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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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하는가
    제목 :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하는가 작가 : 리처드 도킨스 외 출판 : 바다출판사 서문_문 앞에 서 있는 야만 - 존 브록만지적 설계는 왜 과학이론이 아닌가? - 제리 A. 코인반과학에 대처하는 과학자들의 자세 - 레너드 서스킨드지적 설계론자들은 어떻게 대중을 속이는가? - 대니얼 데닛의식은 다윈주의의 아킬레스건인가? - 니콜라스 험프리나는 어떻게 인류의 진화 증거를 발견하는가? - 팀 D. 화이트물에서 뭍으로의 ‘위대한’ 이행 - 닐 슈빈만약 지적 설계자가 외계인이라면…… - 리처드 도킨스다윈은 어떻게 창조론자에서 진화론자로 변신했는가? - 프랭크 J. 설로웨이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 스콧 애트런우리의 도덕 감각 역시 진화한다 - 스티븐 핑커우주의 자연법칙도 진화의 결과다 - 리 스몰린지적 설계에 대한 강력한 반증 - 생물의 자기 조직화 - 스튜어트 A. 카우프만아무 도움 없이 생명을 진화시키는 우주 컴퓨터 - 세스 로이드논쟁의 뿌리 - 오해를 낳는 용어들 - 리사 랜들학교에서 지적 설계론을 가르친다면 어떻게 될까? - 마크 D. 하우저생태-진화 중심의 대안 교육을 고민하자 - 스콧 D. 샘슨부록_펜실베이니아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 판결문 발췌 이 책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글은, 부록으로 실린 펜실베니아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의 판결문 일부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적 설계는 과학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지적 설계가 세 가지 수준에서 실패라고 생각한다. 셋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지적 설계가 과학이라는 판결을 배제하기에 충분하다. 첫째, 지적 설계는 초자연적 인과관계를 끌어들이고 허용함으로써 과학의 수백 년 된 기본 규칙들을 위반한다. 둘째, 지적 설계의 핵심인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논증은 1980년대에 창조과학의 종말을 부른 비논리적이고 결함투성이인 '억지 이원론'을 이용한다. 셋째, 전화론을 부정하는 지적 설계의 공격은 과학계에 의해 반박되었다. 아래서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지적 설계가 과학계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적 설계는 동료 검토를 거친 출판물을 발표한 적이 없고, 검증과 연구의 대상이 된 적도 없다.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를 믿는 사람들은 참 불쌍하다. 그들은 진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우주의 역사를 포함한 자연의 역사가 얼마나 길고, 아름답게 진행되어 왔는가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명백한 사실조차 부정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멍청하고 한심하고, 불쌍해 보인다. 그런 유신론자들을 위해 과학자(진화론자)들은 아주 훌륭한 대안을 마련해 놓고 있다. 즉, 신을 믿는 사람이라도, 진화론을 인정하고 믿는 것에 대해 위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이론인데, 그것은 '신다윈주의'라고 한다. 즉, 유신론자들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믿으면 된다. 그리고 우주도 창조했고, 지구도, 지구에 사는 생명도 창조했다. 그리고 신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만. 그 이후는 우주의 자연스러운 질서와 생명의 창조는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유기물에서 세포로 진화하는 진화의 과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정하면 유신론자들도 마음 편하고, 진화론과도 전혀 다툼 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공존할 수 있다. 유신론자들로서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만일 이렇게 훌륭한 대안을 외면하고, 여전히 지구 나이가 6천년이라고 주장하고, 환원 불가능을 내세워 설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그 어리석음은 결국 유신론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게 될 뿐이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죽도 사무라이 - 마츠모토 타이요
    죽도 사무라이 - 마츠모토 타이요 모두 여덟 권으로 된 장편 만화. 그동안 출간했던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과는 또 다른, 새로운 형식미를 보여주는 시대극화. 작품의 완결성은 물론, 절묘한 선으로 만화의 미학을 한단계 높였다. 일본 작가지만, 참으로 부럽고, 대단한 작가다. 그의 손을 거쳐 나오는 작품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도, 마츠모토 타이요의 시각은 여느 작가들과 확실하게 다르고, 독특하며, 놀랍다. 그가 '천재 작가'의 소리를 듣는 이유다. 에도시대. 주인공 세노 소이치로는 낯선 마을로 떠돌다 정착한다. 사무라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검은 진검이 아닌 대나무검. 진검이자 보검인 쿠니후사는 전당포에 팔아버린다. 더 이상의 살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백수 노릇을 하면서, 마을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소한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세노 소이치로는 잠시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연쇄 살인이 발생하면서 도읍은 긴장감이 흐른다. 한 권, 한 권이 모두 마치 일러스트 작품집처럼 높은 완결성을 갖고 있으며, 생략과 압축, 다양한 시각(카메라 워킹)은 실제 영화를 보는 듯한 박진감과 현실감을 보여준다. 한국에 번역된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은 다 소장하고 있다. 이 작가의 작품은 반드시 소장할 가치가 있으며, 가까이 두고 자주 보면 볼수록 새로운 감동을 느끼게 된다. 두 번 읽었다. 처음 볼 때보다 더 진한 감동이 있다. 세노 소이치로의 출생과 관련한 비밀이 풀려가는 장면은 감동과 전율이 인다. 원작 소설은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상태다. 소설도 퍽 기대된다. 