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송가인, 트로트의 부활과 스타 탄생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었다. 수많은 경선 프로그램이 있고, 우승자도 많지만, '내일은 미스 트롯' 우승자 송가인의 탄생은 남다르고 특별하다. 기존의 경연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은 '미스 트롯'은 한국가요에서도 이제 변방으로 밀려난 '트로트' 장르를 부르는 여성 가수를 뽑는 프로그램이어서 딱히 도드라지는 내용은 아니었다.

고등부, 대학부, 마미부, 걸그룹부, 현역부A, B, C그룹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 여성 트로트 가수들이 경연을 통해 최종 결승까지 진출하는데, 첫 방송 시청률은 5.9%였다. 종편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으로는 높은 편이었고, 이후 시청률이 빠르게 상승했다. 모두 10회 경연 방송에서 결승전은 16.6%로 종편 최고였으며, 공중파에서도 보기 어려울 정도의 시청률을 보여주었다.

이 경연에서 우승한 사람은 현역부에서 진출한 송가인이었다. 트로트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송가인'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적었을 것이다. 송가인은 '내일은 미스 트롯'에서 1위를 하며 하룻밤 사이에 스타로 등극했는데, 송가인과 '미스 트롯'은 변증법적으로 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 '미스 트롯' 제작진은 프로그램 기획을 통해 마당을 펼쳤다면, '미스 트롯'에 출연해 경연을 펼친 경쟁자들의 재능이 프로그램을 견인했다. 이 가운데 특히 송가인은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경연참가자들 사이에서 유독 송가인의 존재를 알아챈 시청자들은 그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에 관한 여러 문제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미스 트롯'은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과 비슷한 내용도 있고, 심사위원의 선정과 자질 문제, 출연자 여성의 성상품화 논란도 있었다. 이런 논란에서도 송가인의 가창력은 모두의 눈에 띄어 '미스 트롯'으로 선정되었고, 송가인은 무명 가수에서 일약 톱스타로 도약했다.


'미스 트롯'은 진 송가인을 비롯해 선 정미애, 미 홍자가 탄생했고, 본선에 진출한 12명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가장 주목 받은 사람은 송가인이었다. '미스 트롯'의 진(1위)이라는 프리미엄과 어드밴티지가 있다고 해도, 송가인 열풍은 남다른 면이 있다. 그 남다른 면이 송가인 현상의 요인이고, '미스 트롯'보다 송가인 개인을 대중이 선호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탁월한 가창력

송가인은 어릴 때부터 판소리를 공부했다. 영화 '서편제'로도 알려졌지만, 판소리는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의 유파가 있는데 송가인은 서편제에 가까운 소리를 한다. 서편제의 특징은 계면조의 애절함과 화려하고 감칠만 나는 소리를 내는데, 이것은 나중에 송가인이 정통 트로트를 부르는데 중요한 자산이 된다.

송가인은 중학생 때 판소리를 시작해 광주예술고등학교, 중앙대학교에서 판소리를 전공했다. 명창 박금희(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9-4) 선생에게 수궁가와 춘향가를 전수받은 정통 판소리꾼이다. 판소리로 여러 대회에서 상을 받았으며 대상인 장관상울 연속 2회 받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판소리의 유망주, 미래의 명창 조은심(송가인의 본명)을 잃은 것은 애석하고 안타깝다.

이런 탄탄한 기본기와 실력을 지닌 채 송가인은 트로트 가수로 전향한다. 판소리에서 트로트로 전향하기 쉽지 않았을텐데, 계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송가인은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해 진도지역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연말 결선까지 진출해 우수상을 받는다. 이미 이때부터 송가인의 트로트는 가창력을 인정받았으며, 작곡가가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고, 앨범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트로트 가수로 전업했다고 한다. 이후 앨범을 내고 '전국노래자랑' 초대가수, KBS 가요무대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미스 트롯'에 출연하기 전까지 약 8년 동안 무명가수로 생활하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미스 트롯'은 송가인의 가창력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무대이자 기회였고, 송가인은 이 기회를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무명의 오랜 시간을 견뎌낸 집념의 승리였고,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존재 증명이기도 했다.

