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2-26(토)

문화
Home >  문화

실시간뉴스
  • 스페인 내전
    [책] 스페인 내전 - 갈라파고스 많은 경우, 한 권의 책을 읽으면 그 책은 마치 하나의 씨앗처럼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치고 열매를 맺으며 연쇄적으로 퍼져나간다. 갈라파고스 출판사에서 나온 '스페인 내전'을 읽으면서 다른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게 된다. 이 책은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스페인 내전에 관한 내용을 다룬 책이다. 알라딘 서점에서 '스페인 내전'으로 검색하면 쓸만한 책은 앤서니 비버가 쓴 '스페인 내전'(교양인)과 갈라파고스에서 출판한 '스페인 내전'이 있을 뿐이다. 애덤 호크실드가 쓴 '스페인 내전'은 앤서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과는 각도가 약간 다르다. 앤서니 비버가 '통사적'으로 접근했다면 애덤 호크실드는 미국 출신의 자원병들에 관해 보다 깊이 있는 서술을 하고 있다. 미국인으로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가한 국제주의자들 가운데 생존자를 만나거나 그의 친구, 가족, 지인들을 만나 인터뷰 하고, 그들이 남긴 자서전, 회고록, 전기를 비롯한 출판물들을 찾아서 미국인들이 스페인 내전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싸우다 죽었는지를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작업들이 조금 더 일찍 시도되었다면 보다 생생한 증언들을 들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 군인을 다룬 이야기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같은 최근의 수작들은 물론이고 이미 70년대부터 헐리우드에서는 수 많은 전쟁영화를 만들면서 미국 군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얼마나 영웅적으로 싸웠는가를 널리 알리고 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은 스페인 내전에 관한 한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그곳에 가서 공화파를 위해 싸웠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듯 하다. 그나마 헤밍웨이가 직접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경험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를 써서 널리 알린 것이 거의 유일할 정도로 미국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미국인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진보적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 여러 나라에서 몰려 온 국제여단 사람들의 구성은 출신이나 신분에 전혀 상관없이 그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막 세계경제공황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자본의 악랄함과 잔인함을 몸으로 느낀 사람들이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기운이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자본의 힘도 강력하지만, 그에 반발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념 역시 그에 못지 않게 강력한 기운을 발산하던 때, 스페인 내전은 제국주의화 하는 독일로 대표되는 자본과 파시즘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동양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했고(중일전쟁),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으며, 일본은 이미 동남아시아를 침략해 식민지를 확장하고 있던 시기였다. 미국에서는 1929년 촉발한 경제공황으로 자본의 수탈로 인한 노동계급의 착취가 극심하던 시기였는데, 이때 미국언론에서는 '사람들이 빌딩에서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렸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이 바로 '자본(가)'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언론과 권력은 숨기고 있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배한 독일과 주변 승전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전후 보상금 문제를 비롯한 승전국의 요구에 독일 국민은 파시즘의 출현으로 대답했다. 유대인과 관련한 사안이 파시즘의 대두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럽 전역에서 당시 유대인을 핍박한 것은 단지 히틀러 정권만이 아니었고, 유럽인 대부분이 유대인에 대한 경멸과 분노의 감정을 보이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현대 사회에서 최초의 '이념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스페인의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왕당파를 비롯한 수구집단-왕정 옹호론자, 가톨릭 집단, 자본가, 군부, 부르주아 등-은 공화파와의 권력 다툼에서 근소한 차이로 진다. 수구집단은 군부를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하는데, 이미 수십 차례의 쿠데타가 실패한 상황에서, 프랑코는 스페인에서 쫓겨나 모로코에 있다가 군대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킨다. 프랑코를 지원하는 세력은 스페인 내부의 수구집단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 등 주변 국가도 노골적이지는 않아도 공화파를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프랑코 군부를 지원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는 것을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는데,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던 1936년 무렵에 이미 히틀러는 독일을 장악하고 유대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자기들의 새로운 무기를 실험하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많은 무기와 군인을 지원했으며, 이 시기를 통해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켜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불간섭 원칙을 지켰는데, 그 이유가 미국 내부의 보수집단-자본가, 가톨릭 세력-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런 불간섭 원칙이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의 패배에 중요한 원인이 된다. 쏘련 역시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페인의 공화파를 지원하지 않았는데, 독일과의 불가침조약 등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스탈린의 의도는 자신의 집권 초기 쏘련 내부에서 정적들을 굴복시키고 숙청을 감행해 자신의 권력 기초를 다지기 위한 계산이 내포되어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은 이런 세계적 정세를 모르지 않았지만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수구집단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패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서 자원한 국제여단 참전군인은 약 7천 명 정도이고 그 가운데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은 약 2천5백 명 정도에 이른다. 내전에서 패배한 인민전선은 내부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공산당과 무정부주의자 그룹, 마르크스통일노동자당(POUM) 등 주요 세력들이 각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략을 다르게 구사하고, 일사분란한 연대를 이루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여기에 각 정파들이 이념에 따라 다른 전략을 세우고, 갈등을 일으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스페인 공산당은 쏘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스탈린의 요구를 들어야 했는데, 그것이 무정부주의 집단에게는 심각한 폭력이었다. 스페인 정부의 공식 권력은 인민전선, 무정부주의 집단에서 가지고 있었지만 스페인 공산당은 조직되어 있고, 쏘련과의 연계로 내전에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쏘련의 스탈린이 스페인 내전을 지원하지 않으면서 스페인 공화파 내부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결국 세계 정세도 파시즘이 확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점에서 스탈린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으며 공산주의의 국제화 전략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스페인 내전은 공화파가 패배한 역사적 사건이었고 세계 모든 나라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지만, 내전에 참가한 인민전선과 국제여단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자들의 투쟁은 빛바래지 않는 기록으로 남았다.
    • 문화
    • 독서
    2022-02-26
  • 100디스커버리
    [책] 100 디스커버리 나는 과학책 읽기를 좋아한다. 과학과 수학을 다루는 책들은 어지간한 소설보다 재미있다. 책을 본격 읽기 시작하던 70년대 중반부터 시대의 흐름과 함께 나의 책읽기도 변했는데, 초기에는 소설과 기초 교양(철학)이 전부였다면 80년대 중반부터는 사회과학 책들을 많이 읽었고,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과학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본업이 글을 쓰는 것이라 문학과 관련한 책은 시대와 관계 없이 꾸준히 읽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과학책 읽기에 쓰고 있다. 과학과 수학과 역사를 다루는 책은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또한 관념적이고 혹세무민하는 세상 속에서 이성의 불빛을 꺼지지 않도록 하는 연료는 다른 어떤 것보다 과학의 신선한 이론들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으로 기존의 이론을 뒤엎고, 보다 날카롭고, 보다 정교한 이론으로 탈바꿈한다. 그 과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화의 과정과 매우 닮아 있다. 최근에 읽은 책들도 거의 과학책인데, 그 가운데서 이 책은 앞부분을 읽다 중단했다. 앞부분에서 '도예술의 발달'이라는 제목으로 도자기의 역사가 나오는데, 지은이는 도자기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일본 죠몬 시대의 토기가 가장 오래 되었으며 기원전 1만1천년 전에 일본에서 토기의 역사가 인류 최초로 시작되었다고 썼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직감으로 이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간단하게 인터넷을 검색했다. 요즘은 어지간한 내용이라면 아주 간단하게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검색을 해 보니,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일본 죠몬토기(縄文土器) 일본도자의 역사는 세계 최고(最古)의 토기라고 일컫는 죠몬토기(縄文土器) 에서 시작된다. 죠몬토기의 이름은 오모리카이즈카(大森貝塚)의 발굴로 알려진 E.S.모스가 사용한 Cord marked pottery에서 유래된다. 방사성탄소(C14) 측정에 의하면 최고(最古)의 것은 약 1만2천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만년이상 계속된 죠몬토기는 그 기형의 변화에 의해 크게 6개의 시기구분(초 창・조기・전기・중기・후기・만기)으로 나눠지고, 게다가 지역적으로도 상세하게 편년되어 있으며 한마디로 죠몬토기라고 해도 그 실체는 가지각색이다. 초창기의 두채문토기(豆粒文土器)와 융선문토기(隆線文土器), 중기의 화염형토기(火焰形土器), 후기의 카메가오카식토기(亀ヶ岡式土器), 거기에 중기부터 만기에 걸쳐서 토우(土偶)등이 대표적이다. 죠몬토기는 일반적으로 흙타래를 쌓아 올려 만드는 방법이 채용되어 있으며, 가마를 구축하지 않은 노천가마에 의한 번조방법으로 800~900도 전후에서 구워졌다. 이 내용만 보면, 죠몬토기가 세계 최초의 토기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듯이 도자기의 역사는 중국이 최초다. 중국도자의 시점 중국 도자기는 1만년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8,000-15,430년 전. 원뿔형 솥. 중국 호남성 옥섬암 동굴에서 발굴된 고대의 토기 파편들이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솥은 두께가 아주 두꺼운데, 발이 거칠고 부드러운 흙으로 빚어져 낮은 온도의 불에서 구워졌다. 토기의 흙에는 작은 자갈도 꽤 많이 섞여 있었다.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하면 이런 파편들이 18,000-15,430년 전 것으로 밝혀졌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16,000년 전의 토기보다 더 앞선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양사오仰韶문화기에는 채도(표면에 색깔을 넣어 구운 도자기), 홍도紅陶, 백도白陶가 제작되었고, 용산龍山문화기에는 흑도黒陶가 번성하였습니다. 상商왕조에는 원시청자라고도 불리는 회유도灰釉陶가 등장합니다. 춘추전국시대 말부터 전국시대에는 인문경도(印文硬陶,도장같은 걸로 무늬를 찍어서 나타낸후 질이 딱딱한 도기) 와 회유도가 제작되었습니다. 중국도자기의 역사가 '인류 최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중국도 세계 4대 문명발상지 가운데 하나이니 토기의 역사 역시 인류 최초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다른 지역일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러면 왜 저자는 일본의 죠몬토기를 인류 최초의 토기라고 단정하고 글을 썼을까. 그것은 그가 본 자료가 그렇기 때문이다. 죠몬토기를 세계 최고의 토기라고 했던 사람은 일본 학자가 아니라 미국 학자 모스가 주장한 것이다. 영어로 된 자료를 읽을 수밖에 없었던 저자는 모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여 일본의 죠몬시대 토기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의 토기는 일본 죠몬 시기에 독자적으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신석기 시대 전반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주장도 있다. 상식적으로도 인류의 이동이 중국을 통해 한반도와 일본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토기의 역사 역시 인류의 이동과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일본에서 토기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결국, 이 책은 앞부분에서 과학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주장을 하는 내용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물론 이 책에서 이 부분만 제외하고 다 맞는 내용일 수도 있겠지만, 하나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자 다른 것들도 의심하게 된다. 책의 내용을 번역한 사람도 의심하지 않았고, 편집한 출판사 역시 이 내용을 의심하지 않았다. 원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옮기는 것은 좋지만, 출판사 차원에서 이런 오류는 바로 잡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 문화
    • 독서
    2022-02-26
  • 사소한 것들의 과학
    [책] 사소한 것들의 과학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기계공학과 교수인 마크 미오도닉의 저서. 재료공학을 전공한 공학자답게 재료에 관한 이야기를 과학, 역사, 문화의 관점에서 들여다 보고 있다. 재료공학은 현대과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재료의 다양성과 새로운 재료의 발견과 개발, 재료의 활용에 있어 재료공학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분야지만 인류의 문명을 개척, 개발하는 선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재료공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쉽게 쓴 재료공학 해설서라고 볼 수 있다. 교양과학분야에 해당하므로 책의 내용이 전문적이거나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상식을 배우고 이해하기에는 적절한 수준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모두 열 개의 재료를 다루고 있는데, 각각의 재료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나오겠지만, 여기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1장 불굴의: 강철steel 2장 미더운: 종이paper 3장 기초적인: 콘크리트concrete 4장 맛있는: 초콜릿chocolate 5장 경탄할 만한: 거품foam 6장 상상력이 풍부한: 플라스틱plastic 7장 보이지 않는: 유리glass 8장 부서지지 않는: 흑연graphite 9장 세련된: 자기porcelain 10장 불멸의: 생체재료implant 다행히 여기서 설명하는 재료들 가운데 서너 가지를 빼고는 재료의 역사나 재료의 문화사적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서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각 재료들의 과학적 분석은 흥미롭게 읽었다. 미오도닉은 과학자답게 모든 재료의 기본 구성은 '원자'라고 전제하고 설명을 시작한다. 재료의 변화는 원자 배열의 변화이며, 재료를 가공하면 원자의 구조와 배열이 바뀌게 되고, 서로 다른 재료들의 결합 역시 원자와 원자의 결합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원자 단위의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만지고 사용하고, 활용하는 모든 물성에는 원자 단위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비이성적인 생각을 조금은 덜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즘은 나노 단위의 사업 분야가 눈에 많이 보이는데, 나노는 원자보다 10배나 큰 단위지만 여전히 분자보다는 훨씬 작은 단위다. 지구에서 발견한 원소들 가운데 약 98% 이상을 차지하는 원소는 불과 8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극미량만 존재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흑연과 다이아몬드의 차이는 극적으로 드라마틱하다. 스테인레스 스틸은 강철의 역사에서도 가장 최근에 발명한 재료로,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숟가락, 젓가락부터 매우 많은 재료들이 스테인레스 스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오래 전에 개발되었지만 비용 때문에 상업화되지 못한 유용한 재료로 '에어로겔'이라는 게 있는데, 최첨단의 과학분야에서만 활용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매우 강력한 단열, 방탄 효과를 가지고 있는 이 재료는 대체제가 많이 개발되는 바람에 우리의 일상에서 쓰이지 못하고 있다. 아마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최첨단의 단열, 방탄 재료들이 일반 건축재료로 쓰일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한다. 이 책은 재료의 본질에 관해 잘 설명하고 있지만, 글의 내용과 수준이 조금은 들쭉날쭉해서 어떤 부분은 훌륭하지만 어떤 부분은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다. 아마도 대중의 수준을 맞추기 위해 여러 모로 고려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차라리 조금 더 전문적으로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문화
    • 독서
    2022-02-26
  • 기나긴 이별
    [책] 기나긴 이별 모처럼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마치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소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세계와 인물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소설 뿐 아니라 인문학, 과학 책도 마찬가지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후기 장편소설 '기나긴 이별'은 그의 첫 장편 '빅 슬립'에 비해 훨씬 신파적이다. 필립 말로는 총 한 발 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생만 한다. 그에게 있어 '긴 이별'은 좋아했던 친구일 수도, 좋아했던 여인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가 살아왔던 쓸쓸하고 우울했던 과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은, 지극히 남성적이면서 미국적이다. 그가 영국에서 꽤 오래 살았다고는 해도 주인공 필립 말로가 살고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다. 게다가 이 작품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자적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어서, 그의 일대기를 이해하면 이 소설을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필립 말로가 우연히 알게 된 한 사내는 갑부의 딸과 결혼했지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말로는 그 사내와 가끔 바에서 술을 마시는 정도로 알고 지내다 어느 날, 그 사내의 부탁으로 멕시코 국경 너머로 태워다준다. 그리고 그 사내의 아내가 사체로 발견되고, 그 사내 역시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린다. 평범해 보이는 시작과 달리, 사건은 점차 미궁으로 빠지는 듯 보이면서, 감추어진 사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를 찾았던 사람들이 차례로 자살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유명인, 부자들의 죽음이 발생하면서 삼류 언론의 먹잇감이 되지만, 진실은 십여년 전의 전쟁 당시(제2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소설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거의 마지막 장편소설이기도 하고, 그의 작품 가운데서 '빅 슬립'과 함께 최고의 작품이기도 하다. 길고 긴 이야기지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힌다. 챈들러의 글쓰기는 독백, 만연체로 현대의 글쓰기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이야기의 핍진함은 탁월하다. 그것은 주인공 필립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마치 실제의 삶을 살아가는 듯한 세부적인 묘사 덕분이다. 등장 인물들도 그 지역에서 실제 살고 있는 인물들처럼 등장과 퇴장이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부르주아들의 추악한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그들 사이의 범죄가 많은 부분 돈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치정 살인이 주된 내용이지만 딸의 추잡한 사생활을 감추기 위해 보이지 않는 힘을 쓰는 것이 결국 돈의 힘이라는 것도, 지극히 미국적인 해결 방식이자 돈이 곧 권력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 반전은 독자를 충격으로 몰고 간다. 주인공 필립 말로는 자신의 친구가 멕시코로 도주하고, 그의 아내가 살해당한 시점부터 꽤 오랜 기간 경찰과 폭력조직 사이에서 시달림을 당하며 고생을 하지만 오로지 혼자서 꿋꿋하게 견딘다.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두 사람이 더 죽고, 마침내 사건이 종결되고 자유의 몸이 된 필립 말로를 찾아온 낯선 사내. 독자는 그를 반갑게 맞이할까, 증오할까.
    • 문화
    • 독서
    2022-02-26
  • 암퇘지
    [책] 암퇘지 프랑스 작가 마리 다리외세크의 데뷔작. 첫 작품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특징은 대화가 거의 없는 독백체라는 것과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방식이다. 한 여성이 점차 돼지로 변해간다는 줄거리인데, 인간이 동물로 변해가는 이야기는 꽤 많다. 늑대인간이 그렇고, 벌레로 변하거나, 심지어 진짜 돼지로 변하는(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경우도 있다. '붉은 돼지'에서도 주인공은 어느 순간 돼지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개인)이 인간의 모습이 아닌, 다른 동물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것은 자의적인 선택(붉은 돼지)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카프카의 '변신') 어느날 갑자기 변하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선택일 경우라도 그것은 자신이 살아왔던 시간적, 공간적 원인 때문이므로 순수하게 자발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하나, 인간의 모습에서 다른 동물의 모습으로 변하고 싶거나 변해 버리는 경우, 그 이유가 긍정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즉 자신의 현재 모습(상황)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외면하고 싶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변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분명 자의적 선택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변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라고 하겠다. 여성이 '돼지'로 변신하는 과정은 여성이 놓여 있는 사회적 위치와 존재의 의미를 상징한다. 사회가 여성을 '돼지'로 바라보고 있고, 돼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묻는 것이다. 즉 그런 시선은 온전히 남성의 시각이며, 가부장제와 마초이즘이 원하고 바라는 여성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여성노동자의 이미지는 아닌가 하는 것이다. 향수가게 남성 지배인이 성추행을 해도 참아야만 하는 처지라면, 노동 외에 먹고 살 수 없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수치와 모욕을 감내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같은 인권 선진국에서도 여성의 처지는 약자 가운데 약자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돼지로 변한 상태에서 호텔의 아랍인 관리인의 도움을 받는다. 어떤 선입견도 없이 주인공을 도와주고, 서로 사랑하게 되는 아랍인은 그러나 불법체류자로 경찰에 잡혀가 추방당한다. 부르주아들은 이너써클의 난잡한 섹스 파티를 열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남성이 대통령이 된다. 이곳에서도 여성들은 노리개로만 등장한다. 여성들의 존엄성과 자존감이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돼지의 변신으로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성 작가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여성의 존재에 관한 사회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 소설의 형식이나 줄거리가 참신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소설과 비교할 수 있는 비슷한 소설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두 소설이 '변신'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변신의 과정을 두고 주인공이 드러내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암퇘지'의 주인공은 자기가 왜 '돼지'로 변했는지에 관한 자기성찰이 없다. 오히려 돼지로 변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그것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반면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기가 한 마리 벌레로 변한 것을 깨달은 다음,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주의 깊게 돌아본다. 문학적 깊이와 철학적 의미를 두고 볼 때, 카프카의 '변신'은 인간의 본질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고, '암퇘지'는 시대를 풍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록 번역으로 읽은 내용이지만 두 소설에서 문장, 묘사, 의미 등에서 '변신'이 훨씬 뛰어남을 느끼게 된다. '암퇘지'도 사회의 모순과 현상을 풍자하고 있어 재미있지만 깊이가 부족한 것이 아쉽다.
    • 문화
    • 독서
    2022-02-26
  • 대장정
    소설 대장정 오랫만에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이 책(다섯권짜리다)을 헌책방에서 발견했을 때, 망설임없이 구입한 것은 출판사 이름 때문이었다. 중국공산당 홍군의 대장정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지식이 있었으므로 내심 대단할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며칠 전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내가 가졌던 선입견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소설은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책을 덮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홍군의 대장정이고, 그 결과가 이미 알려져 있어 흥미가 반감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이 소설을 쓴 작가 웨이웨이는 중국 인민을 대상으로 창작을 했으므로 인민들이 '대장정'에 대한 기본 상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즉, '대장정'에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이 소설이 그다지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대장정'에 관한 약간의 상식을 알아두면 좋겠다. ('대장정'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도 소설 자체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거의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대장정'의 실제 코스를 세 번이나 답사를 했다고 한다. 거리만으로도 무려 1만2천km나 되는 엄청난 거리이며, 그 길이 하나같이 험난하고 척박한 땅을 지나가고 있어서 그냥 지나가는 길이라고 해도 힘든 길이었는데, 당시 홍군은 최악의 상황에서 목숨을 내놓고 그 길을 지나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결코 평온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남부에 자치정부인 소비에트를 구축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지만 반공을 기치로 내세운 최대 군벌 장제스(장개석)에 의해 공격을 받아 쫓기게 된다. 당 지도부는 궤멸 직전의 당을 이끌고 남부 내륙에서 북쪽 연안까지 탈출을 하는데, 이 과정이 바로 '중국공산당 노농홍군 대장정'이다. 장제스는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초기 공산당원의 약 80%를 학살했다.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군벌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군사조직이었으며, 중국공산당은 중국 전체 인민의 약 90%를 차지하는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정치조직이었다. 이 소설은 '대장정'의 과정인 약 1년(368일)간의 시간을 압축했으며 거리는 약 1만km에 이르는 공간을 그렸다. 중국공산당의 상징 인물들인 마오쩌둥(모택동)은 물론이고 저우언라이(주은래), 주더(주덕), 펑더화이(팽덕회), 덩샤오핑(등소평), 린뱌오(임표) 등 공산당 지도자들이 등장하고, 홍군의 중간 간부들은 물론 일반 병사까지 고르게 등장한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집단으로, 노동자와 농민, 소수민족의 정치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모든 인민의 모범이 된다. 공산당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이 나이 어린 병사를 대하는 태도는 극진하다. 홍군에서 일방적 명령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동등한 동지로서 단지 직위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데, 기본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동학'이 보여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매우 비슷하다. '동학'도 서양의 침략에 맞서 힘없는 백성들이 뭉쳐 새로운 세상(개벽)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실패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해 약 8만 명의 홍군이 목적지인 연안에 도착했을 때는 90%의 병력을 잃고 불과 7천명만이 남게 되었지만 이 병력으로 마침내 10년의 투쟁 끝에 중국 전체를 해방하는 혁명을 성공하게 된다. 작가는 '성공한 역사'인 '대장정'을 그리면서 크나큰 자부심과 자긍심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 삐딱하게 본다면 중국공산당을 미화한다고 하겠지만, 나는 이 소설이 '대장정'을 미화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 당시의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혁명에 관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고, 인민의 해방을 위한 모범을 보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고결한 품성은 마르크스-레닌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해방의 이론이 혁명의 과정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날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상징하고 있다. 알려진 것처럼 '대장정' 과정에서 홍군은 90%의 병사들이 낙오하거나 국민당군에 포로로 잡히거나 길 위에서 죽어갔다. 전투로 죽은 병사들이 가장 많지만 포로로 잡혀서 죽은 병사들도 몇 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중국의 혁명 과정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진정한 영웅들이다. 마오쩌둥도 대장정을 마치고 대장정 과정에서 죽은 모든 홍군 병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했다. 이 소설이 대단한 것은, 소설만큼이나 훌륭한 그림이 거의 매 페이지마다 있다는 것이다. 그림은 션야오이가 그렸는데, 한컷 한컷에 온 정성을 들여 그 자체로 작품이다. 그림은 아름답고 선명하게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서, 소설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인물과 똑같이 닮은 얼굴이어서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홍군의 '대장정'은 중국의 최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에 견줄 수 있다. 실제 소설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대장정을 삼국지와 비교하기도 한다. 중국의 역사에서 '삼국지'는 단지 소설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훈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중국인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을 낮춰보고 때로 비하하기도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소수의 인원이 결집해 농민과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 결국 혁명에 성공한 뛰어난 힘을 가진 나라이고, 저력이 있는 나라다. 이제는 정치체제는 공산주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라는 조금은 이상한 형태의 나라로 변했지만, 그들이 현대사에서 보여 준 혁명의 과정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고 있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
    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쉬지 않고 한 번에 다 읽었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는 내용이었고, 내가 느끼고, 생각하던 감정들이 글로 표현되어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로서, 작가로서 박정애 작가의 이 소설은 ‘가족’의 의미, 가족이라는 하나의 작은 집단 속에서 개별 존재로 살아가는 부모와 자식의 처지를 지극히 현실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족 소설이나 청소년 소설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중년의 부모와 청소년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고민을 진지하게 묻고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그런 시도를 하는 소설들은 많지만, 대개 교훈적이거나 낭만적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현실이 힘들고 고달프기 때문에 상상의 세계에서라도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현실을 비껴가는 결말은 당장의 슬픔과 아픔을 외면하는 당의정에 불과하다. 이 작품은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다. 중년의 부부와 청소년의 아들과 딸이 가지고 있는 세계는 아마도 비슷한 세대에서 공감할 내용이 많을 것이다. 나는 아들 민수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고 있다. 또한 민수의 아버지 용규의 깊은 마음도 이해하고 공감한다. 결국 정란과 용규는 아들 민수의 꿈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데, 나 역시 이 소설의 내용을 깊이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바로 민수가 자신의 삶을 이미 일찍부터 결정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부모의 모습이었다. 나도 이 소설에서 묘사하는 삶의 일부분과 비슷하게 살았거나 살고 있다. 나는 그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주변에서 드문 경우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이제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학력, 혈연, 지연과 같은 비정상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삶이 아니기를 바라고, 그렇게 될 것으로 믿는다. 따라서, 민수가 학교를 그만두고 일찌감치 시골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하겠다는 생각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또한 민수의 아버지 용규 역시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지만, 퇴직을 하고 치매가 시작되는 아버지를 모시며 농사를 짓고, 농촌에 적응하겠다는 태도도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세대의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은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자식들을 그렇게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다그치는 것도 과거의 경험을 기준으로 자식을 재단하는 것이다. 부모의 불안과 자식에 대한 불신은 부모 세대 스스로가 만든 공포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그들 스스로가 마땅한 대안이나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아이들을 공부기계로 만들어야 안심하는 부모는, 세상을 경쟁과 투쟁의 전쟁터로 만들어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병기를 길러내는 폭력적인 부모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이들은 아무리 어려도 자기 생각이 있고, 청소년이 되면 부모보다 더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그러니 아이들을 믿고, 오로지 격려하고, 응원을 보내는 것만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따뜻한 밥 먹여주고, 때 맞춰 옷 사주고, 아이들이 원할 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좋은 음악이나 책을 권하고(강요하지는 말고), 그저 느긋하게 바라만 봐주면 아이들은 잘 자란다. 이 소설은 아이들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엄마, 아빠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학교에서 고통받는 청소년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세지다. 2016년 객주문학과 창작관에서 박정애 선생님과 보낸 짧지만 따뜻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이렇게 애틋한 작품이 그곳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반갑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뜻밖의 생 - 김주영
    뜻밖의 생 여든의 현역 작가는 드물다. 물리적으로도 여든의 나이는 창작을 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여건임에 틀림없다. 김주영 작가는 비교적 늦게 문단에 데뷔했고, 데뷔한 이후 곧바로 줄기차게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단편이었고, 내용은 풍자와 우화였다. 그리고 몇 편의 통속 장편소설을 쓰고 나서, 작가는 한국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길 작품 '객주'를 집필하고, 그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현재까지는. 물론 작가가 아끼는 작품이 꼭 '객주'가 아닐 수는 있다. 그가 쓴 역사소설은 '객주' 말고도 '화척', '활빈도', '야정'과 같은 작품들이 있고 그 작품들은 모두 기존의 역사소설을 뛰어넘는 작품들이었으니 말이다. 70년대 말부터 쓰기 시작한 역사소설은 '객주'를 이어 한동안 계속되었고, '야정'을 끝으로 더 이상의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 호흡이 길고, 묵직한 주제와 민중의 언어로 기록된 문학이 흔치 않은 한국문학계에서 김주영 작가의 역사소설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놀라운 결과물이다. 대하 역사소설 이후 김주영 작가의 작품들은 다시 문학의 초기 세계로 돌아가는 듯 하다. '아라리 난장'을 비롯해 그가 쓴 2000년대 이후 일련의 소설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단한 삶을 그리고 있다. 또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있는데, '엄마'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엄마'를 읽으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실제의 삶과 똑같지는 않지만, '문학적'으로 채색한 그의 삶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설 '뜻밖의 생' 역시, 작가의 삶에서 얻은 경험과 흔적이 많이 묻어난다. 부모에게서 사랑받지 못한 어릴 적 기억, 박복한 떠돌이의 삶, 외롭고 슬픈 인생, 늘 밑바닥을 전전하는 풍천노숙의 생활, '행복'이 무엇인지 실체를 느낄 수 없었던 나날들, 학대와 비참함으로 가득한 공간.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삶을 살아오면서도 결국 삶에서 일정하게 해탈하는 경지에 이른다. 아무 것도 가져 본 적이 없고, 배운 적 없는 한 사람이 오로지 시간과 경험만을 통해 뼈저린 각성을 한다는 것은 흔치 않지만,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소설만으로 보자면, 이 소설은 '젊은 소설'은 아니다. 주인공들은 과거를 바라보고, 과거에 묶여 있으며,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드라마틱 하지도 않고, 회상으로 일관하는 빛바랜 내용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주인공 박호구는 어릴 때와 이십 대의 과거 외에는 그 이후의 삶은 드러나지 않는다. 박호구와 만나게 되는 여성 최윤서의 삶 역시 드러나는 것은 거의 없다. 그가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그의 신산한 삶에 관한 자세한 묘사는 없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당나귀는 박호구와 함께 어울렸던 개 칠칠이를 말한다. 칠칠이가 보여 준 박호구에 대한 깊은 애정을 잊지 못하고,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박호구는 칠칠이를 찾아 전국을 떠돈다. 그가 찾는 것은 실체로서의 '칠칠이'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일 것이다. 불교에서도 '소를 찾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구도의 길임을 뜻하지 않던가.
    • 문화
    • 독서
    2022-02-06
  • 소송-프란츠 카프카
    소송-프란츠 카프카 은행의 업무대리인 요제프K는 어느날 '체포 당했다'는 통보를 받는다. 살아가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지만, 그는 소송을 해야 하고, 법정에도 출두해야 한다. 소송은 실체가 없지만, 그의 삶을 지배하고, 그는 삼촌의 소개로 변호사를 만나고,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법원의 판사에게 도움을 받으려 한다. 하지만 법원의 실체는 모호하고, 법정은 빈민촌의 다락방에 존재한다.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구조가 역겹고,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송'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좌절한다. 그리고 어느날,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다. 예전에 한 번 읽었고,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전자책으로 나온 것을 다시 읽었다. 새삼 느낀 것은, 카프카의 작품은 여전히 난해하고 몽환적이라는 느낌이다.카프카의 작품 역시 다른 작가들과 같이 '개인의 체험'에 바탕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학적 표현 방식이 여느 작가와 많이 다른 것은, 그의 감수성이 남다르기 때문일 게다.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소송'을 읽다보면 마치 꿈, 그것도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환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둠 속, 그림자, 분명하지 않은 윤곽, 모호한 대화, 독백, 무표정한 사람들, 알 수 없는 시간, 밤과 새벽의 경계 등 작품에서 묘사되는 장면이나 풍경, 시간,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모호하다.카프카는 문학을 추구했지만, 그의 집안에서는 줄곧 문학을 반대했고, 카프카의 결혼도 결국 문학과 결혼 사이의 갈등에서 결혼을 포기하고 문학을 선택하게 된다.카프카는 철저하게 문학 속에서 살았고, 작가를 꿈꿨으며, 작가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는 가족의 기대와 현실의 욕망, 그리고 자신의 꿈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했으며, 그 때문에 요절하게 된다.'소송' 역시 그가 겪었던 갈등과 방황의 결과물이며, 카프카의 약혼과 파혼이 여러 번 거듭되면서, '소송'과 '법정'이라는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다.건조한 문장, 난해한 설명, 불명확한 이미지, 진심을 알 수 없는 대화와 독백, 의심스러운 태도와 적의를 가진 이웃들 등 카프카의 작품은 마치 짙은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카프카의 작품은 삶의 본질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드는 무서움이 있다. 그의 난해함 속에 감추어진 삶의 본질, 인간의 본질은 대개 적대적이고, 쓸쓸하며, 외로운 존재들이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중요한 정체성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낭비와 욕망 - 쓰레기의 사회사
    낭비와 욕망 대도시에 가끔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물질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것이다.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물질이 이제는 필요 이상을 넘어서 사람의 삶을 내리누르는 거대한 짐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는 '과잉'을 주제로 글을 쓰다가 이 책을 발견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내용이 이 책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이 책이 지은이는 '쓰레기'를 중심으로 사회를 읽었다면, 나는 '물질의 과잉'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생각했다. '물질의 과잉'은 필연으로 '쓰레기'를 발생한다. 즉 '과잉 생산'과 '쓰레기'는 분리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양면이며, 지금 인류에게 닥친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잉여'의 생산물은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 정착 생활을 하고, 가축을 기르며 생산력이 높아지는 것과 때를 같이 한다. 즉 한 단위의 씨족이 먹고 남을 정도의 식량이 생산되고, 가축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남을 정도가 되면서 비로소 인간은 잉여의 생산물을 바탕으로 '교환경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화폐로는 조개껍질, 돌 등이 있는데, 초기에는 단순한 물물교환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화폐'를 사용했음을 알수 있다. 이 책의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인류는 18세기까지 '과잉'이나 '쓰레기'라는 개념이 없었다. 즉 봉건제 사회까지의 생산력은 무언가를 지나치게 생산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음을 뜻한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호화한 생활을 하고, 풍성한 식탁에서 다양한 음식을 먹었겠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의 서민은 직접 농사 지은 쌀과 밀, 감자, 옥수수 등을 주식으로 삼았으며 육식의 비율 역시 매우 낮았다. 육식의 경우,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남아 있는 인간의 치아를 보면, 약 15%만이 육식과 관련 있는 치아라고 하니, 인류의 육식 섭취율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잉여 생산물'은 기술의 발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17세기에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시작한 근대적 자본주의 체제는 그 이전부터 전세계를 상대로 유럽의 여러 국가가 달려 든 '원시 자본축적'에 이어 점차 봉건제에서 농노로 살았던 민중을 임금노동자, 임금노예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체제를 가장 정확하게 분석한 마르크스의 '자본'에도 나와 있듯이, '자본'은 이윤을 발생할 때만 존재의 의의가 있기 때문에, 이윤의 발생을 위해 '자본'은 노동자의 '잉여노동'을 착취하게 된다. 여기서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다룰 수는 없으니 생략하고, 자본이 '상품'을 과잉으로 생산하게 되는 것이 '경쟁'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만을 말해 두자. '자본'은 원자재와 기계(및 건물) 그리고 노동자의 노동을 결합해 '상품'을 만들고, 그 상품을 팔아 이윤을 추구한다. 따라서 자본의 이윤추구는 무제한이며, 경쟁 또한 무제한이다. 문제는 자본이 사용하는 원자재가 주로 자연에서 가져오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고, 자본의 무제한 경쟁과 상품생산은 자연 환경을 필연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옛날에는 쓰레기가 아닌 것들이 오늘날에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경우는 매우 많다. 물자가 귀할 때는 아껴쓰고, 재활용으로 쓰고, 고쳐 쓰고, 나눠 쓰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단지 디자인이 바뀌어서, 유행이 지나서, 싫증나서, 더 좋은 제품으로 바꿔서 쓰지 않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은 일부 재활용이 되지만 곧바로 쓰레기로 변해 버려지게 된다.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하필 생산력이 급증하던 시기에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서 지구 자원을 낭비하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과잉 생산하고, 쓰레기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게 된 것인지는 따로 연구해야 할 과제지만, 분명한 것은 물질의 과잉, 자원의 낭비, 쓰레기의 과다 처리는 분명 자본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일회용품을 쓰고 있고, 한 번 쓰고 버리면서 별다른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요즘에는 심지어 한 번 입고 버리는 종이옷까지 나왔다고 한다. 많은 생활용품들이 일회용으로 바뀌고, 그만큼 많은 쓰레기가 나온다는 것은, 어디선가 그만큼의 원재료를 가져와야 한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입고 쓰는 물건이 과연 얼마나 될까. 꼭 필요한 만큼이라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많은 '과잉'의 세상에서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말하는 것은 공상주의자이고, 잠꼬대나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만들고 소비하면서 존재한다. 생산이 줄어들고, 소비가 줄어들면 자본주의는 존립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이 지나친 소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자본주의 체제 역시 옳지 않음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환경운동이니 지구살리기 운동 따위의 구호를 부르짖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물론 그들의 구호가 자본주의 체제에 경고를 줄 수는 있지만, 세상을 바꾸는 근본의 운동은 되기 어렵다. 모든 (상식적인) 시민사회운동-체제를 옹호하는 일부 시민운동을 제외하고-이 올바른 성과를 내려면 자본주의 체제로는 더 이상 바뀔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빈부의 격차는 물질의 과잉, 쓰레기의 대량 배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빈부의 격차가 클수록 물질의 과잉 현상과 쓰레기의 대량 배출은 커지게 마련이다. 부자는 1인당 물질의 소비가 가난한 사람 1인당 물질 소비보다 적게는 수 십배에서 많게는 수 천만 배까지 늘어난다. 이런 상황은 통계로도 나타나는데, 지구 전체에서 상위 0.2%의 사람이 가진 부가 전세계 인구 40%가 가진 부와 같다고 한다. 물질 과잉의 사회라지만, 또 한쪽에서는 여전히 궁핍과 빈곤에 시달리며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연명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린이가 굶어죽는 숫자도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경제선진국에서 비만으로 인한 사망이 늘어나는 반면, 가난한 나라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불평등이 생기는 이유 역시 자본주의 체제가 원인이다. '이윤'과 '경쟁'을 바탕으로 존립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프란츠 카프카의 '성'
    프란츠 카프카의 '성' 카프카의 소설은 난해하다, 어렵다, 이상하다, 기이하다, 등등의 평가를 하는 독자들이 많다. 그럼에도 카프카의 소설은 현대 세계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세대를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재해석,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도 '한국카프카학회'가 있고, 세계 여러 나라에도 카프카의 문학을 연구하는 '카프카학회'가 있으니, 이것만 봐도 학계에서나 문학분야에서 카프카의 문학은 특별한 지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카프카학회'에서는 '솔출판사'와 함께 '카프카전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동안 카프카의 소설과 그의 일기, 편지 등을 읽으면서 카프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려 애썼지만, 그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 정도만 알게 되었을 뿐, 그의 생각을 읽기는 어려웠다. 천재는 단명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에서는 천재 '이상'(김해경)과 카프카를 비교할 수 있을 듯 하다. 두 사람 모두 요절한 천재이고, 불행한 삶을 살았으며, 신비롭고 모호한 작품을 남겼다. 카프카의 거의 모든 작품들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모호함'이다. 해석의 난해함은 곧 모호함에서 비롯한다. 모호함이란 무언가 분명하지 않고,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그 모호함은 소설의 이야기 즉 구조는 물론이고 소설 속 배경, 인물,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까지 모두 해당한다. 나는 카프카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분명 낮에 밝은 곳에서 읽었음에도, 읽고나면 늘 짙은 안개가 드리운 땅거미가 지는 저녁 어스름이나 별이 보이지 않는 한밤중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다. 이 소설 뿐아니라 다른 소설에서도 인물들은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개성을 드러내지 않으며, 감정 표현도 거의 하지 않는다. 외모 역시 마치 얼굴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좀 더 확실하게 느낀 것은, 카프카의 '모호함'이 꿈을 꾸는 듯한, 꿈속에서 보는 공간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소설의 묘사와 꿈속의 장면을 비교하면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늘 피곤한 상태에 있고, 꿈을 꾸는 듯한 장면을 보며, 시간과 공간이 항상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공간의 왜곡은 꿈에서만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한편으로, 이 소설의 해설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카프카가 당시 유행했던 '고딕소설'의 영향을 받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고딕소설의 특징과 카프카 소설의 특징이 많이 겹치는 것이 그 증거다. 카프카는 고딕소설처럼 공포와 두려움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소설 전체에서 흐르는 내면화된 공포는 악마와 피가 등장하는 것 만큼이나 공포스럽다. 카프카의 소설 가운데 그나마 쉽고 재미있다고 알려진 '변신'의 경우만 해도, 어느날 아침에 눈을 뜨니 벌레가 되어버린 주인공의 이야기는 단순한 '우화'가 아니라 가족과 개인의 실존적 문제를 초현실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번에 읽은 '성'은 매우 긴 소설이고, 다른 때 같았으면 중간에 읽다 포기했겠지만, 이번에는 꽤 흥미롭게 읽었다. 대중적 '재미'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지만, 이 소설을 읽을 때,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상상을 하면서, 주인공 K가 보고 듣는 모든 행동이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소설이 비교적 쉽게 이해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위대한 게츠비 - 열린책들 버전
    위대한 개츠비 - 열린책들 최근 페이스북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을 놓고 무수히 많은 주장과 반론들이 오갔다. 어떤 출판사(의 대표)가 예전부터 카뮈의 '이방인', '쌩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분란을 일으켰고, 이 책 '위대한 개츠비'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번역(과 번역자)를 부정하고, 자신(과 출판사)의 번역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과 편협함의 극치를 보이면서, 그것이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의심을 충분히 사고도 남을 만 했다. 나는 그 출판사에서 펴낸 책은 읽지도 않았고(돈이 아까워서) 읽을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 이미 '이방인'에서부터 보여주었던 번역자의 태도와 번역의 품질에 대해 심각한 전문가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고, 나는 그들 전문가들의 의견에 공감했기 때문에 출판사 쪽의 언론플레이가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도 많은 분들이 그 출판사의 대표가 번역하는 내용을 두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번역의 중요성과 심각함을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이들의 선의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듯 했다. 이런 논쟁을 지켜보면서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어볼 생각을 했고, 내가 구독하고 있는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다. '위대한 개츠비'가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 가운데 하나이고, 지금도 미국의 많은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이 소설을 권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미국문학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 소설은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미국의 문학계와 언론에서도 혹평 일색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소설이 새로운 가치로 발견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소설이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개츠비'는 냉정하게 말하면 '삼류 애정소설'에 불과하다. 아무리 우아하게 포장한다 해도, 그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개츠비라는 한 사내가 한 여자를 만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다시 그 여자에게 일편단심으로 다가가다 비극적으로 죽는다는 내용인데, 소설적 개연성도 떨어지고, 이야기의 구조도 상투적이다. 이 소설의 평론이나 영어의 문장, 시대를 묘사하는 깊이는 번역본으로 읽는 한계 때문에 무어라 말하기 어렵지만, 이 소설의 본질만을 놓고 본다면, 이 소설이 '세계문학'에 속할 정도로 수준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들의 이야기다. 미국의 부르주아들은 다 알다시피 독점과 과점을 통해 급격하게 부를 축적했으며, 이 소설의 무대였던 1920년대 미국 노동자의 삶과 비교하면, 1달러로 하루를 사는 노동자들이 있는가하면, 시거를 100달러짜리에 말아피우는 부르주아들이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이 소설의 작가는 '개츠비'라는 인물의 비극적 삶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정작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가장 큰 사회적 현상인 미국 민중 특히 미국 노동자의 삶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소설 속에서 재투성이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여지긴 하지만 그건 그저 스쳐지나가는 풍경일 뿐이다. 위대한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 근본적인 긴장 관계이며, 부르주아의 사치와 허영을 한꺼풀 벗기면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정글'에서처럼 빈민굴에서 살며 쓰레기장 같은 도축장에서 소와 돼지를 잡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난다. 하워드 진이 쓴 '미국민중사'를 모르는 한, 미국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허황된 구호에 매몰될 것이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런 소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이 당대의 미국 부르주아의 허영과 사치를 풍자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딱히 그런 장면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개츠비'라는 남자가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자에게 집착하는 것과 그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이 전부다. 어떤 세계관을 갖느냐에 따라 이 영화는 '순정한 남자의 고통스러운 일대기'일 수도 있고, 썩어빠진 부르주아의 한심한 돈지랄이자 멍청한 사랑놀음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나는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한국에 번역 출판된 리처드 도킨스의 책은 아래와 같다. 이기적 유전자 확장된 표현형 눈먼 시계공 지상 최대의 쇼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만들어진 신 진화론 강의 조상 이야기 악마의 사도 무지개를 풀며 에덴의 강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 리처드 도킨스의 자서전이다. 다행히도, 나는 위에 열거한 책을 모두 읽었고, 책장에 꽂혀 있다. 이 책들은 지금도 틈틈히 읽어보는 책들이다. 자서전은 두 권으로 되어 있다. 1권은 리처드 도킨스의 출생부터 '이기적 유전자'를 쓰기 전까지의 시기를 담고 있다. 알고 보니 리처드 도킨스는 상위 1%에 속하는 금수저였다는 것이 놀라웠다. 리처드 도킨스의 집안을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의 고조 할아버지 시대부터 친족과 친척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보여주는데, 집안이 꽤 유명하고,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존재가 갑자기 부각된 것이 아니고, 이미 그의 아버지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수재였으며, 그의 삼촌 역시 뛰어난 학자였다. 집안 전체가 수재들이 가득하고, 머리가 좋은 우성 유전자들의 집합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리처드 도킨스의 업적이 저절로 생긴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겨우' 옥스포드에 입학했다고 하지만, 옥스포드에 입학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이미 뛰어난 머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의 성장 과정에서 부모와 친척, 친구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그를 동물학자로 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나 자라고, 어릴 때부터 기숙학교에서 생활했다는 것이 평범한 영국인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가 소년 때부터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결국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은, 줄곧 주류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려 두 권짜리인 이 자서전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그가 쓴 저작물들이 훨씬 흥미진진한데, 자신의 이야기는 그저 평범하게 풀어낸 것은 과장하지 않으려는 영국인 특유의 점잖은 태도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2권에서는 그가 쓴 저작물들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가 어떤 기회에 책을 썼으며, 그 책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켰고, 책을 쓰고나서 달라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바꾸려면 책을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살면서 책을 한 권이라도 쓸 수 있는 사람과, 책을 한 권도 쓰지 못하고 죽는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생각을 돌이켜보고, 정리하고, 체계화하고, 구조화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런 능력이 있다는 뜻이니, 그건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책을 쓸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꾸준히 일기를 쓰는 것도 책을 쓰는 것이고, 전문 영역의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 관심 있는 일에 대해 책 한 권 쓰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노릇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세계적인 과학자이고, 그가 이룬 업적이 충분히 인정받고 있지만 그 시작은 바로 책을 쓰고부터였다. 그가 1970년대에 처음 쓴 책 '이기적 유전자'를 쓴 이후, 그는 놀라운 성장을 한다. 만일 그가 책을 쓰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의 리처드 도킨스가 되었을까.
    • 문화
    • 독서
    2022-02-06
  • 러브 크래프트 전집 1-크툴루 신화
    러브 크래프트 전집 1-크툴루 신화 오래 전부터 알았던 애드거 앨런 포와는 달리 러브 크래프트는 최근에야 알았다. 스티븐 킹의 작품은 거의 다-한국에서 번역된 작품들-읽었지만, 정작 러브 크래프트의 작품을 읽은 것은 최근이었으니 공포와 호러문학에 관한 나의 관심 영역은 많이 부족한 편이다. 최근 한국에 번역된 스티븐 킹의 소설 '리바이벌'을 비롯해 그의 많은 작품들이 러브 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으며, 심지어 러브 크래프트의 이 책 '크툴루 신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써보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 그만큼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들은 미국 공포문학은 물론 세계 공포문학의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드거 앨런 포의 전집이 '우울과 몽상'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간되었는데, 그의 소설 전집이 한 권인 반면, 러브 크래프트의 전집은 여섯 권이나 된다. 애드거 앨런 포가 19세기를 살았던 인물이었고, 그가 남긴 작품들이 이제 막 근대로 이행하는 역사의 과정에서 중세와 근대의 흔적을 남겼다면, 러브 크래프트는 애드거 앨런 포의 어깨 위에 앉아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족적을 남겼다. 공포의 근원은 '무지'에 있다는 러브 크래프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과학문명이 발달했다는 현대에도 여전히 '공포'는 존재하는 이유도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을 통해 알아낸 사실은 매우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지식의 전체라고 해야 겨우 작은 촛불 하나에 불과하다고 비교할 수 있다. 즉, '무지'가 거대한 어둠-그 크기를 알 수 없는 어둠-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제 작은 촛불 하나를 켰을 뿐이다. 촛불의 불빛이 닿는 곳의 범위는 매우 좁다. 하지만 불빛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어둠 속에서 새로운 지식과 진리를 찾아낼 가능성을 매우 높인다는 것이 중요하다.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공포'는 많은 경우 작가의 '꿈'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그는 여행도 좋아하고, 많은 책을 읽었으며, 친구들과 무려 10만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았을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의 의식의 다른 면에서는 '공포'라고 부를 수 있는 씨앗이 생겼고, 어느 순간 발아되었다. 이 시기에 지그문트 프로이드라는 정신분석의 대가가 활동을 하고 있었고, 꿈에 관한 그의 해석은 '무의식'을 과학의 범주로 끌어들이는 획기적인 변화의 시기였다. 러브 크래프트는 단편 '데이곤'과 '인스머스의 그림자'의 원형이 자신의 꿈에서 비롯했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에게 '꿈'은 작품의 모티프로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꿈'은 곧 상상으로 발전하고, 상상은 창작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브 크래프트가 공포 소설을 쓰게 되기까지, 그가 꾸었던 '꿈'과 상상의 세계는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 미국사회와 개인적인 경험이 혼재된 결과물이며, 그가 느끼고 받아들인 감정의 변형된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크툴루 신화'는 러브 크래프트 전집 1권의 제목이며, 이 1권에는 모두 13편의 단편 소설이 들어 있다.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데이곤 Dagon>(1917) 2. <니알라토텝 Nyarlathotep>(1920) 3. <그 집에 있는 그림 The Picture in the House>(1920) 4. <에리히 잔의 선율 The Music of Erich Zann>(1921)5. <허버트 웨스트 리애니메이터 Herbert West - Reanimator>(1922)6. <벽속의 쥐 The Rats in the Walls>(1923) 7. <크툴루의 부름 The Call of Cthulhu>(1926)8. <픽맨의 모델 Pickman’s Model>(1926)9. <네크로노미콘의 역사 History of the Necronomicon>(1927)10. <더니치 호러 The Dunwich Horror>(1928)11. <인스머스의 그림자 The Shadow Over Innsmouth>(1931) 12. <현관 앞에 있는 것 The Thing on the Doorstep>(1933) 13. <누가 블레이크를 죽였는가 The Haunter of the Dark>(1935) 러브 크래프트가 글을 쓰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 복구, 미국의 호황과 뒤이어 온 강력한 경제대공황 등 사회적인 혼란으로 사람들이 고통을 겪던 시기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전쟁의 공포와 상처를 안고 살아가다 어느 날, 경제공황이라고 불쑥 시작된 형체도 없는 괴물 때문에 사람들이 빌딩에서 비오듯 떨어지며 죽어가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자체로 이미 '공포'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렁이기 시작했으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거대한 '공포'의 체험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러브 크래프트는 이런 시기에 자신의 꿈과 사회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공포를 뒤섞어 창작을 했던 것이다. 고딕 양식의 공포와 호러를 만들어 낸 것이 애드거 앨런 포라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확장한 것은 러브 크래프트라고 할 수 있다. 러브 크래프트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책, 지역, 나라, 생물체 등-를 창조하고, 우리의 공포가 우리의 일상에서 가깝게 존재하지만, 그것의 기원은 우주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애드거 앨런 포가 풍선기구를 타고 달에 도착하는 정도의, 소박한 우주관을 보여주었다면, 러브 크래프트는 외계의 존재가 지구에 이미 오래 전부터 자리잡고, 인간과 동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특히 장르 소설에 관한 반응이 싸늘하고, 소위 '정통 소설' 쪽에서는 공포, 호러, SF 등 장르 문학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편견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세계의 문학 흐름도 이미 '정통 소설'과 장르 문학의 경계가 사라진 지 오래고, 그것을 일부러 구분하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고 있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세계문학에 끼친 영향을 보라. 애드거 앨런 포의 공포 문학이 남긴 족적은 세계 현대문학의 거대한 줄기가 되었다. 아서 코난 도일이나 아가서 크리스티의 문학을 두고 장르 문학이라고 폄하하는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현대 문학에서 '스티븐 킹'과 같은 공포, 호러의 대가가 세계 문학시장을 석권하고, 데니스 루헤인, 제임스 엘로이, 레이먼드 챈들러 등 하드보일드 소설은 또 어떻게 할 건가. 이런 장르문학들이 이제는 대중에게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문학의 판도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이 한국 독자에게 알려지는 것은 애드거 앨런 포와 스티븐 킹의 중간을 잇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형제 - 위화
    형제 - 위화 오랜만에 세 권짜리 장편소설을 읽었다. 위화의 소설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모옌'의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세 권의 소설 가운데 1권은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를 다루고 있다. 작가인 위화가 이 시기에 어린이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소설 속 주인공도 작가와 나이가 비슷하다. 문학혁명 시기부터 현대까지, 두 형제의 삶을 서로 다른 삶을 그리고 있는데, 소년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는 시기 즉 문화혁명이 끝나가는 시기까지가 이 소설의 백미에 해당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중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광두, 송강이 소년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고, 이광두의 친아버지는 화장실에서 여자들 엉덩이를 훔쳐보다 똥통에 빠져 죽는다. 이는 루쉰이 늘 말해오던 '어리석은 중국 인민'의 상징이다. 즉 근대적 중국인민의 어리석음과 멍청함을 이광두의 친아버지가 똥통에 빠져죽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광두의 의붓아버지이자 송강의 친아버지인 송범평은 중국 인민의 모범이자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육척이 넘는 훨칠한 키에 잘 생긴 외모, 겸손하면서 굳건한 의지 등은 중국 인민이 가져야 할 품성임을 알게 된다. 그런 송범평이 똥통에 빠져 죽은 이광두의 친아버지를 꺼내서 이광두의 집까지 데리고 가서 장례를 치르도록 한다. 이광두의 엄마인 이란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중세의 여성상을 보여주지만, '어리석고 멍청한' 이광두의 친부와 살 때는 주눅들어 살던 이란은 송범평과 새로운 삶을 살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여성으로 변모한다. 즉, 중국 인민의 변화는 인민 스스로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송범평이 문화혁명 시기에 죽음을 당하는 과정을 자세히 그리면서 독자는 감정이 북받치는 경험을 한다. 문화혁명이 비록 모주석이 시작했지만, 그것이 명백한 정치적 실패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송범평은 '지주'이기 때문에 탄압을 당했는데, 사실 송범평의 아버지는 지주였지만 그 시기에 이미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 자신도 빈농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송범평은 중학교 선생으로, 공산당을 지지하고 문화혁명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그려졌는데, 그런 사람을 하루아침에 반혁명분자로 몰아 참혹하게 죽인 것이다. 당시 홍위병들은 대개 젊거나 어린 청년들로, 극좌적 행동으로 중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든 세력인데, 그 세력의 중심에 모주석과 그의 아내 강청이 있었다. 결국 문화혁명의 광풍이 지나가고 강청은 반혁명분자로 재판을 받고 가택연금 상태에서 자살한다. 이복형제인 이광두와 송강은 나이가 어려 문화혁명의 칼날에서는 비껴났지만 그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결국 부모, 친척도 없이 단 둘만 남게 된다. 두 사람은 청년이 되어 공장에 다니기 시작하고, 이광두가 박스공장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 두 형제와 임홍이라는 미인을 두고 벌이는 삼각 관계, 이광두가 고물 사업을 시작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는 과정과 송강이 임홍과 결혼하고, 이광두와 절연하면서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광두의 출세와 송강의 몰락은 중국 현대사를 상징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는 중국의 거대 도시와 시골의 격차, 현대와 봉건이 공존하는 중국 사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병존하는 중국 사회, 그 속에서 이광두와 같은 천박한 자본가들이 돈을 벌어 권력을 갖게 되고, 송강처럼 성실하고 겸손하며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작가는 중국 사회가 지금처럼 변해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인생 - 위화
    인생 위화의 다른 작품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허삼관의 인생관을 자주 떠올리게 되고, 그의 삶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위하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무지랭이 백성이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삶은 어떤 지식인보다 배울 점이 많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역사의 소용돌이가 그치지 않았던 근현대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중국 인민의 삶을 위화는 고통의 바다에서 유머의 배를 띄우는 것처럼 보여준다. 같은 작가로 모옌의 경우, 중국 인민의 삶을 웅장하고 거대한 중국의 역사와 대륙적 스케일로 강렬한 이미지와 함께 보여준다. 마치 인민들이 영웅처럼 역사의 서사를 이루어나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모옌이 보여주는 서사적 역사성을 담보한, 영웅화된 인민의 모습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리고 민중의 힘은 역사에서 늘 영웅적이기도 했다. 반면 위화는 인민의 삶을 개인의 고난과 비극적 삶을 통해 역사를 드러낸다. 너무나 평범해서 자신들이 역사를 바꿔간다는 것조차 모른 채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다수의 인민들은 마치 풀과 같아서 바람이 불면 먼저 눕고, 비가 내리면 피하지 않고 맞으며 삶의 굴곡을 넘는다. 이 소설 '인생'은 화자인 '나'가 어떤 노인을 만나서 하루 종일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그려진다. 논에서 소를 모는 노인은 평범한 노인이지만, 그가 입을 열자 구구절절한 과거의 이야기, 살아왔던 시간의 진한 피눈물이 터져나온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행복보다는 슬픔과 고통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푸구이'라는 노인의 삶을 통해 중국현대사를 살아 온 중국인민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국공합작, 국민당 군대, 중국공산당, 대약진 시대, 문화혁명 등 중국에서 벌어진 굵직한 사건마다 푸구이의 삶은 요동친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원치 않는 군대에 끌려갔다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해방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 소작인이 되어 농사를 짓다가 홍수와 가뭄으로 극심한 굶주림을 겪는 사연, 아들과 딸, 아내를 차례로 떠나보내야 했던 사연은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다만, 위화의 작품이 전작을 포함해 리얼리티와 무게가 조금은 부족하다는 느낌은 있다. 스토리가 약간 작위적이고, 인물들의 성격이나 묘사가 입체적이지 못하다는 아쉬움은 있다. 그런 면에서 위화의 작품은 오히려 영화로 만들어지기에 적절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중국은 여전히 공산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작가들은 공산주의형 인물과 배경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과거가 봉건체제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한 것과,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은연 중에 스며들도록 하는 일종의 의무를 갖고 있다고 보인다. 나는 중국 작가들이 체제의 우월성을 은근히 드러내는 태도가 오히려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했다는 그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며, 북한이나 여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들이 보여주는 탈이데올로기나 극도의 우상화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건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상의 자유'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작가는 자신이 놓인 사회 속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체제에서 살아가든, 체제를 찬양할 수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바람직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것을 두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나 극도의 봉건체제(북한) 보다는 공산주의 체제가 인민에게는 조금 더 나은 환경이라는 것을 중국 작가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보인다. 물론 중국 내부에서는 여전히 경제와 정치가 분리되고, 인민의 삶이 피폐하게 변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고, 공산당의 부패가 심각한 사회, 정치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작품이 낭만적이라는 비판 역시 달게 받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온 더 무브 - 올리버 색스
    온 더 무브 일천한 지식 때문에 아직 올리버 색스의 다른 책을 읽지 못했다. 이번에 처음 그의 책을 읽었는데, 그의 마지막 책이기도 했고,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쓴 책이어서 어떤 면에서는 그의 첫번째 책으로는 오히려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버 색스가 살아 온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로 일했지만 그보다 글쓰기를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글을 끊임 없이 썼으며, 늘 메모지와 연필을 갖고 다녔고, 생각이 떠오르면 어느 장소에서건 메모를 했다. 올리버 색스의 부모님이 모두 의사였고, 그의 형들도 의사라는 배경은 올리버 색스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여기에 올리버 색스가 동성애자로, 그가 살아온 삶이 조금은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흥미로운 인물의 내면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는 신경과 의사로서, 그가 쌓아 온 다양한 경력을 토대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리고 그 책들은 널리 알려졌고, 그의 책과 함께 그의 명성도 높아졌으며,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드는 원작으로도 작용했다. 올리버 색스는 오토바이를 무척 좋아했고, 오토바이를 타고 많은 곳들 다녔으며, 오토바이와 관련해 일가견이 있을 만큼 오토바이를 잘 알았다. 또한 수영도 잘 했고, 바벨도 열심히 들어 신기록까지 세우는 등 육체적으로도 훌륭한 편이었다. 키도 크고, 몸도 탄탄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거의 완벽한 인간이었던 올리버 색스는 내 기분으로 보면 '넘사벽'인 인물이다. 한 사람의 성장이 이렇게 다양하고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부럽고 놀랍다. 한국의 청소년들을 보면,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것 외에 개성 있는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학진학과 취업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왜곡된 현실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하고, 심지어는 한동안 마약에 취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많은 책을 읽고, 사색하고, 글을 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부러웠다. 물론 올리버 색스는 살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모든 일들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딱히 '돈'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고 있는 집과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청소년의 삶을 억압하고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많은 부분에서 무엇이 정말 문제인지 알고 있다. 교육과 취업의 문제는 그것을 강제하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고, 그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착취와 경쟁에서 비롯하고 있다. 이것을 알면서도 바꾸지 못하는 것은 부모 세대의 무지 또는 그 시스템에 대한 동조 때문이다. 올리버 색스와 같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인간의 내면이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 가난해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해 사회 전체가 착취와 경쟁구도를 체계화 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올리버 색스가 이룬 개인적인 성공보다는 그가 누렸던 자유로움이 더 부러웠고 마음에 와 닿았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지금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청소년이라면 재능은 저절로 발견할 것이고, 자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중반까지는 매우 흥미롭게 잘 읽히다가 중반 이후부터는 조금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그가 나이 들고, 업적을 이루고, 더 이상 모험과 자유를 추구하지 않게 되면서부터다. 누구나 한 번 살아가는 인생을 잘 살고 싶은 욕심과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올리버 색스는 성공한 삶을 살았고, 본받을 점도 있으며, 그가 남긴 저술로 그의 이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 지난번 책모임에서 단편 한 두편을 읽고 나서, 요즘 며칠 잠자기 전에 침대에서 틈틈히 다 읽었다. 책모임에서 읽은 단편들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는데,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은 대개 다 좋았지만, 읽으면서 울컥했던 작품은 '열'이었다. 작가의 삶을 대략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를테면 '이상'의 삶을 알고 있을 때와 모를 때를 비교하면, 그의 작품에 관한 이해의 폭이 매우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듯이, 외국 작가라 해도, 그의 삶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작품을 읽거나, 아니면 작품을 읽고 나서라도 작가의 삶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레이먼드 카버가 미국의 '프란츠 카프카'라거나, '안톤 체홉'이라는 비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가 단편소설에서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삶과 거의 일치하거나, 많은 부분 모티브를 가져온 것들이다. 이것은 작가 자신이 한 말이기도 하다. 레이먼드 카버의 아버지는 벌목 노동자였고, 레이먼드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와 함께 벌목 노동자로 일하지만, 그는 조금은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건 바로 글을 쓰는 재주였다. 게다가 그는 너무 일찍 결혼했다. 19살. 게다가 결혼하고 곧바로 아이가 둘이나 줄지어 태어나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젊음이 그냥 시들어버릴 거라고 절망했던 것 같다. 그는 작가캠프에도 참가하고, 글쓰기를 위한 이런저런 준비들을 하면서 작가가 되기 위해 무척 노력을 했는데, 한편으로는 결혼생활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레이먼드는 알콜중독으로 매우 고생을 했고, 어려서 만난 아내와는 나중에 이혼하게 된다. 그가 살았던 삶 속에서 그는 많은 소재를 끌어냈고, 자신의 이야기를 다듬었다. 그의 작품은 짧고 건조한 문장이 특징이고, 고통스럽거나 슬픈 이야기들도 과장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기술하고 넘어가는데, 김연수는 이것을 '더러운 사실주의'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대단하지 않다는 것, 특별할 것도 없고, 힘들고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아주 가끔 즐겁거나 행복한 시기가 있지만, 그것 역시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 삶은 괴롭거나 행복하거나를 생각하기 전에 그냥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내는 것임을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은 말하고 있다. 이 소설집 <대성당>이 더욱 특별했던 것은, 번역을 한 사람이 바로 소설가 김연수이기 때문이다. 소설로도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김연수가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을 깔끔하고 읽기 편하게 번역을 해서 글을 읽는 동안 퍽 즐거웠다. 특히 책 뒤에 붙인 번역가의 말이자, 작가로서 이 작품들에 관한 평론을 실은 것은 레이먼드 카버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남편이 사라지고 나서-두 권의 소설에서
    남편이 사라지고 나서-두 권의 소설에서 최근 읽은 소설 가운데 우연히 남편의 존재에 관한 내용을 다룬 작품 두 편을 읽었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과 마리 다리외세크의 <유령들의 탄생>이 그것인데, 두 작품 모두 어떤 이유에서든 남편을 잃은 여성의 이야기다. '환상의 빛'은 책읽기 모임에서도 읽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작품인데, 20대 중반의 남편은 어느날 기차 선로 위를 걷다 기차에 치어죽는다. 남편의 죽음은 누가 봐도 명백한 자살이었고, 아내이자 주인공 유미코는 남편이 왜 자살했는지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 어린 아이를 둔 유미코는 남편이 죽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바닷가 마을에서 요리사로 일하며 살고 있는 남자와 재혼한다. 두 사람은 잘 지내지만 유미코는 죽은 전 남편의 '자살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질문하고 이유를 알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느꼈던 바닷가에서의 '환상의 빛'을 남편도 어느 순간 봤을 거라고, 그 '환상의 빛'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고, 어느 순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빛이라는 것을 생각할 뿐이다. '유령들의 탄생'은 어느 날, 바게뜨빵을 사러 나간 남편이 사라진 이야기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 온 남편은 집에 빵이 없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빵을 사러 나간 다음, 사라진다. 남편의 실종을 믿지 못하는 아내는, 동네를 찾아다니고,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돌아올 기약은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왜 집을 나갔는지, 아내는 그 이유를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남편이 돌아오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다. '환상의 빛'은 여자 주인공의 눈으로 바라봤지만 작가는 남성이다. 그리고 '유령들의 탄생'은 여성 작가다. 두 작품이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두 작품 모두, 남편의 자살과 실종에 있어 그 사건의 원인이나 이유를 찾지 못한다. 왜일까? 두 여성 주인공은 그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물론 남편의 '부재'에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소통의 부재'다. 남편이 사라지게 된 결정적 원인이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를 고민하지만, 그 고민에서 자신의 문제는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나 때문일까?'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 걸까? 그건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다. 두렵기 때문이다. 여성(아내)이 자기의 잘못으로 남편이 자살하거나 사라졌다고 한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자기의 몫이고, 가족, 친구, 친지, 이웃 모두에게 비난을 받을 것으므로,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두 작품을 읽어보면, 주인공의 관점에서만 상황을 바라보면 당연히 남편의 자살이나 실종의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두 주인공을 멀찍이 바라보게 되면, 두 여성의 존재가 객관적으로 보이게 되고,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이 소설의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고, 남편의 자살과 실종에 그들의 배우자 즉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가 혹시라도 여성을 비하한다고 여기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위의 상황은 남자와 여자를 바꿔놓아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남편의 자살이나 실종의 문제는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자'의 문제인 것이다. 만일 여기서 자살이나 실종을 하는 사람이 여성이었다면 당연히 문제의 근원은 그들의 배우자인 '남편'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은 '소통의 부재'인 것이지 젠더로서의 '성'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렇다고 남편들의 자살이나 실종의 책임이 온전히 그들의 배우자에게 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두 작품에서 아내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부분은 상당하지만 100%라고 말할 수는 당연히 없다. 모든 사건은 상대적이고, 완전히 어느 한쪽이 잘못하는 경우는 '범죄'에서만 가능하다. 평범한 부부가 살아가면서, 어느 한쪽이 완전히 잘못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아무 잘못 없는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이라면, 그것은 범죄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과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의 경우, 두 부부는 몇 년 동안 큰 문제 없이 잘 지냈다. 거의 다투지도 않았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지도 않았으며, 남편이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남편들은 자살했고, 사라졌다. 왜일까? 나는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이 아내에게 있다고 말한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그렇다면 본질적으로는 누구에게 더 책임이 있을까. 남자인 내가 생각할 때, 결정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는 역시 남편에게 있다. '환상의 빛'에서 남편은 불과 25세 젊은 나이에, 그것도 첫딸을 낳은 지 불과 석달만에 자살한다. 그는 영세한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부부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지만 두 사람 모두 가난한 집안에서 중학교만 겨우 나오고 세상의 밑바닥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의 입장에서, 세상은 이미 고정되어 있고, 자신은 몇 십년은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것만 남아 있는, 미래가 지금과 똑같은 암담하고 고생스러운 시간으로만 남아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내와 갓난아이가 있으니 참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맞는 말이지만 잔인한 말이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결혼을 한 것부터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런 절망과 좌절과 뼈저린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실존에 관한 질문을 던졌고, 사회의 높은 벽과 도시빈민으로 꿈지럭거리는 한 마리 지렁이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런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너무 젊은 나이에, 성급하고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내와 갓난아이를 그렇게 버리고 자살한 것이 이기적인 태도라고 욕을 먹을 수도 있다. 유미코의 남편은 어려서부터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유미코도 마찬가지인데, 남편은 엄마를 따라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가난한 살림 때문에 엄마는 어린 아이를 잘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혼자서 외롭게 큰 아이는 가족의 따뜻함을 몰랐고, 가족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것이 가장 큰 비극이었다. 그렇다고 죄 없는 아내와 아이를 두고 자살하는 것이 잘 한 것이냐는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다. 유미코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비난받아야 할 부분이 있었다면 오히려 다행이겠지만,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유미코는 갓난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런 경우, 실존이 존재를 위협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유령들의 탄생'은 그런 면에서 '환상의 빛'보다는 조금 더 그 이유가 선명하다. 퇴근해 돌아온 남편에게 빵을 사 오라고 말하는 아내. 그리고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자신이 그동안 남편에게 무심했었다고 독백하는 아내. 그러면서도 왜 남편이 사라졌는지를 모르는 아내. 여기서 사라진 남편은 '환상의 빛'에서 자살한 남편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자발적인 실종을 선택했을 뿐, 자살을 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출이 아니라 범죄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빵을 사러 가는 길이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당하거나 차량으로 납치를 당했을 가능성은? 차라리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을지언정 자살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남편은 하루 일과를 마쳤고, 여느 때처럼 저녁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왔으며, 아내가 저녁준비를 마쳤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죄의 가능성도 매우 희박한 이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거리는 사람들의 왕래도 많고, 밤이라도 불이 밝은 곳이어서 범죄자들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남편이 사라진 당일의 행적을 보면, 남편은 부동산 거래를 위해 몇 건의 상담을 했고, 사람들을 만났지만 실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수완이 좋고 능력이 있어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인공은 자신의 독백으로, 남편에게 무심했다는 말을 한다.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는 무심하고, 식사도 잘 차려주지 않고 그렇다고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하루종일 집에서 뭘 하고 있는지 답답하다.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 하는 여느 주부들처럼 집안 살림에 신경을 좀 쓰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그걸 말로 한다는 것도 답답한 노릇이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이 지나가면서 남편은 이런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오니 저녁도 차리지 않은 아내가 빵이 없다면서 자기더러 빵을 사오라고 한다. 낮에 뭐하고 있다가, 일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남편은 화를 내는 대신, 차갑게 웃으면서 알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지갑에 들어 있는 얼마 안 되는 현금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차를 타고 사라진다. 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겠지,하고 생각하면서.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편의 존재가 유령처럼 생각되겠지만, 남편의 입장에서는 숨막히는 저주로부터 풀려난 느낌이라는 걸 아내는 과연 알까? 이 소설은 사실 정반대의 입장 즉 남편의 입장에서 똑같은 분량으로 더 쓰여져야 한다. 앞부분에서 아내가 남편의 실종에 관한 아방가르드하고 슈르레알리즘적인 서술들이 남편의 실종에 관한 자기연민이라면, 뒷부분에서 남편의 독백은 그로데스크하고 자기학대적인 폭력적인 표현들로 난무할 것이다. 여자를 잘못 선택한 멍청한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과 구역질 나는 결혼생활에 대한 자학과 7년 동안 참고 살아 온 고통과 불만의 폭발로 채워질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남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자들의 자기비판이 일정 부분 있어야 할 것이지만, '환상의 빛'에서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남편은 죽을 수밖에 없었고, '유령들의 탄생'에서는 남편의 실종에 아내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아내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럼에도 아내보다는 남편(남자)에게 더 큰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극단의 상황까지 오는 동안에 아내에게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아내를 낯선 사람, 타자, 이방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 남편들의 잘못이었다. 그런 것까지도 아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다. 문제의 심각함을 알아달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남편들이었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눈치껏 남편의 심기를 헤아려야 한다고 믿었던 남편들의 이기심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두 남편은 아내를 완전히 믿었을까?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적어도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 때는 사랑했을 것이고, 믿었을 것이지만, 결혼생활이 지속되면서 남편들에게는 의무감과 책임감만 남았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소통'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단지 나 하나가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끝난다는 극단적인 생각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끝낼 수도 없을테니 말이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별도 없는 한밤에
    별도 없는 한밤에-스티븐 킹 스티븐 킹의 첫번째 탐정 추리소설이라고 광고한 <미스터 메르세데스>를 읽고 나서 그의 중편집을 읽기 시작했다. 네 편의 중편이 들어 있는 이 소설집의 첫번째 작품은 <1922>. 충격과 공포, 스티븐 킹의 진짜 모습이 바로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휴먼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라면, <1922>는 스티븐 킹이 보여주었던 공포와 기괴함이 뒤섞인 그의 본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을 읽고 나서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러브 크래프트'와 '애드가 앨런 포우'였다. 조금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 <1922>는 애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의 확장판 변주곡이었다. 러브 크래프트의 음울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 분위기와 잔혹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애드가 앨런 포우의 소설이 화학적으로 결합된 것이 바로 스티븐 킹의 소설이다. 이 중편소설은 이 책에 들어 있는 네 편의 소설 가운데서 가장 '독하다'. 그래서 책을 온전히 읽기 위해서는 마음의 각오를 조금 해야 한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의 내용에 너무 몰입하거나 상상력을 지나치게 발휘하면 원하지 않는 고통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다. 주인공 제임스는 평범한 농장주인이었지만, 그의 아내가 친정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땅 40만 에이커를 팔겠다고 했을 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시골 농장에서 사는 것을 싫어했고, 도시로 나가 가게-양품점-를 내고 싶어했다. 대대로 농장을 운영하며 살아 온 제임스는 그런 아내의 주장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부부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고, 평범했던 농장주인은 어느 순간 살인마로 돌변한다. 소설의 내용은 개연성이 부족하지만, 끔찍한 공포를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제임스보다 그의 어린 아들이 변해가는 과정은 더욱 기괴하다. 그것은 인간이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마치 진화론처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내면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인간은 단지 악마일 뿐인가, 아니면 제임스의 다른 얼굴인가. 이 경우, 악마의 다른 이름은 탐욕이다. 탐욕은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 뿐 아니라, 어린 자식까지도 악마로 만들고 말았다. 모든 것은 '인과응보'이며, 나쁜 짓에는 결과가 따를 뿐이다. <빅 드라이버>는 여성 작가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독서토론회에서 강연을 하고 수고비를 받는 것이 짭짤한 수입인 작가 테스는 집에서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는 도시로 강연을 하고 오는 길에 길을 잘못 들고, 타이어가 펑크나면서 고립된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나타나고, 그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다음 으슥한 도랑에 버려진다. 끝까지 죽은 척을 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던 테스는, 그 사건 이후 달라진다. 여리고 조금도 폭력적이지 않았던 테스는 자신이 당한 사건을 경찰에 알리지 않고 직접 해결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그 방법도 작가적으로 풀어나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데스 프루프'가 생각났다. 여성들이 탄 자동차만을 테러해서 죽이는 살인마는 자신의 의도대로 네 명의 여성을 잔인하게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죽이고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여성들이 탄 자동차를 공격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여성들의 반격에 살인마는 처절하게 죽게 된다.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통쾌한 복수다. 이 소설 역시, 연약한 여성만을 노리는 연쇄살인마에게 당한 여성이 통쾌한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 테스의 복수극이 아니라, 두 명의 아들을 살인마로 키운 그의 엄마에 대한 궁금증이다. 공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는 여성이 살인마 아들을 둔 어머니였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살인을 하도록 모든 준비를 해주는 것 역시 바로 그 엄마였던 것이다. 소설에서는 살인마의 아버지가 오래 전에 자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그 자살과 관련해 그의 아내 즉 살인마의 엄마와 그 아들들이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는 나오지만 자세한 내용은 드러나지 않는다. 아들에게 젊은 여성을 강간하고 죽이라고 부추기고, 여성을 그쪽으로 데려가는 엄마와 젊은 여성을 강간하고 살인하는 아들의 관계라면 결코 평범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정신병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잘 하고 있었고, 누가 봐도 어엿한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사이코패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미치광이가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 틈에 섞여 성실하고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은 다른 소설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공정한 거래>는 비교적 짧은 소설이다. 암으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주인공 스트리터는 어느 날, 우연히 도로 옆 노점상을 만나게 되고, 그와 '수명을 연장'하는 계약을 한다.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앓고 있는 암을 다른 사람에게 던져야 하는데, 그것은 '가장 미워하는 인간'이어야 했다. 스트리터는 가장 미워하는 인간으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꼽았다. 은행의 중견간부로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던 스트리터에게 암은 곧 죽음이었고,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은 가장 큰 고통이자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마음 속에만 담아두었던 증오의 대상이 바로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노점상과 '연장 계약'을 하고 나서, 스트리터의 암은 사라지고, 친구 톰의 가정에서는 연이어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스트리터보다 훨씬 부자이고, 출세했으며, 훌륭한 자식을 두었던 그래서 질투와 미움으로 치를 떨었던 바로 그 '가장 친한 친구'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친구와 반대로 좋은 일만 생겼다. 암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은행에서 승진했고, 아들과 딸이 모두 성공했으며 아내 재닛과도 신혼부부처럼 다정했다. 반면 친구 톰은 아내가 암으로 죽었고, 큰아들이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으며 둘째 아들은 며느리가 죽었고, 딸이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와 임신한 아이를 사산했다. 게다가 톰의 사업체도 망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진행되었다. 악마와 거래를 하고 나서, 친구의 불행을 바탕으로 자신의 행복을 보장하는 '악마의 계약'이 어떻게 구체화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반전이 보이지 않는다. 단지 악마와 계약을 한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은 그 자체로 끔찍하기는 하지만-그것을 반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보다 강렬한 마지막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행복한 결혼 생활>은 20년 가까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좋은 남편으로 살았던 남자가 알고 보니 연쇄살인마라는 것을 알게 된 여자의 이야기다. 늘 다정하고 따뜻한 남편이기만 했던 사람이 어떻게 끔찍한 연쇄살인마일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할까. 주인공 다아시와 그의 남편 밥은 평범한 미국 백인의 중산층 가정을 이룬 부부였다. 밥은 회계사였고, 부업으로 희귀동전 거래를 하는데 출장이 잦았다. 남편이 출장을 간 어느 날, 우연히 차고의 비밀창고에서 피해자의 물품을 발견한 다아시는 남편이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남편이 돌아와 그 사실을 눈치챘고, 다아시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다아시는 너무도 무섭고 끔찍했지만 아들과 딸을 위해 남편의 요구-한번만 용서해달라는-를 들어주고 다시 정상적인 가정생활로 돌아간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이미 남편이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분명했고,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도 없었다. 겉으로는 별다르지 않게 정상적인 가정이었고 부부였지만 다아시의 내면은 폭풍우가 치는 바다처럼 고통스럽게 뒤집혔다. 남편이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경찰에도 신고하지 않고 조용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다아시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문제를 해결한다. 자식들에게는 여전히 좋은 아버지였고, 남편 밥의 직장과 동료, 이웃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면서도 더 이상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마의 삶은 끝내게 되는 해법. 싸이코패스의 전형을 그린 이 소설은 살인마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가는 싸이코패스의 아내에 초점을 맞췄다. 그 아내가 어리석거나 사악한 인물이었다면 소설은 엽기적이고 공포로 가득한 내용이 되었겠지만, 평범한 여성 다아시는 상식적이고 현명한 사람이어서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잭 런던은 생계를 위해 단편소설을 써서 잡지사에 기고를 하는데, 그때 잭 런던이 생각한 포맷이 있었다. 즉, 짧은 시간에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기본 포맷을 설정하고, 그 포맷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이야기를 만들면 빠른 시간에 다양한 단편소설을 여러 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잭 런던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단편을 써서 잡지사에 기고했고, 원고료를 받아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원고료를 받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지만. 마찬가지로, 스티븐 킹의 소설에도 그런 '기본 포맷'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후기에서 스티븐 킹은 소설의 모티브, 아이디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후기를 읽지 않아도 이 소설들에는 스티븐 킹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미국 메인주의 도시 이름과 풍경들, 지명들이 많이 등장하고 그가 읽고 도움을 받았을 러브 크래프트나 애드가 앨런 포우의 작품들이 떠오르고, 작가로서의 경험-강연회-과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에피소드 등이 소설에 등장한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행복하다. 그의 말대로, 독자들은 재미있는 소설을 읽기 좋아하고, 그렇기 위해서 자신은 두꺼운 소설을 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두껍지만 술술 잘 읽히는 이 소설들은 깊어가는 겨울밤을 잊게 만든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미스터 메르세데스
    미스터 메르세데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있다. 나는 스티븐 킹을 매우 좋아하는 독자로서, 그의 작품은 한국에서 한글로 번역된 작품은 거의(약 90% 정도) 다 찾아 읽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외부의 평가가 어떻든 내게는 '소문난 잔치'에 불과했다. 그건 스티븐 킹의 잘못이라기 보다-이 작품이 스티븐 킹의 얼굴에 똥칠을 할 정도는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이 책을 팔아먹으려는 출판사-미국과 한국-의 지나친 마케팅 때문이다. 물론 스티븐 킹도 출판사의 홍보문구처럼 '최초의 탐정추리소설'에 도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캐리'를 시작으로 단 한번의 실패 없이 지금까지 승승장구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의 뛰어난 글솜씨 때문이었으니,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을테다. 그리고 이 소설은 스티븐 킹이 써 왔던 여느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스티븐 킹은 늘 그랬듯 한 편의 장편소설을 더 출간한 것이다. 출판사의 호들갑은 차치하고, 만일 스티븐 킹이 이 소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건 명백한 판단 오류가 될 것이다. 새로운 탐정 캐릭터를 창조했다거나, 탐정추리소설의 영역을 확장했다거나, 자신이 '탐정추리소설'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만큼 스티븐 킹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은 '탐정'이니 '추리'니 할 만큼의 내용이 아니다. 그저 스티븐 킹이 써 왔던 다양한 장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탐정'이니 '추리'니 따위의 말을 들먹거리는 것이 스티븐 킹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그의 명성을 깎아먹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소설을 읽고 곧바로 이어서 중단편집 가운데 <1922>를 읽었다. 그리고 무엇이 진짜 '스티븐 킹의 작품세계'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스티븐 킹의 세계는 <1922>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이 스티븐 킹의 신작소설이고, 출판사와 서점으로써는 책을 팔아먹어야 할 목적이 있으므로 온갖 화려한 수식어로 장식을 하더라도, 그건 단지 '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라면 이미 40년대부터 시작된 그 세계에 맡겨두는 것이 좋다. 대실 헤밋이나 레이먼드 첸들러를 비롯해 로스 맥도널드, 미키 스필레인 등이 이미 그 세계를 구축해 왔고, 지금까지 잘 굴러가고 있다. 여기에 굳이 스티븐 킹이라는 거목이 발을 들여 놓는 것도 우습거니와, 스티븐 킹의 선배들이 구축한 세계를 더 확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다면 '하드보일드'한 탐정소설 영역을 모욕하는 것은 물론, 스티븐 킹의 명성에도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스티븐 킹이 이 소설의 주인공 하지스를 내세워 앞으로 더 작품을 쓸 것이라고 예고되었는데, 그것을 두고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라는 수식을 내세워 홍보하지 말기를 강력히 권고한다. 그냥 스티븐 킹의 장편소설 또는 연작소설이 출간되었다고 말하면 된다. 그러면 독자도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고, 출판사나 서점도 욕을 먹지 않을 것이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언더 더 돔 - 스티븐 킹
    언더 더 돔 미스터리 스릴러, 공포, 호러의 대가인 스티븐 킹의 작품 가운데서 비교적 노멀한 수준과 내용의 소설이다. 1976년에 처음 구성했고, 집필을 시작했지만, 중도에 포기하고 2007년부터 다시 쓴 장편소설로 한글 번역본이 3권 1,600페이지나 되는 꽤 긴 소설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술술 잘 읽힌다 등장인물이 많긴 하지만, 전체의 흐름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호흡이 길다보니 스티븐 킹 답지 않게 약간의 문제-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도 드러난다. 어느날, '체스터스밀' 마을을 뒤덮은 거대한 돔이 생긴다. 마을은 고립되고, 공포와 두려움과 긴장이 팽배하면서 내부의 분열과 균열이 발생한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상태일 때,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기독교 국가'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미국에서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은 매우 반기독교적 내용을 담고 있다. 마을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온갖 범죄-살인, 탈세, 마약제조 및 판매 등-를 저지르는 부의장 빅 짐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이다. 또한 빅 짐과 함께 근본주의 교회를 끌어가는 목사 역시 빅 짐의 공범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이들에게 종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이고 위장껍데기에 불과했다. 사회가 극적으로 바뀌면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난다. 인간의 탐욕, 이기심, 권력욕, 잔인성 등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애국심'으로 포장된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의 무대는 비록 2천여 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어떤 집단, 어떤 나라에서든 이와 비슷한 일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정치가를 '선출'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투표를 통해 뽑힌 그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할 뿐이다. 개인의 이익과 탐욕이 다른 모든 '공동의 목표'에 앞서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행의 씨앗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도 마을 주민 대부분은 빅 짐의 주장에 동조하고, 그의 거짓말에 완벽하게 속아넘어간다. 그들은 무지한 멍청이일 수도 있고, 빅 짐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동조자들일 수도 있다. 빅 짐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탐욕스러움은 거의 모든 인간들에게 내면화되어 있고, 빅 짐을 통해 그런 야욕을 합리화,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그 역시 이기와 탐욕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반면, 빅 짐과 싸우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빅 짐의 범죄에 대해 알고 있고, 빅 짐에 맞서 싸우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들이 특별히 정의로운 사람들은 아니지만, 단지 빅 짐에게 반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그들 역시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외계의 존재가 등장하고, 유령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다. 마을이 고립되자 마을을 장악하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려는 권력욕의 화신이 누구이고, 그 인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중요한 내용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악의 평범성'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선량한 인간이 될 수도, 또는 잔인한 악마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놓인 상황과 사람과의 관계와, 자신의 이익 또는 불이익에 따라 변할 뿐이다. 태어날 때부터 '악당'은 없겠지만, 인간을 '악당'이나 '악마'로 키우는 '사회'는 존재한다. 아니, '사회'가 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빅 짐을 포함해 악당 노릇을 했던 자들의 최후가 너무 가볍게 그려진 것이 불만이다. 그러기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과 수난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으로'가 스티븐 킹의 모토였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악당들의 최후가 너무 관대한 듯 해서 오히려 미흡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스티븐 킹의 상상력은 뒷부분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돋보기에 노출된 개미떼일 수 있다는 것.
