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전체기사보기

  • 페르소나
    페르소나 페르소나의 존재를 쉽게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분야는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는 송강호 배우, 마틴 스코시지 감독의 페르소나는 로버트 드 니로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윤종빈 감독의 페르소나는 하정우, 박찬욱 감독의 페르소나는 최민식, 송강호, 스티븐 스필버그의 페르소나는 톰 행크스처럼 감독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감독의 분신처럼 표현하는 배우를 말한다. 페르소나의 본래 의미는 '가면'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배우들은 가면에 극중 인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얼굴 표정을 그리고, 목소리의 확산을 위해 고깔을 붙였다. 가면은 썼다 벗을 수 있으므로, 실제 자신의 정체성과 드라마의 속의 인물을 연기할 때의 인물은 분명히 구분되지만, 어떤 경우에 이 분리가 실패하면서 개인의 실제 정체성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이 구분되지 않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지킬박사와 하이드' 또는 '배트맨'을 보면, 지킬박사는 훌륭한 인물이지만 '하이드'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배트맨의 부르스 웨인은 억만장자이면서 박쥐 옷을 입고 고담시티의 범죄자를 찾아 없애는 정의로운 인물이다. 이때 지킬박사와 부르스 웨인은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존재 모두 문제 없어 보이지만, 이들이 창조한 '하이드'와 '배트맨'으로 변신하는 순간 이들은 개인의 정체성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정체성도 모두 의심받기 시작한다. 페르소나는 한 사람이 두 인물을 동시에 살아간다는 점에서 분열성을 내재하고 있는 반면, 서로 인격이 다른 두 사람일 경우에는 권력 관계의 서열에 따라 권력이 강한 자를 대리하는 페르소나가 탄생한다. 영화 '대부'에서 마이클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부'가 되는데, 이때 마이클은 자연인 마이클의 모습이 아니라 조직폭력집단의 두목인 아버지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가는 아버지의 페르소나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권력집단 내부에서는 강한 권력을 가진 자의 모습을 동경하거나 스스로 동기화해서 자신을 권력자와 동일시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특히 이익집단에서 이런 현상은 더 강하게 나타난다. 국가의 행정수반으로 국민의 이익을 가장 우선해야 할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마치 사기업을 운영해 이윤을 빼돌리는 방식으로 범죄를 저지른 이명박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명박은 한국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인물로, 그의 삶 자체가 탐욕으로 뭉친 인간이다. 그는 오로지 부의 축적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인데, 이런 유형은 그의 내면에 무의식으로 자리잡은 강력한 컴플렉스와 대리 욕망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명박은 성장과정에서 부모와 가족에게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 유대, 행복, 연민과 같은 긍정적 감정을 받지 못한 채 성장했으며, 이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인간이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마침 그 때 '욕망의 시기'를 건너고 있었으며, 어리석은 대중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의 확산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당연히 불편하다. 독재자가 나서서 일방 밀어부치는 정치에 익숙했던 기성세대는 스스로 결정하고, 만들어 가는 민주주의 사회를 어색하고 불편하게 여겼고, 여기에 기득권 세력-자본가, 수구 언론, 수구 반동 정치집단 등-이 민주주의 세력인 노무현 정부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함으로써, 노무현 정부는 결국 좌초하게 된다. 물론 노무현 정부의 좌초는 그 자체로 사라지거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민주주의를 위한 뿌리를 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어떻든, 이명박이 '신자본주의'의 기치를 들고, 대중의 욕망을 선동하며 나타난 이후, 국가는 이들 권력을 가진 이익집단의 손에 의해 갈가리 찢겨 나간다. 이명박은 '4대강 사업'으로 대표하는 토목사업을 시작으로 '자원외교' 같은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국민의 세금과 기업의 활동으로 벌어들인 천문학적 부를 빼돌린다. 이명박이 집권하던 당시 오세훈, 박형준은 그 밑에서 '시다바리'를 하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오세훈이나 박형준이나 그 전에는 진보지식인, 진보적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변신은 과거 김문수, 이재오처럼 노동운동을 격렬하게 하다 극우로 돌아선 것과는 다르게, 이미 상부 기득권 엘리트로서 진보적 태도를 유지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의 사회적 존재의 이익과 합치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진입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은 성장 과정에서 결핍되어 있었던 여러 요건들로 인해 물질적 탐욕을 추구하는 기괴하게 비틀린 인간이었지만, 오세훈, 박형준은 그보다는 오히려 '탐욕' 그 자체에 매몰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오세훈이나 박형준의 성장 과정에서도 그런 트라우마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잠재된 무의식과 현실적 욕망의 결합으로 더욱 단단한 욕망이 탄생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명박이 보여 준 강력한 집착-오로지 '돈', '부의 축적'-을 가까이서 지켜봤을 두 사람은 이명박이 온갖 거짓말과 야비한 행동을 하면서도 오히려 사회적 성공에 이르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배운 도덕, 양심 같은 기존의 관습과 개념이 아무 쓸모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된다. 즉, 우리가 어릴 때부터 부모와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 양심, 질서, 비폭력, 배려, 정의 같은 단어는 권력을 가진 자가 약한 자에게 주입하는 세뇌였으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범죄자, 조직폭력배, 깡패, 양아치들은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즉, 도둑질, 강도, 폭력, 사기, 살인 등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행위를 함으로써 크게 두 가지 효과를 드러내게 된다. 범죄를 저지르면 사회에서 격리되어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은 곧, 사회를 구축한 기존 기득권 세력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다수 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것도 교집합으로 성립한다. 기득권 세력은 다수 국민이 이런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범죄는 그 자체로 분명 나쁘지만, 권력과 돈을 가진 기득권 세력은 범죄자 개인이 저지르는 사소한(?) 범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범죄를 아무런 죄책감, 죄의식 없이 저지른다. 그리고 그런 범죄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가져가는 것이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이명박은 그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자였으며, 그 아래서 '시다바리'를 하던 오세훈, 박형준은 욕망의 극대화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이명박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 감옥에 갇혔지만, 오세훈, 박형준은 이미 이명박에게서 배울 것을 다 배우고, 이명박의 페르소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오세훈, 박형준이 이명박의 페르소나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건 좁은 의미에서의 페르소나였을 뿐, 이명박, 오세훈, 박형준은 보이지 않는 실체인 '욕망'의 페르소나라는 점에서는 헤어날 길 없는 존재들이다. 페르소나는 누군가의 대역이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존재다. 누군가의 페르소나인 인물은 자기 삶을 자기가 결정하며 살아간다고 확신하지만, 그 확신 자체가 매우 어리석은 착각이다. 이명박은 자신이 결코 알 수 없었던 트라우마와 결핍을 극복하려는 수단으로 물질에 집착했으며, 오세훈, 박형준은 좁게는 이명박의 페르소나로, 크게는 욕망의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한국사회가 만든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시스템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던 운 좋은 인물이었으며, 그 시스템의 내부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즉, 오세훈과 박형준을 만든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체제는 이명박을 지지했던 다수의 사람들이 바라던 사회였으며, 지금 그 두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명박을 지지했던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로지 물질, 재화를 축적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의 기생충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일본이 가난해지는 원인
    일본이 가난해지는 원인 한 나라의 전체 부(재화)의 총량을 나타내는 지표가 '국내총생산'이다. 이는 나라에서 생산한 재화와 용역의 시장 가치를 합한 것을 뜻한다. 1조 달러 이상인 나라는 16개 국가이고, 한국은 10위를 하고 있다. 일본은 2012년 국내총생산이 6조 2천억 달러로 최대치로 올라갔다가 2015년에 4조 3천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2018년에 4조 9천억 달러로 조금 올랐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국민총생산으로만 보면, 일본은 한국보다 3배 많은데, 1인당 실질구매력으로보면 몇년 전부터 한국이 일본을 앞섰다. 한 해 예산만으로 보면 일본의 2021년 예산은 1,160조원이고, 한국은 558조원이다. 예산으로는 일본이 2배 규모로 크다. 여기에 인구를 대비하면 일본은 1억 2천만 명이고, 한국은 5천 2백만 명으로 일본이 2배 규모다. 단순한 비교로만 보면 일본은 국내총생산이 3배일 뿐, 인구수 대비로는 한국과 거의 같은 수준의 경제력이다. 여기에 중요 변수가 국가부채인데, 일본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이 237%로 세계 모든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채 비율이 높다. 반면 한국은 37.9%에 불과하다. 일본은 국가채무로 인한 부채 상환에 쓰이는 예산이 한해 예산에서 20%가 넘는다. 일본 정부는 한해 예산을 정해 놓고, 정부가 진 빚을 갚기 위해 한해 예산에서 그만큼을 떼야 한다. 인구 대비로 같은 금액의 예산이면서, 일본은 정부 부채가 많아서 국민 1인당 돌아가는 예산액이 한국보다 적은 것이 확실하다. 나라의 부는 국민 모두가 노력해서 키워나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활동이 나라의 부를 키워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 극소수는 나라를 좀먹고 나라의 부를 축내기도 하지만, 한국은 큰 기복 없이 전쟁 이후 지금까지 꾸준하게 발전하고 있다. 한국의 발전에 보이지 않지만, 자연 재해가 적은 것도 큰 몫을 했다. 반면 일본은 지진, 화산 폭발, 쓰나미 등 온갖 자연 재해가 자주 발생해서 나라의 부를 깎아 먹는 심각한 원인이 된다. 이 현상을 조금 단순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내가 1년에 1억 원의 수입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단독주택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월급을 받아서 기본 생활 - 의식주 -을 영위해야 하는데 들어가는 절대 필수 비용이 있다. 이 비용을 1억원의 30%인 3천만원으로 보자. 그리고 문화, 예술, 레포츠, 여행 등 여가 비용으로 20%인 2천만원을 쓴다고 하자. 이제 5천만원의 잉여금액이 남는데, 이 돈의 일부는 단독주택을 소소하게 수리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20%는 건강을 위한 비용으로 따로 떼어둔다. 그러면 순수한 잉여금은 3천만원이 남는데, 이 돈으로 주택을 수리하거나 가전제품을 새로 구입하거나 집을 관리하는 비용으로 쓸 수 있다. 그런데, 천재지변이 잦아서 폭우가 쏟아져 집에 물이 새고,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슬고, 보일러가 고장나서 바꿔야 하고, 전기 설비에 문제가 생겨 수리해야 하고, 집이 점점 낡아가면서 단열, 방수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자. 여기에 전혀 예상하지 않게 지진이 나서 벽이 갈라지고, 심지어 지붕이 무너져 내린다고 하자. 그러면 집을 수리하기 위해 저축한 돈을 써야 하는데, 2천만원 가지고는 어림도 없게 된다. 지금 일본이 놓여 있는 상황이 위에 단순하게 비유한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은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는 나라에 속하며, 피해 규모 또한 커서 나라(국민)가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질 확률이 높은 나라다. 즉 일본에서 지진이 한번 발생할 때마다 적게는 수십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조 원까지 가지고 있는 돈을 써야 한다고 할 때, 한국에서는 그만큼의 돈이 계속 축적되는 것과 달리, 일본은 모아놓은 돈을 쓰게 되므로 나라의 경제는 궁핍해지게 된다. 극단적인 예로, 2011년 후쿠시마 지진 사태 때 동일본 전체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995년 발생한 한신대지진 때 일본의 경제적 피해는 GDP의 2.5%인 10조엔, 우리돈 120조원으로 추산했는데, 2011년 후쿠시마 지진 사태는 한신대지진보다 훨씬 강력하고 장기적인 피해가 발생했으므로 보수적으로 잡아도 2배 이상이다. 2배만 해도 GDP의 5%, 20조엔이며, 우리돈으로 240조원이나 된다. 일본 정부의 추정 피해 금액은 31조엔으로 우리돈 370조원이다. 여기에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피해 비용은 들어가지도 않았다. 핵발전소 피해는 수십년, 수백년 이어지는 심각한 피해로, 돈으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일본의 자연재해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다. 즉, 일본은 단지 집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370조원을 써야 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피해가 앞으로도 예고 없이 발생할 수 있으며, 그럴 때마다 일본은 천문학적 숫자의 비용을 들여 집을 수리해야만 한다. 이건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해결할 수 있거나, 견딜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집을 수리하는 비용은 결국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돈을 써야 하는 것이고, 이 돈은 국민의 삶과 복지, 건강, 교육 등 삶의 기본을 위해 필요한 돈이다. 이렇게 많은 돈을 집수리에 쏟아붓게 되면 국민 개인의 삶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집수리에 신경을 쓰다보면 다른 일 - 생산, 개발, 수출, 투자 등 -에 쏟을 여력이 부족하고, 그러면 수입이 줄어들어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일본은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는 지형적 단점으로 강제로 지불해야 하는 손실비용이 늘어나면서 부를 축적할 기회를 잃게 되고, 꾸준히 가지고 있는 부를 소모하게 된다. 일본은 2차 세계전쟁 이후 패전국으로 미국 앞에 납작 업드려, 미국의 도움과 한국전쟁의 특수로 이후 세계 경제 순위 2위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1990년 이후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고,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면서 정점에 있던 경제대국 일본의 위상은 해마다 추락하고 있다. 일본은 그동안 무수히 많은 내적 모순을 지닌 채 경제가 성장한 기형적 구조를 가진 나라였으며, 후진적 정치제도와 자만, 경쟁국가-특히 한국-의 눈부신 성장 등으로 위기에 놓였는데, 결정적으로 일본을 무너뜨린건 일본에서 발생한 자연재해였다. 일본은 주기적으로 지진, 화산 폭발, 태풍이 발생하는데, 하나의 이벤트가 발생할 때마다 천문학적 복구 비용이 들어간다. 이것은 '생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어서, 장사로 말하면 월 매출에서 상가임대료로 12%가 먼저 빠져나가는 것과 같다. 그동안 운이 좋아서 돈을 많이 벌어 저축도 많이 하고, 여기저기 투자도 해서 한동안은 버틸 수 있지만, 공룡이 쓰러지면 더 빠르게, 더 큰 충격으로 넘어지듯, 일본이라는 경제 공룡이 쓰러지는 건 생각보다 빠르고 강한 충격으로 쓰러질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은 세계 최고령 사회여서 인구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인구 감소는 자연스럽게 경제 규모의 축소로 이어지게 되고, 일본처럼 자연재해가 심각한 나라는 복구비용의 부담이 더 커지게 된다. 반면 한국은 북한, 중국, 동유럽에 있는 동포들을 흡수해 인구를 자연스럽게 늘리고, 경제 규모, 시장의 확보 등 대안을 마련할 여지가 많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세시봉’과 김진숙, 노동계급
    ‘세시봉’과 김진숙, 노동계급 지금 한진중공업의 크레인에 올라 농성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트위터 글이 화제다. 먼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를 반대하며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께 마음 깊이 응원과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지난 설날 특집으로 텔레비전에서 ‘세시봉과 친구들’이라는 프로그램을 했다. 우리 세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가수들이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인물 일게다. 나도 모처럼 70년대로 돌아간 듯 즐거운 시간을 경험했다. 하지만 김진숙 위원은 이들 ‘세시봉과 친구들’의 공연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아무도, 누구도 말하지 않던 이야기다. 물론 누군가는 말했을 것이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다만, ‘세시봉’ 시대를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바라본 글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린 사람이 그만큼 없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은 결국 노동계급의 입장을 말하고 옹호하는 사람이 그만큼 적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 역시 김진숙 위원을 좇아 ‘세시봉’ 시대와 당시를 살았던 사람으로, 노동자의 삶과 생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세시봉’ 프로그램을 즐겁고 재미있게 봤다. 보면서 얼핏 70년대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70년대의 그림자를 지웠다. 70년대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 시기의 엄혹했던 분위기, 힘겨운 나날들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도 유쾌한 마음은 아니었다. 마음속에서 지운다고, 머리에서 잊는다고 사라질 기억은 아니었다. ‘세시봉’을 보는 순간만큼은 좋은 기억들만 추억하고 싶었다. 진보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무의식으로 침잠한 강박이 있는 듯하다. 시대 상황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고, 시대의 아픔과 계급의 고통을 ‘개인화’, ‘내재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것 때문에 진보 진영이 계급적으로 뛰어나며, 도덕적으로 차별화를 갖는 것임에 틀림없다. 늘 역사를 의식하고, 나와 계급을 일체화하며, 개인의 경험을 역사적으로 증폭하는 일은 ‘유물론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하고 필수적인 항목이다. 특히 한국(남한)처럼 불행한 현대사를 가진 나라에서 소위 진보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에게는 현대사와 자신의 삶 전체가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80년대 이후 소위 ‘학출’들이 대거 배출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적 사회주의’가 마치 우리의 미래인 것처럼 왜곡된 상황에서 현장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지도’를 받는 입장이 되었고, 노동계급의 조직과 정체성에 문제가 생기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세시봉’은 1958년부터 1977년까지 존재한 음악다방이지만 김진숙 위원은 당시의 ‘순수’했던 청년문화 전체를 비판하고자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순수’라는 말이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고, 개인적인 삶에만 관심이 있으며, 무비판적인 사고방식, 체제순응적인 태도 등을 아우르는 상당히 모욕적인 단어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위 ‘운동’을 조금이라도 했던 사람이라면 이 ‘순수’라는 단어가 얼마나 치욕스럽고 경멸의 뜻을 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김진숙 위원은 ‘세시봉’으로 표현되는 ‘순수의 시대’에 대한 경멸을 말하는 것일테다. 특히 70년대 노동자는 마치 불가촉천민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 70년, 전태일 선배의 분신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노동자의 처지에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노동현장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당시 텔레비전, 라디오는 연속극과 쇼쇼쇼와 사랑타령으로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사상계는 폐간하고, 씨알의 소리와 창작과 비평, 뿌리깊은 나무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진보 진영은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였다. 1970년대나 2000년대나 노동계급의 처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70년대를 고통과 시련의 시기로 기억한다면, 지금도 마찬가지다. 상대적으로 70년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정보화의 혜택을 노동자들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적은 차이겠지만, 근본에서 달라진 것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다만, 진보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흔히 갖는 ‘경직성’ 만큼은 털어버려야 하지 않을까. 삶의 원칙과 경직성은 다르다. 우리는 변함없이 진보적 태도를 유지하고, 실천해야 하지만, 심각하고 진지한 태도만으로 일관된 삶은 스스로도, 주위 사람도 피곤하게 만든다. ‘운동’이든 ‘변혁’이든, 심지어 ‘혁명’이라도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하고, 기회주의적 삶을 살지 않는 한, 진보적인 삶은 결국 평생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생활’이기도 한 것이다. 예전에 정태춘 씨가 한 말이 생각난다. 정태춘 씨는 초기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통해 대중의 인기를 많이 받았으나 점차 사회 비판적인 노래를 시작했고,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받아주지 않게 되고, 주로 집회나 소극장 공연을 통해 노래했다. 정태춘 씨는 자신의 초기 노래가 ‘순수’했다고 말하면서, 그 노래를 평가절하 했는데, 정작 ‘현장’에 있던 나는 그 초기의 아름다운 노랫말에서 많은 힘을 얻었다. 1970년대부터 노래한 정태춘의 노래 ‘촛불’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관념론자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70년대가 노동자에게 고통과 시련의 시기였기 때문에 ‘순수’한 노래를 부르고 즐긴 사람들을 ‘부르주아’로 매도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혁명가에게도 애틋하고 아련한 사랑의 순간이 있는 것이고, 인간인 이상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순수의 시대’에 매몰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어리석을 뿐, 우리는 시대의 낭만과 역사적 과제를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판사 무용론
    판사 무용론 최근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있는 직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라지는 미래가 불과 30년 이내라고 한다. 직업이 사라지는 요인은 여러가지 있겠지만, 대부분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자동화에 기인한다. 인간이 발명하고 발견한 과학기술이 오히려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는 측면은 부정적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인간 스스로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즉, 어떤 면에서는 인간 스스로 발목을 잡고, 자신의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의 미래는 세계 전체의 바람직한 합의가 없는 한, 자본주의의 과잉 생산체제-지구 자원의 낭비와 인간 노동력의 착취-로 인한 파괴는 계속될 것이고, 그만큼 인류의 종말은 가까워질 것이다. 인간의 직업 역시 자동화, 기계화에 의해 무수히 사라지게 될 터인데, 그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에 없어져도 좋고, 빨리 없어질수록 좋은 직업이 바로 ‘판사'다. ‘판사'라는 직업은 인간이 다른 인간의 행위를 ‘심판’ 하는 역할인데, 이 직업이 아직까지 유효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권위 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지적 수준과 과학기술의 발달에 비해 매우 미개한 상황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엊그제 뉴스에서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이 중국의 프로바둑 기사와 대국을 한 결과가 나왔는데, 인공지능이 프로바둑기사를 이긴 경우는 처음이라고 한다. 인공지능 역시 인간이 개발한 것이므로 인간의 과학기술이 인간 두뇌의 특정한 활동-바둑-을 이기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의 과학기술이 인간의 고도한 두뇌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할 수는 있어도, 미래의 과학기술이 인간의 특정한 능력-바둑-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프로그램이 학습을 통해 스스로 지능을 높여 나가는 방식인데, 인류의 상위 0.000000001%도 안 되는 초고도 두뇌를 가진 프로바둑기사의 능력을 뛰어 넘는 것은 매우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인공지능이 그렇듯, 지능을 생성하기 위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해당 분야-바둑, 법률 등-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이 기본이다. 법률은 바둑보다 훨씬 단순하고 데이터베이스로 만들기도 쉬운 분야여서, 사회적 합의만 있다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판사를 대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법체계에서 경찰과 검사는 필요하겠지만 판사라는 존재가 필요 없는 것은, 판사의 역할이 매우 기능적이고, 데이터에 근거해 결과를 내놓기 때문이다. 기능적이고 데이터에 근거한 결과를 내놓는 것은 컴퓨터가 가장 잘 하는 일이기도 하다. 더 큰 문제는, 인간 판사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 편견과 부족한 지식, 무능으로 인한 오판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특히 권력이 개입된 사건의 경우, 사회적 파장이 크거나 권력자의 입김이 반영되는 경우에 판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언론이나 권력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 없다. 게다가 대부분의 판사는 보수적이고, 보수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으며, 사회의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인간이 기계에게 판결을 받다니! 하면서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법률 자체가 매우 딱딱하고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체계를 갖고 있다. 오히려 합리적인 결과를 원한다면 법률 데이터베이스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그 안에서 모든 판례를 분석해 내놓는 인공지능의 결과가 훨씬 합리적이고 보편적이며 논리적이다. ‘심판관’은 고대 제사장의 역할에서 시작되었으며, 제사장은 무당이었다. 그들의 출현은 인류가 농경시대로 들어서면서 잉여생산물이 확보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잉여생산으로 다양한 기능의 직업군이 생길 수 있었고, 신과 가장 가까운 무당은 제사장이 되어 지배계급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판사’는 지배계급이다. 그들은 법률을 토대로 인간의 행위를 판단한다. 법률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 사회질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보수적인 내용을 규정한 것이고, 법률에 규정하지 않은 모든 행위는 자유롭고, 처벌받지 않는 것을 전제한다. 법률이 복잡하고, 사회의 구성원을 얽매는 내용이 많을수록 판사의 역할은 중요해지게 된다. 그것은 결국 인민의 자유를 구속하고, 억합하는 기재가 되는 것이다. 푸코의 말처럼, 인민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진짜 감옥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한 왜곡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법률은 단순하고 적을수록 좋지만, 현대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그럴 가능성은 적어졌다. 복잡한 법률을 판단하는 데 있어 인간 판사의 능력보다는 인공지능의 판단이 훨씬 합리적일 수 있는 이유는, 컴퓨터는 인간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데이터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큰 데이터에서 나오는 분석과 결과는 인간 판사가 내리는 결론보다 당연히 훨씬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판사가 사라진 법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검사가 제출한 조서는 컴퓨터가 데이터베이스에 추가하고, 판결은 컴퓨터가 출력한 문서로 받아보게 될 것이다. 판사의 권위 따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되어야 한다. * 2016년에 쓴 글입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안철수 대표, 정치는 오기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안철수 대표, 정치는 오기로 해서는 안 됩니다. 최근 서울시장 선거에 후보로 나선 안철수 당대표께, 시민의 한 사람으로 충고합니다. 정치는 자기의 자존심을 살리려고 오기를 부리며 하는 게 아닙니다. 이제라도 정치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다시 찾아보길 바랍니다. 저는 지난 몇 년 사이 안철수 대표에게 보내는 글 세 편을 썼습니다. 2015년에 쓴 글 (https://brunch.co.kr/@marupress/142)에서 정치를 시작하는 안철수 대표에 대해 안쓰런 마음과 함께, 정치인 안철수의 행보에 의문을 갖는다는 글을 썼습니다. 안철수 대표의 진정어린 마음은 믿지만, 함께 정치하는 사람들 속에서 안철수 정치의 본질을 잊은 것은 아닌지, 진보적 테제와 개혁의 화두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습니다. 그리고 5년의 시간이 흘러 2020년, 안철수 대표가 발표한 '특별 기자회견문'을 듣고 다시 글을 썼습니다. (https://brunch.co.kr/@marupress/852) 이때도 안철수 대표가 보여준 행보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전혀 개혁적, 진보적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구태 정치인의 행보를 답습하는 걸 보면서 매우 실망했습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안대표님의 말과 행동은 정치인으로서 대단히 미숙하거나 어리석었습니다'라고 비판했는데, 이 말은 아직까지 고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이 글에서 저는 안철수 대표가 깔끔하고 담백하게 물러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 11월에 쓴 글(https://brunch.co.kr/@marupress/863)에서는 제목부터 '안철수 씨, 정치 그만두시죠'라고 썼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안철수 씨는 행정 경험도 없고, 정치 경험도 없는 '문외한'입니다. 그런 점에서 황교안도 마찬가지죠. 적어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면, 정치와 행정에서 오래 경험을 하고, 공부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철수 씨는 그런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도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건, 일하지 않고 열매만 따먹겠다는 욕심이며, 망상입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서울시장이 되겠다고 나온 지금, 이 지적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 다시 안철수 대표에게 글을 쓰는 이유는,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국민의당' 김윤이 하는 말을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입니다. 김윤은 매우 악의적이고 야비한 말로 현 정부의 정책과 전 서울시장 박원순 씨를 모욕했습니다. 김윤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쌍욕이 나왔습니다. 대중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양식과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항상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말을 가려 하는 것이 교양 있는 사람의 태도이고, 그런 교양과 품위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는 행위이므로, 더욱 조심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수많은 대중이 듣는 라디오 방송에서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김윤은 없는 사실을 단정하거나, 사실을 왜곡, 과장해서 말하고, 고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더군요. 안철수 대표는 '국민의당' 대표로서, 당원이 공적인 자리에서 교양과 품위를 내던지고 천박한 말과 근거 없는 왜곡, 과장된 내용을 말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국민의당' 당원들이 집권당인 민주당을 공격해서 민주당의 지지도를 낮출 수 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당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권력을 쟁취하려고 하는 조직입니다. 그 과정에서 보다 나은 정책을 만들어 국민을 설득하고, 선거를 통해 지지를 얻어 국회, 지자체의 자리를 확보해서 자신들이 만든 정책을 펼치는 것이 정치입니다. 이렇게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정당에서 김윤 같은 천박하고 수준 낮은 사람이 방송에서 다른 정당을 야비하게 공격하고, 고인을 모욕한다면, 그 개인의 잘못만 지적하는 게 타당할까요? 아니면 그가 속한 정당의 수준과 내용을 비난하는 것이 마땅할까요? 반대로, 민주당에서 만약 어떤 당원 한 사람이 방송에 나와서 다른 정당을 야비하게 공격하고, 천박한 말투를 사용하며, 고인을 모욕하는 말을 했다면, '국민의당'에서는 그 '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민주당' 전체의 잘못으로 비난할까요? 당연히 정당 정치인은 누구라도 그 정당을 대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김윤'이라는 개인을 비난하는 것은 물론, 김윤이 속한 '국민의당'도 함께 비난하며, 그 당 대표인 안철수 씨도 싸잡아 비판, 비난하게 됩니다. 안철수 씨가 정치에 입문한 것도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2011년, 전 서울시장 오세훈이 '무상급식' 반대를 주장하며 서울시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했다가 너무도 당연하게 서울시장에서 탈락한 이후, 안철수, 박원순 등이 급격하게 서울시장 후보로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9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안철수 씨는 박원순 후보를 지지하면서 서울시장은 물론 대통령 후보로서의 대중적 인기와 전국적 지명도, 지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10년 동안의 행보를 보면, 안철수 씨는 한마디로 오락가락, 갈팡질팡, 횡설수설 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자기 중심을 세우고, 자기의 정치철학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단단하고 뿌리 깊은 정치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주위의 노회하거나 어리석거나 개인적 욕망에 불타오르는 덜 떨어지고 천박한 정치낭인들의 숲에서 자기 중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니, 안철수 씨가 '정치인'으로서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자기 중심조차 갖지 못해 타인의 욕망에 휩쓸린 것이라고 봅니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안철수 씨는 미국으로 출국했다 돌아와서 2013년 '노원 병'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민주당 계열의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표가 되었다가,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 다시 '국민의당'을 창당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이 움직이지 않고, 안철수 지지 역시 미미하게되면서 2018년 하반기에 독일로 출국합니다. 자기 처지가 조금만 불안하면 무조건 외국으로 나가서 문제가 해결되길 기다렸다 돌아오는 모습은 책임있는 정치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2019년에 다시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합당해 '바른미래당'을 창당했으나 역시 내부 분열과 갈등으로 안철수 대표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현재 안철수 대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안철수 씨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안철수 씨는 모든 선거에서 패했습니다. 딱 한번, '노원 병'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을 뿐입니다. 19대 대통령 선거,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습니다만,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안철수 씨가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대중에게 존경받고, 사회 활동도 다채롭게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정치인' 안철수를 보면, 그동안 정치를 하면서 당한 온갖 상처, 모욕, 불쾌함, 모멸감, 꺽인 자존심과 망가진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오기를 부리며 정치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라고요? 