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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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욕망을 파는 집 - 스티븐 킹
    욕망을 파는 집 - 스티븐 킹 장편소설. 1천 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이지만,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스티븐 킹의 특징이자 장점인 인물 개개인에 대한 서사의 핍진성은 여전히 놀라운데, 작품을 관통하는 서사는 빈약한 편이다. 소설 앞부분에 릴런드 곤트가 등장하고, 그가 잡화점을 시작하면서 이 서사의 끝부분이 보이는 건 나만의 관찰력은 아닐 것이다.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가 아니라, '그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모든 종류의 부정적 감정이 주인공이다. 탐욕, 이기심, 경쟁심, 질투, 시기, 분노, 차별, 불만 같은 부정적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런 감정은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언더 더 돔'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체스터밀이 거대한 투명 돔으로 갇히면서 발생하는 마을 주민 사이의 갈등과 폭력을 그린 소설인데, 양상이 조금 다를 뿐, 캐슬록에서 벌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폭력은 근본에서 같다. 캐슬록은 작은 시골 마을로 사람들이 조금씩은 알고 지낸다. 시골에 살면 한다리 건너 누구네 집에 사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도시처럼 익명으로 살기 어렵다. 마을 행사에도 참여해야 하고, 친하게 지내면 밥도 같이 먹게 된다. 차라리 도시처럼 철저히 익명으로 살아가면 상대에 관해 모르고, 알고 싶지 않고 관심을 끊고 살면 사건이 발생할 확률도 낮아진다. 대신 도시에서의 삶은 고립되어 외롭고 쓸쓸한 삶이 될 확률이 높다. 어느 쪽 삶을 선택하는지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핵심은, 사람과 가까워지면 감정을 나누게 되고, 그 감정의 교류가 꼭 좋은 쪽으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게 이 소설의 배경이다. 인간이 모여 살면서 좋은 점도 많지만, 필연적으로 경쟁, 질투, 이기심 같은 감정이 나타났다. 이건 한 개체가 생존할 때 필요하기 때문에 발현된 것이며, 부정적 감정이지만 반드시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다. 경쟁, 질투, 이기심 등의 감정은 다른 개체보다 내가 더 노력하고, 성장하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건 곧 경쟁하는 동성들 사이에서 우수하고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이성을 만날 기회가 많아지는 걸 의미한다. 즉,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에서 경쟁, 질투, 이기심, 욕망, 시기의 감정이 발생하는 배경과 원인을 말할 때, 개체 또는 집단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둔다면, 그런 감정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부정적 감정을 개체(인간)가 좋은 쪽으로만 발현하거나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개체와 집단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부정적 감정'이라고 정의했다. '경쟁'의 경우는 꼭 부정적이지 않지만, '경쟁'하려는 의지와 행동에서 시기, 질투, 이기심 같은 부수적 감정이 나타나고, 이 바탕에 보다 본질적인 '탐욕'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캐슬록 마을에 어느 날 영업을 시작한 작은 상점 '니드풀 씽스(needful things)'가 사람들 눈에 띈다. 작은 마을이어서, 거리에 가게가 문을 열면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본다. 어떤 상품을 파는지, 누가 주인인지, 주인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그 가게를 드나드는지 등등.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그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구경하는데, 신기하게도 꼭 자기가 갖고 싶었던, 원하던 물건이 눈에 띈다. 모든 사람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욕망하는 물건을 찾아주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가게 주인 릴런드 곤트는 외지에서 온 사람이다. 여름 한 철 관광객이 잠시 머물다 가는 시골 마을에 외지에서 온 사람이 가게를 열었다는 자체도 뉴스거리가 되고, 그 사람이 파는 물건이 새 제품도 아닌, 골동품이라는 것도 신기한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가게에 별 생각 없이 들렀다 깜짝 놀란다. 마음이 설레고, 심장이 뛸 정도로 갖고 싶은 물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물건이라는 게 너무 소박하고 값싼 것들이라 다른 사람에게는 우습게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애착을 갖는 물건이 꼭 비싼 건 아니다. 소소하고 값싼 물건이라도 특히 집착하거나 애정을 듬뿍 담아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경우가 더 많다. '니드풀 씽스'에서 사람들은 그런 물건을 발견한다. '니드풀 씽스'의 주인 릴런드 곤트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이 원하는 물건, 그들의 욕망을 충족하는 물건을 보여준다. 즉, 사람들은 자기의 호기심, 욕망을 충족해주는 사람에게 끌리며, 그런 사람의 말을 따른다고 반대로 해석할 수 있다. 작품에서도, 릴런드 곤트에게 물건을 싸게 산 사람들은 릴런드 곤트가 물건을 싸게 주는 대신 '가벼운 장난'을 하나 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이때 '가벼운 장난'은 물건을 산 사람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이 크지 않아 릴런드 곤트의 제안을 수락한다. 하지만, 사람이 연못에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에게는 목숨이 걸린 것처럼, 누군가 '가벼운 장난'으로 한 짓이, 어떤 사람에게는 목숨을 거는 행위라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가볍게 생각한다. 릴런드 곤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쟁, 이기심, 질투, 분노, 시기, 탐욕 같은 감정을 통제한다. 악마는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사기꾼은 99%의 진실을 말하며, 악마는 친절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초등학생 브라이언 러스크는 귀한 야구카드를 '니드풀 씽스'에서 싼값에 산다. 그리고 릴런드 곤트에게 '가벼운 장난'을 하나 해주면 야구카드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겠노라는 말을 듣는다. 어린이의 영혼까지도 아무런 가책없이 잡아먹는 악마라는 사실을 캐슬록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 쪽지, 편지, 애완견 살해, 돌멩이로 창문 깨기 같은,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장난'이 오해와 불신과 질투와 욕망에 사로 잡힌 사람들 사이에서 뇌관이 터지는 것처럼, 어느 순간 폭발하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결과를 드러낸다. 그렇게 캐슬록 사람들은 미쳐날뛰고, 마을 행정위원장 댄포스 키턴은 아내를 살해하고, 공사장에 보관하던 다이너마이트를 곳곳에 설치해 장례식장, 시청 건물, 다리를 폭파한다.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마을은 불에 타고, 미쳐 날뛰는 사람들로 캐슬록은 아비규환, 지옥이 된다. 마을 하나를 완전히 궤멸시키고 사라지는 릴런드 곤트의 정체는 독자가 상상하는 그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어느 정도 읽은 독자라면 작품 초반에 이미 정체를 알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보안관 앨런 팽본은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니드풀 씽스'의 주인 릴런드 곤트를 눈여겨 본다. 소설의 마지막은 앨런 팽본과 릴런드 곤트의 대결이 하이라이트지만, 인간 사이에 스며들어 인간을 파멸시키는 악마의 정체가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악마'는 외부에서 들어오는가, 아니면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 그 자체인가.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을 오해하고, 불신한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자기 목숨을 대신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사소한 가짜 편지 한 장으로 그 사람을 증오하는 감정이 든다면, 그건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인간의 감정은 너무 쉽고 빠르게 바뀔 수 있으며, 대부분의 인간은 어리석어서 외부의 작은 자극만으로도 사랑이 증오로 바뀔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현명한 사람은 이런 감정의 기복과 변화를 알아채고, 그 감정의 뿌리를 냉정하게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릴런드 곤트가 사람들의 부정적 감정을 충동해 폭력을 일으키지만, 외부의 개입이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가족, 이웃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빌리 서머스 - 스티븐 킹
    빌리 서머스 - 스티븐 킹 스티븐 킹의 소설을 나름 읽었고, 그의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말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어 원문이 아니어서, 그의 농담과 재치를 전부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말로 번역한 소설만으로도 스티븐 킹의 속내는 어지간히 알아서 짐작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스티븐 킹의 '글쓰기'에 관해 꽤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그의 다른 소설과 달리 '스티븐 킹의 글쓰기'라는 형식에 관해서 특히 잘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그의 소설들에서 소설의 내용 즉 '서사'와 인물에 흥미와 관심을 두었다면, 이 소설은 작가의 글쓰기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 작품에서 스티븐 킹은 주인공 빌리가 해야 하는 살인청부 암살, 암살 준비 과정에서 위장을 위한 작가의 삶, 작가 흉내를 내려다 진짜 작가처럼 글을 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빌리, 우연한 사건으로 알게 된 앨리스와의 만남, 암살 이후 벌어지는 진짜 이야기 등 모두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순차적으로 하나로 묶으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예전에는 거의 느끼지 못했거나, 약하게 느낀 정도였으나 이 작품에서는 스티븐 킹이 소설의 얼개를 짜는 방식이 눈에 훤하게 보였다. 그건 나를 포함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지 못했다는 뜻이다. 즉, 이 작품의 얼개는 다른 작품보다 인위적이고,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빌리는 우연히 살인청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지만, 그가 매우 탁월한 솜씨를 보이면서 점차 몸값이 비싸진다. 그는 이제 살인청부의 세계에서 은퇴를 할 생각이었으나 일감을 주는 닉을 통해 이번 한 번만 하고 은퇴하라는 말을 듣는다. 마지막 한 번이고, 금액이 매우 커서 빌리는 내키지 않지만 일을 맡기로 결정한다. 빌리가 노리는 타겟이 법원 계단에 나타날 때까지 몇 달의 시간이 남아 있어서, 빌리는 그 주변에서 평범한 이웃들과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는 사무용 건물 한 칸을 임대해 그곳에서 글을 쓰고, 먹고 자는 집을 임대해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며 생활인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스티븐 킹은 왜 빌리가 '작가'로 모습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빌리가 '작가'의 모습으로 위장하게 되는 과정과 내용은 어쩌면 필연으로 보인다. 법원이 보이는 사무용 건물을 써야 하는데, 그 빌딩에 입주한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눠야 할 때, 빌리가 다른 전문직으로 일한 적이 없으므로, 가장 만만한 직업이 '작가'라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빌리를 '작가'로 위장한 다음, 스티븐 킹은 빌리가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쓰도록 만든다. 그래서 독자는 주인공 빌리가 스스로 쓰는 자전적 이야기를 읽는다. 즉, 작가인 스티븐 킹이 빌리의 과거를 말하지 않고, 작중 인물인 빌리가 직접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형식이다. 빌리는 책은 꾸준히 읽는 사람이지만, 글은 한번도 써본 적 없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이야기를 써보자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득히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글쓰기는 정신 치료에서 매우 긍정적 효과를 내는 방식이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식은 여럿 있지만, 글쓰기의 힘은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빌리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글을 쓰지만, 그는 자전적 소설을 쓰면서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즉, 스티븐 킹은 주인공 빌리를 통해 빌리가 스스로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하고, 그건 성공한다. 빌리의 과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행했다. 빌리는 아버지 없이 자라는데, 그건 스티븐 킹의 어린 시절과 같다. 엄마는 남자 친구를 자주 바꾸고, 품성이 나쁜 남자 친구를 만나 삶이 시궁창 같으면서도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빌리의 여동생 캐시가 엄마의 남자 친구에게 맞아 죽는 장면을 보았고, 그가 불과 아홉 살에 여동생을 죽인 남자를 총으로 쏴죽인다. 엄마는 술을 마시고, 질 나쁜 남자를 만나 결국 마약가지 하면서, 빌리는 위탁 가정에 맡겨지고, 그는 그곳에서 줄곧 생활하다 해병대 입대한다. 빌리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고, 불행한 기억만이 남았으며, 가족과의 행복, 즐거운 추억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빌리의 자전적 소설은 작품이 거의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가 쓴 소설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으며, 다만 실존하는 인물의 이름을 바꿨을 뿐이다. 빌리가 자전적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까지는 이해하지만, 글을 써본 적 없는 빌리가 꽤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너무 작위적이지 않을까?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빌리는 학교도 거의 다니지 않았고,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가 꾸준히 책을 읽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늘 책을 갖고 다니며, 시간을 내서 책을 읽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읽고 있던 책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었다. 이 책은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만들 때 모티프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빌리가 작품 속에서 자전적 소설을 쓸 때, 그 문장은 스티븐 킹의 문장이 아니라 빌리의 문장이므로 당연히 어설프고 미흡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우연히 만난 앨리스는 빌리가 쓴 소설을 읽고 재미있다고 말하고, 좋아한다. 그건 적어도 빌리가 자기의 지난 삶을 거짓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문장력이 부족해도 진솔함이 보이는 문장이라면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 책은 400페이지 두 권인데, 1권에서 암살 사건이 끝나면서, 진짜 이야기는 암살이 아니라는 걸 독자는 알게 된다. 그렇다면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2권에서는 암살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는 것도 짐작한다. 빌리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자전적 이야기는 1권에서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에 이어 해병대 입대, 이라크 파병과 전투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가 저격수로 발탁되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2권에서는 이라크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전우들이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내용들이 나오는데, 빌리는 어릴 때는 물론, 전쟁 트라우마까지 겪으면서 용케 사회 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우연한 사건으로 스무 살 아가씨 앨리스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만남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서사이자, 빌리의 삶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빌리는 앨리스가 성폭행을 당하고 죽기 직전에 그녀를 구하는데,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앨리스가 참혹하게 죽은 여동생 캐시와 동일시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즉, 앨리스를 지키는 것이 죽은 여동생 캐시를 지키지 못한 자기의 나약함에 대한 보상이라고 무의식에서 반응하는 것이다. 계획한대로 암살은 성공했지만, 빌리는 자기에게 일감을 준 사람들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혼자만의 탈출 계획을 만들어 탈출한다. 빌리가 암살한 사람은 범죄자로, '죽어 마땅한' 놈이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빌리 역시 다른 암살자와 조직의 타겟이 되어 쫓기는 몸이 된다. 자기 목에 60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는 걸 알게 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래선을 추적해 누가, 왜 자기를 죽이려는지 알아내는 것이 2권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이때 이 모든 과정을 우연히 만난 앨리스와 함께 하면서, 빌리와 앨리스의 우정은 깊어지고, 앨리스를 지키려는 빌리의 마음은 오빠나 아버지 같은 심정이 된다. 책 표지에 '하드보일드 누아르 스릴러'라고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살인청부를 하는 빌리는 '나쁜 놈만 죽인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고, '누아르'라고 할 만한 내용은 빌리가 죽인 범죄자와 관련 있는 언론 재벌 클라크와 그의 아들에 관한 내용 뿐이다. 빌리는 '하드보일드'하지도 않고, 작품의 내용은 '스릴러'하고도 거리가 있다. 빌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 과거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이 스티븐 킹이 가장 잘 하는 묘사인데, 그가 우연히 만난 앨리스에게 자기의 모든 걸 주는 과정에서, 스티븐 킹이 늘 보여주는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입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빌리는 아동성폭행, 아동성매매, 여성에 대한 성폭행, 성추행에 관해서는 일말의 용서가 없다. 그의 작품에서 이런 내용이 나오면 반드시 철저하게 응징, 복수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불행한 여성이 자기의 현실을 극복하고, 용기를 갖게 되는 장면, 여성이지만, 세상의 편견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당당하게 독립하려는 당찬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빌리는 자기의 과거를 스스로 지움으로써, 앨리스가 새롭게 출발하는 삶을 응원한다. 빌리가 쓴 자전적 소설은 빌리의 부재(不在)를 대신하는 그의 실체이며, 앨리스는 빌리가 쓴 소설을 이어받아 자기 이야기를 써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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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6
  • 로드워크 – 리처드 바크만
    로드워크 – 리처드 바크만 이제 막 마흔 살이 지난 도스는 세탁물 공장의 중간관리자로 일하는 백인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았다. 스무 살에 아내 매리를 만나 결혼했고, 부부 사이는 원만하며, 도시 외곽에 ‘내 집’을 갖고 있는 백인 중산층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사는 배경은 1973년과 1974년으로, 이때 미국은 몇 가지 중요한 외부적 사건으로 미국 사회가 시끄러운 상황이다. 이미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미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이었고, 의미 없는 전쟁에 미국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개죽음을 시킨다는 비판 여론이 폭발하고 있었다. 이런 시국에 1972년 11월 7일, 미국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닉슨이 선거에서 이겨 미국대통령이 되었다. 이때 닉슨은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재선이었으며, 1974년 8월 9일 대통령 자리에서 자진 사임하는 것으로 불명예 퇴진한다. ‘워터게이트’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닉슨의 측근들이 꾸민 ‘재선 공작’의 일부가 들통나면서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정치 사건이었다. 또한 1973년에서 1974년 기간에 중동에서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세계적으로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이 전쟁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뺐긴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되찾는 전쟁이었지만 결론은 다시 이스라엘이 이긴 전쟁이 되었다. 이스라엘 뒤에는 미국이 있었고,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중동 국가들(이집트, 시리아) 뒤에는 쏘련, 북한, 동독, 파키스탄, 레바논 등이 지원했다. 전쟁의 수단 가운데 하나로, 원유 가격을 인상하고, 원유 생산량을 줄이겠다는 중동 국가들(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OPEC 가입 국가)의 결의로 오일 쇼크가 시작되었고, 원유 가격은 약 3배 정도 폭등했다. ‘오일 쇼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는 미국과 유럽이었으며, 이 작품에서도 미국 사회에서 주유소에 휘발유와 경유가 제때 공급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내용이 나온다. 도스의 삶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그가 사는 마을이 새로 공사하는 고속도로에 편입되면서 사라질 처지가 되면서다. 주 정부는 동쪽에서 서쪽을 잇는 고속도로를 새로 건설하면서 도스가 사는 마을,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의 크지 않은 마을을 밀어버리고, 그 위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도록 설계했다. 이미 마을 주민 대부분은 보상금을 받고 마을을 떠났으며, 도스를 포함해 몇 집만 남았고, 그들도 곧 마을을 떠날 예정이었다. 오직 도스만이 마을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스의 아내는 당연히 보상금을 받고 다른 마을에 집을 매입해 떠나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도스는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속인다. 고속도로 신설 공사는 도스의 마을은 물론 그가 다니는 직장까지 영향을 끼치는데, 세탁 공장도 고속도로 공사 범위에 있어 철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스는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부지를 알아보고, 매입 결정을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공장부지 매입 계약을 하지 않으면서 결국 스스로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20년을 애정을 갖고 다닌 회사를 스스로 떠난다. 이 소설은 나에게 매우 ‘개인적인’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에 감정을 이입하게 하는 장치가 있는데, 도스가 자기 집에 집착하면서 집을 떠나지 않으려는 심리, 자기 집이 철거회사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무허가 건물이라고 시에서 파견한 용역들에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걸 보면서 느낀 슬픔과 분노가 되살아났다. 도스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간다. 그는 보상금을 받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며, 다니던 직장에서도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부지를 매입해 중간관리자로 일하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도스의 내면에서 그를 파멸로 이끄는 힘이 있었고, 그 정체가 정확히 무언지 알지 못하지만, 지금의 상태에서 앞으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막연한 느낌을 갖는다. 도스는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의 삶에 발목을 잡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도스가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것도, 그가 지키고 싶은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과거의 추억이 된 슬픔과 아픔이지만. 도스의 삶을 이해하려면 그의 과거를 들여다봐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별문제 없이 살아가는 도스와 매리 부부지만, 그들의 과거에는 자식을 잃은 깊은 슬픔과 아픔이 있었다. 도스의 행동이 때론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도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의 내면이 붕괴되는 과정을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도스의 일방적 행동으로 삶의 기반이 무너지면서 매리는 도스를 떠나고, 결국 이혼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 도스가 계획한 일련의 과정이라고 본다. 매리는 아직 삼십대 후반의 매력있는 여성이고,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도스는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을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도스는 매리를 실망시키고, 매리가 자기를 떠나도록 ‘연기’한다. 물론, 도스는 매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지만, 도스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만큼, 매리를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하는 갈등을 감수한다. 집을 철거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공사업체에서 보낸 변호사가 최후 통첩을 하러 방문한다. 도스는 보상금을 받겠다고 말하고, 그 돈을 받아 절반은 이혼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 매리에게 보내고, 절반은 자선 단체와 그가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보낸 젊은 여성 올리비아에게 보낸다. 도스가 스스로 파멸을 선택한 심리적 배경에는 어린 아들을 잃은 슬픔말고도, 그가 20년을 일한 회사가 주인이 바뀌면서 달라진 환경에도 있었다. 도스는 스무 살 무렵부터 이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고, 그때는 이 세탁 공장이 가족기업으로, 사장인 타킹턴 씨가 운영했으며, 나중에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회사를 운영했다. 도스는 이 회사에 다니며, 회사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대학 공부를 했고,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회사에 복귀해서 관리자가 되었다. 도스에게 이 회사는 단순한 ‘직장’의 의미를 넘어, 하나의 ‘가족’으로 여겨지는 존재였다. 도스의 마음을 흔든 또 하나의 사건은, 그와 오래 함께 일한 조지 워커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이었다. 좋은 동료를 잃은 슬픔도 깊었지만, 조지 워커의 형도 자살하고 말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우연이지만, 도스가 쇼핑몰에서 본 한 여성이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눈앞에서 사망하는 장면을 보았다. 이런 일련의 상황이 도스가 파멸을 선택하는데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즉, 도스의 마지막 행동까지는 매우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그의 행동을 이끌어낸 계기들은 어린 아들의 죽음, 아들과 추억이 얽힌 집의 철거, 서로 인사하며 지내던 이웃과 헤어짐, 회사의 이주와 경영진의 냉정함, 형제처럼 친한 동료의 죽음 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나타난 결과다. 이 소설은 공포, 호러, 스릴러 장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도스의 내면에서 들리는 또 다른 목소리가 도스의 분열적 정신상태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도스의 정신은 멀쩡하고, 자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스가 파멸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가 공포이며, 평범한 한 사람이 맞닥뜨리는 현실과 삶의 과정에서 겪는 슬픔과 고통이 바로 공포라는 걸 소설은 말하고 있다. 누구나 살면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가 있다. 옳지 않은 일을 보면서 모른체하며 넘어갈 수도 있지만, 도스처럼 옳지 않은 일을 바로 잡으려 자기 목숨을 던지는 사람도 드물지만 있다. 도스는 마을을 파괴하고 지나가는 고속도로 현장을 테러한다. 화염병을 만들어 장비와 컨테이너에 불을 지르고, 자기 집에 폭탄을 설치하고 경찰과 대치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으려 한다. 이런 시도는 성공하고, 언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지만,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 고속도로를 만들기로 결정한 건 주 정부였고, 국가(주 정부)권력은 늘 개인을 압도하고, 개인의 삶을 파괴해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소설을 쓴 작가 리처드 바크만은 미국 소설가로 다섯 권의 장편소설을 펴냈는데, 미국 문단과 독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한 서점 직원 스티브 브라운이 스티븐 킹의 소설 Voives와 리처드 바크만의 소설 Thinner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리처드 바크만’이 ‘스티븐 킹’일 거라는 강한 의심을 한다. 스티브는 리처드 바크만과 스티븐 킹의 저작권 대리인 같다는 걸 확인하고 리처드 바크만의 책을 펴낸 출판사에 확인해 결국 리처드 바크만이 스티븐 킹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밝힌다. 이 소설의 배경인 1973년, 1974년은 스티븐 킹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던 때와 같아서, 스티븐 킹은 ‘인간의 고통’, ‘개인의 고통’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였고, 이런 생각을 구현한 작품이 ‘로드워크’다. 스티븐 킹 소설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인데,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이며 정밀한 묘사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표현하는 심리 묘사가 그것이다. 이 두 방식은 픽션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현실감을 증폭하며,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한다. 마치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실성, 인물이 가진 개성과 자연스러운 심리의 변화를 이해하고 긍정하는 힘을 갖게 하는 심리 묘사에서 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하고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나중에 - 스티븐 킹