좋은 만화는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 뿐 아니라,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특히 작가가 표현한 미세한 상징들, 이미지, 농담을 네모 칸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은 활자만으로 되어 있는 문학작품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만화만의 특징이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는 작은 네모 칸에 등장하는 인물들 뿐 아니라 동물, 풍경도 예사롭지 않은데, 인간 외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의인화'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고양이와 개가 사람처럼 말을 하고, 사람과 고양이, 개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또한 가장 핵심이 되는 주인공 세노와 그의 보검 쿠니후사의 이야기는 이 만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보검 쿠니후사는 여성으로 표현되는데, 특이하게도 한쪽 눈을 잃은 여성이다. 왜일까? 쿠니후사는 세노보다 나이가 많다. 그의 아버지 또는 그 이전부터 만들어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보검인데, 일본도의 장인이 만든 이 칼은 당대에서도 보기 드문 칼이었다. 보검은 당연히 의인화할 수 있으며, 주인공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세노가 보검 쿠니후사를 전당포에 맡길 때는 비장한 심정이었다. 세노는 자신에게 피의 냄새를 쫓는 악귀가 씌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손과 같았던 칼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만화의 중반부터 등장하는 키쿠치라는 인물은 매우 독특하고 복잡한 인물이다. 그는 세노와는 정 반대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세노와 마지막에 한 판 대결을 펼치게 된다. 키쿠치는 당대 최고의 검객이지만,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매우 비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노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되던 그의 무술은, 그러나 결국 자기 자신을 벨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 그의 칼에는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쌓여 있는 것은 분노와 증오, 원한 같은 피비린내나는 감정들 뿐이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청부살인업자로 살아가게 된 그의 내력은 그의 부모로부터 시작한다. 부모를 죽이는 것으로부터.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도 많지만, 그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살아 있는 듯, 자연스럽고 또 개성을 갖고 있어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사람들은 대개 선량하고 착하게 살아가지만, 에도 시대가 그렇듯 인간말종도 많고, 힘과 권력을 믿고 시건방을 떠는 자들도 많다. 그런 가운데 세노는 마음 속에는 깊은 슬픔을 묻고, 어린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살아가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삶이란 늘 변하기 마련이고, 세노의 시간을 쫓아가는 만화는 슬픔 속에 실낱같은 희망을 본다.
    • 문화
    • 만화
    2021-12-15
  • 조이랜드 - 스티븐 킹
    제목 : 조이랜드 작가 : 스티븐 킹 출판 : 황금가지스티븐 킹의 최근 작품. 명불허전. 장편소설이지만 속도감 있게 읽힌다. 쉬운 문장과 부드럽게 넘어가는 시퀀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와 에피소드들이 적절하게 섞여 있고, 무엇보다 한 청년의 성장소설이 주는 감동이 있다.줄거리는 이렇다.스물한 살의 대학생 데빈은 여자 친구 웬디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겸 놀이공원인 ‘조이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리고 ‘공포의 집’이란 놀이 시설에서 사 년 전 린다 그레이라는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며,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이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공원에서 함께 일하는 점쟁이인 로지 골드는 데빈의 인생에 한 소년소녀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조이랜드의 마스코트 해피 하운드 하위의 인형 탈을 쓰고 일하던 어느 날, 그는 우연치 않게 한 소녀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얼마 후 휠체어를 탄 마이크 로스라는 소년이 그의 삶에 들어오게 되는데…….스티븐 킹 소설의의 가장 큰 장점은 '디테일'이다. 그의 작품은 당연히 픽션이지만, 마치 실제 장소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같은 느낌을 준다.그만큼 소설 속에 필요한 정보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인과관계를 엮어나가는 재주가 탁월하다. 물론 스티븐 킹의 소설에도 우연이 개입하고, 그 우연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면, 스티븐 킹의 소설은 미국 현대사에서 '개인사'나 '생활사'를 복원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주로 스티븐 킹이 태어나 살았던 시기 즉 1940년대부터 현대인데, 그의 작품에도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 등 각 시대별로 소설의 무대가 펼쳐진다. 그럴 때마다 스티븐 킹은 각 시대의 맞는 사회 분위기를 매우 꼼꼼하게 배치하는 것이 큰 매력이다.이 소설의 중심 무대는 '놀이공원'인 '조이랜드'다. 따라서 놀이공원에서 필요한 정보들-각종 놀이시설, 관리인, 아르바이트 학생들,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 기계들의 움직임 등-을 철저하게 조사했고, 그것이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스티븐 킹을 '공포 스릴러' 작가라고 말하지만, 딱히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쇼생크 탈출'을 비롯해 그의 많은 작품들이 '공포 스릴러'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인간의 내면을 깊이 파헤치는 심리 소설인 경우가 더 많았다.스티븐 킹의 인간 심리에 대한 해부는 다른 어떤 작가보다 탁월해서, 소설 속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과 다양한 감정들을 독자가 마치 실제처럼 느끼도록 하는 재주가 있다.이 작품 역시 마지막 장면의 감동과 함께, 한층 성장하는 한 청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문화