    • 문화
    • 독서
    2021-12-15
  •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노암 촘스키 교수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국 최고의 지성이며, 세계 최고의 언어학자이자, 자본주의 체제를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인물이다. 지난번 '하류지향'을 읽고 나서, 책장에서 눈에 띤 책이 이 책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이다. 이 책은 따로 독후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책에 있는 문장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교육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 (자본주의에서) 학교는 진리를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선동적 주장을 학생들 머릿속에 주입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가 문자 그대로 민주적이라면, 민주주의의 상투적 선전문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킬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저 민주적으로 행동하고 처신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이상을 떠들어댈수록, 그 시스템은 덜 민주적이라는 증거입니다. * 학교는 사회의 지배계급, 즉 부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만들어진 기관이기 때문에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학생들은 권력집단, 주로 기업집단을 옹호하도록 사회화되는 것입니다. * 훌륭한 교사라면, 학생의 학습을 돕는 최선의 방법이 스스로 진실을 찾도록 일깨워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우리가 실질적인 문제를 두고 고민하면서 그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빼앗아갑니다. 말하자면 반지성적인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를 수동적인 소비자로 사회화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 우리가 계급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신화는 허무맹랑한 코미디이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이다. 우리는 쏘련식 사회주의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마찬가지로, 지금 세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자본주의 사회' 역시 '민주주의 사회'와는 관계가 멀다. 사회체제는 곧 그 사회의 교육을 결정하는 토대가 되므로, 교육을 말하려면 반드시 그 체제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교육 환경일까.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교육을 받고 있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가'가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력을 장악한 '자본가'는 당연히 '권력'까지도 장악하게 되고, 맑스의 말대로 한 나라의 정부는 '자본가 위원회'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도 적확한 사실이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식인을 매수하고, 매수된 지식인들은 촘스키의 표현대로 '인민위원'이 되어 학생들을 체제에 순치되도록 '교육'한다. 교육과 관련해서는 이미 파울로 프레이리, 이반 일리히와 같은 진보적 교육학자들의 저서들에서도 일관된 내용으로 '체제 속의 교육'은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사회에 필요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어서, 인간의 본질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자라는 세대에게 교육한다는 것은 체제를 불문하고 매우 어렵고 중요함을 반드시 알아야 하겠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사 놓고도 책장에 꽂아 놓은 채 잊고 있다가, 최근에 '하류지향'을 시작으로 노암 촘스키의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에 이어 자연스럽게 이 책을 꺼내 들었다. 하워드 진 교수에 관해서는 다만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것과 그가 쓴 '미국민중사'가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정도만 알 뿐,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니, 나의 무지는 부끄러워도 마땅한 천박한 수준이다. 그것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든 생각이었고, 왜 빨리 하워드 진의 저서를 읽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하워드 진은 그 자신이 노동계급의 부모를 두고, 그 역시도 노동자로 자란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가 살던 뉴욕의 빈민가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가운데 공산주의자가 많았고, 그가 겪은 삶이 '반 자본주의'를 외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환경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자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로 알려졌지만, 미국 사회의 내부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음을 하워드 진 교수는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것도, 이론이나 주장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겪은 내용만으로도 미국의 본질-제국주의이자, 극소수 자본가의 지배-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정도로 하워드 진 교수의 삶은 실천적이고 행동하는 삶이었다. 이 책은 '자전적 역사 에세이'라는 부제처럼, 하워드 진 교수가 미국의 흑인이 겪는 인종차별의 역사부터 시작한다. 1950년대 말부터 미국 남부-인종차별이 극심한 지역-의 흑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그가 '시민불복종' 운동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드는데, 평화적이면서도 꾸준한 노력에 의해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60년대와 70년대에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고,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함께 연대하며, 반정부투쟁에 앞장서는 하워드 진 교수는 1965년에 노암 촘스키를 만나게 되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동적이고 내 마음에 크게 와 닿은 이야기는, 바로 하워드 진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의 삶은,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나와 닮았고, 그가 읽은 대표적인 책-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리처드 라이트의 '깜둥이' 등-은 나 역시 깊은 울림을 느낀 책들이었고, 내 삶에 영향을 끼친 책이었기 때문에 그 동질감으로 기뻤다. 이 책에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은, 신기한 우연 같지만, 바로 앞에 읽은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의 노암 촘스키와 연결되는 내용이다.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에는 뒷부분에 노암 촘스키가 보스톤 대학의 총장인 존 실버와 텔레비전에서 토론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이 책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의 뒷부분에도 보스톤 대학의 총장인 존 실버가 나오는데, 기막힌 우연이겠지만, 하워드 진 교수가 바로 보스톤 대학에 있었고, 그가 있던 시기에 대학총장으로 존 실버가 영입된 것이다. 1986년에 보스톤 지방 텔레비전 방송에서 노암 촘스키와 존 실버는 미국의 제3세계-주로 남미-민주주의를 말살하는 정책을 집행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토론을 하고 있는데, 이 시기에 보스톤대학에서 하워드 진 교수는 총장인 존 실버의 전횡에 맞서 교수들과 학생들이 연대해 존 실버 퇴진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존 실버는 말하자면 극우주의자이고, 약육강식의 논리에 철저한 인물이다. 그는 학교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몰아내기 위해 경찰을 부르고, 자신이 직접 마이크를 들고 경찰을 지휘하는, 참으로 반지성적이고 폭력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하워드 진의 저작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보라고 권한다. 이 책은 하워드 진의 살아온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의 삶을 통해 미국의 음험한 두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리영희 선생이 계신다면, 미국에서는 하워드 진 교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애국심'이 아니라, 국가, 정부, 민족을 모두 초월하는 '진실'만이 가장 올바른 가치임을 알 때,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릴 것이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우주에는 신이 없다
    우주에는 신이 없다 '창조과학'의 엉터리 주장을 속속들이 반박하는 멋진 저서. 별 다섯 개. 무신론자들의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써도 훌륭하다. 입장을 뒤집어 보면, '신' 특히 기독교의 신을 믿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서도 또한 '창조과학'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참혹한 내용이다. 자신들(유신론자)을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하고, 얼굴에 침을 뱉고, 온갖 쌍욕을 하는 것보다도 더 심한 내용을 점잖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신론자-특히 유일신을 믿는 유신론자-들은 이 책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다. 아주 근본적인 딜레마인데, 유신론자들은 오로지 '아Q'식 '정신승리법'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모든 논리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래도 우리는 신을 믿는다'는 한 문장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동안 무신론에 호감을 가졌지만, 무신론적 사고방식과 과학적 논리를 갖추지 못한 분이라면 이 책을 통해 무신론의 기본 논리를 습득할 수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너무 재미있어서 화장실에서도 읽고, 밤에 잠을 줄여가면서 읽었다. 정상적인 '이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현대사회에서 '종교'나 '신'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인류에게 '종교' 또는 '신'이 필요하던 시기가 있었다. 인류의 이성이 무지에서 깨어나기 전의 역사 단계에 있을 때 말이다. 물론 지금도 수 십억 명의 인간들은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종교' 또는 '신'이라는 관념과 도그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현재 인류의 보편적 수준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과학과 이성은 더 이상 '종교'나 '신'을 용납하지 않을 뿐 더러,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신'을 믿는 유신론자들은 흔히 말한다. 지금도 종교가 사회적으로 좋은 일도 많이 하지 않느냐고. 맞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없어도 전혀 문제 없다. 종교 때문에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종교가 없으면 좋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아전인수일 뿐이다. 김웅진 교수님의 말씀에서 배운 것처럼, '옳은 일', '좋은 일', '정의로움'은 그 자체로 옳기 때문에 다른 무엇을 바라거나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고 있다. 마치 종교가 없으면 인류가 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거나, 인류가 폭력과 파괴를 일삼는 범죄 집단, 야만인의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은, 종교 장사꾼들이 늘상 해 오던 주장일 뿐이다. 오히려 인류는 '종교'라는 관념 때문에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고,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 종교 전쟁을 현대사회에서도 벌이고 살육을 일삼고 있다. 종교가 인류의 진화에 덫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를 갖고 있거나, 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적 신념이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장 사회적으로 순기능을 하는 소수의 종교인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가 파괴한 인류의 문명과 수십 억 명의 학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조금이라도 유리하면 과장해서 떠벌리는 것이 종교인들이거나 종교장사꾼들의 특징이다. '창조과학'이니 '지적설계'니 하는 사이비 주장은 조금만 이성적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지구의 나이가 불과 6천년이라는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엉터리 주장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머저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인간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과학자들 가운데 일부가 '창조과학'을 믿고 있으니, '창조과학'도 나름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적 성과와 개인의 신념은 다르다. 내가 보기에 '유신론자'들의 사고체계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그들이 평소의 생활에서는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도, '신'의 영역과 관련해서는 특이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진화(뇌의 진화) 과정에서 절대적 존재에 관한 미개한 믿음이 이성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건 전화였다. 이들은 전혀 모르는 전화번호로 무례하고 뻔뻔하게 전화를 걸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예의도 없고, 과학적 이성도 없는 이들이 인류의 미래를 망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옛날 소위 '십자군 전쟁'이라는 것이 기독교도들이 '이교도'들을 교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은 것이라면, 현대 사회에서는 무신론이 과학과 합리주의, 올바른 이성을 무기로 유신론자들에게 무신론과 진화론의 세례를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하류지향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교수가 쓴 '하류지향'은 일본의 10대, 20대의 교육과 노동 문제의 핵심을 짚은 책이다. '교육으로부터의 도피'와 '노동으로의 도피'가 서로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우치다 교수는 일본 사회의 변화에서 근원을 찾는다. 1970년대와 1990년대를 비교하고, 이 시기에 일본에서 본질적으로 바뀐 부분이 바로 현재의 일본 젊은이의 교육과 노동관을 완전히 뒤바꾼 근거라고 주장한다. 즉, 집단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던 80년대 이전의 사회에서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는 80년대 이후의 사회 정책이 그 시기의 교육에 반영되면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갖던 자부심과 교육적 효과 등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전제는 있다. 그 이전부터 발달한 일본의 자본주의 체제로 인해 전반적인 사회의 물질적 기반이 두터워지고,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게 된 세대에서 태어난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어려서부터 '소비주체'로 스스로를 인식하면서, 교육과 노동을 하나의 '거래'로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교육과 노동 시장에서 스스로를 도태 시키려는 강렬한 몸부림이 바로 '하류지향'이라는 것이다. 모든 거래는 '몰시간성'이지만 교육과 노동은 시간의 연속성 위에 놓여 있으므로, 당장 눈앞에서 거래나 교환,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 거래에 대해 어린이와 청년들은 그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편해 한다는 것이다. 교육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몸부림, 일(노동)을 하지 않으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청년들의 모습은, 그들이 태어나 자란 사회가 '거래'와 '교환'이라는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주입한 결과이며, 그들은 적어도 매우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우치다 교수는 말한다. '등가교환'에 대해, 교육은 결코 물물교환이나 상거래처럼 등가교환이 될 수 없는 영역이지만, '소비주체'로 어렸을 때 이미 완벽한 자리를 잡은 어린이와 청소년은 교육의 목적, 노동의 과정 등을 하나의 '등가교환'으로 여기기 때문에, 빠르게 성과가 나지 않거나, 목표와 결과가 애매한 것을 참지 못하게 되고, 스스로 그런 불편함을 배제하기 위해 '탈교육', '탈노동'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우치다 교수의 주장에서 일본 사회의 어린이와 청년을 '소비주체'로 자리매김한 것, 교육과 노동을 '등가교환'으로 인식한 것, 대학을 하나의 상품으로 결정한 것 등을 볼 때, 일본 사회의 교육과 노동 문제를 마르크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도 우치다 교수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와 청년들이 학교와 노동현장에서 스스로 도피하는 것을 단순 사회학이 아닌, 경제 문제로 치환해서 바라보는 것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사회 문제에 있어 분석틀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그 결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우치다 교수가 일본의 교육과 노동 문제를 마르크스 이론으로 분석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가장 적당한 틀이 아닐 수 없다. 즉,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사회문제는 같은 자본주의 체제인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내용들이다. 물론, 국가와 정부, 인민의 각성, 문화 수준, 정치 상황 등에 따라 그 차이와 변수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근본에 있어서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우치다 교수가 분석하는 것과 같은 '자본주의 논리'가 교육과 노동 시장에 침투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이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면서 일본 전체의 틀을 집단이 아닌, 개인화 우선 정책을 입안하게 된 것도 자본주의의 논리의 연속성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독립성, 개성, 자율성, 자유, 선택권 등을 최대한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반대로 '개인'을 철저히 고립화시키는 제도라는 것을 대부분 알지 못한다. 정부와 언론에서 떠드는 '자유', '자율', '개성', '독립성', '선택'이라는 단어가 결국 사회의 연대와 공동체를 파괴하고 개개인을 철저히 고립시켜 체제에 순응하거나 굴복하도록 만드는 장치라는 것을 우치다 교수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 이론이나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되어 있는 개인의 고립화 문제가 강하게 제기되지는 않지만,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자본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과 노동 모두 강력한 경쟁체제를 구축하고 있으며,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오직 도태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비정함이 어린이와 청년들을 교육과 노동 현장에서 스스로 떠나도록 떠밀고 있는 것이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총, 균, 쇠
    총, 균, 쇠 이 책은 모두 4부 19장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류의 진화와 문명, 문화의 발달을 진화론에 입각해 체계적으로 써나간 내용은 기존에 나왔던 많은 진화론, 생물학, 문명사, 세계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인류의 문명에서 각 대륙마다 진화, 문명의 발달이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저자는 인류의 직접 조상으로 갈라지는 시점인 700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류 진화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약 1만년 전의 수렵, 채취 활동에서 정주, 경작을 하는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인류의 발달 단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정착, 경작의 발견이 식량 생산을 늘리고,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더 잘 먹고, 오래 살게 되며, 후손을 많이 퍼뜨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책 제목이 <총,균,쇠>여서 자칫 인류의 문명사를 짧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류의 모든 발달 단계를 설명하고 있고, 그것의 진화론적, 과학적 인과 관계를 꼼꼼하게 기술하고 있어 내용도 충실하고 믿음이 간다.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의 진화는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면서 급격히 발생했으며 특히 인류가 야생동물을 가축화 하는 과정에서 동물들에 기생하던 세균과 바이러스가 인류에게도 전이되는 현상을 통해 오늘날의 다양한 질병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쉽고도 명쾌한 분석이다. 또한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가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통해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그 잉여 생산물을 통해 인류가 '먹는' 문제에서 벗어나는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즉, 세계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집단 정착지의 발생과 농업의 발달, 그로 인한 잉여 농산물의 생산과 함께 문자가 발명되었고, 최초의 문자는 주변으로 퍼져나가 조금씩 발전하면서 다양한 언어로 분화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책의 주제인 문명이 서로 다르게 발달하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환경의 영향과 함께, '필요성'에 대해 거론하고 있다. 즉, 어떤 기술이나 발견은 어느 대륙의 인류들이 필요한 시기에 도입하게 되지만, 환경적 요인에 의해 불가능할 수도 있고, 외부의 영향으로 더 일찍 도입되거나, 외부의 영향과는 별개로 오랜 시간 동안 자신들의 방식만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부족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진화론을 바탕으로, 생물학, 인류학, 언어학, 지리학 등 다양한 방면의 지식을 융합하고 있어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고 있다. 사실 인류 문명의 발달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저작들이 있으며, 특히 문명의 발달을 계급투쟁의 결과로 분석한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정치경제학 이론으로 설명한 경우도 있다. 이 책에서도 잉여 농산물의 발생과 함께 계급이 발생한다는 것은 암시하고 있지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발생과 그로 인한 정치경제적 투쟁에 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또한 대륙마다 다르게 발전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환경적 요소(환경생태학적) 원인에 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정치경제학적 원인에 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아쉽다. 이 책과 함께 보충해서 읽어야 할 책들이 더 있기는 하지만,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인류 문명사를 간결하면서 충분하게 설명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을만 하다. 다만, 같은 내용이 여러 번 중복되어 나오는 것은 조금 지루하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음식의 제국
    음식의 제국 이 책은 음식으로 살펴보는 세계 문화, 역사, 문명, 식품의 역사다. 말하자면, 세계 문명사 전반을 다루고 있는 것과 같다. '음식의 제국'이라는 제목 때문에 기대를 한 책이지만, 결과는 좀 실망스럽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은, 내가 이 책의 의도와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저자들이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내가 이 책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맞겠지만, 그럼에도 내 수준에서 드는 의문은 이렇다. 저자들은 왜 '음식' 또는 '식품'을 '주체'로 상정했을까? 이 의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어나가기가 매우 불편했다. 이 책이 다루는 역사의 범위는 수메르 제국(기원전 7천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약 1만년의 역사다. 그리고 중국,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대륙, 중동, 아시아를 아우르는 지구 전체의 역사를 크거나 작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미시사'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거시사'와 함께 지역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내용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않고 있다. '음식' 또는 '식품'을 주체로 상정한 것은 내가 보기에는 명백한 오류라는 생각이다. 이유는, 그로 인해 역사를 '결과론'으로 시작해 '결과론'으로 끝내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이런 함정을 모르지 않을텐데, 왜 역사를 '결과론'으로 몰고 가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저자들의 오류를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저자들은 중세 유럽에서 농업의 혁명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했다. 수도승들이 농업에 종사하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품종을 만들면서 잉여 농산물이 생겨나고, 그것은 곧 수도원 주위의 농토를 매입하고, 농부들을 소작농으로 만들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역사의 극히 단편만을 묘사한 것이다. 중세는 갑자기 생겨난 시대도 아니고, 이미 그 이전 시기부터 쌓여 온 역사의 한 과정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중세의 농업 혁명-신기술의 발달-을 수도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절대 왕권과 종교의 위세에 눌려 살면서도 농업생산성을 키워온 그 시대의 농부들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이 당연하고 기본적인 순서라고 생각한다. '음식' 또는 '식품'을 역사의 주체로 상정한 순간, 거기에는 '인간'이 배제되고 소외된다. 음식을 만들고, 식품을 가공하고, 농어업, 축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농부, 어부의 노고는 사라지고 만다. 이 책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노동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또 하나의 의문은 '무계급성'이다. 적어도 역사를 다루는 저자라면, 인간의 역사는 곧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마르크스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계급투쟁 이론'이나 '사적 유물론' 또는 '변증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유사 이래의 역사가 계급으로 분화하고, 계급 사이의 갈등이 사회와 세계를 바꿔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음식이나 식품을 다루는 문제 역시 지극히 당연하게도 '계급성'은 어느 한 순간도 배제할 수 없는 핵심이다. 이 책에서는 유럽의 제국들이 식민지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폭력은 말하지 않고, 중세나 현대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 또는 자본가와 농민의 갈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을 '식량폭동'이라고 격하한다. 식량이나 식품에 관한 생산성의 증대는 많은 부분 착취와 관련되어 있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노예 노동이나 농노를 통한 생산성 증대는 말할 것도 없이 계급적 폭력의 결과였다. 이런 내용들이 이 책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전자 조작 식품(GMO)에 관한 것이다. 저자들이 의도적으로 빼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다루기에는 이 책의 내용이 적당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음식의 제국'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당연히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 다뤘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가장 실망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는데, 유전자 조작 식품을 다루지 않음으로 해서, 이 책은 반쪽짜리 책에 불과하고, 명성이 있다면, 스스로 먹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 다루지 않으려면, 이런 책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용기도 없이 음식으로 보는 세계문명사를 다루겠다고 나선 것이라면 만용이거나 사기에 불과하다. 이 책은 나름대로 배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책에는 없는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 아는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이 책만이 갖는 훌륭한 장점을 추려내기는 어렵다. 게다가 책의 구성이나 집필 내용이 너무 산만하고 복잡하게 되어 있어,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음에도 책을 읽어나가기가 어렵다. 무려 24쪽에 달하는 미주가 있지만, 그 많은 참고 문헌이 있음에도 내용은 뛰어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식품 제국'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저자들이 말하는 '식품 제국'의 실체는 대체 무엇일까?
    • 문화
    • 독서
    2021-12-15
  •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하는가
    제목 :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하는가 작가 : 리처드 도킨스 외 출판 : 바다출판사 서문_문 앞에 서 있는 야만 - 존 브록만지적 설계는 왜 과학이론이 아닌가? - 제리 A. 코인반과학에 대처하는 과학자들의 자세 - 레너드 서스킨드지적 설계론자들은 어떻게 대중을 속이는가? - 대니얼 데닛의식은 다윈주의의 아킬레스건인가? - 니콜라스 험프리나는 어떻게 인류의 진화 증거를 발견하는가? - 팀 D. 화이트물에서 뭍으로의 ‘위대한’ 이행 - 닐 슈빈만약 지적 설계자가 외계인이라면…… - 리처드 도킨스다윈은 어떻게 창조론자에서 진화론자로 변신했는가? - 프랭크 J. 설로웨이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 스콧 애트런우리의 도덕 감각 역시 진화한다 - 스티븐 핑커우주의 자연법칙도 진화의 결과다 - 리 스몰린지적 설계에 대한 강력한 반증 - 생물의 자기 조직화 - 스튜어트 A. 카우프만아무 도움 없이 생명을 진화시키는 우주 컴퓨터 - 세스 로이드논쟁의 뿌리 - 오해를 낳는 용어들 - 리사 랜들학교에서 지적 설계론을 가르친다면 어떻게 될까? - 마크 D. 하우저생태-진화 중심의 대안 교육을 고민하자 - 스콧 D. 샘슨부록_펜실베이니아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 판결문 발췌 이 책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글은, 부록으로 실린 펜실베니아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의 판결문 일부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적 설계는 과학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지적 설계가 세 가지 수준에서 실패라고 생각한다. 셋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지적 설계가 과학이라는 판결을 배제하기에 충분하다. 첫째, 지적 설계는 초자연적 인과관계를 끌어들이고 허용함으로써 과학의 수백 년 된 기본 규칙들을 위반한다. 둘째, 지적 설계의 핵심인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논증은 1980년대에 창조과학의 종말을 부른 비논리적이고 결함투성이인 '억지 이원론'을 이용한다. 셋째, 전화론을 부정하는 지적 설계의 공격은 과학계에 의해 반박되었다. 아래서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지적 설계가 과학계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적 설계는 동료 검토를 거친 출판물을 발표한 적이 없고, 검증과 연구의 대상이 된 적도 없다.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를 믿는 사람들은 참 불쌍하다. 그들은 진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우주의 역사를 포함한 자연의 역사가 얼마나 길고, 아름답게 진행되어 왔는가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명백한 사실조차 부정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멍청하고 한심하고, 불쌍해 보인다. 그런 유신론자들을 위해 과학자(진화론자)들은 아주 훌륭한 대안을 마련해 놓고 있다. 즉, 신을 믿는 사람이라도, 진화론을 인정하고 믿는 것에 대해 위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이론인데, 그것은 '신다윈주의'라고 한다. 즉, 유신론자들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으면 된다. 그리고 우주도 창조했고, 지구도, 지구에 사는 생명도 창조했다. 그리고 신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만. 그 이후는 우주의 자연스러운 질서와 생명의 창조는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유기물에서 세포로 진화하는 진화의 과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정하면 유신론자들도 마음 편하고, 진화론과도 전혀 다툼 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공존할 수 있다. 유신론자들로서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만일 이렇게 훌륭한 대안을 외면하고, 여전히 지구 나이가 6천년이라고 주장하고, 환원 불가능을 내세워 설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그 어리석음은 결국 유신론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게 될 뿐이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죽도 사무라이 - 마츠모토 타이요
    죽도 사무라이 - 마츠모토 타이요 모두 여덟 권으로 된 장편 만화. 그동안 출간했던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과는 또 다른, 새로운 형식미를 보여주는 시대극화. 작품의 완결성은 물론, 절묘한 선으로 만화의 미학을 한단계 높였다. 일본 작가지만, 참으로 부럽고, 대단한 작가다. 그의 손을 거쳐 나오는 작품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도, 마츠모토 타이요의 시각은 여느 작가들과 확실하게 다르고, 독특하며, 놀랍다. 그가 '천재 작가'의 소리를 듣는 이유다. 에도시대. 주인공 세노 소이치로는 낯선 마을로 떠돌다 정착한다. 사무라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검은 진검이 아닌 대나무검. 진검이자 보검인 쿠니후사는 전당포에 팔아버린다. 더 이상의 살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백수 노릇을 하면서, 마을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소한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세노 소이치로는 잠시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연쇄 살인이 발생하면서 도읍은 긴장감이 흐른다. 한 권, 한 권이 모두 마치 일러스트 작품집처럼 높은 완결성을 갖고 있으며, 생략과 압축, 다양한 시각(카메라 워킹)은 실제 영화를 보는 듯한 박진감과 현실감을 보여준다. 한국에 번역된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은 다 소장하고 있다. 이 작가의 작품은 반드시 소장할 가치가 있으며, 가까이 두고 자주 보면 볼수록 새로운 감동을 느끼게 된다. 두 번 읽었다. 처음 볼 때보다 더 진한 감동이 있다. 세노 소이치로의 출생과 관련한 비밀이 풀려가는 장면은 감동과 전율이 인다. 원작 소설은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상태다. 소설도 퍽 기대된다. 좋은 만화는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 뿐 아니라,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특히 작가가 표현한 미세한 상징들, 이미지, 농담을 네모 칸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은 활자만으로 되어 있는 문학작품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만화만의 특징이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는 작은 네모 칸에 등장하는 인물들 뿐 아니라 동물, 풍경도 예사롭지 않은데, 인간 외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의인화'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고양이와 개가 사람처럼 말을 하고, 사람과 고양이, 개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또한 가장 핵심이 되는 주인공 세노와 그의 보검 쿠니후사의 이야기는 이 만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보검 쿠니후사는 여성으로 표현되는데, 특이하게도 한쪽 눈을 잃은 여성이다. 왜일까? 쿠니후사는 세노보다 나이가 많다. 그의 아버지 또는 그 이전부터 만들어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보검인데, 일본도의 장인이 만든 이 칼은 당대에서도 보기 드문 칼이었다. 보검은 당연히 의인화할 수 있으며, 주인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세노가 보검 쿠니후사를 전당포에 맡길 때는 비장한 심정이었다. 세노는 자신에게 피의 냄새를 쫓는 악귀가 씌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손과 같았던 칼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만화의 중반부터 등장하는 키쿠치라는 인물은 매우 독특하고 복잡한 인물이다. 그는 세노와는 정 반대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세노와 마지막에 한 판 대결을 펼치게 된다. 키쿠치는 당대 최고의 검객이지만,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매우 비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노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되던 그의 무술은, 그러나 결국 자기 자신을 벨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 그의 칼에는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쌓여 있는 것은 분노와 증오, 원한 같은 피비린내나는 감정들 뿐이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청부살인업자로 살아가게 된 그의 내력은 그의 부모로부터 시작한다. 부모를 죽이는 것으로부터.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도 많지만, 그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살아 있는 듯, 자연스럽고 또 개성을 갖고 있어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사람들은 대개 선량하고 착하게 살아가지만, 에도 시대가 그렇듯 인간말종도 많고, 힘과 권력을 믿고 시건방을 떠는 자들도 많다. 그런 가운데 세노는 마음 속에는 깊은 슬픔을 묻고, 어린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살아가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삶이란 늘 변하기 마련이고, 세노의 시간을 쫓아가는 만화는 슬픔 속에 실낱같은 희망을 본다.
    • 문화
    • 만화
    2021-12-15
  • 조이랜드 - 스티븐 킹
    제목 : 조이랜드 작가 : 스티븐 킹 출판 : 황금가지스티븐 킹의 최근 작품. 명불허전. 장편소설이지만 속도감 있게 읽힌다. 쉬운 문장과 부드럽게 넘어가는 시퀀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와 에피소드들이 적절하게 섞여 있고, 무엇보다 한 청년의 성장소설이 주는 감동이 있다.줄거리는 이렇다.스물한 살의 대학생 데빈은 여자 친구 웬디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겸 놀이공원인 ‘조이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리고 ‘공포의 집’이란 놀이 시설에서 사 년 전 린다 그레이라는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며,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이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공원에서 함께 일하는 점쟁이인 로지 골드는 데빈의 인생에 한 소년소녀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조이랜드의 마스코트 해피 하운드 하위의 인형 탈을 쓰고 일하던 어느 날, 그는 우연치 않게 한 소녀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얼마 후 휠체어를 탄 마이크 로스라는 소년이 그의 삶에 들어오게 되는데…….스티븐 킹 소설의의 가장 큰 장점은 '디테일'이다. 그의 작품은 당연히 픽션이지만, 마치 실제 장소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같은 느낌을 준다.그만큼 소설 속에 필요한 정보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인과관계를 엮어나가는 재주가 탁월하다. 물론 스티븐 킹의 소설에도 우연이 개입하고, 그 우연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면, 스티븐 킹의 소설은 미국 현대사에서 '개인사'나 '생활사'를 복원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주로 스티븐 킹이 태어나 살았던 시기 즉 1940년대부터 현대인데, 그의 작품에도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 등 각 시대별로 소설의 무대가 펼쳐진다. 그럴 때마다 스티븐 킹은 각 시대의 맞는 사회 분위기를 매우 꼼꼼하게 배치하는 것이 큰 매력이다.이 소설의 중심 무대는 '놀이공원'인 '조이랜드'다. 따라서 놀이공원에서 필요한 정보들-각종 놀이시설, 관리인, 아르바이트 학생들,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 기계들의 움직임 등-을 철저하게 조사했고, 그것이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스티븐 킹을 '공포 스릴러' 작가라고 말하지만, 딱히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쇼생크 탈출'을 비롯해 그의 많은 작품들이 '공포 스릴러'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인간의 내면을 깊이 파헤치는 심리 소설인 경우가 더 많았다.스티븐 킹의 인간 심리에 대한 해부는 다른 어떤 작가보다 탁월해서, 소설 속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과 다양한 감정들을 독자가 마치 실제처럼 느끼도록 하는 재주가 있다.이 작품 역시 마지막 장면의 감동과 함께, 한층 성장하는 한 청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1984년
    제목 : 1984년 작가 : 조지 오웰 출판 : 열린책들 다시 읽었다. 이 책이 왜 '세계적인 명작'이고 '걸작'인지 새삼 깨닫는다. 1948년에 쓴 이 작품은 당시 쏘련의 정치상황과 스탈린의 철권 통치를 비판하기 위해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갖고 있다. 알다시피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였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악행, 자본주의 사회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당시 영국 노동자계급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이 책을 쓴 동기는 사이비 공산주의 국가였던 쏘련과 스탈린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빅 브러더'로 상징되는 강력한 통제사회에 대한 예견이다. 그가 바라 본 가까운 미래-불과 36년 뒤-의 사회를 이보다 더 정확하고 날카롭게 예견한 작가는 오직 조지 오웰 뿐이다. 이 작품은 외부당원인 윈스턴이 겪는 사상적 흔들림과 자유 투쟁을 벌이고 있는 비밀조직, 사회를 완벽하게 장악한 '빅 브러더'와 그의 정보망, 정체가 발각되고 난 이후 사상개조의 과정 등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은 '권력'에 관한 부분인데, 윈스턴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인민을 위해 권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권력'이 지향하는 것은 '권력' 그 자체임을 말한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유도 바로 '권력' 그 자체를 지키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보여주는 부패와 음모, 권력의 남용, 폭력 등은 모두 '권력'의 속성이고 본질이기도 하다. 특정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마르크스는 이것을 계급 사회,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했다-사회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투쟁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이 작품은 '디스토피아' 사회, 즉 가장 암울하고 억압적이며, 희망이 없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학자들에 의해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말하고 있는 감시 프로그램이 지금,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나 적용되고 있는가를 조사했더니 무려 80% 가까이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거의 '빅 브러더'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사회 감시와 통제의 수준은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에서, 유일한 희망은 오로지 '프롤'에게 있다고 했다. '프롤'의 존재는 무식, 무지하고 통제하기 쉬우며, 권력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미개한 인민'이라고 했는데, '프롤레타리아'의 준말이기도 하다. 과연, 무지하고 무식하며, 집권 여당의 뜻대로 움직이는 '프롤레타리아'들이 미래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 문화
    • 독서
    2021-12-15
  • 허균(許筠)의 시를 바로 잡다
    허균(許筠)의 시를 바로 잡다 호정(湖亭)-허균(許筠) 煙嵐交翠蕩湖光(연람교취탕호광) :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細踏秋花入竹房(세답추화입죽방) :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頭白八年重到此(두백팔년중도차) : 머리 센 지 팔 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畫船無意載紅粧(화선무의재홍장) :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이 시는 허균이 외지에서 벼슬을 하거나, 귀양에서 8년만에 집에 돌아온 소회를 적은 것으로, 허균의 심정이 잘 드러난 시로 읽힌다. 하지만, 이 시를 여기 번역한 그대로 읽으면 아무 감흥이 없다. 시를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허균 생가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허균이 쓴 시를 번역하면 아래 네 줄에 불과하다. 1)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2)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3)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4)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허균은 시를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으로 써왔다. 그의 다른 시를 보면, 일상에서 벌어진 일을 그대로 기록하는, 생생한 현실감과 현장감이 보이는데,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추상적 느낌이 강하다. 1)연에서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이라고 했다. 안개는 주로 아침에 피어오른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현상은 대기와 물의 온도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데, 허균의 집 바로 옆이 경포호여서 이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봄, 가을, 초겨울 아침이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남기'는 어떨까. 남기는 안개와는 또 다르다. 남기는 호수보다는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옅은 안개나 구름같은 부연 현상을 말하는데, 허균의 집에서는 저 멀리 태백산맥 줄기가 보인다. 그 산줄기에 아침, 저녁으로 남기가 드리우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호수의 물결이 넘실댄다는 표현은 원문과 약간 다른데, 호수에 빛이 넘실거리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우리말로 '윤슬'이다. 빛을 받은 호수의 표면에 비늘같은 햇살이 반짝거리는 것이다. 2)연에서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고 했으니, 1)연에서의 호수는 가을 호수다. 즉 안개와 남기는 가을의 아침에 바라보이는 풍경임을 알 수 있다. '가을 꽃 밟고 밟아'라는 표현은 좀 과격하다. 여기서 느낌은 '세답' 즉 조심스럽게 집밖의 길에 떨어진 꽃을 밟았다고 보는 것이 좋다. 실제로 혀균의 생가 바로 옆에는 아주 넓은 소나무 숲이 있는데, 이곳이 예전에는 허균의 개인 도서관이 있던 '호서장서각' 자리다. 허균은 집에 있을 때 책이 무려 1만권이나 되는 여기 장서각에 와서 책을 읽으며 근처를 산책하곤 했는데, 8년만에 돌아온 그의 감회가 어떨까는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는다. 3)연에서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왔다고 했다. 허균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만, 벼슬을 다섯 차례하고, 세 차례의 유배를 겪었다. 그의 삶이 파란만장한 것은 그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광해군이 그를 아껴 요직에 앉히려 했으나, 허균의 자유로운 영혼은 종종 그의 반대파 수구세력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가 유배지 또는 벼슬에서 8년만에 고향 집에 돌아왔으니 마음은 허허롭고, 시원하며, 쇠굴레를 벗은듯 몸과 마음이 가볍지 않을까. 4)연은 그래서 그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라는 내용은 그러나 이 시에서 가장 난해한 문장이다. 이 문장의 뜻을 모르면 이 시의 느낌도, 맛도 알 수 없는데, 학교에서는 이 시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이 마지막 문장은 그가 아직은 죽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그림배'는 '붉은 단장'과 연결된다. 즉, '붉은 단장'은 상여를 말하니, 상여를 실은 배는 울긋불긋한 그림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림배'는 상여를 실은 배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홍장'이 사람의 이름이라면 내용은 완전히 달라진다. 실제로 강릉에는 경포호와 관련한 옛날 이야기에 '홍장'이라는 기생의 이름이 나온다. ------- 경포8경 가운데 5경으로 홍장야우(紅粧夜雨)가 있다. 홍장은 조선 초기에 석간 조운흘 부사가 강릉에 있을 즈음 부예기로 있었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모 감찰사가 강릉을 순방했을 때, 부사는 호수에다 배를 띄어놓고 부예기 홍장을 불러놓 고 가야금을 켜며 감찰사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미모가 뛰어난 홍장은 그날 밤 감찰사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그 감찰사는 뒷날 홍장과 석별하면서 몇 개월 후에 다시 오겠다고 언약을 남기고 떠나간다. 그러나 한 번 가신님은 소식이 없다. 그리움에 사무친 홍장은 감찰사와 뱃놀이하며 즐겁게 놀던 호수에 나가 넋을 잃고 앉아서 탄식 하고 있는데, 이때 자욱한 안개사이로 감찰사의 환상이 나타나 홍장을 부른다. 홍장은 깜짝 놀라면서 너무 반가워 그쪽으로 달려가다 그만 호수에 빠져 죽는다. 이때부터 이 바위를 홍장 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안개낀 비 오는 날 밤이면 여인의 구슬픈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고 전한다. 꽃배에 임을 싣고 가야금에 흥을 돋우며 술 한 잔 기울이던 옛 선조들의 풍류정신을 회상하기 위 한 기념으로서의 일경이다. 그렇다면, '그림배'는 '꽃배'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꽃배'와 '홍장'은 바로 위의 이야기처럼 경포호에서 양반들이 놀던 풍경인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연의 해석은, '홍장을 꽃배에 싣고 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가 되겠다. 즉, 세파에 시달리다 고향에 돌아오니 풍류를 즐기며 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 아닐까. 따라서, 위의 시를 재해석해 번역하면 아래의 내용이 된다. 1)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 물안개 옅은 구름, 호수에 반짝거리는 윤슬 2)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 가을 꽃 조심히 디뎌가며 대나무 방에 들다 3)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 흰머리되어 팔년, 다시 여기 와보니 4)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 홍장을 꽃배에 싣고 나들이 갈 마음이 없구나
    • 문화
    • 독서
    2021-12-13
  • 부조리와 만화
    부조리와 만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 [괴물들] 예술은 현실의 부조리를 어떻게 표현하며, 어느 수준까지 담아낼 수 있고, 얼마나 강력하게 발언할 수 있을까. 수 많은 예술가들이 당대의 현실에 침묵하지 않고 현실의 부조리함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고, 작품을 통해 발언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한국에서의 학살',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 같은 작품은 작가의 신념과 작품의 사실성이 직접 드러난 경우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1980년 한국에서 크게 일어났던 '민중문학', '민중미술', '민중음악'이 같은 사례에 든다. 이 시기-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시기-참여 예술은 문학, 미술, 음악 등 전방위에 걸쳐 펼쳐졌으며 그때만 해도 '민중만화'라는 규정은 없었으나 만화의 형태로 현실을 반영, 고발하는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어느 사회든 정치적 억압이 강한 독재 정권일수록 그에 대한 반발도 같은 크기로 일어난다. 1970년대 칠레에서 군부독재가 철권 통치를 하면서 수많은 학생, 노동자, 지식인을 살해할 때, 현실을 비판하는 노래를 불렀던 빅토르 하라는 군부독재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다. 1980년대 한국에서도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 청년, 노동자, 지식인들이 감옥으로 끌려가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그럴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투쟁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그때 예술가들이 쓰고, 그리고, 불렀던 예술 작품들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진전하면서 점차 '독재 시기의 특성'으로 남게 되었고, 오늘날 더 이상 소비되지 않는 '예술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1970년대, 1980년대에 활약했던 민중 예술가들의 작품을 1세대라고 한다면, 90년대를 지나 현재의 예술가들은 2세대, 3세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다. '제3세계'로 불리던 나라들은 대개 비슷한 민주주의 경로를 걷고 있는데, 군부독재의 출현과 몰락 역시 비슷하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현실의 부조리는 민주주의의 직접적 파괴-쿠데타, 독재-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의 껍데기를 하고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왜곡된 정치와 '신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로 불리는 자본주의의 첨단 기법이 국민을 얼마나 심하게 착취하고 있는지, 부의 극단적 편중과 빈익빈 부익부의 편차로 인한 사회 갈등, 민족과 인종, 종교가 달라서 오는 갈등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이런 시각으로 볼 때, 만화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작가가 '조 사코'와 ‘박건웅’이다. 조 사코는 '코믹 저널리스트'라는 독특한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만화(그래픽노블)라는 형식에 시사(국제문제, 정치, 경제, 인종, 분쟁 등)를 담아 기록한 것으로, 기존의 글로만 기록했던 저널리즘의 지평을 확대하고, 대중에게 하나의 주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역시 '가자 지구'에서 1956년 11월 12일에 발생한 이스라엘군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현재 시점과 과거 상황을 오가며 이 사건의 배경과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형식은 만화지만 영상으로 그대로 옮겨도 될 만큼 형식미도 뛰어나다. 작가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과정과 어렵게 만난 학살생존자 또는 그의 가족, 친척들의 구술을 통해 과거를 재현한다. 1956년 11월 12일,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지만, 그 사건이 있기까지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은 간단치 않다. 이 시점(1956년)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점령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유대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은 2차 세계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 가운데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가 유대인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가 없었던 유대인들을 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유대인들에게 내주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당한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1948년이고, 이때부터 중동 지역에 분쟁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중동의 대부분 국가는 이슬람을 종교로 갖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종교인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종교적 갈등과 함께 영토 분쟁도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인 아베드와 함께 다니며 5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그때의 생존자를 찾아나섰고, 그 과정을 최대한 면밀히 기록한다. 그가 조사와 취재를 위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있을 때도 역시 이스라엘군에 의한 침탈과 학살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50년 전과 현재가 똑같다고 말한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에 무차별 폭격을 해서 팔레스타인 사람 1,417명이 죽었는데, 이 가운데 352명은 어린이였다. 5,300명이 부상당했으며 시가지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조금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대체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미쳐날뛰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고,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오히려 화를 내야 함에도, 이스라엘은 폭력으로 이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 유대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갈등을 고려한다 해도,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저 미치광이의 태도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1956년에 일어난 가자 지구 학살 사건만 해도, 유대인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히틀러에게 당한 집단학살의 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였는데도, 유대인들은 독일군이 저지른 야만적 행위만큼이나 악랄한 집단 학살을 저지른다. 대체 왜? 분쟁의 불씨를 만든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고,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떠돌아 다닌 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물리적 형태의 '국가'가 절실했다. 결국 피해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오랜 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고, 멀쩡한 자기 집을 어느 날 갑자기 뺐기고, 자기 집에서 쫓겨난 황당한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유대인이 점령지를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거주지는 극적으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1948년에 비하면 1/10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영역에서, 그것도 지리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서로 오가지도 못하는 강제된 분단의 처지에 놓여 있고, 가자 지구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곳은 이스라엘군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어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한국에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 근현대사의 비극, 가해자의 논리로 위장되어 있는 진실을 탐구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만화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서 박건웅 작가는 일관성 있는 작품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 속 부조리를 파헤치고 있다. '괴물'은 박건웅 작가의 신작이다. 그가 오랜 시간 그렸던 단편을 모았다.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외국의 작가들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창작하는 경향이 높다. 그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데, 한국현대사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격동적이고, 드라마틱하며, 격렬한 과정을 겪었던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대개 70년대, 80년대에 태어나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가 있었으며,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부패, 권력자의 오만과 폭력을 눈으로 보며 자랐다. 여기에 대학시절의 학생운동, 사회에 나와 시민운동을 경험하면서 정치의식이 발달하고, 민주주의 학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작가의 작품에 스며들었다. 작가의 경험은 작품세계에 직접 영향을 준다. 특히 그래픽노블이 갖는 장르적 특성은 작가의 자기 서사가 강하고 깊다는 데 있는데, 박건웅을 비롯해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한국현대사와 자기 서사를 일치하는 경향이 많다. 이건 퍽 우연이지만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모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픽노블 작가는 강하고 깊은 자기 서사와 함께 개성 있는 그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나 기호보다는 이미지가 그래픽노블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지가 핵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다른 그래픽노블 작가들과 분명한 변별을 보여준다. 강렬한 흑백의 이미지와 판화 같은 날카로운 선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불 때'처럼 무채색 유화의 분위기가 나는 그림도 있다. 전체적으로 흑백의 강렬함 속에서 날카로운 풍자를 드러내는 작가의 작품은, 작품의 주제와 이미지의 형식이 완벽하게 결합한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박건웅 작가가 소재로 삼는 작품들 가운데는 읽기 불편하고, 힘든 작품이 꽤 많다. 이건 물론 작가의 책임이 아니라, 한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현대사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잔악하며, 끔찍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이미지로 그려야 하므로, 독자보다 오히려 더 큰 트라우마를 겪을 것으로 보는데, 그래서 독자는 박건웅의 작품을 쉽게 읽어나가지 못하게 된다. 작품 '문신'은 단편이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고통스럽다. 한 칸, 한 칸의 이미지가 마치 칼날처럼 몸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일본군이 조선의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은 인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범죄였다. 이런 내용을 심각한 논문이 아닌, 그래픽노블로 본다는 것은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작품집은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 그린 것과, 당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 보면서 만든 작품을 모았다. 단편이지만, 마치 연작처럼 작품의 내용과 수준이 일관되고,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만화비평지 [지금, 만화] 12호에 실린 저의 만화비평입니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만화비평으로 보는 두 컷 만화
    만화비평으로 보는 두 컷 만화 팔로우하고 있는 '재수의 연습장' 작가가 어제 올린 그림을 보고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고 잊어버렸다. 오늘 보니, 이 그림을 두고 엄청난 반응이 쏟아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 그림 아래 달린 댓글과 오늘 작가가 다시 올린 해명과 그 글에 달린 댓글을 읽으면서, 가능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을 해봤다. 어디가,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걸까. 두 컷으로 나뉜 그림은 대사가 없는 윗 그림과 대사가 있는 아래 그림으로 나뉜다. 상황은 딱 한 가지가 달라졌다. 윗 그림에서 작가 부부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중년 남성의 뒷모습이 아래 그림에서 얼굴과 상반신이 약간 돌아간 상태로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은 '코로나19' 상황이어서 마스크를 한 채 뛰고 있다. 이들이 이미 한참 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근거는, 아래 그림에서 독자의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온 여성의 얼굴에 땀이 흐르고, 숨이 내뱉고 있음을 보여주는 입김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두 여성은 반팔 티셔츠에 바지는 어두운 계열의 운동복을 입었는데, 이 하의가 요즘 여성들이 많이 입는 '레깅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달리기를 하려면 운동복이 편해야 하므로 트레이닝복이나 레깅스를 입는 것이 상식으로는 맞다. 따라서 여기서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이 입은 옷, 특히 하의는 어느 정도 몸에 붙는 트레이닝복이나 레깅스라고 전제하자. 아래 그림에서 대사를 하는 사람은 작가 부부다. 행위(몸을 움직이고 시선이 바뀌는 행위)는 중년 남성(개저씨 또는 할저씨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단어의 선택은 명백히 의도된 것으로, 혐오를 조장하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다. 남성들이 된장녀, 김치녀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이 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판단한 것은 작가 부부다. 이때, 우리는 주체와 객체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제3의 주체에 관해 각자의 입장과 주장을 해석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주체'는 달리기를 하는 두 명의 여성이다. 달리기를 하는 여성은 주위 사람의 시선을 딱히 의식하지 않거나, 알고 있어도 무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젊은 여성이고, 몸의 굴곡이 보이는 옷을 입었기 때문에 뭇남성의 시선을 받을 거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두 여성이 달리기를 하는 것도 오늘 처음이 아닐 것이고, 이미 한국에서 젊은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물적, 성적 대상화'되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매초, 매순간마다 그것을 의식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큰틀에서 여성의 '성적 대상화'는 분명 사회적 문제라는 명제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이 순간, 두 여성이 달리기를 하면서 작가 앞을 지나가는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두 여성은 앞에서 다가오는 중년 남성의 존재를 의식하지만, 그 남성이 특별히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더구나 그 남성 뒤에 부부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우산을 쓰고 따라오고 있어서 신변에 위협을 받을 거라고 생각할 가능성은 매우, 매우 낮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은 자연스럽게 중년 남성과 작가 부부의 옆을 달리면서 지나간다. 이때 작가 부부 앞에 있던 중년 남성의 시선이 달리던 두 여성을 향해 움직인다. 중년 남성은 '객체'다. 즉, '주체'가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고, 본래의 의지 - 여기서는 앞으로 쭉 걸어가는 것이 중년 남성의 본래 의지다 - 와는 상관 없는 행동을 하게 되므로, 중년 남성은 주체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반응하는 '객체'로써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스트루프 효과'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은 두 가지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1) 의식적이고 능동적이며 의도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2) 무의식적이고 수동적이며 의도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있는데, 이것은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일 때, 가능한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려는 작용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속 중년 남성은 왜 '스트루프 효과'를 일으키는 것인가가 핵심 질문이 되어야 한다. 여성(남성)을 바라보면 자동으로 시선이 돌아가는 이유와 원리는 무엇인가? 단순히 남성(여성)들이 여성(남성)을 '성적 대상화'하기 때문일까? '스트루프 효과'의 진화심리학적 분석을 하기 전에 먼저, 아래 그림의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자. 중년 남성은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을 따라가며 보고 있다. 이 남성의 시선으로 보자면, 저기 앞쪽에서 두 여성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한 때부터 줄곧 두 여성을 보고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적어도 20미터 앞쪽에서부터는 여성들의 몸매가 보이기 시작할테니 적어도 중년 남성이 고개를 돌리기 몇 초 전부터 여성들을 보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후 두 여성이 중년 남성의 곁을 지나쳐 갈 때 중년 남성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두 여성을 쫓아갔고, 그래서 고개가 돌아간 것이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이해할 것이다. 이제 중년 남성의 '행위'를 두고 해석 가능한 주장을 펼쳐보면 아래와 같다. 1.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고 폭력이며 '성추행'이다. 2. 중년 남성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중년 남성을 비난하는 사람은 1번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고, 단지 시선이 머물렀다고 해서 그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거나 혐오하는 것 자체가 남성혐오, 세대혐오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번에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주체'와 '객체'의 자리에 상반되는 인물을 놓아봄으로써 우선 '상식'의 선에서 이 문제의 반대 논리를 제공할 수 있다. 즉, 명제를 아래처럼 바꿔보면 이렇다. 1. 중년 여성이 젊은 남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고 폭력이며 '성추행'이다. 2. 중년 여성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앞에서 1번에 동의한 사람이라면 이 명제에서도 당연히 1번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2번에 동의한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2번에 동의할 것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 1. 정우성이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그 옆을 지나가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2. 정우성이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그 옆을 지나가던 20대 여성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위의 명제에서 중년 여성과 20대 여성은 정우성을 '시선강간'하고, 그 자체가 폭력이며 '성추행'을 한 것인가? 아래 두 컷 만화에서 중년 남성의 시선을 '시선강간' 또는 '성추행'으로 바라보는 것은 '주체'나 '객체'가 아닌 '제3의 주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데, '제3의 주체'가 발화하는 순간, '주체'와 '객체'는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낙인 찍힌다. '제3의 주체'가 발화한 내용을 보면, '객체'의 행위만으로 '객체'의 존재를 비난한다. 근거는 오직 '객체'의 시선이 움직이는 '행위'뿐이다. 과연 '제3의 주체'는 '객체'의 행위만으로 그를 단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객체'가 동성애자라면? '객체'가 지나가는 두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제3의 주체'가 발화한 내용은 전적으로 '제3의 주체'의 심리적 반응이고, 그것은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중년 남성' 일반 또는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중년 남성'에 대한 적대적 고정 관념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3의 주체' 가운데 남성은 이 그림의 작가로 보여지는데, 아내가 하는 말을 들으며 동조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데, 1) 아내의 발화 내용에 동의하는 것과 2) 아내의 발화 내용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아내의 말을 존중하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작가(남성이다)는 아내의 발화 내용 또는 아내의 일방적 주장에 동조하고 있으므로 왜곡된 페미니즘에 동의하고 있거나, 왜곡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아내의 입장에 동의한다는 점에서 비주체적 인물이다. 이제 '스트루프 효과'의 진화심리학적 내용을 살펴보자. 아래 그림에서는 '중년 남성'이 '20대 여성'을 바라보는 상황으로 특정되어 있지만, 거리를 걷다보면, 사람들은 곧잘 고개를 옆으로 돌려 - 각도의 차이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5도, 10도, 15도...180도까지 - 사람을 볼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 모든 시선을 '시선강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기 때문에 '시선강간'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아래 그림의 중년 남성이 달리는 여성을 바라보면서 '내 딸하고 나이가 비슷한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마스크를 하고 달리려면 숨쉬기가 힘들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선강간'이라는 단어도 극렬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만든 용어로, 남성들의 시선이 불쾌함을 넘어 '눈으로 하는 강간'이라는 매우 폭력적 표현으로 '남성 시선'을 규정하고 있다. 이때 '시선강간'에 해당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지속성(시간), 표현(특정 부위, 위, 아래로 훑는 듯한 시선)인가에 따라 '시선희롱', '시선추행', '시선강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여성이 남성을 바라볼 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 사람(특히 남성)이 사람(특히 여성)을 바라보는 심리적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1) 남성은 성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2) 성적인 독점욕을 가지고 있으며, 3) 젊고 건강한 이성을 선택하려 하고, 4) 시각적인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로 규정할 수 있다.[D. 시먼스, <섹슈얼리티의 진화>] 남성은 여성에 대해 '성적으로 독점하고 싶어하는 경향'과 함께 '성적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욕구도 있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진화론과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진화심리학의 이론적 근거로 아래 그림의 '객체'인 중년 남성을 옹호하거나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심리 상태나 무의식적 행동에 대한 분명한 의도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단지 고개를 돌려 달리는 여성들을 바라본 행위만으로 잠재적 또는 실질적 성범죄 가해자로 예단하는 '제3의 주체'의 발화 내용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내용-진화심리학 이론-을 아래 그림의 '중년 남성'이 알고 있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 인지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개가 돌아갔을 수 있다. 그렇게 '180도' 고개를 꺾어 뛰어가는 여성을 보는 남성이 반드시 그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했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다. 보통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가서 바라본 대상은 그만큼 빨리 잊혀지기 때문인데, 우리가 보통 '성적 대상화'라고 할 때,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라고 말하는 건 명백한 왜곡이고 비틀린 주장이다. 누군가가 '성적 대상'이 되려면 시선을 포함한 물리적 접촉과 함께 '성적 행위'의 매개 또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위에서 진화심리학의 4) 시각적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가 곧 모든 것이 '성', '섹스'에만 집중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진화 단계에서 남성은 주로 수렵을 했기 때문에 움직이는 물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것이 오늘날,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 1), 2), 3)의 내용이 본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래 두 컷 만화에서 '제3의 주체'가 발화하는 내용은 앞의 맥락이 삭제되어 있고, '객체'인 중년 남성의 의도가 배제되어 있으며, '제3의 주체'가 가진 명백한 확증편향과 선입견, 예단 그리고 중년 남성에 대한 편견으로 혐오 발언을 하고 있다.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오직 '시선강간' 한 가지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는 만큼이나 못 생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간과 기회도 많다는 것이 발표되었다. 즉, 남성은 꼭 아름다운 여성만 보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못 생긴 여성도 여성이니까 '성적 대상화'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건 그냥 자신의 경험에 미루어 짐작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것은 '시선강간'을 하려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극히, 매우 극히 드물게 그런 변태 남성도 있겠지만, 대부분 남성은 여성을 바라보고 곧바로 자기가 갈 길을 가며, 자기가 바라본 여성에 대해서도 곧바로 잊는다. 그런 점에서 아래의 두 컷 만화는 특히 '중년 남성'의 시선으로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고 '성추행'이라는 뉘앙스로 남성 혐오 발언을 하고 있고, 이것은 명백하게 '제3의 주체'가 주관적 판단 오류 내지는 악의적 왜곡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제목 :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작가 : 조 사코 출판 : 글논그림밭 만화책이지만,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것이 괴로울 정도로, 이 만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정면에서 그리고 있다. 