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평등하지 않은 시간


엊그제 우연히 유튜브에서 고급 음식점에 다니는 사람이 올린 동영상을 봤다. 태어나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고급 음식점들은 한 끼 밥값이 저녁기준으로 적게는 15만원에서 많게는 50만원에 이르는데, 여기에 예약손님이 너무 많아 예약하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

영상에서 보이는 그 고급하고 화려하며, 신선한 음식들은 분명 서민들의 식탁에서는 볼 수 없는 음식이었다. 일류 요리사들이 비싼 식재료로 요리해 유명 브랜드의 그릇에 담겨 나오는 음식은 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었다.

한 끼 밥값으로 부르주아는 50만원이 아니라 100만원도 푼돈처럼 쓸 수 있다. 서민은 한 끼 밥값을 계산하며, 어쩌다 외식을 할 때도 밥값이 너무 비싼 곳은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누구나 하루 세 끼를 먹는다고 했을 때, 그 세 끼의 질은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다. 부르주아는 음식을 미식으로 먹지만,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먹을 수 있는 거라면 어떤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먹어야 한다. 

전철에서, 공장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비정규직 청년노동자의 가방에서 컵라면과 빵이 나왔을 때, 그것은 수백 마디의 슬픈 말보다 더 강렬하게 계급의 슬픔을 상징하고 있었다.

19세기의 자본가는 1달러도 아니고, 100달러 지폐에 담배를 말아피웠다고 한다.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달러이던 시기에. 이런 사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자본가가 될 수 있지만, 자본가는 단지 '자본'의 현현일 뿐이다. 즉,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부자, 가난한 자 가리지 않고 평등한 것은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24시간이 주어진다. 계급의 구분은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두고 드러난다. 부르주아는 24시간을 자기가 주도적으로 쓸 수 있다. 즉, 시간을 통제할 권력이 있다. 누군가에게 강제당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는 24시간 가운데 최소 8시간을 생존을 위해 노동해야 한다. 이 8시간 노동은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자본가가 이윤을 착취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핵심이 바로 '시간'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후불로 구입한다. 자본가는 토지, 공장, 설비, 재료를 갖추고, 노동자로 하여금 '상품'을 만들게 한다. 이때 노동자의 노동시간과 임금, 상품의 제조량 사이에 격차가 발생하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격차(시간당 상품 생산량=잉여생산량)가 자본가의 이윤으로 돌아간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이 명확한 사회체제이므로, '인간' 자체가 평등하지 않다는 전제를 갖는다. 즉, 과거의 노예제 사회와 마찬가지로, 노예와 노예주가 있듯, 노동자와 자본가로 구분한 사회는 근본부터 불평등하다.


인간의 하루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8시간의 잠, 8시간의 노동, 8시간의 휴식이다. 이 가운데 가장 평등한 것은 8시간의 잠이지만, 8시간을 충분히 자는 사람은 부르주아뿐이다. 16시간에서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는 절반이 넘는 시간을 노동과 노동에 필요한 준비 시간으로 써야 한다. 그 시간은 오로지 생존에 필요한 노동이므로 온전한 '개인의 삶'이라고 하기 어렵다. 반면, 부르주아는 16시간을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 부르주아가 누리는 시간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시간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영화 '인 타임'은 시간과 자본, 권력의 관계를 잘 묘사한 내용이다. 인간이 영원히 산다는 가정 속에, 주어진 시간을 모두 쓰면 수명도 끝난다는 설정은, 필연적으로 돈과 권력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지금 우리에게 유일하게 평등한 것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다. 그 평등함 때문에 인간은 그나마 지금의 차별과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무조건 견디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200년에 불과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전지구적 현상으로 번졌고, 자본이 침투한 곳은 자연이 황폐하게 망가지고, 인간들은 경쟁과 이기심, 황금숭배의 노예로 전락해 서로를 물어뜯고, 잡아먹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사람보다 돈이 더 귀하고, 돈을 위해서는 사람의 생명을 쓰레기 취급하며, 선량한 사람의 뒤통수를 때려 강도짓을 하면서 떵떵거리고 사는 자들이 대접 받는 세상이다.

자본주의는 반드시 철폐해야 하며,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그 시간을 얼마나 빨리 앞당기는가는 우리들의 행동에 달려 있다. 자본가 하나의 재산이 수조, 수십조, 수백조원에 달하고, 노동자는 한달에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굶어죽어가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는 반드시 뒤집혀야 한다.

자본가, 부르주아가 자기의 24시간을 자기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노동자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누구는 먹고 살기 위해 피땀흘려 일하면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누구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피땀을 마시며 부유하게 사는 사회는 결코 정의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


자본가, 부르주아는 한줌에 불과하지만, 이들을 몰아내지 못하는 건 체제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자본(가)은 체제를 유지, 옹호하는 사람들로 정부를 만들고, 정부는 자본의 이윤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식으로 자본(가)에 봉사한다.