    • 독서
    2021-12-15
  • 1984년
    제목 : 1984년 작가 : 조지 오웰 출판 : 열린책들 다시 읽었다. 이 책이 왜 '세계적인 명작'이고 '걸작'인지 새삼 깨닫는다. 1948년에 쓴 이 작품은 당시 쏘련의 정치상황과 스탈린의 철권 통치를 비판하기 위해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갖고 있다. 알다시피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였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악행, 자본주의 사회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당시 영국 노동자계급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이 책을 쓴 동기는 사이비 공산주의 국가였던 쏘련과 스탈린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빅 브러더'로 상징되는 강력한 통제사회에 대한 예견이다. 그가 바라 본 가까운 미래-불과 36년 뒤-의 사회를 이보다 더 정확하고 날카롭게 예견한 작가는 오직 조지 오웰 뿐이다. 이 작품은 외부당원인 윈스턴이 겪는 사상적 흔들림과 자유 투쟁을 벌이고 있는 비밀조직, 사회를 완벽하게 장악한 '빅 브러더'와 그의 정보망, 정체가 발각되고 난 이후 사상개조의 과정 등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은 '권력'에 관한 부분인데, 윈스턴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인민을 위해 권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권력'이 지향하는 것은 '권력' 그 자체임을 말한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유도 바로 '권력' 그 자체를 지키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보여주는 부패와 음모, 권력의 남용, 폭력 등은 모두 '권력'의 속성이고 본질이기도 하다. 특정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마르크스는 이것을 계급 사회,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했다-사회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투쟁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이 작품은 '디스토피아' 사회, 즉 가장 암울하고 억압적이며, 희망이 없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학자들에 의해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말하고 있는 감시 프로그램이 지금,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나 적용되고 있는가를 조사했더니 무려 80% 가까이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거의 '빅 브러더'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사회 감시와 통제의 수준은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에서, 유일한 희망은 오로지 '프롤'에게 있다고 했다. '프롤'의 존재는 무식, 무지하고 통제하기 쉬우며, 권력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미개한 인민'이라고 했는데, '프롤레타리아'의 준말이기도 하다. 과연, 무지하고 무식하며, 집권 여당의 뜻대로 움직이는 '프롤레타리아'들이 미래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 문화
    • 독서
    2021-12-15
  • 아웃백스테이크
    아웃백스테이크-011121 살아오는 동안 날마다 음식을 먹지만, 그것을 카메라로 찍어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이 쓰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으니 내 경우는 2004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카메라나 스마트폰이 없기도 했고, 필름카메라로 기록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나의 경우도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음식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2001년 4월달이다. 그때만 해도 음식을 먹기 전에 사진을 찍는 것은 거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고, 여행을 가도 여행지 사진은 찍었지만 음식 사진을 찍는 것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었다. 요즘은 음식사진을 자주 찍고 있어서, 언제 그동안의 음식 사진을 날짜별로 정리해서 올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더 늦기 전에 이렇게 한 곳에 모으려고 한다.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한 다음 찍은 음식 사진 가운데 가장 먼저 올릴 만한 사진은 2001년 11월 21일에 외식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이때는 우리가 부천 중동신도시에 살 때여서 근처에는 음식점도 많았고 백화점과 대형할인매장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밖에 나가기만 하면 음식점이 줄지어 있을 때였다. 게다가 주말이면 거의 외식을 할 때여서 사진을 찍으려 마음 먹었다면 꽤 많은 음식 사진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나마 음식 사진으로 볼 만한 것은 공항가는 길에 있는 아웃백 스테이크에서 찍은 것으로, 디지털카메라 성능이 썩 좋지 않아서인지 화질도 떨어지고 해상도도 낮다. 그래도 이런 사진이 있으니 오래 전에 우리가 어디에서 무얼 먹었는지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네 식구(어머니가 계셨으니)가 주말 외식을 하러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항가는 길에 있던 아웃백스테이크는 한국에서 가장 처음 문을 연 곳으로 유명하다. 이때 이후에 몇 번 가보고는 아웃백스테이크와는 영영 이별을 하고 말았다. 아웃백스테이크에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은 스테이크보다는 양파튀김과 빵이었다. 빵이 참 맛있었고, 무한 리필까지 되었으며, 따로 판매를 해서 개당 1천원씩 사 먹었던 기억이 있다. 스테이크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맛은 레스토랑에서 먹는 스테이크보다는 못했다. 가족들이나 친구, 소규모 회식 등의 모임을 할 때 패밀리레스토랑인 아웃백스테이크는 인기가 있었다. 아웃백스테이크는 지금도 활발하게 영업을 하고 있으니 언제 기회가 되면 아주 오랜만에 한번 가봐야겠다.
