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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흘 그리고 한 인생
-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장편소설. 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 곧바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빠른 전개와 속도감 있는 문장, 심리 스릴러의 긴장이 팽팽하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주인공의 눈에 비치는 가족과 이웃의 모습이 재해석되고 있다. 작가는 시작하면서 독자를 향해 묵직하게 한방을 날린다. 겨우 열두 살인 주인공 앙투안이 여섯 살이던 옆집의 꼬마, 귀엽고 자기를 잘 따르던 착한 꼬마 레미를 살해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아이를 살해한 것을 보면 싸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앙투안이 레미를 살해한 이유를 억지로 들어 변명하자면, 레미의 집에서 키우고 있는 개 윌리스는 앙투안을 매우 잘 따랐다. 앙투안이 혼자 숲속에서 오두막을 짓거나 혼자 시간을 보낼 때, 윌리스는 친구처럼 가깝게 앙투안 옆을 지켜주었고, 외로운 앙투안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런 윌리스가 우연히 교통사로를 당해 다쳤고, 윌리스의 주인이자 레미의 아버지인 데스메트는 고통으로 죽어가는 윌리스를 위해 총을 쏴서 절명시킨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 포대에 넣어둔다. 이 장면을 지켜본 앙투안은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던 순간에 숲속으로 레미가 찾아왔고, 앙투안은 슬픔과 분노로 발작을 일으켜 레미에게 그의 아버지 데스메트를 투사해 죽이게 된 것이다. 물론 이건 변명이고 합리화다. 한순간의 발작으로 좋아하는 레미를 죽인 앙투안은 자기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깨닫는다. 그는 레미의 주검을 은폐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엄마에게 거짓말한다. 그날 오후부터 레미의 부모는 아이가 실종되었다고 경찰에 신고하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마을 근처를 수색한다. 레미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앙투안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레미의 부모, 경찰이 앙투안에게 레미의 행방을 묻지만, 앙투안은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이 곧 들통나 자기는 감옥에 갈 거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레미가 실종되고 이틀 뒤부터 마을에는 어마어마한 태풍과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마을은 쑥대밭이 된다. 큰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레미의 실종이 안타깝지만, 수색에 나설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레미의 실종 사건은 시간 속으로 묻힌다. 앙투안이 레미를 죽인 후, 몇 번이고 자백할 마음을 먹고, 심지어 자살할 생각까지 했으며, 끊임 없이 스스로 자책하고, 벌을 받게 될 것을 상상하면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앙투안은 싸이코패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고등학교를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진학하며서 마을을 떠난다. 단 한 순간도 마을에 있고 싶지 않았고, 마을을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맹세까지 했다. 하지만, 앙투안의 맹세는 깨진다. 마을을 떠나고 12년이 지난 뒤, 앙투안은 다시 집을 찾는다. 마을 주민인 르메르시에 씨의 60회 생일 파티였는데, 그는 앙투안의 엄마를 고용한 사람이기도 했다. 앙투안은 여자친구가 있고, 지금은 인턴으로 의사가 되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12년만에 돌아온 마을은 이미 많은 것이 변했다. 이웃이던 레미의 가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고, 레미의 아버지는 뇌출혈로 사망했다. 앙투안은 엄마의 부탁으로 하루 마을을 찾았는데, 이날 저녁에 우연히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에밀리를 만나 갑작스럽운 섹스를 한다. 그리고 12년 전, 앙투안이 레미를 살해했던 그 숲이 재개발된다는 뉴스를 본다. 앙투안은 숲이 재개발되면 레미의 시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다시 범인을 찾는 수사가 시작되면 자기가 체포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마을을 떠나 여자친구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지만, 몇 달이 지나 갑자기 에밀리가 찾아와 앙투안에게 임신했다고 말하고, 앙투안은 에밀리에게 낙태를 하라고 애원하지만, 에밀리의 아버지는 유전자 검사를 해서라도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낼 거라고 소리친다. 그때, 레미가 묻혀 있는 숲속에서 아이의 형해를 발견하고, 아이의 것이 아닌 머리카락을 발견했으며, 그 머리카락의 유전자를 검사하면 범인을 찾아낼 수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앙투안은 유전자 검사의 덫에 걸리고, 에밀리와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앙투안은 마을을 영원히 떠나고 싶었으나, 오히려 영원히 마을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는 에밀리와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으며, 마을 의사가 되어 마을 주민을 진료하고 있었다. 에밀리는 앙투안과 그랬던 것처럼, 아무 남자하고 불꽃같은 섹스를 하면서 살았고, 아이의 아버지가 앙투안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앙투안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며칠 동안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무의식 상태에서 갑자기 소리를 지르던 그녀가 몇 사람의 이름을 불렀는데, '앙드레'라는 이름을 앙투안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마을 병원에서 진료를 보다 '안드레이 코발스키' 씨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그가 '앙드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코발스키 씨는 곧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다고 말하며, 앙투안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앙투안은 열두 살 때, 발작을 일으켜 레미를 살해했던 그 당시, 도로를 지나다 우연히 발견한 자동차가 코발스키 씨의 차라는 걸 떠올렸고, 엄마가 코마 상태에서 '앙드레'를 애타게 불렀던 것을 결합하면서, 진실을 알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다. 앙투안은 한순간의 실수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그의 삶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앙투안은 17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것도 아주 우연한 계기로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사람이 누구인지, 누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 가득한 인생의 쓴맛에 대해.
백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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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을 따라
의식의 흐름을 따라 1 오늘은 하루 온종일 쉰다. 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쉰다. '쉰다'는 '쉬다'의 현재형으로, 무언가 하지 않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쉬는 날'은 일하지 않는 날을 뜻하며, '쉬는 곳'은 편하게 있는 장소를 말한다. '쉴 틈이 없다'는 매우 바빠서 한가한 틈이 없다는 말이고, '편히 쉬세요'는 몸으로 움직이는 행동(일, 노동) 뿐아니라 복잡한 마음까지도 내려놓고 기운을 부드럽게 다스리라는 뜻이다. 반면, '밥이 쉰다', '음식이 쉰다'처럼 음식이 부패하는 과정의 단계를 뜻하기도 하며, 소리를 많이 지르거나,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거칠거나 잘 나오지 않는 걸 '목이 쉬다'고 한다. 무엇보다, '쉬다'는 '숨을 쉬다'로 완결한다. 모든 생명은 숨을 쉬는 것으로 생명 활동을 이어가며, 숨을 쉬지 않게 되는 순간부터 생명체의 정체성을 잃는다. 나도 지금 숨을 쉬고 있어,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생각하며, 이렇게 글을 쓴다. 숨을 쉬는 건 살아가는 근원의 활동이지만, 한편 음식이 상하는 과정처럼, 생명 활동의 노화가 진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쉬다'의 활용이 생명 활동과 음식물이 상하는 과정을 함께 보고 있다는 점에서 선조의 지혜가 놀랍다. 2 페이스북에도, 대형 커뮤니티에도 온통 보기 싫은 내용만 올라온다. 크게 두 가지다. 굥, 콜걸, 그 일당이 저지르는 온갖 악다구니와 파렴치와 야비와 뻔뻔함이 그것이고, 민주당 내부에서 벌어지는 비틀린 페미니스트의 갑질과 개혁을 비웃고 자기 개인의 출세와 영리만을 추구하는 양아치들이 벌이는 극도의 혐오스러운 행위가 그것이다. 그들의 욕망과 욕구와 탐욕과 이기와 질투와 비루함의 결과로 조국 전 장관과 가족들이 처참하게 (정치, 사법적으로) 학살당했고, 이제 개혁을 주장하는 최강욱 의원을 살해하고 있다. 실력도, 능력도, 상식도 없는 비루한 것들이 얄팍한 권력을 잡자 동료를 학살하고, 적들과 손을 잡고 개혁을 질식시키고 있다. 너무 혐오스러워 구역질이 나온다. 무능한 자들이 권력을 갖게 되면, 마치 어린아이가 총알이 든 총을 가진 것처럼, 자기 제어, 통제를 하지 못한다. 비로 직전의 정부가 많은 부분 잘 했고, 또 많은 부분 잘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사악하거나 야비하거나 천박하지는 않았다. 지금 권력을 잡은 자들은 무능하고, 멍청하며, 사악하고, 야비하고, 천박하다. 올바른 역사관, 정치관, 세계관이 없으니 국가를 올바르게 운영할 능력이 없는 건 당연하고, 주변 강대국의 전술에 휘둘리며 국가의 이익을 뺐기기만 할 뿐이다. 무능하고 멍청한 권력자에게서 권력을 뺐어야 한다. 마치 총을 든 어린아이에게서 총을 뺐는 게 당연하듯. 3 백수가 이렇게 피곤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힘든 나날이다. 일주일에 두 번 하던 글쓰기 강의도 하나가 끝나고, 이제 마지막 강의만 남겨두고 있다. 시민단체 활동도 많은 일을 하는 건 아니나, 참여하는 자체로도 신경 쓸 일이 있고, 즐거운 한편 힘들기도 하다. 여기에 끝이 없는 집안 일과 안팎으로 소소하게 신경써야 하는 일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그런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간다. 이럴 때 부르주아가 부럽다. 돈이 많으면 돈으로 사람을 사서 내 시간을 대신할 수 있는 게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세상에 태어나 자랐으니 그 한계가 너무 명확해서, 자본가, 부르주아 아니면 노동자 계급에 속할 수밖에 없고, 확률통계상 90%에 해당하는 노동자 계급에 속하게 된 건 당연한 결과일테다. 내가 만약 10%에 속하는 자본가, 부르주아였다면 여기서 이런 한심한 말이나 늘어놓고 있지 않을텐데. 이상적 사회주의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루 4시간 사회를 위해 노동하고, 나머지는 나 자신의 창조적 삶을 위해 살아가는 사회, 모두가 고르게 평등하고, 빈부가 사라지고, 문화, 예술이 꽃피우고, 자본주의 폐해인 경쟁, 이기, 착취가 사라지고, 텔레비전에서 연애, 오락방송이 아닌, 깊이 있는 다큐멘터리와 문화, 예술 프로그램과 즐거운 토론으로 격조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회라면. 4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옳고 그름의 가치가 뒤섞이며, 상식과 윤리의 기준이 흔들리는 세상이다. 과거에도 그랬다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지금이 가장 심각하다. 경제 성장으로 나라와 개인의 부가 증가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확산하고, 과거에는 무심코 넘어가던 인권의 문제가 매우 세부적으로 나뉘면서, 각 세대, 집단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건 바람직하고 당연한 역사의 발전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편협, 악의, 이기, 무지한 자들의 선동과 만행으로 고결한 가치가 훼손되고, 더럽혀지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소수자 인권, 페미니즘이 약자의 무기로 작동하면서 선량한 시민을 해치는 흉기가 되는 꼴을 지금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축소하거나 제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옥석을 가려야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는 사람이 너무 많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개혁에 걸림돌이 된다는 걸 정확히 인지해야 하며, 그 방해물을 빠르게 제거하는 것도 개혁 시민이 해야 할 일이다. 5 카타르시스가 필요하다. 세상이 역겨울 정도로 참담하고 한심할 때, 나는 조용히 침잠한다. 책 읽고, 영화 보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세상으로 난 문을 닫는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존재 의의가 있지만, 그 사회가 추잡하고, 역겨울 때는 잠시 몸을 숨길 필요가 있다. 다만, 몸을 숨길 수 없는 사람들, 어쩔 수 없이 힘들과 괴로운 나날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카타르시스 방법이 있을 걸로 믿는다. 일상을 무심히, 묵묵히 살아가는 건 지독한 세상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다. 밥 하고, 설거지 하고, 집안 정리, 청소하고, 책 읽고, 영화 보고, 음악 듣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나날이 당연하면서 치유의 시간이다. 마음 통하는 가족, 친구, 이웃과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시며 수다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고,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그런 시간 외에 그저 조용히 침잠하는 나날이지 않을까. 정치가 개인의 삶을 옥죄고, 불행하게 만들 때, 과거에는 거리로 뛰쳐나가 돌과 화염병을 던졌지만, 지금은 모두 두더쥐처럼 땅속으로 숨는다. 그런 비겁이 권력의 만행을 부추기고, 악행을 용인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나는 이기적 인간들이 싫다. 다른 사람의 피와 땀에 기생하는 자들, 열매만 따먹으려는 이기적이고 야비한 자들이 싫다. 그런 자들을 위해 내 피와 땀을 흘리기도 싫다. 6 누리호 2차 발사를 생중계로 봤다. 누리호가 힘차게 우주를 향해 날아오르는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뭉클하다. 우리에게는 우주가 있다. 우리는 '창백한 푸른 점'에 살고 있는 미미한 존재다. 무엇보다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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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의 '생존자'
르네 마그리트의 '생존자' 이 그림만 보고는 어떤 작가가 그렸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나도 꽤 안다고 생각했던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이란 걸 알았을 때, 약간 충격 받았다. 이 작품은 보자마자 느낀 생각이 '초현실주의' 작품이 아닌 듯하다 였다. 하지만 다시 보고, 조금 더 생각하니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작품이었다. 피카소는 두 편의 '학살' 관련 작품을 그렸는데, 하나는 1937년에 그린 '게르니카'다. 자신의 고향인 스페인에서 내전이 발발했고, 쿠데타를 일으킨 프랑코는 선거에서 승리한 인민전선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시작했다. 프랑코는 독일 히틀러에게 도움을 청했고, 히틀러는 폭격기를 보내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그곳이 바로 '게르니카'였다.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는 독일 폭격기에서 쏟아부은 폭탄으로 소멸했고,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이때 학살당했다. 전쟁과 아무 관련이 없던 작은 시골 마을에 당시 독일에서 개발한 최신 무기를 실험하면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히틀러와 프랑코의 만행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당시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던 피카소에게 스페인 정부(인민전선)는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할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피카소는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진 학살을 뉴스를 통해 보고 들었고, 이 참혹한 역사를 그림으로 기록하겠다고 생각하고 작품을 만들었고, 지금 우리가 아는 '게르니카'가 되었다. 또 한 작품은 '한국전쟁'과 관련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피카소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작품을 완성한다.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이다. 1937년 '게르니카'를 그릴 때 피카소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고 공산당원이 된 피카소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반전을 주제로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이 작품이 '미군이 한국인을 학살'하는 장면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전쟁의 비극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피카소도 후기 작품이 '초현실주의'로 변화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데, 피카소의 초기, 중기, 후기 작품들의 변화는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도 초기, 중기, 후기 작품의 변화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데, 두 사람의 작품의 변화 양상은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이 추구하는 작품 세계는 비슷한 면이 있다. 피카소와 르네 마그리트는 모두 공산당원이었으며, 피카소는 프랑스에서, 르네 마그리트는 벨기에에서 공산당원이자 예술가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두 사람 모두 예술이 '선전선동의 도구'가 되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고, 예술의 독창성, 작가의 자유로운 작품 세계, 제한 없는 창작의 영역과 시도를 그 어떤 작가보다 강렬하게 추구했다. '반제 반파시즘'과 '일당 독재(스탈린)'에 대해 강한 거부감과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던 사람이 조지 오웰이었고, 그가 '동물농장'이나 '1984' 같은 뛰어난 소설로 독재와 반지성을 비판했다면, 피카소와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방식으로 현대(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작품은 'The Survivor', '생존자'라는 제목이다. 만약 이 그림에 제목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그림에서 어떤 걸 발견하고,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모든 창작물에서 '제목'은 또 하나의 '상징'이 된다.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그 자체로 철학과 언어학의 주제가 되었다. 미셸 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작품만으로 책 한 권을 쓸 정도였다. 이 작품은 1950년,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전시회를 위해 그린 작품으로, 이 작품이 전시되면서 평론가와 관객들 사이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작품을 들여다보자. 배경은 벽이다. 그것도 어느 평범한 가정집의 거실 또는 안방 같은 공간이거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만나는 전실일 수도 있다. 위쪽으로는 꽃무늬 벽지가 가지런하고 단아하게 새겨져 있고, 아래쪽에는 양각한 나무 판자가 매우 엄격한 문양으로 반복하고 있다. 피가 흥건히 흘러내리는 총이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고, 왼쪽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오른쪽에 총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개머리판이 있는 바닥은 원목마루가 깔려 있고, 총기에서 흘러내린 피가 마루에 흥건히 젖어들고 있다. 이 그림만 보면, '초현실주의'가 아닌, '리얼리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초현실'로 보이는 대상 또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리얼'한 작품에서 '초현실'을 느끼게 되는 요인은 무엇이고 왜일까. 우선, 평범한 일상-가정집의 벽면-에 비현실적 요소-피묻은 총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장면이 곧 '초현실'적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이런 장면을 평생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것은 그림 또는 사진 또는 영상에서나 볼 수 있는 '비현실'의 재현이며, 따라서 현실의 초월한다. 또 하나, '생존자'는 누구인가. 관객은 이 작품의 제목을 보고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작품 제목이 하나의 '상징'인 이유가 여기 있다. 관객은 작가가 부여한 작품 제목을 받아들이게 되고, 제목의 영향을 받아 자의적 해석을 한다. '생존자'는 누구인가. 이 총 자체가 '생존자'인가, 아니면 이 총을 가져온 어떤 사람이 생존자인가. 이 총은 사람을 상징하는 '의인화'한 대상은 아닌가. 저 피는 누구의 피일까. 이처럼 많은 질문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지만, 르네 마그리트는 자기 작품에 상징을 부여하는 걸 경계하고 경고했다. 즉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다'라는 게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르네 마그리트의 모든 '초현실주의' 작품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건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르네 마그리트는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한다. 정해진 답은 없지만, 호기심을 갖고, 현실에 관해 의문을 던지고, 질문하는 것은 관객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르네 마그리트는 1차, 2차 세계전쟁을 겪은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가 정신병을 앓다 자살한 불우한 과거가 있지만, 좋은 아버지와 형제들 사이에서 건강하게 자랐고, 나이 들면서 벨기에 공산당에 가입해 공산당원으로도 활동할만큼 진보적 태도를 가졌다. 그의 작품 세계에 트라우마가 작용했을 거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이 작품 '생존자'는 세계 전쟁을 겪은 뒤 그가 가졌던 감정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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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마지막 인터뷰
