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2-26(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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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 내전
    [책] 스페인 내전 - 갈라파고스 많은 경우, 한 권의 책을 읽으면 그 책은 마치 하나의 씨앗처럼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치고 열매를 맺으며 연쇄적으로 퍼져나간다. 갈라파고스 출판사에서 나온 '스페인 내전'을 읽으면서 다른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게 된다. 이 책은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스페인 내전에 관한 내용을 다룬 책이다. 알라딘 서점에서 '스페인 내전'으로 검색하면 쓸만한 책은 앤서니 비버가 쓴 '스페인 내전'(교양인)과 갈라파고스에서 출판한 '스페인 내전'이 있을 뿐이다. 애덤 호크실드가 쓴 '스페인 내전'은 앤서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과는 각도가 약간 다르다. 앤서니 비버가 '통사적'으로 접근했다면 애덤 호크실드는 미국 출신의 자원병들에 관해 보다 깊이 있는 서술을 하고 있다. 미국인으로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가한 국제주의자들 가운데 생존자를 만나거나 그의 친구, 가족, 지인들을 만나 인터뷰 하고, 그들이 남긴 자서전, 회고록, 전기를 비롯한 출판물들을 찾아서 미국인들이 스페인 내전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싸우다 죽었는지를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작업들이 조금 더 일찍 시도되었다면 보다 생생한 증언들을 들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 군인을 다룬 이야기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같은 최근의 수작들은 물론이고 이미 70년대부터 헐리우드에서는 수 많은 전쟁영화를 만들면서 미국 군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얼마나 영웅적으로 싸웠는가를 널리 알리고 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은 스페인 내전에 관한 한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그곳에 가서 공화파를 위해 싸웠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듯 하다. 그나마 헤밍웨이가 직접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경험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를 써서 널리 알린 것이 거의 유일할 정도로 미국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미국인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진보적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 여러 나라에서 몰려 온 국제여단 사람들의 구성은 출신이나 신분에 전혀 상관없이 그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막 세계경제공황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자본의 악랄함과 잔인함을 몸으로 느낀 사람들이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기운이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자본의 힘도 강력하지만, 그에 반발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념 역시 그에 못지 않게 강력한 기운을 발산하던 때, 스페인 내전은 제국주의화 하는 독일로 대표되는 자본과 파시즘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동양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했고(중일전쟁),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으며, 일본은 이미 동남아시아를 침략해 식민지를 확장하고 있던 시기였다. 미국에서는 1929년 촉발한 경제공황으로 자본의 수탈로 인한 노동계급의 착취가 극심하던 시기였는데, 이때 미국언론에서는 '사람들이 빌딩에서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렸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이 바로 '자본(가)'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언론과 권력은 숨기고 있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배한 독일과 주변 승전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전후 보상금 문제를 비롯한 승전국의 요구에 독일 국민은 파시즘의 출현으로 대답했다. 유대인과 관련한 사안이 파시즘의 대두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럽 전역에서 당시 유대인을 핍박한 것은 단지 히틀러 정권만이 아니었고, 유럽인 대부분이 유대인에 대한 경멸과 분노의 감정을 보이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은 현대 사회에서 최초의 '이념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스페인의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왕당파를 비롯한 수구집단-왕정 옹호론자, 가톨릭 집단, 자본가, 군부, 부르주아 등-은 공화파와의 권력 다툼에서 근소한 차이로 진다. 수구집단은 군부를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하는데, 이미 수십 차례의 쿠데타가 실패한 상황에서, 프랑코는 스페인에서 쫓겨나 모로코에 있다가 군대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킨다. 프랑코를 지원하는 세력은 스페인 내부의 수구집단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 등 주변 국가도 노골적이지는 않아도 공화파를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프랑코 군부를 지원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는 것을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는데,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던 1936년 무렵에 이미 히틀러는 독일을 장악하고 유대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자기들의 새로운 무기를 실험하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많은 무기와 군인을 지원했으며, 이 시기를 통해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켜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불간섭 원칙을 지켰는데, 그 이유가 미국 내부의 보수집단-자본가, 가톨릭 세력-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런 불간섭 원칙이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의 패배에 중요한 원인이 된다. 쏘련 역시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페인의 공화파를 지원하지 않았는데, 독일과의 불가침조약 등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스탈린의 의도는 자신의 집권 초기 쏘련 내부에서 정적들을 굴복시키고 숙청을 감행해 자신의 권력 기초를 다지기 위한 계산이 내포되어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은 이런 세계적 정세를 모르지 않았지만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수구집단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패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서 자원한 국제여단 참전군인은 약 7천 명 정도이고 그 가운데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은 약 2천5백 명 정도에 이른다. 내전에서 패배한 인민전선은 내부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공산당과 무정부주의자 그룹, 마르크스통일노동자당(POUM) 등 주요 세력들이 각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략을 다르게 구사하고, 일사분란한 연대를 이루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여기에 각 정파들이 이념에 따라 다른 전략을 세우고, 갈등을 일으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스페인 공산당은 쏘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스탈린의 요구를 들어야 했는데, 그것이 무정부주의 집단에게는 심각한 폭력이었다. 스페인 정부의 공식 권력은 인민전선, 무정부주의 집단에서 가지고 있었지만 스페인 공산당은 조직되어 있고, 쏘련과의 연계로 내전에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쏘련의 스탈린이 스페인 내전을 지원하지 않으면서 스페인 공화파 내부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결국 세계 정세도 파시즘이 확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점에서 스탈린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으며 공산주의의 국제화 전략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스페인 내전은 공화파가 패배한 역사적 사건이었고 세계 모든 나라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지만, 내전에 참가한 인민전선과 국제여단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자들의 투쟁은 빛바래지 않는 기록으로 남았다.
    • 문화
    • 독서
    2022-02-26
  • 100디스커버리
    [책] 100 디스커버리 나는 과학책 읽기를 좋아한다. 과학과 수학을 다루는 책들은 어지간한 소설보다 재미있다. 책을 본격 읽기 시작하던 70년대 중반부터 시대의 흐름과 함께 나의 책읽기도 변했는데, 초기에는 소설과 기초 교양(철학)이 전부였다면 80년대 중반부터는 사회과학 책들을 많이 읽었고,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과학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본업이 글을 쓰는 것이라 문학과 관련한 책은 시대와 관계 없이 꾸준히 읽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과학책 읽기에 쓰고 있다. 과학과 수학과 역사를 다루는 책은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또한 관념적이고 혹세무민하는 세상 속에서 이성의 불빛을 꺼지지 않도록 하는 연료는 다른 어떤 것보다 과학의 신선한 이론들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으로 기존의 이론을 뒤엎고, 보다 날카롭고, 보다 정교한 이론으로 탈바꿈한다. 그 과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화의 과정과 매우 닮아 있다. 최근에 읽은 책들도 거의 과학책인데, 그 가운데서 이 책은 앞부분을 읽다 중단했다. 앞부분에서 '도예술의 발달'이라는 제목으로 도자기의 역사가 나오는데, 지은이는 도자기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일본 죠몬 시대의 토기가 가장 오래 되었으며 기원전 1만1천년 전에 일본에서 토기의 역사가 인류 최초로 시작되었다고 썼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직감으로 이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간단하게 인터넷을 검색했다. 요즘은 어지간한 내용이라면 아주 간단하게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검색을 해 보니,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일본 죠몬토기(縄文土器) 일본도자의 역사는 세계 최고(最古)의 토기라고 일컫는 죠몬토기(縄文土器) 에서 시작된다. 죠몬토기의 이름은 오모리카이즈카(大森貝塚)의 발굴로 알려진 E.S.모스가 사용한 Cord marked pottery에서 유래된다. 방사성탄소(C14) 측정에 의하면 최고(最古)의 것은 약 1만2천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만년이상 계속된 죠몬토기는 그 기형의 변화에 의해 크게 6개의 시기구분(초 창・조기・전기・중기・후기・만기)으로 나눠지고, 게다가 지역적으로도 상세하게 편년되어 있으며 한마디로 죠몬토기라고 해도 그 실체는 가지각색이다. 초창기의 두채문토기(豆粒文土器)와 융선문토기(隆線文土器), 중기의 화염형토기(火焰形土器), 후기의 카메가오카식토기(亀ヶ岡式土器), 거기에 중기부터 만기에 걸쳐서 토우(土偶)등이 대표적이다. 죠몬토기는 일반적으로 흙타래를 쌓아 올려 만드는 방법이 채용되어 있으며, 가마를 구축하지 않은 노천가마에 의한 번조방법으로 800~900도 전후에서 구워졌다. 이 내용만 보면, 죠몬토기가 세계 최초의 토기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듯이 도자기의 역사는 중국이 최초다. 중국도자의 시점 중국 도자기는 1만년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8,000-15,430년 전. 원뿔형 솥. 중국 호남성 옥섬암 동굴에서 발굴된 고대의 토기 파편들이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솥은 두께가 아주 두꺼운데, 발이 거칠고 부드러운 흙으로 빚어져 낮은 온도의 불에서 구워졌다. 토기의 흙에는 작은 자갈도 꽤 많이 섞여 있었다.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하면 이런 파편들이 18,000-15,430년 전 것으로 밝혀졌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16,000년 전의 토기보다 더 앞선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양사오仰韶문화기에는 채도(표면에 색깔을 넣어 구운 도자기), 홍도紅陶, 백도白陶가 제작되었고, 용산龍山문화기에는 흑도黒陶가 번성하였습니다. 상商왕조에는 원시청자라고도 불리는 회유도灰釉陶가 등장합니다. 춘추전국시대 말부터 전국시대에는 인문경도(印文硬陶,도장같은 걸로 무늬를 찍어서 나타낸후 질이 딱딱한 도기) 와 회유도가 제작되었습니다. 중국도자기의 역사가 '인류 최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중국도 세계 4대 문명발상지 가운데 하나이니 토기의 역사 역시 인류 최초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다른 지역일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러면 왜 저자는 일본의 죠몬토기를 인류 최초의 토기라고 단정하고 글을 썼을까. 그것은 그가 본 자료가 그렇기 때문이다. 죠몬토기를 세계 최고의 토기라고 했던 사람은 일본 학자가 아니라 미국 학자 모스가 주장한 것이다. 영어로 된 자료를 읽을 수밖에 없었던 저자는 모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여 일본의 죠몬시대 토기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의 토기는 일본 죠몬 시기에 독자적으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신석기 시대 전반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주장도 있다. 상식적으로도 인류의 이동이 중국을 통해 한반도와 일본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토기의 역사 역시 인류의 이동과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일본에서 토기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결국, 이 책은 앞부분에서 과학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주장을 하는 내용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물론 이 책에서 이 부분만 제외하고 다 맞는 내용일 수도 있겠지만, 하나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자 다른 것들도 의심하게 된다. 책의 내용을 번역한 사람도 의심하지 않았고, 편집한 출판사 역시 이 내용을 의심하지 않았다. 원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옮기는 것은 좋지만, 출판사 차원에서 이런 오류는 바로 잡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 문화
    • 독서
    2022-02-26
  • 사소한 것들의 과학
    [책] 사소한 것들의 과학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기계공학과 교수인 마크 미오도닉의 저서. 재료공학을 전공한 공학자답게 재료에 관한 이야기를 과학, 역사, 문화의 관점에서 들여다 보고 있다. 재료공학은 현대과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재료의 다양성과 새로운 재료의 발견과 개발, 재료의 활용에 있어 재료공학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분야지만 인류의 문명을 개척, 개발하는 선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재료공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쉽게 쓴 재료공학 해설서라고 볼 수 있다. 교양과학분야에 해당하므로 책의 내용이 전문적이거나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상식을 배우고 이해하기에는 적절한 수준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모두 열 개의 재료를 다루고 있는데, 각각의 재료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나오겠지만, 여기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1장 불굴의: 강철steel 2장 미더운: 종이paper 3장 기초적인: 콘크리트concrete 4장 맛있는: 초콜릿chocolate 5장 경탄할 만한: 거품foam 6장 상상력이 풍부한: 플라스틱plastic 7장 보이지 않는: 유리glass 8장 부서지지 않는: 흑연graphite 9장 세련된: 자기porcelain 10장 불멸의: 생체재료implant 다행히 여기서 설명하는 재료들 가운데 서너 가지를 빼고는 재료의 역사나 재료의 문화사적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서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각 재료들의 과학적 분석은 흥미롭게 읽었다. 미오도닉은 과학자답게 모든 재료의 기본 구성은 '원자'라고 전제하고 설명을 시작한다. 재료의 변화는 원자 배열의 변화이며, 재료를 가공하면 원자의 구조와 배열이 바뀌게 되고, 서로 다른 재료들의 결합 역시 원자와 원자의 결합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원자 단위의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만지고 사용하고, 활용하는 모든 물성에는 원자 단위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비이성적인 생각을 조금은 덜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즘은 나노 단위의 사업 분야가 눈에 많이 보이는데, 나노는 원자보다 10배나 큰 단위지만 여전히 분자보다는 훨씬 작은 단위다. 지구에서 발견한 원소들 가운데 약 98% 이상을 차지하는 원소는 불과 8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극미량만 존재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흑연과 다이아몬드의 차이는 극적으로 드라마틱하다. 스테인레스 스틸은 강철의 역사에서도 가장 최근에 발명한 재료로,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숟가락, 젓가락부터 매우 많은 재료들이 스테인레스 스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오래 전에 개발되었지만 비용 때문에 상업화되지 못한 유용한 재료로 '에어로겔'이라는 게 있는데, 최첨단의 과학분야에서만 활용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매우 강력한 단열, 방탄 효과를 가지고 있는 이 재료는 대체제가 많이 개발되는 바람에 우리의 일상에서 쓰이지 못하고 있다. 아마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최첨단의 단열, 방탄 재료들이 일반 건축재료로 쓰일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한다. 이 책은 재료의 본질에 관해 잘 설명하고 있지만, 글의 내용과 수준이 조금은 들쭉날쭉해서 어떤 부분은 훌륭하지만 어떤 부분은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다. 아마도 대중의 수준을 맞추기 위해 여러 모로 고려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차라리 조금 더 전문적으로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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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2-02-26
  • 기나긴 이별
    [책] 기나긴 이별 모처럼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는 시간은 마치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소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세계와 인물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소설 뿐 아니라 인문학, 과학 책도 마찬가지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후기 장편소설 '기나긴 이별'은 그의 첫 장편 '빅 슬립'에 비해 훨씬 신파적이다. 필립 말로는 총 한 발 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생만 한다. 그에게 있어 '긴 이별'은 좋아했던 친구일 수도, 좋아했던 여인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가 살아왔던 쓸쓸하고 우울했던 과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은, 지극히 남성적이면서 미국적이다. 그가 영국에서 꽤 오래 살았다고는 해도 주인공 필립 말로가 살고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다. 게다가 이 작품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자적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어서, 그의 일대기를 이해하면 이 소설을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필립 말로가 우연히 알게 된 한 사내는 갑부의 딸과 결혼했지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말로는 그 사내와 가끔 바에서 술을 마시는 정도로 알고 지내다 어느 날, 그 사내의 부탁으로 멕시코 국경 너머로 태워다준다. 그리고 그 사내의 아내가 사체로 발견되고, 그 사내 역시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린다. 평범해 보이는 시작과 달리, 사건은 점차 미궁으로 빠지는 듯 보이면서, 감추어진 사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를 찾았던 사람들이 차례로 자살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유명인, 부자들의 죽음이 발생하면서 삼류 언론의 먹잇감이 되지만, 진실은 십여년 전의 전쟁 당시(제2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소설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거의 마지막 장편소설이기도 하고, 그의 작품 가운데서 '빅 슬립'과 함께 최고의 작품이기도 하다. 길고 긴 이야기지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힌다. 챈들러의 글쓰기는 독백, 만연체로 현대의 글쓰기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이야기의 핍진함은 탁월하다. 그것은 주인공 필립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마치 실제의 삶을 살아가는 듯한 세부적인 묘사 덕분이다. 등장 인물들도 그 지역에서 실제 살고 있는 인물들처럼 등장과 퇴장이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부르주아들의 추악한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그들 사이의 범죄가 많은 부분 돈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치정 살인이 주된 내용이지만 딸의 추잡한 사생활을 감추기 위해 보이지 않는 힘을 쓰는 것이 결국 돈의 힘이라는 것도, 지극히 미국적인 해결 방식이자 돈이 곧 권력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 반전은 독자를 충격으로 몰고 간다. 주인공 필립 말로는 자신의 친구가 멕시코로 도주하고, 그의 아내가 살해당한 시점부터 꽤 오랜 기간 경찰과 폭력조직 사이에서 시달림을 당하며 고생을 하지만 오로지 혼자서 꿋꿋하게 견딘다.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두 사람이 더 죽고, 마침내 사건이 종결되고 자유의 몸이 된 필립 말로를 찾아온 낯선 사내. 독자는 그를 반갑게 맞이할까, 증오할까.