    나중에 - 스티븐 킹 혼령을 보고, 혼령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어떤 경험을 할까. 스티븐 킹은 이런 질문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고, 어머니와 살고 있는 제이미는 서너 살 때 이미 혼령을 보기 시작한다. 그는 너무 어려서 사람과 혼령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를 실제와 똑같이 보고, 대화까지 할 수 있다. 이 능력을 엄마인 티아가 알게 된 건 제이미가 여섯 살 무렵이고,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작은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아들의 능력을 인정한다. 제이미 엄마 티아는 저작권 대리 사무실을 운영하는데, 꽤 괜찮은 수입을 올리는 업체여서 넉넉한 생활을 한다. 외삼촌(제이미 엄마의 오빠)이 하던 저작권 대리 사업을 물려받아 꾸준히 성과를 내며 넉넉한 삶을 살던 티아와 제이미는 그러나 투자 사기를 당하면서 가진 재산을 모두 잃게 되고 한동안 어려운 생활을 한다. 제이미의 엄마 티아는 리즈와 연인 사이다. 엄마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제이미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리즈는 경찰이지만 마약 운반을 하는 부패한 경찰이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티아나 리즈 모두 2008년 모기지 사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고, 티아보다 리즈의 가족이 더 큰 피해를 당해 리즈가 경찰이면서도 마약을 운반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는 계기가 된다. 제이미는 혼령을 보는 특별한 재능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건에 말려들면서 끔찍한 경험을 한다. 물론 엄마를 위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작가의 혼령을 만나 쓰다 만 소설의 내용을 받아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끔찍한 경험을 더 많이 한다. 더구나 엄마의 연인이었던 경찰 리즈에게 납치당하면서 생명이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하는데, 기지를 발휘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난다. 제이미의 도움으로 엄마 티아는 저작권 대리업이 다시 좋아지고, 수입이 많아지면서 다시 안정적 생활을 하게 된다. 제이미의 외삼촌이자 엄마의 오빠인 해리가 요양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요양원에 간 제이미는 혼령 해리를 만난다. 그리고 묻지 말았어야 할 질문을 한다. 삼촌, 내 아빠가 누군지 아세요? 이 소설은 제이미의 성장소설이다. 제이미의 독백으로 진행하고, 제이미가 여섯 살 무렵부터 막 성년이 되는 열 여덟 살까지의 이야기 가운데 삶에서 중요한 경험을 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제이미는 이 이야기를 '공포 소설'이라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어린 제이미가 외부모인 엄마와 둘이 살면서 겪은 인생 이야기이면서 결코 바라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제이미의 슬픈 탄생과 성장의 이야기다. 제이미는 엄마와 비교적 넉넉하고 행복한 삶을 살며 성장하지만, 그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그는 깊은 딜레마에 빠진다. 즉,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놓인 딜레마와 같은, 결코 돌이킬 수도, 잊을 수도 없는 낙인을 가슴에 찍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제이미는 테리올트의 혼령이 사라지지 않고 자기를 따라다닌다는 걸 알게 된다. 폭탄을 건물에 설치해 많은 사람을 해치던 폭파범 테리올트는 정체가 드러나면서 자살하는데, 제이미는 형사 리즈의 강압으로 테리올트의 혼령을 보게 되고, 그에게 마지막으로 설치한 폭탄이 어디 있는지 알아낸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생명을 구했지만, 정작 테리올트의 혼령이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제이미의 뒤를 따라다니며 괴롭히자 제이미는 존경하는 버켓 교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다. 제이미는 테리올트의 혼령이 나타나자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먼저 다가가 그 혼령을 끌어안는다. 혼령을 지배하는 힘은 실체가 없었지만 마치 지구 밖 멀고 먼 외계에서 온 존재로 여겨진다. 그동안 제이미가 봤던 혼령들은 제이미가 묻는 말에 진실을 말했으며, 공격적이지 않고, 일주일쯤이면 혼령의 존재가 사라지지만, 테리올트의 혼령 내부에 또 다른 무언가 존재하고 있어 테리올트는 시간이 많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제이미가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해 달려들자 그 존재는 오히려 겁을 먹고 도망한다. 제이미는 그 존재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제이미가 부를 때면 언제든 나타나기로 약속한다. 버켓 교수는 제이미에게 말하길,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존재를 다시 불러내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 존재는 무얼까. 단순히 외계에서 온 불가항력의 존재일까. 그건 제이미의 정신 세계로 읽힌다. 아버지 없이 자란 제이미는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지만 여전히 아버지가 없는 정신적 허기를 느낀다. 아이에게 엄마는 하나의 우주, 절대 세계이면서 온전한 존재다. 그런 엄마가 로즈라는 동성의 연인과 사귀고, 사랑을 할 때, 제이미는 질투, 공포, 외로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제이미는 성장 과정에서 느낀 이 부정적 감정에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가 온다.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접어드는 질풍노도의 시기, 정신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면서도 쉽지 않은, 부모를 뛰어넘어 자기의 정체성과 자아의 독립을 이루어야 하는 시기가 닥치고, 제이미가 겪은 혼령과의 대화나 보이지 않는 끔찍한 존재와의 사투는 제이미가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독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힌다. 제이미가 알게된 출생의 비밀로 이 소설은 공포에서 잔혹극으로 변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비밀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한 사람의 삶과 존재를 규정하거나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제이미가 알게 된 비밀은 더욱 그 자신은 물론,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심각한 비밀이었고, 그걸 아는 순간 제이미의 삶은 근본에서 흔들린다. 그가 혼령을 보고, 혼령과 대화를 나누는 경험이 그의 삶을 뒤흔든 것처럼. 그 둘은 결국 같은 의미이며, 자기 정체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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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3-08-26
  • 고도에서 - 스티븐 킹
    고도에서 - 스티븐 킹 스콧 캐리는 40대 백인 남성이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기획, 제작하는 프리랜서로 일하며,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다. 키는 190센티미터가 넘고 몸무게도 120킬로그램이 나가는 거구인데, 평범하고 선량한 남성이다. 이웃의 은퇴한 노인이자 의사였던 밥 엘리스와 친하게 지내는 스콧은 최근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말한다. 날마다 몸무게가 줄어들고 있다면 좋은 일일까. 어느 정도까지는 좋은 일이겠으나, 스콧에게 일어난 것처럼 감량이 멈추지 않고 날마다 조금씩 꾸준히 줄어드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오로지 '몸무게'만 줄어든다면. 스티븐 킹은 '몸무게가 줄어드는 남자'라는 아이디어로 짧은 소설을 한 편 썼다. 평소라면 이 정보 분량은 단편집 모음에 들어가는 게 맞을 정도다. 내용도 그렇고, 분량도 중편 수준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을 하나의 '장편'으로 펴낸 걸까. 스콧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심지어 행복하다고 느낀다. 비록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지만, 지금 하는 프리랜서 업무가 잘 풀려서 몫돈을 만졌고, 건강도 아무 문제 없고, 좋은 이웃들과 지내며, 나쁜 일이 일어나지도 않고 그럴 만한 꼬투리도 없다. 이웃에 사는 레즈비언 부부(가운데 남편 역할을 하는) 매콤과는 조금 불편한데, 그 집의 강아지들이 스콧의 마당 잔디밭에 똥을 싸기 때문이다. 스콧은 강아지와 산책할 때 목줄을 하고, 똥을 치워달라고 말한다. 매콤은 필요 이상으로 스콧에게 냉정하게 대한다. 레즈비언 부부인 매콤과 디어드리는 보스톤에서 이사온 '결혼한 레즈비언 부부'로, 이곳에 채식 식당을 열고 운영하고 있다. 음식은 맛있지만 보수적인 동네여서 레즈비언 부부를 곱게 바라보지 않고, 뒤에서 흉을 보거나 험담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스콧도 안다. 마을 축제의 하나로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스콧도 참가한다. 매콤은 다른 지역의 달리기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아마추어보다는 잘 달리는 실력인데, 스콧은 그런 매콤에게 내기를 하자고 요청한다. 스콧이 이기면 스콧의 집에서 채식 요리를 먹으며 이웃으로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 전부였다. 매콤이 보기에 거구의 중년 백인 남성인 스콧은 달리다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아 보였지만, 농담인줄 알면서도 그러자고 한다.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하고, 스콧은 처음에 천천히 뒤쳐지다가 조금씩 속도를 내며 앞으로 나간다. 결승선이 가까워지면서 폭우가 쏟아지고, 매콤을 추월하던 스콧은 넘어지려는 매콤을 부축해 일으켜 그가 결승선을 먼저 지나가도록 돕는다. 지역신문에 두 사람의 사진이 실리고, 문을 닫을 위기에 있었던 매콤과 디어드리의 식당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자리를 잡는다. 이들 매콤과 디어드리 레즈비언 부부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스콧이었고, 이제 그들은 스콧의 주방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이웃의 밥 엘리스 부부와도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친밀한 사이가 된다. 스콧은 그들에게 자기의 몸무게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고 밝히고, 곧 몸무게가 0에 수렴하면 자신은 떠난다고 말한다. 현대 의학으로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지만, 가장 가까운 이웃인 밥 엘리스 부부와 매콤 부부에게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마침내 스콧의 몸이 저절로 허공에 떠오를 정도가 되던 날, 스콧은 매콤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풍선을 잡고, 허리에는 폭죽을 매달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밥 엘리스 부부와 매콤 부부가 하늘로 올라가는 스콧을 지켜본다. 스콧은 왜 몸무게가 날마다 줄어들까. 스티븐 킹의 아이디어는 단순했을 걸로 본다. 날마다 몸무게가 줄어들다 마침내 0에 수렴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스콧은 자기 몸무게가 줄어드는 걸 보면서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암에 걸리지 않고, 병에 걸려 고통당하지 않고, 몸무게가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몸무게'는 육체적, 물질적 의미의 '몸무게'이기도 하지만, 스콧의 정신 연령일수도 있고, 존재의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일수도 있다. 스콧은 큰 고민 없이 사는 평범한 백인 중년 남성으로 보이지만, 그의 내면에서 '인생의 환희', '삶의 기쁨', '존재의 감동'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즉,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일상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스콧의 소멸은 스스로 지금의 현실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자신의 결정에 따른 결과다. 스콧이 자신의 소멸을 바라지 않아 보이지만, 그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온전히 인정한다. 날마다 몸무게가 줄어드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의 몸무게가 머지 않아 0에 수렴하면 자신이 소멸할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스콧에게 좋은 이웃이 있지만, 이웃은 본질에서 스콧의 삶을 붙드는 강력한 의미를 갖는 존재는 아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가족 사이에서도 자살하는 가족이 있는데, 아무리 가까운 가족도 '개인'의 존재에 관한 본질적 고민과 고통에 관해서는 교감하기 어렵다. 스콧이 어떤 외부의 영향이나 작용 없이 저절로 몸무게가 0에 수렴하는 현상은 온전히 스콧 내부에서 발생한 존재론적 문제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소설이 공포, 호러, 스릴러가 되려면 스콧의 몸무게가 0으로 수렴하는 원인과 과정에서 불가사의하거나 끔직한 일이 벌어져야 하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시 스콧의 상황을 객관의 눈으로 보자면, 스콧은 40대 백인 남성으로 몸집이 크다. 그는 혼자 살고, 가까운 이웃이 있지만 또래의 친구는 없다. 결혼했지만 이혼했고, 자녀는 두지 않은 걸로 나온다. 그에게 가족은 멀리 사는 고모가 한 분 계실 뿐이니 고아나 마찬가지다. 스콧은 외로운 남성이다. 천성은 착하고, 나름 밥벌이는 하지만, 여성에게 인기가 없고,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 스콧은 이렇게 살아가는 나날이 지겹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렇게 공허한 나날을 보내던 스콧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시한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게 암이든, 병이든, 자살이든 마찬가지다. 그는 결심했고, 세상을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그의 몸무게가 0으로 수렴하는 시간은 불과 두어 달. 그때까지 마음을 다스리며 이웃들과 즐거운 시간을 만들기로 작정한다. 이 작품을 홍보하는 전단지에서는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전에 없던 상냥함'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 작품은 고독한 삶을 살던 중년 남성의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록 스콧 자신이 선택한 마지막이긴 해도, 모든 마지막은 슬프고, 안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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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3-08-26
  • 피가 흐르는 곳에 - 스티븐 킹
    피가 흐르는 곳에 - 스티븐 킹 해리건 씨의 전화기 크레이그는 아버지와 함께 작은 시골마을에서 산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고,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지만, 그의 마음에 깊은 슬픔이 일렁이고 있다. 스티븐 킹은 어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줄곧 형과 엄마, 세 식구가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이 소설에서는 엄마로 바꿨을 뿐, 그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크레이그는 마을에 이사 온 엄청난 부자로 은퇴한 해리건 씨를 알게 되고, 그의 집에서 책을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 소설이 독특한 점은, 그동안 IT와 관련해 거의 언급한 적이 없는 스티븐 킹이 아이폰, 아마존을 비롯한 첨단 정보산업과 미국 투자회사와 관련한 정보를 나열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해리건 씨가 은퇴하기 전 투자를 통해 억만장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배경에 깔아놓는다. 해리건 씨는 크레이그에게 일 년에 네 번 카드를 보내는데, 그 속에 복권을 함께 넣었다. 우연히 그 복권이 당첨되었고, 해리건 씨는 당첨금을 애플 주식에 투자하라고 권한다. 이때 애플에서 막 '아이폰'이 나오기 시작했고, 크레이그는 생일선물로 '아이폰'을 받았으며, 해리건 씨에게 '아이폰'을 선물한다. 크레이그의 성장소설이면서, 해리건 씨와의 인연으로 발생하는 신비하고 놀라운 경험을 담고 있지만, 스토리는 진부하다. 다만 그동안 스티븐 킹의 놀라운 이야기 솜씨처럼, 이 소설도 읽는 즐거움이 있다. 매우 핍진하게 담겨진 에피소드는 서사의 사실성을 높이는 배경이 되고, '아이폰'의 등장, 억만장자의 죽음과 상속, 크레이그가 유산의 일부를 물려받는 행운, 물려받은 유산으로 '아마존'에 투자하는 내용 등에서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유머'는 다 읽을 수 있지만, 그건 지금에 와서는 조금 낡아버린 이야기가 되었다. 또한 크레이그가 해리건 씨의 장례식에서 죽은 해리건 씨의 옷에 그의 '아이폰'을 몰래 집어 넣은 다음, 시간이 지나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설정은 재미있지만, 충격적이지는 않다. 크레이그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크레이그는 그것이 죽은 해리건 씨가 영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지만, 그건 미스터리로 남겨 둔다. 척의 일생 독특한 형식의 소설. 시간의 흐름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척 크란츠'의 짧은 삶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단편소설 세 편의 연작으로 구성했다. 각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은 공통점이 없으며, '척 크란츠'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마티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강력한 지진으로 캘리포니아의 아래쪽이 떨어져 나가면서 인터넷과 전기가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도시에도 거대한 씽크홀이 생기고,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듯한 분위기에서 도시의 광고판과 텔레비전, 인터넷에 모두 '척 크란츠'를 애도하는 광고가 뜬다. '척 크란츠'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의 없다. 그럼에도 '척'은 도시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다. 마티는 고등학교 선생이고, 이혼한 아내 펠리샤와 잘 지내고 있다. 미국은 거대한 지진이 발생해 대륙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고, 지구 전체가 불안정한 상태로 그려진다. 두 번째 작품에서, 재러드 프랑크는 길거리 공연으로 드럼을 친다. 사람들이 거의 반응 없이 지나가고, 재러드가 조금 실망하고 있을 때, 양복을 입고 가방을 든 '척'이 그 앞을 지나가다 재러드를 보고 걸음을 멈추고 드럼 연주를 듣는다. 그러다 '척'은 혼자 춤을 추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조금씩 걸음을 멈추고 '척'의 춤과 재러드의 드럼 연주를 구경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구경을 하던 재니스가 '척'의 춤 상대가 되어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사이였음에도 완벽한 춤을 추며 구경하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다. 이 장면은 삶의 한 순간,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을 그린 것으로, '척'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 번째 작품에서, 척은 어릴 때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된다. 그는 친할머니,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며 학교에서 춤동아리에 들어가 춤을 배우고, 회계사가 되어 살아간다.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걸 지켜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깊은 슬픔의 시간을 보낸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 상실감, 안타까운 감정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지만, 그들의 내면에 일렁이는 슬픔의 감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본질의 감정이기에, 해결할 수 없고, 해소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 작품은 공포, 스릴러, 호러와 아무 관련이 없는, 담담하고 담백한 내용으로, '척'의 일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에 슬픔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피가 흐르는 곳에 '피가 흐르는 곳에 특종이 있다'는 언론계의 관용어에서 온 제목. 중편이라기에는 긴 편이고, 거의 짧은 장편 길이인데, 이야기는 단순하다. 한 초등학교에 소포가 배달되고, 그 소포에는 폭탄이 들어 있었으며, 폭탄이 터져 수십 명의 어린이가 죽고 다치게 된다. 당연히 모든 방송국과 언론사에서 학교 앞으로 취재를 나오고, 치열한 보도 경쟁, 속보 경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사립 탐정인 홀리 기브니는 텔레비전에서 리포트를 하는 체트 온도스키를 본다. CCTV에 찍힌 범인의 얼굴이 공개되고, 현상금이 걸리지만, 범인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홀리는 우연히 발견한 리포터 체트에게서 설명할 수 없지만,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참사 현장에서 보도하는 그의 태도나 현장을 중계하면서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에서 그가 참사를 '즐기고' 있다는 기괴한 느낌인데, 처음에는 홀리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체트가 폭탄을 배달한 범인과 같은 인물이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전혀 엉뚱하고 터무니없는 발상이었지만, 홀리는 그 의심을 갖고 체트의 과거를 조사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참사에 체트가 현장에 있었으며, 그가 참사를 일으켰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전직 경찰이자 범인의 몽타쥬를 그리는 일을 오래 했던 노인을 만나면서, 그 노인이 수십 년 동안 체트의 뒤를 추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가 모은 구체적 자료를 보면서 홀리의 직감이 옳았다는 걸 확인한다. 체트 온도스키는 분명 '인간'이지만, 그는 인간 이상의 존재이며,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작가는 체트 온도스키가 어떤 생명체인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제2의 인간'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종류의 인간은 자기 외모를 바꿔가면서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산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온 인간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외계에서 온 전혀 다른 생명체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체트가 외모를 바꾸는 장면이 딱 한 번 나오는데, 물리적인 몸뚱아리가 출렁거리며 외모를 바꾼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인간종일 수 있고, 외계 생명체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체트 온도스키라는 한 인간이 동시에 여러 사람으로 변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참사를 저지른 범인이라는 점이다. 크고 작은 폭탄 폭파 사건,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아닌, 인간과 다른 종이라는 설정에서 이 소설은 환타지 소설로 분류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참사를 보도하며 '즐거워 하는' 언론사의 본질을 비판한 것으로 본다. 즉, 언론은 '피가 흐르는 곳에'서 자기들의 먹이가 많다고 좋아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애통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즐겁고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참사 보도는 기본적으로 자극적이고, 사람들은 자극적인 뉴스를 좋아하며, 시청률이 높아지면 광고가 많이 들어오고, 광고가 많아지면 방송사, 언론사는 돈을 더 많이 벌게 되고, 언론 자본은 부자가 되며, 그곳에서 일하는 언론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 보너스를 받는다. 사회에서 비극이 더 많이 발생할수록 상대적으로 언론은 행복해지는 이 아이러니를 스티븐 킹은 '괴물'로 표현한 것이다. 쥐 드류 라슨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면서, 단편소설을 여섯 편 쓴 작가다. 그의 단편소설이 '타임'에 실릴 정도로 괜찮았는데, 장편소설을 쓰지 못한 컴플렉스가 있다. 그는 곧 안식년을 맞이하게 되고, 과거에 장편소설을 쓰려다 크게 실패한 경험이 있어 불안하지만, 어느 날, 문득 완벽한 장편소설 이야기가 떠오른다. 드류 라슨은 아내와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버지 때부터 쓰던 별장으로 가서 장편소설의 앞부분을 쓰기로 작정한다. 별장은 몹시 외진 곳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잡화점이 20km 떨어진 곳에 있고, 전화와 전기는 들어오지만 휴대전화는 사용할 수 없으며, 전기와 전화도 언제 끊길 지 알 수 없는 산골이다. 소설을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작가인 스티븐 킹이 이미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샤이닝'이 있고, '미저리' 역시 그렇다. 작가는 '글쓰기'가 곧 자기 정체성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매우 행복한 반면 그만큼의 무게로 공포와 두려움도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드류 라슨은 지난번 장편소설의 실패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이번에는 좋은 작품을 쓰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는 완벽하게 준비를 마치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산골 오두막에서,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한 소설의 이미지를 글로 옮긴다. 모든 것이 훌륭했고, 드류 라슨 자신도 이렇게까지 글이 잘 써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소설은 처음부터 훌륭하게 시작했다. 그러다 폭풍이 몰려오고, 집 주위 나무가 쓰러지면서 창고를 덮치고, 드류 라슨은 문앞에서 기절한 쥐를 발견한다. 쥐를 멀리 내던질 수도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드류 라슨은 쥐를 벽난로 앞에 놓아둔다. 그리고 다음 날, 쥐는 사라지고, 나흘 뒤부터 드류 라슨은 글쓰기에 문제가 생긴다. 처음 장편소설을 쓸 때처럼 트라우마가 작동한 것이다. 그때 쥐가 나타나 드류 라슨에게 제안한다. 소설을 완성하도록 돕겠다. 단, 소설을 완성하면 네가 좋아하는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 그래도 하겠는가. 드류 라슨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소설을 완성하고픈 욕심에 쥐와 거래한다. 작가의 욕망이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보다 크다는 걸 작품은 말한다. 사실 이런 소재는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평범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대단히 드라마틱하지도, 공포와 호러와 피가 튀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심심하다. 차라리 외딴 집에서 겪는 공포를 다룬 단편이었다면 어땠을까. 말하는 쥐와 거래한다는 내용은 동화처럼 읽힌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명을 잃는 건 우연이었지만, 드류 라슨은 죄책감을 갖는다. 삶은 그런 우연과 죄책감이 동시에 작용하기도 한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조국의 법고전 산책
    조국의 법고전 산책 법을 다룬 책, 그것도 100년, 200년 전의 법철학 책이 과연 재미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책을 펼친 나는 시작부터 깜짝 놀랐다. 우리가 가진 상식, 법을 다룬 책은 딱딱하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단숨에 깨뜨리는 내용이었다. 조국 교수는 친절하다.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도 말했지만, 조국 교수는 친절한 저자이면서, 알고보면 '츤데레'일지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격하고 조금은 냉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말이다. 이 책은 조국 교수가 예전에 강의한 내용을 수정, 보완한 책으로, 거의 새로 쓴 내용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한국 정치 현실에 관한 내용과 민주주의의 기본을 다룬 내용이 많아서 전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법의 기틀을 만들어 온 근대 법철학은 어지간한 지식의 기초가 쌓이지 않으면 혼자 책을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 책의 장점은 근대 법철학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저자가 재조직하면서, 그 시대의 배경, 역사적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법철학자의 이름은 다 알고 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의 근원과 내용의 의미, 역사적 배경에 관해서는 어렴풋했는데, 이 책을 읽고는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인 조국 교수도 말했지만, 이 책은 중학생, 고등학생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재미있게 썼다.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도록 권하면 좋겠다. '프랑스 혁명'을 촉발한 장 자끄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시작으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존 로크의 '통치론',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토머스 페인의 '상식, '인권',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메디슨, 존 제이의 '페러랄리스트 페이퍼',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위한 변명', '크리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불복종',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 평화론'까지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정작 이들의 저서는 다 읽지 못한 나같은 불량한 독자를 위해 조국 교수는 중요한 문장까지 인용하며 법고전이 근대와 현대를 어떻게 열었는가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개인의 권리, 민주주의의 확대, 인권의 탄생, 인간을 도구가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보기 시작한 근대적 '휴머니즘'의 발전에는 이런 법고전을 통한 강력한 계몽과 사상의 실천이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셸 푸코가 쓴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이 떠올랐다. 법고전의 저자들이 큰틀에서 인간의 권리, 자유, 민주주의, 인권에 관해 디딤돌을 놓았다면, 미셸 푸코는 그 시대의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과 계급 갈등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포착했고, 서로 연관이 없을 것 같은 현상을 관찰하면서 본질에서 동일한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걸 밝힌다. 푸코는 병원과 감옥(수용소), 학교, 군대가 모두 동일한 시스템으로 작동한다는 걸 역사적 과정을 통해 확인한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설파하고 있을 때, 거리를 배회하는 정신병자들과 부랑자들은 교회(성당)의 비어 있는 공간에 갇히게 되고, 교회(성당)는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내 이들 정신병자들과 부랑자를 수용해 관리한다. 이렇게 시작된 '수용'과 '감금'의 역사는 '병원'을 탄생하는 계기가 되고, '감옥'의 원형이 된다. 중세에는 거리를 떠도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았어도 '수용'당하거나 '감금'되어도 그걸 항변할 인권이 없었고, '인권', '민주주의'의 개념이 없던 시대에는 '마녀사냥'이라는 명목으로 수십만 명의 여성을 교회가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악행을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했다. 이 책 '조국의 법고전 산책'은 유럽 중세의 극악한 사회 현상 이후 나타난 계몽의 결과물이 무언가를 알려준다. 즉 무소불위의 왕권, '마녀사냥'을 통해 돈벌이에 눈이 먼 교회(성당) 권력의 부패함, 광장에서 죄인 또는 죄인이라는 누명을 쓴 사람들을 한꺼번에 교수형을 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참혹함, 갓난 고아들에게 럼주를 먹여 수십, 수백 명의 고아를 살해하던 극악한 범죄 등을 본 지성인들이 미개한 사회를 계몽하고, 인간의 이성이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애쓴 결과물로 나온 책들이 바로 이 책에 등장하는 법고전 책들이다. 여기 등장하는 책들은 모두 당대에 진보적 테제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들이 온전히 독자적이고, 독립적으로 앞서 나간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 현상이 그렇듯, 이들 법고전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이미 누적된 민중(인민)의 투쟁이 있었고, 이 책의 저자들은 그런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발견하고 정리했다. 그들의 높은 안목과 철학이 한 권의 책으로 집약되고, 이 책은 다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민중의 삶을 위한 투쟁과 지성인의 저서가 변증적으로 상호 작용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책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이 책은 조국 교수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쓴 책이다. 수많은 책이 있지만, 읽어서 살이 되고, 뼈가 되는 책이 있는 반면, 종이만 낭비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살이 되고, 뼈가 되는 책이다. 조국 교수의 진심이 담긴 책이니 가능한 많은 사람이 읽고, 이 책에서 말하는 개인의 권리, 인권, 민주주의에 관해 자기 생각을 올곧게 세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지구 생명의 아주 짧은 역사
    지구 생명의 아주 짧은 역사 제목이 정직하다. 지구의 역사에서 최초의 생명은 40억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인류의 역사는 아무리 길어봐야 고작 700만 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구과학이나 생물학, 진화를 다룬 전문서적이 아니다. 태양의 탄생과 이후 지구의 탄생부터 시작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책에는 어떠한 그림, 사진, 도표, 수식, 일러스트 등이 단 하나도 없다. 아, 도표는 몇 개가 있는데, 각 장의 끝에 연대표를 만들어 독자가 글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매우 어려운 자연과학을 다루고 있음에도 문장은 어렵지 않다.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고, 읽으면서 곧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저자 헨리 지는 매우 섬세하게 독자를 배려하면서 글을 썼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지구의 탄생, 최초의 생명, 고세균의 등장, 지의류, 이끼류의 진화, 지구 환경의 변화에 따른 생물의 진화와 멸종, 산소 농도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지구 환경과 생물의 생존 반응, 바다에서 생명의 진화 단계, 단세포의 출현과 단세포끼리의 포식과 공존, 다세포의 출현과 진화를 통한 복제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이 책의 뒷부분에 미주가 두껍게 모여 있는 건 어쩔 수 없으면서 필연적인 선택이다. 본문에는 미주 번호가 꽤 많은데, 이 미주를 함께 읽으면 책의 내용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독자들 가운데는 이런 미주를 챙겨 읽는 걸 귀찮아할 수도 있겠다. 동물의 출현은 약 6억 3,500만 년 전에 일어났는데, 지구가 탄생하고 약 40억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때까지 지구는 지구 자체의 변화와 진화를 끊임 없이 이루어 왔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지구는 가장 최근인 200만 년 전까지도 빙하기와 해빙기를 반복하면서 생물이 살아가기 힘든 별이었다. 하물며 6억 년 이전까지 지구는 대륙의 생성, 멘틀의 이동, 화산 폭발 활동, 우주에서 날아오는 행성과의 충돌, 지진, 용암 분출로 인한 육지의 발생과 바다의 출현, 지각판의 습입과 충돌로 인한 대륙의 융기와 함몰, 이산화탄소의 증가 또는 감소, 산소의 증가와 감소에 따른 대기 성분의 변화로 생물의 멸종과 진화 등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다양한 변화가 지구 자체의 진화를 이루고 있었다. 6억 년 전에 최초의 생명체들이 등장한 이후 5억 년 전 '오르도비스기'에 생물의 종류가 급격히 늘어났지만 빙하기가 시작하면서 그 다양한 생물 대부분이 멸종한다. 4억 년 전에 최초로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생물, 육상 식물이 등장하고 3억 5천만 년 전에 네 발을 가진 동물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혁명적 사건이 발생한다. 이 시기를 '데본기'라고 하는데, 데본기 말엽에 다시 생물 대멸종 시기가 있었다. 외부 행성 충돌로 인한 지구 환경의 급격한 변화때문으로 분석하는데, 이때 멸종한 동식물들이 현대에서 '석탄'으로 나타나서 이때를 '석탄기'라고 분류한다. '석탄기'가 끝나고 지구 대륙은 판게아가 어느 정도 형성되는데, 멸종에서 살아남은 생물들이 번성했으나 2억 5천만 년 전인 '페름기' 말에 다시 대멸종이 일어나 생물의 90%가 지구에서 사라진다. '페름기'를 지나면서 초기 포유류가 등장한다. 지구는 판게아 대륙이 계속 갈라지고, 부닥치면서 대륙의 형태가 바뀌고, 대륙이 이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다시 2억여 년 전 '트라이아스기' 말에 대멸종이 다시 일어난다. 지구 자체의 급격한 변동과 외부 충격, 판게아의 이동과 대기의 변화에 따른 지구 환경으로 생물은 멸종과 진화를 반복한다. '쥐라기'가 끝날 무렵, 그러니까 공룡 시대가 끝날 무렵 새의 조상이 나타나고, '쥐라기' 이후 '백악기'에 식물에서 꽃이 나타난다. 하지만 '백악기' 말에 다시 대멸종이 일어나고, 신생대로 들어서면서 빙하기가 시작한다. 백악기 대멸종이 끝나고 6천만 년 전, 고대 포유류와 공포새가 등장하고, 5천 5백만 년 전 영장류와 '현대' 포유류가 나타난다. 최초의 영장류는 700만 년 전에 나타났으며, 이후 영장류의 진화는 지구 역사에서 짧은 시간에 빠르게 진화하는 걸로 보인다. 이 책에서는 인류의 진화 단계를 거시적으로 살펴보고 있어 이해하기 쉬운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진화에서 보다 깊이,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지각의 발달, 뇌의 발달, 언어의 발달 같은 추상적 진화 과정을 더 공부해야 한다. 이 책은 지구의 변화, 진화와 함께 지구에서 탄생한 모든 생물의 진화와 인간의 진화를 함께 살펴보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그것도 자연과학을 잘 모르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그동안 연구로 밝혀진 최신 과학의 결과를 어려운 말로 하지 않고, 쉽게 설명하는데 있다. 따라서 독자는 이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다가 지구의 탄생, 지각, 용암, 대륙판과 같은 내용이 나올 때는 '지사학'과 관련한 책을 찾아 읽으면 좋고, 생명의 탄생, 생명의 진화와 관련해서는 '진화생물학' 관련 책을 찾아 읽기를 권한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자연과학을 한 권으로 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다른 분야로 나아가는 기초가 되는 자연과학 입문서라고 볼 수 있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나와 아버지 - 옌롄커