우리는 중동의 역사에 대해 많은 부분 무지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들과 우리의 접점이 약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너무 심하게 미국과 유럽 쪽 역사에 편향된 교육만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동 뿐이랴. 아프리카의 역사는 어떤가. 우리가 수단이나 나미비아, 탄자니아 같은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강자의 역사, 승리한 자의 기록, 편향과 왜곡으로 점철된 역사일 뿐임을 새삼 깨닫는다. 예를 들어, 미국의 역사를 말할 때도 우리는 미국의 '백인'들이 기록한 역사를 읽고, 판단한다. 미국인-주로 백인-들이 가장 충격적인 책으로 꼽는 것이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인데, 미국인의 주류인 백인들도 '미국민중사'에서 말하는 역사의 내용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그렇듯, 어느 나라의 역사든 기록은 왜곡되고, 편향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는 어떤가. 심지어 자기나라의 역사조차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려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하물며 세계사라니. 결국 이런 역사 공부를 하려면 혼자 책을 찾아 읽는 방법 외에는 없다. 올바른 세계관을 갖기 위한 가장 첫번째 단계는 '역사'를 올바르게 공부하는 것이다. 역사를 모르거나 배우지 않거나, 잘못 배우면, 그 위에 쌓는 지식은 모두 잘못될 수밖에 없다. 이 만화책에서 작가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기억하지 않거나, 기억에서 멀어진 1956년의 학살 사건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든다.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사람, 남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수 백 명을 학살한 사건인데, 이런 처참한 학살 행위가 UN보고서에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1947년 이후 오늘날,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미국과 영국이라는 강대국이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의 여러나라들도 같은 이슬람 국가인 팔레스타인을 돕지 못하거나, 않는 이유는 그들 내부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즉,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와 결탁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집권층이 존재하는 나라는 '친서방' 국가로 분류되고, '반미, 반유럽'을 외치는 나라들은 미국에 의해 '테러국가'로 낙인 찍히고 미군의 침략에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는 운명을 갖는 것이다. 거대한 역사는 추상적이지만, 이렇게 개인의 운명을 다루는 미시적 역사 기록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의 입장이라면 과연 어떨까.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와 비교하면 어떨까. 저항하다 죽는 것과 굴종으로 살아가는 것, 오로지 그 두 가지 방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때,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까. 당신은. 조 사코는 '코믹 저널리스트'라는 독특한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만화(그래픽노블)라는 형식에 시사(국제문제, 정치, 경제, 인종, 분쟁 등)를 담아 기록한 것으로, 기존의 글로만 기록했던 저널리즘의 지평을 확대하고, 대중에게 하나의 주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역시 '가자 지구'에서 1956년 11월 12일에 발생한 이스라엘군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현재 시점과 과거 상황을 오가며 이 사건의 배경과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형식은 만화지만 영상으로 그대로 옮겨도 될 만큼 형식미도 뛰어나다. 작가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과정과 어렵게 만난 학살생존자 또는 그의 가족, 친척들의 구술을 통해 과거를 재현한다. 1956년 11월 12일,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지만, 그 사건이 있기까지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은 간단치 않다. 이 시점(1956년)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점령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유대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은 2차 세계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 가운데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가 유대인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가 없었던 유대인들을 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유대인들에게 내주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당한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1948년이고, 이때부터 중동 지역에 분쟁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중동의 대부분 국가는 이슬람을 종교로 갖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종교인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종교적 갈등과 함께 영토 분쟁도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이집트의 국내 정치 상황과 이슬람 패권주의, 이집트와 영국, 프랑스, 미국 사이에 벌어진 수에즈 운하 국유화 사건, 이집트 내부의 이슬람 근본주의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정치적 긴장, 범 이슬람 진영과 범 친미 진영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 등 복잡한 양상이 바탕에 깔려 있지만, 궁극적인 원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기존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동에서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고, 여기에 이스라엘은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을 든든한 배경으로 업고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과 전쟁을 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다. 자신들이 살던 땅을 유대인들에게 뺐긴 것도 억울한데, 이집트와 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군에 쫓겨 어쩔 수 없이 가자 지구로 들어온 사람들은 허허벌판에서 움막을 짓고 살아야 했다. 마치 한국에서 남북한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땅에서 거지처럼 살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들은 자신의 집, 재산을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맨손으로 가자 지구로 들어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마져도 이스라엘군의 감시와 통제, 예측할 수 없는 학살로 인한 공포 속에서 늘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극우파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이들 극우파는 주변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보다는 폭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했고, 11월 2일 가자 지구를 침략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군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인 남성들을 밖으로 끌어내 아무 이유 없이 집단 학살을 시작했고, 학살당한 사람은 최소 수백 명에 이른다. 생존자의 증언, 생존자 가족, 친지, 이웃의 증언, 학살당한 가족, 친지, 이웃, 친구의 증언이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기록되기 시작한다.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인 아베드와 함께 다니며 5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그때의 생존자를 찾아나섰고, 그 과정을 최대한 면밀히 기록한다. 그가 조사와 취재를 위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있을 때도 역시 이스라엘군에 의한 침탈과 학살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50년 전과 현재가 똑같다고 말한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에 무차별 폭격을 해서 팔레스타인 사람 1,417명이 죽었는데, 이 가운데 352명은 어린이였다. 5,300명이 부상당했으며 시가지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조금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대체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미쳐날뛰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고,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오히려 화를 내야 함에도, 이스라엘은 폭력으로 이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 유대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갈등을 고려한다 해도,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저 미치광이의 태도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1956년에 일어난 가자 지구 학살 사건만 해도, 유대인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히틀러에게 당한 집단학살의 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였는데도, 유대인들은 독일군이 저지른 야만적 행위만큼이나 악랄한 집단 학살을 저지른다. 대체 왜? 분쟁의 불씨를 만든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고,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떠돌아 다닌 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물리적 형태의 '국가'가 절실했다. 결국 피해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오랜 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고, 멀쩡한 자기 집을 어느 날 갑자기 뺐기고, 자기 집에서 쫓겨난 황당한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유대인이 점령지를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거주지는 극적으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1948년에 비하면 1/10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영역에서, 그것도 지리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서로 오가지도 못하는 강제된 분단의 처지에 놓여 있고, 가자 지구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곳은 이스라엘군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어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자면, 일본군이 지금 서울 면적에 한국인 5천만 명을 집어 넣고, 서울 외곽 경계에 높은 담장을 두르고, 서울에서 나가거나 들어올 때마다 검문, 검색을 하며, 아무런 통지 없이 출입문을 닫아 걸고 몇날 며칠을 통행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필품도 부족하고, 인구 밀도는 엄청나게 높고, 경제 활동이랄 것도 없어서 거의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고,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한 빈곤층이 90%에 이르고, 상하수도를 비롯한 기반 시설이 붕괴되어 거의 원시상태에 가까운 삶이라면, 폭동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 일본군과 싸우고, 자살폭탄테러를 하는 것이 최후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누구를 원망하게 될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놓여 있는 현재의 삶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방 사회 즉 제국주의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몸부림을 '테러'로 규정한다. 그리고는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대등한 상태에서 '분쟁'을 하고, 전쟁을 하고 있다고 떠들고 있다. 현실은 이스라엘의 일방적 폭행과 폭력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나가고 있으며, 지난 60년 동안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악의적으로 왜곡,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과거 유대 민족처럼 '국가'가 없고, 중동 지역에 흩어져 살던 민족이어서 지금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들의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고, 가해자 이스라엘의 악행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누구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의 팔레스타인 현실은 실재하는 지옥이라고 해야 한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제목 :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작가 : 김홍모 출판 : 창비 7년, 아직도 세월호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부는 왜 존재하는 걸까. 정부는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던 2014년 4월 16일. 그 이후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침몰의 사실을 밝히라는 시민의 비통한 목소리를 폭력으로 탄압하고, 언론과 정치권 역시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도,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시민들(일부를 제외하고)이 세월호 참사와 희생자, 유가족을 끌어안고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각오로 7년을 버텼다. 무능하고 천박하며, 악랄하고 야비한 박근혜 정부를 촛불로 끌어내린 시민은 문재인 정부를 세우고, 국회의석도 민주당에 180석을 밀어주었지만, 정부와 여당은 집권하고 무려 4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명백히 촛불시민에 대한 배신이며, 역사의 정의를 거스르는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 씨와 그의 가족, 다른 생존자들을 인터뷰해서 완성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위해 세월호 참사 관련 영상과 자료를 거의 모두 찾아봤으며, 시나리오를 완성할 때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도 세월호 참사 이후 그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참사는 기억하되 참사의 디테일은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희생자의 얼굴을 바라보면, 나 역시 그 깊은 고통과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세월호 참사를 알리려고 스스로 그 고통과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와 사실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용기이며 많은 시민에게 희망을 주는 행동이다. 1부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학생과 시민을 구한 '민용'의 증언을 토대로 한 내용. 민용은 세월호에 트럭을 싣고 인천에서 제주를 오가는 트럭기사로, 세월호 참사 당일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남아 학생과 시민을 구한 의인이다. 하지만 정부와 언론은 민용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민용은 배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민용에게 세상은 단순하다. 거짓말 하는 것은 나쁘고, 어려움에 놓여 있는 사람은 도와주어야 하며, 특히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최선을 다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정부는 국민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며, 대통령과 장관, 공무원은 국민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상식적인 사람이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대통령을 비롯해 공무원, 경찰, 언론 등 정부를 구성하는 모든 분야에서 거짓말과 회유, 협박을 하며 민용을 압박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 그는 정부의 존재가 거대한 악마의 모습 그 자체였다. 2부 민용의 딸 안나는 고등학생이다. 인천에서 제주로 수학여행을 오던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2학년이었고, 그 학생들을 구하다 몸과 마음이 망가진 아버지 민용을 옆에서 지켜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아버지는 자책과 트라우마로 우을증을 앓고, 자해를 해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간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안나는 친구들과 함께 '세월호 기억 플래시몹'을 준비한다. 안나와 친구들은 고3으로 수험공부를 해야 했지만, 그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의 일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제주신성여고, 제주여고, 중앙여고, 제주일고, 대기고 학생들과 연합해 플래시몹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대학에 진학한 안나는 언니 나연과 같은 '응급구조학과'를 전공한다. 언니 나연이 '응급구조학과'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었지만, 안나가 '응급구조학과'를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세월호에서 많은 학생, 시민의 목숨을 구한 것이 안나는 많이 자랑스럽다. 3부 세월호 생존자 민용과 그의 가족, 아내와 두 딸(나연, 안나)은 민용을 지켜보며 함께 괴로워한다. 민용은 세월호 참사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몇 번의 자해를 하며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를 안전하게 구하라는 말을 하지만, 정부와 주위 사람들은 오히려 민용을 비난한다. 희생자 가족은 말할 것도 없지만, 생존자와 생존자 가족들의 삶도 세월호 참사 당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세월호 침몰의 사실을 밝히고, 희생자, 유가족, 생존자, 생존자 가족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치료가 절실함에도 박근혜 정부는 그들을 '빨갱이' 취급했으며, 패륜집단인 '일베'는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를 모욕하고 조롱하는데도 정부는 그걸 방관하고, 심지어 조장했다. 그것이 박근혜 정권의 정체성이었다면,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런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지만, 이런 패륜집단과 악랄한 반인륜 발언을 하는 자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의 역사에서 그 전과 이후를 가를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이 완전하게 사실이 드러나고, 원인을 제공한 자들, 가해자들이 모두 처벌받고, 희생자, 유가족, 생존자, 생존자 가족이 납득할 만한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받지 않는 한, 절대 끝날 수 없는, 끝나서도 안 되는 사건이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아 김홍모 작가의 '홀'이 나온 것이 세월호 참사의 사실을 밝히는 데 작은 밑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문밖의 사람들
    제목 : 문밖의 사람들 작가 : 김성희, 김수박 출판 : 보리 1988년 무렵에 나는 구로공단에 있는 영세한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삼미금속'이라는 회사였는데, 도금 공장이었다. 일당을 많이 벌려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것이 나았고, 군대 입대 전에는 3년 정도 배관공으로 일을 한 경력도 있어서 나는 공사현장이나 매형이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파견 노동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는 중동 건설 붐이 일고 있었고, 몇 년만 다녀오면 집을 한 채 마련할 수 있을 정도여서 인기가 높았다. 나는 그런 기회를 잡았지만,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중동에 가지 못했다. 구로공단의 영세한 공장에 들어가게 된 것은 내 밥벌이도 있었지만, 그때 함께 공부하던 선배들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70년대 후반부터 알게 된 독서회는 번성했고, 내가 살던 지역에 새로운 독서회가 생기면서, 그곳에서 선배, 친구들을 만났다. 이들 가운데 극소수가 따로 '스터디'를 했는데, 사회과학 공부였다. 나는 정규 학교를 다닌 것이 국민학교가 전부였으므로 이때만큼 열심히, 깊이 있게 공부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검정고시로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대학에 진학할 생각도 있었지만, 선배들은 대학보다는 현장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나는 대학생이 아니었으므로 '위장취업'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노동자였고, 이미 몇몇 공장을 전전하고 있었다. 휴대용 가스렌지를 조립하는 공장, 텔레비전 케이스에 필름을 씌우는 공장 등을 거치면서 저녁에 집에 돌아와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제1회 전태일문학상에 당선되었고, 나는 '노동자 작가'가 되었다. 그래도 삶은 달라지지 않았고, 올림픽이 열린다는 그 해에도 도금 공장에 다니며, 삶은 어둡고 무거웠다.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었지만, 노동자의 의식은 낮았고, 회사의 감시는 심했다. 도금공장에는 황산, 염산 원액과 시안화나트륨(청산가리), 시안화칼륨 등 독극물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심지어 시안화나트륨은 작은 흰색 덩어리인데, 드럼통으로 가득 우리들이 옷을 갈아 입는 탈의식에 놓여 있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청산가리를 가지고 나갈 수 있었다. 염산, 황산, 시안화나트륨, 시안화칼륨 등 독극물을 취급하면서도 우리는 고무장화와 고무장갑만 끼었을 뿐, 보호안경도 없었다. 그 용액이 눈에 튀어 들어가면 물로 씻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일하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문송면 군이 수은중독으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렇게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면서도 노동자들은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쉬는 날 등산도 하고, 가끔 야근을 하지 않을 때는 저녁도 먹으면서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 슬쩍 떠봤지만, 그들도 이 공장에서 오래 일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영세한 공장에서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고가 지금, 경제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파견노동자, 하청노동자, 비정규노동자 등으로 더 잘게 쪼개져 차별당하는 노동자의 현실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정치는 군사독재에서 민주정부로 진보했지만, 노동자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성장하고, 수출이 세계 10위권이고, 국민총생산, 국가총생산, 1인당 국민소득 등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노동자의 소득도 증가하고,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으며, 개인의 절대적 삶의 환경도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이 성장하고, 자본가와 부르주아가 가져가는 부의 크기에 비하면, 노동자들의 몫은 상대적으로 더 작아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즉, 사회의 부가 커지면 거의 대부분을 소수의 자본가와 부르주아가 차지하고, 다수의 노동자는 아주 적은 몫을 나눠 갖는 것이다. 이것을 서양 자본주의에서는 '신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한국은 특히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빈부의 격차는 더 극심하게 벌어지고, 노동자의 고용 불안정이 깊어졌다. 정규직, 비정규직, 하청, 파견 노동자 등으로 세분화한 것도 외환 위기 이후부터였다. 이렇게 노동자의 고용 환경이 나빠지면서 노동자의 삶은 더 불안정하고, 임금 격차는 커지게 되었다. 자본은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본능이고,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여기기 때문에, 노동자의 죽음을 하찮게 여긴다. 이 작품에서 메탄올 독성으로 실명하게 된 여섯 명의 청년 노동자들도 자본의 이윤 추구에 소모품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역사는 민주주의로 발전하면서 인권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 인권의 확대로 인해 노동시간은 줄어들고, 각종 차별은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으며, 노동 환경도 개선되고 있다. 주5일 노동, 최저임금제 등 노동자의 권익이 향상되는 것도 시대의 당연한 흐름이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은 서양의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노동자의 처지가 매우 열악하고, 자본의 착취가 악랄한 현실이다. 자본가의 범죄는 가볍게 처벌되고,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파업은 무겁게 처벌된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해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이 고전적 형태의 자본 축적에 관한 해석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금융자본의 진화로 자본의 축적은 더 다양하게 발전하고, 노동자의 착취도 세련되게 바뀌었다. 여기에 노동자도 인간으로의 욕망을 가진 존재라서 이기심, 경쟁 같은 자본주의의 특성에 쉽게 빠지게 된다. 괴물이 된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건 민주주의와 인권, 복지를 바탕으로 하는 정부의 통제와 제도적 장치다.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고, 자본(가)의 범법 행위를 미리 감시하는 구조를 만들고, 자본가가 범죄를 저지르면 강하게 처벌하는 법률을 만드는 등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있지만, 그런 일을 하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을 자본이 매수하는 방식으로 길들여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여기에 사법부까지 매수하면서 자본은 모든 권력을 길들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인은 자본가다. 그들은 막강한 자본으로 국가를 장악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노동자는 다수지만 가진 것은 오직 '머릿수' 뿐이다.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통해 자본가와 힘겨루기를 하지만, 사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는 전진기지 역할을 해야 하며,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의 혁명을 통해 끝장난다는 것이 고전적 혁명이론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한 존재다. 평등하지는 않지만, 동등한 존재임에도 노동자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간다. 인류의 역사가 불평등과 차별의 역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 보편의 평등과 인권이 확대되고, 부의 집중과 편향도 줄어들어드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기 위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리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상황에 놓인 노동자들과 노동자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위험한 공장에 취업하고, 파견노동자가 된다. 공장은 하청, 재하청으로 내려오는 구조로 생산단가가 깎이고, 영세공장의 자본가는 최소한의 임금에서 이윤을 남기려고 독극물을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쓰게 된다. 산재를 당한 노동자들을 돕는 단체의 일꾼들 역시 열악한 처지에 있지만, 이들은 한결 같이 어려운 처지의 노동자와 함께 한다. 올바른 국가라면 이들 일꾼들이 하는 일은 모두 정부의 기관에서 해야 할 일이다. 정부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와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단체를 만들어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최저 임금 이하의 '생존비'를 받으며 일하면서도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에게만 기대야 하는 걸까. 한국 그래픽노블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놓치지 않고 천착한다는 점에서, 김성희, 박수박 작가를 비롯한 그래픽노블 작가들의 성과가 놀랍고, 대단하다. 다른 장르보다 그래픽노블이 갖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화 장르가 기존의 '오락물'이라는 선입견을 떨치고, 깊이 있고 진지한 장르일 수 있다는 걸 그래픽노블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다. 만화는 현실을 조금 떨어져서 보는 효과가 있다. 소설은 상상을 통해, 영화는 미장센을 통해 리얼리즘을 구축한다. 만화는 단순화한 선으로 사물을 표현하기에 실제 현실 세계가 아닌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비현실성은 독자가 작품 속 세계와 현재(실제 세계)의 중간에서 작품과 현실을 오가며 비교, 판단할 수 있는 거리를 두게 만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지금, 현재 일어난 사건이지만 마치 1970년대, 1980년대 일어난 사건처럼 보인다. 그만큼 비정상적 사건이라는 뜻이다. 내용에도 나오지만, 후진국에서조차 일어나지 않는 미개한 수준의 사건이라는 뜻인데, 자본가와 관리자들이 화학물질을 다루는 기본의 기본 조차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고, 그 원인은 오로지 '단가'를 맞추기 위한 것이며, '단가'를 맞춘다는 것은 영세 자본가가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비현실적 사건과 상황을 표현하는 김성희 작가의 그림은 디테일이 많이 생략된 단순한 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단순한 듯 보이는 그림은 오히려 실사화보다 작품의 내용에 몰입하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구체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는 장면에서는 디테일이 살아난다. 67쪽과 89쪽에 등장하는 박근혜의 그림은 다르다. 같은 인물을 실제 인물과 매우 비슷하게 그리거나, 만화화 해서 표현하는 것은 작가가 그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픈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노블은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그림과 함께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는 기능도 있다. 이 작품 역시 언론에 보도되기는 했지만, 실제 내용 전체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김성희, 김수박 작가는 밀도 있는 취재를 통해 사건의 시작, 피해 노동자 개인의 삶, 노동자를 돕는 단체와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영세기업과 대기업의 태도 등 이 사건을 둘러싼 노동자와 자본의 이해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어린 학생들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수업 재료로도 훌륭한 교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레드 로자
    제목 : 레드 로자 작가 : 케이트 에반스 출판 : 산처럼 80년대, 사회과학 공부를 할 때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몰랐다. 시간이 지나서 '레닌보다 뛰어난 이론가'였던 로자의 평전을 읽었다. 로자의 비범함은 물론이지만, 당시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의 비겁한 태도를 보면서, 유럽에서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로자가 살던 시대는 '혁명의 시대'였다. 로자는 1871년, 폴란드의 도시 자모시치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는 폴라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우크라이나 국경 쪽으로 붙은 도시였고, 유대인들이 전체 주민의 약 30%를 차지할 만큼 많았다. 현재의 자모시치 구 시가지는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모시치 시는 폴란드의 귀족이었던 얀 자모이스키가 16세기에 세운 도시로, 서유럽과 북유럽을 연결하는 무역로에 세운 도시다. 도시 설계는 이탈리아 건축가 베르난도 모란도가 했으며,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양식을 적용한 아름다운 도시로 이름이 있다. 로자는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자유롭고 진보적인 성향이어서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폴라드인'의 정체성을 갖도록 자식을 키웠으며, 부자는 아니었지만 자식들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부모였다. 그런 부모에게서 막내로 태어난 로자는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고,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다. 하지만 다섯 살 무렵, 그는 한쪽 다리가 뒤틀리며 키도 자라지 않아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았다. 로자는 여성, 장애인, 유대인이라는 여러 겹의 차별과 억압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그의 지성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에 자기의 사상을 널리 알릴 만큼 뛰어났다. 로자가 세 살되는 해, 1873년에 로자의 가족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이주한다. 바르샤바 역시 유대인 인구가 전체의 약 30%에 이를 정도로 많았고, 로자는 중산층 집안에서 자유롭게 성장했다. 로자가 성장하던 바르샤바는 폴란드, 독일,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도시였으며, 유대인 공동체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자의 부모는 유대인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특정한 종교나 정파에 소속하지 않은, 진보적 시민으로 살아갔다. 이런 환경에서 로자는 폴란드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까지 네 개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었다. 이런 재능은 로자의 장애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육체적 장애로 인한 제한된 자유를 확장하기 위해 로자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우연의 일치지만,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도 1871년, 로자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그는 천식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을 평생 앓았다. 마르셀도 육제적 장애를 지닌 채 글을 쓰기 시작했고,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남겼다. 재능 있는 사람은 스스로 빛을 낸다. 비록 육체가 자유롭지 못하다 해도, 지성까지 장애를 갖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들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로자는 불과 아홉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독일어로 쓴 시와 산문들을 번역하고, 자신의 글을 써서 바르샤바에서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에 실린다. 1881년 3월 1일, 러시에서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파' 단원들에게 암살당한다. 이들 무정부주의자들 가운데 폴란드인 '이그나치 리니에비에드츠키'가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압제에 있었던 폴란드인들은 속으로 환호했지만,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암살단원 가운데는 러시아 여성 '소피아 페로프스카야'도 있었고, 그녀는 이 그룹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재판을 통해 이들은 모두 사형당하고, 로자는 그들의 소식을 신문을 통해 들으면서, 여성 혁명가의 삶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로자가 중학생이던 1883년 무렵, 처음으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 시기에도 '프롤레타리아 당'에서 활동하던 혁명가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특히 여성 혁명가의 체포와 죽음은 로자에게 특별한 충격을 주었다. 1885년에 '프롤레타리아 당' 당원이자 혁명가인 여성 두명, 19살의 마리아 보후스제비치와 로살리아 펠센하르트가 경찰에 체포되어 죽고, 1886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당' 지도부 네 명이 바르샤바 성채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로자는 자신도 뭔가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15살 무렵 '프롤레타리아 당'에 가입한다. 로자가 '혁명가'의 삶을 선택한 것은 시대적 소명을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인으로 러시아 제국에 압제를 당하는 조국의 현실, 수많은 진보 지식인, 학생들의 반제국 투쟁, 로자가 다니는 학교에서 겪었던 차별, 여성의 사회적 제약,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의 고통 등 여러 겹의 구조적 모순이 로자를 내리 눌렀고, 로자는 그런 차별과 억압에 정면으로 저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6살의 로자는 이미 차르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으며, 그는 이때 마르크스, 엥겔스의 자적을 읽기 시작했다. 비밀 조직이었던 '프롤레타리아 당'과 나중에 결성한 '폴란드 노동자 연맹' 등에 대한 경찰의 감시와 탄압은 심해지고, 1888년, 17살이 된 로자는 여권을 만들어 스위스로 탈출한다. 불과 5년 전, 마르크스가 영국에서 사망했다. 로자는 취리히대학 철학과에 등록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수강한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물론, 다윈의 진화론을 비롯해 수학, 생물학 등 과학 분야의 지식을 쌓아간다. 사회주의자가 가져야 할 덕목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분야가 바로 '과학'이다. 과학과 철학은 철저하게 이성적 활동이며, 과학은 특히 객관적 근거가 증명되어야 하는 엄격한 분야여서 논리와 분석, 구조를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자, 사회주의자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학문이기도 했다. 스위스, 취리히에는 이미 정착한 선배 혁명가들이 많았고, 그는 폴란드 혁명가들은 물론, 러시아, 독일의 유명한 혁명가들의 흔적을 찾았고, 그들을 만나 교류했다. 그는 1893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제3차 대회'에서 발언하며 선배, 동료 혁명가들로부터 진짜 혁명가로 인정받는다. 1898년, 독일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바르샤바로 가서 혁명에 동참했다. 이때부터 로자의 고난이 시작된다. 러시아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갇혔으며, 1911년에는 인터내셔널 사회주의국의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1915년에는 다시 독일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된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경찰의 감시를 받는 '보호관찰' 대상자였음에도 급진 좌파 단체인 '스파르타쿠스'의 지도부로 참여하게 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레닌의 지도로 성공하면서 1918년에는 독일공산당 창립 총회에서 연설하고, 1919년, 운명의 그해에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배후로 체포되어 학살당한다. 혁명의 시기,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깃발을 내걸고 투쟁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당대를 가장 앞서 가는 지성인들이었다. 다수의 민중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들은 목숨을 걸로 투쟁했으며, 그들이 살았던 당대는 제국주의 폭력이 세상을 망치고 있었다. 진보적 지성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당연히 반제국주의였으며, 사회주의 이론은 그들의 무기였다. 로자는 독일 야경단에 잡혀 살해당하기 전까지 네 권의 책을 썼다. '자본의 축적'은 1913년에 쓴 저작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설명하고 있는 자본의 축적 과정을 자본과 제국주의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러시아 혁명' 등의 저작을 남긴 로자는 유대인, 여성, 장애인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난 사회주의자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다. 그가 가진 불리함 때문에 여전히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악마의 일기
    제목 : 악마의 일기 작가 : 박건웅 출판 : 우리나비 잠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책을 읽고 자는 습관이 있는데, 어제는 막 도착한 이 책을 손에 들었다. 몇 페이지만 읽으려다 그만 다 읽고 말았다. 80년대 중반 그러니까 20대 중반에 선배들과 사회과학 공부를 할 때 정치, 경제, 철학, 역사를 집중해서 공부했는데, 한국근현대사도 그때 기본을 배웠다. 한국 역사-통사-를 처음 배울 때, '민중사'의 관점으로 배우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지배자의 관점으로 쓴 역사이거나, 친일 역사의 관점으로 쓴 역사를 배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정치와 뗄 수 없으며, 정치는 경제와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는 걸 바탕에 깔고 공부해야 한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1984년 동학혁명부터 1987년 노동자대투쟁까지-를 올바르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결코 일베충이나 친일매국노가 될 수 없다. 지금 일베충과 친일매국노, 민족반역자들이 날뛰는 건, 그들이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학교 교육이 그만큼 부실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학교 교육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 건 영어, 수학 따위가 아니라 역사여야 한다. 일제강점기 시기 친일매국노의 범죄와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한 항쟁, 해방 이후 이승만 도당의 독재와 만행을 가르치지 않았기에 비뚤어진 역사인식을 가진 일베충과 매국노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아직도 전체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이승만 정권의 최대 학살 사건이자 한국현대사에게 가장 비극적인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에 벌어졌지만, 이 학살 사건과 한줄로 연결되는 또 다른 학살 사건인 '제주4.3'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1947년 3월부터 시작된 제주4.3 봉기는 제주 경찰이 3.1만세운동 기념식에서 무고한 시민에게 총을 쏴 학살한 사건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제주도에는 인구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갔던 제주도민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1947년 무렵 약 30만 명에 이르렀던 제주도민 가운데 당연히 다양한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공산주의자, 남로당원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에서 남로당을 '토벌'한다는 목적을 갖고 군대를 투입했고, 이건 다시 1948년 '여수, 순천 사건'으로 연결된다. 즉, 1950년 6월 25일, 공식적으로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던 한국전쟁과 그 직후 벌어졌던 '보도연맹 학살 사건' 이전에 이승만과 극우집단은 대구10.1 사건(1946년), 제주4.3(1947년), 여수, 순천 사건(1948년) 등 일련의 조선노동당과 공산주의자, 진보적 지식인, 노동자들이 일으킨 봉기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미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 노동자, 지식인은 물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전력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보도연맹'을 조직한다. 보도연맹을 기획, 관리한 자들은 한때 좌익 활동을 하다 전향한 배신자들과 극우, 친일매국노, 북한에서 내려온 개신교도 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이 주도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예비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불법 체포해 감옥이나 큰 건물에 몰아 넣었고, 그렇게 잡아온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악마의 일기'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그린 그래픽노블이다. 이 작품의 원작은 박만순 선생님의 저작 '기억전쟁'임을 작가가 밝히고 있다. 작품은 여러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이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다락방 해방 창고 이름 목총 닭 귀신 외무덤 삼형제 두 얼굴 굴 호환 만세 순이 만남 기억 증언 작품의 형식을 보면, 작가는 그림 형식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창고'부터 '순이'까지는 의도적으로 어린이가 그린 듯한, 서툰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부분은 실제 학살 장면이 등장하고,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의 만행이 잔혹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많아서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림을 서툴게 표현함으로써 공포를 누그러뜨리지만, 어린이의 시각으로 보는 듯한 솔직함으로 이승만 정부가 국민을 어떻게 학살했는지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창고'에서 '순이'까지 보도연맹 학살의 직접 내용은 한 소년의 일기처럼 기록되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그림일기를 쓴 형식을 따라 윗부분에는 그림을 그리고, 아래는 내용을 적는 형식이다. 그림은 단순하고, 내용은 짧고 간략하게 생략되어 있지만, 독자는 오히려 그 간략한 형식의 그림과 짧은 내용만으로도 사건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앞부분 '다락방'과 '해방'에서는 주인공 '육삼이'의 이야기와 그가 '악마'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일제강점기 시기, 어린이였던 육삼이는 햇볕을 보면 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는 병이 있어 다락방에서 지낸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자, 아버지가 목사였지만 몸에 666 문신을 새기고 나왔다고 해서 부모도 그를 '악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육삼이는 가장 친한 친구 필순이와 사이 좋게 지내면서 행복한 시기를 보내지만, 자기 뜻과는 상관 없이 보도연맹 가입자들 속에 묻혀 들어가 군인에게 학살당하고, '악마'로 부활한다. 그리고 그는 '창고'부터 '순이'까지 이승만 정부가 저지른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목격하고, '만남'에서 전쟁이 끝나고 4.19혁명이 일어난 이후,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을 찾아간다. 이승만은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후 박정희 군사쿠데타, 전두환 군사쿠데타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가 압축되어 나타나고, 1987년 민주항쟁이 그려진다. '기억'에서는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이 나오고, 세월호 참사가 기록된다. 악마가 된 육삼이는 자신이 살았던 고향에 가 보지만, 고향은 골프장으로, 아파트로, 모텔로, 대형 교회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육삼이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666이 사실은 999 즉 '은하철도 999'의 철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기의 보금자리였던 다락방 속으로 들어가 엄마를 만난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영혼으로 사라진 육삼이를 보도연맹 발굴단이 학살당한 사람들이 묻힌 곳을 파헤쳐 육삼이의 유골을 발견한다. '증언'에서는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학살한 당사자 가운데 용기 있는 한 사람의 증언을 통해,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에서 치밀하게 기획하고 실행한 계획된 학살 사건이라는 것을 밝힌다. 박건웅 작가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꾸준히 그래픽노블로 작업하고 있다. '꽃' '노근리 이야기' '홍이 이야기' '어느 혁명가의 삶' '짐승의 시간' '그해 봄' '제시 이야기' '예안송' '아리랑' 그리고 이 작품 '악마의 일기'까지 어느 한 작품 소홀할 수 없는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대목을 그리고 있다. 나는 박건웅 작가의 작품을 초, 중, 고등학교 역사 교재로 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역사책을 읽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픽노블로 만든 작품들은 청소년이 읽기 쉽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 교훈을 배울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정식 교재로 쓰지 못한다면, 보조 교재로 청소년들이 꼭 한번씩은 읽을 수 있도록 학교도서관에 배치하고, 선생님들이 추천해서 - 사실, 선생님들이 먼저 읽어야 한다 - 청소년들이 이 일련의 작품들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갖기 바란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만화와 영화의 화학적 결합
    만화와 영화의 화학적 결합 -이동은, 정이용의 《환절기》, 《당신의 부탁》 만화는 영화보다 훨씬 오래된 예술형식이다. 영화는 현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탄생한 예술이지만, 만화는 원시시대부터 있었던 그림에서 나왔다. 현대만화의 시작은 19세기 초반이라고 하지만, 사람을 비롯해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과장, 축소, 비약, 간략화 한 이미지는 이미 그 자체로 만화적이다. 늦게 출현한 영화는 서사에서 만화와 소설에게 빚지고 있는데, 그건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서사의 역사가 짧기도 하고, 서사의 다양성, 양적 측면에서도 영화는 만화나 소설을 따라가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영화의 탄생 이후 수 많은 영화가 만화와 소설을 원작으로 새롭게 해석되어 나왔으며, 이럴 경우 관객은 원작 만화(또는 소설)와 영화를 비교하거나 다르게 해석한 부분을 흥미롭게 느낄 수 있다. 영화가 특히 만화와 더 가까울 수 있는 건, 영화도 문학의 한 갈래인 희곡(시나리오)을 거쳐 스토리보드(만화)를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이미 서사(시나리오)를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가 스토리보드로 기능하기 때문에, 만화를 영화로 옮기는 것이 훨씬 쉽다. 그런 면에서 작가 이동은, 정이용의 작품은 만화의 영화화에 매우 친근한 작품들이다. 원작 만화의 글을 쓴 작가이자 두 영화의 감독인 이동은은 영화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한 작가여서, 이 두 원작 만화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영화적 관점으로 그려지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영화로 만들 때, 별도의 시나리오 작업이 거의 필요 없을 만큼 그 자체로 시나리오이자 스토리보드가 된다. '기생충'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도 학생 때 학보에 만화를 그렸고,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스토리보드로 옮긴 것을 보면, 만화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만화와 영화는 '스토리보드'라는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두 작품에서 영화는 원작 만화의 줄거리를 거의 비슷하게 따라가지만, 시간의 흐름을 조금씩 바꿔 놓았다. 만화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작동하지만 짧게 등장하는 내용이 영화에서는 생략되기도 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서사를 강하게 압축해 놓았고, 이것을 아주 조금씩 풀어놓으면서 독자(관객)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여백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이런 장치는 만화에서 장점이 된다. 어차피 만화는 정적인 예술이고, 칸과 칸 사이를 메우는 것은 독자의 상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화가 영화로 옮겨오면 상황은 달라지고, 달라져야 한다. 만화의 한 컷, 한 화면이 상징하는 의미는 영화에서 똑같이 반복하기 어렵다. 영화는 필름일 경우, 1초에 24프레임이 움직이고 있고, 대사와 음악, 효과음 등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만화 또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때로 성공하거나 실패하는데, 그건 원작의 성공 여부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영화는 자신의 언어와 문법이 있음을 의미한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만화 원작의 모티프를 보다 강렬하게 '영화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환절기》 이야기는 미영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미영의 아들 수현은 고등학생이고, 어느 날, 그는 친구 용준을 집으로 데려온다.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배경과 상황이 있지만,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미영은 외아들 수현과 함께 살고 있지만, 사실 그의 남편은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수현이 사고를 당하고 드물게 한국에 오지만, 그에게는 이미 필리핀에 다른 여자가 있다. 미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살이에 초연한 사람처럼, 위자료만 주면 이혼해주겠다고 말한다. 미영의 남편도 미안해 하기는 해도 미영의 제안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자기와 아들을 배신한 남편이지만 뺨 한 대도 때리지 못할 정도로 여린 심성을 가진 사람이 미영이다. 미영은 아들 수현이 교통사고로 코마 상태가 된 것이 용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용준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다. 미영이 놓여 있는 상황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다. 아들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까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걸 모두 견뎌야 하는 미영은 누구보다 괴로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미영은 이 모든 상황을 이겨낸다. 그가 강한 사람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놓여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고통과 괴로움이 견딜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뀐다.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그건 곧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는 것이므로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미영은 남편을 놓아주고, 용준을 용서하면서 마음이 편해진다. 아들 수현이 동성애자라는 것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용준과 함께 한 시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었고, 마음이 움직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용준은 미영의 친아들이 아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용준은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부모가 불화하고, 결국 엄마는 자살하고, 아버지와는 혈연을 끊게 되고, 가족들과도 멀어지게 되는 경험을 한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성 정체성으로 가족 모두가 불행해지는 걸 보고 겪으면서, 그 모든 상황과 결과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현까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 상태에 놓이면서 용준의 죄책감은 커졌고,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하지만 용준은 자살보다는 다시 살아서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빚을 갚으려 한다. 그의 노력은 결국 미영의 마음을 움직이고, 용준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가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동기가 된다. 등장인물 가운데 미영 말고는 모두 남성이고, 미영의 남편, 아들 수현, 용준 등은 미영의 '타자'이자 미영의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이면서, 미영이 돌봐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미약한 존재들이다. 미영은 남자들을 돌봐야 하는 '엄마'이자 자기 자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운전도 배우고, 끊임 없이 사회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프로메테우스형 인물이다. '엄마'는 불완전한 존재인 자식을 돌보면서 힘들고 괴롭기도 하지만, '자식'의 존재만으로 근원적 기쁨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미영은 미숙한 남자들을 돌보면서 그것이 단순한 고통, 괴로움이 아닌, 그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수현이 기적처럼 깨어나면서 미영의 삶도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온다. 수현의 사고 이후, 수현과 용준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느낀 불편함도 수현이 깨어난 이후, 미영과 용준의 관계는 어느새 엄마와 아들의 관계로 바뀌고, 수현과 용준은 오히려 서먹해진다. 두 사람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열려 있다. 중요한 건, 미영이 아들을 하나 더 얻었다는 것이다. 불쑥 청년인 아들을 얻은 것처럼, 미영도 용준을 만나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진정한 '엄마'로 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신의 부탁》 어느 날, 효진에게 시동생이 찾아와 죽은 남편과 전 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할머니와 살던 종욱은 할머니가 치매로 병원에 입원하자 오갈 데가 없어지고, 결국 종욱은 효진의 집으로 들어간다. 종욱은 생모를 찾지만, 생모를 만나서는 생모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한다. 종욱의 생모는 죽었고, 어릴 때 자신을 키워준 사람은 계모였다. 종욱도 자기가 찾는 '엄마'가 생모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린 자기를 두고 떠난 이유를 알고 싶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여섯 살의 종욱에게는 그 사람이 '엄마'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가족을 이루는 방식은 모두 우연처럼 찾아온다. 효진에게 종욱이, 종욱에게는 여자친구의 뜻하지 않은 임신이 그렇다. 이들은 혈연이 아니지만, 기꺼이 가족이 되기를 바란다. 효진은 죽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혈육은 아니지만 종욱을 받아들인다. 종욱의 상황에서 보면, 생모는 얼굴도 모를 때 죽었고, 기억하는 엄마는 생모가 아닌 계모였으며, 그 계모마져도 여섯 살 때 자기를 떠났다. 종욱의 아버지 즉 효진의 남편은 종욱을 자기 어머니에게 맡기고 효진과 결혼해 살았으니, 이 가족의 가장 큰 피해자는 종욱과 그의 할머니인 걸 알 수 있다. 종욱은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 자기를 버리고 떠난 계모를 어떻게든 만나고자 한 것도 생모가 아님을 알면서도, 어린 자신을 떠난 이유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려서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고아 의식은 평생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효진은 그런 종욱의 마음을 헤아리고, 종욱도 효진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종욱이 여자친구의 임신과 출산에 적극 개입하는 것도 그런 트라우마의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종욱이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출산한 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어렸을 때 종욱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연이겠지만, 효진이나 《환절기》에서 미영도 고등학생 남자아이를 아들로 받아들인다. 고등학생 청소년은 곧 성인이 되는 경계에 있다. 이들은 이미 성인의 세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성인 흉내를 내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미숙한 면이 많아서 자주 세계와 충돌한다. 어른들이 만든 강고한 세계 - 사회질서와 구조 - 에 저항하는 한편,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 하는 청소년은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프로락사스와 같은 존재다. 종욱이 여자친구가 낳은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려 하지만,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갓난아이의 입양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렇다. 현실은 냉정하고 무섭게 타산적이다. 종욱이 가진 낭만적 이상이 현실과 충돌하면서, 좌절하는 과정은 곧 그가 사회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자, 이상과 낭만이 깨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종욱에게 합리적 조언을 하는 효진과 자기 아이를 입양시키는 종욱의 여자친구는 오히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대응하는 능력이 있다. 무모하고 낭만적이지만 종욱은 '책임'이라는 의무를 다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건 자신의 트라우마도 있지만, '남성성'의 한 특징으로 보인다. 효진이나 미영이 의도하지 않은 '아들'을 만나고, 모자의 인연을 만들지만, 이들은 오래지 않아 다시 헤어져야 할 인연이거나 이미 따로 살고 있다. 혈육이든 아니든 가족도 '개인'의 집합이며, 독립해 살기 시작하면 가족은 분화한다. 효진이 종욱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때, 종욱이 곧 성인이 되어 독립할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두 작품의 주인공 미영과 효진은 처음부터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기에도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고,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들이닥쳤을 때, 그 상황을 거부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인다. 이 '수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여성성' - 이걸 '모성'이라고 표현하기는 애매하다 -의 발현이고, 다른 하나는 가부장사회 체제에 길들여진 여성의 순치된 모습이다. 이 두 상황을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형태로든 두 모습은 혼재되어 있어서, 여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영이 수현과 용준의 동성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용준의 아버지가 끝내 용준을 용서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된다. 용준의 가족은 용준을 버리지만, 미영은 용준을 아들로 받아들인다. 효진 역시 죽은 남편이 전 아내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아들로 받아들인다. '가족'은 피를 나눈 혈연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더 넓은 의미의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 가부장사회의 혜택을 직접 받는 '남성(아버지)'이 아니라, 오히려 그 체제의 피해자인 여성(엄마)이라는 점에서, 미래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유연한 '여성성'이 주도하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할 수 있다. 미영과 효진은 낯선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의 삶을 확장하고, 성장한다. 서사의 흐름만 보면 미영과 효진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듯 하지만, 그건 마치 물이 사물을 포용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감싸안는 것과 같다. 자연은 흐름을 거스르지 않듯, '여성성'이 가진 본성도 그런 것이 아닐까. 약하고, 가여운 존재를 포용하고 감싸안는 따뜻함을 통해 자기의 외연을 확장하는 유연함을 두 작품은 잘 그리고 있다. 만화나 영화의 서사는 다시 문학과 만난다. 우리는 칸으로 나뉜 그림(만화)과 움직이는 그림(영화)의 이야기를 보면서 감동하는데, 표현 형식만 다를 뿐, 서사는 기본적으로 '문학'이다. 즉, 프랑시스 라까생의 표현대로 문학은 '쓰여진 문학', 만화는 '그려진 문학'이고 여기에 영화는 '움직이는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동은, 정이용의 작품에서 문학을 느낄 수 있는 건, 서로 다른 형식에서 '문학'의 본질을 느끼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프랑시스 라까생(1998), 《제9의 예술만화》, 하늘연못
    • 문화
    • 만화
    2021-12-13
  • 아리랑 - 혁명가 김산의 이야기
    제목 : 아리랑 작가 : 박건웅 출판 : 동녘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영웅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재능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시대에 조응하는 인간이며, 역사에 온몸을 내던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김산은 열다섯 살에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집을 떠난다. 지금의 중학생 정도의 어린 소년이 조국의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혁명가가 된다. 소년이 일본경찰과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다. 조선공산당이 1921년에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김산의 행동은 자생적 공산주의자 1세대에 해당한다. 김산은 당시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판단하고 있던 것처럼, 중국공산당의 혁명과 함께 해야만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크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갈라졌으며 그 안에서도 여러 분파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장투쟁 계열에서도 개별적 테러를 활용했던 민족주의 계열과 군대를 양성해 일본과 전쟁을 하겠다는 전투부대 조직은 목적은 같았으나 행동이 달랐고, 그들도 중국공산당과 쏘련공산당으로 각각 협력 세력이 나뉘었다. 아무리 간단하게 요약해도 당시 독립운동의 갈래는 매우 복잡했으며, 각 파벌의 갈등은 동지가 아닌, 적과 같은 미움과 증오를 띄기도 했다. 여기에 중국으로 숨어든 일본의 조선인 밀정이 독립운동가를 납치, 살해하는 경우도 많았고, 멀쩡하게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일제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사상의 굳건함을 잃지 않고, 혁명가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잊지 않고 일관된 투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서양에서는 체 게바라를 대표적 혁명가로 손꼽지만, 김산의 삶은 체 게바라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혁명과 독립을 위해 싸웠다. 쿠바 혁명을 비롯한 남미의 혁명이 미제국주의와 자본을 뒤엎는 혁명이었다면, 김산이 살았던 시대의 혁명은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띈다. 한국의 일제식민지 상황에서 독립하는 절대 과제와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혁명까지 이뤄야 하는 공산주의 혁명의 의무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산은 중국 곳곳에서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군벌들과 싸우며, 크고 작은 도시에서 일시적으로 혁명에 성공해 해방구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중국공산당은 언제나 열세에 있었으며, 군벌에 쫓기고 있었다. 이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에서 패퇴하면서 대장정을 시작한다. 대장정을 시작할 때 10만 명이던 사람은 연안에 도착했을 때 90% 가까이 사망하게 된다. 30년대 중반의 중국공산당은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연안에서 다시 터전을 다진 중국공산당은 마침내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다. 김산은 중국혁명의 성공도, 한국의 독립도 못 본 채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삼십대의 짧은 살았던 한 혁명가의 삶은 님 웨일스의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남았다. 님 웨일스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짜 혁명가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쟁을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남북한의 분단과 체제로 인해 인정받지 못하거나, 왜곡되는 현실이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혁명가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고, 북한에서는 민족주의 계열, 남조선노동당, 중국공산당과 협력했던 혁명가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결국 만주와 중국, 쏘련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역사에서 잊혀졌거나 지워진 상태다. 약소국의 혁명가는 시작부터 비극적 운명을 내재하고 있다. 조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서 큰 나라의 혁명을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곤혹스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들 혁명가는 현실의 고난을 피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신화와 창작에서 영웅은 고향을 떠나 고난의 길을 따라 모험을 하고, 더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현실의 혁명가는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전전하며 끝모를 고통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다. 그리고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혁명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억울하게 죽은 혁명가들은 기록에도 남아 있지 못하다. 님 웨일스의 남편 에드가 스노우는 모택동을 만나 '중국의 붉은 별'을 써서 서양에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알린 인물이고, 님 웨일스 역시 한국공산주의자이자 중국공산당원 장지락(김산)을 인터뷰해 당시 한국공산주의자들과 혁명에 관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은 매우 중요한 기록이지만 한국에서는 한때 금서였다. 독재정권은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장지락(김산)의 일생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제는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과거의 혁명가를 잊어버렸다. 박건웅 작가는 활자에 갇혀 있던 혁명가 김산을 깨웠다. 박건웅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흑백 판화 기법의 그림은 강렬한 내용처럼 강한 이미지로 당대의 이야기를 표현한다. 김산의 삶은 스스로 혁명가로서의 자각과 오랜 훈련으로,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의 고통을 극복하며 살아가지만, 늘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혁명가라도 인간적인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고, 평범한 행복을 누릴 기회도 있었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이미 결심한 김산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행복조차도 부담스러워한다. 그 누구도 김산의 삶을 강제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스스로 선택한 혁명가의 삶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높은 도덕성과 신념, 의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다루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하지만 이름 없이 스러진 수많은 혁명가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북한의 분단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의 자취까지 분단되는 부작용을 만들었으며, 역사에 기록될 기회조차 갖지 못한 훌륭한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이 많다. '아리랑'은 정부나 단체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닌, 님 웨일스와 장지락이 만나 대화를 하며 기록한 내용이라 공인받지 못한 기록이지만, 개인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기록하고, 당대의 세밀한 묘사가 풍부하게 살아 있다는 점에서 높은 사료적 가치가 있다. 님 웨일스의 글을 읽기 부담스럽다면, 박건웅 작가가 그래픽노블로 그린 이 작품을 권한다. 글만 읽을 때보다 훨씬 이해도 잘 되고 재미있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삶과 중국의 혁명 과정까지 알 수 있어 독립운동사 자료로 꼭 읽어야 할 책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엉클어진 기억
    제목 : 엉클어진 기억 작가 : 사라 레빗 출판 : 우리나비 가족 가운데 누군가 치매(알츠하이머)를 앓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많은 사람들은 부모가 치매를 앓아도 그 고통과 괴로움을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 점에서 사라 레빗은 조금 특별하다. 그는 그림과 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픽노블에서 작가가 자기와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 흔하다. 작가는 개인적 체험과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지만, 그 경험은 재해석되고, 보편화한다. 작가는 엄마가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을 알고나서 기록을 시작한다. 작가의 엄마는 불과 52세에 치매가 진행되는데, 모든 검사를 하고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보통 알츠하이머는 뇌 속에 이상 단백질(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 타우 단백질)이 쌓이면서 뇌 신경세포가 서서히 죽어가는 퇴행성 신경질환이다. 또한 21번 염색체에 있는 아밀로이드 전구단백질(APP) 유전자에 돌연별이가 있다면, 65세 이전에 치매가 나타나며, 이것을 '조발성 가족성 알츠하이머병'이라고 한다. 작가의 엄마가 바로 이 병(조발성 가족성 알츠하이머병)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14번 염색체에 있는 PS1, PS2 유전자의 돌연변이도 같은 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뇌조직 검사가 있었지만, 작가의 가족은 그 검사를 포기한다. 어떻게도 엄마의 치매 진행을 막을 수 없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의 변화만 따라가면, 인간이 아무리 지성과 이성의 동물이라도 물리적으로 뇌가 망가지는 병에 걸리면, 지성과 이성이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인간이 '동물'로서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날 때는 뇌의 퇴화가 진행하면서다. 이성과 의지가 사라지고 본능만 남게 될 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인간'으로 존재했던 과거는 분명하지만, 뇌의 퇴화는 과거와 (치매를 앓고 있는) 현재를 단절한다. 연속성이 사라지고, 가족의 얼굴과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그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지만, 사회적 기준으로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건 우리가 잘 아는 '좀비'와 비슷하다. 좀비는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이성과 지성이 사라지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다. 우리는 '좀비'를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형체는 인간이되, 존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한다. 자기 의지와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자신을 짧은 순간, 정신이 온전할 때 알아채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질병은 치매(알츠하이머)가 유일하다. 가장 가까운 가족도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습관적으로 하던 행동조차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기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작가의 엄마는 전형적인 진행을 보이는데, 처음에는 기억이 사라지고, 언어가 사라지며, 근력도 사라지고, 시력은 정상이어도 사물을 구분하지 못하며, 시공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판단력이 사라지며, 망상에 시달리고, 우울증이 나타나고, 감정의 변화가 급격하고, 밤이 되면 더욱 난폭해지고 가출한다. 치매를 앓는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이 겪는 고통 역시 만만치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서히 인간성을 잃어가는 걸 지켜보는 건 어쩌면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일 수 있다. 그렇기에 '아무르'에서 주인공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는 식물인간이 된 제자를 코치가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이다. 서양에서 먼저 '안락사'와 '존엄사'를 논의하기 시작한 건, 동양의 가족주의보다는 좀 더 개인주의가 발달했기 때문인데, 작가의 가족은 최대한 가족이 함께 지내며 돌보다 마지막 순간에 요양원 입원을 결정한다. 이들도 환자를 요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비인간적이고, 책임을 떠넘기는 비윤리적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족 가운데 한 명이 오래 병을 앓고 있거나, 치매로 인간성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요양원에 맡기는 것이 해결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작가의 가족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간병인이 도와준다. 간병인이 있어 가족은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치매(알츠하이머)는 단지 뇌 질환이 아니라, 육체 전체가 기능이 떨어지고, 퇴화하면서 서서히 죽는 병이다. 작가의 엄마도 병이 발견되고 불과 6년밖에 살지 못했다. 그 시간동안 가족들은 아내가, 엄마가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나빠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슬픔, 고통, 비탄, 분노, 좌절, 절망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서 늘 우울하거나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고, 순간, 순간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엄마가 운명하고 나서도 투병 기간의 기억이 가족을 더 가깝고 깊게 유대감을 갖도록 작용한다. 인간성이 파괴되는 병을 앓아야 하는 건 비극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주관적으로 표현하거나 객관화하지 못한다. 가족들은 병을 앓는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환자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이해하지만, 자신에게 내재화하지 못한다. 이 거리는 가족의 사랑으로 좁힐 수 있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다. 아무리 피를 나누고, 부모와 자식 사이라 해도, 개별적 존재가 갖는 자기 정체성과 독립성이 있고, 이들은 독립적 존재로 다른 환경과 생각, 가치관,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성인이 된 가족은 서로에게 타인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직접 경험한 시간과 사건을 그렸다. 독자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감정과 함께 두려움을 느낀다. 내 가족 가운데 누군가 치매에 걸린다면 어떻게 할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이기에 이 작품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현실은 작품보다 훨씬 고통스럽겠지만.