본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그런 의심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정치인은 무엇보다 자신만의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돈과 권력, 명예가 있다고 누구나 정치인이 되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잡아서 사리사욕을 취하고, 개인의 사적 욕구와 욕망을 위해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태입니다. 정치인 안철수의 정치철학은 무엇입니까? 그동안 자신의 포지션을 놓고 '중도진보', '중도', '중도보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중심이 없는 정치가의 불안정한 모습을 국민이 확인했습니다. 그동안 사회의 약자들 -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임시직, 특별고용직, 아르바이트 등 노동자들과 여성, 어린이, 노약자, 성소수자 등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진지하고 깊이 있는 고민과 발언을 한 적이 있던가요? 국민의 보편적 복지를 위한 정책을 내 놓은 적이 있나요? 외교 문제에 대해 전략적 깊이를 보여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던가요? 한국의 농어민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까? 안철수 씨는 정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자기의 의지가 아니었고, 정치를 하려는 의지도, 목표나 목적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대개 철저한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해도, 정치를 시작한 이후에도 안철수 씨는 정치가 국민을 위한 철저한 봉사라는 것, 국민의 삶을 편안하게 하고, 오로지 국민의 삶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의 관점에서, 안철수 씨의 정치행보와 '국민의힘' 소속의 국회의원들이 보여주는 행태가 거의 다르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즉, 안철수 씨는 자신이 '중도'라고 외치지만, 한국사회에서 수구반동 집단과 차별성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굳이 안철수 씨까지 나서서 한국의 정치를 극우로 몰아가려는 행동을 할 까닭이 있을까요? 그러고 싶은 겁니까? 앞에서 쓴 세 개의 글에서 저는 내내 안철수 씨의 역할이 있다면 그건, 진정한 개혁만이 대안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사회는 매우 폭넓게 썩었습니다. 정치, 언론, 검찰, 사법, 재계 등 부패하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이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것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는 국민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가들이 국민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라면, 지금은 오히려 국민이 정치와 정치가를 걱정하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고, 반동, 매국 언론과 검찰, 사법이 정상 국가를 망가뜨리고 있기 때문에, 국민이 화가 나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철수 씨는 어떤 정치를 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고, 이 정부가 잘 하는 정책은 모른 척 하고, 꼬투리를 잡아서 침소봉대해 비난하는 것만 즐겨하는, 막말로 양아치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표로 있는 당의 당원이 시중잡배 같은, '양아치'처럼 말하는 걸 보면서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는다면, 안철수 씨가 대표로 있는 당의 정체성과 당 대표의 인성까지도 같은 종류로 판단하게 될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안철수 씨가 정치에 입문할 때 받았던 그 높은 지지도-약 60%-가 10년이 지난 지금 왜 형편없이 초라하게 쪼그라들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문재인 정부와 척을 지고, 비난하는 행동, 수구반동 집단과 비슷한 정치적 언행, 말과 행동의 불일치, 천박하고 야비한 당원의 행태 등이 안철수 씨와 '국민의당'을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안철수 씨를 응원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최소한의 희망도 갖지 않습니다. 안철수 씨는 서울시장이나 대통령의 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한번씩 낙선을 했던 경험이 있고, 국민은 더 이상 안철수 씨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걸 알기 바랍니다. 그 결과에 대한 원인은 지난 10년 동안 안철수 씨가 보여준 행동에 있고, 국민은 그런 안철수 씨와 '국민의당'을 심판한 것입니다. 깨끗하게 승복하고 포기할 줄 아는 것도 군자의 품위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입니다. 서울시장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욕망은 서울시장이 되어서 서울시민의 삶을 향상시키겠다는 행정가로서의 의욕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고픈 욕망을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로 삼는 것이 분명하지 않던가요? 서울시정 조차 잘 알지 못하고, 비전과 전략이 없으면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 뿐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불행의 구렁으로 몰아가는 매우 반국가적 태도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경원 같은 사람이 서울시장으로 나오는 것 -만약 나온다면 - 역시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 앞에서는 깔끔하게 승복하고, 뒤돌아 서는 것이 현명한 태도입니다. 정치인으로 자질도, 능력도 안 되는 인물이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다고 망상하는 것이야말로 불행의 첩경입니다. 돈이 있으니 오기를 부려가며 정치를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점점 더 비참해질 것입니다. 국민의 뜻을 거스른 정치인들의 말로를 돌아보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기 욕망과 욕구를 위해 정치한 결과, 국민에게 비난, 조롱, 외면당하고 역사에서 더러운 이름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안철수라는 이름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나처럼 단순한 사람을 위한 정리
    나처럼 단순한 사람을 위한 정리 사회 현상을 이해할 때, 세부 항목을 모두 기억하거나, 기록해서 분석하는 건 전문가들이 할 일이다. 나처럼 평범한 서민은 기본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높지 않으며, 설령 있다 해도 피상적이고 개념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건 여러 종류의 선거철에 대중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중은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선거 때마다 '인물론'이나 '정당론' 등의 여론에 따라 선택하는 후보가 달라진다. 물론 큰 줄기에서 옳고 그름이 판명되기는 하지만, 요즘처럼 정치가 어지럽게 뒤섞이고, 거짓 정보와 미세한 차이로 갈리는 여론전 속에서 나처럼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옳고 그름, 지지와 반대를 가르는 기준을 두고 혼란할 수 있다. 그래서 내 기준으로 단순하게 현재 상황을 정리해 봤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기준이고, 복잡한 상황을 단순화한 것이므로 세부적으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겠지만, 큰 줄기에서 동의하는 분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적은 누구인가? 정치에서 한국현대사의 큰 줄기를 보면, 현재 '국민의 힘'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적폐 세력이자, 반민족, 반민주, 친일매국노 집단이다. 즉, 어떤 명분이든 '국민의 힘'을 지지하는 건 반민족, 친일매국노를 지지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독재와 매국에 뿌리를 두고 거둔 부와 권력으로 한국사회의 기득권을 형성했으며, 학계, 언론과 카르텔을 형성해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처벌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승만과 매국노, 매국경찰에 의해 정당한 법집행이 좌절되어 오늘날 매국, 독재의 뿌리가 자란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미래를 위해 극우반동 집단인 '국민의 힘'과 그 카르텔을 박살내는 것이 민주시민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것은 오로지 투표와 함께 현 집권 여당을 감시, 지지하는 한편, 시민의 여론으로 압력을 가해서 민주당이 개혁 입법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민주당은 어떤가. 민주당도 기득권 부르주아 세력임에 틀림없지만 '국민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수정당'이다. 민주당은 보수정당이지만 상대적으로 민주적이며 진보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한국에 좌파정당이 없는 현실에서 민주당이 그나마 대안이며, 70년대, 80년대, 90년대의 진보운동세력, 학생운동, 활동가들 일부는 민주당으로 들어가 개혁을 시도했다. 민주당 내부에는 극우에 가까운 인물부터 좌파에 가까운 인물까지 스펙트럼이 넓어서 일방으로 비난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나는 민주당 지지자가 아니지만, 진보세력, 진보성향의 시민이라면 민주당이 개혁을 할 수 있도록 지지할 필요가 있다. 정치에서 실질적 힘(정당 의석 수, 조직력, 당원 수 등)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인정하고, 좌파 진보정당이 없는 한국현실에서 민주당을 압박하는 한편, 온건한 개혁부터 민생의 구체적 사업에 이르기까지 민주당을 견인하는 것은 깨어 있는 시민의 역할이다. 종교에서 기독교 주류는 정치의 '국민의 힘'과 같은 무리다. 이들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친일기독교로 거슬러 올라가며, '서북청년단'이 저지른 제주도민 학살사건의 주범이기도 하다. 한경직 목사가 스스로 밝혔듯, 서북청년단의 모체는 평안도를 중심으로 하는 북한에서 내려온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이들이 제주4.3에서 군인, 경찰과 함께 제주도민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이다. 이후, 이들 기독교 세력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군사독재 정권에 협력하며 세를 키웠다.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기독교도가 나라를 망치는 데 앞장섰다. 대표 인물이 이승만, 이명박이다. 같은 기독교라 해도, 가톨릭은 조금 다르다. 한국현대사에서 가톨릭은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민주화 투쟁을 하는 청년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 현 문재인 대통령도 종교가 가톨릭이며,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개신교에서는 엄청난 확진자가 나오고, 사회를 혼란시켰지만, 가톨릭은 확진자도 거의 나오지 않고, 정부의 '코로나19' 방역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되는 성범죄자 가운데 목사가 가장 많다는 보도(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6년 11월까지 성폭력 범죄로 검거된 전문직이 5,261명이고 이 중 종교인이 681명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이 중에서도 성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른 전문직 직업군 1위가 바로 개신교 목회자였다. - 가스펠투데이)를 보면, 개신교가 얼마나 썩었나를 알 수 있다. 가톨릭도 미국을 비롯해 세계 전역에서 가톨릭 신부들이 성범죄-동성 아동 성착취-를 저지른 사례가 드러나고 있으니 개신교만 비난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의 사례에서는 가톨릭보다는 개신교가 훨씬 악랄하다. 사실, 개신교의 목사나 교회를 일방 비난하기 어렵다.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나 도덕적 비난이 반복되는 것은, 그럼에도 꾸준히 그런 목사나 교회를 지지하는 신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회가 타락하는 원인에는 어리석고 무지하며, 멍청한 개신교도들이 수백만 명이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속이는 놈이 더 나쁘지만, 속는 놈도 결국 한통속이라는 뜻이다. 주류 언론은 거의 대부분 '자본'의 노예라고 봐도 좋다. 공생관계라고 말하지만, 재벌, 대기업이 광고를 하지 않으면 당장 밥줄이 끊긴다는 걸 그들은 잘 안다. '자본'은 이 사회의 주류이며, 정치와 경제를 양손에 잡고 흔드는 핵심 세력이다. 따라서 '자본'의 말을 거역하는 언론은 거의 없다. 삼성 장충기에게 문자를 보낸 언론사 간부들, 판사들의 면면이 까발려진 적이 있다. 언론가 간부, 판사들도 장충기에게는 애완견에 불과한 것이다. 수구 반동들이나 '자본'이 부패한 권력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권력이 부패하면 뜯어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때 기업들은 더 부자가 되었고, 그때 권력자들과 그 주변의 하이에나들, 언론은 떡고물을 꽤 넉넉하게 얻어 먹었다. 지금 주류 언론이 민주당 정부를 공격하는 유일한 이유는, 떡고물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하이에나와 들개들이 몰려 다니며, 호랑이가 사냥한 먹이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민주 정부를 흠집내고, 권력을 빼앗아 수구 반동 세력이 가져가면, 그들끼리 서로 부패한 열매를 나눠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악랄하게 민주당 정부를 물어뜯고, 민주당 정부에서 개혁적인 인물 - 조국, 추미애 등 - 을 인정사정 없이 물어뜯는 것이다. 사교육 시스템 - 정부의 입시 정책, 초중고등학생을 위한 사설학원 -이 붕괴하지 않는 이유는, 정부의 보수적 정책과 사교육 시장의 이익이 같고, 여기에 천박한 시민들의 경쟁적 욕망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교육 시스템을 완전히 철폐하지 못하는 한, 한국의 교육은 학생의 목을 조르고, 결국 한국의 미래를 질식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핀란드처럼, 교육 혁명을 일으켜야 하는데, 이걸 주도할 정부가 없으며, 누가 먼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를 두고 서로 눈치만 볼 뿐이다. 기본적으로 수구 반동 세력에서는 현재의 사교육 시스템을 옹호, 지지하고 있으니 당연히 걸림돌이고, 민주당도 보수적이긴 마찬가지다. 학생들을 점수로 줄 세우고, 끊임 없이 경쟁하도록 만들어 결국 수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현재의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인간들은 전부 수구 반동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의 서열화, 입시 학원화, 취업 학원화 하는 학교,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 뺑뺑이를 돌리는 현재의 공교육과 사교육은 아이들을 말려죽이고, 학교폭력을 조장하며, 어린이, 청소년의 창의성을 말살하고, 자본의 노예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획일화된 공장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70년대 초반에 핑크 프로이드의 'The Wall'에서 노예를 만드는 학교 교육을 강하게 비난했지만, 지금까지 바뀐 것은 없다. 교육 시스템을 혁명하지 않으면, 어린이, 청소년들의 삶이 왜곡될 것이고, 사교육으로 지출되는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며, 부모들은 경쟁 교육의 달리기에서 지쳐 쓰러질 것이다. 검찰과 사법부는 정치적 중립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 검찰총장 윤석렬은 '이명박 정부가 가장 쿨했다'는 표현으로, 검찰의 본질을 드러냈다. 한국에서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한국 검찰만큼의 권력을 가진 검찰이 없다. 검찰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검찰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정부를 지지한다. 즉, 검찰에게 최대의 재량권을 부여하는 정부(권력)와 친한 관계를 유지한다. 현 문재인정부와 검찰이 갈등을 일으키는 이유는 민주정부가 검찰의 권력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검찰은 자신의 권력과 기득권을 뺐긴다고 판단해 강력하게 반발하는데, 민주정부의 통제에 반발한다는 것만으로도 검찰은 개혁 대상이다. 그동안 검찰은 독재정권과 부패정부에서 권력의 하수인으로 충실한 머슴 또는 사냥개 노릇을 해왔다. 검찰로서는 적당히 부패하고, 권력과 돈, 인맥으로 얽힌 기득권 집단에서 권력을 누리고, 향유하며 즐기다 변호사가 되어 전관예우로 몇 달 사이에 수십억 원의 돈을 벌 수 있었던 과거가 좋을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가 검찰을 개혁하는 것은 과거 독재정권, 부패정권의 잘못을 끊어내고, 민주주의 사회에 어울리는 검찰로 만들기 위함이다.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도 검찰 개혁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검찰에게 칼을 맞고 노무현 대통령이 참담한 죽음을 당한 경험이 있기에, 노무현 정부를 잇는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 개혁은 단순한 개혁 과제가 아니라, 정권의 운명을 건 필사적인 싸움이 될 것이다. 법원의 상징은 판사다. 모든 법적 분쟁을 판결하는 위치에 있는 판사는 절대 독립과 중립의 원칙을 부여받고 있지만, 양승태 사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법원(판사)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삼성의 장충기에게 충성 문자를 보낸 판사도 있다. 판사도 진급에 신경을 쓰고, 평가를 받으며, 더 높은 직급의 관리에게 인사고과에 따른 불이익을 당한다. 그런 점에서 판사도 여느 직장인과 다름 없는 수직 명령체계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판사들 대부분이 문서에 있는 법조항과 현실의 법감정이 엄청난 괴리를 보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는 '유전무죄'가 적용되어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는 걸 시민들은 알고 있고, 사법부는 스스로 권위를 타락시키고, 돈과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법을 적용하는데 있어 공평, 평등하지 않은 사회는 기본이 무너진 사회다. 한국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선진국에 가깝지만, 검찰, 사법, 언론 등은 매우 후진 시스템이어서, 시민의 평균 상식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떤 죄를 짓든 결과는 형량으로 나타나는데, 수천 억원을 사기 친 범죄자, 살인을 한 범죄자와 라면을 몇 개 훔친 사람의 형량이 같다면, 그런 법을 과연 누가 믿을까. 돈과 권력에 자발적으로 굴종해 재벌의 사장에게 충성문자를 보내는 판사가 건재한 사회라면, 그런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법원이 과연 중립과 원칙을 지킬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법부가 돈과 권력의 자발적 노예로 전락해 기득권 집단의 범죄와 부정, 부패, 비리를 눈감아 주는 일이 계속되면, 그들에게는 좋은 세상일지 모르지만, 시민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르면 결국 그들 - 부패의 카르텔 - 모두가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을 예견할 수 있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고, 흑과 백으로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 옳고 그름은 있고, 아군과 적은 구분된다. 우리는 시민민주주의와 봉건 잔재가 뒤섞인 상황에서 매국노(친일, 친미)들과 싸우고 있다. 우리 역사를 부정하고, 우리를 짓밟은 나라를 찬양하고,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자는 매국노다. 시민이 만든 민주 정부를 부정하고, 독재(박정희, 전두환)와 부패(이명박, 박근혜) 정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는 자는 우리나라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려는 민족반역자들이다. 누가 이런 말을 하는지 잘 들어보라. 적은 훨씬 가까운 곳에 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전태일과 체 게바라
    전태일과 체 게바라 -전태일을 모욕하는 자는 누구인가 어제(11월 13일) 많은 사람이 '전태일'을 언급했다. 그 무수한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전태일'에 관한 말들이 내게는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기득권이며, '전태일'을 팔아서 호의호식 하려는 인간들이었다. 정작 '전태일'을 말할 자격이 있는 분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나 역시, sns에 쏟아지는 '전태일'에 관한 글을 보면서, 그 말을 하는 자들의 면면이 야비하고, 천박하며, 가식과 파렴치,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론, 좋은 분들이 없는 건 아니다. 진심으로 '전태일 정신'을 따르고자 하는 분들도 있다. 극소수지만.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을 일으켰으며, 쿠바의 자본주의 체제를 뒤집고, 쿠바 사회주의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명백히 사회주의자이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다른 나라에서 혁명 활동을 하다 적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회주의자 체 게바라가 어느 때부터 가장 자본주의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착취에 반대하던 일부 진보주의자들이 체 게바라의 혁명성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를 아이콘화 했다. 체 게바라는 분명 사회주의 혁명의 상징이자 영웅으로 칭송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마르크스, 레닌, 체 게바라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사회주의 혁명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아이콘으로, 선전선동의 대표 인물로 선정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착취에 저항하는 민중들 역시 성공한 혁명의 대표적 인물인 혁명가 체 게바라를 뜨거운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시간이 흘러 체 게바라는 티셔츠, 모자, 노트, 신발, 후드티 등에 새겨졌고, 젊은이들 사이에 '쿨한' 아이템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밥 말리처럼. 비틀즈를 소비하던 60년대, 70년대 세대에게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퀸, 핑크 프로이드와 같은 개념으로 마르크스, 레닌, 체 게바라가 '대중화'되었다. 이제 체 게바라는 멋진 베레모를 쓰고, 콧수염을 기른 잘 생긴 배우가 되었고, 그가 남긴 일기는 멋진 오토바이 여행으로 기록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혁명가의 삶을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고, 대중은 그런 혁명가를 소비한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태일'은 한국에서 금기였다. 그가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산화한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전태일'은 '빨갱이'와 같은 이름이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은 독재정권에서 가장 강한 탄압을 받았으며,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았다. '전태일'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다. 그는 개인이었지만, 노동자 전체였으며, 노동자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무수한 '전태일'이 공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손발이 잘리고, 불구가 되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었다. 전태일 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는 것은, 정권을 타도하자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철저하게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독재정권과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전태일을 떠올리는 것도, 이름을 말하는 것도 금지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역시 인간 전태일의 어머니에서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아들의 뜻이 올바르고, 그 뜻을 따르는 무수한 '전태일'이 살아서 어머니를 따르고 있었기에, 어머니는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에 등장하는 '어머니'처럼,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노동자의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 서는 어머니가 된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하고 50년이 지났다. 엄혹한 시기를 지나면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기에, 노동자들은 전태일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깨어 있는 지식인들은 '대학생 친구'가 되고자 노동자들 곁으로 몰려들었다. 노동자, 학생, 시민, 농민 등 기층 민중은 반독재투쟁과 민주주의 투쟁을 통해 일정 수준의 민주주의를 확보했으며, 독재정권을 몰아냈다. 하지만 그 열매는 여전히 부르주아 우파 정권이 차지했고, 노동자는 지금도 소외당한 채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자본은 노동자를 이간질하고, 정규직, 비정규직, 산업예비군(실업자)로 경쟁시켜 분열을 조장하며, 노동자끼리 싸우도록 만들고 있다. 젊은 노동자들은 이제 더 이상 '전태일'이 누구인지, '전태일 정신'이 무엇인지 모른 채, 비정규직으로, 임시직 노동자로,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살아간다. '전태일'을 소비하는 건 오히려 부르주아와 자본이다. '전태일' 이름을 팔아 마치 노동자와 노동조건에 관심이 많은 것처럼 대중을 기만하고, '전태일' 이름을 팔아 호의호식 하며, '전태일' 이름을 팔아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나는 1988년, 제1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상을 받은 이후 나는 더 이상 노동자로 살지 않았거나 못했다. 임금을 받거나 자유기고로 근근히 생활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였으나, 노동자라는 인식은 약해졌다. 그래서 더욱 노동운동에 관해 입을 열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노동자로 일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도시빈민으로 자랐다. 나는 소년 노동자로 세상에 나왔으며, 사회주의를 공부했고, 적어도 '멍청한 노동자'로 남지 않았다. 나이 들어 임금노동자의 위치에서는 벗어났지만, 나는 계급적 자각과 계급의식은 여전히 노동자로 남아 있다. 현재 수많은 노동자는 자신이 임금노동자로 살면서도 '노동계급', '계급의식'이 없는 멍청한 임금노예로 살아간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멍청한 상태에 있도록 집요하게 방해한다. 노동자로서의 자각과 계급의식에 눈뜨도록 하는 모든 활동은 국가와 기업의 물리적 폭력과 경쟁, 세뇌를 통해 저지한다. 전태일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대학생 친구'들은 반독재 투쟁과 노동운동의 과정에서 노동현장으로 들어왔다가 세월이 흘러 이제는 거의 다 사라지고, 더 나타나지 않았다. 전태일의 친구인 노동자들은 과거보다 더 어리석고 멍청하게 퇴보했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연예인이 나오는 텔레비전을 보며 낄낄거리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더 좋은 자동차를 구입하고,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걸 꿈꾸는 자본주의 욕망의 추종자로 변했다. 일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무식한 인간으로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기가 노동자라는 자각도 하지 못하는 무지 속에서, 자본가의 노예로 살다가 죽는다. 전태일이 바라던 세상은 노동자의 권리가 최소한으로 지켜지는, '근로기준법'이 정상으로 작동하는 사회였다. 50년이 지났지만, 전태일이 바라는 세상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전태일을 팔아 호의호식하는 인간들은 늘어났지만, 그들에게 전태일은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는 외투에 불과할 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하청 노동자는 오히려 전태일이 누구인지 모른다. 이것이 한국 노동계의 현실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아티스트, 나훈아
    아티스트, 나훈아 올해 한가위는 텔레비전에서 방송한 나훈아 공연이 가장 큰 화제였다. 무려 160분 공연을 나훈아 혼자 이끌었고, 시청률은 30%에서 순간 최대 70%까지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번 공연은 나훈아 씨가 무려 15년 만에 텔레비전에 출연한 것으로, 그에게나 팬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나훈아 씨는 출연료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방송에서 광고를 내보내지 않았고, 공연 기획, 무대, 조명 등 모든 것을 자신의 지휘로 직접 준비했다. 예전에 부천의 한 체육관에서 그의 공연을 직접 본 이후, 그가 단지 노래만 하는 가수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 공연으로 나훈아 씨는 기존의 팬들보다 훨씬 많은 대중에게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냈다. 이번 공중파 공연은 모두 3부로 구성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나훈아의 히트곡들이 앞쪽에 배치되었고, 2부와 3부에서 그의 신곡 가운데 몇 곡이 들어갔다. 나훈아 콘서트는 화려한 퍼포먼스로도 유명한데, 무대 뒤에 수십 명의 합창단은 기본이고, 타악, 국악, 댄스, 사물놀이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을 활용해 관객의 귀와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여기에 절묘하게 꺾이는 나훈아의 창법과 상남자의 외모에서 나오는 간드러진 노래, 외모와는 다른 조금은 푼수같은 멘트 등이 대중에게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1970년대부터 나훈아, 남진의 경쟁구도를 만든 것은 연예계와 언론이었는데, 대중가요계에서는 투탑으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이때의 나훈아는 20대 중반의 청년으로, '노래를 잘 하는 가수'로 인기가 많고, 팬덤이 형성된 대중가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70년대는 정치, 사회적으로 엄혹한 시기였다. 독재자 박정희는 영구 집권을 노리고 있었고,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청년들은 청바지, 통기타, 맥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를 만들어가면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르가 새롭게 나타났다. 한대수, 김민기, 조영남, 송창식, 김도향,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양희은 등 당시 통기타 세대는 청년 문화의 바람을 일으켰고, 정부는 이런 청년 문화를 불순한 것으로 규정해 억압했다. 이들 1세대 통기타 가수들 가운데 한대수, 김민기는 '아티스트'다. '가수'와 '예술가(아티스트)'를 구분하는 것은, 주어진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자기가 직접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작사, 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대중 앞에서 부르는 건, 노래를 잘 부르는 기교만 있으면 되지만, 자기가 직접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은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차원이 다르다. 소설가나 시인이 글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라면, 영화감독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연출해 만든 영화로 발언한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그렇다. 음악 역시 작사, 작곡, 노래를 자신이 직접 할 때 비로소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대수, 신중현, 김민기, 정태춘, 송창식 등은 수많은 가수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존재들이다. 70년대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 가수들의 노래는 주로 미국의 팝송을 가져와 번안해서 불렀고, 당대 한국의 현실이나 민중의 목소리를 스스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한대수가 갑자기 나타났다. 한국 가요계는 한대수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한대수의 등장은 한국가요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작사, 작곡, 노래를 직접 하는 가수의 등장은 곧바로 그 시대 가수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한대수 이후 자기 노래를 하는 가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특징은 미국에서 생활하며 직접 영향을 받았거나(한대수), 미군부대에서 연주, 노래를 하거나(신중현), 당시 독재정권의 집권 상황에서 친일문화와 급격히 들어오는 외래문화(주로 미국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민중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삶과 노래를 일치하려는 노력(김민기, 정태춘, 송창식)이 만든 결실이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트로트 장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트로트가 일본 가요인 '엔카'의 영향을 직접 받은 왜색이 짙은 노래라고 비판했으며,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해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청년문화에 직접 영향을 끼친 미국문화에 대한 비판은 적었다. 그럴 것이, 미국에서 일어난 팝, 락음악은 당시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인종차별 반대를 위한 표현 도구로 쓰였고,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청년문화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밥 딜런, 존 디아즈가 통기타 음악의 상징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비틀즈를 비롯해 수 많은 그룹이 기존 음악의 틀을 깨면서 새로운 세대를 열고 있었으며, 이 물결은 한대수에게 직접 영향을 끼쳤고, 한대수의 뒤를 따라 물밀듯이 미국 대중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나훈아는 '트로트 가수'로 출발해 '예술가'가 된 드문 경우에 속한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무수한 가수가 노래했고, 인기를 얻었으며, 스타가 되었지만, 그들 가운데 '예술가'로 불린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나훈아는 1968년에 데뷔한 이후, 오래지 않아 동료 가수 남진과 라이벌로 불리며 인기가 절정에 이른다. 라이벌 구도를 만든 것은 두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당시 방송과 언론이 인기가 많은 남진과 나훈아를 라이벌로 엮어 보다 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의 결과물이었고, 대중은 이런 라이벌 구도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호응했다. 나훈아가 '예술가'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건 그가 데뷔하고 10년이 조금 지났을 때부터 드러난다. 1981년, KBS에서 나훈아 100분쇼 스페셜을 방송했는데, 이때 나훈아는 자신의 노래는 물론, 전통 트로트를 부르는 한편, 우리 민요(양산도, 사발가, 닐리리야)를 구성지게 부른다. 100분 동안 혼자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말하며 끌고 가는 힘이 대단하고, 무엇보다 노래를 맛깔나게 불러 보는 사람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나훈아가 민요를 부르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어려서 엄마를 따라 국악 공연을 자주 보러 다녔고, 직접 민요를 배우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외항선 선원으로 집에 거의 없었고, 엄마는 나훈아의 손을 잡고 주로 국악 공연을 보러 다녔는데, 나훈아도 그때 국악을 배워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를 다루는 것을 엄마가 보면서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미 나훈아는 어려서 음악의 기초를 국악으로 쌓아왔다. 나훈아가 가수로 데뷔한 것도 우연한 기회였고, 그는 공부를 잘 하는 수재였다. 나훈아의 아버지는 아들이 의사나 판사가 되기를 강력히 바랐고, 가수가 된 나훈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도 잘 하고, 노래도 잘 하는 나훈아는 목청이 이미 타고난 가수였으며, 그는 한때 성악을 할 생각도 진지하게 가졌다고 했다. 나훈아가 부르는 트로트에서 특유의 '꺾기'는 트로트 창법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꺾기와는 조금 다른데, 나훈아 스스로 밝혔듯, 트로트와 민요를 결합한 창법이 나훈아 창법이다. 성량이 풍부하고, 국악을 일찍부터 배워 트로트를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한 것이 지금의 창법이 된 것이다. 국악으로 시작해 스타가 된 경우가 또 있는데, 경연대회를 거치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송가인이 그렇다. 송가인도 엄마가 소리를 하는 분이고, 어려서 판소리를 배웠으며, 스스로 트로트를 독학으로 배워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스타가 되었다. 송가인 역시 어떤 노래든 잘 부르고 폭넓은 성량을 자랑하는 것은 타고난 면도 있지만, 판소리로 기초를 탄탄히 다졌기 때문이다. 나훈아가 텔레비전에 자주 나온 시기는 데뷔 이후 1980년대 말까지였다. 그는 이 시기에 텔레비전 가요 방송에서 '10대 가수', '최고 가수상' 등을 모두 받았으며, 단독 공연을 비롯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70년대 라이벌이었던 남진이 가수협회장을 하고, 방송에 자주 출연해 대중에게 모습을 보인 반면, 나훈아는 텔레비전 출연이 거의 사라졌다. 대신 그는 전국의 공연장을 돌며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때부터 나훈아는 텔레비전에서 소비되는 대중가수와는 다른 길을 가기로 선택했다. 텔레비전에 출연하면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신선함이 사라지고, 상품으로의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그 사이에 나훈아 개인의 삶은 밝지 않았다. 