은 아직도 정당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혐오를 조장하고, 패륜을 저지르는 자들의 반사회, 반민주주의 행위는 강력한 처벌만이 유일한 해결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한수자의 '두 할머니'는 김전숙, 이명신 할머니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두 분은 전쟁 직후 북한에서 내려왔다가 붙잡혀 간첩죄로 감옥에서 10여년을 복역하고 나왔고, 이후 6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살고 있다. 해방된 나라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 겪어야 했던 그 고난의 세월과 감옥에서 견딘 10여년 그리고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시간은 두 분에게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단호하고 묵묵히 자본주의 체제를 견디고 있다. 김홍모의 '진짜 간첩'은 34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남파간첩 비전향 장기수 박종린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그는 1959년 남한으로 내려왔다가 서울에서 조직책임자였던 자의 배신으로 곧바로 정보기관에 잡혔고, 감옥 안에서는 전향공작으로 참혹한 고문을 견뎠다. 남한 정권에서는 '간첩'이지만 그는 조국을 사랑하고, 반제, 반일 활동을 한 애국자였으며, 많은 애국자들이 '간첩'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권용득의 '최선의 선택'은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불법 요소가 있다는 의심을 하는 작가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그 선거에서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고, 불법한 일이 있었을 거라고 의심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그런 의심을 검증할 제도나 권력이 시민에게 없었기 때문에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었고,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결국 탄핵당했다.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선택해야 하는 두 가지 색깔의 약 가운데 하나다. 빨간약과 파란약. 파란약을 먹으면 현실에서 편하게 살아갈 수 있고, 빨간약을 먹으면 '진짜 현실'을 알게 되며 그렇게 되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고난에 대해서는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진실의 약이다. 사람들에게 이 두 가지 약을 내밀면서 선택하라고 하면 '빨간약'을 선택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 문화
    • 만화
    2021-10-31
  • 달리
    제목 : 달리 작가 : 애드몽 보두앵 출판 : 미메시스 스페인의 '천재' 화가로 알려진 살바도르 달리의 일대기를 그린 그래픽노블. 프랑스의 작가 애드몽 보두앵이 그렸다. 그의 그림이 달리의 삶을 표현하는데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초현실주의자 달리의 작품을 모티브로, 작가 보두앵은 달리의 삶을 초현실주의의 작품처럼 표현하고 있다. 달리는 피카소와 함께 스페인이 배출한 현대의 천재 예술가인데, 피카소와는 또 다른 달리만의 특징은, 그가 '미술' 또는 '회화'의 영역에 그치지 않고 영화, 연극(무대), 백화점 디스플레이, 책, 디자인, 광고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전천후 인물이라는 점이다. 달리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가진 재능을 알고 있었고, 스스로를 '천재'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학생일 때부터 이미 전시회를 열면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가 있었는데, 그가 보통의 작가들처럼 한 가지 분야 즉, '회화'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형식과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 동기는 한두 가지 사건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어릴 때 여자가 되고 싶어했고, 스스로 아름답다는 나르시즘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어릴 때 세상을 떠난 형의 죽음에 집착했다. 청소년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청년기에 피카소를 만났다. 그는 무정부주의자, 무신론자를 자처했으며, 한때는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다. 달리는 예술의 흐름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이 초현실주의자가 된 것을 당연한 결과로도 여겼다. 달리는 예술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당대 과학과 철학의 흐름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04년에 태어난 달리는 제1차 세계대전을 어려서 겪었기에 그 참상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에 휩싸인 유럽의 어둡고 비참한 분위기는 그의 정서에 영향을 끼쳤다. 달리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니며 큰 어려움 없이 학교 생활을 했고,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는데, 루이스 부뉴엘 같은 영화감독이 그의 친구였다. 나중에 달리는 부뉴엘과 함께 영화 '안달루이사의 개'를 만들기도 한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할 때, 달리는 그의 연인 갈라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때는 이미 미국에서도 달리는 유명한 작가로 알려졌고, 그는 미국에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친다. 달리의 일대기를 그린 보두앵은 달리의 업적보다는, 그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달리가 어릴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증거들은 많은데, 그가 여장을 한다거나, 청소년기에 또래의 여성 앞에서 나체로 있었다거나, 수음을 자주 했다거나, 기억도 하지 못하는 형의 죽픔에 집착하거나, 죽음의 공포에 민감한 정서 등이 그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독특한 모습들이었고, 보두앵은 달리의 잠재의식과 무의식, 어릴 때 겪었던 정신적 충격 등을 초현실적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두앵의 그림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또한 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 문화
