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1-18(목)
 

제목 : 예쁜 여자

작가 : 권용득

출판 : 미메시스


권용득의 만화는 처음이다.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아 미안하고 그래서 더 반갑다. 

만화를 읽다 보면,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 같다. 세밀한 묘사와 감정의 선을 그려나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순간, 영화감독 홍상수와 그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권용득 작가가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만화와 영화에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니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홍상수의 영화를 만화로 그린다면 권용득의 만화가 되고, 권용득의 만화를 영화로 만들면 홍상수의 작품이 된다.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대화, 어색하고 기분 나쁜 상황에서 대처하는 모습, 소심함과 비겁함 따위의 사사로운 감정 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민낯의 얼굴이 많이 닮았다.

짧은 단편들은 모두 작가의 1인칭 주관적 시점의 경험담을 그리고 있고, 고향을 방문하고, 결혼식에 참석하고, 친구와 동기, 선후배를 만나고, 예전의 짝사랑했던 여자를 만나고, 그렇게 다시 이야기가 얽히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런 찌질함은 어찌보면 20대, 30대 남자들의 특권(병신짓도 특권이라면 특권이다)임에 틀림 없다. 이 나이의 여자들은 절대로 이런 짓을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권용득의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기들이 찌질이라는 것을 모른다. 모두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다른 사람을 흉보고, 욕하고, 비웃는다. 하지만 그런 모욕은 모두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시간이 지난 다음에서야 깨닫게 된다.

시간이 흘르고 나이가 들어 어느날, 잠자리에 들었을 때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발로 이불을 차고 싶도록 스스로가 쪽팔리고 한심했던 때가 있을 것이다. 없다고? 당신은 인생을 헛살았다.

얼굴이 화끈하도록 쪽팔림을 느낀다면, 당신은 성장한 것이다. 어리석은 찌질이에서, 세상을 조금은 알게 된 어른으로. 그러니 괜찮다. 이 만화를 보고 씁쓸하게 웃는다면 당신은 그때보다는 조금쯤 나아졌다는 것을.

마지막 단편 '예쁜 여자'를 보고 울었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어려운 시절은 있을 것이고, 그것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앞길이 막막할 때, 어디에고 기대고 싶을 때가 있고 그 시기를 겪으면서 사람은 자란다. 엄마와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미워할 수 없는 가족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해와 공감은 사랑의 기본 조건이다. 


이 작품집은 여덟 편의 단편을 모은 것이다. 작가의 말에도 있듯이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이다. 하지만 작가도 '사랑이 뭘까요?'라고 묻고 있듯이, 사랑이 무언지 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나머지의 진실]에서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문자를 받는다. 그것을 본 여자는 그 여자가 누구냐고 다그친다. 친구 결혼식장에서 만난, 문자를 보낸 그 여자(이기쁨)는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였고, 두 사람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진다. 택시를 타고 떠나는 여자의 표정이 좋지 않다. 짜증이 났거나, 기분 나쁜 표정이다. 조금 전까지 술을 마시면서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자의 마음이 상한 이유는 뭘까. 남자에게 온 전화를 남자는 받지 않았고, 그것은 당연히 남자의 애인일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자가 이 남자와 사귀던 때에도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고,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옛날 애인을 만난 남자를 보면서 여자가 울고, 남자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할게'라며 말한다. 이런 무신경과 뻔뻔함은 남자만의 전유물일까, 아니면 극히 일부 '멍청한' 남자들의 특수한 경우일까, 궁금하다. 옛날 애인을 '후배'라고 속이는 것도, 앞으로 들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도 뻔한 거짓말인데, 남자는 뻔뻔해서 그렇다해도 여자는 왜 속아주는 척하는 걸까,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단편 속 한 컷에는 권용득 작가의 아내이자 작가인 송아람의 작품 '자꾸 생각나'를 홍보하는 컷이 있다. 제목 위에 팔을 걸치고 있는 남자는 역시 작가이자 '새만화책' 대표인 김대중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이 단편이 2005년 7월 [계간만화]에 실렸던 것을 고려하면, '자꾸 생각나'가 레진코믹스에 연재하고 있을 때로 추정한다.