    • 문화
    • 독서
    2022-02-26
  • 암퇘지
    [책] 암퇘지 프랑스 작가 마리 다리외세크의 데뷔작. 첫 작품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특징은 대화가 거의 없는 독백체라는 것과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방식이다. 한 여성이 점차 돼지로 변해간다는 줄거리인데, 인간이 동물로 변해가는 이야기는 꽤 많다. 늑대인간이 그렇고, 벌레로 변하거나, 심지어 진짜 돼지로 변하는(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경우도 있다. '붉은 돼지'에서도 주인공은 어느 순간 돼지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개인)이 인간의 모습이 아닌, 다른 동물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것은 자의적인 선택(붉은 돼지)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카프카의 '변신') 어느날 갑자기 변하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선택일 경우라도 그것은 자신이 살아왔던 시간적, 공간적 원인 때문이므로 순수하게 자발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하나, 인간의 모습에서 다른 동물의 모습으로 변하고 싶거나 변해 버리는 경우, 그 이유가 긍정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즉 자신의 현재 모습(상황)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외면하고 싶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변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분명 자의적 선택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변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라고 하겠다. 여성이 '돼지'로 변신하는 과정은 여성이 놓여 있는 사회적 위치와 존재의 의미를 상징한다. 사회가 여성을 '돼지'로 바라보고 있고, 돼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묻는 것이다. 즉 그런 시선은 온전히 남성의 시각이며, 가부장제와 마초이즘이 원하고 바라는 여성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여성노동자의 이미지는 아닌가 하는 것이다. 향수가게 남성 지배인이 성추행을 해도 참아야만 하는 처지라면, 노동 외에 먹고 살 수 없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수치와 모욕을 감내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같은 인권 선진국에서도 여성의 처지는 약자 가운데 약자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돼지로 변한 상태에서 호텔의 아랍인 관리인의 도움을 받는다. 어떤 선입견도 없이 주인공을 도와주고, 서로 사랑하게 되는 아랍인은 그러나 불법체류자로 경찰에 잡혀가 추방당한다. 부르주아들은 이너써클의 난잡한 섹스 파티를 열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남성이 대통령이 된다. 이곳에서도 여성들은 노리개로만 등장한다. 여성들의 존엄성과 자존감이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돼지의 변신으로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성 작가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여성의 존재에 관한 사회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 소설의 형식이나 줄거리가 참신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소설과 비교할 수 있는 비슷한 소설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두 소설이 '변신'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변신의 과정을 두고 주인공이 드러내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암퇘지'의 주인공은 자기가 왜 '돼지'로 변했는지에 관한 자기성찰이 없다. 오히려 돼지로 변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그것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반면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기가 한 마리 벌레로 변한 것을 깨달은 다음,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주의 깊게 돌아본다. 문학적 깊이와 철학적 의미를 두고 볼 때, 카프카의 '변신'은 인간의 본질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고, '암퇘지'는 시대를 풍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록 번역으로 읽은 내용이지만 두 소설에서 문장, 묘사, 의미 등에서 '변신'이 훨씬 뛰어남을 느끼게 된다. '암퇘지'도 사회의 모순과 현상을 풍자하고 있어 재미있지만 깊이가 부족한 것이 아쉽다.
    • 문화
    • 독서
    2022-02-26
  • 대장정
    소설 대장정 오랫만에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이 책(다섯권짜리다)을 헌책방에서 발견했을 때, 망설임없이 구입한 것은 출판사 이름 때문이었다. 중국공산당 홍군의 대장정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지식이 있었으므로 내심 대단할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며칠 전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내가 가졌던 선입견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소설은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책을 덮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홍군의 대장정이고, 그 결과가 이미 알려져 있어 흥미가 반감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이 소설을 쓴 작가 웨이웨이는 중국 인민을 대상으로 창작을 했으므로 인민들이 '대장정'에 대한 기본 상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즉, '대장정'에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이 소설이 그다지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대장정'에 관한 약간의 상식을 알아두면 좋겠다. ('대장정'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도 소설 자체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거의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대장정'의 실제 코스를 세 번이나 답사를 했다고 한다. 거리만으로도 무려 1만2천km나 되는 엄청난 거리이며, 그 길이 하나같이 험난하고 척박한 땅을 지나가고 있어서 그냥 지나가는 길이라고 해도 힘든 길이었는데, 당시 홍군은 최악의 상황에서 목숨을 내놓고 그 길을 지나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결코 평온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남부에 자치정부인 소비에트를 구축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지만 반공을 기치로 내세운 최대 군벌 장제스(장개석)에 의해 공격을 받아 쫓기게 된다. 당 지도부는 궤멸 직전의 당을 이끌고 남부 내륙에서 북쪽 연안까지 탈출을 하는데, 이 과정이 바로 '중국공산당 노농홍군 대장정'이다. 장제스는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초기 공산당원의 약 80%를 학살했다.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군벌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군사조직이었으며, 중국공산당은 중국 전체 인민의 약 90%를 차지하는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정치조직이었다. 이 소설은 '대장정'의 과정인 약 1년(368일)간의 시간을 압축했으며 거리는 약 1만km에 이르는 공간을 그렸다. 중국공산당의 상징 인물들인 마오쩌둥(모택동)은 물론이고 저우언라이(주은래), 주더(주덕), 펑더화이(팽덕회), 덩샤오핑(등소평), 린뱌오(임표) 등 공산당 지도자들이 등장하고, 홍군의 중간 간부들은 물론 일반 병사까지 고르게 등장한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집단으로, 노동자와 농민, 소수민족의 정치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모든 인민의 모범이 된다. 공산당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이 나이 어린 병사를 대하는 태도는 극진하다. 홍군에서 일방적 명령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동등한 동지로서 단지 직위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데, 기본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동학'이 보여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매우 비슷하다. '동학'도 서양의 침략에 맞서 힘없는 백성들이 뭉쳐 새로운 세상(개벽)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실패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해 약 8만 명의 홍군이 목적지인 연안에 도착했을 때는 90%의 병력을 잃고 불과 7천명만이 남게 되었지만 이 병력으로 마침내 10년의 투쟁 끝에 중국 전체를 해방하는 혁명을 성공하게 된다. 작가는 '성공한 역사'인 '대장정'을 그리면서 크나큰 자부심과 자긍심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 삐딱하게 본다면 중국공산당을 미화한다고 하겠지만, 나는 이 소설이 '대장정'을 미화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 당시의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혁명에 관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고, 인민의 해방을 위한 모범을 보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고결한 품성은 마르크스-레닌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해방의 이론이 혁명의 과정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날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상징하고 있다. 알려진 것처럼 '대장정' 과정에서 홍군은 90%의 병사들이 낙오하거나 국민당군에 포로로 잡히거나 길 위에서 죽어갔다. 전투로 죽은 병사들이 가장 많지만 포로로 잡혀서 죽은 병사들도 몇 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중국의 혁명 과정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진정한 영웅들이다. 마오쩌둥도 대장정을 마치고 대장정 과정에서 죽은 모든 홍군 병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했다. 이 소설이 대단한 것은, 소설만큼이나 훌륭한 그림이 거의 매 페이지마다 있다는 것이다. 그림은 션야오이가 그렸는데, 한컷 한컷에 온 정성을 들여 그 자체로 작품이다. 그림은 아름답고 선명하게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서, 소설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인물과 똑같이 닮은 얼굴이어서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홍군의 '대장정'은 중국의 최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에 견줄 수 있다. 실제 소설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대장정을 삼국지와 비교하기도 한다. 중국의 역사에서 '삼국지'는 단지 소설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훈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중국인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을 낮춰보고 때로 비하하기도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소수의 인원이 결집해 농민과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 결국 혁명에 성공한 뛰어난 힘을 가진 나라이고, 저력이 있는 나라다. 이제는 정치체제는 공산주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라는 조금은 이상한 형태의 나라로 변했지만, 그들이 현대사에서 보여 준 혁명의 과정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고 있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
    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쉬지 않고 한 번에 다 읽었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는 내용이었고, 내가 느끼고, 생각하던 감정들이 글로 표현되어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로서, 작가로서 박정애 작가의 이 소설은 ‘가족’의 의미, 가족이라는 하나의 작은 집단 속에서 개별 존재로 살아가는 부모와 자식의 처지를 지극히 현실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족 소설이나 청소년 소설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중년의 부모와 청소년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고민을 진지하게 묻고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그런 시도를 하는 소설들은 많지만, 대개 교훈적이거나 낭만적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현실이 힘들고 고달프기 때문에 상상의 세계에서라도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현실을 비껴가는 결말은 당장의 슬픔과 아픔을 외면하는 당의정에 불과하다. 이 작품은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다. 중년의 부부와 청소년의 아들과 딸이 가지고 있는 세계는 아마도 비슷한 세대에서 공감할 내용이 많을 것이다. 나는 아들 민수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고 있다. 또한 민수의 아버지 용규의 깊은 마음도 이해하고 공감한다. 결국 정란과 용규는 아들 민수의 꿈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데, 나 역시 이 소설의 내용을 깊이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바로 민수가 자신의 삶을 이미 일찍부터 결정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부모의 모습이었다. 나도 이 소설에서 묘사하는 삶의 일부분과 비슷하게 살았거나 살고 있다. 나는 그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주변에서 드문 경우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이제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학력, 혈연, 지연과 같은 비정상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의 삶이 아니기를 바라고, 그렇게 될 것으로 믿는다. 따라서, 민수가 학교를 그만두고 일찌감치 시골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하겠다는 생각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또한 민수의 아버지 용규 역시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지만, 퇴직을 하고 치매가 시작되는 아버지를 모시며 농사를 짓고, 농촌에 적응하겠다는 태도도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세대의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은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자식들을 그렇게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다그치는 것도 과거의 경험을 기준으로 자식을 재단하는 것이다. 부모의 불안과 자식에 대한 불신은 부모 세대 스스로가 만든 공포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그들 스스로가 마땅한 대안이나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아이들을 공부기계로 만들어야 안심하는 부모는, 세상을 경쟁과 투쟁의 전쟁터로 만들어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병기를 길러내는 폭력적인 부모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이들은 아무리 어려도 자기 생각이 있고, 청소년이 되면 부모보다 더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그러니 아이들을 믿고, 오로지 격려하고, 응원을 보내는 것만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따뜻한 밥 먹여주고, 때 맞춰 옷 사주고, 아이들이 원할 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좋은 음악이나 책을 권하고(강요하지는 말고), 그저 느긋하게 바라만 봐주면 아이들은 잘 자란다. 이 소설은 아이들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엄마, 아빠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학교에서 고통받는 청소년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세지다. 2016년 객주문학과 창작관에서 박정애 선생님과 보낸 짧지만 따뜻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이렇게 애틋한 작품이 그곳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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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2-02-06
  • 뜻밖의 생 - 김주영
    뜻밖의 생 여든의 현역 작가는 드물다. 물리적으로도 여든의 나이는 창작을 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여건임에 틀림없다. 김주영 작가는 비교적 늦게 문단에 데뷔했고, 데뷔한 이후 곧바로 줄기차게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단편이었고, 내용은 풍자와 우화였다. 그리고 몇 편의 통속 장편소설을 쓰고 나서, 작가는 한국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길 작품 '객주'를 집필하고, 그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현재까지는. 물론 작가가 아끼는 작품이 꼭 '객주'가 아닐 수는 있다. 그가 쓴 역사소설은 '객주' 말고도 '화척', '활빈도', '야정'과 같은 작품들이 있고 그 작품들은 모두 기존의 역사소설을 뛰어넘는 작품들이었으니 말이다. 70년대 말부터 쓰기 시작한 역사소설은 '객주'를 이어 한동안 계속되었고, '야정'을 끝으로 더 이상의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 호흡이 길고, 묵직한 주제와 민중의 언어로 기록된 문학이 흔치 않은 한국문학계에서 김주영 작가의 역사소설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놀라운 결과물이다. 대하 역사소설 이후 김주영 작가의 작품들은 다시 문학의 초기 세계로 돌아가는 듯 하다. '아라리 난장'을 비롯해 그가 쓴 2000년대 이후 일련의 소설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단한 삶을 그리고 있다. 또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있는데, '엄마'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엄마'를 읽으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실제의 삶과 똑같지는 않지만, '문학적'으로 채색한 그의 삶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설 '뜻밖의 생' 역시, 작가의 삶에서 얻은 경험과 흔적이 많이 묻어난다. 부모에게서 사랑받지 못한 어릴 적 기억, 박복한 떠돌이의 삶, 외롭고 슬픈 인생, 늘 밑바닥을 전전하는 풍천노숙의 생활, '행복'이 무엇인지 실체를 느낄 수 없었던 나날들, 학대와 비참함으로 가득한 공간.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삶을 살아오면서도 결국 삶에서 일정하게 해탈하는 경지에 이른다. 아무 것도 가져 본 적이 없고, 배운 적 없는 한 사람이 오로지 시간과 경험만을 통해 뼈저린 각성을 한다는 것은 흔치 않지만,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소설만으로 보자면, 이 소설은 '젊은 소설'은 아니다. 주인공들은 과거를 바라보고, 과거에 묶여 있으며,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드라마틱 하지도 않고, 회상으로 일관하는 빛바랜 내용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주인공 박호구는 어릴 때와 이십 대의 과거 외에는 그 이후의 삶은 드러나지 않는다. 박호구와 만나게 되는 여성 최윤서의 삶 역시 드러나는 것은 거의 없다. 그가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그의 신산한 삶에 관한 자세한 묘사는 없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당나귀는 박호구와 함께 어울렸던 개 칠칠이를 말한다. 칠칠이가 보여 준 박호구에 대한 깊은 애정을 잊지 못하고,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박호구는 칠칠이를 찾아 전국을 떠돈다. 그가 찾는 것은 실체로서의 '칠칠이'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일 것이다. 불교에서도 '소를 찾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구도의 길임을 뜻하지 않던가.