    • 만화
    2021-10-31
  • 좁은 방
    제목 : 좁은 방 작가 : 김홍모 출판 : 보리 잠자기 전에 조금만 읽고 자야지, 생각했다가 끝까지 보게 된 만화. 예전에 작가가 웹툰으로 연재하는 것을 알고 있어서 늘 궁금했는데, 이제서야 책으로 구입해서 읽었다. 주인공 용민은 대학생으로, 학생운동을 하다 경찰에 잡혀 구치소에 갇힌다. 그가 재판을 받고 풀려날 때까지 약 8개월 동안의 구치소 생활을 그린 작품인데, 이 작품은 시대상황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용민이 대학생이던 90년대 중반의 상황은 분명 문민정부 시대였다.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3당 야합이 있었고, 정권은 바뀌었지만 학살자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을 처벌하는데 실패했다. 용민(이자 작가 자신)이 활동하던 90년대 중반만 해도 학생운동은 활발했다. 작품에서도 묘사되고 있지만 학생들의 시위와 경찰백골단의 격렬한 대립으로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여럿 있었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산화한 학생 열사들도 많았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용민이 구치소에 갇혀 감방 동료들과 생활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작가의 선택이긴 하지만, 감옥 생활이 약간 낭만적으로 묘사된 것은 감안하고 봐야 한다. 주인공 용민은 학생운동권에서도 핵심에 속하는 총학생회 부회장이어서 처벌도 더 엄하게 받을 걸로 예상하고 있었다. 용민의 경험으로만 보면, 학생이 경찰에 잡혀와서 폭행이나 고문을 당하지 않은 것은 퍽 의례적이다. 90년대 중반의 사회상황이 80년대와는 많이 달라진 것은 분명하지만,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나 이한열 최루탄치사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80년대 경찰은 잔인하고, 악랄했다. 80년대와 그 이전 시기의 민주화운동, 감옥 생활을 잘 그린 작품이 '나는 공산주의자다'와 '짐승의 시간'이다. 두 작품 모두 박건웅 작가의 작품으로, 비전향장기수, 김근태 의장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들에서 경찰과 정보기관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참혹함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이 작품에서 경찰은 잡혀온 학생들을 폭행하거나 고문하지 않는다. 주인공 용민만 겪은 예외적인 상황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용민과 그의 친구들이 구치소 안에서 생활 개선 투쟁을 벌일 때도 교도관들은 학생들을 달래기만 할 뿐, 그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용민이 깨닫는 건, 그들의 힘이 더 강하고, 정부가 학생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수많은 학생들이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정권의 폭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 시민들의 여론도 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위기여서 정부가 학생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용민은 '사상범'으로 분류되었지만, 강력범들 가운데서도 전과가 많은 사람들이 있는 방에서 생활한다. 용민이 관찰하는 조폭들은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몸에 문신과 흉터가 많은 것을 제외하면, 용민이 생활하는 8개월 내내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낸다. 오히려 범죄자라는 사람들이 학생들을 응원하고, 구치소 생활개선 투쟁을 할 때도 함께 하는 등 학생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 용민도 대학에 들어와서 광주항쟁에 관해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운동권 학생이 된다. 그가 정의로운 사람으로 성장하는 바탕에는 그의 아버지 역할도 컸다. 자식이 어렵게-무려 3수를 하면서-대학에 들어갔는데, 학교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시위만 하고 다니고, 수배자가 되어 경찰에 쫓기는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많은 우리의 부모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자 정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정권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용민의 아버지는 누구보다 자식이 하는 말과 행동을 믿고, 반대하지 않았으며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작품으로, 구치소의 경험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어 특별한 작품이다. 한국처럼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하는 나라는 많지만, 그 경험을 그래픽노블로 생생하게 표현한 작품은 매우 드문 것으로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홍모 작가의 그림이 참 좋다. 작가는 한국화를 전공한 걸로 아는데, 나는 그의 그림이 퍽 따뜻하고 다정다감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 문화
    • 만화
    2021-09-26
  • 저 하늘에도 슬픔이