    • 문화
    • 만화
    2021-12-13
  • 메즈 예게른
    제목 : 메즈 예게른 작가 : 파울로 코시 출판 : 미메시스 오스만 투르크(터키)가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을 학살한 사건은 의외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15년에 일어난 이 학살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세계사적 범죄였음에도 그동안 조직적으로 은폐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터키는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그런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터키가 '한국전쟁' 때 한국에 참전해서 함께 싸웠기 때문에, 우리의 우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터키는 아르메니아인을 무려 150만 명이나 학살한 이후, 어떠한 사과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한국군은 베트남 인민을 학살했다. 학살한 증거는 너무 많아서 말이 필요 없을 정도지만, 한국정부는 여전히 '공식 사과'와 그에 따르는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약소 민족이나 인종을 차별하고 학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국제사회의 관례'라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미개하다는 것은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휴머니즘이나 도덕성, 양심 등에 관해 더 이상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과 그 일당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저지른 범죄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했던가?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터키 정부도, 시간이 얼마가 지났던-올해가 터키가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자신들이 저지른 학살 범죄를 공식 인정하고, 아르메니아인에게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 시간이 흘렀다고, 범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나 터키라는 나라가 소멸되고, 민족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다른 민족, 국가의 노예로 전락한 상태라면 모를까, 주권을 가진 나라라면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터키를 전혀 '형제'로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독일보다 더 질이 나쁜 학살국가로 인식하고, 터키에 대한 태도를 부정적으로 견지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국현대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사죄가 없는 이상, 한국 역시 학살국가로 인정하는 것처럼. 이 학살 만행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가 된 사건과 관련 있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항제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아가 세르비아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가혹한 요구조건으로 최후 통첩을 보낸다. 그 요구조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모든 반(反)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할 것. 암살에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할 것. 반(反)오스트리아 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할 것. 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를 조사하는 데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로 들어가 도울 것을 허용할 것. 오스트리아로서는 보스니아가 이 조건을 다 들어준다해도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분리 독립을 원하는 보스니아의 주장을 오스트리아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황태자 암살사건을 계기로 보스니아를 침공해 본때를 보여줄 작정이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단순히 오스트리아와 보스니아의 국지전에 머물지 않고, 독일이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 오스만 트루크(나중에 터키공화국)였다. 이때 아르메니아인은 터키 남동부와 러시아 영토에 걸쳐 살아가고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령과 러시아 제국령에 걸쳐 살아가던 아르메니아 사람들 가운데 오스만 제국령에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이 학살당하게 된다. 이유는 단순했다. 오스만 제국이 독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러시아는 적대국이 되었고, 러시아 령과 오스만 령에 걸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독립을 위해 러시아를 도울 수 있다는 가정 때문이었다.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오스만의 지배자들이었고, 가뜩이나 자국의 영토에서 살아가던 아르메니아인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그 핑계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한국에서도 전쟁 기간에 양민학살이 많았지만, 특히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극우 권력이 진보 성향의 인민을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30만 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지금도 진상규명이 진행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곧바로 진보 성향의 시민을 체포해 학살했다. 그들이 잠재적 적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은 민족대 민족이었지만, 한국의 보도연맹 학살은 같은 민족이 단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지른 만행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광기가 민족이나 이념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터키가 저지른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을 두고, 히틀러도 지적했다. 세계의 누가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그것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동기와 합리화를 제공했으며, 소위 민주주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유럽과 미국 등의 백인 중심국가에서도 소수민족이자 약자인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에 관해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은 학살 장면을 재현하지 않는다. 물론 잔혹한 장면이 있지만, 참혹함을 소비하거나 관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살의 배경을 들여다본다. 터키의 '청년 쿠르드당'은 쿠데타에 성공한 이후, 세 명에게 권력을 몰아준다. 이들이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지휘했고, 동맹국인 독일마져도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항의할 정도였으나, 터키의 권력자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아르메니아인 여성, 아이까지 모두 사막으로 내몰아 잔악하게 학살하고 강간 살해한다. 인류의 집단 학살은 인류 초기부터 있었던 현상이다. 처음에는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살육을 저질렀지만, 이후 전투에서 이긴 부족은 진 부족을 노예로 삼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종교적 이유, 이념의 이유, 인종의 이유만으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인류는 동족을 대량 학살하는 잔혹한 동물이다. 인류가 이성과 지능을 가진 고등동물이라고 말하지만, 맹목으로 기울어진 광기와 편집증은 동족을 잔혹하게 살해하면서도 죄의식을 갖지 않게 만든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제목 :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작가 : 김금숙 출판 : 서해문집 이 작품은 정철훈이 쓴 '소설 김알렉산드라'를 바탕으로 김금숙 작가가 창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성남문화재단'과 '성남시'에서 지원하는 웹툰 작업의 하나였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리즈를 '다음 웹툰'에 여러 작가가 연재하고 있다. 이 작품도 '다음 웹툰'에서 연재한 내용을 모두 볼 수 있다. 원작자인 정철훈은 1996년에 '김알렉산드라 평전(필담)'을 먼저 펴냈고, 이후 2009년 실천문학사에서 장편소설로도 발간했다.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는 특별한 존재로 알려졌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바롭스크 마르크스가 24번지에 있는 그의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17~1918년 이 건물에서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이 일하였다. 그는 볼셰비키당 시위원회 사무국원이며 하바롭스키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기도 하였다. 1918년 그는 영웅적으로 죽었다. 김알렉산드라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이자 볼쉐비키였으며, 역시 한국인 최초로 레닌과 면담한 공산주의자이다.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시작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발발한 직후, 자생적-여기서 '자생적'이라는 단어는 온전히 독자적으로 조직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과 일본공산주의 활동의 영향을 조선의 진보지식인들도 알고 있었고,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 으로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기로 보면,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에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기 전에 동북지역에서 활동한 최초의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의 활동은 쏘련공산당에도 도움이 되었다. 김알렉산드라의 존재는 조선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중국과 러시아 하바롭스크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상해에서 활동하는 임시정부 그룹,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그룹,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그룹인데, 임시정부에서는 공산주의자와 결별해 민족주의의 길을 걷고, 만주 지역에서도 무장투쟁으로 나아간 그룹과 민족주의 계열로 갈라진다. 무장투쟁을 선택한 그룹은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공산주의와 협력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했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독립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반면 김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힘겹게 살아온 김알렉산드라의 아버지와 그녀 자신의 삶은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차별과 억울함을 당하는 동포들을 보면서, 조선의 독립은 물론, 인간 해방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게 된다. 김알렉산드라의 운명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닮았다. 로자 역시 유대인과 여성, 장애인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공산주의자로 활동했으며, 그의 이론과 의지는 레닌을 능가할 정도로 위대했다고 알려졌지만, 그녀의 최후는 비참했다. 두 여성 공산주의자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두 여성이 공산주의자로서 매우 헌신적이었으며, 유능했고, 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김알렉산드라가 나라를 잃은 조선의 가난한 노동자의 딸이었다면, 로자는 폴란드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김알렉산드라는 로자보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삶 자체가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이었고, 로자는 그가 의용대에게 암살당하기 전에 이미 세 권의 뛰어난 책을 쓸 정도로 훌륭한 지성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공산주의자로 오래 활동하지 못했다. 김알렉산드라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기간이 불과 2년에 불과했고, 로자도 암살당할 때의 나이가 47세였다. 그럼에도 두 여성이 공산주의 역사에 남긴 족적과 의미는 훨씬 크다. 여성이 억압과 차별을 당하던 시기에, 남성보다 더 진보적이고 유능하게 활동한 여성 공산주의자들이 많겠지만, 당시 한국에서 김알렉산드라의 존재는 한국역사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기록해야 할 인물이다. 아래는 '시사저널'에 실린 내용으로, 김알렉산드라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 다음은 이인섭씨의 알렉산드라 김 전기 첫회로, 사형 장면과 유년 시절부터 10월혁명 전후 시기까지의 부분이다. 적 · 백군 내전 시기의 활동, 체포 및 재판 장면은 제217호에, 연해주 빨치산 조직표와 명단은 제218호에 싣는다<편집자> 사형 1918년 9월(조선력으로 8월15일 추석) 피로 물든 것 같은 아무릎 강이 옆으로 흐르는 하바로프스크 공원. 높다란 모자를 쓰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외투를 입은 키 큰 칼므이크인들(칼뫼코브가 이끌던 코사크 부대의 부대원들)이 모인 가운데 백군 사형집행인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지도자들로 소비에트 · 당 간부들, 그리고 우수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적군 병사들과 전에 이 공원에서 연주를 하였던 음악인들, 이만역 준투에 가담하였던 수십명의 소비에트 애국자들을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였다. 칼므이크인 사형집행인들은 혁명가들의 눈을 흰헝겊 조각으로 가리고 절벽에서 총살한 후 아무르 강에다 집어던졌다. 그때 총살된 치쉰, 벨로우스, 네페로프 등 동지들 속에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 동지도 있었다. 집행인이 알헥산드라의 눈을 가리자, 그는 눈에서 흰 천을 벗겨내고 선 다음과 같이 소리높여 이야기했다. “나는 35분간 연설할 권리가 있다. 나는 자기 조국을 훔치거나 배신한 자가 아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이며 조선의 혁명이다. 내 스스로 죽을 장소를 고르겠다. ”(이 이야기는 알렉산드라의 두 번째 남편 B.B. 오가이의 큰 딸 올가바실리예비치 오가이에 의해 알려졌다). 그는 천천히 todrr에 잠겨 열세 걸음을 걸었다. 무라비요프의 동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절벽에 멈추어 서서 사형에 대한 공포의 기색도 없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조용히 몸을 돌렸다. “존경하고 친애하는 동지들 남성들 여성들 노인과 젊은이들이여. 오늘 우리늬 적이 많은 우리의 애국자들과 나의 전우들과 그리고 나의 생명을 앗아가지만,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수행하던 과업은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조선의 후손들이여 ! 지금 내가 걸음은 바로 조선의 열세 개의 도입니다. 각각의 도에 공산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모든 장애 · 바람 · 폭풍을 극복하여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 주며, 자본가들과 지주들에게는 죽음을 가져다 주는 기적의 꽃을 피워라. 조선 13도의 젊은이들이여, 그 꽃을 손에 들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여라. 그것은 그대들의 자랑이 되리라. 여러분 모두는 우리의 후예들이 조선을 해방시키고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하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조선독립 만세 ! / 소비에트 만세 ! 볼셰비키당 만세 !/ 세계 혁명 만세 !” 총성이 울렸고,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의 시신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투쟁을 호소하던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던 절벽 아래로 떨어져 아무르 강에 잠겼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두려움을 몰랐다. 그의 대단함은 조선 청년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 대단함은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에게강한 인상을 주었고 우리의 적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칼므이크인 집행인 율리네스코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조선의 영웅이자 극동위원회의 위원이며 개화된 여성이었던 그는 죽었다. 전세계 근로자들의 자유를 위한 활동 때문에 사형집행인의 총 한방에 죽었다.”(선집《극동에서의 혁명》, 모스크바, 1923,160항 참조).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사, 소련공산당 고참당원, 우랄노동자동맹(1917)의 조직자, 재소 조선의 사회주의자 당원이었다. 유년시절 알렉산드라는 1888년 (3월1일께) 극동 연해주 수이푼의 포크롭스키 라이온(면)의 시넬니코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나게 영리했고, 용감하고 온화한 성품이었다. 두 살 때인 1890년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는 계모 밑에서 학대를 받다가, 다섯 살 때인 1893년 하얼빈의 아버지에게로 가 같이 살게 되었다. 아버지 페트로비치 김은 북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중국군사철도 건설 현장에서 한국어와 중국어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자이자 그들의 성공적인 투쟁의 지도자였다. 아버지 표트르 김은 사랑하는 딸 슈라(알렉산드라의 애칭)에게 늘 다음과 같이 얘기하곤 했다.“사랑하는 딸아, 네가 커서 일을 하게 될 때 나처럼 항상 노동자 편에 서서 일을 해야 한단다.”아홀살 때인 1897년 하얼빈 시에서 소학교에 다닐 때 그에게 커다란 슬픔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죽었던 것이다. 표트프 김이 죽자, 그를 존경하던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 수천의 노동자가 파업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어버지가 죽은 뒤 알렉산드라는 폴안드인 마르크 이오시포비치 스탄케배치의 집에서 살다가 열 살 때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오빠 추푸로프 페트로비치 김에게 갔다. 그곳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립 학교를 마쳤다. 그는 학교 도서과에서 체르니세프스키 · 게르첸 · 도브롤류보프 · 플레하노프 그리고 다른 혁명적 작가들의 저작을 공부하였다. 젊은 시절 열여섯살 때인 1904년 알렉산드라는 동창생인 폴란드인 마르크 아오시포비치 스탄케이비치에게 시집을 갔다. 이 일은 조선인 사회에 많은 소문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그가 외국인과 결혼한 최초의 조선인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 마르크 이오시포비치는 무위도식에 술과 도박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인간이었다. 결국 스무살 때인 1908년 남편과 이론한 알렉산드라는 그 행에 태어난 아들 비야체슬라프 마르코비치를 데리고 하얼빈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스물한살 때인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러시아어 교사였던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오가이와 재혼했다. 1910년 두 번째 아들 보리스가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늘 혁명 활동을 꿈꾸었다. 남편 오가이는 아내를 가사에서 해방시켜 혁명 활동을 위한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정치 활동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전쟁에 가담한 제정 러시아는 노동대중을 동원하였다. 도시와마을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등 노인과 여성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징집되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김병학이라는 비열한 청부업자가 있었다. 이 자는 선금으로 1만루블을 받고 조선인 노동자 1천여 명을 고용하여 우랄 지방의 나제즈진 벌목장으로 데려갔다. 하얼빈에서도 3천~4천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바로 이 나제즈진 벌목장에 동원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산드라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고인이 된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다고판단한 것이다. 스물여섯살 때인 1914년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남겨두고, 우랄 지역 노동자들의 통역을 자원해 벌목 현장으로 떠났다. 우랄 지역 노동자들은 아버지아 일했던 중국군사철도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 도시 바깥으로 출입하거나서신 연락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중국인 용병 가운데서 뽑힌 경비병들이 노동자들을 감시했고, 파업이 일어날 경우 물자공급 중단, 심지어는 대량 학살까지 자행했다. 알렉산드라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사민당의 볼셰비키와 관계를 맺게 되어 그 당원이 되었다. 그는 볼셰비키파의 비합법적 저작물을 읽었으며, 그리하여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차를 체제타도 그리고 자본가와 지주 등 착취 계급을 박멸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수 있다고 더욱 굳게 확신했다. 알렉산드라는 일본의지배를 증오하는 젊은 조선인 애국자들이 볼셰비키 당원이 되기는 아직 이르지만, 그들로 일단의 정치 조직을 결성하는 일은 적적하다고 판단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빠르게 전개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때인 1917년 2월27일(신력으로 3월12일) 부르조아 민주혁명이 제정을 무너뜨렸다. 이 혁명의 결과 러시아에는 두 개의 권력이 나타났다. 하나는 자본가와 지주의 권력 확립을 지향하며 전쟁을 계속 수행하려는 멘셰비키와 사외혁명당이 이끄는 임시정부의 권력이었고, 또 하나는 전쟁을 중지하며‘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 아래 자본가와 지주의 권력을 일소하여는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의 프롤레타리아 권력이었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우랄을 비못한 각 지방에서도 2월혁명에 고무되어 대중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조선인 여성 알렉산드라는 1만여 명의 주민에게 계급투쟁과 민중해방운동을 호소하는 연설을 행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우리 5천 조선인 · 중국인 노동자들은 오늘부터 더 이상 제정러시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가 권력을 쥔 국가의 국민이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청부인들과 차르 권력 사이세 밎여진 불공정한 계약의 이행을 무조건 거부합니다. …” 그의 모든 말은 노동 대중의계급적 단결을 공고하게 하였고, 기업가들과 멘셰비키에 대한 적개심를 불러일으켰다. 이 날부터 전우랄에서 권력 쟁취를 위한 볼셰비키와 멘세비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저명한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서 가장 정력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많은 기업 · 공장 · 노동현장을 다니면서, 지하에 숨어 있었던 당의 사업을 합법화했고, 당세포들을 조직하였다. 그는 노동조합에 가입을 권유하는 사업과 노동 조합에 당 세포를 조직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부행하였다. 1917년 3월게 볼셰비키 조직인 우랄노동자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에는 중국인도 가입하여싸. 노동조합이나 지방 소비에트 회의, 볼세비키 지도자 선출을 위한 투표에서, 5천여 명이나 되는 조선인 · 중국인 노동자들읜 많은 투표권을 가졌으나, 러시아어를 몰랐기 때문에 항상 알렉산드라가 찬성표를 던지면 따라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우랄에서 알렉산드라 동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1917년 두 번이나 모스크바에 페테르부르그를 방문한였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무엇 때문에 그가 그곳을 다녀왔는지 관심 없었으나, 지금 추측컨대 그는 당 중앙위원회를 방문하여 레닌을 만났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또 누구를 만났으며, 어떠한 과제를 받았는지는 모른다. 1917년 7월에 알렉산드라는 옴스크로 가서 10일간 보냈다. 이 기간에 나는 그와 함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강령과 규약 그리고<동산당 선언>을 러시아어에서 조선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조선어로 불렀고 나는 받아 적었다. 알렉산드라는 우랄노동자동맹이라는 볼세비키 조직을 만들어내었고, 그후 극동으로 떠났다. 나는 그의 위임을 받아 당의 강령과 규약을 조선어로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시베리라의 여러 도시에서 사회주의 조직을 만들었다. 10월혁명 전후의 활동 당시 조선인들사이에는 포크롭스키 라이노(면)출신 조선인 여성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청부인 김병학이 팔아넘긴 노동자들을 해방시켰다는 소문이 벌써 돌고 있었다. 모든 조신인들은 알렉산드라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반겼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이 조선인 마을에서 발행되던 조선인 신문 <조선인신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벌목자의 고통스러운 작업으로부터 수천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노동자들을 해방시킨 수에 우랄에서 돌아온 알겍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우리 편집국을 내방하였다. 조선인 볼세비키인 그는 남자들보다 더 용감했으며,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이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바뀌어 나가도록 호소하고 있다.” 알렉산드라는 남편 오가이로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저명한 조선인 혁명가 이동휘가 자유 아무르 주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으며, 사할린을 거쳐 일본으로 호송될 것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이동휘의 석방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알렉산드라는 오성묵과 다른 이들과 함께, 러사아와 중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이민들과의 관계 설정에 노력하였다. 동시에 그는 볼세비키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활동하였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의 사실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알겍산드라는 아무르 역(현재의 라조역)의 당조직가인 무라비요프에 의해 선출된 대표로서, 1917년 10월18일(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지구(크라이) 당협의회에 참가했다. 그해 10월 사회주의대혁명 승리 후에 하바로프스크에 극동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가 결성되자, 알렉산드라는 외교부장으로, 동시에 하바로프스크에 잇는 러시아사회주의노동당 한 조직의 서기로 선출되었다. 이 사실은 조선인 여성인 그가 러시아인 볼세비키들과 함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소비에트 극동 집행위훤회의 외교부장에 선출된 사실은, 극동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들에게는 대단한 기쁨이 되었으며, 또한 그들 사이에 커다란 정치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알렉산드라는 조선인들에겍서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는데,이는 그가 그들을 솔직하게 대했개 때문이었으며, 그가 중국어를 자유로이 구사 할 수 있어 모든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는 외교부장으로서 헝가리인 · 독일인 등 외국인에 대한 여권발급제도를 간소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항상 그에게 고마워했다. 알렉산드라는 서른살 때인 1918년 2월(러시아의 구력으로는 3 · 1운동이 2월에 일어난 것으로 된다)에 일어난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따라 혁명가들의 회합을 열기로 결정하였다. 회합에는 이동휘 양기탁 모동열 이동녕 등 조선 민족해방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들과 조선과 중국과 극동에서 온 수십명의 혁명 활동가들이 참석했다. 회합에서는 조선 혁명운동의 정세와 장래 과제들을 토론하였다. 이 모임에서 알렉산드라는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입장에서 함렌파(이동휘, 김닙 혹은 김립), 평양그룹(유동렬, 양기탁) 그리고 경성그룹 (이동녕) 등 조선민족해방운동에 존재하는 파벌주의를 비판하였다. 그의 연설이 있은 후 사적인 간담회에서 모든 이들은 분파싸움을 중지하자고 약속하였다. 그 후 조선 민족해방운동 문제를 계속하여 토론하던 중 참석자들의 일부(이동녕과 그으 지지자)가 ‘정의당’이란ㄴ 이름의 민족해방조직을 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글나 다른 일부는 조선해방운동을 사회주의운동으로 바꿀 것을 호소하였다. 3월28일 하바로프슼에서이동휘 유동열 이하녕 오성무(오성묵의 오기라고 여겨짐) 등이 한인사회당(조선인사회주의당)을 조직하였다. 이것은 조선혁명가들의 단결과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첫걸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은 알렉산드라가 민족해방투쟁에 관한 마르크스 이론에 얼마나 정통해 있었는가,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을 사회주의운동으로 전환시키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실천적으로 훌륭하게 실현시켰는지 확고하게 말해 주고 있다.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권력으로부터 비용를 할당받았다. 조직의 할동가 등은 현금 급룔ㄹ 받았고 <자유종>이라는 신문을 발간하였다. 군사학교가 설립되었다. 위훤회의 의장은 이동휘었다. 군사학교장 겸 군사부장은 유동렬, 부위원장은 오가이, 청년부 의장은 오성묵,<자유종>의 편집인은 김 립이었다. 나는 재정담당이었다.(계속)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이번 호 알렉산드라 김 전기 2부에는 적백내전 기간의 전투에서부터 체포되어 재판 받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다. 소련당국에 알렉산드라 김의 전기를 제출하고 난 뒤, 이인섭씨는 당시 소련 정부 당국자로부터 주요 부분에 대한 보충 질의를 받게 된다. 이에 대한 이인섭씨의 답변 문서 가운데 특히 그가 알렉산드라 김과 관련한 자료를 추적하게 된 과정이 부속 기사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 이인섭시 전기 이후 밝혀진 새로운 사실을 중심으로 알렉산드라 김의 가족과, 그의 사상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준 요인들을 작가 鄭棟柱씨가 분석했다. <편집자> 시민전쟁 한인사회당 창설 1주일 뒤인 1918년 4월5일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국제 간섭군이 상륙했다 백위군이 봉기한 것이다. 시민전쟁이 시작됐다. 알렌산드라가 맨 먼저 무기를 들었다. 그는 영어·프랑스어·일본어·중국어·한국어 그리고 러시아어로 무장간섭군에 대한 정항을 호소하였다. 자국과 전세계 근로자들에 대한 호소와 계급 투쟁 호소, 그리고 조국을 수호하자고 외치는 전단을 썼다. 그는 선전 활동을 정력적으로 벌였고, 각 지방으로 동지들을 파견하였는데, 중국인 순취우, 러시아인 벨로우스와B.골리온코 등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주민들을 적군으로 동원하는 일과, 사람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일에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알렉산드라는 과?성이 있었다. 그는 매우 진지하고 신중하며 용감했다. 그는 시작한 모든 일을 끝까지 해내었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고 동지들을 존중하였다. 항상 매우 열심히 일을 하여 동지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그들의 활동력을 끌어올렸다. 한인사회당 당원들은 순서에 따라 의무적으로 전선으로 향하였다. 많은 노동자, 일용 농부, 어부들이 자원해서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전선으로 나아갔다. 조선 청년 1백명 이상이 우수리 전선에서 전사했으며, 조선인 적군 부대는 고립되어 싸운 게 아니라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싸웠다. 많은 조선인이 이만과 비야젬스키 역의 격렬한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본 간섭군과 벌인 여러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 중 반이상이 조선인이었다. 18년 9월초 빨치산 부대가 ‘붉은 강’의 후퇴선에 주둔했을 때 조선인들은 겨우 10명 남짓했다. 알렉산드라의 지휘아래 중국인 둥지 순취우는 중국인 독립부대를 조직하였고, 이 부대는 만주의 하오헤 지구와 비야젬스키 역 지구에서 활동하였다. 19년 9월 하바로프스크 시는 전면 포위되었다. 붉은 강까지 이르는 우수리 전선은 일본군·백위군·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 점령되었다. 일본군이 스바보드느이 시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르 시를 점령하고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는 메르쿨로프가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 군사철도와 하얼빈은 백위군 장군인 호르바트가 장악하고 있었다. 코사크 대장 세메노프는 치타를 지배하고 있었다. 로프스크 시립공원 회의실에서 소비에트 및 당 활동가들의 회합이 열렸다. 이 회합에 소비에트의 아무르 주 집행위원회 의장인 무힌 동지가 참석하였다. 회의에서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전투 없이 철수할 것과 부대를 숲으로 이동해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철수하는 소비에트와 당 활동가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도시를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첫번째 그룹은 육로로 아무르 주와 보도이보를 거쳐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고, 두번째 그룹은 아무르 강을 따라 배로 아무르 주와 보도이보를 거쳐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고, 두번째 그룹은 아무르 강을 따라 배로 아무르 중와 몽고 증부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나가서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다. 회합 참석자들 중 일부가 백군을 화약고로 유인하여 화약고를 폭파할 것과, 우리 부대가 아무르 철교를 건넌 후에 철교를 폭파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이 제안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야만 한다. “적을 죽이기 위해 주민에게 고통을 주면 안되다” 알렉산드라는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말하는 동안 강당은 조용했고 사람들은 줄곧 그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지들, 우리는 시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철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시에서 펄수한 뒤에 우리 적들이 거주하게 되겠지만 인민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만약 화약고를 우리가 폭파하면 적들은 죽이겠지만, 주민들에게 고통을 줄것이며, 건물로 부서지게 됩니다. 전투 없이 시에서 퇴각한다는 우리 의 의도는 무익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르 강의 철교는 극동의 장대한 건설물이자 우리들의 자랑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그것을 파괴하면 내일 우리가 다시 건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폭파해야 합니까.” 알렉산드라의 제안에 따라 철교와 화약고는 파괴하지 않았다. 두번째 남편인 B.B. 오가이의 큰 딸 올가 바실리예브나의 말에 따르면, 오가이는 알렉산드라 김이 시를 떠나기 전에 아내에게 조선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가발로 조선 여자들의 머리 모양을 하여, 멀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에서 온 여자처럼 위장하라고 권하였다. 알렉산드라 김은 그 충고를 거절하였다. “소비에트 극동 집행위원회의 책임 간부로서 어떻게 그렇게 대중들로부터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알렌산드라 김은 오가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알렉산드라는 3백~4백명이나 되는 적국과 함께 ‘바론 코르프’호를 타고 하바로프스크를 떠났다. 이튿날 블라고베첸스크를 지나 거류지 예카테리노-니콜스크에 이르렀을 무렵 혁명을 배반한 아무르 소함대의 군함 두 척이 바론 코르프를 정지시키고 부장해제했다. 정박 통보가 없었다는 것이 구실이었다. 매수당한 바론 코르프흐 선장은 예카테리노-니콜스크측에 배를 넘기고 밤중에 도망하였다. 혁명의 배신자들에게 속은 승무원과 승객 들은 백군 코사크들에게 체포되었다. 조선인들과 함께 체포된 알렉산드라는 학교 건물에 구금되었다. 내가 이 학교를 지나가게 되었을 때, 체포된 조선인 중 한 사람이 내게 소리질렀다. “인섭아, 자네 어딜 가는가? 우리는 모두 여기 있네.” 이 말 때문에 나도 체포되었다. 나도 잡혀서 모두 함께 마당에 앉아 있었다. 김 립과 유돌렬이가 낙담하여 “우리는 보기 드문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알렉산드라는 “당신들은 정말 맹렬하게 일하지 않았는가. 직접 조선의 혁명을 보고 싶다. 괜찮지 않은가. 우리의 사업은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선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이룰 수 없다면 우리의 아들 딸들이 이룰 것이며, 그들이 못해낸다면 손자 손녀들이 해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후손들의 힘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우리는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나, 인섭은 그 때 장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나는 연해주와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잠시 생각한 뒤에 말했다. “…나는 그것을 말릴 수 없지만, 당신에게 더 큰 규모의 일, 동반구에서의 넓은 활동 영역을 맡기겠다. …총알 하나는 단 한 사람을 죽이지만 한장의 삐라는 적의 모든 군사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 …나는 선전 삐라와 조선어로 번역한 정치문서를 조선으로 보내는 것이 훈련되지 못한 활동가들을 지휘하는 것보다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사흘간 우리들은 그와 함께 창고에 있으면서 파업을 하달받았다. 나는 그에게 맡겨준 일을 꼭 수행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체포된 지 나흘째 되던 날 알렉산드라는 다른 장소에 따로 구금되었다. 우리는 그 마음에 14일간 감금되어 있었다. 그 후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었다. 알렉산드라·타쉰·네페도프 등은 각각 따로 호송되었다. 우리를 호송해온 배는 3일간 하바로프스크 부두에 정박해 있었는데 그곳으로 주민 수천명이 몰려들었다. 부두는 일본군 소대가 지키고 있었다. 체포된 러시아인 둥지들은 칼므이크인 백군 부대로 인도되어 시내로 호송되었다. 체포된 조선인 12명은 부두에 남았다. 코사크들은 우리 12명을 어떤 보상금이나 사례를 받고 일본군 손에 넘기려 하였다. 이 12명 가운데 조선에서 일본 군국주의와 싸우던 세 사람의 정치적 망명자가 있었다. 김 립, 이단열 그리고 나였는데 우리에게는 심각한 위험이 닥쳤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비상 사태가 벌어졌다. 백군들이 일본군 소대장에게 우리 12명을 접수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 때 일본군 소대장은 부두의 질서를 안정시키라는 명령을 수행하기에 바빠 백군의 제의는 예기치 못한 것이었고 불쾌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는 여권을 검사해 일본이 발급한 것이 아니면 체포된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증명서를 제출하였다. 그것은 중국 여권이었다. 그러자 일본 소대장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렇지, 우리 여권을 발급받은 자가 어떻게 볼셰비키가 되겠는가.” 그리고 일본어로 백군들을 욕하였다. “바카 ! ” 백군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나는 일본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슬그머니 해안으로 내려가 중국인들 사이에 숨어버렸다. 남은 두 조선인은 러시아인 동지들이 감금된 곳으로 보내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나중에 석방되었다. 재판, 그리고 총살 백군들은 감옥에 격리수용되어 있던 알렉산드라 · 타쉰 · 네페도프 동지와, 당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다른 지도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알렉산드라는 법정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군사재판정을 공산주의 선전장으로, 적들을 고발하는 무대로 바꾸어 버렸다. 군사재판장은 알렉산드라에게 “당신은 조선인이므로 러시아의 국사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모든 것을 인정하고 뉘우친다면 당신을 석방하겠다”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분개하여 “인정하고 뉘우치라고? 나는 조선인 혁명가로서, 만약 조선 인민이 러시아 불셰비키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달성한다면 조선 민족도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당신은 내가 조선 출신으로서 이 전쟁에 참가한 것으로 여기는가 본데, 나는 러시아 영내에서 태어나 자랐다. 적군 병사들과 함께 이 전쟁에 참가한 수백명의 조선인은 모두 노동자·농민, 조선 애국자들이다. 그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것이 조선 민족을 해방에 이르게 해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열성적으로 이 전쟁에 참가한 것이다. 몇 달 후면 당신들은 만주에서, 조선에서, 극동 전역에서 손에 무기를 든 조선인들을 틀림없이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들에게 체포되었지만 내가 해온 혁명 사업은 어디서나 언제나 전개되고 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당신이 말하는 대로 ‘인정하고 뉘우친다’면, 나는 혁명을 배신하고 2천만 조선 민족 앞에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한 재판관이 “만약 여성으로서 당신이 재판관들에게 자기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여성으로서?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하고 있다. 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계급 투쟁에 나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다. 당신은 그 모든 여성에게 자기의 활동을 뉘우치라고 얘기할 수 없다. …몇년 뒤에 극동에서 조선에서 중국에서 전세계에서 여성들이 남자들과 나란히 인간 사회의 모든 생활에 걸쳐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참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해오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만의 여성 가운데서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 만약 이 세계의 억압받는 여성과 남성들이 자유를 위해서 봉기하여 승리를 거둔다면 전세계는 통일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그리고 사이 좋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기의 범죄를 뉘우친다면,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이다.” 재판관들은 모두 알렉산드라가 인정하고 뉘우치도록 강요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짐승 같은 고문을 당하고 가슴과 얼굴에 흉측한 상처를 입었다. 사형 집행후 일본 영사 다쿠치는 사법기관에 알렉산드라의 총살에 관한 정보를 요청하였다. 이 일은, 적국인 일본 당국도 알렉산드라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의 활동에 대하여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사건 이후에 하바로프스크 주민들은 그 지역의 아무르 강에서 고기를 낚지 않았다고 한다(이 부분은 올가 바실리예비치 오가이가 이야기한 것임).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 문화
    • 만화
    2021-12-11
  • 괴물들 - 박건웅 단편집
    제목 : 괴물들 작가 : 박건웅 출판 : 보리 박건웅 작가의 신작이다. 그가 오랜 시간 그렸던 단편을 모았다.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외국의 작가들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창작하는 경향이 높다. 그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데, 한국현대사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격동적이고, 드라마틱하며, 격렬한 과정을 겪었던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대개 70년대, 80년대에 태어나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가 있었으며,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부패, 권력자의 오만과 폭력을 눈으로 보며 자랐다. 여기에 대학시절의 학생운동, 사회에 나와 시민운동을 경험하면서 정치의식이 발달하고, 민주주의 학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작가의 작품에 스며들었다. 작가의 경험은 작품세계에 직접 영향을 준다. 특히 그래픽노블이 갖는 장르적 특성은 작가의 자기 서사가 강하고 깊다는 데 있는데, 박건웅을 비롯해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한국현대사와 자기 서사를 일치하는 경향이 많다. 이건 퍽 우연이지만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모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픽노블 작가는 강하고 깊은 자기 서사와 함께 개성 있는 그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나 기호보다는 이미지가 그래픽노블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지가 핵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다른 그래픽노블 작가들과 분명한 변별을 보여준다. 강렬한 흑백의 이미지와 판화 같은 날카로운 선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불 때'처럼 무채색 유화의 분위기가 나는 그림도 있다. 전체적으로 흑백의 강렬함 속에서 날카로운 풍자를 드러내는 작가의 작품은, 작품의 주제와 이미지의 형식이 완벽하게 결합한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박건웅 작가가 소재로 삼는 작품들 가운데는 읽기 불편하고, 힘든 작품이 꽤 많다. 이건 물론 작가의 책임이 아니라, 한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현대사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잔악하며, 끔찍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이미지로 그려야 하므로, 독자보다 오히려 더 큰 트라우마를 겪을 것으로 보는데, 그래서 독자는 박건웅의 작품을 쉽게 읽어나가지 못하게 된다. 작품 '문신'은 단편이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고통스럽다. 한 칸, 한 칸의 이미지가 마치 칼날처럼 몸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일본군이 조선의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은 인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범죄였다. 이런 내용을 심각한 논문이 아닌, 그래픽노블로 본다는 것은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작품집은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 그린 것과, 당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 보면서 만든 작품을 모았다. 단편이지만, 마치 연작처럼 작품의 내용과 수준이 일관되고,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은 자가 돌아왔다 보름달이 뜨던 날 오래전에 죽었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죽은 사람들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놀라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자들에게 자기 피를 주고 달콤한 빵을 얻어먹다 보니, 점차 피가 모자라게 된다. 죽은 자는 썩어서 흙이 되어야 하지만, 살아 돌아왔다는 것으로 이미 역사의 퇴행을 의미한다. 죽은 자가 산 자의 피를 마시고 생기를 찾을 때, 산 자들은 과거의 역사, 과거의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죽은 자가 내미는 빵은 과거의 유산이다. 빵을 먹는 것은, 미래로 나가지 못하는, 미래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퇴행의 의지를 드러낸다. 과거의 유산이 달콤할수록 불투명한 미래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죽은 자들이 살아오고, 죽은 자가 마을의 대표가 되고,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이 공급하는 달콤한 빵에 만족할 때, 마을은 쇠퇴하고 사람들은 유령처럼 변한다.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죽은 자들이 마을을 점령한다. 죽은 자와 타협하는 것은 곧 과거로의 퇴행이자 소멸의 시작이라는 걸, 작가는 우화처럼 말한다. 전해 내려오는 모든 우화는 시대의 본질을 담고 있으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후대의 몫이며, 우화는 항상 새롭게 해석된다. 넋 사람들이 쌍굴다리 밑에서 모여 있다. 목이 마르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되는데 동굴 입구에 미군들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굴에서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본다.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을 답사하고 그린 작품이다. 한 두 페이지를 넘겼을 때, 노근리 사건 이야기임을 알았다. 작가는 이미 '노근리 이야기'를 두 권으로 펴냈고, 이 단편은 노근리 학살 현장으로 답사를 다녀와서 그린 작품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노근리 철길 아래는 여전히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고, 죽은 넋은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삶과 죽음을 알지 못하는 것, 살았어도, 죽었어도 끊임없이 고통을 느껴야 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들은 목이 마르고, 잘려나간 팔다리를 보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한다. 어둡고, 춥고, 고통스러운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절망 속에서 이들은 누군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 나타난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낯선 말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나타나고, 고통과 절망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는 그들은 군복을 입은 해골이다. 자신들을 죽인 그 미군들이 죽어서 해골이 되어 나타나 다시 그들을 죽이려 한다. 그들은 페인트를 가져와 벽을 지운다. 그들이 쏜 총알이 벽에 무수히 박혀 있는 자국을 감추려 했던 것처럼, 죽은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지우려 하는 것이다. 미군은 죽은 자들을 다시 죽이고, 그들이 남긴 흔적을 지우고, 역사에서도 지우려 한다. 바람이 불 때 1980년 봄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친구로 헤어진다. 그 뒤 한 사람은 버스에 탄 시민으로, 다른 한 사람은 버스에 총을 쏘는 군인으로 만난다. 5.18 광주에 투입됐던 어느 공수부대원의 증언을 모티브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5.18 광주민중항쟁 시기에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광주에 살던 청춘 남녀는 서로에게 마음이 있지만, 남자는 군에 입대한다. 공수부대에 배치된 남자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고, 부대원들이 광주 외곽을 지나가는 버스에 집단 난사를 해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 모두를 학살한다.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한다는 연인은 버스를 타보라는 남자의 말을 듣고, 남자를 면회가기 위해 멀미를 참으며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 그날, 그 버스에 남자의 연인이 타고 있었다. 이 사건이 실제 있었던 일이었을까. 작가는 공수부대원의 증언으로 재구성했다. 연인들이 시민과 군인으로 만났다면, 그 군인은 광주에 폭동이 일어났고,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상관의 말을 믿었다면, 총을 쏜 군인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모르고 저지른 학살이라도 학살자의 죄를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현대사사의 비극 가운데 가장 큰 비극은 대부분 해방 이후에 국내에서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 많다. 그 군부의 상급자들은 거의 대부분 일제시대에도 군인이었으며, 친일파들이었다.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하고, 국민을 학살했으며, 독립운동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학살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거인 캄캄한 굴 속에서 살아가는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만났던 귀족과 거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을 사람들은 거인이 모든 것을 다 해 줄 것이라는 귀족의 유혹에 속아 넘어가고, 마을의 강은 점차 죽음의 강으로 변해 간다. 소박하게 살아가던 마을 주민에게 귀족이 찾아온다. 귀족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본(가)이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많다. 귀족은 지배자일 수도 있고, 엘리트일 수도 있으며, 이명박일 수도 있다. 그것들이 순박한 마을 주민을 꼬드기고, 욕망을 부추킬 때, 사람들은 그 욕망을 좇는다. 어리석고 무지한 대중은 그 자체로 죄악이다. 사기 치는 놈은 당연히 나쁘지만, 멍청하게 그 사기에 동조하고, 보이지 않는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 역시 사기꾼의 범죄에 가담하는 것이다. 민중이 언제나 옳거나 지혜롭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거의 대부분 어리석고 멍청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어리석은 민중은 조금씩 깨어났고, 지혜로워졌다. 욕망의 부추김에 수없이 속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무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이 데려온 거인은 탐욕과 욕망의 현현이다. 탐욕과 욕망은 추구할수록 커진다. 그것은 끝도 없이 자라며, 더 많은 것을 삼키고, 더 많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그 거인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에서 잠들어 있다. 언제든 어리석은 인간이 깨울 날을 기다리며. 거인과 소인 오래전부터 소인들은 거인에게 음식과 재물을 바치며 평생 살아왔다. 어느 날 더 바칠 것이 없어지자 거인은 소인들의 자식도 바치라고 요구한다. 결국 소인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 거인을 물리치고 새로운 왕을 뽑아 새로운 왕국을 만들지만, 왕은 또다시 거인이 되어 나타난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부터 존재는 스스로 작아진다. 거인과 소인은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존재다. 그것은 상대적이며,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거인은 권력자다. 아니, 권력자를 거인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리가 스스로 소인으로 만든다. 권력의 유무에 따라 인간의 존재가 거인과 소인으로 나뉘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걸 의미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규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권력을 준 것은 다수의 인민이지만,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과 '자기'를 일체화한다. 권력과 존재의 일체화는 개인을 권력의 화신으로 만든다. '개인'이 작아지지 않는 방법, 권력을 가진 자가 거인으로 보이지 않는 방법은 올바른 투표 뿐이라는 걸 작가는 우화로 말한다. 괴물들 아버지는 사막 너머에 괴물들이 살고 있으며 호시탐탐 마을을 위협하기 때문에 괴물들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괴물을 잡으러 사막 너머로 가, 괴물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그 자식을 인질로 데려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괴물을 잡으러 가자고 말한다. 괴물들은 작고 약했지만, 거대한 아버지는 그 괴물을 죽이고, 사로 잡아 마을로 데려온다. 그런데, 마을의 주민들과 잡아 온 괴물의 모습은 같다. 마을 주민들은 괴물을 잡아온 거인을 '나리', '아버지'라고 부른다. 나리가 잡아온 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배자는, 권력자는 자기가 다스리는 마을 사람과 똑같은 사람을 두고 '괴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때로 '빨갱이'이며, '종북'이며, '반미'이며, '친북'이며, '친중국'이며, '장애인'이며, '여성'이며, '페미니스트'이며, '성소수자'이며, '사회적 약자'들이다. 나리는 이런 소수자들을 '괴물'이라고 말하고, 이들을 혐오하도록 부추기고, 이들을 때려잡고, 이들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정작, 평범한 사람을 '괴물'이라고 말하는 '나리'는 눈이 하나인 진짜 '괴물'이다. 봄섬 태준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려운 집안 환경 속 고민을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밤하늘의 별은 반짝이는데 그 순간, 태준이는 어떻게 이 섬에 올 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 이야기를 기록한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 2016)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지금도 진행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학생의 이야기는, 한국현대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과 맥이 닿아 있다. 제주4.3, 노근리, 광주5.18로 이어지는 학살의 주범은 늘 권력이었고, 동족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노근리는 외국군(미군)이 피난하는 민중을 학살한 사건이었지만, 그것 역시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 탓이었으니, 이 땅의 민중은 늘 그렇게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존재였다. 세월호 참사는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에서 벌어진 그 모든 학살 사건의 정점이자, 마지막 사건이다. 이 사건을 만든 박근혜 정권의 뿌리는 저 멀리 일제강점기의 일본 관동군 소좌 박정희로 거슬러 올라가고, 독립군을 때려잡았던 조선일본군 박정희와 백선엽으로 시작해서, 해방 이후 조선의 민주주의자들을 암살하고, 때려잡던 일제 앞잡이 군인과 경찰로 이어지며,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망가뜨린 이승만을 거쳐 제주4.3에서 제주도 민중을 '어린아이도 모두 학살하라'고 명령한 이승만과 조병옥이를 비롯해 학살의 주범들이 권력을 쥐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좌우의 이념을 선택한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이후, 수없이 많은 민주주의 시민과 학생을 학살했다. 세월호 참사가 박근혜 정권에서 일어난 것은 필연이었다. 학살자를 아버지로 둔 박근혜는 대를 이어 권력을 잡았지만,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인간 허수아비였고, 최순실의 노리개가 되어 나라를 망가뜨렸다. 국민은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권력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해경은 학살 현장을 방조, 동조했다. 이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로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진실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고, 학살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아파트 새로 지은 아파트 벽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주민들은 누가, 왜, 어떻게 시체로 발견되었는지보다 당장 아파트 값이 떨어질까 걱정부터 하는데…. 그 비밀을 추적하던 9층 남자는 마침내 아파트의 비밀을 알게 된다. 아파트공화국에 대한 통렬한 풍자. 아파트를 세우는 사람들은 노동자다. 저임금에 강도 높은 노동으로 공사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사고로 죽는다. 이렇게 죽는 노동자들은 거푸집에 버려져 콘크리트와 함께 묻히고, 비싸고 화려한 아파트가 준공되어, 은행빚을 왕창 얻은 중산층은 아파트를 사면 곧바로 2배, 3배 아파트 값이 뛸 것을 기대한다. 아파트에 대한 욕망은 사람의 생명보다 훨씬 강렬하다. 아파트 벽에 사람의 시체가 드러나도 '예술작품'이라고 견강부회하며 오히려 아파트의 가치를 높인다고 말하는 목사의 말은, 아파트 가격이 지상 최고의 가치이자, 욕망의 절정이라는 걸 잘 드러낸다.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들은 시체를 꺼내 국을 끓여 먹고, 살아 있는 사람도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른다.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 사회는 인간의 윤리, 도덕, 염치, 사랑이 사라진 사회다. 오로지 돈, 물질, 가치, 욕망이 전부인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반 평범한 국민이 가지고 있는 자산의 70%가 아파트라고 하니, 아파트 가격의 오르내림은 이들에게 목줄을 쥐고 있는 것과 같다. 아파트 가격의 80%까지 은행에서 빚을 얻어 매입하고, 매달 이자를 내고 있으니, 아파트 가격이 내려가면 이들은 빚더미에 앉게 되는 것이다. 이들,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욕망에 매달리도록 만든 것은 권력과 자본이다. 인간의 이기와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는 사람의 생명보다 아파트 가격이 더 중요하도록 만들었다. 서로를 잡아 먹어야 살아남는 자본주의의 잔혹함은 주민들이 또 다른 주민을 잡아 먹는 장면으로 드러난다. '식인'은 단지 오래된 관습이 아니라, 경쟁을 부추기고, 경쟁을 통해서만 살아남아야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낸다. 천국과 지옥 1 죽은 자들은 천국의 문 앞에서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결정된다. 하나님을 믿고 십일조를 해야만 천국으로 갈 수 있고, 돈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시간이 흘러 천국은 부패한 사람들로 가득해 살기 힘들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한 천국 사람들은 결국 지옥으로 향한다. 한국 개신교를 신랄하게 풍자한 내용. 천국과 지옥은 흑과 백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개신교의 맹점을 드러낸다. 세상이 오로지 천국과 지옥으로만 존재한다는 이 멍청하고 한심한 생각은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만든다. 조 아무개를 닮은 천사는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갈 지, 지옥으로 갈 지 선별한다. 예수를 믿은 사람,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회개했다는 사람, 돈이 많아서 뇌물을 바치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가난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 천국은 범죄자들, 사기꾼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가득 차고, 지옥은 가난한 사람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산다. 천국에서는 온갖 범죄가 일어나고, 서로를 죽이고, 악행이 벌어지면서 천국에 살던 사람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지옥으로 탈출한다. 차라리 지옥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천국은 타락하고, 멸망한다. 그렇게 지옥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지옥이 너무 평화롭고,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지옥은 화염이 불타고, 악마가 창과 칼로 사람들을 난도질 하는 것이었지만, 이 지옥은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타락하고 멸망한 천국을 버리고 지옥으로 내려 온 조 아무개 천사는 지옥에 다시 거대한-천국을 찌를 만한-교회를 짓고 신도를 모으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교회에 관심이 없다. 교회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지옥은 평화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진짜 '예수'가 살고 있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내려 온 예수가 그곳에 있는 것이다. 유령 학교에서 청소를 하는 청소 노동자들은 유령이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교수, 학생, 노동자가 계급으로 인식되는 학원 풍경 속에서, 청소 노동자들은 유령이 아닌 사람으로서 권리를 되찾으려 한다. 청소노동자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 불안정한 고용으로 고통당하는 청소노동자는 현장에서도 유령 취급을 받는다. 누구도 아는 척 하지 않고, 무시하는 하찮은 존재. 그들이 누구건, 교수, 대학생, 사무직 노동자들 모두, 청소노동자를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자신도 노동자이면서 청소노동자를 마치 벌레처럼, 노예처럼 여기는 그들의 시선은 천박하게 비뚤어져 있다. 신분제 사회는 인간을 차별하고, 등급화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주인이고, 노동을 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인 것이 당연하지만, 여기에 다시 신분제가 자리 잡는다. 교수는 월급을 받는 노동자가 분명하지만, 자신을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은 대부분 미래의 노동자가 되지만, 청소노동자를 외면한다. 노동자도 대기업 정규직, 대기업 비정규직, 중소기업 정규직, 중소기업 비정규직, 하청업체 비정규직 등등 무수히 많은 차별과 차등으로 서로를 구분하고, 혐오한다. 청소노동자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신분의 노동자다. 그런 그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순간, 유령이었던 청소노동자는 존재를 찾게 되고, 다른 노동자와 동등하게 노동자의 위치를 갖게 된다. 노동자는 단결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찾고, 실존의 인격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죄와 벌 술을 먹고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는 떳떳하게 살아가고, 성범죄 피해자는 사람들의 눈총과 속앓이로 더 움츠리고 숨어 지내야 하는 현실을 대비하여 보여 준다. 한국에서 성범죄는 매우 가볍게 처벌한다. 성범죄자의 95% 이상이 남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법부는 성범죄를 남성 범죄로 규정해도 좋은데, 남성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범죄에 관대한 한국의 법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성범죄를 부추기고, 남성의 성범죄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결국 사법부가 성범죄자인 남성들을 옹호하고 보호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일에는 소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뒤집어 보면, 성범죄 피해자의 95%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사법부까지 피해자인 여성을 보호하지 않는 현실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남성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 사회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천국과 지옥 2 지옥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던 예수가 지상이 살기 힘들다는 기도를 듣고 지상으로 향한다. 대형 교회와 작은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교회의 부조리함을 알게 된다. 지옥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예수는 자기를 팔아서 먹고 사는 목사와 대형교회를 보면서 절망한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예수를 팔아서 무지한 신도들의 등을 처먹는 목사와 교회가 매우 많고, 어리석은 신도들은 그런 목사와 교회를 아무 생각없이 추종한다. 신도들은 '신' 또는 '하나님' 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고, 목사의 말을 진리로 믿는다. 어리석은 신도와 탐욕에 찌든 목사가 만나서 소돔과 고모라의 막장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살아서 한국에 오면 노숙자 소리를 듣고, 사기꾼 소리를 듣게 된다. 예수를 등처먹는 목사가 나타나고, 예수는 목사에게 이용당하고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전락한다. '신'이라는 예수마져도 하찮게 만드는 한국 개신교의 탐욕과 욕망의 크기는 초대형 크기의 교회로 등장한다. 세계 최고 크기의 교회를 짓는 한국의 개신교는, 목사가 대를 이어가며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교회를 부동산 가치로 계산하는 철저한 물신주의를 따른다. 문신 열세 살 소녀는 어느 날 일본군에게 끌려가, 혜산시 군부대 막사에서 다른 소녀들과 함께 성노예로 지내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이토 다카시가 40년 동안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흑백의 단순한 형태로 그린 만화지만, 차마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하다. 일본군이 저지른 이 참혹한 만행은 필설로 표현하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잔혹하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주인공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서 온몸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일제의 만행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일본은 한국의 성노예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다. 일본은 자기 나라 국민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일본군이 저지른 이 잔혹하고 악귀의 행위를 은폐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천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대로 일본의 만행을 더 널리 알리고, 성노예 피해자를 보호하고, 보살펴야 한다. 세균 지구에서 가장 하등한 동물로 취급되는 세균. 어느 날 이 세균을 믿기 힘들 정도 귀하게 대접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세균을 통나무에 넣고 이런저런 실험을 자행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잊히지 않는 실험이 있다. 일본군 731부대의 만행을 그린 내용. 일본군은 세균전을 준비하기 위해 세균실험을 하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조선인과 중국인을 잡아와 생체실험을 했다. 그 내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하고 참혹해서 필설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731부대에서만 일본군의 실험대상으로 약 1만 명의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 몽골인이 죽었고, 731부대가 개발한 세균을 중국에 투하해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세균 감염으로 죽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쓴다는 것부터, 그들이 저지른 악행은 나찌가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가스 학살보다 훨씬 더 잔혹한 행위였다. 일본은 끝내 이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여기서 만들어진 자료는 미군이 가져갔다. 미군 역시 731부대의 만행을 알았지만, 자료를 넘겨 받는 조건으로 전쟁범죄를 문제 삼지 않았으므로, 강대국의 논리는 정의보다는 자국의 이익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앞으로 10년 동안 긴 밤이 올 것이라는 예보가 나왔다. 밤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대통령은 모두가 긴 잠을 자야 한다고 대국민연설을 한다. 어느 날 모두가 잠든 피난소에 괴물이 나타나 사람 피를 빨아 먹는데, 그 모습을 잠들지 못한 소녀가 보게 된다. 침묵하는 대중은 권력에 잡혀 먹힌다. 권력은 낮은 밤으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으며, 밤이 되면 모습을 바꿔 괴물이 된다. 그들은 대중의 피 - 재산은 물론 가족, 이웃, 친구, 우정, 정의, 민주주의, 연대, 우애, 윤리, 도덕, 사랑 - 를 먹고 사는 존재다. 괴물을 막으려면 대중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서 행동하는 시민, 단결하고, 힘을 모으고, 합심해 괴물을 막겠다는 의지를 가진 대중은 괴물(권력)에 잡혀 먹히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번 괴물에게 잡혀 먹혔던 기억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 이명박 사기꾼, 박근혜 등 사악하거나 멍청한 권력에게 빛을 빼앗기고, 오랜 시간 잡아먹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대중은 깨어났고, 서로 힘을 모아 괴물을 물리쳤다. 촛불 집회가 그 생생한 기록이자 증거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 어둠을 밝혔고, 괴물(권력)을 쫓아냈으며, 마침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
    제목 :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 작가 : 유디트 바니스텐달 출판 : 미메시스 가족이 겪는 아픔과 슬픔을 잔잔하면서도 감동 있게 그려낸 그래픽노블. 한 가족의 구성원이 아버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품이 시작하기 전에 가족 관계도를 보여준다. 이 관계도를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이 가족이 어떻게 맺어졌는가를 독자가 미리 알기를 바라는 것이고, 이 작품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작품에는 모두 다섯 명의 가족 구성원이 나오지만, 작품에서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네 명이다. 루이즈는 너무 어려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귀여운 아기로만 등장한다. 주인공 다비드는 1946년생으로, 여행서적 전문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혼한 전처 율리아와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지만 둘 사이에서 낳은 미리암과는 가깝게 지낸다. 다비드는 파울라와 재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나이 차이가 열일곱 살이어서 딸 미리암과 새엄마는 불과 열세 살 차이여서 엄마라기보다는 언니 같은 느낌이다. 미리암은 혼자 아이를 출산하는데, 미리암의 딸 루이즈가 2000년 생인데, 다비드와 파울라의 딸 타마르는 1992년으로 불과 여덟 살 차이나는 이모와 조카 사이가 된다. 미리암과 타마르는 이복 자매면서 열여섯 살 차이가 난다. 이런 가족 관계를 바탕으로, 작품은 네 사람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다비드는 친구인 의사 조르지 앞에서 자신이 후두암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아직 어린 딸 타마르였다. 어린 딸을 두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다비드는 진한 슬픔이 차오른다. 다비드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유모였다. 유모는 쓰러진 다비드에게 나타나 용기를 주고, 희망을 심장에 넣어준다. 미리암 미리암은 2000년 4월,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인에서 혼자 아이를 출산한다.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서 루이즈를 낳는다. 미리암의 출산 방식은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산부인과에서 자연분만 또는 제왕절개술로 출산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미리암의 자연분만, 그것도 물속에서 아이를 낳는 방식은 특별하면서 아름답게 보인다. 아빠와 새엄마, 이복동생은 모두 미리암이 아기를 낳은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이를 낳고 미리암은 루이의 전화를 받는다. 루이즈의 아빠이기도 한 루이는 미리암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만났다. 그때 이미 루이는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미리암도 사랑한다고 했고, 두 사람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사랑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은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걷는데, 루이는 목수로 일을 하는데, 나무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고 했다. 미리암은 보도사진 작가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코소보 전쟁에 종군기자로 갔었다. 여기서 잠깐, 미리암이 갔던 코소보 전쟁에 관해 간략하게 알아보자. 코소보 전쟁은 내전의 성격이었지만 미군과 나토군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쟁으로 확산한 전쟁이다. 1998년 2월에 시작해 1999년 6월에 끝난 전쟁으로 알바니아계 준군사조직인 코소보해방군과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 정부군이 상대였다. 코소보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발상지로 세르비아 영토였으나 오스만 제국에게 전쟁에서 패하고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무슬림계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에 살기 시작하면서 알바니아인 비율이 높아졌고, 1974년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유고연방 내 자치주로 승격했다. 1980년, 티토가 죽고나서 1989년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세르비아 공화국에서 집권하자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라는 이유로 코소보의 자치를 박탈한다. 이 조치에 분노한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1995년 코소보해방군을 결성해 무장투쟁을 시작한다. 1998년 3월, 코소보해방군이 먼저 지역을 순찰하던 세르비아 경찰을 사살했고, 세르비아가 주세력이었던 유고연방은 정부군을 코소보로 파견해 코소보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미리암은 이 전쟁에 종군기자로 들어갔지만, 아이까지도 잔혹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보면서 트라우마가 생겼고, 더 이상 전쟁 사진을 찍지 않게 된다. 미리암이 루이즈를 낳고 집으로 돌아와 아빠 다비드를 만났을 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빠에게 그 말을 듣는 미리암의 손이 떨리고, 자러 들어갔던 타마르도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나온다. 미리암은 새엄마 파울라에게 아버지의 암 이야기를 꺼내지만, 파울라는 미리암에게 화를 낸다. 남편 다비드나 미리암 모두 너무 과묵해서 마음을 나누지 않는 것에 화가 난 것이다. 바싹 마른 아버지의 모습에서 해골이 된 아버지의 환영을 보고, 죽음의 사신과 춤을 추는 꿈을 꾼다. 타마르 타마르는 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5일 동안의 여행이지만 옆집 친구 맥스와 헤어지는 건 더 오랜 시간처럼 느껴진다. 타마르의 엄마 파울라는 남편에게 왜 같은 장소로만 여행을 하느냐고 묻지만 다비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 지난 5년의 세월이 다비드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시기에 지금의 아내 파울라를 만났고, 둘 사이에 타마르가 태어났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기 그 여행지에서 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다비드가 딸 타마르와 단 둘이 그 여행지로 떠나는 것도, 어린 딸에게 추억을 남겨주고 싶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소박한 소망은 아닐까 생각한다. 호수에 도착해 다비드는 낚시를 하고, 타마르는 수영을 한다. 물속으로 잠수한 타마르는 인어를 만난다. 타마르는 인어에게 멀리서 낚시하고 있는 아빠를 보여주며, 자기를 낳아준 사람이라고, 하지만 곧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 타마르는 아빠와 장을 보러 가고, 배를 타고 낚시로 물고기를 낚아 배에서 직접 구워 먹는 소소한 일상을 누린다. 맥스가 쓴 편지를 파울라가 풍선에 묶어 보내면, 호수 여행지에 있는 다비드가 받아서 요트 돛대 기둥에 묶어 놓고 타마르에게 편지가 왔다고 알려준다. 물론 진짜 편지는 우편을 통해서 오지만, 아이들의 꿈을 살려주는 어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 것도 정겹다. 타마르가 잠든 밤, 다비드는 선착장에 홀로 앉아 유모가 심어준 희망을 조금씩 꺼내보면서 기운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어린 딸을 생각하면 암으로 아픈 것보다 더 마음이 아리다. 타마르는 아빠와 둘이 배에서 잠을 자며, 별들이 쏟아질 것같은 하늘을 바라보다 묻는다. '영원하다'가 무슨 뜻이냐고. 세상은 모두 죽는다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두. 타마르는 호수의 인어와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와 맥스를 만난다.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맥스와 놀고 있던 타마르는 아빠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타마르는 작업실에 있던 엄마를 부르고, 구급차에 실려 다비드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다. 파울라 병원에 입원한 다비드의 상태를 보던 파울라는 주치의이자 다비드의 친구인 의사 조르지에게 남편의 상태에 관한 설명을 듣는다. 다비드의 후두암은 이미 온몸으로 퍼져 있었고, 앞으로 남은 기간이 길어야 6개월이라는 말을 듣는다. 퇴원한 다비드를 돌보며 자기 일-패브릭 디자이너-을 하는 파울라는 헬싱키에서 닷새간 객원 강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다비드나 옆집 맥스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며 헬싱키에 다녀오라고 말하지만, 남편이 언제 죽을까 애태우는 파울라는 다비드에게도, 맥스 엄마에게도 화를 낸다. 그는 슬프면 화가 난다고 했다. 다비드가 죽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은 파울라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헬싱키로 떠난다. 그는 호텔에 도착해 호수가 있는 곳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남편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노인에게서 건강했을 때 남편에게서 맡았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파울라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타마르는 이제 아홉살이 되었다. 파울라가 작업실에서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가족이 모두 사라졌다. 맥스 엄마는 모두 병원에 갔다고 말한다. 파울라가 병원에 도착해 다비드 병실에 들어섰을 때, 타마르 홀로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울라는 다비드의 마지막 순간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다비드 몸 상태가 조금 좋아질 때면 딸 타마르와 놀아주지만 그보다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약에 취해 깊이 잠들거나 통증으로 괴로워한다. 다비드는 이제 헛것을 본다. 딸 미리암이 헤어진 아내 율리아로 보인다. 다비드와 미리암의 대화를 들어보면, 다비드의 전 아내 율리아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암 종양이 식도를 누르자 조르지는 후두를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후두를 제거하고, 말을 할 수 없는 다비드는 종이에 연필로 필담을 한다. 통증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다비드. 마지막으로 가족 모두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다비드는 친구 조르지에게 자신의 삶을 끝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한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바늘땀-정서적 학대에서 벗어나기
    제목 : 바늘땀 작가 : 데이비드 스몰 출판 : 미메시스 작가의 자전적 성장 이야기. 여섯 살부터 고등학생이 되어 집을 나올 때까지의 시간에서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주인공 소년과 가족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 사는 여섯 살 아이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데이비드는 방사선과 의사인 아버지 에드와 전업주부 엄마 베티, 형 테드, 넷이 한 식구로 살아가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막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한 중산층 가족으로 보이지만, 소년의 눈에 보이는 부모의 모습은 정상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엄마는 웃는 모습이 드물고, 한번 화가 나면 일주일, 한달씩 집안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곤 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퇴근하면 지하실에 매달아 놓은 샌드백을 두드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형 테드는 드럼을 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막내인 데이비드는 우울한 집안 분위기와 화를 참지 못해 난폭한 행동을 하는 엄마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꾀병을 앓았다. 데이비드는 대개 혼자였으며,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밖에서 혼자 놀거나, '앨리스와 이상한 나라의 마법사'에서 앨리스가 되는 꿈을 꾸며 앨리스 흉내를 내다 동네 아이들에게 게이, 호모, 변태, 기지배라는 놀림을 당하기도 한다. 봄방학 때, 아버지는 형 테드와 친가로 떠나고, 데이비드는 엄마를 따라 외가를 방문했다. 가족이 이렇게 갈라져서 각자의 부모를 만나러 가는 것도 신기하다. 어린 데이비드는 정확히 몰랐지만,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랐다. 다정다감하지도 않았고, 데이비드를 살뜰하게 보살피지도 않았다. 게다가 외가가 있는 인디애나 남동부까지 가는 동안 엄마는 마치 남의 집안 이야기처럼 당신의 가계에 관해 데이비드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 내용은 겨우 아홉살 아이가 듣기에는 잔인한 내용이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댄스파티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사랑했고, 외할머니가 임신하자 결혼하려 했지만 외할아버지의 부모님(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머피 부부)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두 사람은 집을 나와 집안 소유의 땅에 있는 오두막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아이(데이비드의 엄마)를 낳았지만, 아이의 심장은 오른쪽에 있었다. 데이비드의 엄마가 열 살 때 외할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사망했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증조할머니의 구박과 핍박이 심해지자 사유지를 떠나 코너스빌로 이사했고, 할머니는 가정부로 일하다 재혼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배수관 세정제를 마시고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성대가 타버려 목소리를 잃었다. 시간이 흘러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게 되었을 때, 집안에서 그녀가 훔친 물건이 쏟아져 나왔다. 포목점에 들를 때마다 물건을 훔쳤는데, 포목점에서는 증조할아버지에게 전화했고, 증조할아버지는 곧바로 돈을 지불했다. 데이비드가 기억하는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린 데이비드가 엄마를 따라 외가를 방문했을 때, 외할머니는 재혼해 존과 살고 있었다. 존 할아버지는 장의사에서 일했고, 마을 주민들과 잘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었다. 반면 외할머니는 괴팍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이상한 노인이었다. 데이비드는 엄마에게 할머니가 미친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엄마는 데이비드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태도와 엄마의 태도는 매우 비슷했다. 데이비드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집에서 병원 부인회 친목회가 열리곤 했는데, 외과의 남편을 둔 딜런 아주머니가 데이비드의 눈길을 끌었다. 딜런 아주머니가 방문할 때는 늘 우울하던 엄마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무렵, 데이비드의 목에 혹이 생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데이비드는 아버지가 일하는 병원에서 목에 생긴 혹을 검사하고, 열네 살에 혹 제거 수술을 받는다. 이 무렵은 데이비드의 아버지도 승진하고 수입도 많아져서 새 차를 구입하고, 집안 가구도 새 것으로 바꾸는 등 데이비드의 부모는 비교적 행복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수술은 간단하다고 했지만, 두 번을 했고, 첫 수술에서는 목소리가 잘 나왔지만, 두 번째 수술을 받고나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대의 한쪽과 편도선이 사라진 것이다. 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했고, 가족들은 모래알처럼 따로 놀았으며, 목소리를 잃은 데이비드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마치 유령같은 존재였다. 그러다 우연히 자기가 받은 혹 제거 수술이 사실은 후두암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가족 누구도 그 혹이 암이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수술을 받고 나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살았지만, 어쩌면 후두암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여전히 데이비드에게 냉랭했고, 가족들 사이에는 사랑이 없었다. 데이비드는 학교에 가지 않고 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며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의 차를 훔쳐타고 도망가다 잡혀서 유치장에 갇히기도 하고, 부모가 기숙학교에 강제로 전학시켰지만 세 번이나 탈출하다 퇴학당했다. 열 다섯 살이 되는 해, 데이비드는 문제 학생이 되어 심리상담을 받게 되는데, 그때 만난 상담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그 선생님-헤럴드 데이비드슨-은 데이비드에게 누구도 하지 않았던 말을 한다. "네 어머니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 말을 들은 데이비드는 충격을 받고, 그동안 쌓였던 마음의 응어리를 헤럴드 선생에게 풀어 놓는다. 데이비드는 부모에게 '방치형 학대'를 당했던 것이다. 부모의 학대는 자식에게 여러 형태로 드러나는데, 폭력을 쓰지 않는 학대도 있다는 걸 부모도, 아이도 모르는 상태로 지냈던 것이다. 데이비드는 심리상담을 하는 헤럴드 선생을 만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지만, 그의 가족은 서서히 그러나 그동안 쌓였던 불만, 부정, 냉대, 위선이 드러나면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가 어느 날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의 침실에서 그가 좋아했던 딜런 아주머니를 발견한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엄마의 냉랭한 시선과 마주치면서 그동안 겪었던 엄마의 냉대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한 것인지를 느낀다. 뒤 이어 외할머니가 존 할아버지를 지하실에 가두고 집에 불을 질러 주립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는 데이비드의 목에 암이 생긴 것은 자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 아버지는 데이비드가 어릴 때 필요 이상으로 방사선을 많이 쬐어 암이 발생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쩌면 죄책감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에 데이비드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고백했을 것이지만,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데이비드는 열여섯 살이 되자 집을 나와 따로 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디트로이트 외곽의 폐가에서 지냈는데, 이곳에는 집을 마련하지 못하거나 몰락해서 내몰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데이비드는 학업과 함께 그림을 열심히 그렸고,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예일 예술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뉴욕의 대학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그가 마지막으로 엄마를 만난 것은 서른 살이 되던 해, 엄마가 위독하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엄마는 아무 말없이 눈을 감았고, 데이비드도 애달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린 데이비드는 어려서 정서적 학대를 당하며 자랐다. 이걸 알게 된 것은 그가 열 다섯 살, 문제아로 심리상담을 받기 위해 헤럴드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였으니 어린 데이비드가 겪었을 심리적 고통을 생각하면 독자의 마음도 먹먹하고 답답해진다. 정서적 학대를 한 사람이 엄마와 아버지 모두 였을 걸로 생각하는데, 특히 엄마는 자신도 어려서 정서적 학대를 당하며 살았기 때문에 이미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결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데이비드의 외할머니는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지는데, 외할머니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이유는, 시부모(데이비드의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의 구박에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이 원인일 수 있다. 그때 외할머니는 임신한 상태였고, 임산부는 평상보다 훨씬 정서적, 육체적으로 민감하고 여린 상태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임산부를 더 따뜻하고 안락하게 보호해야 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이 할 일이지만, 외할머니의 시부모는 오히려 자식 내외를 거부하고, 구박하며, 못 살게 굴었다. 그렇게 나쁜 인성을 보였던 증조할머니는 결국 상습적으로 도둑질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그의 도벽은 역시 그의 집안 환경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집안 내력에 속된 말로 '나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한다. 외가 쪽으로 이렇게 좋지 않은 환경이 이어지면서 데이비드의 엄마, 외할머니, 증조할머니까지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어른들이 보이는 기이한 행동이 어린 데이비드에게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데이비드의 엄마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아마 오래 전-어쩌면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는 여성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 당할 각오를 해야하므로 평범한 여성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데이비드의 엄마 베티는 자신이 레즈비언으로 있을 때-딜런 아주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정상'의 인물로 돌아온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인할 때는 행복했던 것이다. 베티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에 남편도, 자식도 모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삶에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수 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았는지, 끝내 몰랐는지 작품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그 질문을 끝내 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기 아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부부라면 모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부는 아이를 낳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가족, 가정을 이루며 살았다. 베티가 죽은 다음에도 에디는 재혼해서 여든 네 살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정서적 학대를 당한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고 원만하게 사회생활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은데, 데이비드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고, 과거의 자신, 과거의 가족을 객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당시의 상황과 심리를 이해하고, 부정적 감정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다는 것, 그림을 매우 잘 그려서 그것으로 직업을 삼고, 학업을 마치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어려서 정서적 학대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은 것을 감안할 때,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면서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세 개의 그림자