    • 여행/음식
    • 경기
    2021-12-13
  • 양평에서 한정식을 먹다
    양평에서 한정식을 먹다 저녁밥을 먹으러 옥천에 있는 생선구이 전문점으로 갔으나, 마침 수요일은 휴일이라고 해서 바로 그 앞에 있는 한정식 식당으로 갔다. 우리가 간 한정식 식당은 개업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깨끗한 건물이다. 옥천 용천리에 있는 이곳은 바로 앞에 개울이 흐르는데, 그 개울 이름이 '사탄천'이다. 개울의 발원은 용문산이고, 사나사 계곡을 통해 흘러 내리고 있다. 옥천 용천리를 흐르고 있는 개울 이름이 '사탄천'. 뭔가 아스트랄하다. 새로 문을 연 이 한정식 식당은 메뉴가 단 한 가지. 그냥 한정식이다. 식당 안에는 메뉴도 없고, 가격표도 없다. 고민할 필요 없으니 좋은 점도 있지만 가격표가 없는 건 좀 아쉬웠다. 식사를 주문하자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채소 샐러드와 해파리냉채. 샐러드의 소스는 새콤한 맛이어서 입맛을 돋우고, 해파리냉채 역시 새콤하고 코를 톡 쏘는 겨자맛이다. 뒤이어 나온 것은 해물파전과 생선강정. 세번째로 나온 것은 메밀전병. 김치속이 들어 있어 매콤하면서 맛있다. 밑반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치가 슴슴하게 맛있었다. 달걀찜도 괜찮았고, 버섯무침과 멸치볶음도 나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간은 싱거운 편이었고,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거나, 아주 적게 쓰는 듯 했다. 밥은 솥밥으로, 누룽지가 생겼고, 여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 누룽지를 만들어 먹으면 구수하고 훌륭한 맛이다. 밥은 흰쌀이고 고구마가 세 조각쯤 들어 있다. 식사를 마치면 수정과가 후식으로 나온다. 1만5천원이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지만, 가격표와 한정식 차림의 사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제 시작이라 준비를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 여행/음식
    • 경기
    2021-12-13
  • 매실을 어떻게 먹을까
    매실을 어떻게 먹을까 매실을 발효액으로 담가 먹는 것은 퍽 좋은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매실을 먹기도 하지만, 발효액으로 만든다는 것은 '발효'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매실 액기스'라고 하는 건, 매실과 설탕을 1대1로 섞어 약 100일을 발효하면 액기스가 생기고, 그 액기스를 물에 타 마시거나, 원액을 천연양념으로 쓰기도 합니다. 또한 매실은 과육을 벗겨 장아찌로 먹기도 하고, 매실 씨는 베개 속에 넣기도 합니다. 이렇게 두루 쓰임이 많은 매실을 담그는 방법은 거의 천편일률인데, 아마 아래와 같은 방식이 보편적이지 않을까 합니다.1. 매실을 깨끗이 씻어 말린다.2. 꼭지를 뗀다-이쑤시개를 쓰거나 바늘을 쓴다.3. 잘 마른 매실에 소주를 스프레이 한다. 스프레이 건에 소주를 넣고 매실 위에 뿌린다.(이 단계는 하지 않는 분도 있을 겁니다.)4. 매실과 설탕을 1대1로 넣고 버무린다. 이때, 버무리지 않고 그냥 매실을 넣고 그 위에 설탕을 붓는 방식을 쓰기도 합니다.5. 매실을 담는 용기는 플라스틱통, 유리병, 항아리 등을 이용한다.6.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로 올리고, 마지막에 설탕으로 덮는다.이렇게 해서 뚜껑을 봉하고 약 100일 정도를 그냥 두는 경우도 있겠지만, 가끔 통을 휘저어 가라앉은 설탕과 매실을 잘 섞어주기도 합니다. 저는 잘 섞어주는 방법을 선택합니다.이제, 약 100일이 지나고 매실 알맹이를 꺼내는 사람이 있겠습니다. 꺼낸 매실 알맹이는 과육과 씨를 분리해서 과육은 장아찌로 만들어 먹고, 씨는 잘 말려서 베개 속으로 쓰면 되겠죠?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매실 발효액 담그기'라고 하면 통상 위에 적은 내용에 따라 만들었을 것입니다. 저도 물론 그랬구요. 하지만 올해부터는 다르게 담을 생각입니다. 어떻게 할 작정이냐구요?1번부터 3번까지를 하지 않습니다. 즉, 매실을 물로 씻지 않고, 꼭지도 떼지 않고, 소주로 스프레이도 하지 않습니다.또한, 100일이 지나서도 매실과 액기스를 분리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3개월이 지나 꼭 마셔야 한다면 위와 같은 방법으로 '매실 발효액'을 담가 드시면 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좀 더 오래 놔두는 방법을 선택해도 됩니다.어떤 설탕을 넣을 것인가?매실 발효액은 물론이고, 설탕을 넣는 모든 발효액은 설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유통되는 설탕은 메이저인 제일제당과 삼양의 설탕이 있고, 국내 업체에서 유통하는 유기농 설탕이 일부 있으며, 최근 쿠바와 브라질 등에서 수입하는 유기농 설탕이 있습니다.또한, 설탕보다는 덜 달지만 몸에는 더 좋다는 '원당'이 태국에서 수입되고 있기도 합니다.어떤 설탕을 넣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담가 먹는 경우에 따라 들어가는 설탕의 종류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일반적으로 100일 동안 발효를 해서 먹는 매실 발효액의 경우, 즉, 발효 시간이 짧을수록 좋은 설탕을 써야 합니다. 발효가 100일 정도 진행되었다면 '충분한 발효'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즉, 매실 액기스 안에는 여전히 설탕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실 액기스를 먹는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설탕을 함께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설탕의 성분이 중요한 것입니다.짧은 기간-약 100일-에 먹는 매실액이라면 유기농 설탕이나 원당을 쓰는 것을 권하고, 장기간 발효를 한다면, 일반 백설탕을 써도 전혀 상관 없습니다.설탕은 발효를 일으키는 미생물의 먹이이기 때문에 설탕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당이 분해되면서 단당으로 바뀌게 되면, 처음 넣은 설탕은 화학적 반응을 통해 우리 몸에 해로운 성분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만드는 것이 '진짜 매실 발효액'일까 설탕이 완전히 분해되어 포도당으로 변하려면 적어도 3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효소학'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다당->이당->단당으로 바뀌는 과정이 '발효'인데, 이 과정에서 '당'은 완전히 분해되어 몸에 이로운 '포도당'으로 바뀌게 됩니다.그러면 매실은 어떻게 될까요? 담가서 100일 정도된 매실은 좀 쪼그라들긴 하지만 그래도 과육은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실 과육을 먹을 게 아니라면 오래 그냥 놔두는 것을 추천합니다.