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1-18(목)
 

제목 : 하비비

작가 : 크레이그 톰슨

출판 : 미메시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린 전작 '담요'에 이어 이 책이 나오기 중간에 '만화가의 여행'이라는 여행 일기를 낸 크레이그 톰슨이 7년 동안 공을 들여 내놓은 작품이다. 그래픽노블로 이만한 두께로 출판한 것은 보기 드물다. 무려 670쪽이나 되는 이 두툼하고 묵직한 책은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호기심이 들게 만든다. 이렇게 할 말이 많다는 건, 작가가 수다장이거나, 진정 하고픈 말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렇게 두꺼운 책은 잘못 고르면 종이와 잉크, 독자의 시간 낭비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선택하게 된다. 이 책이 크레이그 톰슨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선뜻 믿고 구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이 놀라운 점은, 장편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과 함께 작가가 직접 매우 복잡하고 섬세한 이슬람의 문양을 그렸다는 점이다. 첫페이지부터 작가는 이슬람 전통 문양을 꼼꼼하고 섬세하게 그리는데, 이 문양을 직접 그렸다고 생각하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랍다. 크레이그 톰슨이 그래픽노블의 대가라고 말하는 것이 이 작품을 보면서 수긍될 정도로 한 페이지마다 들인 공력이 대단하다.

그런 면에서, 활자로 이루어진 소설과 그림과 글로 표현하는 그래픽노블의 차이와 의미를 이 작품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소설로도 이 작품을 묘사할 수 있지만, 그래픽노블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풍부한 정보와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일부러 밝혔듯, 이 작품은 순수한 창작이다. 작품의 무대는 이슬람 국가지만,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가 아니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시간의 흐름은 약 16년 정도라고 하는데, 독자가 느끼는 시간은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길고도 오래된 이야기다.

작가는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주인공으로 어린 여자와 흑인 아기를 내세웠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은 독립적 존재가 아닐 정도로 천대받는 존재다. 이슬람의 율법에는 여성을 존중하라는 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꼭 있는데, 이슬람의 현실은 율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다른 나라도 여성의 차별과 억압이 항상 존재하지만, 이슬람 사회에서는 여성의 위치가 더욱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어린 여자 주인공 도돌라는 가난한 집안에서 가족들의 식량을 구입하려는 이유만으로 낯선 남자에게 팔려간다.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은 듯한 남자는 필경사였고, 다행히 도돌라를 학대하지는 않지만 딸보다 어린 도돌라와 섹스를 하고, 도돌라가 처녀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필경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죽고, 도돌라는 노예시장으로 팔려간다. 그곳에서 갓난아이 '잠'을 만나고, 잠의 엄마도 다른 곳에 노예로 팔려나가자 도돌라는 잠을 데리고 사막으로 도망친다.

도돌라는 누나처럼, 엄마처럼 잠을 돌본다. 그들은 사막에 버려진 배에서 무려 9년 동안 숨어서 생활하는데, 도돌라는 먹고 살기 위해 사막을 횡단하는 상단에게 몸을 팔고, 음식을 얻는다. 잠이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점차 소년으로 자라면서 도돌라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내면에 성적 욕망이 들끓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다 도돌라가 식량을 구하려고 배를 떠날 때, 잠이 몰래 뒤를 밟는다. 도돌라는 자신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고, 잠은 처음 그 장면을 보면서 크게 충격받는다.

어느날, 식량을 구하러 나간 도돌라는 궁에서 나온 병사들에게 납치당해 술탄의 후궁이 된다. 갑자기 헤어진 잠을 걱정하면서, 술탄의 아이를 출산하지만 자기가 직접 낳은 아이를 외면하고, 헤어진 잠만을 생각한다. 그러다 아이가 3살이 되던 어느 날, 도돌라는 아이의 존재를 깨닫고 모성애가 발현하는 걸 느끼는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사라진다. 경쟁자 후궁들 가운데 누군가 아이를 납치해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와 애착이 시작되자마자 아이를 잃어버린 도돌라는 삶의 희망이 사라진다. 

이 무렵 '잠'은 사라진 도돌라를 찾아 도시로 들어오고 거세한 남자들의 집단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도 성기를 거세하고 그들과 함께 돈과 음식을 구걸하며 다니다 왕궁에 잡혀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도돌라를 발견하고, 이제 가치가 사라진 도돌라를 죽이라는 술탄의 명령으로 그들은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간 다음, '잠'은 도돌라를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든다. 두 사람은 술탄의 성 바깥쪽 빈민가의 하수구에서 어부에게 발견되고, 도돌라는 자신을 살린 사람이 '잠'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어부의 보살핌으로 몸을 추스린 두 사람은 옛날의 그 사막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사막은 이미 사라졌고, 그 자리는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살기 위해 도시로 들어가 '잠'은 노동자가 되고, 폐허가 된 빌딩의 한 칸에 도돌라는 살림을 차리고 둘이 생활한다. 도돌라와의 관계에서 극심한 갈등을 일으키는 '잠'은 자살할 결심을 하지만, 그는 마음을 바꿔 도돌라에게 돌아온다. 숨어지내던 건물이 다시 공사를 시작하고, 두 사람은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어디론가 떠나는데, 시장에서 노예처럼 팔리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와 셋이 길을 떠난다.

이 작품은 신화와 현실이 뒤섞여 있다. 도돌라가 돈에 팔려 필경사 남자를 만나고, 그에게서 글을 배우게 되는 것, 나중에 도돌라가 '잠'을 데리고 탈출해 잠과 함께 지낼 때도 잠에게 글을 가르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이 서사가 신화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화에서 여신은 인간을 돕는다. 어린 '잠'은 인간의 상징이고, 자연에서 연약한 인간은 늘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여신이 그를 보호한다. 물과 음식을 주고, 말과 글을 알려주며, 모성의 사랑을 나눠준다. 작품에서는 도돌라가 술탄의 후궁이 되고, 다시 술탄의 미움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도돌라를 살리는 건 '잠'이다. 잠은 신이자 어머니, 누나이기도 한 도돌라를 잃고 고난의 시간을 보낸다.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스스로 거세하고(하지만 완벽한 거세가 아닌 걸로 보인다), 다시 만난 도돌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려 한다. 

도돌라가 '잠'에 집착하는 건 어린 아이를 자기가 직접 키웠기 때문인데, 자신이 임신해서 낳은 아이에게는 오히려 냉담한 모습을 보이는건, 그 아이가 술탄의 아이이기는 해도 자신이 원치 않았던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도돌라는 나중에 자신의 냉담함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는다.

도돌라와 잠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날 때의 시간은 16년이지만, 이 작품에서 시간의 흐름은 두 사람의 나이보다는 사막이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하고, 작은 마을이 거대한 도시로 바뀌며, 고층 빌딩이 무수하게 들어서는 문명의 변화로 느낄 수 있다. 신화 속 주인공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결국 도시에서도 빈민이자 노숙자의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나마 '잠'이 노동자로 일해 번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데, 도시에서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시를 떠나 새로운 곳을 찾아나선다. 

이 작품이 놀라운 점은, 서사의 독특함과 함께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인위적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만화를 그릴 때 패턴, 배경, 효과 등을 위해 많은 만화가들이 톤을 쓰는데, 크레이그 톰슨은 오로지 펜과 붓선만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특히 섬세한 문양과 패턴이 많이 들어가는 작품이어서 이것을 오로지 펜과 붓으로만 그리려면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가는데, 작가는 끈기 있게 자신의 손으로만 작업을 한 것이다. 이런 노력이 있기에 뛰어난 작가의 작품이 더욱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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