    제목 : 세 개의 그림자 작가 : 시릴 페드로사 출판 : 미메시스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맞닥뜨렸으나, 그 운명을 거부해야 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는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신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가족-루이, 리즈, 조아킴-에게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이 나타난다. 이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그저 멀리서 가족을 지켜볼 뿐이다. 루이는 성실한 농부로 부지런히 농사 짓고 가족을 지키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평범한 사람이다. 아내 리즈도 남편과 아이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집을 돌보고, 살림을 맡아 하는 살뜰한 여성이다. 좋은 부모를 둔 조아킴은 구김살 없이 나날이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을 보낸다. 평화로운 풍경, 아름다운 자연이 집을 둘러싸고 있어 부족함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가족에게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은 누구일까. 루이와 리즈는 그들이 아들 조아킴을 데리러 온 사신이라고 믿는다. 루이는 그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려 대결을 펼치고 싶지만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리즈는 마을에 사는 주술사를 찾아가 부적을 써 오지만 역시 효험이 없다. 루이가 아들 조아킴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은 집을 떠나 죽음의 사신이 쫓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는 것 뿐이다. 다가올 운명을 피해 길을 떠나는 것은 전형적인 영웅의 서사이기도 하다. 영웅은 운명과 맞닥뜨려 운명과 싸워 이기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도 하지만, 운명과 맞서 싸워 처절하게 몰락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닥쳐올 운명을 알고 있다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운명을 피해 도망하는 것이겠다. 그렇게 루이는 아내 리즈를 집에 남겨둔 채, 아들 조아킴을 데리고 세 개의 그림자를 피해 길을 나선다. 그 길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영원한 길이라는 걸 이들도 알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이들의 아늑한 생활은 세 개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순간 깨졌고, 미래는 불안과 두려움이 지배할 것임을 예감한다. 신화적으로 본다면, 루이와 리즈는 인류의 앞선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세 개의 그림자 즉, 죽음, 자연, 질병에 맞서 후손의 생존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투쟁을 떠올리게 한다. 루이는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내놓고 배를 탈 수 있는 탑승권을 구입한다. 재산을 다 내놓고라도 세 개의 그림자로부터 멀리 도망쳐야 하는 절박함이 드러난다. 그 절박함은 곧 조아킴을 지키려는 굳건한 마음이기도 하다. 사흘을 건너야 하는 거대한 호수는 바다처럼 넓어서 비바람이 거세게 불고, 태풍이 몰아친다. 루이는 세 개의 그림자를 따돌렸다고 생각하지만, 배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루이는 살인자로 지목되어 조아킴과 함께 감옥에 갇힌다. 태풍으로 배가 가라앉고, 루이와 조아킴은 겨우 살아나는데, 두 사람을 구해 준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두 사람을 극진하게 구명한다. 죽을 고비를 넘긴 루이는 자신이 두려워했던 세 개의 그림자보다, 사랑하는 가족이 서로 떨어져 고생하는 것보다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소중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루이가 이미 건너온 호수를 다시 되짚어 돌아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자신을 구해준 노인은 조아킴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부여하겠다고 제안한다. 루이는 자신의 목숨과 조아킴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한다. 노인은 루이의 심장을 꺼내고, 조아킴을 지킬 수 있는 거대한 힘을 부여한다. 이 장면은 신화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루이의 심장 즉 '생명'의 상징을 꺼내는 것은 하나의 삶이 끝나는 걸 뜻한다. 루이가 한 명의 개체로서의 영웅이든, 어느 집단을 상징하든 그 집단, 세대, 영웅은 소멸하고, 그가 가진 힘과 권위가 다음 세대를 지키게 된다. 노인은 '절대자'이며, 앞선 세대를 끝내면서 뒤이어 오는 세대가 살아갈 환경을 부여한다. 앞선 세대의 희생에 의해 후손은 살아갈 여지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뒤이어 루이와 조아킴을 뒤따라오던 세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악, 재앙, 폭력, 질병과 같은 부정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시간, 행복, 슬픔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공포에 떨 만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루이가 세 개의 그림자 정체를 일찍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가족과 헤어지면서까지 힘겨운 길을 떠났을까. 심장을 내준 루이는 거대한 불멸의 존재로 변하고, 조아킴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는 자신의 몸도 지키지 못하고 쓰러진다. 루이는 인류의 역사를 의인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인류가 만드는 역사의 한 가운데를 지나며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의 생존 과정을 드러낸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조아킴(인류의 후손)은 세 개의 그림자와 함께 떠난다. 결국 인류가 지키려고 했던 소중한 것들은 인류의 힘으로 저지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다. 세 개의 그림자가 공포, 두려움, 재앙이든 시간, 행복, 슬픔이든 인류는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 결국 루이는 집으로 돌아가 리즈를 만나 두 딸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환상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루이가 말하는 동양의 격언, '일어서서 버텨라. 그리고 삶이 있는 곳에 머물러라.'는 말은 현실의 삶, 현재의 삶에 충실한 것이 인류 본연의 모습임을 깨닫게 한다. 작가의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그림은 이 이야기를 납득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흔히 사용하는 펜과 잉크가 아니라 붓펜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세필붓으로 매우 가는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붓선은 펜선보다 부드러우면서 선의 굵기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펜선으로는 톤의 느낌을 내기 어려운 반면, 붓선은 선의 강약과 얇고 두꺼움을 통해 짙거나 옅은 선과 면을 그릴 수 있어 톤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붓선은 선의 외곽 뿐아니라 면을 그리는데도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그리는 선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어 실력이 출중하다는 걸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디즈니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한 경력만 봐도 실력은 검증이 되었지만, 이야기와 그림이 잘 어울리고 있어서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 한국어 번역판에서 말풍선 안에 들어가는 대사의 글꼴도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손글씨 글꼴을 쓰고 있어서 작품의 품질을 높였다. 만약 말풍선 안의 활자를 보통 인쇄체 글꼴로 썼다면 그림과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포르투갈
    제목 : 포르투갈 작가 : 시릴 페드로사 출판 : 미메시스 잘 만든 양장본에 두툼한 두께의 이 그래픽 노블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그림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그래픽 노블의 특징이자 장점인 그림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그래픽 노블을 선택하는 가장 큰 요소는 그림이다.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림이 수준 이하라면 보고 싶지 않다. 반대로 내용은 별로인데 그림이 훌륭하다면 그것은 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래픽 노블에서 최우선 요소는 역시 그림이다. 지은이는 월트디즈니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고, 이후 만화가로 전업하면서 유명한 만화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책만 봐도 말할 필요 없이 최고의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삼부작으로 구성되었고, 주인공 시몽 뮈샤는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만화가지만 작가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 있고, 삼대로 이어지는 집안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잔잔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지고 있다. 시몽 이야기 주인공 시몽은 만화가로 작품집도 발표한 작가지만 심각한 슬럼프 상태에 있다. 그는 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세상 일이 심드렁하고, 삶의 의지도 박약한 상태로 침체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간다. 그의 애인 끌레르는 집을 사서 한 곳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시몽은 정착할 마음이 없어 갈등을 일으킨다. 시몽은 포르투갈에서 열린 작은 만화축제에 참가한 다음, 포르투갈과 자신의 끈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프랑스 사람으로 살아왔던 시몽에게 포르투갈에 자신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 할아버지의 고향이자 뿌리가 포르투갈이라는 사실은 뜻밖의 사실로 다가오고, 마음이 끌리는 걸 느끼게 된다. 그동안 가족들과도 소원하게 지내온 주인공은 사촌의 결혼식을 계기로 프랑스를 벗어나 포르투갈에서 한동안 지낼 생각을 하게 되고, 그동안 만나지 않았던 사촌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모든 일에 의욕도 없고, 미래를 설계하지도 않는 시몽을 보면서 끌레르는 결국 시몽의 곁을 떠난다. 시몽의 태도는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외로움을 느끼며 정서적, 정신적으로 결핍 상태에 놓어 있으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그는 심리상담을 하지만, 그것도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상담사도 포기한다. 시몽은 감정, 정서적으로 자기애가 과잉인 상태로 보인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자신도 모른다. 부모를 잃은 결핍인지, 고향이 없어서 겪는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한 원초적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 관한 허무 때문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장의 이야기 장은 시몽의 아버지다. 둘은 서로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자주 만나지 않는다. 형의 딸(조카) 아네스의 결혼식에 가는 걸 두고도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망설이다 결국 참석하기로 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퍽 낯설다. 가족의 결혼식이라면 당연히 참석하는 걸로 생각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이들은 철저히 자기의 삶을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는 걸 볼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장은 아들 시몽과 함께 조카 아네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르고뉴를 찾는다. 사돈댁은 부르고뉴에서 포도농장을 크게 경영하고 있었고, 와인을 생산하는 넉넉한 집안이었다. 결혼식의 하객은 주로 신랑 쪽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신부 쪽은 몇 명에 불과했다. 장은 조카의 결혼식에서 형과 누나를 만난다. 장의 형제들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장과 그의 누나는 부모님이 장남인 장의 형을 편애했다고 기억한다. 결혼식을 계기로 남매들이 만나서 이야기 할 기회를 갖게 되고, 이들이 계획에 없던 소풍을 나가면서, 돌아오는 길에 차가 고장나고, 비까지 내려 차 안에 갖힌 상태로 오래 전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함께 따라간 시몽은 큰아버지, 고모,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의 시대와 할아버지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 된 이야기를 처음으로 다양하게 들을 기회를 맞는다. 시몽은 끌레르와 헤어지는 것을 인정하고, 두 사람은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아벨의 이야기 시몽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지금도 그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포르투갈로 간다. 그곳에서 사촌의 집에 머물며 의뢰받은 작업도 하고, 할아버지의 고향과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들을 만나며 천천히 자신의 뿌리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촌이 묵으라고 한 집은 오래 전, 할아버지 아벨과 그의 동생 마뉴엘이 직접 지은 집이었고, 지금도 '무샤' 성을 가진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시몽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란 프랑스 사람으로, 언어도 프랑스어만 할 줄 알았지만, 자신의 뿌리가 포르투갈이라는 것, 포르투갈어가 낯설지 않다는 걸 느낀다. 할아버지 아벨을 잘 알고 있는 마을의 노인을 찾아 이야기를 듣고, 집앞 텃밭을 가꾸는 아주머니에게서도 할아버지의 동생 마뉴엘에 관해 이야기를 듣다가 그는 결정적인 내용을 알게 된다. '무샤' 집안의 뿌리는 스페인에서 온 무사들이 어린 아이를 마을에 놓고 떠난 사건에서 비롯했으며, 그 이름 모를 아이가 자신을 '무차초'라고 말해서 '무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샤' 집안의 시작이 된 그 아이는 이름도, 고향도 알 수 없었고, 오직 스페인에서 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아벨이 포르투갈을 떠난 것은 1930년대로, 포르투갈이 정치적으로 독재 상황이었고, 경제적으로도 몹시 어려운 시기여서 아벨과 마뉴엘은 먹고 살기 위해 프랑스로 일을 찾아 떠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벨은 프랑스에 그대로 남고, 동생 마뉴엘만 고향으로 돌아와 이후 고향을 지키며 살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시몽의 일상에서 시작해 점차 가족, 집안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점층적 서사를 보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친절한 설명은 없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관계, 감정, 살고 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시몽과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남매들은 자신들이 디아스포라적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포르투갈에 있고, 시몽의 할아버지대에 포르투갈에서 프랑스로 이주해 정착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드물게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신들에게도 '호적등본'을 떼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서 '외국인' 즉 '타자'로 보이게 되는 상황을 드러내며 복잡한 마음이 된다. 포르투갈은 프랑스에서 멀지 않지만, 중간에 스페인이라는 큰 나라가 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처럼 보인다. 포르투갈도 중세 유럽의 식민지 개척 시기에는 강력한 국가였지만 지금은 유럽에서는 힘이 많이 빠진 중진국이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선진국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쇠퇴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라의 여건이야 어떻든 이 만화에서는 포르투갈의 평범한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중진국 수준이지만 이들은 소박하고 낙천적인 성향으로 낯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친절하게 대하고 있는 걸 보여준다. 주인공 시몽은 자신의 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의 역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도 조금은 더 가까워지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들-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사촌들과도 쉽게 한 식구처럼 가까워진다. 이런 현상은 포르투갈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따뜻한 환대와 열린 마음, 가족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들의 문화 덕분이기도 한데,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 느끼지 못한 따뜻한 분위기가 시몽의 태도와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시몽의 할아버지는 형제가 프랑스로 취업 이민을 위해 고향 포르투갈을 떠났고,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시몽의 할아버지인 아벨은 프랑스에서 사망한다. 아벨의 동생이자 시몽에게는 작은할아버지인 마뉴엘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고, 두 집안은 그때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반전은 주인공 집안인 무샤의 집안이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를 알려주는 전설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전쟁을 하던 시기에 포르투갈의 한 마을에 스페인 기사들이 찾아오고, 한 아이를 재워달라고 부탁하고 기사들은 떠나간다. 그 아이는 혼자 남게 되고, 그 마을에서 자라 농부가 되는데, 그가 바로 '무샤' 집안의 조상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로만 본다면 '무샤'집안의 뿌리는 스페인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마지막 이야기는 퍽 낭만적이고 애틋해서 찡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며 감동이 더하는 이 그래픽 노블은 여러 번을 봐도 좋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그림이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다. 작가 시릴 페드로사의 그림은 한컷 한컷이 뛰어난 일러스트 작품일 정도로 완성도가 높고 뛰어나다. 작품은 모두 채색이며, 수채화 작업으로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채색의 특징은 이야기의 구성과 깊은 관련이 있어서, 과거, 회상, 현재, 감정에 따라 채색의 톤을 달리해 이야기의 흐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채색의 톤은 약간 어둡게 가라앉아서 차분하고 우울한 느낌이다. 이것은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들의 마음을 채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이 주로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어, 탈색된 느낌으로 채색을 한 것은, 과거의 이야기를 이미지로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섬세한 펜선으로 꼼꼼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그 위에 여러 겹의 채색으로 배경을 입혔다. 작품에서 시몽과 그의 가족이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포르투갈어를 외국어로 표기한 것은 작가가 의도한 역설이다. 포르투갈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외국인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라 외국어인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를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한국인을 부모로 둔 사람이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한국을 방문해 한국어를 들었을 때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모국어와 자신의 정체성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를 이 작품에서도 시몽과 그의 사촌이 나누는 대화에서 볼 수 있다. 이때 개인의 정체성은 물리적 공간(지역)에 있는 것인지, 혈연(핏줄)에 있는 것인지를 철학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작품을 다 읽으면 시몽이 초반에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방황을 이해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가 보인 행동을 납득하기는 어렵다. 결국 그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는데, 관계의 파탄은 오로지 시몽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의 삶과 생각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어떤 행동, 행위의 결과만을 두고 판단할 뿐이다. 시몽이 보였던 행동은 어리석고 멍청하게도 보이지만, 그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삶의 경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중동, 만들어진 역사
    제목 : 중동, 만들어진 역사 작가 : 장 피에르 필리유/디비드 베 출판 : 다른 한국(사람)은 미국과 유럽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고 있지만, 중동, 아프리카, 남미 국가들의 역사는 잘 모르거나 배우려 하지 않는 지적(知的)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 왜 그럴까. 미국과 유럽이 강대국이고, 정치, 경제 분야에서도 세계의 흐름을 좌우하는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과도 정치, 경제에서 긴밀한 관련이 있기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에 정치,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한편으로 치우쳐 있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미국의 시각'으로 편중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수입하는 원유의 약 80%는 중동에서 오고 있다. 한국은 70년대 중동의 건설현장에 진출해 많은 기업과 노동자가 뜨거운 사막에서 땀흘려 일해 나라의 부를 키웠다. 한국도 강대국 틈새에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 있지만, 중동 지역은 유럽 열강과 미국 등 패권국가들 틈새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굴욕적 위치에 놓여 있다. 중동이 평화롭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곧바로 한국에도 영향이 미친다. 제3차 중동-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자 원유 가격이 급등했고, 한국의 휘발유, 경유 가격이 폭등했던 전력이 있었다. 우리가 중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중동의 민주주의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원유 가격 뿐 아니라, 중동 여러 국가가 과거의 우리처럼 약소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의 폭압 아래 36년 동안 지배당한 기억을 잊지 않듯 중동의 여러 나라도 강대국의 폭압으로 부족과 민족이 서로 갈등하고 적대 관계가 되고, 증오하도록 만든 역사가 있다. 그 역사를 올바르게 알고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중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강대국의 논리를 따라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그래픽노블은 3부작으로 구성했다. 추천사(김재영 프레시안 기자)에도 썼듯이 이 책의 내용은 1) 어떤 과정을 거쳐 미국이 중동지역에 개입했고, 2) 중동의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미국이 어떻게 중동 독재자와 손을 잡았으며, 3)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가 어떤 문제와 갈등을 낳았는가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미국이 영국과 전쟁해서 독립한 직후부터 중동 지역의 분쟁에 개입해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과정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였다. 민중의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한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도 이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미국의 침략사는 미국이 독립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이 책의 중요한 미덕이다. 1부 1783~1953년, 열강이 만든 중동 1. 옛날이야기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해지는 서사시를 다루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로 알려진 이 오래된 이야기는 수메르의 도시 국가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의 영웅담을 그리고 있다. 길가메시는 신과 인간이 섞인 초인이다. 그는 강력하지만 백성을 억누르는 독재자였다. 이를 보고 천신 아누와 모신 아루루가 엔키두라는 강력한 인간을 만들지만, 길가메시는 엔키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삼나무 숲을 지키는 괴물 훔바바를 죽이는 원정을 떠나 마침내 훔바바를 죽이고 돌아온다. 길가메시는 여신 아슈타르의 유혹을 뿌리치자 아슈타르는 아버지 아누에게 길가메시를 징벌하기 위해 '하늘의 황소'를 내려달라고 요청한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하늘의 황소'도 죽인다. 그러자 신들이 엔키두를 죽였고, 길가메시는 충격을 받고 길을 떠나 영생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인간 우트나피시팀과 그의 아내를 찾아나서서 그들을 만나 대홍수에 대해 듣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다시 우르크로 돌아온다. 수메르의 전설은 기독교 설화에도 도입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기독교에서 '노아의 방주'로 알려진 대홍수 이야기는 수메르 전설로 알려졌으며, 내용도 거의 같다. 이라크에서 발견한 수메르 유적 가운데 석판이 있는데, '독수리 전승비'라고 불리는 이 석판의 한쪽에는 적들의 시체를 쌓아 승리를 기념하는 그림이 있는데, 2004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국 병사들이 이라크 정치범을 쌓아놓고 사진을 찍어 크게 문제된 적이 있었다. 역사는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2. 해적과의 싸움 15세기 이후 이슬람 진영은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수많은 전쟁과 전투를 치르는데, 기독교 쪽에서는 이것을 '십자군 전쟁'이라고 말하고, 이슬람 쪽에서는 '지하드 전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쪽에서 '십자군 전쟁'이라고 명명한 것은 18세기에 등장하는데, 기독교(가톨릭) 집단이 이슬람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초부터였다. '십자군 전쟁'에서 가톨릭 쪽의 내부 상황은 단지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 뿐 아니라 가톨릭 내부의 갈등과 긴장, 위협 요소를 바깥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여기에 귀족과 시민 계급의 불만을 무마하는 한편,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경제적 이익을 보기 위한 가톨릭과 각 나라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다. 기독교 세계(유럽)에서는 11세기부터 16세기 르네상스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암흑시대'라고 했는데, 그 말은, 가톨릭의 위세가 너무 강해서 종교적 억압이 유럽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고, 이에 따라 과학, 문화, 예술, 경제 등 사회 모든 분야가 발달하지 못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반면, 이슬람은 그리스의 발달한 과학, 수학, 철학을 받아들여 문명의 꽃을 피우던 시기였고, 영토도 확장되었다. 십자군은 11세기 초 기독교도로 구성한 정예 군대가 출전한 것을 제외하면, 이후 15세기까지 점차 약탈을 목적으로 온갖 부랑자, 범죄자들이 병사로 나섰다. 더 이상 종교적 명분은 성립하지 않았고, 영토 확장과 약탈이 주를 이루었다. 중세 이슬람 진영과 기독교 진영은 바다에서도 격렬하게 전쟁을 했는데, 양쪽 모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일을 하거나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노역을 했다. 19세기 초가 되면서 두 진영은 평화조약을 맺어 더 이상 해적이 상대 배를 침탈하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해군력이 약한 덴마크,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은 이슬람 해적에게 인질로 잡혀 몸값을 지불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미국이 독립한 직후, 영국은 미국이 영군 해군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제리에 알렸고, 알제리(이슬람 진영) 해적은 미국 상선을 나포해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미국 독립 직후에 발생했으며, 미국은 인구가 불과 300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였다. 미국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었다. 미국은 인질로 잡힌 미국인을 구하기 위해 영국 런던에서 트리폴리의 특사와 회담을 했다. 이때 참석한 미국 대표는 존 애덤스(영국 주재 미국대사), 토머스 제퍼슨(프랑스 주재 미국대사)였다. 하지만 이 회담은 결렬되었다. 1785년에 이어 1796년에도 이슬람 해적은 미국 선박을 나포해 선원을 노예로 삼았다. 1797년 존 애덤스가 미국대통령(제 2대)이 되자 미국 정부는 국가 전체 예산의 20%에 해당하는 돈을 이슬람 해적에게 주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1801년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슬람 진영에서 요구하는 돈의 액수가 커지자 평화조약을 파기했다. 그리고 미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트리폴리의 파샤(지배자)를 처단하겠다며 함대를 출전했다. 미국이 세계 전쟁에 나선 시작이었다. 1803년부터 시작한 미국 함대의 트리폴리 공격은 무려 네 차례나 있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이 중동 지역에 자연스럽게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권력자의 내분 때문이었다. 1793년 알리 카라만리가 죽으면서 장남 하산을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셋째 아들 유스프가 맏형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다음 둘째 형 하메트를 추방하고 그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하메트는 이집트로 도망가서 미국 정부에 왕위를 찾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미국은 하메트와 함께 트리폴리로 진격했지만 유스프와 협상을 통해 평화조약을 맺고 전투를 끝냈다. 이후에도 미국 선박은 알제리 해적에게 여러 번 나포당했고, 1812년 미국과 영국이 전쟁을 시작해서 1815년 정전협정을 했다. 이후 미국은 1815년 알제리를 침략해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는다. 19세기 초부터 미국은 대륙의 서쪽으로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당시 영국령, 프랑스령, 스페인령 영토를 무력으로 빼앗거나 돈을 주고 매입하면서 땅을 확장했으며, 해군은 중동을 비롯해 유럽, 아프리카 등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시아 진출은 1844년 청나라와 불평등 통상조약을 맺었고, 1854년 일본과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은 1866년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온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 미국 선원을 처형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1871년 한국 군사작전, 미-한 전쟁, 조선 원정 등으로 부르고 있다. 3. 석유의 시작 미국은 19세기부터 중동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했지만, 중동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중동과 아프리카는 유럽 여러 나라가 식민지를 만들거나 천연자원을 약탈하고, 그보다 앞서서는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을 폭력으로 끌고와 노예로 팔았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1939년 석유개발권을 협의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나온 원유가 최초로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복잡하고 격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1932년 '사우디 왕국'을 건국하고 이븐 사우드가 초대 국왕이 되었다. 사우디는 미국이 정권과 나라의 안위를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1945년 2월에 수에즈 운하로 이어지는 호수에 미국 구축함 USS 머피호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와 이븐 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비밀 회담을 벌였고, 이후 지금까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동의 여러 나라-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리비아 등과 미국이 긴장 관계, 적대 관계를 반복했던 것과 달리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에서 가장 확고한 친미 국가로 존재한다. 4. 쿠데타가 남긴 것들 1901년 오스트리아의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시는 페르시아(이란)에서 원유 탐사를 시작했고, 영국의 지원을 받아 '앵글로 페르시아 석유회사(APO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이후 영국 국영 석유회사(BPC)가 된다. 1914년 영국 정부는 APOC 지분의 51%를 확보했다. 영국은 이란의 남쪽, 쏘련은 이란의 북쪽 지역을 점령해서 각각 채굴권을 확보했다. 이란 왕은 채굴권을 팔아 돈을 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란에는 영국, 쏘련, 미국 등 강대국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주둔했다.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사데크가 총리로 등장하면서 원유 개발을 국유화했다. 그러자 외세(영국, 미국 등)는 모사데크를 축출하려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하자 미국은 이란의 왕에게 접근해 모사데크를 해임하라고 압력을 넣지만 샤가 회피하자 이란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 공작을 벌인다. 이 사태로 이란은 심각한 분열이 발생하고, 나라는 폭동이 일어나고 내전이 발발하는 사태에 이른다. 미국은 정보기관과 군대를 동원해 이란의 정부를 전복했고, 마침내 모사데크를 몰아냈다. 2부 1953~1984년, 미국이 만든 중동 5. 6일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쏘련은 연합군이었다. 쏘련은 독일의 침략에 맞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꾸는 가장 영웅적인 전투를 치렀고, 독일군을 궤멸했다. 전투는 쏘련이 치렀고, 전쟁물자는 미국이 상당 부분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가 재편되면서, 미국은 강대국 쏘련이 중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우려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쏘련이 중동 여러 나라들과 협력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중동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집트의 가말 나세르는 1952년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제를 폐지하고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대통령이 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요르단, 시리아 등에서 지지를 받았지만 영국과 미국은 반 나세르 세력을 지원해 각 나라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거나 내전이 일어났다. 미국 석유회사와 유대인은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를 강하게 반대했고, 나세르는 쏘련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45년 이후 유대인 시오니스트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일부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했지만 한편으로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프랑스에서 핵무기를 도입했다. 1967년에 미국은 이스라엘에 막대한 전쟁무기를 제공했고,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집트를 선제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은 전투기로 이집트를 급습해 이집트 전투기 대부분을 폭격했고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의 공군도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공격했고, 불과 6일만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쏘련이 이스라엘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서야 겨우 전쟁은 끝났다. 6. 두 전쟁 사이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요르단에서 점령한 땅에 살던 주민을 쫓아내고 자신들이 차지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은 여전히 이집트가 쏘련과 가깝게 지낼 것이라 판단해 이집트의 영향력을 줄이고, 중동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죽고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고, 시리아에서 알 아사드가 권력을 잡아 반 이스라엘 전선을 구축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의 닉슨은 이집트에 휴전을 제안했지만 사다트가 거부하자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다. 쏘련도 이집트와 시리아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다. 중동의 전쟁 상황과 미국, 쏘련의 개입을 두고 보던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왕은 미국에 석유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다른 중동 여러 나라들도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세계는 심각한 석유 파동을 겪게 된다. 유엔은 이스라엘에 휴전하라고 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보였다. 그러자 쏘련이 무장하기 시작했고, 핵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보였다.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스라엘을 강하게 압박했고, 이스라엘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7. 1979년 미국은 이미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쓰라린 기억이 있었고, 중동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중동의 평화가 유지되길 원했다. 이 시기에 미국대통령은 지미 카터로 그는 이집트의 사다트와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를 미국으로 불러 비밀협상을 벌였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란에서는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혁명이 발발했다. 호메이니는 시아파 종교지도자로, 팔레비에 반대했다 쫓겨나 터키로 망명했으며 외국에서도 계속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이란으로 들여보내 이란 혁명을 일으켰다. 호메이니를 추종하는 학생들이 이란의 미국대사관을 습격해 미국인 인질 66명을 붙잡아 행진했다. 미국 정부는 미국에 있는 이란 자산을 동결하고, 이란에서 석유 수입을 중단했다. 인질들은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는 날 풀려났다. 이 해에 여러 이유로 쏘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다. 쏘련은 아프가니스탄의 권력자를 교체했지만, 반 쏘련을 외치는 민족주의 성향의 반란군(지하드)이 등장했다. 미국은 이 반란군을 지원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 빈 라덴이 이때 파키스탄에 들어와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8. 레바논 내전 레바논은 중동에서도 특이하게 이슬람보다 기독교 세력이 큰 지역이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원래 레바논 땅보다 더 넓은 지역-시리아 땅을 포함한-을 국경으로 설정했는데, 이것이 내전의 원인 가운데 한 요소로 작용했다. 여기에 초기에는 기독교도가 51%였던 지역이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30%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이슬람교도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종교적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1975년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베이루트의 교회를 습격해 기독교도를 살해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앞세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게릴라, 레바논까지 공격하도록 했다.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두고 미국, 프랑스, 쏘련이 협상을 벌였고, 1982년 전투는 멈췄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원했고, 레이건은 이스라엘이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길 희망했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의 난민촌을 습격해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해 중동 지역을 분쟁과 전쟁 지역으로 만들었고, 쏘련도 시리아 뒤에서 반미, 반이스라엘 투쟁을 하는 아랍 민족주의 집단을 지원했다. 3부 1984~2013년, 새로운 질서와 싸움 1990년 이라크의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도 침공할 것을 두려워했고, 곧바로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 공격했다. 미국의 개입으로 중동 지역의 여러 나라가 반발하고,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에 맞서 이라크를 지원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연합국을 결성했는데, 중동지역에서는 시리아, 모로코, 이집트가 미국 편을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후세인을 반서구, 반미에 맞서는 영웅으로 칭송했다. 미국은 50만 명의 군인을 이라크에 투입했고, 그 전에 공중 폭격으로 이라크 전역을 폭격했다. 이라크군은 궤멸당했고, 후세인은 휴전협정에 싸인했다. 후세인은 전쟁에서 졌지만, 이라크에서는 반란군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끝까지 저항하자는 결의를 다진 강경파 집단이 반란을 주도했다. 하지만 후세인의 정부군이 반란군을 진압했고, 이때 많은 쿠르드족이 터키로 도망했다. 쿠르드족은 자기 민족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미국을 도왔다.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부는 오슬로에서 비밀 회담을 열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인정하는 협약을 했다. 하지만 하마스(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단체)는 이 협약을 거부하고, 대 이스라엘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고, 수단에서는 빈 라덴이 알카에다를 구축하고 있었다. 1998년 8월 빈 라덴은 케냐와 탄자니아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공격했다.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도 빈 라덴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미국 본토를 공격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미국의 클린턴은 성추문이 터지자 여론을 이라크로 돌렸다. 2001년 미국에서 9.11 폭탄 테러가 발생했고, 미국은 빈 라덴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빈 라덴을 쫓는 한편,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을 체포, 처형했다. 이후 오바마 정부에서 빈 라덴을 추격해 끝내 빈 라덴도 사살했다. 중동 지역의 분쟁과 내전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장한 면이 많다. 여기에 중동 지역의 복잡한 상황-종교, 인종, 국경 문제 등-이 겹치면서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석유가 나오는 지역이라는 특수성까지 결합해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도 시리아는 내전을 치르고 있으며, 같은 종교인 이슬람교도임에도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학살하고 있다. 종교적 극단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내전이라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터키, 러시아, 이스라엘 등 주변 국가들까지 끼어든 상황이다. 중동 지역에 언제 평화가 정착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너무 오랫동안 분쟁 지역이었고, 강대국의 먹이로 버려진 약소국가의 고통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도 '한국전쟁'이라는 참담한 경험을 이미 했으니,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것을 이 그래픽노블을 통해 새삼 느낀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홍이 이야기
    제목 : 홍이 이야기 작가 : 박건웅 출판 : 새만화책 박건웅의 만화는 무겁다. 아니, 무거운 주제를 선택한다. 그 무게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박건웅의 그림은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보기 드문 그림이다. 마치 박수근의 그림을 보는 듯한, 무채색의 굵은 선은 언듯 판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그림이 모두 어두운 것은 아니지만, 역사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늘 무겁고, 어둡고, 무채색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그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들 - 제주 4.3 항쟁, 한국 전쟁, 이념적 인간형 등 - 이 모두 무겁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만화의 한 컷, 한 컷이 마치 작품처럼 완성도를 높였고, 짧지만 강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짧은 이야기로, 본문이 불과 36쪽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이야기 소재는 작가의 후배(제주도가 고향인)가 제공했다. 후배가 쓴 이야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고 슬픈 내용이어서 이런 사건이 실제 벌어졌는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봉화가 오르고, 제주도의 좌익 진영은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봉기했다. 미국은 친일파보다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좌익의 존재를 더 껄끄럽고 두렵게 여기고 있었기에, 친일파를 앞세워 좌익을 척결하려는 전략을 구사했다. 제주4.3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이 작품의 뒷부분에 박찬식 제주4.3연구소장님이 글을 썼다. 박건웅 작가의 그래픽노블과 함께 박찬식 소장님의 글을 읽으면 제주4.3과 관련한 큰 줄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홍이는 말을 하지 못한다. 홍이는 마을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마을 앞 작은 오름에 올라 바깥에서 노란개(군인)나 검은개(경찰)가 쳐들어 오는지 온종일 지키고 있다. 이들이 오면 홍이는 깃대를 쓰러뜨리고, 나팔을 분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깊이 숨어 안전하다. 홍이가 사는 중산간 마을은 미군정의 군인과 경찰이 좌익을 토벌한다고 자주 드나들었고, 죄 없는 홍이의 이웃 아저씨, 삼촌들이 잡혀가 죽어서 시체만 돌아오곤 했다. 드물게 산에서 무장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깊은 밤을 도와 내려오기도 했다. 그들은 마을 주민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먹을 것을 가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홍이가 동생 영이와 오름에 올랐고, 홍이는 배고픈 동생을 위해 먹을 것을 찾다 그만 노란개와 검은개가 마을로 들이닥치는 걸 놓치고 말았다. 노란개와 검은개는 닥치는대로 마을 주민을 학살했다. 영이도, 홍이의 부모도, 이웃 아저씨와 아주머니, 삼촌과 어린아이들까지. 그리고 홍이도 나팔을 불지 못하고 소리는 저 멀리 하늘로 퍼져나갔다. 이 작품은 김금숙 작가의 '지슬'(오멸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원작)과 맥을 같이한다. '지슬'에 등장하는 중산간 주민들도 정부군과 경찰 토벌대에 쫓겨 더 깊은 산의 동굴로 들어간다. 당시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은 좌익 무장투쟁단이 아닌, 평범한 마을주민들도 모두 '적'으로 규정해 학살했다. 이것은 명백히 전쟁범죄이며, 동족학살범죄였지만 아직도 제주민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은 물론,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 만화계에서 박건웅은 작가주의 만화가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미 그가 생산한 작품들이 보여주는 역사의식과 사회성은 어떤 작가들보다 강렬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초기 작품들이 절판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책들이 재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경성을 쏘다
    제목 : 경성을 쏘다 작가 : 박건웅 출판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은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진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였다. 올해는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정부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통해 독립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의 삶을 널리 알렸다. 극히 일부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의 일대기를 교육하고, 강조하는 것을 지겨워한다.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일제강점기 시기에 일본놈들에게 억압, 차별, 수난, 모욕을 당한 사실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유대인을 보라. 그들은 아우슈비츠로 상징하는 대학살의 기억을 수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유대인은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영화, 소설, 만화 등 대중이 쉽게 만날 수 있는 장르에서 유대인이 나찌 독일에게 핍박당하고 학살당한 사건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세계에 자신들이 당한 고통을 알리고 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어 7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당한 수난과 고통의 총체적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1945년에 해방은 되었지만 매국노를 처단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매국노들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면서, 현재 한국에는 친일매국노의 뿌리가 단단히 자리잡고 있고, 그들이 돈과 권력을 갖고 친일매국노 청산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30여 년의 세월은 한국이 민주주의를 확립해 나갈 시기였지만, 오히려 친일매국노, 군부독재의 폭력으로 민족정기가 위축되고 기운을 펴지 못했다. 일본특무경찰이 해방되고도 독립운동가의 뺨을 때리는 처참하고 참담한 나라가 된 것은, 매국노들의 발호와 권력의 비호 때문이지만, 민중이 어리석고 정치적 상황이 성숙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아주 느리지만, 시민의 피와 땀으로 민주주의는 성숙하고 우리는 친일매국노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고,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는 것이 왜 필요한가도 깨달았다. 우리는 비록 36년 동안 일본의 폭압에 시달렸지만, 모두가 숨죽이고 있지 않았다. 3.1만세운동은 아시아 식민국들의 해방운동이 되는 도화선이었고, 곧바로 해외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한 매우 드문 독립운동가의 삶을 그리고 있다. 김상옥 열사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한데, 그를 다룬 책은 2014년에 '김상옥 평전'과 '경성을 쏘다' 두 권에 불과하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삶이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작품은 이성아 작가가 쓴 '경성을 쏘다'를 바탕으로 한국역사와 인물을 그래픽노블을 그리고 있는 박건웅 작가가 재해석해 그렸다. 소설과 그래픽노블은 형식과 내용에서 많이 다르지만, 상호보완의 관계다. 소설은 문자 기호로 이야기를 만들고, 추상적 관념의 소설을 이미지로 전환하면서 공감각의 지평을 확장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문자는 고도의 추상적 이미지다. 이성아 작가의 소설은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 작품 속 세계 역시 높은 추상적 밀도를 갖는다. 그래픽노블에서는 소설의 추상적 묘사가 이미지로 전환한다. 그래픽노블의 이미지는 공간을 분할해 각각의 칸이 소설의 문장을 이미지화한다. 만화에서 인물의 대사는 소설보다 생생한데, 축소, 생략, 과장한 캐릭터는 독자의 감정에 인물(캐릭터)과의 동일시, 동질감, 감정이입의 여지를 풍부하게 남긴다. 박건웅 작가의 작품은 형식미가 뛰어나고, 기법이 독특하며 개성 있다. 드로잉이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판화처럼 그린 이미지는 두꺼운 외곽선으로 더욱 강렬하게 보인다.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 그림은 외국 작가들과 분명 다르다. 나라마다 작가들의 그림선이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보이는데, 한국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외국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듯, 자기 색깔이 분명한 그림체를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도드라져 보인다. 판화 기법의 작화는 단순하면서 강렬하다. 이런 형태의 그림은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효과가 있다. 박건웅 작가가 줄곧 역사와 사회적 인물을 다루는 것은 자신의 그림과 잘 어울리는 소재라는 점에서, 작가의 작품성을 발휘하기 적합한 소재를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그래픽노블로 재창조하는 작업은 어떤 면에서 오리지널 창작보다 어렵다. 소설 원작일 경우, 문장으로 묘사하는 풍경, 배경을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할 경우 더욱 힘들다. 따라서 원작을 그대로 압축 또는 재구조화를 통한 작업이기보다 원작을 바탕으로 하되 만화작가의 해석을 거친 새로운 작품으로 창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작품은 서점에서 구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정부지원자금으로 창작, 제작되었으며 한글,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로 번역해 그 나라의 주요 기관과 도서관 등에 배포한다. 이렇게 좋은 작품은 값을 낮게 책정해 많은 사람이 쉽게 사 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많은 사람이 보기를 추천한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자꾸 생각나
    제목 : 자꾸 생각나 작가 : 송아람 출판 : 미메시스 미메시스의 그래픽 노블. 만화책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만화가 예전과는 다른 갈래가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만화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며 창작물이지만, 그동안은 수준이 낮은 장르로 여겨왔다. 이것은 만화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다. 소설도 흔히 삼류소설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준이 낮은 모든 창작물은 비주류로 묶여 천대받아왔다. 그러던 만화가 언젠가부터 '그래픽 노블'로 분류되면서 당당하게 고급한 예술작품으로 팔리고 있다. 같은 만화임에 분명하지만 소위 말하는 '대본소 만화'나 '공장 만화'가 아니라 '작가주의' 만화를 지향하기 때문이고, 그만큼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래픽 노블은 특히 유럽에서 창작이 활발하다. 미국여행 때, 서점에 들러서 그래픽 노블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기대보다' 종류가 많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유럽과 한국, 중동,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의 그래픽 노블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어서, 나처럼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아닐까 한다. 그래픽 노블의 장점은 소설과 만화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이야기)의 구조와 만화(그림)의 수준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수준이 낮으면 그래픽 노블의 자격을 잃게 된다. 모든 만화가 다 '그래픽 노블'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야기와 그림의 수준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에서 핵심은 '그래픽' 즉 그림이다. 그림과 이야기가 모두 훌륭해야 하지만, 그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없다. 그래픽 노블 작가는 만화가와 소설가를 섞어 놓은 듯한, 그 둘의 장점을 모두 갖춘 부러운 존재들이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래픽 노블 작가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들의 능력이 퍽 부럽다. 이 만화는 송아람 작가의 장편 그래픽 노블이다. 웹툰으로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었는데, 그래서인지 만화의 특징인 네모칸이 없다. 게다가 무려 600쪽이 넘는 분량이어서 만화지만 읽기가 만만찮다. 내용은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다룬 것인데, 주인공들이 만화가라는 점에서 자전적 요소가 있어 보인다. 주인공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하고 진지한 시간들이겠지만, 시간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독자인 내 눈에는 찌질해 보인다. 청춘의 찌질함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리려 했다. 생각해보면, 청춘의 지난 날은 아름답기도 했지만, 어리석고 찌질한 부분도 많지 않던가. 자의식 과잉과 편견, 심각한 자기애, 오해와 독단 등의 감정이 분출되었고, 감정적으로 미숙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우습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영화를 만드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보인다. 즉 솔직한 감정 표현들이 민망하고 불편하지만 그런 감정과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청춘들에게는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 작품에는 여섯 명의 청년이 등장한다. 만화가 최도일, 백승태, 만화가를 지망하는 장미래, 최도일의 애인 유명지, 장미래의 애인 정상인, 백승태를 좋아하는 김겨자가 그들이다. 주인공은 장미래와 최도일로 두 사람의 만남과 감정의 얽힘, 헤어지고 만남의 반복이 드라마의 중심을 이룬다. 장미래와 최도일 모두 애인이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린다. 장미래의 애인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으로, 건실하고 모범적인 청년이다. 장미래가 최도일에게 끌리는 마음을 들여다보면, 지금의 애인 정상인과 비교했을 때, 성격과 태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최도일은 미래가 불안정한 만화가지만, 장미래에게는 자기 작품을 출간한 '작가'이고, 만화가를 꿈꾸는 장미래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최도일은 건실하거나 모범적인 정상인과는 사뭇 다르다.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연애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최도일과 유명지는 같은 집에서 산다. 최도일은 자기가 살던 집과 작업실의 보증금을 까먹고 유명지의 집으로 들어와 월세를 부담하며 살고 있는데, 유명지와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고등학교 이후 사귀기 시작한 '오래된 커플'이다. 유명지는 최도일과 결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최도일의 변심에 충격 받는다. 만화가를 지망하는 장미래가 최도일 블로그에 댓글을 남기고, 최도일이 장미래에게 비밀 메시지를 보내면서 두 사람이 만나는데, 장미래를 만나는 자리에 최도일의 후배 백승태가 나타나면서, 세 사람의 관계가 살짝 복잡해지지만, 백승태가 장미래에게 집적거리는 건 연애를 시작하는 젊은 남성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미시적이고 디테일한 개인의 생활과 감정을 깊이 천착하고 있어 독자가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기 좋은 작품이다. 독자의 시각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말과 태도는 독자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이 보기 좋거나, 바람직하다기 보다, 숨기고 싶고, 답답하고, 짜증나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일 수 있다. 창작에 몰입하는 이유는,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작품과 창작물은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의 위치, 시각, 가치관,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감정이입하게 된다. 이 작품이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어, 연애를 하는 청춘남녀라면 보편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사회적 맥락을 생각하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청년, 미래가 불투명한 청년, 사회적 입지를 다지지 못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한편으로 복잡한 연애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존재의 불안과 삶의 고민, 자아의 분열과 타자를 의식해야 하는 분열적 감정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열린 결말로 끝나는 것은, 주인공들이 가진 불안과 불투명한 삶, 미래를 보여준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바닥이 흔들리던 청년의 삶도 나이가 들면서 점차 단단해지고, 생활인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한편으로 안도하고, 한편으로 삶의 단조로움, 삶의 지겨움, 삶이 구질구질함을 떠올리며 한숨 쉴 때도 있을테다. 어떤 사람은 성공할 것이고, 누구는 여전히 단조로움 삶과 생활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것이며,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단칸방 월세에서 전세로, 아파트로 옮겨가며 중산층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멀지 않은 미래'가 다가오기 직전의 삶을 살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를 숨쉬고 있고, 자신의 예술행위를 '경제적 가치'로 인정받아야 하는 삶을 살지만, 그것을 의식하지는 못한다. 모든 문제는 '개인적'이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개인주의'는 '민주주의'와 같은 정도로 중요하며, 이 순간만큼은 체제나 구조보다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한 시기라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Sur-reslism)'의 면모를 보인다. 청춘은 이루지 못할 꿈을 꾸며, 구체적 현실을 감각하지 않고, 이상과 꿈을 좇아 달리는 추상적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는 물리적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지만, 청춘의 이상과 꿈은 비현실의 세계에 머문다. 작가는 리얼리즘을 구현하려 했으나, 작품 속 세계는 현실을 초월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주인공들은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작가와 결별하는 지점을 건너간다. 훌륭한 작품일수록 작품의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데,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전에 작품을 끝낸다. 이제 주인공들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할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이 열려 있는 상태로 끝나는 것은 작가가 만든 주인공들의 운명에 더 이상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미래는 최도일을 만나기 전의 모습과 최도일과 연애를 하면서 달라지는 모습에서 내면의 성장이 보인다. 질투와 초조함으로 자기 중심을 잃었던 과거와는 달리 최도일과의 관계가 삐걱거리면서 오히려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출간한 작가'라는 이름으로 외부에서 자기를 찾으려던 장미래가 멀고 먼 길을 돌아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장미래는 성장한다. 이제 장미래는 연애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 작가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뿌리를 내린다는 점에서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의 존재가 자기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새로운 길에 서는 모습을 보인다. 독자는 장미래가 걸어갈 미래를 응원하고, 희망을 생각한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와이 아트?
    제목 : 와이 아트? 작가 : 엘리너 데이비스 출판 : 밝은세상 독특한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는 그래픽노블이다. 제목부터 독자에게 질문한다. '왜 예술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도 아니고, '왜 예술인가?'라고 묻는데, 독자는 당연히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 미셀 푸코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두고 작은 제목으로 작은 책 한 권 분량의 비평을 썼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파이프 그림 아래 필기체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 있는데, 그림보다 이 글씨가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실제로 푸코도 그림으로의 '파이프'보다는 텍스트로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텍스트는 이미지 기호로 작동하는가, 아니면 문자 기호로 작동하는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작품(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파이프 그림과 글씨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기호이며, 둘 사이의 관계는 실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푸코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분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에 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지로써 파이프는 관객에게 '파이프'라는 시각적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관습과 경험에 따라 관객은 그 이미지를 '파이프'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파이프'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파이프'가 더 이상 '파이프'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익숙한 사물은 낯설어지고, 기존의 상식과 개념은 파괴된다. 이 책(와이 아트?)도 시작이 난해하다. '왜 예술인가'에 답하기 전에 예술 작품의 종류를 알아보자고 하면서, '색상'을 말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림은 흑백이다. 분명 주황색, 파란색, 주황&파란색을 말하지만 실제 그림은 흑백이다. 이것은 역설(irony)이다. 뒤이어 크기에 따른 작품, 가면, 가면, 거울, 먹는 것, 감추기, 끔찍함 등에 관한 설명이 나오고, 아홉 명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돌로레스, 리처드, 마이크, 주롱, 소피아, 마케일라, 트와이스투, 제니퍼, 호세는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퍼포먼스를 하는 돌로레스는 사람들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관객은 그 말에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하는 관객들이 생기고, 작품의 진실성이 사라진다고 생각한 돌로레스는 관객을 피해 여행을 떠나고, 상어에게 한쪽 팔을 잃지만, 다시 상어를 쫓아가 잡아먹자 팔이 자라고, 상어이빨이 생긴다. 이것은 분명한 은유(metaphor)다. 돌로레스의 팔을 뜯어 먹는 상어는 '예술'을 상징하며, 잃어버린 팔은 '예술성' 또는 작가의 창작욕, 상상력이다. 돌로레스가 상어를 잡아먹자 팔이 자라고, 상어이빨이 생겼다는 것은, 고갈된 작가의 창작성과 상상력을 되찾았다는 의미다. 아홉 명의 작가가 모였을 때, 이들은 전시 준비를 한다. 하지만 비가 쏟아지고, 전시장의 작품은 망가진다. 지붕과 벽이 바람에 날아가고, 하늘에서 거대한 손이 내려와 집을 들어올린다. 모두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 마이크가 작은 섀도박스를 들여다보고, 이들은 극적으로 구출된다. 안전하고 쾌적한 곳에 도착한 그들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돌로레스는 작은 인형을 만들기 시작하고, 다른 작가들도 작은 집 안에 들어가는 인형과 물건을 만들어 넣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었던 전시장의 작품을 작게 만들어 배치한다. 그 작은 인형-작가 자신의 아바타-들은 스스로 움직이며 더 나은 작품을 만들고,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어 간다. 이때, 돌로레스가 갑자기 그 작은 집의 지붕을 열고, 바람을 일으키고, 물을 뿌리고, 작은 집을 들어서 흔든다. 그리고는 작은 인형들을 향해 '용기가 무엇인지 보여줘'라고 말한다. 소설 형식에 '액자 소설'이 있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이 액자소설로 알려졌는데, 액자 소설은 보통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 가운데서도 이 작품처럼 이야기가 순환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순환적 액자소설'로, 이야기가 무한반복할 수 있는 구조다. 순환구조를 갖는 이야기는 주로 '시간'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시간 이동(time slip)을 통해 같은 환경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작가가 앞에서 '왜 예술인가?'를 말하면서 작품의 분야와 종류를 설명했는데, 작품 속 아홉 명의 작가가 경험하는 것은 자신들도 알 수 없는 운명이었고, 자기 작품을 망친 거대한 힘이 사실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창조와 파괴가 서로 다르지 않은 일련의 창작 행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었다. 아무 연락 없이 책이 도착해서 조금 의아했는데, 내가 그래픽노블 비평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출판사에서 알았나보다. 좋은 책을 읽는 즐거움에 대한 최소한의 답례로 리뷰를 쓴다. 이런 기회는 얼마든지 환영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평등은 개뿔
    제목 : 평등은 개뿔 작가 : 신혜원, 이은홍 출판 : 사계절 이 책을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은, 이 '만화책'이 페미니즘 교과서로 채택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이 '만화책'으로 기초, 기본수업하고,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은 요즘 페미니즘 책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교재가 부족할 걱정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을 리뷰하기 위해서 책을 따로 인용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 책에 얼마나 공감하는가를 잘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이 책의 작가 두 사람은 나와 같은 세대-몇 살 적다-를 살아온 사람이어서 내가 페미니즘을 배운 경로와 경험이 두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봐도 좋겠다. 작가 부부는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진보적 삶을 살고 있었고, 한국사회에서는 0.1%에 속하는 부자, 아니 '평등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들은 대학에서 '운동권'이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진보, 합리, 이성의 태도를 갖춘 청년이었다. 그들이 결혼하고도 이런 태도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 다짐하지만, 현실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남성인 이은홍은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진보적인 삶을 산다고 자부하지만, 알고보니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사회의 관습에 길들여져 기득권의 공기를 숨쉬며 살아온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나도 80년대 중반-군대에서 전역하고-부터 선배들과 함께 사회과학 공부를 했다. 그때 정치경제학, 유물론철학, 민중사학 등을 깊게 배웠지만 '페미니즘'은 따로 공부하지 못했다. 지금도 소위 '386 운동권 세대'가 비판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했지만, 정작 그들의 의식은 여전히 가부장, 남성우월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내 선배들도 그랬다. 그들은 누구보다 진보적인 사람들이었고, '언드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그래서 경찰의 수배를 당해 하루가 멀다하고 도망다니던 투사들이었지만, 그들이 나중에 결혼해서 보여준 태도를 보면서, 나는 그들이 얼마나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매몰된 사람들인가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들도 이론적으로는 남녀평등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 체화하지 못했다. 일상에 녹아들지 못하는 이론이나 주장은 오히려 독이 된다. 80년대에는 '페미니즘'을 배우고 싶어도 마땅한 교재도 부족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책이 바로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론'이었다. 이 책은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였지만, 아마 읽지 않은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마르크스, 레닌의 저작을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고, 여력이 없던 때였으니, '여성론'을 읽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여성론'을 읽고 페미니즘의 기초를 배웠으며, 이후 페미니즘 이론을 스스로 공부했다. 그때만 해도 '페미니즘'이라고 부르지 않고, '여성이론'이나 '여성학'이라고도 했는데, 어떤 이름이든 남녀평등에 관한 저서나 논문들이 발표되기 시작했고,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 같은 책도 번역되어 나오고 있었다. 남성으로서 페미니즘 이론을 배우는 것이 '진보적 태도'라고 한다면, 나는 이론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삶에서 '페미니즘'을 체득했다. 내게는 누나가 있는데, 처음에는 한 명이었다가 내가 결혼하고 나서 누나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매우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내게는 세 명의 배다른 형과 두 명의 누나가 있는데, 부모가 살아계시고,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을 돌보고, 살 수 있도록 온갖 힘을 쓴 건 누나였다. 큰 누나는 나와 13년 차이가 나는데, 실질적으로 '엄마' 노릇을 했다. 나는 자라면서 늘 엄마와 누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고, 남자로, 장남으로 아쉬움 없이 생활했다. 우리집은 매우 가난했음에도, 나는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밥하고, 반찬 만들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온갖 시시콜콜한 집안 일에서 해방된 상태로 지낸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큰 특혜였는지 전혀 몰랐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어머니가 모든 집안일을 했고, 어머니는 내가 50살이 될 때까지 비교적 건강하게 살다 돌아가셨다. 결혼을 하고도 집안일은 어머니 차지였다. 아내는 결혼 전부터 직장을 다녔고, 지금도 다닌다. 반면 나는 결혼 전부터 프리랜서였고, 결혼하고 나서 직장에 취직했다가, 그마져도 몇 년 지나서 다시 백수가 되어 집안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직장에 다니지 않는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나 역시 무려 50년을 어머니의 그늘에서 살며, 온갖 혜택만 받고, 살림은 해본 적이 없어서 서툴렀다. 게다가 내 의식에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은 남자가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고,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사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성문제 일반에 관해서는 비교적 평등하고 진보적 태도를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의 생활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성우월주의자, 가부장사회의 기득권을 누리는 남성이었다. 다행히 아내는 나를 이해해주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아내가, 집안일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일은 내가 맡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뉘었다. 내가 지금도 늘 마음에서 누나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것은, 누나들이 동생인 내게 베푼 것에 아무런 보답을 못하고 있는 것 때문이다. 누나들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사회적 존재로 인해 집안에서도, 사회에서도 이중, 삼중의 억압과 불평등, 착취를 당하며 살았다. 내 아내도 여성이면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데, 나는 어머니, 누나, 아내의 삶을 보면서, 세상을 실제로 이끌어 가는 것은 여성인데, 여성이 사회적으로 억압당하고, 불평등한 위치에 있으며, 남성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야 하는가 의문을 갖게 되었다. 페미니즘을 성(sex) 대결로 몰고가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청년 남성들이 여성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 학교교육이 근본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교육이라면, 어릴 때부터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으로서의 '젠더'를 구분해서 가르쳐야 하고, 성과 제더에 관한 어떠한 편견과 차별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이 현상-여성혐오-을 좀 더 본질에서 들여다보면, 이것은 사회구성원을 분리하고, 경쟁과 대립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가족제도를 해체하고, 여성의 사회참여-이 문제는 여성의 삶에 있어 장단점이 다 있다-라는 명목으로 여성의 노동력을 사회화하면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은 값싼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이며, 대가족에서 핵가족, 1인 가구로 이어지는 해체의 과정은, 노동자의 개별화, 파편화를 통해 결집하지 못하도록 하고, 실업예비군(실업자)을 유지하면서 노동자 서로가 경쟁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남녀의 성(sex) 대결이 아니라, 남녀가 평등함을 지향하고, 서로 연대하며,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남녀의 문제보다 더 절박한 계급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적이 여성해방을 통한 인간해방이라는 점에서, 노동해방을 통한 인간해방을 부르짖는 계급운동과 본질에서 같다. 다만 (노동자)여성은, 같은 노동계급 내부에서도 남성에게 차별당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노동계급 내부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계급의 단결을 목표로 할 때, 페미니즘은 남녀평등과 계급평등을 함께 달성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띄게 된다. 여전히, 페미니스트 내부에서는 '페미니즘'에 관한 전선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은 무지개보다 더 다양해서, 최초 페미니즘이 백인여성의 인권을 향상하는 것으로 시작한 것처럼, 여성 내부에서도 계급, 인종, 민족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남녀평등은 물론 인종, 민족의 차별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착취-자본가의 착취든 남성에 의한 여성의 착취든- 없는 세상에 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맞서야 할 상대는 거대한 적인 '자본(가)'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남성은 사회구조의 기득권자로 분류되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남성도 자신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여성은 남성이라는 기득권세력과도 맞서야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런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착취구조인 자본의 억압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의 고난을 겪고 있다. 많은 남성이 여성의 동지로 함께 싸우고 있지만, 강력한 체제권력(자본)을 움직이는 세력은 여전히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의 수호를 위해 법과 제도를 악용하고 있으며, 현실을 호도하고, 일부 남성을 끌어들여 여성을 적으로 만들고 있다. 봉건시대에는 '유교'라는 지배논리를 통해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를 옹호, 유지해 왔으며, 자본시대에는 형식적으로 남녀평등을 말하면서도 제도와 의식은 여전히 봉건제에 머물러 있는 남성들로 인해 여성은 현대 민주주의체제에 살면서도 실질적 삶은 봉건제적 억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 만화는 한국 현실에 맞는 페미니즘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적어도 유럽이나 북아메리카 나라에 사는 부부들과는 다른 인식을 갖고 있을 것이고, 그것이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덜 '개인주의적'이며, 덜 '민주주의적'이고, 집단주의와 유교의 찌꺼기가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물론, 남성까지도 자유롭지 못하게 옭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만화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부부, 남녀의 평등을 가로 막는 체제의 힘은 곧 남성지배권력과 '자본'의 결합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곧바로 거대한 남성지배권력과 '자본'에 대항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인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여행, 상상과 현실의 모호함
    제목 : 여행 작가 : 에드몽 보두앵 출판 : 새만화책 '새만화책'에서 펴낸 작품. '새만화책'은 나에게는 '로망'이다. 꿈을 꾸지만 이룰 수 없는, 영원한 신기루와 같다. 나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고, 무엇보다 만화를 그리고 싶지만, 그것은 그저 소망이고, 욕망일 뿐, 현실은 다르다. 만화를 그릴 능력이 없어서 만화를 좀 더 깊이 읽었고, 만화비평을 하게 되었다. '새만화책'에서 나오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글과 그림은 결코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학'의 범주에는 활자만 속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길가메시' 이후 문학은 '문자'로만 형상화되었다. 고대는 물론, 근대까지도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것은 지식인이었고, 지배계급에 속했음을 생각한다면, '문자'를 다루는 행위는 극소수 지식인과 지배계급의 행위였고, 이것은 다수 민중의 삶과 괴리되어 있었다. 문자 이전에 이미지가 소통 수단으로 등장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언어와 문자가 없던 시기에도, 인류는 자연의 모습을 흉내낸 이미지를 그렸고, 자연을 숭배하는 행위, 동물을 사냥하는 행위, 사냥을 잘 하길 기원하는 주술적 행위도 모두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미지는 인류에게 친숙한 대상이자 도구였으며, 문자 이전에는 중요한 소통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초기의 문자는 '표의 문자'가 대부분으로, 문자 하나가 하나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문자들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 이미지가 점차 '표음 문자'의 등장으로 분리되면서, 이미지는 문자와 언어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별개의 영역-예술-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미지가 문자로 바뀌는 과정은 인류의 지성이 발달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고, 문자의 확대는 지식의 보편을 이뤘다. 문학이 수천 년을 이어오면서 문자로 기록을 남기고, 대중의 삶에 깊숙히 스며들었다면, 만화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겨우 창작되기 시작했다. 인류에게 이미지는 문자보다 더 익숙한 매체였고, 실제 다양한 이미지가 창작되었으나 만화의 형식이 탄생하기까지 물적 토대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석기시대의 동굴벽화부터 인류가 그려 온 무수한 그림은 대개 단일한 이미지였으며, 만화처럼 칸과 프레임을 쓰면서 그림이 연결되고, 이야기가 있는 방식의 이미지는 이미지와 문자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각각의 이미지와 문자로 창작된 방식과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였다. 만화는 기존의 이미지가 표현하지 않거나, 못했던 방식으로 대상과 상황을 표현했다. 고전적 의미의 이미지는 어떤 한 순간을 고정시키지만, 만화는 이미지의 한 순간을 고정시키는 방식은 같아도, 그것을 과장, 축소, 왜곡, 변형시키면서 연속으로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만화는 다시 카툰, 코믹스, 그래픽노블 같은 여러 장르로 나뉘는데, 그래픽노블은 카툰, 코믹스보다 가장 늦게 나타난 장르다. 그래픽노블과 코믹스는 형식에서 차이가 없지만, 그래픽노블이 작가의 의도와 의지를 더 강하게 내포하고, 반영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작가주의 만화'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에서 '예술영화'나 '작가주의 영화'로 불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 책 '여행'은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 보두앵의 작품인데, 무엇보다 붓으로 그린 그림이 훌륭하다. 매너리즘에 빠진 주인공 시몬이 가족과 도시를 떠나 시골마을에 가서 겪는 새로운 경험과 시간의 흐름, 시몬의 의식의 변화를 몽환적인 기법과 함께 그린 만화인데, 붓으로만 그린 선이 마치 동양의 그림을 보는 듯 하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여행'이 실제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여행이기도 하지만, '메타포로써의 여행'이라고도 했다. 즉, 작가의 상상이라는 말인데, 작품에서도 사실묘사보다는 환상, 환각의 장면이 처음부터 나온다. 작품의 시작부터 45쪽, 올리비에를 만날 때까지 주인공은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이미지는 지극히 환상적이며, 비현실적인 풍경과 주인공이 환상에 시달리는 장면으로만 그려진다. 이때 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픽노블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한데, 지문 없거나 극히 최소한만 사용하면서, 이미지로 인물의 심리와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것은 문학(노블)과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 작품에서 '노블'은 '그래픽'만큼 중요하지 않아보인다. 주인공 시몬은 가족과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 형상이 바뀐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머리 위에 올라간 것으로 보이지만, 이내 머리에 철창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는 시몬의 머리에 쓰인 철창을 볼 수 있지만, 만화 속 인물들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이것은 2차원 이미지로 드러낼 수 있는 한계이자, 독자와 만화의 인물을 구분하는 상징적 장치다. 시몬은 집을 나와 회사로 출근한다. 그가 거리를 걸을 때, 도로의 이미지는 시몬의 머리와 연결된다. 건물, 비둘기, 하늘, 나무, 지하도의 천정, 지하철의 천정 등 그의 머리는 마치 열려서 기이하게 변형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다 전철 안에서 그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그들이 모두 죽은 사람으로 보이는 환각을 겪는다. 그의 머리에서 해골이 쏟아져나오고, 사람들의 머리가 해골로 바뀐다. 시몬은 지하철을 뛰쳐나와 회사로 들어가지만, 이내 뛰쳐나온다. 그는 거리를 걷다 센느강으로 나와 우연히 어떤 여성을 만나 고양이가 죽었냐고 묻는다. 그러자 여자는 고양이가 없다고 말하고, 오늘 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한다. 남편, 딸, 개, 일, 모두. 그러면서 '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시몬은 이 여자에게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냐고 묻는데, 여자는 '사랑이 뭐'냐고 되묻는다. 시몬은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 왜 뜬금없이 처음 만난 여자에게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냐고 묻는 걸까. 여자와 헤어지고, 시몬은 다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직원인 프랑수아즈에게 '나랑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느냐고 다시 묻는다. 이것은 작품의 뒷부분에서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는 걸로 보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시몬의 충동은 작가의 상상에 불과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요소이거나, 시몬의 피폐한 정서가 자신을 방기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해석인데, 이건 오로지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시몬은 홈리스 노인을 만나 그에게 돈을 준다. 노인은 여행 떠나기 좋은 날이라며 자신은 술을 마시는 것이 곧 여행이라고 말한다. 시몬은 거리를 방황하다 열차를 타고 낯선 곳에 내린다. 히치하이킹을 하다 만난 올리비에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가게 되고, 이때부터 시몬과 올리비에는 '정상적'인 대화를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뛰쳐나왔다. 올리비에도 우여곡절을 겪고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인형극을 하고 다닌다. 시몬도 올리비에를 도와 인형극 조수로 일하며 며칠을 보내다 올리비에의 친구인 마르크의 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마르크의 여동생 레아를 만나고 첫눈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이제 이야기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내용으로 이어진다. 처음 시몬이 환상과 환각을 보면서 시작했던 이야기는 도시를 떠나 낯선 시골로 장소와 환경이 바뀌면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시몬이 놓인 환경-가족, 직장, 도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마르크는 시몬에게 자신의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자고 제안하고, 시몬은 동의한다. 두 사람은 바다를 항해하고, 마르크가 갑자기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려는 걸 시몬이 저지한다. 마르크는 애인 이자벨이 폭풍우에 휩쓸려 죽은 장소에서 죽고 싶었노라고 말한다. 마르크는 살았지만 곧 날씨가 거칠어지면서 배가 침몰하고, 시몬이 물에 빠져 죽게 되는 상황에서 마르크가 다시 시몬을 살린다. 이런 극적 장치는 작위적으로 느껴져 진정성이 떨어지는데, 작가는 시몬이 죽을 고비를 넘겨 새로운 삶을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작위적인 설정을 감수한 것으로 보인다. 시몬은 마르크와 헤어져 선술집에 갔다가 시비가 붙고, 거리에서 습격 당해 얻어맞는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을 떠올리고, 곧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혼잣말을 한다. 이제 시몬의 공황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시몬은 우연히 홈리스 노인을 만나는데, 그 노인은 파리에서 봤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이 평생 한번도 이 마을(라로셀)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라로셀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400km 떨어진 항구 마을로 인구는 약 8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다. 빈털털이 시몬에게 노인은 적선을 베풀고, 한 노인을 소개한다. 시몬은 소개받은 노인의 집을 찾아가 임시 거처를 마련한다. 노인은 방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한다. 노인은 요정의 친구로 평생 아름다운 사랑을 했고, 사랑을 멈추자 갑자기 늙었다고 했다. 시몬은 다시 레아를 만나고, 두 사람은 노인이 빌려준 방에서 섹스를 한다. 레아는 시몬에게 산에 오르자고 제안하고, 두 사람은 산을 올라 다시 섹스를 하고, 레아가 먼저 산을 내려간다. 레아는 시몬에게 산에 조금 더 오래 남아 있기를 권하는데, 혼자 산에 남은 시몬은 아주 멀고 먼 과거, 지구가 생기고, 공룡이 뛰어다니고, 원시인류가 사냥을 하고, 시간이 거슬로 오면서 중세, 근대, 현대의 역사 속을 경험한다. 시몬의 환상은 그가 자신의 삶을 객관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역사 속에 투영, 투사하는 것은 자기를 성찰하는 자세이며,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은 결코 자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시몬은 산을 내려오다 미끄러져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 이것도 작위적인 느낌이다. 이미 바다에서 빠져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다시 산에서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위험을 그려 넣은 것은 작가의 치기가 보이는 장면이다. 산을 내려온 시몬은 올리비에를 만나고, 그와 고성에서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낯선' 집으로 돌아온다. 이야기의 구조는 좋지만, 주인공 시몬이 겪는 상황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 그가 회사와 집을 단조롭게 오가는 것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만, 가족과의 단절과 회사에서의 매너리즘이 모두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그의 태도는 매우 이기적이다. 결국 회사에서 무작정 뛰쳐나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목적지도 없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이동 인형극장 일을 하는 올리비에를 만나 그의 집까지 가고, 그곳에서 처음 만나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누군들 이런 여행을 꿈꾸지 않을까. 시몬만이 특별한 사람도 아닐테고, 그의 가족들도 온통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텐데, 마치 자신만이 유독 특별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듯한 과도한 설정이 조금 불편하다. 여기서는 주인공 시몬 한 사람의 시각과 입장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의 가족 아내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시몬의 아내와 아들은 갑자기 사라진 남편과 아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또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한다면, 그들의 입장도 뒷부분에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독자는 시몬의 상황은 이제 충분히 보고 이해했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시몬의 아내와 아들 피에르에 관한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편,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에게 무엇일까를 깊이 고민하게 되고,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부재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모자의 삶은, 정작 사라지길 원했던 시몬보다 더 절실하고 안타까운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시몬이 가족을 떠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오려고 할 때, 그는 집과 가족을 '낯선 집'이라고 말한다. 시몬에게 가족은 이미 피붙이의 애틋함이 사라진, '관계'로서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것은 관습적이고 당연한 클리셰이다. 너무 익숙해서 의문을 품지 않는 '가족'을 낯설게 느낀다는 건, 자기 존재와 가족을 분리하고, 객관화하며,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고, 또한 몽환적이었던 것처럼, 주인공 시몬이 실제로 여행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시몬의 상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몬이 겪었던 모든 시간과 공간이 오로지 '상상'이었더라도 시몬은 가족과 일정한 거리가 벌어진 것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은 시몬 뿐 아니라 아내와 아이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작품은 훌륭한 그림과 함께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 기법의 독특함으로 좋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펜이 아닌, 붓으로 그린 그림은 부드럽고, 선은 거친 듯 하면서 미려하다. 한 페이지에 여섯 칸을 기본으로 하고, 다양한 변형을 주었는데, 선의 굵기로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고, 여백과 생략을 과감하게 하면서, 드러내야 할 부분만 충실하게 묘사한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쥐, 아우슈비츠의 참혹함과 생존자의 고통을 그리다