공연을 하는 도중, 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심하게 상처를 입었고, 결혼, 이혼, 결혼의 과정이 있었으며 콘서트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주로 공부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배우 김지미 씨와 결혼한 이후 김지미 씨에게 서예와 그림을 배웠는데, 나훈아 개인의 인격과 내적 성숙이 이 시기에 많이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1989년, KBS에서 방송한 나훈아 쇼특급에서는 이전보다 발전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훨씬 많은 합창단과 무용팀이 나오고, 나훈아는 공연 끝부분에서 남북통일을 노래하고 있다. 1990년 '나훈아 스페셜'에서는 노래와 춤을 다양하게 변주하는 장면을 직접 연출해서 그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를 '아티스트'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번 KBS에서 방송한 '2020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이 결정적이다. 이미 2000년 이후 나훈아는 수 많은 콘서트를 통해 아티스트의 면모를 충분히 보였고, 그에게 '가황'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도 팬들이었다. 콘서트에서 그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기대나 상상을 뛰어 넘는 파격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배운 국악, 국악기, 무용, 합창, 연주 등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동원해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대를 연출하고 있다. 그가 부르는 대부분의 노래는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인데, 작곡과 편곡은 전문 작곡가와 편곡가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작품의 내용과 수준에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발언하며, 그 작품이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건 대중의 판단과 선택에 있다. 나훈아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이후 '엄니'라는 노래를 만들어 광주시민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2020년 신곡 앨범에 들어갔다. 노래를 들어보면, 저절로 눈물이 흐를 정도로 노랫말과 음악이 애절하다. 가사에서는 광주민주항쟁에 관한 내용이 직접 들어 있지 않지만, 나훈아가 처음으로 전라도 사투리로 노래를 부른 것, 엄니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누구나 이 노래가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것임을 알 수 있다. 헤비메탈 그룹 '블랙홀'이 부른 '마지막 일기'도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가 쓴 일기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렇게 구체적인 내용을 가사에 넣지 않아도 대중은 상징과 은유를 충분히 해석하고 공감하게 된다. 엄니 엄니 워째서 울어쌌소 나 여그 있는디 왜 운당가 엄니 (엄니) 엄니 (엄니) 뭐 땀시 날 낳았소 한 많은 이 세상 어째 낳았소 들리지라우 엄니 들리지라우 엄니 인자 그만 울지 마시오 엄니 엄니 워째서 불러쌌소 눈앞에 나 있는디 어째 날 찾소 엄니 (엄니) 엄니 (엄니) 무등산 꽃 피거든 한 아름 망월동에 심어주소 들리지라우 엄니 들리지라우 엄니 인자 그만 울지 마시오 엄니 엄니 워째서 잠 못 자요 잠자야 꿈속에서 날 만나제 엄니 (엄니) 엄니 (엄니) 나 잠들고 싶은디 잠들게 자장가나 불러주소 들리지라우 엄니 들리지라우 엄니 인자 그만 울지 마시오 인자 그만 울지 마시오 인자 그만 울지 말랑께 이 가사에서 '무등산 꽃피거든 한아름 망월동에 심어주소', '나 잠들고 싶은디 잠들게 자장가나 불러주소'는 아직도 진상규명이 끝나지 않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가해자 전두환 일당이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처참한 상황을 뜻하고 있으며, 전두환 일당을 처단하고, 광주항쟁을 역사에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때,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있다. 나훈아가 '예술가'로 인정받는 사건 가운데 한 재벌 회장이 불렀을 때, 오히려 자기 공연장에 와서 들으라고 말한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의 가수라면 그 재벌 회장의 생일에 초청받아 노래를 부르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겠지만, 나훈아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만큼 나훈아는 자신의 음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직업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결코 돈에 팔려다니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예술가나 작가, 지식인이 돈에 팔려다닌다면 그건 이미 예술가, 작가, 지식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대중가수는 노래로 인기를 얻는데, 노래는 가사와 음악으로 구성한다. 음악은 가사를 표현하는 동시에 멜로디 자체의 힘을 지니고 있다. 가사가 없어도 음악은 성립하고, 음악이 없어도 음악이 된다. 클래식 음악도 음악이고, 판소리도 음악이다. 대중가요는 가사와 음악이 대중의 정서에 호소하고,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대중가요를 낮춰 말하는 사람은 클래식 음악이 더 '고급'하다고 믿는다. 이건 어처구니 없는 사대주의다.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쵸네도 대중가요다. 오페라는 당대의 대중이 즐기던 대중을 위한 공연이었다. 해학과 풍자, 은유를 내포한 작품을 만들 정도의 가수라면, 그 가수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신중현, 한대수, 정태춘 같은 가수를 예술가라고 부를 때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제 나훈아도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걸 말할 때가 되었다. 이번 '2020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에서 가장 인기를 얻은 노래 '테스형'은 그가 예술가의 반열에 확실히 올랐음을 증명한다. 어느 예술 장르든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미와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상징미가 있기 마련이다. 대중음악에서는 풍자와 해학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표피적인 내용만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기는 불가능하다. 일시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지만 그 생명이 매우 짧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들국화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 테스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형 가사에서 '테스형' 즉 소크라테스에게 하소연 하는 내용이다. 소크라테스를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파격이지만, 가사에서 백미는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와 '테스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다. 이 가사는 50대 이하와 그 이상에서 느끼는 감정이 상당히 다를 것으로 안다. 흔히 유행가 가사가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면 그건 내 이야기라고 한다. 50대 이상에서는 '세상이 왜 이렇게 힘들고, 눈물 많은 나에게 세상이 아픈' 것은 바로 내 이야기라서 공감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를 소환한 것은, 대단한 철학자로 알려진 소크라테스도 사실 알고보면 우리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걸 말한다. 위대한 사람의 삶이나 평범한 사람의 삶이나 모든 삶은 비슷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삶은 희노애락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인생은 고행이지만, 그 고행을 알되, 삶은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불교적 관점을 말하고 있다. '턱 빠지게 웃다'가도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 것은 나이 든 사람이라면 절절하게 공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노래가 훌륭한 건, 노래 전체를 뒤집는 상징이 있다는 데 있다. '테스형'의 진짜 모습은 아버지였다. 즉 나훈아는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묘소 앞에서, 힘들고 외로운 자신의 처지를 아버지에게 하소연 하는 내용인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 하면서, 힘들고 외로운 내 처지를 아버지에게 넋두리 하면서, 정작 부르는 대상은 '테스형'인 것은, 그가 풍자와 해학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훈아는 나이 들면서 꾸준히 발전, 진화하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 졸업 후 얻은 직장에서, 직책에서 수십 년 변하지 않으면서 점점 퇴화하는 것과는 달리, 늘 새로운 시도와 모험을 하며 삶의 지평을 확장해 온 태도만으로도 나훈아는 충분히 훌륭한 인물이다. 이번 KBS 공연도 그렇지만, 그는 콘서트를 할 때, 무대 기획부터 소품까지 스스로 꼼꼼하게 점검하고, 확인하는 사람이다. 91년 한 방송에서 나훈아와 이상벽 씨가 같이 나와 대담을 하는 가운데, 이상벽 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나훈아 씨가 얼마나 완벽주의자인가를 알 수 있다. 그건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지키려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대의 완벽주의자라면 조용필을 떠올릴 수 있는데, 나훈아, 조용필 같은 최고의 스타들이 보여주는 결벽에 가까운 완성도에 대한 집착은, 그들이 성공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데뷔하고 이제 50년 넘는 세월을 무대에서 노래한 나훈아는 한국가요계의 살아 있는 증인이자, 한국가요의 지평을 확장하고, '대중가수'에서 '예술가'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 교과서 같은 인물이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멋지지만, 그는 여전히 청년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더욱 빛난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건설공사장에서 만난 두 형
    003-건설공사장에서 만난 두 형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매형을 따라 건설공사장에 처음 나간 날, 1976년 2월 6일.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노량진에서 내려 여의도까지 샛강을 걸어서 건너야 했다. 공사장은 아침 7시에 작업을 시작하고, 저녁 7시에 작업이 끝났다. 하루 12시간 노동이다. 여기에 출퇴근 시간이 왕복 3시간 정도.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집에 오면 저녁 먹고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여러 곳의 영세한 공장을 다니며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았다. 가내수공업으로 낚시대 만드는 공장, 압핀공장, 유리병공장 등을 다녔고, 건설공사장을 다니기 직전에는 청량리 시장 안에 있는 식당에서 일했다. 음식 배달도 하고, 청소, 서빙, 냉면 내리기 등 식당의 잡일은 모두 했다. 월급은 거의 없었고, 유일한 장점이자 즐거움은 음식을 배불리, 실컷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식당은 백반, 순대국, 냉면 따위를 다 만드는 일종의 음식백화점 같은 곳이어서 식재료가 항상 풍성했다. 그때 함께 일하던 형이 있었는데, 둘이 다락방을 썼다. 다락방은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했으며, 요강에서는 항상 지린내가 났다. 식당이 영업을 마친 저녁에 우리는 순대를 길게 끊어서 다락방에서 먹었다. 하지만 식당 일도 오래 하지 못했고, 결국 일당이 조금 많은 건설공사장으로 가는 것은 필연이었다. 이미 매형이 배관공으로 일을 하고 있어서, 조금 편하게 건설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 일 시작하면서 받은 일당은 600원, 조금씩 올라서 800원이 되었고, 몇 달 지나서 서울이 아닌, 지방으로 일하러 갈 기회가 생겼다. 지방 공사는 그동안 좁은 울타리에만 살았던 내게 새로운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길고 지루한 출퇴근 시간이 사라졌고, 더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졌으며, 일도 한결 편했다. 여기에 일당이 서울에서 다닐 때보다 더 많았다. 우리 팀은 주로 연초제조창에서 일을 많이 했는데, 광주연초제조창, 신탄진연초제조창에서 일할 때의 기억이 특별하다. 일하러 다닌 곳도 광주, 마산, 창원, 울산 등 그때 처음 생기기 시작한 공업단지의 기숙사 건물이 많았고, 설악산 아래 설악동을 처음 지을 때는 한겨울에 따뜻한 물이 없어 찬물로 머리를 감아야 했다. 그렇게 지방을 전전하며 공사장에서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 팀의 사장은 공사장 근처에 하숙집을 잡아서 묵게 해주었는데, 하루 세 끼의 식사가 마냥 행복했다.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고, 하루 12시간 일과만 마치면 자유시간이 많았다. 서울에서 함께 내려간 팀원 가운데 두 명의 형이 내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우연히 그 두 사람은 모두 서울토박이였고, 나도 서울에서 태어났으니 우리는 동질감을 갖고 있었다. 원범이 형은 유한공고를 졸업하고 잠시 공사장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신탄진 하숙집 아주머니가 중매를 서 신탄진에서 결혼을 했다. 나는 어릴 때 노동자가 된 이후, 배운 것이 없었다. 삼중당문고는 꾸준히 읽었지만, 세상 물정도 몰랐고,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사회생활의 기본을 알려준 사람이 두 형이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가르쳐 준 형과, 다정다감하고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해 준 다른 형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성장 배경이 사뭇 달랐지만, 내게는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그때 바느질도 배우고, 기타 치는 법도 배웠으며,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요령을 배웠다. 그때 공사장에서 만난 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나는 그들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고, 또 스스로 배우려는 의지는 분명했다. 나는 술, 담배를 배우지 않았고, 체질도 맞지 않아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건설노동자의 대부분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내게 영향을 준 두 형 모두 술과 담배를 하지 않거나 아주 적게 한 것도 분명 영향이 있었다. 그렇게 좋은 영향을 끼친 두 형과도 시나브로 만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선화예고 공사장에서 먹고 자며 일하고 있었는데, 그 전후로 독서회를 알게 되었다. 독서회를 만나게 된 것은 내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 사건이었고, 두 형과도 이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내 친구
    002-내 친구 친구는 두 개의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이럴 만큼 가까운 친구가 내 삶에 있었던가를 물어본다.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은 어려서 헤어졌고, 학교에서는 한 반에 68명이나 되어서 누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국민학교 5학년일 때, 우리 학급에 한 아이가 전학왔다. 그 아이는 키가 컸고, 골격과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어떤 계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친구와 나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는 우리집에 놀러와 엄마가 만들어 준 찐빵을 맛있게 먹었다. 그의 집은 학교에서 가까운 도화동 꼭대기였고, 우리집은 같은 도화동이었지만 학교에서 조금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놀았고, 서로 의지가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마포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나는 그 무렵 유래 없는 홍수에 우리집이 물에 잠겨 결국 누나가 살고 있던 시흥으로 이사하면서 상급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이사하고 곧바로 나와 동생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고, 14살부터 소년노동자로 살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는 했어도 한달에 한두번은 만났다. 친구는 학생으로, 나는 노동자로 삶의 배경이 달라지고, 물리적 거리도 멀어지면서 우리는 주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쌓았다. 내가 공장노동자에서 건설노동자로 전국을 떠돌며 현장 생활을 할 때, 친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대우그룹 계열사에 취업을 한 다음 아주대학교를 다녔다. 아주대학교가 당시 대우그룹 계열이어서 대우의 노동자들은 야간에 대학을 다닐 수 있는 혜택을 주었다. 나는 그 무렵, 지방을 전전하며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고, 서울 현장에서 일하다, 운좋게 독서회를 알게 되었다. 독서회는 내 인생을 바꾼 중요한 계기였다. 그곳에서 훌륭한 선배들을 만났고, 검정고시를 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도 그 선배들을 통해서였다. 우리가 가는 길은 국민학교 졸업 이후 갈라졌지만, 우리는 서로 소식을 끊지 않았고, 주로 편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직장에 얼마간 다니다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때 공군 사병은 36개월 근무였고, 나 역시 현역으로 강원도 화천에서 복무했다. 그때 공군 현역병이던 친구가 일부러 화천까지 면회를 오기도 했다. 그는 군복무가 끝나고 다시 원래 다니던 회사에 다니며 대학 공부도 계속했다. 그 사이 나도 1984년에 군복무를 마치고 당장 일을 해야 해서 구로공단에 있는 공장엘 다녔다. 그 무렵에는 독서회도 가끔 나갔고, 대학 다니는 선배들과 함께 사회과학 공부도 했다. 잡지사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는데,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글쓰고 책만드는 일을 꾸준히 하게 되었다. 공장은 열네 살 때 잠깐 다니고, 절대 다시는 공장에 가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지만,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다시 들어갔다. 결국 노동조합은 만들지 못했고, 나는 거의 쫓겨나다시피 공장을 나왔다. 독서회에서 알게 된 형이 출판사를 차렸고, 나는 그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 무렵 산본 신도시 아파트의 공모 청약에서 작은 평수의 아파트가 당첨되었다. 내 친구가 사는 곳도 산본이어서 꽤 기분 좋았지만, 1990년, 어느 날, 친구가 기숙사 창문으로 들어가려다 떨어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상 못한 충격이어서 지금도 그때가 생생한데, 나는 그때 친구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죽음은 단순 추락사로 처리되었고, 시골의 어느 땅에 묻혔다. 우리 둘은 전역하고 강화도를 2박3일 동안 걸었다. 텐트 하나와 배낭만 가지고, 강화도를 크게 한바퀴 걸으며 잠은 길가에 텐트를 치거나 교회 안에서 잤다. 우연이지만, 사고가 나기 전, 그는 나에게 자기 고민을 이야기했다. 썩 마음데 들지 않는 여성이 있다고. 어떻게 끝을 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나는 이제 그 친구의 나이만큼을 더 살았다. 이 글을 쓰기 직전에 땅벌의 침에 여러 번 쏘여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죽지는 않았지만, 죽음이 어떤 느낌인지 분명히 느꼈다. 살면서 여러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지만, 내 친구의 죽음은 첫 번째 죽음이자 가장 강렬한 죽음이었다. 내 삶에서 유일한 친구였던 그가 세상을 떠나고, 이후 그만큼 가까운 친구는 군대 동기 뿐이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최고의 공격이 최상의 수비다
    최고의 공격이 최상의 수비다 -적폐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 많은 분이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나는 이제서야 분명하게 깨달았다. 조국, 추미애 장관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검찰과 언론, 수구반동야당의 행태를 보면서, 이 사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제로 분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조국, 추미애 장관일까. 두 사람의 공통점은 '법무부장관'이다. 조국 전장관은 장관 임명 전부터 검찰과 언론, 수구야당이 떼로 몰려들어 발목을 잡았고, 결국 장관 임명 이후 며칠만에 사퇴했다. 조국 장관이 물러난 이후에도 검찰과 언론은 1년이 지나도록 조국 장관과 그의 가족을 악랄하게 괴롭히고 있고, 어떻게든 피를 봐야겠다는 폭력적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 이들은 정작 조국, 추미애 장관 개인에게서 비리를 발견하지 못하자, 그의 가족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조국 장관의 부모님, 아내, 아들, 딸, 동생까지 끊임 없는 별건수사를 만들어 어떻게든 범죄의 고리로 옭아매려는 의도가 확연하다. 추미애 장관에게서도 개인 비리를 발견할 수 없자, 그의 아들 군복무에서 병가 처리한 부분을 들먹이며 마치 나라가 망할 것처럼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이들의 수법은 과거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갈 때와 거의 같은 패턴을 보인다. '논두렁 고급 시계', '호화요트', '아방궁'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민주정부에 적대적인 언론을 통해 소나기가 퍼붓든 기사를 쏟아내는 것이다. 문재인대통령을 공격할 때도 시골집 건축에 문제가 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조국, 추미애 장관에게서 어떠한 문제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이들-검찰, 언론쓰레기, 수구반동야당-은 결코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얼마나 편리하고 유용한가를 너무 잘 알고 있으며, 자신들이 공격을 멈추는 순간, 곧바로 멸망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 검찰, 언론쓰레기, 수구반동야당이 마치 미치광이가 칼을 들고 휘두르는 것처럼 분별 없이 날뛰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필사의 몸부림인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검찰 개혁, 사법 개혁을 좌절시키고, 개혁, 진보적 인물인 조국, 추미애 장관을 내쫓아 자기들의 목적인 현상태 유지를 강력하게 바라는 것이다. 즉, 자신들이 지금까지 누리던 절대권력과 기득권의 이익을 눈꼽만큼도 양보할 수 없다는 처절하면서도 악의에 가득 찬 몸부림인 것이다. 이 공격에는 검찰이 최선봉에 서 있고, 그들의 하수인이자 머슴, 공생관계에 있는 언론쓰레기들이 검찰이 주는 소스를 가지고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상황이다. 측면에서는 수구반동야당이 문재인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양동작전을 펴고 있으며, 이들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부정부패가 난무하고, 부패한 권력을 유지하며,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데 있다. 지금까지 수구반동들이 권력을 쟁취한 이후 벌어진 사건들을 보면, 이들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뚜렷이 알 수 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수구반동 권력은 자신이 찬탈한 권력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국민의 투표로 위임된 권력을 갖고도 오로지 자신들의 사적 이익만을 극대화하려는 노골적이고 파렴치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이명박은 4대강, 자원외교라는 명목으로 수십 조, 수백 조의 국민세금을 갈취했으며, 이 사건은 지금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박근혜는 대통령으로 매우 무지하고 멍청한 인간이었고, 최순실의 아바타였다. 최순실은 대기업들에게 돈을 뜯어냈고, 재벌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돈을 상납하면서, 자기들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속내를 보였다.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이들의 수법은, 가장 개혁적 인물을 저격해 쓰러뜨림으로서 문재인 정부의 사기를 꺾고, 덜 개혁적인 인물이 장관 자리에 앉으면 자신들의 의도대로 정책 방향을 돌리기 수월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바로 조국, 추미애 장관이다. 수구반동, 부패집단의 총공격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살펴보면 일관하는 특징이 보인다. 그것은 검찰, 쓰레기언론, 수구반동야당, 여기에 소위 '진보'라고 불리는 잡것들의 부화뇌동까지 겹치면서 포화가 한 곳으로 집중하면서 대상이 옮겨 가고 있다. 그들이 공격하는 대상은 아래와 같다. 조국 장관과 그 가족 꼭 1년 전에 시작한 이 악랄하고 야비한 공격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으나, 저들의 공격이 더 이상 먹히지 않고, 오히려 조국 장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천천히, 따박따박' 저 반동 무리들의 거짓, 왜곡, 음해에 대응하는 조국 장관의 모습을 보면서, 그와 함께하는 우리 촛불시민들은 정의가 반드시 구현될 것임을 믿고, 응원하고 있다. 의대생 사태 의사의 숫자를 단계적으로 늘리자는 정부의 발표를 두고, 의대생, 의사 집단이 마치 꼬리에 불이 붙은 강아지처럼 미쳐날뛰고 있다. 정부는 과거 정부에서 추진했던 것처럼, 당연히 해야 할 정부 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이고, 실제 OECD 국가 가운데 10만 명당 의사 수는 한국이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따라서 의사 증원은 어느 정부에서든 해야 할 일이며, 이는 결국 국민의 복지 혜택과 맞물린 필연적 행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일부 의사집단은 문재인 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하며, 정부의 일정을 비토, 방해하고 있다. 이 사태도 이제는 진정 국면으로 돌아섰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의대생, 의사집단의 비열하고 이기적이며 악의에 찬 행동을 본 국민의 시선은, 의사를 존경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는 천박한 돈벌레들이라는 정체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추미애 장관 아들 음해 사건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라면 이것이 전혀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추 장관 아들이 자기의 몸이 아프고 불편함에도 끝까지 군복무를 성실하게 했다는 증거가 되어 미담이 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안다. 전혀 불법이 아닌, 휴가 전화통보라는 지엽적 문제를 가지고 마치 국방부와 추 장관이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사건을 은폐하는 거라고 악을 써대는 언론쓰레기와 그것을 범죄로 엮으려고 국방부 압수수색을 한 검찰, 군대도 가지 않은 수구반동야당의 일부 의원들이 내뱉는 무식한 발언들이 쓰레기 언론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는 그대로 반사해서 야당 의원들의 군복무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따지고 들어가야 한다. 황교안의 의심스러운 군면제 사건, 전두환의 사위 윤상현의 1일 군면제 사건, 수구반동야당 의원들의 군면제 사건을 전부 다시 들여다보고, 비리를 밝혀야 한다. 박원순 시장 성추행 음해 사건 박원순 시장이 간단한 유언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비서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보도가 있기 직전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여성은 나타나지 않고, 그 여성 비서의 변호사가 전면에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여성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성추행 고소 사건은 증거도 없고, 정체가 모호한 상태이며, 여성 비서의 변호사도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초기에 수세에 몰렸던 박 시장의 측근들이 언론인터뷰와 기자회견 등을 통해 박 시장이 결코 성추행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내보이고 있다. 여성 비서의 변호사 김재련은 박 시장과 그 여성 비서 사이에서 성추행이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먼저 검찰과 전화통화를 했고, 성추행 사건으로 일방 터뜨렸다. 이것은 엄연히 정치적 책략이며, 박원순 시장을 공격해 그를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짓이다. 왜 이렇게 악랄하게 물고 늘어질까. 검찰, 쓰레기언론, 수구반동야당이 좀비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 이유는, 1) 문재인 정부를 공격해 개혁 인사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 2) 그래서 문재인 정부에 흠집을 내어 다음 선거에서 유리한 국면을 만들기 위한 것, 3) 다음 정권을 탈환하기 위한 수구반동들의 결집 효과, 4) 검찰, 쓰레기언론, 수구반동야당이 저지른 범죄와 은폐해야 할 사건들을 막기 위한 발악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최고의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말은 이들에게도 통하는 것이다. 검찰의 타격 대상은 명확하다. 조국, 추미애 장관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며, 그들의 지상과제다. 따라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가진 권력을 최대한 동원하고 있다. 여기에 검찰과 같은 목적을 가진 쓰레기언론이 스피커가 되어 악랄한 음해를 확대재생산 하고 있다. 쓰레기언론 가운데는 한때 '진보'라고 불리던 것들도 있는데, 이들은 검찰의 목적과 단일하지는 않지만, 권력은 무조건 비판한다는 맹동주의에 빠져 민주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이들은 '언론'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보도준칙, 기준 따위도 무시하고, 사실 관계를 따지지도 않으며, 현재 권력을 가진 집단과 개인을 향해 혐오와 비아냥, 왜곡의 확대재생산을 하며, 적들을 돕고 있는 상황이다. 수구반동야당은 검찰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므로, 현 정부를 공격하고, 현 정부의 진보적 인사, 개혁을 하려는 인물에 대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어뜯고 있다. 검찰, 언론, 수구반동 야당이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검찰은 지금처럼 권력을 독점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에, 검찰 개혁을 하려는 현 정부와 법무부장관을 죽이기 위해 어떠한 파렴치한 범죄도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이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고, 이것은 정당한 검찰의 법 집행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의 미친 칼부림이며, 권력을 잃게 될까 두려움에 떠는 최후의 발악이기도 하다. 검찰은 자기들이 가진 권력의 크기와 강도가 얼마나 센가를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고, 그 권력을 과시함으로써, 검찰 조직 주위로 쓰레기언론, 수구반동야당을 끌어들여 방어막을 더욱 공고히 하고, 그 힘을 모아 현 정부를 공격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쓰레기언론은 검찰과 수구반동야당, 일부 재벌를 배경으로, 그들과 공생하는 관계이며, 악어새처럼, 악어의 이빨을 청소하며 찌꺼기를 얻어 먹는 존재다. 이들은 마치 현존 권력인 문재인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올바른 언론의 자세라고 자기 최면을 걸고, 뒤로는 기업의 광고와 촌지를 받아먹으며, 온라인 기사의 클릭수를 늘리기 위한 천박하고 저열한 목적으로 자발적 반동 스피커 노릇을 자처하고 있다. 이들 언론 역시 '언론개혁'이라는 절대 당위와 명제 앞에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뺏기지 않으려 발악하고 있다. 수구반동야당은 어떻게든 정권을 탈환하기 위해 현 정부를 공격하는 것이 필연이다. 수구반동야당이 집권하면서 저지른 온갖 범죄와 탈법, 악행, 비리, 부패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도 없이, 그들은 한국사회를 과거로 회기시켜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가 지배했던 그 폭력과 부패의 정치를 실현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수구반동야당은 집권을 위해서라면 어떤 범죄도 저지를 수 있는 집단이다. 북한에 돈을 주고 남한 쪽으로 총을 쏴달라는 '총풍사건'부터 수백억원의 검은 돈을 트럭으로 받는 범죄집단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면, 극소수 재벌, 부자들에게는 큰 혜택이 돌아가지만, 서민은 더욱 고혈을 빨리는 죽음의 사회가 될 것이다. 정부와 촛불시민은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은 단순하다.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은 '적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상황이다. 조국 장관 따님의 표창장, 추미애 장관 아들의 복귀 처럼, 미세한 부분을 끊임없이 다투게 되면, 적의 프레임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다. 프레임을 완전히 바꿔서, 정부, 민주당은 검찰의 무소불위 권력, 언론 개혁의 당위와 필요성, 수구반동야당 의원들의 개별적 비리를 강하게 드러내야 한다. 지금 적들은 '최고의 수비는 최고의 공격으로 가능하다'는 명제에 따라, 집단과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적의 공격에 방어만 하고 있는 것은 하염없이 적의 공격에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고, 일방 당할 뿐이다. 오히려 수류탄을 적의 진영에 터뜨려 공격해야 한다. 정부가 갖고 있는 권력은 마음껏 휘두르라고 촛불시민이 위임한 것이다. 여당 180석도 촛불시민이 모아 준 강력한 화력이다. 이걸 사용하지 못한다면 무능하고 어리석은 집단일 뿐이다. 정부와 여당은 검찰 개혁을 강하게 추진하고, 쓰레기언론에 대해서는 언론사 대표와 기자를 상대로 고발, 고소를 진행해야 하며, 수구반동야당의 의원 가운데 비리 혐의가 있는 의원을 상대로 사실 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 정부, 여당이 품속의 칼을 꺼내지 않는 것은, 정치 난투극으로 번질 경우, 국민을 위한 서비스, 복지, 사회경제에 끼치는 영향 등을 걱정하기 때문인데, 지금 촛불시민은 오히려 문재인 정부가 강한 개혁의 칼날을 휘두르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까지 벌어진 조국, 추미애 장관 상황에서 촛불시민이 전면에 나서 막아주고, 뒤에서 밀어주지 않았다면 문재인 정부는 훨씬 심한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싸움은 촛불시민이 하겠지만,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정부와 여당이 적들의 발호에 강력하게 나서지 않는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퇴임 후, 현재 이낙연 당대표가 대통령 후보 1순위에 오르겠지만, 이낙연 대표가 얼마나 개혁적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보다 개혁적 인물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물망에 오를 가능성이 많다. 부패와 탐욕으로 뭉친 기득권을 해체하지 않는다면, 적폐세력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촛불시민이 아무리 전면에 나서 싸운다해도, 법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고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렸지만, 적폐세력들은 할 수만 있다면 총칼로 우리 민주정부와 촛불시민을 학살할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적들은 우리를 '개, 돼지'라고 공공연히 부르고 있다. 우리는 촛불시민이지만, 저들에게는 '개, 돼지'일 뿐이며, 그런 개, 돼지는 언제든 죽여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를 개, 돼지로 보는 저들과 맞서 싸우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기도 하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잊지 못할 동네 후배
