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제목 : 자꾸 생각나

작가 : 송아람

출판 : 미메시스


미메시스의 그래픽 노블. 만화책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만화가 예전과는 다른 갈래가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만화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며 창작물이지만, 그동안은 수준이 낮은 장르로 여겨왔다. 이것은 만화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다. 소설도 흔히 삼류소설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준이 낮은 모든 창작물은 비주류로 묶여 천대받아왔다.

그러던 만화가 언젠가부터 '그래픽 노블'로 분류되면서 당당하게 고급한 예술작품으로 팔리고 있다. 같은 만화임에 분명하지만 소위 말하는 '대본소 만화'나 '공장 만화'가 아니라 '작가주의' 만화를 지향하기 때문이고, 그만큼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래픽 노블은 특히 유럽에서 창작이 활발하다. 미국여행 때, 서점에 들러서 그래픽 노블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기대보다' 종류가 많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유럽과 한국, 중동,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의 그래픽 노블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어서, 나처럼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아닐까 한다.


그래픽 노블의 장점은 소설과 만화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이야기)의 구조와 만화(그림)의 수준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수준이 낮으면 그래픽 노블의 자격을 잃게 된다. 모든 만화가 다 '그래픽 노블'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야기와 그림의 수준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에서 핵심은 '그래픽' 즉 그림이다. 그림과 이야기가 모두 훌륭해야 하지만, 그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없다. 그래픽 노블 작가는 만화가와 소설가를 섞어 놓은 듯한, 그 둘의 장점을 모두 갖춘 부러운 존재들이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래픽 노블 작가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들의 능력이 퍽 부럽다.


이 만화는 송아람 작가의 장편 그래픽 노블이다. 웹툰으로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었는데, 그래서인지 만화의 특징인 네모칸이 없다. 게다가 무려 600쪽이 넘는 분량이어서 만화지만 읽기가 만만찮다. 내용은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다룬 것인데, 주인공들이 만화가라는 점에서 자전적 요소가 있어 보인다.

주인공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하고 진지한 시간들이겠지만, 시간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독자인 내 눈에는 찌질해 보인다. 청춘의 찌질함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리려 했다. 생각해보면, 청춘의 지난 날은 아름답기도 했지만, 어리석고 찌질한 부분도 많지 않던가. 자의식 과잉과 편견, 심각한 자기애, 오해와 독단 등의 감정이 분출되었고, 감정적으로 미숙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우습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영화를 만드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보인다. 즉 솔직한 감정 표현들이 민망하고 불편하지만 그런 감정과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청춘들에게는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 작품에는 여섯 명의 청년이 등장한다. 만화가 최도일, 백승태, 만화가를 지망하는 장미래, 최도일의 애인 유명지, 장미래의 애인 정상인, 백승태를 좋아하는 김겨자가 그들이다.

주인공은 장미래와 최도일로 두 사람의 만남과 감정의 얽힘, 헤어지고 만남의 반복이 드라마의 중심을 이룬다. 장미래와 최도일 모두 애인이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린다. 장미래의 애인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으로, 건실하고 모범적인 청년이다. 장미래가 최도일에게 끌리는 마음을 들여다보면, 지금의 애인 정상인과 비교했을 때, 성격과 태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최도일은 미래가 불안정한 만화가지만, 장미래에게는 자기 작품을 출간한 '작가'이고, 만화가를 꿈꾸는 장미래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최도일은 건실하거나 모범적인 정상인과는 사뭇 다르다.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연애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최도일과 유명지는 같은 집에서 산다. 최도일은 자기가 살던 집과 작업실의 보증금을 까먹고 유명지의 집으로 들어와 월세를 부담하며 살고 있는데, 유명지와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고등학교 이후 사귀기 시작한 '오래된 커플'이다. 유명지는 최도일과 결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최도일의 변심에 충격 받는다. 

만화가를 지망하는 장미래가 최도일 블로그에 댓글을 남기고, 최도일이 장미래에게 비밀 메시지를 보내면서 두 사람이 만나는데, 장미래를 만나는 자리에 최도일의 후배 백승태가 나타나면서, 세 사람의 관계가 살짝 복잡해지지만, 백승태가 장미래에게 집적거리는 건 연애를 시작하는 젊은 남성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미시적이고 디테일한 개인의 생활과 감정을 깊이 천착하고 있어 독자가 공감하고, 감정이입하기 좋은 작품이다. 독자의 시각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말과 태도는 독자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이 보기 좋거나, 바람직하다기 보다, 숨기고 싶고, 답답하고, 짜증나고, 감추고 싶은 이야기일 수 있다. 창작에 몰입하는 이유는,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작품과 창작물은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의 위치, 시각, 가치관,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감정이입하게 된다. 

이 작품이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어, 연애를 하는 청춘남녀라면 보편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사회적 맥락을 생각하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청년, 미래가 불투명한 청년, 사회적 입지를 다지지 못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한편으로 복잡한 연애감정을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존재의 불안과 삶의 고민, 자아의 분열과 타자를 의식해야 하는 분열적 감정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열린 결말로 끝나는 것은, 주인공들이 가진 불안과 불투명한 삶, 미래를 보여준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바닥이 흔들리던 청년의 삶도 나이가 들면서 점차 단단해지고, 생활인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한편으로 안도하고, 한편으로 삶의 단조로움, 삶의 지겨움, 삶이 구질구질함을 떠올리며 한숨 쉴 때도 있을테다. 

어떤 사람은 성공할 것이고, 누구는 여전히 단조로움 삶과 생활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것이며,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단칸방 월세에서 전세로, 아파트로 옮겨가며 중산층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멀지 않은 미래'가 다가오기 직전의 삶을 살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를 숨쉬고 있고, 자신의 예술행위를 '경제적 가치'로 인정받아야 하는 삶을 살지만, 그것을 의식하지는 못한다. 모든 문제는 '개인적'이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개인주의'는 '민주주의'와 같은 정도로 중요하며, 이 순간만큼은 체제나 구조보다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한 시기라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Sur-reslism)'의 면모를 보인다. 청춘은 이루지 못할 꿈을 꾸며, 구체적 현실을 감각하지 않고, 이상과 꿈을 좇아 달리는 추상적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는 물리적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지만, 청춘의 이상과 꿈은 비현실의 세계에 머문다. 작가는 리얼리즘을 구현하려 했으나, 작품 속 세계는 현실을 초월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주인공들은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작가와 결별하는 지점을 건너간다. 훌륭한 작품일수록 작품의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데,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전에 작품을 끝낸다. 이제 주인공들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할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이 열려 있는 상태로 끝나는 것은 작가가 만든 주인공들의 운명에 더 이상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미래는 최도일을 만나기 전의 모습과 최도일과 연애를 하면서 달라지는 모습에서 내면의 성장이 보인다. 질투와 초조함으로 자기 중심을 잃었던 과거와는 달리 최도일과의 관계가 삐걱거리면서 오히려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출간한 작가'라는 이름으로 외부에서 자기를 찾으려던 장미래가 멀고 먼 길을 돌아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장미래는 성장한다. 이제 장미래는 연애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 작가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뿌리를 내린다는 점에서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의 존재가 자기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새로운 길에 서는 모습을 보인다. 독자는 장미래가 걸어갈 미래를 응원하고, 희망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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