문재인 대통령의 마지막 인터뷰 대통령의 인식과 주관은 뚜렷했다. 문재인 정부가 이룬 공과 과를 잘 알고 있었고, 훌륭한 성과가 묻힌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걸 느꼈다. 원칙주의자이자 합리적 보수의 인식을 가진 대통령은 한편으로 주관적 확신이 강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주길 바랐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억울하고 비참하게 살해당한 이후, 그 과정과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문재인 대통령이라면, 노무현의 꿈을 이룰 것이라고 당연히 믿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살해한 이명박을 감옥에 보낸 것까지는 좋았다. 이명박은 대통령 재임시절 분명히 범죄(뇌물, 횡령)를 저질렀고, 지금 죄값을 치르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보다 더 나쁜 것들이 일부 정치검찰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소환할 때, 창밖으로 내려다보며 비열하게 웃던 검사들을 보면서, 저들이 대통령을 발가락의 때처럼 여기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라면, 그런 정치 검찰을 때려잡고, 속시원하게 검찰 개혁을 하리라 믿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조국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으로 내정할 때, 비로소 검찰 개혁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상관인 법무부장관을 살해하는 걸 보면서도 끝까지 침묵할 때도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나름의 계획을 갖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경제는 선진국으로 진입했고, 특히 K-시리즈로 이어지는 팝, 영화, 춤, 패션, 음식 등 한국 문화 전반의 눈부신 성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성공했다. 하지만 국내 정치와 개혁 과제는 미진했다. 촛불항쟁으로 박근혜를 탄핵하고, 촛불정부로 시작한 문재인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국정과제는 '개혁'이었다. 그것도 강력하고 단호한 개혁이었다. 가장 먼저 검찰을 개혁하고, 언론을 개혁하는 것을 촛불시민은 바랐다. 진심으로 바랐다. 조국 전 장관과 가족이 정치 검찰과 그들의 개들에게 난도질 당하고 있을 때, 대통령은 뒷전에서 침묵했다. 나는 그 순간에도 문재인 대통령을 믿었다. 분명 무언가 내가 생각하지 못한, 한 차원 높은 수순을 만들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조국 전 장관과 가족이 갈갈이 찢기는 와중에, 촛불시민들이 안타까움과 분노로 치를 떨며 다시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었고, '조국'을 지키는 것이 곧 검찰 개혁이라는, '조국'이 개혁의 상징이 되어버리는 순간에도,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전 장관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훌륭한 인물,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마지막 인터뷰를 본 나는, 문재인 대통령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문재인을 과대평가했거나, 내가 가진 프레임에 맞춰 생각했거나, 나의 개혁의지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사했다. 그리고 실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원래' 점잖은 사람이고, 보수적 인물이며, 지극히 합리적 인물이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증오에 가까운 복수심과 뿌리를 뽑아야 하는 개혁의 의지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걸 몰랐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살해당하고, 노회찬 의원이 자살당하고, 박원순 시장이 자살당하는 걸 보면서, 적들에게도 똑같은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문재인 대통령이 해주길 바랐다. 자신의 오른팔인 조국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할 때는, 그만한 각오를 했을 터이고, 검찰과 언론의 발호를 막을 계획을 세웠을 거라고 믿었다. 자신의 오른팔이던 장군이 전장에 나가 적진도 아닌, 아군의 진영에서 무수한 배신자들에게 난자당하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면, 그게 훌륭한 지도자일까. 오늘 마지막 인터뷰를 보면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는다. 그는 자신이 모시던 노무현 대통령의 비참한 죽음도 외면했고, 자기의 오른팔이던 조국 민정수석, 법무부장관과 그의 가족의 정치적 살해도 외면했다. 자신이 아무리 '원칙주의자'이고, '법치주의자'라고 강변해도, 우리 촛불시민이 바란 건, 그런 '원칙'과 '법치'가 아니었다. 칼을 든 범죄자 앞에서 '원칙'과 '법치'만 말하고, 당장 살해당하는 자기 가족을 외면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믿고 따르거나,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다. 촛불시민이 대통령제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인 '대통령'을 만들었을 때, 우리가 바란건 대통령이 권력을 휘둘러 날카롭고 확실한 개혁을 하길 바랐다. 경제, 외교, 문화를 잘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 재임 기간에 경제, 외교, 문화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반목과 불신과 증오와 폭력이 난무했다는 걸로 기억한다. 정치검찰과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을 살해했고, 노회찬 의원을 살해했으며, 박원순 시장을 살해했다. 그리고 이제 그 피묻은 칼날은 점잖기만 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할 것이다. 그때, 촛불을 들어 박근혜를 탄핵했던 시민들이 과연 문재인 대통령을 지켜줄까. 조국 전 장관과 가족이 저렇게 난도질당할 때 침묵했던 문재인 대통령, 억울하게 살해당한 노무현 대통령의 원한을 갚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 정치검찰과 쓰레기 언론을 개혁하지 못한 문재인 대통령. 나는 더 이상 문재인 대통령을 '존경'할 마음이 없다.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퇴임 후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자신을 믿고 따르던 장수들을 모른체 하는, 그런 대통령이 문재인이었다면, 그동안 내가 가졌던 존경의 마음을 철회한다.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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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
층간 소음 한국은 독특한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나라다. 집단 주거시설인 아파트와 공동주택이 전체 주택의 77%에 이를 정도로 공동주택의 비율이 높다. 아파트 비중이 높은 이유는 1) 인구의 도시 집중화, 2) 주거 공간의 협소화로 인한 필연적 결과라고 보는데, 여기에 한국에서 유독 특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자산 증식 가치'로써의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부동산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민감하고 심각한 현상이며, 부동산 가격의 폭등, 폭락은 집권 여당에게 강력한 타격을 입힐 정도로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한국에서 산업화가 본격 시작된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부동산은 단 한 번도 가치가 하락한 적 없는 유일한 자산 가치여서 '부동산 신화'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정부는 물가 인상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지만, 부동산 가격은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물가 인상과 임금 인상율보다 훨씬 높은 상승율로 부동산 가격이 급증하면서, 주택 특히 '아파트'는 재산 증식 수단 가운데 가장 독보적 존재로 자리잡았다. 주택 공급 공약은 모든 정부에서 핵심 공약으로 자리잡았고, 1990년 이후 해마다 10만 가구 이상 아파트를 공급했지만, 여전히 주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아파트 가격은 폭등하고 있다. 서울에서 신규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기만 해도 몇억 원은 쉽게 벌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는 건, 그동안 정부가 부동산(아파트) 정책에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더욱 심각한 건, 이렇게 지은 아파트에 입주하려고 높은 경쟁을 통해 겨우 입주한 사람들의 주거 만족도가 입주 전보다 높지 않다는 데 있다. 처음 '내 집'을 마련한 가족이라면 당연히 성취감과 만족도가 높겠지만, 아파트의 여러 편리하고 효율적이며, 부가 서비스 등의 기능은 삶의 질과 만족도를 높여주지만, 그런 모든 장점을 한번에 상쇄하는 것이 바로 '층간 소음'이다. 층간 소음은 두 가지 심각한 사회 현상을 드러낸다. 실제 층간 소음으로 인해 아파트 주민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는 것과, 층간 소음을 해결하지 못한 부실 시공이 그것이다. 결론부터 보면, 층간 소음은 부실 시공의 결과다. 그 결과로 인해 입주민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 것이고, 갈등이 심각해지면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전국에 있는 수백만 채의 아파트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층간 소음 문제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하고, 적어도 한번 이상은 겪어 본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점이다. 평당 1천만 원부터 5천만 원이 넘는 고가의 아파트에 살면서 층간 소음으로 전전긍긍하고, 늘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다녀야 하며, 어린 자녀가 마음 놓고 걷지도 못하게 막아야 하는 불안함으로 생활하는 걸 참고만 있다는 것도 매우 이상하다. 그러다 아래, 위층에서 층간 소음 문제로 시비가 붙기라도 하면 사소한 다툼이 점차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고, 오해와 보복 심리가 발동하면서, 단지 아파트 분양을 받거나 매입하거나, 전월세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일 뿐이 이웃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고 만다. 층간 소음이 발생하도록 시공한 건설업체의 부실 시공도 문제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정부의 방임도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아파트를 짓는 업체의 시공 과정을 꼼꼼히 감리, 감시하고, 층간 소음이 발생하지 않는 건축 규격을 엄격하게 만들어, 건설회사가 그 규격을 지키도록 했다면 수많은 아파트 입주민이 고통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층간 소음은 정부의 무능과 기업의 이윤 추구의 극대화가 만들어 낸 합작품이다. 따라서 층간 소음 문제는 아파트 입주민이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아파트 사는 이웃끼리 얼굴 붉히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층간 소음의 본질적 문제에 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고, 이 문제를 다루는 기관, 단체가 거의 없는 것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원인이다. 층간 소음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해결 방안을 제시한 경우도 있고, 신축 아파트들은 과거 아파트보다는 층간 소음을 없애려는 정부의 규제와 과학적 방법을 도입해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기도 하다. 층간 소음을 확실하게 없애려면 기존의 아파트 구조부터 바뀌어야 하는데, 이것은 곧바로 건축 원가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건설회사의 이윤이 줄어들게 되므로 건설회사에서 비용이 높아지는 신공법을 빠르게 도입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또한 각 층의 바닥(천정) 두께를 2005년부터 210mm로 의무화하고 있지만, 층간 소음을 보다 확실히 잡으려면 두께가 300mm는 되어야 하며, 여기에 별도로 완충재를 설치해야 한다. 완충재 위에 다시 기포 콘크리트 40mm가 깔리고, 그 위에 온수 파이프 배관과 몰탈 마감, 원목 바닥 마감재로 마무리한다. 오래 된 아파트는 바닥(천정) 콘크리트 두께도 얇고, 완충재도 설치하지 않아 층간 소음이 더 심한데, 이때 천정에서 흡음재를 설치해 층간 소음을 줄이는 기술도 있다. 이렇게 정부와 기업이 적극적으로 층간 소음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아파트 입주민들이 힘을 모아 정부와 건설회사를 압박할 때, 층간 소음 문제는 보다 빨리 해결될 것이다. 층간 소음은 구조적 문제지만, 당장 아래, 위층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날마다 부닥치는 심각한 일상이다. 정부의 해당 부처에서는 층간 소음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위원회를 설치하고, 건설회사와 함께 층간 소음을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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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상품화 문제
'생수'의 상품화 문제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의 이야기는 어리석은 양반을 놀리는 풍자의 재미라도 있지만, 인류 공동의 소유물인 지하수를 특정 기업이 뽑아 올려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해 이윤을 가져간다는 사실은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도 이해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제가 작동한다. '상품화'는 자본의 유전자와 같은 것이고, '상품화'의 목적은 '이윤'에 있다. 즉, 자본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 - 물질, 서비스, 추상적 가치 등 - 을 '상품'으로 만든다. '자본주의'는 기술의 발달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말은, 봉건제가 끝장난 원인도 기술의 발달에 있다는 뜻이다. 즉, 영국에서 증기기관이 탄생하면서 그동안 오로지 인간의 손으로만 만들던 섬유 가공 산업이 기계를 활용한 반자동화, 대량 가공화하면서부터 본격 '자본주의 체제'를 갖췄다고 경제학자들은 설명한다. 수공업 노동자들은 '길드'를 만들어 자영업자의 시작이 되고, 농촌에서 귀족 영주의 땅에 농사를 지어먹거나 양을 치던 농부 가족들은 '강제로' 도시로 이주해 공장노동자가 된다. 귀족 영주들은 더 많은 양을 키워 양털을 판매하는 한편, 스스로 면직 공장을 지어 섬유를 생산하는 자본가로 변신한다. '자본주의'는 몇 가지 현상이 이상적으로 절묘하게 결합하면서 발생한 특이한 현상인데, 마르크스는 이 현상을 관찰하면서 원시공동체-노예제-봉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으로 발생하는 사회 체제라고 규정했다.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18세기는 유럽 뿐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19세기 시작 단계에서 세계 인구는 약 10억 명이었지만 불과 100년 만에 두 배인 20억 명이 된다. 이것은 과거 1천 년 즉, 서기 1000년에서 서기 1800년 사이에 증가한 인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많은 숫자였다. 인구 증가가 갖는 의미는 거주 집단의 밀집, 대형화, 소비의 대량화로 특징할 수 있다. 사람들은 교통이 편리하거나 상업이 활발한 장소로 모이는데, 이렇게 도시가 형성되면 마치 원심력을 가진 것처럼, 도시는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렇게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시기에 마침 '증기 기관'이 발명된 것이다. 기계, 기술의 발달은 18세기 이전부터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으나, '증기 기관'의 발명과 실용화는 '질적 전환'을 이룬 역사적 사건이다. 같은 시기에, 석탄이 주 연료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탄광 개발과 탄광 노동자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인구 증가, 증기 기관의 발명, 석탄의 주 연료화 같은 중요한 사회 현상이 우연히 발생한 것은 물론 아니다. 기술 문명의 발달은 아주 조금씩 누적되어온 인류의 지식과 지혜가 일정한 시기에 이르러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도약하게 되는데, 증기 기관의 발명이 자본주의를 촉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그 전부터 자본주의 맹아는 싹 트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근원적 질문으로 돌아가서, '석탄'도 인류 공동의 자원인데 왜 소수의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해 임금을 주고 캐낸 석탄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독차지하는 것일까, 질문할 수 있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리적 폭력 - 전쟁, 식민지, 약탈, 노예 매매 등 - 으로 자본을 축적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 시기가 지나면 제조, 교역, 상업으로 자본을 축적하게 된다. 이때 자본(가)은 토지, 노동, 자본이라는 자본주의의 핵심이 되는 세 가지 요소를 갖추는데, 유럽에서 봉건제 당시에 이미 왕족과 귀족, 종교 집단은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으나, 자본주의 체제로 진입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 문명이 충분히 열리지 않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개화하는 필요충분조건은 자본의 구성과 함께 '인신의 자유'가 있었다. 즉, 농노로 묶여 있던 민중의 처지가 자유로워지면서 '노동자'로 전환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시기는 '근대국가'가 형성되기 전이었고, 자본가의 출현은 귀족, 부르주아, 길드의 자영업자, 상인 등에서 빠르게 나타났다. '자본'은 본능적으로 성장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19세기 중반에 이미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시작된 영국에서 '자본'의 본질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책을 썼다. '노동 시간'에서 이윤이 창출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핵심이었다. 이때는 이미 수많은 자본가들이 자기들끼리 경쟁하는 한편, 자본가와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경쟁자인 왕족과 귀족을 몰아내고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봉건왕조의 소멸과 근대국가의 탄생 사이에서 '자본가'가 출현하고, 이들은 이윤이 발생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먹고, 입고, 자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물론이고, 석탄, 기차, 선박, 도로 같은 국가 기간 산업에 해당하는 분야에서도 '자본'은 눈부시게 활약했다. '자본'은 국가와 다르게 매우 효율적으로 움직였으며, 생산성이 높았고, 자체 경쟁을 통해 더 나은 상품,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양면성은 인류의 삶을 빠르게 향상시켰지만, 그렇게 빠른 속도로 인류의 삶을 파괴하고 있었다. '자본'은 이윤을 위해 지구 자원을 파괴하고, 대량 생산, 대량 소비를 추구한다. 그 결과, 자본주의가 본격 가동하고 200여년 만에 지구 환경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 20세기 끝까지, 자본은 무한 경쟁, 대량 생산, 대량 소비를 최선이라고 주장했고, 대중 역시 기술의 발달과 문명의 혜택을 생활에서 느끼며, 밀려드는 상품의 물결을 환영했다. 자본주의가 인류의 역사에서 빠르게 뿌리내리고,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강력한 동력은 '욕망의 자유'와 '경쟁의 보편화'라는 혁명적 시대 상황에 있었다. 시간이 흘러 마르크스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낼 때까지, 자본주의의 선봉에 선 부르주아는 봉건제를 깨뜨리고, 농노를 해방하며, 경제 체제를 바꾼 혁명적 역할을 했다고 마르크스는 이들 부르주아의 역할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쏘련과 중국이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되거나 경제 분야만큼은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더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고도화하지 못한 상태 즉 봉건적 환경과 낮은 생산성,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서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체제에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려면 내적 모순이 폭발하기 직전에 이르러야 한다. 