    잊지 못할 동네 후배 001-동네 후배 1970년대 중반까지 마포에 살았다. 공덕동, 지금 한겨레신문사 맞은 편 언덕의 어느 골목집에서 태어났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번역가이자 작가 안정효 선생이 살던 바로 옆집이었다. 자라면서는 도화동, 그러니까 지금 마포 네거리, 4호선, 5호선 공덕역이 있는 그 네거리 바로 옆 우체국 뒷담에 붙은 무허가 판자집에서 살았다. 지금은 철둑도 다 헐려서 시야가 트였지만, 철둑이 있던 오래 전에는 그 철둑 아래로 지나는 굴이 세 개 있었고, 하나는 온전히 개천이 흐르고, 가운데는 비가 많이 오면 개천이 되지만 바닥을 띄운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번째 굴은 통행로의 절반을 판자로 막아 집을 짓고 살았는데, 대낮에도 어두운 그 굴집들은 항상 불이 켜져 있었고, 습한 냄새가 났다. 우리집도 무허가여서 형편은 좋지 않았지만 우체국 뒷담을 끼고 있었고, 바로 앞으로 개천이 흘렀다. 개천 위로 가설한 통행로를 놓아서 마치 긴 회랑처럼 다닐 수 있었고, 여러 집이 잇대어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누나의 손을 잡고 마포국민학교에 입학한 것이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그때가 아마 1968년 무렵이지 않았을까. 아버지와 함께 전차를 타고 창경원에 갔던 기억도 있다. 나는 전차를 탄 마지막 세대인 셈이다. 그보다 더 오래된 기억은 몇 개의 조각인데, 내 기억으로는 두 번 집을 잃었던 때가 있었다. 집을 떠나 철둑에서 서강 쪽을 바라보며 갔는데,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했고, 나는 경찰 짚차를 타고 집앞까지 와서 경찰이 어머니에게 나를 인계하던 기억이 난다. 짚차는 하얀색이었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이니 여섯, 일곱살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철둑, 경찰 짚차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집 바로 앞이 개천이라 나는 동무들과 함께 그 개천에서 물놀이도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가 더 이상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때는 이미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몸에 이상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고학년 무렵에는 친구들과 개천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는데, 우리집에서 철둑 굴다리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개천 위로 모두 집을 지어 자연스럽게 굴처럼 보였다. 개천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몹시 더러웠다. 우리는 스티븐 킹의 소설에 나오는 소년들처럼 호기심이 이끄는대로 어둡고 깊은 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보면 안 되는 것들을 봤다. 우리는 베이비 붐 세대여서 또래 친구들이 많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모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을 수 없었다. 거의 방치하다시피 내놓고 키웠고,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친구들끼리 어울리며 고물을 주워 고물상에 팔아 푼돈을 벌어 군것질도 하고, 만화가게에서 만화도 봤으며, 버스를 타고 세검정까지 가서 맑고 시원한 물속에 뛰어들어 시원한 여름을 즐기기도 했다. 불과 열 두어살의 어린이들이었지만, 우리는 많은 일을 찾아서 했고, 언제나 바빴으며, 신나게 놀았다. 못된 형들이 싸움을 붙이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놀이를 하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지만, 그건 극히 드문 사건이었고, 보통은 마을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비석치기, 다방구 같은 놀이들로 시간을 보냈고, 나는 만화가게에 가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텔레비전이 귀하던 시절이라, 돈을 받고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집이 있었는데, 하루 저녁에 10원이었다. 나중에는 만화가게에서도 돈을 받고 텔레비전을 보여주었다. 보통 2시간 정도를 볼 수 있었는데, 초저녁에 어린이를 위한 만화영화가 가장 큰 인기였다. 그때 '타이거마스크',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 '밀림의 왕자 레오' 같은, 일본만화를 더빙한 만화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다. 집에서 학교 가는 길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문을 나서면 긴 회랑의 가설 골목이 있고, 그 길의 끝 양쪽에 주막이 있었으며, 그 주막이 있는 작은 네거리에서 왼쪽은 개천을 건너는 다리, 정면은 굴다리, 오른쪽으로 나가면 공동수도가 있고, 우체국 후문이 있었다. 우체국 바로 앞이 큰길이고, 그 길을 건너면 바로 '마포극장'이 있었다. 마포극장의 포스터는 늘 멋있었다. 마포극장을 지나 골목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경보극장이 있었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 등에 업히거나 따라서 극장에 자주 갔는데, 영화를 상영하는 중간에 연예인들이 나와 '쇼'를 했다. 영화 상영은 보통 두 편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일한 오락거리이기도 했다. 경보극장을 지나 골목을 따라 약간 오르막 길을 올라가면 마포국민학교가 있었다. 내가 다닐 때, 학교에 커다란 지하공간이 발견되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만든 방공호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육성회비를 제 때 납부하지 못해 수업시간에 집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했다. 울면서 떼를 써봐야 없는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학교는 다녔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던 학교였다. 마을에는 또래 아이들이 많았는데, 학년에 따른 위계가 분명했다. 고학년은 고학년끼리, 저학년은 저학년끼리 놀았다. 고학년은 철둑을 따라 용산 청과시장에 가서 길거리에 버린 깨진 수박을 먹기도 하고, 말린 고구마를 싣고 가는 기차를 따라 서강을 지나 당인리까지 가기도 했다. 고학년, 저학년이 함께 놀 때도 많았는데, 고학년들은 책임감을 갖고 저학년 동생들을 돌봐주었다. 물론 우리는 가부장사회의 자식들이었고,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지배하는 독재사회에서 자랐기에 어지간한 폭력은 폭력으로 생각지도 않을 정도였다. 내 아버지는 우리를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었지만, 우리 동네에서 아버지에게 맞고 자란 친구들은 많았다. 주로 '노가다'를 다니는 아버지들은 저녁에 술을 한 잔 걸치면, 자식들 머리통도 쥐어박거나, 손발로 아이들 몸뚱아리를 멍들게 하기도 했다. 그때는 사회의 대부분이었던 도시빈민의 자식들이었지만, 어린이들은 건강했다. 머리에 부스럼이 생기고, 코를 빨아 먹으며, 쓰레기를 뒤지고 다녀도 대개 건강하게 자랐다. 그러다 가끔 앓기도 하고, 열병을 앓거나, 두드러기가 생기기도 하고, 죽을 고비도 넘겼다. 동네에는 장애가 있는 아이도 있었다. 나보다 한 학년 아래 아이였는데,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다.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가 옳지 못할 뿐 아니라 범죄라는 생각이 상식이지만, 70년대만 해도 공공시설 내부, 버스, 술집, 다방에서 남자들은 담배를 피웠고, 장애인은 마치 불가촉천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갈고리가 달린 의수를 한 장애인이 망태를 짊어지고 다니며 종이를 주웠고, 버스 안에서는 장애인이 종이를 나눠주며 갱생을 도와달라고 사람들에게 돈을 빼앗다시피 위협하기도 했다. 목발을 짚거나, 다리를 절거나, 맹인이거나, 농인들은 으레 조롱과 비하,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 시대는 봉건의 그림자가 걷히지 않았고, 독재는 민주주의와 개인의 인권, 자유를 혐오했기에, 차별과 혐오를 조장했다.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자랐기에,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나도, 다른 친구들도 한 살 어린 그 아이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기 보다 별명을 만들어 불렀다. 그 아이가 다리를 전다고 '찐따'라는 별명을 불렀고, 백인 혼혈인 아이는 '튀기'라고 불렀다. 우리는 야만의 사회에서 정글의 생존경쟁을 하는 동물들이나 다름없었다. 그 많던 동네 친구들도 지금은 어디 사는지 알 수 없고, 이름도 모두 잊었지만 다리를 절던 그 한 살 어린 후배는 지금도 생각난다. 너무도 미안하고, 나 자신이 부끄럽다. 철없던 어린이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가 되었을까. 평생 잊을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이고, 그 후배에게 평생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조국 전 장관의 지난 1년
    조국 전 장관의 지난 1년 아래 글모음은 지난 2019년 8월, 조국 전 법무부장관 임명 직전부터 검찰과 언론의 악의적 음훼가 벌어지는 상황을 2019년 연말까지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그때부터 꼭 1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어떤가. 검찰은 궁지에 몰린 쥐가 되었고, 언론은 수십만 건의 기사를 삭제했다. 과연 검찰과 언론이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 그의 가족들에게 죄가 있다는 걸 밝혔는가? 언론은 사실을 보도했나? 1년의 시간이 지나고, 조국 전 장관을 비난했던 그 수많은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가. 검찰, 언론, 천박한 '지식인'들이 조국 전 장관과 가족을 비난하고, 범죄자로 몰아갈 때, 촛불시민은 끝까지 조국 전 장관을 지켰다. 서초동에서 촛불집회를 열었고, 온라인에서 적들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 결과를 '조국백서'로 펴냈다. 이제, 죄 없는 조국 전 장관과 그 가족을 범죄자로 몰았던 집단과 개인은 자신들이 함부로 놀린 주둥아리와 펜대의 무게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왔다. 그것이 감옥이든, 재정적 부담이든, 조국 전 장관은 '천천히, 따박따박' 결코 지치지 않고 진행할 것이다. 우리 촛불시민들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너희들, 적들의 몰락을 기꺼이 지켜볼 것이다. -----------------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와 관련해 며칠 언론, SNS가 시끌벅적했다. 내 타임라인에도 많은 사람들이 조국 후보를 두고 응원, 지지, 비판, 비난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들의 면면을 보니, 사람을 다시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 청문회가 열리지도 않았고, 조국 후보의 답변을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자유당이나 조중동 기타 기레기들이 하는 발언과 보도를 보고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노란리본을 단 사람도 있고, 촛불을 든 사람도 있었다. 문재인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노동운동을 하던 진보적인 사람도 있었다. 자유당이나 조중동 쓰레기는 차치하고, 조국 후보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수구꼴통이나 일베충이나 돈받고 댓글을 다는 쓰레기들이다. 자기가 멀쩡한데, 조국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정치적 판단력이나 지적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닥치고 있는 게 좋을 것이다. 며칠 지나면서, 조국 후보와 관련한 각종 '의혹'들은 모두 거짓말, 왜곡, 과장보도, 의도적 부풀리기, 악의적 보도 등으로 드러나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조국 후보를 '까는' 언론 쓰레기나 자유당의 주장에 대해서는 일말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조국 후보는 당연히 법무부장관이 되어야 한다. 조국 후보가 사퇴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매국집단과 매국노에 동조하는 사람이거나 그들의 주장에 비판할 줄 모르고 동조하는 멍청이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조국 후보를 끌어내려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집단과 개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오는데, 그런 기초조차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른 분야는 몰라도 정치에 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본인을 위해 좋은 일이다. 세상에는 멍청한 인간이 많다. 조국 후보가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할 수 있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를 둘러싼 상황은 갑작스러운 검찰의 개입으로 변곡점에 도달했다. 윤석렬(발음할 때는 윤서결로 해야 한다) 검찰총장의 지시로 특수부에서 이루어진 이번 긴급 압수수색과 출국금지명령은 그동안 야당과 언론에서 일방 비난, 비판한 의혹제기를 법적으로 가릴 기회이기도 한데, 검찰의 개입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검찰의 독자적 개입으로 조국 후보와 관련한 위법 사실을 밝혀낸다면 당연히 조국 후보는 법무부장관이 될 수 없을 것이고, 문재인정권은 그때부터 몰락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와 반대로, 검찰이 조국 후보의 범법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 조국 법무부장관은 사법개혁을 근본에서 시작할 것이므로 지금의 검찰은 당연히 타격을 입게 된다. 검찰이 갑자기 개입한 의도를 들여다보면, 사법개혁의 의지가 강력한 조국 후보에게 불리한 면이 많다고 추측할 수 있다. 윤석렬 검찰총창은 개인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것은 정권과는 아무 관계없이, 검찰의 독립을 강화하겠다는 의지의 확인이었다. 검찰이 오로지 올바른 법집행을 하겠다면, 지금 야당의원들이 저지른 온갖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조국 후보만큼 강력한 의지를 갖고 수사해야 한다. 검찰의 개입으로 설왕설래하지만 섣부른 단정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겠지만, 그 결론이 정당하고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오로지 검찰의 몫이고, 그들의 운명이다. 조국 후보의 사법적 판단을 지켜본다. 그리고 윤석렬 검찰총장의 진심도 지켜본다. 과연 촛불시민의 판단이 옳기았기를 바랄 뿐이다. 마음이 불편하다. 나와 직접 관련한 일도 아니고, 세상이 끝장날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몹시 불편하니 소화도 안 되고, 가슴도 답답하다. 조국 법무부장관 내정자를 둘러싼 적들의 공격은 집요하고 악랄하며, 야비하다. 조국을 거꾸러뜨리면, 누구에게 이익일까. 토착왜구, 매국노, 언론쓰레기, 거대자본, 수구집단, 검찰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반면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든 시민은 불행하게 된다. 문재인정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법개혁이 좌절된다면, 문재인정부는 적들에게 무릎을 꿇게 되고, 산 채로 하이에나에게 뜯겨 먹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난 10년을 인간 이하의 악랄하고 야비하며, 천박하고, 역겨운 인간들이 지배한 세상에 살았다. 국가가 망하기 직전에 가서야 촛불혁명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는데, 지금 사법개혁이 좌절되면, 다시 그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쳐 날뛰는 적들의 야만에 맞서 촛불시민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할까, 아니면 화염병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답답하고, 울화가 복받치는 심정으로 청문회를 보고 나서, '자유한국당' 자유게시판에 쓴 글을 읽고 힐링한다. 자유당 지지자들도 보는 눈은 그리 다르지 않아서, 자기편이라도 멍청하고 실력 없다는 건 알아챘나보다. 특히 나경원을 쫓아내라는 주장이 많았는데, 나경원이 청문회 합의를 해주어서 자유당이 망신만 당하고, 조국 법무부장관 내정자가 더 빛나 보였다는 말들이 많았다. 그렇다. 진실은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지금 120만 건에 달하는 기자쓰레기들이 쓴 글들이 삭제되고 있다. 자기들이 써놓고도 정당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촛불시민과 함께 하는 조국 법무부장관이 임명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지우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기자쓰레기들의 정체와 민낯은 드러났고, 자유당의 무능과 멍청함도 생중계로 알려졌다. 남은 것은 사법개혁이고, 사학재단의 비리를 끝까지 캐내는 것이며, 기자쓰레기들을 양산하는 쓰레기같은 언론사들을 때려잡는 것이다. 세상에는 보통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훌륭한 사람이 있다. 보통의 사람은 그런 위인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한다. 그런데, 너무 뛰어난 인물이 있다면, 보통의 사람이 갖는 시기, 질투, 부러움 따위의 감정 조차 들지 않게 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영웅'으로 부른다. 문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삼국지에서 '관우'와 '장비', '조운'은 죽어서 신이 되었다. 그들은 너무 뛰어난 사람이라, 나같은 평민은 감히 평가조차 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위대한 인물이다. 조 국 법무부장관 내정자를 헐뜯는 수많은 인간들이 있지만, 그건 미물들이나 하는 짓이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 국 내정자는 그의 집안, 그 자신, 그의 딸까지, 평범한 사람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인물이다. 이걸 인정하기 싫다면, 수구꼴통, 토착왜국, 매국노, 일베충인 것이다. 조 국의 훌륭함을 인정하는 것이 곧 나의 비루함과 천박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냥 탁월하고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생물학적으로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잘 생긴 외모, 명석한 두뇌, 올곧은 품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지금 이 시대에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지, 결코 흠잡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 국과 그의 딸이 하드웨어(외모)와 소프트웨어(머리), 중앙정보처리(심장)까지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는,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라면, 그들이 조국(한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하도록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걸 반대하는 자들은 분명코 평범한 시민들의 적이다. First Man “이 첫걸음은 한 인간에게 있어서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게 있어서 커다란 첫 도약입니다.” 인류 최초로 달 표면에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은 한국전쟁 때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비행사가 되고 싶었고, 그 목표를 향해 꾸준히 공부했다. 닐은 탁월한 비행사로 경력을 쌓고,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비행사 훈련을 받는다. 닐 이전에 달에 가려던 그룹의 동료 우주비행사들이 사고로 죽으면서, 닐과 그의 동료들도 충격을 받고, 쏘련과 우주 경쟁을 벌이던 미국 정부를 향해 미국인들의 반대도 격렬했다. 게다가 이 시기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미국 청년들이 베트남에서 죽어나가던 시기였고, 반전 시위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였다. 미국 정부는 쏘련과의 과학 경쟁, 국내의 반전 시위, 국가예산을 쓸데없는 곳에 쓴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달나라 프로젝트를 어렵게 이어나가고 있었다. 닐은 달에 첫 발을 내딛기 몇 년 전에 사랑하는 딸을 잃는다. 너무 어려서 세상을 떠난 딸을 늘 마음에 담고 있었던 닐은 달 표면에 내려서 딸의 유품을 달의 계곡에 던지며 딸을 마음에 담는다. 닐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장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함께 훈련받던 동료도 잃었지만,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학교수로 평생 안정된 직장과 인기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안위를 내려놓고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개혁을 앞장서려 하고 있다. 그 세상에는 온갖 하이에나와 들개떼들이 그를 물어뜯으려 작심하고 있고, 그의 편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는 오로지 벌거숭이로 광야에 나섰으며, 그가 든 깃발은 반동의 칼바람에 찢겨지고, 깃발에 새겨진 '사법개혁'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적들은 사방에서 덤벼들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인 지금, 그에게 천군만마의 힘이 되어줄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는 반동과 반역의 폭풍 속에서, 개혁의 고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나아가고 있다.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고, 하이에나와 들개떼들이 몰려들고, 그의 가족을 납치해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이다. 그는 프로메테우스처럼, 미개한 인류에게 불을 선사하는 신이 될 것이고, 그가 들고 있는 찢어진 깃발에 꽂힌 깃대에는 관우가 들었던 청룡언월도가 숨겨져 있다. 그가 분노하는 순간, 그를 둘러싼 하이에나와 들개떼들의 모가지는 선혈이 낭자하게 잘리워 광야에 흩어질 것이다. 적들은 피맛을 볼 것이고, 그들의 모가지는 두 동강이 날 것이며, 우리 시민은 그가 가져온 불로 새로운 세상을 맞을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을 새롭게 열며 앞으로 나아가는 First Man, 조 국이다. 태풍, 지나가다 미쳐 날뛰던 바람이 꼬리를 감추었다. 남쪽에서 올라온 거대한 먹구름은 바람에 떠밀려 빠르게 하늘을 가로지르고, 간간이 비를 흩뿌렸다. 그 사이, 우리 사회에 불었던 반개혁, 특권의 발호와 반격의 광풍이 마침내 조 국 법무부장관 내정자를 물어뜯었고, 그의 가족까지 잔인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광풍은 거리의 간판과 나무를 쓰러뜨렸고, 개혁을 바라는 시민의 심장을 물어뜯었으며, 무엇보다 조 국 내정자와 그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바람이 잦아들고, 광풍이 지나갔지만, 거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당당했으며, 대지에 뿌리를 내린 신념으로 단단한 몸과 강인한 정신으로 비난의 광풍을 견뎠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나무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부드럽게 흐느적거리며 자신을 지킨다. 11시간의 광풍도, 15시간의 미친 바람도 모두 견딘 영웅은, 부드럽고 온화한 태도로 자신을 지켰다. 그의 내면에서 폭발하는 반동과 반역 세력에 대한 적의는 그의 차가운 이성과 냉정한 판단으로 바뀌었다. 적들은 야비하지만, 그는 당당하고, 적들은 천박하지만, 그는 품위가 있다. 광풍은 쓰레기를 날리지만, 뿌리깊은 바위는 흔들지 못하듯, 어리석고 천박하고 야비한 인간들은 진정한 영웅을 쓰러드릴 수 없다. 그는 촛불시민의 열망을 품은 대리인이자 현현이며, 시대의 개혁을 앞장 서서 밀고 나가는 프로메테우스다. 태풍이 지나가고,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때다. 조 국 법무부장관님,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내정자 지명을 받은 이후, 토착왜구, 매국노 집단의 추잡한 공격에 시달리고, 가족까지 참담한 상황에 놓였음에도 장관님은 꿋꿋이 견디셨습니다.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역사의 소명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조 국 개인이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장관님의 우국충정을 미련한 저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장관이 되신 이후에도 적들의 더럽고, 역겨운 공격을 계속 되겠지만, 오로지 사법개혁과 정의가 물결치는 한국이 되도록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는 벽에다 대고라도 말해야 한다는 김대중대통령님의 말씀도 있었지만, 다행히 요즘은 SNS가 있어서 내가 하고픈 말을 쓰면 누군가는 읽어준다. 요즘 정말 마음이 답답하다. 이런 증상은 지난 이명박 개새끼 때와 박근혜 쌍년이 지배하던 정국에서 느끼던 것과 비슷하다. 물론 지금은 문재인대통령님이 계시고, 조 국 법무부장관이 있어서 그 정도는 아니지만, 검찰 쿠데타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함을 느낀다. 여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문재인정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자유당 것들의 더럽고, 역겨운 행태까지 겹쳐서 개혁이 지지부진하고, 설상가상 기자쓰레기와 그 쓰레기들을 키우는 매국언론들이 문재인정부를 비토하고, 훼방하며, 악의적으로 왜곡, 선동하는 꼴을 보면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새삼 느낀다. 예전 박정희, 전두환 때는 무조건 경찰, 군대 동원해서 쓸어버리면 됐지만, 지금은 촛불시민의 힘으로 탄생한 민주주의 정권이 아닌가. 그러니 폭력은 감히 상상도 못하고, 오로지 법치로만 나라를 운영해야 하는데, 그걸 아는 저 인간쓰레기들이 온갖 훼방을 놓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나부터 자아비판을 할 것이 있다. 나는 문재인대통령께서 검찰총장으로 윤석렬을 지명했을 때, 잘 하셨다고 지지했다. 그리고 윤석렬이 '개인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윤석렬이 검찰 쿠데타를 일으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임명권자인 문재인대통령을 믿었고, 윤석렬이 기개있는 검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그런 나의 잘못된 믿음을 스스로 비판하고 잘못을 인정한다. 윤석렬이 이끄는 현재 검찰은 토착왜구, 매국노 집단의 이익을 위해 뛰는 충성스런 개에 불과하며, 민주주의의 개혁을 가로막는 적폐집단이다. 이제 믿을 것은, 검찰 개혁의 선두에 서 있는 조 국 법무부장관과 촛불시민 뿐이다. 오늘 마을에서 벼룩시장을 열고, 이웃들과 함께 어울리며 점심도 먹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오늘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 모이는 촛불시민의 마음과 함께 있었다. 오늘 내내 컴퓨터에 접속하지 못하다, 이제 컴퓨터 앞에 앉아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보니, 벗들은 모두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 있었고, 촛불의 물결을 보면서 마음이 감동으로 울컥한다. 얼마만인가. 우리가 그 추웠던 시간에 광화문 앞에 모이기 시작해 백만명이 넘는 촛불이 모여 결국 무능하고 타락한 대통령을 탄핵한 그 위대한 촛불이 다시 모인 것이다. 촛불시민은 명령하고 있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사유화한 정치검찰은 스스로 떠나고, 검찰개혁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촛불시민의 명령을 거부하면, 그 끝은 검찰의 비참한 몰골만 남을 것이고, 끝내 검찰개혁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에게는 조국 법무부장관과 문재인대통령이 있지 않은가. 우리 촛불시민은 서로를 믿으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다. 나는 비록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 있지 않지만, 마음은 그곳에 있고, 온라인에서 항상 촛불시민과 함께 행동할 것이다. 우리 한국 촛불시민의 위대함이 다시 역사를 바꾸고, 만들고 있다. 세계사에 빛나는 촛불의 역사다. 어제 촛불시민의 위대한 행동에 감격하며 꿀잠을 자고 일어나 타임라인을 보니, 내 타임라인은 역시 훌륭하다. 페친들 대부분 99%는 이번 촛불집회에 참여하신 분들이고, 참여하지 못해도 이 집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분들이다. 사실, 페친을 맺을 때 그 사람의 정치성향을 알기는 어렵다. 가능한 그 분이 쓴 글을 쭉 읽고 페친 수락 여부를 결정하는데,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페친 끊기를 했는데, 촛불집회에 관심이 없다는 분이었다. '비정치적 성향'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수적 입장을 지지하게 마련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 촛불시민들이 자기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애쓰고 있는 동안, 멀리서 구경이나 하다가 달콤한 민주주의 열매만 먹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또 한 명, 좌파지식인으로 알려진 김세균 교수가 쓴 글을 읽고, 아, 이 분도 지금의 정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정의당의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조국 법무부장관이 그만두어야 한다거나, 청와대가 조국 장관을 사퇴시켜야 한다는 그의 논리는,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 촛불시민들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관념적 진보론자의 태도, 그것이었다. 나는 정의당이 '진보정당'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한국의 정당 가운데 상대적으로 진보적 테제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문서일뿐, 그들이 보여주는-심지어 당대표부터-태도는 부루주아좌파 정도일 뿐이다. 무엇보다 정의당에서 조국 법무부장관의 임명과 관련해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정략적 이해만을 따지는 것을 보면서, 진보정당의 한계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촛불을 든 시민들은 문재인정부의 한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국 장관을 적극 지지하고 수호하려는 뜻은, 정파나 정당을 떠나 범진보적 사회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마음이고, 토착왜고, 매국정당인 자유당을 절멸시켜야 하며, 한국에 자발적 매국노들이 들끓는 것을 모두 때려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이 정의로운 사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검찰개혁이 최우선 과제이며, 사법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주역으로 조국 장관이 적격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국 장관을 사퇴시켜야 한다는 따위의 말을 하는 -자유당 놈들은 말할 것도 없고 - 진보정당이나 인물들이 누구든, 그들은 촛불시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조국 장관은 스스로 검찰개혁, 사법개혁의 칼이 되겠다고 했고, 촛불시민은 그런 조국 장관을 믿고 강력하게 지지하며 응원하고, 조국 장관을 지키려는 것이다. 지금 그 반대쪽에 윤석렬 검찰총장과 검찰이 있고, 그 뒤에 자유당과 토착왜구, 거대자본, 매국노들이 검찰에 힘을 보태고 있다. 촛불시민은 숫자가 많지만, 돈과 권력은 없다. 오로지 올바른 양심과 떳떳한 정의로움만으로 뭉친 것이다. 이 싸움에서 돈과 권력이 이긴다면, 한국사회는 철저한 노예국가로 전락할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 이제 촛불시민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문재인대통령님, 지금 검사들이 대통령의 명령을 듣지 않고, 항명하는 상태입니다. 항명죄로 검사 전체를 파면하고, 검사를 기존 변호사들 가운데서 새롭게 임명하시길 바랍니다. 행정부 일개 공무원에 불과한 자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검사 개인과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법을 악용하고 있는 현 상황은 매우 엄중한 사태이며, 대통령의 인사권을 적극 사용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수처 설치는 당연하고, 파면한 검사는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없도록 해야 하며, 파면한 모든 검사의 비위를 조사해서 범죄행위를 낱낱이 파헤쳐야 합니다. 조 국 장관과 가족에 대한 압수수색을 무려 70회 넘게 한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검사들의 범법행위에 대한 압수수색도 한 사람마다 최소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개 공무원에 불과한 검사가 통수권자이자 인사권자인 법무부장관과 대통령 알기를 마치 자기 발가락의 때처럼 여기고, 대가리를 빳빳하게 세워 대드는 꼴을 국민인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모든 검사를 파면하시고, 훌륭한 검사는 선별해서 재임용하고, 비리가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검사는 몇 년이 지나더라도 범죄행위를 밝혀 엄벌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합니다. 왜 조국이냐고, 조국이 아니면 안 되냐고, 조국을 버리라고 말하는 먹물들은 반동이다. 그들은 촛불시민의 동력에 찬물을 끼얹고,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반시대적 반동들이며, 문재인정부의 개혁의지를 의심하거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들이다. 지금 악랄하고 야비한 검찰이 조국 장관을 그렇게 털어도 조국 장관에게서 아무런 불법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의 가족을 괴롭히고 있다. 조국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인물도 검찰의 집단 발호와 항명, 쿠데타를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롭다고 하는데, 조국이 아닌 누가 조국처럼 이를 악물고 견디겠는가. 조국이 아니라고 말하는 먹물은 대안을 제시하던가, 입을 좀 닥치고 있어라. 조국이 '사회주의노동자연맹'과 관련이 있다고, 그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반공매국노들의 공격은 악의적 마타도어다. 이미 30년이 훨씬 넘은, 그래서 사람의 사상과 생각은 변하고, 사회도 바뀌었다. 조국을 비난하는 자들은, 30년 전과 지금의 사상과 생각과 이념이 전혀 변하지 않았는가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라.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기괴한 것이다. 그런 인간은 괴물이다. 조국이 '강남좌파'여서 안 된다고, 부르주아라고, 상류층이라고, 돈이 많아서 안 된다고 말하는 자들은 두 부류다. 부르주아라면, 조국 장관을 배신자로 여기기 때문이고, 가난한 자라면 멍청하거나 열등감 때문이다. 왜 좌파는 부자여서는 안 되는가. 좌파는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누가 제시했으며,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좌파도 부유하게 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좌파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잡을 데 없어야 한다? 왜 수구매국노들은 불법과 범죄를 밥 먹듯 저질러도 비난하지 않고, 좌파의 티끌 하나는 부풀려서 악의적으로 비난하는가 말이다. 그게 공평한 잣대인가. 나도 자칭 '좌파'에 속하지만, 가끔 자동차 신호도 위반하고, 범죄까지는 아니어도 욕 먹을 짓도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거나 경범죄를 할 수도 있다. 수구매국노들이 저지른 수많은 범죄목록을 먼저 뒤져서 그들을 비난하라. 그리고도 할 일이 없을 때, 그때 조국 같은 사람을 비난할 빌미를 찾아라. 나는 조국을 믿는다. 그의 개혁 의지를 믿으며, 그가 지금 문재인정부에서 검찰개혁의 최적임자라는 것을 믿는다. 조국을 비난하는 자는, 나같은 시민을 비난하는 것이다. 중앙일보 기사는 그동안 조국 법무부장관과 관련한 기사에서 기자쓰레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런 중앙에서 윤석렬을 옹호하는 기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이 기사가 과연 윤석렬을 옹호하는 기사로 읽히는지는 의문이다. 윤석렬이 건설업자에게 접대를 받든, 받지 않았든 그걸 떠나서, 윤석렬의 이 발언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말이다. 기자가 직접 윤석렬에게 들은 것도 아니고, 어떤 검찰에게(여기서는 '복수'라고 했으니 최소 두 명 이상을 말하지만 그건 알 수 없다) 듣고 쓴 기사인데, 윤석렬이 '대충 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면 그건 그간 윤석렬이 말한 '개인에 충성하지 않는다', '검사가 법을 악용하면 깡패지 검사냐'와 같은 말과 같은 맥이라고 본다. 윤석렬이 '대충 살지 않았다'고 말했다면,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은 대충 살았다는 말로도 들린다. 즉, 검찰에는 윤석렬 자신만큼 검사로서 치열하게 산 사람이 없거나, 거의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인데, 과연 윤석렬이 털어서 티끌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한 인물인지는 나중에 따져볼 일이다. 그에게 걸린 '의혹'은 이미 장모와 관련한 의혹이 있고, 그의 부인과 관련한 의혹도 있다. 윤석렬은 장모나 부인이 자신의 검사 경력이나 부패행위와 어떤 관련이 있느냐고 청문회에서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이제 이런 정황을 가지고 조국 법무부장관과 비교해보자. 조국 장관은 대충 살았나? 이 말에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증거를 대라. 윤석렬이 말한 것처럼, 조국 자신이 아닌 가족의 문제는 모두 제외하고, 조국에게 티끌을 찾을 수 있다면 조국은 이미 오래 전에 장관후보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윤석렬이 '대충 살지 않았다'고 말한 것에 가족 문제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조국 관련 검찰 수사는 원천에서 부당하며, 악의적이다. 조국 장관을 수사하려면, 윤석렬 가족도 탈탈 털어야 한다. 그게 공평하다. 또한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검사들도 검사 자신 뿐아니라 그 가족들의 범죄혐의까지도 탈탈 털어야 하는 것이 공평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중앙의 이 기사는 윤석렬을 옹호하기 위해 쓴 것이지만, 검찰 개혁을 바라는 많은 시민을 분노하게 만들고, 검찰 개혁의 당위를 확신하게 만들며, 더 빨리 검찰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기사다. 기자쓰레기가 옹호하는 대상이라면, 개혁을 바라는 시민에게는 분명 의혹의 대상이고, 적대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겨레21'의 하어영이 말한 것처럼, 윤석렬이 건축업자 별장에서 '대접'을 받았다거나, 그래서 윤석렬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또 다른 상황의 전개일 뿐이고, 하어영이 이 소스를 어디에서 얻었는지, 어떤 의도로 기사화했는지는 밝혀져야 한다. 다만, 윤석렬의 이 발언은, 조국 장관과 비교할 때, 어처구니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소아병적 주장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왜 안 그러겠어요. 대통령이 임명한 법무부장관도 때려잡고, 그의 아내도 때려잡고, 그의 딸과 아들도 때려잡아서 한 집안을 풍비박산을 내고, 사회적 매장을 시켰으니 검사의 권력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셨잖아요. 참 대단하세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 백만명 넘는 촛불시민이 모여서 검찰개혁을 외쳐도 어디서 개돼지가 짖느냐고 눈도 깜짝하지 않는 그 통큰 기개와 배짱, 시민을 개돼지로 보는 그 도덕적 우월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네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삼성에서 검사님들께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달하는 '떡값'을 전달한 사건도 흐지부지 넘어갔잖아요? 감히 누가 검사를 건드리나요. 그렇게 뇌물을 처먹어도 검사님은 아무도 잡혀가지 않았으니 정말 대단해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검사가 스폰서에게 돈과 성(섹스) 접대를 받으셔서 참 좋으시겠어요. 국가공무원이 뇌물과 성접대를 받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검사님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을까요? 부산지방검찰청, 부산고등검찰청 검사님 약 40여 명에게 촌지와 성접대를 했다는 사실을 언론이 밝혔어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잖아요. 역시 검사가 최고에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요즘은 검사가 피의자와 성관계도 하는군요. 서울동부지검검찰청에서 초임검사가 여성 피의자와 검찰청 내부조사실, 모텔에서 성관계를 했네요. 이 검사님은 서울대학교를 나오고 한양대학교 로스쿨을 나온 로스쿨1기라고 하네요. 검사님이 참 멋져요. 그런데 성폭력이 아니라 뇌물수수 혐의라면서요? 검사끼리는 눈물나게 감싸주시는 그 애틋한 정이 참 보기좋아요. '섹검'이라는 별명도 참 '섹시'하네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검사님은 주먹질도 참 잘 하시나봐요. 서울지검에서 조폭 피의자를 밤새 고문하고 폭행하다 결국 한 명을 때려죽였잖아요. 검사 말 안 들으면 때려죽이는 정도는 당연하니까요. 앞으로도 계속 조폭이든 시민이든 주먹으로 때려죽이시길 바라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검사님들은 돈봉투 돌리는 걸 참 좋아하시나봐요. 2017년 4월 21일 이영렬과 안태근이 한 음식점에서 동석한 검찰 특별수사본부 간부 6명과 검찰국 1, 2과장에게 돈봉투를 줬네요. 아, 당연히 검사에게 돈봉투를 주는 건 격려 차원이겠죠. 그런데 그 돈은 어디서 난 걸까요? 그거 국민 세금 아니죠? 당연히 이영렬과 안태근의 개인돈이겠죠? 감찰반에서는 대통령이 지시해도 피의자와 밥 먹으면서 조사했다면서요? 참, 훌륭해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서울고등검찰청 부장검사 김광준이 10억원의 뇌물을 받고 구속되기도 했네요. 유진그룹에서 5억 9천만원,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 측근에게 2억7천만원, 전 국가정보원 직원 부인에게 8천만원, KTF 임원에게 2천만원을 받았네요. 역시 검사님은 참 통이 커요. 10억 단위가 아니면 돈도 아니잖아요? 얼마나 많은 검사님들이 돈을 받아 먹는지 감찰을 하면 좋겠지만, 그건 깨끗하고 청렴한 검사님을 의심하는 거니까 절대 안 되죠.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김학의 법무부차관도 전직 검사님인데, 별장에서 성폭행, 성추행 사건을 저질렀잖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몇 번을 조사해도 무혐의가 나왔네요. 동영상에 선명하게 찍혀 있어도 검사님은 그 사람이 김학의가 아니라고 하셨죠? 아마 똑같이 생긴 다른 사람이겠죠? 시민들은 아주 똑똑히 알아보고, 정확히 전직 대전고등검찰청 고검장이었다가 법무부차관인 그 김학의로 알아보던데, 시민은 전부 개돼지니까 잘못 알고 있는 거겠죠?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검사님은 길거리에서 공연음란행위도 참 잘 하시나봐요? 제주지검장이 2014년 8월 12일에 길거리에서 자위-우리같은 개돼지는 그냥 딸따리라고 해요-를 하다 여학생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체포되었는데,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군요. 검사가 아닌, 우리같은 개돼지가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법을 잘 아시는 검사님들은 돈도 참 잘 벌어서 좋겠어요. 홍만표, 진경준 같은 검사님들은 온갖 불법, 탈법, 비리를 저지르면서 돈을 긁어모으잖아요. 검사 출신 변호사니까 당연히 전관예우와 내부커넥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같은 개돼지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건 그냥 검사님들 실력이 좋아서잖아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검사님은 범죄자를 잘 다루잖아요? 그래서 후배 검사도 그렇게 폭언, 폭행을 해서 자살하도록 만들고요. 김대현 부장검사의 폭언, 폭행을 해서 초임검사인 김홍영 검사가 자살하도록 만들었네요. 후배 검사를 위해 욕설을 하고, 인신모욕을 하고, 서류를 찢어 던지고, 술자리에서 술시중하라고 시키고 했다면서요? 김대현 검사님은 그 전부터 지위가 낮거나 후배 검사들에게 폭언, 폭행을 일삼았다고 악명이 높더군요. 역시 검사님보다 위대한 인물은 없으니까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김형준 부장검사 사건은 PD수첩에서도 방송했는데, 검사가 사기혐의 피의자에게 돈을 받고, 술집에서 접대받고, 심지어 술집여자게에 오피스텔을 얻어줘서 내연관계를 맺었다는군요. 스폰서 김씨의 말에 따르면 매달 수천만원을 썼다고 하네요. 너무 훌륭한 검사님이라 눈에 보이는 게 없나봐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검사님도 같은 검사끼리 성추행도 잘 하시나봐요? 안태근 검사가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네요. 그것도 장례식장에서, 법무부장관이 바로 옆에 앉았는데 안태근 검사님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장례식도, 바로 옆에 앉은 법무부장관도 전부 개돼지로 보였나봐요? 아, 원래 검사들이 자기들만 빼고는 전부 개돼지로 보기는 하잖아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검사님은 표창장 한 장하고 어마무시한 마약하고 비교하면 표창장이 더 나쁘다고 보시나봐요? 역시 독특하고 권위적인 검사님의 안목이니 우리같은 개돼지가 뭘 알겠어요. 마약을 가지고 공항에 들어와도 집행유예가 되고, 표창장을 받아도 그게 국가를 전복할 만큼 중대하고 심각한 범죄라고 판단하시잖아요? 검사님, 요즘 기분 좋으시죠? 많이 행복하실 거에요. 검사님, 검사님 권력은 당연하고, 대통령과 법무부장관 '새끼'는 겨우 5년 동안 있다가 물러날테니 대통령이 뭐라고 하든, 법무부장관 '새끼'가 뭐라고 하든 그냥 생까고 있다가 자유당이 집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잖아요? 그러니 그때까지 그냥 '너는 떠들어라, 나는 검사다'라고 쌩까고 있으시면 되요. 촛불시민은 개돼지잖아요. 언제나 검사님의 건승을 기원해요.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평등하지 않은 시간