두번째 작품 [영원히 안녕]는 애인과 다투고 졸업한 학교의 축제에 온 남자가 옛날 애인 민주를 만나 '어쩌다' 함께 밤을 보내고 헤어진다. 남자는 여전히 옛날 애인 민주에게 마음이 있고, 그녀와 결혼하고픈 마음도 있지만, 지금 애인도 포기한 건 아니다. 남자의 마음은 갈대처럼 움직이고,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구분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고, 옛날 애인 민주가 찾아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고 말한다. 남자는 민주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고, 민주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그리고 다시 다퉈서 잠시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한다. 남자는 민주의 결혼식장에서도 마지막까지 농담처럼, '나에게 시집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남자의 분열적 감정이 담겨 있는데,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대한 질투와 원망이 담겨 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두고 비아냥과 투정을 하는 것이다. 그건 퍽 유치하고 감상적인 심리로, 남자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와나카의 추억]은 남자가 잠시 뉴질랜드 와나카에서 지낼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남자는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엄마와 전화를 하면서 알게 된다-친구가 있는 뉴질랜드로 간다.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지만, 딱히 할 일도, 하고픈 일도 없는 남자는 바에서 늙은 주민을 만나 서로 빗나가는 대화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남자는 바에서 만난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구입한 낚시면허증을 주려하지만, 통화는 실패로 끝난다.

바에서 만난 늙수그레한 주민은 결혼도 한 적이 없는 듯하고, 살고 있는 와나카 바깥을 나가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뉴질랜드가 천국이라고 말하지만, 그곳도 사람이 살고, 외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으며, 세상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는 걸 남자는 깨닫는다.

[그만한 돈]은 만화가 용득권과 김응응이 만나 술을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원고료를 조금 더 달라는 용득권은 잡지사의 변명이 불쾌하고 짜증난다. 두 사람은 대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김응응은 '자갈마당'에 가자고 말하며, 용득권에게 '자갈마당'에 가봤는냐고 묻는다. 용득권은 두 번 가봤으며, 우연히 같은 여자를 만났다고 말한다. 여자가 있는 곳은 여관처럼 낯설고 지저분한 곳이 아니라,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었고, 여자의 일생 속으로 들어간 용득권은 낯설지만 편안한 감정을 느끼면서, 여자에게 돈을 주고 섹스를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여자는 용득권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다시 찾아오라고 하지만, 용득권은 다음에 한 번 더 갔을 뿐, 더 이상 여자를 찾아가지 않는다. 이유는 죄책감이 들어서라고, 용득권은 말한다. 

그가 성매매 산업의 구조적 모순과 희생물로 전락한 성매매 여성의 처지를 얼마나 깊이 아는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가 막연하게 느낀 죄책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를 생각하면, 많은 남성들이 본능적으로 여성의 성상품화, 성매매에 대해 죄의식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금 상황-자본주의 체제와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 체제-에서 남성은 '남자다움'과 체화된 가부장제 의식으로 여성의 성상품화, 성매매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똑똑똑]은 친구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수도관이 얼지 않도록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의미하지만, 더 내밀한 곳에서는 엄마에 대한 안부인사와 방석집에서 만난 동향의 여자의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옥탑방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데, 안부전화를 한 엄마와 다투고 기분이 좋지 않다. 그때 친구가 찾아오고, 멀리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다. 가진 돈을 다 쓰려고 친구는 '좋은 데'를 가자고 택시기사에게 말하고, 그들은 철거 직전의 허름한 방석집에서 옷을 모두 벗고 '맥주와 섹스'를 두당 10만원에 거래한다.

그곳에서 만난 여자는 '나'와 동향이고, 무엇이든 만화로 그린다는 말을 들은 여자는 이런 장면은 그리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독자는 그렇게 말하는 내용까지를 포함해 그곳에서 오간 대화를 '관음'한다. 그렇게 친구는 쓰던 밥솥을 남기고 떠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섹스를 한 술집여자와 엄마를 생각한다. 그리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슬퍼서 약간 눈물을 흘리는데, 그건 '나'의 복잡하고도 서글픈 마음을 드러내는 진심으로 보인다.

[막차]는 막차 시간을 다르게 알려준 여자 후배와 얽힌 이야기다. 서울에 살던 영수는 월세로 살던 집에서 월세가 밀려 보증금까지 날리고 잠시 고향집으로 내려온다. 그는 만화를 그리고 있지만, 형편이 좋지 않다. 학교 후배인 정태와 어울리며 졸업한 대학도서관에서 만화 작업을 하는데, 우연히 후배 선미를 만난다. 공대에서 여학생이 드물기도 하지만, 선미는 미인이라 인기가 많다.