혁명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모순에 이미 내재해 있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가 봉건제 내부에서 발아해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봉건제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면서 본격 자본주의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여 년에 불과하다. 인류가 하나의 체제를 뛰어 넘는 시간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짧아지고 있지만, 봉건제 1천년에 비하면 자본주의는 앞으로도 한동안 인류를 지배하는 체제가 될 것이다. 다시 '생수'로 돌아와서, 자본이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기준은 '이윤'에 있다. 물과 공기처럼 인류 생존의 절대 요소를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것은 아무리 물질의 화신인 자본이라 해도 정도를 넘는 행위인데, 이런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식수'를 국민에게 공급하는 것은 근대국가에서 권력을 가진 정부가 해야 할 의무다. 정부는 국민의 의식주를 기본으로 책임져야 하지만, 국가는 부여된 의무를 온전히 이행하지 못한다.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제약이 있기도 하고, 국가권력을 담당하는 정부와 자본(가) 집단의 힘겨루기 또는 담합의 결과에 따라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는 쪽으로 정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자동차 도로를 건설할 때 정부는 국가예산만으로 하지 않고 민간자본이 투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이렇게 민간자본이 들어간 자동차 도로에는 일정한 구간마다 '통행료'를 부여하게 되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그 도로를 다니면서 돈을 지불해야 한다. 정부는 국가 예산을 적게 들이면서 도로 건설을 빠르게 진행하려는 목적으로 민간자본의 투입을 허용하는 것인데, 그로 인해 지분을 투자한 민간자본은 투자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이윤을 보장받게 된다. 어느 단계에서는 이렇게 정부와 민간자본이 함께 투자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민간자본 참여는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려는 정부(권력)와 자본의 결탁일 확률이 높다. 생수의 판매도 같은 논리로 볼 수 있다. 식수가 매우 부족한 나라에서는 정부가 다른 어떤 정책보다 우선 국민의 식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때 모든 가정에 식수를 공급하기 어려운 조건이라면, 일정 기간 대량으로 물을 공급하는 관정을 만들어 그 물을 다른 지역으로 공급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생수'의 상품화는 식수의 오염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그건 다시 정부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정부는 당연히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함에도 '안전한 식수'를 공급하는 과제를 소홀히 하거나, 국민이 충분히 믿고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하지 못(안)하면서 불신을 자아낸다. 자본은 정부의 무능 또는 국민의 불신을 파고 들면서 생존의 절대요소인 '물'을 상품화한다. 이와 똑같은 논리로 '공기'도 상품화했다. 상식 있는 정부라면 자본이 획책하는 '물의 상품화'를 승인하지 않겠지만, 자본(가)은 한 국가의 체제를 규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권력의 총체여서 국가(정부)라 해도 자본의 공격을 방어하기 힘겨운데, 대개의 국가(정부)는 '자본위원회'(마르크스)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 권력은 자본(가)에 의해 장악된 경우가 많아 '상품화'의 파상적 공세를 막기 어렵다. '상품화'는 자본의 일방적 행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상품'을 구매, 수용하는 소비자 대중이 존재하고, 그들이 '상품'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상품화'는 완결된다. 이때 자본(기업)은 자신이 만든 상품을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마케팅'을 통해 대중에게 접근한다. 자본(기업)의 마케팅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국가권력이 인민을 향해 선전, 선동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본은 자신의 이윤을 위해 마케팅하고, 국가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선전, 선동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세계 생수 시장은 100조원이 넘었으며, 물의 양은 3,857억 리터가 넘는다. 자본(기업)은 물이 부족한 나라, 상수도 시설이 미약한 나라 등으로 진출하는 한편, 상수도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정부에서도 상수도와 차별화 전략을 통해 '건강한 물', '안전한 물'이라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자본(기업)은 정부가 해야 할 기본 의무를 가로 채, 생존의 절대요소이자 공공재인 '물'을 상품화함으로써, 비윤리적 행위를 통해 이윤을 축적하는 것은 물론, 물을 상품화하는 과정에서 플라스틱 생수병의 과다한 발생으로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다. 국민(대중)은 정부에서 공급하는 싸고 품질 좋은 식수를 마시지 않고, 훨씬 비싼 금액을 지불하며 '생수'를 사 먹게 되면서 필요하지 않은 지출이 발생하고, '생수'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가해자가 된다. '생수'의 상품화는 지극히 한정된 상황에서 인정되어야 하며, 당위성을 갖는 경우가 있다고 본다. 거의 대부분 '생수'가 아닌, 정부가 공급하는 상수도를 마실 수 있도록 체제를 갖추는 것이 정부의 의무이자, 지구 환경을 지키는 기본 태도라고 생각한다. 자본(기업)이 물을 상품화해서 이윤을 올리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인정하기 어려운 비합리적 상황이며, 오직 자본(가)에게만 이익이 되는 행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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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백스테이크
아웃백스테이크-011121 살아오는 동안 날마다 음식을 먹지만, 그것을 카메라로 찍어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이 쓰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으니 내 경우는 2004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카메라나 스마트폰이 없기도 했고, 필름카메라로 기록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나의 경우도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음식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2001년 4월달이다. 그때만 해도 음식을 먹기 전에 사진을 찍는 것은 거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고, 여행을 가도 여행지 사진은 찍었지만 음식 사진을 찍는 것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었다. 요즘은 음식사진을 자주 찍고 있어서, 언제 그동안의 음식 사진을 날짜별로 정리해서 올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더 늦기 전에 이렇게 한 곳에 모으려고 한다.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한 다음 찍은 음식 사진 가운데 가장 먼저 올릴 만한 사진은 2001년 11월 21일에 외식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이때는 우리가 부천 중동신도시에 살 때여서 근처에는 음식점도 많았고 백화점과 대형할인매장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밖에 나가기만 하면 음식점이 줄지어 있을 때였다. 게다가 주말이면 거의 외식을 할 때여서 사진을 찍으려 마음 먹었다면 꽤 많은 음식 사진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나마 음식 사진으로 볼 만한 것은 공항가는 길에 있는 아웃백 스테이크에서 찍은 것으로, 디지털카메라 성능이 썩 좋지 않아서인지 화질도 떨어지고 해상도도 낮다. 그래도 이런 사진이 있으니 오래 전에 우리가 어디에서 무얼 먹었는지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네 식구(어머니가 계셨으니)가 주말 외식을 하러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항가는 길에 있던 아웃백스테이크는 한국에서 가장 처음 문을 연 곳으로 유명하다. 이때 이후에 몇 번 가보고는 아웃백스테이크와는 영영 이별을 하고 말았다. 아웃백스테이크에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은 스테이크보다는 양파튀김과 빵이었다. 빵이 참 맛있었고, 무한 리필까지 되었으며, 따로 판매를 해서 개당 1천원씩 사 먹었던 기억이 있다. 스테이크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맛은 레스토랑에서 먹는 스테이크보다는 못했다. 가족들이나 친구, 소규모 회식 등의 모임을 할 때 패밀리레스토랑인 아웃백스테이크는 인기가 있었다. 아웃백스테이크는 지금도 활발하게 영업을 하고 있으니 언제 기회가 되면 아주 오랜만에 한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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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에서 한정식을 먹다
양평에서 한정식을 먹다 저녁밥을 먹으러 옥천에 있는 생선구이 전문점으로 갔으나, 마침 수요일은 휴일이라고 해서 바로 그 앞에 있는 한정식 식당으로 갔다. 우리가 간 한정식 식당은 개업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깨끗한 건물이다. 옥천 용천리에 있는 이곳은 바로 앞에 개울이 흐르는데, 그 개울 이름이 '사탄천'이다. 개울의 발원은 용문산이고, 사나사 계곡을 통해 흘러 내리고 있다. 옥천 용천리를 흐르고 있는 개울 이름이 '사탄천'. 뭔가 아스트랄하다. 새로 문을 연 이 한정식 식당은 메뉴가 단 한 가지. 그냥 한정식이다. 식당 안에는 메뉴도 없고, 가격표도 없다. 고민할 필요 없으니 좋은 점도 있지만 가격표가 없는 건 좀 아쉬웠다. 식사를 주문하자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채소 샐러드와 해파리냉채. 샐러드의 소스는 새콤한 맛이어서 입맛을 돋우고, 해파리냉채 역시 새콤하고 코를 톡 쏘는 겨자맛이다. 뒤이어 나온 것은 해물파전과 생선강정. 세번째로 나온 것은 메밀전병. 김치속이 들어 있어 매콤하면서 맛있다. 밑반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치가 슴슴하게 맛있었다. 달걀찜도 괜찮았고, 버섯무침과 멸치볶음도 나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간은 싱거운 편이었고,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거나, 아주 적게 쓰는 듯 했다. 밥은 솥밥으로, 누룽지가 생겼고, 여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 누룽지를 만들어 먹으면 구수하고 훌륭한 맛이다. 밥은 흰쌀이고 고구마가 세 조각쯤 들어 있다. 식사를 마치면 수정과가 후식으로 나온다. 1만5천원이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지만, 가격표와 한정식 차림의 사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제 시작이라 준비를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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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을 어떻게 먹을까
매실을 어떻게 먹을까 매실을 발효액으로 담가 먹는 것은 퍽 좋은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매실을 먹기도 하지만, 발효액으로 만든다는 것은 '발효'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매실 액기스'라고 하는 건, 매실과 설탕을 1대1로 섞어 약 100일을 발효하면 액기스가 생기고, 그 액기스를 물에 타 마시거나, 원액을 천연양념으로 쓰기도 합니다. 또한 매실은 과육을 벗겨 장아찌로 먹기도 하고, 매실 씨는 베개 속에 넣기도 합니다. 이렇게 두루 쓰임이 많은 매실을 담그는 방법은 거의 천편일률인데, 아마 아래와 같은 방식이 보편적이지 않을까 합니다.1. 매실을 깨끗이 씻어 말린다.2. 꼭지를 뗀다-이쑤시개를 쓰거나 바늘을 쓴다.3. 잘 마른 매실에 소주를 스프레이 한다. 스프레이 건에 소주를 넣고 매실 위에 뿌린다.(이 단계는 하지 않는 분도 있을 겁니다.)4. 매실과 설탕을 1대1로 넣고 버무린다. 이때, 버무리지 않고 그냥 매실을 넣고 그 위에 설탕을 붓는 방식을 쓰기도 합니다.5. 매실을 담는 용기는 플라스틱통, 유리병, 항아리 등을 이용한다.6.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로 올리고, 마지막에 설탕으로 덮는다.이렇게 해서 뚜껑을 봉하고 약 100일 정도를 그냥 두는 경우도 있겠지만, 가끔 통을 휘저어 가라앉은 설탕과 매실을 잘 섞어주기도 합니다. 저는 잘 섞어주는 방법을 선택합니다.이제, 약 100일이 지나고 매실 알맹이를 꺼내는 사람이 있겠습니다. 꺼낸 매실 알맹이는 과육과 씨를 분리해서 과육은 장아찌로 만들어 먹고, 씨는 잘 말려서 베개 속으로 쓰면 되겠죠?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매실 발효액 담그기'라고 하면 통상 위에 적은 내용에 따라 만들었을 것입니다. 저도 물론 그랬구요. 하지만 올해부터는 다르게 담을 생각입니다. 어떻게 할 작정이냐구요?1번부터 3번까지를 하지 않습니다. 즉, 매실을 물로 씻지 않고, 꼭지도 떼지 않고, 소주로 스프레이도 하지 않습니다.또한, 100일이 지나서도 매실과 액기스를 분리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3개월이 지나 꼭 마셔야 한다면 위와 같은 방법으로 '매실 발효액'을 담가 드시면 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좀 더 오래 놔두는 방법을 선택해도 됩니다.어떤 설탕을 넣을 것인가?매실 발효액은 물론이고, 설탕을 넣는 모든 발효액은 설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유통되는 설탕은 메이저인 제일제당과 삼양의 설탕이 있고, 국내 업체에서 유통하는 유기농 설탕이 일부 있으며, 최근 쿠바와 브라질 등에서 수입하는 유기농 설탕이 있습니다.또한, 설탕보다는 덜 달지만 몸에는 더 좋다는 '원당'이 태국에서 수입되고 있기도 합니다.어떤 설탕을 넣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담가 먹는 경우에 따라 들어가는 설탕의 종류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일반적으로 100일 동안 발효를 해서 먹는 매실 발효액의 경우, 즉, 발효 시간이 짧을수록 좋은 설탕을 써야 합니다. 발효가 100일 정도 진행되었다면 '충분한 발효'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즉, 매실 액기스 안에는 여전히 설탕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실 액기스를 먹는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설탕을 함께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설탕의 성분이 중요한 것입니다.짧은 기간-약 100일-에 먹는 매실액이라면 유기농 설탕이나 원당을 쓰는 것을 권하고, 장기간 발효를 한다면, 일반 백설탕을 써도 전혀 상관 없습니다.설탕은 발효를 일으키는 미생물의 먹이이기 때문에 설탕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당이 분해되면서 단당으로 바뀌게 되면, 처음 넣은 설탕은 화학적 반응을 통해 우리 몸에 해로운 성분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만드는 것이 '진짜 매실 발효액'일까 설탕이 완전히 분해되어 포도당으로 변하려면 적어도 3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효소학'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다당->이당->단당으로 바뀌는 과정이 '발효'인데, 이 과정에서 '당'은 완전히 분해되어 몸에 이로운 '포도당'으로 바뀌게 됩니다.그러면 매실은 어떻게 될까요? 담가서 100일 정도된 매실은 좀 쪼그라들긴 하지만 그래도 과육은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실 과육을 먹을 게 아니라면 오래 그냥 놔두는 것을 추천합니다.발효의 초기 단계에서 매실과 설탕은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매실 과육의 수분이 빠져나오게 됩니다. 100일이 되면 매실의 과육에서 수분이 충분히 빠져나왔다고 보는 건데, 많은 사람들이 매실 씨에는 독 성분이 있어서 너무 오래두면 안된다고 하는데,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100일이 지나고, 1년이 지나면 '역삼투압 현상'이 나타납니다. 즉, 매실에 있던 수분이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시기가 끝나면, 반대로 밖에 있던 매실 액기스들이 매실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즉, 좋은 성분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흠...이거 고급 정본데... 따라서 빨리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 않았다면, 매실을 오래 묵힐수록 좋은 발효 액기스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래 묵힐 매실 발효액이라면 설탕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사용해도 됩니다. 물론, 유기농 설탕을 쓰면 더 좋겠지만, 굳이 유기농 설탕이 아니어도, 모든 설탕은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분해되어 '단당'으로 바뀌기 때문에 우리 몸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검증된 이론입니다. 설탕의 역할은 '효소의 먹이'입니다. 발효 과정에서 효소들이 먹을 먹이가 필요한데, 설탕이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효 기간이 짧을수록 좋은 설탕이 필요한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고, 기간이 길어지면 설탕의 종류는 관계없게 됩니다.매실과 설탕의 비율은 계절, 날씨, 온도, 습도, 빛의 농담 정도에 따라 상당히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설명하면, 봄, 가을에는 1대1로 맞추고, 여름에는 매실1에 설탕 1.2가 적당하고, 겨울에는 매실1에 설탕0.7이 맞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도 절대적인 이론은 아닙니다.또한, 여름처럼 온도가 높을 때는 설탕을 한꺼번에 많이 넣는 것보다는 처음에는 절반을, 그리고 발효되는 상황을 보면서 설탕을 몇 번에 나눠 추가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이렇게 하려면 발효에 관한 지식이 좀 있어야 하니까, 이런 방법이 어려운 사람은 그냥 한꺼번에 넣어도 됩니다.작년에 담근 매실 원액을 가져간 가족이 맛있다고 해서 올해도 좀 많이 담가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매실 맛있게 담가드시기 바랍니다.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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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 사무라이 - 마츠모토 타이요