    평등하지 않은 시간 엊그제 우연히 유튜브에서 고급 음식점에 다니는 사람이 올린 동영상을 봤다. 태어나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고급 음식점들은 한 끼 밥값이 저녁기준으로 적게는 15만원에서 많게는 50만원에 이르는데, 여기에 예약손님이 너무 많아 예약하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 영상에서 보이는 그 고급하고 화려하며, 신선한 음식들은 분명 서민들의 식탁에서는 볼 수 없는 음식이었다. 일류 요리사들이 비싼 식재료로 요리해 유명 브랜드의 그릇에 담겨 나오는 음식은 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었다. 한 끼 밥값으로 부르주아는 50만원이 아니라 100만원도 푼돈처럼 쓸 수 있다. 서민은 한 끼 밥값을 계산하며, 어쩌다 외식을 할 때도 밥값이 너무 비싼 곳은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누구나 하루 세 끼를 먹는다고 했을 때, 그 세 끼의 질은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다. 부르주아는 음식을 미식으로 먹지만,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먹을 수 있는 거라면 어떤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먹어야 한다. 전철에서, 공장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비정규직 청년노동자의 가방에서 컵라면과 빵이 나왔을 때, 그것은 수백 마디의 슬픈 말보다 더 강렬하게 계급의 슬픔을 상징하고 있었다. 19세기의 자본가는 1달러도 아니고, 100달러 지폐에 담배를 말아피웠다고 한다.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달러이던 시기에. 이런 사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자본가가 될 수 있지만, 자본가는 단지 '자본'의 현현일 뿐이다. 즉,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부자, 가난한 자 가리지 않고 평등한 것은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24시간이 주어진다. 계급의 구분은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두고 드러난다. 부르주아는 24시간을 자기가 주도적으로 쓸 수 있다. 즉, 시간을 통제할 권력이 있다. 누군가에게 강제당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는 24시간 가운데 최소 8시간을 생존을 위해 노동해야 한다. 이 8시간 노동은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자본가가 이윤을 착취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핵심이 바로 '시간'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후불로 구입한다. 자본가는 토지, 공장, 설비, 재료를 갖추고, 노동자로 하여금 '상품'을 만들게 한다. 이때 노동자의 노동시간과 임금, 상품의 제조량 사이에 격차가 발생하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격차(시간당 상품 생산량=잉여생산량)가 자본가의 이윤으로 돌아간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이 명확한 사회체제이므로, '인간' 자체가 평등하지 않다는 전제를 갖는다. 즉, 과거의 노예제 사회와 마찬가지로, 노예와 노예주가 있듯, 노동자와 자본가로 구분한 사회는 근본부터 불평등하다. 인간의 하루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8시간의 잠, 8시간의 노동, 8시간의 휴식이다. 이 가운데 가장 평등한 것은 8시간의 잠이지만, 8시간을 충분히 자는 사람은 부르주아뿐이다. 16시간에서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는 절반이 넘는 시간을 노동과 노동에 필요한 준비 시간으로 써야 한다. 그 시간은 오로지 생존에 필요한 노동이므로 온전한 '개인의 삶'이라고 하기 어렵다. 반면, 부르주아는 16시간을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 부르주아가 누리는 시간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시간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영화 '인 타임'은 시간과 자본, 권력의 관계를 잘 묘사한 내용이다. 인간이 영원히 산다는 가정 속에, 주어진 시간을 모두 쓰면 수명도 끝난다는 설정은, 필연적으로 돈과 권력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지금 우리에게 유일하게 평등한 것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다. 그 평등함 때문에 인간은 그나마 지금의 차별과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무조건 견디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200년에 불과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전지구적 현상으로 번졌고, 자본이 침투한 곳은 자연이 황폐하게 망가지고, 인간들은 경쟁과 이기심, 황금숭배의 노예로 전락해 서로를 물어뜯고, 잡아먹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사람보다 돈이 더 귀하고, 돈을 위해서는 사람의 생명을 쓰레기 취급하며, 선량한 사람의 뒤통수를 때려 강도짓을 하면서 떵떵거리고 사는 자들이 대접 받는 세상이다. 자본주의는 반드시 철폐해야 하며,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그 시간을 얼마나 빨리 앞당기는가는 우리들의 행동에 달려 있다. 자본가 하나의 재산이 수조, 수십조, 수백조원에 달하고, 노동자는 한달에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굶어죽어가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는 반드시 뒤집혀야 한다. 자본가, 부르주아가 자기의 24시간을 자기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노동자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누구는 먹고 살기 위해 피땀흘려 일하면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누구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피땀을 마시며 부유하게 사는 사회는 결코 정의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 자본가, 부르주아는 한줌에 불과하지만, 이들을 몰아내지 못하는 건 체제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자본(가)은 체제를 유지, 옹호하는 사람들로 정부를 만들고, 정부는 자본의 이윤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식으로 자본(가)에 봉사한다. 자본(가)을 유지, 옹호하는 정부는 폭력기관-경찰, 군대-을 운영하며, 자본(가)에 반대하는 노동자, 농민, 프롤레타리아 민중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용산 철거민 사태,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 파괴 등이 대표적 케이스다. 또한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소위 '중산층'이라는 어중간한 계층이 체제의 안정을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본(가)은 이들 중산층에게 당근(정규직, 고연봉, 사무직)을 주고, 자영업자들도 자신이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어 그들의 편에 선다. 이들 중산층(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노동자들이다)과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를 분리하는 것이 자본(가)의 기본 전략이며, '신자유주의' 이후 이 전술은 더 교활해져 '노동자-노동자'의 대립으로 몰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의 차별로 시작했고, 곧이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으로 노동자끼리의 경쟁을 강화하고, 세대 사이의 경쟁을 만들었다.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가 일자리와 복지를 놓고 갈등을 일으키고, 대립한다. 실업 문제, 취업 문제, 복지, 기본소득, 출산, 육아, 동일노동 동일임금, 남녀 성별에 따른 차별 등 자본은 끊임 없이 갈등의 소재를 던지고, 청년 예비 노동자, 실업예비군, 노동자들은 자본(가)이 던진 갈등을 받아들고 서로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작 힘을 합해 목을 쳐야 할 대상은 단 하나, 자본(가)일 뿐인데, 노동자 대중 대부분은 어리석고 멍청하기 때문에 자본(가)의 전략과 전술에 말려드는 것이다. 물론 '자본'의 힘은 단지 '폭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기술문명을 적극 도입해 첨단 제품을 만들어 내면서, 대중은 자본이 만드는 '상품'에 환호하고, '상품'의 (자발적)노예가 된다. '애플'을 비롯해 유명 대기업 제품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소비 행위는 매우 계급적이면서 정치적이다. '상품'은 상위 1%가 소비하는 것부터 모든 사람이 쉽게 소비할 수 있는 것까지 미세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가방 하나에 수천만 원을 하는 것은, 소비를 통해 계급을 구분하려는 '자본'의 전술이다. 따라서 어떤 노동자가 자본가와 부르주아들이 소유한 '상품'을 소유하면 자신도 그 계급에 속할 거라는 '욕망'을 충족시킨다. 물론 이때 '욕망'은 허구이고, 허위의식일 뿐이다. 그렇다고 당장 '폭력혁명'을 일으키는 건 불가능하다. 한국에는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도 거의 없고, 이들이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며, 설령 있다해도 이들이 노동자 대중을 지도할 권력이나 능력, 조직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뒤집을 수 없다면, 남은 것은 온건한 개혁의 과정이거나, 대중 - 노동자, 농민, 중소자영업자, 예술가, 청년학생 등 - 의 각성에 의한 진보 정권의 수립과 진보적 정책의 입법, 실행 등이 있다.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이 바로 이와 같은 진보적 개혁 과정인데, 이 과정은 매우 더디다. 그럼에도 한국이 놓여 있는 정치 상황, 국제 관계를 보면, 내부 혁명은 결코 쉽지 않으며, 부르주아 개혁을 견인하는 대중의 압력이 과거와 현재보다 조금 더 왼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보수, 반동의 발호와 저항이 거세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데 - 수구 언론과 정당, 검찰과 법조계 - 이 과정을 극복해야만 대중의 삶이 한 단계 발전할 것이다. 무력, 폭력 혁명 없이 대중이 원하는 사회 - 주4일 노동, 하루 6시간 노동, 보편적 복지 확립, 기본소득, 비경쟁 교육, 모든 주택의 공공영구임대 등 - 를 만드는 과정은 자본(가)과 부르주아의 반격으로 쉽지 않지만, 내부의 갈등과 각 계층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도 쉽지 않다. 우리는 인간의 삶을 큰줄기에서 결정하는 기본 원칙을 세우고, 세부 원칙들을 조정해 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이윤을 독차지하는 '자본가'는 도태될 것이고, 빈인빅, 부익부의 현상을 제거하기 위해 자본의 독점을 폐지하고, 노동자들이 기업의 주인이 되는 제도를 갖추게 되며, 국민 모두가 기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소득을 비롯해 기본 생존권을 보장받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지금은 24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계급이 오로지 자본가와 부르주아 뿐이지만, 모든 국민은 '노동의 의무'가 있고, 그 노동의 의무를 다 하면, 누구나 원하는 휴가를 다닐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시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화폐를 평등하게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독학의 시작
    독학의 시작 1975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폭우와 홍수가 마을을 덮쳤다. 허름한 판잣집은 물에 잠겼고, 홍수가 끝나자 철거되었다. 우리 가족은 서울 변두리 산동네로 이사했고, 나와 동생은 곧바로 소년노동자가 되었다. 열네 살, 열한 살의 형제는 공장을 전전하며 밥벌이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 차비를 아끼려고 한 시간 넘는 거리를 걸었으며, 빈민을 위한 급식소에서 하루 한끼 국수를 사 먹으며 살았다. 열여섯 살, 건설노동자가 되어 전국을 떠돌며 살았다. 다행히 좋은 형들을 만나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고, 열여덟 살에 중학 졸업자격 검정고시를 치렀다.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고등 졸업자격 검정고시를 치렀고, 스승님의 도움으로 잡지사에 취직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세대는 대학진학률이 27%에 불과했다. 나는 여건이 더 나빠서, 국민학교 이후는 진학할 수 없었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공부해서 검정고시로 최소한의 학력을 유지했다. 그렇게 서른두 살이 될 때까지 잡지사, 공장, 출판사, 자유기고가 등을 하며 살다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했다. 독학과 학력은 관련이 없고, 학력이 배움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스스로 마음가짐을 다지기 위해 대학공부를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건설노동자로 일하던 열여섯 살 무렵부터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다. 내게 공부는 오로지 책을 읽는 것이 유일했다. 다행히 독서의 욕구와 열망은 높아서, 눈에 띄는 책, 손에 잡히는 책을 읽다가 삼중당문고를 주로 읽기 시작했다. 책읽기의 초반은 주로 소설이었고, 가벼운 에세이, 교양입문서 등이었다. 배경 지식, 기초 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어려운 책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군 복무를 할 때 특히 책을 많이 읽었다. 운이 좋아서 행정병으로 근무했고, 하루 몇 시간은 책을 읽을 여건이 되었다. 꾸준한 책읽기는 정신의 근육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86년, 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생 선배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이때 본격 사회과학과 철학, 경제학을 배웠다. 여전히 대학 진학하기 어려운 가난한 상태였고,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도 있었다. 독서모임에서 처음 체계적 독서를 시작했다. 역사, 철학, 경제학, 사회과학의 커리큘럼에 맞춰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고, 토론을 하는 모임은 정규 학교를 다닌 적 없는 내게 중요한 경험이었다. 1988년, 사회는 민주화운동으로 격변하고 있을 때, 나는 소설을 써서 상을 받았다. 내가 글쓰기에 약간의 재능이 있다면 그건 온전히 책을 열심히 읽은 덕이다. 나는 더욱 책을 열심히 읽었고, 책읽기의 범위는 넓어지고, 조금씩 깊어졌다. 1993년,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성실하게 공부하지 못했다. 학교 공부와 사회생활은 병행하기 힘들었고, 이후 결혼하고, 회사에 취업해 직장생활을 성실하게 유지하는 한편, 태어난 아이의 육아도 직장 다니는 아내와 함께 하느라 공부가 쉽지 않았다. 결국 방송통신대학의 학부 생활은 몇 번의 등록, 재등록을 거치며 중단되었고, 그사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로 이주해 지역 사회에서 활동하며 꾸준히 글을 썼다. 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책읽기는 더욱 열심히 했다. 아이가 자라서 군복무를 하게 된 나이가 되었을 때, 2020년, 다시 방송통신대학교에 재입학을 신청했다. 이미 60세가 되어가는 나이였지만, 학력과는 상관없이, 시작한 공부를 마치고, 죽을 때까지 배움은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만화평론으로 상을 받았고, 나의 책읽기를 통한 독학은 약 40여 년을 이어왔다. 몇 년 단위로 스스로 뒤를 돌아볼 때마다 내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교육 과정을 정상으로 밟아 중, 고, 대학교를 다니고, 전공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한 사람보다는 부족하지만, 나는 스스로 공부했고,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배웠다. 배움에는 형식이나 지름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한문 공부는 신문-옛날 신문은 한문이 많이 섞여 있었다-을 읽으면서 터득했고, 외국어(영어)는 쉬운 영어책과 영화를 보면서 배웠다. 나는 어리석음을 깨치기 위해 공부했으며, 책을 읽었다. 컴퓨터-하드웨어, 소프트웨어-도 1989년부터 스스로 밤을 새워가며 조립하고, 프로그램을 설치하며 혼자 배웠고, 건설노동자로 일하며 배운 배관, 설비, 용접 기술로 군대에서 자격증도 취득하고, 시골에 사는 지금은 그때 배운 기술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배우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자양분이 되고,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배우려는 마음은 겸손하고, 스스로를 낮추게 되는 장점이 있다. '날마다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공자의 말씀은 지금도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안철수 씨는 정치 그만두시죠.
    안철수 씨는 정치 그만두시죠. 과거의 인연이 있어 험한 말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요 며칠 페이스북에서 안철수 씨가 한 발언을 보면서, 안철수 씨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정치를 할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안철수 씨가 정치에 입문한 것도 자신의 오랜 고민이나 철학에 기반한 것이 아닌,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 내린 결론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소위 '대통령 꿈'에 젖어 있던 안철수 씨는 오랜 시간 정치적 단련을 이겨내고 성공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 같은 깊은 내공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서 IT 기업인으로 성공했고,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안철수 씨에 대한 인간적 호감이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었고, 그것은 안철수 씨에게 큰 자산이었습니다. 그런 귀한 자산을 바탕으로, 한국의 부패하고 수준 낮은 정치계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킬 거라고 믿는 시민들의 바람을 안고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치계에 발을 디딘 이후 안철수 씨가 보여준 행보는 기존 정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난 행적에 관해서는 거두절미하고, 최근 며칠 사이에 안철수 씨가 발언한 내용만으로, 안철수 씨가 왜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없는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지난 4월 9일, <포퓰리즘 반대 및 긴급재난구조 기조에 대한 특별성명문>을 발표했습니다. 성명문에서 안철수 씨는 세 가지를 주장했습니다. 1) 포퓰리즘을 배격하자, 2) 긴급재난지원금(기본소득) 대상을 제한하자, 3) 코로나19 이후를 위한 전략회의를 제안한다, 입니다. 포퓰리즘을 배격하자는 배경은 '재난지원금'을 국민 모두에게 빠짐없이 주자는 여당, 야당, 이재명 지사의 주장에 대한 반박입니다. 그러면서 재벌이나 공무원, 공공기관 직원에게 지원하는 것을 명백히 반대했습니다. 그러면서 지원대상에서 '공무원, 공공기관 근로자, 교사, 직업군인, 안정적인 대기업 근로자'는 제외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제외하면 지급대상자가 2,750만 명이라고 했습니다. 안철수 씨. 이런 주장이 얼마나 심각하게 국민을 분열하고, 감정 상하고,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말인지 혹시 진짜 모르는 건가요? 긴급재난기본소득을 차별 지급한다는 발상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같은 경제 체제의 문제나 민주주의, 독재 같은 정치 체제의 문제를 떠나 상식적으로도 옳지 않고, 국민의 감정을 대단히 불쾌하게 만드는 발언입니다. 안철수 씨 주위에 제대로 된 상식을 가진 참모도 없거나, 모두 안철수 씨가 주장한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 참모들만 있다면, 안철수 씨는 매우 불행한 정치인입니다. 한국 경제는 세계 10위권에 있고, 국가부채 역시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따라서 국민 한 사람마다 긴급재난기본소득으로 100만원을 지급해도 충분한 여력이 있습니다. 국민 모두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마치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떠드는 사람들은 두 부류입니다. 1) 무조건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려는 멍청한 인간들, 2) 한국 경제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인간들이 그들입니다. 재난기본소득을 국민 모두에게 100만원씩 지급한 이후, 이것을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이내 모두 소진하도록 하고, 소득 수준에 따라 연말에 연말정산을 통해, 소득이 높은 사람에 대한 지원은 다시 세금으로 환수하면 됩니다. 매우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으로 국가재정을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재난기본소득을 일부에게만 준다면, 그 대상을 분류하고, 조사하고, 지급하는 과정에서 매우 많은 인력과 비용이 발생합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정부가 국민을 차별한다는 인식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국민은 모두 국민의 4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데, 왜 재난기본소득에서는 차별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기도 싫습니다. 오히려 안철수 씨에게 묻습니다. 왜 국민을 차별합니까? '공무원, 공공기관 근로자, 교사, 직업군인, 안정적인 대기업 근로자'를 제외하자는 그 발상의 이유는 단지 그들-모두 노동자들입니다-이 수입이 많기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왜 건물주인, 의사, 변호사, 변리사 같은 고소득자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재난기본소득을 주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진짜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은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사람들을 재난기본소득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그 발언의 본심은, 지금의 어려운 상황에서 부자를 보호하고, 노동자에게 위기를 떠넘기는 매우 악랄한 자본가적 발상이라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안철수 씨는 경제에 관한 기본 개념도 없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가진자, 부자, 권력자의 시각으로 국민을 대하고 있으니, 만일 안철수 씨가 대통령이 되면, 정책을 펼 때도 부자, 권력자를 위한 정책을 펼 것이라는 예상을 당연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안철수 씨는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어제(4월 10일) 안철수 씨는 '배달의 민족'이 갑자기 수수료를 정액제에서 일회당 5.8%로 대폭 올리겠다고 발표한 후, 여론과 언론, 이재명 지사의 발언 이후 자신들의 정책을 철회하겠다는 발표에 관해,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발언을 비판했습니다. 이재명 지사는 '배달의 민족'이 보인 독점의 횡포를 막기 위해 '배달 공공앱'을 개발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시장의 영역을 침법하는 것이며 인기영합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시장만능 논리'는 자본주의자들이 늘 하는 말입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식상하고 짜증날 정도죠. 안철수 씨에게 묻습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금융위기 사태가 터졌을 때, '시티뱅크'를 비롯해 미국 금융권에 무려 7천억 달러(770조원)의 자금을 미국정부가 미국시민이 낸 세금으로 지원한 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한국에서도 지난 IMF 때, 정부에서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돈을 빌려 기업에 195억 달러(23조원)를 투입해 기업을 살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건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갚아야 할 돈이었습니다. 자본주의자들이나 안철수 씨의 논리라면, 미국은 이미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자본주의자들은 경제가 순탄하고, 돈을 잘 벌 때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경제가 악화하고 자신들이 돈을 벌지 못하면 정부가 왜 시장에 개입하지 않으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절대 명제를 자기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이 바로 자본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안철수 씨는 경제 정책에 관한 자기 중심이나 철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널리 알려진 자본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되풀이 하는 수준에 그치는 걸 보면, 안철수 씨는 경제를 이끌어야 할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재명 지사가 말하는 '배달 공공앱'은 경기도가 직접 '배달 공공앱'을 개발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재명 지사는 안철수 씨의 비판에 대해 자세하게 반론하고 있습니다. 그 반론 읽어보셨나요? '경기도가 추진하는 공공배달앱은 경기도가 직접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 아니고, 지역화폐망 등 공적 자산들을 활용하되 민간 기술과 경영노하우를 활용해 설립운영하므로 반시장적이라고 비난하거나 실패의 저주를 할 이유가 없고 또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경기도가 추진하는 공공앱은 군산의 배달의 명수가 자리잡아 가는 것처럼 100% 독점배달앱에 대항해 독점횡포를 저지하고 시장질서를 회복시키는 순기능을 할 것이고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정치에 발을 들인 이후, 안철수 씨가 하는 발언은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겠죠? 그럼에도 여전히 안철수 씨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 여론을 알 수 있는 여론조사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후보 지지도, 이번 총선에서 안철수 씨가 만든 '국민의당' 지지도를 보시면, 안철수 씨의 현재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안철수 씨가 정치를 그만두고, 자선사업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본가이자 부르주아인 안철수 씨는, 정치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아니면 빌 게이츠처럼 정치가 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봉사를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안철수 씨도 정치를 하는 일부 국회의원처럼 친일매국노, 반역자가 되고 싶지는 않겠죠? 게다가 이명박이나 박근혜처럼 권력을 차지해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거나 무능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꼭둑각시가 되는 것도 원치 않으시죠?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정치를 그만두는 것이 가장 올바른 태도입니다. 앞으로 안철수 씨가 계속 정치를 할수록 안철수 씨의 말과 행동은 비웃음과 비난을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번 총선에서 비례대표 정당지지도로 '국민의당'은 6%가 나왔습니다.(2020년 4월 10일 '미디어오늘 기사) 이 숫자라면 아마 비례 의원으로 2-3명 정도의 의원이 나올텐데, 앞으로 안철수 씨의 정치행보에 과연 도움이 될까요? 이런 참혹한 결과가 나온 것은 과연 누구 탓일까요? 더구나 비례대표 4번인 김근태는 말과 행동이 극단적이고 악랄한 인물인데, 이런 사람을 쓰겠다는 의도가 대체 무엇인지 묻습니다. 다음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는 이낙연, 이재명, 황교안, 안철수(이상 한국갤럽 조사 순위)의 지지도는 이낙연 26%, 이재명 11%, 황교안 8%, 안철수 5%로 나왔습니다. 지금 지지도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언제든 역전할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 그런 자기 확신이 나락의 구덩이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도 그러면 알고 계시겠지요? 안철수 씨는 행정 경험도 없고, 정치 경험도 없는 '문외한'입니다. 그런 점에서 황교안도 마찬가지죠. 적어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면, 정치와 행정에서 오래 경험을 하고, 공부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철수 씨는 그런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죠. 그런데도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건, 일하지 않고 열매만 따먹겠다는 욕심이며, 망상입니다. 과거 안철수연구소(안랩)에 있을 때, 안철수 씨는 행복했습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에 입문한 이후, 안철수 씨는 눈빛이 달라졌고, 늘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자주 웃는 모습을 보던 저로서는 그런 안철수 씨의 모습이 몹시 낯설고 기이합니다. 왜 정치에 뛰어들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안철수 씨는 자신을 희생해 국민의 삶에 기여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졌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국민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꼭 정치를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사회와 국민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쓰는 것은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 국토달리기도 그저 쇼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으실 걸로 압니다. '국민의당'도 후보를 내지 못하고, 정당비례후보만 낸 상태이고, 그것마저도 성과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꿈은 이미 안철수 씨가 기간 보여준 행보만으로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깨끗하게 정치와 결별하고, 행복한 개인으로 돌아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텔레그램 n번방의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텔레그램 n번방의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이 무슨 '종족주의' 어쩌구 하는 책의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이란다. 이 사람이 쓴 글을 읽고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아, 그래, 바로 이게 이들의 공통점이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친일매국노는 다양한 형태를 띈다. 한국최대 야당 집단이 있고, 개독 집단이 있으며, 일베충 집단이 있고, 광화문에 태극기, 일본국기, 미국국기, 이스라엘국기 등을 들고 나와 데모하는 틀딱늙은이 집단이 있고, 나랏돈을 자기돈처럼 쓰는 어린이집, 유치원 원장 일부 집단이 있고, 의사 일부 집단이 있고, '종족주의' 어쩌구 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지식인 집단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비난한다는 것이다. 지난 세월호 참사 때도 피해자 학생과 그 부모, 가족을 비난한 것도 바로 이런 친일매국노 집단이었다. 이번 텔레그램 n번방 집단 성폭행 사건을 보는 시각도 친일매국노들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즉, 여성들이 처신을 잘못했기 때문에 남성들에게 당한 것이다,라는 논리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일제의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되었던 피해자를 향해 이 친일매국노들이 '자발적 매춘부'라고 비난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다. 그러면, 이 친일매국노들은 왜 피해자를 비난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들은 비겁하다. 강한 자에게는 납작 업드려 복종하고, 약한자에게는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뜯어 먹는 약육강식의 본능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문명적으로, 정신적으로 진화가 덜 된 '종족'인 것이다. 설마, 이들 가운데는 의사도 있고, 판사, 검사도 있고, 학자도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반문하겠지만, 그런 사회적 직업과 본성은 다르게 봐야 한다.즉, 책을 달달 외워서 시험보는 머리와, 사회적 진화 단계, 정신적 성숙도, 공동체에서의 협력, 협응, 우애의 유전자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원시적 충동을 내재한 채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원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고 싶지만, 사회적 규범이 있으므로 충동적으로 살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충동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것이 바로 피해자 즉 힘없고 약한 사람을 물어뜨는 방식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은 지금의 문재인정부를 증오한다. 그것은 이들 친일매국노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 주로 독재정권에서 권력에 빌붙어 약한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형태로 존재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마치 흡혈귀나 좀비처럼, 숙주가 있어야 한다. 그 숙주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었고, 독재의 폭력은 더욱 백성을 짓누르는 상태였으니, 강한자에게 복종하고, 약한자를 짓밟는 친일매국노의 성향에 딱 맞는 사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 정부로, 모든 것이 공개되고, 폭력도 쓰지 않으며, 약한 사람들이 서로 연대해 서로를 돕는 사회를 만들려 노력했고,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되니 과거의 독재폭력과 억압, 야만에 적응했던 친일매국노들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좀 어처구니 없이 단순한 이유로 이들 친일매국노들은 세상을 일차원으로 바라보고 있다. 즉, 결과만 보고 해석하는 것이다. 가령 이렇다. 코로나19로 사람이 죽었을 때, 이 친일매국노들은 죽은 사람을 비난한다. 앞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 사람(죽은 사람)은 자기가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는 '하나님이 그 사람(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서 쓰시기 위해 불렀다'고 말한다. 혹은 '그 사람(죽은 사람)은 그럴만 하니까(죽을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죽었다'고 말한다. 즉,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원인과 결과에 대한 분석 없이, 자의적으로, 자기가 편하고, 말하기 쉬운대로, 생각하는대로 말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개독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태풍이 불어 피해가 발생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태풍이 태평양에서 발생할 때, 바닷물의 온도가 상승하고, 저기압 상태에서 다량의 수증기가 증발하면서 거대한 구름이 생기고, 이런 물리적 변화가 점차 변증법적으로 태풍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앞의 예로 돌아가서, 텔레그램 n번방 성폭행 사건을 두고, 피해자인 여성을 '단속'하겠다는 발상은,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비난받아야 한다는 의식, 무의식의 발현이다. 저 '종족주의' 저자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가해자 처벌은 별개로' 어쩌구 써놨지만, 그건 그냥 변명일 뿐이다. 핵심은 '내 딸(여성)을 단속하겠다'는 것에 있다. 나는 이 인간에게 묻고 싶다. 네 딸이 그 안에 있었다면 어떻게 할까? 네 딸을 데려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못했다고 뺨을 때리고, 몽둥이로 두드려 팰 것인지, 아니면 여자가 그따위로 몸가짐을 하고 다녀서 성폭행을 당했으니 어쩔 수 없고, 당해도 싸다,라고 말할 것인지 몹시 궁금하다. 이미 성폭행을 당한 수 많은 여성이 존재하는데, 거기다 대고 '내 딸이라면 단속하겠다'는 따위의 되먹지 못한 말을 하는 자가 '종족주의' 어쩌구라는 책을 쓰는 건 필연적 결과다. 즉, 가해자의 논리에 길들여진 노예이자, 약한자를 물어뜨는 하이에나같은 친일매국노들의 본성이 매우 잘 드러난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20002 형, 반가워.