발효의 초기 단계에서 매실과 설탕은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매실 과육의 수분이 빠져나오게 됩니다. 100일이 되면 매실의 과육에서 수분이 충분히 빠져나왔다고 보는 건데, 많은 사람들이 매실 씨에는 독 성분이 있어서 너무 오래두면 안된다고 하는데,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100일이 지나고, 1년이 지나면 '역삼투압 현상'이 나타납니다. 즉, 매실에 있던 수분이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시기가 끝나면, 반대로 밖에 있던 매실 액기스들이 매실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즉, 좋은 성분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흠...이거 고급 정본데... 따라서 빨리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 않았다면, 매실을 오래 묵힐수록 좋은 발효 액기스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래 묵힐 매실 발효액이라면 설탕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사용해도 됩니다. 물론, 유기농 설탕을 쓰면 더 좋겠지만, 굳이 유기농 설탕이 아니어도, 모든 설탕은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분해되어 '단당'으로 바뀌기 때문에 우리 몸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검증된 이론입니다. 설탕의 역할은 '효소의 먹이'입니다. 발효 과정에서 효소들이 먹을 먹이가 필요한데, 설탕이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효 기간이 짧을수록 좋은 설탕이 필요한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고, 기간이 길어지면 설탕의 종류는 관계없게 됩니다.매실과 설탕의 비율은 계절, 날씨, 온도, 습도, 빛의 농담 정도에 따라 상당히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설명하면, 봄, 가을에는 1대1로 맞추고, 여름에는 매실1에 설탕 1.2가 적당하고, 겨울에는 매실1에 설탕0.7이 맞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도 절대적인 이론은 아닙니다.또한, 여름처럼 온도가 높을 때는 설탕을 한꺼번에 많이 넣는 것보다는 처음에는 절반을, 그리고 발효되는 상황을 보면서 설탕을 몇 번에 나눠 추가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이렇게 하려면 발효에 관한 지식이 좀 있어야 하니까, 이런 방법이 어려운 사람은 그냥 한꺼번에 넣어도 됩니다.작년에 담근 매실 원액을 가져간 가족이 맛있다고 해서 올해도 좀 많이 담가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매실 맛있게 담가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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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2021-12-13
  • 손석희를 떠나보내며
    손석희를 떠나보내며 한동안 칩거했던 손석희 전 JTBC 사장이 오늘 MBC '시선집중'에 출연해 인터뷰했다. 앞으로도 '사장'에 준하는 직책으로 '순회특파원'이 되어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닌다고 하니, '특파원'이라는 이름을 걸고 세계를 두루 돌아볼 예정으로 보인다. 오랜 동안 한국 최고의 언론인으로 손꼽히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손석희는 과거 MBC의 언론노조에서 언론민주화를 위한 강력한 투쟁의 선두에 섰던 행동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손석희 씨를 알게 된 이후-1990년 무렵부터-줄곧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며 그의 언론활동을 지켜보며 응원했다. 그는 '시선집중', '100분 토론' 같은 프로그램에서 탁월한 진행자였으며, 언론인의 귀감이자, 모범이고, 전범같은 인물이었다. 그런 손석희가 MBC를 떠나 'JTBC'로 간다고 했을 때, 그의 이적을 두고 사람들은 설왕설래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보다는 훌륭하게 JTBC에서 뉴스는 성공적이었고, 보도 내용도 중립을 유지하며, 바람직한 언론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이 끝날 때까지, 손석희와 JTBC는 한국의 기울어진 언론 운동장에서 그나마 반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부터 손석희와 JTBC는 촛불시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손석희 개인도 크고 작은 스캔들에 휘말리기 시작했고, 그때문인지 JTBC의 보도 내용도 점차 우려스러운 형태로 변질되어갔다. 사람은 변한다. 변하되, 어떻게 변하는지, 중심을 잃지 않았는지, 시류에 영합하거나, 영혼이 타락했는지, 고루하거나 보수적으로 바뀌지 않았는지 스스로 경계하며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언론인 손석희'를 그동안 봤을 뿐이고, '개인 손석희'에 관해서는 거의 모른다. '개인 손석희'는 후배 언론인과 술을 마시다 싸우고, 성범죄를 저지른 조주빈의 협박을 받고 돈을 송금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손석희가 과거와 달리 수구 꼴통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손석희라는 강력한 사회적 힘을 지닌 사람이, 자신의 영향력을 사회와 정의, 진보를 위해 사용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촛불 정국에서 박근혜 탄핵에 결정적 한방을 날렸지만, 조국 전 장관과 가족이 당하는 박해와 수모에 관해서는 기계적 중립을 지키거나 오히려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개인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다. 그것은 '역사의 물결 위에 잠시 나타나는 물방울'일 수도 있고, 물결 위를 떠다니는 나뭇잎 같은 존재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대가 끝나면 영웅도, 물방울도, 나뭇잎도 사라지게 된다. 손석희는 박근혜를 탄핵한 촛불과 함께 타올랐다 사라지는 존재였다. 거기까지가 손석희의 사회적, 역사적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손석희는 여전히 JTBC에 몸담고 있으며, 월급을 받으며 세계여행을 할 것이고, 돌아와서 책을 쓰고, 대학강단에 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손석희는 어쩌면 '유시민'을 롤모델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유시민도 강하면 부러진다는 생각을 나이들면서 하게 된 사람이다. 