죽도 사무라이 - 마츠모토 타이요 모두 여덟 권으로 된 장편 만화. 그동안 출간했던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과는 또 다른, 새로운 형식미를 보여주는 시대극화. 작품의 완결성은 물론, 절묘한 선으로 만화의 미학을 한단계 높였다. 일본 작가지만, 참으로 부럽고, 대단한 작가다. 그의 손을 거쳐 나오는 작품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도, 마츠모토 타이요의 시각은 여느 작가들과 확실하게 다르고, 독특하며, 놀랍다. 그가 '천재 작가'의 소리를 듣는 이유다. 에도시대. 주인공 세노 소이치로는 낯선 마을로 떠돌다 정착한다. 사무라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검은 진검이 아닌 대나무검. 진검이자 보검인 쿠니후사는 전당포에 팔아버린다. 더 이상의 살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백수 노릇을 하면서, 마을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소한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세노 소이치로는 잠시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연쇄 살인이 발생하면서 도읍은 긴장감이 흐른다. 한 권, 한 권이 모두 마치 일러스트 작품집처럼 높은 완결성을 갖고 있으며, 생략과 압축, 다양한 시각(카메라 워킹)은 실제 영화를 보는 듯한 박진감과 현실감을 보여준다. 한국에 번역된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은 다 소장하고 있다. 이 작가의 작품은 반드시 소장할 가치가 있으며, 가까이 두고 자주 보면 볼수록 새로운 감동을 느끼게 된다. 두 번 읽었다. 처음 볼 때보다 더 진한 감동이 있다. 세노 소이치로의 출생과 관련한 비밀이 풀려가는 장면은 감동과 전율이 인다. 원작 소설은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상태다. 소설도 퍽 기대된다. 좋은 만화는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 뿐 아니라,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특히 작가가 표현한 미세한 상징들, 이미지, 농담을 네모 칸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은 활자만으로 되어 있는 문학작품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만화만의 특징이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는 작은 네모 칸에 등장하는 인물들 뿐 아니라 동물, 풍경도 예사롭지 않은데, 인간 외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의인화'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고양이와 개가 사람처럼 말을 하고, 사람과 고양이, 개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또한 가장 핵심이 되는 주인공 세노와 그의 보검 쿠니후사의 이야기는 이 만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보검 쿠니후사는 여성으로 표현되는데, 특이하게도 한쪽 눈을 잃은 여성이다. 왜일까? 쿠니후사는 세노보다 나이가 많다. 그의 아버지 또는 그 이전부터 만들어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보검인데, 일본도의 장인이 만든 이 칼은 당대에서도 보기 드문 칼이었다. 보검은 당연히 의인화할 수 있으며, 주인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세노가 보검 쿠니후사를 전당포에 맡길 때는 비장한 심정이었다. 세노는 자신에게 피의 냄새를 쫓는 악귀가 씌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손과 같았던 칼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만화의 중반부터 등장하는 키쿠치라는 인물은 매우 독특하고 복잡한 인물이다. 그는 세노와는 정 반대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세노와 마지막에 한 판 대결을 펼치게 된다. 키쿠치는 당대 최고의 검객이지만,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매우 비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노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되던 그의 무술은, 그러나 결국 자기 자신을 벨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 그의 칼에는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쌓여 있는 것은 분노와 증오, 원한 같은 피비린내나는 감정들 뿐이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청부살인업자로 살아가게 된 그의 내력은 그의 부모로부터 시작한다. 부모를 죽이는 것으로부터.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도 많지만, 그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살아 있는 듯, 자연스럽고 또 개성을 갖고 있어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사람들은 대개 선량하고 착하게 살아가지만, 에도 시대가 그렇듯 인간말종도 많고, 힘과 권력을 믿고 시건방을 떠는 자들도 많다. 그런 가운데 세노는 마음 속에는 깊은 슬픔을 묻고, 어린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살아가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삶이란 늘 변하기 마련이고, 세노의 시간을 쫓아가는 만화는 슬픔 속에 실낱같은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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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와 만화
부조리와 만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 [괴물들] 예술은 현실의 부조리를 어떻게 표현하며, 어느 수준까지 담아낼 수 있고, 얼마나 강력하게 발언할 수 있을까. 수 많은 예술가들이 당대의 현실에 침묵하지 않고 현실의 부조리함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고, 작품을 통해 발언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한국에서의 학살',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 같은 작품은 작가의 신념과 작품의 사실성이 직접 드러난 경우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1980년 한국에서 크게 일어났던 '민중문학', '민중미술', '민중음악'이 같은 사례에 든다. 이 시기-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시기-참여 예술은 문학, 미술, 음악 등 전방위에 걸쳐 펼쳐졌으며 그때만 해도 '민중만화'라는 규정은 없었으나 만화의 형태로 현실을 반영, 고발하는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어느 사회든 정치적 억압이 강한 독재 정권일수록 그에 대한 반발도 같은 크기로 일어난다. 1970년대 칠레에서 군부독재가 철권 통치를 하면서 수많은 학생, 노동자, 지식인을 살해할 때, 현실을 비판하는 노래를 불렀던 빅토르 하라는 군부독재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다. 1980년대 한국에서도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 청년, 노동자, 지식인들이 감옥으로 끌려가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그럴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투쟁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그때 예술가들이 쓰고, 그리고, 불렀던 예술 작품들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진전하면서 점차 '독재 시기의 특성'으로 남게 되었고, 오늘날 더 이상 소비되지 않는 '예술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1970년대, 1980년대에 활약했던 민중 예술가들의 작품을 1세대라고 한다면, 90년대를 지나 현재의 예술가들은 2세대, 3세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다. '제3세계'로 불리던 나라들은 대개 비슷한 민주주의 경로를 걷고 있는데, 군부독재의 출현과 몰락 역시 비슷하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현실의 부조리는 민주주의의 직접적 파괴-쿠데타, 독재-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의 껍데기를 하고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왜곡된 정치와 '신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로 불리는 자본주의의 첨단 기법이 국민을 얼마나 심하게 착취하고 있는지, 부의 극단적 편중과 빈익빈 부익부의 편차로 인한 사회 갈등, 민족과 인종, 종교가 달라서 오는 갈등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이런 시각으로 볼 때, 만화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작가가 '조 사코'와 ‘박건웅’이다. 조 사코는 '코믹 저널리스트'라는 독특한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만화(그래픽노블)라는 형식에 시사(국제문제, 정치, 경제, 인종, 분쟁 등)를 담아 기록한 것으로, 기존의 글로만 기록했던 저널리즘의 지평을 확대하고, 대중에게 하나의 주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역시 '가자 지구'에서 1956년 11월 12일에 발생한 이스라엘군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현재 시점과 과거 상황을 오가며 이 사건의 배경과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형식은 만화지만 영상으로 그대로 옮겨도 될 만큼 형식미도 뛰어나다. 작가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과정과 어렵게 만난 학살생존자 또는 그의 가족, 친척들의 구술을 통해 과거를 재현한다. 1956년 11월 12일,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지만, 그 사건이 있기까지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은 간단치 않다. 이 시점(1956년)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점령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유대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은 2차 세계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 가운데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가 유대인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가 없었던 유대인들을 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유대인들에게 내주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당한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1948년이고, 이때부터 중동 지역에 분쟁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중동의 대부분 국가는 이슬람을 종교로 갖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종교인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종교적 갈등과 함께 영토 분쟁도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인 아베드와 함께 다니며 5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그때의 생존자를 찾아나섰고, 그 과정을 최대한 면밀히 기록한다. 그가 조사와 취재를 위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있을 때도 역시 이스라엘군에 의한 침탈과 학살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50년 전과 현재가 똑같다고 말한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에 무차별 폭격을 해서 팔레스타인 사람 1,417명이 죽었는데, 이 가운데 352명은 어린이였다. 5,300명이 부상당했으며 시가지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조금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대체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미쳐날뛰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고,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오히려 화를 내야 함에도, 이스라엘은 폭력으로 이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 유대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갈등을 고려한다 해도,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저 미치광이의 태도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1956년에 일어난 가자 지구 학살 사건만 해도, 유대인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히틀러에게 당한 집단학살의 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였는데도, 유대인들은 독일군이 저지른 야만적 행위만큼이나 악랄한 집단 학살을 저지른다. 대체 왜? 분쟁의 불씨를 만든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고,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떠돌아 다닌 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물리적 형태의 '국가'가 절실했다. 결국 피해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오랜 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고, 멀쩡한 자기 집을 어느 날 갑자기 뺐기고, 자기 집에서 쫓겨난 황당한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유대인이 점령지를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거주지는 극적으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1948년에 비하면 1/10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영역에서, 그것도 지리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서로 오가지도 못하는 강제된 분단의 처지에 놓여 있고, 가자 지구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곳은 이스라엘군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어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한국에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 근현대사의 비극, 가해자의 논리로 위장되어 있는 진실을 탐구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만화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서 박건웅 작가는 일관성 있는 작품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 속 부조리를 파헤치고 있다. '괴물'은 박건웅 작가의 신작이다. 그가 오랜 시간 그렸던 단편을 모았다.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외국의 작가들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창작하는 경향이 높다. 그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데, 한국현대사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격동적이고, 드라마틱하며, 격렬한 과정을 겪었던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대개 70년대, 80년대에 태어나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가 있었으며,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부패, 권력자의 오만과 폭력을 눈으로 보며 자랐다. 여기에 대학시절의 학생운동, 사회에 나와 시민운동을 경험하면서 정치의식이 발달하고, 민주주의 학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작가의 작품에 스며들었다. 작가의 경험은 작품세계에 직접 영향을 준다. 특히 그래픽노블이 갖는 장르적 특성은 작가의 자기 서사가 강하고 깊다는 데 있는데, 박건웅을 비롯해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한국현대사와 자기 서사를 일치하는 경향이 많다. 이건 퍽 우연이지만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모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픽노블 작가는 강하고 깊은 자기 서사와 함께 개성 있는 그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나 기호보다는 이미지가 그래픽노블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지가 핵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다른 그래픽노블 작가들과 분명한 변별을 보여준다. 강렬한 흑백의 이미지와 판화 같은 날카로운 선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불 때'처럼 무채색 유화의 분위기가 나는 그림도 있다. 전체적으로 흑백의 강렬함 속에서 날카로운 풍자를 드러내는 작가의 작품은, 작품의 주제와 이미지의 형식이 완벽하게 결합한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박건웅 작가가 소재로 삼는 작품들 가운데는 읽기 불편하고, 힘든 작품이 꽤 많다. 이건 물론 작가의 책임이 아니라, 한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현대사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잔악하며, 끔찍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이미지로 그려야 하므로, 독자보다 오히려 더 큰 트라우마를 겪을 것으로 보는데, 그래서 독자는 박건웅의 작품을 쉽게 읽어나가지 못하게 된다. 작품 '문신'은 단편이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고통스럽다. 한 칸, 한 칸의 이미지가 마치 칼날처럼 몸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일본군이 조선의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은 인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범죄였다. 이런 내용을 심각한 논문이 아닌, 그래픽노블로 본다는 것은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작품집은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 그린 것과, 당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 보면서 만든 작품을 모았다. 단편이지만, 마치 연작처럼 작품의 내용과 수준이 일관되고,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만화비평지 [지금, 만화] 12호에 실린 저의 만화비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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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비평으로 보는 두 컷 만화
만화비평으로 보는 두 컷 만화 팔로우하고 있는 '재수의 연습장' 작가가 어제 올린 그림을 보고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고 잊어버렸다. 오늘 보니, 이 그림을 두고 엄청난 반응이 쏟아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 그림 아래 달린 댓글과 오늘 작가가 다시 올린 해명과 그 글에 달린 댓글을 읽으면서, 가능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을 해봤다. 어디가,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걸까. 두 컷으로 나뉜 그림은 대사가 없는 윗 그림과 대사가 있는 아래 그림으로 나뉜다. 상황은 딱 한 가지가 달라졌다. 윗 그림에서 작가 부부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중년 남성의 뒷모습이 아래 그림에서 얼굴과 상반신이 약간 돌아간 상태로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은 '코로나19' 상황이어서 마스크를 한 채 뛰고 있다. 이들이 이미 한참 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근거는, 아래 그림에서 독자의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온 여성의 얼굴에 땀이 흐르고, 숨이 내뱉고 있음을 보여주는 입김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두 여성은 반팔 티셔츠에 바지는 어두운 계열의 운동복을 입었는데, 이 하의가 요즘 여성들이 많이 입는 '레깅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달리기를 하려면 운동복이 편해야 하므로 트레이닝복이나 레깅스를 입는 것이 상식으로는 맞다. 따라서 여기서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이 입은 옷, 특히 하의는 어느 정도 몸에 붙는 트레이닝복이나 레깅스라고 전제하자. 아래 그림에서 대사를 하는 사람은 작가 부부다. 행위(몸을 움직이고 시선이 바뀌는 행위)는 중년 남성(개저씨 또는 할저씨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단어의 선택은 명백히 의도된 것으로, 혐오를 조장하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다. 남성들이 된장녀, 김치녀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이 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판단한 것은 작가 부부다. 이때, 우리는 주체와 객체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제3의 주체에 관해 각자의 입장과 주장을 해석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주체'는 달리기를 하는 두 명의 여성이다. 달리기를 하는 여성은 주위 사람의 시선을 딱히 의식하지 않거나, 알고 있어도 무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젊은 여성이고, 몸의 굴곡이 보이는 옷을 입었기 때문에 뭇남성의 시선을 받을 거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두 여성이 달리기를 하는 것도 오늘 처음이 아닐 것이고, 이미 한국에서 젊은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물적, 성적 대상화'되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매초, 매순간마다 그것을 의식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큰틀에서 여성의 '성적 대상화'는 분명 사회적 문제라는 명제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이 순간, 두 여성이 달리기를 하면서 작가 앞을 지나가는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두 여성은 앞에서 다가오는 중년 남성의 존재를 의식하지만, 그 남성이 특별히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더구나 그 남성 뒤에 부부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우산을 쓰고 따라오고 있어서 신변에 위협을 받을 거라고 생각할 가능성은 매우, 매우 낮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은 자연스럽게 중년 남성과 작가 부부의 옆을 달리면서 지나간다. 이때 작가 부부 앞에 있던 중년 남성의 시선이 달리던 두 여성을 향해 움직인다. 중년 남성은 '객체'다. 즉, '주체'가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고, 본래의 의지 - 여기서는 앞으로 쭉 걸어가는 것이 중년 남성의 본래 의지다 - 와는 상관 없는 행동을 하게 되므로, 중년 남성은 주체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반응하는 '객체'로써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스트루프 효과'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은 두 가지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1) 의식적이고 능동적이며 의도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2) 무의식적이고 수동적이며 의도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있는데, 이것은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일 때, 가능한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려는 작용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속 중년 남성은 왜 '스트루프 효과'를 일으키는 것인가가 핵심 질문이 되어야 한다. 여성(남성)을 바라보면 자동으로 시선이 돌아가는 이유와 원리는 무엇인가? 단순히 남성(여성)들이 여성(남성)을 '성적 대상화'하기 때문일까? '스트루프 효과'의 진화심리학적 분석을 하기 전에 먼저, 아래 그림의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자. 중년 남성은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을 따라가며 보고 있다. 