    나와 아버지 - 옌롄커 옌롄커는 1959년에 태어났다. 중국이 혁명에 성공하고 불과 10년이 지났을 때였으니, 중국은 혁명의 소용돌이와 혼란, 봉건의 역사와 수천 년 이어지는 전통의 습속이 뒤섞이고 충돌하던 시기였다. 옌롄커는 60년대와 70년대를 시골에서 성장하는데, 어지간한 시골이 아니고 바러우산맥 아래쪽 몹시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린 궁핍한 산골 마을에서 자랐다. 중국공산당이 혁명을 성공하고, 도시에서는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던 시기였지만, 산골 마을은 변화가 크지 않았다. 옌롄커는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의 삶을 돌아보며 아버지 세대의 농민들이 살아온 삶과 중국 현대의 변화를 진솔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옌롄커는 혁명 이후의 세대지만 그의 부모 세대는 혁명 이전 세대로, 전통과 관습을 지키며 살아왔다. 혁명 이후에도 농민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으며, 언제나 도시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도시 노동자는 시간당 임금이 있고, 그 임금도 농촌보다 훨씬 높았다. 농촌에서는 온종일 일해도 도시 노동자의 10%에 불과한 임금을 받았다. 옌롄커의 아버지들은 전통 사회를 살아왔으며, 그들은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 거친 음식을 먹고, 남루한 옷을 입으며, 온종일 논과 밭에서 땀흘려 일하고, 자식들이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며, 자식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돈을 모아 집을 짓고, 혼수를 마련한다. 그렇게 한평생 자식을 위해 일하고,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삶이자 운명이라 여겼다. 아버지들은 집안을 지켜야 하고, 가문을 위해 살아야 하며, 자식들을 위해 어떤 어려움도 견뎌야 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옌롄커가 자신의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에 관해 쓴 기록이다. 옌롄커가 작가가 되기까지, 그가 소설을 쓰게 된 배경과 그의 작품이 고향인 허난성을 배경으로 하는 농민들의 이야기와 자신이 오래 몸담았던 군대의 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오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옌롄커는 어릴 때부터 힘든 노동을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과 사촌 형제들의 삶도 돌아본다. 옌롄커는 대학 입학을 바랐으나 실패했고, 돈을 벌려고 작은아버지, 넷째 삼촌이 일하는 석회 공장에서 적은 임금을 받으며 노동을 했다. 70년대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수많은 지식인이 '반동',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 죽거나 일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되는데, 시골에서는 그런 영향과 분위기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변화의 물결에서 멀리 있었다. 옌롄커가 지식인을 경멸하고 싫어하는 이유도 그가 어릴 때 경험했던 사건 때문이었다. 그의 마을에도 도시에서 '하방'한 청년 지식인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청년이 동네 젊은 여성을 강간했지만 정작 강간한 청년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고, 강간당한 젊은 여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와 반대로, 시골 청년이 도시에서 온 젊은 지식인 여성을 강간하려다 미수로 그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때는 시골 청년이 잡혀 총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도시 사람과 농촌 사람을 드러내놓고 차별한 이 사건과 함께, '하방'한 청년 지식인들이 시골에서 노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키우던 닭과 양, 염소 등을 몰래 잡아 먹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도시의 청년 지식인들은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 않지만, 농민들을 경멸하고 하찮게 여긴다는 걸 옌롄커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느낀다. 옌롄커는 작가가 되기 전, 어릴 때부터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고, 몹시 힘든 노동을 오래도록 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이 어떻게 농사를 짓고 살았는지, 도시로 나간 넷째 삼촌이 공장에서 얼마나 힘든 노동을 하며 돈을 버는지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풍토에 분노하고 있었다. 옌롄커의 소설이 땅, 농사, 개인의 욕망, 인간의 존엄에 천착하고 있는 것도 그가 전통 시대를 살아온 부모 밑에서 농사와 노동을 했기 때문이며, 지식인의 허위를 어릴 때 발견한 경험으로 그는 '말'보다는 '행동'을 더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이 책은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옌롄커의 문학은 그가 탄생한 허난성의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며, 쌀과 땔감, 기름과 소금을 얻으려는 노동으로 가득하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중국 농민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옌롄커의 문학도 이해하기 어렵다. 옌롄커 자신은 농촌을 탈출해 도시에서 사는 지식인이 되었지만, 그의 작품에서 지식인과 도시인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지식인과 도시인은 노동하는 사람에게 기생하는 존재인데 오히려 그들은 농민을 경멸하고, 하찮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옌롄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특출한 사람이 없다. 지극히 평범하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장삼이사 가운데 하나다. 소설 속 인물들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지만 자기 운명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고난과 죽음이 닥쳐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꿋꿋하게 맞서 싸우는 개인의 모습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의 위대한 모습이다. 이들 평범하지만 위대한 인간의 모습은 산골에 사는 중국 농민이 모델이며, 작가의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 작가의 부모 세대가 모두 돌아가고, 중국의 현대에는 이런 강건하고 꿋굿한 인민의 전형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개혁개방' 시대 이후 태어난 중국인은 옌롄커의 작품에 등장하는 부모 세대의 고난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에서도 50년대, 60년대 태어난 세대가 지금 부모 세대이고, 그들의 자식 세대인 80년대 이후 세대는 부모 세대가 겪은 정치, 문화, 사회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옌롄커는 이런 중국의 세대가 겪는 서로 다른 경험의 이질성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자신이 부모 세대에게 배우고 얻은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가를 말함으로써, 중국의 젊은 세대가 '중국'이라는 나라와 민족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길 바라는 듯하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연월일 - 옌롄커 중편집
    연월일 - 옌롄커 중편집 연월일 바러우 산맥에 기대 사는 산골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흉작이 들어서다. 비가 내리지 않아 작물이 모두 타죽고, 땅이 갈라져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면서, 주민들은 바러우 산맥을 넘어 흉년을 피할 도시로 떠났다. 셴할아버지는 혼자 마을에 남아 어떻게든 옥수수를 지키려 한다. 눈 먼 개와 셴할아버지는 텅 빈 마을에서 식량을 구하려는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쥐구멍을 파내 쥐들이 모아 놓은 옥수수 알갱이를 찾아 먹다가, 옥수수 알갱이를 으깨 쥐를 잡아 먹으며 옥수수를 지키는 셴할아버지는, 중국 민중의 현현이자, 중국 인민의 영웅적 모습을 상징한다. 농민에게 자연은 극복할 수 없는 절대 존재다.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자연의 이치에 맞는 삶을 살아온 중국 농민들은 자연 앞에 겸손하고, 모든 삶의 근거와 존재와 뿌리를 자연에 맡기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셴할아버지처럼 닥쳐오는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쉽게 굴복하지 않고, 농민의 자존심을 잃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을 굳게 세우는 영웅 같은 인물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 이는 마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청새치를 잡아 돌아오는 길에 상어떼를 만나 사투를 벌이다 결국 청새치는 뼈만 남기고 노인은 지쳐 돌아오는데, 노인의 사투와 불굴의 의지가 인간의 존재 이유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셴할아버지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의 목숨도, 옥수수 한 자루의 생명도. 생명은 고귀하고 위대하기에,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생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건 생명을 지키고,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옥수수 한 알을 지키는 일이 온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중국 농민 뿐 아니라, 세계의 농민이라면 본질에서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다만 중국은 드넓은 대륙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고, 빈곤에 찌든 농민의 삶이 수천 년을 이어오면서, 대륙에서 겪을 수 있는 지역적, 물리적 경험을 축적해 왔고, 이런 경험들이 중국 농민의 삶을 규정하고 지배했다. 자연 재해 앞에서 불굴의 의지를 보이는 셴할아버지는 중국 인민의 보여주었던 조상(영웅)의 상징이며, 중국 인민이 바라는 이상적인 농민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 중국은 이런 '진짜' 농민이 사라졌다. 사회주의 중국의 치하에서 '진짜 농민'이 사라졌을 수 있고, 농업 생산성의 발달로 흉년을 고통스럽게 넘기지 않아도 되어,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일 수 있다. 옌롄커가 그리는 셴할아버지 같은 '진짜 농민'은 이미 과거의 인물이고, 역사가 된 이야기다. 셴할아버지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 체제에서 태어난 농민도 아니다. 중국 농민은 수천 년을 어떤 체제나 지배권력의 간섭에 지배당하지 않았다는 걸 옌롄커는 말한다. 중국 농민은 그 자체로 역사이자 인민이다. 오래 전부터 중국 왕조는 중국 인민을 지배했다고 착각했듯이, 중국공산당도 중국 인민을 통치하고 계도한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중국 인민은 물과 같아서, 권력과 지배자의 형태를 따라 흐를 뿐, 단 한번도 지배당한 적이 없었다. 골수 요우스터우는 자기 자식 네 명이 모두 간질병을 앓는 유전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요우스터우의 아내 요우쓰댁은 무책임하게 죽은 남편을 원망하며 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홀로 키운다. 한 여성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 단편이지만, 이 작품이야말로 중국인민, 중국여성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요우스터우의 할아버지도 간질병이 있었고, 이 병은 집안 내력이며 유전되고 있다. 이 말은, 중국 역사에서 남성가부장제, 남성 권력의 지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걸 뜻한다. 즉, 중국 역사의 전통은 남성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인데, 이런 제도는 곧 간질병, 유전병처럼 악질이다. 중국 혁명 이후 이런 남성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공산주의의 평등과 인권의 확산, 민주주의의 보편화로 과거 중국의 전통이었던 불행한 제도와 인습은 사라지게 된다. 즉, 요우스터우의 자살은 중국의 바람직하지 않은 전통, 관습을 상징한다. 요우쓰댁은 새로운 중국 인민을 상징한다. 중국 혁명 이후, 혁명 세례를 받으며 새롭게 태어나는 중국 인민은 진보적이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자기 삶을 개척한다.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도, 요우쓰댁은 후손(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삶을 개척한다. 저능아에다 간질이 있는 세 딸을 시집보내면서 집안의 재산과 곡식이 모두 사라지지만, 요우쓰댁은 후손들이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작품에서는 요우쓰댁이 세 딸과 아들의 간질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남편의 무덤에서 뼈를 파내 그 뼈를 달여 마시도록 하는데, 이는 중국의 전통, 관습의 부정적인 면을 제거하고, 혁명의 삶을 선택하는 것을 상징한다. 아버지의 뼈를 고아 먹은 자식들은 모두 간질병이 낫고, 저능아에서 정상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인간 요우쓰댁으로 보면 자식을 향한 끝없는 모성을 보여주는 내용이자, 중국 인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천궁도 루류밍은 이제 막 죽어서 육신에서 혼이 빠져나와 자기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가족과 이웃들이 자기의 육신을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가는 장면을 보며, 그는 쓸쓸한 마음이 든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한다. 노인이 이끄는 곳은 루류밍이 살아서 살았던 세상과는 완전히 반대인 세상이었다. 루류밍은 산골 빈촌에서 태어났는데, 가뭄이 극심하던 때 태어나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글자도 모르고, 극빈한데다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저는 루류밍은 '무식하고 가난한 농민'이자, 중국 농민 다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 루류밍이 스물 여덟 살에 이웃 동네에 사는 열 여덟 살 여성 샤오주와 결혼을 하는데, 사기 결혼이나 다름 없었다. 샤오주의 집안도 가난해서, 결혼지참금으로 2천원을 받기로 했으나, 루류밍의 이모는 2천원을 주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루류밍은 결혼하면 어떻게든 2천원을 샤오주에게 갚기로 약속한다. 샤오주는 중국 역사의 상징이다. 루류밍은 고구마를 구워 팔고, 밭에서 채소를 길러 내다 팔며 조금씩 돈을 모은다. 촌장(권력자)의 비리를 눈 감아주는 대가로 돈을 받고, 촌장이 아내 샤오주에게 돈과 곡식을 주며 아내와 잠자리를 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화를 내지도, 복수를 하지도 못하는 무능하고 한심한 인간 루류밍은 끝까지 아내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고 닥치는대로 돈을 번다. 이웃 장씨의 아들이 저지른 죄를 대신 뒤집어 쓰는 조건으로 700위안을 받고 2년 동안 노동교화소에서 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 샤오주가 면회 오면 모아놓은 돈을 건넨다. 성실하게 복역한 결과, 루류밍은 8개월이나 일찍 퇴소할 수 있었고, 그가 집에 돌아오니 아내 샤오주는 촌장과 함께 그녀의 고향에 새집을 짓는다고 했다. 루류밍은 그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는데, 그가 샤오주를 위해 살았던 삶은 소나 말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나날이었다. 오로지 결혼할 때 한 약속을 지키려고 루류밍은 온갖 모욕과 굴욕과 마음의 깊은 상처와 육체의 고통을 견뎠지만, 끝내 자신을 버린 아내 샤오주에 대한 배신감으로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루류밍이 진짜 목숨을 내던지자, 그동안 루류밍의 고통과 굴욕을 지켜보며, 루류밍이 벌어온 돈을 쓰던 샤오주는 루류밍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가 자살하게 된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샤오주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루류밍의 마음을 이해할 때, 루류밍은 다시 이승으로 돌아온다. 중국 민중과 역사가 만나는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 결혼은 나의 할아버지와 했으나 진짜 사랑한 사람은 소작인이었던 리좡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할머니의 과거를 두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갈등을 빚는다. 이웃에 사는 리좡 할아버지가 한겨울에 얼어 죽고, 평생 혼자 살았고, 가족도 없는 리좡 할아버지를 위해 나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수의를 가져다 입히고, 장례를 치러준다. 리좡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할머니는 많이 슬퍼하고 상심해 건강을 잃는다.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리좡 할아버지 무덤 옆에 묻어달라고 부탁한다. 할머니와 리좡 할아버지는 어떤 관계였을까. 나의 할아버지는 결국 할머니의 유언을 지켜 리좡 할아버지 무덤 옆에 할머니를 묻는다.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리좡 할아버지와 할머니 무덤이 비에 쓸려 망가지고, 나의 아버지는 할머니의 무덤을 개장해 할아버지 옆으로 다시 모신다. 할머니는 평생 할아버지와 살았고, 자식을 낳았으며 원만한 삶을 살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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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6
  • 일광유년
    일광유년 옌롄커 장편소설. 이 소설을 읽고 앞으로 10년 안에 옌롄커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노벨문학상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중국에서 모옌에 이어 옌롄커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중국문학은 세계문학의 주류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지 않을까. 특히 모옌과는 다르게 옌롄커의 작품은 중국사회를 매우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어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모옌이 받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된다. 중국 정부가 옌롄커 작품을 승인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중국공산당과 옌롄커는 서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노벨문학상 여부는 매우 상징적 사건이 된다. 이 소설은 두 번 읽게 된다. 앞부분에서 독자는 조금 어리둥절하게 되는데, 끝까지 읽고 나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뒤부터 다시 읽게 된다. 그런 구조로 작품의 얼개를 짰다. 쉬운 예를 들면, 영화 '박하사탕'이 '나 돌아갈래'로 시작해서 점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인데, 이 소설이 바로 그렇다. 모두 5장으로 구성한 이 소설은 주인공 쓰마란과 란쓰스를 중심으로 산싱촌(三姓村) 사람들의 약 40년에 걸친 대하드라마를 그리고 있다. 산싱촌은 란, 두, 쓰마를 쓰는 세 성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허난성 서쪽 바러우산맥 골짜기에 있는 산골 마을이다. 공산당의 영향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한 탓에 이 산골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방식으로 생존한다. 40년 산싱촌 사람들은 마흔 살을 넘기지 못한다. 마흔 살을 넘겨 사는 걸 최고의 소원으로 생각할 정도로, 이 마을 사람들의 수명은 짧다. 이유는 모른다. 중국 정부는 알고 있지만 마을 주민들에게는 알려주지 않는다. 마흔 살이면 한창 인생의 꽃을 피우는 나이인데, 이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우리는 모두 죽지만, 마흔 살에 죽는 것과 여든 살에 죽는 건 사뭇 다르다. 게다가 그 죽음은 반드시 예고를 한다. 목구멍이 막히고, 목이 아픈 증상이 나타난다. 이 증상이 나타나면 짧게는 며칠에서 길어도 몇 달 안에 반드시 죽는다. 마을 주민의 소원은 쉰살, 예순살, 일흔살, 여든살까지 사는 것이다. 마을 주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려면 촌장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촌장은 주민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주거 이전의 자유'가 없다. 중국 정부의 방침이면서, 산싱촌 주민들의 암묵적 규칙이기도 하다. 산싱촌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이 모진 운명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한다. 농지와 수로 마을 촌장 쓰마샤오샤오는 마을 주민들이 일찍 죽는 원인을 농토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발상인데, 그들이 먹는 옥수수, 유채 같은 식물을 재배하는 땅이 오염되었다면, 땅을 뒤집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쓰마샤오샤오는 마을 공동 소유의 농지를 전부 뒤집어서 아래 흙을 위로 올리는 공사를 시작하는데, 각종 도구와 수레 등을 구입하려고 도시에 있는 교화원에 가서 허벅지 피부를 잘라 판매한다. 촌장의 명령과 독려로 마을 주민들은 땅을 뒤집는 대공사를 시작하지만, 마을 주민의 힘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공사였다. 촌장은 다른 지역에서 토지 정리 공사를 하고 있는 현의 주임 루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읍소한다. 겨우 주 주임의 마음을 돌려 마을의 농토를 뒤집어 엎고, 새로 정리하는 공사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란쓰스가 처녀를 루 주임에게 받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주인공 쓰마란과 란쓰스에게 심각한 문제가 된다. 어린 쓰마란이 스무 살이 넘어 촌장이 되자, 쓰마란은 아버지가 했던 땅 뒤집기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으로 마을 주민의 생명을 연장하는 방안을 고민하다, 멀리 있는 다른 마을에서 수로를 파 깨끗한 물을 산싱촌으로 끌어오기로 결심한다. 주민들이 단명하는 이유가 오염된 물을 마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수로를 파는 일이 그만큼 절실하다는 걸 주민들에게 알리고 설득한다. 땅을 뒤집는 공사나 수로를 파는 공사는 촌장이 마을 주민을 위해 결정한 사업이지만, 겉으로는 주민의 목숨을 연장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이 사업을 통해 촌장의 권력을 강화하고, 촌장의 권위와 권력을 휘두르는 동력이 된다. 피부, 인육 장사, 아동 살해 옌롄커의 소설은 원초적 충격이 있다. 모옌의 소설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모옌이 신화적, 서사적 충격이라면 옌롄커의 작품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적나라한 충격이다. 산싱촌 사람들은 마을 공사를 하기 전에 필요한 도구와 식량을 구입하는 방법으로 교화원에서 허벅지 피부를 잘라 판다. 화상 환자를 위해 피부 이식을 해야 하는 교화원에서는 피부를 팔고 싶은 사람들이 반가운데, 이때 피부 이식에 필요한 돈은 환자와 환자 가족이 부담한다. 따라서 돈 많은 환자에게 비싸게 피부를 잘라 팔 수 있다면 큰돈을 만지게 된다. 마을의 촌장들은 솔선수범하여 자기 허벅지 피부를 잘라 팔아 마을 기금으로 내놓는다. 마을 주민들도 성인 남성이라면 거의 모두 허벅지 피부를 잘라 팔아 마을 기금으로 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마을 기금으로 내지 않고, 그 돈을 들고 도시로 나가 장사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한다. 남자들이 허벅지 피부를 팔아 돈을 벌 때, 여자들은 큰 도시로 나가 몸을 팔아 돈을 번다. 주로 과부나 젊은 여성이 대상으로, 이들은 마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촌장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 란쓰스가 도시로 나가 인육장사를 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마오샤오샤오 촌장이 주도한 땅 뒤집기 공사 이후 오히려 옥수수 농사가 실패하고, 여기에 메뚜기떼가 습격하면서 흉년이 든다. 마을에서는 가지고 있는 곡식을 아껴먹지만, 식량이 다 떨어지자 촌장은 장애가 있는 어린이들을 산속으로 데려가 유기한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산 채로 까마귀에게 뜯어먹히고, 마을 주민들은 까마귀를 잡아 식량으로 먹는다. 촌장 세 명의 성씨가 살아가는 산싱촌은 촌장이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 두싱, 쓰마란, 란바이수이, 쓰마샤오샤오 등 촌장을 지내는 사람들은 마을 주민들이 마흔 살을 넘게 살 수 있는 방안을 내놓는다. 농사 짓는 땅을 뒤집거나, 먼 마을에서 깨끗한 물을 끌어온다는 계획을 제시하고, 그걸 실천에 옮기기 위해 스스로 허벅지 피부를 교화원에 판다. 권력자라고 뒤로 빠지거나, 말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산싱촌의 촌장은 자기가 가진 권력의 권한과 의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과 마을 주민의 재산, 노동력을 전부 동원해서 마을의 숙원사업을 진행하지만, 문제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다는 점이다. 산싱촌 사람들은 주민 모두의 운명을 걸고 엄청난 규모의 사업을 진행하지만, 그들이 하는 사업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기를 쓸수록 문제가 더 커지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쓰마란, 란쓰스 이 소설에서 쓰마란과 란쓰스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사이였고, 결혼을 약속했다. 아기 때 쓰마란은 란쓰스의 엄마 젖을 란쓰스와 같이 먹었고, 어려서 서로의 벗은 몸을 보여주었으며, 혼인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쓰마란은 마침내 촌장이 되고, 그의 아버지가 추진했던 수로 공사를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쓰마란은 교화원에서 허벅지 피부를 팔고, 란쓰스는 도시로 나가 인육장사를 한다. 쓰마란은 란쓰스를 좋아하지만, 아내는 두주추이를 맞았다. 세 사람의 관계는 애증으로 얽혔고, 이들은 불과 서른 중후반에 인연의 끈을 놓는다. 그 짧은 시간에 산싱촌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인간의 삶에서도 극단을 치닫고, 격렬하게 타오른다. 마을 주민들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집단으로 유기한 다음, 다시 격렬한 방사를 통해 다음 해 거의 모든 여성이 임신하고 출산한다. 아이들도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걸 어릴 때부터 온몸으로 느끼고, 체득한다. 중국 문학은 본질적으로 대륙의 물리적 크기와 다양성으로 다른 나라, 민족이 흉내내기 어려운 토대를 가지고 있다. 모옌의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고, 옌롄커의 소설에서도 보이는 특징은 이들이 중국 대륙의 물리적 환경과 조건을 작품에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땅과 강, 산맥이 만들어내는 서사가 있으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과 외세에 맞서 투쟁하는 상황은 거대한 역사이면서 생존의 기록이다. 중국은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대륙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중국의 고전은 중국 문학의 거름이며, 중국 민중의 삶은 그 자체로 역사이기에, 중국 작가들은 민중의 삶을 왜곡하지 않고 올바르게 기록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모옌이 중국의 전통, 신화, 역사를 바탕으로 민중의 삶을 긍정한다면, 옌롄커는 중국 민중의 삶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그들의 내면에 숨은 욕망과 탐욕, 삶의 의지를 찾아낸다. 옌롄커는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쓸 수밖에 없는 글'을 쓰는 작가로 알려졌다. 즉, 마음에서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글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허난성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렵게 공부했고, 공산당원이긴 해도, 그가 중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고향의 가난한 주민들이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옌롄커는 중국의 현실을 비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중국과 중국인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작가가 해야 하는 역사적 의무를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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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6
  • 한국 팝의 고고학 - 1960