유시민 같은 강성 운동권이었던 사람도,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고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손석희도 과거에는 언론 민주화 투쟁을 가열차게 했으나, 이제는 한국사회의 1% 기득권이 되었고, 세상이 더 이상 변하지 않아도 좋은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필연적으로 보수화한 것이다. 그런 손석희를 이제는 떠나보낸다. 그가 살았던 시대, 우리가 살았던 시대는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의 엄혹한 시기였고, 민주화투쟁의 시기였으며, 경제가 발전하고,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경제적 발전이 중요하던 시기였다. 손석희는 건강한 의식을 가진 청년이었으나 언론인이었고,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큰 이름을 얻었으며,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내려놓으려 하고 있다. 그가 얻었던 크고 강한 이름을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쓰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쉽고 안타깝지만, 자신의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마땅히 이해하게 된다. 이제 '개인' 손석희로 돌아가 편안한 삶을 누리시기 바란다.
    • 칼럼
    • 백건우
    2021-12-13
  • ‘종전 선언’ 효과와 국내외 반응 예상
    ‘종전 선언’ 효과와 국내외 반응 예상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체스코 교황을 만나 남북한 문제에 적극적인 역할을 바란다는 의견을 표명했고, 프란체스코 교황은 문재인 대통령의 의견에 매우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는 2022년 5월 9일까지니까, 지금부터 꼭 6개월 남았다. 문재인 정부 5년을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종전 선언’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공개했다. ‘종전 선언’과 ‘평화 협정’과 관련해서는 이미 노무현 정부에서도 시도한 바 있으며, 이때 미국과 중국이 반대하면서 노무현 정부의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현재 상황도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종전’과 관련해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종전 선언’을 해도 남북한의 급격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으며, 현재 상황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종전’은 남북한 관계에 상징적 의미와 함께 평화 협정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 분명하다. ‘종전 선언’과 관련해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을 정리했다. 이 주제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1. ‘종전 선언’ 자체 효과 2. ‘종전 선언’ 이후 ‘보수’ 진영의 반발 3. ‘종전’을 둘러싼 주변국 반응 4. ‘종전’ 이후 나타나는 구체적 현실 -------- 1. ‘종전 선언’ 자체 효과 1 ‘종전 선언’의 효과 두 가지는, 1) 남북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게 되고, 2)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이 임기 말까지 지속되어 레임덕 현상이 사라지는 것, 3) 종전과 북한 문제에 관한 프레임을 민주당이 주도한다는 것이다. 1)의 경우, 이미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중에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남북한 문제에 관한 깊은 논의를 한 바 있고, 남북한의 기본 인식을 확인했다. 즉, 남북한은 무력이 아닌, 대화를 통해 긴장을 완화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남북한 교류의 필요성을 공감했으며, 남북한이 평화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 동북아시아 미래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다만, 문재인·김정은 두 수뇌의 회담 이후,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던 것은 미국 국내의 정치 상황 변화 – 트럼프 대통령 재선 실패 – 와 미국 매파의 강경한 대북 입장의 고수, 한국 내부의 보수 진영에서 일어나는 반발 그리고 일본의 악의적이고 끈질긴 남북한 대화, 교류 반대 로비 등으로 지금까지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많이 늦긴 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 선언’ 카드를 꺼내 든 것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지금까지 남북문제의 연속선에서 중요한 화두를 제시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고, 실질적 효과나 결과를 기대하기보다는, 차기 정부-이재명 정부-에서 ‘종전 선언’ 카드를 이어받아 실질적 결실을 맺도록 포석을 까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2)의 경우, ‘종전 선언’ 카드가 아니어도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까지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레임덕 없는 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칠 확률이 매우 높다. ‘종전 선언’은 레임덕 없는 문재인 대통령이 추진할 수 있는 가장 영향이 크고 효과 있는 대외 정책이다. 현 정부에서 ‘종전 선언’의 토대를 착실하게 다지는 것은, 다음 민주당 정부(이재명 정부)가 대북 정책을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되고, 효과가 빠르게 나타날 거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3) ‘종전 선언’ 카드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남북문제를 환기하는 효과가 있다. 북한과 관련한 의제, 논의, 협의, 선언, 뉴스 등이 한국 사회에서 언급되는 것 자체로 북한에 대한 공포와 혐오의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효과가 있으며, 북한이 ‘한민족’이고, 함께 살아야 할 겨레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효과가 있다. 