    제목 : 쥐 작가 : 아트 슈피겔만 출판 : 아름드리미디어 이 만화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태인이 겪은 비참한 상황을 ‘만화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는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으로 그의 가족, 그의 아내와 아내의 가족이 겪은 비극에 대해 구술한다. 수십명의 가족, 친척들이 모두 죽고 결국 극소수의 형제와 부부만 살아남은 가운데 노년을 미국에서 보내는 유태인의 삶에 대해서도 현실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이 만화를 13년 동안 꾸준히 준비하며 그렸고, 이 책으로 퓰리처상과 구겐하임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래픽노블의 역사에서도 선구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작가 역시 전위적이고 진보적인 만화를 그리는데 앞장 선 인물이다. 이 만화의 특징을 몇 개의 주제로 분석했다. 먼저 줄거리를 요약했다. 작가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은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으로, 부유한 집안의 여성 안나 질버베르그를 만나 결혼한다. 이후 장인의 도움으로 직물공장을 운영하며 부유하게 살다 히틀러의 나찌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폴란드군에 징집되었고, 독일군에 잡혀 전쟁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 한동안 머물다, 독일 공장의 노동자로 자원한다. 땅을 파는 노동자로 몇 달을 보낸 다음, 갑자기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탄다. 나찌는 형식적으로 전쟁포로를 석방한 다음, 독일 영토로 끌고가 학살하고 있었다. 블라덱은 근처에 사촌이 있다고 말하고, 뇌물을 주어 무사히 수용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살던 집으로 돌아가 부모와 아내를 만난다. 하지만 나찌의 탄압은 더 심해지고, 1939년이 되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가스실의 정체가 유태인들에게도 알려지지만 대부분의 유태인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블라덱의 처가는 부유한 집안이어서 나찌에 협조하고 있는 유태인 위원회를 매수해 탄압의 속도를 늦추고 있었지만, 결국 살던 집에서 쫓겨나 게토로 옮겨가고, 이후 진행되는 과정은 은거, 도주, 체포, 도주, 은거를 반복하면서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이어간다. 폴란드인 가운데 선량한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유태인 가족을 숨겨주었지만, 블라덱 가족은 헝가리로 국경을 넘으려다 체포된다. 나찌의 유태인 분류에 따라 블라덱의 대가족은 뿔뿔히 흩어진다. 대부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들어가서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1944년 3월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블라덱은 카포(유대인 관리자)의 개인 영어교사로 차출되어 비교적 안전하고 좋은 대우를 받으며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 다음에는 함석공으로, 제화공으로 옮겨가며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다시 공사장 노동자로 돌아가서 극심한 고생을 하게 되고,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스실을 직접 보고 기계 설비 일부를 해체한 목격자가 된다. 이후 소련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까이 접근하자 독일군은 유태인을 독일 국내로 끌고가기 위해 열차에 태워 오랜 시간 이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유태인이 사망한다. 블라덱은 끝까지 살아남았고, 다카우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 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포로교환으로 스위스까지 가는 기차를 타게 되고, 이곳에서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마침내 독일군이 패퇴하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살아남는다. 이후 블라덱은 나찌에게 잡혀갈 때 살고 있었던 소스노비에츠로 돌아가 기적처럼 아내 아냐를 만난다. 쥐 작가는 유태인을 쥐로 그렸다. 유태인을 쥐로 설정한 것은 작가의 오리지널이 아니라, 이미 히틀러가 집권하던 시기, 나찌는 유태인을 쥐로 묘사하고 있었다. 나찌가 유태인을 쥐로 묘사할 때, 독일 국민을 비롯한 모든 유럽의 비유대인은 왜 반발하지 않았을까. 유태인을 차별하고, 학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결코 모르지 않았을텐데, 극우 나찌가 권력을 잡고, 유태인을 열등한 민족으로 폄하하고, 절멸해야 할 대상으로 찍었을 때, 비유태인들이 눈감고, 외면하고, 모른 척 한 까닭은 무엇일까. 작가는 1938년 상황부터 시작한다. 작가의 아버지가 결혼을 앞두고 만났던 여성과의 갈등과 새로운 여성과의 만남, 결혼부터. 작가의 부모는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 겪는 산후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체코로 휴양을 떠나지만, 그곳에서 나찌의 철십자 깃발을 본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이미 유태인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학살당하거나 추방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히틀러는 극렬한 반공주의자이자 반유태주의자였다. 히틀러의 가계에서 유태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거나 히틀러는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을 드러내려 했고, 유태인이 열등한 인종이며, 절멸시켜야 할 인종이라며 혐오했다. 이런 극단적 혐오의 감정이 유태인을 쥐로 표현하게 된 배경이다. 그렇다면, 유태인은 왜 히틀러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걸까. 히틀러는 권력을 차지하고, 권력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 유태인을 혐오의 대상으로 점찍었을 뿐이다. 이미 유태인은 유럽 전체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작가가 유태인을 쥐로 묘사한 것은 히틀러의 나찌가 유태인을 묘사한 것에 대한 반발의도와 자기비하를 통한 동정얻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아니, 작가가 의도적이지 않았다 해도 독일군을 고양이로 그린 것에서 그런 의도는 분명해진다. 애초 쥐와 고양이를 비롯해 동물의 의인화 작업은 진보적 만화가들의 주제 가운데 하나였고, 아트 슈피겔만은 흑인과 백인의 관계를 먼저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흑인도, 백인도 아니어서 흑백 인종차별에 관해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유태인이고, 부모가 아우슈비츠 생존자라는 것은 곧바로 유태인과 독일군의 관계로 이어졌고, 처음 몇 페이지짜리 만화로 시작해 장편 그래픽노블이 될 때까지 무려 13년의 시간을 이 만화에 투자했다. 쥐와 고양이는 그 자체로 천적이며, 약한 자와 강한 자를 상징하고, 전복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톰과 제리'에서 고양이 톰은 분명 강자이면서도 늘 약자인 쥐 제리에게 당한다. '심슨 가족'에서 호머의 가족이 보는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이치와 스크래치는 '톰과 제리'의 패러디이면서, 더 과장하고 왜곡된 형태의 '톰과 제리'를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한 '톰과 제리'의 패러디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에서 유통되고 있는 '톰과 제리'의 상징과 이미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가를 비트는 패러디다. 유태인을 쥐로 표현하고, 독일군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 쏘련은 곰 등 민족마다 다른 동물의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쥐는 인간이 혐오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유태인이 유럽(은 물론 아시아에서도)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혀 탄압을 받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인간에게 백해무익하다는 쥐를 유태인의 상징으로 그린 것은 작가의 탁월하면서 필연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유태인이 쥐로 그려진 것은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상황이었고, 이후 유태인은 다른 민족인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상황이 역전되어 고양이로 변한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유태인의 이중성과 아이러니를 드러낼 수 없다. 유태인 유태인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아이러니다. 그들이 믿는 신이 세계의 절반 가까이 지배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그 신의 아들이라는 인물을 부정한다. 유태인이 믿는 신과 기독교의 구교, 신교, 이슬람교의 신은 동일하지만, 신의 아들인 예수를 부정하는 것은 오로지 유태교 뿐이다. 유태인들은 유일신 야훼를 믿으며, 자기 민족만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믿는 선민사상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자신과 다른 모든 민족과 인종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기초가 된다. 2천년 전부터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로 인정받고, 로마의 힘을 따라 유럽 전체로 퍼져나갈 때도 유태인은 자신이 믿는 신과 구분했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를 성삼위일체로 받아들인 기독교는 유태인들의 배타적 태도와 행위가 거슬렸고, 그들의 선민의식이 아니꼬왔다. 유태인은 역사 속에서 소수집단이었으며, 한때 자신의 국가를 세우기도 했으나 외세의 침략으로 뿔뿔이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들의 디아스포라가 끝난 것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라를 이뤄 살고 있던 지역을 침탈해 '이스라엘'을 세웠다. 종교적으로 유일신을 숭배하고,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고, 강한 선민의식을 가진 집단이었던 유태인은 수천 년에 걸친 디아스포라를 통해 유럽 전역은 물론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이들은 소수민족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며,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금융업을 개발하고, 유통업 등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유태인이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이라는 말은, 그들이 대대로 교육-집단윤리와 종교-을 통해 자녀를 훈육하고, 소수민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들이 혹독한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유일신 야훼의 존재와 선민의식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고, 그런 자기중심의 세계관이 또한 다른 민족들에게 탄압당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니, 유태인의 존재 자체가 아이러니인 것이다. 봉건시대 이전까지의 유태인은 다른 인종-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만드는 앵글로색슨, 게르만, 노르만, 이베리안, 켈트, 스코트 등 유럽의 주류 인종-에 비해 소수인종이었으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디아스포라 민족이어서 여러 지역에 흩어져 생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류 인종들에게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었으며, 차별당하고 억압당하는 존재들이었다. 유태인 뿐아니라 '집시'를 비롯해 소수 유랑민족들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존재하고, 이들 소수민족, 인종은 늘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경제체제가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이행하고, 정치적으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17세기 이후 유태인은 소수민족이지만 부와 권력을 획득할 기회가 많아졌고,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갖는 다수민족, 인종은 이런 유태인을 보며 시기, 질투를 하게 된다. 이념적으로도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유태인 가운데 뚜렷하게 드러나는 인물이 있어 유태인을 탄압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유럽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유태인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특히 러시아 혁명에서 공산주의자 그룹의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수-약4%-가 유태인이었다고 추정한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극렬하게 혐오하고, 그들을 절멸하려했던 가장 큰 이유로 이념 전쟁을 들기도 한다.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자로, 공산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었고,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는 가장 먼저 제거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레닌이 권력을 잡았을 때, 볼쉐비키 그룹에는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이 많았고,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쟁 중에 러시아 혁명 소식을 듣는다. 전쟁에서 진 독일은 승전국들이 요구하는 과도한 전쟁비용에 고통당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전후 불안과 경제적 빈곤, 강대국의 억압 등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이것은 곧 파시즘의 대두와 소수인종의 탄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받아들여, 반공, 순혈주의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갔고, 소수인종, 민족인 유태인과 집시 등은 절멸의 위기를 맞게 된다. 생존자 히틀러가 유태인을 절멸하려는 이유로 '인종'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고, 실제로는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유태인 절멸을 통해 세 가지 이익을 보게 되는데, 하나는 아리안 인종의 우수성을 내세워 독일국민을 단일하게 통합할 수 있는 명분을 세우고, 유태인을 공격함으로써 파시즘의 정당성을 획득하며, 히틀러에 대한 지지, 충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다. 유태인은 공장, 상가, 기업을 소유하고, 보석 유통 등 부가가치가 높은 상업을 하고 있었다. 유태인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자신이 살던 집에서 쫓겨났고, 그들의 재산을 독일정부가 몰수했다. 그들이 게토로 이동하거나, 수용소에 갇힐 때까지 가지고 있던 짐은 대부분 압수되었고, 몸에 지닌 모든 장신구, 시계, 반지, 목걸이, 보석 등도 몰수당했다. 유태인의 집에는 값비싼 미술작품을 비롯해 금고에는 돈, 금괴 등도 많았기에 나찌는 유태인의 집에서 압수한 이런 물건을 극소수만 아는 창고를 마련해 숨겨두었다. 전쟁 막바지에 미군이 히틀러의 요새를 점령해서 발견한 물건들 가운데 미국으로 반출된 것이 매우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유태인을 절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학살을 멈추지 않은 것은, 전쟁 막바지로 가면서 자포자기한 측면도 있고, 학살의 과정이 시스템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유태인을 죽여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많았다. 부자 유태인 가족이 사라지면 그들의 재산이 모두 누군가에게로 옮겨갔고, 그렇게 부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 비유태인이 유태인을 증오할 이유는 수백, 수천가지도 더 되었고, 유태인은 결코 정직하거나 선한 사마리아인도 아니었으며, 그들의 존재, 말과 행동, 신념, 종교가 증오를 부르는 원인의 일부였다. 그리고 시대상황은 유태인에게 매우 불리하게 움직였고, 많은 유태인이 가스실로 들어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유태인은 말한다. 왜 우리가 증오의 대상이 되고, 학살당해야 하는가라고. 아우슈비츠에서 죽었거나, 살아남은 유태인은 범죄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시대의 광기에 희생된 사람들일 뿐이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갈까.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지만, 작가의 어머니는 1968년에 자살한다. 작가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지만, 살아 있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 참기 어려울 정도의 강박증세를 보인다. 작가의 아버지처럼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수용소의 경험을 책으로 남긴 프리모 레비의 증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수용소에서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었다. 프리모 레비도 결국 자살하는데, 불과(?) 10개월의 수용소 경험이 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뒤흔들고, 다시는 과거의 '존엄성을 유지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유태인 개개인이 겪은 학살의 트라우마는 집단화한다. 융이 말한 것처럼, 집단무의식은 민족의 염원으로 드러나고, 다시는 같은 참혹함을 당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공포와 강렬한 의지가 시오니즘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유태인의 선민의식이 결합한 시오니즘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물리적으로 소수그룹인 유태인은 가장 강력한 집단인 미국을 등에 업기로 결정한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 자신을 투사하면, 자신도 가장 강하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약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우리가 약했기 때문에 당했으니, 약한 자는 당해도 싸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가하는 폭력은 아우슈비츠에서의 트라우마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며, 집단무의식의 발현이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 미국을 등에 업고 자신이 유럽에서 당한 따돌림과 폭력을 같은 소수민족인 팔레스타인을 향해 퍼붓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만화의 형식 이 작품은 한 페이지에 여덟 칸을 기본으로 하고, 칸의 변형을 통해 이야기의 흐름을 긴장감 있게 전달하고 있다. 칸 하나의 밀도는 매우 높아서, 그림과 글이 꽉 차 있다. 만화에 여백이 없거나 드문 것은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가 많거나, 스토리에서 여유를 부릴 만한 심리적 편안함이 없다는 걸 반증하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칸에 글과 그림이 빼곡하다. 대사와 지문은 너무 많아서 만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두꺼운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든다. 작가가 선택한 주제와 아버지의 과거 경험, 현재 아버지와의 관계 등이 작가의 작품에 생생하게 녹아들기 때문에 그만큼 해야 할 말, 하고픈 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아버지의 증언을 토대로 그림 작업을 했지만, 그림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증언이나 적은 기록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작가가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13년간 작업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도 아니고, 엄살도 아니다. 작가는 사실에 가까운 묘사를 위해 수많은 자료를 수집해 분석하고,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동물의 의인화를 제외하고 시대 배경-건축, 의상 등-을 최대한 당대에 가깝게 재현했다. 책 1권 90쪽에 유태인들이 디엔스트 스타디움에 모이는 장면이 있는데, 반페이지 칸에 수백 명의 유태인을 꼼꼼하게 그리고 있다. 스타디움 앞 광장에 동상과 전차, 자동차까지 배치해 현실감을 높였고, 계속 진행하는 장면들에서도 군중 씬에서 유태인들이 입은 옷과 게쉬타포가 입은 군복에서도 작가의 고증은 꼼꼼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 작가는 스크린톤을 쓰지 않고 모든 선을 직접 펜으로 그렸는데, 당연하면서도 신선하다. 스크린톤은 일본과 한국만화에서 쓰이는 특징인데, 그래픽노블에서는 스크린톤이 거의 쓰이지 않는다. 스크린톤은 일본에서 개발되어 주로 '공장만화'에 쓰이다 한국으로 넘어왔고, 한국에서도 만화가가 여러 명의 보조 인력을 데리고 일하면서 대량으로 만화를 생산하는 체제를 갖춘 곳에서 주로 쓰였다. 작가가 인종에 따라 동물로 형상화하면서 발생한 문제(?) - 작가가 분명 의도한 것이라고 보는데 - 는 '개인'보다는 집단의 문제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보인다. 유태인을 '쥐'로 표현하면서, 모든 유태인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즉, 개인의 '퍼스낼리티'는 이 만화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돼지로 표현한 폴란드인이나, 고양이로 표현한 독일인처럼, 그들이 인종대 인종으로써 학살하고, 학살당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 집단 학살 앞에서 개인의 존재는 무의미하며, 생존자는 오로지 '우연'과 '행운'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현재의 아버지와 과거의 아버지를 번갈아 만나는 방식이다. 여든이 넘어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수용소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아내의 자살이 자기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아들인 작가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민감한 문제인데, 현재의 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는 말라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말라 역시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오래 전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블라덱의 아내(작가의 어머니) 안나가 자살하면서 아무런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묵시적으로 남편을 비난하는 것으로 읽힌다. 안나 역시 수용소에서의 트라우마가 극심해서, 그 결과 자살을 결심한 것으로 보이지만, 남편 블라덱의 행동이 수용소 이전과 이후에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볼 때, 안나는 달라진 남편의 말과 행동을 견디기 어려웠고,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남편의 달라진 행동으로 인한 불안과 실망, 좌절이 겹쳐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아버지를 만나며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발화로 과거로 돌아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작가가 개입하면서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현재에서 발생하는 사고, 사건은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고, 현재의 '괴팍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과거에서 찾는다. 이 작품 속에서 아버지는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하는데, 작가는 아버지가 회상한 과거를 녹음했고, 녹음을 들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과거는 아버지의 기억에서 소환되거나, 아버지의 발화를 통해 기록되어 작가의 작품으로 옮겨간다. 이 만화는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지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충분하게 전하고 있다. 독일군-나찌-의 잔학함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분을 느끼게 하고, 유태인들의 무저항에 대해서도 어리석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문제는, 아트 슈피겔만처럼 별 ‘악의없이’ 자신의 가족사를 그리는 사람마져도 유태인의 전략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조직적으로 ‘유태인 학살’에 대해 끊임없이 여론을 환기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그 자신이 유태인의 피가 흐르는 스티븐 스필버그는 유태인의 수난사에 대해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돕고 있고,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분야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예술가를 지원하면서 재생산하고 있다. 유태인 학살을 거론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역사는 잊어서는 안된다. 인종을 말살하려는 인종우월주의자가 다시 나타난다면 인류는 존재의 의의마져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해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유태인은 소수라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실제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그것은 그들이 2천년동안 떠돌아 다니면서 배운 지혜의 결과겠지만, 그들의 생존을 위해 예전의 자신들과 같은 다른 민족을 말살하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찌들에 의해 독가스 등으로 학살 당한 유태인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면서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그보다 더 잔학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것은 어떻게 변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유태인’의 문제는 한 종족의 문제가 아닌, 세계 평화와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우익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미국의 이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방향으로 중동의 중심에서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태인이 자기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소리치는 것도 이제 귀가 아플 정도가 되었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유태인 학살에 대한 고발 장면-영화, 소설, 만화, 다큐멘터리 등-도 신물이 날 지경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촘스키와 같은 동족-유태인-이 이스라엘의 파시즘화를 노골적으로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지성인이라면 자기 종족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유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도 ‘친일매국노’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핍박받은 상황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유태인들처럼 집요하면서도 사실적인 증언과 복원의 결과물들이 훨씬 더 많이 나와야 한다. 고통받은 사람들의 증언이 영화, 만화, 소설,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야 하고, 그런 목소리가 사회에 크게 울려야 한다. 아직도 친일매국노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반민족행위자들이 출세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소위 진보를 말하는 자들이거나, 양심있는 자들은 ‘유태인’처럼 우리가 당한 수난의 역사를 우물처럼 자꾸 퍼올려야 한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엄마’, 욕망하는 여자
    ‘엄마’, 욕망하는 여자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분명 누군가의 ‘엄마들’이지만, ‘엄마’는 이들의 정체성이 아니다. 이들의 자식들은 이미 장성해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거나, 남편과 이혼(또는 사별)해서 따로 살고 있는 여성들이다. ‘엄마’와 ‘어머니’는 같은 기혼 여성 가운데 자식을 둔 여성을 지칭하지만, 의미는 다르다. 마영신 작가는 왜 ‘어머니’여야 할 자신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들을 ‘엄마들’이라고 했을까. 작가는 남성이고, 자신이 바라보는 ‘엄마’는 ‘어머니’이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엄마들’은 작가가 ‘아들’이자 ‘남성’의 시각을 투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엄마’는 남성(아들)의 시각에서, 늘 자기를 보살피고, 다정하고, 욕구-먹고, 입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뒷바라지 하는 모든 것-를 해소해 주는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 ‘어머니’는 보다 형식적이면서 존재가 분명한 이성(理性)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이 나이 들어도 여전히 ‘엄마’로 부르려는 것은 단순한 친밀감의 표현이 아니라(그렇다 해도), 그들이 어렸을 때 받았던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하지만 ‘엄마’도 인간이고, 여성이다. 엄마도 나이 들면서 변하고, 달라진다.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면서 이타적으로 행동한 존재이며, 사회는 ‘엄마’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퍼뜨려, ‘엄마’의 역할을 고정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회적 억압이다. ‘엄마’의 역할을 고정하려는 사회적 의도와 압력은 곧 여성 일반의 사회적 역할을 고정하고 억압하려는 가부장제, 남성 우월주의의 연장선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영신 작가는 ‘엄마들’이라는 감성적 제목과는 완전히 다른 ‘엄마’이자 욕망하는 여자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품은 표지부터 남다르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의도를 드러내는 가장 분명하고 좋은 방법은 표지그림인데,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한국적'인 표지그림은 이 작품이 아마도 최초가 아닐까. 표지그림은 그 자체로 역설이다. '엄마들'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보편으로 인식된 '엄마'라는 따뜻하고 편안하며 행복한 이미지의 추상이지만, 그 아래 두 중년 여성이 서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악을 쓰는 모습은 '엄마'라는 기존의 아름다운 추상적 이미지를 산산이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바탕의 빨강색은 중년들이 좋아하는 색깔로 알려졌는데, 빨강의 강렬한 색감과 흑백의 인물이 강조되면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풀어놓을 거라는 기대를 일으킨다. 주인공은 이소연이다. 중년의 여성이고, 아직 독립하지 않은 성인 아들과 함께 사는데, 자기 이름으로 남은 유일한 재산은 연립주택 가운데 한 채다. 소연은 스무 살에 중매로 남편을 만났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길렀지만, 남편이 도박에 빠져 집안을 망치고 빚만 늘어나자 소연은 빚을 갚기 위해 평생 가난과 노동에 허덕였다. 그러다 결국 이혼을 하고 지금은 건물 청소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집안을 망치고, 가족을 괴롭힌 것은 남성(남편)인데, 그 문제를 해결하려 고생하는 것은 여성(아내)이 되는 구조는 ‘사회적 스톡홀름 신드롬’에 해당한다. 가부장사회,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다. 여성은 늘 자신이 억압당하는 상태에 있음을 느끼고, 성폭행, 성추행, 폭행, 차별, 억압 같은 공포를 겪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성(사회)의 요구에 동의,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소연 역시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힘겨운 노동으로 보냈다. 이런 여성의 행동을 가부장 사회에서는 ‘현모양처’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한다. 이런 장치를 통해 여성의 욕망은 소거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다. 소연에게는 애인 종석이 있는데 술집 웨이터로 일하는 남자다. 종석의 아내는 다단계에 빠져 빚이 많은 데다 종석의 동창하고 불륜 관계여서 사실상 이혼한 상태로 생각하고 있다. 소연은 애인인 종석이 3년 전부터 꽃집 여자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는 종석에게 욕을 하며 헤어지지만, 이들의 삼각관계는 이어진다. 꽃집 여자 명희는 소연에게 종석과 헤어지라고 말하고, 소연은 '내 남자와 연락하지 말라'고 카톡을 하다 새벽에 길거리에서 만나 육탄전을 벌인다. 작품 속 엄마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성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이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진 그녀들의 모습은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사회적 약자, 가부장제, 남성 우월주의 체제 속에서 억눌린 채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피억압자의 모습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엄마들은 대개 부자도 아니지만, 많이 배우지 못한 여성들이어서 자기들의 삶이 왜, 어떻게 망가져 왔는지 깊이 성찰할 능력은 없다. 남자(남편을 포함한 애인까지)들이 저지른 일을 뒤치다꺼리하느라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면서도 자신보다 남자, 자식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던 여성이 바로 '엄마'다. 하지만 '엄마'도 나이 들면서 자기 욕망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오랜 시간 너무나 많이 참았고, 남자(남편과 애인)와 아이들에게 시달렸고, 자신의 행복을 유예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춤을 배우고, 나이트클럽과 콜라텍에서 낯선 남자들과 춤을 추고, 애인을 사귀고, 삼각관계에서 질투와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엄마들'의 다른 모습은 '여성 노동자'다. 그것도 비정규직의 불안한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한다. 소연은 빌딩 청소를 하는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그곳에는 소연과 비슷한 나이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함께 일하고 있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용역업체의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여성 노동자로 빌딩 청소를 하는 ‘엄마’는 그들이 집에서 살림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바로 그 모습을 빌딩 청소라는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있다. 즉, 여성 노동자로서, 엄마로서 가정과 사회에서 그들의 처지는 늘 낮은 곳, 가장 열악한 곳, 가장 힘들고, 대우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조적으로 억압 상태에 놓여 있는 여성 노동자이자 ‘엄마들’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욕망을 발산하고, 사회적으로 노동조합을 건설한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해 달라고 소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한 옥자 언니는 성추행을 당하고 해고된다. 옥자 언니는 여성가족부도 찾아가고 노동운동을 하는 여성도 찾아가지만, 실질적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이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용역업체 소장-남성-은 반장을 시켜 어용노조를 만들도록 하고, 16명 가운데 12명이 어용노조에 가입하고, 4명이 된 소연과 동료들은 따돌림을 당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여성)들이 어용노조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자기들만 고용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을 보면서 소연과 동료들은 배신감을 갖지만, 12명의 여성이 왜 권력의 그늘로 순순히 들어갔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드러나지 않는다. 동료와의 연대까지 외면하면서 더 중요한 건 ‘일자리’고 ‘임금’이기 때문이다. 빈곤은 동료 노동자와의 연대와 협력을 방해한다. 일자리를 잃게 되면 곧바로 들이닥치는 생존 문제는 이들이 노동착취와 차별에 저항하지 못하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다. 소연은 라디오 방송에 나가 일하는 회사에서 부당 노동행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고발한다. 라디오 방송의 파급 효과가 있어 소장은 소연을 비롯해 모두 해고될 거라고 협박하지만 결과는 용역업체와 소장이 바뀌고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남았는데, 소연과 연정 언니는 해고된다. 소연은 옥자 언니와 다른 업체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 예전 업체에서 반장을 했던 사람이 들어온다. 떡값을 빼돌리다 들통나서 해고되자 우연히 소연이 일하는 곳으로 취업한 것이다. 소연은 삼각관계였던 명희와 친구가 되고, 연순은 만남 어플로 연하의 남자를 만나고, 명옥이는 기자 애인과 계속 만나고, 연정은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고, 경아의 남편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모두 여전히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사회를 개혁할 여력도, 능력도 없지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 이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공모한 만화평론에 가작 당선한 저의 글입니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룸펜 프롤레타리아, 욕망의 리얼리즘
    룸펜 프롤레타리아, 욕망의 리얼리즘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발현하는가를 들여다보면, 좁게는 개인을 둘러싼 좁은 영역에서 발생하는 낮은 차원에서 사회의 구조를 아우르는 거대한 관계망까지 영향을 끼치는 폭넓은 스펙트럼이 있다. 권력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사회의 구조를 바꾸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사회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과 개인의 욕망이 일치할 때, 그것을 ‘사회적 성공’과 ‘개인의 입신양명’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보편적 욕망은 자신이 놓인 삶의 물적 토대에 근거하며, 욕망의 크기도 개인의 환경에 비례한다. 욕망의 진화 역시 사회의 구조적 선택압을 받게 되며, 구조는 마치 거대한 계단처럼 개인의 욕망을 가로막는다. 욕망은 변증법적으로 진화하며, 질적 변화를 일으킬 때, 계단을 뛰어넘는다. 사람은 저마다 욕망을 지닌 채 살아간다. 대개는 ‘욕망’과 ‘희망’ 또는 ‘욕구’를 구분하지 않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객관적 조건과 거리가 먼 황당한 기대를 당연한 듯 품고 살기도 한다. 마영신의 ‘아티스트’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 신득녕, 곽경수, 천종섭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의 남성이자 예술가로 자처하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들이 가진 욕망의 발현을 ‘권력’이라는 배경에 투사해 해부한다. 한국사회에서 40대 남성은 그 자체로 권력을 가진 존재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인정받지 못했거나, 중심에서 멀어져 소외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의 존재가 ‘기득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주인공들은 자신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가난한 예술가이며, 주변부에서 소외된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계급으로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이며, 본질에서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집단에 속해 있다. 이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한국)사회의 계급구조와 집단의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풍자와 해학을 통해 개인의 욕망을 비판하지만, 표현은 결코 말랑하지않다. 작품에서 ‘계급’, ‘모순’, ‘갈등’, ‘대립’, ‘억압’ 같은 사회과학 용어가 등장하지 않을 뿐,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과 과정, 몰락에 이르기까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숨 쉬는 (자본주의)체제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이루지 못한 꿈(천종섭, 곽경수)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인물과 더 높은 곳으로 오르지 못하는(신득녕) 인물이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내면에서 인지부조화의 갈등을 일으키는 초반은 이들의 본성이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난다. 지식인(인텔리겐챠)은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이건 하나의 명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식인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학연과 스승, 동료, 제자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식을 자본화한다. 지식 자본은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세 가지 요소-토지, 공장, 노동력-처럼 토대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들-인텔리겐챠-의 발밑은 단단하지 않다. 지식 자본은 원래의 ‘자본’에서 파생한 것이므로, ‘자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 많은 경우, 지식 자본은 ‘자본’에 복종하며, 자본의 용병으로 복무한다. 따라서 지식 자본을 보유한 인텔리겐챠는 본질적으로 기회주의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기에,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경수, 득녕, 종섭은 남성 예술가 모임 ‘오락실’에서 만난 또래들이다. 각자 두 살 터울이지만 형, 동생의 위계를 지키는데, 이건 특히 한국의 병영 문화가 낳은 폐해를 드러낸다. 이들이 형, 동생으로 부르지만, 실제로 나이 먹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 먹어서 한심하다고 경멸할 때, 이들의 위계는 본질을 드러낸다. 세 명의 주인공이 모두 남성인 것은 작가가 남성이기 때문도 아니고, 남성 우월주의를 드러내려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다.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의 의도는, 한국사회에서 허리에 해당하는 40대 남성 가운데서도 노동자가 아닌, 인텔리겐챠이면서 룸펜 프롤레타리아인 이들이 ‘예술가’로 자처하지만, 실제 ‘예술가’의 정체성이 있는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들은 술자리에서 요절한 젊은 가수의 작품성을 폄하하고, 인간성까지 비난하며, 죽어서 대중에게 스타 대접을 받는 것까지 질투한다. 뮤지션 천종섭은 저작권을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신득녕에게 다른 가수의 음원을 불법으로 복사해 달라고 말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이중성은 기득권 남성의 멘탈리티를 본능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같은 ‘오락실’ 멤버 가운데 가수로 성공한 사람, 영화로 성공한 사람을 두고 실력도 없으면서 어쩌다 성공했다고 폄하하며, 조금 유명해졌다고 사람이 달라졌다고 비난한다. 이들의 비난은 근거가 없다. 그들의 일방 주장일 뿐이다. 그러면서 곽경수는 말한다. ‘우리 세 사람은 누가 잘 되면 무시하지 말고, 서로 진심으로 위하면서 살자’고. 이 대사는 이미 자기들이 무시당하는 걸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고, 누군가 성공했을 때, 서로 진심으로 위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을 드러낸다. 작품의 초반에 나오는 이 대사는 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질 것임을 예고한다. 작품의 발단에서 이들이 보이는 태도는 전형적인 룸펜 프롤레타리아다. 세 명 모두 일정한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았고, 지식 자본을 갖추었으나 그것을 상품으로 판매하지 못하는 소외된 상태에 있으며, 그렇다고 노동시장으로 편입하려는 의지도 드러내지 않는다. 세 명 모두 가족과의 유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득녕은 34세에 소설집을 출간한 작가지만, 집안에서 모두 득녕이 작가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가족들과 멀어졌다. 득녕이 종섭의 에세이집 출간을 적극 돕는 이유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명이 우연히 만나 어울리며 가깝게 지내게 된 배경에는 ‘예술’을 향한 그들의 고집이 집안의 반대로 현실의 벽에 부닥쳤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세 명은 자발적으로 가족 단위에서 스스로를 해체한다. 가족의 범위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면,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 개념에서 벗어난 이들은 ‘오락실’이라는 남성 예술가 모임에서 만나 유사 가족을 구성한다. 이들은 각자 독립 공간을 가지고 있지만, 자주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공통의 화제를 찾아 이야기한다. 보통의 가족도 각자의 방에서 생활하며, 밥을 먹을 때는 주방에, 텔레비전을 볼 때는 거실에 함께 모인다. 이런 생활 방식은 약간의 물리적 거리만 있을 뿐, ‘오락실’의 남성 예술가들이나 기존의 가족 형태나 크게 다르지 않다. 세 명이 나이에 따라 위계를 갖추는 것 또한 한국 병영 문화의 하나이면서, 유교 전통에 따르는 보수적 가치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보수적 위계와 유사 가족의 결합이 긍정적으로 작동한 경우가 바로 득녕이 종섭을 위해 책 출간을 적극 돕는 것으로 나타난다. 득녕은 어려서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득녕을 폭행했고, 엄마는 득녕을 이기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득녕은 부모와 가족의 부정적 교육에서 벗어나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는 종섭이 뮤지션이면서 글도 잘 쓴다는 것을 발견하고, 종섭이 글을 꾸준히 쓰도록 지원하며, 출판사를 섭외하는 등 자발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욕망의 발현은 구체적인 물적 토대가 있을 때 가능하다. 이들이 드러내는 욕망의 크기는 자신이 이룩한 사회적 성공만큼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거대한 세계라고 그들은 착각한다. 득녕의 도움으로 책을 출판한 종섭은, 예상치 않은 성공으로 어리둥절한다. 인세나 받아서 생활비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정도였던 에세이집은 크게 성공하고, 종섭은 하루아침에 스타 작가가 된다. 종섭이 자신의 전공분야로 생각하는 음악이 아닌, 글을 써서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것은, 이들의 사회적 성공이 개인의 재능이나 철학과는 깊은 관련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다. 즉, 자신을 ‘예술가’라고 말하지만, 추구하는 예술을 향한 치열한 노력이나 열정은 보이지 않고, ‘예술’을 도구나 지렛대로 활용해 사회적 욕망의 크기를 키우려는 주인공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종섭과 마찬가지로 경수 또한 자신이 추구하는 미술 작품으로 사회적 욕망을 발현하는 것이 아닌, ‘통합예술진흥원’에서 중간 관리자가 되어 권력과 금력을 추구하는 것에 만족한다. 득녕 역시 문학작품으로 상을 받은 이후, 잡지사를 만들어 문학계에 영향력을 키운다는 점에서 ‘작가’의 정체성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던 돈과 명예, 권력을 누리지만, 그들의 본질인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저급한 인식에서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추락하게 된다. 여기서 필연적 배경은, 주인공들이 사회적 욕망에서 배제(소외)된 상태였을 때 스스로 성찰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던 요소들 즉, 남성 우월주의 사회, 남성가부장제의 한계, 남성 기득권의 문제, 인텔리겐챠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한계, 자신이 속한 예술 분야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 성 감수성과 페미니즘의 몰이해 등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거나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자기 세계를 만들기도 전에 사회적 욕망의 토대에 올라 돈과 권력을 휘두르면서, 이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의 재능으로 이룬 성공이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결과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들은 자기 전공이라고 여기는 예술 분야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민감하고 전투적인 태도를 보인다. 종섭이 음악하는 누나의 앨범 발매 축하연에서 만난 래퍼 ‘빅 라이스’와 자존심 대결을 하는 장면이나, 경수가 미술하는 선후배 모임에서 자격지심을 드러내는 장면은 아집과 열등감이 폭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전공 분야’라는 것도 처음에는 구체적 꿈으로 열정을 갖고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 이들이 쌓아 올린 탑이 아니라, 상상의 세계에서 구축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이들은 구체적으로 실천하거나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을 좇는 관념적 인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세 명의 주인공은 두 가지 성공을 거둔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드러난 ‘명예’로 종섭은 수필집을 출간하면서 스타 작가로 대접받으며 돈과 인기를 끌어모은다. 경수는 ‘통합예술진흥원’의 중간 관리자로 일하기 위해 원장 후보자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새로운 원장을 위해 개처럼 충성한다. 득녕은 마침내 문학상을 받는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가지고 있던 내면의 열등감과 과잉 자의식이 해소되는 것이다. 사실 이들에게는 사회적 성공보다 내적 갈등의 해소가 더 중요하지만,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 한다. 라캉은,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은 대개 상징계-이미 구성되어 있는 세계-에서 머물며, 실재계-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징의 세계-는 다다를 수 없는 ‘균열 없는 충만한 세계’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고 했는데, 세 명의 주인공이 머물고 있는 상징계가 곧 그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즉, 이들은 룸펜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적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술’이라는 다다를 수 없는 차원을 꿈꾸다 파멸한다. 이들이 얻는 것은 지극히 작은 권력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지킬 수 있는 훈련된 내면의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에 주어진 권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낯설어한다. 이들은 유사 가족이지만, 모두 자아가 성숙하지 못한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유치하고 치졸한 말과 행동은 세 명이 서로 상대방을 거울로 인식하고, 그 거울에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이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일 때,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난다. 세 명의 주인공은 누군가 한 사람이 우연이든, 노력에 의해서든 세속적 성공을 이루자 그것을 모방하려 한다. 이들의 모방은 질투와 시기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욕망의 실현이다. 따라서 본능에 가까운 욕망 즉 불안을 해소하려는 의지는 이성의 세계인 도덕과 윤리의 의지보다 강렬하다. 종섭이나 경수가 보이는 타락은 이성보다 강한 의지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종섭은 득녕의 도움을 받아 출판을 하고, 스타 작가가 되지만, 인터뷰에서 득녕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득녕이라는 거울을 모방했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의 존재가 여전히 유아적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섭이 획득한 권력-명예, 돈, 호감-을 주로 여성의 육체를 탐닉하는데 소모한다. 종섭은 스타 작가가 되자 곧바로 12살 차이 나는 여성을 선택하고, 음원저작권 협상을 주도하는 권력을 위임받은 다음, 어린 신인가수에게 접근해 육체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다시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을 성추행하다 발각되고, 무릎을 꿇고 사과할 때조차 권위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결정적으로, 강남에서 치과병원을 하는 의사의 딸이었던 애인에게도 결별 선언을 듣고, 종섭은 자신의 졸렬함과 비열함을 드러낸다. 경수는 추잡한 스캔들을 터뜨리겠다고 협박해 문화단체의 중간 관리자가 되지만, 방탕한 생활과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남용해 결국 자리에서 쫓겨난다. 종섭과 경수는 자신이 획득한 욕망을 지키지 못했다. 욕망은 어차피 다른 사람의 욕망이었으며, 자신이 추구하던 욕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 채, 욕망의 결과만을 누리려 했던 두 사람은 자신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추락한 것이다. 득녕은 종섭과 경수와는 다른 세계를 구축한다. 그는 처음-룸펜 프롤레타리아 시절-부터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정도의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고,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공동체 의식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득녕은 소설로 데뷔해 문학상을 받고 성공의 문턱에 오르지만, 그는 오히려 창작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프로듀서의 능력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득녕은 자기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애인인 성희와 문학잡지를 만들 때부터 더 이상 창작-소설쓰기-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기존의 시스템과는 완전히 다른, 협동조합 체제로 잡지 출판을 시작하고, 이 시도는 좋은 작품을 발굴하면서 사업으로도 성공한다. 이타적이고, 자기객관화가 뛰어나며, 헌신적인 데다 머리까지 좋은 득녕은 마침내 자기가 원하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종섭이 인기 작가의 명맥을 유지하지만, 글쓰기나 음악 모두 아무런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면, 경수는 조직에서 쫓겨난 이후 처음 등장했던 바로 그 위치-룸펜 프롤레타리아-로 돌아가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다 미국 만화 캐릭터를 그려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한다. 저작권을 위반하는 것도 알지만, 경수는 영세사업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면서 고집을 부린다. 이들과 다르게 득녕은 잡지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잡지는 문학계에서 힘을 갖게 된다. 득녕이 종섭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아내 성희와 나누는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성희는 종섭의 인터뷰에서 ‘천재작가’라는 타이틀은 지나친 표현이며, 그런 표현으로 종섭이 오히려 위축되어 작품 활동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득녕은 성희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해야 하며, 외부의 규정에 얽매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합리적이다. 그러나 득녕이 노린 것은 과연 ‘합리적’ 선택일까. 종섭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는 독자들이 종섭을 대중 작가에서 ‘예술가’로 격상하는 상찬을 하기 때문에, 당장 종섭에게 유리하고 이로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정작 종섭은 ‘천재작가’라는 타이틀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경수에게도 잡지 표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탁하지만, 정작 경수가 그린 그림은 표지로 사용하지 않는다. 경수의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겨울비’를 표절했고, 표절이 이유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경수의 그림을 실을 의도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경수는 자신의 그림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득녕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보복과 파괴의 욕망은,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 조건 없이 헌신해서 성공의 디딤돌이 되었던 노력을 종섭이 무시했다는 기억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종섭이 성공한 상업 작가지만, 진정한 ‘예술가’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득녕은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고, 종섭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종섭을 오히려 ‘예술가’의 반열로 올려야 한다는 것을 득녕은 계산하고 있었다. 득녕이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던 잡지사는 내부 반발이 발생하고, 득녕을 ‘문화권력’으로 규정한다. 득녕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신이 권력 지향적인가,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나, 욕망이 자신을 삼키지는 않았나. 득녕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지만, 그는 대학교 정교수 자리를 거절한다. 그리고 10년 뒤에 문화부장관이 되어 있을 거라고 아내 성희에게 상상을 주입한다. 득녕은 자신이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 말은 이미 거짓말이다. 득녕은 스스로를 기만한다. 자기가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합리화하지 않으면, 이미 인연이 끊긴 종섭과 경수처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때 비슷한 처지에서 서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거울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 우연이든, 실력이든 세속적 성공-욕망의 현현-을 이루자 곧바로 타락한다. 종섭과 경수의 몰락은 성공의 근원이 외부에 있었다는 것, 자신의 욕망을 직접 투사하지 못하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했다는 것, 욕망의 부피를 다룰 역량이 없었다는 것 등의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종섭과 경수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로 인한 불안이 욕망을 잠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득녕은 두 사람과 달리 성공의 근원이 내부에서 추동한 것으로, 득녕 자신의 주체적 욕망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무엇보다 유일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종섭과 경수와는 다른 존재다. 세 사람은 유사 가족으로 묶여 있었지만, 욕망의 발현-세속적 성공-추락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자아를 깨닫는다. 이들의 존재는 여전히 룸펜 프롤레타리아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는 거울을 모방하는 유아기에서 벗어나 스스로 발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들은 느슨한 인연을 유지하겠지만, 과거의 가부장적 질서, 유교적 위계 관계, 남성 중심의 기득권 유지는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한다. 세 사람이 겪는 사건들 가운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성추행, 성희롱, 위계에 의한 성폭력 등 범죄에 가까운 행위가 있었고, 종섭과 경수가 몰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더 이상 남성 기득권을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호흡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그들의 ‘예술’과 ‘아티스트’라는 존재 의의는 사회적 몰락과 함께 잊혀지게 된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이자 나약한 인텔리겐챠의 한계를 드러내는 필연적 결말이기도 하다. * 이 글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공모한 만화평론에 가작 당선한 저의 글입니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지슬
    제목 : 지슬 작가 : 김금숙 출판 : 서해문집 이 작품은 오멸 감독의 작품인 영화 '지슬 2'의 내용을 그래픽노블로 창작한 것이다. 이미 영화를 봤기 때문에 줄거리는 알고 있지만, 영화와 만화는 느낌이 다르다. 먼저, 김금숙의 그림은 거친 붓을 사용한 형식미에서 영화의 분위기를 강렬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투쟁 가운데서 죄 없는 제주의 가난한 백성들이 총칼로 잔인하게 학살당하는 과정이 김금숙의 그림을 통해 필연적으로 융합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하기 어렵다. 예전에 어린이 잡지 월간 '개똥이네 놀이터'에 '꼬갱이'를 연재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 그림과 이 작품의 그림이 같은 작가의 것인줄은 몰랐다. 김금숙과 같은 작가가 한국 만화계에 등장한 것은 만화계의 축복이자, 독자에게는 가뭄의 단비처럼 반갑고도 즐거운 소식이다. 작가 김금숙은 전라남도 고흥 출생인데, '지슬'의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의 집안 역시 한국 전쟁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가 깊은 듯 하다. 아직까지는 작가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내진 않고 있는 듯 한데, 그의 작품 가운데 '아버지의 노래'가 자전적 이야기지만, 한국전쟁의 참담함을 본격 다루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앞으로 작가의 집안 이야기가 창작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되면, 아마도 '지슬'과 같은 무겁지만 아름다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원작 소설이나 원작 영화를 그래픽노블로 재창작하는 것은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을까. 소설을 만화로 재창작하는 것은 활자의 상상력을 구체화, 사실화한다는 점에서 현실성을 높이고, 캐릭터와 배경, 사물을 익숙한 이미지로 만나게 되어, 독자는 활자를 읽고 상상하던 것을 시각으로 확인하게 된다. 이는 활자만으로 된 내용을 보다 쉽고, 재미있게 접근한다는 점에서 장점이지만, 독자와 그래픽노블 작가의 해석이 다를 때는 오히려 독자의 상상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실망할 가능성도 있다. 영화는 약 2시간 동안, 초당 24프레임으로 끊임 없이 상영된다. 이것을 5초당 1프레임으로만 바꿔도 1분이면 12프레임, 1시간이면 720프레임, 2시간이면 1440프레임이 된다. 만화는 한 페이지에 1-8컷 정도를 나누는데, 평균 5컷으로 계산하면 300쪽 만화는 1500컷으로 연출할 수 있다. 영화의 프레임과 만화의 컷을 이렇게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보면, 영화의 내용은 거의 다 담을 수 있겠지만, 만화는 정지된 장면들의 모음이기 때문에 영화보다는 세부 묘사와 동작의 섬세함을 표현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래픽노블이 영화보다 좋은 점 몇 가지가 있다. 만화는 영화에서 중요하게 보이는 장면을 이미지화 할 수 있다. 영화는 끊임 없이 장면이 흘러가지만, 만화는 수 많은 장면들 가운데, 중요한 장면을 이미지화하면서, 한컷, 한컷의 상징성을 만들어간다. 이 작품의 표지는 영화포스터와 같은 이미지로 보이지만, 영화포스터의 사실적 이미지와는 또다른 울림을 준다. 군인이 아무 죄 없는 주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은 민족의 분단과 분열, 이념으로 갈린 내전과 학살을 상징한다. 영화는 사실에 가까운 표현을 통해 그때의 비극 상황을 재연하지만, 만화는 생략과 과장을 통해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픽노블 작가의 그림은 그 자체로 회화 작품이고, 폭력과 공포, 죽음을 드러내는 거친 붓선과 먹의 농담으로 제주도 민중이 겪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제주4.3을 펜선이 아닌, 붓과 먹으로 그렸다는 것도 이 작품이 주목받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수묵화는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회화였으며, 그림은 물론 글도 붓과 먹으로 썼다. 화가들은 일상의 풍경을 담은 세속화를 많이 남겼고, 조선의 민중은 수묵화를 퍽 친근하게 여기고 있다. 수묵화는 조선(한국) 민중에게 친숙하고 낯익은 표현도구이며, 우리의 정서와 감성을 오롯이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제주4.3의 희생자 대부분은 제주 민중이고, 이들은 이념 전쟁에서 억울하고 참혹하게 죽는다. 제주 민중을 수만 명 학살한 서북청년단과 경찰, 군인은 공산주의자를 제거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북한에서 쫓겨내려 온 기독교도들 가운데 극우주의자들이 복수를 위해 결성한 단체-서북청년단-를 통해 이념적 복수를 제주 민중을 향해 저지른 것이다. 작가 김금숙은 이들 우익이 저지른 학살 만행의 참혹함을 수묵화로 표현하고, 그 표현 기법은 그래픽노블에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뛰어난 방식이다. 수묵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도 역사적 사건을 그린 그래픽노블이 많겠지만, 이렇게 내용은 참혹해도 형식은 아름다운 수묵화 그래픽노블은 찾아보기 어렵다. 참혹한 내용을 아름다운 형식으로 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희생자와 그 가족인 제주민중의 처지에서 보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그것을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미지 작업을 통해 기억하는 것을 기껍게 생각할 것이다. 참혹한 짓을 저지른 것은 가해자인 서북청년단, 경찰, 군인이고, 제주민중은 피해자였다. 참혹함과 반인륜, 반지성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무엇보다 희생자와 그 가족의 아픔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작가 김금숙의 작품은 형식미에 있어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본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예쁜 여자
    제목 : 예쁜 여자 작가 : 권용득 출판 : 미메시스 권용득의 만화는 처음이다.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아 미안하고 그래서 더 반갑다. 만화를 읽다 보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 같다. 세밀한 묘사와 감정의 선을 그려나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순간, 영화감독 홍상수와 그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권용득 작가가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만화와 영화에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니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홍상수의 영화를 만화로 그린다면 권용득의 만화가 되고, 권용득의 만화를 영화로 만들면 홍상수의 작품이 된다.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대화, 어색하고 기분 나쁜 상황에서 대처하는 모습, 소심함과 비겁함 따위의 사사로운 감정 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민낯의 얼굴이 많이 닮았다. 짧은 단편들은 모두 작가의 1인칭 주관적 시점의 경험담을 그리고 있고, 고향을 방문하고, 결혼식에 참석하고, 친구와 동기, 선후배를 만나고, 예전의 짝사랑했던 여자를 만나고, 그렇게 다시 이야기가 얽히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런 찌질함은 어찌보면 20대, 30대 남자들의 특권(병신짓도 특권이라면 특권이다)임에 틀림 없다. 이 나이의 여자들은 절대로 이런 짓을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권용득의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기들이 찌질이라는 것을 모른다. 모두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다른 사람을 흉보고, 욕하고, 비웃는다. 하지만 그런 모욕은 모두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시간이 지난 다음에서야 깨닫게 된다. 시간이 흘르고 나이가 들어 어느날, 잠자리에 들었을 때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발로 이불을 차고 싶도록 스스로가 쪽팔리고 한심했던 때가 있을 것이다. 없다고? 당신은 인생을 헛살았다. 얼굴이 화끈하도록 쪽팔림을 느낀다면, 당신은 성장한 것이다. 어리석은 찌질이에서, 세상을 조금은 알게 된 어른으로. 그러니 괜찮다. 이 만화를 보고 씁쓸하게 웃는다면 당신은 그때보다는 조금쯤 나아졌다는 것을. 마지막 단편 '예쁜 여자'를 보고 울었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려운 시절은 있을 것이고, 그것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앞길이 막막할 때, 어디에고 기대고 싶을 때가 있고 그 시기를 겪으면서 사람은 자란다. 엄마와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미워할 수 없는 가족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해와 공감은 사랑의 기본 조건이다. 이 작품집은 여덟 편의 단편을 모은 것이다. 작가의 말에도 있듯이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이다. 하지만 작가도 '사랑이 뭘까요?'라고 묻고 있듯이, 사랑이 무언지 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나머지의 진실]에서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문자를 받는다. 그것을 본 여자는 그 여자가 누구냐고 다그친다. 친구 결혼식장에서 만난, 문자를 보낸 그 여자(이기쁨)는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였고, 두 사람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진다. 택시를 타고 떠나는 여자의 표정이 좋지 않다. 짜증이 났거나, 기분 나쁜 표정이다. 조금 전까지 술을 마시면서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자의 마음이 상한 이유는 뭘까. 남자에게 온 전화를 남자는 받지 않았고, 그것은 당연히 남자의 애인일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자가 이 남자와 사귀던 때에도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고,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옛날 애인을 만난 남자를 보면서 여자가 울고, 남자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할게'라며 말한다. 이런 무신경과 뻔뻔함은 남자만의 전유물일까, 아니면 극히 일부 '멍청한' 남자들의 특수한 경우일까, 궁금하다. 옛날 애인을 '후배'라고 속이는 것도, 앞으로 들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도 뻔한 거짓말인데, 남자는 뻔뻔해서 그렇다해도 여자는 왜 속아주는 척하는 걸까,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단편 속 한 컷에는 권용득 작가의 아내이자 작가인 송아람의 작품 '자꾸 생각나'를 홍보하는 컷이 있다. 제목 위에 팔을 걸치고 있는 남자는 역시 작가이자 '새만화책' 대표인 김대중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이 단편이 2005년 7월 [계간만화]에 실렸던 것을 고려하면, '자꾸 생각나'가 레진코믹스에 연재하고 있을 때로 추정한다. 두번째 작품 [영원히 안녕]는 애인과 다투고 졸업한 학교의 축제에 온 남자가 옛날 애인 민주를 만나 '어쩌다' 함께 밤을 보내고 헤어진다. 남자는 여전히 옛날 애인 민주에게 마음이 있고, 그녀와 결혼하고픈 마음도 있지만, 지금 애인도 포기한 건 아니다. 남자의 마음은 갈대처럼 움직이고,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구분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고, 옛날 애인 민주가 찾아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고 말한다. 남자는 민주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고, 민주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그리고 다시 다퉈서 잠시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한다. 남자는 민주의 결혼식장에서도 마지막까지 농담처럼, '나에게 시집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남자의 분열적 감정이 담겨 있는데,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대한 질투와 원망이 담겨 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두고 비아냥과 투정을 하는 것이다. 그건 퍽 유치하고 감상적인 심리로, 남자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와나카의 추억]은 남자가 잠시 뉴질랜드 와나카에서 지낼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남자는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엄마와 전화를 하면서 알게 된다-친구가 있는 뉴질랜드로 간다.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지만, 딱히 할 일도, 하고픈 일도 없는 남자는 바에서 늙은 주민을 만나 서로 빗나가는 대화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남자는 바에서 만난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구입한 낚시면허증을 주려하지만, 통화는 실패로 끝난다. 바에서 만난 늙수그레한 주민은 결혼도 한 적이 없는 듯하고, 살고 있는 와나카 바깥을 나가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뉴질랜드가 천국이라고 말하지만, 그곳도 사람이 살고, 외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으며, 세상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는 걸 남자는 깨닫는다. [그만한 돈]은 만화가 용득권과 김응응이 만나 술을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원고료를 조금 더 달라는 용득권은 잡지사의 변명이 불쾌하고 짜증난다. 두 사람은 대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김응응은 '자갈마당'에 가자고 말하며, 용득권에게 '자갈마당'에 가봤는냐고 묻는다. 용득권은 두 번 가봤으며, 우연히 같은 여자를 만났다고 말한다. 여자가 있는 곳은 여관처럼 낯설고 지저분한 곳이 아니라,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었고, 여자의 일생 속으로 들어간 용득권은 낯설지만 편안한 감정을 느끼면서, 여자에게 돈을 주고 섹스를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여자는 용득권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다시 찾아오라고 하지만, 용득권은 다음에 한 번 더 갔을 뿐, 더 이상 여자를 찾아가지 않는다. 이유는 죄책감이 들어서라고, 용득권은 말한다. 그가 성매매 산업의 구조적 모순과 희생물로 전락한 성매매 여성의 처지를 얼마나 깊이 아는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가 막연하게 느낀 죄책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를 생각하면, 많은 남성들이 본능적으로 여성의 성상품화, 성매매에 대해 죄의식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금 상황-자본주의 체제와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 체제-에서 남성은 '남자다움'과 체화된 가부장제 의식으로 여성의 성상품화, 성매매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똑똑똑]은 친구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수도관이 얼지 않도록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의미하지만, 더 내밀한 곳에서는 엄마에 대한 안부인사와 방석집에서 만난 동향의 여자의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옥탑방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데, 안부전화를 한 엄마와 다투고 기분이 좋지 않다. 그때 친구가 찾아오고, 멀리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다. 가진 돈을 다 쓰려고 친구는 '좋은 데'를 가자고 택시기사에게 말하고, 그들은 철거 직전의 허름한 방석집에서 옷을 모두 벗고 '맥주와 섹스'를 두당 10만원에 거래한다. 그곳에서 만난 여자는 '나'와 동향이고, 무엇이든 만화로 그린다는 말을 들은 여자는 이런 장면은 그리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독자는 그렇게 말하는 내용까지를 포함해 그곳에서 오간 대화를 '관음'한다. 그렇게 친구는 쓰던 밥솥을 남기고 떠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섹스를 한 술집여자와 엄마를 생각한다. 그리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슬퍼서 약간 눈물을 흘리는데, 그건 '나'의 복잡하고도 서글픈 마음을 드러내는 진심으로 보인다. [막차]는 막차 시간을 다르게 알려준 여자 후배와 얽힌 이야기다. 서울에 살던 영수는 월세로 살던 집에서 월세가 밀려 보증금까지 날리고 잠시 고향집으로 내려온다. 그는 만화를 그리고 있지만, 형편이 좋지 않다. 학교 후배인 정태와 어울리며 졸업한 대학도서관에서 만화 작업을 하는데, 우연히 후배 선미를 만난다. 공대에서 여학생이 드물기도 하지만, 선미는 미인이라 인기가 많다. 세 사람은 자주 어울리며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데, 하루는 정태가 엄마와 함께 외갓집에 가고, 영수와 선미는 술을 마신다. 막차는 밤 11시라고 선미가 알려주고, 그 시간에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려도 막차 버스가 오지 않자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간다. 영수는 선미에게 키스를 하지만 선미는 거절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정태는 영수가 선미와 술을 마셨다는 걸 알고 '형은 씨발놈'이라고 욕하고 싸운다. 영수는 치킨집을 처분한 엄마에게서 돈을 받아 다시 서울로 올라오고, 가끔 선미에게 연락하지만 선미에게서는 답이 없다. 영수는 선미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선미의 육체만 원한 걸까. 남자는 사랑과 섹스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또는 일시적인 충동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정태의 말대로, 영수는 서울에 애인이 있으면서도 선미를 집적대는 것이다. 이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고, 선미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선미는 그걸 느꼈고, 다시는 영수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국화차와 소주] 만화가 영수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우연히 블로그를 방문한 팬이라는 여성 구외영을 알게 되고, 출판사에서 일하는 구외영은 영수에게 일을 부탁한다. 두 사람은 인사동에서 만나 국화차를 마시고, 술을 마신 다음, 구외영의 집에서 술과 함께 섹스를 하려 하지만, 구외영이 사귀는 남자와 전화를 하는 사이 영수는 집으로 돌아온다. 영수의 여자친구는 연락이 닿지 않던 영수를 추궁하고, 구외영과 있었던 일을 미루어 짐작한다. 영수의 친구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영수는 오래 전 사귀었던 첫사랑 민주를 떠올리고, 민주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을 두고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구외영에게서 전화가 오고, 혼자 다짐했던 마음과는 달리 택시를 타고 구외영을 만나러 간다. 두 사람은 섹스를 하고, 영수는 지금의 애인과 구외영과 구외영이 만난다는 유부남을 떠올리며 자괴감에 빠진다. 애인 앞에서도 비루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영수는 친구 결혼식에 가는 길에 첫사랑 민주의 연락을 받는다. 자기는 참석하지 못하니 대신 축의금을 내달라는 말이었다. 결혼식에서도 영수는 구외영에게 연락을 하지만, 끝내 구외영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첫사랑 민주 이름으로 한 축의금을 돌려받지 못했으며, 그의 애인과는 결혼을 했고, 이 모든 일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화하지 않은 영수의 일상은 창작이자 고백이다. 독자는 물론 영수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받아들이고, 작가 역시 영수의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고,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감정, 미워하는 감정이 냉온탕처럼 오가는 것은 욕망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욕망은 비단 나이가 젊기 때문은 아니다. 마영신 작가의 [엄마들]을 보면, 50대의 엄마들이 보여주는 적나라한 욕망의 퍼레이드는 나이와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게 된다. [예쁜 여자]는 구외영의 시각이다. 모텔에서 몰래 빠져나간 영수를 모른 체하는 구외영은 출판사에서 기획회의를 하며 편집장과 대립한다. 편집장은 유부남이고, 그와 내연관계지만, 남자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어렵게 대학을 마치고, 출판사에 임시직으로 들어갔다가 정식 사원이 된 것도 편집장의 배려였고, 편집장은 출판사 사장의 아들이며, 그 남자는 다른 남자와 달라보였다. 그건 물론 구외영의 착각이지만, 구외영은 자신을 합리화한다. 갑자기 병원에 입원한 엄마를 만나러 고향으로 내려간 구외영은 집에서 숨겨놓은 엄마의 일기를 발견하고, 과거를 떠올린다. 자기만의 방이 없었던 어린 시절, 제멋대로 사는 아버지와 자기 몸을 더듬던 오빠의 손길, 늘 고생하는 엄마의 삶이 지겨워 집을 떠나 서울로 왔지만, 그 역시 삶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온 엄마의 인생, 유부남인 편집장의 노리개처럼 전락한 자신의 삶이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숙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극복할 의지도, 최소한의 디딤돌로 없는 구외영으로서는 슬픔과 비애만을 느낄 뿐이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구외영은 출판사에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기로 결심한다. 부모의 삶도, 자신의 삶도 비난하거나 비난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누구의 삶도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 문화
    • 만화
    2021-11-18
  • 영순이 내 사랑
    제목 : 영순이 내 사랑 작가 : 권용득 출판 : 새만화책 영순이는 남자다. 게다가 무섭게 생겼다. 게다가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하다. 그의 친구는 미국이다. 미국이는 혼혈이고 기타를 잘 친다. 좋아하던 여자 정자는 미국이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 월세는 밀리고, 돈을 벌 방법은 모르겠고, 세상은 답답하다. 죽는 것 조차 한심하다. 맨주먹에 열정 뿐인 젊은이들은 세상과 맞서 싸우려 하지만, 그 대상은 모호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열심히 살려고, 뇌물까지 줘가며 애를 쓰지만 돌아오는 것 사기와 비웃음뿐. 청춘이 아름답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니, 거짓말이지만 진짜라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더 비참하니까. 권용득의 첫 장편 만화인 이 작품은 제작지원금을 받아 창작되었고, 이 만화를 계기로 권용득은 진짜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작가 스스로 말한다). 이 작품과 비슷한 수준의 외국 그래픽 노블이 한국에 소개되었다면, 아마도 이 작품보다는 훨씬 많은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외국의 그래픽 노블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으며, 오히려 뛰어난 작품성을 갖춘 작품이지만 단지 한국의 만화가라는 이유 때문에 홀대를 받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권용득 뿐 아니라 박건웅, 김한조, 앙꼬, 심흥아 등을 비롯해 많은 작가주의 만화가들이 놓인 현실이기도 하다. 만화를 그려 배를 곯지 않는 것이 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화를 그려서 갑부가 되는 일본처럼까지는 아니어도, 직장인들보다는 수입이 많아야 할 것이고, 그런 사회가 '문화'를 존중하는 사회이며,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권용득은 이 작품에서 '톤'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만화가라면 누구나 쉽게 톤의 유혹을 받을 것이고, 그것이 작업도 빠르고, 보기에도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용득은 펜만을 사용했다. 무수히 많은 선이 들어가는 작업에도 펜으로만 작업했기에 드러나는 손맛이 보인다. 공장 만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작가주의 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한국은 만화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지만, 이렇게 좋은 작가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어 감사하다. 이 작품은 2부로 구성되었으며, 1부 3편, 2부 5편으로 모두 8편의 단편 연작으로 구성하고 있다. 1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영순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에서 해고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순이는 인상이 험악하다. 머리는 빡빡 밀었고, 체격도 크다. 사람들은 영순이가 말하면 경계하고, 겁을 먹는다. 그건 영순이가 바라는 바가 전혀 아니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영순이를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영순이의 인상이 험악하다며 영순이를 해고하는 편의점 사장의 인상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렇게 일자리를 잃고,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지만 그것도 욕을 먹는다. 월세가 밀려서 쫓겨나기 직전이고, 사귀던 정자는 헤어지자고 말한다. 영순이에게는 총체적 난국이 닥쳤다. 길에서 할머니 젖가슴을 훔쳐봤다는 누명을 쓰고 할머니에게 얻어 맞기까지 하면서, 영순이라는 인물을 소개한다. 1부의 시작만으로도 이 만화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작가의 펜선의 핍진함과 굉장한 밀도는 인물의 대사-말풍선-뿐 아니라 그림 자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는 힘이 있다. 이별하자는 정자는 머리를 모히칸 머리로 깎았고, 입고 있는 티셔츠에 PISS라고 새겨 있다. 이 단어는 '오줌'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이 단어가 들어가는 용법으로 pissed off, piss someone off, piss off 등으로 쓰는데, '빡치다', '빡치게 하다', '꺼져' 같은 의미를 갖는다. 작가가 정자의 티셔츠를 클로즈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순한 풍자일 수 있고, 정자가 좋아한 사람이 정작 영순이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면, 이 단어는 영순이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보인다. 2화 '외계인 등장'에서 영순이는 치매를 앓고 있는 할아버지와 친구 미국이와 함께 살고 있다. 영순이는 할아버지를 '우리 용득이'라고 부른다. 어린아이같은 할아버지는 밥 달라고 칭얼거리고, 기저귀에 똥을 싼다. 영락 없는 아기다. 영순이는 미국이를 찾다가 옷장에서 벌거벗은 미국이와 정자를 발견한다. 영순이는 충격을 받아 집을 뛰쳐나가고, 어느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자살하려 하는데, 그때 자신을 영희라고 불러달라는 외계인을 만난다. 그 외계인은 평범한 여자로 보이고, 영순이가 가수라는 걸 알아주고, 응원한다. 영순이는 조금 전 죽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고,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고 노래한다. 3화 '영순이와 미국이'는 집을 뛰쳐나간 영순이를 걱정하며 미국이와 정자가 헤어지고, 미국이가 과거를 회상한다. 영순이 애인이었던 정자를 처음 만났을 때, 셋이 항상 어울려 다니며 놀지만, 어느 날, 정자는 머리를 모히칸처럼 깎고 나타나 미국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섹스를 하다 영순이가 집에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옷장 속으로 숨는다. 정자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미국이는 골목 담벼락에 서 있는 영순이를 만나고, 영순이도 자신이 질투심 때문이었다는 걸 인정한다. 두 사람은 다시 친구로 돌아오고, 마침 첫눈이 나린다. 2부에서는 본격 사건이 펼쳐진다. 1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월세가 밀린 영순이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써놓고 나간다. 영순이와 미국이는 고부장이 소개한 '벌떼촌 성인 나이트클럽'을 찾아가 오디션을 보지만, 락과 펑크도 구분 못하는 클럽 부장에게 쫓겨난다. 실망한 두 사람은 터덜거리며 거리로 나서고, 미국이는 기타를 영순이에게 맡기고 어디를 다녀오겠다고 하고, 영순이는 월세 걱정을 하며 집에 돌아오는데, 정작 주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월세는 이미 영순이 애인이 다 냈다고 하면서. 영순이는 애인이라면 정자가? 하면서 방으로 들어오는데, 거기에는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말한 영희가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 여기부터 미국이가 고부장을 찾아가서 벌어지는 사건과 영희가 영순이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영순이가 라디오헤드의 Creep을 미국이의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면이 몽타주 기법으로 펼쳐진다. 미국이는 자신들을 속이고 비웃는 고부장을 패죽이고 싶었지만 참는다. 그러다 고부장에게 변기뚜껑으로 맞아 쓰러지고, 영순이는 노래를 절절하게 부르고, 영희는 사라진다. 영순이가 부른 노래 Creep은 노래 가사가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어서, 이 가사를 음미하는 것은, 영순이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네가 내게 다가왔을 때 너의 눈을 볼 수 없었어 너는 마치 천사같아 너의 살결은 날 눈물짓게 해 넌 깃털처럼 떠다니지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내가 특별했으면 좋았을텐데 너는 특별해 하지만 난 병신이지 난 이상한 놈이야 내가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난 이곳이 어울리지 않아 상처가 된다해도 상관없어 자제를 할 수 있엇으면 좋겠어 난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어 난 완벽한 영혼을 갖고 싶어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내가 주변에 없더라도 넌 정말 특별해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난 병신이야 난 이상한 놈이야 내가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난 이곳이 어울리지 않아 그녀가 도망친다 그녀가 또 도망치고 있어 그녀는 도망가네 널 웃음짓게 하는 모든 것 넌 정말 특별해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난 이상한 놈이야 난 병신이야 노래 가사는 영순이의 처지와 심리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영순이는 영희가 외계인이라는 걸 알지만, 그녀는 아름답고, 자신을 이해하는 영희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만, 감히 말을 꺼낼 처지가 아니다. 자신은 외모도 험상궂고, 가진 것도 없으며,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한심한 백수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영희와 자신의 거리가 너무 멀어 마음이 아프다. 절절하게 부르는 영순이의 노래는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움직인다. 2화 'Raging 영순'에서 영순은 영자가 달려와 미국이가 응급실에 있다고 알려주고, 둘은 미국이가 입원한 응급실로 달려간다. 미국이가 혼수상태인 걸 본 영순이는 고부장을 찾아가고, 그 자리에 조사장과 함께 있는 고부장에게, 미국이에게 사과하라고 말하지만, 고부장은 비웃기만 한다. 배경 설명은 없지만, 이 자리에 고부장, 조사장과 함께 강회장 심부름꾼도 등장하는데, 뒷부분으로 가면서 이들의 존재감과 역할이 커진다. 영순이는 화가 치솟고, 고부장을 창밖으로 밀어버린다. 사건이 본격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화 '외계인의 행방(1)' 미국이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다. 영순이가 갔던 나이트클럽에서는 여러 명이 죽은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형사는 CCTV를 보면서 영순이가 여러 명과 싸우는 장면을 보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영순이는 미국이와 영자를 만나 고부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순이 마음은 고부장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때 불쑥 나타난 영희가 영순이의 살기를 잠재운다. 실제 고부장을 죽인건 강회장 심부름꾼이라는 해결사였다. 4화 '외계인의 행방(2)' 경찰은 영순이 집을 찾아와 치매 할아버지와 실랑이를 하다 결국 영순이를 체포한다. 경찰은 강회장을 찾아가 고부장이 횡령한 장부를 보여준다. 강회장은 해결사에게 전화해 사건을 마무리하라고 명령한다. 경찰에 잡혀가던 영순을 구한 건 미국이었다. 미국이는 꾀병을 부려 영순이를 구하고, 영순이는 현장 목격자인 영희를 찾으러 나선다. 5화 '다시, 사노라면' 영희를 찾아다니던 영순은 경찰을 만나고, 경찰의 설득으로 함께 경찰서로 가려는 순간, 해결사가 나타나 경찰을 때려눕히고 영순과 싸운다. 칼을 든 해결사와 죽음의 사투를 벌인 영순은 해결사를 쓰러뜨리고 자신도 정신을 잃는다. 영순은 영희를 만나고, 잘 참고 살아온 영순을 격려하고 떠난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영순은 진범을 잡고 사건이 해결된 것을 알게 된다. 밀린 월세를 내준 것도 영자였고, 두 사람은 '사노라면'을 부르며 새로운 날, 그러나 달리 바뀔 것이 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영순이와 미국이는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청년들이다. 그들이 술집에서 노래를 하는 것도 직업이라고 보긴 어렵다. 영순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도 인상이 험상궂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한다. 20대 청년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그들 자신도 알 수 없겠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매우 불평등하고, 자본의 착취가 격렬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청년들이 집단으로 사회에 저항하고,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청년의 권리를 쟁취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지만, 그건 나이 먹은 사람의 바람일 뿐, 변화는 청년 내부에서 일어나 시작해야 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영순이와 미국이, 영자의 삶은 어떻게 바뀔까,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닥친 과제이기도 하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심해수 - 오래된 이야기에 새로운 형식을 입히다