    • 문화
    • 독서
    2022-02-06
  • 소송-프란츠 카프카
    소송-프란츠 카프카 은행의 업무대리인 요제프K는 어느날 '체포 당했다'는 통보를 받는다. 살아가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지만, 그는 소송을 해야 하고, 법정에도 출두해야 한다. 소송은 실체가 없지만, 그의 삶을 지배하고, 그는 삼촌의 소개로 변호사를 만나고,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법원의 판사에게 도움을 받으려 한다. 하지만 법원의 실체는 모호하고, 법정은 빈민촌의 다락방에 존재한다.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구조가 역겹고,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송'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좌절한다. 그리고 어느날,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다. 예전에 한 번 읽었고,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전자책으로 나온 것을 다시 읽었다. 새삼 느낀 것은, 카프카의 작품은 여전히 난해하고 몽환적이라는 느낌이다.카프카의 작품 역시 다른 작가들과 같이 '개인의 체험'에 바탕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학적 표현 방식이 여느 작가와 많이 다른 것은, 그의 감수성이 남다르기 때문일 게다.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소송'을 읽다보면 마치 꿈, 그것도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환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둠 속, 그림자, 분명하지 않은 윤곽, 모호한 대화, 독백, 무표정한 사람들, 알 수 없는 시간, 밤과 새벽의 경계 등 작품에서 묘사되는 장면이나 풍경, 시간,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모호하다.카프카는 문학을 추구했지만, 그의 집안에서는 줄곧 문학을 반대했고, 카프카의 결혼도 결국 문학과 결혼 사이의 갈등에서 결혼을 포기하고 문학을 선택하게 된다.카프카는 철저하게 문학 속에서 살았고, 작가를 꿈꿨으며, 작가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는 가족의 기대와 현실의 욕망, 그리고 자신의 꿈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했으며, 그 때문에 요절하게 된다.'소송' 역시 그가 겪었던 갈등과 방황의 결과물이며, 카프카의 약혼과 파혼이 여러 번 거듭되면서, '소송'과 '법정'이라는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다.건조한 문장, 난해한 설명, 불명확한 이미지, 진심을 알 수 없는 대화와 독백, 의심스러운 태도와 적의를 가진 이웃들 등 카프카의 작품은 마치 짙은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카프카의 작품은 삶의 본질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드는 무서움이 있다. 그의 난해함 속에 감추어진 삶의 본질, 인간의 본질은 대개 적대적이고, 쓸쓸하며, 외로운 존재들이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중요한 정체성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낭비와 욕망 - 쓰레기의 사회사
    낭비와 욕망 대도시에 가끔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물질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것이다.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물질이 이제는 필요 이상을 넘어서 사람의 삶을 내리누르는 거대한 짐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는 '과잉'을 주제로 글을 쓰다가 이 책을 발견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내용이 이 책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이 책이 지은이는 '쓰레기'를 중심으로 사회를 읽었다면, 나는 '물질의 과잉'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생각했다. '물질의 과잉'은 필연으로 '쓰레기'를 발생한다. 즉 '과잉 생산'과 '쓰레기'는 분리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양면이며, 지금 인류에게 닥친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잉여'의 생산물은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 정착 생활을 하고, 가축을 기르며 생산력이 높아지는 것과 때를 같이 한다. 즉 한 단위의 씨족이 먹고 남을 정도의 식량이 생산되고, 가축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남을 정도가 되면서 비로소 인간은 잉여의 생산물을 바탕으로 '교환경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화폐로는 조개껍질, 돌 등이 있는데, 초기에는 단순한 물물교환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화폐'를 사용했음을 알수 있다. 이 책의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인류는 18세기까지 '과잉'이나 '쓰레기'라는 개념이 없었다. 즉 봉건제 사회까지의 생산력은 무언가를 지나치게 생산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음을 뜻한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호화한 생활을 하고, 풍성한 식탁에서 다양한 음식을 먹었겠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의 서민은 직접 농사 지은 쌀과 밀, 감자, 옥수수 등을 주식으로 삼았으며 육식의 비율 역시 매우 낮았다. 육식의 경우,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남아 있는 인간의 치아를 보면, 약 15%만이 육식과 관련 있는 치아라고 하니, 인류의 육식 섭취율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잉여 생산물'은 기술의 발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17세기에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시작한 근대적 자본주의 체제는 그 이전부터 전세계를 상대로 유럽의 여러 국가가 달려 든 '원시 자본축적'에 이어 점차 봉건제에서 농노로 살았던 민중을 임금노동자, 임금노예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체제를 가장 정확하게 분석한 마르크스의 '자본'에도 나와 있듯이, '자본'은 이윤을 발생할 때만 존재의 의의가 있기 때문에, 이윤의 발생을 위해 '자본'은 노동자의 '잉여노동'을 착취하게 된다. 여기서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다룰 수는 없으니 생략하고, 자본이 '상품'을 과잉으로 생산하게 되는 것이 '경쟁'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만을 말해 두자. '자본'은 원자재와 기계(및 건물) 그리고 노동자의 노동을 결합해 '상품'을 만들고, 그 상품을 팔아 이윤을 추구한다. 따라서 자본의 이윤추구는 무제한이며, 경쟁 또한 무제한이다. 문제는 자본이 사용하는 원자재가 주로 자연에서 가져오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고, 자본의 무제한 경쟁과 상품생산은 자연 환경을 필연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옛날에는 쓰레기가 아닌 것들이 오늘날에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경우는 매우 많다. 물자가 귀할 때는 아껴쓰고, 재활용으로 쓰고, 고쳐 쓰고, 나눠 쓰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단지 디자인이 바뀌어서, 유행이 지나서, 싫증나서, 더 좋은 제품으로 바꿔서 쓰지 않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은 일부 재활용이 되지만 곧바로 쓰레기로 변해 버려지게 된다.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하필 생산력이 급증하던 시기에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서 지구 자원을 낭비하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과잉 생산하고, 쓰레기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게 된 것인지는 따로 연구해야 할 과제지만, 분명한 것은 물질의 과잉, 자원의 낭비, 쓰레기의 과다 처리는 분명 자본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일회용품을 쓰고 있고, 한 번 쓰고 버리면서 별다른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요즘에는 심지어 한 번 입고 버리는 종이옷까지 나왔다고 한다. 많은 생활용품들이 일회용으로 바뀌고, 그만큼 많은 쓰레기가 나온다는 것은, 어디선가 그만큼의 원재료를 가져와야 한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입고 쓰는 물건이 과연 얼마나 될까. 꼭 필요한 만큼이라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많은 '과잉'의 세상에서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말하는 것은 공상주의자이고, 잠꼬대나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만들고 소비하면서 존재한다. 생산이 줄어들고, 소비가 줄어들면 자본주의는 존립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이 지나친 소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자본주의 체제 역시 옳지 않음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환경운동이니 지구살리기 운동 따위의 구호를 부르짖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물론 그들의 구호가 자본주의 체제에 경고를 줄 수는 있지만, 세상을 바꾸는 근본의 운동은 되기 어렵다. 모든 (상식적인) 시민사회운동-체제를 옹호하는 일부 시민운동을 제외하고-이 올바른 성과를 내려면 자본주의 체제로는 더 이상 바뀔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빈부의 격차는 물질의 과잉, 쓰레기의 대량 배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빈부의 격차가 클수록 물질의 과잉 현상과 쓰레기의 대량 배출은 커지게 마련이다. 부자는 1인당 물질의 소비가 가난한 사람 1인당 물질 소비보다 적게는 수 십배에서 많게는 수 천만 배까지 늘어난다. 이런 상황은 통계로도 나타나는데, 지구 전체에서 상위 0.2%의 사람이 가진 부가 전세계 인구 40%가 가진 부와 같다고 한다. 물질 과잉의 사회라지만, 또 한쪽에서는 여전히 궁핍과 빈곤에 시달리며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연명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린이가 굶어죽는 숫자도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경제선진국에서 비만으로 인한 사망이 늘어나는 반면, 가난한 나라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불평등이 생기는 이유 역시 자본주의 체제가 원인이다. '이윤'과 '경쟁'을 바탕으로 존립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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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6
  • 프란츠 카프카의 '성'
    프란츠 카프카의 '성' 카프카의 소설은 난해하다, 어렵다, 이상하다, 기이하다, 등등의 평가를 하는 독자들이 많다. 그럼에도 카프카의 소설은 현대 세계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세대를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재해석,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도 '한국카프카학회'가 있고, 세계 여러 나라에도 카프카의 문학을 연구하는 '카프카학회'가 있으니, 이것만 봐도 학계에서나 문학분야에서 카프카의 문학은 특별한 지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카프카학회'에서는 '솔출판사'와 함께 '카프카전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동안 카프카의 소설과 그의 일기, 편지 등을 읽으면서 카프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려 애썼지만, 그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 정도만 알게 되었을 뿐, 그의 생각을 읽기는 어려웠다. 천재는 단명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에서는 천재 '이상'(김해경)과 카프카를 비교할 수 있을 듯 하다. 두 사람 모두 요절한 천재이고, 불행한 삶을 살았으며, 신비롭고 모호한 작품을 남겼다. 카프카의 거의 모든 작품들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모호함'이다. 해석의 난해함은 곧 모호함에서 비롯한다. 모호함이란 무언가 분명하지 않고,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그 모호함은 소설의 이야기 즉 구조는 물론이고 소설 속 배경, 인물,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까지 모두 해당한다. 나는 카프카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분명 낮에 밝은 곳에서 읽었음에도, 읽고나면 늘 짙은 안개가 드리운 땅거미가 지는 저녁 어스름이나 별이 보이지 않는 한밤중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다. 이 소설 뿐아니라 다른 소설에서도 인물들은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개성을 드러내지 않으며, 감정 표현도 거의 하지 않는다. 외모 역시 마치 얼굴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좀 더 확실하게 느낀 것은, 카프카의 '모호함'이 꿈을 꾸는 듯한, 꿈속에서 보는 공간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소설의 묘사와 꿈속의 장면을 비교하면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늘 피곤한 상태에 있고, 꿈을 꾸는 듯한 장면을 보며, 시간과 공간이 항상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공간의 왜곡은 꿈에서만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한편으로, 이 소설의 해설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카프카가 당시 유행했던 '고딕소설'의 영향을 받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고딕소설의 특징과 카프카 소설의 특징이 많이 겹치는 것이 그 증거다. 카프카는 고딕소설처럼 공포와 두려움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소설 전체에서 흐르는 내면화된 공포는 악마와 피가 등장하는 것 만큼이나 공포스럽다. 카프카의 소설 가운데 그나마 쉽고 재미있다고 알려진 '변신'의 경우만 해도, 어느날 아침에 눈을 뜨니 벌레가 되어버린 주인공의 이야기는 단순한 '우화'가 아니라 가족과 개인의 실존적 문제를 초현실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번에 읽은 '성'은 매우 긴 소설이고, 다른 때 같았으면 중간에 읽다 포기했겠지만, 이번에는 꽤 흥미롭게 읽었다. 대중적 '재미'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지만, 이 소설을 읽을 때,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상상을 하면서, 주인공 K가 보고 듣는 모든 행동이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소설이 비교적 쉽게 이해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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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6
  • 위대한 게츠비 - 열린책들 버전
    위대한 개츠비 - 열린책들 최근 페이스북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을 놓고 무수히 많은 주장과 반론들이 오갔다. 어떤 출판사(의 대표)가 예전부터 카뮈의 '이방인', '쌩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분란을 일으켰고, 이 책 '위대한 개츠비'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번역(과 번역자)를 부정하고, 자신(과 출판사)의 번역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과 편협함의 극치를 보이면서, 그것이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의심을 충분히 사고도 남을 만 했다. 나는 그 출판사에서 펴낸 책은 읽지도 않았고(돈이 아까워서) 읽을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 이미 '이방인'에서부터 보여주었던 번역자의 태도와 번역의 품질에 대해 심각한 전문가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고, 나는 그들 전문가들의 의견에 공감했기 때문에 출판사 쪽의 언론플레이가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도 많은 분들이 그 출판사의 대표가 번역하는 내용을 두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번역의 중요성과 심각함을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이들의 선의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듯 했다. 이런 논쟁을 지켜보면서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어볼 생각을 했고, 내가 구독하고 있는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다. '위대한 개츠비'가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 가운데 하나이고, 지금도 미국의 많은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이 소설을 권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미국문학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 소설은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미국의 문학계와 언론에서도 혹평 일색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소설이 새로운 가치로 발견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소설이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개츠비'는 냉정하게 말하면 '삼류 애정소설'에 불과하다. 아무리 우아하게 포장한다 해도, 그 본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개츠비라는 한 사내가 한 여자를 만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다시 그 여자에게 일편단심으로 다가가다 비극적으로 죽는다는 내용인데, 소설적 개연성도 떨어지고, 이야기의 구조도 상투적이다. 이 소설의 평론이나 영어의 문장, 시대를 묘사하는 깊이는 번역본으로 읽는 한계 때문에 무어라 말하기 어렵지만, 이 소설의 본질만을 놓고 본다면, 이 소설이 '세계문학'에 속할 정도로 수준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들의 이야기다. 미국의 부르주아들은 다 알다시피 독점과 과점을 통해 급격하게 부를 축적했으며, 이 소설의 무대였던 1920년대 미국 노동자의 삶과 비교하면, 1달러로 하루를 사는 노동자들이 있는가하면, 시거를 100달러짜리에 말아피우는 부르주아들이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이 소설의 작가는 '개츠비'라는 인물의 비극적 삶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정작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가장 큰 사회적 현상인 미국 민중 특히 미국 노동자의 삶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소설 속에서 재투성이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여지긴 하지만 그건 그저 스쳐지나가는 풍경일 뿐이다. 위대한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 근본적인 긴장 관계이며, 부르주아의 사치와 허영을 한꺼풀 벗기면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정글'에서처럼 빈민굴에서 살며 쓰레기장 같은 도축장에서 소와 돼지를 잡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난다. 하워드 진이 쓴 '미국민중사'를 모르는 한, 미국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허황된 구호에 매몰될 것이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런 소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이 당대의 미국 부르주아의 허영과 사치를 풍자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딱히 그런 장면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개츠비'라는 남자가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자에게 집착하는 것과 그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이 전부다. 어떤 세계관을 갖느냐에 따라 이 영화는 '순정한 남자의 고통스러운 일대기'일 수도 있고, 썩어빠진 부르주아의 한심한 돈지랄이자 멍청한 사랑놀음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나는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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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6
  •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한국에 번역 출판된 리처드 도킨스의 책은 아래와 같다. 이기적 유전자 확장된 표현형 눈먼 시계공 지상 최대의 쇼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만들어진 신 진화론 강의 조상 이야기 악마의 사도 무지개를 풀며 에덴의 강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 리처드 도킨스의 자서전이다. 다행히도, 나는 위에 열거한 책을 모두 읽었고, 책장에 꽂혀 있다. 이 책들은 지금도 틈틈히 읽어보는 책들이다. 자서전은 두 권으로 되어 있다. 1권은 리처드 도킨스의 출생부터 '이기적 유전자'를 쓰기 전까지의 시기를 담고 있다. 알고 보니 리처드 도킨스는 상위 1%에 속하는 금수저였다는 것이 놀라웠다. 리처드 도킨스의 집안을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의 고조 할아버지 시대부터 친족과 친척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보여주는데, 집안이 꽤 유명하고, 재능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존재가 갑자기 부각된 것이 아니고, 이미 그의 아버지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수재였으며, 그의 삼촌 역시 뛰어난 학자였다. 집안 전체가 수재들이 가득하고, 머리가 좋은 우성 유전자들의 집합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리처드 도킨스의 업적이 저절로 생긴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겨우' 옥스포드에 입학했다고 하지만, 옥스포드에 입학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이미 뛰어난 머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의 성장 과정에서 부모와 친척, 친구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그를 동물학자로 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아프리카 케냐에서 태어나 자라고, 어릴 때부터 기숙학교에서 생활했다는 것이 평범한 영국인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가 소년 때부터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결국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은, 줄곧 주류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려 두 권짜리인 이 자서전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그가 쓴 저작물들이 훨씬 흥미진진한데, 자신의 이야기는 그저 평범하게 풀어낸 것은 과장하지 않으려는 영국인 특유의 점잖은 태도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2권에서는 그가 쓴 저작물들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가 어떤 기회에 책을 썼으며, 그 책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켰고, 책을 쓰고나서 달라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바꾸려면 책을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살면서 책을 한 권이라도 쓸 수 있는 사람과, 책을 한 권도 쓰지 못하고 죽는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생각을 돌이켜보고, 정리하고, 체계화하고, 구조화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런 능력이 있다는 뜻이니, 그건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책을 쓸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꾸준히 일기를 쓰는 것도 책을 쓰는 것이고, 전문 영역의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 관심 있는 일에 대해 책 한 권 쓰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노릇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세계적인 과학자이고, 그가 이룬 업적이 충분히 인정받고 있지만 그 시작은 바로 책을 쓰고부터였다. 그가 1970년대에 처음 쓴 책 '이기적 유전자'를 쓴 이후, 그는 놀라운 성장을 한다. 만일 그가 책을 쓰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의 리처드 도킨스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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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6
  • 러브 크래프트 전집 1-크툴루 신화