    20002 형, 반가워.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는데, 가평 별장에 있었네? 별장 안에서 젊은 여성들이 시중들어 주고, 형은 참 좋겠어. 근데, 망원경으로 밖은 왜 쳐다봐? 밖에서 형 좇아다니는 신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보려는거야? 아니면 형 별장 앞에 모여서 형이 운영하는 특수시설에 자의반, 타의반 들어간 자식들, 남편, 아내 돌려달라고 울부짖는 가족들 보려고 그러는 거야? 형이 운영하는 특수시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형을 '살아 있는 예수'라고 한다며? 그리고 형은 '영생 불멸'한다며? 다 좋은데, 형 모습을 보니까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거 같던데? 걷는 것도 지팡이에 의지해서 겨우 걷고, 형 얼굴을 보니까 합죽이처럼 보이던데, 형 틀니했지? 형 영생한다면서? 이도 다 빠지고, 잘 걷지도 못하는 데 어떻게 영생할 거야? 그렇지만, 형이 부럽긴 하다. 한국에서 몇 대 없다는 '마이바흐'를 타고 다니잖아. 그거 거니형 정도나 되어야 타고 다닐 수 있는 건데, 형은 가뿐하게 소나타 타고 다니듯 마이바흐를 타고 다니는 걸 보니 역시 사기를 치든, 도둑질을 하든 무조건 돈만 벌면 장땡인가봐, 그렇지? 형도 옛날에 형이 믿던 사이비종교 집단에 들어갔다가 전재산 날렸잖아. 그거 신문기사로 요즘도 돌아다니더라. 그때 형 기분이 어땠어? 사기치는 새끼들 다 감옥에 잡아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아니면, 나도 당했으니 너희들도 당해봐라, 뭐 이런 심정으로 형도 이 바닥에 뛰어든 거야? 이유야 어떻든 형은 성공했네. 가평 북한강 바로 옆에 거대한 별장을 짓고, 마이바흐를 타고 세상 부러울 게 없겠어. 그런데, 형은 참 안목은 별로인가봐. 별장이라고 지어 놓은 건물 디자인이 너무 구려. 요즘 그렇게 건축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 엄청 촌스럽고 구리거든. 형이 오늘 진짜 넓은 마음으로 언론 카메라 앞에 나와서 기자회견했잖아. 영생한다는 형이 마스크 쓰고 나와서 말하는 걸 보니 진짜 웃기더라. 형 영생한다면서? 그리고 말은 왜 그렇게 못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거야? 아니면 원래 말하는 모습이 그런 거야?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다듣지 못하겠어. 뭐, 말은 잘 못할 수 있지. 그래도 형이 좋은 음식에다 건강에 좋다는 약을 꾸준히, 열심히 먹나봐. 하긴 영생하는 사람이 나이를 먹는 건 의미 없잖아. 형처럼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은 하루 몇 끼나 먹어? 한 이십하고도 새끼를 더 먹나? 돈 많으니까 끼니마다 쇠고기 먹겠네? 그건 참 부럽다. 나는 쇠고기 먹은 기억이 가물가물해. 형은 하루에 한 이십하고도 새끼를 더 먹을 수 있으니 역시 형은 영생하겠어. 그런데, 오늘 형이 왼쪽 손목에 찬 시계, 그거 사람들이 엄청 관심이 많던데, 그거 파텍 필립 아냐? 왜 있잖아, 시계 하나에 1억이 넘는 최고급 시계 말이야. 시계가 막 번쩍거리던데. 아냐? 누가 그러던데 그네누나 시계라고 하던데? 그네누나 시계는 어떻게 구한 거야? 지금 그네누나 국립호텔에 들어가서 국가가 건강관리 해주고 있잖아. 형하고 그네누나하고 인연이 깊어? 아, 그렇구나. 그러면 이번 기회에 형도 그네누나 옆으로 가면 어떨까? 형도 국가가 운영하는 호텔에 들어가서 국가가 잘 관리해주고, 하루 이십새끼는 아니어도, 새끼는 꼬박꼬박 잘 챙겨 주고, 건강관리도 잘 해주고, 무엇보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릴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되잖아. 형을 구원자, 영생자, 예수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꽤 많다면서? 그런데 장로교나 침례교 같은 기성 개신교에서는 형을 보고 사이비종교 지도자니, 사기꾼이니, 배워먹지 못한 놈이라고 욕하던데, 형이 그걸 참는 거 보면서, 형은 역시 대인배구나 하고 생각했어. 아니면 저런 놈들하고는 상종도 하기 싫거나, 상종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거나겠지. 왜? 형은 살아 있는 예수니까. 원래 예수도 자기 고향에서나, 살아 있을 때 가까운 사람들에게 욕을 실컷 얻어먹고, 사람들이 막 침도 뱉고, 돌멩이도 던지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형도 사람들이 형을 보고 사이비니, 개독이니, 사기꾼이니 비난해도 그건 다 형이 '살아 있는 예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다 좋은데 형이 '살아 있는 예수'로 자칭하는 건 좀 웃기지 않아? 일단 외모부터가 너무 다르잖아. 예수 그림 좀 봐봐. 미끈하게 잘 생긴 서양 백인 남성이잖아. 머리칼도 금발로 길게 기르고, 눈동자도 파랗고, 얼굴은 알랑 드롱보다 더 잘 생겼잖아. 근데 형은 뭐야, 다 쭈그렁 늙은이에, 이빨도 다 빠지고, 피부는 갈색에, 얼굴은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넙데데하고...이건 뭐 예수하고는 전혀 코드가 안 맞잖아. 그래서 말인데, 형, 우리 수술 좀 하자. 요즘 성형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알지? 형이 진정한 예수도 태어나려면 외모를 싹 뜯어고쳐야 해. 주름을 없애려면 보톡스를 넣고, 피부도 하얗게 박피를 하고, 머리칼도 길게 길러서 황금빛으로 염색하고, 옷도 예수시대에 입던 '토가'를 입고, 가죽으로 만든 샌들을 신고 다니는 거야. 그러면 누가봐도 형은 '진짜 예수'처럼 보이잖아. 어때? 근데, 다 좋은데 형이 말하는 거, 그건 정말 어떻게 안 될까. 예수처럼 아람어나, 히브리어나, 코이네 그리스어를 섞어서 써야 멋있는데, 형은 아직도 경상도 사투리가 남아 있는 떠벌이처럼 말하잖아. 그건 참 보기 안 좋아. 사람들이 왜 형을 영생 불멸한다고 믿을까. 그런 걸 보면 형이 참 재주가 좋아. 나는 형이 참 촌스럽고 여러 면에서 수준 이하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봐? 어쨌든 형이 운영하는 특수시설에 있는 사람들이 온나라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녀서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었잖아. 지금은 정부가 방역하고, 치료하지만 나중에 형이 나라와 국민에게 입힌 피해를 배상해야 할 걸. 그거 돈으로 환산하면 형이 가진 재산 다 팔아도 택도 없어. 형이 한순간에 거지가 될 수도 있다 이거지. 오늘 텔레비전에 나와서 큰절을 했지만, 그게 쇼라는 건 모두 알잖아. 그러니, 형이 가진 명단하고 재산 다 내놓고 국립호텔에서 노후를 편안하게 지내는 게 어때? 내가 진지하게 조언하는 거야. 다 형을 위해서.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신천지와 다단계
    신천지와 다단계 오래 전, 다단계에 엮일 뻔한 일이 있었다.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는 친구가 있는데 - 그 친구가 먼저 페이스북을 차단했다 - 어느 날, 2박3일 여행을 가자며 연락했다. 여행 경비도 자기가 낼테니 준비만 해서 만나자고 했다. 평소 다단계에 관해서는 전혀 말한 적도 없고, 나 역시 그 친구가 다단계에 빠졌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나는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다만, 그 친구가 만나자고 한 장소가 의외였다. 녀석은 압구정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보자고 했는데, 그곳은 당시 우리가 살던 마을-금천구 시흥동-에서도 매우 멀었지만, 우리와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무 의심 없이 그곳에 나갔다. 녀석은 나를 어느 카페로 데리고 갔고, 그곳에서 선배를 잠깐 만나자고 했다. 잠시 뒤 어떤 남자가 들어왔고, '문화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 나는 '문화운동' 쪽에서 일하고 있었고, 지금은 돌아가신 박인배 형과 함께 일했다. 그 낯선 사람도 '문화운동' 경험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 '운동'을 하던 사람은 연대의식이 있어서 일단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다시 모르는 여성이 등장했다.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문화운동'을 더 진지하게 이야기하자고 했고, 어떤 곳으로 가자고 권유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들이 갑자기 나타나 내가 아는 '문화운동'에 관해 아는 척하고, 어디론가 함께 가자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들이 다단계가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들, 다단계 아니냐'고 물었고, 그들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합리적 의심을 통해 이들이 분명 다단계라고 확신했다. 내가 카페에서 일어나 나오자, 그들도 따라 나왔고, 나를 끌고서라도 어디론가 데려갈 움직임을 보였다. 나는 압구정 네거리-지금도 넓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다단계로 나를 끌어들이려면 죽여버리겠다고. 그리고 친구였던 그 녀석에게도 쌍욕을 퍼부었다. 그렇게 그 자리를 떴고, 그 뒤로 꽤 오래 그 녀석을 만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서, 그 녀석은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때 자기가 귀신에 홀렸는지, 다단계에 빠졌으며 돈을 꽤 날리고 빠져나왔다고. 그런 녀석이 몇 년 전에 내가 부르주아라면서 페이스북을 차단하고, 친구로서도 인연을 끊었다. 오래 전, 10대 때 잠깐 가까운 형을 따라 순복음교회에 다닌 적이 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가서 찬송가도 불렀고, 성경도 읽었다. 나는 천성이 게을러서 뭔가를 열성적으로 하지 못하는데, 그때는 먹고 사는 일에 쫓겨 교회를 다니는 것도 사치였다. 그러다 군복무를 하고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종교는 내 삶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사회과학 공부를 한 것을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한다. 그때 팀을 꾸렸던 대학생 형들이 있는데, 그들과는 삶의 궤적이 달라졌지만, 처음 그들에게서 정치경제학,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와 레닌을 배우면서 나는 사회를 구조적으로, 계급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기초를 갖게 되었다. 신천지에 빠진 사람을 보면, 그 과정이 다단계와 99% 똑같다. 인간적 호의와 친밀감으로 접근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세뇌를 통해 자신들의 이론이 옳다고 믿게 만든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은 철저하게 세뇌된다. 한번 세뇌당하면 스스로 벗어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인간의 정신은 의외로 나약해서, 강력한 외부의 힘에 쉽게 조종당한다. 그래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떤 교육보다 중요한 것이고, 교육의 핵심이 그것이어야 한다. 현 체제의 교육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을 전달할 뿐이다. 사이비 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그런 기초교육의 틈새를 파고 들어가며, 인간의 나약하고 부족한 정신을 건드려 불안감을 증폭하고, 공포를 조장하며, 가능성 없는 미래와 희망을 불어넣어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을 추종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완벽한 사기이며 거짓말이지만, 사람들은 그런 거짓말을 '믿고 싶어'한다. 그것이 나약한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종교 뿐 아니라, 사회에서 사기를 치는 사기범들도 사이비 종교의 교주와 매우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사람들이 가진 욕망을 건드리고, 공포와 희망을 동시에 주입하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의 능력과 노력보다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더 중요한 것을 쉽게 얻으려는 사람은 이런 사기꾼에게 쉽게 넘어가고, 그들의 노예가 된다. 사기를 치는 놈이 가장 악질이지만, 그런 사기꾼에게 넘어가 가족과 친구를 버리고, 가족과 친구에게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끼치면서 사기꾼의 노예가 되는 사람은 단지 '피해자'가 아닌, 사기꾼에게 동조하는 공범이자 가해자가 된다. 무지와 어리석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기도 하다. 내가 종교를 혐오하는 이유는, 반이성, 반지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현대사회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고대의 미신을 믿는 어리석고 멍청한 행위이며, 발달한 인류의 지성과 과학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신천지 교주 20002도 사이비 종교에 뛰어들었다가 교주에게 사기를 당해 교주를 고소했던 사람이다. 그 자신이 사이비 종교의 피해자였다가 '나만 당할 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그렇게 번 돈으로 마이바흐를 끌고 다닐 정도로 부자가 되었다. 신천지를 믿는 사람들의 롤모델이 20002라면, 그들도 모두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사치를 치고, 돈을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걸 뜻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결코 '피해자'가 아니다. 미래의 잠재 사이비 교주들이며, 예비 사기꾼들이다. 국가에서 사법권을 발동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범죄 집단과 범죄자를 미리 찾아내고, 격리하기 위한 것인데, 과연 한국의 검찰과 경찰은 눈에 보이는 사이비 범죄집단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올바르게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신정일치 사회를 꿈꾸는 그들
    신정일치 사회를 꿈꾸는 그들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면서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이미 불을 발견했고, 수렵채집경제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들과 산에서 자라는 곡식을 가져와 벌판에 심고, 개량해 추수하고, 산과 들, 숲에서 나오는 온갖 과일, 채소, 식용 풀과 버섯, 꿀 등을 먹고, 사냥을 위해 덫을 만들거나 새끼를 데려와 길들여 가축으로 기르면서 인류의 먹거리는 풍성하고 다양해졌다. 이 과정에서 잉여농산물이 발생하고, 동시에 노동하지 않는 특별한 사람이 등장했다. 이들은 씨족이나 부족 가운데 연장자로 씨족장, 부족장을 겸하고 있는 노인으로, 경험이 많아 지혜로운 사람으로 불렸다. 이들과 함께 '무당', '주술사' 역할을 하던 사람도 노동하지 않는 특별한 사람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의사' 역할도 했는데, 부족 가운데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악령을 퇴치하는 역할을 맡았다. 부족장이나 주술사는 부족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잉여 농산물의 일부를 받아 생활했는데, 잉여 생산물은 주로 부족의 노인과 어린이 등 노동력이 없는 사람에게 분배되었다. 씨족과 부족 단위의 공동체는 침략과 전쟁을 통해 통합되었고, 공동체 규모는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노동력도 커지고, 잉여생산물도 커졌다. 전투와 전쟁에서 이긴 부족은 진 부족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고, 잉여생산물의 대부분은 승리한 부족의 지도자 그룹이 가져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도시국가가 탄생하고, 국가, 제국이 탄생했다. 이들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경제체제를 구축했고, 지배그룹은 종교와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들은 초기에 부족을 이끄는 지도자이자 제사장을 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권력과 제사장, 종교지도자는 분리되어 두 영역으로 나뉘지만, 두 그룹은 강력한 연대를 통해 지배권력을 강화했다. 종교는 초기 인류가 자연현상을 이해하지 못해 발생했다. 토테미즘을 거쳐 각종 미신과 다신이 등장하고, 인류의 모습을 담은 인격신이 나타난 다음, 인간의 욕망과 소망을 해결하기 위한 '절대신', '유일신'이 등장했다. 신과 종교는 인류의 욕망에 의해 진화했으며, 과학이 발달하기 전까지 인간의 미개함을 합리화하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종교는 인민을 정신적으로 지배했고, 정치권력과 함께 지배계급으로 자리잡았다. 중세까지 신정일치의 사회는 인민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유지되었고, 인민은 오로지 왕과 교황의 지배에 순종하며 노예로, 농노로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 산업혁명 이후 봉건왕조는 몰락했지만, 종교는 살아남았다. 자본가는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를 교육할 필요를 느꼈고, 교육을 받기 시작한 노동자는 종교가 거짓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식계층에서 노동계급의 입장에 서려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자본가, 부르주아, 교회가 담합해 노동자, 농민, 서민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회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성한 노동자와 지식계층은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가, 부르주아, 교회 권력을 타도하고 계급이 사라진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일부 성공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노동자는 자본의 착취 아래 놓여 있으며, 자본과 부르주아의 이익에 봉사하는 종교 대리인, 교회의 목사와 신부, 절의 중이 하는 말을 믿고 따른다. 노동자는 이중의 모순에서 깨지 못한 채, 임금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자본에 의한 착취의 모순과 종교가 강요하는 미신의 모순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권력과 종교집단은 강력한 연대를 유지하며 노동자, 자영업자, 학생, 서민, 어린이, 노인 등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공략하고 있다. 이들의 목적은 가능한 많은 사람을 무지와 정신적 노예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이성은 날카롭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다수의 인민은 정신적으로 미개하거나 미숙한 상태에 놓여 있다. 현대는 과학기술문명이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다수 인민의 이성과 지성은 중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증거는 종교가 여전히 활발하게 성장하거나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2천년 전의 미신을 진실이라고 믿는 미개함은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더디게 발달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교회권력은 그런 미개한 사람들에게 협박과 거짓, 공포를 주입하는 한편,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 안에서 개인의 인정욕구와 자신감을 불어 넣고, 조직 안에서 절대자를 섬기며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끊임없이 세뇌한다. 종교권력은 수많은 개인들이 자의반, 타의반 제공한-노동력과 교환한 가치인-화폐를 모아 거대한 부를 쌓고, 소수의 교회지배자는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다. 이들은 정치권력과 결합하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며, 이것은 정치권력과 교회권력 모두에게 이롭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교회권력은 필연적으로 보수적이며 자본과 부르주아의 이익과 한편이기에, 인민-노동자, 농민, 서민, 자영업자 등-의 이익과는 반대되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이들은 혁명, 개혁, 변혁, 변화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현 체제를 옹호, 유지하려 한다. 씨알-인민, 민중, 백성, 시민, 국민,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서민, 자영업자, 학생, 실업자 등 모든 형태의 피지배 계급과 계층-이 깨어나지 않으면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은 끊임없이 씨알의 피를 빨아먹을 것이고, 그들은 배를 불리고, 이 세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피를 빨리는 씨알은 그렇게 말라죽을 것이고, 세상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금고에 금괴와 무기명양도증서와 채권과 현금다발을 쌓아 놓고, 수십억, 수백억 저택에 살며, 한 끼 밥값으로 노동자 한 달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쓰며,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달러일 때,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피우는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삶을 동경하며 살 것인가, 그들이 자긴 모든 금괴와 무기명양도증서와 채권과 현금은 씨알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임에도 자기의 피땀을 빨아먹는 저 악귀같은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의 발 아래 엎드려 굽신거리며 말라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목을 졸라 가지고 있는 것을 뱉어내도록 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오로지, 우리의 행동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총칼을 들 것인가, 도끼와 낫을 들 것인가, 아니면 투표를 할 것인가. 우리는 촛불을 들어 세상을 바꿨다. 촛불의 힘도 강력했지만, 투표는 더 강력한 무기다. 우리가 당장 총칼과 도끼와 낫을 들 수 없다면, 차선책은 투표가 유일하다. 하지만, 투표로는 정치권력만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정작 인민을 정신적 노예로 만드는 것은 종교권력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인민의 정신을 썩게 만드는 독극물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많은 인민은 어리석고, 멍청하며, 한심하도록 멍청하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며, 노예의 상태에 있을 때 안심하고, 행복하며, 안정을 얻는 사람들이다. 이런 좀비같은 정신적 노예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 역시 올바른 교육, 자본의 노예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깨어 있는 씨알의 투쟁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안철수 대표님
    안철수 대표님 '특별 기자회견문' 잘 읽었습니다. 대표님하고는 같은 회사에서 일한 인연이 있어 가능한 모진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인간 안철수'는 올바르고 선량하며 따뜻한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기에, 몇 년 전, 정치를 하신다고 했을 때도 부디 원하시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안 대표님이 선택한 정치는 '혁신', '개혁', '진보', '민주'와는 거리가 있는 구태 정치, 낡은 정치여서 저는 몹시 실망했습니다. 기존의 부르주아 정당정치, 기득권 속에서 패를 나눠 파이를 더 가져가려는 패거리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서, 안 대표님이 정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주변의 노회한 정치기술자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사람들은 안 대표님에게 기대를 걸었고, 그래서 무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하도록 표를 주었으며, 새정치연합,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다시 무소속으로, 그리고 '국민의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 행보에도 여전히 기대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 대표님이 정치에 입문한 이후 안 대표님이나 한국 정치에서 달라진 것이 있는지 묻습니다. 안 대표님이 그렇게 힘주어 말하는 정치개혁은 이루어졌나요? 아니, 정치개혁을 이루려는 노력은 있었나요? 안 대표님은 기존 기득권 정치세력의 벽이 두텁고 높아서 그렇다고 말하겠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변명입니다. 그런 현실을 모르고 정치에 뛰어들었다면 현실 감각이 없는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고, 그런 현실을 알면서도 정치개혁에 게을렀다면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안 대표님이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성공할 수 있는 전략에 관해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안 대표님 주변에 훌륭한 참모들이 많을 것이고, 뛰어난 전략을 제시할 인재가 많다고 생각해서 저같이 시골 변방에 사는 사람은 감히 조언할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때 제가 했던 생각은,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당시는 새정치연합, 새정치민주연합)보다 훨씬 진보적인 테제를 내걸고 정치의 패러다임을 주도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수구정당인 새누리당은 아예 제쳐놓고, 상대적으로 진보 정당인 민주당보다는 훨씬 진보적 정책을 내걸어야만 새로운 정당을 만들거나, 대통령 선거를 할 때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기본소득, 주4일 근무, IT기반의 농어촌 활성화, 지방도시의 활성화, 노인 인구의 능동적 활용, 저출산 문제의 적극적 해결 방안, 내수 시장의 확대 정책, 학력과 학벌 폐기, 기술 인력의 우대 등 안 대표님이 잘 알고 있고, 잘 할 수 있는 분야의 정책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그 어떤 정당에서도 내놓지 못한 진보적이며 혁신적인 정책들이어서 안 대표님의 리더십이 세상에 빠르게 알려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 대표님은 기존 정치인들의 숲에 싸여서 그들의 조언을 듣고, 그들의 방식대로 움직였습니다. 그것은 기존 정치체제의 내부에서 그들의 패러다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선되었지만, 대통령 선거에서는 7백만 표도 얻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1백만 표도 얻지 못해 참담한 결과였는데, 안 대표님은 언론에서 마치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안 대표님의 말과 행동은 정치인으로서 대단히 미숙하거나 어리석었습니다. 안 대표님이 아무리 부인하고, 믿고 싶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안 대표님을 무조건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비판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겠지만,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듯, 안 대표님을 진정 생각하는 사람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 나쁠 것은 없을 걸로 생각합니다. 이제 안 대표님은 '참신한' 정치인이 아니라, '구태'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현실은 그렇습니다. 안 대표님은 이번 '기자회견문'에서 이런 말도 했더군요. 첫째, 현 정권의 무능과 폭주를 막는 것입니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현 정권은 과거로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경고를 보내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더 나쁜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위기감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묻습니다. 현 문재인 정부가 '무능'하다는 증거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폭주'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폭주'했는지 역시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근거를 대서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과거로 역주행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것들이 과거로 역주행하고 있는지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대서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묻는 내용에 합리적 설명과 근거가 제시되어, 제가 수긍한다면, 저는 안 대표님을 위해 총선이든, 대선이든 온몸을 다해 뛰어다니며 봉사하겠습니다. 저는 민주당 지지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민주당 앞잡이로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존경하는 분이지만, 인간 문재인과 대통령 문재인은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가 문재인 정부로 경도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위에서 말씀하신 내용의 근거를 제시해 주시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겠습니다. 저는 안 대표님이 정치에 뛰어든다고 했을 때부터 걱정했습니다. 정치는 안 대표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 대표님은 심사숙고한 결과,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그때부터 이제 약 8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안 대표님의 참신함은 사라졌고, 정치권을 개혁할 의지도, 명분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한 다음,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독일과 미국 등에서 생활하다 다시 돌아와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주변 참모와 측근의 조언에 따른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안 대표님의 오기도 작용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물러설 수 없다는 결기는 훌륭하지만, 억지로 이룰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탑을 오르려 애쓰는 모습은 안쓰럽기만 합니다. 안 대표님처럼 재정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분이라면, 지금 만들어 놓은 동그라미 재단을 통해 사회에 더 유익한 일을 많이,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빌 게이츠도 말했습니다. '정치가는 절대 안 할 것이다. 재단의 일만으로도 정치가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정치가가 되어 국민에게 봉사하겠다는 뜻은 가상하지만,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정치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빌 게이츠처럼 직접 사회에 필요한 일, 직접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안 대표님에게도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번 총선에서 지역 후보는 내지 않고, 비례 후보만 내겠다는 것은 온전한 정당이 아니라 '기생 정당'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도 안 된 정당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건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기만하고 우습게 보는 것 아닐까요? 깔끔하고, 담백하게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금처럼 정치권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흙탕물이 더 묻고, 허우적거리다 비참한 모습으로 퇴장하게 될 것을 염려합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다른 사람 흉내를 내는 것같은 지금의 '정치가' 안철수가 아닌, 편안하고 따뜻한 '인간' 안철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건승하길 빕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여성의 몸-주체적인가 성의 상품화인가
    여성의 몸-주체적인가 성의 상품화인가 결론을 내리고 쓰는 글이 아니라 애매할 수도 있겠지만, 이 주제는 나의 개인적인 과제이기도 하고, 많은 남성들이 겪는 애매함에 대한 일종의 '질문'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먼저,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현상을 몇 가지 살펴보자. 여성 아이돌들의 의상은 거의 벌거벗은 상태다. 그들의 노출은 자발적인가? 아니라면 그런 노출에 대한 여성 아이돌의 생각은 어떨까? 가수 비욘세의 '싱글 레이디' 동영상을 보면 노출이 심하다. 비욘세의 노출은 자발적인가? 아니라면 비욘세의 생각은 어떨까? 심하게 노출이 된 옷을 입고 무대에 서는 여성 가수들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생각은 어떨까? 어린 여성 아이돌이든, 비욘세 같은 세계적인 가수든 바라보는 여성들은 노출에 대한 시선이 불편한가? 아니면 당당하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남자 가수, 연예인들은 무대에 오를 때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 않는가? 여성들이 남자들의 노출을 싫어하기 때문에? 남성 가수나 연예인들이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인터넷 방송-아프리카, 유튜브 등-에서 지나친 노출과 선정적 몸짓을 통해 남성 시청자들로부터 돈을 벌어들이는 행위는 주체적인가, 성의 상품화인가. 이런 논의를 하기 전에 전제해야 할 명제가 있다. 이미 사회적 합의가 끝나 여성에 대한 성착취가 분명한 사안들을 정리하고, 여성의 성착취와 성상품화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성상품화’도 넓은 의미에서 ‘성착취’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개인의 ‘성’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것은 성(젠더)을 구분하지 않는다. 자본의 속성은 ‘이윤’에 있기 때문에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인 윤리와 도덕은 인류의 문명이 존속하기 위한 사회진화적 선택일 뿐, 체제의 이념과는 원리적으로, 합목적적 인과관계가 없다. 따라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속성과 압력에 의해 개인의 선택은 자율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강제된다. 자본의 압력은 ‘노동자에게는 굶어 죽을 자유만 있을 뿐’이라는 명제로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노예제와 봉건제에서 묶여 있던 개인을 해방시킨 진보적 체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해방된 개인은 자신의 노동을 판매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자본-토지, 생산수단-을 보유하지 못한 개인(프롤레타리아, 룸펜프롤레타리아)은 자본의 통제 아래에서 노동-육체노동, 지식노동-을 제공하고 그 보상으로 임금을 받는다. 같은 이유로, ‘성’을 판매하는 것도 ‘노동’을 판매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노동을 판매할 수 없거나, 노동하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을 받기 원할 때, 그것이 ‘성’이라면, 자신의 ‘성’을 판매하려는 개인이 등장한다. 성을 판매하는 성 판매자 가운데 특히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성을 구매하려는 구매자가 압도적으로 남성이기 때문이지만, 여성이 사회의 약자이고 소수자인 원인도 크다. 수요는 공급을 창출하고, 자본주의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남성우월주의, 남성가부장제가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남성에 의한 성착취가 절대 비중을 차지한다. 남성우월주의 사회가 여성의 성착취를 노골화하는 이유는 당연히 ‘불평등 구조’에 있다. 여성은 같은 조건에서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일상적 불이익을 당한다. 여성과 남성이 사회적으로 평등한 위치에 있다면 여성의 성착취는 거의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여성이 자신의 ‘성’을 판매하는 것은 자발적 행위가 아니라 구조적 불평등, 자본의 착취, 사회적 압력-생존 압력-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극히 일부, 여성이 자신의 ‘성’을 자발적으로 판매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 역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즉 건전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노동의 대가가 정당하고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 ‘성’을 판매해서 얻는 수익이 훨씬 클 경우, 자발적으로 ‘성’을 판매하려는 여성이 나타난다. 이때 ‘자발성’은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닌, 체제 속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거나 더 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사회적 압력에 굴복해 자신을 강제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여성이 자신의 몸이나 성을 상품화하는 것은 복합적 이유가 있다. 인간의 행위는 체제와 이념에 의해 규정되지만 개인의 욕망을 발현하는 것은 체제나 이념이 다룰 수 없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므로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다. '성 판매'와 다르게 '성 상품화'는 합법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성을 매매하는 행위는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성을 상품화하는 것은 규제하지 않는다. 자본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면 '성'은 물론 인간의 육체를 부위별로, 장기별로 구분해서 팔 정도로 상품화를 추구한다. 성 상품화가 자본의 강제로 발생하는 것은 정치경제학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인간의 자발적 심리가 개입하고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을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면 평범한 노동자로 사는 것보다 더 빠르고 편하게 물질적 풍요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개인은 그것이 비록 체제의 압력이긴해도 그런 상황을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 노력한다. 즉 자발적 성 상품화를 하며, 성 상품화의 목적은 경제적 이익과 함께 대중에게 주목받고자 하는 인정 욕구가 발동한다. 인간이 상대적으로 주체적 동물임은 분명하고, 개인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진화이론에 근거하며, 사회적으로는 인정욕구에 기인한다. 별다른 재능이 없어도 인터넷의 동영상 스트리밍을 통해 자신의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보통의 노동자들이 노동을 해서 버는 재화보다 훨씬 큰 재화를 벌어들인다면, 그 유혹을 떨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여성의 성을 상품으로 바라보려는 남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남성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가로 재화를 교환한다는 정당한 거래라고 판단하면 성 상품화는 불법이 아닌데다 생산성이 높은 재화가 될 수 있다. 성 상품화에 자본이 개입하게 되면 개인의 재능을 결합한 형태로 성 상품화가 이뤄진다. 어린 여성을 여러 명 묶어 '아이돌'로 훈련시켜 시장에 내보낸다. 이때 '아이돌'은 자본의 상품이자 개인으로는 자신의 재능과 욕망을 발현하는 주체가 된다. 자본의 상품으로 '아이돌'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대중 앞에 서서 노래와 춤을 춰야 하며, 팬덤이 형성되면 팬을 위한 서비스를 감당해야 한다. 상품으로의 '아이돌'과 개인의 존재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존재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자신이 자본의 상품으로 재능과 성적 매력을 판매하고 있다고 자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대중의 인기를 얻어 '스타'가 되고, 사회적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짧은 시간에 많은 재화를 축적할 수 있다는 욕망과 욕구의 충족이 개인의 내적 갈등을 억누르게 된다. 하지만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상품으로의 '아이돌'은 상품성의 순도에 따라 판매가 지속되거나 중단된다. 이런 판단은 오로지 자본의 의지에 따른 것이며, 자본의 의지는 '이윤'이라는 척도로 결정된다. 상품으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아이돌'이라해도 대중 앞에 서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예전과 같은 재화를 가져갈 수 없게 된다.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개별적으로 성공하는 '아이돌'이 있지만 이런 경우는 예외적이다. 성 상품화는 자본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른 원칙에 의해 거래되며, 성을 상품으로 내놓은 개인의 존재가 더 이상 상품으로 가치가 사라지면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의 상품화를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 개인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고, 그것은 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성 상품화를 부추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누가 대통령과 여당을 공격하는가