'미스 트롯'에 출연한 많은 가수들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만, 관객은 본능적으로 송가인의 노래를 알아챘다. 오래 단련한 판소리 공부에서 나온 내공은 분명 달랐다. 송가인의 탁성은 고음으로 올라갈수록 맑고 깨끗한 소리로 변하는데, 저음과 고음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는 기교는 판소리에서 터득한 것이다. 송가인은 트로트 가수가 되는 과정에서 따로 교육을 받거나, 트로트 공부를 전문가에게 배우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연습했는데, 노래 하나를 배울 때는 너무 많이 불러서 구역질이 날 때까지 연습했다고 한다.

트로트의 특징은 흔히 '꺾기'라고, 목소리를 떨거나 음계를 급격하게 변화하는 기교를 부려야 하는데, 이 기교는 판소리 형식과도 닮은 점이 많아서 송가인에게 유리하다. 송가인의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판소리로 다져진 그의 실력은 판소리를 배우지 않은 가수들과 차별성을 보인다. 송가인이 '미스 트롯'으로 돋보이긴 했으나, 프로그램과 다른 참가자들을 압도하며, 자신의 카리스마를 드러낸 것은 오로지 그의 탁월한 가창력에 있다.


전라남도 진도

송가인의 고향이 진도라는 것, 판소리를 공부했다는 것은 오늘의 송가인을 만든 원천이자 밑거름이다. 가수 활동과 출신지역이 직접 관련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많은 예술가에게 고향은 그의 작품 활동과 예술성에 깊은 영감을 주고, 창작과 재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특히 송가인은 예술의 고향인 남도의 땅 진도에서 태어났고, 어머니가 진도씻김굿 전수조교였고, 그 자신 판소리를 공부했다. 남도-여기서는 전라남도를 뜻한다-가 예술의 고향이 된 것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양반(벼슬한 양반)이 남도 쪽으로 귀양을 온 것과 관련이 있다. 왕은 신하가 잘못하면 서울에서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는데, 거리가 멀수록 죄가 크다는 뜻이다. 북쪽 끝으로 올라가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이었고, 남쪽 끝에서도 섬으로 들어갈수록 유배는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유배지로 내려온 양반은 소일거리를 찾아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책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유배자들이 만든 예술작품은 '유배문학'으로도 남았고, 글과 그림 역시 남도에는 많이 남아 있다. 남도의 모든 정자에는 그때 유배왔던 양반들이 남긴 시를 담은 편액이 걸려 있고, 서민의 집에도 글과 그림이 한편 이상 걸려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곳이 남도다.

판소리는 민중의 노래지만, 여기에도 양반(지식인)의 지식이 개입한 흔적이 많다. 17세기 이후 판소리를 채집, 정리한 것은 판소리를 사랑한 양반 신재효였고, 판소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가사에도 양반들의 언어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판소리가 특히 남도에서 발흥한 것은 지리적 특성과 함께 유배온 양반의 개입, 세습무의 영향 등이 복합 작용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가장 크고 넓은 곡창지대는 남도였다. 조선인의 주식인 쌀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에다 강, 바다가 가까운 곳에 있어 해산물, 생선도 풍부했고, 기후가 따뜻해 발효음식이 자연스럽게 발달한 지역이다. 

진도는 섬이어서 육지로 오가기가 불편하고,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남쪽 끝이어서 조선의 양반들 가운데 유배를 온 유명한 관료들이 많다. 무오사화의 이주, 홍언필, 기모사화의 김정, 김안로, 기사환국 김수항, 신축옥사 조태채, 을사사화 노수신은 무려 19년을 진도에서 유배를 살았는데, 그는 진도 주민을 가르쳐 진도를 개화한 시조라는 말을 듣는다. 

유배 온 양반에게서 지식을 전수받은 지역민은 지식을 습득하면서 맹목에서 벗어나 말과 행동이 달라졌다. 지금도 남도 사람들의 언어에는 '문자'가 많은데, 이것은 조선 지식인의 흔적이다. 주로 어려운 한자를 섞어 쓰는 언어생활이 일상이며, 서화를 가깝게 두고 보는 것도 지식인 취향인데, 이들이 단지 양반 문화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 속에서 내재화하고 체화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에는 여러 지역에서 '아리랑'이 탄생했는데, 아리랑의 최초 기원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정선아리랑(아라리),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등이 있으나 진도아리랑이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일 정도로 진도는 음악의 발원지로도 유명하다.

