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9-26(일)
 

페르소나


페르소나의 존재를 쉽게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분야는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는 송강호 배우, 마틴 스코시지 감독의 페르소나는 로버트 드 니로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윤종빈 감독의 페르소나는 하정우, 박찬욱 감독의 페르소나는 최민식, 송강호, 스티븐 스필버그의 페르소나는 톰 행크스처럼 감독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감독의 분신처럼 표현하는 배우를 말한다.

페르소나의 본래 의미는 '가면'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배우들은 가면에 극중 인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얼굴 표정을 그리고, 목소리의 확산을 위해 고깔을 붙였다. 가면은 썼다 벗을 수 있으므로, 실제 자신의 정체성과 드라마의 속의 인물을 연기할 때의 인물은 분명히 구분되지만, 어떤 경우에 이 분리가 실패하면서 개인의 실제 정체성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이 구분되지 않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지킬박사와 하이드' 또는 '배트맨'을 보면, 지킬박사는 훌륭한 인물이지만 '하이드'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배트맨의 부르스 웨인은 억만장자이면서 박쥐 옷을 입고 고담시티의 범죄자를 찾아 없애는 정의로운 인물이다. 이때 지킬박사와 부르스 웨인은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존재 모두 문제 없어 보이지만, 이들이 창조한 '하이드'와 '배트맨'으로 변신하는 순간 이들은 개인의 정체성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정체성도 모두 의심받기 시작한다.

페르소나는 한 사람이 두 인물을 동시에 살아간다는 점에서 분열성을 내재하고 있는 반면, 서로 인격이 다른 두 사람일 경우에는 권력 관계의 서열에 따라 권력이 강한 자를 대리하는 페르소나가 탄생한다. 영화 '대부'에서 마이클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부'가 되는데, 이때 마이클은 자연인 마이클의 모습이 아니라 조직폭력집단의 두목인 아버지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가는 아버지의 페르소나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권력집단 내부에서는 강한 권력을 가진 자의 모습을 동경하거나 스스로 동기화해서 자신을 권력자와 동일시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특히 이익집단에서 이런 현상은 더 강하게 나타난다. 국가의 행정수반으로 국민의 이익을 가장 우선해야 할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마치 사기업을 운영해 이윤을 빼돌리는 방식으로 범죄를 저지른 이명박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명박은 한국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인물로, 그의 삶 자체가 탐욕으로 뭉친 인간이다. 그는 오로지 부의 축적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인데, 이런 유형은 그의 내면에 무의식으로 자리잡은 강력한 컴플렉스와 대리 욕망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명박은 성장과정에서 부모와 가족에게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 유대, 행복, 연민과 같은 긍정적 감정을 받지 못한 채 성장했으며, 이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인간이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마침 그 때 '욕망의 시기'를 건너고 있었으며, 어리석은 대중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의 확산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당연히 불편하다. 독재자가 나서서 일방 밀어부치는 정치에 익숙했던 기성세대는 스스로 결정하고, 만들어 가는 민주주의 사회를 어색하고 불편하게 여겼고, 여기에 기득권 세력-자본가, 수구 언론, 수구 반동 정치집단 등-이 민주주의 세력인 노무현 정부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함으로써, 노무현 정부는 결국 좌초하게 된다. 물론 노무현 정부의 좌초는 그 자체로 사라지거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민주주의를 위한 뿌리를 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어떻든, 이명박이 '신자본주의'의 기치를 들고, 대중의 욕망을 선동하며 나타난 이후, 국가는 이들 권력을 가진 이익집단의 손에 의해 갈가리 찢겨 나간다. 이명박은 '4대강 사업'으로 대표하는 토목사업을 시작으로 '자원외교' 같은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국민의 세금과 기업의 활동으로 벌어들인 천문학적 부를 빼돌린다.


이명박이 집권하던 당시 오세훈, 박형준은 그 밑에서 '시다바리'를 하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오세훈이나 박형준이나 그 전에는 진보지식인, 진보적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변신은 과거 김문수, 이재오처럼 노동운동을 격렬하게 하다 극우로 돌아선 것과는 다르게, 이미 상부 기득권 엘리트로서 진보적 태도를 유지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의 사회적 존재의 이익과 합치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진입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은 성장 과정에서 결핍되어 있었던 여러 요건들로 인해 물질적 탐욕을 추구하는 기괴하게 비틀린 인간이었지만, 오세훈, 박형준은 그보다는 오히려 '탐욕' 그 자체에 매몰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오세훈이나 박형준의 성장 과정에서도 그런 트라우마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잠재된 무의식과 현실적 욕망의 결합으로 더욱 단단한 욕망이 탄생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명박이 보여 준 강력한 집착-오로지 '돈', '부의 축적'-을 가까이서 지켜봤을 두 사람은 이명박이 온갖 거짓말과 야비한 행동을 하면서도 오히려 사회적 성공에 이르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배운 도덕, 양심 같은 기존의 관습과 개념이 아무 쓸모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된다.

즉, 우리가 어릴 때부터 부모와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 양심, 질서, 비폭력, 배려, 정의 같은 단어는 권력을 가진 자가 약한 자에게 주입하는 세뇌였으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범죄자, 조직폭력배, 깡패, 양아치들은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즉, 도둑질, 강도, 폭력, 사기, 살인 등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행위를 함으로써 크게 두 가지 효과를 드러내게 된다.

범죄를 저지르면 사회에서 격리되어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은 곧, 사회를 구축한 기존 기득권 세력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다수 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것도 교집합으로 성립한다. 기득권 세력은 다수 국민이 이런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범죄는 그 자체로 분명 나쁘지만, 권력과 돈을 가진 기득권 세력은 범죄자 개인이 저지르는 사소한(?) 범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범죄를 아무런 죄책감, 죄의식 없이 저지른다. 그리고 그런 범죄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가져가는 것이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이명박은 그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자였으며, 그 아래서 '시다바리'를 하던 오세훈, 박형준은 욕망의 극대화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이명박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 감옥에 갇혔지만, 오세훈, 박형준은 이미 이명박에게서 배울 것을 다 배우고, 이명박의 페르소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오세훈, 박형준이 이명박의 페르소나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건 좁은 의미에서의 페르소나였을 뿐, 이명박, 오세훈, 박형준은 보이지 않는 실체인 '욕망'의 페르소나라는 점에서는 헤어날 길 없는 존재들이다.


페르소나는 누군가의 대역이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존재다. 누군가의 페르소나인 인물은 자기 삶을 자기가 결정하며 살아간다고 확신하지만, 그 확신 자체가 매우 어리석은 착각이다. 이명박은 자신이 결코 알 수 없었던 트라우마와 결핍을 극복하려는 수단으로 물질에 집착했으며, 오세훈, 박형준은 좁게는 이명박의 페르소나로, 크게는 욕망의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한국사회가 만든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시스템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던 운 좋은 인물이었으며, 그 시스템의 내부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즉, 오세훈과 박형준을 만든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체제는 이명박을 지지했던 다수의 사람들이 바라던 사회였으며, 지금 그 두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명박을 지지했던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로지 물질, 재화를 축적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의 기생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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