    한국 팝의 고고학 - 1960 10대의 어느 한 때, 오래된 트로트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난영, 고복수, 남인수, 현인, 김종구 같은 가수들의 노래를 하염없이 들으며 마음이 좀 슬펐던 기억이 있다. 그땐 몰랐지만 아마도 '자기 연민'이 아니었을까. 소년 노동자로 살면서 나는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무지렁이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공장노동자, 건설노동자로 10대, 1970년대를 보냈고, 그때 라디오에서는 나훈아, 남진, 김추자, 최헌, 송창식, 어니언스, 패티김, 이은하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비록 몇 달이었지만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음악에 몰두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국민학교 다닐 때 동무들과 유행가를 부르며 마을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추억이 있다.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대중음악은 우리에게 유행가였고, 어린 우리는 동요보다 유행가를 더 많이 불렀다. 이 책은 '한국 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통해 들어온 음악과 당시 한국에서 불렸던 음악(민요)이 결합해 '트로트'라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이 분야는 지금도 '트롯'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생산하고, 소비한다. '트롯'과 함께 두 줄기 가운데 하나로 '팝'이 있는데,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 '한국 팝'은 전후, 여기서 '전후'는 1945년이 아니라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를 뜻한다. 미군이 한국에 상주하면서 미국의 대중음악이 이식되는 과정에서 '한국 팝'이 하나의 장르로 탄생한다. 미8군으로 상징하는 미군의 존재는 전쟁을 겪은 한국 민중에게 '나라를 구한 은인'이자, 굶주린 대중에게 곡식(밀가루, 설탕)을 가져다 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미지가 겹쳐 절대의 권위와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해방 직후 약 3년의 '미군정' 시기를 사람들은 잘 모른다. 미군은 한국 정치가를 배제하고, 그들이 직접 한국을 지배했던 시기가 있었다. 해방 직후 민족주의자인 여운형 등을 배제하고 이승만과 친일파 계열이 득세할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도 바로 미군이 정치적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해방 직후 '점령군'으로 한국에 '진주'했으며, 한국을 3년 동안 '미군정' 체제로 다스렸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해 '작은 3차대전'을 한반도에서 치른다. 이승만은 미군(맥아더 장군)에게 '전시작전지휘권'을 이양하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 역량이 형편 없다는 걸 인정하고, 외국군인 미군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긴 것이다. '전시작전지휘권'은 한국이 세계 6위의 전투 능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음에도 아직 되찾지 못하고 있다. 주권 국가에서 '전시작전지휘권'을 외국에 넘겨준 경우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만큼 한국에서 미군의 존재 의미는 여전히 특별하다. 전후 가난이 극심하던 때, 대중음악을 하는 예술가들이 그나마 무대에 설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미8군으로 대표하는 미군부대의 무대였다. 미군은 세계 곳곳에 있는 미군을 위해 본토에서 순회공연팀을 만들어 공연을 하러 다녔는데, 냇 킹 콜, 조니 마티스, 진 러셀, 마릴린 먼로 같은 미국의 유명한 연예인이 한국의 미군부대에서 공연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미국 본토에서 직접 연예인들이 한국을 방문해 공연하는 건 물리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미군은 한국의 대중음악인을 훈련시켜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 미군은 까다로운 심사(오디션)을 통과한 한국 대중음악인에게 기회를 주었고, 이들은 피나는 노력과 훈련을 통해 미군들이 환호할 정도의 기량을 갖추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가수, 연주자, 작곡가들 대부분 미군 무대에서 활약한 사람들인 건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미군의 엄격한 오디션을 통과해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고, 미군부대의 무대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가수, 연주자, 작곡가들은 자신의 창작 능력보다는 미군이 요구하는 미국의 음악, 미군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노래하고 연주해야 했다. 즉, 한국 팝은 정확히 미군의 요구로 한국에 이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군부대의 무대는 특별했으며, 한국의 방송(라디오, 텔레비전) 무대는 '일반 무대'였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있었으나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여서, 가수, 연주자들은 전국에 있는 극장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극장은 대중이 가장 쉽고,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였고, 영화는 기본이 두 편으로 '동시상영'이었다. 가수와 연주자들은 영화 한 편이 끝나는 막간에 공연했으며, 이런 방식의 공연이 나중에 가수의 독자 공연으로 발전해 '리사이틀'이 되었다. '하춘화 리사이틀', '남진 리사이틀', '나훈아 리사이틀' 같은 제목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극장에서 공연했던 걸 어릴 때 극장의 간판으로 본 기억이 있다. 1960년대 한국에서 그룹, 중창단이 활발하게 탄생한 것도 미군 또는 미국의 대중음악 영향을 직접 받은 결과다. 미국에서도 1950년대, 1960년대 그룹이 많이 생겼는데, 우리에게 알려진 에벌리 브라더스를 비롯해 드리프터스, 문글로스, 플래터스, 브라더스 포, 사이먼앤카펑클, 더 벤처스, 비지스, 비틀즈가 50년대, 템테이션, 포시즌스, 비치보이스, 도어스, 마마스앤파파스, 스콜피언스, 잭슨스, 핑크 플로이드, CCR, 애니멀스 같은 밴드들이 60년대 초중반에 결성한다. 한국에서는 신중현의 '에드 훠'를 시작으로 '김시스터즈', 블루 벨스, 봉봉 사중창단, 자니 브라더스, 아리랑 브라더스, 멜로톤 트리오, 키보이스 등이 줄지어 나타났다. 이런 그룹 활동은 미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70년대로 오면서 듀엣이 또 하나의 특징으로 등장한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이후 한국은 독재 정권 체제에서 수출중심의 산업으로 재편한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1961년, KBS를 시작으로 1962년 MBC, 1964년 TBS 같은 민간 상업방송이 등장하면서 텔레비전의 영향은 급격히 커졌다. 대중음악이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전국의 극장을 돌며 공연하던 가수, 연주자들이 텔레비전에 등장해 '스타'가 되는 시기였다. 방송국은 컨텐츠가 많이 필요하던 때였고, 특히 대중음악을 하는 예술가의 쓰임이 폭발하듯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8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가수, 연주자들이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면서 한국의 대중문화는 트롯과 함께 블루스, 팝, 록 같은 다양한 음악이 대중음악의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독재 정권에서 나름 다양한 음악이 등장한다. 이 시기는 대중음악의 다양함과 폭발적 확산과 함께 독재 정권이 블랙리스트, 금지곡 지정으로 대중음악과 문화를 통제하고 억압했다. 대중가수를 통제하는 방식은 마약(대마초)과 가사 검열이었다. 독재 정권은 어리석은 짓이 분명한 검열과 블랙리스트를 휘두르며 대중예술을 통제, 억압했지만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박정희가 살해당하는 걸로 끝났다. 60년대는 대중음악 빅뱅의 시기였다. 2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에서 민요와 혼종으로 시작한 '트로트'는 '뽕짝'이라는 멸칭으로도 불렸으나, 지금은 '뽕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트롯'은 한때 팝송, 한국 팝, 록에 밀려 입지가 좁았으나 지금은 전성기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반면 50년대 시작한 한국 팝은 청년 문화와 결합하면서 독재 체제에 저항하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가 나타났다. 이때 한국 팝은 일본과 미국에서 유행하거나 발표된 노래를 '번안곡'이라는 이름으로 저작권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라 '표절'을 해도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던, 바람직하지 않은 시기였다. '번안곡'으로 표절을 정당화하면서 나온 노래들이 방송에 나오고, 음반으로 제작되어 대중이 소비하는데, 60년대 말이 되면 한국 팝에서 창작 음악이 나타난다. 신중현은 일찌감치 한국 록의 창작으로 아무도 밟지 않은 영역을 개척하고 있었고, 미국 대중음악의 세례를 받은 한대수가 한국에서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개척했다. 한국 팝은 미군의 요구로 이식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스스로 자생,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중음악가들은 외국 음악을 받아들여 한국사람의 정서를 불어 넣어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번안곡'이라는 표절도 있었으나 이건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고, 창작 과정과 예술의 발달에 있어 필연의 과정이기도 하다. 60년대는 현대 한국 대중음악이 탄생하고 혼돈의 시기를 보낸 시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음악, 우리 고유의 민요, 미국에서 이식된 다양한 장르(팝, 록, 블루스, 로큰롤, 재즈 등)의 음악이 뒤섞였고, 독재 권력의 검열과 청년의 저항문화가 대립하면서 대중음악은 독특하게 발전한다. 이 책은 대중음악을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훌륭한 길잡이 노릇을 한다. 그것도 '한국 팝'이라는 장르의 역사와 인물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고, 예술가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결과를 만드는가를 볼 수 있다. 열악한 환경과 상황에서도 한국의 대중예술가들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창작과 예술을 위해 노력했고, 60년대의 활동을 밑거름으로 이후 대중예술은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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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6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렌커의 이 장편소설은 중국 공산당이 판매금지했다. 몇 가지 이유로 판매금지했는데,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를 한 걸로 본다. 중국 공산당은 '국가' 위에 있는 존재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진데, '공산당'이 먼저 생기고, 공산당이 국가 조직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의 공산당은 또한 군부와 뗄 수 없는 샴쌍동이 같은 존재다. 공산당이 곧 군부이고, 군부가 곧 공산당이다. 1924년, 중국공산당을 결성하고, 마오쩌둥이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면서, 이들은 곧바로 내전과 항일투쟁의 선봉에 서는데, 공산당과 당의 군사조직을 지휘하는 간부는 거의 모두 같은 인물이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당의 이념과 사상에 가장 투철하며, 당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용맹함과 헌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했고,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당하는 인민을 해방하는 걸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 공산당(의 지도부)이 보기에, 이 소설은 중국의 위대한 공산당의 존재와 역사와 역할을 폄훼하고 있으며,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을 모욕하고, 중국 붉은 군대의 명성에 먹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이 소설을 판매금지한 건 당연하다고 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중국공산당의 현재 모습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중국은 공산당 독재 사회이면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채택한 기형적 국가다. 등소평이 '흑묘백묘론'을 주창한 이후, 중국공산당은 인민의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한다고 선언했고, 이후 실제 중국 인민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중국 전체의 부는 커졌지만,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는 계층은 공산당원 특히 고위 공산당원들이었다. 그들은 가진 권력으로 각종 이권에 개입했으며, 직접 자본가가 되거나, 자본가의 이익을 보장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받아 부를 축적했다. 공산당원과 비당원, 대도시 거주민과 시골 농민의 삶은 극단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크게 벌어졌고, 중국공산당은 가난한 농민과 인민을 착취해 배를 불린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다왕은 사단장 사택의 당번병이다. 그는 사단장과 그의 가족을 위해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텃밭을 가꾼다. 그는 이 보직을 얻으려 온몸을 내던져 사단장의 어린 아들과 놀아주었고, 여러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당번병이 되었다. 그는 모범병사였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음식도 잘 하는 병사로, 자타가 인정하는 붉은 군대의 인재였다. 그가 이렇게 훌륭한 모범병사가 될 수 있었던건 그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그가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굳게 약속했고, 장인어른에게 혈서까지 썼기 때문이다. 시골 무지랭이였던(중학교는 졸업했다) 우다왕은 이웃마을의 말단 관리 자오의 배려로 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산골 출신이 군에 입대한다는 건 대단한 출세였다. 고향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하루 세 끼의 식사에는 반드시 고기가 들어 있고, 군복은 깨끗했으며, 사상학습을 통해 폭넓은 지식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우다왕은 군대 생활에 만족하지만, 그에게는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가 있었다. 공산당에 입당해 당원이 되는 것, 군대에서 공을 세워 진급해 군 간부가 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목표는 장인어른인 자오와 약속한 내용으로 혈서까지 썼으며, 그의 아내에게도 맹세했다. 하지만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는 매우 어렵고, 우다왕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사단장 부인 류롄이 유혹하는 걸 뿌리칠 정도로 윤리, 도덕으로 무장한 인물이지만 '욕망' 앞에서 무너진다. 우다왕의 아내 자오어즈는 시골의 봉건적 분위기에서 자란 여성이다. 공산주의 사회라곤 해도 중국의 시골은 여전히 봉건의 요소가 많이 남아 있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인민은 마을 촌장과 당 간부의 지도에 따라 관습적으로 살아간다. 자오어즈는 아버지(자오)의 명령으로 우다왕과 결혼한다. 우다왕은 간경화로 죽어가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급하게 자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사랑의 감정이 있을리 없고, 일종의 정략 결혼이어서 우다왕이 아내와 아들에 대한 책임감과 류롄과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원인이 되는데, 자오어즈의 존재는 중국 농촌 여성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인다. 자오어즈는 신혼 첫날 밤, 우다왕에게 세 가지 약속을 지키라고 맹세하도록 한다. 첫 휴가 때 군복을 가져올 것, 매년 부대에서 공을 세울 것, 승진할 것이 그 내용이다. 이때 자오어즈의 태도는 개인의 삶을 공동체(집단)와 동일하게 여기는 인식을 보인다. 즉, 결혼과 부부라는 지극히 개인의 삶을 사회의 기준으로 치환해 객관화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이런 태도는 자오어즈가 어려서부터 배워온 사회주의 학습의 결과이며, 공산당은 개인의 삶을 계량화, 수치화, 통계화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 당원, 승진, 간부 - 결과에 집착하도록 교육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경쟁을 통해 물질과 부를 축적하는 행위와 비슷하며, 공산주의 사회는 개인의 희생, 집단 속의 개인, 개인의 영웅화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 인간을 만든다. 류렌 사단장의 아내로, 간호부대에서 근무하던 군인이었다. 사단장이 류렌을 보고 '찍었다'고 했으나, 류렌이 사단장을 선택했다고 봐야 한다. 사단장이 청혼했어도 정말 싫었다면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장은 류렌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사람으로, 훌륭한 군인이고, 지휘관인 건 분명하다. 류렌은 사단장에게는 두번째 부인이다. 사단장의 첫번째 부인과는 이혼했는데, 이 소설을 다 읽으면 독자가 사단장의 이혼에 관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류렌은 서른 살 초반의 여성으로, 사단장의 아내로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는데, 당번병 우다왕을 적극 유혹한다. 류렌의 알몸을 보고서도 유혹을 뿌리친 우다왕에게 당번병을 바꾸겠다고 협박한 건 류렌의 진심이었는지, 단지 공갈이었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류렌은 우다왕이 당번병으로 사택에 들어와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나름 깊은 인상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만약 사단장 당번병으로 키 작고 외모도 형편 없는 병사가 들어왔다면 류렌이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유혹했을까. 류렌의 입장에서 외모는 유혹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우연이지만 우다왕의 외모는 류렌의 기준에 합격했고, 여기에 우다왕의 개인적 문제까지 겹치면서 류렌의 의지가 관철된다. 사단장 1세대 공산당원으로 항일 전쟁과 내전을 겪으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진정한 투사다. 철저한 군인이지만 '개인'으로는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사단장은 작품에서도 거의 등장하지 않고, 등장해도 의미 있는 역할이 아니다. 그는 특수한 임무를 띄고 두 달 동안 출장을 떠나는데, 우다왕과 류렌은 이 기간 동안 아담과 이브가 된다. 작품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사단장이 사택을 비우면서 젊은 아내와 당번병 둘만 남는다는 걸 모를 리 없고, 신경 쓰지 않았을 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단장은 가장 믿는 부하에게 사택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수 있고, 아내 류렌과 우다왕이 수상한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류렌이 우다왕을 유혹하는게 사단장과 류렌의 합의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다. 사단장의 첫 부인과 이혼한 이유도, 첫 부인이 당번병과 불륜 관계였음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첫 부인이 임신을 하는 것으로 당번병과의 불륜을 허락했지만, 부인이 임신하지 않았거나, 못했기에 그 책임을 지고 이혼한 건 아닐까. 사단장은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말을 류렌이 우다왕에게 하는 건, 다시 두 가지 숨은 이유가 있다. 사단장이 성적으로 류렌을 만족시키지 못해 류렌은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불만과 함께 임신을 할 수 없어 아이를 낳지 못해, '엄마'가 될 수 없는 비극을 예상할 수 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소설의 제목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모택동의 감동적 연설의 제목이다. 중국공산당과 공산주의자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역사적 소명이자 당의 명령이라는 내용으로, 중국공산당이 '중국해방전쟁' 과정에서 물(인민)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물고기(공산당)를 비유하며, 인민 속으로 들어가 철저하게 인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단장 사택의 식탁에 놓여 있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패는 소설에서 몇 가지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우다왕은 군에서 배운 신념대로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 여기서 인민은 인민해방군이 보위해야 하는 중국 인민이지만, 구체적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이며, 사단장의 부인인 류렌이다. 우다왕은 정식으로 결혼한 아내 자오어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죄책감을 갖는다. 반면 불륜인 류렌에게는 그가 한번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데, 이 서로 다른 대상에게 서로 다른-윤리적으로 옳지 않은-감정을 느끼면서 스스로 혼란하다. 우다왕과 류렌의 관계 시작은 전형적인 계급 관계로 시작한다. 사단장 부인이라는 강력한 권력자 류렌은 사택 당번병 우다왕을 유혹할 때 주도적으로 행동하며, 우다왕이 거절하자 그를 쫓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며 우다왕이 굴복하도록 만든다. 이 권력 관계는 우다왕과 류렌이 육체 관계를 통해 계급이라는 사회적 권위를 내려놓으면서 점차 평등해지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짧은 관계가 끝나면 다시는 누나-동생 또는 애인이 될 수 없는 사이로, 계급 질서가 복원되는 게 두 사람에게는 비극이다. 류렌은 우다왕보다 네 살이 많아서, 사단장의 부인이기도 하지만 연상의 여성으로, 우다왕을 어리게 생각한다. 류렌이 먼저 '누나'라고 부르도록 하고, 우다왕은 '사모님'에서 '누님'으로 호칭을 바꾸는데, 이건 류렌과의 관계가 사회적 계급관계에서 개인적 관계로 전이하는 걸 의미한다. 사단장이 집을 비운 두 달 동안 두 사람은 마치 신혼부부처럼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데, 이 과정에서 류렌은 새로운 자극을 받으려는 행동으로 모택동의 부조, 글씨, 사진 등을 모두 파괴한다. 우다왕도 이 행위에 동참하며 스스로 반혁명분자라고, 총살당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두 사람은 사택의 출입문을 모두 안으로 걸어잠그고, 격렬한 애정 표현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택동의 이미지를 훼손하는데, 이건 개인의 욕망이 공산주의 이념보다 앞서고, 중요하다는 걸 드러내는 상징적 행위다. 이렇게 권위와 권력의 상징인 모택동의 이미지를 훼손하면서 두 사람은 정욕이 더 강해지는 걸 느끼고 격렬한 정사를 벌인다. 이 소설에서 '섹스'는 명백히 중국의 권위와 통제에 반발하는 상징의 행위다. '섹스'는 지극히 개인적 행위이며 국가나 공산당에서 개입할 수 없고, 개입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다. 우다왕과 류렌은 각자 배우자가 있는 기혼자이며, 중국공산당의 자부심인 인민해방군으로 인민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기혼자이자 중국공산당 당원이며 최고의 병사인 우다왕과 류렌은 중국공산당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하고 '개인의 욕망'을 충족한다. 사단장이 돌아오기 전, 류렌은 자기가 임신했다는 느낌을 받았고, 우다왕에게 집으로 휴가를 가라고 명령한다. 이제 다시 계급 관계가 복원되면서 우다왕은 '유사 사단장'의 지위에서 당번병의 위치로 돌아오지만, 그것만으로도 충격을 받는다.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와 아들을 만나도 크게 기쁘지 않고, 아내와 몸을 섞지도 않으며, 오로지 류렌을 생각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이라는 것과, 다시는 류렌을 만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다왕은 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에 시달린다. 반면 류렌은 우다왕에게 약속한대로 우다왕이 도시의 큰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할 수 있도록 처리했으며, 우다왕의 아내가 그렇게 바란대로 도시에서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류렌은 임신했고, 그 아이가 우다왕의 아이라는 건 오직 류렌 자신만 알 뿐이다. 우다왕도 류렌의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짐작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라는 원칙에 따라 그는 류렌에게 아이가 자기 아이라는 말을 묻지 않는다. 사단장은 인민해방군의 효율적 편재를 위해 스스로 자기 사단을 해체하기로 결정한다. 예하 부대들이 해체되거나 다른 부대로 편입하고, 많은 군인들이 군을 떠나 민간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다왕도 전역하고 도시의 큰 공장 공장장으로 일하게 되는데, 류렌이 약속을 지킨건 우다왕에게 커다란 선물이었다. 이야기는 15년이 지난 뒤에 우다왕이 류렌을 만나려 시도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는데, 두 사람은 결국 만나지 못한다. 아니, 류렌이 우다왕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 우다왕은 사택 근처에서 놀고 있는 열다섯 살 남짓한 사내아이를 오래 지켜보는데, 그 아이가 류렌의 아이인지는 확실치 않다. 중국의 현대가 개인의 욕망을 '공산주의'의 틀로 가두고 있다는 걸 비판, 풍자한 이 소설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이 욕망이라는 공통점으로, 그들만의 공간(사택)에서 사회에 반역한다는 내용으로 중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두 사람의 욕망은 순수하지만, 두 사람의 사회적 관계, 사회적 위치, 사회의 기준으로 구분되는 신분의 격차, 이념이 짓누르는 사회 분위기와 함께 개인의 욕망과 사회의 권력 관계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한국 팝의 고고학 - 1970
    한국 팝의 고고학 - 1970 1970년을 기억하는 건 쉽지 않다. 기억은 파편으로 남았고, 나는 그때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는 열 살이었고, 마포의 기찻길 아래, 루핑을 얹은 판잣집에서 살았다. 국민학교 2학년 무렵이었고,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읽다가 한글을 깨쳤다. 집앞으로 문안(사대문 안쪽)에서 흘러나온 개천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흑백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가진 집이 하나였다. 우리집에는 배터리를 고무줄로 묶은 금성 라디오가 유일한 가전제품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연속극이 나오고, '전설따라 삼천리'가 나왔다.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무서운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 꼬마들은 따로 배우지 않았어도 '유행가'를 알고 있었다. 우리들은 동요를 부르지 않았고, 남진의 '님과 함께'를 신나게 불렀다. 맹인 가수 이용복의 노래들, 신중현의 '미인',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봄비', '거짓말이야'를 뜻도 모르고 불렀다. 1971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나는 꼬마였고, 정치를 몰랐지만 아버지에게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대요.'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쉿, 그런 말 하는 거 아냐'라고 하셨고, 1979년, 박정희는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나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 일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라고 썼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쉽게 알 수 없는 한국음악의 팝 계열 음악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했다. '가왕' 조용필이 1971년 처음으로 '가수왕' 상을 받은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70년대 최고의 대중잡지였던 '썬데이서울'이 주최한 '썬데이서울컵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조용필은 최이철, 김대환과 함께 '김트리오'를 결성해 출전했고, '가수왕' 상을 받는다. 70년대는 듀엣, 트리오 같은 그룹이 많이 나타났고, 그들의 노래가 유행했다. 키보이스, 키브러더스, 히식스, 영사운드, 템페스트, 사월과 오월, 어니언스 같은 그룹의 노래는 라디오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마을에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서는 오후5시에 시작하는 방송 시간에 맞춰 입장료 10원을 받고 꼬마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엄마를 졸라 10원을 받아 텔레비전을 보러 달려갔다. 일본 만화영화를 그대로 가져온 '뱀, 베라, 베로', '타이거 마스크', '밀림의 왕자 레오'를 봤고, 동네 누나들은 남진과 나훈아의 팬으로 갈려 서로 '우리 오빠'가 최고라고 부르짖었다. 남진 오빠에게 시집가겠다는 누나가 수십 명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청년들이 부르는 노래를 금지했고, 긴 머리를 길거리에서 함부로 가위로 잘랐으며,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치마 길이를 재고, 경찰서로 끌고가 창피를 주었다. 청년들이 팝송을 부르고, 통기타를 치고, 한데 모여 음악 듣는 걸 두려워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천리마운동'을 시작하자 남쪽에서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으로 따라했다. 시골의 초가집을 벗겨내고 슬레이트 지붕을 덮었고, 마을 길을 넓히고, 북한의 '5호담당제'처럼, 마을 주민을 감시하도록 했다. 언론은 숨죽였고, 텔레비전에는 오락과 코미디만 넘쳤다. 1974년 여름, 한여름 폭우가 개울을 넘고, 집으로 물이 넘실대면서 우리 가족은 한밤중에 보따리를 싸서 철둑으로 도망했다. 날이 밝고, 철둑길에서 바라본 동네는 온통 물바다였다. 지붕만 남은 우리집은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고, 머지 않아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름으로 속절 없이 헐렸다. 우리 가족은 서울의 변두리 산동네, 큰누나가 살고 있는 산비탈 단칸방에서 월세를 살았다. 나는 소년노동자가 되었고, 더 이상 유행가를 따라부르지 않았다. 공장 몇 곳과 식당을 전전하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가다꾼'이 되어 지방 공사장을 떠돌았다. 그때 이정선의 '섬소년'을 들었고,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외웠다. 하루 노동을 마치고 하숙집에 돌아와 카세트 라디오에서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 사월과오월의 '등불', 어니언스의 '편지', '저별과 달을', 영사운드의 '등불'을 들었다. 대중은 알 수 없는, 가요계 인맥과 가수들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은 특히 팝을 중심으로 청년 가수들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어 70년대 청년문화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기 한국의 팝은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을 직접 받고 있었고, 가수들도 미군부대에서 노래하길 바랐다. 미군부대에서 이름을 얻은 가수와 밴드, 그룹이 방송과 연예계로 진출하는 수순이 자연스러웠다. 라디오 방송에서 팝송이나 대중가요를 내보내고, 진행자가 DJ(디스크자키)로 인기 연예인이 되고, 방송국으로 엽서와 편지가 무더기로 보내지던 시절이었다. 70년대 중반, 영화계에서는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라는 특이한 장르가 등장했다. 독재정권이 체제에 부정적인 문화를 거세하고, 대중을 어리석은 상태로 만드는 '우민화 정책'을 쓰면서 '벗기는 영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75년이 되면서 신중현 '미인', 김정호 '하얀 나비', 김세환 '사랑하는 마음', 둘다섯 '긴머리 소녀', 윤항기 '이거야 정말', 송창식 '왜 불러', 윤형주 '어제 내린 비', 검은 나비 '당신은 몰라' 같은 노래들이 히트곡이었다. 나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이런 노래들은 들었지만, 흥겹게 따라 부르고 싶은 상태가 아니었다. 가난과 노동으로 삶은 피곤하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한달에 하루나 이틀을 겨우 쉴 수 있었고, 거의 매일 잔업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 조치'를 발표하고, 많은 연예인들이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거나 화면에서, 방송에서 사라졌다. 내 삶 뿐아니라 사회 전체가 암울하고 답답하던 시기였다. '금지곡'이 늘어나고, 가수, 연예인들의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 가요와 영화는 정부기관의 심의를 받아야 했고, 창작의 자율과 상상력은 억압당했다. 1976년 2월, 나는 매형을 따라 건설노동자가 되었다. '노가다'라고 업신여기는 직업이었지만, 공장보다 임금이 많았고, 공장처럼 한 자리에서 기계 부속품처럼 반복작업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일은 힘들었지만 자율성이 있어서 할만 했다. 송대관의 '해뜰 날'이 방송과 거리에 울려 퍼졌다. 내 인생에서도 '쨍 하고 해뜰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싶었다. 최헌의 '오동잎'이 거리를 휩쓸 때, 나는 경남 울주의 새로운 공단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저 아래, 부산에서 파도를 일으키며 서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1977년, 1978년에도 나는 지방을 전전하며 '노가다'를 뛰었다. 경남 울주, 마산, 창원, 전남 광주, 충청 신탄진, 강원 속초의 건설 현장에서 때로는 하숙집에서 편하게 잠자고, 맛있는 밥을 먹으며 일하다, 때로는 현장의 허름한 숙소에서 잠자고 현장 식당에서 맛없는 밥을 먹으며 일했다. 세상은 내게 따뜻하지도, 호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가수들은 명멸했고, 그룹사운드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카세트 녹음기가 첨단 기기로 나타났고, '공테이프'를 사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녹음했다. 그때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다. 이 무렵 처음 '대학가요제'가 열렸고, 대학생 그룹과 개인의 신선한 노래가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그동안 기성 가수들의 노래에 싫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대학생의 음악에 환호를 보냈다. 샌드페블스 '나 어떡해' 블랙테트라 '구름과 나' 활주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같은 음악들은 청년의 감성을 흔들었다. 그리고 '산울림'이 등장했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놀라운 그룹이 등장했다고 사람들은 흥분했다. '산울림'의 신선한 충격은 오래 이어졌다. 1979년, 나는 지방에서 올라와 독서회 활동을 시작했고,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고 있었으며 삼중당 문고를 열심히 읽었다. 이때 혜은이, 이은하, 윤시내 같은 여성 가수들이 도드라졌다. 그룹사운드의 음악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끊이지 않고 나왔다. 활주로, 블랙테트라, 샌드페블스, 휘버스, 작은 거인, 장남들, 벗님들, 블루드래곤 같은 그룹사운드의 음악은 한국 팝 음악의 70년대 열매이자, 80년대를 여는 서곡이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 독재가 막을 내렸다. 박정희는 부하가 쏜 총에 맞아 죽었고,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 책은 그 시대를 기억하는 가수, 연주자들, 음악 제작자, 프로듀서, 작곡가 등의 인터뷰가 많이 실려 있어서 음악의 흐름과 가수를 비롯한 음악 관련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풍성하고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음악이 탄생하는 과정이 얼마나 다양하고 긴밀한 인간 관계를 통해 일어나는가를 잘 알 수 있고, 가수, 작곡가, 연주자들이 선의를 가진 협업을 통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신기하고 흐믓하다. 모든 것이 아날로그이던 시대, 아날로그의 투박하지만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포크와 팝 음악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녹슬지 않고 싱싱하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썼습니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그해 여름 끝