    누가 대통령과 여당을 공격하는가 문재인대통령은 지지하지만 민주당은 제한적으로 지지한다. 진보정당을 지지하고 싶지만 한국에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없어서 역시 제한적으로 정의당을 지지한다. 정의당에서도 심상정 대표는 지지하지 않지만, 지역에 있는 정의당은 지지한다. 이런 전제로 대통령과 여당을 공격하는 것들의 정체를 들여다보면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자유당과 그 지지자. 이들을 보면, '다르다'가 아니라 '틀리다'가 어떤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자유당과 그 지지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학살자를 지지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앞선 권력자의 범죄행위를 어떻게든 합리화하려 한다. 시대가 그랬기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그래도 경제발전은 하지 않았냐'고 말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모든 통계는 독재자가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의 지표가 민주정부-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시기보다 낮고, 설령 지표가 높다해도 권력의 정책보다는 외부의 영향 때문인 것이 드러났다. 자유당과 그 지지자들이 현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공격하는 건 정책의 다름이나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 독재로 회귀해 극소수의 권력집단만이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 때문이다. 여기에 수준 낮고 멍청하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지역감정에 매몰되어 자유당을 지지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공부하지 않고, 사실을 알려 하지 않으며,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객관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적 활동에 몹시 게으르며, 역사를 올바르게 공부하지 않았거나, 역사와 사회의 발전을 시민의 눈으로 보지 않고, 지배자의 눈으로 보려한다. 이들은 도덕성, 윤리보다는 경제적 이익, 욕망에 더 충실하다. 이들에게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범죄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른바 권력형 비리를 저지르는 자들의 대부분이 독재권력의 대를 이은 정당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이런 이론을 증명한다. 자유당과 그 지지자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에게 '자유'는 '마음대로, 내키는대로, 꼴리는대로' 하는 것을 뜻한다. 즉, 자기의 욕망과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적 계약이라는 뜻이 뭔지,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것이 왜 그런지, 개인의 헌신과 노력, 정의와 평화, 공정과 자율과 같은 단어가 왜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유당과 그 지지자들이 부끄러움, 수치심, 염치, 도덕성, 윤리성이 거의 없거나 부족한 것은 그들이 탐욕과 욕망에만 충실할 뿐, 사회가 다양한 계층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움직인다는 기본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이나 조직은 다른 사람이나 조직을 짓밟고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려 하기 때문에, 이타적 심리를 억제하거나, 처음부터 그런 감정이 없는 쏘시오패스들이다. 하지만 진화론을 바탕으로 이런 탐욕스러운 집단이나 개인은 결국 도태하게 되어 있다. 생물학적 유전자는 물론이고, 사회적 유전자도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며, 협력과 협업을 하는 유전자가 더 오래 생존한다는 실험 결과가 이미 나와 있고, 실제 그런 조직이나 개인이 오래 살아남는다. 따라서 자유당과 그 지지자는 미성숙했던-야만적이고 폭력적인-근현대사에서 우월한 듯 보였지만,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생존 가능성은 낮아진다. 얼치기 진보정당과 그 지지자. 여기저기 '진보'를 붙이며 돌아다니는 글을 보면서, 코웃음만 난다. 극우는 아예 처음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기에 논외로 하지만, '진보'가 붙으면 그래도 우리 사회를 보다 '좋은 쪽'으로 발전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집단이나 개인이라 기대를 하게 되는데, 지금 한국사회에서 '진보'가 과연 있기는 한지 의문이다. 진보를 기치로 내건 정의당, 노동당, 민중당 따위의 소수 정당이 내놓는 논평이라는 걸 보면 대학생 동아리에서 하는 말보다 수준이 낮고, 논점 자체가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위 '진보'를 부르짖는 단체나 개인들의 수준이 보수야당인 민주당보다 낮다는 건, 한국에 진정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있다는 건 분명 잘못된 것이고, 옳지 않은 현실이지만, 한국사회를 자본의 착취에서 해방시키자는 말을 왜 못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회주의를 주장한다는 정당과 정파 조차도 현 대통령과 정부, 여당에 대한 인식 수준이 형편없이 비현실적이다. 적과 아군도 구분하지 못하거나, 정책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기준도 모호하면서 오로지 대통령과 여당을 공격하는 것이 자기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더 큰 문제는, 진보정당과 그 지지자는 현재의 정부, 여당에서 제시하는 각종 정책을 비난하기만 할 뿐, 그 정책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제를 만들고, 체제의 프레임을 바꿀 획기적이고 실현 가능한 정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보수정당인 민주당과 정부를 공격하는 건 적폐세력인 자유당과 결론에서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이들이 민중의 삶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은 현재의 구조 속에서 기득권의 일부를 나눠먹는 것이 목표일 뿐, 민중의 삶에 부응하는 정치, 제도와 프레임을 바꾸는 진보적 정책의 개발과 실현에 뜻을 두고 있지 않다는 걸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유당처럼 분명한 '공공의 적'은 아니므로 민주당은 연대와 협력을 통해 정치를 하겠지만, 사회의 진보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얼치기 노동운동 단체와 그 지지자. 노동조합의 운동은 기본적으로 조합(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조합주의에 매몰된 사람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기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지극히 어리석고 멍청한 인간이다. 빼앗길 것은 착취의 쇠사슬밖에 없다는 노동자가 자기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냥 노예로 사는 걸 받아들이고, 견디며 살겠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현실은 결코 나아질 수 없다. 경제가 발전한 공로의 대부분은 노동자의 피와 땀에 있지만, 그 열매는 대부분 자본가가 가져간다. 그럼에도 한국은 최빈국에서 70년만에 세계 10위의 부자 나라가 되었다. 그 시간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진 노동자는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도 비정규, 저임금 노동자는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는 당연히 자본주의를 끝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것은 역사가 부여한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개량주의는 노동자를 체제순응적 인간으로 만들고, 현실과 타협하는 나약한 존재로 만들며,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비하는 인간으로 살도록 만드는 가장 나쁜 상태다. 노동조합 간부들이 기업과 결탁해 자기 자식이나 친인척을 취업하도록 만드는 것은 노동운동을 사리사욕의 도구로 쓰는 범죄이자, 노동운동을 부패시킨 배신이며, 노동자의 이름을 더럽힌 악랄한 기만행위다. 이런 조합이나 노동자가 현 대통령과 여당을 비난하는 건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보고 짖는 것과 다름 없다. 노동조합은 현 정부의 노동정책을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라, 제도적 보완과 대안을 제시해야 하며, 무엇보다 노동조합, 노동운동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파렴치한 범죄행위부터 청소해야 하는 내부정화가 필요하다. 단위 노동조합에서는 조합원 교육도 거의 하지 않고, 노동자는 일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으며, 퇴근하면 몰려다니면서 술이나 퍼마시고, 스스로 공부하는 노동자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이 여론을 형성하고, 진보적 프레임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정규직 노동조합이 같은 노동자에게 갑질을 하는 걸 보면서, 더 이상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를 접은지 오래지만, 진보 운운하기 전에 기본 상식을 갖춘 인간이 먼져되어야 한다. 여당인 민주당은 보수정당이다. 이들은 현 체제를 유지하며 그 안에서 자신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다. 물론 그들은 재벌이나 대기업, 부르주아보다는 중산층과 서민의 삶을 생각하고 있긴 하다. 그럼에도 보수정당이 갖는 한계는 뚜렷하기에,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이나 개인은 민주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사회를 더 왼쪽으로 이끌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하지 않거나 못하는 건, 진보 세력의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보수 정당의 수준보다 낮은 상태에서 올바른 테제를 만들지 못하고,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보수정당에 끌려다니는 것이다. 나는 소위 '진보' 운운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위선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역시 극우들처럼, 자기 이익을 위해 '진보'의 껍데기를 쓰고 있을 뿐, 진심으로 사회진보를 바라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극우와 극좌는 분명 하나로 통하며 본질에서 같다. 이재오, 김문수 같은 자들은 한때 극좌였다가 지금은 극우다. 또 한때 진보쪽에 발을 딛고 있다가, 자기의 이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면 어느새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자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걸 보면, 민주당에서 진득하게 서민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제도를 만들고 있는 젊은 국회의원들이 훨씬 더 진보적이다. 한국에 올바른 진보세력이 없다는 건 퍽 안타깝다. 진보세력이 형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촛불시민의 행동에서 보듯, 시민 대부분은 오히려 진보적이고 정의롭다. 진보정당이나 노동조합은 촛불시민의 의식수준보다 낮다는 것이 이명박그네 정부를 통해 확인되었다. 이제 한국사회를 이끄는 강한 세력은 촛불시민이 분명하다. 시민은 정당도 아니고, 단체도 아니지만, 그 자체로 거대한 세력이며, 힘이다. 대통령도, 민주당도 촛불시민의 명령을 무겁게 생각하고 있다. 진보세력이 살아남을 길은 촛불시민과 함께 한발짝 앞서 나가는 것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송가인, 트로트의 부활과 스타 탄생
    송가인, 트로트의 부활과 스타 탄생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었다. 수많은 경선 프로그램이 있고, 우승자도 많지만, '내일은 미스 트롯' 우승자 송가인의 탄생은 남다르고 특별하다. 기존의 경연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은 '미스 트롯'은 한국가요에서도 이제 변방으로 밀려난 '트로트' 장르를 부르는 여성 가수를 뽑는 프로그램이어서 딱히 도드라지는 내용은 아니었다. 고등부, 대학부, 마미부, 걸그룹부, 현역부A, B, C그룹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 여성 트로트 가수들이 경연을 통해 최종 결승까지 진출하는데, 첫 방송 시청률은 5.9%였다. 종편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으로는 높은 편이었고, 이후 시청률이 빠르게 상승했다. 모두 10회 경연 방송에서 결승전은 16.6%로 종편 최고였으며, 공중파에서도 보기 어려울 정도의 시청률을 보여주었다. 이 경연에서 우승한 사람은 현역부에서 진출한 송가인이었다. 트로트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송가인'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적었을 것이다. 송가인은 '내일은 미스 트롯'에서 1위를 하며 하룻밤 사이에 스타로 등극했는데, 송가인과 '미스 트롯'은 변증법적으로 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 '미스 트롯' 제작진은 프로그램 기획을 통해 마당을 펼쳤다면, '미스 트롯'에 출연해 경연을 펼친 경쟁자들의 재능이 프로그램을 견인했다. 이 가운데 특히 송가인은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경연참가자들 사이에서 유독 송가인의 존재를 알아챈 시청자들은 그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에 관한 여러 문제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미스 트롯'은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과 비슷한 내용도 있고, 심사위원의 선정과 자질 문제, 출연자 여성의 성상품화 논란도 있었다. 이런 논란에서도 송가인의 가창력은 모두의 눈에 띄어 '미스 트롯'으로 선정되었고, 송가인은 무명 가수에서 일약 톱스타로 도약했다. '미스 트롯'은 진 송가인을 비롯해 선 정미애, 미 홍자가 탄생했고, 본선에 진출한 12명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가장 주목 받은 사람은 송가인이었다. '미스 트롯'의 진(1위)이라는 프리미엄과 어드밴티지가 있다고 해도, 송가인 열풍은 남다른 면이 있다. 그 남다른 면이 송가인 현상의 요인이고, '미스 트롯'보다 송가인 개인을 대중이 선호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탁월한 가창력 송가인은 어릴 때부터 판소리를 공부했다. 영화 '서편제'로도 알려졌지만, 판소리는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의 유파가 있는데 송가인은 서편제에 가까운 소리를 한다. 서편제의 특징은 계면조의 애절함과 화려하고 감칠만 나는 소리를 내는데, 이것은 나중에 송가인이 정통 트로트를 부르는데 중요한 자산이 된다. 송가인은 중학생 때 판소리를 시작해 광주예술고등학교, 중앙대학교에서 판소리를 전공했다. 명창 박금희(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9-4) 선생에게 수궁가와 춘향가를 전수받은 정통 판소리꾼이다. 판소리로 여러 대회에서 상을 받았으며 대상인 장관상울 연속 2회 받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판소리의 유망주, 미래의 명창 조은심(송가인의 본명)을 잃은 것은 애석하고 안타깝다. 이런 탄탄한 기본기와 실력을 지닌 채 송가인은 트로트 가수로 전향한다. 판소리에서 트로트로 전향하기 쉽지 않았을텐데, 계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송가인은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해 진도지역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연말 결선까지 진출해 우수상을 받는다. 이미 이때부터 송가인의 트로트는 가창력을 인정받았으며, 작곡가가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고, 앨범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트로트 가수로 전업했다고 한다. 이후 앨범을 내고 '전국노래자랑' 초대가수, KBS 가요무대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미스 트롯'에 출연하기 전까지 약 8년 동안 무명가수로 생활하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미스 트롯'은 송가인의 가창력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무대이자 기회였고, 송가인은 이 기회를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무명의 오랜 시간을 견뎌낸 집념의 승리였고,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존재 증명이기도 했다. '미스 트롯'에 출연한 많은 가수들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만, 관객은 본능적으로 송가인의 노래를 알아챘다. 오래 단련한 판소리 공부에서 나온 내공은 분명 달랐다. 송가인의 탁성은 고음으로 올라갈수록 맑고 깨끗한 소리로 변하는데, 저음과 고음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는 기교는 판소리에서 터득한 것이다. 송가인은 트로트 가수가 되는 과정에서 따로 교육을 받거나, 트로트 공부를 전문가에게 배우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연습했는데, 노래 하나를 배울 때는 너무 많이 불러서 구역질이 날 때까지 연습했다고 한다. 트로트의 특징은 흔히 '꺾기'라고, 목소리를 떨거나 음계를 급격하게 변화하는 기교를 부려야 하는데, 이 기교는 판소리 형식과도 닮은 점이 많아서 송가인에게 유리하다. 송가인의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판소리로 다져진 그의 실력은 판소리를 배우지 않은 가수들과 차별성을 보인다. 송가인이 '미스 트롯'으로 돋보이긴 했으나, 프로그램과 다른 참가자들을 압도하며, 자신의 카리스마를 드러낸 것은 오로지 그의 탁월한 가창력에 있다. 전라남도 진도 송가인의 고향이 진도라는 것, 판소리를 공부했다는 것은 오늘의 송가인을 만든 원천이자 밑거름이다. 가수 활동과 출신지역이 직접 관련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많은 예술가에게 고향은 그의 작품 활동과 예술성에 깊은 영감을 주고, 창작과 재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특히 송가인은 예술의 고향인 남도의 땅 진도에서 태어났고, 어머니가 진도씻김굿 전수조교였고, 그 자신 판소리를 공부했다. 남도-여기서는 전라남도를 뜻한다-가 예술의 고향이 된 것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양반(벼슬한 양반)이 남도 쪽으로 귀양을 온 것과 관련이 있다. 왕은 신하가 잘못하면 서울에서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는데, 거리가 멀수록 죄가 크다는 뜻이다. 북쪽 끝으로 올라가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이었고, 남쪽 끝에서도 섬으로 들어갈수록 유배는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유배지로 내려온 양반은 소일거리를 찾아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책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유배자들이 만든 예술작품은 '유배문학'으로도 남았고, 글과 그림 역시 남도에는 많이 남아 있다. 남도의 모든 정자에는 그때 유배왔던 양반들이 남긴 시를 담은 편액이 걸려 있고, 서민의 집에도 글과 그림이 한편 이상 걸려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곳이 남도다. 판소리는 민중의 노래지만, 여기에도 양반(지식인)의 지식이 개입한 흔적이 많다. 17세기 이후 판소리를 채집, 정리한 것은 판소리를 사랑한 양반 신재효였고, 판소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가사에도 양반들의 언어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판소리가 특히 남도에서 발흥한 것은 지리적 특성과 함께 유배온 양반의 개입, 세습무의 영향 등이 복합 작용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가장 크고 넓은 곡창지대는 남도였다. 조선인의 주식인 쌀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에다 강, 바다가 가까운 곳에 있어 해산물, 생선도 풍부했고, 기후가 따뜻해 발효음식이 자연스럽게 발달한 지역이다. 진도는 섬이어서 육지로 오가기가 불편하고,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남쪽 끝이어서 조선의 양반들 가운데 유배를 온 유명한 관료들이 많다. 무오사화의 이주, 홍언필, 기모사화의 김정, 김안로, 기사환국 김수항, 신축옥사 조태채, 을사사화 노수신은 무려 19년을 진도에서 유배를 살았는데, 그는 진도 주민을 가르쳐 진도를 개화한 시조라는 말을 듣는다. 유배 온 양반에게서 지식을 전수받은 지역민은 지식을 습득하면서 맹목에서 벗어나 말과 행동이 달라졌다. 지금도 남도 사람들의 언어에는 '문자'가 많은데, 이것은 조선 지식인의 흔적이다. 주로 어려운 한자를 섞어 쓰는 언어생활이 일상이며, 서화를 가깝게 두고 보는 것도 지식인 취향인데, 이들이 단지 양반 문화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 속에서 내재화하고 체화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에는 여러 지역에서 '아리랑'이 탄생했는데, 아리랑의 최초 기원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정선아리랑(아라리),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등이 있으나 진도아리랑이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일 정도로 진도는 음악의 발원지로도 유명하다. 송가인이 이런 진도에서 태어나 예술가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그가 판소리든, 트로트 가수든 성공할 재능을 물려 받은 것은 분명하고, 노력과 기회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판소리와 씻김굿 판소리를 공부한 송가인의 어머니 송순단은 진도 씻김굿 전수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송가인이 '미스 트롯'으로 스타가 되자, 그의 어머니가 만신(무당)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씻김굿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전통 예술이다. 씻김굿으로 일가를 이룬 송순단은 딸에게 판소리 배울 것을 권유하고, 재능이 있던 송가인은 판소리로 훌륭한 성과를 이룬다. 중학생 때부터 배운 판소리는 대학(중앙대학교)에서도 전공을 할 정도로 꾸준히 이어졌는데, 2010년, 송가인은 판소리를 포기하고 트로트 가수의 길로 들어선다. 판소리와 씻김굿은 전통예술이고, 오늘날 전통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매우 낮다. 전통예술은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그 보유자와 전승자를 지원하지만, 그들에 대한 지원의 수준이 낮아서 전통예술을 지켜나가기 어려운 현실이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의 인심이 바뀌면서 우리의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다. 서양문화가 중심이고, 대세인 우리 사회에서 전통예술가에 관한 관심과 지원이 부족하고, 이들은 생활을 위해 재능과 자부심을 포기할 위기에 놓이기도 한다. 송가인이 판소리를 포기하고 트로트 가수의 길로 접어든 것도 이런 사회의 무관심과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 때문 아닐까. 송가인은 현재 판소리를 포기한 것으로 보이지만, 트로트 가수로 성공하면서 오히려 판소리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판소리를 바탕으로 성공한 트로트 가수라는 이미지는 우리 전통음악의 높은 예술성을 입증하는 것이고, 나이 많은 세대에게는 익숙한 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청년 세대에게는 잘 모르던 우리 예술을 발견할 기회를 주었다. 송가인의 트로트에는 판소리의 기교와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그의 호소력 짙은 창법과 묵직하면서도 꽉 찬 발성은 단전에서 올라와 긴 호흡과 큰 폐활량을 통해 놀라운 표현력으로 발산한다. 씻김굿과 판소리는 음악에서 공통점이 많은 분야로, 본질에서는 같다. 씻김굿은 무속의 한 분야로, 세상을 떠난, 망자의 영혼을 달래주는 무가형식이지만, 그 굿을 보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 망자의 가족이 대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의 슬픔을 달래주고 위로해주는 역할을 한다. 판소리도 '판'을 벌려 부르는 소리로, 민중이 모일 만한 장소-주로 장터, 잔치마당, 마을의 정자 등-에서 창을 부르는 소리꾼과 북을 치는 고수 두 사람이 사설(아니리)과 창으로 대중을 휘어잡는다. 씻김굿도, 판소리도 즉흥성이 생명이어서, 공연을 하는 장소와 사람에 따라 가사와 내용을 적절하게 바꾼다. 민중의 바람과 함께 성장하는 예술이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민중의 사랑을 받는 전통예술이다. 송가인과 가족 '미스 트롯'을 통해 트로트 스타가 탄생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가수의 등장이고, 가수 한 사람의 성공을 집중해서 조명하게 마련이지만, 송가인의 경우는 가족 특히 부모가 돋보이면서 송가인의 인기는 물론 그의 가족 모두가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송가인이 스타로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던 것은 여느 가수나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송가인의 어머니가 진도 씻김굿 전수조교로 활동하고 있다는 이력도 신선했고, 부모님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스토리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송가인의 대중 이미지는 훨씬 친근하고 가까운 이웃으로 여기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오락, 연예 방송의 많은 부분은 연출된 이미지를 내보내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여러 방송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출연하는 송가인과 그의 가족을 보면, 연출해서 보여주는 장면과 실제 인성이 드러나는 장면을 알 수 있다. 송가인은 자기 매니저도 아닌 회사 매니저에게 먼저 다가가 치아 치료를 권하고, 자기가 치료비를 지불하기도 하고, 송가인 팀은 행사가 끝나면 모두 회식을 하고 헤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화합을 중요하게 여긴다. 송가인도 사람들과 밥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는 함께 일하는 사람을 '식구'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런 송가인의 태도는 오랜 무명생활에서 겪었던 설움을 통해 배운 것도 있지만, 그의 인성이 그의 부모에게서 온 것임을 가족을 촬영한 영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송가인의 부모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송가인이 '미스 트롯' 진이 되고, 송가인이 주목 받으면서 그의 부모가 사는 진도에서의 생활을 세미 다큐로 방송하면서인데, 어머니는 진도 씻김굿 전수조교로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아버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평범한 시골 아저씨를 비추는 순간, 평범했던 시골 아저씨는 여느 개그맨보다 재미있는 캐릭터로 시청자를 휘어잡았다. 진도에서 농사를 짓는 60대 노인이지만, 그의 외모는 출중했고,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혼자서도 오디오, 비디오를 꽉 채우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송가인의 재능이 어머니 쪽에서 받았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재능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청년이었을 때, 기차를 치며 노래하면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아버지는 지금도 혼자 농사일을 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기량이 남다르다. 송가인의 본명은 조은심인데, 아버지 쪽 친척들 가운데 판소리를 하는 사람, 무형문화재, 국악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이런 걸 보면, 엄마의 재능과 함께 아버지 쪽 재능도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송가인 부모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하루 1,000명이나 될 정도로 송가인의 인기가 치솟고 있을 때, 송가인 부모는 막내 송가인이 성공하고, 인기를 얻는 것이 모두 팬들의 덕분이라고 여기며, 기꺼이 번거로움과 수고를 감수한다. 진도까지 먼 길을 온 팬을 위해 음료수, 옥수수, 감자 등을 대접하는데, 유명한 가수의 집을 찾는 팬이 이렇게 많은 경우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송가인 부모의 일상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시청자가 알게 되는 사실은, 송가인 부모의 넉넉한 인심은 물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의 매력과 평범한 시골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어머니는 뛰어난 음식 솜씨로 가족과 이웃, 손님을 대접하고, 농사부터 온갖 집안일까지 '조가이버'라는 별명을 듣는 아버지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농부의 모습이다. 부부의 모습은 한국의 전통적 가정과 생활의 평균을 보는 듯하다. 우리 부모 세대는 지금도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으며, 산업사회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가족과 이웃, 마을을 아우르는 공동체가 여전히 시골에서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한국은 지금 산업사회와 전통사회가 공존하는 마지막 단계에 있으며, 우리의 부모 세대가 가족과 이웃, 마을의 공동체를 보여주는 마지막 세대이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송가인 부모를 통해 유쾌하고 즐겁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송가인의 인기가 높아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송가인의 개성과 태도 '미스 트롯' 진으로 오랜 무명의 시간에서 탈출해 일약 스타가 된 송가인은 무명시절의 서러움을 이야기할 때, 담담하지만 마음 아픈 순간을 담담하게 표현한다. 지금도 무명 가수들이 지방의 행사를 다니면서, 언젠가 스타가 될 날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스 트롯'에 출연한 많은 가수들도 진이 되었다면 보여지고, 드러나는 모습이 예전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송가인은 특유의 개성이 돋보인다. 그는 광주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중앙대학교를 다니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는데, 지금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의도적으로 표준말을 쓰려고 애쓰지 않는 것도 보기 좋은데, 서울과 서울 말씨에 대한 열등감이 없음을 알 수 있으며, 한편으로 자신의 고향말인 전라도 사투리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한때 전라도 사투리는 방송에서 천대당하는 지방말이었으며, 권력자들의 지역차별의 희생양이 남도지역이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 극우, 패륜집단에서는 전라도 지역말을 비웃고 혐오하지만, 송가인이 자연스럽게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서 시청자는 전라도 말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송가인은 자신이 무명에서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된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있다. 자신의 위치가 신데렐라처럼 주목받는 존재가 된 것도 알지만, 자신의 성공이 대중의 사랑과 응원 덕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송가인의 팬덤은 아이돌보다 더 단단하고 조직적이다. 아무래도 트로트 팬층은 중년 세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팬들의 선물도 굴비, 낙지, 홍삼 같은 건강음식이 주류를 이루며,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팬들이 많아 경제적 지원에서도 다른 가수들을 압도한다. 이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송가인은 외모와 태도에서 호감을 얻는 요소가 많다. 외모를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겠지만, 송가인의 외모는 그가 스타로 발돋움하면서 돋보이고 있다. 둥그런 얼굴에 늘 웃는 눈, 복스러운 코는 어른들이 보기에 복 많은 맏며느리상이다. 송가인의 겸손한 태도는 그가 대중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겸손한 태도를 몸에 익혀 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스타가 된 이후에도 무명 시절에 돈을 벌기 위해 했던 비녀 만드는 작업을 한동안 이어갔다. 그가 직접 재료를 구입해 비녀 완성품을 만들어 발송했다. 송가인은 자신의 능력으로 스타가 되었지만, 자만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는 조금 보수적이며, 무대에서도 노출이 있는 의상을 입지 않고, 단정하고, 단아한 무대의상을 선택하며, 어르신을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럽다. 송가인은 무명으로 활동하던 약 7-8년의 시기에 작은 행사장 무대에 오르거나 지방 방송국의 리포터로 활동하거나 부업을 하며 생활을 꾸렸다. 무명의 설움을 겪었기에 처음부터 꽃길을 걸었던 스타와는 다른 마음가짐이었을테고, 또 그만큼의 시간을 단련했기에 어느 날 갑자기 스타가 되었어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있다. 지금의 송가인이 있기까지 부모의 뒷바라지가 지극정성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가족의 믿음과 응원이 지금의 송가인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트로트는 나이 든 사람들이나 부르는 노래로 인식되고, 구시대의 유물 쯤으로 여겨지는 장르지만, 주현미, 장윤정, 홍진영 등이 트로트 가수로 이름을 널리 알린 이후, 이렇게 빠른 속도로, 넓은 팬층을 모으고 있는 여성트로트 가수는 송가인이 최초다. 또한 이전의 트로트 가수와는 다르게, 송가인의 팬덤은 송가인의 압도적이고 탁월한 가창력과 인성이 결합해 더욱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송가인이 출연한 프로그램은 거의 다 찾아봤고, 송가인의 부모님이 출연한 프로그램도 거의 다 찾아 봤다. 송가인의 가창력은 놀라웠고, 구수한 사투리는 정겨웠고, 부모님의 따뜻하고 다정한 모습은 부러웠고, 진도는 아름다웠다. 송가인 열풍이 언제까지 지속할지 알 수 없지만, 노래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는 대중이 존재하고, 훌륭한 가수가 등장해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한동안 대중의 즐거움은 유지될 걸로 보인다. 다만, 송가인이 스타로 탄생하면서 급격하게 소비되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인기가 치솟으면서 부르는 곳이 많으니 대중가수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초기의 관심과 열풍이 지나치면 식상함으로 연결될 수 있는 우려가 있다. 스타 탄생, 인기 상승, 인기 유지, 인기 하락으로 이어지는 대중가수의 운명은 송가인도 비켜가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대중을 상대로 활동하는 대중 예술인의 숙명이기도 하다. 다만, 그 시간을 얼마나 늦출 수 있는가, 인기가 오래 유지되는가는 대중예술인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달려 있다. 새로운 노래를 발표하고, 그 노래가 널리 알려져야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 송가인의 탁월한 가창력이 그를 든든하게 잡아주리라 믿으면서, 송가인을 둘러싼 음악 환경이 그의 운명을 결정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송가인이 주체적으로 활동하고픈 열망과는 또 다른 것으로, 자신이 음악을 작사, 작곡하지 않는 한, 다른 작곡가의 힘을 빌어야 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고, 지속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송가인은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며, 이 시대에 대중이 원하는 가수로 등장했다. 그의 미래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송가인과 그의 팬들이 행복한 것은 틀림없다. 이 시간이 오래도록 지속하길 바란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주택문제와 결혼, 출산을 생각하며
    주택문제와 결혼, 출산을 생각하며 한국은 신자유주의 폭탄을 맞은 자본주의 국가다. 그 전에는 국가주도 경제성장 즉, 군부독재에 의한 일방적 경제정책으로 수출 위주의 정책을 설정했고, 그 기저에는 한국이 분단국가이자 미국의 주변국가로, 제국주의의 경제부문에 기여하는 제3세계 국가의 하나였으며, 저임금 노동력으로 원자재 수출, 제품임가공, 조립 같은 단순노동으로 시작해 점자 경공업, 중공업으로 이행하는 경제 단계를 거쳐왔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군부독재권력과 결탁해 특혜를 받으며 성장했다. 자본은 금융과 노동 양쪽에서 엄청난 특혜를 받았으며, 반대로 노동자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당했다. 물적 토대가 취약했던 한국의 경제는 노동자를 착취해 경제를 일으켰으나, 그 열매는 오로지 자본과 권력이 가져갔고, 노동자, 서민에게는 극히 적은 몫이 주어졌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현재 중국과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 여러나라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산업자본이 취약한 저개발국가는 값싼 노동력이 최대 무기였고, 국가(정부)는 폭력(독재국가의 법은 그 자체가 폭력이며, 물리적 폭력도 포함한다)으로 노동자에게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한국의 경제가 활성화하고, 소득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후 꾸준히 지속되었지만, 특히 전두환 군부독재시절이던 1980년대 이후 양적,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물론 전두환 정부의 능력이 아닌, 당시 세계 경제가 이례 없을 정도로 활황이었다는 점, 한국사람의 특징인 높은 교육열의 결과로 생성된 고학력자들이 베이비붐 세대로 사회에 진출하면서 단순, 저임금 노동에서 지식, 고임금 노동으로 이행하기 시작한 경제구조의 변화, 군부독재에 저항하면서 높아진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등이 한국 경제가 발전하게 된 여러 요소들이다. 짧은 기간에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이런 압축성장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자본'은 이윤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체제여서 그 자체는 감정이 없지만, 한국은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을 듣고 있다. 자본주의 자체가 착취에 기반한 체제이므로 형식이야 어떻든 자본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체제지만, 북유럽 국가들처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사회주의 정책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도입하느냐에 따라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착취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불평등 역시 착취만큼이나 심각한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이 높아지면서 전체적인 삶의 질은 높아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 지표는 국민총생산, 국민1인당 소득 지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한국은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물론 이 지표는 상당히 과장, 왜곡된 숫자라고 생각한다. 1억원을 버는 사람과 1천만원을 버는 사람의 소득을 통계내면 5천5백만원이 된다. 통계 숫자는 한국인 평균 소득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오히려 불평등 구조를 감추는 장치이기도 하다. 불평등 구조는 어느 체제든 존재한다. 공산주의 체제라 해도 완벽한 평등은 있을 수 없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듯, 하는 일과 역할, 능력에 따라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차별의 정도가 사회구성원이 상식으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적 합의에 따른 차별의 범주여야 한다. 불평등 구조는 경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소득의 차별 역시 사회적 합의에 따라 제한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의 주장은, 이윤추구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본'의 이윤추구에 방해가 되는 경쟁업체나 제품에 대해 규제를 해야 한다거나, 노동조합의 파업에 대해서는 범죄행위로 규정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 이것은 '자본'이 윤리나 사회적 합의, 법과 같은 질서보다는 이윤추구가 최고의 목적이자 가치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많이 추구하는 것이 '자본'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올바른 정부라면 미쳐 날뛰는 짐승을 길들이는 것처럼, '자본'의 폭력을 제재하고, 사회의 기본윤리 안에 어울리도록 길들이며, 소수의 이익이 아닌, 집단-여기서는 국가-구성원의 공동 이익에 기여하도록 해야 하지만, '자본'은 태생적으로 국경이 없기 때문에, 폭주하는 자본을 통제하기 어렵다. 경제의 불평등구조는 심각한 빈익빈 부익부를 발생하고, 집단 내부에서 긴장과 갈등을 증폭한다. 인구의 10%에 불과한 자본가와 부르주아가 전체 부의 80%를 독점하는 사회가 건강하다고 말하는 자는 자본의 착취, 불평등을 옹호하는 것이고, 그들은 불평등 구조의 아래쪽에 있는 80% 사람들과는 적이다. 마르크스는 국가의 정부를 일컬어 '자본가위원회'라고 불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정부)는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기구이며, 그런 정부를 구성하는 인물들 역시 자본가, 부르주아들이어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자본가가 대통령이 되자 곧바로 토목건설에 22조 원을 투입한 것은 대표적 사례다. 자본가가 자기의 이윤추구를 위해 골프장을 지을 때도 정부(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개인의 땅을 강제수용하는데, 골프장 건설이 '공익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전통적 의미에서 '자본가'는 노동력을 착취해 이윤을 추구하는 자를 말하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본은 착취의 형태를 다양하게 변주한다. 공장에서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고 상품을 생산해 판매하는 과정에서 이윤이 발생하는 것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금융자본, 부동산자본은 똑같이 이윤을 추구해도 방식이 다르다. 또한 '자본가'가 아니어도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는데, 연예인, 스포츠스타, 학원강사, 방송인(유튜버 포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판매해 부를 축적한 경우여서, 노동자를 착취해 부를 축적한 고전적 자본가와는 다른 종류의 부르주아들이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사례이기도 한 이들은, 자유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번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개인의 능력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재능 있는 사람을 대우하는 시스템에서 이미 심각한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단지 경쟁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 모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려하거나 모르기 때문에 대체로 자유 경쟁 논리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에서 불평등구조를 드러내는 핵심은 아파트다. 부동산은 불패라는 속설처럼, 70년대 이후 부동산 가격은 임금상승률보다 몇십 배부터 몇천 배까지 뛰었다. 땅이나 아파트를 소유하면, 노동으로 버는 돈보다 훨씬 큰 돈을 벌게 되면서, 노동이 천시당하고 투기가 당연한 기술로 인정받으며 사회가 부패하게 된다. 불로소득에 대한 잉여자산을 세금으로 정당하게 환수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동산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아파트 분양권을 매입하거나, 은행 대출을 받아 힘겨운 이자를 내가면서 아파트를 소유한다. 그 이유는 오로지 아파트 가격이 상승해서 막대한 차익이 발생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상을 심어주고, 실제로 부동산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드물게 제공하는 것도 자본의 논리다. 