자본(가)을 유지, 옹호하는 정부는 폭력기관-경찰, 군대-을 운영하며, 자본(가)에 반대하는 노동자, 농민, 프롤레타리아 민중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용산 철거민 사태,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 파괴 등이 대표적 케이스다.

또한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소위 '중산층'이라는 어중간한 계층이 체제의 안정을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본(가)은 이들 중산층에게 당근(정규직, 고연봉, 사무직)을 주고, 자영업자들도 자신이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어 그들의 편에 선다.

이들 중산층(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노동자들이다)과 노동자, 프롤레타리아를 분리하는 것이 자본(가)의 기본 전략이며, '신자유주의' 이후 이 전술은 더 교활해져 '노동자-노동자'의 대립으로 몰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의 차별로 시작했고, 곧이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으로 노동자끼리의 경쟁을 강화하고, 세대 사이의 경쟁을 만들었다.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가 일자리와 복지를 놓고 갈등을 일으키고, 대립한다.

실업 문제, 취업 문제, 복지, 기본소득, 출산, 육아, 동일노동 동일임금, 남녀 성별에 따른 차별 등 자본은 끊임 없이 갈등의 소재를 던지고, 청년 예비 노동자, 실업예비군, 노동자들은 자본(가)이 던진 갈등을 받아들고 서로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작 힘을 합해 목을 쳐야 할 대상은 단 하나, 자본(가)일 뿐인데, 노동자 대중 대부분은 어리석고 멍청하기 때문에 자본(가)의 전략과 전술에 말려드는 것이다. 물론 '자본'의 힘은 단지 '폭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기술문명을 적극 도입해 첨단 제품을 만들어 내면서, 대중은 자본이 만드는 '상품'에 환호하고, '상품'의 (자발적)노예가 된다. '애플'을 비롯해 유명 대기업 제품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소비 행위는 매우 계급적이면서 정치적이다. '상품'은 상위 1%가 소비하는 것부터 모든 사람이 쉽게 소비할 수 있는 것까지 미세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가방 하나에 수천만 원을 하는 것은, 소비를 통해 계급을 구분하려는 '자본'의 전술이다. 따라서 어떤 노동자가 자본가와 부르주아들이 소유한 '상품'을 소유하면 자신도 그 계급에 속할 거라는 '욕망'을 충족시킨다. 물론 이때 '욕망'은 허구이고, 허위의식일 뿐이다.


그렇다고 당장 '폭력혁명'을 일으키는 건 불가능하다. 한국에는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도 거의 없고, 이들이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며, 설령 있다해도 이들이 노동자 대중을 지도할 권력이나 능력, 조직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뒤집을 수 없다면, 남은 것은 온건한 개혁의 과정이거나, 대중 - 노동자, 농민, 중소자영업자, 예술가, 청년학생 등 - 의 각성에 의한 진보 정권의 수립과 진보적 정책의 입법, 실행 등이 있다.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이 바로 이와 같은 진보적 개혁 과정인데, 이 과정은 매우 더디다.

그럼에도 한국이 놓여 있는 정치 상황, 국제 관계를 보면, 내부 혁명은 결코 쉽지 않으며, 부르주아 개혁을 견인하는 대중의 압력이 과거와 현재보다 조금 더 왼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보수, 반동의 발호와 저항이 거세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데 - 수구 언론과 정당, 검찰과 법조계 - 이 과정을 극복해야만 대중의 삶이 한 단계 발전할 것이다.

무력, 폭력 혁명 없이 대중이 원하는 사회 - 주4일 노동, 하루 6시간 노동, 보편적 복지 확립, 기본소득, 비경쟁 교육, 모든 주택의 공공영구임대 등 - 를 만드는 과정은 자본(가)과 부르주아의 반격으로 쉽지 않지만, 내부의 갈등과 각 계층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도 쉽지 않다.

우리는 인간의 삶을 큰줄기에서 결정하는 기본 원칙을 세우고, 세부 원칙들을 조정해 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이윤을 독차지하는 '자본가'는 도태될 것이고, 빈인빅, 부익부의 현상을 제거하기 위해 자본의 독점을 폐지하고, 노동자들이 기업의 주인이 되는 제도를 갖추게 되며, 국민 모두가 기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소득을 비롯해 기본 생존권을 보장받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지금은 24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계급이 오로지 자본가와 부르주아 뿐이지만, 모든 국민은 '노동의 의무'가 있고, 그 노동의 의무를 다 하면, 누구나 원하는 휴가를 다닐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시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화폐를 평등하게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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