    그해 여름 끝 옌롄커의 초기 작품. 중국문학에서 '신사실주의'를 만든 작품으로 알려졌고, 이 작품으로 옌롄커는 매우 위험한 상황까지 몰리는 탄압을 받았는데, 다행히 외국의 언론이 그를 살렸다. 중국정부는 옌롄커의 작품을 불온하다고 판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 소설은 단순하고 무겁지 않다. 현대 중국의 현실 가운데서 중국해방군 내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그것이 '불온'하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중국정부가 이 소설을 '불온' 딱지를 붙일 작정이었다면, 그것은 이 소설을 바라보는 중국정부의 관료들이 매우 편협하고, 스스로 잘못을 감추려는 불안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그냥 두었다면 이렇게 크게 난리가 나지 않았을텐데, 불구덩이를 함부로 쑤셔서 사건을 크게 만든 건 중국정부였다. 그래서 옌롄커의 이름은 더 널리 알려졌고, 그가 중국정부로부터 탄압당하는 작가라는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세계문학계에서 옌롄커의 이름은 확실히 각인되었다. 소설의 서사는 단순하다. 인민해방군 중대장 자오린과 정치지도원 가오바오신이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전우이며, 오랜동안 함께 복무한 처지라 서로를 형제처럼 가깝게 생각하고 있다. 두 사람은 승진에 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고향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베트남 전쟁 이후로 중국해방군은 심각한 전쟁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고 있으며, 날마다 훈련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의 삶에 심각한 고비가 닥친 건 총기보관소에 있던 자동소총 한 정이 사라진 이후였고, 두 사람이 총기를 찾으려 곳곳을 수색하지만 발견하지 못한다. 이 사건으로 문책을 당하게 될 경우를 예상하는 두 사람은 미묘한 신경전을 펼친다. 그러다 3중대 신임 병사 '샤를뤄'가 사라진 총기로 자살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어린 병사 '샤를뤄'의 자살을 둘러싼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상부에서는 병사 자살사건을 두고 중대장 자오린과 정치지도원 가오바오신을 문책하기로 결정한다. 자살 경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일주일 가까이 감금당해 한 방에서 생활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걸 느낀다. '샤를뤄'의 자살 이후 오히려 상부에서는 두 사람을 심하게 문책하지 않고, 한 계급 강등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두 사람 모두 군대에 남게 되었으며, 벌점은 받았지만 더 노력해서 다시 진급하면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이 소설이 중국 현대문학에서 '신사실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서사의 사실성에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중국 현대문학 작품에서 이만큼의 '리얼리티'도 확보하지 못한 작품들이 발표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지만, 서사가 내재한 담론의 폭은 상당히 넓다. 군부 내부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한 것은 분명 충격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확률의 범위에 있다. 다만, 여기서 '샤를뤄'가 자살한 이유는 끝내 밝히지 못한다. 그의 부모도 아들 '샤를뤄'가 사회성이 부족해 보인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자살할 이유일 수는 없다. 중국 군대에서는 물리적 폭력, 따돌림 같은 건 생각하기 어려운데, 이는 인민해방군이 일본군이나 한국군처럼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제국주의 군대와는 다른,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탄생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은 중국 국가를 이루는 양대 산맥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공산당'의 지도와 '인민해방군'의 역할은 최우선 가치를 지닌다. 이 소설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오히려 군대 내부의 문제보다는 자오린이 끝내 버리지 못하는 '농민' 출신의 비애와 원한이다. 자오린은 가난한 시골마을의 농민으로 살다 어렵게 인민해방군에 입대한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농촌에서 유일한 탈출은 군인이 되는 것인데,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경쟁자들은 군대에 추천할 권한을 가진 촌장에게 뇌물을 주어야 한다. 자오린도 촌장이 새집을 짓는 곳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 일을 해주었고, 그의 친구가 경쟁을 포기하면서 군인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친구는 사고로 죽고, 친구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중대장이 된 이후 자오린은 휴가 다녀온 병사들이 가져온 작은 선물을 받는데, 그것이 뇌물은 아니지만, 병사들이 무언가를 가져다 바쳐야 한다는 중국 군대의 현실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최저 생활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 배급제도 1993년 이후부터 사라지고 중국 인민은 정부의 도움 없이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공산주의의 정체성이 사라지면서, 인민은 각자도생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 것이다. 자오린이 아내와 딸들을 어떻게든 영내로 불러들이려 한 것도 농촌에서는 먹고 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와 '농민공'이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도시에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라도 하지만, 시골에서는 안정적 수입이 없고, 빈민을 구제할 지방정부도 없으니 생존 문제가 심각하다. 옌롄커는 군대 내부의 문제를 꺼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농민의 가난한 삶과 그걸 방치하고 있는 중국정부의 무능 또는 무관심을 비판하고 있다. 자오린이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 가오바오신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군대를 떠나는 상황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단지 명예 때문이 아니다.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문제가 동지와의 오랜 우정도 포기할 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자오린은 상상하지 못한 인연을 만나는데, 그의 부대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상점의 회계 왕후이를 만나게 된 사건이다. 자오린은 마흔이 넘은 사내인데, 양귀비, 서시보다 더 아름다운 왕후이가 자오린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결혼해서 아내와 두 딸이 있는 자오린은 왕후이의 접근을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아름다움과 열정에 마음이 흔들린다. 인민해방군 장교가 불륜을 저지를 수 있다는 설정은 중국 현실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자오린은 끝내 자기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왕후이와의 만남은 열린 결말로 두지만, 중국 인민의 결혼과 연애, 이혼 같은 사생활이 중국 정부의 경직된 태도를 건드린 것으로 보인다. 옌롄커의 작품이 현대 중국을 살아가는 인민들의 구체적, 보편적 삶의 태도와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중국 인민의 비극성과 낙관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샤를뤄'의 죽음 이전과 이후에 보여주는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의 태도는 공산주의 사회 중국에서 개인이 가진 욕망의 표현과 '사회주의자'로서의 인민이 보여주어야 하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소총 도난 사건 이후와 '샤를뤄'의 자살 사건 이후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은 상대를 비난하면서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를 보인다. 전쟁터에서 서로의 목숨을 살려줄 정도로 진한 전우애를 가진 이들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 이익에 연연하며, 서로를 비난하는 태도는 그들이 공산주의로 무장한 사회주의자라 해도 개인의 욕망과 이익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존재라는 걸 말한다. 하지만 '샤를뤄' 자살 사건의 진상조사가 끝나고,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에 대해 한 계급 강등 정도로 사건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상대방의 처지를 옹호하고, 군대를 떠난다면 '내가 떠나겠다'고 말하면서, 동지를 위해 기꺼이 자기 미래를 양보하겠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이중적 태도는 인간이라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동안 중국사회는 '이상적 공산주의자'의 전형을 만들었고, 개인의 욕망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 이중성과 모순을 내재한 인간형을 무시하거나 부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옌롄커의 작품이 중국정부의 탄압을 받게 된 것도 중국정부가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직된 정책과 '좌파적 환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중국의 현실을 지나치지 않게 있는 그대로 반영한 점과 개인의 나약함, 이중성을 하나의 돌연한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소설 제목이 '샤를뤄'이고, 작품에서 신입 병사 '샤를뤄'가 자살하는 건 중의적이다. '그해 여름의 끝'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는 '여름해가 질 때'가 조금 더 느낌이 가까운데, 작품에서 '샤를뤄'가 남긴 긴 편지 내용이 바로 이 장면을 말한다. '샤를뤄'는 자살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긴 편지를 보내는데, 그가 묘사한 풍경은 누구도 본 적 없는 몽환적 분위기다. 부대 근처에 강이 없는데, '샤를뤄'는 붉게 타오르는 강을 묘사하고 있었다. 나중에,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이 징계를 당했지만, 다행히 두 사람 모두 군대에 남아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해지는 거리를 걸어 도달한 곳에서 본 풍경이 바로 '샤를뤄'가 편지에 쓴 그 풍경이 보이는 장소였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이 편지 내용과 똑같아서 충격을 받는다. '샤를뤄'가 자살한 이유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 풍경, 중국의 거대한 대륙의 장엄하면서도 몽환적인 석양의 압도하는 자연의 힘과 경이로움이 '샤를뤄'를 죽음으로 이끈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우주의 기원
    우주의 기원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짧은 시간 살다 죽지만, 그 시간이 행복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이 들어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다. 현대 자연과학은 우주의 기원부터 인류의 진화까지 이론과 실험을 통해 많은 부분 밝혔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인류가 존재한 이후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선진국'에 속한 나라에서, 배 곯지 않고 사는 걸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구 인구의 50억 명은 지금도 가난과 굶주림,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며, 전쟁과 자연 재해로 고통받는 삶을 산다. 풍요로운 나라에 살아도 무지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많다. 인간이 만든 '신'을 믿으며, 어리석고 멍청하게 사는 사람도 많고, 눈앞의 쾌락을 추구하며 넓고 깊은 세상을 모른 채 사는 사람도 많다. '개인'은 사회의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환경의 지배를 받는 나약한 존재다. 이런 한계를 안고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 '순수한 기쁨'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 그런 감정을 느꼈다. 다른 모든 학문은 인간의 실제 삶에 필요하거나 영향을 주고 받지만, 자연과학은 지금 우리의 삶과 직접 관련 없는 경우가 많다. 수학의 순수한 이론적 성취를 예로 들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리만 가설', 푸앵카레 추측', '골드바흐 추측' 같은 이론은 한평생 살면서 전혀 몰라도 되는 지식이다. 특히 이 책처럼 우주를 다룬 지식은 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내용이며, 모른다고 창피할 것도 없다. 우주, 별의 탄생과 죽음, 태양계, 원자, 양자 같은 이론과 지식은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 읽기에 어렵다. 자연과학은 기본이 어렵다. 이 분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이고 영역이다. 이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피보나치, 오일러, 갈루아, 가우스, 칸토어, 페렐만, 힐베르트, 리만, 와일스 같은 수학자,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닐스 보어, 프랑크, 패러데이, 뉴튼,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슈레딩거, 페르미, 케플러, 파인만 같은 물리학자 그리고 자연과학 각 분야마다 존재하는 무수한 천재들은 인류의 0.0001%도 안 되는 매우 뛰어난 존재들이며, 인류의 빛과 희망이다. 우리는 이들 천재가 만든 길을 따라가며, 그들이 만든 세계를 보고 놀라고 감탄한다. 우리는 그 세계를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들이 만든 세계가 우리의 생활을 놀랍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이 만든 세계는 우리 삶과 생활에 직접 이해관계가 없지만, 그 자체로 인간의 '이성 활동'의 놀라움과 순수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영역이다. 자연과학을 공부한 학자, 전문가가 나같은 평범한 사람을 위해 최대한 쉽게 쓴 자연과학 개론, 기초 입문서를 많이 출판하고 있다. 내가 자연과학 책을 읽기 시작한 건 2000년 초반부터인데, 이 시기가 한국출판계에서 자연과학 책을 본격 출간하던 때라고 알고 있다. 1990년대까지는 사회과학과 문학이 주류였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출판의 흐름에도 변화가 온 것이다. 가장 먼저 자연과학의 선두에 서서 대중을 이끈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이 책은 1980년대 초반에 출간했으니 이제 40년이 된 고전이지만, 여전히 잘 팔리고,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만큼 진화론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기적 유전자'를 시작으로 리처드 도킨스의 (한글로 번역한) 다른 책들을 다 읽고, 진화와 관련한 다른 책들, 수학, 물리학, 천문학, 우주와 관련한 책들을 꾸준히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다 어려웠지만, 어려워도 꾸준히 읽으니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고, 여전히 모르는 내용이라도 읽으려 노력한다. 이 책은 우주의 시작과 진화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우주가 138억년 전에 빅뱅으로 탄생했다는 건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에 우주로 올라간 제임스 웹 천체망원경으로 관찰하게 되면 또 어떤 놀라운 발견을 할 수 있을지 몹시 기대하는데, 지금의 과학으로도 빅뱅 이후 10의 -35초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추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더 놀라운건, 10의 -35초에서 -33초 사이에 가속팽창을 한 것까지 밝혔는데, 우리의 상상으로는 10의 -35초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가사의한 순간인데, 이걸 현대 인류의 과학이 포착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빛이 도달한 거리까지여서, 138억년의 시간이라고 알 뿐, 그보다 멀리 있는 우주는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우주가 여러 개인지, 닫혀 있는지, 몇 개의 차원인지 아직 모르는 것이 매우 많지만, 인류는 멸종하는 순간까지 우주의 비밀을 알려고 노력할 것이다. 옛날 브라운관 텔레비전에서 채널 사이에서 지직거리며 화면이 물결처럼 흔들리면서 잡음이 들리는데, 그게 바로 '우주복사'의 흔적이고, 138억년의 파동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우주와 아무 관련도 없지 않다는 걸 깨닫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가 우주에서 온 것이며, 우리가 죽어 육체가 사라지면 모두 원자가 되어 다시 우주로 돌아간다는 이 '과학적' 사고방식이야 말로 어떤 '종교'나 '신'보다도 더 아름답고 신비하지 않은가. 우주를 공부하는 건 '순수한 기쁨'을 얻는 지식이자, 삶을 겸손하게 살아가는 동기가 된다. 우리는 저 우주 속에서 '창백한 점'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날뛰어도 우주에서는 티끌보다 작은 존재로 살다, 바다의 파도 위에 잠깐 떠오른 물방울처럼 이내 사라지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우주를 바라보고, 우주를 생각하는 건, 내가 '인간'으로 진화한 동물의 후손이고, 말과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걸 깨달으면서, 더 없이 고맙고 행복하게 여기게 된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딩씨 마을의 꿈
    딩씨 마을의 꿈 먼저, 이 소설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은 창작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작가 옌렌커의 고향이 허난성인데, 공교롭게도 허난성에서 문제의 사건이 발생했다. 허난성은 인구는 많으나(9천6백만 명) 가난한 지역으로, 황허 남쪽 내륙의 농업 중심 지역이다. 여전히 봉건적 잔재가 많이 남아 있고, 70년대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의 기운이 남아 있는 곳이며, 70년대, 80년대 개혁, 개방,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혜택을 적게 받은 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 1990년대 초중반에 믿기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다.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는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가 창궐했다. 초기에 이 병에 걸리면 약도 없고, 고통스럽게 죽어간다는 보고가 있어서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특히 이 병이 동성애자에게 많다고 해서 동성애를 혐오하고 공격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타액과 피를 통해 전염된다고 알려진 '에이즈'는 미국과 유럽 즉 서방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생한 '타락한 윤리'의 결과라고 중국은 결론을 내렸다. 중국에서는 85년 6월에 최초의 에이즈 환자가 사망했는데, 그는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이 무렵 중국은 혈우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서 수입한 혈장을 검사하다 '인간면역 결핍바이러스(HIV)'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이 약은 이미 몇 사람의 환자에게 사용했고, 그들 가운데 네 명이 HIV에 감염된 것을 확인했다. 중국 정부는 서양의 '에이즈'에 맞서 꿩 먹고 알 먹는 전략을 개발한다. '깨끗한' 중국 인민의 피를 모아 중국에서 '깨끗한 혈장'을 만들어 제약회사에 팔면, 중국 경제도 살리고, 중국 인민에게도 경제적 이익이 발생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대도시 인민을 상대로 하지 않고, 아직까지 봉건적 잔재가 많고, 농촌의 유교적 질서가 남아 있으며, 가난한 농촌 지역 인민을 대상으로 이 전략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 첫번째 대상이 바로 '허난성' 지역 인민들이었다. 1990년, 중국 정부는 허난성 인민을 대상으로 채혈센터를 구축하고, 인민들에게 '매혈'할 것을 선전했다. 말이 선전이지 지역의 공산당 간부를 통해 할당량을 정하고, 혈액을 수집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물론 매혈을 하는 인민에게는 돈을 주었다. 허난성에 있는 117개 현에는 모두 400개가 넘는 채혈센터가 설립되었고, 이곳에서 인민들의 '피'를 돈을 주고 샀다. 이른바 '매혈경제'가 시작된 것이다. 500cc를 채혈하면 50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돈은 미국돈으로 약 8달러 정도, 한국돈으로 1만원 정도가 된다. 당시 허난성의 가난한 농가가 농사를 지어 1년에 버는 수입이 200달러가 안되었으니, 채혈 한번에 8달러라면 큰돈이었다. 중국 정부는 인민 한 사람이 한달에 2회까지만 매혈을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일주일에 1회, 많게는 3일마다 한번씩 매혈하는 사람도 있었다. 채혈센터는 허난성 정부가 세운 공식 센터가 있었지만, 시골 마을에는 사설 채혈센터가 많았다. 사설 채혈센터에서는 지역주민을 직접 찾아가 채혈을 했고, 그 피를 정부 채혈센터에 팔아 중간 이윤을 챙기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이때 사설 채혈센터는 바늘과 솜, 주사바늘 등을 재활용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의 피가 섞이게 되었고, 이것이 허난성에 '에이즈'가 퍼지는 원인이 된다. 중국 정부는 매혈하는 인민에게 돈을 주었지만, 그 돈은 피를 판 대가로는 너무 적었고, 인민을 속였다. 중국 정부는 인민의 피를 모아 제약회사에 팔았는데, 정부가 마치 브로커처럼 중간에서 인민을 속이고, 인민이 받아야 할 돈을 가로챈 것이다. 1995년이 되면서 중국 의료인들 가운데 양심적 의료인들이 '매혈경제'의 진실을 밝히기 시작한다. 특히 허난성 저우커우시의 감염질환 연구자인 왕슈핑은 매혈자들이 HIV, AIDS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시와 성 보건국에 보고하지만, 보건국은 왕슈핑의 보고를 묵살하고 왕슈핑을 해고한다. 왕슈핑이 베이징에 있는 국가보건성에 다시 샘플 재조사를 의뢰하자 중국 정부는 허난성의 모든 채혈센터를 폐쇄하기 시작했다. 1999년부터 '에이즈' 환자가 발생했고, 허난성에서 매혈을 한 인민은 약 300만 명에 이르며, 이들 가운데 적게는 60만 명에서 많게는 120만 명이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중국 당국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2001년이 되어서야 공식 인정했다. 이 소설, '딩씨 마을의 꿈'은 위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촌장 역할을 하는 딩수이양 노인의 맏손자인 딩샤오창인데, 딩샤오창은 이미 죽은 인물이다. 그것도 누군가 몰래 음식에 탄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딩샤오창이 죽은 건 그의 아버지 딩후이가 마을 주민을 속이고 오로지 돈벌이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결국 딩후이는 자신이 저지른 못된 짓의 대가로 아들이 독살당하는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반면 '딩씨' 집성촌의 큰 어른인 딩수이양 노인은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인물로, 마을 주민 모두의 행복과 권리를 위해 합리적이고 공평한 태도를 유지한다. 하지만 맏아들 딩후이가 시당 간부로 일하면서 사설 채혈센터를 운영하고, 관(시신을 넣는 관)을 공급하는 사업을 독점하면서 중간에서 많은 이윤을 챙기는 걸 보면서 아들 딩후이의 태도가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하고 비판한다. 딩수이양 노인은 전통적 중국 인민의 전형이다.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깨어 있는 중국 인민이 딩수이양 노인이지만, 그는 이미 다 늙어서 힘이 없다. 즉,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고 싶어도 힘이 부족한 것이다. 반면 맏아들 딩후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은다. 중앙 정부와 성, 시에서 '채혈센터'를 설립해 '매혈경제'를 일으키자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나서서 마을 주민을 설득해 피를 팔도록 한 사람이 바로 딩후이였다. 딩후이는 90년대 이후 개혁, 개방 경제를 상징하는 '자본주의적 인민형'의 상징이며, 지방의 말단 공산당원 가운데 부패한 공산당원의 전형이다. 딩후이는 마을 주민의 피를 모아 중간 이윤을 남기고 피를 넘겼으며, 에이즈에 걸린 환자가 죽으면 성 정부에서 무상으로 지급하는 관을 돈 받고 팔아서 이윤을 챙긴다. 여기에 '영혼 결혼'을 주선하면서 양쪽 가족에게서 다시 돈을 받는 등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으는데, 그렇게 모은 돈으로 딩후이는 도시에 거대한 호화주택을 짓고, 방마다 돈다발을 가득 쌓아놓고 있었다. 딩수이양 노인은 아들 딩후이에게 마을 사람들 앞에서 절하며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말한다. 딩후이가 채혈센터를 하면서 사람들이 피를 팔고, 그러다 에이즈에 걸렸으니 마땅히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 딩수이양 노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딩후이는 오히려 자기가 채혈센터를 세워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벌도록 해주었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야 한다면서 뻗댄다. 그렇게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두 사람은 불편한 관계가 된다. 이것은 중국의 현대사에서 '공산주의적 정신'과 '자본주의적 정신'의 대립, 갈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딩씨 마을'에서 열병 환자(에이즈 환자)가 늘어나자 딩수이양 노인은 환자들을 학교로 모아 한 곳에서 생활하도록 한다. 어차피 병에 걸린 사람들은 함께 있어도 서로를 전염시킬 염려가 없으니 한 곳에 모여 생활하는 것이 식량도 아끼고, 열병에 걸리지 않은 가족과 이웃에게도 좋기 때문이다. 이렇게 환자들이 학교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딩수이양의 둘째 아들 딩량과 딩수이양의 조카며느리 양링링이 눈이 맞아 불륜을 맺는다. 이 작품에서 많은 부분을 딩량과 양링링의 이야기에 할애하는데, 작가가 두 사람의 불륜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딩량과 양링링은 각자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배우자들은 열병에 걸리지 않았고, 공교롭게 딩량과 양링링만 열병에 걸려 학교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모두 젊고, 특히 양링링은 신혼을 막 지낸, 스물네 살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인데, 곧 열병으로 죽게된다는 현실이 몹시 비극적이다. 딩량은 사촌 동생의 아내인 양링링과 불륜을 저지르지만,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동안 사회적 관습에 얽매여 있던 인간 관계가 '열병'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깨지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인습과 도덕, 염치, 예의 같은 전통적 가치보다 그들 '개인'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여기에 두 사람은 어려서 각자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여의는데, 딩량은 양링링에게 '어머니'라고 부르고, 양링링은 딩량에게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들은 부부이면서 모자, 부녀, 오누이 관계가 된다. 이 호칭이 상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서, 독자도 이 부분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도덕적 고정관념에 충격을 받는다. 딩량과 양링링은 불륜이자 부부이고, 근친상간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전통적 유교문화, 도덕관념, 봉건적 질서 등에 대한 전복적 표현이다. 두 사람은 열병을 앓는 상태에서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존 배우자와 이혼하고, 정식 혼인을 해서 부부가 된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은 진심으로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거의 동시에 숨을 거두고, 딩량의 형 딩후이는 두 사람의 장례식을 화려하게 치른다. 왕이나 쓸만한 최고급 관에 고급의 부장품을 넣어 거대한 묘를 만들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묘는 도굴당하고, 관도 파헤쳐진다. 마을 주민들은 부정하게 돈을 번 딩후이를 응징하는 방법으로 딩량과 양링링의 묘를 파헤친 것이다. 부패한 관리 딩후이의 행동은 인민에게 증오의 대상이며, 기회만 되면 딩후이는 '뒤통수에서 칼을 맞을' 운명인 것이다. 딩수이양 노인은 마을 주민들이 딩후이를 원망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자기가 봐도 아들이지만 돈에 눈이 멀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딩수이양 노인은 아들 딩후이에게 마을 주민에게 사과하고, 부정하게 돈을 모으지 말라고 경고한다. 마을 주민 가운데는 딩후이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만나면 '뒤에서 칼을 꽂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딩후이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짜증나고, 자기가 하는 일이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에게 효도하겠다는 뜻에서 딩수이양 노인을 도시에 있는 자신의 호화주택으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돈이 가득한 집을 본 딩수이양 노인은 아들 딩후이가 바른 삶을 살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딩후이는 독살당해 무덤에 묻힌 아들 딩샤오창(화자)의 영혼 결혼식을 하려고 무덤을 파헤쳐 다른 곳으로 가져가려 한다. 영혼 결혼식의 신부는 현의 당간부 딸로, 딩후이는 출세를 위해 죽은 아들까지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딩수이양 노인은 분노로 몸을 떨며 몽둥이를 집어들고 맏아들 딩후이의 뒤통수를 때려 살해한다. 그리고는 마을 주민들에게 '내가 딩후이를 때려죽였소'라고 부르짖는다. 전통적인 중국 인민인 딩수이양 노인은 자본주의의 폐해로 찌든 현대 중국인 딩후이를 살해한 것이다. 이것은 현대 중국의 모습이 중국 인민 다수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며,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 경제 도입 이후 당과 간부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나라 전체가 썩어가고 있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는 걸 뜻한다. 옌롄커의 소설은 처음 읽었다. 그의 작품이 한국에 거의 모두 번역되어 있는 것도 이번에 알았는데, 이 소설 '딩씨 마을의 꿈'을 읽고, 옌롄커의 소설이 중국에서 판매금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다. 옌롄커의 소설은 그 이전 작가인 모옌의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 모옌도 중국현대사에서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입장이긴 해도, 중국 인민의 위대함, 중국공산당의 긍정적 면을 그리고 있는데, 옌롄커의 작품은 특히 현대 중국의 상황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어서 경직된 중국 정부의 권력자들에게는 몹시 불편한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예롄커의 작품은 현대 중국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는 새로운 형식의 문학이다. 그의 작품은 앞선 세대가 그린 '위대한 중국', '위대한 인민'의 뿌리는 잃지 않으면서,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중국공산당원의 부정, 부패, 정책의 오류, 경직된 제도, 권력의 남용, 자본주의 경제 도입 이후 발생하고 있는 심각한 빈부격차 등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현대 중국문학의 특징은 일당독재인 중국공산당 체제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혼재해서 발생하는 모순과 갈등을 중국현대사의 비극적 상황과 씨줄과 날줄로 엮어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데 있다. 위화의 '형제'도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인데, 중국 문학이 세계문학에서 차지하는 독특하고 고유한 위치도 중국의 이런 비대칭적 구조이기에 가능하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세월의 설거지
    세월의 설거지 안정효 작가와는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세월의 어느 지점에서 인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안정효 작가 고향은 서울 마포구 공덕동 434번지인데, 내 고향은 공덕동 432번지였다. 번지수만 보면 이웃이다. 다만 안정효 작가는 나보다 꼭 스무살 연상으로, 거의 한 세대에 가까운 어른이다. 그의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마포가 배경이며, 고등학교 시절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안정효는 이미 중학 1년 때부터 영화광이었으며, 그의 삶에서 영화는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도 '유명한 번역가'에서 출발해 '실천문학'에 연재된 '전쟁과 도시'를 읽으면서였다. 안정효는 이미 대학생 때부터 영어를 잘 하기로 유명한 학생이었고, 졸업하기 전에 이미 영자 신문사에 취업했다. 그는 번역을 업으로 삼기 전인 학생 때 영어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소설을 미국에서 출판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여러 번 미국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며 작품 출판을 시도했으나 결코 쉽지 않았다. 이 책 '세월의 설거지'는 안정효의 자서전이다. 다만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자신을 대상화한 것은 상황을 보다 객관으로 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짐작했다. 1인칭 '나'로 이야기를 풀어가다보면 직접 말하기 괴로운 장면이 많고, 뒤로 갈수록 자기 자랑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완화하는 방식이 3인칭 서술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안정효는 1941년에 태어났으니 해방과 전쟁을 어릴 때 겪었다. 어릴 때 겪은 전쟁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그의 가족이 마포에서 안양으로, 다시 할머니가 계시는 소사(부천)에서 전쟁을 겪고 집(마포)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어린이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작가의 가족은 전쟁 때 불에 탄 집을 아버지가 스스로 지었으며, 가게를 서너 개 만들어 세를 놓을 정도였다. 그 동네에서는 그나마 사는 형편이 나은 가족이었다. 전쟁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1950대 중반부터 작가의 집은 부자는 아니어도 굶지는 않는 생활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내용은, 작가의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석공으로 일하러 다녔는데, 석공이 쓰는 연장을 벼르는 대장간을 집에 설치해 놓을 정도였다. 집도 직접 지을 정도로 손재주도 좋은 작가의 아버지는 성실하고 재주 있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어느 순간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아버지가 된다. 나도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을 자주 보면서 자랐다. 두 사람은 육탄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동네가 떠들썩하게 욕설이 난무하고, 집안의 살림이 날아다녔다. 그래도 아버지는 점잖은 편이고, 어머니를 때리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비난했으며 그럴만한 이유도 충분했다. 어릴 때 부모가 싸우는 장면만 보고 자란 나도 트라우마가 생기는데, 아버지의 일방적 폭력을 겪어야 했던 작가의 어머니와 자식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함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문제는, 작가의 아버지가 아내를 구타하는 시기가 아이들이 어릴 때만이 아니라 자식들이 모두 자라서 청년이 되었을 때도 여전했다는 것이다. 자식이 어릴 때는 아버지의 권위와 물리적 폭력에 저항하기 어렵다고 해도, 청년이 된 상황에서 아버지의 폭력을 저지할 수 있었음에도 여전히 어머니는 폭력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부부싸움을 하던 아버지에게 대든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었고, 아버지는 무능했다. 나는 어머니 편에서 아버지를 비난했고, 아버지를 증오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작가의 아버지에 비하면 더 없이 선량한 인간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거의 대부분은 작가의 글쓰기와 관련한 내용이다. 작가는 중고등학생 때는 만화를 그렸고, 대학생이 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다재다능하고 머리 좋은 인물이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지망할 계획도 있었지만 친구의 권유로 서강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해서는 곧바로 영어를 다른 친구보다 월등히 잘 하는 학생이 되었다. 영어를 잘 하는 것으로 작가의 삶은 큰 줄기가 결정되었다. 영어를 잘 했기 때문에 영자 신문사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브리태니커 편집부장이 되었으며, 한국 최초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마침내 자기 소설을 미국에서 영어로 출판하게 되었다. '하얀 전쟁'과 '은마'가 미국 소호출판사에서 출판되고, 영어권에서 호평을 받은 것은 물론, '뉴욕타임스'의 서평란에 큰 지면으로 소개된 것은 한국작가 가운데 안정효 작가가 최초다. 하지만 이런 기록도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높이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때가 전두환 군부독재 시기라는 특성도 있었으나, '번역가 안정효'를 '작가 안정효'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고 본다. 작가 안정효는 50세 이후부터 창작 활동이 더 활발했다. 그의 작품은 한국문학에서 의미 있는 부분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가 너무 유명한 번역가로 알려진 것이 오히려 '소설가'로 진입하는 장벽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문학사에서 작가 가운데 영어를 뛰어나게 잘 하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그 가운데 최고가 안정효 작가가 아닐까. 과거 남조선 노동당원이자 미군정에서 근무했던 설정식도 영어를 잘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는 너무 짧은 삶을 살았고, 미국에서 영어를 배우지 않은 한국인이 직접 영어로 쓴 소설로 미국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안정효 작가가 아직까지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해방과 전쟁을 겪은 세대이며, 폐허인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과정을 직접 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고, 가난하던 시기에 대학을 다녔으며, 당시 한국 문학, 문화계의 첨단을 달리는 소수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삶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하게 기록된 생생한 기록이며, 그 자신이 이룬 많은 성과 역시 우리 문화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 자서전은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개인의 삶이자,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견이며, 한국문학과 영문학의 화학적 결합을 목격하는 현장이고 한국문학이 나갈 미래를 보여준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인간의 마음 - 에리히 프롬