송가인이 이런 진도에서 태어나 예술가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그가 판소리든, 트로트 가수든 성공할 재능을 물려 받은 것은 분명하고, 노력과 기회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판소리와 씻김굿

판소리를 공부한 송가인의 어머니 송순단은 진도 씻김굿 전수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송가인이 '미스 트롯'으로 스타가 되자, 그의 어머니가 만신(무당)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씻김굿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전통 예술이다. 

씻김굿으로 일가를 이룬 송순단은 딸에게 판소리 배울 것을 권유하고, 재능이 있던 송가인은 판소리로 훌륭한 성과를 이룬다. 중학생 때부터 배운 판소리는 대학(중앙대학교)에서도 전공을 할 정도로 꾸준히 이어졌는데, 2010년, 송가인은 판소리를 포기하고 트로트 가수의 길로 들어선다. 

판소리와 씻김굿은 전통예술이고, 오늘날 전통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매우 낮다. 전통예술은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그 보유자와 전승자를 지원하지만, 그들에 대한 지원의 수준이 낮아서 전통예술을 지켜나가기 어려운 현실이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의 인심이 바뀌면서 우리의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다. 서양문화가 중심이고, 대세인 우리 사회에서 전통예술가에 관한 관심과 지원이 부족하고, 이들은 생활을 위해 재능과 자부심을 포기할 위기에 놓이기도 한다.

송가인이 판소리를 포기하고 트로트 가수의 길로 접어든 것도 이런 사회의 무관심과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 때문 아닐까. 송가인은 현재 판소리를 포기한 것으로 보이지만, 트로트 가수로 성공하면서 오히려 판소리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판소리를 바탕으로 성공한 트로트 가수라는 이미지는 우리 전통음악의 높은 예술성을 입증하는 것이고, 나이 많은 세대에게는 익숙한 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청년 세대에게는 잘 모르던 우리 예술을 발견할 기회를 주었다.

송가인의 트로트에는 판소리의 기교와 감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그의 호소력 짙은 창법과 묵직하면서도 꽉 찬 발성은 단전에서 올라와 긴 호흡과 큰 폐활량을 통해 놀라운 표현력으로 발산한다.

씻김굿과 판소리는 음악에서 공통점이 많은 분야로, 본질에서는 같다. 씻김굿은 무속의 한 분야로, 세상을 떠난, 망자의 영혼을 달래주는 무가형식이지만, 그 굿을 보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 망자의 가족이 대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의 슬픔을 달래주고 위로해주는 역할을 한다.

판소리도 '판'을 벌려 부르는 소리로, 민중이 모일 만한 장소-주로 장터, 잔치마당, 마을의 정자 등-에서 창을 부르는 소리꾼과 북을 치는 고수 두 사람이 사설(아니리)과 창으로 대중을 휘어잡는다. 씻김굿도, 판소리도 즉흥성이 생명이어서, 공연을 하는 장소와 사람에 따라 가사와 내용을 적절하게 바꾼다. 

민중의 바람과 함께 성장하는 예술이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민중의 사랑을 받는 전통예술이다.


송가인과 가족

'미스 트롯'을 통해 트로트 스타가 탄생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가수의 등장이고, 가수 한 사람의 성공을 집중해서 조명하게 마련이지만, 송가인의 경우는 가족 특히 부모가 돋보이면서 송가인의 인기는 물론 그의 가족 모두가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송가인이 스타로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던 것은 여느 가수나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송가인의 어머니가 진도 씻김굿 전수조교로 활동하고 있다는 이력도 신선했고, 부모님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스토리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송가인의 대중 이미지는 훨씬 친근하고 가까운 이웃으로 여기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오락, 연예 방송의 많은 부분은 연출된 이미지를 내보내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여러 방송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출연하는 송가인과 그의 가족을 보면, 연출해서 보여주는 장면과 실제 인성이 드러나는 장면을 알 수 있다.