노인 세대는 북한을 두려워하거나 혐오하고, 청년 세대는 북한에 무관심하거나 막연히 싫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북한에 관해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 정부에서 북한과 관련한 사업을 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 이제는 ‘북한 바로 알기’를 통해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할 때이며, 가장 좋은 방법은 남북한 국민이 직접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2. ‘종전 선언’ 이후 ‘보수’ 진영의 반발 2 ‘종전 선언’을 반대하는 쪽의 입장을 정리하면 큰틀에서 다음과 같다. 1) 문재인정부를 반대하는 ‘국민의힘’과 그 지지집단과 지지자들, 2) 반공 이념에 사로잡혀 북한과의 어떠한 교류도 반대하는 반공주의 강경파들, 3) ‘종전 선언’을 결사반대하는 일본과 일본을 지지하는 국내 친일매국노들, 4) 무조건 북한을 찬양하면서 북한의 무력을 신봉하는 정신나간 NL 멍청이들. 여기에서 1), 2), 3)의 집단은 교집합이 많아서 대부분 중복된 집단과 개체들이다. 즉, ‘국민의힘’은 현 문재인 정부에 대한 무조건 반대와 함께 북한과의 대립, 갈등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과거,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북한과 비밀로 접촉해 북한 쪽에서 무력시위를 해 달라는 음모를 꾸몄는데, 권력을 차지하려 그들이 규정한 ‘적’과 내통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서슴지 않는 악랄한 행태를 보인 바 있다. ‘국민의힘’은 통일과 남북 교류를 반대하고, 북한과의 갈등과 긴장이 유지되길 바라는 반통일세력으로, ‘종전 선언’ 역시 악착같이 반대하고 있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가장 큰 세력은 50대 이후의 구세대다. 그들은 박정희 독재 시대에 짙은 향수를 품고 있는 집단이며, 전쟁의 공포, 보릿고개, 새마을운동 같은 전근대 국민국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세대로, 이성과 논리, 합리성에 근거해 남북한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노력보다는 감정, 감성, 경험적 판단으로 북한과의 접점을 거부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이들 가운데는 전쟁(한국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 여전히 생존하며, 설령 전쟁을 겪지 않았더라도, 전쟁에 준하는 공포와 고통을 겪은 세대여서, 북한에 대한 근원적, 원초적 공포와 증오를 품고 있다. 여기에 1960년, 4.19혁명 이후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후, 철저한 ‘반공주의’를 내세워 공포정치를 한 것도 이들이 북한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큰 원인 가운데 하나다. 전후 20년 사이(1951-1971) 태어난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에서 ‘반공’에 관한 이념을 주입 당했으며, 북한을 괴물로 만들어 공포와 증오의 감정을 키우도록 교육받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 진학률은 30% 이하에 불과했고,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 노동운동은 1970년 전태일 열사의 산화 이후라고 할 정도로 박정희 독재의 폭력은 한국 사회를 강하게 짓눌렀다.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의 주역들 역시 지식인 사회에서 시작했으며, 전태일 열사 이후 노동운동도 지식인들이 현장으로 뛰어들면서 확산하기 시작했다. 즉, 절대다수의 민중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의 폭압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생존을 위해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은 독재 권력이 만든 프레임에 갇혀 북한을 증오하는 교육만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의 50대 이후 세대는 북한의 실체를 모른 채 공포와 증오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북한은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보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앞서 있었고, 이런 자신감으로 한국을 깔보고, 무장, 고정 간첩을 자주 내려보냈다. 북한은 무장 부대를 한국에 침투시켜 남한 사회를 교란하고, 박정희를 암살하려 시도했으며, ‘무력 통일’에 관한 희망을 70년대까지 버리지 않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전두환은 권력을 장악하고,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로 ‘반공’을 더욱 강하게 부르짖었고, ‘평화의 댐’ 같은 사기를 공공연히 벌인다. 1997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은 외환 위기를 겪으며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지만, 이 어려움을 빠르게 극복하고 2000년대를 맞이한다. 이때부터 시민 의식이 건강하게 발전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반공’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박정희에게 암살당하기 직전까지 갔던 경험을 했고, 경제력으로만 보면, 1980년대 이후 한국은 비록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이라는 정치적 한계 속에서도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 무렵 세계 경제 흐름이 전반적으로 호황이었고, 수출주도 경제체제를 가진 한국은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을 기반으로 수출 경제가 호조를 보이면서, 70년대의 빈곤과 낙후함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김대중 정부는 정보통신 인프라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2000년 6월, 북한 김정일과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바로 직전의 정부였던 김영삼 정부에서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이 안타깝게 불발된 것에 이은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특징과,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남북한의 미래에 관한 밑그림을 그렸다는 의미가 있다.