    인간의 마음 - 에리히 프롬 한글 학교에 다니는 큰누나를 위해 쓰지 않고 모아 둔 공책(노트)를 정리하다 오래 된 노트에서 발견한 자료. 대략 35년쯤 전에 쓴 노트다. 에리히 프롬의 책을 읽고 정리한 내용인데, 한때 이렇게 꼼꼼하게 정리한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군 복무를 할 때, 30개월 동안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휴가나오면, 집에서 더블백에 책을 담아가서 다 읽고, 다시 나올 때 책을 짊어지고 나오기를 반복했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 행정병이어서,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고, 책 읽을 시간이 다른 병사보다는 조금 더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행정사무실(군수과)에서 혼자 있을 때,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심지어 판화도 찍고, 그림도 그렸다. 거기에 좋은 동기들이 있어서 나는 다행히 군대 트라우마는 거의 없는 편이다. 이 노트도 군대 있을 때였거나 그 직후일 때 쓴 내용이다. 이제 스캔했으니 원본은 다 버리고, 줄이고, 정리할 일만 남았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환각 - 올리버 색스
    환각 - 올리버 색스 올리버 색스의 책은 그의 자서전 '온 더 무브'를 가장 먼저 읽었다. 그의 삶 자체가 상당히 드라마틱하고 흥미롭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다큐멘터리 '올리버 색스, 그의 생애'를 통해 큰 줄기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는데, 이 책 '환각'은 그가 마지막으로 쓴 책이기도 하다. 수많은 환자들의 병력을 기록하면서, 올리버는 환자들의 증세와 실제 병명이 다르다는 걸 자주 발견하게 된다. 비슷한 증상처럼 보이는 병에도 원인이 사뭇 다르고, 질병의 부위, 정도에 따라 발현하는 증상이 다르게 나타나며, 환자 자신은 병리학적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의사가 환자를 깊이 관찰하고, 면담하고, 병증을 검사하면서 근본 원인을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뇌 기능에 이상 증상이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병증을 기록한 것으로,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환각'을 다루고 있다. '환각'은 어떤 경우든 뇌의 특정 지점에서 발생하는 전기적 작용의 결과물이다. 뇌과학의 발달은 지금까지 인류가 믿었던 모든 불가사의, 초자연 현상, 귀신, 유령, 신의 존재, 임사체험, 천국과 지옥, 악마 등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올리버는 이 책에서 열 다섯 종류의 환각 체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간의 뇌는 매우 섬세하게 발달해서, 뇌의 특정 부위가 조금만 비정상적 자극을 받으면 곧바로 반응한다. '샤를보네 증후군'의 경우, 시각을 잃은 환자들이 보게 되는 환각으로, 실재 사람과 사물을 보는 것과 똑같은 환각이라고 한다. 시각을 잃어도 뇌는 이미지를 처리하려는 관성이 남아 있어서, 뇌에서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이때 이미지는 환자의 경험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즉 무작위로 이미지가 생성되며, 환자는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과 풍경 이미지를 보게 된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감각을 차단하면 환각, 환청, 환시를 보게 되는데, 이런 실험을 통해 실제 실험자들은 다양한 경험을 기록했다. 이때, 실명을 하지 않고도 단지 눈을 오래 감고만 있어도 '샤를보네 증후군' 현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망망대해를 오래 항해하는 선원, 사막을 건너는 모험가 등은 주위의 단조로움 때문에 환각을 볼 수 있다. 없는 냄새를 맡는 '후각 환각'도 있는데, 후각을 상실하거나 시각을 상실한 경우에도 후각 환각을 느끼게 된다. 환청은 정신질환을 앓지 않는, 정상인에게도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환청은 사람의 목소리, 음악 소리, 각종 기계음-초인종, 벨소리 등-처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다양한 원인으로 기인한다. 여러 종류의 마약, 간질 발작, 어릴 때 만나는 환영 등 무수히 많은 경우에 따라 사람은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보게 된다. 뇌의학은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면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를 알아가는 단계에 있고, 상당히 진전한 연구들이 발표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이런 면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동물도 꿈을 꾼다는 건 알려졌다. 하지만 인간처럼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면서 환각, 환영, 환청, 환후각 등을 경험할까 하는 것인데, 동물에게 마약 실험을 하면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 궁금하다. 동물은 지각이 없기 때문에 기억(인간처럼 저장된 기억)도 없으며, 시간의 순서를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동물에게는 환각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이런 다양한 뇌 반응이 나타나는건, 인간이 그만큼 복잡하면서 불완전하게 진화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진화 단계에서 동물과 똑같은 감각 반응만 있었다. 진화 단계에서 직립 보행, 도구 사용, 불의 사용과 익힌 음식의 섭취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류는 빠르게 변화했고, 외부의 위협과 자극에서 살아남는 과정에서도 운동 반응과 개념 같은 고차원 작용이 발생했다. 기억과 시간의 개념이 만들어지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인류는 '말'을 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뇌는 다른 신체부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뇌가 커지면서 저장하는 정보의 양도 많아지고,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인류의 감각 기관은 초기에 청각(소리)에 가장 크게 의존했으나 점차 시각(이미지)으로 옮겨가면서 청각과 후각 기능은 발달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시각이 발달했다. 이때 시각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서, 뇌는 시각 정보(이미지)를 분류해 비슷한 것들끼리 묶어서 범주화한 다음, 한꺼번에 인지하게 된다. 이런 범주화는 뇌의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려는 것과 정보 처리 속도를 빠르게 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인 알츠하이머, 파킨슨증, 뇌졸증, 치매 같은 병은 모두 뇌의 이상에서 발생하는 질병이다. 인류는 이제 암을 거의 극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암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 많은 데이터를 축적했고, 암세포만 죽이는 표적 약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뇌과학은 현대 의학과 과학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고 있는데, 뇌는 의학은 물론 심리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게 밝혀졌다. 뇌의 발달은 진화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분야이며, 정신분석학, 심리학과 더불어 인류 과학의 미래 영역이다. 올리버 색스는 이런 뇌과학 분야에서 가장 알려진 저자이며, 그 자신 환자들과 직접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찰한 결과를 정리해 대중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 뇌과학이 널리 알려지면 불필요한 미신이나 우상, 신, 귀신, 망령, 유령 같은 비합리적 존재의 발생 원인을 알 수 있게 된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모비 딕' 원작소설과 그래픽노블
    '모비 딕' 원작소설과 그래픽노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 한국에서 완역해 출판한 것은 2011년이다. 그 전까지 출판한 책은 전부 일본어 중역이거나 축약본이었다는 말이다. '완역본'이 출판되는 건 그 나라의 경제 수준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출판의 양과 질적 수준에 있어 한국출판계는 2000년 이후 그 전과 차원이 다른 도약을 했다고 본다. 출판하는 책의 수준이 높아진 것은 물론, 다양성, 깊이, 완성도 등 모든 면에서 출판계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더 나은 출판을 위해 노력한 출판인들의 피땀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한다. '모비딕' 완역본은 7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다. 그것도 19세기 영어로 쓴 소설로, 미국 낭만주의 소설의 걸작 가운데 하나였지만, 100년 동안 인정받지 못한 '저주받은 걸작'이었던 소설을 완역한 것이다. 19세기 소설의 특징은 소설의 길이와 문장이 길고, 설명하려 들며, 백과전서식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찰스 디킨스부터 도스또예프스키 심지어 카프카까지도 만연체 문장을 쓰고 있다. 허먼 멜빌은 그가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는데,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소설에 반영하고 있다. 그는 포경선에서 일반선원으로 일했고, 해군에서도 복무했으며, 남태평양의 섬으로 탈출해 식인 원주민들과도 생활한 경험이 있다. '모비 딕'에서도 관찰자이자 기록자인 이스마엘('이슈메일'이지만 구약에 나오는 이름이어서 '이스마엘'로 쓴다)이 선원이 되고자 뉴욕 넨터컷에 도착한 때부터 '피쿼드'호의 선원으로 계약하고 배가 출항할 때까지 무려 21장(142페이지)을 할애한다. 경장편 소설 한편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는 '고래'에 관한 사전적 기록과 여러 문헌에서 발췌한 고래의 기록을 보여준다. 그가 고래에 관해 공부하고, 참조한 자료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모비 딕'은 고래 '모비 딕'과 그를 쫓는 에이해브 선장의 집념을 그린 작품이다. 형식적으로는 바다, 고래, 선장, 선원, 뱃사람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 작품의 알레고리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번역자 김석희도 썼지만, 이 작품은 기독교 구약성경의 인물들을 차용하고 있다. 허먼의 집안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 집안이라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허먼이 사용한 등장 인물의 이름은 물론, 배 이름 '피쿼드'호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하녀 하갈에게 태어난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하녀 하갈과 통정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이스마엘'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게 되자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나 사막으로 간다. 사막에서 천사를 만난 모자는 이후 번성한다는 약속을 받고, 이스마엘은 현 아랍인의 조상이 되며, 이슬람의 쿠란에서도 초기 선지자로 기록하고 있다.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 역시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인데, 소설 속에서 '에이해브'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그의 부모가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었다고 한다. '에이해브'는 구약성경의 '열왕기'에 나오는 '아합'의 영어 이름인데,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왕이면서, 유대민족이 섬기는 신이 아닌, '바알'신을 섬기고 있었다. 결국 '아합'은 전쟁터에서 부상 당해 죽는다. '피쿼드'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이름이다. 유럽에서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한 이후 불과 14년이 지난 1637년, 백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 최초의 전쟁이 발생했고, 백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서쪽으로 진출했는데, 그때 가장 먼저 절멸당한 부족이 '피쿼드' 부족이었다. 수천 명의 피쿼드 부족을 단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고 학살한 것은 백인들과 다른 인디언 부족이다. 허먼은 이런 백인의 범죄를 어떻게든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고, 자신의 작품 속에 '피쿼드'라는 이름을 새겼다. 원작 소설에서 허먼은 등장하는 주요 인물에 대해 자세한 묘사와 설명을 한다. 1인칭 화자인 '이스마엘'의 시각으로 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까이 지낸 '키퀘그'는 남태평양의 섬에서 온 '식인종'으로 그려지지만, 뛰어난 작살잡이인 키퀘그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같은 점이 많다. 1등 항해사 '스타벅'은 성실하고 이성적인 인물로, 다혈질이자 복수에 불타는 에이해브 선장이 전적으로 믿는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의 커피 회사 '스타벅스'는 바로 1등 항해사 '스타벅'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허먼은 소설에서 '고래학'이라는 소제목으로 고래에 관한 백과사전식 정리를 하고 있는데, 곳곳에 당시의 통계와 구체적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소설은 많은 부분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데, 미국의 포경업, 포경선의 구체적인 항해와 고래잡이, 향유고래를 잡아서 해체하고, 기름을 끓이고, 그렇게 모은 향유고래 기름을 팔아서 돈을 버는 구조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때, 포경선의 선주, 선장, 선원이 나누게 되는 수입의 비율부터, 포경선이 한번 출항할 때 드는 비용과 벌어들이는 수입의 총액으로 정상적인 포경선이 수십 명의 선원과 함께 고래잡이를 하고 돌아오면 적어도 몇백만 달러를 벌게 된다는 포경업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이 소설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19세기 낭만주의 소설의 특징인 만연체와 길고 장황한 설명 때문이지만, 서사가 단조로운 것이 더 큰 이유다. 700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이지만, 이스마엘이 키퀘그를 만나서 포경선에 올라 항해를 하고, 고래를 잡으러 가는 과정과 모비 딕을 만나 마지막 결투를 벌이는 것이 전부다. 그 과정에서 선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즉, 인물들이 거의 대부분 평면적이고 발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로써의 한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토프 샤부테의 그래픽노블 '모비 딕'은 원작 소설과는 다른 작품이다. 원작의 서사를 가져오되, 19세기의 풍경을 상상이 아닌, 실재 이미지로 재현한다. '모비 딕'을 읽는 독자는 원작에서 오로지 모든 풍경과 인물을 상상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그래픽노블 '모비 딕'에서는 작가 샤부테가 재현한 이미지 속에서 인물과 서사를 따라가기만 하는 편안함이 있다. 원작 소설과 그래픽노블은 서로 완전히 다르면서,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원작 소설에서 길고 장황한 묘사와 서술은 그래픽노블에서 몇 컷의 이미지로 설명한다. 소설에서 중요한 장면들이 그래픽노블에서 선택되며, 주요 인물의 운명을 쫓아간다. 그래픽노블 '모비 딕'만 읽어도 큰 줄기에서 서사는 이해할 수 있지만,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의 풍요로움은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두 작품은 서로 보완의 관계이며, 두 작품을 다 읽는 재미가 있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이윤길의 시집 두 권
    이윤길의 시집 두 권 주문진, 파도 시편 지금은 아니지만, 30년 전쯤, 한때 '시인'이라는 '것들'을 경멸한 적이 있었다. 내가 소설을 써서 그런 것은 아니고, 내 주변에 서성거리던 자칭 '시인'이라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덜 떨어지고, 현실 감각도 없었으며, 비루하고, 남의 눈치나 보며 살던 수준 낮은 인물들이었던 까닭이다. 그들이 끄적이던 '시'라는 것도 건강하지 못했으며, 밤낮 서로 몰려다니며 으슥한 술집에서 마담 몸이나 더듬는 파렴치한 종자라고 - 그들의 말을 들어 - 여겼기 때문이다. 더 역겨웠던 건, 그들이 '시'를 쓴답시고 예술가, 작가를 자처하며 자기들끼리 '아무개시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이름 없는 잡지에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시로 '등단'했다고 명함에 '시인'이라고 명토박아 다니는 꼴불견이었다. 그때 이미 문단에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무려 5만 명이 넘었는데, 동네 개가 물고가도 모를 만큼 길거리에 널린 것이 소위 '시인'들이었다. 이들 자칭 '시인'들의 특징이 있는데, 남자들은 도리우찌를 쓰고, 스카프를 목에 감았으며, 여자는 짙은 화장에 선글래스를 쓰고 다녔다. 전형적인 룸펜프롤레타리아와 유한마담이었으며, 그런 인식이 나에게 너무 강하게 들어박혀, 지금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이런 고정관념이 생기기 전까지, 나는 한동안 노동시를 썼으며, 노동운동과 노동문학 쪽에서 피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에, 뜬구름 잡는 언어유희나 해대는 룸펜프롤레타리아와 유한마담의 '시'라는 것이 몹시 역겨웠고, 거슬렸다. 물론, 그때도 이미 존경하는 시인들은 여럿 있었고, 그들의 시집은 지금도 내 의자에서 가장 가까운 책장에 꽂아놓고 틈틈이 읽는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시인'의 언어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시는 소설과 달라서, 문학을 모르는 사람은 '시'를 우습게 생각하기도 한다. 시는 짧은 글이고, 누구나 적당히 끄적이면 시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는 문학의 정수다. 소설처럼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독자의 심장을 찌른다. 시인이 쓰는 언어는 날카롭게 벼린 무기이며, 언어의 칼로 독자의 마음을 베는 것이다. 정지용, 이육사, 신동엽, 김수영, 김남주, 신경림 같은 시인이 위대한 것은, '언어'를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깃발처럼 휘날리며 죽어야 하는 운명이다. 시인이 시 쓰기를 포기하는 순간, 그의 운명 역시 소멸한다. 박노해, 김지하가 시를 쓰지 않으면서, 살아 있어도 이미 죽어버린 존재가 된 것처럼. 이윤길은 '시를 쓰는 뱃사람'이 아니라, '뱃사람으로 살면서 시를 쓰는' 사람이다. 즉, 머리(관념)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몸(현실)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의 시는 모두 노동시이자 생활시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현실 같은 원양어선의 현실, 남극바다와 유빙, 지구의 종말이 온 듯한 폭풍우와 파도를 직접 겪으며, 땀방울과 눈물로 얼룩진 손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새긴 것이 '파도 시편'이다. 60편의 시에는 한결같이 '파도'처럼 철썩이는 삶이 담겨 있다. 파도는 '어머니 눈물들(파도 9)'이며, '나의 참혹한 무덤(파도 12)'이다. 이윤길에게 삶은 '파도 넘어가는 뱃머리가 무저갱(파도 35)'이며, '시퍼런 악귀(파도 42)'다. 그는 배를 타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녔다. 바다는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은 '지구'가 아니라 '수구'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바다의 별에서 그는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다, 바닥이 단단한 땅을 딛으면 오히려 몸이 기울어지는 배사람이다. 그에게 땅(육지)은 다시 바다로 돌아가기 위한 임시 기착지이며, 중간 기항지이자, 불안정한 삶의 근거지다. 그 역시 거의 모든 사람처럼, 땅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의 고향은 바다다. 그가 태어난 주문진은 땅이라기 보다는 바다이며, 바다에 기대어 살고, 바다에서 주는 것을 받아먹으며 산다. 그의 기억은 땅보다는 바다에 더 가깝고, 그의 발길은 항구와 방파제와 일렁이는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배들로 향한다. 주문진 어항, 골목, 낮은 담장, 낡은 건물들 모두 그의 기억과 함께 하는 고향이다. 그는 가난한 고향의 배고픔과 고생을 기억하며, 세월이 흘러 달라진 주문진의 향수를 추억한다. 한번 바다로 나가면 몇 년씩 돌아오지 못하는 고향, 파도와 폭풍우와 빙하와 물고기와 처절한 싸움을 겪고 탈진해 돌아온 고향은 조금씩 달라지고, 그는 주문진이 달라지는 만큼 외로워진다. 시인은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하는 운명이다. '모비딕'에서 이스마엘이 에이해브 선장의 최후를 목격하고, 기록한 것처럼. 이윤길은 파도에 담긴 선원의 삶을 기록하고,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의 풍경을 기록한다. 그것은 누구도 모르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대개의 사람에게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겠지만, 이윤길에게는 그것이 곧 삶이고, 눈물이고, 감동이기 때문이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깊이에의 강요
    깊이에의 강요 [좀머 씨 이야기]를 발표하고 5년 뒤인 1996년에 발표한 이 작품의 원제목은 [세 가지 이야기와 하나의 명상]인데, 한국에서는 [깊이에의 강요]로 출간했다.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그리고 '...그리고 하나의 고찰'이 각 작품의 제목이다. '깊이에의 강요'는 예술가와 평론가의 관계를 보여주지만, 본질에서는 작가의 자존감에 관한 내용이다. 전시회를 하는 젊고 재능 있는 작가에게 평론가가 칭찬의 말을 하면서 마지막에 '그렇지만 깊이가 조금 부족하다'는 말을 한다. 평론가의 말은 신문의 기고문으로도 실리고, 그 신문을 본 사람들은 젊고 재능 있는 작가를 볼 때마다 작품이 훌륭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렇지만 깊이가 조금 부족하다'는 말을 작가 뒤에서 은밀하게 주고 받았다. 작가는 그 말을 듣고 자기에게 '깊이'가 없다는 걸 느끼고, 어떻게 하면 '깊이'가 생길까를 고민하고, 공부하지만, 정작 '깊이'가 무엇인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작가는 창작을 멈추고, 자신에게 '깊이'가 없다는 것에 절망한다. 작가는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결국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젊고 아름다우며 재능 있는 작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악의적인 평론일까. 표면으로는 작가가 평론가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왜 평론가의 말에 그렇게까지 집착해야 했을까. 작가가 특별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누구나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들은 한 마디 말이 평생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는데, 작가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고 본다. 이 작가는 평론가의 말을 듣고, 마지막 문장이 불쾌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렸을 수 있겠지만, 그걸 무심하게 넘겼어야 했다. 대부분의 말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거나, 부식되어 사라지기 마련이다. 작가가 평론가의 마지막 문장을 되새기는 건,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것처럼, 하나의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창작하는 예술가에게 '깊이가 없다'는 말처럼 치명적인 말은 없지만, 단지 한 사람의 평론가가 한 말이 절대적일 수 없고, 때로 많은 사람들은 '깊이가 없는' 작품을 선호하기도 한다. 작가는 분명 창작의 영혼에 상처를 입었고, 다른 어떤 말로도 그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다. 평론가는 자기가 느낀대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 것이고, '깊이'를 극복하지 못한 건 온전히 작가의 의무이므로,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작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고, 작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다. '승부'는 길거리에서 동네 사람들이 하는 체스판의 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동네 정자에 노인들, 아저씨들이 모여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면서 시간을 보내는 그런 장소처럼, 시골 마을 광장 한쪽에 있는 정자에서 막 체스 경기가 시작되는데, 한 노인은 마을 주민으로, 마을에서는 이길 사람이 없는 고수였고, 상대방은 젊은 사람으로,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그가 체스의 고수를 넘어 천재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두 사람을 둘러싼 마을 주민들 - 거의 다 아저씨거나 노인들이고, 체스 고수 노인이 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 이 두 사람의 체스 경기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마음으로는 낯선 청년을 응원한다. 수십 년, 마을 최강자로 군림한 노인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청년은 처음부터 예상하지 못한 수를 두며 고수 노인을 당황하게 만든다. 거침 없는 행보와 도발적인 행마, 좌충우돌하는 청년의 말들이 체스판을 날뛰고, 고수 노인은 청년의 공격을 막는 한편, 허점을 찾느라 골몰한다. 청년의 공격은 무모했으나, 그를 지켜보는 마을 주민들도, 고수 노인도 청년에게 무언가 감추고 있는 최후의 필살기가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체스판 위에 청년의 말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킹, 퀸, 비솦만이 남은 상태에서, 청년은 킹을 쓰러드리고 자리를 떠난다. 실망한 마을 주민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고수 노인만 남아 체스판을 챙기며, 청년과 두었던 체스를 머리에서 복기한다. 노인은 청년의 당당한 태도에 주눅들고 겁먹었다. 청년은 체스 천재가 아니고, 초심자에 불과한 실력이었는데, 노인은 단지 상대의 태도만 보고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노인은 지나치게 신중했고, 상대의 의중을 읽지 못했다. 체스는 이겼으되, 그는 청년에게 졌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는 체스를 두지 않겠노라고 결심한다. 이 작품은 '깊이에의 강요'와 비슷한 맥락이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상대방 또는 주위의 시선에 경도되거나 매몰되어 자신을 지키지 못한 노인의 이야기다.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깊이에의 강요] 주인공이 재능 있는 작가라는 것과 같지만, 노인은 시골 마을의 고수일 뿐, 자신의 실력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기에, 외부에서 온 청년의 실력을 모르면서 고수일 거라고 믿는다. 외부로부터 인정을 받아야한다는 강박이 노인을 겁에 질리게 만든 것이다.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중세를 배경으로, '픽션 히스토리'를 만든 작품이다. 작가의 특기이자 전공이기도 한 중세역사는 이미 그의 전작 [향수]에서 탁월하게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말하자면 '중세식 농담' 같은 작품이다. 장인 뮈사르는 금은 세공으로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사람으로, 나이 들어 시골에 장원을 꾸미고, 여유로운 노후를 즐기려는 성공한 인물이다. 그가 정원을 손질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조개로 인해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다른 지역에서도 돌조개가 발견되는지 확인하다, 나중에는 지구 표면 전체가 돌조개로 뒤덮여 있으며, 인류는 머지않아 돌조개로 뒤덮여 멸망할 거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뮈사르가 발견한 돌조개는 명백히 메타포(은유)다. 세상이 돌조개로 뒤덮인 것은 메말라가는 세상의 풍속과 인심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점점 경직되고, 보수적으로 변하고, 각박해지는 것을 두고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돌조개가 생기면서 즉 돌조개병이 들면서 몸과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돈도 많고, 명예까지 얻은 뮈사르가 이런 병에 걸렸을까.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고, 가난한 금세공사에서 수많은 하인을 부리는 영주가 된 사람이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누리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뜨게 된 걸까. 뮈사르는 '실존적 존재'에 관해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는 개인과 자아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이론적, 논리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못한 시기였고, 개인의 존재론적 고민, 존재의 철학적 고민에 관해 깊이 있는 공부나 토론을 할 수 있는 바탕이 거의 없었다. 뮈사르는 가난하게 자라서 많은 고생을 하고, 금공예사가 되어 귀족들, 왕족들을 위해 일하며 큰돈을 벌었고, 신분 상승을 위해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그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면서는 귀족들과 연회를 주최하면서 다양한 지식과 토론을 위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악착같이 노력한 덕분에 그는 귀족들도 인정하는 부와 명예를 갖게 된 것이다. 뮈사르는 자신의 삶에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졌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성공한 그의 삶에서도 만족하지 못한 것이 '실존적 고민'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존재하며, 자기가 성공한 이유가 단지 자신의 노력만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는 '인간들'의 계급적 분리, 빈부의 격차,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사는 농도들과 삶을 낭비하는 귀족, 왕족들을 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의문에 접근한다. 하지만 그때까지 누구도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은 없었고,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었다. 뮈사르에게 돈과 명예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의문과 질문에 답을 얻으려 세상 곳곳을 다녔고, 노력했으나 결국 아무 성과도 없었다. 그는 절망했고, 살아간다는 것이 더 이상 의미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고찰'은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인데, 글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게 공감할 내용이다. 범위를 좁혀서, 글 쓰는 사람들은 적어도 어려서부터 지금 - 50대 - 까지 많은 책을 읽었다. 그런데 어떤 책을 읽었다는 기억만 있을 뿐, 그 책의 내용은 대부분 잊어버린다. 책을 읽을 때는 기억해야 하거나, 참조해야 할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 그 옆 여백에 메모도 한다. 그렇게 책을 읽어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는다. 세월이 많이 흘러 우연히 책장을 보다 어떤 책 - 잊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했지만, 예전에 퍽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한 책 - 을 꺼내 읽다가 누군가 밑줄을 그은 구절을 발견한다. 그 옆의 메모도 본다. 그리고 그게 바로 자신이 오래 전에 했던 밑줄과 메모라는 걸 떠올린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은 스러지고, 우리가 읽고, 배운 것은 형해화한다. 그러므로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작가는 외친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좀머 씨 이야기