    제목 : 저 하늘에도 슬픔이작가 : 이희재출판 : 청년사 이윤복은 대략 1951에서 1953년 사이에 태어났다. 한창 한국전쟁이던 시기에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 역시 몹시 가난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윤복의 동생은 모두 세 명으로, 순나, 윤식, 태순이가 있다. 윤복이 어려서 엄마가 집을 나갔는데,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가난이 너무 힘에 겨워서였거나, 남편이 폭력적이었거나 두 가지 모두가 원인이었거나 하겠지만, 시간이 흘러 윤복이 쓴 일기가 세상에 알려지고, 윤복이 신문에 등장하고, 그의 일기가 책으로, 영화로 유명해지면서 집을 나갔던 엄마와도 연락이 되는 걸로 알려졌다. 윤복의 바로 아래 동생인 순나도 돈을 벌겠다고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스스로 집을 나갔는데, 윤복의 일기가 책으로 나오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윤복이 국민학교 4학년이던 당시는 1960년대 중반이다. 95%의 사람들이 빈민이어서 가난은 당연하고, 하루 세끼를 다 먹는 집도 드물었다. 설령 끼니를 해결한다 해도 쌀밥이 아닌, 잡곡, 밀가루, 죽 같은 음식들로 끼니를 해결하고, 김치를 많이 넣고 끓인 쌀죽이나 수제비, 양이 많은 국수 등을 먹었다.모두 가난하게 살았지만 이윤복의 집은 특히 더 가난했다. 그의 가족은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거나 이틀, 사흘씩 끼니를 굶을 때도 있었으니 아이들의 배고픔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매우 안쓰럽다.윤복은 집안의 장남으로 소년가장의 역할을 해야만 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목수였으나 몸이 아파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고, 엄마가 집을 나가 사라진 상황이라 정상적인 가정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윤복은 거리에서 껌을 팔아 푼돈을 벌어 끼니를 해결하거나, 돈이 없을 때는 동생 윤식과 함께 집집을 다니며 밥과 쌀을 구걸해 먹었다.다행히 그는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학교 선생님이나 급우들은 윤복의 처지를 알고 도와주었다. 특히 김동식 선생님이 윤복의 처지를 알고는 경제적 도움은 물론, 친구 기자에게 윤복이의 삶을 보도하도록 소재를 제공하고, 윤복이 쓴 일기를 보고 책으로 내는 일에 도움을 주는 등 윤복의 삶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윤복이의 일기가 세상에 알려지고, 그의 일기가 책으로 출판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덕분에 윤복의 가정은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윤복 자신에게도 학업을 지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다. 윤복은 39세에 병을 얻어 사망하는데, 그가 성인이 된 이후에는 어려서 헤어졌던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 함께 살았다. 짧고도 기구한 삶이었지만, 이윤복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가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일기를 썼다는 사실이다. 글을 쓴다는 건 의식적인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하는 행위다. 더구나 윤복의 처지는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없는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음에도 그가 글을 꾸준히 썼다는 것이 다른 어린이들과 달랐고, 그 일기의 내용이 솔직하고 절절한 자기 감정과 생각을 드러냈다는 것 역시 남다른 점이었다. 누가 윤복에게 일기를 쓰라고 권유한 사람이 있을까도 생각할 수 있지만, 아마도 일기는 윤복의 자발적 의지에 따랐을 거라고 생각한다.윤복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어린 시절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가난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나는 60년대 초반에 태어나서 이윤복과는 약 10년 정도의 터울이 지는데, 윤복의 경험과 많은 부분이 겹친다. 우리집도 매우 가난했고, 가끔 밥을 굶었으며,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벌을 받거나 집으로 돌려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도 친구와 신문을 떼다 거리에서, 버스에서 신문을 팔아본 적도 있고, 점심 도시락을 가져가지 못해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에서 믈로 배를 채운 적도 많았다. 아버지가 무능한 것도 같았지만 다행히 나에게는 엄마가 있었고, 엄마가 일을 해 우리 가족을 먹여살렸다.윤복의 삶을 들여다보면, 나는 고생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모두들 사는 것이 고생이었고, 힘들고 괴로워도 그것을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윤복의 가족은 빈민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사실 빈곤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도 많았으니 그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으리라.이 만화를 그린 이희재 작가는 작품의 주인공인 이윤복과 동년배다. 작가가 어린시절에 우연히 이윤복의 일기를 읽게 되었고, 자기와 같은 나이의 윤복이 겪은 가난의 설움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고 회고했다. 이희재 작가는 퍽 좋아하는 작가인데, 우선 그의 그림이 아름답다. 그의 작품은 아름다운 그림에서 먼저 빛이 난다. 주인공들의 생생한 모습이 살아 있고, 따뜻하고 다정한 그의 선은 슬프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주는 느낌이다.이제는 절대 빈곤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한국이지만, 우리의 이웃들 가운데 극소수는 여전히 윤복이의 가족처럼 힘겹고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가끔 언론에도 보도되는 것처럼, 굶어죽는 사람이 있고, 가난해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는 다수가 굶주림에서 벗어나 먹고 사는 문제가 절대절명의 상황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고, 그늘에서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이 없는가 돌아봐야 할 때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이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이리라.