이 남성의 시선으로 보자면, 저기 앞쪽에서 두 여성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한 때부터 줄곧 두 여성을 보고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적어도 20미터 앞쪽에서부터는 여성들의 몸매가 보이기 시작할테니 적어도 중년 남성이 고개를 돌리기 몇 초 전부터 여성들을 보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후 두 여성이 중년 남성의 곁을 지나쳐 갈 때 중년 남성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두 여성을 쫓아갔고, 그래서 고개가 돌아간 것이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이해할 것이다. 이제 중년 남성의 '행위'를 두고 해석 가능한 주장을 펼쳐보면 아래와 같다. 1.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고 폭력이며 '성추행'이다. 2. 중년 남성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중년 남성을 비난하는 사람은 1번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고, 단지 시선이 머물렀다고 해서 그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거나 혐오하는 것 자체가 남성혐오, 세대혐오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번에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주체'와 '객체'의 자리에 상반되는 인물을 놓아봄으로써 우선 '상식'의 선에서 이 문제의 반대 논리를 제공할 수 있다. 즉, 명제를 아래처럼 바꿔보면 이렇다. 1. 중년 여성이 젊은 남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고 폭력이며 '성추행'이다. 2. 중년 여성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앞에서 1번에 동의한 사람이라면 이 명제에서도 당연히 1번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2번에 동의한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2번에 동의할 것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 1. 정우성이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그 옆을 지나가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2. 정우성이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그 옆을 지나가던 20대 여성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위의 명제에서 중년 여성과 20대 여성은 정우성을 '시선강간'하고, 그 자체가 폭력이며 '성추행'을 한 것인가? 아래 두 컷 만화에서 중년 남성의 시선을 '시선강간' 또는 '성추행'으로 바라보는 것은 '주체'나 '객체'가 아닌 '제3의 주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데, '제3의 주체'가 발화하는 순간, '주체'와 '객체'는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낙인 찍힌다. '제3의 주체'가 발화한 내용을 보면, '객체'의 행위만으로 '객체'의 존재를 비난한다. 근거는 오직 '객체'의 시선이 움직이는 '행위'뿐이다. 과연 '제3의 주체'는 '객체'의 행위만으로 그를 단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객체'가 동성애자라면? '객체'가 지나가는 두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제3의 주체'가 발화한 내용은 전적으로 '제3의 주체'의 심리적 반응이고, 그것은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중년 남성' 일반 또는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중년 남성'에 대한 적대적 고정 관념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3의 주체' 가운데 남성은 이 그림의 작가로 보여지는데, 아내가 하는 말을 들으며 동조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데, 1) 아내의 발화 내용에 동의하는 것과 2) 아내의 발화 내용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아내의 말을 존중하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작가(남성이다)는 아내의 발화 내용 또는 아내의 일방적 주장에 동조하고 있으므로 왜곡된 페미니즘에 동의하고 있거나, 왜곡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아내의 입장에 동의한다는 점에서 비주체적 인물이다. 이제 '스트루프 효과'의 진화심리학적 내용을 살펴보자. 아래 그림에서는 '중년 남성'이 '20대 여성'을 바라보는 상황으로 특정되어 있지만, 거리를 걷다보면, 사람들은 곧잘 고개를 옆으로 돌려 - 각도의 차이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5도, 10도, 15도...180도까지 - 사람을 볼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 모든 시선을 '시선강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기 때문에 '시선강간'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아래 그림의 중년 남성이 달리는 여성을 바라보면서 '내 딸하고 나이가 비슷한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마스크를 하고 달리려면 숨쉬기가 힘들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선강간'이라는 단어도 극렬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만든 용어로, 남성들의 시선이 불쾌함을 넘어 '눈으로 하는 강간'이라는 매우 폭력적 표현으로 '남성 시선'을 규정하고 있다. 이때 '시선강간'에 해당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지속성(시간), 표현(특정 부위, 위, 아래로 훑는 듯한 시선)인가에 따라 '시선희롱', '시선추행', '시선강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여성이 남성을 바라볼 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 사람(특히 남성)이 사람(특히 여성)을 바라보는 심리적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1) 남성은 성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2) 성적인 독점욕을 가지고 있으며, 3) 젊고 건강한 이성을 선택하려 하고, 4) 시각적인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로 규정할 수 있다.[D. 시먼스, <섹슈얼리티의 진화>] 남성은 여성에 대해 '성적으로 독점하고 싶어하는 경향'과 함께 '성적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욕구도 있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진화론과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진화심리학의 이론적 근거로 아래 그림의 '객체'인 중년 남성을 옹호하거나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심리 상태나 무의식적 행동에 대한 분명한 의도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단지 고개를 돌려 달리는 여성들을 바라본 행위만으로 잠재적 또는 실질적 성범죄 가해자로 예단하는 '제3의 주체'의 발화 내용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내용-진화심리학 이론-을 아래 그림의 '중년 남성'이 알고 있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 인지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개가 돌아갔을 수 있다. 그렇게 '180도' 고개를 꺾어 뛰어가는 여성을 보는 남성이 반드시 그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했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다. 보통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가서 바라본 대상은 그만큼 빨리 잊혀지기 때문인데, 우리가 보통 '성적 대상화'라고 할 때,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라고 말하는 건 명백한 왜곡이고 비틀린 주장이다. 누군가가 '성적 대상'이 되려면 시선을 포함한 물리적 접촉과 함께 '성적 행위'의 매개 또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위에서 진화심리학의 4) 시각적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가 곧 모든 것이 '성', '섹스'에만 집중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진화 단계에서 남성은 주로 수렵을 했기 때문에 움직이는 물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것이 오늘날,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 1), 2), 3)의 내용이 본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래 두 컷 만화에서 '제3의 주체'가 발화하는 내용은 앞의 맥락이 삭제되어 있고, '객체'인 중년 남성의 의도가 배제되어 있으며, '제3의 주체'가 가진 명백한 확증편향과 선입견, 예단 그리고 중년 남성에 대한 편견으로 혐오 발언을 하고 있다.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오직 '시선강간' 한 가지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는 만큼이나 못 생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간과 기회도 많다는 것이 발표되었다. 즉, 남성은 꼭 아름다운 여성만 보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못 생긴 여성도 여성이니까 '성적 대상화'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건 그냥 자신의 경험에 미루어 짐작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것은 '시선강간'을 하려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극히, 매우 극히 드물게 그런 변태 남성도 있겠지만, 대부분 남성은 여성을 바라보고 곧바로 자기가 갈 길을 가며, 자기가 바라본 여성에 대해서도 곧바로 잊는다. 그런 점에서 아래의 두 컷 만화는 특히 '중년 남성'의 시선으로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고 '성추행'이라는 뉘앙스로 남성 혐오 발언을 하고 있고, 이것은 명백하게 '제3의 주체'가 주관적 판단 오류 내지는 악의적 왜곡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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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제목 :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작가 : 조 사코 출판 : 글논그림밭 만화책이지만,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것이 괴로울 정도로, 이 만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정면에서 그리고 있다. 우리는 중동의 역사에 대해 많은 부분 무지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들과 우리의 접점이 약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너무 심하게 미국과 유럽 쪽 역사에 편향된 교육만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동 뿐이랴. 아프리카의 역사는 어떤가. 우리가 수단이나 나미비아, 탄자니아 같은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강자의 역사, 승리한 자의 기록, 편향과 왜곡으로 점철된 역사일 뿐임을 새삼 깨닫는다. 예를 들어, 미국의 역사를 말할 때도 우리는 미국의 '백인'들이 기록한 역사를 읽고, 판단한다. 미국인-주로 백인-들이 가장 충격적인 책으로 꼽는 것이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인데, 미국인의 주류인 백인들도 '미국민중사'에서 말하는 역사의 내용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그렇듯, 어느 나라의 역사든 기록은 왜곡되고, 편향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는 어떤가. 심지어 자기나라의 역사조차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려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하물며 세계사라니. 결국 이런 역사 공부를 하려면 혼자 책을 찾아 읽는 방법 외에는 없다. 올바른 세계관을 갖기 위한 가장 첫번째 단계는 '역사'를 올바르게 공부하는 것이다. 역사를 모르거나 배우지 않거나, 잘못 배우면, 그 위에 쌓는 지식은 모두 잘못될 수밖에 없다. 이 만화책에서 작가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기억하지 않거나, 기억에서 멀어진 1956년의 학살 사건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든다.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사람, 남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수 백 명을 학살한 사건인데, 이런 처참한 학살 행위가 UN보고서에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1947년 이후 오늘날,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미국과 영국이라는 강대국이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의 여러나라들도 같은 이슬람 국가인 팔레스타인을 돕지 못하거나, 않는 이유는 그들 내부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즉,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와 결탁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집권층이 존재하는 나라는 '친서방' 국가로 분류되고, '반미, 반유럽'을 외치는 나라들은 미국에 의해 '테러국가'로 낙인 찍히고 미군의 침략에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는 운명을 갖는 것이다. 거대한 역사는 추상적이지만, 이렇게 개인의 운명을 다루는 미시적 역사 기록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의 입장이라면 과연 어떨까.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와 비교하면 어떨까. 저항하다 죽는 것과 굴종으로 살아가는 것, 오로지 그 두 가지 방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때,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까. 당신은. 조 사코는 '코믹 저널리스트'라는 독특한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만화(그래픽노블)라는 형식에 시사(국제문제, 정치, 경제, 인종, 분쟁 등)를 담아 기록한 것으로, 기존의 글로만 기록했던 저널리즘의 지평을 확대하고, 대중에게 하나의 주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역시 '가자 지구'에서 1956년 11월 12일에 발생한 이스라엘군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현재 시점과 과거 상황을 오가며 이 사건의 배경과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형식은 만화지만 영상으로 그대로 옮겨도 될 만큼 형식미도 뛰어나다. 작가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과정과 어렵게 만난 학살생존자 또는 그의 가족, 친척들의 구술을 통해 과거를 재현한다. 1956년 11월 12일,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지만, 그 사건이 있기까지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은 간단치 않다. 이 시점(1956년)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점령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유대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은 2차 세계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 가운데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가 유대인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가 없었던 유대인들을 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유대인들에게 내주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당한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1948년이고, 이때부터 중동 지역에 분쟁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중동의 대부분 국가는 이슬람을 종교로 갖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종교인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종교적 갈등과 함께 영토 분쟁도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이집트의 국내 정치 상황과 이슬람 패권주의, 이집트와 영국, 프랑스, 미국 사이에 벌어진 수에즈 운하 국유화 사건, 이집트 내부의 이슬람 근본주의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정치적 긴장, 범 이슬람 진영과 범 친미 진영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 등 복잡한 양상이 바탕에 깔려 있지만, 궁극적인 원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기존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동에서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고, 여기에 이스라엘은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을 든든한 배경으로 업고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과 전쟁을 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다. 자신들이 살던 땅을 유대인들에게 뺐긴 것도 억울한데, 이집트와 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군에 쫓겨 어쩔 수 없이 가자 지구로 들어온 사람들은 허허벌판에서 움막을 짓고 살아야 했다. 마치 한국에서 남북한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땅에서 거지처럼 살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들은 자신의 집, 재산을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맨손으로 가자 지구로 들어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마져도 이스라엘군의 감시와 통제, 예측할 수 없는 학살로 인한 공포 속에서 늘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극우파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이들 극우파는 주변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보다는 폭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했고, 11월 2일 가자 지구를 침략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군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인 남성들을 밖으로 끌어내 아무 이유 없이 집단 학살을 시작했고, 학살당한 사람은 최소 수백 명에 이른다. 생존자의 증언, 생존자 가족, 친지, 이웃의 증언, 학살당한 가족, 친지, 이웃, 친구의 증언이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기록되기 시작한다.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인 아베드와 함께 다니며 5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그때의 생존자를 찾아나섰고, 그 과정을 최대한 면밀히 기록한다. 그가 조사와 취재를 위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있을 때도 역시 이스라엘군에 의한 침탈과 학살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50년 전과 현재가 똑같다고 말한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에 무차별 폭격을 해서 팔레스타인 사람 1,417명이 죽었는데, 이 가운데 352명은 어린이였다. 5,300명이 부상당했으며 시가지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조금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대체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미쳐날뛰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고,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오히려 화를 내야 함에도, 이스라엘은 폭력으로 이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 유대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갈등을 고려한다 해도,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저 미치광이의 태도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1956년에 일어난 가자 지구 학살 사건만 해도, 유대인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히틀러에게 당한 집단학살의 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였는데도, 유대인들은 독일군이 저지른 야만적 행위만큼이나 악랄한 집단 학살을 저지른다. 대체 왜? 분쟁의 불씨를 만든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고,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떠돌아 다닌 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물리적 형태의 '국가'가 절실했다. 