세 사람은 자주 어울리며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데, 하루는 정태가 엄마와 함께 외갓집에 가고, 영수와 선미는 술을 마신다. 막차는 밤 11시라고 선미가 알려주고, 그 시간에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려도 막차 버스가 오지 않자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간다. 영수는 선미에게 키스를 하지만 선미는 거절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정태는 영수가 선미와 술을 마셨다는 걸 알고 '형은 씨발놈'이라고 욕하고 싸운다. 

영수는 치킨집을 처분한 엄마에게서 돈을 받아 다시 서울로 올라오고, 가끔 선미에게 연락하지만 선미에게서는 답이 없다. 영수는 선미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선미의 육체만 원한 걸까. 남자는 사랑과 섹스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또는 일시적인 충동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정태의 말대로, 영수는 서울에 애인이 있으면서도 선미를 집적대는 것이다. 이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고, 선미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선미는 그걸 느꼈고, 다시는 영수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국화차와 소주] 만화가 영수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우연히 블로그를 방문한 팬이라는 여성 구외영을 알게 되고, 출판사에서 일하는 구외영은 영수에게 일을 부탁한다. 두 사람은 인사동에서 만나 국화차를 마시고, 술을 마신 다음, 구외영의 집에서 술과 함께 섹스를 하려 하지만, 구외영이 사귀는 남자와 전화를 하는 사이 영수는 집으로 돌아온다. 영수의 여자친구는 연락이 닿지 않던 영수를 추궁하고, 구외영과 있었던 일을 미루어 짐작한다.

영수의 친구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영수는 오래 전 사귀었던 첫사랑 민주를 떠올리고, 민주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을 두고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구외영에게서 전화가 오고, 혼자 다짐했던 마음과는 달리 택시를 타고 구외영을 만나러 간다.

두 사람은 섹스를 하고, 영수는 지금의 애인과 구외영과 구외영이 만난다는 유부남을 떠올리며 자괴감에 빠진다. 애인 앞에서도 비루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영수는 친구 결혼식에 가는 길에 첫사랑 민주의 연락을 받는다. 자기는 참석하지 못하니 대신 축의금을 내달라는 말이었다. 결혼식에서도 영수는 구외영에게 연락을 하지만, 끝내 구외영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첫사랑 민주 이름으로 한 축의금을 돌려받지 못했으며, 그의 애인과는 결혼을 했고, 이 모든 일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화하지 않은 영수의 일상은 창작이자 고백이다. 독자는 물론 영수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받아들이고, 작가 역시 영수의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고,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감정, 미워하는 감정이 냉온탕처럼 오가는 것은 욕망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욕망은 비단 나이가 젊기 때문은 아니다. 마영신 작가의 [엄마들]을 보면, 50대의 엄마들이 보여주는 적나라한 욕망의 퍼레이드는 나이와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게 된다.

[예쁜 여자]는 구외영의 시각이다. 모텔에서 몰래 빠져나간 영수를 모른 체하는 구외영은 출판사에서 기획회의를 하며 편집장과 대립한다. 편집장은 유부남이고, 그와 내연관계지만, 남자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어렵게 대학을 마치고, 출판사에 임시직으로 들어갔다가 정식 사원이 된 것도 편집장의 배려였고, 편집장은 출판사 사장의 아들이며, 그 남자는 다른 남자와 달라보였다. 그건 물론 구외영의 착각이지만, 구외영은 자신을 합리화한다.

갑자기 병원에 입원한 엄마를 만나러 고향으로 내려간 구외영은 집에서 숨겨놓은 엄마의 일기를 발견하고, 과거를 떠올린다. 자기만의 방이 없었던 어린 시절, 제멋대로 사는 아버지와 자기 몸을 더듬던 오빠의 손길, 늘 고생하는 엄마의 삶이 지겨워 집을 떠나 서울로 왔지만, 그 역시 삶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온 엄마의 인생, 유부남인 편집장의 노리개처럼 전락한 자신의 삶이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숙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극복할 의지도, 최소한의 디딤돌로 없는 구외영으로서는 슬픔과 비애만을 느낄 뿐이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구외영은 출판사에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기로 결심한다. 부모의 삶도, 자신의 삶도 비난하거나 비난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누구의 삶도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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