송가인은 자기 매니저도 아닌 회사 매니저에게 먼저 다가가 치아 치료를 권하고, 자기가 치료비를 지불하기도 하고, 송가인 팀은 행사가 끝나면 모두 회식을 하고 헤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화합을 중요하게 여긴다. 송가인도 사람들과 밥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는 함께 일하는 사람을 '식구'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런 송가인의 태도는 오랜 무명생활에서 겪었던 설움을 통해 배운 것도 있지만, 그의 인성이 그의 부모에게서 온 것임을 가족을 촬영한 영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송가인의 부모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송가인이 '미스 트롯' 진이 되고, 송가인이 주목 받으면서 그의 부모가 사는 진도에서의 생활을 세미 다큐로 방송하면서인데, 어머니는 진도 씻김굿 전수조교로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아버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평범한 시골 아저씨를 비추는 순간, 평범했던 시골 아저씨는 여느 개그맨보다 재미있는 캐릭터로 시청자를 휘어잡았다. 진도에서 농사를 짓는 60대 노인이지만, 그의 외모는 출중했고,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혼자서도 오디오, 비디오를 꽉 채우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송가인의 재능이 어머니 쪽에서 받았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재능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청년이었을 때, 기차를 치며 노래하면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아버지는 지금도 혼자 농사일을 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기량이 남다르다.

송가인의 본명은 조은심인데, 아버지 쪽 친척들 가운데 판소리를 하는 사람, 무형문화재, 국악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이런 걸 보면, 엄마의 재능과 함께 아버지 쪽 재능도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송가인 부모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하루 1,000명이나 될 정도로 송가인의 인기가 치솟고 있을 때, 송가인 부모는 막내 송가인이 성공하고, 인기를 얻는 것이 모두 팬들의 덕분이라고 여기며, 기꺼이 번거로움과 수고를 감수한다. 진도까지 먼 길을 온 팬을 위해 음료수, 옥수수, 감자 등을 대접하는데, 유명한 가수의 집을 찾는 팬이 이렇게 많은 경우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송가인 부모의 일상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시청자가 알게 되는 사실은, 송가인 부모의 넉넉한 인심은 물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의 매력과 평범한 시골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어머니는 뛰어난 음식 솜씨로 가족과 이웃, 손님을 대접하고, 농사부터 온갖 집안일까지 '조가이버'라는 별명을 듣는 아버지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농부의 모습이다.

부부의 모습은 한국의 전통적 가정과 생활의 평균을 보는 듯하다. 우리 부모 세대는 지금도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으며, 산업사회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가족과 이웃, 마을을 아우르는 공동체가 여전히 시골에서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한국은 지금 산업사회와 전통사회가 공존하는 마지막 단계에 있으며, 우리의 부모 세대가 가족과 이웃, 마을의 공동체를 보여주는 마지막 세대이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송가인 부모를 통해 유쾌하고 즐겁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송가인의 인기가 높아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송가인의 개성과 태도

'미스 트롯' 진으로 오랜 무명의 시간에서 탈출해 일약 스타가 된 송가인은 무명시절의 서러움을 이야기할 때, 담담하지만 마음 아픈 순간을 담담하게 표현한다. 지금도 무명 가수들이 지방의 행사를 다니면서, 언젠가 스타가 될 날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스 트롯'에 출연한 많은 가수들도 진이 되었다면 보여지고, 드러나는 모습이 예전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송가인은 특유의 개성이 돋보인다. 그는 광주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중앙대학교를 다니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는데, 지금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의도적으로 표준말을 쓰려고 애쓰지 않는 것도 보기 좋은데, 서울과 서울 말씨에 대한 열등감이 없음을 알 수 있으며, 한편으로 자신의 고향말인 전라도 사투리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한때 전라도 사투리는 방송에서 천대당하는 지방말이었으며, 권력자들의 지역차별의 희생양이 남도지역이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 극우, 패륜집단에서는 전라도 지역말을 비웃고 혐오하지만, 송가인이 자연스럽게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서 시청자는 전라도 말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송가인은 자신이 무명에서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된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있다. 자신의 위치가 신데렐라처럼 주목받는 존재가 된 것도 알지만, 자신의 성공이 대중의 사랑과 응원 덕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송가인의 팬덤은 아이돌보다 더 단단하고 조직적이다. 아무래도 트로트 팬층은 중년 세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팬들의 선물도 굴비, 낙지, 홍삼 같은 건강음식이 주류를 이루며,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팬들이 많아 경제적 지원에서도 다른 가수들을 압도한다.

