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레드 로자
작가 : 케이트 에반스
출판 : 산처럼
80년대, 사회과학 공부를 할 때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몰랐다. 시간이 지나서 '레닌보다 뛰어난 이론가'였던 로자의 평전을 읽었다. 로자의 비범함은 물론이지만, 당시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의 비겁한 태도를 보면서, 유럽에서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로자가 살던 시대는 '혁명의 시대'였다. 로자는 1871년, 폴란드의 도시 자모시치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는 폴라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우크라이나 국경 쪽으로 붙은 도시였고, 유대인들이 전체 주민의 약 30%를 차지할 만큼 많았다.
현재의 자모시치 구 시가지는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모시치 시는 폴란드의 귀족이었던 얀 자모이스키가 16세기에 세운 도시로, 서유럽과 북유럽을 연결하는 무역로에 세운 도시다. 도시 설계는 이탈리아 건축가 베르난도 모란도가 했으며,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양식을 적용한 아름다운 도시로 이름이 있다.
로자는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자유롭고 진보적인 성향이어서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폴라드인'의 정체성을 갖도록 자식을 키웠으며, 부자는 아니었지만 자식들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부모였다.
그런 부모에게서 막내로 태어난 로자는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고,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다. 하지만 다섯 살 무렵, 그는 한쪽 다리가 뒤틀리며 키도 자라지 않아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았다. 로자는 여성, 장애인, 유대인이라는 여러 겹의 차별과 억압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그의 지성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에 자기의 사상을 널리 알릴 만큼 뛰어났다.
로자가 세 살되는 해, 1873년에 로자의 가족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이주한다. 바르샤바 역시 유대인 인구가 전체의 약 30%에 이를 정도로 많았고, 로자는 중산층 집안에서 자유롭게 성장했다. 로자가 성장하던 바르샤바는 폴란드, 독일,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도시였으며, 유대인 공동체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자의 부모는 유대인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특정한 종교나 정파에 소속하지 않은, 진보적 시민으로 살아갔다. 이런 환경에서 로자는 폴란드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까지 네 개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었다.
이런 재능은 로자의 장애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육체적 장애로 인한 제한된 자유를 확장하기 위해 로자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우연의 일치지만,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도 1871년, 로자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그는 천식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을 평생 앓았다. 마르셀도 육제적 장애를 지닌 채 글을 쓰기 시작했고,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남겼다. 재능 있는 사람은 스스로 빛을 낸다. 비록 육체가 자유롭지 못하다 해도, 지성까지 장애를 갖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들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로자는 불과 아홉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독일어로 쓴 시와 산문들을 번역하고, 자신의 글을 써서 바르샤바에서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에 실린다.
1881년 3월 1일, 러시에서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파' 단원들에게 암살당한다. 이들 무정부주의자들 가운데 폴란드인 '이그나치 리니에비에드츠키'가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압제에 있었던 폴란드인들은 속으로 환호했지만,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암살단원 가운데는 러시아 여성 '소피아 페로프스카야'도 있었고, 그녀는 이 그룹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재판을 통해 이들은 모두 사형당하고, 로자는 그들의 소식을 신문을 통해 들으면서, 여성 혁명가의 삶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로자가 중학생이던 1883년 무렵, 처음으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 시기에도 '프롤레타리아 당'에서 활동하던 혁명가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특히 여성 혁명가의 체포와 죽음은 로자에게 특별한 충격을 주었다. 1885년에 '프롤레타리아 당' 당원이자 혁명가인 여성 두명, 19살의 마리아 보후스제비치와 로살리아 펠센하르트가 경찰에 체포되어 죽고, 1886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당' 지도부 네 명이 바르샤바 성채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로자는 자신도 뭔가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15살 무렵 '프롤레타리아 당'에 가입한다.
로자가 '혁명가'의 삶을 선택한 것은 시대적 소명을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인으로 러시아 제국에 압제를 당하는 조국의 현실, 수많은 진보 지식인, 학생들의 반제국 투쟁, 로자가 다니는 학교에서 겪었던 차별, 여성의 사회적 제약,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의 고통 등 여러 겹의 구조적 모순이 로자를 내리 눌렀고, 로자는 그런 차별과 억압에 정면으로 저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6살의 로자는 이미 차르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으며, 그는 이때 마르크스, 엥겔스의 자적을 읽기 시작했다. 비밀 조직이었던 '프롤레타리아 당'과 나중에 결성한 '폴란드 노동자 연맹' 등에 대한 경찰의 감시와 탄압은 심해지고, 1888년, 17살이 된 로자는 여권을 만들어 스위스로 탈출한다. 불과 5년 전, 마르크스가 영국에서 사망했다.
로자는 취리히대학 철학과에 등록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수강한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물론, 다윈의 진화론을 비롯해 수학, 생물학 등 과학 분야의 지식을 쌓아간다. 사회주의자가 가져야 할 덕목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분야가 바로 '과학'이다. 과학과 철학은 철저하게 이성적 활동이며, 과학은 특히 객관적 근거가 증명되어야 하는 엄격한 분야여서 논리와 분석, 구조를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자, 사회주의자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학문이기도 했다.
스위스, 취리히에는 이미 정착한 선배 혁명가들이 많았고, 그는 폴란드 혁명가들은 물론, 러시아, 독일의 유명한 혁명가들의 흔적을 찾았고, 그들을 만나 교류했다. 그는 1893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제3차 대회'에서 발언하며 선배, 동료 혁명가들로부터 진짜 혁명가로 인정받는다.
1898년, 독일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바르샤바로 가서 혁명에 동참했다. 이때부터 로자의 고난이 시작된다. 러시아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갇혔으며, 1911년에는 인터내셔널 사회주의국의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1915년에는 다시 독일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된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경찰의 감시를 받는 '보호관찰' 대상자였음에도 급진 좌파 단체인 '스파르타쿠스'의 지도부로 참여하게 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레닌의 지도로 성공하면서 1918년에는 독일공산당 창립 총회에서 연설하고, 1919년, 운명의 그해에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배후로 체포되어 학살당한다.
혁명의 시기,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깃발을 내걸고 투쟁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당대를 가장 앞서 가는 지성인들이었다. 다수의 민중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들은 목숨을 걸로 투쟁했으며, 그들이 살았던 당대는 제국주의 폭력이 세상을 망치고 있었다.
진보적 지성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당연히 반제국주의였으며, 사회주의 이론은 그들의 무기였다. 로자는 독일 야경단에 잡혀 살해당하기 전까지 네 권의 책을 썼다. '자본의 축적'은 1913년에 쓴 저작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설명하고 있는 자본의 축적 과정을 자본과 제국주의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러시아 혁명' 등의 저작을 남긴 로자는 유대인, 여성, 장애인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난 사회주의자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다. 그가 가진 불리함 때문에 여전히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