결국 피해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오랜 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고, 멀쩡한 자기 집을 어느 날 갑자기 뺐기고, 자기 집에서 쫓겨난 황당한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유대인이 점령지를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거주지는 극적으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1948년에 비하면 1/10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영역에서, 그것도 지리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서로 오가지도 못하는 강제된 분단의 처지에 놓여 있고, 가자 지구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곳은 이스라엘군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어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자면, 일본군이 지금 서울 면적에 한국인 5천만 명을 집어 넣고, 서울 외곽 경계에 높은 담장을 두르고, 서울에서 나가거나 들어올 때마다 검문, 검색을 하며, 아무런 통지 없이 출입문을 닫아 걸고 몇날 며칠을 통행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필품도 부족하고, 인구 밀도는 엄청나게 높고, 경제 활동이랄 것도 없어서 거의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고,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한 빈곤층이 90%에 이르고, 상하수도를 비롯한 기반 시설이 붕괴되어 거의 원시상태에 가까운 삶이라면, 폭동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 일본군과 싸우고, 자살폭탄테러를 하는 것이 최후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누구를 원망하게 될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놓여 있는 현재의 삶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방 사회 즉 제국주의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몸부림을 '테러'로 규정한다. 그리고는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대등한 상태에서 '분쟁'을 하고, 전쟁을 하고 있다고 떠들고 있다. 현실은 이스라엘의 일방적 폭행과 폭력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나가고 있으며, 지난 60년 동안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악의적으로 왜곡,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과거 유대 민족처럼 '국가'가 없고, 중동 지역에 흩어져 살던 민족이어서 지금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들의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고, 가해자 이스라엘의 악행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누구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의 팔레스타인 현실은 실재하는 지옥이라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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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제목 :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작가 : 김홍모 출판 : 창비 7년, 아직도 세월호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부는 왜 존재하는 걸까. 정부는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던 2014년 4월 16일. 그 이후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침몰의 사실을 밝히라는 시민의 비통한 목소리를 폭력으로 탄압하고, 언론과 정치권 역시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도,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시민들(일부를 제외하고)이 세월호 참사와 희생자, 유가족을 끌어안고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각오로 7년을 버텼다. 무능하고 천박하며, 악랄하고 야비한 박근혜 정부를 촛불로 끌어내린 시민은 문재인 정부를 세우고, 국회의석도 민주당에 180석을 밀어주었지만, 정부와 여당은 집권하고 무려 4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명백히 촛불시민에 대한 배신이며, 역사의 정의를 거스르는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 씨와 그의 가족, 다른 생존자들을 인터뷰해서 완성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위해 세월호 참사 관련 영상과 자료를 거의 모두 찾아봤으며, 시나리오를 완성할 때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도 세월호 참사 이후 그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참사는 기억하되 참사의 디테일은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희생자의 얼굴을 바라보면, 나 역시 그 깊은 고통과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세월호 참사를 알리려고 스스로 그 고통과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와 사실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용기이며 많은 시민에게 희망을 주는 행동이다. 1부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학생과 시민을 구한 '민용'의 증언을 토대로 한 내용. 민용은 세월호에 트럭을 싣고 인천에서 제주를 오가는 트럭기사로, 세월호 참사 당일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남아 학생과 시민을 구한 의인이다. 하지만 정부와 언론은 민용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민용은 배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민용에게 세상은 단순하다. 거짓말 하는 것은 나쁘고, 어려움에 놓여 있는 사람은 도와주어야 하며, 특히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최선을 다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정부는 국민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며, 대통령과 장관, 공무원은 국민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상식적인 사람이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대통령을 비롯해 공무원, 경찰, 언론 등 정부를 구성하는 모든 분야에서 거짓말과 회유, 협박을 하며 민용을 압박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 그는 정부의 존재가 거대한 악마의 모습 그 자체였다. 2부 민용의 딸 안나는 고등학생이다. 인천에서 제주로 수학여행을 오던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2학년이었고, 그 학생들을 구하다 몸과 마음이 망가진 아버지 민용을 옆에서 지켜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아버지는 자책과 트라우마로 우을증을 앓고, 자해를 해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간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안나는 친구들과 함께 '세월호 기억 플래시몹'을 준비한다. 안나와 친구들은 고3으로 수험공부를 해야 했지만, 그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의 일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제주신성여고, 제주여고, 중앙여고, 제주일고, 대기고 학생들과 연합해 플래시몹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대학에 진학한 안나는 언니 나연과 같은 '응급구조학과'를 전공한다. 언니 나연이 '응급구조학과'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었지만, 안나가 '응급구조학과'를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세월호에서 많은 학생, 시민의 목숨을 구한 것이 안나는 많이 자랑스럽다. 3부 세월호 생존자 민용과 그의 가족, 아내와 두 딸(나연, 안나)은 민용을 지켜보며 함께 괴로워한다. 민용은 세월호 참사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몇 번의 자해를 하며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를 안전하게 구하라는 말을 하지만, 정부와 주위 사람들은 오히려 민용을 비난한다. 희생자 가족은 말할 것도 없지만, 생존자와 생존자 가족들의 삶도 세월호 참사 당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세월호 침몰의 사실을 밝히고, 희생자, 유가족, 생존자, 생존자 가족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치료가 절실함에도 박근혜 정부는 그들을 '빨갱이' 취급했으며, 패륜집단인 '일베'는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를 모욕하고 조롱하는데도 정부는 그걸 방관하고, 심지어 조장했다. 그것이 박근혜 정권의 정체성이었다면,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런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지만, 이런 패륜집단과 악랄한 반인륜 발언을 하는 자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의 역사에서 그 전과 이후를 가를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이 완전하게 사실이 드러나고, 원인을 제공한 자들, 가해자들이 모두 처벌받고, 희생자, 유가족, 생존자, 생존자 가족이 납득할 만한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받지 않는 한, 절대 끝날 수 없는, 끝나서도 안 되는 사건이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아 김홍모 작가의 '홀'이 나온 것이 세월호 참사의 사실을 밝히는 데 작은 밑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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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장편소설. 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 곧바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빠른 전개와 속도감 있는 문장, 심리 스릴러의 긴장이 팽팽하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주인공의 눈에 비치는 가족과 이웃의 모습이 재해석되고 있다. 작가는 시작하면서 독자를 향해 묵직하게 한방을 날린다. 겨우 열두 살인 주인공 앙투안이 여섯 살이던 옆집의 꼬마, 귀엽고 자기를 잘 따르던 착한 꼬마 레미를 살해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아이를 살해한 것을 보면 싸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앙투안이 레미를 살해한 이유를 억지로 들어 변명하자면, 레미의 집에서 키우고 있는 개 윌리스는 앙투안을 매우 잘 따랐다. 앙투안이 혼자 숲속에서 오두막을 짓거나 혼자 시간을 보낼 때, 윌리스는 친구처럼 가깝게 앙투안 옆을 지켜주었고, 외로운 앙투안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런 윌리스가 우연히 교통사로를 당해 다쳤고, 윌리스의 주인이자 레미의 아버지인 데스메트는 고통으로 죽어가는 윌리스를 위해 총을 쏴서 절명시킨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 포대에 넣어둔다. 이 장면을 지켜본 앙투안은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던 순간에 숲속으로 레미가 찾아왔고, 앙투안은 슬픔과 분노로 발작을 일으켜 레미에게 그의 아버지 데스메트를 투사해 죽이게 된 것이다. 물론 이건 변명이고 합리화다. 한순간의 발작으로 좋아하는 레미를 죽인 앙투안은 자기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깨닫는다. 그는 레미의 주검을 은폐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엄마에게 거짓말한다. 그날 오후부터 레미의 부모는 아이가 실종되었다고 경찰에 신고하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마을 근처를 수색한다. 레미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앙투안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레미의 부모, 경찰이 앙투안에게 레미의 행방을 묻지만, 앙투안은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이 곧 들통나 자기는 감옥에 갈 거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레미가 실종되고 이틀 뒤부터 마을에는 어마어마한 태풍과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마을은 쑥대밭이 된다. 큰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레미의 실종이 안타깝지만, 수색에 나설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레미의 실종 사건은 시간 속으로 묻힌다. 앙투안이 레미를 죽인 후, 몇 번이고 자백할 마음을 먹고, 심지어 자살할 생각까지 했으며, 끊임 없이 스스로 자책하고, 벌을 받게 될 것을 상상하면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앙투안은 싸이코패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고등학교를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진학하며서 마을을 떠난다. 단 한 순간도 마을에 있고 싶지 않았고, 마을을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맹세까지 했다. 하지만, 앙투안의 맹세는 깨진다. 마을을 떠나고 12년이 지난 뒤, 앙투안은 다시 집을 찾는다. 마을 주민인 르메르시에 씨의 60회 생일 파티였는데, 그는 앙투안의 엄마를 고용한 사람이기도 했다. 앙투안은 여자친구가 있고, 지금은 인턴으로 의사가 되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12년만에 돌아온 마을은 이미 많은 것이 변했다. 이웃이던 레미의 가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고, 레미의 아버지는 뇌출혈로 사망했다. 앙투안은 엄마의 부탁으로 하루 마을을 찾았는데, 이날 저녁에 우연히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에밀리를 만나 갑작스럽운 섹스를 한다. 그리고 12년 전, 앙투안이 레미를 살해했던 그 숲이 재개발된다는 뉴스를 본다. 앙투안은 숲이 재개발되면 레미의 시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다시 범인을 찾는 수사가 시작되면 자기가 체포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마을을 떠나 여자친구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지만, 몇 달이 지나 갑자기 에밀리가 찾아와 앙투안에게 임신했다고 말하고, 앙투안은 에밀리에게 낙태를 하라고 애원하지만, 에밀리의 아버지는 유전자 검사를 해서라도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낼 거라고 소리친다. 그때, 레미가 묻혀 있는 숲속에서 아이의 형해를 발견하고, 아이의 것이 아닌 머리카락을 발견했으며, 그 머리카락의 유전자를 검사하면 범인을 찾아낼 수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앙투안은 유전자 검사의 덫에 걸리고, 에밀리와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앙투안은 마을을 영원히 떠나고 싶었으나, 오히려 영원히 마을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는 에밀리와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으며, 마을 의사가 되어 마을 주민을 진료하고 있었다. 에밀리는 앙투안과 그랬던 것처럼, 아무 남자하고 불꽃같은 섹스를 하면서 살았고, 아이의 아버지가 앙투안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앙투안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며칠 동안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무의식 상태에서 갑자기 소리를 지르던 그녀가 몇 사람의 이름을 불렀는데, '앙드레'라는 이름을 앙투안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마을 병원에서 진료를 보다 '안드레이 코발스키' 씨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그가 '앙드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코발스키 씨는 곧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다고 말하며, 앙투안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앙투안은 열두 살 때, 발작을 일으켜 레미를 살해했던 그 당시, 도로를 지나다 우연히 발견한 자동차가 코발스키 씨의 차라는 걸 떠올렸고, 엄마가 코마 상태에서 '앙드레'를 애타게 불렀던 것을 결합하면서, 진실을 알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다. 앙투안은 한순간의 실수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그의 삶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앙투안은 17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것도 아주 우연한 계기로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사람이 누구인지, 누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 가득한 인생의 쓴맛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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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파친코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애플TV'에서 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2018년에 발표했고, 지금 촬영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 소설이 미국에서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었고,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소설이 미국의 주류 문학계에서 주목받는 현상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인은 미국에서 소수민족이며, 그리 주목받지 못한 대상으로 100년을 살았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과 일본 거주는 20세기 초반의 비극적 역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의 기원이 있다. 1910년,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 조선인의 삶은 고통과 울분, 비통의 연속이었다.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려던 조선인들은 가까운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하와이, 쿠바, 멕시코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가는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났다. 이렇게 떠난 조선인은 인종차별과 하층 노동자로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한국인에게 근현대사의 시작은 비극이었다. 동학혁명이 일본군의 폭력에 무너지면서 민중의 삶은 짓밟히기 시작했고, 그것은 조선왕조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참혹한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당시 조선의 근현대사 배경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부산의 영도 바닷가에 살던 이름 없는 가난한 어부 부부에게 온전치 못한 몸을 지닌 아들 '훈'이 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더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 양진이 부부로 맺어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훈'이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몸은 튼튼했고, 듬직하고 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너무 가난해서 입 하나를 덜기 위해 시집 온 양진은 시부모와 함께 힘든 시간을 지내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삶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선자가 태어나고, 선자는 튼튼하고 야무진 여성으로 성장한다. 이 작품은 4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 세대는 드라마틱하게 다른 삶을 살지만 등장인물들이 일본에 정착하면서 살게 된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재일조선인', 일본사회에서의 소수자로 당하는 차별, 멸시의 구조다. 주인공들이 일본에서 자기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일본의 '재일조선인' 정책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사회적 공모가 강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의 구성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가난한 조국 조선을 자발적이든, 강제로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디아스포라적 삶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실존적'이든 '이념적'이든 '경계인의 삶'으로 존재하고 있다. 역사 속의 집단이자 개인으로 디아스포라이면서 경계적 존재로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재일조선인이 공통점을 갖는다. 유럽에는 '집시'도 있으나 그들은 단일한 민족 정체성을 갖지 못한 집단 유랑민이라는 점에서 유대인과는 또 다르다. 작품 제목인 '파친코'는 '재일조선인'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는 마치 유대인을 상징하는 단어로 '고리대금업자'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 두 경우 모두 그 집단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직업이 아니며, 사회에서 천대와 멸시를 받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작품의 제목인 '파친코'와 작품의 등장인물에서 여성의 삶은 서로 만나는 지점이 없다. 즉, 이 작품은 여성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제목은 '재일조선인' 가운데서도 남성이 운영하는 '파친코'로 되어 있어 제목과 내용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이것을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상징성에 무게를 두었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여성 서사를 다루고 있다. 