    • 문화
    • 만화
    2021-09-26
  • 수상한 연립주택
    제목 : 수상한 연립주택작가 : 오영진출판 : 창비 서울 변두리 마을에 있는 낡은 연립주택에는 모두 여섯 가구가 살고 있다. 건물 주인이 바뀌어 새 주인이 이사를 오는데, 세입자들은 건물주인을 우습게 생각한다. 연립주택에서 가까운 곳에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가 집주인 남자이고, 여자는 부잣집 딸로, 남편의 병원을 친정아버지가 차려주었다고 남편을 우습게 아는 여자다.옥탑방에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청산유수로 하는 청년이 사는데, 고시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그냥 백수다. 옥찹 아래 4층에 주인 내외가 살고, 3층에는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박사장 가족, 2층에는 아내가 회사 다니고, 남편인 오공식은 전업주부로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하고, 1층이자 반지하에는 이혼하고 딸과 함께 살면서 유흥업소에서 밴드 마스터로 일하는 남자 강씨와 늙은 개와 함께 사는 장씨 할머니가 있다.이들은 저마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만, 소시민의 삶이 대개 거기서 거기라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잘 참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집주인은 이 연립주택을 허물고 새로 건물을 지으려 한다. 집주인과 세입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힘으로 밀어부치던 집주인은, 조물주보다 위라는 건물주의 위세가 전혀 먹히지 않자, 세입자를 회유해 '문화통치'를 시도한다.그 와중에 집주인 여자는 옥탑방 청년과 바람이 나고, 어느날 이 지역 일대가 재개발지역으로 발표되면서, 집주인이자 '항문외과' 원장인 의사는 마침내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꿈도 잠시, 연립주택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사는 비둘기가 희귀한 종이어서 그 지역이 재개발지역에서 제외된다는 구청직원의 말을 듣고, 집주인 의사는 특단의 조치를 마련한다. 그것은 새를 잡아먹는 뱀을 몰래 들여와 나무에 풀어놓자는 계획인데, 그 계획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된다.이야기는 좀 황당하지만, 집주인과 세입자들의 이야기는 사실적이고 생생하다. 옥탑방에 사는 남자는 고시공부를 하지만 그는 이미 7년째 시험에서 떨어졌고, 앞으로도 시험에 붙을 확률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는 백수다. 하지만 외모가 번듯하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은 좋다. 시험에 합격하진 못했어도 그동안 읽은 책이 있어 법에 관해 잡다한 지식이 많다. 그래서 집주인이 하는 말을 법률적으로 반박하기 때문에 집주인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집주인 여자가 이 청년에게 반한 것도 이유가 있다. 연하의 남자이고, 외모도 잘 생겼으며, 말도 청산유수로, 교양 있는 말만 하기 때문이다. 청년은 집주인 여자를 누님이라고 부르고, 그 여자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옥탑방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반지하에 살고 있는 고3 학생 강희인데, 유흥업소 밴드마스터로 일하는 강씨의 딸이다. 모두들 사연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비극적인 사연의 주인공은 반지하에 사는 장씨 할머니다. 장씨 할머니의 아들이 이 연립주택을 짓는 공사장에서 일하다 사고로 죽었고, 그 보상으로 반지하 방을 하나 얻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씨 할머니는 집주인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낡은 연립주택의 운명은 필연적으로 헐리게 되어 있다. 다만 그때가 언제일지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마침내 그때가 오고, 연립주택은 재개발로 인해 헐리게 된다. 한 건물에 살며 이런저런 인연을 맺어오던 이웃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집주인 남자만 행방불명이 되고, 이야기는 미스터리를 남긴 채 끝난다.오영진은 이전에도 독특한 소재로 만화를 그리곤 했는데, 그의 그림은 개성 있다. 그의 작품이 그래픽노블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퍽 아쉬운데, 작가에 관한 평가가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은 작가 자신의 경험과 함께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실성과 유머, 공감을 함께 보여주는 내용이어서 읽는 즐거움이 있다.
    • 문화
    • 만화
    202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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