    러브 크래프트 전집 1-크툴루 신화 오래 전부터 알았던 애드거 앨런 포와는 달리 러브 크래프트는 최근에야 알았다. 스티븐 킹의 작품은 거의 다-한국에서 번역된 작품들-읽었지만, 정작 러브 크래프트의 작품을 읽은 것은 최근이었으니 공포와 호러문학에 관한 나의 관심 영역은 많이 부족한 편이다. 최근 한국에 번역된 스티븐 킹의 소설 '리바이벌'을 비롯해 그의 많은 작품들이 러브 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으며, 심지어 러브 크래프트의 이 책 '크툴루 신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써보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 그만큼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들은 미국 공포문학은 물론 세계 공포문학의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드거 앨런 포의 전집이 '우울과 몽상'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간되었는데, 그의 소설 전집이 한 권인 반면, 러브 크래프트의 전집은 여섯 권이나 된다. 애드거 앨런 포가 19세기를 살았던 인물이었고, 그가 남긴 작품들이 이제 막 근대로 이행하는 역사의 과정에서 중세와 근대의 흔적을 남겼다면, 러브 크래프트는 애드거 앨런 포의 어깨 위에 앉아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족적을 남겼다. 공포의 근원은 '무지'에 있다는 러브 크래프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과학문명이 발달했다는 현대에도 여전히 '공포'는 존재하는 이유도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을 통해 알아낸 사실은 매우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지식의 전체라고 해야 겨우 작은 촛불 하나에 불과하다고 비교할 수 있다. 즉, '무지'가 거대한 어둠-그 크기를 알 수 없는 어둠-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제 작은 촛불 하나를 켰을 뿐이다. 촛불의 불빛이 닿는 곳의 범위는 매우 좁다. 하지만 불빛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어둠 속에서 새로운 지식과 진리를 찾아낼 가능성을 매우 높인다는 것이 중요하다.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공포'는 많은 경우 작가의 '꿈'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그는 여행도 좋아하고, 많은 책을 읽었으며, 친구들과 무려 10만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았을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의 의식의 다른 면에서는 '공포'라고 부를 수 있는 씨앗이 생겼고, 어느 순간 발아되었다. 이 시기에 지그문트 프로이드라는 정신분석의 대가가 활동을 하고 있었고, 꿈에 관한 그의 해석은 '무의식'을 과학의 범주로 끌어들이는 획기적인 변화의 시기였다. 러브 크래프트는 단편 '데이곤'과 '인스머스의 그림자'의 원형이 자신의 꿈에서 비롯했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에게 '꿈'은 작품의 모티프로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꿈'은 곧 상상으로 발전하고, 상상은 창작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브 크래프트가 공포 소설을 쓰게 되기까지, 그가 꾸었던 '꿈'과 상상의 세계는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 미국사회와 개인적인 경험이 혼재된 결과물이며, 그가 느끼고 받아들인 감정의 변형된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크툴루 신화'는 러브 크래프트 전집 1권의 제목이며, 이 1권에는 모두 13편의 단편 소설이 들어 있다.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데이곤 Dagon>(1917) 2. <니알라토텝 Nyarlathotep>(1920) 3. <그 집에 있는 그림 The Picture in the House>(1920) 4. <에리히 잔의 선율 The Music of Erich Zann>(1921)5. <허버트 웨스트 리애니메이터 Herbert West - Reanimator>(1922)6. <벽속의 쥐 The Rats in the Walls>(1923) 7. <크툴루의 부름 The Call of Cthulhu>(1926)8. <픽맨의 모델 Pickman’s Model>(1926)9. <네크로노미콘의 역사 History of the Necronomicon>(1927)10. <더니치 호러 The Dunwich Horror>(1928)11. <인스머스의 그림자 The Shadow Over Innsmouth>(1931) 12. <현관 앞에 있는 것 The Thing on the Doorstep>(1933) 13. <누가 블레이크를 죽였는가 The Haunter of the Dark>(1935) 러브 크래프트가 글을 쓰던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 복구, 미국의 호황과 뒤이어 온 강력한 경제대공황 등 사회적인 혼란으로 사람들이 고통을 겪던 시기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전쟁의 공포와 상처를 안고 살아가다 어느 날, 경제공황이라고 불쑥 시작된 형체도 없는 괴물 때문에 사람들이 빌딩에서 비오듯 떨어지며 죽어가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자체로 이미 '공포'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렁이기 시작했으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거대한 '공포'의 체험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러브 크래프트는 이런 시기에 자신의 꿈과 사회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공포를 뒤섞어 창작을 했던 것이다. 고딕 양식의 공포와 호러를 만들어 낸 것이 애드거 앨런 포라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확장한 것은 러브 크래프트라고 할 수 있다. 러브 크래프트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책, 지역, 나라, 생물체 등-를 창조하고, 우리의 공포가 우리의 일상에서 가깝게 존재하지만, 그것의 기원은 우주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애드거 앨런 포가 풍선기구를 타고 달에 도착하는 정도의, 소박한 우주관을 보여주었다면, 러브 크래프트는 외계의 존재가 지구에 이미 오래 전부터 자리잡고, 인간과 동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특히 장르 소설에 관한 반응이 싸늘하고, 소위 '정통 소설' 쪽에서는 공포, 호러, SF 등 장르 문학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편견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세계의 문학 흐름도 이미 '정통 소설'과 장르 문학의 경계가 사라진 지 오래고, 그것을 일부러 구분하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고 있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세계문학에 끼친 영향을 보라. 애드거 앨런 포의 공포 문학이 남긴 족적은 세계 현대문학의 거대한 줄기가 되었다. 아서 코난 도일이나 아가서 크리스티의 문학을 두고 장르 문학이라고 폄하하는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현대 문학에서 '스티븐 킹'과 같은 공포, 호러의 대가가 세계 문학시장을 석권하고, 데니스 루헤인, 제임스 엘로이, 레이먼드 챈들러 등 하드보일드 소설은 또 어떻게 할 건가. 이런 장르문학들이 이제는 대중에게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문학의 판도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이 한국 독자에게 알려지는 것은 애드거 앨런 포와 스티븐 킹의 중간을 잇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형제 - 위화
    형제 - 위화 오랜만에 세 권짜리 장편소설을 읽었다. 위화의 소설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모옌'의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세 권의 소설 가운데 1권은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를 다루고 있다. 작가인 위화가 이 시기에 어린이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소설 속 주인공도 작가와 나이가 비슷하다. 문학혁명 시기부터 현대까지, 두 형제의 삶을 서로 다른 삶을 그리고 있는데, 소년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는 시기 즉 문화혁명이 끝나가는 시기까지가 이 소설의 백미에 해당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중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광두, 송강이 소년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고, 이광두의 친아버지는 화장실에서 여자들 엉덩이를 훔쳐보다 똥통에 빠져 죽는다. 이는 루쉰이 늘 말해오던 '어리석은 중국 인민'의 상징이다. 즉 근대적 중국인민의 어리석음과 멍청함을 이광두의 친아버지가 똥통에 빠져죽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광두의 의붓아버지이자 송강의 친아버지인 송범평은 중국 인민의 모범이자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육척이 넘는 훨칠한 키에 잘 생긴 외모, 겸손하면서 굳건한 의지 등은 중국 인민이 가져야 할 품성임을 알게 된다. 그런 송범평이 똥통에 빠져 죽은 이광두의 친아버지를 꺼내서 이광두의 집까지 데리고 가서 장례를 치르도록 한다. 이광두의 엄마인 이란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중세의 여성상을 보여주지만, '어리석고 멍청한' 이광두의 친부와 살 때는 주눅들어 살던 이란은 송범평과 새로운 삶을 살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여성으로 변모한다. 즉, 중국 인민의 변화는 인민 스스로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송범평이 문화혁명 시기에 죽음을 당하는 과정을 자세히 그리면서 독자는 감정이 북받치는 경험을 한다. 문화혁명이 비록 모주석이 시작했지만, 그것이 명백한 정치적 실패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송범평은 '지주'이기 때문에 탄압을 당했는데, 사실 송범평의 아버지는 지주였지만 그 시기에 이미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 자신도 빈농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송범평은 중학교 선생으로, 공산당을 지지하고 문화혁명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그려졌는데, 그런 사람을 하루아침에 반혁명분자로 몰아 참혹하게 죽인 것이다. 당시 홍위병들은 대개 젊거나 어린 청년들로, 극좌적 행동으로 중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든 세력인데, 그 세력의 중심에 모주석과 그의 아내 강청이 있었다. 결국 문화혁명의 광풍이 지나가고 강청은 반혁명분자로 재판을 받고 가택연금 상태에서 자살한다. 이복형제인 이광두와 송강은 나이가 어려 문화혁명의 칼날에서는 비껴났지만 그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결국 부모, 친척도 없이 단 둘만 남게 된다. 두 사람은 청년이 되어 공장에 다니기 시작하고, 이광두가 박스공장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 두 형제와 임홍이라는 미인을 두고 벌이는 삼각 관계, 이광두가 고물 사업을 시작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는 과정과 송강이 임홍과 결혼하고, 이광두와 절연하면서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광두의 출세와 송강의 몰락은 중국 현대사를 상징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는 중국의 거대 도시와 시골의 격차, 현대와 봉건이 공존하는 중국 사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병존하는 중국 사회, 그 속에서 이광두와 같은 천박한 자본가들이 돈을 벌어 권력을 갖게 되고, 송강처럼 성실하고 겸손하며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작가는 중국 사회가 지금처럼 변해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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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2-02-06
  • 인생 - 위화
    인생 위화의 다른 작품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허삼관의 인생관을 자주 떠올리게 되고, 그의 삶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위하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무지랭이 백성이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삶은 어떤 지식인보다 배울 점이 많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역사의 소용돌이가 그치지 않았던 근현대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중국 인민의 삶을 위화는 고통의 바다에서 유머의 배를 띄우는 것처럼 보여준다. 같은 작가로 모옌의 경우, 중국 인민의 삶을 웅장하고 거대한 중국의 역사와 대륙적 스케일로 강렬한 이미지와 함께 보여준다. 마치 인민들이 영웅처럼 역사의 서사를 이루어나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모옌이 보여주는 서사적 역사성을 담보한, 영웅화된 인민의 모습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리고 민중의 힘은 역사에서 늘 영웅적이기도 했다. 반면 위화는 인민의 삶을 개인의 고난과 비극적 삶을 통해 역사를 드러낸다. 너무나 평범해서 자신들이 역사를 바꿔간다는 것조차 모른 채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다수의 인민들은 마치 풀과 같아서 바람이 불면 먼저 눕고, 비가 내리면 피하지 않고 맞으며 삶의 굴곡을 넘는다. 이 소설 '인생'은 화자인 '나'가 어떤 노인을 만나서 하루 종일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그려진다. 논에서 소를 모는 노인은 평범한 노인이지만, 그가 입을 열자 구구절절한 과거의 이야기, 살아왔던 시간의 진한 피눈물이 터져나온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행복보다는 슬픔과 고통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푸구이'라는 노인의 삶을 통해 중국현대사를 살아 온 중국인민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국공합작, 국민당 군대, 중국공산당, 대약진 시대, 문화혁명 등 중국에서 벌어진 굵직한 사건마다 푸구이의 삶은 요동친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원치 않는 군대에 끌려갔다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해방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 소작인이 되어 농사를 짓다가 홍수와 가뭄으로 극심한 굶주림을 겪는 사연, 아들과 딸, 아내를 차례로 떠나보내야 했던 사연은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다만, 위화의 작품이 전작을 포함해 리얼리티와 무게가 조금은 부족하다는 느낌은 있다. 스토리가 약간 작위적이고, 인물들의 성격이나 묘사가 입체적이지 못하다는 아쉬움은 있다. 그런 면에서 위화의 작품은 오히려 영화로 만들어지기에 적절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중국은 여전히 공산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작가들은 공산주의형 인물과 배경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과거가 봉건체제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한 것과,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은연 중에 스며들도록 하는 일종의 의무를 갖고 있다고 보인다. 나는 중국 작가들이 체제의 우월성을 은근히 드러내는 태도가 오히려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했다는 그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며, 북한이나 여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들이 보여주는 탈이데올로기나 극도의 우상화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건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상의 자유'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작가는 자신이 놓인 사회 속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체제에서 살아가든, 체제를 찬양할 수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바람직한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것을 두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나 극도의 봉건체제(북한) 보다는 공산주의 체제가 인민에게는 조금 더 나은 환경이라는 것을 중국 작가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보인다. 물론 중국 내부에서는 여전히 경제와 정치가 분리되고, 인민의 삶이 피폐하게 변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고, 공산당의 부패가 심각한 사회, 정치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작품이 낭만적이라는 비판 역시 달게 받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온 더 무브 - 올리버 색스
    온 더 무브 일천한 지식 때문에 아직 올리버 색스의 다른 책을 읽지 못했다. 이번에 처음 그의 책을 읽었는데, 그의 마지막 책이기도 했고,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쓴 책이어서 어떤 면에서는 그의 첫번째 책으로는 오히려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버 색스가 살아 온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로 일했지만 그보다 글쓰기를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글을 끊임 없이 썼으며, 늘 메모지와 연필을 갖고 다녔고, 생각이 떠오르면 어느 장소에서건 메모를 했다. 올리버 색스의 부모님이 모두 의사였고, 그의 형들도 의사라는 배경은 올리버 색스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여기에 올리버 색스가 동성애자로, 그가 살아온 삶이 조금은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흥미로운 인물의 내면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는 신경과 의사로서, 그가 쌓아 온 다양한 경력을 토대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리고 그 책들은 널리 알려졌고, 그의 책과 함께 그의 명성도 높아졌으며,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드는 원작으로도 작용했다. 올리버 색스는 오토바이를 무척 좋아했고, 오토바이를 타고 많은 곳들 다녔으며, 오토바이와 관련해 일가견이 있을 만큼 오토바이를 잘 알았다. 또한 수영도 잘 했고, 바벨도 열심히 들어 신기록까지 세우는 등 육체적으로도 훌륭한 편이었다. 키도 크고, 몸도 탄탄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거의 완벽한 인간이었던 올리버 색스는 내 기분으로 보면 '넘사벽'인 인물이다. 한 사람의 성장이 이렇게 다양하고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부럽고 놀랍다. 한국의 청소년들을 보면,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것 외에 개성 있는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학진학과 취업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왜곡된 현실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하고, 심지어는 한동안 마약에 취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많은 책을 읽고, 사색하고, 글을 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부러웠다. 물론 올리버 색스는 살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모든 일들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딱히 '돈'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고 있는 집과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청소년의 삶을 억압하고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많은 부분에서 무엇이 정말 문제인지 알고 있다. 교육과 취업의 문제는 그것을 강제하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고, 그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착취와 경쟁에서 비롯하고 있다. 이것을 알면서도 바꾸지 못하는 것은 부모 세대의 무지 또는 그 시스템에 대한 동조 때문이다. 올리버 색스와 같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인간의 내면이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 가난해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해 사회 전체가 착취와 경쟁구도를 체계화 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올리버 색스가 이룬 개인적인 성공보다는 그가 누렸던 자유로움이 더 부러웠고 마음에 와 닿았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지금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청소년이라면 재능은 저절로 발견할 것이고, 자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중반까지는 매우 흥미롭게 잘 읽히다가 중반 이후부터는 조금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그가 나이 들고, 업적을 이루고, 더 이상 모험과 자유를 추구하지 않게 되면서부터다. 누구나 한 번 살아가는 인생을 잘 살고 싶은 욕심과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올리버 색스는 성공한 삶을 살았고, 본받을 점도 있으며, 그가 남긴 저술로 그의 이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 레이먼드 카버 지난번 책모임에서 단편 한 두편을 읽고 나서, 요즘 며칠 잠자기 전에 침대에서 틈틈히 다 읽었다. 책모임에서 읽은 단편들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는데,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은 대개 다 좋았지만, 읽으면서 울컥했던 작품은 '열'이었다. 작가의 삶을 대략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를테면 '이상'의 삶을 알고 있을 때와 모를 때를 비교하면, 그의 작품에 관한 이해의 폭이 매우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듯이, 외국 작가라 해도, 그의 삶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작품을 읽거나, 아니면 작품을 읽고 나서라도 작가의 삶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레이먼드 카버가 미국의 '프란츠 카프카'라거나, '안톤 체홉'이라는 비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가 단편소설에서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삶과 거의 일치하거나, 많은 부분 모티브를 가져온 것들이다. 이것은 작가 자신이 한 말이기도 하다. 레이먼드 카버의 아버지는 벌목 노동자였고, 레이먼드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와 함께 벌목 노동자로 일하지만, 그는 조금은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건 바로 글을 쓰는 재주였다. 게다가 그는 너무 일찍 결혼했다. 19살. 게다가 결혼하고 곧바로 아이가 둘이나 줄지어 태어나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젊음이 그냥 시들어버릴 거라고 절망했던 것 같다. 그는 작가캠프에도 참가하고, 글쓰기를 위한 이런저런 준비들을 하면서 작가가 되기 위해 무척 노력을 했는데, 한편으로는 결혼생활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레이먼드는 알콜중독으로 매우 고생을 했고, 어려서 만난 아내와는 나중에 이혼하게 된다. 그가 살았던 삶 속에서 그는 많은 소재를 끌어냈고, 자신의 이야기를 다듬었다. 그의 작품은 짧고 건조한 문장이 특징이고, 고통스럽거나 슬픈 이야기들도 과장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기술하고 넘어가는데, 김연수는 이것을 '더러운 사실주의'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대단하지 않다는 것, 특별할 것도 없고, 힘들고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아주 가끔 즐겁거나 행복한 시기가 있지만, 그것 역시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 삶은 괴롭거나 행복하거나를 생각하기 전에 그냥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내는 것임을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은 말하고 있다. 이 소설집 <대성당>이 더욱 특별했던 것은, 번역을 한 사람이 바로 소설가 김연수이기 때문이다. 소설로도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김연수가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을 깔끔하고 읽기 편하게 번역을 해서 글을 읽는 동안 퍽 즐거웠다. 특히 책 뒤에 붙인 번역가의 말이자, 작가로서 이 작품들에 관한 평론을 실은 것은 레이먼드 카버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남편이 사라지고 나서-두 권의 소설에서