작가가 여성이어서 여성의 삶에 보다 공감과 깊이를 더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사회적 약자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의 삶을 구원하는 구원자적 존재로 등장한다. 여성은 늘 남성의 그늘, 발 아래, 뒤치닥꺼리, 조력자, 보조자 등으로 존재하지만, 길게 보면 남성을 품고, 기르고, 키우고, 성장시키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작품에서도 양진은 가난한 집 막내딸로 굶주리는 삶을 살다, 나이가 많고, 몸도 성치 않은 어부의 아들 '김훈'의 아내가 된다. 다행히 김훈은 장애가 있지만,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어서 양진은 가난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딸인 선자는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엄마와 두 사람의 일하는 여성과 함께 하숙을 치면서 성장한다. 선자가 고한수를 만나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평양에서 온 백이삭 목사의 도움으로 결혼식을 하고 정식으로 백이삭의 아내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면서, '재일조선인' 1세대의 삶이 시작된다. 백이삭의 형 백요셉은 이미 그의 아내 이경희와 함께 일본에서 정착했고, 이경희는 선자를 동생처럼 여기며 끈끈한 연대와 우정을 쌓아간다. 고한수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고 세 딸을 두었고, 그의 장인은 야쿠자 두목이었던 것이 나중에 드러난다. 고한수 역시 장인의 야쿠자 조직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는 평생 야쿠자로 살면서 돈과 권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선자의 남편 백이삭은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2년의 옥살이 끝에 결국 숨을 거둔다. 백요셉 역시 미군의 폭격에 화상을 입고 고생하다 죽는데, 남성들이 이렇게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도 '재일조선인'의 비극이라는 것을 작가는 드라마틱한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남성(남편)의 부재로 곤란한 생계를 꾸리는 건 여성들이다. 경희와 선자는 김치 파는 행상을 시작으로 집안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김치는 맛있다는 소문이 나고, 김창호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이들의 김치를 전부 구입하겠다며 두 사람을 식당 주방에서 직접 김치를 담그게 한다. 시간이 지나서 김창호의 뒤에 고한수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만, 설령 일찍 알았다 해도 경희와 선자는 그 주문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희와 선자에게는 아들 노아와 모자수가 있었다. 두 아이를 건강하고 떳떳하게 키우는 것이 삶의 전부이자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은, 아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고통도, 굴욕도 참을 수 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성장하는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는 평생 힘겹게 일하는 엄마와 큰엄마를 보면서 엇나갈 수 없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곧 조국의 부재이기도 하다. 나라를 잃은 민족, 조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디아스포라의 존재인 이들 '재일조선인'은 끊임 없이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버지' 고한수는 노아에게 고통의 근원이다. 이미 아내와 딸이 있는 그는 어린 선자를 좋아하고, 임신시켜 선자의 인생을 망친다. 그렇게 태어난 노아는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불행이며,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백이삭이 죽은 이후, 존재할 수 없는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 아버지가 사회에서 가장 비난받는 야쿠자라는 이유로, 자기의 삶을 방기한다. 이삭의 비극은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 결과일까, 아니면 야쿠자를 부모로 둔 자식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절망과 자포자기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이삭의 자살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뿌리내리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노아는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그의 삶도 모순적이긴 마찬가지다. 그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파친코 가게에 취업해 많은 돈을 벌면서 '아버지' 고한수가 보내준 학비를 다 갚고, 어머니에게도 많은 돈을 보낸 이후에도 그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여럿 낳아 기르면서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삶을 스스로 끝내는 것은,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애초에 결혼할 마음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이삭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건 분명하다. 아내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 극단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한다 해도, 이삭의 결정을 존중할 수는 있지 않을까. 모자수는 우연하게 파친코 업계에 발을 들여 놓지만, 이 역시 그의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주류에 속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의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사회에서 강하게 밀려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럴 때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위험하거나 더럽거나 불법한 일일 수밖에 없다. 모자수를 파친코로 끌어들인 사람 역시 재일조선인 고로 씨였다. 성실하고 머리가 뛰어난 모자수는 빠르게 일을 배우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 빠르게 성장한다. 그는 고로 씨의 도움으로 파친코를 직접 경영할 뿐 아니라 가게도 늘리면서 막대한 돈을 벌기 시작한다. 모자수의 아내 유미는 모자수의 단골 양복점에서 일하던 미싱공이었으나 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는 걸 꿈꾸던 여성이었다. 모자수와 결혼해 아들 솔로몬을 낳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데, 이런 크고작은 비극이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솔로몬은 부자 아버지인 모자수 덕으로 어려서부터 국제유치원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하지만 미국에서 공부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인 상사에게 이용당하고 해고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으면서, 솔로몬은 아버지가 하는 파친코 업계에서 일을 하겠다고 자청한다. '재일조선인' 4세대인 솔로몬이라면 자기가 원하는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버지가 파친코로 돈을 벌어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고, 원한다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솔로몬의 위치였다. 하지만 솔로몬은 일본에 눌러 앉는다. 솔로몬은 할머니와 엄마, 아버지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자신 역시 '재일조선인'으로 3년 마다 지문을 등록해야 하는 차별을 당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재일조선인'이라 해도, 일본 사회에서 늘 변두리, 울타리 너머에 존재하는 이방인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부모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온 솔로몬 같은 청년 세대가 '재일조선인'으로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결심은, 차별과 멸시의 땅, 고통과 비난이 발목을 잡는 일본 사회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불행한 역사를 만든 일본이 상상하지 못한 존재였지만, 일본 내부의 모순을 뚫고 성장하는 기형적 존재이면서, 한편으로 일본인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과거 침략과 범죄 역사의 살아 있는 증거이자 증인이며, 조선인의 의지와 투지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존재 그 자체다. '재일조선인'의 존재는 일본의 내부적 모순을 드러내는 한편, 모순을 첨단, 극대화하는 존재로 작동한다. 일본은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으며,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일본의 과거 전쟁범죄는 사라지지 않고 유효하며, '재일조선인'을 차별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것으로 일본인의 저열함, 야비함, 악랄함을 증명하기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일본 양심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작동하고 있다. 작품에서 '재일조선인' 인물들 가운데 기독교와 관련한 내용이 많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다. 작품에서 백이삭과 선자가 만나는 대목은 어색하지 않다. 백이삭은 평양의 부잣집 둘째 아들로, 목사가 되어 일본에 있는 교회로 목회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일본에는 이미 그의 형 백요셉이 아내와 함께 정착했고, 이삭을 불러들인 것이다. 백요셉이 일본으로 가는 과정에서 선자의 부모가 하는 하숙집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었고, 요셉은 그 하숙집을 소개한 것이다. 그렇게 이삭과 선자가 만나는데, 선자는 이미 임신을 했고, 아버지인 고한수가 유부남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선자는 고한수와 결별한다. 선자는 이삭의 헌신에 감동하고, 진심으로 이삭을 사랑하지만, 이삭은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당하고 일찍 사망한다. 이삭의 아들은 노아, 모자수이고, 모자수의 아들은 솔로몬이다. 일본은 기독교가 극히 미미한 존재인데, '재일조선인'으로 조선사람의 흔한 이름이 아닌, 성경에 나오는 이름을 차용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백이삭과 백요셉이 평양에서 온 기독교인이라는 점은, 미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 평양은 미국 개신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으로, 당시 조선에서 기독교가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 하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우고, 조선사람을 교육시켰다. 교육과 목회는 서로 떨어지지 않았고, 공부를 잘 하는 조선인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공부하도록 돕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의 근대화에 미국 개신교는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으며, 재미교포 작가인 이민진 작가는 작품 취재를 통해 '재일조선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이 시기 평양의 개신교도를 취재했거나 자료를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읽으면서 독특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가 재미교포로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가서 성장한 사람이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기 때문에, 한글 문장과는 사뭇 다른 영어 문장으로 작품을 썼고, 그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면서 한국소설을 읽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내용은 분명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한국인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문장은 한국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구조로 짜여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의식구조는 이미 '미국인'으로 확고히 정립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그가 모국인 한국과 한국의 역사, 한국인의 고난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다는 건 퍽 높게 평가하면서, 이민진 작가의 영어 소설이 한국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세계 문학의 보편성을 획득하기에 필요한 문장구조가 서양(미국)식으로 짜여지고 있는 것은 흥미를 갖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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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 백남룡
벗 - 백남룡 북한 문학 작품을 처음 읽은 건 군복무 하던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이 왜곡되었어도 그 언저리였던 건 분명하다. 그러니까 82년을 전후한 시기였고, 나는 부대 근처에서 그 책을 발견했다. 내가 복무하던 부대는 화천에서 산양리를 거쳐 민통선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포병대대였다. 부대 주변으로 가끔 북한에서 보낸 삐라가 떨어지곤 했다. 삐라를 주워도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관물대에서 북한 삐라가 나오면 말할 것도 없이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가거나, 최소한 군대 영창이라도 가게 될테니, 삐라를 발견하면 주워서 보고를 하던지, 그냥 두고 지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가 주운 삐라에 실린 단편소설은 어린 소년과 기차 그리고 김일성 장군이 나오는 내용이었다. 단편 내용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으로, 북한 문학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감동 코드가 들어 있었다. 그 단편이 언제 창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제 읽은 백남룡의 소설 '벗'과 한 줄기로 연결되는 공통점이 있다. 이 작품은 1988년에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소설의 무대는 80년대 중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정진우 판사는 이혼 전문 판사로 복무하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 한 젊은 여성이 찾아온다. 채순희는 도 예술단의 성악 배우, 중음 가수(메조 소프라노)로 복무하는 예술노동자다. 그이는 정진우 판사에게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고, 이혼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정진우 판사는 채순희의 배우자인 리석춘의 의견과 주장도 들어봐야 해서 저녁에 자기 아파트로 리석춘을 부른다. 리석춘은 아내 채순희와 처음 만난 때부터 갈등을 일으키게 된 계기와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초산군에 있는 철제일용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채순희는 도시에 있는 강안공장에서 파견을 온 리석춘을 만나게 된다. 리석춘은 한 달을 기한으로 공장에 선반기와 후라이스, 원통연마반들을 설치해주고 운전공들의 기능 양성까지 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리석춘은 채순희를 발견하고 첫눈에 반한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했고, 아들 호남이도 낳아 키우고 있다. 채순희와 리석춘이 말하는 이혼 이유는 '생활 리듬'이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우리식 표현으로는 '성격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진우 판사는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각자 주장하는 내용을 귀기울여 듣는다. 리석춘이 일하는 공장을 찾아가 리석춘의 선배 노동자를 만나 리석춘이 어떤 사람인가를 듣고, 채순희가 복무하고 있는 도 예술단장을 만나 채순희에 관해 동료들의 평가를 경청한다. 이 과정에서 정진우 판사와 그의 아내 한은옥의 상황도 등장한다. 두 사람은 대학에서 우연히 만났다. 법률 공부를 하는 정진우와 생물학을 전공한 한은옥이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정진우의 동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진우는 한은옥이 외진 시골의 가난한 마을에서 유학을 온 학생이고, 그가 마을을 위해 남새(채소) 육성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연인이자 동지적 관계로 호감을 갖고 결혼한다. 정진우는 곧 판사로 복무하고, 한은옥은 학부 때부터 연구해 온 남새(채소) 연구를 계속하는데, 물이 귀하고 온도가 낮은 고향 연수덕에서 남새를 재배할 수 있도록 육종 연구를 무려 20년 가까이 해오고 있다. 정진우는 자주 집을 비우고 출장 가는 아내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도 있고, 외로울 때도 있지만, 채순희, 리석춘 이혼 사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아내 은옥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자기의 이기적인 태도를 반성하고, 아내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걸 느끼게 된다. 소설은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채순희와 리석춘이 결국 이혼을 하게 될지, 아니면 정진우의 바람대로 다시 마음을 돌이켜 서로를 이해하고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갈지 독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채순희가 바라는 남편 리석춘의 모습과 리석춘이 바라는 아내 채순희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왜 다른지를 서정적으로 그리기 때문에, 독자는 희망과 긍정의 마음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게 된다. 이 작품의 특징은 서너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먼저, 이 소설에는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소설의 '우상화'와 '위대한 지도자'에 관한 충성에 관한 내용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이건 매우 특이하게 보이는데, 북한문학이 80년대 이전보다 사상적으로 훨씬 유연하고 자유로워진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다만, 정진우를 비롯해 주인공들이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떠올릴 때, '당과 조국'을 위해 복무한다는 것, 개인의 삶의 존재 의미는 '당과 조국'의 이익에 있다는 정도가 이 소설이 북한소설이라고 생각되는 표현 수위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1988년인데, 소설을 읽어보면 한국(남한)의 60년대, 70년대 풍경이 떠오른다.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50대 이상-이라면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풍경과 언어-작가가 구사하는 문장과 작품의 주인공들이 하는 대화-가 60년대, 70년대의 한국 풍경과 매우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남한에서 60년대, 70년대 개봉한 영화를 보면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때만 해도 북한(평안도)과 경기(서울 포함)의 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가의 언어는 부드럽고 순하다. 문장은 소박하고 대화는 은근하며, 마음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의 성향에 따른 개성이 아니라, 북한의 체제가 보여주는 환경의 영향이라고 본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주체적'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고, '개인'보다는 '당과 조국'을 마음에 품은 개인들의 공동체로 묶인 집단의 정서를 내재하고 있다. 북한에서 '판사'는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존재가 아니다. 정진우 판사는 단지 법률을 배운 지식인으로, 법적 판단을 하는 사람일 뿐, 공장 노동자, 예술단 성악 노동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노동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으며, '노동자'는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갖고 있다. 이것은 북한 체제의 특수성에서 오는 모습이지만, 남한과 비교하면 극적으로 다르다. 남한의 판사는 스스로 최고의 엘리트라고 생각하며, 평범한 노동자를 깔보고 함부로 대한다. 이런 모습만 보면 '인간 중심'의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 어느 쪽이 더 평등하고 우월한가를 알 수 있다. 북한에도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은 있다. 이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자기 조국(북한)을 탈출해서 다른 나라로 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 자본주의적 탐욕에 이끌려 조국을 배신한 사람도 있다고 본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인물 - 채림 -이 있는데, 정진우 판사는 채림의 범죄 사실을 발견하고 호되게 질책한다. 채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가 재산을 원상복구하는 선에서 가벼운 징계를 받는데, 북한과 같은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행동을 하면, 그 집단은 내부에 균열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의 지배집단에서는 '개인주의'를 가장 경계하고, 이기적, 탐욕적 행위를 강하게 처벌한다. 정진우 판사는 채순희에게는 예술가가 갖는 허영심을 개인화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즉, 자기가 갖고 있는 재능-성악 가수-을 기예로써가 아닌, 그 노래를 듣는 노동자, 인민의 삶과 결합해 노동자, 인민이 예술단원의 노래를 통해 '당과 조국'을 더욱 깊이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공장의 선반노동자 리석춘에게는 '헌신성'만으로는 위대한 노동자가 될 수 없다고 충고한다. 아내 채순희가 바라는대로 현재의 조건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주체적으로 하는 능동적 노동자로 거듭나지 않으면 '당과 조국'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고 충고한다. 이런 정진우의 주장은, 북한(노동당)이 과거에 가졌던 보수적 태도를 버리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현실적 이유와 맞물리는 내용이다. 즉, 채순희와 리석춘의 불화는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데서 오는 나태와 무기력이 원인이었고, 이것을 깨닫고 새로운 마음과 정신으로 스스로 능동적인 노동자로 발전하도록 노력하는 순간, 두 사람의 불화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남북한 문학을 통틀어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한다. 소설 내용도 좋지만, 북한 체제가 보여주는 특수함, 북한 인민이 '당과 조국'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프랑스 독자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경험일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독자들도 이 작품을 읽기 권한다.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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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해 - 이윤길