아파트를 소유하는 과정은 치열한 경쟁을 통하거나, 막대한 이자를 감당할 여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모두 소득 상승을 바라는 서민들 끼리의 경쟁이며, 자본은 금융을 통해, 부동산 건설을 통해 이윤을 집적한다. 한국은 독특하게 선분양 후입주의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데, 자본이 취약하던 건설사를 위해 아파트 매입자들이 공사 전에 미리 주택가격의 일부 또는 전부를 미리 납부해 왔던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지만, 건설자본에게는 이윤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제도이므로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아파트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해마다 추정 재산이 늘어나는 시스템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익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 자신의 아파트를 팔고 다른 아파트를 매입할 때는 의미가 사라진다. 차익을 수익으로 환원하려면 자신의 아파트에서 발생한 차익보다 값싼 아파트로 옮겨야 하는데, 비슷한 지역에서 그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으므로 평수를 줄이거나 아파트 가격이 낮은 곳으로 옮겨야 한다. 결국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가격이 오르는 건 부동산 가격이 낮은 시골로 옮기거나, '주택연금' 같은 정부의 복지서비스를 이용할 때 도움이 될 뿐, 비슷한 아파트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파트 가격 상승은 실질 이익이 거의 없다. 아파트 가격의 상승이나 폭등은 아파트를 매입하려는 사람에게도 부담이지만, 전세나 월세를 사는 세입자에게는 더 큰 부담이 된다. 아파트 매입자는 은행 대출을 받아 주인이 되고, 전세입자도 은행 대출을 받아야 아파트 전세라도 얻을 수 있게 된다. 가게부채에서 금융비용은 수입 대비 지출에서 큰몫을 차지하고, 이것은 삶의 질이 낮아지는 원인이 된다. 부동산의 벽이 높아지면서, 사회에 진입하는 청년세대의 좌절과 절망이 커진다. 청년취업 문제는 청년세대의 결혼율, 출산율이 모두 낮아지는 원인이며, 이 원인의 핵심은 부동산 정책에 있다. 청년의 주거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완전히는 아니어도 청년의 취업, 결혼, 출산 문제가 많은 부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주택정책의 대안을 제시한다. 청년을 위한 집단거주 주택을 마련하자 청년세대는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게 된다. 기성세대가 청년세대를 착취하면서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을 듣는 것처럼 비참한 상황은 없다. 사실 청년세대의 문제는 세대간 갈등이나 인구비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즉 자본의 착취에 있다는 걸 확인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최저임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청년세대는 자신들이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려야 함에도,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려 하지 않고, 청년세대는 기성세대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는 듯 하다. 청년세대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규모 집단거주 주택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장기임대 아파트를 많이 지어 청년에게 임대하고, 청년이 결혼하면 이 임대아파트를 장기임대로 전환해서 주거문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당장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다가구, 빌라, 소규모 아파트, 단독주택 등을 청년 주거주택으로 개발해 싼 임대료로 제공하는 것이다. 일부 지자체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정책이지만,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청년의 주거문제는 나아지지 않고 있다. 요즘은 공유주택도 있고, 공유오피스도 있어서 청년들이 자신의 주거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부(지자체)가 정책으로 펼치는 것만큼의 효과를 거두기는 어렵다. 신혼(결혼 10년까지)부부를 위한 장기임대 아파트를 제공하자 싱가폴은 신혼부부에게 주택(아파트)를 우선 제공한다. 결혼하면 집(아파트)이 생기기 때문에 싱가폴의 결혼 연령은 20대 초중반이다. 싱가폴의 주택개발청은 신혼부부에게 특히 집값의 80% 이상을 장기저리로 대출해 주고, 임대아파트를 우선 분양한다. 싱가폴의 주택정책을 보면, '생애 최초로 집 마련하는 부부', '첫 자녀 출산 예정이거나 16세 이하 자녀가 있는 부부', '부모 거주 지역 근처에 분양받는 부부'에게는 신규 아파트 분양에서 우선권을 준다. 싱가폴은 임대아파트를 꾸준히 짓고 있으며, 장기저리 융자는 25년 상환이어서 부담이 적다. 한국에서도 대도시를 중심으로 정부와 자자체가 직접 장기임대 아파트를 지어서 분양하는 정책이 매우 필요하다. 궁극으로는 아파트 건설이 민간부문이 아닌, 공공부문의 임대아파트로 이행해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외국에서 성공한 정책은 도입 검토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 싱가폴의 청년주택 정책처럼, 청년에게 실질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이 정부(지자체)의 의무이기도 하다. 공공임대 아파트는 대도시 외곽에 지어 분양한다. 토지 가격과 청년 세대가 주로 대도시에서 일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도시 외곽일 수밖에 없다. 공공임대 아파트를 건설하면 자연스럽게 그 주위로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등이 생기고, 음식점 등 상권이 형성된다. 전월세 부담이 적어지고, 주거가 안정되면서 청년 세대는 문화와 오락에 비용을 투자할 수 있고, 삶의 질이 높아진다.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하자 지금도 공교육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지만, 어린이집, 유아원, 유치원,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다. 태어나서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교육을 무상교육으로 지원하는 것은 청년세대와 그 이후 세대를 위한 투자다. 특히 인구절벽이니 인구감소니 하면서 인구가 줄어든다고 걱정하는 기성세대에게 이 정도 무상교육 투자는 당연하다. 무상교육이나 공공임대 아파트 정책을 펼치면 정부가 무슨 돈이 많아서 전부 공짜로 해주느냐고 하겠지만, 정부는 세금 정책을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펼쳐 세금을 내지 않는 기업, 전문인 등 고소득자에 대한 부문만 확실하게 해도 세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의료보험, 연금 등을 위해 국민 모두에게 세금을 더 걷는다면 반발도 적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 의료, 연금이다. 이것을 정부가 책임진다면 사교육, 사보험, 사연금으로 들어가는 개인의 지출이 줄어들고 오히려 가게지출이 줄어들게 된다. 의료보험을 강화, 확대하자 비단 청년세대 뿐아니라 국민 모두는 의료보험과 연금에서 고통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 연금은 기본소득제로 대체할 수 있으니 정부, 시민단체 등의 협의를 통해 구체적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의료보험은 정부가 국민의 건강을 책임진다는 기본 조건을 만족시키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한국의 의료보험은 지금도 훌륭한 편이다.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의료보험이 마땅치 않을 것이지만, 그들도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가 할 수 없는, 부족한 부분을 사회주의 정책에서 가져온 것들이 많다. 이것을 자본주의 정부는 '복지정책'이라고 말한다. 정부의 공공의료보험이 없다면, 미국처럼 사보험에 의존해야 하고, 사보험은 개인의 건강보다는 보험회사의 이윤추구가 목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건강권이 존중받을 수 없는 환경이 된다. 청년세대의 결혼, 육아 과정에서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교육, 의료가 중요하다. 세금은 개별적으로 세세하게 구분하고, 복지는 보편으로 실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본소득을 실시하자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가를 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청년 세대는 물론, 국민 모두에게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당연히 국민세금으로 지급하는 복지제도의 하나이며, 자본주의의 맹점을 보완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복지정책이다. 한 국가의 국민은 누구나 '주민세'를 내는데, 이것은 한 나라의 국민임을 인정하는 세금이기도 하다. 기본소득은 극렬한 소득불균형을 줄이고,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다. 한편으로 이런 정책이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고 온존하도록 만드는 당의정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행되고 있는 모든 복지정책은 다수의 노동자, 농민, 서민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권리들이며, 자본(가)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시민의 요구를 듣거나, 새로운 복지정책을 내놓아야 했다. 기본소득 역시 위기에 몰린 자본(가)이 하나의 대안으로 마련한 정책이자, 그동안 끈질기게 복지의 확대를 요구한 서민의 권리가 제도화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시행은 변화하는 시대가 요구하는 필연이며, 자본주의는 계속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변화할 것이다. 주5일 노동은 주4일 노동으로 바뀌고, 복지정책은 확대할 것이며, 기술과 도구의 발달로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단순노동은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생길 것이다. 기본소득은 자본의 발톱이 아주 조금 무뎌지는 것을 의미하며, 시민의 승리이기도 하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20대 국회의원 300명 분석
    우리가 진짜 알아야 할 내용 -20대 국회의원 300명 분석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직접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물리적,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정보통신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많는 말일지 모르지만, 이제는 폐기되어야 한다. 오히려 지금은 직접 민주주의가 훨씬 구현하기 쉽고, 정확하고 빠른 방식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수렴하는 세상에서, 유독 오프라인 선거라는 방식을 통해 시민의 대리자를 선택할 이유가 있을까. '국회의원'이라는 국민의 대리자도 필요 없으며, 곧바로 모든 국민이 직접 자기 의사를 온라인을 통해 밝힐 수 있다. 이제, 현재 국회의원 성분을 보면서 이들의 구성과 성분이 국민의 민의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국회의원들이 악랄하게 행동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국민의 뜻을 전혀 받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국회의원을 뽑은 국민이 멍청한 것이고, 국민이 멍청하니까 노예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국회를 해산하고, 국민이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입법 활동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려우면 21대 국회의원은 적어도 민의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사람을 선출해야 할 것이다. 국회의원 평균 나이 - 55.5세 70대 - 5명 60대 - 81명 50대 - 161명 40대 - 50명 30대 - 2명 20대 - 1명 한국 인구가 노령화되고 있는 것은 현실이지만, 위의 분포는 매우 심각하게 인구 비례를 왜곡하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청년 국회의원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런 모순은 어디에서 생겼을까. 청년들이 투표하지 않기 때문이고, 자신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을 이따위로 뽑아놓고, 청년실업이며 청년취업, 청년창업, 청년복지 정책이 없다고 징징거리는 건, 욕이나 처먹어야 한다는 걸 좀 알아야 한다. 나는 늘 주장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70세부터는 퇴직해야 한다. 70세가 넘어서도 어떤 일이든 하려는 건, 청년 세대의 일자리를 뺐는 것이고, 그건 탐욕이다. 국회의원 다선 순위 6선 - 7명 5선 - 17명 4선 - 34명 3선 - 46명 2선 - 71명 국민의 투표로 선출하는 자리인데, 왜 국회의원만 제한이 없을까. 대통령도 단 한 번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국회의원은 최대 3선까지만 하는 법을 만들어 제한해야 한다. 국회의원을 3선 이상하면 고인물이 썩는 것처럼, 국회 정치가 오염되기 마련이다. 항상 새로운 피를 공급해야 하며, 가능한 젊은 사람을 영입해야 한다. 국회의원 평균 재산 평균 재산 - 41역 400만원 최고, 최저 제외한 평균 재산 - 26억 7800만원 국회의원 재산을 보라. 지금 26억원을 가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부자들을 뽑아놓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책을 만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멍청한 짓인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법을 만들려면, 우리처럼 서민들, 돈 없고, 전세나 월세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어 법을 만들어야 한다. 아니면 조국 법무부장관처럼, 강남 좌파라도 정의롭고 공평한 법정신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매우 매우 희귀한 경우이므로, 계급의 이해를 관철하려면, 당연히 자신과 같은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거울을 좀 봐라. 국회의원 전공 분야 법학 전공 - 62명 행정학 전공 - 31명 정치외교 전공 - 31명 경제학 전공 - 22명 경영학 전공 - 19명 무역학 전공 - 6명 토목공학 전공 - 6명 물리학 전공 - 5명 건축학 전공 - 3명 기계공학 전공 - 2명 전자공학 전공 - 2명 화학공학 전공 - 1명 환경공학 전공 - 1명 천문학 전공 - 1명 전자계산 전공 - 1명 사회확과 전공 - 11명 국문학과 전공 - 11명 철학 전공 - 8명 사학 전공 - 6명 독문학 전공 - 5명 불문학 전공 - 4명 영문학 전공 - 2명 역사교육 전공 - 3명 영어교육 전공 - 2명 체육교육 전공 - 2명 수학교육 전공 - 2명 국회의원이 반드시 법이나 행정, 정치, 외교를 전공해야 하는 건 아니다. 국회의원이 하는 일은 국민의 뜻을 왜곡하지 않고 반영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지역구 주민이 어떤 정책을 원하는가 귀기울여 듣고, 그것을 잘 다듬어 법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국회의원을 상전으로 모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국회의원이 주민을 상전으로 모셔야 하는데, 지금 한국에서는 국회의원이 온갖 특혜를 누리며 주민을 무시하고, 깔보고 있다. 대학 진학률이 계속 낮아지고 있다. 70% 아래로 낮아질 것이며, 지금도 대학을 가지 않는 사람이 30% 정도다. 그렇다면, 대학을 가지 않고도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고졸, 중졸, 초졸, 무학의 국회의원들도 나와야 하지 않은가. 너무 당연한 말이 아니냐 말이다. 국회의원이 대단한 직업이 아니라, 우리 이웃집 사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고, 정책을 만들고, 우리 사회를 편하게 만드는 것이 올바른 정치 아니겠는가. 국회의원 직업(중복 있음) 정치인 - 220명(73.3%) 교육자 - 49명(대학교수 포함) 변호사 - 16명 법조인 - 49명 경찰 - 8명 군인 - 5명 의료 - 10명 기획재정부 - 9명 고위공무원 - 4명 과학정보통신 - 7명 문화예술체육 - 4명 언론인 - 12명 노동 - 9명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월급을 받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가 1천만 명을 넘는다. 이들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은 불과 9명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을 국회의원으로 앉혀 놓고, 자기들끼리의 리그를 즐기고 누리도록 하고 있으니, 정작 서민들의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투표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반영할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 부자를 위한 정당의 국회의원을 선택하는 건, 스스로 멍청한 바보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는 약 30%의 멍청하고 덜떨어진 한심한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이 한국사회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청년을 비롯한 70%의 다수 국민이 자기 선택을 하지 않거나,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면, 그 소수의 30%가 원하는 미치광이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가 날마다 보고 있는 현상이다. 대통령 한 명만 바뀌었을 뿐, 세상은 수구반동매국집단의 발호로 나라가 망가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촛불집회와 매국집회의 차이
    촛불집회와 매국집회의 차이 지난 9월 28일, 서초동 검찰청 앞에서 열린 제7차 촛불집회에 100만 명의 시민이 모인 사건이 벌어졌고, 위대한 민주주의 집회를 조직한 경험이 많은-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얼마나 신나게 했던가-시민들은 역시 매우 훌륭한 집회 문화를 보여주었다. 이 집회를 보고 수구반동 매국노들은 부러움, 시기, 질투의 감정이 뒤섞인 위기의식과 패배감으로 이 국면을 만회하려는 회심의 집회를 조직하게 된다. 그들-패륜, 수구, 반동, 매국노-은 정당의 지역조직과 교회의 신도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했지만, 10월 3일, 광화문 광장에 모인 그들의 숫자는 서초동 촛불시민보다 적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폭력을 휘둘렀다. 수구, 반동, 패륜 집단의 폭력 시위를 본 촛불시민은 다시 10월 5일, 제8차 촛불집회를 열었고, 제7차보다 두 배나 많은 시민이 모여 더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집회와 시위를 통한 경제활성화를 입증하듯, 서초동 일대의 편의점은 물론, 토요일에는 아예 문을 열지 않는 음식점들도 모두 문을 열고 장사해서 돈을 벌었다. 식당과 술집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건물주에게 월세를 내는 사람들이고, 그들도-비록 강남에서 음식점이나 술집을 한다해도-약자들이다. 편의점, 음식점, 술집의 주인들이 설령 보수적 성향이라 해도, 이번 기회를 통해, 촛불시민이 주장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이고,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촛불시민의 높은 시민의식과 태도를 높게 평가할 것이다. 반면 광화문에 모였던 매국 집단의 시위는 폭력이 난무하고, 거짓말, 악의적 왜곡, 증오와 악의가 뿜어져 나오는 부정적이고 악랄한 집회였다. 그곳에서 발언한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혐오하고, 폭력을 조장하며, 자기의 이익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과 정부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매국 집단의 지도부가 그런 것처럼,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거의 대부분 노인들-은 일당 2만원부터 7만원까지 받고 동원된 사람들이 다수였고-자발적으로 참석한 사람도 드물게 있었지만-이들의 얼굴은 불만과 피로로 일그러져 있었다. 촛불집회와 매국집회의 가장 큰 차이는 평화와 폭력이다. 촛불집회는 축제처럼 즐겁고, 재미있고, 흥겹게 진행된 반면, 매국집회는 증오와 폭력, 일그러진 분노로 진행되었다. 촛불집회의 핵심도 충분히 분노할 내용이지만, 촛불시민은 결코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인내와 자제를 보여주며 성숙한 민주주의 시민으로 행동했다. 반면 매국집회는 정당하지 않은 주장, 억지 주장, 악의적으로 왜곡한 내용을 통해 대중을 선동했으며, 그들은 그곳에 동원된 사람들을 동등한 시민이 아닌, 한번 쓰고 버리는 도구로 여겼다. 촛불집회가 끝난 자리는 작은 쓰레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깨끗했지만, 매국집회의 끝에는 온갖 쓰레기가 어지럽게 흩날리고, 주변의 편의점, 음식점, 술집, 상가에서는 매국집회 참가자들이 보여준 불쾌한 모습 때문에 진저리를 쳤다. 집회의 의미를 숫자로 비교하려는 어리석고 멍청하며 유치한 매국집단의 의도를 알고 있지만, 촛불시민은 집회 참석인원이든, 집회의 성격이든, 집회의 내용에서든 매국집회를 압도하고 있다. 이것은 그 집회의 의미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두 집회를 보도하는 언론-심지어 수구, 보수언론까지도-의 태도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정치검찰을 개혁하고, 사법개혁을 통해 사법기관, 권력기관이 시민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중대한 변화의 변곡점에 있다. 촛불시민은 검찰과 법원에 명령하고 있다. 공수처를 비롯한 검찰개혁에 순순히 무릎 꿇고 받아들이라는 것이고, 끝까지 권력을 조직의 이익을 위해 휘두를 때, 그 최후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상징적 인물이 바로 문재인대통령과 조 국 법무부장관이다. 촛불시민은 문재인대통령과 조 국 법무부장관을 보호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검찰개혁, 사법개혁을 보위하며, 이 개혁이 결국 시민의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촛불시민의 의지에 거스르는 매국집단의 집회는 타도되어야 하며, 그것을 기획하고 실행한 매국집회 지도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끝까지, 촛불시민은 목적을 이룰 때까지 흥겹고, 즐겁고, 재미있게 촛불집회를 이끌 것이고, 우리가 이미 경험했던 2002년 월드컵 응원, 광우병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를 통해 스스로 체득한 성숙한 민주주의의 집회를 통해 우리가 바라는 검찰개혁, 사법개혁, 민주주의의 완성을 이룰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19금 선녀와 나무꾼
    19금 선녀와 나무꾼 6년을 기다렸다. 그 긴 시간동안 나는 산속 오두막에 갇혀 나무꾼 새끼에게 끊임없이 성폭행을 당했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개새끼. 나는 줄곧 탈출할 기회를 노렸고, 셋째 아이 돐이 지나자 나무꾼 새끼가 나를 감시하는 눈길이 조금 약해졌다. 이제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 전에는 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방문을 걸어잠구고 나무를 하러 갔다 왔고, 집에 있을 때는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나를 감시했다. 6년 전, 나는 천상에서 친구들과 함께 잠깐 땅으로 나들이를 했다. 모두 다섯 명이었는데, 흰색과 분홍색이 섞인 천사의 날개옷을 화려하게 펼치고, 구름을 타고 내려온 우리는, 인간의 발길이 없는 깊은 계곡에서 옷을 모두 벗고 목욕을 했다. 천상에서 인간이 사는 땅으로 내려올 기회는 흔치 않았다. 우리처럼 영원히 사는 천사들도 몇백 년에 한 번 내려올까 말까할 정도였으니, 우리에게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하늘에는 하얀 달이 둥그렇게 떠 있어 세상이 은빛을 뿌린 듯 환하게 빛나고,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계곡에서는 새소리, 동물들 움직이는 소리, 물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사위는 고요했다. 넓은 웅덩이는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고 깨끗했고, 우리는 날개옷을 훌훌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살에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상쾌함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천상에서는 이렇게 차갑고 상쾌한 물이 없기 때문에, 땅으로 내려오는 건 우리들이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시원한 계곡 웅덩이에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달이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새벽이 머지 않았을 때, 우리는 다시 천계로 올라가려고 옷을 입었다. 하지만, 내 옷만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옷을 갖춰 입었고, 옷을 찾지 못한 나 때문에 몹시 난감한 표정들이었다. 새벽빛이 밝을 때까지 천계로 올라가지 못하면 벌을 받게 되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기 어렵게 된다. 나는 친구들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말했다. 내 옷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친구들을 곤란하게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혼자 덩그라니 있으니, 불안이 몰려왔다. 그때, 숲속에서 검은 물체가 나타났고, 그는 나무꾼이었다. 나는 벌거벗은 몸을 감추려고 물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는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물에서 끌어내 성폭행했다. 그후 그에게 끌려 그의 오두막으로 갔고, 지금까지 갇혀 살면서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그리고 어제, 6살 아이가 자기 아버지인 나무꾼에게 물었다. 아빠, 엄마랑 어떻게 만났어? 눈동자가 흔들리는 나무꾼을 바라보았다. 그는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났고, 아이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응, 엄마하고는 산에서 만났는데, 엄마가 물건을 잃어버린 걸 내가 찾아줬어. 나무꾼은 거짓말을 했다. 나도 모르게 비웃음이 나왔다. 개새끼. 와, 멋지다. 아빠가 좋은 일 했네. 그런데, 어떤 물건이야? 보석? 돈? 아이는 좋아하며 물었다. 나무꾼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으응, 엄마가 가지고 다니던 옷이야. 나무꾼은 아이와 내 눈치를 보며 어물거렸다. 엄마 옷? 그럼 엄마가 갖고 있겠네? 엄마, 어떤 옷인지 보여줘. 나는 웃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아빠가 잘 간직하고 있어. 아빠에게 물어봐. 아이는 다시 나무꾼에게 말했고, 졸라대는 아이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에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옷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6년만에 보는 내 옷이었다. 와, 엄마 옷이다. 엄마, 이 옷 입어봐. 얼마나 예쁜가 보게. 나무꾼은 아이들을 끔찍하게 사랑했고, 아이들이 하는 말은 다 들어주었다.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야, 지금은 못 입어. 옷이 작거든. 조금 더 있다 살이 빠지면 입어볼께. 내 말을 듣고 나무꾼은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나무꾼을 보며 웃어주었다. 그에게 처음 보이는 웃음이었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죽지 못해 살았고, 날마다 죽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나무꾼은 내가 웃는 모습을 보이자,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아이들을 옆방에 재우고, 나는 나무꾼과 함께였다. 그동안 나무꾼에게 수없이 강간, 성폭행을 당했고, 그건 오로지 내 옷이 어디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제 옷이 돌아왔고, 더 이상 짐승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나무꾼은 내가 좋아서 그러는 줄 알고, 벌써부터 옷을 벗고 덤벼들었다. 나는 그에게 못이기는 척하며, 바닥에 누우라고 했고, 그의 배에 걸터 앉았다. 나무꾼은 흥분해서 콧바람을 불었고, 내 몸을 더듬었다. 나는 머리칼 사이에 숨겨둔 은장도를 꺼내 나무꾼의 목에 깊숙이 박았다. 이어서 손톱 기른 손가락을 그의 두 눈에 박았다. 잘린 동맥에서 피가 솟구치고, 뽑힌 눈알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무꾼의 비명이 터지기 전, 걸레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무꾼은 방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나갔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는 허공을 더듬으며 밖으로 나왔고, 나는 그를 숲속으로 유인했다. 그곳에는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었고, 나무꾼의 몸뚱아리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나무꾼이 살던 오두막을 떠나 세 아이와 함께 읍내로 나와 살았다. 바느질 삯으로 아이를 키우며.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9월의 시작
    9월의 시작 말복을 지나면서 더위가 한풀 꺾이더니, 처서가 되니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다. 시나브로 9월이 도착하고, 바람은 한낮에도 시원하다. 따가운 햇살을 지나는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가을이 새삼 애틋하다. 문을 조금 열어 놓은 창밖으로 곤충들의 우는, 아니 노래하는 소리가 정겹다. 그저 여치나 귀뚜라미인줄만 알았더니, 베짱이도 여러 종류가 울고, 귀뚜라미도 한두 녀석이 아니다. 여기에 방울벌레며 풀종다리까지 마당의 잔디 속에서, 나무 위에서, 뒷마당 풀숲에서, 옆집 우거진 나무숲에서 끊이지 않고 노래한다. 곤충의 울음, 아니 노래소리는 백색소음이어서 듣기에 거슬리지 않는다. 아침부터 밖에서 떠드는 늙은 여자의 새된 목소리에는 짜증이 솟구치지만, 곤충의 노래는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히는 힘이 있나보다. 며칠 게으름을 부리다보니,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일상'은 우리가 이어나가는 리듬인데, 리듬이 깨지지 않고,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경제력이다.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수입이 있어야 한 가족, 가정을 유지할 수 있고, 가족 구성원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개별적 생존'에 있다. 즉 누구나 시장에 뛰어들어 경쟁을 해서 이긴 자가 부를 독점하고, 도태되는 자는 빈민의 구덩이에서 허덕거리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자본주의의 원리를 명명백백하게 해부했고,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가 역사법칙의 하나이며, 역사는 질적 변화를 통해 뒤바뀐다고 예언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종교화하는 사람들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거의 절반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혼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체제가 위협을 받을 때마다 개혁(개선)을 통해 민중의 저항을 무마해 왔다. 무상교육, 무상급식, 의료보험, 복지그물망 같은 것들은 모두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8시간 노동,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주5일 근무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나처럼 50대 이상인 사람은 토요일 오전근무를 하거나, 토요일까지 주6일은 물론, 연장 근로, 야간 근로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잘 안다. 지금도 그런 노동현장이 없는 것은 아니나, 예전과는 분명 다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주4일 근무, 하루6시간 노동. 1년에 한달은 무조건 유급휴가. 이런 것들은 지금의 경제 조건에서 충분히 가능하지만, 자본은 마지막 순간까지 완강하게 거부한다. 기본소득제도 반드시 필요한데, 자본은 거부하고 있다. 오로지 육체노동(사무직도 육체노동자다)을 통해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노동자들은 해고되면 당장 수입이 사라진다. 영세자영업자도 사업이 망하면 수입이 사라지고, 빚더미에 앉는다. 약간의 은행 잔고가 있다고 해도 부자가 아닌 다음에는 몇 달 버티지 못한다. 일상의 리듬이 깨지는 것이다. 기본소득제는 추락하는 노동계급을 받아주는 안전한 복지 그물망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상'의 리듬이 깨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최소한의 복지가 기본소득제다. 여기에 '연금'을 포함하면, 퇴직한 노동자가 비참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인간적인 제도가 되는 것이다. 일상은 어쩌면 너무 단조로워서 소중함을 잊게 된다. 밤이면 돌아와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있고, 하루 두 끼, 세 끼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고, 철마다 한두 벌의 옷을 사 입을 수 있다는 것이 귀하고 소중하다. 이런 일상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은 노동을 한 대가로 받는다. 근본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는 사람은,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생존을 위해 노동해야 하고, 자신의 재능이나 하고픈 일을 선택하는 것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을 우선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재능과 꿈을 추구하는 사회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사회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추구해야 한다. 인간이 소모품으로 쓰이다 죽는 지금의 사회는 인류의 역사 이래 본질이 변하지 않은 계급사회의 연장이고, 인간이 '해방'된 사회는 아니기 때문이다. 9월의 첫 날을 맞아, 아들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소박하게 밥상을 차리고, 작은 케잌도 잘라 나눠 먹었다. 평범한 일상은 우리가 나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변화가 생길 것이다. 육체는 늙어가고, 정신은 흐려질 것이고, 삶을 이어가기 어려운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한여름의 폭발하는 생명도 가을이면 시들어가듯, 사람도 시들어 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기꺼워할 때, 우리의 일상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청년들께, 꼰대가
    청년들께, 꼰대가 물리적 나이가 많다고 해서 더 많은 지식이 있거나, 능력이 있거나,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청년들은 옛날의 청년에 비해 더 현명하고, 더 많이 노력하고 있으며, 더 많은 지식과 열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청년들을 상대로 글을 쓰는 이유는 있습니다. 어느 세대나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들은 있거든요. 제가 속한 세대인 50대는 약 70% 정도가 '보수적'이라고 통계가 말합니다. '보수적'이라고 해서 '수구꼴통'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수구꼴통은 세대에 따라서 10%에서 40% 사이에 존재하는데, 이들 평균이 약 20%쯤 됩니다. 이건 자유한국당의 지지율과 비슷하죠. 아니, 정치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바라보는 청년들의 모습에 관해 몇 가지 하고픈 말이 있어서 두서 없지만 편한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하지만 아무리 편하게 말한다해도 50대의 중늙은이가 말하는 건 언제나 꼰대의 잔소리일 뿐이겠죠.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중늙은이의 말 가운데 하나라도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지 않을까요. 멘토는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목사, 중, 신부 같은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이 자칭, 타칭 '멘토'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럴 듯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물론 그들의 말 가운데 극히 일부는 좋은 말도 있습니다. 모든 사기꾼이 100% 거짓말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진실을 말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사기꾼은 거짓말을 합니다. 멘토를 찾지 말고, 스스로 답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훌륭한 선생님, 선배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좋은 책이 널렸습니다. 멘토를 자처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좋은 책을 한 권 더 읽는 것이 청년 자신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럼, 좋은 책은 어떻게 찾아 읽느냐고요? 대학이나 공공기관에서 추천하는 도서목록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공인된 도서목록에서 자신에게 맞는 책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책은 한두 분야만 편식하지 말고, 다양한 분야를 골고루 읽어서 지식과 교양의 폭을 넓히는 것이 좋습니다. 문학, 역사, 과학, 철학, 여성(페미니즘), 환경 관련 책을 읽는 것은 기본이겠지요. 자기계발 책은 읽지 마세요. 청년들이 '자기계발' 관련 책을 찾아 읽는 것을 비판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취업 문제가 특히 심각해서, 자기계발은 곧 대학, 취업 등과 같은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자기계발'을 하라고 말하는 자들이 누구인가를 먼저 들여다보기 바랍니다. 스스로도 계발하지 못하는 자들이 조잡한 책을 써서 '자기계발'을 하라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런 책을 읽을 시간에 스스로의 삶에 도움이 되는 취미를 갖거나, 좋은 책을 골라 읽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계발'은 '자기계발'을 떠드는 책을 읽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고, 행동하는 과정을 통해 저절로 계발되는 것입니다. 종교를 갖지 마세요. 종교는 개인의 자유와 생각을 억압합니다. 종교는 현대과학문명을 부정하고 미신을 믿는 미개한 문화입니다. 종교를 믿는 것은, 인류의 미개함이 지속되는 것에 동조하는 것이며, 본인 스스로도 미개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번성하는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어리석고, 천박하며,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중세 이후 종교는 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하고, 착취하는 지배자의 도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종교에 기대어 자신의 어리석음을 합리화하는 것보다, 스스로 부족한 것을 깨우치고 좋은 책을 골라 읽거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실천을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됩니다. 역사와 과학을 꼭 배우세요.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어리석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면 올바른 판단력과 배경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청년 시기에는 반드시 역사와 과학에 관한 책을 읽고, 토론하고, 학습하기를 권합니다. 우리가 비난하는 수구꼴통 집단, 태극기부대, 일베충들은 역사와 과학을 올바르게 배우지 못한 집단입니다. 비뚤어진 사회인식을 갖게 된 배경에는, 개인적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태어나 죽는 것은 목적이 없지만,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개돼지나 마찬가지로 미개하게 살다 죽게 됩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를 단단하게 다지는 것처럼, 한 사람의 인성과 인격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역사, 과학, 철학이 그런 토대에 해당합니다. 이런 공부를 하지 않고 수능시험만 잘 받으면, 서울대에 가서도 일베충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인성을 위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기성세대에 저항하세요. 청년세대는 지금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그들의 정책과 행정을 개혁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야 합니다. 비판을 잘 하려면 기성세대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춰야 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결국 청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는, 지금의 기성세대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청년들이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대학등록금을 낮추자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모든 교육을 무상으로 하고,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본의 착취를 멈추도록 저항해야 합니다. 늙은 부모 세대를 부양하는 사회적 비용이 크지 않도록 정부를 압박하고, 정책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합니다. 막대한 분단비용을 줄이고, 자본이 독식하는 이윤을 사회화하고, 남녀평등 구조를 만들고, 복지정책을 강화하고, 협동과 협력을 통한 사회기업을 확산하는 등의 노력은 청년세대만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하고, 저항의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폭력도 써야 합니다. 80년대 청년들이 화염병을 들었던 것처럼, 청년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수단이 없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해야 합니다. 청년세대가 건강하게 사회에 자리 잡아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보장됩니다. 청년이 좌절하는 사회는 불행한 미래만 있을 뿐입니다. 청년은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하고, 사회의 정의가 바로 서면, 청년세대 뿐아니라 모든 세대가 행복합니다. 기성세대는 이미 정신이 늙고 병들었으니, 청년들이 낡은 것을 부수고,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 개혁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기성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것입니다. 청년의 기개를 널리 펼치길 간절히 바랍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