    남편이 사라지고 나서-두 권의 소설에서 최근 읽은 소설 가운데 우연히 남편의 존재에 관한 내용을 다룬 작품 두 편을 읽었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과 마리 다리외세크의 <유령들의 탄생>이 그것인데, 두 작품 모두 어떤 이유에서든 남편을 잃은 여성의 이야기다. '환상의 빛'은 책읽기 모임에서도 읽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작품인데, 20대 중반의 남편은 어느날 기차 선로 위를 걷다 기차에 치어죽는다. 남편의 죽음은 누가 봐도 명백한 자살이었고, 아내이자 주인공 유미코는 남편이 왜 자살했는지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 어린 아이를 둔 유미코는 남편이 죽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바닷가 마을에서 요리사로 일하며 살고 있는 남자와 재혼한다. 두 사람은 잘 지내지만 유미코는 죽은 전 남편의 '자살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질문하고 이유를 알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느꼈던 바닷가에서의 '환상의 빛'을 남편도 어느 순간 봤을 거라고, 그 '환상의 빛'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고, 어느 순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빛이라는 것을 생각할 뿐이다. '유령들의 탄생'은 어느 날, 바게뜨빵을 사러 나간 남편이 사라진 이야기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 온 남편은 집에 빵이 없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빵을 사러 나간 다음, 사라진다. 남편의 실종을 믿지 못하는 아내는, 동네를 찾아다니고,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돌아올 기약은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왜 집을 나갔는지, 아내는 그 이유를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남편이 돌아오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다. '환상의 빛'은 여자 주인공의 눈으로 바라봤지만 작가는 남성이다. 그리고 '유령들의 탄생'은 여성 작가다. 두 작품이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두 작품 모두, 남편의 자살과 실종에 있어 그 사건의 원인이나 이유를 찾지 못한다. 왜일까? 두 여성 주인공은 그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물론 남편의 '부재'에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소통의 부재'다. 남편이 사라지게 된 결정적 원인이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를 고민하지만, 그 고민에서 자신의 문제는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나 때문일까?'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 걸까? 그건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다. 두렵기 때문이다. 여성(아내)이 자기의 잘못으로 남편이 자살하거나 사라졌다고 한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자기의 몫이고, 가족, 친구, 친지, 이웃 모두에게 비난을 받을 것으므로,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두 작품을 읽어보면, 주인공의 관점에서만 상황을 바라보면 당연히 남편의 자살이나 실종의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두 주인공을 멀찍이 바라보게 되면, 두 여성의 존재가 객관적으로 보이게 되고,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이 소설의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고, 남편의 자살과 실종에 그들의 배우자 즉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가 혹시라도 여성을 비하한다고 여기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위의 상황은 남자와 여자를 바꿔놓아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남편의 자살이나 실종의 문제는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자'의 문제인 것이다. 만일 여기서 자살이나 실종을 하는 사람이 여성이었다면 당연히 문제의 근원은 그들의 배우자인 '남편'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은 '소통의 부재'인 것이지 젠더로서의 '성'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렇다고 남편들의 자살이나 실종의 책임이 온전히 그들의 배우자에게 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두 작품에서 아내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부분은 상당하지만 100%라고 말할 수는 당연히 없다. 모든 사건은 상대적이고, 완전히 어느 한쪽이 잘못하는 경우는 '범죄'에서만 가능하다. 평범한 부부가 살아가면서, 어느 한쪽이 완전히 잘못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아무 잘못 없는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이라면, 그것은 범죄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과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의 경우, 두 부부는 몇 년 동안 큰 문제 없이 잘 지냈다. 거의 다투지도 않았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지도 않았으며, 남편이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남편들은 자살했고, 사라졌다. 왜일까? 나는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이 아내에게 있다고 말한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그렇다면 본질적으로는 누구에게 더 책임이 있을까. 남자인 내가 생각할 때, 결정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는 역시 남편에게 있다. '환상의 빛'에서 남편은 불과 25세 젊은 나이에, 그것도 첫딸을 낳은 지 불과 석달만에 자살한다. 그는 영세한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부부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지만 두 사람 모두 가난한 집안에서 중학교만 겨우 나오고 세상의 밑바닥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의 입장에서, 세상은 이미 고정되어 있고, 자신은 몇 십년은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것만 남아 있는, 미래가 지금과 똑같은 암담하고 고생스러운 시간으로만 남아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내와 갓난아이가 있으니 참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맞는 말이지만 잔인한 말이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결혼을 한 것부터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런 절망과 좌절과 뼈저린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실존에 관한 질문을 던졌고, 사회의 높은 벽과 도시빈민으로 꿈지럭거리는 한 마리 지렁이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런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너무 젊은 나이에, 성급하고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내와 갓난아이를 그렇게 버리고 자살한 것이 이기적인 태도라고 욕을 먹을 수도 있다. 유미코의 남편은 어려서부터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유미코도 마찬가지인데, 남편은 엄마를 따라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가난한 살림 때문에 엄마는 어린 아이를 잘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혼자서 외롭게 큰 아이는 가족의 따뜻함을 몰랐고, 가족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것이 가장 큰 비극이었다. 그렇다고 죄 없는 아내와 아이를 두고 자살하는 것이 잘 한 것이냐는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다. 유미코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비난받아야 할 부분이 있었다면 오히려 다행이겠지만,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유미코는 갓난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런 경우, 실존이 존재를 위협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유령들의 탄생'은 그런 면에서 '환상의 빛'보다는 조금 더 그 이유가 선명하다. 퇴근해 돌아온 남편에게 빵을 사 오라고 말하는 아내. 그리고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자신이 그동안 남편에게 무심했었다고 독백하는 아내. 그러면서도 왜 남편이 사라졌는지를 모르는 아내. 여기서 사라진 남편은 '환상의 빛'에서 자살한 남편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자발적인 실종을 선택했을 뿐, 자살을 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출이 아니라 범죄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빵을 사러 가는 길이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당하거나 차량으로 납치를 당했을 가능성은? 차라리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을지언정 자살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남편은 하루 일과를 마쳤고, 여느 때처럼 저녁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왔으며, 아내가 저녁준비를 마쳤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죄의 가능성도 매우 희박한 이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거리는 사람들의 왕래도 많고, 밤이라도 불이 밝은 곳이어서 범죄자들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남편이 사라진 당일의 행적을 보면, 남편은 부동산 거래를 위해 몇 건의 상담을 했고, 사람들을 만났지만 실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수완이 좋고 능력이 있어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인공은 자신의 독백으로, 남편에게 무심했다는 말을 한다.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는 무심하고, 식사도 잘 차려주지 않고 그렇다고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하루종일 집에서 뭘 하고 있는지 답답하다.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 하는 여느 주부들처럼 집안 살림에 신경을 좀 쓰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그걸 말로 한다는 것도 답답한 노릇이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이 지나가면서 남편은 이런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오니 저녁도 차리지 않은 아내가 빵이 없다면서 자기더러 빵을 사오라고 한다. 낮에 뭐하고 있다가, 일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남편은 화를 내는 대신, 차갑게 웃으면서 알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지갑에 들어 있는 얼마 안 되는 현금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차를 타고 사라진다. 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겠지,하고 생각하면서.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편의 존재가 유령처럼 생각되겠지만, 남편의 입장에서는 숨막히는 저주로부터 풀려난 느낌이라는 걸 아내는 과연 알까? 이 소설은 사실 정반대의 입장 즉 남편의 입장에서 똑같은 분량으로 더 쓰여져야 한다. 앞부분에서 아내가 남편의 실종에 관한 아방가르드하고 슈르레알리즘적인 서술들이 남편의 실종에 관한 자기연민이라면, 뒷부분에서 남편의 독백은 그로데스크하고 자기학대적인 폭력적인 표현들로 난무할 것이다. 여자를 잘못 선택한 멍청한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과 구역질 나는 결혼생활에 대한 자학과 7년 동안 참고 살아 온 고통과 불만의 폭발로 채워질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남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자들의 자기비판이 일정 부분 있어야 할 것이지만, '환상의 빛'에서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남편은 죽을 수밖에 없었고, '유령들의 탄생'에서는 남편의 실종에 아내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아내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럼에도 아내보다는 남편(남자)에게 더 큰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극단의 상황까지 오는 동안에 아내에게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아내를 낯선 사람, 타자, 이방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 남편들의 잘못이었다. 그런 것까지도 아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다. 문제의 심각함을 알아달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남편들이었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눈치껏 남편의 심기를 헤아려야 한다고 믿었던 남편들의 이기심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두 남편은 아내를 완전히 믿었을까?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적어도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 때는 사랑했을 것이고, 믿었을 것이지만, 결혼생활이 지속되면서 남편들에게는 의무감과 책임감만 남았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소통'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단지 나 하나가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끝난다는 극단적인 생각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끝낼 수도 없을테니 말이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별도 없는 한밤에
    별도 없는 한밤에-스티븐 킹 스티븐 킹의 첫번째 탐정 추리소설이라고 광고한 <미스터 메르세데스>를 읽고 나서 그의 중편집을 읽기 시작했다. 네 편의 중편이 들어 있는 이 소설집의 첫번째 작품은 <1922>. 충격과 공포, 스티븐 킹의 진짜 모습이 바로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휴먼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라면, <1922>는 스티븐 킹이 보여주었던 공포와 기괴함이 뒤섞인 그의 본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을 읽고 나서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러브 크래프트'와 '애드가 앨런 포우'였다. 조금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 <1922>는 애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의 확장판 변주곡이었다. 러브 크래프트의 음울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 분위기와 잔혹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애드가 앨런 포우의 소설이 화학적으로 결합된 것이 바로 스티븐 킹의 소설이다. 이 중편소설은 이 책에 들어 있는 네 편의 소설 가운데서 가장 '독하다'. 그래서 책을 온전히 읽기 위해서는 마음의 각오를 조금 해야 한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의 내용에 너무 몰입하거나 상상력을 지나치게 발휘하면 원하지 않는 고통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다. 주인공 제임스는 평범한 농장주인이었지만, 그의 아내가 친정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땅 40만 에이커를 팔겠다고 했을 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시골 농장에서 사는 것을 싫어했고, 도시로 나가 가게-양품점-를 내고 싶어했다. 대대로 농장을 운영하며 살아 온 제임스는 그런 아내의 주장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부부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고, 평범했던 농장주인은 어느 순간 살인마로 돌변한다. 소설의 내용은 개연성이 부족하지만, 끔찍한 공포를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제임스보다 그의 어린 아들이 변해가는 과정은 더욱 기괴하다. 그것은 인간이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마치 진화론처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내면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인간은 단지 악마일 뿐인가, 아니면 제임스의 다른 얼굴인가. 이 경우, 악마의 다른 이름은 탐욕이다. 탐욕은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 뿐 아니라, 어린 자식까지도 악마로 만들고 말았다. 모든 것은 '인과응보'이며, 나쁜 짓에는 결과가 따를 뿐이다. <빅 드라이버>는 여성 작가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독서토론회에서 강연을 하고 수고비를 받는 것이 짭짤한 수입인 작가 테스는 집에서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는 도시로 강연을 하고 오는 길에 길을 잘못 들고, 타이어가 펑크나면서 고립된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나타나고, 그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다음 으슥한 도랑에 버려진다. 끝까지 죽은 척을 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던 테스는, 그 사건 이후 달라진다. 여리고 조금도 폭력적이지 않았던 테스는 자신이 당한 사건을 경찰에 알리지 않고 직접 해결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그 방법도 작가적으로 풀어나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데스 프루프'가 생각났다. 여성들이 탄 자동차만을 테러해서 죽이는 살인마는 자신의 의도대로 네 명의 여성을 잔인하게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죽이고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여성들이 탄 자동차를 공격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여성들의 반격에 살인마는 처절하게 죽게 된다.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통쾌한 복수다. 이 소설 역시, 연약한 여성만을 노리는 연쇄살인마에게 당한 여성이 통쾌한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 테스의 복수극이 아니라, 두 명의 아들을 살인마로 키운 그의 엄마에 대한 궁금증이다. 공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는 여성이 살인마 아들을 둔 어머니였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살인을 하도록 모든 준비를 해주는 것 역시 바로 그 엄마였던 것이다. 소설에서는 살인마의 아버지가 오래 전에 자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그 자살과 관련해 그의 아내 즉 살인마의 엄마와 그 아들들이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는 나오지만 자세한 내용은 드러나지 않는다. 아들에게 젊은 여성을 강간하고 죽이라고 부추기고, 여성을 그쪽으로 데려가는 엄마와 젊은 여성을 강간하고 살인하는 아들의 관계라면 결코 평범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정신병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잘 하고 있었고, 누가 봐도 어엿한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사이코패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미치광이가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 틈에 섞여 성실하고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은 다른 소설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공정한 거래>는 비교적 짧은 소설이다. 암으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주인공 스트리터는 어느 날, 우연히 도로 옆 노점상을 만나게 되고, 그와 '수명을 연장'하는 계약을 한다.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앓고 있는 암을 다른 사람에게 던져야 하는데, 그것은 '가장 미워하는 인간'이어야 했다. 스트리터는 가장 미워하는 인간으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꼽았다. 은행의 중견간부로 나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던 스트리터에게 암은 곧 죽음이었고,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은 가장 큰 고통이자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마음 속에만 담아두었던 증오의 대상이 바로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노점상과 '연장 계약'을 하고 나서, 스트리터의 암은 사라지고, 친구 톰의 가정에서는 연이어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스트리터보다 훨씬 부자이고, 출세했으며, 훌륭한 자식을 두었던 그래서 질투와 미움으로 치를 떨었던 바로 그 '가장 친한 친구'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친구와 반대로 좋은 일만 생겼다. 암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은행에서 승진했고, 아들과 딸이 모두 성공했으며 아내 재닛과도 신혼부부처럼 다정했다. 반면 친구 톰은 아내가 암으로 죽었고, 큰아들이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으며 둘째 아들은 며느리가 죽었고, 딸이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와 임신한 아이를 사산했다. 게다가 톰의 사업체도 망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진행되었다. 악마와 거래를 하고 나서, 친구의 불행을 바탕으로 자신의 행복을 보장하는 '악마의 계약'이 어떻게 구체화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반전이 보이지 않는다. 단지 악마와 계약을 한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은 그 자체로 끔찍하기는 하지만-그것을 반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보다 강렬한 마지막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행복한 결혼 생활>은 20년 가까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좋은 남편으로 살았던 남자가 알고 보니 연쇄살인마라는 것을 알게 된 여자의 이야기다. 늘 다정하고 따뜻한 남편이기만 했던 사람이 어떻게 끔찍한 연쇄살인마일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할까. 주인공 다아시와 그의 남편 밥은 평범한 미국 백인의 중산층 가정을 이룬 부부였다. 밥은 회계사였고, 부업으로 희귀동전 거래를 하는데 출장이 잦았다. 남편이 출장을 간 어느 날, 우연히 차고의 비밀창고에서 피해자의 물품을 발견한 다아시는 남편이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남편이 돌아와 그 사실을 눈치챘고, 다아시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다아시는 너무도 무섭고 끔찍했지만 아들과 딸을 위해 남편의 요구-한번만 용서해달라는-를 들어주고 다시 정상적인 가정생활로 돌아간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이미 남편이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분명했고,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도 없었다. 겉으로는 별다르지 않게 정상적인 가정이었고 부부였지만 다아시의 내면은 폭풍우가 치는 바다처럼 고통스럽게 뒤집혔다. 남편이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경찰에도 신고하지 않고 조용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다아시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문제를 해결한다. 자식들에게는 여전히 좋은 아버지였고, 남편 밥의 직장과 동료, 이웃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면서도 더 이상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마의 삶은 끝내게 되는 해법. 싸이코패스의 전형을 그린 이 소설은 살인마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가는 싸이코패스의 아내에 초점을 맞췄다. 그 아내가 어리석거나 사악한 인물이었다면 소설은 엽기적이고 공포로 가득한 내용이 되었겠지만, 평범한 여성 다아시는 상식적이고 현명한 사람이어서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잭 런던은 생계를 위해 단편소설을 써서 잡지사에 기고를 하는데, 그때 잭 런던이 생각한 포맷이 있었다. 즉, 짧은 시간에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기본 포맷을 설정하고, 그 포맷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이야기를 만들면 빠른 시간에 다양한 단편소설을 여러 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잭 런던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단편을 써서 잡지사에 기고했고, 원고료를 받아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원고료를 받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지만. 마찬가지로, 스티븐 킹의 소설에도 그런 '기본 포맷'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후기에서 스티븐 킹은 소설의 모티브, 아이디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후기를 읽지 않아도 이 소설들에는 스티븐 킹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미국 메인주의 도시 이름과 풍경들, 지명들이 많이 등장하고 그가 읽고 도움을 받았을 러브 크래프트나 애드가 앨런 포우의 작품들이 떠오르고, 작가로서의 경험-강연회-과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에피소드 등이 소설에 등장한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행복하다. 그의 말대로, 독자들은 재미있는 소설을 읽기 좋아하고, 그렇기 위해서 자신은 두꺼운 소설을 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두껍지만 술술 잘 읽히는 이 소설들은 깊어가는 겨울밤을 잊게 만든다.