    제목 : 심해수 작가 : 이경탁, 노미영 출판 : 투믹스 심해수 - 오래된 이야기에 새로운 형식을 입히다 아포칼립스는 현실이 되는 순간 세상의 종말이자 멸망이기 때문에, 그것이 미래의 언제라는 예측 불가능함과 미지의 확률이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인류에게 처음, 최초가 있었듯이, 최후, 종말, 멸망의 이야기가 발생하는 것은 필연이다. 다만 인류의 최초가 신화와 전설, 설화였다면 인류의 종말은 인류가 이룬 과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즉 시작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그것은 인류의 초기가 미개했기 때문이었고-종말은 인류의 지성으로 예측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2천 년 전에도 인류가 멸망할 거라는 예언서는 존재했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고 불칼과 화염과 죽음이 땅 위에 가득할 거라고 했다. 고대 사람들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은 자연재해였다. 그들이 들판에서 야생동물과 사투를 벌이던 시기를 지나고, 집단으로 일정한 곳에 움막을 만들고, 농사를 짓고, 야생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와 외부의 위협으로는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지만, 지진, 화산폭발, 용암분출, 비, 바람, 눈, 천둥과 번개 같은 자연재해는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신의 영역에 속했다. 인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떠올렸다. 고대의 아포칼립스와 현대의 아포칼립스는 그래서 근본에서 다르다. 고대에서 바라보는 종말이 이제는 낭만적인 동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현대의 종말이 그리는 세계는 과학적 논리에 바탕한 추론 가능한 세계이기에, 낭만의 요소가 배제된 잔혹한 리얼리즘일 수밖에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처음 만든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에서도 인류의 종말로 세계는 바다 위에 겨우 떠다니는 섬만 남게 된다. ‘코난’에서 지구의 바다화는 인류의 전쟁이 원인이었다. 초자력무기는 대륙을 바다 아래로 가라앉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무기인데, 대륙이 가라앉으면서 발생한 해일로 땅 위에 있던 건물과 사람들도 모두 물속으로 쓸려 내려갔다. [심해수]는 [미래소년 코난]의 하드보일드 버전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라고 볼 수 있다. ‘코난’이 그림부터 이야기 전개가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라면 ‘심해수’는 극사실 묘사를 통해 이 이야기가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한다. ‘심해수’에서 죽음은 일상이다. ‘유니온’에 사는 ‘선민’(이 단어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배에 탄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선택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은 그나마 생존의 위협에서 안전한 편이지만, 난민-작은 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 심해수에게 잡아먹힐지 알 수 없어 늘 공포에 시달린다. ‘심해수’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심해수는 몸집이 매우 거대한데, 현재 심해에서 거대 생물을 발견하거나, 사체가 드물게 바다 위나 해안으로 떠오른 사진을 볼 때, 거대 심해어가 존재한다는 설정은 과학적 상식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심해어들이 왜 바다 위로 올라와 인간을 공격하는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심해어는 여러 종이 보이는데, 게, 뱀, 아귀와 비슷하지만 몸집은 몇십, 몇백배 큰 생물이 인간을 공격한다. 만화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이들 거대 심해 생물의 등장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돌연변이 가능성과 외계에서 유입된 물질에서 돌연변이의 생성을 떠올릴 수 있다. 비슷한 아포칼립스 만화인 [아들의 땅-지피]에서도 지구의 표면은 대부분 물에 잠긴다. 하지만 ‘아들의 땅’에서는 문명을 일으키려는 시도보다는, 인류의 지식과 문명의 발달이 결국 인류의 종말을 일으켰다는 자각으로, 인류가 미개의 단계에 놓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이 강한 내용이다. 생존하려면 동물의 수준으로 야생성을 키워야 한다는 내용은, 인류가 문명을 잃어버렸을 때 당장 맞닥뜨리는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두 아들은 글자로 대표하는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우정, 연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 [괴물-봉준호]에서도 괴물의 출현은 미군이 버린 독극물에서 비롯한 것임을 암시한다. 인류의 종말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때, 외계의 간섭보다는 내재적 원인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는데, 핵폭탄, 핵발전소와 같은 불가역 반응은 물론이고, 지진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도미노 붕괴현상,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도 인류 종말의 가능성을 높이는 현상들이다. 시간적으로, 심해어의 출현은 인류가 자연재해-만화에서 지구는 외계에서 날아온 얼음 유성으로 인해 멸망한다-로 지구가 물에 잠기게 되면서 나타나는데, 그 기간이 불과 100년이다. 그렇다면 100년 사이에 상상할 수 없는 진화적 돌연변이가 일어났다는 뜻인데, 그러려면 매우 극적인 물리적 환경변화가 발생해야 한다. 내재적 환경오염으로 인한 돌연변이는 지구가 물속에 잠기기 전까지 세계 여러나라에서 운용하고 있는 핵발전소와 핵무기, 플루토늄과 각종 독극물, 화학물질이 땅 위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대륙 전체가 물에 잠기면서, 그 위에 남아 있던 인류가 만든 모든 독극물과 화학물질, 방사능물질이 그대로 물속에 녹아들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물고기들이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며 급격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고 이해할 수 있다. 외부에서 유입된 돌연변이 가설은, 우주를 떠돌던 얼음 유성이 태양계 밖을 떠돌다 우연히 태양계 내부로 들어오면서 중력에 의해 태양 가까이 다가오다 달과 충돌하고, 그 파편이 지구로 떨어지면서 대기권으로 진입한 얼음 파편이 녹아 비가 되어 내리고, 얼음 속에 들어 있던 외계의 물질 속에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두 가지 가설로 심해어의 돌연변이를 설명한다해도 왜 하필이면 심해어들만 극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가에 대한 설명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나마 가능한 설명은, 유해물질과 외부의 바이러스가 바다의 가장 아래쪽,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심해 생물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심해수’는 고전적 의미에서 말하는 ‘영웅설화’의 구조와 서사를 답습한다. 영웅설화의 구조는 1)고귀한 혈통, 2)출생의 비밀, 3)비범한 능력, 4)어려서 고아, 5)죽을 고비를 넘기고 은인을 만남, 6)성장하여 다시 위험에 빠짐, 7)위기를 극복하고 영웅으로 거듭남이 핵심인데, ‘심해수’의 주인공 보타는 이 영웅설화 구조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물이다. ‘심해수’가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미래의 이야기지만, 그 구조는 오래된 이야기에서 가져왔고, 우리가 만든 수많은 이야기의 서사 구조는 영웅 설화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야기’를 소비하는 대중-수천년 전과 지금의 대중 모두-의 심리적 기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영웅 서사는 대중의 욕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몇천년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상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대중의 영웅 서사에 관한 욕망이 가장 극적이고, 격렬하게 투사된 것이 신의 존재다. 영웅은 신을 대신하거나,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로 투사되었으며, 대중의 욕망을 대리하는 존재로 작동한다. ‘심해수’에서 보타와 리타의 아빠는 작은배를 타고 바다 위를 떠돌며 두 아이를 돌보는 전천후 영웅이다. 적어도 보타와 리타의 입장에서는. 엄마에 관한 기억이 없는 두 아이는, 아버지가 엄마 역할까지 해야하는 한부모 가정에서도 결핍을 겪지 않고 자란다. 그 힘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하지만 보타의 가족이 탄 배가 심해어의 공격을 받고,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아버지는 두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위대한 전사, 작살꾼의 능력을 발휘한다. 보타는 아버지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본능으로 느끼지만, 정확한 실체를 알지 못한 상태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고아가 된 보타와 리타는 바다 위로 솟은 작은 빌딩에서 살아가려 하지만, 심해어에게 끊임없이 공격당하면서 위험한 상황에 놓이고, 죽을 위기에서 갑자기 나타난 여자 작살꾼 카나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심해어’에서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카나의 외모인데, 이는 나중에 같은 여성 작살꾼인 소니아의 외모와도 일맥상통한다. 즉 여성의 외모를 선정적으로 그리고, 심해어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카나의 행동을 외설스럽게 표현하면서, 이 만화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성을 상품화한다는 비판에서 비껴가지 못한다. 카나는 ‘유니온 부산’에서 가장 뛰어난 작살꾼인데, 작살꾼으로는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심해어와 싸우는 작살꾼은 고래를 잡는 포경선에서 고래의 급소에 작살을 던지는 전문 작살꾼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데, 심해어의 크기가 가장 큰 것은 흰긴수염고래보다 큰 것으로 그려진다. 보타의 아빠가 마지막으로 잡은 심해어가 바로 심해어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포악한 놈으로 켄트라시라는 이름의 50미터짜리였다. 이런 심해어를 혼자 해치웠다는 것을 최고의 작살꾼이라는 카나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시 카나의 외모로 돌아가면, 카나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매우 선정적인 외모를 지녀야 한다는 건, 만화 속 세계가 아닌, 만화를 소비하는 독자의 욕망(주로 남성 독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예술이 독자에게 아부하는’ 방식이며, 작가가 현실과 타협하고, 자신의 신념을 일정부분 포기하는 것으로 비친다. 그 근거로, 같은 작살꾼 가운데 남성의 외모는 철저하게 제복으로 감싸여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면, 작살꾼 가운데 최고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우연히 여성이고, 그 여성이 유일하며, 가장 선정적인 외모를 하고 있다는 설정은 작위적이다. 여성 작살꾼의 활약을 그린다면, 적어도 작살꾼들 가운데 일정 비율은 자연스럽게 여성이어야 한다. 여성을 뛰어난 전사로 그리는 것이 혹시라도 ‘페미니즘’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여지길 바라는 작가(들)의 의도였다면, 그것 역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외압에 굴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들)가 여성을 유일하게 최고 실력자 작살꾼으로 그려야 할 납득할만한 이유,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의 필연성을 만들지 않으면, 대중성을 염두에 둔 창작의 태만함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아포칼립스에서도 대중은 안전한 곳을 찾는데,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같은 존재로 ‘유니언’을 들 수 있다. 유니언은 거대한 배의 집합체이며 그 자체로 움직이는 도시이자 국가같은 존재다. 보타와 리타가 구조되어 간 곳도 ‘유니온 부산’으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앞서 작살꾼들이 제복을 입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 유니온은 작은 국가여서 누군가 권력을 휘두르며, 계급이 존재한다. 보타와 리타가 ‘유니온 부산’에 승선하고, 곧 두 아이를 둘러싼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카나의 비밀도 함께 드러나는데, 카나 역시 영웅 서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보타의 영웅 서사를 완성하는 멘토의 역할을 한다. ‘유니온 부산’에는 권력을 휘두르는 계급이 존재한다. 작살꾼은 봉건시대 일본에서 영주를 위해 일하던 ‘사무라이’와 매우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데, 작살꾼을 다스리는 계급은 누구인지 아직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유니온 부산’에 살고 있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경찰이자 감시자이자 재판관 역할을 하는 작살꾼들의 폭력-모든 권력은 폭력이므로-에 순응한다. 작살꾼들이 입은 제복은 ‘권위’와 ‘계급’을 상징하며, 이는 국가주의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작살꾼들의 권력 관계와 보타의 아버지가 반역자로 몰리는 상황은 만화 [설국열차]에서 계급 관계를 보여주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설국열차’ 역시 아포칼립스 이후 지구 표면을 도는 열차가 독립한 국가처럼 작동하는데, 이는 ‘유니온 부산’이 놓인 상황과 같다. 게다가 기차에 매달린 객차는 수직적 관계를 드러내고, 기차의 앞쪽부터 높은 계급에서 낮은 계급으로 이동한다. ‘유니온 부산’에서도 거대한 선체의 상층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지배 권력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타의 처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체의 가장 낮은 곳에서 배관공으로 일하게 되는 보타는 배관공 노동자들과 함께 낡은 파이프를 교체하는 작업을 하는데, 배의 밑바닥, 낡은 파이프, 더러운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는 이들이 피지배계급임을 상징한다. 이곳이 계급이 지배하는 상황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는 보타와 리타를 난민으로 받아준 관리자가 한 말에서 나타난다. 그는 난민일 때는 심해어에게 죽을 위험에 놓이지만, ‘유니온 부산’에서는 심해어의 위협보다는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돈은 물물거래의 수단이지만, 화폐 거래는 거래하는 물품이나 서비스에서 ‘이윤’ 즉 부가가치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아포칼립스 이후에도 여전히 ‘자본’의 힘은 인류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타와 리타가 레비아탄 슬레이어 마테온의 아들과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니온 부산’에서 있었던 10년 전 사건이 새롭게 떠오른다. 이와 함께 보타와 리타를 구한 카나의 과거도 오버랩되고, 이들이 서로 예사롭지 않은 인연으로 만났다는 걸 알게 된다. ‘유니온 부산’의 작살꾼들은 마테온이 자신들 조직을 배반하고 ‘유니온 부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라고 말하며 보타와 리타를 살해하려 한다. 이 무렵에 이미 보타는 자신의 아버지 마테온이 ‘유니온 부산’에서 가장 뛰어난 작살꾼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전설로 알려진 6성 작살꾼임을 알게 된다. 현재 가장 뛰어난 작살꾼인 카나가 3성 작살꾼임을 볼 때, 6성 작살꾼은 믿기 어려운 기록이다. 혼자 600마리의 심해수를 해치웠는데, 그런 영웅이 ‘유니온 부산’에서 탈출할 때는 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카나와 보타, 리타도 다시 ‘유니온 부산’에서 탈출한다. 이들의 탈출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폭력에 의해 축출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유니온 부산’은 하나의 국가로, 계급 사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보타와 리타는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의 자식들이고, 카나는 그런 반역자의 자식을 도와주는 사람이어서 체제에 위협이 되는 인물을 제거하는 집단의 폭력은 필연적 결과를 드러낸다. 체제-지구를 뒤덮은 바다는 단일한 시장으로 통합된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를 상징한다-위에서 존재하는 ‘유니온’은 국가를 은유하고, 작은배로 바다를 떠돌며 어떻게든 ‘유니온’으로 합류하려는 사람들은 난민이자 피지배계층이다. 이들은 ‘유니온’에 올라 입선 심사를 받고-이민 심사와 같다-합격한 사람만 ‘유니온’에 남을 수 있고, 불합격하면 다시 작은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한다.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은 보호해 줄 장치가 사라지고, 심해수에게 잡혀먹힐 확률이 높아진다. ‘심해수’는 현상적으로 바다의 돌연변이 괴물이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사회 체제의 구조 그 자체로 봐도 크게 무리가 없다. 바다(체제)에 사는 구조적 착취나 불평등이 괴물로 변해 난민을 잡아먹는 것은 이 만화가 의도했거나 하지 않았더라도 독자가 읽어낼 수 있는 메타포다. 아포칼립스를 그리고, 심해수와 죽음의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많아도, 이 만화에서 ‘가족’은 등장인물들이 가진 상처이자 희망이다. 보타와 리타는 심해수에게 아버지를 잃었고, 카나 역시 부모가 심해수에 잡혀먹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고아가 된 카나를 돌봐준 것은 ‘유니온 부산’에서 작살꾼으로 활약하던 보타의 아버지 마테온이었고, 세월이 흘러 마테온의 아들과 딸을 구한 것은 카나였다. 카나는 ‘유니온 부산’을 포기하면서까지 두 아이를 지키고, 보타와 리타는 카나를 누나나 언니처럼 여긴다. 가족의 부재는 그 자체로 공포다. 카나, 보타, 리타는 모두 어려서 부모를 잃는다. 생물학적 부모의 부재를 메우는 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어른들의 보살핌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나마 있던 울타리에서 쫓겨난다. 현실에서는 당장 죽음과 맞닥뜨리는 상황에 놓여 생존 본능이 앞서지만, 이들이 새로운 세계-세 명은 극적으로 살아나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에 도착해 심리적, 육체적 안정을 찾게 되면서, 각자의 내면에 가라앉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다스릴까도 중요한 과제다. 이들의 트라우마는 심해수를 향한 증오와 복수로 드러나지만, 그것은 그들 내면의 현상만을 볼 뿐이다. 보다 근본에서 부모를 그리워하는 결핍의 문제는 이들을 끝까지 괴롭힐 것이다. 카나가 최고의 작살꾼이 될 수 있었던 것과 보타 역시 아버지와 같은 전설적 작살꾼의 재능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유전적 이유보다는 증오와 복수의 감정이 동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슬픔, 외로움, 그리움, 결핍의 감정이 마치 심해수처럼 주인공들의 내면을 할퀴게 될 것이다. ‘심해수’는 스토리 작가, 그림 작가, 배경과 채색 작가가 모두 다른, 협업 구조로 제작하고 있다. 사물과 배경은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인물의 행동은 박진감 넘친다. 레이아웃의 제한을 두지 않는 자유로운 화면 연출로 웹툰의 장점을 살렸다. 캐릭터는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강하게 보인다. 특히 ‘카나’는 귀여운 얼굴에 무서운 전투력을 갖춘 여성으로 그려지는데, 그녀가 거의 나체나 다름없는 외모로 그려지는 것은 일본 만화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는 증거다. 다른 캐릭터 역시 한눈에 일본 만화의 캐릭터와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만화가 뛰어난 연출과 극사실 묘사, 진지한 서사를 다루면서도 그래픽 노블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만화의 핵심인 그림과 서사의 독창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그린 ‘아들의 땅’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림과 함께 앞에서도 언급한 ‘독자에게 아부하는’ 카나의 존재-선정적인 외모와 유일하면서 최고의 실력자인 작살꾼의 위치-는 작가가 구축한 작품 세계의 일부를 허무는 행위로 보이고, 창작의 진지함을 훼손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여성의 나체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몸을 드러내야 할 필연적인 이야기 구조가 아님에도, 선정성을 목적으로 그렸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형식은 내용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다. 작품의 완성도는 뛰어나지만, 본질에서 벗어난 캐릭터와 독창성이 부족하면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독자를 온전히 설득하지 못하게 된다. 만화에서 드러나는 형식과 내용의 문제는 작가에게 ‘작품에 관한 철학의 부재’로 귀결하게 되면서, 작품의 완성도에 흠집을 낸다. 만화가 예술 장르의 하나라는데 동의한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작품에 작가의 철학이 중심으로 자리잡아야 하는건 작가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이 아닐까. 그런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심해수’는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나쁜 친구
    제목 : 나쁜 친구 - 앙꼬 작가 : 앙꼬 출판 : 창비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같지만, 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마다 삶의 밀도는 다르다. 얼마나 핍진하게 시간의 결을 살아왔는가 가늠하는건 쉽지 않지만, 밀도가 높을수록 시간이 지나면서 삶의 순도 또한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삶을 구성하는 ‘밀도’와 ‘순도’는 무엇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도스또예프스키는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당하고, 청년일 때 혁명가였지만, 그는 사형 직전에 황제의 명령으로 목숨을 건졌고, 나이 들어 도박중독자가 되었다. 빚더미에 앉아 평생 빚독촉을 받으며 써내려간 소설은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그가 사형 직전 살아남았을 때, 그의 삶은 강한 밀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고흐, 카프카, 천재 이상을 비롯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의 삶은 짧지만 강렬하다.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운 외부 환경과 내면의 욕망이 갈등을 빚으며 천재성을 드러냈다. 백살을 살아도 평범하게 살다 죽는 사람과, 30년을 살아도 역사에 남는 예술작품을 남기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지 천재적 재능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어떤 삶을 살든 자신의 내면에서 발산하고픈 강렬한 욕망을 표출하고, 여러 삶의 방식을 포기하며,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찾고 싶거나, 만들고 싶은 모습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스스로에게 묻을 때, 자신의 존재는 구체적 모습을 갖춰갈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앙꼬의 ‘나쁜 친구’는 청소년 시기 짧은 몇 년을 남다르게 보낸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면서, 과거 자신의 삶이 어떠한가를 객관의 눈으로 담담하게 바라본다. 그 과거의 시간은 평범하지 않았고, 짧지만 강렬하게 기억에 새겨졌다. 그 시간은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지나간 삶이지만, 그 짧은 시간이 주인공 진주에게는 미래의 자신을 만들어 갈 자양분이 되었다. 앙꼬는 그의 책 ‘열아홉’의 표제작 ‘열아홉’에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고등학생 경진이는 기성세대가 규정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비행청소년’이다. 이 단어로 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폭력인가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진짜 문제 집단이 누구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관습과 이해의 틀 안에서 청소년을 규정한다. 분류하고, 꼬리표를 달고, 인격을 재단하고, 품성을 평가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기성세대가 정상 또는 합격으로 평가한 청소년은 시험성적이 좋고, 부모와 교사의 말을 잘 듣고,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기성세대)가 요구하는 관습과 제도를 내면화한 사람들이다. [나쁜 친구]는 세 편의 단편으로 묶은 옴니버스 연작만화다. ‘열아홉’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로, 20대가 된 주인공 진주는 새벽 고요한 어둠 속에서 과거를 들여다본다. 진주(‘열아홉’에서는 경진)는 중학생 때 ‘노는 아이들’ 가운데 하나인 정애와 친구가 된다. 정애는 여학교에서 ‘일진’이었으며, 술과 담배, 고등학생 남자 친구를 사귀는 ‘날라리’, ‘양아치’였다. 그들은 평범한 학생들을 괴롭히고, 때리고, 돈을 뜯고, 밤에는 빈집에 모여 술을 마시며 논다. 그들은 자기의 행동에 죄책감이 없다. 진주와 정애에게 ‘왜?’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묻는 건, 왜 숨을 쉬고, 왜 밥을 먹으며, 왜 화장실에 가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삶을 방기한 진주, 정애 같은 청소년을 올바로 이끌지 못한 사회와 구조와 기성세대에게 있는 데, (그 안에 가정과 부모도 있다) 정작 기성세대는 자신의 무능과 가부장적, 제도적 폭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모든 책임을 진주나 정애에게 뒤집어씌운다. (진주와 정애가 후배들에게 휘두른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알 수 없는 일들’은 진주와 정애가 만나고, 술, 담배를 하며 학교생활에 관심이 없던 두 소녀가 가출해 술집에 다니는 친구를 만나 나이를 속이고 술집에 취직하는 이야기다. 진주는 아버지에게 맞아서 머리가 찢어지고, 몸에 멍이 들고, 팔다리도 상처투성이다. 정애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시달리고, 엄마는 가출했다. 불우한 가정에서 부모의 보살핌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이 모두 그렇지 않지만, 정애는 나이보다 일찍 세상에 눈뜬다. 두 소녀는 가출해 여관을 숙소로 삼고, 술집에 취직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가혹했으며 난폭했다. 술집에 오는 남자들은 어린 여자를 성적으로 소비했으며, 미성년자라는 걸 알면서도 술집 주인은 소녀들을 돈벌이에 써먹었다. 학교에서는 ‘일진’이었지만, 세상에 나오자 그들은 힘없는 미성년 여자아이들이었고, 돈과 권력 아래 놓인 희생양이었다. 그걸 깨닫는 건 금방이었고, 아버지의 폭력을 감수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들이 학교의 담장 안쪽과 바깥쪽의 공기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심각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애’에서는 학교로 돌아온 진주와는 다르게 정애는 어딘가로 사라진다. 중학교 졸업식 사진에 얼굴이 없는 정애의 삶과 진주의 삶을 돌아보며, 똑같이 자기를 때리는 아버지가 있어도, 진주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의무와 책임감 때문에 엇나간 자식을 체벌하는 것이고, 정애의 아버지는 이유 없는 폭력을 휘둘렀다는 점이 달랐다고 말한다. 진주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여전히, 아니 더 심하게 학교생활을 방기하고, ‘비행청소년’이 되었다. 더 많이 아버지에게 맞고, 학교에서도 선생에게 맞는다. 그러면서도 진주는 자기가 마음 내키는대로 살았다. ‘정애와 나’는 돌아오지 못한 정애를 기억하며, 진주가 정애에게 갖는 죄책감을 그리고 있다. 우연히 버스에서 마주친 정애를 발견하고 말을 건네지 못하는 진주는 친구를 두고 자기 혼자만 어둠에서 빠져나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작가는 청소년 시기의 모습을 돌아보며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는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행동과 그 결과까지가 모두 자신의 온전한 모습이라는 걸 인정한다. 작가도 고백하듯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똑같은 처지에 놓였던 정애와 달리 자신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고, 자기를 믿고 기다려준 부모와 형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작가는 직간접 경험과 상상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조합해서 보여줄 때 설득력을 갖는다. 앙꼬의 만화 ‘나쁜 친구’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상상력으로 창작한 것보다 더 묵직하고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건, 이 이야기가 과거를 미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주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가의 크기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맞아서 머리가 찢어지고, 선생에게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어 학교에 경찰이 출동할 정도가 되어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덤덤함은 그가 일부러 가지려는 태도가 아니라, 그의 내면 세계가 그렇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작가 ‘앙꼬’는 작품 속에서 드러내지 않지만, 학교 생활에서는 일탈하면서도 그가 진짜 좋아했던 그림 그리기는 숨 쉬는 것처럼 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손에서 연필을 놓지 않고, 청소년 시기를 거치면서 매우 높은 밀도로 그림을 그렸다. 20대의 ‘앙꼬’가 그린 그림은 긴 시간 그림을 그린 노인의 선처럼 노련하고, 깊이가 느껴진다. ‘앙꼬’는 친구들에게 그림을 그려 보여주고, 자신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잘 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혼란하고 불투명한 청소년 시기를 겪으면서 ‘앙꼬’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연필과 노트는 그의 삶을 지탱한 유일한 희망이자 힘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이 작품으로 앙굴렘에서 ‘새로운 발견상’을 받은 것은 이야기의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다. 작가주의 만화, 그래픽 노블로 분류할 수 있는 하나의 장르에서도 리얼리즘의 세계를 깊이 있게 보여준 앙꼬의 만화는 작가의 경험과 세계관을 세계의 독자가 공감했음을 확인했다. 형식과 내용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는 젊은 작가가 진화하는 모습을 보는 건 독자로서 행운이기도 하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제시이야기
    제목 : 제시이야기 작가 : 박건웅 출판 : 우리나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귀한 자료를 박건웅 작가가 만화로 그렸다. 독립운동은 우리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중국에 임시정부를 설립하면서 본격 시작되었다. 국내에서 하는 독립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이어나가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다른 나라들에게 조선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어도 여전히 독립한 국가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임시정부 활동은 꼭 필요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양우조, 최선화가 그들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훌륭한 인물들이 많지만, 이 젋은 부부는 임시정부에서도 가장 젊은 사람에 속했고, 아기를 출산해 육아를 하면서 임시정부의 일도 함께 하던 흔치 않은 경우였다. 젊은 부부가 첫번째 아이인 '제시'를 낳은 것이 1938년이었고, 이때부터 조국이 광복되어 중국에서 부산에 도착할 때인 1945년까지의 육아 기록이다. 이 책이 특이한 것은, 나라를 빼앗겨 외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가 중국에서도 내전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부부가 함께 육아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결혼도 김구 선생님의 주례로 조촐하게 했으니, 이들 부부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부부임에 틀림없다. 임시정부는 중국의 항주에서 시작해 가홍, 상해, 진강,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기강, 중경까지 옮겨가는데, 중국의 동쪽 끝에서 서쪽 깊숙한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중국 대륙을 전전한다. 그것도 그냥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폭격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건물이 파괴되는 공포의 상황에서 갓난아이를 보살피며 물도, 음식도, 풍토도 맞지 않는 중국 대륙을 전전하는 독립운동가들과 젊은 부부의 이야기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참혹한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도 아이는 태어나고 자란다. 세계의 역사는 지금까지 한 세대 이상 평온한 때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내전이 벌어지고 있고, 사람들이 죽어간다.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지만, 살아가는 일상은 별다를 게 없다. 혁명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은 혁명가들은 많았지만, 마르크스도, 레닌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두었다. 조선의 혁명가들도 인간이고, 조국의 운명이 아니었다면 평범하게 살아갈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당연하다. 작품에서는 어린 제시를 아끼는 젊은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아이와 함께 중국 대륙을 전전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겪고 있는 중일전쟁의 참혹함과 중국 민중의 삶도 보인다. 나라를 가릴 것 없이 전쟁이 발생하면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민중이 가장 큰 고통을 겪는다. 하물며 나라를 빼앗기고 다른 나라를 전전하는 독립운동가들은 어떨까. 그래도 이렇게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남긴 기록이 있어 우리의 어른들이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던가를 알 수 있으니 기쁘고 반갑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
    제목 : 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 작가 : 쥘리 다셸, 카롤린 출판 : 이숲 마그리뜨는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애인도 있고, 직장생활도 하지만, 날마다 일상을 꾸려가는 일이 힘겹다. 20대 후반의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은 매우 단조롭고 규칙적이어서 건조하게 보이지만, 정작 마그리뜨에게는 가장 편안한 삶의 방식이다. 직장에서, 애인과, 이웃과의 소통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자각한 마그리뜨는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고 자폐와 관련한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증상이 아스퍼거 증후군과 매우 비슷하다는 걸 알고는 정식으로 의사와 상담하고 진료를 통해 아스퍼거 자폐인이라는 판정을 받는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언어 지체나 지적 장애가 없는 가벼운 자폐의 일종이라고 정의한다. 1944년 오스트리아의 정신과의사 한스 아스퍼거가 처음 보고 했다는데, 한국에서는 2005년이 되어서야 이 증상이 자폐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아스퍼거 증후군과 관련해 '나무위키'의 내용을 보면, 정신과의사 아스퍼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를 지지하는 의사였고, 정신병자는 물론 유대인, 집시 등 당시 독일의 극우정당이 인종청소를 하려는 정책을 지원했다는 의심을 강력하게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명명한 사람은 정작 아스퍼거 본인이 아니라 영국 의사 로나 윙이었는데, 198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아스퍼거 증후군'을 보고했으며, 로나 윙이 인용한 '칼 융'의 정형화를 비판하면서 미셸 푸코의 책 '정신의학의 권력'으로 이어지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아스퍼거 자폐인은 일상 생활을 하는데 큰 문제는 없지만,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자폐 스펙트럼의 약한 쪽에 속해 있으며, 그동안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좀 별난 사람이라거나, 어딘가 좀 모자란 사람 정도로 취급 받는 사람이 검진을 통해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판정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 작품은 글을 쓴 작가 본인이 아스퍼거 자폐인으로 판정을 받기 전과 받은 이후의 삶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묘사하고 있다. 아스퍼거 자폐인으로 판정 받기 전의 주인공은 자신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사람들과의 소통에 고통받는다. 하지만 스스로 문제를 찾기 시작하고, 상담과 진찰을 통해 아스퍼거 자폐인 판정을 받은 이후부터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알게 되면서 삶에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이 작품이 작가의 경험을 다룬 것이라는 전제로 본다면, 퍽 부러운 부분이 많다. 주인공 마그리뜨는 회사에 다니고 있고, 자신이 아스퍼거 자폐인 판정을 받고, 장애인 등록을 한 다음에도 회사에서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장애인이니까 자신이 업무를 잘 볼 수 있도록 회사의 환경을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프랑스에서도 아스퍼거 자폐인 판정을 받는 것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임을 말하고 있지만, 일단 장애인 판정을 받으면 사회구성원들이 그 장애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편견을 갖지 않고 바라본다는 점은 선진국 문화의 장점이다. 아스퍼거 장애인의 경우,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장애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냥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다. 차라리 장애인이라는 판정을 받으면 당사자도 좋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도 확실한 구분이 되어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만, 장애와 정상의 경계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자신이 아스퍼거 증후군인 줄 모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지나 않을까 생각한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거인의 역사
    제목 : 거인의 역사 작가 : 맷 킨트 출판 : 세미콜론 원제목은 '3Story'다. 세 개의 이야기인데, 한 남자의 삶을 두고 세 명의 여자-엄마, 아내, 딸-가 바라본 기록이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아이의 엄마 마지는 전쟁-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남편에게 독백한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마지의 남편은 전쟁에 참전했고, 그는 전쟁터에서 죽는다. 아이와 둘만 남은 젊은 엄마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애를 쓰지만 심한 우울증에 걸리고, 아이에게 냉담하다. 아이는 해가 다르게 키가 거지고, 비정상적으로 커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지역신문에 알려질 정도로 키가 커져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엄마는 그렇게 우울한 삶을 살다 요양원에서 죽고, 키가 계속 커지는 크레이그는 그 특이한 신체적 특징 덕분에 대학에 입학하고, 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대학을 다닌다. 그곳에서 여자를 만나고, 두 사람은 결혼한다. 키가 너무 커져 입고, 먹고, 자야 할 곳이 남달라야 하는 상태에서 곤란을 겪던 크레이그에게 CIA가 접근한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시대 배경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인데, 이때는 미국이 쏘련과 냉전 상태에 있었던 시기였고,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했으며, 쿠바에 쏘련 미사일이 들어와 미국의 코밑을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와 쏘련 사이의 첩보전쟁이 격렬했던 시기였기도 했다. 미국중앙정보부는 주인공 크레이그에게 접근해 먹고, 입고, 잘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조건은 미국중앙정보부를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던 크레이그는 미국중앙정보부의 제안에 동의하고, 그의 아내 조가 설계한 거대한 집에서 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세계여행을 하고, 사람들 앞에 서서 구경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거대한 인간을 보기 위해 몰려들고, 미국중앙정보부는 겉으로 거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행사를 치르면서 뒤로는 공작을 한다. 하지만 거인의 존재가 더 이상 미국중앙정보부에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판단에 따라 크레이그의 귀에 폭탄을 설치하고 행사장에서 그를 쓰러뜨린다. 설상가상으로 크레이그의 아내 조도 거대한 인간인 남편과의 생활에 날이 갈수록 고통스러워 한다. 그녀는 크레이그 모르게 불륜을 저지르고, 자기 만의 집을 만들어 숨기도 하지만 더 이상 거대한 인간 크레이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낀다. 크레이그는 그런 아내를 바라보면서, 또 자신이 계속 커지고 있으며, 이 상태로는 모두에게 짐이 될 뿐이라는 생각으로 집을 떠나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 크레이그의 딸이 거대한 인간인 아버지의 흔적을 추적하며 그가 숨을 거둔 자리를 찾아나선다. 이미 20여년이 지났기에 거인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여전히 곳곳에 거인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거인이 살던 시카고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이어진 흔적은 미국을 떠나 세계 여러 나라로 이어지고 있었지만 정작 거인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발견하지 못한다. 이 작품이 독특한 점은, 거대한 거인이 등장하는 사회를 미국의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과, 거인 자신의 발언이 아닌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세 명의 여성-엄마, 아내, 딸-의 증언으로 구성한 점이다. 거대한 인간은 '미국'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미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대한 나라임에 틀림없고,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세계의 경찰임을 자처한, 그 존재만으로 위협적인 깡패국가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자신의 조국이 '세계의 깡패'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약소국가에 살고 있고, 미국의 직접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우리나라는 거대한 국가 미국을 깡패국가로 인식한다. 거인이 직접 발언하지 않는 것은, 미국 자신이 발언하는 것은 상황을 객관으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기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미 편견과 왜곡이 전제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주변 사람이 바라본 거인을 판단하도록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거인에게 접근한 것이 미국중앙정보부라는 것은 미국이 세계 여러나라에서 정보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고, 미국중앙정보부는 남미의 여러나라에서 진보적 성향의 정부를 뒤집어 엎고, 군부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거인이 쓰러지는 사건도 미국중앙정보부의 의도였으며, 쓸모가 없으면 가차없이 버리는 냉정하고 냉혹한 태도는 정보전쟁의 특성이자, 미국이 역사적으로 정보전쟁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고, 전쟁을 유발하고, 군사쿠데타를 지원했어도 미국이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미국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고,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다. 결국 거인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 미국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영향력, 정치력, 군사력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고, 패권국가로서의 영향도 줄어들었다. 미국은 여전히 강한 국가지만, 단 한번도 존경을 받는 나라였던 적은 없었다. 오로지 힘으로만 최고의 자리를 유지해왔고,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미국의 태도는 세계 모든 나라에게 두려움은 주었을지언정 '친구'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었다. 그런 과거의 존재를 찾아봐야 세계 여러나라에 미친 흔적들만 있을 뿐, 미국의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는 은유를 발견할 수 있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그림자 소묘
    제목 : 그림자 소묘 작가 : 김 인 출판 : 새만화책 훌륭한 작품이다. 이 작품집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제작지원공모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출판한 작품인데, 작가의 이력이 독특하다. 대학에서 언어학과 회화를 공부했고, 서울애니메이션만화가 전문 과정을 수료했고, 2003년 제작지원공모에 당선되어 이 작품이 나왔다. 그는 만화가가 될 생각이 어려서는 없었지만, 김혜린의 '비천무'를 읽고 만화가가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는 20대 초반에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첫 작품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건, 작가가 주변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성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보통의 만화와 다르다. 만화의 대부분은 잉크와 펜으로 먹선을 그리는데, 이 작품은 콘테와 붓으로 그렸다. 작가는 2년 동안 이 작품을 그렸는데, 그래서인지 한컷 한컷이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그래픽노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가를 따진다면, 당연 그림이다. '그래픽'+'노블'이란 말처럼, 그래픽이 노블에 선행한다. 아주 단순한 예만 들어도 알 수 있는데, 그래픽노블 가운데 '도착'이라는 작품이 있다. '숀 텐'이 그린 작품인데, 여기에는 문자가 없다. '이야기'는 있지만, '문자'가 없고, 오로지 그림으로만 완성되는 작품도 그래픽노블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은 그래픽노블을 보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그림은 뚜렷한 개성을 보인다. 그래픽노블에서 흑백 그림은 무수히 많은데, 흑백 그림이라도 다 같은 흑백이 아니라는 걸 이 그림은 보여준다. 연필로만 그린 그래픽노블도 많다. 연필의 검은 선이 명암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흥미로운데, 잉크의 먹이 완전한 검은색이라면, 같은 검은색이라도 붓으로 표현하는 검은색의 농담은 연한 회색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단계의 무채색을 표현한다. 이 작품은 콘테의 질감이 흑백의 단조로움을 상쇄하며 깊은 흑백의 명암을 표현하고, 붓선의 자유로움과 붓으로 그린 먹선의 다양함이 흑백의 멋을 잘 드러내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흑백이지만 이 작품은 '빛'을 그리고 있다. 즉 깊거나 얕은 어둠을 드러내는 방식은 곧 빛의 밝기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작품에서도 '빛은 이미 그림자를 포함하고 있어'라는 말이 나오는데, 화실에서 정물화를 그릴 때, 그림자가 없는 그림은 깊이가 없다는 화실 선생님의 말이다. 이야기는 두 편의 단편이지만, 두 편은 독립된 이야기면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시골에 살던 주희는 이모와 함께 서울에 살게 된다. 전라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하는 주희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서 서울에서 공부하며 그림 공부도 함께 하고 싶다. 큰 길에 있는 크고 유명한 화실을 마다하고 골목에 있는 작은 화실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그 화실 앞에 해바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골의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살던 주희는 서울의 복잡하고 시끄럽고 어지러운 길거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길을 잃곤 한다. 자기만의 그림 지도를 그려 길을 잃지 않게 되고, 그 그림은 거리에 있는 나무와 화분과 담장의 나무와 꽃을 그린 것이다. 살아 있는 식물을 그림으로 그려 지도를 만든 주희의 마음은 도시의 복잡하고 어지러운 거리를 고향에서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는 주인공은 따돌림을 당한다기보다 자신이 다른 친구들에게 관심이 없다. 점심 때 도시락도 같이 먹자는 친구들의 말을 거절하고, 체육시간에는 다른 친구들이 상대를 하지 않아 외톨이가 된다. 친구도 없고, 늘 혼자 다닌다. 그러다 교실에서 전학 온 주희를 발견하고, 두 사람은 서로 안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전편에서 주희가 길거리에서 자동차와 부딪칠 뻔한 일이 있는데, 그때 스케치북에서 그림 한 장이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고, 그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본 사람이 주인공이었다. 주희는 그 아이를 눈여겨 보았고, 교실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고, 주희는 그 아이의 존재감을 느끼고, 주인공은 주희가 자신을 알아본 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자신에게만 그림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주희를 만남으로써 자신에게도 그림자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다. 두 여학생의 만남은 도시적이지 않다. 주희가 갖고 있는 풍요로운 감성과 따뜻한 마음은 삭막한 도시에서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그의 구수한 사투리는 도시의 삭막함과 다른 시골의 정서를 표현한다. 그림자가 없고,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던 주인공도 주희를 만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낀다. 우정은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똑똑, 리틀맨
    제목 : 똑똑, 리틀맨 작가 : 체스터 브라운 출판 : 미메시스 작가의 초기 작품을 모은 단편집. 여기 실린 작품들은 작가의 나이 20-35살 사이에 그린 작품들이다. 모두 27편의 짧은 만화가 실렸는데, 작가의 상상력이 독특한 시각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만화는 거의 모두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작품집에서 주목할 만한 사회적 발언을 한 내용이 있다. '반 검열 선전'의 작품은 예술 작품의 검열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여기 등장하는 두 사람은 캐나다 총리와 그의 부하인데, 두 사람의 모습이 기괴하다. 총리는 남자의 모습인데 가슴은 여성의 가슴을 하고 있고, 그의 부하도 여성의 가슴에 남성 성기를 길게 꼬리처럼 끌고다닌다. 이들은 벌거벗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 대화는 아래 내용이다. -교회 단체에서 포르노그래피를 금지시켜 달라는 편지를 몇 통 받았습니다. -잠깐, 사전 좀 찾아보고...'포르노그래피...주로 성적 욕구를 유발하기 위한 문학, 회화 등. -이게 뭐 어때서? 성적 욕구를 일으키는게 잘못됐다는 말인가? -신의 법에 어긋난다는 거죠. -그들의 종교가 그런 법을 규정한다...이 나라에서 종교는 개인 문제 아닌가. 만일 자신의 종교가 포르노그래피를 금한다면 자기만 그걸 사지 않으면 되잖아. -그걸 보는 애들에게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하는 거죠. -그 자들이 걱정하는 건 뭔지 알겠어. 만일 애들이 포르노그래피를 사지 못하게 하는 법령 같은 걸 자네가 만든다면, 그렇게 크게 벌어질 일은 아닐 거야. -포르노의 생산 자체를 금해달라는 뜻도 있답니다. -그렇지만 미성년자 성희롱이나 성행위는 이미 불법아닌가. 게다가 성적 자각이 사춘기나 그 이전에 시작된다는 걸 모른 척할 순 없는 문제라고. -포르노그래피가 남자들이 여자들을 강간하게 만든다는 말도 하더군요. -사진이 없고, 문맹이 들끓던 시절에도 강간은 있었네. 영화나 잡지를 봤다고 강간범이 되는 건 아니잖나. 사람들이 그렇게 즉각적으로 행동한다면 히치콕 감독의 '사이코' 같은 영화는 개봉도 못했을 걸세. -그렇게 단단히 답할 수 업슨 게 지금으로썬 큰 문제랍니다. -그래, 강간범을 잡는 건 어렵지만, 미디어의 성적인 요소를 이유로 출판사나 화가, 영화 제작자를 잡아들이는 건 지나치게 쉽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면 대중에게 우리가 여자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겁니다. -비록 실상은 예술가 나부랭이들이나 괴롭힐 뿐이겠지만 말이야! 젠장 레이! 이게 바로 언론을 쥐고 흔드는 방법이야! 얼른 뛰어가서 반포르노 법령을 빨리 써내! 결국 창작행위를 검열하는 법령이라는 건, 권력을 가진 자들이 예술가를 괴롭히고, 자신들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는 걸 작가는 정치가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작가는 오래 전 그린 이 만화의 내용이 유치한 수준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는데, '창작의 자유'와 '검열'의 대립을 두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여전히 한심한 수준인 만큼, 검열을 하려는 자들-권력을 가진 자들-의 멍청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은 더 날카로워져야 한다고 본다. 나중에 나온 체스터 브라운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퍽 온건하고 현실적인 내용인데, 작가 특유의 냉소적 태도는 이 작품집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작가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만화의 세계를 넓혔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너 좋아한 적 없어
    제목 : 너 좋아한 적 없어 작가 : 체스터 브라운 출판 : 미메시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청소년들의 미묘하고 까다로운 심리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체스터는 어릴 때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욕설 때문에 엄마한테 심하게 야단 맞는다. 그리고 그 뒤로 학교에서 욕설을 하지 않는 아이로 소문이 난다. 어릴 때는 대개 별 생각 없이 욕을 한다. 친구들은 체스터에게 욕을 해보라고 놀린다. 욕을 참는 것이 자존심과 연결되면서 체스터는 욕을 하지 않고, 친구들은 욕을 하라고 놀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체스터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체스터를 옹호하고, 그들 가운데 여학생 캐리는 체스터를 좋아하지만 정작 체스터는 캐리의 친구 스카이를 좋아한다. 체스터는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캐리를 보면서 부담스러워 하지만, 그렇다고 싫은 내색도 하지 않는다. 캐리의 언니 코니와는 친구로 지내고, 숨박꼭질을 할 때는 둘이 들판에 누워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체스터는 처음으로 스카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고백을 하고도 체스터의 마음은 복잡하다. 스카이도 고백을 한 체스터가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으니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의심한다. 체스터가 자기의 친구 스카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캐리는 체스터에게 화가 나서 '너 좋아한 적 없어'라고 말한다. 이런 일들이 체스터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 그의 엄마는 정신과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사망한다.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체스터가 잔디를 깎고 있을 때, 스카이가 찾아와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하지만 체스터는 거절한다. 청소년 시기는 불안정한 상태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가족과 원만하고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고, 학교의 친구들이나 이웃과 어려움 없이 지낸다면 불안정한 청소년 시기도 무사히 넘길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체스터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야했는데, 원하지 않고, 믿지도 않는 신을 찬양하기 위해 일요일의 행복한 시간을 버려야 한다는 건 몹시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체스터는 교회에 마지못해 나가고, 학교 생활도 묵묵히 해나간다. 체스터는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는 열정적으로 반항하기 보다는,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친구들이 놀려도 상대하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에게도 열렬한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런 냉소적 태도는 주인공의 타고난 성격이기도 하고, 그가 자란 환경의 영향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엄마가 정신병으로 입원해야 하는 상황은 그 전부터 집안에 우울함이 가득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물론 이 작품은 창작이므로 논픽션으로 생각하는게 이상하지만, 적어도 많은 부분에서 작가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고, 이야기를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아서 담담하고 심심하다. 마치 자기 이야기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무심하고, 냉소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작가의 특징이기도 하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하비비
    제목 : 하비비 작가 : 크레이그 톰슨 출판 : 미메시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린 전작 '담요'에 이어 이 책이 나오기 중간에 '만화가의 여행'이라는 여행 일기를 낸 크레이그 톰슨이 7년 동안 공을 들여 내놓은 작품이다. 그래픽노블로 이만한 두께로 출판한 것은 보기 드물다. 무려 670쪽이나 되는 이 두툼하고 묵직한 책은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호기심이 들게 만든다. 이렇게 할 말이 많다는 건, 작가가 수다장이거나, 진정 하고픈 말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렇게 두꺼운 책은 잘못 고르면 종이와 잉크, 독자의 시간 낭비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선택하게 된다. 이 책이 크레이그 톰슨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선뜻 믿고 구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이 놀라운 점은, 장편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과 함께 작가가 직접 매우 복잡하고 섬세한 이슬람의 문양을 그렸다는 점이다. 첫페이지부터 작가는 이슬람 전통 문양을 꼼꼼하고 섬세하게 그리는데, 이 문양을 직접 그렸다고 생각하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랍다. 크레이그 톰슨이 그래픽노블의 대가라고 말하는 것이 이 작품을 보면서 수긍될 정도로 한 페이지마다 들인 공력이 대단하다. 그런 면에서, 활자로 이루어진 소설과 그림과 글로 표현하는 그래픽노블의 차이와 의미를 이 작품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소설로도 이 작품을 묘사할 수 있지만, 그래픽노블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풍부한 정보와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일부러 밝혔듯, 이 작품은 순수한 창작이다. 작품의 무대는 이슬람 국가지만,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가 아니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시간의 흐름은 약 16년 정도라고 하는데, 독자가 느끼는 시간은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길고도 오래된 이야기다. 작가는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주인공으로 어린 여자와 흑인 아기를 내세웠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은 독립적 존재가 아닐 정도로 천대받는 존재다. 이슬람의 율법에는 여성을 존중하라는 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꼭 있는데, 이슬람의 현실은 율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다른 나라도 여성의 차별과 억압이 항상 존재하지만, 이슬람 사회에서는 여성의 위치가 더욱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어린 여자 주인공 도돌라는 가난한 집안에서 가족들의 식량을 구입하려는 이유만으로 낯선 남자에게 팔려간다.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은 듯한 남자는 필경사였고, 다행히 도돌라를 학대하지는 않지만 딸보다 어린 도돌라와 섹스를 하고, 도돌라가 처녀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필경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죽고, 도돌라는 노예시장으로 팔려간다. 그곳에서 갓난아이 '잠'을 만나고, 잠의 엄마도 다른 곳에 노예로 팔려나가자 도돌라는 잠을 데리고 사막으로 도망친다. 도돌라는 누나처럼, 엄마처럼 잠을 돌본다. 그들은 사막에 버려진 배에서 무려 9년 동안 숨어서 생활하는데, 도돌라는 먹고 살기 위해 사막을 횡단하는 상단에게 몸을 팔고, 음식을 얻는다. 잠이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점차 소년으로 자라면서 도돌라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내면에 성적 욕망이 들끓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다 도돌라가 식량을 구하려고 배를 떠날 때, 잠이 몰래 뒤를 밟는다. 도돌라는 자신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고, 잠은 처음 그 장면을 보면서 크게 충격받는다. 어느날, 식량을 구하러 나간 도돌라는 궁에서 나온 병사들에게 납치당해 술탄의 후궁이 된다. 갑자기 헤어진 잠을 걱정하면서, 술탄의 아이를 출산하지만 자기가 직접 낳은 아이를 외면하고, 헤어진 잠만을 생각한다. 그러다 아이가 3살이 되던 어느 날, 도돌라는 아이의 존재를 깨닫고 모성애가 발현하는 걸 느끼는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사라진다. 경쟁자 후궁들 가운데 누군가 아이를 납치해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와 애착이 시작되자마자 아이를 잃어버린 도돌라는 삶의 희망이 사라진다. 이 무렵 '잠'은 사라진 도돌라를 찾아 도시로 들어오고 거세한 남자들의 집단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도 성기를 거세하고 그들과 함께 돈과 음식을 구걸하며 다니다 왕궁에 잡혀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도돌라를 발견하고, 이제 가치가 사라진 도돌라를 죽이라는 술탄의 명령으로 그들은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간 다음, '잠'은 도돌라를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든다. 두 사람은 술탄의 성 바깥쪽 빈민가의 하수구에서 어부에게 발견되고, 도돌라는 자신을 살린 사람이 '잠'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어부의 보살핌으로 몸을 추스린 두 사람은 옛날의 그 사막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사막은 이미 사라졌고, 그 자리는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살기 위해 도시로 들어가 '잠'은 노동자가 되고, 폐허가 된 빌딩의 한 칸에 도돌라는 살림을 차리고 둘이 생활한다. 도돌라와의 관계에서 극심한 갈등을 일으키는 '잠'은 자살할 결심을 하지만, 그는 마음을 바꿔 도돌라에게 돌아온다. 숨어지내던 건물이 다시 공사를 시작하고, 두 사람은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어디론가 떠나는데, 시장에서 노예처럼 팔리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와 셋이 길을 떠난다. 이 작품은 신화와 현실이 뒤섞여 있다. 도돌라가 돈에 팔려 필경사 남자를 만나고, 그에게서 글을 배우게 되는 것, 나중에 도돌라가 '잠'을 데리고 탈출해 잠과 함께 지낼 때도 잠에게 글을 가르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이 서사가 신화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화에서 여신은 인간을 돕는다. 어린 '잠'은 인간의 상징이고, 자연에서 연약한 인간은 늘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여신이 그를 보호한다. 물과 음식을 주고, 말과 글을 알려주며, 모성의 사랑을 나눠준다. 작품에서는 도돌라가 술탄의 후궁이 되고, 다시 술탄의 미움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도돌라를 살리는 건 '잠'이다. 잠은 신이자 어머니, 누나이기도 한 도돌라를 잃고 고난의 시간을 보낸다.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스스로 거세하고(하지만 완벽한 거세가 아닌 걸로 보인다), 다시 만난 도돌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려 한다. 도돌라가 '잠'에 집착하는 건 어린 아이를 자기가 직접 키웠기 때문인데, 자신이 임신해서 낳은 아이에게는 오히려 냉담한 모습을 보이는건, 그 아이가 술탄의 아이이기는 해도 자신이 원치 않았던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도돌라는 나중에 자신의 냉담함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는다. 도돌라와 잠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날 때의 시간은 16년이지만, 이 작품에서 시간의 흐름은 두 사람의 나이보다는 사막이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하고, 작은 마을이 거대한 도시로 바뀌며, 고층 빌딩이 무수하게 들어서는 문명의 변화로 느낄 수 있다. 신화 속 주인공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결국 도시에서도 빈민이자 노숙자의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나마 '잠'이 노동자로 일해 번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데, 도시에서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시를 떠나 새로운 곳을 찾아나선다. 이 작품이 놀라운 점은, 서사의 독특함과 함께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인위적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만화를 그릴 때 패턴, 배경, 효과 등을 위해 많은 만화가들이 톤을 쓰는데, 크레이그 톰슨은 오로지 펜과 붓선만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특히 섬세한 문양과 패턴이 많이 들어가는 작품이어서 이것을 오로지 펜과 붓으로만 그리려면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가는데, 작가는 끈기 있게 자신의 손으로만 작업을 한 것이다. 이런 노력이 있기에 뛰어난 작가의 작품이 더욱 돋보인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만화가의 여행
    제목 : 만화가의 여행 작가 : 크레이그 톰슨 출판 : 미메시스 크레이그 톰슨이 2004년 3월 5일부터 5월 14일까지 프랑스, 스페인, 모로코를 여행한 기록을 담은 작품이다. 작가도 밝혔듯이 이 작품은 작가의 정식 작품이 아닌, 새 작품이 나올 때까지 독자들을 위해 만든 '간식' 같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여행기는 훌륭하다. 작가 자신의 사사로운 기록이지만, 그가 보고, 듣고, 먹고, 마시고, 경험한 이야기는 보편성을 갖는다. 작가는 그의 작품 '담요'가 크게 성공하면서 유럽의 출판사에서 출판이 이루어지고, 출판사의 초대를 받아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게 된다. 그 가운데서 주요 무대인 프랑스, 스페인, 모로코에서 지낸 나날을 그림 일기처럼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실린 그림은 작가가 온전히 기억에 의존해 그린 것이라고 밝혔다. 즉 카메라를 가자고 다니지 않았다는 말인데, 이 작품의 그림을 보면 그 장면, 구도, 묘사가 기억만으로 그린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고 뛰어나다. 작가는 프랑스에서 며칠 머물며 신문과 라디오 방송에서 인터뷰를 하고, 사인회를 한 다음 그가 가보고 싶었던 모로코로 가서 약 한달 정도를 머문다. 모로코에서 있었던 일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그는 열린 마음으로 모로코의 사회와 사람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모로코는 가난한 나라여서 외국인 여행자에게 어린이들이 달려들어 구걸을 하거나, 가이드를 해준다면서 쇼핑을 강요하거나 공공연히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혼자 왔지만 모로코에서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나 함께 지내기도 하고, 유럽에서 온 다른 여행객들과도-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친하게 지낸다. 작가는 날마다 스케치북에 풍경과 사람을 그리고, 일기처럼 기록을 남긴다.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고, 자기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작가는 어지간하면 이런 부탁을 들어주지만 이미 손에 관절염이 생겨 오래 펜을 쥐고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작가는 모로코에서 약 한달 가까이 지내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작가가 만나는 사람들은 같은 일을 하는-그래픽 노블-작가들이나 출판사 관계자들이 대부분인데, 이 작품에서도 유명한 그래픽노블 작가들이 많이 등장한다. 크레이그 톰슨이 언급한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는 것도 큰 재미가 될 것이다. 프랑스에서 싸인회, 인터뷰, 출판기념회 등을 하면서 친구와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어울리며 편안하고 따뜻한 나날을 지내던 작가는 스페인으로 간다. 그곳에서도 작가의 작품 '담요'가 번역 출판되어 만화박람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역시 싸인회, 인터뷰 일정이 여럿 잡혀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스페인에서의 추억을 특별하게 그리는데, 가우디의 사그라다 피말리아를 비롯해 가우디의 건축물들과 바르셀로나의 공원, 시내를 돌아다니고, 박화박람회에서 만난 동료 만화가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작가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데, 우연히 만난 여성과 짧지만 강렬한 사랑을 경험한다. 이런 내용은 만화적 장치일 수도 있지만 그의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은 사실적이다. 이 작품이 주는 의미는, 작가가 여행을 하면서 날마다 그림 일기를 꾸준히, 성실하게 그렸다는 사실이 아니라, 작가의 시각이 남다르다는 걸 느끼는 데 있다. 작가는 분명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훌륭한 작가일수록 그런 남다른 시각은 독특하고 개성 있게 표현한다. 크레이그 톰슨 역시 평범한 나날의 일기를 기록하면서도 그것이 작품이 되도록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이 진정한 '프로'임을 입증한다고 본다. 작가가 그린 그림을 보면, 밑그림을 하지 않고 곧바로 붓펜으로 선을 그려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밑그림 없이 한번에 그린 그림이라면 그 공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작가가 줄곧 손의 관절염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불과 30대의 청년이 펜으로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렸으면 관절염까지 오게 될까를 생각하면, 뛰어난 작가가 된다는 건 타고난 재능과 함께 다른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노력과 훈련이 바닥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 문화
    • 만화
    2021-11-18
  • 담요
    제목 : 담요 작가 : 크레이그 톰슨 출판 : 미메시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까지 작가의 가족, 종교, 학교, 친구들 그리고 우연히 만났지만 주인공의 영혼을 따뜻하게 보듬었던 레이나와의 만남까지를 사실적으로 그린다. 처음 이 만화를 보고 느낀 감정은 주인공의 이기적 태도에 약간 짜증이 났던 기억이 있다. 여전히 주인공의 태도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그렇게 행동하기까지 그의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에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련 없이 부모를 따라 교회에 다녔고, 교회에서는 아이들에게 죄의식만 심어주었다. 이 만화에서도 그렇듯, 어린이가 종교의 일방적 세례를 받으면 정서적으로 피폐하며, 잘못된 생각을 주입당해 밝고 건강한 어린이로 자라지 못한다. 어린이를 종교의 굴레를 씌워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키우려는 부모의 어리석음과 무지는 결국 가족 모두에게 불행하다는 걸 잘 보여준다. 주인공은 학교에서도 힘센 학생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학교도, 집도 편안한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학대를 당하며 자란 것은 아니다. 그의 부모는 엄격하긴 해도 육체적 학대를 하지는 않았고, 학교에서도 힘센 아이들이 괴롭히긴 했어도 심각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은 오랜동안 종교의 특정한 이념에 노출되었고, 종교에서 말하는 '죄악'의 개념 때문에 자유로운 인간으로 성장할 기회를 빼앗겼다. 주인공은 고등학생이 되어도 생활에 변화가 없었다. 재미 없는 학교에 다니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고, 알 수 없는 죄의식과 답답한 나날을 이어가던 주인공은 여름 성경캠프에서 여학생 레이나를 만난다. 캠프에서 알게 된 둘은 캠프에서 돌아와 서로 편지를 나누고, 전화도 하면서 서로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마침내 부모의 허락을 받고 레이나의 집에서 두 주일을 보낼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은 부모님의 차를 타고 위스콘신과 미시간주의 경계에서 만난다. 위스콘신과 미시간 사이에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미시간 호수가 있다. 작가도 어린 시절 미시간주의 트래버스시티에서 태어났으니 미시간과 인연이 있었다. 주인공은 레이나의 집에 도착하고, 레이나의 가족과 인사를 나눈다. 레이나의 부모는 이혼을 준비하고 있어서 집안이 어수선하다. 레이나의 언니는 일찍 결혼해 집 근처에서 따로 살고 있고, 집에는 레이나의 오빠와 언니가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입양을 했는데 장애를 가졌다. 이 작품은 3분의 2는 레이나의 집에서 지낼 때의 추억을 그리고 있다. 두 주인공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도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부모의 종교적 편견 때문에 어린 시절을 죄의식과 공포, 두려움 속에서 자란 두 사람 모두 종교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도 같았다. 레이나의 부모는 아직 법적 이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레이나의 아버지는 따로 나가서 살고 있었다. 그래도 날마다 장애가 있는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역시 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 목재소에서 일을 한다. 레이나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장애가 있는 언니를 돌봐야 하고, 일을 하는 어머니 대신 집안 일도 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 주인공과 레이나는 짧은 시간을 내서 데이트를 하고, 산책을 하고, 눈쌓인 산에 올라 순수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시기가 마침 겨울이고, 그들이 살고 있는 위스콘신과 미시간은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마을은 항상 눈이 쌓였고, 눈도 자주 내렸다. 세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는데, 이건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어쩌면 의도했던-은유이기도 하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그들의 관계를 의미한다. 순수한 청년들의 마음, 순수한 사랑, 그들 둘만의 순수한 시간, 시끄럽고 불안하며, 일상의 시끄러움과 더러움으로부터 떨어져 깨끗하고 순수하게 둘만의 시간을 갖는 공간을 상징한다. 두 사람은 두 주일동안 함께 지내면서 친구이자 연인으로 가깝게 지내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처럼 덤덤한 시간들도 보낸다. 크레이크는 레이나와 함께 지내는 시간 속에서도 레이나와 둘이 집에 있을 때와 밖에 나와서 카페에 갔을 때나 집에서도 레이나가 집안 일을 할 때 느끼는 감정이 사뭇 다른 것을 느낀다. 크레이그는 레이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레이나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는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이어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이고,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도 낮고, 미래가 불투명하며, 집안의 형편이 복잡하고 가난해서 삶이 힘들고 괴로운 현실이다. 레이나는 특히 장애가 있는 언니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더 피곤하다. 크레이그와 레이나가 함께 한 두 주일이 지나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두 사람은 전화로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고, 크레이그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레이나와 함께 했던 모든 추억을 불에 태워 재로 만든다. 레이나에게 전화해 이제 인연을 끝내자고 말한 것도 크레이그였다. 레이나의 보이지 않는다. 레이나도 아마 예상하고 있었을까. 레이나의 반응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크레이그의 태도가 이기적으로 보인다. 크레이그는 스무 살이 될 무렵 집에서 나와 독립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집에 들르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는 집의 다락에서 비닐봉지에 담긴 담요를 발견한다. 그 담요는 크레이그와 레이나가 처음 만났을 때, 레이나가 크레이그를 위해 미리 준비한 선물이었다. 레이나가 여러 천을 짜집기해서 만든 담요는 정성을 많이 들인, 아름다운 담요였다. 레이나와의 추억이 담긴 모든 물건을 불태웠지만 담요만은 보관하고 있었다. 크레이그는 집을 떠나 도시(뉴욕)에서 생활하며 스무 살 이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고, 교회에서 금기했던 책들을 엄청나게 읽었다. 크레이그는 동생 필의 결혼식 때문에 집을 방문하고, 다시 몇 년이 지나 크리스마스 연휴에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때까지 온전하게 가족들은 잘 살고 있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며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때, 그는 혼자 눈 내리는 집 주변을 산책하며 과거의 삶을 돌아본다. 물론 레이나와의 특별한 추억도 함께.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작가의 다음 작품인 '만화가의 여행'에서, 옛날 여자친구와 통화했다는 내용이 가끔 나온다. 그 여자친구가 이 작품의 주인공인 레이나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 문화
    • 만화
    2021-11-15
  • 수중용접공
    제목 : 수중용접공 작가 : 제프 르미어 출판 : 미메시스 잭은 수중용접공이다. 그의 아내는 곧 출산을 앞둔 임산부로, 잭이 바닷속으로 들어가 특수용접을 해야 하는 현실을 걱정한다. 잭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고, 늘 해오던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일하러 나간다. 해안에서 멀지 않은 바다 위에 세운 구조물(시추선)의 물속 기둥에 균열이 생기면 용접공이 들어가 보수작업을 하는데, 물속에서 하는 용접은 특수용접이고, 산소통을 메고 헬맷을 쓰고 하는 일이라 육체적으로 몹시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수중용접에는 건식과 습식이 있는데, 잭이 하는 수중용접은 습식으로 건식에 비해 간편하고 설비비가 싸며, 응급처치를 할 때 활용한다. 수중 아크용접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일이 위험해서 임금이 높다. 한국에서는 하루 임금이 100만원에 가까울 정도라고 한다. 잭이 수중용접공으로 일하는 것도 임금이 높기 때문이고, 일을 적게 하고 아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위험해도 잭은 이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잭은 용접을 하다 갑자기 어디선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바닥에 놓여 있는 회중시계를 발견하고 그걸 집으려다 정신을 잃는다. 잭이 눈을 뜨자 그의 동료들이 그를 걱정스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소를 공급하는 장치가 고장나서 산소 공급이 끊겼고, 잭은 질식해서 기절한 것이다. 다행히 그의 동료가 일찍 발견해 끌어올렸다. 의사는 잭에게 정밀검사를 받고 당분간 일을 하지 말라고 권유하지만 잭은 당장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결국 잭은 집으로 돌아오고, 임신한 아내는 안심하지만, 잭은 목욕을 하다 환각을 본다. 피곤했던 잭은 아내와 잠이 들고, 그는 꿈을 꾼다. 어린 잭은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바닷가로 간다. 아버지는 침몰한 배를 인양하는 개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의 꿈은 바다에 가라앉은 보물선을 찾는 것이다. 잭이 10살이던 때, 아버지는 잭을 데리고 바다로 나와 보물을 찾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서는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나이 33살이었고, 시간이 흘러 잭이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잭은 엄마를 만나보러 가고, 만삭의 아내는 오후에 잭과 함께 조산사를 방문할 거라고 이야기한다. 엄마를 만난 잭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그가 찾는 회중시계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집으로 돌아오다, 바닷가에 앉아 잠깐 과거를 회상하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잭은 화난 아내에게 심한 비난을 받자 편지를 쓴 뒤 집을 나가 시추선으로 돌아간다. 그는 바다 밑바닥으로 내려가 회중시계를 발견하고 다시 시추선으로 올라오지만, 시추선은 망가져 있고,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그는 현재의 자신과 어린 시절의 모습을 오가며 현실과 과거의 기억이 뒤섞이며 혼란을 일으킨다. 그는 단골 술집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받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잭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잭은 아내가 사라진 걸 발견하고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시추선으로 돌아가 바다 밑으로 들어간다. 그가 깊은 바다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자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고, 아버지가 건네주는 회중시계를 받아들고 아버지와 진심으로 화해한다.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잭을 구하러 내려온다. 잭은 물속에서 정신을 잃어가며 앞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을 환각으로 본 것이고, 그가 환각 속에서 만난 아버지와 엄마, 아내 수지와의 대화와 갈등은 잭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마음의 번뇌였다. 이 작품은 한번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해는 하지만, 잭의 갈등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찬찬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잭의 행동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출산을 앞둔 아내를 지켜줘야 하지만, 잭은 자꾸 바다로 들어가려고만 하고, 이미 오래 전 죽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집착한다. 잭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삶을 들여다보자. 잭이 열 살 때 그의 부모는 이혼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 따로 살면서 일주일에 한번 잭을 만나러 왔다. 부모의 이혼으로 아이가 받은 충격을 잭의 부모는 알지 못했고, 공감하거나 이해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잭은 부모의 이혼으로 받은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스스로 끌어안고 살아야 했으며, 쌀쌀한 엄마와 다정하지만 알콜중독자 아버지 사이에서 마음을 편하게 내려 놓을 곳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어른이 된 잭은 수지를 만났고, 수지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이제 곧 출산을 앞두고 있다. 잭은 임신한 수지보다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기의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고, 아버지라면, 열 살 때, 보물을 찾으러 바다로 들어간 알콜중독자 아버지가 떠올랐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 인해 잭은 깊은 상실감을 갖게 되고, 트라우마가 되었다.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 아들이 열 살이 되었을 때, 잭 자신도 어린 아들을 두고 어디론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잭은 아버지가 된다는 현실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에 사라진 아버지로 인해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이혼으로 갈라진 부모, 사랑이 없었던 어린 시절,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등이 혼재된 그의 내면은 분열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모든 감정이 수중용접을 하다 사고가 발생하고,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서 질식해 가는 상태에서 환각과 환상을 보게 된 것이다. 동료에게 구조된 잭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고, 막 출산한 아내와 아기를 본다.
    • 문화
    • 만화
    2021-10-31
  • 내 가족의 역사
    제목 : 내 가족의 역사작가 : 리쿤우출판 : 북멘토 중국 만화가 리쿤우의 작품.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중국의 그래픽노블이 한국에 소개된 경우가 적어서 유럽의 그래픽노블보다는 찾아 읽기가 쉽지 않다. 이 작품은 한 중국인이 발견한 귀한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잔학함과 중국인의 희생이 얼마나 참담했던가를 밝히는 내용이다.작가 리쿤우는 (나는 잘 모르지만) 중국에서 유명한 만화가로 알려진 인물이라고 한다. 리쿤우는 1955년에 태어나 중국군으로 복무한 다음, 신문사에 입사해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지금은 만화창작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주인공은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골동품 시장을 둘러본다. 그러다 어떤 골동품 장사와 손님이 다투는 장면을 보게 되고, 골동품 장사가 말다춤을 하는 가운데 '애국주의 국보'라는 말을 한 것을 주인공이 듣고는 골동품 장사에게 그 물건이 어떤 물건이냐고 물어본다. 골동품 장사는 '청일전쟁'에 관한 그림 자료라고 말하고, 주인공이 보고 싶다고 말하자 물건을 보관한 창고로 데려가 그 자료를 보여준다. 청일전쟁 관련 자료는 일본에서 만든 것으로 1894년에 만든 한 장짜리 화첩이었다. 주인공이 그 자료를 구입하려 하지만 너무 비싸게 불러 구입하지 못하게 되고, 대신 골동품 장사는 그 자료를 주인공에게 돈을 얼마간 받고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렇게 빌린 화첩을 주인공은 컬러 스캔으로 복사를 하고 돌려준다. 그러면서 골동품 장사에게 사실대로 말을 하고, 나중에 원본을 비싸게 부른 값을 다 주고 사겠다고 말한다.골동품 장사는 그 자료보다 훨씬 더 귀한 자료가 있다고 주인공에게 말하고, 그 사진 자료를 보여주겠노라고 제안한다. 주인공은 그가 말한 자료가 어떤 자료인지 궁금해서 날짜를 정해 두 사람은 마을 외각의 빈민가로 향한다. 그곳에는 골동품 장사의 스승이 살고 있는데, 옥탑방에서 매우 궁핍하게 살고 있는 노인을 찾아간 주인공은 골동품 장사가 어렵게 꺼내온 화보집을 보고는 몹시 놀란다. 그 자료는 일본군이 '중일전쟁'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으로, 일본군이 중국에서 활약한 내용을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사진집이었다. 주인공은 당장 그 자리에서 카메라로 화보집을 찍고, 찍은 사진을 일본어를 잘 아는 후배에게 보낸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 정리한 사진을 보며 화보에 찍힌 사진의 의미를 살핀다. 그가 찍은 화보를 소유한 노인은 죽어도 그 화보를 팔지 않겠다고 했고, 몇 달의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그 장소에 간 주인공은 빈민촌이었던 마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빌딩이 들어선 것을 알고는 난감해 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역사적으로 특별한 자료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가 발견한 화보집은 '지나사변과 무적황군'이라는 제목의 화집인데, 1939년에 발행한 책이다. 1937년에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중국에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그것을 자신들의 승리의 기념으로 사진까지 찍어서 화보로 만들어 홍보했다.중국에서 '중일전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만화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주인공이 발견한 화보집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정도를 넘어서는 호들갑을 떤다는 느낌이 강했다. 주인공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말한 '지나사변과 무적황군'은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다.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홍보하기 위해 중국 뿐아니라 당시 조선에서도 같은 화보집을 출판했는데, 주인공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대단한 자료를 발견한 것처럼 생각한다. 1939년에 부산일보사에서 발행한 자료로 '지나사변과 무적황군'이 있다. 이 만화에서 대단한 자료로 언급한 바로 그 화보집이다. 그러니 이 만화에서 언급한 자료의 가치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물론 그들 중국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을 수 있다-생각이 들었다.이 만화가 기대 이하였던 것은, 주인공이 발견한 자료의 가치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만화의 절반 이상을 이 화보의 사진을 그대로 실었다는 점이다.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자료가 역사적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서 그 사진을 그대로 만화에 실었다고 생각하지만, 만화의 절반 이상을 사진으로 채우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한다.이 작품을 그린 작가 리쿤우가 중국에서 얼마나 유명하고 위상이 높은 작가인지 알 수 없지만, 만일 똑같은 상황이 한국에서 발생했다면-즉, 한국에서 매우 유명한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절반 이상을 사진으로 채우는 만행을 저질렀다면-나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작가의 안일하고 무능한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을 것이다.솔직히 말해서, 이따위를 만화로 그리고 있는지 한심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화보 사진을 만화의 절반 이상 그대로 싣고는 그걸 자기 작품이라고 출판하는 태도가 용인되고, 또 그것이 마치 훌륭한 작품인 것처럼 포장되는 것을 보면, 중국의 예술 수준이 어떤가를 알 수 있고, 중국의 그래픽노블 수준의 천박함을 알 수 있다.작가는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작품(?)을 만들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만화는 만화도 아니고, 작품은 더더욱 아니며, 추천할 만한 책도 아니고, 만화의 수준도 매우 낮다고 판단한다. 중국사람들에게 이 만화가 의미는 있겠지만, '그래픽노블'로서의 작품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 문화
    • 만화
    2021-10-31
  • 엄마들
    제목 : 엄마들 작가 : 마영신 출판 : 휴머니스트 표지가 기막히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의도를 드러내는 가장 분명하고 좋은 방법은 표지 그림인데,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한국적'인 표지그림은 이 작품이 아마도 최초가 아닐까. 표지 그림은 그 자체로 역설이다. '엄마들'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엄마'라는 따뜻하고 편안하며 행복한 이미지의 추상이지만, 그 아래 두 중년 여성이 서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악을 쓰는 모습은 '엄마'라는 기존의 추상적 이미지를 산산히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바탕의 빨강색은 중년들이 좋아하는 색깔로 알려졌는데, 빨강의 강렬한 색감과 흑백의 인물이 강조되면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드라마틱한 사연을 풀어놓을 거라는 기대를 준다. 이 만화를 그린 작가 마영신은 엄마의 생활을 지켜보다 엄마에게 노트와 펜을 주고 엄마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자기와 친구 이야기를 솔직하게 썼고, 작가는 엄마가 쓴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니 스토리 작가는 마영신 작가의 엄마인 셈이다. 작품 속 주인공은 이소연이다. 중년의 여성이고, 아직 독립하지 않은 아들과 함께 사는데, 자기 이름으로 남은 유일한 재산은 연립주택 가운데 한 채다. 소연은 스무살에 중매로 남편을 만났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길렀지만 남편이 도박에 빠져 집안을 망치고 빚만 늘어나자 소연은 빚을 갚기 위해 평생 가난과 노동에 허덕였다. 그러다 결국 이혼을 하고 지금은 건물 청소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소연에게는 애인 종석이 있는데 술집 웨이터로 일하는 남자다. 종석의 아내는 다단계에 빠져 빚이 많은데다 종석의 동창하고 불륜 관계여서 사실상 이혼한 상태로 생각하고 있다. 소연의 친구인 연순, 경아, 연정, 명옥이 등장학고, 이들은 각자 나름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연순은 남자가 자주 바뀌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간, 쓸개를 다 빼주는 속없는 여자라고 친구들에게 욕을 먹지만, 연순은 순정이 있는 여자다. 연정은 남편이 성불구여서 늘 불만이 가득한데, 애인을 쉽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헬스장에서 만난 남자는 알고 보니 게이였다. 소연은 애인인 종석이 3년 전부터 꽃집 여자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는 종석에게 욕을 하며 헤어지지만 이들의 삼각관계는 이어진다. 꽃집 여자 명희는 소연에게 종석과 헤어지라고 말하고, 소연은 '내 남자와 연락하지 말라'고 카톡을 하다 새벽에 길거리에서 만나 육탄전을 벌인다. 작품 속 엄마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자들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진 그녀들의 모습은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사회적 약자, 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 체제 속에서 억눌린 채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피억압자의 모습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엄마들은 대개 부자도 아니지만 많이 배우지 못한 여성들이어서 자기들의 삶이 왜, 어떻게 망가져 왔는지 깊은 성찰을 할 능력은 없다. 남자(남편을 포함한 애인까지)들이 저지른 일을 뒤치닥거리하느라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면서도 자신보다 남자, 자식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던 여성이 바로 '엄마'다. 하지만 '엄마'도 나이 들면서 자기 욕망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오랜 시간 너무나 많이 참았고, 남자와 아이들에게 시달렸고, 자신의 행복을 유예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춤을 배우고, 나이트클럽과 콜라텍에서 낯선 남자들과 춤을 추고, 애인을 사귀고, 삼각관계에서 질투와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들'의 다른 모습은 '여성노동자'다. 그것도 비정규직의 불안한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한다. 소연은 빌딩 청소를 하는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그곳에는 소연과 비슷한 나이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함께 일하고 있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용역업체의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빌딩에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사무실에는 책상에 앉아 일하는 정규직 사무노동자들이 있지만, 빌딩 청소를 하는 중년의 여성노동자들은 그들에게 거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용역업체에서 나온 관리자의 눈치도 봐야 하고, 같은 처지에 있지만 '반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동료 노동자의 눈치도 봐야 하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여성노동자들도 모두 '엄마'들이다. 이들은 밥도 화장실에서 먹어야 하고, 편히 쉴 장소가 없어 계단이나 비품창고 같은 구석에서 쉬어야 한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해 달라고 소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한 옥자언니는 성추행을 당하고 해고된다. 옥자언니는 여성가족부도 찾아가고 노동운동을 하는 여성도 찾아가지만 실질적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이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용역업체 소장은 반장을 시켜 어용노조를 만들도록 하고, 16명 가운데 12명이 어용노조에 가입하고, 4명이 된 소연과 동료들은 따돌림을 당한다. 소연은 라디오 방송에 나가 일하는 회사에서 부당 노동행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고발한다. 라디오 방송의 파급 효과가 있어 소장은 소연을 비롯해 모두 해고될 거라고 협박하지만 결과는 용역업체와 소장이 바뀌고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남았는데, 소연과 연정언니는 해고된다. 소연은 옥자언니와 다른 업체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 예전 업체에서 반장을 했던 사람이 들어온다. 떡값을 빼돌리다 들통나서 해고되자 우연히 소연이 일하는 곳으로 취업한 것이다. 소연은 삼각관계였던 명희와 친구가 되고, 연순은 만남 어플로 연하의 남자를 만나고, 명옥이는 기자 애인과 계속 만나고, 연정은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고, 경아의 남편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모두들 여전히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50대와 60대 가난한 여성의 삶은 그렇게 구질구질하면서도 끈끈하고, 현실에 충실한 나날을 보낸다.