이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송가인은 외모와 태도에서 호감을 얻는 요소가 많다. 외모를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겠지만, 송가인의 외모는 그가 스타로 발돋움하면서 돋보이고 있다. 둥그런 얼굴에 늘 웃는 눈, 복스러운 코는 어른들이 보기에 복 많은 맏며느리상이다. 

송가인의 겸손한 태도는 그가 대중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겸손한 태도를 몸에 익혀 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스타가 된 이후에도 무명 시절에 돈을 벌기 위해 했던 비녀 만드는 작업을 한동안 이어갔다. 그가 직접 재료를 구입해 비녀 완성품을 만들어 발송했다.

송가인은 자신의 능력으로 스타가 되었지만, 자만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는 조금 보수적이며, 무대에서도 노출이 있는 의상을 입지 않고, 단정하고, 단아한 무대의상을 선택하며, 어르신을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럽다. 송가인은 무명으로 활동하던 약 7-8년의 시기에 작은 행사장 무대에 오르거나 지방 방송국의 리포터로 활동하거나 부업을 하며 생활을 꾸렸다. 

무명의 설움을 겪었기에 처음부터 꽃길을 걸었던 스타와는 다른 마음가짐이었을테고, 또 그만큼의 시간을 단련했기에 어느 날 갑자기 스타가 되었어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있다. 지금의 송가인이 있기까지 부모의 뒷바라지가 지극정성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가족의 믿음과 응원이 지금의 송가인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트로트는 나이 든 사람들이나 부르는 노래로 인식되고, 구시대의 유물 쯤으로 여겨지는 장르지만, 주현미, 장윤정, 홍진영 등이 트로트 가수로 이름을 널리 알린 이후, 이렇게 빠른 속도로, 넓은 팬층을 모으고 있는 여성트로트 가수는 송가인이 최초다. 또한 이전의 트로트 가수와는 다르게, 송가인의 팬덤은 송가인의 압도적이고 탁월한 가창력과 인성이 결합해 더욱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송가인이 출연한 프로그램은 거의 다 찾아봤고, 송가인의 부모님이 출연한 프로그램도 거의 다 찾아 봤다. 송가인의 가창력은 놀라웠고, 구수한 사투리는 정겨웠고, 부모님의 따뜻하고 다정한 모습은 부러웠고, 진도는 아름다웠다.

송가인 열풍이 언제까지 지속할지 알 수 없지만, 노래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는 대중이 존재하고, 훌륭한 가수가 등장해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한동안 대중의 즐거움은 유지될 걸로 보인다.

다만, 송가인이 스타로 탄생하면서 급격하게 소비되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인기가 치솟으면서 부르는 곳이 많으니 대중가수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초기의 관심과 열풍이 지나치면 식상함으로 연결될 수 있는 우려가 있다. 스타 탄생, 인기 상승, 인기 유지, 인기 하락으로 이어지는 대중가수의 운명은 송가인도 비켜가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대중을 상대로 활동하는 대중 예술인의 숙명이기도 하다. 다만, 그 시간을 얼마나 늦출 수 있는가, 인기가 오래 유지되는가는 대중예술인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달려 있다. 새로운 노래를 발표하고, 그 노래가 널리 알려져야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 송가인의 탁월한 가창력이 그를 든든하게 잡아주리라 믿으면서, 송가인을 둘러싼 음악 환경이 그의 운명을 결정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송가인이 주체적으로 활동하고픈 열망과는 또 다른 것으로, 자신이 음악을 작사, 작곡하지 않는 한, 다른 작곡가의 힘을 빌어야 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고, 지속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송가인은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며, 이 시대에 대중이 원하는 가수로 등장했다. 그의 미래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송가인과 그의 팬들이 행복한 것은 틀림없다. 이 시간이 오래도록 지속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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