    • 문화
    • 독서
    2022-02-06
  • 미스터 메르세데스
    미스터 메르세데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있다. 나는 스티븐 킹을 매우 좋아하는 독자로서, 그의 작품은 한국에서 한글로 번역된 작품은 거의(약 90% 정도) 다 찾아 읽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외부의 평가가 어떻든 내게는 '소문난 잔치'에 불과했다. 그건 스티븐 킹의 잘못이라기 보다-이 작품이 스티븐 킹의 얼굴에 똥칠을 할 정도는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이 책을 팔아먹으려는 출판사-미국과 한국-의 지나친 마케팅 때문이다. 물론 스티븐 킹도 출판사의 홍보문구처럼 '최초의 탐정추리소설'에 도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캐리'를 시작으로 단 한번의 실패 없이 지금까지 승승장구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의 뛰어난 글솜씨 때문이었으니,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자신도 있었을테다. 그리고 이 소설은 스티븐 킹이 써 왔던 여느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스티븐 킹은 늘 그랬듯 한 편의 장편소설을 더 출간한 것이다. 출판사의 호들갑은 차치하고, 만일 스티븐 킹이 이 소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건 명백한 판단 오류가 될 것이다. 새로운 탐정 캐릭터를 창조했다거나, 탐정추리소설의 영역을 확장했다거나, 자신이 '탐정추리소설'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만큼 스티븐 킹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은 '탐정'이니 '추리'니 할 만큼의 내용이 아니다. 그저 스티븐 킹이 써 왔던 다양한 장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탐정'이니 '추리'니 따위의 말을 들먹거리는 것이 스티븐 킹에게는 불리할 뿐 아니라, 그의 명성을 깎아먹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소설을 읽고 곧바로 이어서 중단편집 가운데 <1922>를 읽었다. 그리고 무엇이 진짜 '스티븐 킹의 작품세계'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스티븐 킹의 세계는 <1922>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이 스티븐 킹의 신작소설이고, 출판사와 서점으로써는 책을 팔아먹어야 할 목적이 있으므로 온갖 화려한 수식어로 장식을 하더라도, 그건 단지 '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라면 이미 40년대부터 시작된 그 세계에 맡겨두는 것이 좋다. 대실 헤밋이나 레이먼드 첸들러를 비롯해 로스 맥도널드, 미키 스필레인 등이 이미 그 세계를 구축해 왔고, 지금까지 잘 굴러가고 있다. 여기에 굳이 스티븐 킹이라는 거목이 발을 들여 놓는 것도 우습거니와, 스티븐 킹의 선배들이 구축한 세계를 더 확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다면 '하드보일드'한 탐정소설 영역을 모욕하는 것은 물론, 스티븐 킹의 명성에도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스티븐 킹이 이 소설의 주인공 하지스를 내세워 앞으로 더 작품을 쓸 것이라고 예고되었는데, 그것을 두고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라는 수식을 내세워 홍보하지 말기를 강력히 권고한다. 그냥 스티븐 킹의 장편소설 또는 연작소설이 출간되었다고 말하면 된다. 그러면 독자도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고, 출판사나 서점도 욕을 먹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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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2-02-06
  • 언더 더 돔 - 스티븐 킹
    언더 더 돔 미스터리 스릴러, 공포, 호러의 대가인 스티븐 킹의 작품 가운데서 비교적 노멀한 수준과 내용의 소설이다. 1976년에 처음 구성했고, 집필을 시작했지만, 중도에 포기하고 2007년부터 다시 쓴 장편소설로 한글 번역본이 3권 1,600페이지나 되는 꽤 긴 소설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술술 잘 읽힌다 등장인물이 많긴 하지만, 전체의 흐름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호흡이 길다보니 스티븐 킹 답지 않게 약간의 문제-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도 드러난다. 어느날, '체스터스밀' 마을을 뒤덮은 거대한 돔이 생긴다. 마을은 고립되고, 공포와 두려움과 긴장이 팽배하면서 내부의 분열과 균열이 발생한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상태일 때,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기독교 국가'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미국에서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은 매우 반기독교적 내용을 담고 있다. 마을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온갖 범죄-살인, 탈세, 마약제조 및 판매 등-를 저지르는 부의장 빅 짐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이다. 또한 빅 짐과 함께 근본주의 교회를 끌어가는 목사 역시 빅 짐의 공범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이들에게 종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이고 위장껍데기에 불과했다. 사회가 극적으로 바뀌면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난다. 인간의 탐욕, 이기심, 권력욕, 잔인성 등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애국심'으로 포장된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의 무대는 비록 2천여 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어떤 집단, 어떤 나라에서든 이와 비슷한 일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정치가를 '선출'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투표를 통해 뽑힌 그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할 뿐이다. 개인의 이익과 탐욕이 다른 모든 '공동의 목표'에 앞서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행의 씨앗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도 마을 주민 대부분은 빅 짐의 주장에 동조하고, 그의 거짓말에 완벽하게 속아넘어간다. 그들은 무지한 멍청이일 수도 있고, 빅 짐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동조자들일 수도 있다. 빅 짐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탐욕스러움은 거의 모든 인간들에게 내면화되어 있고, 빅 짐을 통해 그런 야욕을 합리화,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그 역시 이기와 탐욕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반면, 빅 짐과 싸우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빅 짐의 범죄에 대해 알고 있고, 빅 짐에 맞서 싸우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들이 특별히 정의로운 사람들은 아니지만, 단지 빅 짐에게 반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그들 역시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외계의 존재가 등장하고, 유령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다. 마을이 고립되자 마을을 장악하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려는 권력욕의 화신이 누구이고, 그 인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중요한 내용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악의 평범성'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선량한 인간이 될 수도, 또는 잔인한 악마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놓인 상황과 사람과의 관계와, 자신의 이익 또는 불이익에 따라 변할 뿐이다. 태어날 때부터 '악당'은 없겠지만, 인간을 '악당'이나 '악마'로 키우는 '사회'는 존재한다. 아니, '사회'가 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빅 짐을 포함해 악당 노릇을 했던 자들의 최후가 너무 가볍게 그려진 것이 불만이다. 그러기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과 수난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으로'가 스티븐 킹의 모토였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악당들의 최후가 너무 관대한 듯 해서 오히려 미흡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스티븐 킹의 상상력은 뒷부분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돋보기에 노출된 개미떼일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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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1-12-15
  •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노암 촘스키 교수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국 최고의 지성이며, 세계 최고의 언어학자이자, 자본주의 체제를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인물이다. 지난번 '하류지향'을 읽고 나서, 책장에서 눈에 띤 책이 이 책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이다. 이 책은 따로 독후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책에 있는 문장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교육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 (자본주의에서) 학교는 진리를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선동적 주장을 학생들 머릿속에 주입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가 문자 그대로 민주적이라면, 민주주의의 상투적 선전문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킬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저 민주적으로 행동하고 처신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이상을 떠들어댈수록, 그 시스템은 덜 민주적이라는 증거입니다. * 학교는 사회의 지배계급, 즉 부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만들어진 기관이기 때문에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학생들은 권력집단, 주로 기업집단을 옹호하도록 사회화되는 것입니다. * 훌륭한 교사라면, 학생의 학습을 돕는 최선의 방법이 스스로 진실을 찾도록 일깨워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우리가 실질적인 문제를 두고 고민하면서 그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빼앗아갑니다. 말하자면 반지성적인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를 수동적인 소비자로 사회화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 우리가 계급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신화는 허무맹랑한 코미디이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이다. 우리는 쏘련식 사회주의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마찬가지로, 지금 세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자본주의 사회' 역시 '민주주의 사회'와는 관계가 멀다. 사회체제는 곧 그 사회의 교육을 결정하는 토대가 되므로, 교육을 말하려면 반드시 그 체제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교육 환경일까.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교육을 받고 있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가'가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력을 장악한 '자본가'는 당연히 '권력'까지도 장악하게 되고, 맑스의 말대로 한 나라의 정부는 '자본가 위원회'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도 적확한 사실이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식인을 매수하고, 매수된 지식인들은 촘스키의 표현대로 '인민위원'이 되어 학생들을 체제에 순치되도록 '교육'한다. 교육과 관련해서는 이미 파울로 프레이리, 이반 일리히와 같은 진보적 교육학자들의 저서들에서도 일관된 내용으로 '체제 속의 교육'은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사회에 필요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어서, 인간의 본질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자라는 세대에게 교육한다는 것은 체제를 불문하고 매우 어렵고 중요함을 반드시 알아야 하겠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사 놓고도 책장에 꽂아 놓은 채 잊고 있다가, 최근에 '하류지향'을 시작으로 노암 촘스키의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에 이어 자연스럽게 이 책을 꺼내 들었다. 하워드 진 교수에 관해서는 다만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것과 그가 쓴 '미국민중사'가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정도만 알 뿐,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니, 나의 무지는 부끄러워도 마땅한 천박한 수준이다. 그것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든 생각이었고, 왜 빨리 하워드 진의 저서를 읽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하워드 진은 그 자신이 노동계급의 부모를 두고, 그 역시도 노동자로 자란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가 살던 뉴욕의 빈민가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가운데 공산주의자가 많았고, 그가 겪은 삶이 '반 자본주의'를 외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환경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자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로 알려졌지만, 미국 사회의 내부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음을 하워드 진 교수는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것도, 이론이나 주장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겪은 내용만으로도 미국의 본질-제국주의이자, 극소수 자본가의 지배-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정도로 하워드 진 교수의 삶은 실천적이고 행동하는 삶이었다. 이 책은 '자전적 역사 에세이'라는 부제처럼, 하워드 진 교수가 미국의 흑인이 겪는 인종차별의 역사부터 시작한다. 1950년대 말부터 미국 남부-인종차별이 극심한 지역-의 흑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그가 '시민불복종' 운동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드는데, 평화적이면서도 꾸준한 노력에 의해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60년대와 70년대에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고,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함께 연대하며, 반정부투쟁에 앞장서는 하워드 진 교수는 1965년에 노암 촘스키를 만나게 되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동적이고 내 마음에 크게 와 닿은 이야기는, 바로 하워드 진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의 삶은,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나와 닮았고, 그가 읽은 대표적인 책-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리처드 라이트의 '깜둥이' 등-은 나 역시 깊은 울림을 느낀 책들이었고, 내 삶에 영향을 끼친 책이었기 때문에 그 동질감으로 기뻤다. 이 책에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은, 신기한 우연 같지만, 바로 앞에 읽은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의 노암 촘스키와 연결되는 내용이다.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에는 뒷부분에 노암 촘스키가 보스톤 대학의 총장인 존 실버와 텔레비전에서 토론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이 책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의 뒷부분에도 보스톤 대학의 총장인 존 실버가 나오는데, 기막힌 우연이겠지만, 하워드 진 교수가 바로 보스톤 대학에 있었고, 그가 있던 시기에 대학총장으로 존 실버가 영입된 것이다. 1986년에 보스톤 지방 텔레비전 방송에서 노암 촘스키와 존 실버는 미국의 제3세계-주로 남미-민주주의를 말살하는 정책을 집행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토론을 하고 있는데, 이 시기에 보스톤대학에서 하워드 진 교수는 총장인 존 실버의 전횡에 맞서 교수들과 학생들이 연대해 존 실버 퇴진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존 실버는 말하자면 극우주의자이고, 약육강식의 논리에 철저한 인물이다. 그는 학교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몰아내기 위해 경찰을 부르고, 자신이 직접 마이크를 들고 경찰을 지휘하는, 참으로 반지성적이고 폭력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하워드 진의 저작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보라고 권한다. 이 책은 하워드 진의 살아온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의 삶을 통해 미국의 음험한 두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리영희 선생이 계신다면, 미국에서는 하워드 진 교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애국심'이 아니라, 국가, 정부, 민족을 모두 초월하는 '진실'만이 가장 올바른 가치임을 알 때,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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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1-12-15
  • 우주에는 신이 없다
    우주에는 신이 없다 '창조과학'의 엉터리 주장을 속속들이 반박하는 멋진 저서. 별 다섯 개. 무신론자들의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써도 훌륭하다. 입장을 뒤집어 보면, '신' 특히 기독교의 신을 믿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서도 또한 '창조과학'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참혹한 내용이다. 자신들(유신론자)을 비웃고, 조롱하고, 모욕하고, 얼굴에 침을 뱉고, 온갖 쌍욕을 하는 것보다도 더 심한 내용을 점잖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신론자-특히 유일신을 믿는 유신론자-들은 이 책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다. 아주 근본적인 딜레마인데, 유신론자들은 오로지 '아Q'식 '정신승리법'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모든 논리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래도 우리는 신을 믿는다'는 한 문장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동안 무신론에 호감을 가졌지만, 무신론적 사고방식과 과학적 논리를 갖추지 못한 분이라면 이 책을 통해 무신론의 기본 논리를 습득할 수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너무 재미있어서 화장실에서도 읽고, 밤에 잠을 줄여가면서 읽었다. 정상적인 '이성'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현대사회에서 '종교'나 '신'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인류에게 '종교' 또는 '신'이 필요하던 시기가 있었다. 인류의 이성이 무지에서 깨어나기 전의 역사 단계에 있을 때 말이다. 물론 지금도 수 십억 명의 인간들은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종교' 또는 '신'이라는 관념과 도그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현재 인류의 보편적 수준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과학과 이성은 더 이상 '종교'나 '신'을 용납하지 않을 뿐 더러,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신'을 믿는 유신론자들은 흔히 말한다. 지금도 종교가 사회적으로 좋은 일도 많이 하지 않느냐고. 맞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없어도 전혀 문제 없다. 종교 때문에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종교가 없으면 좋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아전인수일 뿐이다. 김웅진 교수님의 말씀에서 배운 것처럼, '옳은 일', '좋은 일', '정의로움'은 그 자체로 옳기 때문에 다른 무엇을 바라거나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고 있다. 마치 종교가 없으면 인류가 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거나, 인류가 폭력과 파괴를 일삼는 범죄 집단, 야만인의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은, 종교 장사꾼들이 늘상 해 오던 주장일 뿐이다. 오히려 인류는 '종교'라는 관념 때문에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고,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 종교 전쟁을 현대사회에서도 벌이고 살육을 일삼고 있다. 종교가 인류의 진화에 덫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를 갖고 있거나, 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적 신념이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장 사회적으로 순기능을 하는 소수의 종교인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가 파괴한 인류의 문명과 수십 억 명의 학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조금이라도 유리하면 과장해서 떠벌리는 것이 종교인들이거나 종교장사꾼들의 특징이다. '창조과학'이니 '지적설계'니 하는 사이비 주장은 조금만 이성적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지구의 나이가 불과 6천년이라는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엉터리 주장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머저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인간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과학자들 가운데 일부가 '창조과학'을 믿고 있으니, '창조과학'도 나름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적 성과와 개인의 신념은 다르다. 내가 보기에 '유신론자'들의 사고체계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그들이 평소의 생활에서는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도, '신'의 영역과 관련해서는 특이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진화(뇌의 진화) 과정에서 절대적 존재에 관한 미개한 믿음이 이성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건 전화였다. 이들은 전혀 모르는 전화번호로 무례하고 뻔뻔하게 전화를 걸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예의도 없고, 과학적 이성도 없는 이들이 인류의 미래를 망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옛날 소위 '십자군 전쟁'이라는 것이 기독교도들이 '이교도'들을 교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은 것이라면, 현대 사회에서는 무신론이 과학과 합리주의, 올바른 이성을 무기로 유신론자들에게 무신론과 진화론의 세례를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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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1-12-15