    • 문화
    • 만화
    2021-10-31
  • 빨간약
    제목 : 빨간약 작가 : 권용득, 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마영신, 한수자 출판 : 보리 작가주의 만화를 지향하는 만화가들의 단편 모음집. 한국에서 '작가주의 만화'는 곧 그래픽노블을 뜻한다. 이 책에 실린 작가들을 보면, 그동안 작가 자신과 사회에 관한 발언(작품)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기획부터 한국사회의 부조리에 관해 만화가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분위기를 표현해 보자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믿는 한국 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부조리, 부패, 악의적 왜곡, 탐욕과 사리사욕으로 뭉친 권력의 남용,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착취와 폭력에 관해 언론, 방송, 지식인들이 말과 글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렇게 만화가들이 작품으로 발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회 현실에 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작가들이 많을수록 창작과 표현의 자유는 커질 것으로 믿는다. 이 작품집은 모두 여섯 명의 작가가 그린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_ 김성희 나의 전교조 선생님_ 김수박 일베는 우리 동무_ 마영신 두 할머니_ 한수자 진짜 간첩_ 김홍모 최선의 선택_ 권용득 김성희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작가보는 세상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부모(기성세대)와 생각이 달라서 갈등을 빚고, 제주도 강정 해군기지 저지투쟁, 용산 철거민 침탈 사건, 종북몰이와 정의구현사제단의 활약 그리고 세월호 침몰 사건을 그리고 있다. 그 많은 사건들과 투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독단과 탐욕 때문이다. 박근혜의 당선 뒤에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독재를 한 박정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고, 독재의 권력 뒤에는 자본의 악랄함이 마치 일란성 쌍동이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김수박의 '나의 전교조 선생님'은 작가가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김동순 선생님을 회고하고 있다. 작가는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강연도 하는데, 마침 교사들 앞에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고, 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김동순 선생님은 나중에 알고 보니 전교조 선생님이었고, 전교조가 불법이라는 정부의 결정으로 교단에서 쫓겨난 김동순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과 친구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잔잔하게 말하고 있다. 마영신의 '일베는 우리 동무'는 작가가 일베 사이트를 폭파하기 위해 만화를 연재하려다 실패한 이야기와 함께, 일베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의 소수 의견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주장한다. 이 만화집의 주제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니까, 불편한 내용을 다루는 것은 당연한데, 일베의 성격을 너무 온건하고 순진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여 작가의 날카로움이 부족한 느낌이다. 일베는 이해나 동정의 여지를 갖고 바라볼 대상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일베에서 패륜을 저지르는 자들이 중학생이든, 초등학생이든 그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교화의 대상일 뿐, 이해와 연민의 시각으로 바라볼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일베가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이야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물론 그 전에도 패륜아들은 존재했지만-패륜을 부추기고, 조장한 권력의 탓이 가장 큰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 법의 처벌을 받게 되겠지만, 일베충들에 대한 패륜은 아직도 정당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혐오를 조장하고, 패륜을 저지르는 자들의 반사회, 반민주주의 행위는 강력한 처벌만이 유일한 해결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한수자의 '두 할머니'는 김전숙, 이명신 할머니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두 분은 전쟁 직후 북한에서 내려왔다가 붙잡혀 간첩죄로 감옥에서 10여년을 복역하고 나왔고, 이후 6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살고 있다. 해방된 나라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 겪어야 했던 그 고난의 세월과 감옥에서 견딘 10여년 그리고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시간은 두 분에게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단호하고 묵묵히 자본주의 체제를 견디고 있다. 김홍모의 '진짜 간첩'은 34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남파간첩 비전향 장기수 박종린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그는 1959년 남한으로 내려왔다가 서울에서 조직책임자였던 자의 배신으로 곧바로 정보기관에 잡혔고, 감옥 안에서는 전향공작으로 참혹한 고문을 견뎠다. 남한 정권에서는 '간첩'이지만 그는 조국을 사랑하고, 반제, 반일 활동을 한 애국자였으며, 많은 애국자들이 '간첩'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권용득의 '최선의 선택'은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불법 요소가 있다는 의심을 하는 작가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그 선거에서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고, 불법한 일이 있었을 거라고 의심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그런 의심을 검증할 제도나 권력이 시민에게 없었기 때문에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었고,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결국 탄핵당했다.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선택해야 하는 두 가지 색깔의 약 가운데 하나다. 빨간약과 파란약. 파란약을 먹으면 현실에서 편하게 살아갈 수 있고, 빨간약을 먹으면 '진짜 현실'을 알게 되며 그렇게 되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고난에 대해서는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진실의 약이다. 사람들에게 이 두 가지 약을 내밀면서 선택하라고 하면 '빨간약'을 선택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 문화
    • 만화
    2021-10-31
  • 달리
    제목 : 달리 작가 : 애드몽 보두앵 출판 : 미메시스 스페인의 '천재' 화가로 알려진 살바도르 달리의 일대기를 그린 그래픽노블. 프랑스의 작가 애드몽 보두앵이 그렸다. 그의 그림이 달리의 삶을 표현하는데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초현실주의자 달리의 작품을 모티브로, 작가 보두앵은 달리의 삶을 초현실주의의 작품처럼 표현하고 있다. 달리는 피카소와 함께 스페인이 배출한 현대의 천재 예술가인데, 피카소와는 또 다른 달리만의 특징은, 그가 '미술' 또는 '회화'의 영역에 그치지 않고 영화, 연극(무대), 백화점 디스플레이, 책, 디자인, 광고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전천후 인물이라는 점이다. 달리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가진 재능을 알고 있었고, 스스로를 '천재'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학생일 때부터 이미 전시회를 열면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가 있었는데, 그가 보통의 작가들처럼 한 가지 분야 즉, '회화'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형식과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 동기는 한두 가지 사건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어릴 때 여자가 되고 싶어했고, 스스로 아름답다는 나르시즘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어릴 때 세상을 떠난 형의 죽음에 집착했다. 청소년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청년기에 피카소를 만났다. 그는 무정부주의자, 무신론자를 자처했으며, 한때는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다. 달리는 예술의 흐름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이 초현실주의자가 된 것을 당연한 결과로도 여겼다. 달리는 예술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당대 과학과 철학의 흐름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04년에 태어난 달리는 제1차 세계대전을 어려서 겪었기에 그 참상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에 휩싸인 유럽의 어둡고 비참한 분위기는 그의 정서에 영향을 끼쳤다. 달리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니며 큰 어려움 없이 학교 생활을 했고,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는데, 루이스 부뉴엘 같은 영화감독이 그의 친구였다. 나중에 달리는 부뉴엘과 함께 영화 '안달루이사의 개'를 만들기도 한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할 때, 달리는 그의 연인 갈라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때는 이미 미국에서도 달리는 유명한 작가로 알려졌고, 그는 미국에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친다. 달리의 일대기를 그린 보두앵은 달리의 업적보다는, 그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달리가 어릴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증거들은 많은데, 그가 여장을 한다거나, 청소년기에 또래의 여성 앞에서 나체로 있었다거나, 수음을 자주 했다거나, 기억도 하지 못하는 형의 죽픔에 집착하거나, 죽음의 공포에 민감한 정서 등이 그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독특한 모습들이었고, 보두앵은 달리의 잠재의식과 무의식, 어릴 때 겪었던 정신적 충격 등을 초현실적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두앵의 그림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또한 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 문화
    • 만화
    2021-10-31
  • 좁은 방
    제목 : 좁은 방 작가 : 김홍모 출판 : 보리 잠자기 전에 조금만 읽고 자야지, 생각했다가 끝까지 보게 된 만화. 예전에 작가가 웹툰으로 연재하는 것을 알고 있어서 늘 궁금했는데, 이제서야 책으로 구입해서 읽었다. 주인공 용민은 대학생으로, 학생운동을 하다 경찰에 잡혀 구치소에 갇힌다. 그가 재판을 받고 풀려날 때까지 약 8개월 동안의 구치소 생활을 그린 작품인데, 이 작품은 시대상황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용민이 대학생이던 90년대 중반의 상황은 분명 문민정부 시대였다.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3당 야합이 있었고, 정권은 바뀌었지만 학살자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을 처벌하는데 실패했다. 용민(이자 작가 자신)이 활동하던 90년대 중반만 해도 학생운동은 활발했다. 작품에서도 묘사되고 있지만 학생들의 시위와 경찰백골단의 격렬한 대립으로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여럿 있었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산화한 학생 열사들도 많았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용민이 구치소에 갇혀 감방 동료들과 생활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작가의 선택이긴 하지만, 감옥 생활이 약간 낭만적으로 묘사된 것은 감안하고 봐야 한다. 주인공 용민은 학생운동권에서도 핵심에 속하는 총학생회 부회장이어서 처벌도 더 엄하게 받을 걸로 예상하고 있었다. 용민의 경험으로만 보면, 학생이 경찰에 잡혀와서 폭행이나 고문을 당하지 않은 것은 퍽 의례적이다. 90년대 중반의 사회상황이 80년대와는 많이 달라진 것은 분명하지만,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나 이한열 최루탄치사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80년대 경찰은 잔인하고, 악랄했다. 80년대와 그 이전 시기의 민주화운동, 감옥 생활을 잘 그린 작품이 '나는 공산주의자다'와 '짐승의 시간'이다. 두 작품 모두 박건웅 작가의 작품으로, 비전향장기수, 김근태 의장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들에서 경찰과 정보기관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참혹함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이 작품에서 경찰은 잡혀온 학생들을 폭행하거나 고문하지 않는다. 주인공 용민만 겪은 예외적인 상황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용민과 그의 친구들이 구치소 안에서 생활 개선 투쟁을 벌일 때도 교도관들은 학생들을 달래기만 할 뿐, 그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용민이 깨닫는 건, 그들의 힘이 더 강하고, 정부가 학생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수많은 학생들이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정권의 폭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 시민들의 여론도 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위기여서 정부가 학생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용민은 '사상범'으로 분류되었지만, 강력범들 가운데서도 전과가 많은 사람들이 있는 방에서 생활한다. 용민이 관찰하는 조폭들은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몸에 문신과 흉터가 많은 것을 제외하면, 용민이 생활하는 8개월 내내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낸다. 오히려 범죄자라는 사람들이 학생들을 응원하고, 구치소 생활개선 투쟁을 할 때도 함께 하는 등 학생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 용민도 대학에 들어와서 광주항쟁에 관해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운동권 학생이 된다. 그가 정의로운 사람으로 성장하는 바탕에는 그의 아버지 역할도 컸다. 자식이 어렵게-무려 3수를 하면서-대학에 들어갔는데, 학교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시위만 하고 다니고, 수배자가 되어 경찰에 쫓기는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많은 우리의 부모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자 정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정권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용민의 아버지는 누구보다 자식이 하는 말과 행동을 믿고, 반대하지 않았으며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작품으로, 구치소의 경험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어 특별한 작품이다. 한국처럼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하는 나라는 많지만, 그 경험을 그래픽노블로 생생하게 표현한 작품은 매우 드문 것으로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홍모 작가의 그림이 참 좋다. 작가는 한국화를 전공한 걸로 아는데, 나는 그의 그림이 퍽 따뜻하고 다정다감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 문화
    • 만화
    2021-09-26
  • 저 하늘에도 슬픔이
    제목 : 저 하늘에도 슬픔이작가 : 이희재출판 : 청년사 이윤복은 대략 1951에서 1953년 사이에 태어났다. 한창 한국전쟁이던 시기에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 역시 몹시 가난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윤복의 동생은 모두 세 명으로, 순나, 윤식, 태순이가 있다. 윤복이 어려서 엄마가 집을 나갔는데,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가난이 너무 힘에 겨워서였거나, 남편이 폭력적이었거나 두 가지 모두가 원인이었거나 하겠지만, 시간이 흘러 윤복이 쓴 일기가 세상에 알려지고, 윤복이 신문에 등장하고, 그의 일기가 책으로, 영화로 유명해지면서 집을 나갔던 엄마와도 연락이 되는 걸로 알려졌다. 윤복의 바로 아래 동생인 순나도 돈을 벌겠다고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스스로 집을 나갔는데, 윤복의 일기가 책으로 나오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윤복이 국민학교 4학년이던 당시는 1960년대 중반이다. 95%의 사람들이 빈민이어서 가난은 당연하고, 하루 세끼를 다 먹는 집도 드물었다. 설령 끼니를 해결한다 해도 쌀밥이 아닌, 잡곡, 밀가루, 죽 같은 음식들로 끼니를 해결하고, 김치를 많이 넣고 끓인 쌀죽이나 수제비, 양이 많은 국수 등을 먹었다.모두 가난하게 살았지만 이윤복의 집은 특히 더 가난했다. 그의 가족은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거나 이틀, 사흘씩 끼니를 굶을 때도 있었으니 아이들의 배고픔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매우 안쓰럽다.윤복은 집안의 장남으로 소년가장의 역할을 해야만 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목수였으나 몸이 아파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고, 엄마가 집을 나가 사라진 상황이라 정상적인 가정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윤복은 거리에서 껌을 팔아 푼돈을 벌어 끼니를 해결하거나, 돈이 없을 때는 동생 윤식과 함께 집집을 다니며 밥과 쌀을 구걸해 먹었다.다행히 그는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학교 선생님이나 급우들은 윤복의 처지를 알고 도와주었다. 특히 김동식 선생님이 윤복의 처지를 알고는 경제적 도움은 물론, 친구 기자에게 윤복이의 삶을 보도하도록 소재를 제공하고, 윤복이 쓴 일기를 보고 책으로 내는 일에 도움을 주는 등 윤복의 삶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윤복이의 일기가 세상에 알려지고, 그의 일기가 책으로 출판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덕분에 윤복의 가정은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윤복 자신에게도 학업을 지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다. 윤복은 39세에 병을 얻어 사망하는데, 그가 성인이 된 이후에는 어려서 헤어졌던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 함께 살았다. 짧고도 기구한 삶이었지만, 이윤복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가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일기를 썼다는 사실이다. 글을 쓴다는 건 의식적인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하는 행위다. 더구나 윤복의 처지는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없는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음에도 그가 글을 꾸준히 썼다는 것이 다른 어린이들과 달랐고, 그 일기의 내용이 솔직하고 절절한 자기 감정과 생각을 드러냈다는 것 역시 남다른 점이었다. 누가 윤복에게 일기를 쓰라고 권유한 사람이 있을까도 생각할 수 있지만, 아마도 일기는 윤복의 자발적 의지에 따랐을 거라고 생각한다.윤복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어린 시절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가난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나는 60년대 초반에 태어나서 이윤복과는 약 10년 정도의 터울이 지는데, 윤복의 경험과 많은 부분이 겹친다. 우리집도 매우 가난했고, 가끔 밥을 굶었으며,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벌을 받거나 집으로 돌려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도 친구와 신문을 떼다 거리에서, 버스에서 신문을 팔아본 적도 있고, 점심 도시락을 가져가지 못해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에서 믈로 배를 채운 적도 많았다. 아버지가 무능한 것도 같았지만 다행히 나에게는 엄마가 있었고, 엄마가 일을 해 우리 가족을 먹여살렸다.윤복의 삶을 들여다보면, 나는 고생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모두들 사는 것이 고생이었고, 힘들고 괴로워도 그것을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윤복의 가족은 빈민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사실 빈곤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도 많았으니 그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으리라.이 만화를 그린 이희재 작가는 작품의 주인공인 이윤복과 동년배다. 작가가 어린시절에 우연히 이윤복의 일기를 읽게 되었고, 자기와 같은 나이의 윤복이 겪은 가난의 설움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고 회고했다. 이희재 작가는 퍽 좋아하는 작가인데, 우선 그의 그림이 아름답다. 그의 작품은 아름다운 그림에서 먼저 빛이 난다. 주인공들의 생생한 모습이 살아 있고, 따뜻하고 다정한 그의 선은 슬프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주는 느낌이다.이제는 절대 빈곤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한국이지만, 우리의 이웃들 가운데 극소수는 여전히 윤복이의 가족처럼 힘겹고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가끔 언론에도 보도되는 것처럼, 굶어죽는 사람이 있고, 가난해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는 다수가 굶주림에서 벗어나 먹고 사는 문제가 절대절명의 상황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고, 그늘에서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이 없는가 돌아봐야 할 때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이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이리라.
    • 문화
    • 만화
    2021-09-26
  • 수상한 연립주택
    제목 : 수상한 연립주택작가 : 오영진출판 : 창비 서울 변두리 마을에 있는 낡은 연립주택에는 모두 여섯 가구가 살고 있다. 건물 주인이 바뀌어 새 주인이 이사를 오는데, 세입자들은 건물주인을 우습게 생각한다. 연립주택에서 가까운 곳에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가 집주인 남자이고, 여자는 부잣집 딸로, 남편의 병원을 친정아버지가 차려주었다고 남편을 우습게 아는 여자다.옥탑방에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청산유수로 하는 청년이 사는데, 고시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그냥 백수다. 옥찹 아래 4층에 주인 내외가 살고, 3층에는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박사장 가족, 2층에는 아내가 회사 다니고, 남편인 오공식은 전업주부로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하고, 1층이자 반지하에는 이혼하고 딸과 함께 살면서 유흥업소에서 밴드 마스터로 일하는 남자 강씨와 늙은 개와 함께 사는 장씨 할머니가 있다.이들은 저마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만, 소시민의 삶이 대개 거기서 거기라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잘 참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집주인은 이 연립주택을 허물고 새로 건물을 지으려 한다. 집주인과 세입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힘으로 밀어부치던 집주인은, 조물주보다 위라는 건물주의 위세가 전혀 먹히지 않자, 세입자를 회유해 '문화통치'를 시도한다.그 와중에 집주인 여자는 옥탑방 청년과 바람이 나고, 어느날 이 지역 일대가 재개발지역으로 발표되면서, 집주인이자 '항문외과' 원장인 의사는 마침내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꿈도 잠시, 연립주택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사는 비둘기가 희귀한 종이어서 그 지역이 재개발지역에서 제외된다는 구청직원의 말을 듣고, 집주인 의사는 특단의 조치를 마련한다. 그것은 새를 잡아먹는 뱀을 몰래 들여와 나무에 풀어놓자는 계획인데, 그 계획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된다.이야기는 좀 황당하지만, 집주인과 세입자들의 이야기는 사실적이고 생생하다. 옥탑방에 사는 남자는 고시공부를 하지만 그는 이미 7년째 시험에서 떨어졌고, 앞으로도 시험에 붙을 확률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는 백수다. 하지만 외모가 번듯하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은 좋다. 시험에 합격하진 못했어도 그동안 읽은 책이 있어 법에 관해 잡다한 지식이 많다. 그래서 집주인이 하는 말을 법률적으로 반박하기 때문에 집주인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집주인 여자가 이 청년에게 반한 것도 이유가 있다. 연하의 남자이고, 외모도 잘 생겼으며, 말도 청산유수로, 교양 있는 말만 하기 때문이다. 청년은 집주인 여자를 누님이라고 부르고, 그 여자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옥탑방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반지하에 살고 있는 고3 학생 강희인데, 유흥업소 밴드마스터로 일하는 강씨의 딸이다. 모두들 사연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비극적인 사연의 주인공은 반지하에 사는 장씨 할머니다. 장씨 할머니의 아들이 이 연립주택을 짓는 공사장에서 일하다 사고로 죽었고, 그 보상으로 반지하 방을 하나 얻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씨 할머니는 집주인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낡은 연립주택의 운명은 필연적으로 헐리게 되어 있다. 다만 그때가 언제일지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마침내 그때가 오고, 연립주택은 재개발로 인해 헐리게 된다. 한 건물에 살며 이런저런 인연을 맺어오던 이웃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집주인 남자만 행방불명이 되고, 이야기는 미스터리를 남긴 채 끝난다.오영진은 이전에도 독특한 소재로 만화를 그리곤 했는데, 그의 그림은 개성 있다. 그의 작품이 그래픽노블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퍽 아쉬운데, 작가에 관한 평가가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은 작가 자신의 경험과 함께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실성과 유머, 공감을 함께 보여주는 내용이어서 읽는 즐거움이 있다.
    • 문화
    • 만화
    2021-09-26
  • 사랑은 혈투
    제목 : 사랑은 혈투작가 : 바스티앙 비베스출판 : 미메시스 바스티앙 비베스의 작품. 그래픽노블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사, 지문이 거의 없고, 빠르게 그린 듯한 데셍과 거칠지만 적절한 색감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사랑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판 제목은 '사랑의 혈투'지만 원제목은 '도살'이라고 한다. 제목이 잔혹하지만, 내용은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오해하고, 다시 사랑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수많은 나날을 함께 지내면서 때로는 오해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즐겁고, 기쁘게 지내는 연애의 과정을 단순한 그림이지만 생생한 묘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연애 초기, 연인은 헤어지기 아쉽고 떨어지고 싶지 않은 애틋한 장면이 보인다. 하지만 뒤를 이어 곧바로 수송기에서 낙하하기 직전의 군인 모습이 보이고, 낙하(연애)가 처음인 신병에게 선임병이 말한다. 저 아래(연애의 세계)에 '엄청난 살육'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충고한다.청년은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그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쁘다. 두 사람은 왈츠를 추는데, 이 춤이 곧 연애를 상징한다. 두 사람이 서로 호흡을 맞춰 춤을 추는 것은, 사랑하는 관계를 우아하고 아름답게 표현했다.두 사람은 사랑을 하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오해가 일어나고, 한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이런 일은 연애 기간이 지속되면서 가끔 일어나고, 두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육체에 상처를 입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남성이 여성을 몽둥이로 때리는 장면, 여성이 남성의 어깨를 칼로 찌르는 장면은 오해와 말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몸을 다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걸 보여준다.두 사람은 결국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이별 음식'을 선택하는데, 그들이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의 애틋함과 다정함은 이별의 메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어정쩡하게 헤어지고, 여자가 다시 다른 남자를 만나자, 연인이었던 남자는 여성에게 달려가 사랑을 구걸한다. 여자 역시 예전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새로 만난 남자를 버리고 달려가지만, 두 사람은 다시 서로에게 실망하고, 담담하게 헤어진다.사랑과 연애는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험이다. 요즘 청년들 사이에는 스무살, 서른살이 되어도 연애를 못해본 사람들이 있다는데, '모태 솔로'라고 자조하는 말이 나올 정도라면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청년 시기에 사랑과 연애를 많이 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성숙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청년들의 연애를 보면, 일부이긴 해도 상식에 어울리지 않는 찌질함과 위험한 모습이 보이는데, 연애하다 헤어진 사람을 스토킹하거나, 연애할 때 찍었던 사진과 영상을 온라인에 올리거나, 그걸로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협박하는 걸 보면서 연애를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사람의 미래를 짐작하게 한다.결혼은 이제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애하는 것은 선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삶에 큰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유전적으로, 남녀의 사랑은 자신과 가장 유전인자가 먼 사람을 선택하는 행위라고 한다. 즉, 유전적 친화관계가 멀수록 더 건강하고 우월한 유전자로 대를 이을 수 있기 때문에 유전자는 호르몬 분비를 통해 자신과 가장 다른 사람(이성)을 선택하게 되고, 그렇게 다른 사람이 만나 새로운 생명을 만들면, 건강한 유전자를 가진 2세가 태어나 유전자를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다.유전적으로 멀다고 해서, 두 사람의 성격이나 애정의 깊이에 거리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유전자가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것과는 달리, 사람은 자신의 취향과 감성, 지성에 따라 상대를 선택한다. 즉, 유전자와 사람의 이성이 복합적으로 상대방을 선택하는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정신병동 이야기
    제목 : 정신병동 이야기작가 : 대릴 커닝엄출판 : 이숲 작가는 정신병동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만화를 그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종류의 정신병이 비슷하지만 다 다르고, 복잡한 원인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정신병'의 공통점은 모두 '뇌'에서 발생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뇌에 관한 생물학, 유전학적 분석은 깊지 않지만, 상식으로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꽤 도움이 되겠다. 인간의 뇌는 수백만 년(약 700만년)에 걸쳐 느리게 진화하다 지금부터 약 20만년 전부터 급격하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가 공생하던 시기에 인류는 서서히 수렵 채취에서 정착, 농경 단계로 진입하게 되는데, 육식의 비율이 높아지고, 불을 이용한 화식이 늘면서 인류의 육체는 커지고 뇌 발달도 빠르게 진행했다.문제는,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갖게 되면서 시공간 개념을 이해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추상하며, 언어를 구사하는 복잡한 뇌 구조로 진화하면서 그만큼 문제가 생길 확률도 높아졌다. 복잡한 뇌기능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유전적 영향 등 선척적인 원인은 물론, 후천적 환경에 노출되면서도 쉽게 영향을 받아 이상이 발생한다. 정신병의 많은 부분은 선천적 원인에 있다고 하지만, 현대의 정신병은 후천적 요인의 비율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높다고 알고 있다.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그가 '자본'의 지배를 받지 않을 만큼 부르주아라면 문제가 없겠지만-자본의 노예로 생존하는 자체로 큰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생존을 위해 노동해야 하는 것부터 존재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는데, 여기에 수많은 경쟁 속에서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살아야 하고, 소음, 공해에 시달리며 육체와 정신이 늘 긴장과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면역계가 파괴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물질숭배 사회에서 인간은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건강하고 온전한 인간관계는 맺기 어려운 세상이 되면서, 개인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스스로 소외당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스트레스는 외부에서 충격을 주지만, 받아들이는 뇌에서는 뉴런, 스냅스, 호르몬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결국 물리적 자극을 통해 뇌를 변화시킨다. 우리가 보고, 듣고, 믿는 것이 완벽하지 않은 것은 뇌의 활동의 결과를 마치 '나'라는 존재가 판단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아'와 '뇌 기능'의 관계는 물리적으로 동일하지만, '이성적 의지'와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인류에게 '뇌'의 문제는 진화와 관련해 매우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소년의 마음 - 소복이
    제목 : 소년의 마음작가 : 소복이출판 : 사계절 소복이의 그림과 글을 퍽 좋아하는 나는, 소복이가 그린 책을 찾아 읽는다. 이 그래픽노블을 보면서, 소년의 마음에 감정이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나도 소년처럼 울었다.가족과 함께 있어도 행복하지 않았던 시절, 부모의 불화 속에서 늘 우울하고 외롭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때로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더 많이 혼자 철둑길의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어린이에게 집과 부모는 세계의 모든 것이고, 절대적이었는데, 그 세계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온 존재가 불행하다는 뜻이기도 하다.소복이는 이런 어린 소년의 마음을 잘 읽고 그려내고 있다. 소년은 슬프고, 외로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자신을 귀여워하고 사랑한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상상의 세계에서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여전히 소년을 사랑하고, 따뜻하게 안아준다. 그 힘으로 소년은 현실의 슬픔과 외로움을 견딘다.세상에 홀로 남겨졌다해도,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힘든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 소년에게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추억이 있고, 다행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지낸 사람은 부러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나이 들어도 원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확률이 높다. 가난하고 조금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그때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심하지는 않아도, 가끔 꿈속에서 나는 슬프고 외롭다. 어린이는 행복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정이 행복하지 않다면, 사회에서라도 어린이를 돌봐야 한다. 이 책의 주인공, 소년의 모습이 보편성을 얻는 것은,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많기 때문 아닐까.
    • 문화
    • 만화
    2021-09-24
  • 풀 - 김금숙
    제목 : 풀 작가 : 김금숙 출판 : 보리 김금숙 작가 작품. 그래픽노블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이렇게 과거의 기록을 남길 때다. 구술사의 경우,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구술자의 말을 글로 기록하게 되는데, 기록의 생생함을 글로만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글은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복원되지만, 독자의 상상은 독자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로 인해 제한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래픽노블처럼 글과 그림이 동시에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독자의 상상력을 확대하고, 고증의 완벽성이 관건이긴 하지만 독자의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또한 글만 읽을 때의 어려움을 그림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가독성을 높이고, 내용의 이해를 도우며, 책읽기의 즐거움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그래픽노블을 단순히 만화라고만 생각하면 큰 오판이다. 그림은 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으며, 글의 내용이 전달하고자 하는 원래의 목적을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이 작품은 일본군 성노예로 붙잡혔던 이옥선 할머니를 작가가 직접 인터뷰해서 그리고 쓴 작품이다. 이럴 때,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작가는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동질감을 갖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므로, 똑같은 소재라 해도 남성 작가가 접근하는 것보다는 훨씬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작가는 그림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붓과 먹을 이용한 흑백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흑백은 과거의 시간을 그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미지이며, 붓과 먹은 우리의 전통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 우리의 역사를 전통의 방식으로 다루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작가의 그림은 한국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과거의 시간에 채색을 하는 것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 잔인한 과거의 흔적을 묘사하는데 흑백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가는 일본군의 만행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의 마음을 묘사하는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그것은 이 역사적 사건에서 피해자가 주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를 가해자 중심으로 놓고 보면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간단한 예로, 박정희 정권에서 희생당한 인혁당 사건의 주인공들을 그릴 때도, 박정희 정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식과 인혁당 피해자와 가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분명하고 엄연하게 다르다. 역사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는 역사를 누구의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와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역사의 시각과 관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일본군 성노예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비틀릴 수밖에 없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일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도는 한국의 지식인 사이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이 사건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단지 포주와 창녀의 돈벌이로 왜곡, 격하시키는 발상은 일본이 늘 주장하고 바라는 관점이다. 이옥선 할머니의 경우, 당시 조선의 가난한 민중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일본의 수탈, 조선의 지배계급의 무능과 부패, 강대국에 침탈당하는 약소국의 비애, 식민지를 확대, 강화하는 제국주의의 발현 등 당시 역사의 총체적 사건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지와 편견, 왜곡된 지식으로 친일파가 되어버린 인간들의 역겨운 인식이 날뛰는 꼴을 볼 수 있다. 김금숙 작가의 작품으로 오멸 감독의 영화를 그래픽노블로 창작한 '지슬'이 있다. '지슬' 역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제주4.3을 피해자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작가는 붓과 먹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흑과 백이라는 단순함은 이미지의 강렬함과 함께 주제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일수록 컬러보다는 흑백이 어울리는 이유는, 다채로운 색으로 분산되는 독자의 시선을 작가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금숙 작가의 이 작품과 '지슬'도 그렇고, 박건웅 작가의 일련의 작품 - 짐승의 시간, 노근리 이야기 등 -도 흑백으로 창작되었다. 김금숙 작가의 작품 주제인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고, 제국주의 일본이 침략했던 나라에서는 공통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이 전쟁범죄는 인권과 가장 깊은 관계가 있고, 특히 여성의 성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세계여성운동과도 밀접하다. '풀'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편성을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영국 '가디언'의 2019 최고 그래픽노블, 프랑스 휴머니티 만화상 심사위원특별상,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2019 올해 최고의 만화 등으로 선정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전쟁범죄, 성노예 범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과 김금숙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일본군의 성범죄에 대한 증언을 외면하고 왜곡한다. 일본이 아무리 오리발을 내밀어도, 역사는 분명하게 진실을 증언하고 있으며, 세계의 상식은 일본의 범죄를 규탄하고 있다. 김금숙 작가의 이 작품이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고, 전쟁 범죄의 잔혹함을 증명하며,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서 더욱 뜻깊다. 한국의 만화가들 가운데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아버지의 노래
    아버지의 노래 김금숙 작가 작품.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가가 태어난 1970년의 농촌 마을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지배하던 시기였지만 전통적으로 조선의 농업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시골이다. 농촌 마을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를 겪고, 곧 이어 전쟁까지 겪으면서 격렬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도 농업의 근간을 잃지 않은 뿌리깊은 전통을 유지하는 곳이다. 그런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는 농사를 하는 부모님과 아홉 형제의 막내로 자란다. 기본적으로 건강한 가족 사이에서 자란 것을 작가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농사를 짓던 부모가 농사를 포기하고 서울로 이주하기로 작정한 것은, 70년대의 커다란 흐름과 관계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이후 경공업의 활성화와 수출 위주의 산업구조 개편을 통해 농업 위주의 나라에서 산업국가로 이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의 자본가들이 한국에 공장을 짓고, 값싼 노동자를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첫번째 방법이었으며, 여기에 10대의 여성 노동자들이 대량 투입되었다. 이들은 가난한 시골의 여성들로, 학교는 국민학교 졸업 또는 중학교 졸업이 전부인 여성들로, 집안의 경제에 도움이 되기 위해 어린 나이에 공장에 취직한 어린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 심지어는 철야로 일을 하며 노동력을 값싸게 공급했고, 자본가는 막대한 이윤을 챙길 수 있었다. 노동력 확보를 위해 시골의 젊은이를 도시로 불러오도록 하는 정책은 농촌을 구조적으로 수탈하는 방식이었으며, 가장 핵심은 쌀값을 올리지 않는 것이었다. 낮은 쌀값은 농민의 생계를 위협했고, 농민 특히 대지주가 아닌 빈농은 먹고 살기 위해 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부모님도 농업만으로는 먹고 살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자식들의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대학을 졸업하면 거의 전부 취업을 할 수 있었고, 취업은 곧 집안을 일으키는 것과 동일한 인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낸다고 '우골탑'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작가의 부모님은 이미 서울에 살고 있던 작가의 큰외삼촌(엄마의 남동생)에게 땅 판 돈을 맡기고 서울로 올라가지만 외삼촌은 그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 그로 인해 작가의 가족은 큰 어려움을 겪고, 도시빈민으로 전락한다. 도시 이주와 관련해 수많은 비슷한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흔하디 흔한 이야기지만, 가족의 배신으로 고통을 겪는건 언제나 분노를 일으킨다. 작가의 부모는 과일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힘들고 고생이 많은 나날이지만 대가족을 이루고 있던 작가의 가족은 서로 힘을 합해 어려움을 이겨나간다. 그 과정에서 이미 어른이 된 오빠와 언니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기로 한다. 어지간한 집안에서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내기는 쉽지 않았다. 막내였던 작가는 부모와 형제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고, 고향인 시골마을에서 대도시로 이주하면서 발생하는 괴리로 인해 정신적으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옮겨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다만 그런 환경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불만과 고통을 참으며 살아갈 뿐이다. 작가는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그 재능을 살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그렇게 작가가 한국을 떠나는 것은 가족과의 연대를 끊는 것이기도 하지만, 개인으로는 성장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고, 애틋하고 안쓰러운 가족의 아픔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작가는 가난하게 자랐지만 그늘지지 않고 밝고 쾌활하게 자랐음을 알 수 있는데, 가난해도 부모의 깊은 애정과 형제들의 우애가 이들을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자살도
    자살도 '홀리랜드'의 작가 코우지 모리의 작품. 열일곱 권으로 완간. 한국에서는 '아일랜드'로 번역 출판. 전작인 '홀리랜드'도 주인공을 비롯해 등장인물과 배경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사회에서 일탈된 '비정상'의 인간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 개개인이 비정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발생하고, '홀리랜드'나 이 만화의 주인공들도 사회의 경쟁과 구조 속에서 발생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홀리랜드'에서는 주로 학교의 불량배들과 따돌림과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등장했다. 기존의 시스템에서 '불량배'들은 도태된 인간들을 말한다. 학교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을 만드는 곳이고,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청소년은 '불량품'이라고 낙인찍힌다. 즉, 청소년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감성은 억압당하고, 획일화된 프로그램 안에 갇히게 됨으로써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큰 그림으로 보면 체제의 희생자들이다. 억압기제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탈하거나 폭발하는 것인데, 가해자는 자신들보다 더 약한 존재를 괴롭힘으로써 억압의 스트레스 강도를 낮추려한다. 따라서 학교폭력의 피해자는 이중의 고통을 받으며 억압의 강도가 커지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이던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자살도'에서는 수많은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한 인간들이다. 그들이 살던 사회는 경쟁과 억압이 일상화된 사회이며, 누군가를 끊임없이 짓밟고 올라서지 못하면 짓밟혀 가라앉게 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려서부터 일방 폭력(가정폭력, 성폭력)에 노출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자아가 형성되기 전부터 심각한 폭력에 시달린 사람들이라 일방적 피해자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사회에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가해자들의 논리에 시달린다. 자살도에 버려진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행운아들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들에게 생존의 이유도, 생존의 열정도 없다는 점에서, 그들이 살아있다는 건 오히려 불행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에서는 자살미수자들을 무인도에 버리는데, 그곳에서 자살을 하든, 서로를 죽이든, 아니면 섬에서 굶어죽든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명백히 국가가 저지르는 범죄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음에도 무인도에 유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자살자들은 섬에 내리는 즉시 모두 자살을 해야 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결국 자살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섬에 버려진 사람들은 무정부 상태에 놓여진 무리이고, 그들은 스스로 처음부터 새로운 삶의 기준을 만들어가야 한다. 누군가 앞장서야 하고, 각자 역할을 해야하며, 서로 돕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자살은 혼자 결정하면 되지만, 살기 위해서는 협동하고, 의논하고, 노동하고, 일정한 규칙을 만들어 적응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정부가 예상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섬에 버려지는 상황을 그린 작품은 '배틀로얄'이나 '파리대왕'처럼 극단적 상황을 보여주는 내용이 있지만, 이 만화는 상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주인공 '세이'는 작가의 전작인 '홀리랜드'에서 주인공 '유우'와 비슷하다. 세이도 어떤 이유에선지 자살을 시도하지만 살아남는데, '유우'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면 '세이'처럼 되었을 것이다. 세이는 의지도 약하고, 마음도 여린 사람인데, '자살도'에 들어와 오히려 삶의 의지가 강해지고, 자신의 능력을 발견한다. '유우'가 스스로 연습한 복싱을 통해 집안에서 바깥으로 나가게 되고, 결국 강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구도를 갖고 있다. '자살도'에서는 크게 두 집단이 대립하는데, 이는 인류의 발전단계에서 씨족-부족의 단계에서 발생하는 전투와 약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투와 약탈은 식량과 노예의 확보가 목적이다. 무인도에 버려진 이들도 인류의 초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이들의 대립은 일정한 생산성이 확보될 때까지 계속된다. 초기에는 식량 확보에 급급했던 자살자들은 조금씩 먹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들이 살아남아야 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관한 해답을 얻는다. 그것은 알고보면 매우 쉬운 내용이지만, 그들에게는 놀라운 깨달음이었고,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홀리랜드
    홀리랜드 코우지 모리의 데뷔작이자 출세작. 한국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열여덟 권으로 완간했다.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건 아니지만 개성이 있고, 일본 주류 만화와 다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이 만화는 일본에서 히트작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리 널리 알려지진 않은 걸로 안다. 이 만화를 그린 코우지 모리가 한동안 방황하면서 겪었던 사건을 바탕에 깔고 있어서 꽤 생생한 느낌이 드는 '거리의 싸움꾼' 만화다. 주인공은 카미시로 유우라는 고등학생이다. 그는 중학교 때 심하게 따돌림을 당하고, 학교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학교도 자주 가지 않고, 집에서도 가족과 대화하지 않으며 방안에서만 지내던 히키코모리였다. 그러던 그가 '아프지 않게 맞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이 복싱 교본을 보고 따라하기를 하면서였다. 그는 하루에 5천번씩 스트레이트 연습을 할 정도로 집중하는데, 그가 밤에 길거리에서 '불량배 사냥꾼'이 된 것은 그의 내면에 응어리진 분노때문이다. 유우는 독학으로 배운 복싱 기술로 불량배를 몇 명 때려눕히지만, 그의 앞에 나타나는 강자들을 상대하기에는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 이 만화는 그래서 영웅설화의 과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영웅은 좌절하는 인간이며, 고통과 고난의 과정을 겪고 무사히 귀환하거나 누군가를 살린다. 유우는 시대에 버림받고, 민중에게 버림받은 영웅이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자 애를 쓰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적은 너무 많고, 강하기 때문이다. 이때 영웅을 돕는 인물이 등장한다. 카네다 신이치가 그의 정신적 동반자라면 이자와 마사키는 유우의 성장을 돕는 멘토이자 앞서가는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유우는 이자와 마사키를 만난 이후 늘 그를 동경하고 존경한다. 그의 롤모델이 된 것이다. 이자와 마사키 역시 유우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다. 두 사람은 전혀 모르던 사이지만,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유우는 자신이 싸워 이기거나 진 상대를 찾아가 그들의 장점을 배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이 진짜 강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인데, 유우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유우의 친구인 카네다나 이자와는 유우의 내면이 강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유우가 중학생 때 따돌림을 당하고, 동급생이나 상급생들에게 얻어 맞고 돈을 빼앗긴 것은 그가 육체적으로 약하다기 보다는 폭력에 대응할 마음의 자세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자와 마사키도 마찬가지여서, 전국대회에 나갈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복싱선수였던 이자와였지만, 규칙이 없는 길거리 폭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유우는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불량배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본격 길거리 싸움꾼의 삶을 만들어간다. 학교에서 불량배라 해도 길거리에서 1대 1로 싸움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유우는 여러 학교에서 주먹깨나 쓴다는 일진들을 상대로 1대 1로 싸워 그들을 때려눕힌다. 그가 배운 것은 복싱이지만 레슬링, 공수도, 복싱, 검도 등 여러 분야의 강자들을 상대하면서 성장한다. 소재는 거리의 싸움이지만 당연히 성장만화이고, 약자, 패배자였던 한 소년이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작가인 코우지 모리는 키 183센티미터, 몸무게 85킬로그램으로 운동을 좋아하고 잘 하는 사람이다. 그가 만화가로 데뷔하기 전, 일시적으로 방황하던 때, 길거리 싸움을 경험했고, 그의 친구이자 유명한 만화가인 미우라 켄타로가 코우지 모리에게 힘들었던 시기를 만화로 그려보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이 만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주인공 카미시로 유우는 선량하고 유약한 청소년이지만, 워낙 괴롭힘을 심하게 당해서 스스로 히키코모리가 되고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그가 우연히 복싱의 기본을 배우게 되면서 길거리로 나오고, 불량배를 때려눕힐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는데,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 이야기는 발전적으로 그려지지만 정작 유우의 가족들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주인공과 가족 사이가 여전히 소원하고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짐작한다. 부모는 의외로 잔소리도 하지 않고, 염려하는 마음이지만 유우의 생활에 참견하지 않는다. 즉 상당히 방임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이 유우에게는 부모가 무관심하고 애정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을 듯하다. 그래도 유우가 스스로 밤거리로 나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쳑하게 된 것도 가족의 방임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는데, 불꽃같이 타올랐던 유우와 그의 친구들의 밤거리 생활도 학교를 졸업하면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게 되고, 유우를 비롯해 몇몇은 여전히 거리의 전설로 회자된다. 학교를 졸업한-어쩌면 졸업하지 못한-유우의 삶은 어떻게 될까. 적어도 그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히키코모리의 트라우마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많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때려눕힌 실력자이며, 스스로 강자의 반열에 올랐음을 확인했다. 그러니 과거에 발목이 잡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자기의 길을 걸어갈 것으로 기대한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스트리트 페인터
    스트리트 페인터 [3그램]의 작가인 수신지 작가의 작품. 작가의 자전적 작품으로,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던 시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림체가 동글동글 귀엽다. [3그램]도 그렇고 이 만화도 표지만 봤을 때는 외국 작가의 작품인 줄 알았다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한국 작가라는 걸 알았다. 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초상화나 캐리커쳐를 그려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만화에도 그런 천태만상이 드러나지만, 사람은 많은 경우 상식적이고 좋은 사람들이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 때문에 사회는 흙탕물이 된다. 옛말처럼,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을 흐린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기적이고, 자신의 안위를 가장 먼저 살핀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이기심을 조금씩 누르고,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생존확률을 높이고, 자손을 더 많이 퍼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생존률을 떨어뜨리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은 미대에 다니는 대학생으로, 아르바이트 삼아 거리 화가에 지원한다. 구청에서 마련한 장소에서 비교적 편하게 자리를 잡지만 경험이 없어서 다른 거리 화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람들의 얼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때 보여주는 사람들의 반응이 퍽 다채롭다. 시각을 조금 달리해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거리의 화가들에게 자신의 초상화나 캐리커쳐를 그리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화가의 시선이 아닌, 일반 시민의 눈으로 바라보면, 비록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지만 그들의 재능을 높이 산다는 것이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에 대한 선망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같은 '거리의 화가'라 해도 우리가 농담처럼 말하는 '몽마르뜨의 화가'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나도 프랑스 여행 때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림 그리는 거리의 화가들을 지켜봤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삶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적인 관광지인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거리의 화가'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지고,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더 자유롭게 자리잡고 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림 뿐아니라 음악도 그렇고, 판토마임이나 연극, 춤, 노래도 그렇다. 모든 예술행위를 하는 예술가들이 거리에서, 공연장에서 보다 활발하고 자유롭고, 마음 놓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따로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일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3그램
    3그램 미메시스 그래픽 노블. 작가가 경험한 암 투병기를 그리고 있다. 20대 여성으로 난소암을 발견하고 투병 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말한다. 물론 정작 작가는 그 시기를 결코 담담하게 보낼 수는 없었겠지만, 지금은 완치되어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으니 만화를 보는 독자는 안심하고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다. 암투병과 관련해 감동적인 만화는 김보통 작가의 '아만자'를 들 수 있다. 그에 비해 이 만화는 상대적으로 담담하고 편안하다. 작가가 자신의 암 투병 과정을 과장하지 않고, 희망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암이라는 병은 여전히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이미지다. 주인공은 퍽 운이 좋아서 암이 3기였지만 전이가 안 된 상태로 수술을 할 수 있었고, 현대의학이 암을 불치병이 아닌, 난치병 수준으로 낮추는 훌륭한 성과를 이뤘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암'은 현대의학에서 가장 위험한 병으로 알려졌다. '암'은 세포가 비정상으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인체의 세포들이 적절한 통제를 통해 세포의 생성과 성장, 소멸의 과정이 이뤄지는데, '암'은 세포의 일부가 비정상적으로 재생산을 빠르게 진행하는 것으로, 신체의 통제에서 벗어난 활동이다. '암'은 유전적 요소도 있지만 후천적 환경에 의해 발병할 확률이 더 높으며, 음식과 공기, 생활습관이 암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졌다. 인체의 온도가 1도 올라갈 때마다 암세포가 줄어들 확률은 커지고, 육식보다는 채식, 발효음식을 먹는 것이 암을 예방, 치료하는데 좋다고 알려졌다. 내가 아는 사람은 대장암 3기였는데, 몇 년의 암치료를 통해 완치했다. 그는 암이 발생하기 전에는 술과 담배, 육식을 날마다 했고, 그렇게 수 십년의 시간이 흐르자 암이 발생했다. 그는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삶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그는 암치료를 하면서 마치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거쳤다. 술, 담배는 물론 고기도 거의 먹지 않았고,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하면서 시골로 이사해 하루 종일 산을 걸어다녔으며, 미역국과 물김치, 채소샐러드만을 먹었다. 그 과정에서 살도 많이 빠졌고, 암은 재발하지 않았다. 물론 가장 큰 항암의 요소는 병원의 치료였지만, 그에 걸맞는 운동, 음식, 체질개선 등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했기 때문에 건강을 찾을수 있었다. 유전적 요인 때문에 암에 걸리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더 많은 경우가 현대생활의 문제 때문에 발생하고 있으니 '암'을 현대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은 자연식이 아닌, 공장제품일 경우가 더 많고, 육식의 비중이 평균치인 15%-이것은 인간의 치아를 기준으로 산정한 것이다-보다 높기 때문에 과대한 육식은 건강에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유기농 제품만을 먹자는 말은 아니다. 공장제품은 적게 먹을수록 좋지만 유기농만을 고집하는 것도 지나친 태도다. 암은 초기에 발견할수록 완치 확률이 높아지고, 암의 발병률이 높은 것은, 암을 진단하는 기술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암'은 현대의학으로 극복 가능한 수준까지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암'으로 죽는다해도 그것은 자신의 삶이 만든 결과이므로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말자.
    • 문화
    • 만화
    2021-09-24
  • 자꾸 생각나
    자꾸 생각나 미메시스의 그래픽 노블. 만화책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만화가 예전과는 다른 갈래가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만화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며 창작물이지만, 그동안은 수준이 낮은 장르로 여겨왔다. 이것은 만화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다. 소설도 흔히 삼류소설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준이 낮은 모든 창작물은 비주류로 묶여 천대받아왔다. 그러던 만화가 언젠가부터 '그래픽 노블'로 분류되면서 당당하게 고급한 예술작품으로 팔리고 있다. 같은 만화임에 분명하지만 소위 말하는 '대본소 만화'나 '공장 만화'가 아니라 '작가주의' 만화를 지향하기 때문이고, 그만큼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래픽 노블은 특히 유럽에서 창작이 활발하다. 미국여행 때, 서점에 들러서 그래픽 노블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기대보다' 종류가 많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유럽과 한국, 중동,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의 그래픽 노블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어서, 나처럼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아닐까 한다. 그래픽 노블의 장점은 소설과 만화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이야기)의 구조와 만화(그림)의 수준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수준이 낮으면 그래픽 노블의 자격을 잃게 된다. 모든 만화가 다 '그래픽 노블'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야기와 그림의 수준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에서 핵심은 '그래픽' 즉 그림이다. 그림과 이야기가 모두 훌륭해야 하지만, 그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없다. 그래픽 노블 작가는 만화가와 소설가를 섞어 놓은 듯한, 그 둘의 장점을 모두 갖춘 부러운 존재들이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래픽 노블 작가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들의 능력이 퍽 부럽다. 이 만화는 송아람 작가의 장편 그래픽 노블이다. 웹툰으로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었는데, 그래서인지 만화의 특징인 네모칸이 없다. 게다가 무려 600쪽이 넘는 분량이어서 만화지만 읽기가 만만찮다. 내용은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다룬 것인데, 주인공들이 만화가들이어서 자전적 요소가 있어 보인다. 만화 주인공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하고 진지한 시간들이겠지만, 시간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독자인 내 눈에는 찌질해 보인다. 청춘의 찌질함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리려 했다. 생각해보면, 청춘의 지난 날은 아름답기 보다는 찌질했다. 자의식 과잉과 편견, 심각한 자기애, 오해와 독단 등의 감정이 분출되었고, 감정적으로 미숙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우습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영화를 만드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보인다. 즉 솔직한 감정 표현들이 민망하고 불편하지만 그런 감정과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청춘들에게는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포르투갈
    포르투갈 잘 만든 양장본에 두툼한 두께의 이 그래픽 노블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그림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그래픽 노블의 특징이자 장점인 그림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그래픽 노블을 선택하는 가장 큰 요소는 그림이다.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림이 수준 이하라면 보고 싶지 않다. 반대로 내용은 별로인데 그림이 훌륭하다면 그것은 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래픽 노블에서 최우선 요소는 역시 그림이다. 지은이는 월트디즈니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고, 이후 만화가로 전업하면서 유명한 만화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책만 봐도 말할 필요 없이 최고의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삼부작으로 구성되었고, 주인공 시몽 뮈샤는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만화가지만 작가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 있고, 삼대로 이어지는 집안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잔잔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지고 있다. 주인공 시몽은 만화가로 작품집도 발표한 작가지만 심각한 슬럼프 상태에 있다. 그는 애인과의 사이도 벌어지고, 세상 일이 심드렁하고, 삶의 의지도 박약한 상태로 침체되어 있는데, 포르투갈에서 열린 작은 만화축제에 참가한 다음, 포르투갈과 자신의 끈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프랑스 사람으로 살아왔던 시몽에게 포르투갈에 자신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 할아버지의 고향이자 뿌리가 포르투갈이라는 사실은 뜻밖의 사실로 다가오고, 마음이 끌리는 걸 느끼게 된다. 그동안 가족들과도 소원하게 지내온 주인공은 사촌의 결혼식을 계기로 프랑스를 벗어나 포르투갈에서 한동안 지낼 생각을 하게 되고, 그동안 만나지 않았던 사촌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포르투갈은 프랑스에서 멀지 않지만, 중간에 스페인이라는 큰 나라가 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처럼 보인다. 포르투갈도 중세 유럽의 식민지 개척 시기에는 강력한 국가였지만 지금은 유럽에서는 힘이 많이 빠진 중진국이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선진국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쇠퇴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라의 여건이야 어떻든 이 만화에서는 포르투갈의 평범한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중진국 수준이지만 이들은 소박하고 낙천적인 성향으로 낯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친절하게 대하고 있는 걸 보여준다. 주인공 시몽은 자신의 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의 역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도 조금은 더 가까워지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들-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사촌들과도 쉽게 한 식구처럼 가까워진다. 이런 현상은 포르투갈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따뜻한 환대와 열린 마음, 가족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들의 문화 덕분이기도 한데,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 느끼지 못한 따뜻한 분위기가 시몽의 태도와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시몽의 할아버지는 형제가 프랑스로 취업 이민을 위해 고향 포르투갈을 떠났고,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시몽의 할아버지인 아벨은 프랑스에서 사망한다. 아벨의 동생이자 시몽에게는 작은할아버지인 마뉴엘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고, 두 집안은 그때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반전은 주인공 집안인 무샤의 집안이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를 알려주는 전설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전쟁을 하던 시기에 포르투갈의 한 마을에 스페인 기사들이 찾아오고, 한 아이를 재워달라고 부탁하고 기사들은 떠나간다. 그 아이는 혼자 남게 되고, 그 마을에서 자라 농부가 되는데, 그가 바로 '무샤' 집안의 조상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로만 본다면 '무샤'집안의 뿌리는 스페인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마지막 이야기는 퍽 낭만적이고 애틋해서 찡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며 감동이 더하는 이 그래픽 노블은 여러 번을 봐도 좋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유료 서비스
    유료 서비스 이 만화는 '성매매'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질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선진국인 캐나다에서는 이런 '성매매'가 많은 부분 합법이어서 우리 사회와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성매매'는 남성이나 여성-거의 대부분은 여성-의 성착취라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합리화할 수 없다. 작가이자 이 만화의 주인공인 채스터 브라운의 주장대로 '성매매의 합법화', '성매매의 자유화'가 이루어진다 해도, 성을 파는 사람은 늘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작가의 발상은 순진한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성매매'를 하기 시작한 것은 섹스 없이 한 집에서 살던 여자친구가 새로운 남자친구가 같은 집에서 동거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느낀 이후였다. 작가의 동료들이 그 점을 지적하면서 '너의 내면에 여성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쌓여 있다'고 말하지만 작가(주인공)는 이 주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은 지극히 정상이고, 평온한 심리 상태이며, 여성에 대한 어떠한 분노나 환멸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의식에 자리잡은 감정까지 사람이 알 수는 없다. 트라우마가 왜 생기겠는가. '성매매'를 시작하는 과정을 보면 주인공이 아무리 자신의 처지를 부정해도 '여성에 대한 환멸과 분노'의 감정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만화의 내용은 철저하게 남성 주인공의 입장과 시각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성매매 여성들은 모두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며, 남성의 시각으로 재단당하고 평가된다. 즉, 여성이 '인간'으로서 동등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의 인식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우며 여성을 존중하는 평균 이상의 지식인이라 해도 '성매매'를 바라보는 시각만큼은 여전히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의 틀 안에 갇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매매를 하는 여성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지만, 그 여성들이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솔직하게 말했을까는 알 수 없다.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성매매가 아무리 합법이라 해도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 책을 두고 수 많은 매체와 인물들이 이 책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작가이자 주인공의 경험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만화는 한 남성의 성매매 경험담이므로, 남성의 시각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주인공의 경험과 시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성매매 여성의 입장에서 수 많은 성매매 남성들의 태도를 바라보는 만화책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빨간 풍선
    빨간 풍선 작가는 '빨간 풍선'이라고 써 놓고, 영어 제목은 'The Purple Balloon'이라고 썼다. 의도한 것일까? 이 작품집에 들어 있는 내용은 삶의 아이러니를 그리고 있고,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하지만 쉽게 잊어버리기는 어려운, 삶의 찌꺼기, 잔해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만화가는 소설가가 갖지 못한 위대한 장점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소설가는 글로만 자신의 상상을 표현하지만, 만화가는 소설가의 글솜씨와 그보다 더 멋진 그림으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구축하기 때문에, 내게 만화가는 소설가보다 더 위대한 존재다. 내가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는 이유는, '만화'라는 형식을 빌려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표현하고, 공감을 얻는 창작을 하기 때문이다. 단지 소설만이었다면 세상은 얼마나 심심했을까. 물론 소설은 그 나름대로의 재미와 세계가 충분히 있다는 건 알고 있고, 나 자신, 소설을 쓰고 있는 입장에서 소설보다 만화가 더 좋다고 고백을 하는 건 조금 굴욕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기꺼이 '그래픽 노블'을 쓰고 그리는 만화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 만화는 한국의 많은 '만화작가'들 가운데 한 명인 김수박 작가의 작품집이다. 이 만화에 실려 있는 만화는 만화가게에서 무협지를 넘기듯 1초에 한 장씩 넘기는 그런 만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김수박 작가의 만화 뿐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모든 '그래픽 노블' 작가들의 작품은 작품 전체를 아울러 깊이와 철학을 발견하는 재미로 천천히, 한컷 한컷 글과 그림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번째 작품인 '개변기'는 상황 자체가 끔찍하다. 이 만화는 개에 대한 극단적 혐오를 드러내고 있어서 동물보호단체나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본다면-그런데, 이 만화를 그런 사람들이 안 봤을 리 없을텐데,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것도 이상하다-결코 지나치지 않을 내용이다. 하지만, 이 만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를 혐오하는 나'가 아니라, '개와 같은 인간을 싫어하는 나'이기 때문에, 여기서 변기에 빠진 개는 우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 같은 인간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소심한 복수는 그 '개와 같은 인간들'을 변기에 쓸어 넣고, 온갖 화학물질을 들이부어 잔인하게 없애버리는 것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온갖 화학물질을 투입해 막힌 변기가 뚫리는 날, 나는 친구들을 불러 떠들썩한 파티를 연다. 변기에 쓸려 내려간 개에 대해 일말의 연민도 없다는 점에서 '나'는 싸이코패스처럼 보이지만, '개같은 인간들'에게 동정이나 연민의 마음을 갖지 못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감정 아니던가. 일곱번째 작품인 '첫사랑'은 사랑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역겨운 것인가를 잘 드러낸다. 모든 첫사랑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첫사랑의 풋풋하고 애틋한 감정이 시간이 지나 그것을 다시 마주했을 때, 예전의 시간에 갇혀 있던 '첫사랑'과 시간이 흘러 지금 많이 변한 내 모습에서 오는 심한 괴리감이 구토를 일으킬 정도가 된다. 여기서, 변한 것은 '첫사랑'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변한 것을 모르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첫사랑'과의 만남이 결국 '섹스'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의도했던, 생각하지 않았던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역겨운 현실이라는 것에 '나'는 자기환멸을 느낀다. 만화를 읽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다. 만화를 많이 좋아하는 나는 이런 '그래픽 노블'이 풍성해지고 다양해지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제는 볼 만한 만화책이 없어서 고민이 아니라, 너무 많은데 사볼 돈이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도바리
    도바리 1980년을 배경으로 주인공 대학생이 경찰에 쫓기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니는 '운동권 대학생'을 이 책의 제목처럼 '도바리'라고 했다. 물론 운동권 대학생 뿐 아니라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수배자가 되었고, 잡히지 않으려 '도바리'를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때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고비를 맞고 있었는데,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지금은 '광주민주화운동'이 공식 인정된 명칭이지만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르던 그때는 '광주사태'라고 했다. 모든 언론에서는 광주에 무장간첩이 내려와 시민을 학살하고 있다는 새빨간 거짓뉴스를 퍼뜨렸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운 것이 바로 그때의 언론이었고, 그 언론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산다. 물론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도 잘 먹고 잘 산다. 이런 걸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만화의 주인공 김인권은 운동권 학생으로 수배자가 되어 남쪽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그는 '소설가'라고 말하고 작은 마을에서 민박을 하거나, 마음 좋은 노인을 만나 '조카' 노릇을 하며 일도 하고 밥도 얻어먹는다. 그가 찾아다니는 시골의 작은 마을들에는 대개 선량하고 순박한 주민들이 많았지만, 조금 더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도 온갖 타락한 인간관계와 권력구조가 개인과 작은 집단을 억압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결국 거대한 악인 군부쿠데타 세력을 없애면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던 김인권은 자신이 보고 느낀 현실에 절망하고, 경찰에 체포당한다. 80년대 '운동권'은 그때로는 비장하고 고결한 정신으로 적(쿠데타 세력)과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한없이 유치하고 비뚤어진 태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운동권 세력-은 적어도 군부쿠데타에 정면으로 맞섰으며, 이 나라를 다수의 민중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80년대는 여전히 전근대와 봉건의 의식이 많이 남아 있었고, 변증법적 유물론과 마르크스, 레닌을 부르짖는 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봉건적,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질서에 젖어 있던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들(운동권)은 민주주의의 시민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군부쿠데타 세력과 싸워야 했고, 모든 역량은 '반독재, 민주화'의 깃발 아래로 모여야 했다. 결국 전두환이 장기집권의 꿈을 포기하고, 노태우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88년 올림픽이 열리고,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문민정부'라는 타이틀을 세울 때까지, 막연하지만 온몸을 던져 싸운 그때의 20대 청년들의 피와 땀과 눈물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주인공은 수배자로 도망다니면서 민중 속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폭력을 보며 좌절하는 한편, 후배인 우광진이 전남도청에 남아 쿠데타 세력과 마지막 전투를 치를 때까지의 일기를 보면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당대(80년대)의 역사적 의미를 뼈저리게 느낀다. 지금 우리가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박근혜를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한 것이 한국의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고, 우리가 직접 만들어 냈다는 것을 가슴 절절하게 느끼는 것처럼, 80년대의 청년들 역시 자신들이 지금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묵직하게 느끼고 있었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피부색깔 꿀색
    피부색깔 꿀색 입양아의 자전적 이야기. 이 만화를 그린 주인공 전정식은 다섯 살 때 고아원에서 스웨덴의 한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면서, 과장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고,가능한 있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국은 지금도 어린이를 외국으로 입양 보내는 나라이고, 외국의 가정에 입양된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겪은 많은 이야기들이 한국에 알려지고 있다. 입양의 문제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입양아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아니면 내가 잘 모르고 있거나) 입양아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소수 가운데서도 소수의 문제라 사회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어쩌다 외국에서 입양아로 성장한 사람이 유명해지는 경우는 긍정적인 부분만 강조하기 위해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입양아가 갖게 되는 심리적 혼란과 자아 정체성의 불안에 관해서는 이해는 하지만 공감하기는 어렵다. 그런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깊고 끈질기게 자신의 삶을 끌어당기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만화에서도 구체적으로 뿌리가 뽑힌 자신의 모습을 여러 번 그리고 있는데, '엄마'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는 그 사람의 온 생애를 불안하게 만든다. '엄마 부재'에 관한 불안은 나도 어렸을 때 느낀 적이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 아무도 없었다. 배가 몹시 고팠지만 먹을 것은 없었고, 낡은 찬장에는 신김치만 한 그릇 있었다. 신김치를 먹고 물을 바가지로 들이키고 나서 동네에 뛰어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땅거미가 질 때까지 놀다 들어와도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혹시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뱃속에서 설움이 복받쳤고, 눈물이 흘렀다. 엄마가 없다는 상상만으로도 서러움이 복받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 책의 저자가 가졌을 막막함과 서러움과 불안과 허무함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백인 사회에서 백인 부모를 둔 동양인 아이의 삶이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혹독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선진국의 성숙한 시민의식과 물질적 풍요로움이 한국에서 고아로 자랐을 때 받았을 가난과 열악한 환경을 어느 정도는 상쇄할 수 있을 거라 위안을 삼을 수는 있겠지만, 뿌리가 없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입양아들이 그렇듯, 주인공도 나이가 들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한국을 방문한다. 어머니에 대한 하염없는 그리움을 간직한 채 희미한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기대하지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입양아들 가운데는 친엄마를 만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주인공은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이 만화는 더욱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고, 입양아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솔직하게 질문하고 있다. 가난하지만 부모 밑에서 자란 내가 행복하다고 느낄 정도로, 주인공이 겪는 뿌리 없는 삶의 고통은 헤아리기 어렵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팔레스타인 - 조 사코
    팔레스타인 - 조 사코 한 권의 만화로 팔레스타인의 삶을 이렇게 깊이 있고 절절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소설이나 논문, 사회과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독자를 끌어당기기 어려운 심각하고 진지한 현실을 객관으로 바라보면서도 고통, 슬픔, 분노, 웃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공감을 얻는 작가의 능력은 탁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수구반동 집단이 집회를 할 때 미국국기와 이스라엘국기를 들고 나타난다. 이들은 특정한 종교를 교조주의적으로 신봉하는 미개한 존재들인데, 이스라엘이 '반기독교'라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는 무지하고 멍청한 인간들의 집단이라고 봐도 좋다. 하여간, 그런 이스라엘이 제2('이'라고 읽으면 안 되고, '투'라고 읽어야 대통령 후보 자격이 있다.)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미국과 유럽의 비호, 특별히)영국의 비호 아래 지금의 땅을 점령해 유대인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세웠는데, 문제는 이미 그 땅에서 오래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폭력으로 쫓아냈다는 것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꼴이고, 그들이 그렇게 당했다고 사방팔방 떠들어 대던 '유대인 학살'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악랄한 방법으로 시전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막강한 자본을 동원해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반면, 정작 진짜 피해자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국제사회에 호소할 힘조차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다. 그들이 놓여 있는 처지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으며, 일상적으로 유대인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어린이, 여성, 노약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 만화에서, 유대인의 폭력은 말할 것도 없이 심각하고 전쟁범죄이며 반인륜의 행동이지만,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여성과 어린이처럼 사회적 약자가 이중, 삼중의 억압과 폭력을 당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된 타도의 대상은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사회적 약자의 희생이 강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목적이 정당하다고 수단이 무시된다면, 우리가 그동안 겪었던 진보진영 내부의 봉건잔재와 가부장적 폐해, 남성우월주의가 또다른 폭력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유대인과의 전쟁 때문에 팔레스타인 내부의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말하는 건 전형적인 억압사회의 태도다. 이슬람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봉건적 억압이 사라지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 문제는 단지 이스라엘과의 전쟁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 국가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얽혀 분열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뒤에 국제깡패 미국이 총칼로 무장하고 있는 상태에서,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팔레스타인이 해방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전체의 민주주의의 발전은 필수 요건이다. 조금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이든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이든 현재의 분쟁을 있게 한 것은 결국 종교 때문이다. 그들은 동일한 신을 믿으면서도 서로를 학살하지 못해 안달하는 중이고, 거의 대부분의 학살은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삶보다 존재하지도 않는 신의 존재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한, 이런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할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제목 :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작가 : 박건웅 출판 : 북멘토 박건웅은 작품은 대개 충격적이고 놀라운 작품들이다. 그 이유는, 그가 한국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가가, 시사만평을 그리는 것도 아닌데, 유독 한국현대사의 핵심만을 다루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다. 게다가 박건웅의 작품은 미학적으로도 훌륭하다. 그의 그림과 표현 방식은 많은 경우 판화적 표현 기법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흑백 판화는 표현의 강렬함과 함께 이미지가 드러내는 상징성이 탁월한 기법이다. 흑백 그림은 박건웅의 작품에서 특히 '흑과 백' 즉 '선과 악'의 구도이자 '적과 아군'을 상징하며, '생과 사'를 드러내는가 하면,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게 하고, '지옥과 천국'을 상징하기도 한다. 흑백 그림은 잔혹하고 처참한 사실적 묘사를 지우는 대신, 역사와 진실에 더욱 주목할 수 있도록 만든다. 최용탁의 단편소설을 만화로 표현했는데, 원작의 생생한 언어들을 장면마다 살려내는 박건웅의 그림은, 세계의 많은 그래픽 노블 가운데서 특히 역사를 다루고 있는 그래픽 노블 가운데서는 가장 탁월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계의 현대사에서 학살과 관련한 사건은 무수히 많고, 그 피해자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한국에서 벌어진 여러 건의 양민학살은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했다. 이 만화는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남한에서 발생한 이 학살은 친일극우정권이 벌인 극악한 범죄의 일부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고 있으며, 친일(사실은 매국)정권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감추기 위해 가능한 역사교과서에서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비틀고 있다. 사실이나 진실을 들여다 보는 것은 때로 고통이다. 그저 모르고 살거나, 되도록 기억하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통스럽고 괴로운 역사일수록 우리는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되풀이하고, 친일매국노들과 수구반동 집단이 권력을 잡으면, 이런 양민학살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남한과 북한은 분단된 상태로 '휴전' 중이며, 사상 탄압은 변하지 않았고, 반대파를 '빨갱이'로, '좌익'으로 매도하고 그들을 폭력으로 단죄하는 것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세상에서 이 만화는 과거의 참혹함을 되새기자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한국 상황이 극단적으로 변할 것을 경계하는 뜻도 담고 있다. '정적(정치적 반대자)'이라는 이유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치 파리를 죽이듯 양민을 학살하는 정권이 여전하지 않은가.
    • 문화
    • 만화
    2021-09-24
  • 우리, 선화
    제목 : 우리, 선화 작가 : 심흥아 출판 : 새만화책심흥아 작가의 첫 번째 작품. 첫 번째 작품에 이 정도 뛰어난 수준이라면, 작가의 실력은 이미 검증된 것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글솜씨 또한 탁월하다.작가주의 만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톤'을 쓰지 않거나 적게 쓰는 것인데, 심흥아 작가의 작품에서도 이런 경향을 볼 수 있다. '톤'을 쓰되 그림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 정도로만 사용했다. 또한 톤을 한 가지만 사용하고 있고, 명암을 표현할 때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이 작품에 관한 소개를 보자.일란성 쌍둥이 자매이지만 속은 다른 봉선화와 봉우리, 그리고 할아버지라고 놀림을 받을 만큼 나이 드신 아빠, 이렇게 세 사람이 봉씨네 식구이다. 창문이 있고, 장마에 물 들어올 걱정 없고, 세탁기를 놓을 정도 크기의 화장실이 있고, 개수대가 두 개인 싱크대가 놓인 집에 살아 보는 것이 큰딸 선화의 소망일 정도로 소박한 살림살이이다.더 나을 것도 없는 셋집으로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던 봉씨네는 쌍둥이가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 이사를 또 하게 된다. 마을버스 기사인 아빠가 안면 있는 승객인 스님의 제안으로 정착할 집을 마련할 때까지 절집으로 사는 곳을 옮기기로 한 것인데, 새초롬한 성격의 ‘우리’는 그 상황이 너무 못마땅하다. 그렇게 절집 사람들과 식구가 되어 3년째를 맞이한다.선화는 자기 환경을 껴안고 견디며 진학을 포기하고 만화가가 되고자 하고, 언제고 집을 벗어나리라 마음먹고 있던 우리는 계획한 대로 상고 졸업 후 취업하자마자 독립하기 위해 집을 떠난다. 그 사이 아버지는 드디어 절집에 들어갈 때의 생각대로 온 가족이 모여 살 만한 집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선화와 우리는 쌍동이 자매지만, 선화가 언니 노릇을 하고, 그래서인지 속이 깊다. 하지만 동생인 우리에게서 따뜻한 자매애를 느끼면서, 쌍동이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이야기는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선화의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담담하면서 나즈막히 가라앉은 나레이터, 선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집을 떠나 독립하려는 우리가 선화에게 준 선물, 브래지어를 하면서, 본 적도 없는 엄마가 생각난다는 말에, 울컥 눈물이 난다.선화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만화를 그리고 싶어하지만, 제과제빵 기술을 배워 먹고 살 준비를 한다. 고생 끝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집을 떠났던 동생 우리가 돌아오면서, 삶은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선화처럼, 나도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거의 50년 가까이 되었는데, 내가 국민학교 때 이미 아버지는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 작품 속에서 선화 아버지는 마을버스 운전을 하며 집안을 이끌어 가는 능력자였지만, 내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는 내가 어릴 때부터 백수 노릇을 했다.선화는 엄마의 얼굴을 모르지만, 나는 어머니와 줄곧 살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내가 치렀으니, 그런 면에서는 선화보다 조금 운이 좋았다고 할까, 엄마의 그리움을 덜 느낄 정도라고 할까.어린 선화가 성장하면서 느끼는 섬세한 감정이 녹아 있는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삶과 함께 독자의 마음까지 성장하도록 만드는 따뜻한 마음이 녹아 있다.
    • 문화
    • 만화
    2021-07-3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