    좀머 씨 이야기 이 작품은 전작 [비둘기]를 발표하고 다시 3년이 지나서 발표한 작품이다. 제목과 달리 주인공은 소년이다. 소년의 눈으로 본 '좀머'라는 중년 남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나'는 열 살 무렵부터 열여섯 살까지 자신의 성장 이야기와 좀머 씨의 삶을 단편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쟁이 끝난 직후, 1945년 이후의 독일 작은 도시의 마을에서 보이는 평범한 풍경도 좋고,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는 소년의 이야기도 담담하면서 따뜻하다. 독일은 패전국이었으나 빠르게 경제를 회복하고 있었다. 소년은 나무타기를 좋아하고, 호수 가장자리 숲에서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 나이 또래에는 동무들끼리 어울려다니며 말썽도 부리고, 또래 집단에서 사회성을 키워야 하지만, 소년의 생활은 오히려 단조롭고 외로워 보인다. 그것이 소년 자신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또래 집단에 낄 수 없는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소년의 처지와 좀머 씨의 행동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둘이 모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 누군가의 방해를 받기 싫어한다는 것, 혼자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소년에게는 다섯 살 많은 형도 있고, 누나도 있었다. 그럼에도 소년은 늘 혼자 다닌다. 소년의 가족이 딱 한 번, 빗속을 걸어가는 좀머 씨를 태워주려 했으나, 좀머 씨는 '그러니 그냥 날 좀 내버려 두시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 일을 두고 소년의 가족은 좀머 씨가 '밀폐공포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몸에 경련이 일어나 걸을 때만 경련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항상 걷는 거라고 말한다. 좀머 씨가 마을에 들어온 것은 전쟁이 끝난 직후니까 1945년 하반기나 1946년 무렵이겠다. 좀머 씨는 아내와 함께 작은 방을 빌려 살았고, 살림은 아내가 책임지고 했다. 좀머 씨는 날마다 도시와 호숫가를 걸어다녔는데,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좀머 씨는 아마 독일군으로 복무했고, 패전하면서 소련군이나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풀려났을 수 있다. 아니면,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그가 극심한 PTSD(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를 겪는 사람일 수 있다. 군인이 아니었다면, 그가 전쟁 기간 가족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어떻든 그는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고, 오로지 혼자 떠돌아 다닌다. 사람들은 좀머 씨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지만, 모두 뜬소문일 뿐, 누구도 좀머 씨에 관해 아는 사람은 없다. 소년은 성장하고, 애틋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안타깝게 놓치고, 엄마의 자전거로 자전거를 배우고, 괴팍한 할머니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조금씩 성장한다. 그 사이, 소년은 몇 번 좀머 씨를 가까이 볼 기회가 있었다. 거리에서, 숲속에서, 호수에서. 하지만 단 한 번도 좀머 씨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좀머 씨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아예 말을 붙이지도 못하게 늘 바쁘게 걸어다녔다. 소년은 짝사랑하는 카롤리나에게 차이고 나무 위에 올라가 떨어져 죽으려 작정하는데, 마침 좀머 씨가 숲속으로 들어오는 걸 발견한다. 그렇게 소년은 좀머 씨의 출현으로 죽으려는 마음을 고쳐먹었고, 이후에도 거리에서, 호숫가에서 늘 바쁘게 걸어다니는 좀머 씨를 발견한다. 좀머 씨는 마을 주민들에게 일상이자 풍경이며, 습관이다. 어디에서나 좀머 씨는 발견되지만, 누구도 좀머 씨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없다. 좀머 씨는 존재하지만 또한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다. 좀머 씨에게 생활은 있었을까. 아내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집안 일을 하고, 장작을 쪼개거나 석탄을 나르고, 삐걱거리는 가구를 수리하고, 라디오를 들으며 흥얼거리는 따위의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은 좀머 씨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좀머 씨는 살아 있지만 동시에 죽은 존재다. 소년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마을에는 텔레비전을 들여 놓은 집이 많아지고, 부자들 몇몇은 이미 자가용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소년은 형의 자전거를 물려 받아 선수처럼 잘 타게 되었고, 소년의 삶도, 소년 가족 모두의 삶도 평범하지만 평온하고 행복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좀머 씨를 풍경처럼 인식하던 어느 날,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 소년은 밤길을 자전거로 달리다 체인이 벗겨져 수리를 하고, 손 닦을 낙엽을 주으러 숲으로 들어가다 호숫가에 서 있는 좀머 씨를 발견한다. 좀머 씨는 망설임 없이 호수 가운데로 걸어들어가고, 소년은 그 장면을 끝까지 지켜본다. 그리고 좀머 씨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돌고, 경찰이 수배 전단지를 돌리고, 수소문을 하지만, 누구도 좀머 씨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소년만 제외하고. 소년은 좀머 씨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소년 자신도 왜 그래야 했는지 분명하게는 몰랐지만, 좀머 씨의 마지막 모습을 말하는 것은, 좀머 씨를 모욕하는 거라고 느꼈다. 좀머 씨는 자신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소년은 머리보다 마음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면서 소년도 성장한다. 몸 뿐아니라 마음도. 이 작품은 소년의 성장 소설이면서, 독일 현대사의 비극을 몸으로 안고 살아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좀머 씨의 삶에는 비극적인 독일현대사가 있으며, 좀머 씨는 비극적 운명 속에 스러져간 이름 없는 한 인간이었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비둘기
    비둘기 [콘트라베이스](1981년)를 이어 장편소설 [향수](1985년)를 발표하고 3년 뒤 발표한 작품. 30년 동안 정확하게 집과 직장만 오가며 생활하던 조나단 노엘에게 어느 날,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 문앞에 비둘기가 앉아 있던 것이다. 이 상황이 왜 이상하느냐고 묻는 건 당연하지만, 조나단에게는 일생일대의 위기가 된다. 조나단은 50대 중반의 사내로, 파리 시내의 한 은행의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20대에 군복무를 마치고 은행에 저금해 둔 돈을 모두 꺼내 파리로 오기까지, 그의 삶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어느 날 갑자기 조나단의 어머니가 사라지고, 뒤이어 아버지도 사라진다. 말 그대로, 부모가 갑자기 사라진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나단과 여동생은 멀리 떨어진 친척의 집에서 자라고, 조나단은 친척의 중매로 결혼했지만, 아내는 결혼 4개월만에 아이를 출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한다. 조나단은 3년간 군 복무를 하고 돌아오고, 여동생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그곳에서 지역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으며 지내다 불쑥 파리로 올라온 것이다. 조나단의 어머니는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했다. 조나단의 부모가 모두 유대인이었는지, 아니면 어머니만 유대인이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앞부분에서 건조하게 설명하고 넘어간 조나단의 과거는,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자, 조나단의 행동을 이해하는 전제가 된다. 어릴 때 갑작스러운 부모의 실종으로 남매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갖게 되고, 조나단은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이 없는, 익명으로의 삶을 선택한다. 그는 가진 돈으로 파리의 임대 건물 7층, 엘리베이터는 상상할 수 없는 좁은 계단과 건물 골목, 한 층에 하나뿐인 공용 화장실이 있는 작은 방에 세들어 산다. 길이 3.4미터, 너비 2.2미터의 작은 방은 2평 조금 넘는 넓이로, 그가 혼자 살아가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조나단은 30년 동안 살았다. 조금도 불평 없이, 혼자만의 삶에 만족하며. 조나단에게 이 작은 방은 특별한 존재가 된다. 외롭게 살아가는 조나단에게 늘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이면서, 이곳에 있을 때만큼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다는 점에서, 이 작은 방은 마치 조나단의 연인, 아내처럼 의인화한다. 문앞에서 비둘기를 발견한 조나단의 행동은 극단적이지만, 그의 과거와 트라우마를 떠올리면, 이 비둘기의 출현이 그의 내면에 잠재된 의식을 건드린 것으로 추측한다. 사실 파리에는 비둘기가 많다. 어디든 흔하게 보이는 날짐승이고, 비둘기는 더 이상 '야생 동물'이라고 하기에는 인간의 생활과 매우 가까이 있다. 그런 비둘기를 봤다고 마치 금방이라도 인생이 끝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조나단의 행동이 이상하지만, 비둘기는 하나의 상징이다. 나도 조나단 만큼은 아니지만, 비둘기를 몹시 싫어한다. 누군가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비둘기를 표현하지만, 흉칙한 눈, 아무 곳에서나 똥을 싸대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행동을 보면서 비둘기가 아름답기는 커녕 혐오스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조나단은 비둘기가 혐오스럽고 무서워서 마주치지 못한 것일까. 조나단에게 비둘기는 어떤 의미일까. 조나단은 30년 동안 은행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시골에서 파리로 오는 순간 과거는 모두 잊었으며,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파리에서 새로 태어났고,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생활이 좋았으며, 좁지만 아늑한 자기의 방에 있는 것이 늘 행복했다. 즉 스스로 고립되고, 유폐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30년을 살았지만, 그의 내면, 잠재의식에 자리잡은 '자유'는 어떤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었다. 조나단이 비둘기를 발견했을 때, 그의 잠재의식이 깨어났고, 그는 비둘기를 보며 벌벌 떨면서 트렁크에 짐을 싸서 집을 나온다. 즉, 비둘기로 인해 촉발된 '자유'라는 잠재의식이 발동한 것이다. 조나단은 은행 근처의 값싼 호텔에 들어가 다시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그가 안온하고, 평온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지난 30년의 시간은 스스로 삶을 가둔 시간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조나단에게 '자유'란 끔찍한 것이다. 비둘기를 봤을 때 들었던 끔찍한 느낌은, 그가 '독립적 인간',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비둘기는 어디로든 훌쩍 날아갈 수 있다. '자유'는 개인의 육체에 묶이지 않고, 어떤 생각이든, 어디로든 공간과 시간을 제약을 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한다. 조나단은 50년 넘게 살면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기의 의지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내면에 숨죽이고 있던 '자유'가 눈을 뜨는 순간 그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유'의 충동에 떠밀려 짐가방을 싸고, 호텔로 들어왔으나 그는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에게 가장 편한 곳은 30년 동안 살아온 작은 방이고, 그 방은 그에게 연인이자, 아내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나단이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문앞에 비둘기는 보이지 않았다. '자유'의 의지가 사라진 것이다. 그는 호텔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내일 자살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삶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작은 방' 앞에 도달하고, 비둘기가 보이지 않자,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도 좋겠다는 마음을 갖는다. 그는 과연 자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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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6
  • 콘트라베이스
    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이름을 알린 첫 작품으로, 인물의 캐릭터가 이후 발표하는 작품처럼 '문제적 인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작품은 짧은 소설이면서 연극 대본으로도 쓰이고 있다. 지금도 유럽에서는 모놀로그 연극으로 꾸준히 공연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작품인데, 주인공의 성격을 보면, 유럽인의 보편적 정서를 이해할 듯 하고, 이후 '좀머 씨 이야기', '비둘기'를 읽으면 유럽인의 '어두운 면'을 느낄 수 있다. 방백을 하는 '나'는 국립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연주자로, 나이는 30대 중반의 남성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근무하는-공무원이다-오케스트라에 새로운 성악가에 관심이 많다. 그 성악가는 메조소프라노로, '나'보다는 나이가 열살 가까이 어린, 20대 중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성 성악가다. '나'는 '세라'라는 그 성악가에게 반했고, 어떻게든 사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현실은 전혀 그럴 기회가 없다. '나'는 콘트라베이스로 연주하는 음악적 특성과 소리의 특징, 자신이 콘트라베이시스트가 된 과정을 말한다. '나'는 콘트라베이스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최대한 실망시킬 마음으로, 즉 부모에게 앙심을 품고 콘트라베이스를 선택한 것이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엄격한 성격으로, 아들인 '나'를 사랑하지 않고, 여동생만 사랑했으며, 음악을 좋아하고, 플룻을 연주하고 음악을 사랑했던 어머니도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아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공무원이 되고자 했고, 어머니에 대한 복수로 가장 못생기고, 다루기 힘든 악기인 콘트라베이스를 선택했다. 그래서 공무원으로 일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국립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된 것이다. '나'는 콘트라베이스를 중심으로 악기와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의 역할과 존재에 관해 장황하게 설명한다.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낮은 음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설명하지 않은 내용이 있다. 대편성 오케스트라는 단원이 120명 정도 되는데, 이때 콘트라베이시스트는 8명 정도가 담당한다. 콘트라베이스 앞쪽에 첼로가 더블베이스(같은 악기의 다른 이름이다)보다 더 많은 숫자로 편성된다. 첼로는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의 중간 음을 담당한다. 이때, 콘트라베이스만으로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저음 파트가 있을 때, 관악기에서 튜바가 그 역할을 한다. 관악기에서도 바순(목관), 콘트라 바순과 튜바(금관), 더블베이스 튜바는 상당한 저음이고 특히 튜바는 저음이면서도 해상도가 좋은 편이라 콘트라베이스의 저음과는 다른 음색을 낸다. 게다가 튜바는 '튜바'와 '더블베이스 튜바'가 있어서 콘트라베이스의 저음보다 훨씬 낮은 음을 낼 수 있다. 더블베이스 튜바는 피아노의 가장 왼쪽 건반보다 더 낮은 음을 낼 수 있어서 콘트라베이스가 내지 못하는 저음을 담당한다. 이 작품에서 저음에 관한 이런 내용이 들어갔다면 보다 흥미롭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는 평생 신분이 보장되고, 연금까지 나오는 안정된 직장인 국립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이제 30대 중반의 연주자다. '나'는 아직 미혼이고, 얼마 전 입단한 메조소프라노 세라를 향한 애정이 폭발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세라는 나이 많은 지휘자들과 최고급 레스토랑을 드나드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질투와 애증이 그를 집어삼키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자기 파괴적 상황으로 뛰어들기 직전이다. 그가 자기 삶을 파괴할 권리는 있지만, 왜 그런 행동을 하려는 걸까에 관해 생각할 여지가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 - 우연히도 모두 남성들이다 - 은 고독한 인물이고, 자기 파괴적 상황으로 달려간다. '나'는 어릴 때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가부장의 전형인 인물이고, 어머니는 자립적이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종속된 인물이고, 모든 사랑은 여동생이 독차지했다. '나'는 어릴 적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이고, 그가 지금까지 결혼은 물론 연애도 온전히 해본 적 없는 인물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연애에 서툰 사람이 보이는 전형적 태도가 '짝사랑'이다. '나'는 새로 들어온 단원 가운데 메조소프라노 세라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녀와 대화 한번 한 적이 없지만, '나'는 자기가 말한 하면 세라도 자기를 좋아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나'가 공연장에서 수많은 청중과 오케스트라 단원이 있는 무대 위에서 연주하러 나온 세라를 향해 '사랑한다'고 소리칠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 지 잘 알고 있다. 상황 판단을 멀쩡하게 하면서도 '나'는 그 행동을 멈추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안정된 직장에서 쫓겨나고, 당장 실업자가 되면 생활이 곤란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가 용기를 낸 것에 대해 세라가 달려와 자기의 사랑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한다.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에서 존재감이 약한 악기다.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고, 드라마틱한 액션도 없기 때문에, 청중은 콘트라베이시스트를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콘트라베이스의 소리는 전체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없으면 안 되는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자신은 빛나지 않으면서 전체에게는 도움이 되는, '나'는 그런 사람이어서 그의 고독과 불안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자, 유일한 방식이 자기 파괴인 것이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여성의 시선으로 해체하는 부조리 가정극
    여성의 시선으로 해체하는 부조리 가정극 -마선숙의 작품들 글쓰기는 탈출구이자 자가 치료 요법이다. 정작 창작하는 젊은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알고 모르고가 중요하지는 않다. 모든 창작하는 작가나 예술가는 어느 순간 계시를 받아서 시작하지 않는다. 마치 오솔길을 걸어가다 샘터를 발견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받아 적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작가들도 처음부터 걸작을 써낸 것은 아니다. 스티븐 킹은 아홉 살부터 형이 만든 동네 잡지에 글쓰기를 시작했고, 출세작 '캐리'는 쓰레기통에 버린 걸 아내가 다시 주워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물론, 예술가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 몇 살에 시작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술가의 재능은 나이와 관계 없이 어느 순간 드러나기도 한다. 박완서도 마흔 살이 넘어서 장편소설로 데뷔했다. 재능보다 더 중요한 건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꾸준함이다. 특히 소설은 엉덩이를 의자에 진득하게 붙이고 있어야 하는 절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마선숙 작가는 55세에 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했고, 그 전에 이미 주부로 30년 가까이 4대가 사는 큰 집의 주부, 엄마, 며느리로 살았다. 시동생, 시누이들이 고등학생, 대학생일 때 교과서를 닥치는대로 읽었고, 결혼 전 가졌던 창작의 불씨는 오랜동안 타오를 기회가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태어나 '근대화'를 몸으로 겪은 세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서적 트라우마를 겪는다. 전통과 관습이라는 족쇄와 가부장의 폭력 아래, 여성은 더욱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였으나 마선숙 작가는 4대가 살아가는 집안에서 30년 동안 자기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마선숙 작가와 비슷한 연배의 누나와 나보다 몇 살 위의 누나가 있다. 내가 마선숙 작가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두 누나의 삶을 피상적으로라도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누나들은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전쟁을 겪고, 극빈의 삶을 살면서 학교도 가지 못했고, 어려서 노동자가 되어 공장에서 힘든 노동을 했으며, 결혼하고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안 살림에 허덕여야 했고, 자식을 키워야 했다. 그런 누나들의 삶은 그 시대를 살았던 거의 모든 여성의 삶이었다고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 고생과 고통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노동과 고통이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다. 마선숙의 소설집 [몸이 먼저 먼 곳으로 갔다]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등장하는 남성들이 가부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몸이 먼저 먼 곳으로 갔다]에서는 50대에 명예퇴직한 군인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아내가 갑작스럽게 가출하고, 찾아간 섬(더 이상 섬이 아닌)에서 역시 혼자 떠나온 남자를 만난다. [즐거운 우리집]에서는 직장을 다니는 남편이 물려 받은 경기도의 땅을 팔아 30억 원을 받지만, 자린고비에 이기적 태도를 보여준다. [스콜]에서도 서인의 남편 강민은 금수저로 자란 남성으로, 뭇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남자면서 가난한 발레리나 서인을 아내로 선택한다. 강민이 서인에게 가하는 정서적 폭력은 남성 작가의 소설에서는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공감하기도 어려운데, 마선숙 작가는 정서적 폭력을 과장하지 않고 그려낸다. [하얀 고무신]에서 90대 부부 순녀와 노식은 젊어서 4.19혁명 때 큰아들을 잃는데, 어머니의 가슴에는 평생 아들이 살아 있지만, 남편 노식은 자신의 욕망에 더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흑백사진의 집]에서 며느리인 주인공의 남편은 전형적인 룸펜이자 쁘띠부르주아이며 가부장 남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렇게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모습이 가부장에 폭력적 모습을 드러내는 건, 작가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작품집의 여성 주인공들은 독립적이고 주도적인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늘 어떤 경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건 단편의 한계이면서, 작가의 의식의 한계로 보인다. 여성 주인공들은 자신을 온전한 인간, 통합된 하나의 인격체로 인지하지 못하고, '배우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한다. 즉, 여성 주인공의 의식은 현실과 내면이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현실과 이상이 일치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견뎌야 하는 의식이 고통을 견디기 어려울 때, 자아를 분리하는 '다중인격'의 초기 모습처럼 보인다. 작품의 소재는 젊은 작가가 다루기 어려운, 삶의 오랜 경험과 핍진한 고민을 다루고 있어서, 작가보다는 한참 후배지만 이제 막 60의 문턱에 들어선 내게 [저녁의 시] 같은 작품은 절절하게 다가왔다. 이 작품은 영화 [아무르]의 다른 버전을 보는 듯 했는데, 노인이 되면 누구도 안심할 수 없고, 피해가기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작가의 역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재와는 별개로, 소설의 기법이나 미학적 부분에서 아쉬움도 보이는데, [즐거운 우리집]에서 자식들을 따라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난 주인공이 공항에 내렸을 때, 아무런 리액션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추운 한국을 떠나 몇 시간만 가면 갑자기 더운 나라로 이동하는데, 공항에서 후끈한 열기를 느끼지 못했는지, 이국적 풍경에 낯설음을 느끼지 않았는지 하는 세부적 묘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작품들은 무엇보다 쉬운 단어, 쉬운 문장을 쓰고 있어서 읽기 편하다. 다만, 문장이 쉽게 읽히는 것과, 묘사의 핍진성, 문장의 철학성, 다른 말로 문장의 깊이를 탐구하는 작업은 작가의 숙명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작가'의 이름을 걸고 있지만, 여기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작가들이 서로 격려하고, 건강한 비판을 주고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마선숙 작가는 꾸준히 발전하는 작가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조국, 프로메테우스, 촛불, 헤라클레스
    조국, 프로메테우스, 촛불, 헤라클레스 조국, [조국의 시간]을 읽고 신의 아들이었던 프로메테우스는 어리석은 인간을 위해 스스로 위험한 상황을 비켜가지 않는다. 인간을 위해 제우스에게 받치는 인간의 제물을 만들었으며,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의 전략에 분노해 인간에게서 불을 빼앗자 다시 제우스를 속이고 인간에게 불을 몰래 가져다 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창조한 신'이자, '인간의 옹호자'이며, '선지자', '먼저 생각하는 자'로 알려졌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신'의 존재였으나, 나약한 인간을 위해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오길 마다하지 않았다. 조국 교수는 자기가 금수저임을 인정하며며,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도 조국 교수가 금수저이면서 우월한 유전자의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서울대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강남 거주, 모델 뺨치는 외모 등 단 하나도 빠지지 않는 조국 교수는 상위 0.01%의 특별한 존재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미움을 받으면서까지 제우스가 인간에게서 뺐은 불을, 인간을 위해 다시 가져다 준다. 그러다 제우스가 분노하고, 그에게 벌을 내린다. 코카서스 산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조국 교수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 집단, 엘리트를 위한 검찰의 기득권을 해체해 국민에게 사법평등을 이루도록 노력했으나, 야당, 검찰, 언론의 집단 공격을 받아 가족이 멸문지화의 화를 당하고, 조국 교수는 물론, 가족들까지 심한 내출혈로 죽음의 아가리에 빠지기 직전에 놓여 있다. 검찰 권력은 마치 제우스의 분노처럼, 한국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이었으며, 한 사람을 찍으면, 그 사람은 만신창이가 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정도로 집요하고 잔인하며, 악랄하다. 살인자도 피해자를 칼이나 둔기로 한번 휘두르고 마는데, 검찰은 권력의 칼과 도끼를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검찰이 찍은 대상이 난자당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싸이코패스와 같다. 검찰은 일제강점기부터 막강한 절대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자를 때려잡으려는 목적으로,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에서 사회주의자, 진보인사를 때려잡으려는 목적으로, 박정희, 전두환 소장이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이후에는 반정부, 민주주의자를 때려잡으려는 목적으로 검찰은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반정부' 민주주의자들을 범죄자로 만들어왔다. 김대중 정부 이후 검찰은 더 이상 권력의 의도에 맞는 기소를 하지 않아도 되면서, 검찰은 검찰 스스로가 최고의 권력기관이자,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검찰 출신은 한국 최고 엘리트이면서, 정치를 포함해 상위 권력그룹, 상위 경제그룹에 포함되는 위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는 통제되지 않는 검찰 권력을 통제하지 않고, 그들의 자정 능력을 기대했으나, 결국 검찰의 잔인한 보복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목숨을 스스로 끊어야 하는 '사회적 타살'을 맞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촛불시민들은 9년이 지나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문재인 비서실장이 권력을 잡도록 이끌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검찰 개혁을 하라는 것이 촛불시민의 지상명령이었다. 그리고, 검찰개혁의 적임자로 조국 민정수석이 지목되었다. 선출직 국회의원이 되거나, 임명직 법무부장관이 되는 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였다. 어느 길이든 한쪽으로는 가야만 했다. 조국 교수는 대학교수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기에, 선출직이 아닌, 임명직, 법무부장관을 선택했다. 프로메테우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제우스를 속이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그럼에도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선택했다. 그가 인간을 버렸다면, 신으로서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조국 교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민정수석을 마치고 대학교수로 복귀하면 그는 최고의 엘리트, 강남의 상류층으로 늘 존경받으며, 넉넉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하지만 조국 교수는 검찰의 무소불위 권력을 해체하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확산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제우스의 분노로 프로메테우스는 쇠사슬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검찰을 개혁하겠다는 조국 교수는 검찰이 휘두르는 권력의 칼과 창과 쇠스랑과 도끼에 찍혀 만신창이가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를 구한 건 헤라클레스였다. 헤라클레스는 신 제우스와 인간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이다. 인간이 신을 구한 것처럼, 엘리트이자 강남좌파 조국 교수를 구한 것은 서민인 촛불시민들이다. 촛불시민은 무능하고 부패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서 끌어내렸으며, 검찰이 휘두른 권력의 칼날로 신음하는 조국 교수와 그의 가족을 촛불을 들어 구했다. 프로메테우스가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에게 불을 건낸 것처럼, 조국 교수도 자신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검찰 개혁을 우리 사회에 안겨줄 것이다. 이미 그 단초는 시작되었고, 조국 교수가 쓴 '조국의 시간'은 촛불시민이 서초동에서 들었던 촛불처럼, 한권, 한권이 촛불처럼 빛나며 검찰의 무도한 권력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 길에 프로메테우스의 헤라클레스처럼, 조국에게는 촛불시민이 함께 한다. 조국은 개인이면서, 검찰개혁의 아이콘이자, 상징이다. 그 상징을 빛내는 것이 바로 촛불시민이고, [조국의 시간]을 든 우리들이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네 눈물을 믿지 마