  • 하류지향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교수가 쓴 '하류지향'은 일본의 10대, 20대의 교육과 노동 문제의 핵심을 짚은 책이다. '교육으로부터의 도피'와 '노동으로의 도피'가 서로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우치다 교수는 일본 사회의 변화에서 근원을 찾는다. 1970년대와 1990년대를 비교하고, 이 시기에 일본에서 본질적으로 바뀐 부분이 바로 현재의 일본 젊은이의 교육과 노동관을 완전히 뒤바꾼 근거라고 주장한다. 즉, 집단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던 80년대 이전의 사회에서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는 80년대 이후의 사회 정책이 그 시기의 교육에 반영되면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갖던 자부심과 교육적 효과 등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전제는 있다. 그 이전부터 발달한 일본의 자본주의 체제로 인해 전반적인 사회의 물질적 기반이 두터워지고,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게 된 세대에서 태어난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어려서부터 '소비주체'로 스스로를 인식하면서, 교육과 노동을 하나의 '거래'로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교육과 노동 시장에서 스스로를 도태 시키려는 강렬한 몸부림이 바로 '하류지향'이라는 것이다. 모든 거래는 '몰시간성'이지만 교육과 노동은 시간의 연속성 위에 놓여 있으므로, 당장 눈앞에서 거래나 교환,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 거래에 대해 어린이와 청년들은 그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편해 한다는 것이다. 교육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몸부림, 일(노동)을 하지 않으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청년들의 모습은, 그들이 태어나 자란 사회가 '거래'와 '교환'이라는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주입한 결과이며, 그들은 적어도 매우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우치다 교수는 말한다. '등가교환'에 대해, 교육은 결코 물물교환이나 상거래처럼 등가교환이 될 수 없는 영역이지만, '소비주체'로 어렸을 때 이미 완벽한 자리를 잡은 어린이와 청소년은 교육의 목적, 노동의 과정 등을 하나의 '등가교환'으로 여기기 때문에, 빠르게 성과가 나지 않거나, 목표와 결과가 애매한 것을 참지 못하게 되고, 스스로 그런 불편함을 배제하기 위해 '탈교육', '탈노동'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우치다 교수의 주장에서 일본 사회의 어린이와 청년을 '소비주체'로 자리매김한 것, 교육과 노동을 '등가교환'으로 인식한 것, 대학을 하나의 상품으로 결정한 것 등을 볼 때, 일본 사회의 교육과 노동 문제를 마르크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도 우치다 교수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와 청년들이 학교와 노동현장에서 스스로 도피하는 것을 단순 사회학이 아닌, 경제 문제로 치환해서 바라보는 것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사회 문제에 있어 분석틀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그 결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우치다 교수가 일본의 교육과 노동 문제를 마르크스 이론으로 분석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가장 적당한 틀이 아닐 수 없다. 즉,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사회문제는 같은 자본주의 체제인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내용들이다. 물론, 국가와 정부, 인민의 각성, 문화 수준, 정치 상황 등에 따라 그 차이와 변수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근본에 있어서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우치다 교수가 분석하는 것과 같은 '자본주의 논리'가 교육과 노동 시장에 침투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이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면서 일본 전체의 틀을 집단이 아닌, 개인화 우선 정책을 입안하게 된 것도 자본주의의 논리의 연속성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독립성, 개성, 자율성, 자유, 선택권 등을 최대한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반대로 '개인'을 철저히 고립화시키는 제도라는 것을 대부분 알지 못한다. 정부와 언론에서 떠드는 '자유', '자율', '개성', '독립성', '선택'이라는 단어가 결국 사회의 연대와 공동체를 파괴하고 개개인을 철저히 고립시켜 체제에 순응하거나 굴복하도록 만드는 장치라는 것을 우치다 교수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 이론이나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되어 있는 개인의 고립화 문제가 강하게 제기되지는 않지만,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자본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과 노동 모두 강력한 경쟁체제를 구축하고 있으며,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오직 도태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비정함이 어린이와 청년들을 교육과 노동 현장에서 스스로 떠나도록 떠밀고 있는 것이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총, 균, 쇠
    총, 균, 쇠 이 책은 모두 4부 19장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류의 진화와 문명, 문화의 발달을 진화론에 입각해 체계적으로 써나간 내용은 기존에 나왔던 많은 진화론, 생물학, 문명사, 세계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인류의 문명에서 각 대륙마다 진화, 문명의 발달이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저자는 인류의 직접 조상으로 갈라지는 시점인 700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류 진화의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약 1만년 전의 수렵, 채취 활동에서 정주, 경작을 하는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인류의 발달 단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정착, 경작의 발견이 식량 생산을 늘리고,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더 잘 먹고, 오래 살게 되며, 후손을 많이 퍼뜨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책 제목이 <총,균,쇠>여서 자칫 인류의 문명사를 짧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류의 모든 발달 단계를 설명하고 있고, 그것의 진화론적, 과학적 인과 관계를 꼼꼼하게 기술하고 있어 내용도 충실하고 믿음이 간다.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의 진화는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면서 급격히 발생했으며 특히 인류가 야생동물을 가축화 하는 과정에서 동물들에 기생하던 세균과 바이러스가 인류에게도 전이되는 현상을 통해 오늘날의 다양한 질병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쉽고도 명쾌한 분석이다. 또한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가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통해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그 잉여 생산물을 통해 인류가 '먹는' 문제에서 벗어나는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즉, 세계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집단 정착지의 발생과 농업의 발달, 그로 인한 잉여 농산물의 생산과 함께 문자가 발명되었고, 최초의 문자는 주변으로 퍼져나가 조금씩 발전하면서 다양한 언어로 분화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책의 주제인 문명이 서로 다르게 발달하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환경의 영향과 함께, '필요성'에 대해 거론하고 있다. 즉, 어떤 기술이나 발견은 어느 대륙의 인류들이 필요한 시기에 도입하게 되지만, 환경적 요인에 의해 불가능할 수도 있고, 외부의 영향으로 더 일찍 도입되거나, 외부의 영향과는 별개로 오랜 시간 동안 자신들의 방식만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부족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진화론을 바탕으로, 생물학, 인류학, 언어학, 지리학 등 다양한 방면의 지식을 융합하고 있어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고 있다. 사실 인류 문명의 발달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저작들이 있으며, 특히 문명의 발달을 계급투쟁의 결과로 분석한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정치경제학 이론으로 설명한 경우도 있다. 이 책에서도 잉여 농산물의 발생과 함께 계급이 발생한다는 것은 암시하고 있지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발생과 그로 인한 정치경제적 투쟁에 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또한 대륙마다 다르게 발전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환경적 요소(환경생태학적) 원인에 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정치경제학적 원인에 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아쉽다. 이 책과 함께 보충해서 읽어야 할 책들이 더 있기는 하지만,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인류 문명사를 간결하면서 충분하게 설명한 이 책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을만 하다. 다만, 같은 내용이 여러 번 중복되어 나오는 것은 조금 지루하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음식의 제국
    음식의 제국 이 책은 음식으로 살펴보는 세계 문화, 역사, 문명, 식품의 역사다. 말하자면, 세계 문명사 전반을 다루고 있는 것과 같다. '음식의 제국'이라는 제목 때문에 기대를 한 책이지만, 결과는 좀 실망스럽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은, 내가 이 책의 의도와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저자들이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내가 이 책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맞겠지만, 그럼에도 내 수준에서 드는 의문은 이렇다. 저자들은 왜 '음식' 또는 '식품'을 '주체'로 상정했을까? 이 의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어나가기가 매우 불편했다. 이 책이 다루는 역사의 범위는 수메르 제국(기원전 7천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약 1만년의 역사다. 그리고 중국,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대륙, 중동, 아시아를 아우르는 지구 전체의 역사를 크거나 작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미시사'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거시사'와 함께 지역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내용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않고 있다. '음식' 또는 '식품'을 주체로 상정한 것은 내가 보기에는 명백한 오류라는 생각이다. 이유는, 그로 인해 역사를 '결과론'으로 시작해 '결과론'으로 끝내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이런 함정을 모르지 않을텐데, 왜 역사를 '결과론'으로 몰고 가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저자들의 오류를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저자들은 중세 유럽에서 농업의 혁명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했다. 수도승들이 농업에 종사하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품종을 만들면서 잉여 농산물이 생겨나고, 그것은 곧 수도원 주위의 농토를 매입하고, 농부들을 소작농으로 만들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역사의 극히 단편만을 묘사한 것이다. 중세는 갑자기 생겨난 시대도 아니고, 이미 그 이전 시기부터 쌓여 온 역사의 한 과정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중세의 농업 혁명-신기술의 발달-을 수도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절대 왕권과 종교의 위세에 눌려 살면서도 농업생산성을 키워온 그 시대의 농부들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이 당연하고 기본적인 순서라고 생각한다. '음식' 또는 '식품'을 역사의 주체로 상정한 순간, 거기에는 '인간'이 배제되고 소외된다. 음식을 만들고, 식품을 가공하고, 농어업, 축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농부, 어부의 노고는 사라지고 만다. 이 책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노동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또 하나의 의문은 '무계급성'이다. 적어도 역사를 다루는 저자라면, 인간의 역사는 곧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마르크스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계급투쟁 이론'이나 '사적 유물론' 또는 '변증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유사 이래의 역사가 계급으로 분화하고, 계급 사이의 갈등이 사회와 세계를 바꿔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음식이나 식품을 다루는 문제 역시 지극히 당연하게도 '계급성'은 어느 한 순간도 배제할 수 없는 핵심이다. 이 책에서는 유럽의 제국들이 식민지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폭력은 말하지 않고, 중세나 현대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 또는 자본가와 농민의 갈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을 '식량폭동'이라고 격하한다. 식량이나 식품에 관한 생산성의 증대는 많은 부분 착취와 관련되어 있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노예 노동이나 농노를 통한 생산성 증대는 말할 것도 없이 계급적 폭력의 결과였다. 이런 내용들이 이 책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전자 조작 식품(GMO)에 관한 것이다. 저자들이 의도적으로 빼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다루기에는 이 책의 내용이 적당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음식의 제국'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당연히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 다뤘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가장 실망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는데, 유전자 조작 식품을 다루지 않음으로 해서, 이 책은 반쪽짜리 책에 불과하고, 명성이 있다면, 스스로 먹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 다루지 않으려면, 이런 책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용기도 없이 음식으로 보는 세계문명사를 다루겠다고 나선 것이라면 만용이거나 사기에 불과하다. 이 책은 나름대로 배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책에는 없는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 아는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이 책만이 갖는 훌륭한 장점을 추려내기는 어렵다. 게다가 책의 구성이나 집필 내용이 너무 산만하고 복잡하게 되어 있어,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음에도 책을 읽어나가기가 어렵다. 무려 24쪽에 달하는 미주가 있지만, 그 많은 참고 문헌이 있음에도 내용은 뛰어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식품 제국'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저자들이 말하는 '식품 제국'의 실체는 대체 무엇일까?
    • 문화
    • 독서
    2021-12-15
  •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하는가
    제목 :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하는가 작가 : 리처드 도킨스 외 출판 : 바다출판사 서문_문 앞에 서 있는 야만 - 존 브록만지적 설계는 왜 과학이론이 아닌가? - 제리 A. 코인반과학에 대처하는 과학자들의 자세 - 레너드 서스킨드지적 설계론자들은 어떻게 대중을 속이는가? - 대니얼 데닛의식은 다윈주의의 아킬레스건인가? - 니콜라스 험프리나는 어떻게 인류의 진화 증거를 발견하는가? - 팀 D. 화이트물에서 뭍으로의 ‘위대한’ 이행 - 닐 슈빈만약 지적 설계자가 외계인이라면…… - 리처드 도킨스다윈은 어떻게 창조론자에서 진화론자로 변신했는가? - 프랭크 J. 설로웨이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 스콧 애트런우리의 도덕 감각 역시 진화한다 - 스티븐 핑커우주의 자연법칙도 진화의 결과다 - 리 스몰린지적 설계에 대한 강력한 반증 - 생물의 자기 조직화 - 스튜어트 A. 카우프만아무 도움 없이 생명을 진화시키는 우주 컴퓨터 - 세스 로이드논쟁의 뿌리 - 오해를 낳는 용어들 - 리사 랜들학교에서 지적 설계론을 가르친다면 어떻게 될까? - 마크 D. 하우저생태-진화 중심의 대안 교육을 고민하자 - 스콧 D. 샘슨부록_펜실베이니아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 판결문 발췌 이 책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글은, 부록으로 실린 펜실베니아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의 판결문 일부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적 설계는 과학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지적 설계가 세 가지 수준에서 실패라고 생각한다. 셋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지적 설계가 과학이라는 판결을 배제하기에 충분하다. 첫째, 지적 설계는 초자연적 인과관계를 끌어들이고 허용함으로써 과학의 수백 년 된 기본 규칙들을 위반한다. 둘째, 지적 설계의 핵심인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논증은 1980년대에 창조과학의 종말을 부른 비논리적이고 결함투성이인 '억지 이원론'을 이용한다. 셋째, 전화론을 부정하는 지적 설계의 공격은 과학계에 의해 반박되었다. 아래서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지적 설계가 과학계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적 설계는 동료 검토를 거친 출판물을 발표한 적이 없고, 검증과 연구의 대상이 된 적도 없다.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를 믿는 사람들은 참 불쌍하다. 그들은 진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우주의 역사를 포함한 자연의 역사가 얼마나 길고, 아름답게 진행되어 왔는가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명백한 사실조차 부정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멍청하고 한심하고, 불쌍해 보인다. 그런 유신론자들을 위해 과학자(진화론자)들은 아주 훌륭한 대안을 마련해 놓고 있다. 즉, 신을 믿는 사람이라도, 진화론을 인정하고 믿는 것에 대해 위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이론인데, 그것은 '신다윈주의'라고 한다. 즉, 유신론자들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으면 된다. 그리고 우주도 창조했고, 지구도, 지구에 사는 생명도 창조했다. 그리고 신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만. 그 이후는 우주의 자연스러운 질서와 생명의 창조는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유기물에서 세포로 진화하는 진화의 과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정하면 유신론자들도 마음 편하고, 진화론과도 전혀 다툼 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공존할 수 있다. 유신론자들로서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만일 이렇게 훌륭한 대안을 외면하고, 여전히 지구 나이가 6천년이라고 주장하고, 환원 불가능을 내세워 설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그 어리석음은 결국 유신론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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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5
  • 조이랜드 - 스티븐 킹
    제목 : 조이랜드 작가 : 스티븐 킹 출판 : 황금가지스티븐 킹의 최근 작품. 명불허전. 장편소설이지만 속도감 있게 읽힌다. 쉬운 문장과 부드럽게 넘어가는 시퀀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와 에피소드들이 적절하게 섞여 있고, 무엇보다 한 청년의 성장소설이 주는 감동이 있다.줄거리는 이렇다.스물한 살의 대학생 데빈은 여자 친구 웬디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겸 놀이공원인 ‘조이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리고 ‘공포의 집’이란 놀이 시설에서 사 년 전 린다 그레이라는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며,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이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공원에서 함께 일하는 점쟁이인 로지 골드는 데빈의 인생에 한 소년소녀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조이랜드의 마스코트 해피 하운드 하위의 인형 탈을 쓰고 일하던 어느 날, 그는 우연치 않게 한 소녀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얼마 후 휠체어를 탄 마이크 로스라는 소년이 그의 삶에 들어오게 되는데…….스티븐 킹 소설의의 가장 큰 장점은 '디테일'이다. 그의 작품은 당연히 픽션이지만, 마치 실제 장소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같은 느낌을 준다.그만큼 소설 속에 필요한 정보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인과관계를 엮어나가는 재주가 탁월하다. 물론 스티븐 킹의 소설에도 우연이 개입하고, 그 우연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면, 스티븐 킹의 소설은 미국 현대사에서 '개인사'나 '생활사'를 복원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주로 스티븐 킹이 태어나 살았던 시기 즉 1940년대부터 현대인데, 그의 작품에도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 등 각 시대별로 소설의 무대가 펼쳐진다. 그럴 때마다 스티븐 킹은 각 시대의 맞는 사회 분위기를 매우 꼼꼼하게 배치하는 것이 큰 매력이다.이 소설의 중심 무대는 '놀이공원'인 '조이랜드'다. 따라서 놀이공원에서 필요한 정보들-각종 놀이시설, 관리인, 아르바이트 학생들,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 기계들의 움직임 등-을 철저하게 조사했고, 그것이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스티븐 킹을 '공포 스릴러' 작가라고 말하지만, 딱히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쇼생크 탈출'을 비롯해 그의 많은 작품들이 '공포 스릴러'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인간의 내면을 깊이 파헤치는 심리 소설인 경우가 더 많았다.스티븐 킹의 인간 심리에 대한 해부는 다른 어떤 작가보다 탁월해서, 소설 속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과 다양한 감정들을 독자가 마치 실제처럼 느끼도록 하는 재주가 있다.이 작품 역시 마지막 장면의 감동과 함께, 한층 성장하는 한 청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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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5
  • 1984년
    제목 : 1984년 작가 : 조지 오웰 출판 : 열린책들 다시 읽었다. 이 책이 왜 '세계적인 명작'이고 '걸작'인지 새삼 깨닫는다. 1948년에 쓴 이 작품은 당시 쏘련의 정치상황과 스탈린의 철권 통치를 비판하기 위해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갖고 있다. 알다시피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였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악행, 자본주의 사회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당시 영국 노동자계급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이 책을 쓴 동기는 사이비 공산주의 국가였던 쏘련과 스탈린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빅 브러더'로 상징되는 강력한 통제사회에 대한 예견이다. 그가 바라 본 가까운 미래-불과 36년 뒤-의 사회를 이보다 더 정확하고 날카롭게 예견한 작가는 오직 조지 오웰 뿐이다. 이 작품은 외부당원인 윈스턴이 겪는 사상적 흔들림과 자유 투쟁을 벌이고 있는 비밀조직, 사회를 완벽하게 장악한 '빅 브러더'와 그의 정보망, 정체가 발각되고 난 이후 사상개조의 과정 등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은 '권력'에 관한 부분인데, 윈스턴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인민을 위해 권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권력'이 지향하는 것은 '권력' 그 자체임을 말한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유도 바로 '권력' 그 자체를 지키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보여주는 부패와 음모, 권력의 남용, 폭력 등은 모두 '권력'의 속성이고 본질이기도 하다. 특정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마르크스는 이것을 계급 사회,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했다-사회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투쟁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이 작품은 '디스토피아' 사회, 즉 가장 암울하고 억압적이며, 희망이 없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학자들에 의해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말하고 있는 감시 프로그램이 지금,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나 적용되고 있는가를 조사했더니 무려 80% 가까이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거의 '빅 브러더'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사회 감시와 통제의 수준은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에서, 유일한 희망은 오로지 '프롤'에게 있다고 했다. '프롤'의 존재는 무식, 무지하고 통제하기 쉬우며, 권력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미개한 인민'이라고 했는데, '프롤레타리아'의 준말이기도 하다. 과연, 무지하고 무식하며, 집권 여당의 뜻대로 움직이는 '프롤레타리아'들이 미래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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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5