남극해 - 이윤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익명이다. 작가는 본능적으로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던 걸까. 박 기관장, 강 사장, 장 선장, 1기관사, 조기장 '심근수'만 유일하게 이름이 나오지만, 정작 그는 조선족 조리장에게 살해당한다. 선원들의 익명은 그들의 운명을 상징한다. 그들이 탄 배의 이름이 '피닉스호'라는 것에서, 그들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43년이나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빈 작가의 경험과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귀중한 소설이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이면서도 올바른 해양정책이나 해양문학이 뿌리 내리지 못한 기형적 형태를 갖고 있는데, 특히 '해양문학'은 저변이 좁고 얕아서 하나의 장르나 범주로 구분하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부박하다. 작품은 원양어업, 그것도 대서양이나 북태평양이 아닌, 남극해로 떠나는 원양어업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피닉스호'는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을 출발한다. 갑자기 빈 자리가 된 기관장을 부산에 사는 박 기관장을 불러야 했고, 그가 부산에서 뉴질랜드로 오는 길이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웰링턴을 출발한 피닉스호는 남위 60도까지 내려오면서 남극수렴선까지 오는데만 20일이 걸린다. 이 기간동안 배에서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박 기관장의 과거 회상이 나오고, 강 사장이 '피닉스호'를 끌고 다시 바다로 나오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급격하게 바뀌는 날씨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배는 큰 문제 없이 남극해로 향하고, 피닉스호는 남태평양에서 대권항해를 하며 '케이프 혼'을 지나 사우스 셰틀랜드 제도(이곳에 킹 조지섬이 있다)를 통과하면서 웨들해로 들어선다. 소설의 중반부터 피닉스호 선원들은 조업을 시작한다. 이들이 잡는 물고기는 '남극이빨고기'로 값이 비싼 물고기다. 그만큼 잡기 어렵고,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한번 출항에 만선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강한 유혹이 있는 어업이기도 하다. 다국적 선원으로 구성된 피닉스호의 선원들과 선주를 비롯한 선장, 기관장 등이 모두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일종의 '외인부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소설에서 다수의 선원들은 배경으로 처리되고, 박 기관장, 강 사장, 장 선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점이 조금 아쉽다. 선원들이 서른 명이 넘기 때문에, 이들을 소설에서 모두 소개하거나, 이들의 서사를 나열하는 것이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적어도 대표적인 인물 몇 명의 서사를 풀어 놓으면서, 주인공 세 사람의 서사와 얽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 중반까지는 피닉스호가 출발해서 남극해로 들어서기까지 과정을 그리고 있다. 원양어선에서 일어나는 일은 독자에게 낯설기 때문에, 작가는 친절하게 상황과 내용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결코 지루하지 않다. 허먼 멜빌의 '백경'이 그렇게 두꺼운 소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선원에 관한 설명을 가능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 기록이 당대의 선원의 삶과 배에서의 생활, 배의 기능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기록으로의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된다. 이렇듯, 작가는 구체적인 사건-투승과 양승-이 발생하기 전에 선원들과 배의 운명을 가능한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피닉스호가 웨들해에 들어서면서부터 시투(첫번째 시험 투승)를 할 때부터는 팽팽한 긴장을 느낄 수 있는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바뀐다. 끊임없이 떠내려오는 유빙과 싸워야 하고, 심해 1,000미터 아래 살고 있는 남극이빨고기를 낚아 올려야 하는 부담과 압박으로 선주는 물론 선장 이하 모든 선원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날카로운 남극의 바닷물을 뒤집어 쓰면서 고통스러운 육체노동을 하는 장면은, 원양어업의 고단한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피닉스호 조업을 나선 이후, 네 번의 사고가 발생한다. 출항 초기에 선원 아만의 손가락 부상, 조기장 심근수의 부친상, 조선족 조리장의 살인 그리고 피닉스호의 운명을 가르는 기관실 화재가 그것이다. 이 사건들이 하나의 인과로 묶이지는 않지만, 주인공 박 기관장은 피닉스호에 타는 순간, 자신이 다시는 육지에 발을 디디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받는다. 아니, 좀 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육지에 발을 디디고 싶지 않다는 의지인지 모른다. 그는 배의 엔진을 수리하는 기술자로 먹고 살았지만, 자신이 선원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그가 육지에서의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것은, 육지-현실-의 삶이 자신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는데, 그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육지가 '현실'이라면, 바다는 '이상'이자 '희망'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선연'을 떠난다. 그가 이미 아내와 이혼한 것처럼, 그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육지에서 사업하며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인간의 욕망과 이기, 탐욕에 환멸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고, 돈도 벌 수 있었음에도, 강 사장이 자기를 부르자, 모든 것을 버리고 - 심지어 사랑하는 어머니마저도 홀로 두고 - 바다로 나온 것이다. 독자는 한국문학에서 낯선 해양문학인 이 작품을 읽으면서 바다, 원양어업, 뱃사람, 남극에 대해 풍부한 상식을 얻을 수 있다. 가능하다면 구글 지도를 펼쳐놓고, 이 작품에 나오는 지명을 찾아보면서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케이프 혼'을 돌아 '사우스셰틀랜드 제도'로 지나면 곧바로 웨들해가 나오는데, '웨들해'는 실제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섬'까지 빨리 가도 5일이나 걸리는 거리인데, 지도에서 보면 그 거리가 실감난다. 가장 가까운 곳에 '킹 조지 섬'이 있고, 이곳에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과학기지가 있다. 작가는 현직 선장으로 세계의 모든 바다를 누빈 풍부한 경험으로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바다를 그리고 있어서 작품의 사실성을 핍진하게 채우고 있다. 이런 바다의 묘사들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라는 점에서, 해양문학은 '르뽀르따주'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피닉스호의 운명은 너무 갑작스럽고 우연하게 결정되는데, 그것이 매우 사실적이라 해도, '소설적 완결성'을 말할 때는 아쉬움이 있다. 실제 벌어진 사건으로 선상 반란과 선상 살해사건 등이 언론에서도 보도된 바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선원(조리장)의 살해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 살인 사건과 피닉스호의 운명은 직접 관련이 없다. 차라리 심각한 살인사건과 피닉스호의 운명을 연결지을 수 있는 새로운 사건을 도입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원들은 모두 익명으로 등장하며, 주인공들과 사건의 배경으로만 보이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선원들의 갈등과 선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피닉스호의 운명을 가름하는 것이었다면 좀 더 드라마틱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앞부분에 선원들 가운데 몇 명이라도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국 문학에서 해양문학은 퍽 귀한 존재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인간의 삶도 보편성을 띄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바다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나오는 인간의 행동은 육지에서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과는 분명 다르며, 그 다름이 특별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해양문학의 저변이 넓어지고, 작품이 깊어지면 바다와 바닷사람, 섬, 어촌, 어업을 바라보는 뭇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고,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남극해'는 바다와 바닷사람의 삶을 과장하지 않고 보여주며, 뱃사람의 고독, 외로움, 바다와 인간의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군대에서 전역하고, 사회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이 해양 전문 잡지사였다. 1985년 무렵이었는데, 그때는 해양, 어촌, 수산물 등을 다루는 잡지가 한국에 두 개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 월간 잡지를 발행하는 한 곳이었다. 편집부 직원 두 명과 서무직원 한 명이 근무하는 잡지사는 열악했고, 사장은 잡지에 실을 광고를 가져오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때의 짧은 경험으로, 한국 정부가 바다에 기울이는 정책, 제도, 지원이 형편 없다는 걸 알았고, 한국이 경제, 문화, 산업적으로 시장을 키우려면 반드시 바다와 관련한 정책에 큰 관심과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 한국의 대기업 조선소는 세계 1위의 수주율을 기록하고 있는데, 바다와 관련한 산업은 보통 사람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할 뿐 아니라, 경제적 가치도 매우 높고, 규모도 크다. 양식업, 근해조업, 원양어업 등 수산업은 물론이고, 어촌의 현대화, 어촌의 콘텐츠를 살려 소프트웨어 산업으로 육성하며, 수천 개의 섬을 역사, 문화 자원으로 삼아 지역 발전의 밑거름이 되게 만들 수 있는 방안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바다 산업은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해양수산부는 정부 부처에서도 힘이 약한 기관이고, 예산도 많지 않아서 필요한 사업을 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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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에코 - 해리보슈 시리즈 1
블랙 에코 - 해리보슈 시리즈 1 마이클 코넬리의 장편 데뷔작. 이 작품에 대한 상찬은 다른 곳에서도 많으니, 읽으면서 느낀 몇 가지 아쉬운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로스엔젤레스 경찰국 소속 형사 '해리 보슈'는 불우한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엄마는 매춘부로 알려졌는데, 나중에 거리에서 강간살인 사건의 피해자로 죽는다. 이후 해리는 위탁가정에서 지내며 불우한 청소년 시기를 거쳐 베트남 파병 군인이 된다.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와 경찰이 되었고, 그는 형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언론의 관심을 받고, TV시리즈에 이름을 빌려주어 돈을 벌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경찰청 본부에서 헐리우드 경찰서로 좌천된다. 이 작품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우연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우연'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고 연결되며, 사건의 배경이 된다. 살인사건 목격자 샤키가 동굴 입구에 있었다는 건 필연이라고 하자. 그가 그 시간에 누군가 사체를 유기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과연 필연일까. 그리고 피해자 메도우스 사체가 그 동굴로 유기되는 건 필연이라고 하자. 메도우스와 해리가 베트남에서 같은 부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전우였다는 건 어떤가. 이건 너무 기막힌 우연 아닌가. 그리고 하필 왜 이때 메도우스는 살해당했으며, 사금고와 은행을 터는 사건이 발생하는 시기가 이때였으며, 왜 이런 사건이 벌어진 걸까.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던 FBI의 팀장 루크가 베트남에 있었다는 것, 해리의 베트남 동료들이 이 사건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 등은 모두 우연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범죄를 기획했다면, 메도우스가 돈이 궁해 금고를 털었을 때 나온 팔찌를 전당포에 파는 일이 없도록 기획자이자 책임자-지금은 루크라고 해두자-가 면밀히 지켜보고, 관리했을 것이다. 수백만 달러의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큰돈이 될만한 재물을 손에 넣었으면서도 정작 그들은 모두 가난하게 지냈다.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들이 돈이 없어 다시 범죄를 저지르거나, 실수를 해서 범죄 행위가 들통날 것은 예상했다면, 오히려 루크는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이들을 전부 죽이는 것이 더 안전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은 메도우스, 해리, 그리고 베트남에서 같은 소대였던 동료들, FBI 팀장 루크까지 모두 베트남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FBI 요원이자 해리의 동료인 엘리노어 위시까지도 베트남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엘리노어의 오빠도 베트남 파병 군인이었으며, 베트남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고향인 LA에 돌아와서 살해당한다. 20년 전, 베트남 파병 군인이었던 메도우스의 죽음으로 시작한 사건은 20년 전, 베트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미국의 패전과 철수, 베트남에서 미군과 월맹군이 뒷거래로 마약을 팔고, 미국으로 밀반입했던 내용이 드러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이 베트남에서의 패전으로 쫓기게 된 월맹군 일부가 수백만 달러를 다이아몬드로 바꿔서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엘리노어 위시의 오빠가 살해당한 것도 베트남에서 마약을 가지고 들어와서 몫돈을 벌려는 목적 때문에 그런 것이고, 메도우스가 죽은 것도, 이들을 모두 죽게 만든 것도 루크의 탐욕과 함께, 루크를 은밀하게 조종한 엘리노어 위시의 ‘작전’ 때문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건의 기획이 엘리노어 위시의 철저한 계획이라는 것인데, 변수는 오로지 해리 보슈이 등장 뿐이었다. 하필 해리 보슈가 헐리우드 경찰서 소속으로 좌천되었고, 하필 그날, 메도우스가 살해당한 날 당직을 섰으며, 하필 그 시간에 동굴 근처에 있던 샤키가 재빠르게 사체가 있다고 전화했을까.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좀 불편하다. 사건의 세부적 묘사, 경찰서, 로스엔젤레스의 시가지와 풍경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 주요 인물의 심리와 갈등을 면밀하게 그린 것은 높게 평가하지만,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우연’이 작동하는 것은 작품의 무게와 깊이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과 비교하면, 이 작품은 훨씬 ‘말랑말랑’하다. 즉, 하드보일드하지 않다는 뜻이다. 해리 보슈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외롭고 고독한 인물이며, 동료 경찰과도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외톨이지만, 그것이 ‘하드보일드’한 인간은 아니다. 해리가 FBI 요원 엘리노어 위시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걸 보면, 그의 내면이 메말라 있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해리는 다정한 부모, 따뜻한 가정, 사이 좋은 형제, 남매가 있는 가정에서 살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런 환경을 부러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환경으로 들어가는 걸 두려워한다. 행복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동경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내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해리는 금욕적 인간으로, 자신을 잘 통제하지만, 그 자기억제의 내면에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마약, 폭력 등에 노출될 수 있을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베트남에서 그런 경험을 했고, 베트남에서의 공포와 충격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수많은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전쟁 트라우마(PTSD)로 고향에 돌아와 마약, 알콜중독 등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다. 해리 보슈 역시 그들 가운데 한 명이며, 억세게 운 좋게 살아 남은 경우에 속한다. 해리는 동물적 감각과 탁월한 추리로 사건의 본질을 향해 가지만, 그가 동료 메도우스를 기억하고, 베트남 동료와 베트남에서 벌어진 마약 밀거래, 베트남 군인과 미군의 공모로 수백만 달러의 다이아몬드가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과정, FBI 요원 루크와 위시의 연결고리 등을 모두 밝혀내는 것은 그가 베트남 참전 군인으로, 그와 가까운 동료가 죽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필 그가 근무하는 지역에서, 근무하는 시간에. 고전적인 스릴러, 추리, 첩보 소설에서는 주인공(경찰, 사립탐정 등)이 피해자와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다. 주인공은 제3자의 입장에서, 피해자와 그 주변 사람들을 탐문, 수사하면서 범인을 찾아낸다. 범인은 당연히 피해자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으며,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는 인물이거나, 너무 가까워서 범인이라고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인물일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처음부터 우연이 개입하고, 그 우연은 작품 곳곳에서 단서를 제공하며, 결국 마지막까지 우연이 개입한 필연으로 종결된다. 읽기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마치 잘 닦아 놓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이랄까, 미로를 찾아 헤매는 불안과 호기심이 거의 들지 않았다. 심지어 소설 초반에 루크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고, 그 짐작은 들어맞았다. 이 소설은 분명 재미있지만, 아쉬움도 많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작가의 장편 데뷔작이어서 어쩌면 이런 ‘우연’이 옥에 티로 작용한 것일 수 있다. 앞으로 해리 보슈 시리즈를 계속 읽어가다보면 작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