    네 눈물을 믿지 마 김이정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3, 4년 전쯤 청송 '객주문학관'에서 김이정 작가를 처음 만났다. 그때 만난 작가들 가운데 박정애, 권지예, 정길연, 이경혜, 해이수, 이지 작가들이 있었고, 나는 운 좋게 그곳에서 얼마간 머무를 수 있었다. 작가를 만났다고 해서 그 작가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개의 작가들은 진짜 자기 모습은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자기 모습은 드러내되, 자기 창작의 내면은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에게 내밀한 지하공간이며, 무수히 많은 창조의 단어들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기에 섣불리 보여줄 수도, 드러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 세 끼의 밥을 맛있게 먹고, 저녁 때는 가끔 내가 만든 간식들을 나눠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밥 먹는 시간이나, 가끔 산책하는 시간 외에는 모두 창작실에서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었으니, 아마 스님의 하안거, 동안거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품들은 2014년 이후 1년에 한 편 정도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시기는 다르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이야기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인도, 포르투칼, 스페인, 베트남, 영국에서 떠나온 한국을 생각하고, '나'가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한다. 인물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는 동기는 무언가에 떠밀리듯 한 비자발적이고 충동적인 행위 때문인데, 이때 이런 비자발성은 '나'의 내면에서 발생한 충격 또는 갈등이 원인이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인들에 의한 학살 사건을 조명한 작품 외에는 모두 '나'의 충동적 여행이고, '나'는 여행을 통해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의지와 함께, 현실을 객관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무의식적 행동을 한다. 퍽 오랜만에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베트남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이 가해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쟁범죄라면, '나'가 외국에서 겪는 에피소드는 바깥에서 나를 보는 객관의 시선이다. '나'는 늘 온전하지 않은 삶으로 고통스러운 인물이다. '나'는 사업이 파산한 남편과 이혼하거나, 위암에 걸리는 등 자기 의지와 상관 없는 고통을 겪는다. 이때 '나'가 할 수 있는 건 현실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 뿐이다. 그때 현실(한국)은 더욱 엉망진창이 되거나, 알아서 수습이 되거나 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운명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고, '나'는 그저 폭포처럼 쏟아지는 운명을 감당할 뿐이다. 프리페이드 라이프 '나'는 무언가에 홀린듯,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떠밀리듯 한국을 떠나 인도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우연히 보게 된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이 큰 이유라고 말하지만,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존재로 버티고 있었다. 마치 좀비처럼. '나'는 한국에서도, 인도에서도 음식을 먹지 않는다. 마치 좀비처럼. 그가 유일하게 음식에 관해 언급한 것은 인도의 중국음식점에서 주문한 '한국 수제비'이야기였다. 그것도 음식을 먹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에게 음식은 절실하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그에게 음식보다 더 절실한 것은 존재에 대한 확신이다. 그는 집안의 빚 때문에 이혼을 했고, 가족을 부양하면서 빚을 갚아야 했던 오랜 시간이 있었다. 그는 빚에 짓눌리고, 찌든 삶을 살아가느라 자기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버스의 룸미러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기겁한 것이다. 그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나'이면서 '나'는 아니다. '나'는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글을 쓰지만, 그는 왼손을 쓴다. '나'는 오른손잡이지만 거울 속의 '그'는 왼손잡이다. '나'는 빚에 짓눌러 질식해 가고 있지만, 거울 속의 '그'는 빚을 지지 않았으면서도 서서히 말라죽어 가고 있다. '나'는 오랜 동안 빚을 갚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이미 오래 전에 끝났음에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것이 빚으로 남아,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도의 갠지스강가 화장터를 오가며, 화장터에서 불살라 잿더미로 사라지는 육신을 보며,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히 바라보며, 마치 자기 자신이 그렇게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 갠지강에 뿌려지는 듯한 환상 체험을 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나'는 정말 그렇게 고요히, 가볍게 장작 위에 놓인 시신이 되어 화염 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에게 인도는 '저승'이다. 그는 이승(서울)을 떠나 비현실의 세계, 실재하지 않는 세계, 빚독촉과 고통스러운 가족의 인연과 비루한 삶이 있던 서울을 떠나 저승 같은 인도로 온 것이다. 저승에서는 의식주가 중요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도 하찮아진다. '나'는 저승에서 지난 삶을 돌아본다. 그 삶은 과연 살만했던 삶이었을까. 삶의 의미는 있는 걸까, 비루와 오욕으로 더럽혀진 삶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준 것은 아닐까. 한때 미워했던 사람들 마져도, 나의 탐욕과 욕망과 이기의 투사는 아니었을까. '나'는 이승(한국)에서 견딜 수 없어 자발적으로 저승(인도)으로 온 사람이다.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돌아갈 의무도, 책임도 없다. 하지만 이승(한국)에는 여전히 가족들이 있고, 그가 돌봐야 할 식구들이 절망과 슬픔의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혼자 이승(한국)을 떠난 것조차 죄스럽기만 하다. '나'는 망자들의 영혼이 건너는 갠지스강 위에서 '자신을 잃은 삶이야말로 가장 부도덕한지도 몰라. 어떻게든 나를 회복하기 위해 애쓸 거야.'라고 말한다. '나'는 어쩌면 살아서 이승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미 연꽃 호아, 서 하사, 광희. 1968년, 1998년. 2010년. 베트남 하미 마을에서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집단 학살 사건을 세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한국군은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받았다. 이것은 마치 '한국전쟁'으로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에서 극적으로 부활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한국군대를 베트남에 파병했고, 병사들의 죽음과 돈을 맞바꿨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의 자식들이었던 '한국군인'들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동료를 위해 싸웠고, 동료의 죽음을 보며 괴물이 되어갔다. 베트남 민중은 죄 없이 학살당했으며, 이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수많은 주민학살과 똑같은 내용과 의미를 갖는다. '한국군'은 '한국전쟁' 때 자기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고, 베트남에서도 주민들을 '빨갱이'라고 덮어씌워 학살했다. 학살을 명령한 주범들은 영웅이 되어 돌아왔고, 그들은 거들먹 거렸으며, 훈장을 받았고, 부자가 되었으며, 권력을 누렸다. 병사들 가운데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사람이 있었고, 서 하사처럼 평생 정신병원에 갇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었다. 오로지 제국주의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으킨 사악한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나갔던 한국군은 미군보다 더 잔혹한 살인귀가 되어 베트남 주민들을 학살한 것이다. 이것은 씻을 수 없는 전쟁범죄이며,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를 지금도 비난하듯,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베트남 국민에게 우리는 비난당해도 마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가해자의 시각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을 가능한 객관의 시선으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작품이 그동안 한국문학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여전히 베트남 전쟁에서의 (일부) 한국군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우리가 가해자로서 저지른 범죄에 관해 가르치지 않고 있다. 우리와 일본의 관계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일본의 강점기에 일본이 저지른 범죄에 관해서는 꾸준히 가르치고 있지만, 우리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학살 범죄에 관해서는 가능한 침묵하려 한다. 이것은 명백히 범죄를 은폐하는 또 다른 범죄다. 독일처럼 기회가 될 때마다 대통령과 총리가 공식 사죄를 해야 하고,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전쟁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역사적 처벌을 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죄 없는 사람들의 도시 '나'는 엄마의 장례와 삼우재를 지내고 도망치듯 리스본으로 온다. 호스텔에서 머물며 리스본의 거리를 배회하면서 '나'는 엄마가 죽어가는 과정을 돌아본다. 갑작스러운 죽음. 죄 없는 사람의 불행. 그것은 리스본에 닥쳤던 18세기 지진과 해일로 리스본에 살던 사람 약 25%가 죽은 사건과 중첩하면서, 삶과 죽음에 관해 내면으로 침잠하는 '나'의 생각을 좇는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최근 나에게 닥쳤던 두 가지 사건과 30년 전에 있었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건이다.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죽음'을 이해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가 아닌, 다른 사람일 때만 그렇다. 죽음이 나에게 닥쳤을 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 '나'의 엄마는 아직 젊은 나이에 급성 백혈병(혈액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한다. 엄마를 바라보는 '나'는 많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죽음을 느끼지는 않는다. 죽음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이 딜레마는 단순한 안타까움이나 슬픔을 넘어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엄마는 고통으로 죽어가는데, 나는 여전히 건강하게 살며, 먹고, 마시고, 웃고, 섹스를 하고 있다는 것이 죄의식으로 남는 것이다. '나'가 도망치듯 외국으로 떠나온 것은,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와, 자기 혐오를 달래기 위한 무의식적 행동이다. 그리고 하필 포르투갈에 도착했고, 포르투갈의 18세기에 있었던 지진과 해일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때 죽은 사람들은 마침 휴일이었던 그 날, 신을 찬양하기 위해 성당에 모였고, 신의 공간이었던 성당이 붕괴하고 불이 나면서 비참하게 죽었다. '나'의 엄마는 평생 육식을 하지 않았고, 바닥에 사는 작은 생물조차 죽이지 않으려 조심하며 살았지만,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괴로운 시간을 보낸 끝에 죽게 된다. 포르투갈 사람들도 선량한 시민들이었을테고, 모두들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병으로, 사고로 죽어간다. '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앞으로도 영원히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조리한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던지는 것은 '도대체 왜?'라는 질문 뿐이다. 믿지 마, 네 눈물은 누군가의 투신일지도 몰라 파산한 남자 이야기. 아내와도 위장 이혼하고-위장 이혼이라는 건 없다. 그냥 이혼을 했을 뿐-혼자 고시원을 떠돌며 인력사무소를 통해 일당을 버는 남자는 오랜만에 집을 찾아오지만, 현관키가 바뀌어 들어가지 못한다. 그는 한때 잘 나가던 사업가였으나 지금은 채권자들에게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은 남자다. 아내는 보험영업을 하며 먹고 살고, 아들은 아버지인 자신을 더 이상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친어머니처럼 생각했던 장모님도 파산 이후에는 딸의 눈치를 보는 것과 동시에, 사위에 대한 애정도 거두었다. 사내는 연락할 친구도, 도움을 받을 가까운 사람도 없다. 과거에 가까웠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돈을 보고 만났던 사람들이고, 사회와 현실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냉정하고 삭막하다는 걸 사내는 깨닫는다. 사내는 배낭에 몇 가지 물건을 지니고 다닌다. 그것은 그의 삶을 끝내는 도구들이지만, 역설적으로 사내가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되어준다. 파산 이후,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사내는 약으로 하루하루를 버티지만 약이 떨어져도 선뜻 약을 구입하지 못한다. 약보다 아내의 카드로 약값을 결재해야 하는 부담이 더 크기 때문이다. 파산, 금치산자가 된 사내는 채권자에게 쫓기면서 정상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는 고시원의 관짝 같은 방에서 낮을 보내고, 야간 경비를 서며, 일당을 떼이고,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 되어 간다. 가족들은 전화를 받지 않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문자로 묻고 답한다. 사내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그는 이미 죽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퐁니 믿고 싶지 않겠지만, 베트남에서 벌어진 베트남-미국의 전쟁 때, 한국군은 미국의 괴뢰군으로, 여러 번의 학살을 저질렀다. 이 작품 역시 1968년 2월 12일, 퐁니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이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들어오면서, 어린 탄이 한국군에게 초콜릿을 받아 먹은 것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은 미군에게 초콜릿을 받아 먹었다. 한국전쟁 때, 군대의 전투를 통한 군인의 사망이 아닌, 군대에 의한 주민 학살 사건만 해도 보도연맹, 거창 주민, 노근리 피난민, 경산 코발트탄광, 국민방위군, 고양 금정굴, 강화주민, 산청,함양주민, 남양주 주민, 함평 주민, 문경 주민, 죽산 주민, 나주 주민, 서울 홍제리 집단총살,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학살 사건이 있었다. 이런 학살 사건은 이념 전쟁이자 냉전의 대리 전쟁이었던 한국에서 벌어진 가장 끔찍하고 비극적 사건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한을 안고 살아가는 원인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 어린이였거나 전쟁이 끝나서 태어난 청년들이 베트남에서 다시 이런 참혹한 학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인류의 비극은 결코 멈춰지지 않을 거라는 암울한 예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생명의 존엄성을 말해도,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고, 지금도 지구의 몇몇 나라에서는 내전 또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예외없이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한국)는 오랜 역사에서 늘 피해자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고조선 이후 지금까지 이웃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고도 말한다. 우리는 평균 몇 년에 한번씩 적의 침략으로 전쟁을 치렀지만 지금까지 끝가지 살아남았고,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베트남 전쟁에서만큼은 우리는 가해자였으며, 전쟁범죄에 앞장 선 나라였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에 의한 한국인 주민 학살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한국인끼리도 남북한 군인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이 많았다. 이때 남북한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노인, 여성, 어린이까지 무차별 학살했다. 베트남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노인, 여성, 어린이를 학살했다. 이념을 앞세워 자신들의 학살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는, 전쟁범죄를 은폐하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이같은 행위는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에서 똑같이 벌어졌다. 즉, 총을 든 악마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늘 우리 주변에 있다는 뜻이다. 베트남 학살 피해자 가운데 극히 일부가 살아남았고, 그들은 그날의 상황을 증언한다. 그때 학살에 참여했던 한국군들을 찾아내 전쟁범죄자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 정의다. 노 파사란 갑자기 한국을 떠나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한 '나'는 바깥에도 나가지 않고 거의 호스텔 안에서 잠과 잠을 반복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겨우 바깥으로 나온 '나'는 거리를 걷다 우연히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게르니카'를 보게 된다. 그 거대한 그림을 보는 순간, '나'의 내면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나'는 짐을 꾸려 '게르니카'로 향한다. 무작정 도착한 게르니카에서의 첫 인상은 즐겁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아이들이 강아지를 강매하려 하고, 호스텔 주인은 신경질을 부리고, 호스텔 입구의 체크인 카드기계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것이 엉망인 상태로 시작한 게르니카였지만, 다음 날부터 조금씩 달라진다. '나'는 시내를 걷다 우연히 호스텔 주인 여자를 발견하고, 그 여자가 웃는 모습을 보면서, 어제 마귀 같았던 여자와 같은 인물인지 놀란다. 그때 아이들이 폭죽놀이를 하고, 주인여자와 함께 있던 노인이 탁자 아래로 기어들어가면서 올리브오일 병이 깨지는 등 가벼운 사고가 벌어진다. '나'는 다시 거리를 걷다 배가 고파 들어간 식당에서 우연히 다시 호스텔 여주인을 만난다. 첫 인상을 나빴지만, 대화를 하면서 여주인은 치매인 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호스텔을 하면서 병원 조무사로도 일을 하는 등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치매 어머니가 낮에 한 행동은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에 있었던 폭격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 폭격으로 어머니의 가족 모두 사망했고, 오직 어머니 혼자만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어머니는 치매 이후 여덟 살의 그때 나이로 돌아갔고, 큰 소리만 들리면 폭격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1937년, 게르니카에 쏟아진 폭격은 독일 나찌의 비행기에서 떨어진 폭탄이었다. 당시 스페인 내전이 벌어졌고, 프랑코는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주의 좌파 세력과 내전을 시작한다. 그때 독일은 프랑코를 지원했고, 공화파는 소련의 지원을 받긴 하지만 화력에서 열세였고, 결국 프랑코에게 패한다. 왜 이곳에 왔느냐는 주인 여자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는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한 남편이 위장 이혼을 하고, 혼자 고시원을 떠돌다가 6개월이 지났을 때, 갑자기 사망한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무작정 떠난 외국, 스페인, 게르니카, 폭격, 고아가 된 주인여자의 어머니와 남편을 잃은 '나'. 게르니카에 떨어진 폭탄처럼, '나'에게도 삶을 공격하는 고통과 채무의 폭탄이 떨어지는 걸 온몸으로 느끼며 오열한다.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자 '나'는 영국에 사는 친구를 찾아간다. 14년만의 만남.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이지만, 친구의 남편은 몇년 전 심장마비로 죽었고, 아들은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있다. '나'는 그녀와 얽힌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다. 그녀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고, 가난했으며, 딸이 무려 일곱이나 되는 집안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나'는 대학을 다니고, 교사가 되었지만, 친구는 대학 진학을 못했고, 어렵게 돈을 모아 영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운명은 갈렸지만, '나'는 결혼하고 남편의 사업이 파산한 이후 이혼을 당하고,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 잘 살고, 학교 선생으로 만족하며 살던 삶도 위암 판정을 받는 순간 부서져 내리는 걸 느낀다. '나'는 위암 수술을 앞두고 영국에 있는 친구를 찾은 것이다. 두 사람은 과거의 추억과 기억에서 상처받은 시간과 숨겨두었던 슬픔을 꺼낸다. '나'는 친구에게 부채감과 죄의식을 갖고 있었고, 삶의 변곡점에서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피카소가 그린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은 검은 머리에 붉은 목도리를 두른 여인이 녹색의 압생트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다. 진한 화장을 하고, 몸이 마른 여인은 왼쪽 손을 귀 근처에 대고 있는데, 마치 누군가 하는 말을 자세히 들으려는 듯한 자세다. 오른손은 잔 위에 가볍게 다가갔다. 이 여인은 어쩌면 '창부'일 가능성이 높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피에르 오디넬이 치료용으로 만든 술인 압생트는 주류업자 페르노 리카르에게 넘어가서 대중에게 팔리게 되는데, 당시 프랑스 부르주아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이들과 함께 했던 고급창부(드 미 몽드)들이 특히 이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18세기 이후 유럽의 화가들 가운데 '압생트'를 소재로 그림을 그린 화가만 해도 피카소, 고흐, 드가, 마네, 로트렉 등 유명 작가들이 많다. 붉은 길 '그'를 찾아 인도에 온 '나'는 정작 그가 있는 '마이소르'에 가지 않고, '벵갈루루'의 한 숙소에 머문다. '나'는 산책을 나왔다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고, 낯선 길, 붉은 황토길을 걸으며 불안한 마음으로 '그'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이혼을 했고, 남편이었던 남자는 남미로 떠났다. 영어학원에서 처음 본 '그'와 가까워지지만 어느날 '그'는 인도 '마이소르'로 떠난다고 했다.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 떠난 인도행이지만, 막상 '그'가 살고 있는 도시로는 가지 못하고, 2시간 거리의 벵갈루루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나'는 현실에서도 길을 잃었고, 삶의 길에서도 길을 잃은 상태다. 그를 만나야 하는 건지, 만나서 어쩌자는 건지, 결혼 생활은 끝이 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낯선 길 위에서 초조한 모습으로 떨고 있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인도에서 여성, 그것도 외국 여성 혼자 밤거리를 걷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얼마전에도 인도여성이 여러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결국 병원에서 죽은 사건도 일어났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제복을 입은 남성들에게 다가가 '스와미 아쉬람'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한다.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어 극도의 긴장 속에서 여러 명의 남자들과 함께 차를 타고 어느 장소에 도착한다. '나'의 약간의 오해 끝에 경찰이 데려다 준 곳은 '스와미 아쉬람'이었다.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고, '그'를 찾으려는 마음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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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6
  • 4월 혁명의 주체들
    4월 혁명의 주체들 이 글을 쓰는 오늘이 우연히 4월 19일이다. 4월 혁명이 일어나고 61년이 지났으며, 한국은 '4.19혁명'을 헌법에 새겨 넣었다. 3.1만세운동이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민중의 독립운동이었다면, 4.19혁명은 같은 해 치러진 3.15 선거 -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 - 에서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획책하면서 촉발했다. 부산,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자유당 정부는 폭력으로 탄압했고, 이 과정에서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사진이 부산일보에 보도되면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시민들의 규탄 시위를 폭력으로 저지하는 한편, 계엄령을 선포해 국민의 자유를 속박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한편, 깡패를 동원해 시위하는 국민에게 테러를 하는 악랄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경찰 역시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했고, 시민들은 경찰서를 습격해 총기를 탈취하고,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전쟁이 끝나고 불과 7년이 지난 상황에서, 내전에 가까운 혁명이 발발한 것은 오로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범죄가 원인이었으며, 일본 앞잡이였던 매국노를 정부 관리로 기용하고, 독립군과 애국지사를 홀대한 이승만 정권의 반민주적, 독재적 태도가 4.19혁명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 이 책은 4.19혁명 당시, 혁명에 참여한 여러 주체들을 분류하고, 그들의 참여와 역할, 혁명에 기여한 내용을 분석하고 있다. 4.19혁명을 말할 때 가장 널리 알려진 주체는 '학생'이다. 혁명 초기였던 3.15일 의거는 마산의 민주당 당원들이 앞장서 부정선거를 밝혀내면서 시작되었고, 여기에 시민, 학생이 동참했다. 이 시위에서 경찰이 총을 쐈고 7명의 시민, 학생이 사망했으며, 870명이 부상당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승만은 마산의 시위가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마산시민은 다시 시위를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서울에서도 고려대학교 학생을 시작으로 주요 대학의 학생들이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시작했고, 이승만 정권은 시민을 향해 폭력으로 맞서다 정권이 붕괴된 것이다. 01 4월혁명과 학생 / 오제연(성균관대학교) 1. 머리말 2. 4월혁명 당시 학생들의 존재 양태 3. 학생시위의 전개 과정과 시기별 양상 4. 학생시위의 조직적 특징 5. 맺음말 해방이 되고, 미군정 시기를 거쳐 1948년 정부를 수립한 이후, 정부는 교육 예산을 연평균 10.5% 사용하고 있었다. 즉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초등학생 취학률은 100%에 가까웠고, 중학생, 고등학생의 수도 15년 사이(1945-1960년) 10배 가까이 늘어났다. 4.19혁명의 주체는 '학생'이면서 특히 '고등학생'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서울에서 고려대학생이 시위를 시작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2월 28일 대구의 경북고, 대구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하면서 실질적인 4.19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4월 16까지도 전국의 도시에서 고등학생들이 시위의 주체가 되었고, 혁명의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다 4월 18일 서울에서 최초로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고, 이후 이승만이 하야 선언을 한 4월 26일까지도 대학생보다는 고등학생이 숫자에서도, 시위의 참여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학생들의 시위 양태는 2월 말에서 선거가 있던 3월 중순까지, 선거 이후, 그리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학생을 정치도구로 활용하지 말라는 주장에서, 공명선거, 선거부정 규탄으로 이어졌고, 이후 본격 혁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02 4월혁명과 도시빈민 / 하금철(한국학중앙연구원) 1. 머리말 2. ‘폐허의 도시’ 속에서 등장한 도시빈민 시위 3. 학교별 시위 본격화 이후―‘불량행위’로 해석되는 도시빈민 시위 4. 도시빈민의 범죄화 5. 맺음말 4.19혁명에서 도시빈민의 존재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위에 참여한 대중의 비율에서 도시빈민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연구다. 상식으로만 봐도 '도시빈민'은 당시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보편적 민중의 삶을 규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불과 7년이 지났을 뿐이고, 국토가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경제활동의 근거가 거의 없었던 민중은 당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도시빈민'의 형성은 전쟁 이후 예전부터 도시에서 살던 사람과 지방,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도시빈민은 지방,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고학생' 즉 스스로 돈을 벌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도시빈민'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통상적 기준으로 도시빈민은 경제적으로 하층민이며,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으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다. '도시빈민'에 관한 논의는 이후 80년대까지 중요한 주제로 논의되지만, 이 책의 연구에서 '도시빈민'의 혁명 참여가 나중에 어떻게 배신당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4.19혁명에 적극 참여한 도시빈민들이 상대적으로 엘리트이자 기득권 집단인 '학생 집단'과 분리되는 과정, 도시빈민의 혁명성이 범죄로 낙인 찍히면서 혁명의 동력이 차단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4.19혁명으로 정권은 바뀌었지만, '민중의 국가'가 되지 못한 것을 두고 '미완의 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지도 논의의 대상이다. 03 4월혁명과 여성 / 홍석률(성신여자대학교) 1. 머리말 2. 기록에서 배제되는 여성들 3. 여학생의 민주항쟁 참여와 활동 4. 일반 여성들의 민주항쟁 참여 5. 맺음말 4.19혁명에서 여성의 참여를 기록한 내용이 적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혁명 과정에서 여성 - 중학생, 고등학생, 20대, 중년, 노인 여성 등 - 의 참여는 고르게 발견되고 있음에도 기존의 연구와 언론에서 여성이 혁명에 적극 참여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그 근저에 가부장제 사회, 남성우월주의,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의 사회활동은 남성에 비해 부차적으로 인식되어왔으며,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거나 돋보이는 역할에 대해서는 사회적 압력이 가해졌다. 즉, 여성은 남성에 종속적 역할로 머물러야 한다는 가부장제 사회적 인식이 보편성을 띄던 사회상황이었고, 이 시기 대중의 성 인식은 매우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어, 봉건적 수준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진보적 엘리트, 좌익 정당에서는 여성의 참정권, 남녀평등에 관한 정책을 내놓기도 하는 등 여성의 불리한 사회적 위치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중의 인식 수준은 진보적 여성관을 수용할 정도로 높지 않았다. 여성은 사회적 약자라는 점에서 도시빈민과 비슷하지만, 젠더로 구분하는 순간, 도시빈민보다 더 열악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물론 도시빈민 내부에서도 젠더의 구분이 가능하고, 도시빈민 여성은 최하위 존재로 규정되어 있다는 건 이미 연구결과로 드러난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4.19혁명에 적극 참여한 것은, 사회의 억압구조를 타파하려는 여성 일반의 집단의식이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04 4월혁명과 근대화 주체론의 변화 / 홍정완(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1. 머리말 2. 1950년대 한국사회의 근대화 담론과 주체 3. 4월혁명과 근대화 주체론의 변화 4. 맺음말 05 4월혁명의 담론과 주체 / 황병주(역사문제연구소) 1. 머리말 2. 혁명 담론의 추이 3. 혁명 주체론 4. 맺음말 06 4월혁명의 자유주의적 전유―『동아일보』와 『사상계』 비교를 중심으로 / 윤상현(경남대학교) 1. 머리말 2. 혁명의 과정과 주체―『동아일보』의 4월혁명 서사구조 3. 혁명의 성격 짓기―『사상계』 지식인혁명/정신혁명 4. 맺음말 4월 혁명을 두고 한국의 여러 계층과 이해 집단에서는 혁명의 성격을 다르게 해석, 규정하고 있다. 4월 혁명을 민중이 주도한 '민중 혁명'으로 볼 것인지, 학생이 주도한 엘리트 계층의 혁명인지, 혁명의 성격을 두고도 민주주의 혁명인지, 민권 혁명인지 등 당시 혁명 세력 내부에서도 이런 논의는 정리되지 않은 채 무수한 담론만 남기고 시간이 흘렀다. 4.19혁명을 통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이후 부르주아, 엘리트 계층과 민중은 분리되고, 민주주의보다 파시즘에 경도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등장하면서 곧바로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왜곡된 군부독재의 등장과 함께, 세계적으로는 제3세계에서 발생한 수많은 군부쿠데타의 연속선에 있었다는 세계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2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약소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새로운 국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군부의 개입으로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한국 역시 그런 제3세계 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부르주아, 엘리트 계층은 자신들이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고 있었고, 이들의 스피커인 언론과 잡지도 4.19혁명을 학생이 주도한 엘리트 혁명으로 교묘히 구성하고 있었다. 이는 분단 상황으로 남북이 긴장 상태에 있고, 미국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점, 세계적으로는 미국과 쏘련의 냉전이 고조되고, 민중의 역량이 성장하지 못하던 시점이었던 것을 감안했을 때, 세계사의 흐름에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 경제적 토대가 없는 상황에서, 시민민주주의의 확대는 엄두를 내기 어려웠고, 국민 개개인의 의식, 지적 수준이 함양되지 못한 60년대 초반의 한국상황에서도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이루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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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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