  • 허균(許筠)의 시를 바로 잡다
    허균(許筠)의 시를 바로 잡다 호정(湖亭)-허균(許筠) 煙嵐交翠蕩湖光(연람교취탕호광) :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細踏秋花入竹房(세답추화입죽방) :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頭白八年重到此(두백팔년중도차) : 머리 센 지 팔 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畫船無意載紅粧(화선무의재홍장) :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이 시는 허균이 외지에서 벼슬을 하거나, 귀양에서 8년만에 집에 돌아온 소회를 적은 것으로, 허균의 심정이 잘 드러난 시로 읽힌다. 하지만, 이 시를 여기 번역한 그대로 읽으면 아무 감흥이 없다. 시를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허균 생가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허균이 쓴 시를 번역하면 아래 네 줄에 불과하다. 1)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2)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3)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4)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허균은 시를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으로 써왔다. 그의 다른 시를 보면, 일상에서 벌어진 일을 그대로 기록하는, 생생한 현실감과 현장감이 보이는데,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추상적 느낌이 강하다. 1)연에서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이라고 했다. 안개는 주로 아침에 피어오른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현상은 대기와 물의 온도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데, 허균의 집 바로 옆이 경포호여서 이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봄, 가을, 초겨울 아침이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남기'는 어떨까. 남기는 안개와는 또 다르다. 남기는 호수보다는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옅은 안개나 구름같은 부연 현상을 말하는데, 허균의 집에서는 저 멀리 태백산맥 줄기가 보인다. 그 산줄기에 아침, 저녁으로 남기가 드리우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호수의 물결이 넘실댄다는 표현은 원문과 약간 다른데, 호수에 빛이 넘실거리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우리말로 '윤슬'이다. 빛을 받은 호수의 표면에 비늘같은 햇살이 반짝거리는 것이다. 2)연에서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고 했으니, 1)연에서의 호수는 가을 호수다. 즉 안개와 남기는 가을의 아침에 바라보이는 풍경임을 알 수 있다. '가을 꽃 밟고 밟아'라는 표현은 좀 과격하다. 여기서 느낌은 '세답' 즉 조심스럽게 집밖의 길에 떨어진 꽃을 밟았다고 보는 것이 좋다. 실제로 혀균의 생가 바로 옆에는 아주 넓은 소나무 숲이 있는데, 이곳이 예전에는 허균의 개인 도서관이 있던 '호서장서각' 자리다. 허균은 집에 있을 때 책이 무려 1만권이나 되는 여기 장서각에 와서 책을 읽으며 근처를 산책하곤 했는데, 8년만에 돌아온 그의 감회가 어떨까는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는다. 3)연에서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왔다고 했다. 허균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만, 벼슬을 다섯 차례하고, 세 차례의 유배를 겪었다. 그의 삶이 파란만장한 것은 그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광해군이 그를 아껴 요직에 앉히려 했으나, 허균의 자유로운 영혼은 종종 그의 반대파 수구세력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가 유배지 또는 벼슬에서 8년만에 고향 집에 돌아왔으니 마음은 허허롭고, 시원하며, 쇠굴레를 벗은듯 몸과 마음이 가볍지 않을까. 4)연은 그래서 그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라는 내용은 그러나 이 시에서 가장 난해한 문장이다. 이 문장의 뜻을 모르면 이 시의 느낌도, 맛도 알 수 없는데, 학교에서는 이 시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이 마지막 문장은 그가 아직은 죽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그림배'는 '붉은 단장'과 연결된다. 즉, '붉은 단장'은 상여를 말하니, 상여를 실은 배는 울긋불긋한 그림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림배'는 상여를 실은 배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홍장'이 사람의 이름이라면 내용은 완전히 달라진다. 실제로 강릉에는 경포호와 관련한 옛날 이야기에 '홍장'이라는 기생의 이름이 나온다. ------- 경포8경 가운데 5경으로 홍장야우(紅粧夜雨)가 있다. 홍장은 조선 초기에 석간 조운흘 부사가 강릉에 있을 즈음 부예기로 있었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모 감찰사가 강릉을 순방했을 때, 부사는 호수에다 배를 띄어놓고 부예기 홍장을 불러놓 고 가야금을 켜며 감찰사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미모가 뛰어난 홍장은 그날 밤 감찰사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그 감찰사는 뒷날 홍장과 석별하면서 몇 개월 후에 다시 오겠다고 언약을 남기고 떠나간다. 그러나 한 번 가신님은 소식이 없다. 그리움에 사무친 홍장은 감찰사와 뱃놀이하며 즐겁게 놀던 호수에 나가 넋을 잃고 앉아서 탄식 하고 있는데, 이때 자욱한 안개사이로 감찰사의 환상이 나타나 홍장을 부른다. 홍장은 깜짝 놀라면서 너무 반가워 그쪽으로 달려가다 그만 호수에 빠져 죽는다. 이때부터 이 바위를 홍장 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안개낀 비 오는 날 밤이면 여인의 구슬픈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고 전한다. 꽃배에 임을 싣고 가야금에 흥을 돋우며 술 한 잔 기울이던 옛 선조들의 풍류정신을 회상하기 위 한 기념으로서의 일경이다. 그렇다면, '그림배'는 '꽃배'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꽃배'와 '홍장'은 바로 위의 이야기처럼 경포호에서 양반들이 놀던 풍경인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연의 해석은, '홍장을 꽃배에 싣고 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가 되겠다. 즉, 세파에 시달리다 고향에 돌아오니 풍류를 즐기며 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 아닐까. 따라서, 위의 시를 재해석해 번역하면 아래의 내용이 된다. 1)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 물안개 옅은 구름, 호수에 반짝거리는 윤슬 2)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 가을 꽃 조심히 디뎌가며 대나무 방에 들다 3)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 흰머리되어 팔년, 다시 여기 와보니 4)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 홍장을 꽃배에 싣고 나들이 갈 마음이 없구나
    • 문화
    • 독서
    2021-12-13
  • 홍까오량 가족 - 모옌
    <책> 홍까오량 가족 - 모옌 읽는 내내 고통스러운 작품이었다. 내용도 그렇고, 그 내용을 표현한 문장도 읽는 이의 심장과 영혼을 뜯어내는 듯한 충격과 격렬함 때문에, 페이지를 쉽게 넘기지 못했고, 한 번에 오래 읽기도 어려웠다.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충분히 그럴 만 하고,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모옌의 작품은 중국 대륙의 현대사를 자신의 고향 산둥성 까오미 둥베이 향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일반화, 보편화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 민중의 고통과 끈질긴 생명력에 관한 기록이며, 작게는 자신의 개인사적 사건이자 중국 현대사와 맞물린 거대한 물줄기를 관통하는 중국민중사이기도 하다. 이 소설집은 모두 다섯 편의 중편을 묶은 것으로, 중편 연작이지만 하나의 장편소설로도 충분히 읽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붉은 수수밭'은 이 책의 첫번째 중편 '붉은 수수'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붉은 수수'도 매우 강렬한 피빛이지만, 뒤에 나오는 '고량주', '개들의 길', '수수장례식', '이상한 죽음'은 더욱 강렬하고 뜨겁고, 끈적끈적한 피빛이다. 이 작품을 읽고 머리에 남는 것은 '끈적끈적한 피'의 이미지다. 그것은 중국 민중의 피이며, 중국 대륙을 적시는 고통받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자들의 피이며, 인간이 흘린 피이기도 하고 중국 역사가 흘린 '고통의 시간'이라는 피이기도 하다. 그 핏물을 먹고 자란 수수는 붉은 빛으로, 저녁 놀에 더욱 새빨갛게 피빛으로 빛난다. 광활한 붉은 수수밭은 마치 뜨거운 피가 일렁거리듯, 강렬한 색채로 번쩍거리며, 그 속에 살아가는 중국 민중은 압제와 어리석음 속에서 잔혹하게 죽어간다. 같은 시기-중국 근현대사의 초기인 198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루쉰은 중국 민중을 '아Q'에 빗대었다. '인간의 고기를 먹는 미치광이'들로도 표현했다. 중국 민중은 어리석고, 멍청하며, 자신들의 힘으로 역사를 바꿀 의지도, 지혜도 없는 인간들이라고 강렬하게 비판했다. 반면, 모옌은 루쉰의 '아Q'적 인간관을 수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피빛으로 물든 중국 민중의 삶을 잔혹하지만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침략자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 민중은, 당시 정부나 정권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그들 스스로 일본군과 싸운다. 우리도 일본 제국주의의 군화발에 짓밟힌 경험이 있지만, 중국 민중이 당한 고통과 아픔과 슬픔은 우리와 결코 다르지 않다. 그것을 모옌은 매우 강렬하고 직설적이며,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은 결코 일본의 악행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와 경고가 이 작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에서 이 정도의 강렬함과 잔혹함을 묘사한 작품이 있을까. 내가 아는 한 없다. 모옌은 자기의 조국, 중국의 민중이 당한 피비린내 나는 고통과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장면은 충격과 공포이며, 잔혹함과 슬픔이고, 짙은 피비린내와 격렬한 분노를 동반하고 있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최근의 현실이었음을 자각하도록 만든다. 모옌의 작품은 한국의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 굵은 묘사와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그는 중국의 신화, 역사, 민간신앙을 총동원해서 중국 인민이 처한 상황을 직설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한국에 모옌과 같은 작가가 없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끄러움이다.
    • 문화
    • 독서
    2021-07-30
  • 듀마 키 - 스티븐 킹
    <책> 듀마 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스티븐 킹이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티븐 킹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스티븐 킹이 죽음 직전까지 간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이 매우 심했던 것을 잘 알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그렇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사고의 후유증에 따르는 고통-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묘사는 실제 당했던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매우 세밀하고, 감정적이며, 깊이 있는 내용이어서, 읽는 사람마저 그 고통을 느낄 정도로 치열하다. 무려 10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주인공 에드거의 독백으로 이어진다. 그가 살았던 과거의 삶과, 죽음에서 겨우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 아내와의 이혼, 삶의 터전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옮겨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 그러다가, 이야기는 점차 새로운 영역,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주인공에게 생긴 초능력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발생한 오래 된 실종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무시무시한 사건. 호러 장르에서 '리얼리티'를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호러' 자체가 '안티 리얼리티'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뿐 아니라 모든 호러 작가들의 작품에서)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유령이나 귀신의 존재가 아니라, 그로 인해 변화하는 인간(개인과 가족, 친구, 친지, 이웃)들의 삶이다. 즉, 초자연적인 존재를 내세워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는 것이 호러 작품의 진짜 목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스티븐 킹이 돋보이는 것은, 뒷부분의 크라이막스가 아니라, 그가 풀어나가는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의 삶에서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삶에서 상처 입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초현실, 비현실적인 상황을 끌어들여 그들이 겪는 아픔이 현실을 초월하는, 현실에서는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상처와 아픔이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한다. 스티븐 킹의 작품에 등장하는 비현실적 존재들-유령, 귀신, 외계의 존재 등-은 스티븐 킹의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상상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가 작가이기 때문에 만들어 내는 그런 '당연한' 존재들이 아니라, 스티븐 킹의 삶을 통해 만들어진, 그의 경험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호러 작가 스티븐 킹은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 현실적 충격이 정신적, 감정적 충격으로 그의 뇌리에 남았을 것이다. 누구나 어렸을 때,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스티븐 킹의 경험은 평범한 개인이 겪었던 것보다는 훨씬 심각하고 다양했다. 그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것들'은 그의 잠재의식과 불안에서 발생한 것들이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스티븐 킹은 호러소설을 선택한 것이 어쩌면 필연일 수 있다. (그가 지금도 가끔 악몽을 꾸고나면 아내를 향해 돌아눕는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이 소설은 특히 스티븐 킹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받은 물리적,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한-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글쓰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매우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기 어려운(적어도 이런 정도의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작가일 확률은 매우 낮으므로) 고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했을 것이다. 결국, 스티븐 킹의 시도는 성공했고, 그는 자신의 경험과 고통을 소설로 기록했다. 우리는 스티븐 킹의 묘사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에 대해서도.
    • 문화
    • 독서
    2021-07-30
  • 클린트 이스트우드
    <책> 클린트 이스트우드 지은이 : 마크 엘리엇 출판사 : 민음사 출간일 : 2013년 2월 25일 분량 : 616쪽 개요 이 책은 마초 이미지를 대표하는 스타 배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 감독,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역할 모델로 추앙받는 세계적인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평전이다. 50여 년간 출연하고 만들어 온 영화와 뒷이야기는 물론,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과 불륜, 각종 소송에 대한 비화, 그리고 아이스크림콘을 거리에서 먹지 못하게 하는 시 당국의 조례 제정에 분노하여 카멜의 시장에 선출되는 의외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용직을 전전하던 목표 없는 청년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난 80년간의 일대기이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영화사(史) 학자인 마크 엘리엇이 수많은 자료와 다양한 취재원들을 동원하여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생생하고 상세하게 그 드라마틱한 삶을 전달한다. 1930년대 대공황기에 가난한 떠돌이 부부에게서 태어난 5.15kg의 우량아, 군 복무 시절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행운아, 혼외정사로 네 명의 아이를 낳은 바람둥이 할리우드 스타. 이 모두가 대스타라는 이미지에 가려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다양한 모습이다.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사생활과 그가 찍어 온 영화들로 대표되는 공적 생활이 어떻게 조응해 가는지 추적한다. 기존의 평전들이 놓친 최근 10년간의 황금기를 상세히 밝힐 뿐만 아니라, 찬양과 비판 사이에서 시종일관 객관적 거리를 견지하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거대한 스타의 명과 암을 조명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 철학, 연출 스타일, 배우와 감독으로서 다다른 성숙함, 공인으로서의 자기 관리 능력, 인생을 바라보는 철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고 싶다면, 이 책 한 권으로 충분할 것이다.-<출판사 책소개> 독후감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유명한 마이클 무어가 미국총기협회를 대표해 영화배우 찰튼 헤스턴을 인터뷰했을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만일 마이클 무어가 내 앞에 나타나면 죽여버리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했고,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마이클 무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인터뷰를하지 않았다.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알게 된 건 초등학교 시절부터였으니, 40년 세월이다. 당시 우리 꼬마들은 이소룡 흉내를 내며 골목을 뛰어다녔고, 동네에 있는 두 개의 극장에서는 수많은 영화 간판들이 바뀌어 걸렸다.이소룡 다음으로 인기 있었던 영화는 당연히 서부극이었고, 우리는 보난자의 보안관이 되어 머플러를 휘날리며 적과 등을 맞대고 열 걸음을 걸은 다음, 재빠르게 쌍권총을 뽑아 적을 쓰러뜨렸다.가난했지만, 우리에게는 꿈이 있고, 우상이 있었다. 콧물을 흘리며 뛰어다닐 동무가 있었고, 골목길이 있었으며, 공부하라고 머리를 쥐어박는 어른도 없었다.우리는 지칠 때까지 놀았고, 땅거미가 지고도 한참 지나 어두워질 때까지, 아니면 엄마가 밥 먹으라고 소리칠 때까지 줄기차게 놀았다.영화 뿐 아니라 당시로는 귀했던 흑백 TV에서도 서부극은 단골 프로그램이었다. 우리는 시가를 씹으며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장화 끝에 박차를 매단 총잡이와 보안관을 사랑했다.그들은 마초였으며, 외톨이였지만 결코 고독하지도, 연민에 사로잡히지도 않는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 영웅은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존 웨인도 있었지만, 우리는 마카로니 웨스턴에 더 가까운 꼬마들이었고, 도대체 웃지 않고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고독한 총잡이가 모든 적들을 쓰러뜨리고 황혼의 사막 위로 사라지는 모습은 경이로움, 바로 그것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보수니 진보니 하는 진영 논리를 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 사람들은 진영 논리에 의해 움직이지도 않는다. 보수, 진보라는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양심’이고, 잘 훈련된 개인주의이기 때문이다.실제로, 아무리 진보주의자라 해도 ‘개인주의’ 훈련이 덜 된 사람은 어느 순간 자신이 믿는 이념의 정반대편으로 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극과 극은 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웠던 양심, 도덕, 염치, 인내, 배려, 사랑, 존중 등과 같은 덕목은 이념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이념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감정들이고, 가치 기준인 것이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이런 기본적인 사회성이 발달하지 않은 사람은 언제든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적 태도를 견지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보수성’은 한국 사회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태도에 가깝다. 즉, 미국의 보수집단 가운데서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진보적 보수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인간(사회)의 중요한 덕목들-양심, 도덕, 존중, 배려, 자유 등-을 누구보다 충실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생활에 있어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사회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진보적 태도일 수도 있지만,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태도와는 사뭇 다른, 그래서 혼란스러운 모습이다.결혼을 한 이후에도-결혼 전은 말할 것도 없고-단 한 순간도 아내 외에 다른 여자가 없었던 적이 없는, 말하자면 바람둥이, 플레이보이, 난봉꾼으로 불릴 만한 인물이었음에도 스스로는 도덕적 결함을 인정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그는 자신의 삶과 영화배우나 감독으로서의 삶을 분리하려 했지만, 어찌보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개인은 평생 영화에 종속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배우로서도 성공했지만, 특히 감독으로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자리매김했고, 그를 인간적으로는 싫어할 수 있겠지만, 그의 작품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걸작들을 만들어 왔다.이 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배우, 감독과 그의 작품들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의 사생활에 관한 내용도 다른 책에서는 다루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일부러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객관적으로 수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일대기를 쓴 것이다. 본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것이 단점일 수 있지만,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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