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다시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을 했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김정은 위원장과 무려 세 번이나 정상회담을 했다.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역대 대통령-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은 모두 남북 정상회담을 하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국민의힘’은 기본적으로 북한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종전 선언’을 반대하는 집단 가운데는 ‘개신교’ 집단도 있다. 이들은 철저한 반공 이념을 내세우며, 남북통일을 반대하고, 북한과 교류하는 것도 가로막는 수구 집단이다. 이들의 행태는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바탕이며, 한국 ‘보수’집단의 원천이자, 반개혁, 반민주주의 집단으로,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걸림돌이 되는 존재다. 한국개신교의 뿌리는 북한에서 내려온 개신교도로 시작한다고 봐도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개신교가 전파되는 경로와 과정을 보면, 평양을 중심으로 확산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구한말 이후 개신교는 주로 교육 사업을 통해 선교 활동을 한다. 초기 개신교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민중에게 도움이 되는 활동을 펼친 것을 부정할 수 없으며, 망해가는 국가가 할 수 없는 복지 사업을 펼쳤다. 19세기에 들어온 구교(카톨릭)가 조선 정부에 의해 강하게 박해당한 것과 비교하면, 개신교는 훨씬 좋은 조건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부터 개신교의 주류 세력은 친일을 선택했고, 극히 일부 개신교도가 독립운동에 개별적으로 참여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북쪽으로 쏘련군이 진주하고,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해 서로 다른 이념을 바탕으로 사회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북쪽의 개신교 집단은 쏘련군과 김일성이 주도하는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다. 북쪽에서 내려온 개신교도들은 자신을 핍박한 쏘련군과 김일성 체제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고, ‘한국전쟁’은 개신교도들이 ‘반공’을 신념화하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1945년부터 1950년 사이에도 북한에서 내려온 개신교도들이 중심이 된 ‘서북청년단’이 남한의 좌익,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고, 때려잡는데 가장 앞장섰다는 사실만 봐도, 북한 개신교도 집단이 품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강렬한가를 알 수 있다. 이들은 제주도에서도 ‘제주4.3항쟁’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고, 제주도민을 참혹하게 학살하는 주체였다. 해방 이후 남북한의 이념 대립이 격렬해지고,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개신교 집단은 ‘기독교 정신’과는 반대로 국민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집단이다. 지금까지도 개신교 단체는 한국전쟁 전후에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 만행에 관해 단 한 마디의 사죄를 한 적이 없는 것을 봐도, 이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랄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다. 이때 대통령인 이승만도 개신교도였고, 경무부장 조병옥도 개신교도였다. 이들 극우 개신교 집단은 이후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를 지지했으며, 독재정권을 미화, 찬양했고, 전두환 군부쿠데타를 지지하고 찬양했다. 또한 서울시와 대한민국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공공연하게 천명한 이명박과 황교안도 개신교도였다. 지금 광화문에서 태극기, 성조기, 일장기, 이스라엘기를 들고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는 시위대의 앞장에는 개신교 목사가 있고, 개신교도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으며, 50대 이후의 노인들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어 피리 소리를 따라가는 들쥐들처럼 쫓아다니고 있다. 4 한국에는 오래전부터 자생적 북한 추종자가 있었다. 박정희, 전두환의 ‘반공’ 대결이 격렬할수록 그에 반대하면서, 북한을 미화하고, 김일성을 우상으로 섬기는 개인 또는 집단이 있었는데,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서 ‘민족해방(NL)’그룹으로 표출되었다. 북한과 김일성을 추종하는 개인, 집단은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이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앞서 나갔고, 한국(남한)에서는 하지 못한 친일파 청산과 평등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에 큰 관심과 지지를 보냈다. 또한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이 저지른 인권 탄압, 노동자, 학생의 민주주의 운동을 폭력으로 짓밟은 행위, 북한을 그대로 따라 한 ‘새마을운동’ 같은 사이비 사회운동, 일부 자본가, 부르주아 계급에게만 이로운 경제 개발 계획 등 박정희에 대한 반감, 분노의 감정이 상대적으로 북한과 김일성에 대한 찬양으로 나타났다. 박정희 독재에 맞서는 반정부 투쟁의 한 방법으로 북한 체제를 찬양하고, 김일성의 존재를 우상화하는 방식은 공포의 존재(박정희)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다른 대상(김일성)을 찾아 이상화하는 사회적, 집단 정신병의 하나다. 건강한 시민이라면, 박정희, 전두환 독재에 맞서 피를 흘리며 싸울지라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본다. 하지만 북한(김일성)을 찬양하는 자는 자기가 사는 사회(남한)의 모순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다가갈 수 없는(이상적 사회) 북한과 김일성을 이상화하는 것으로 자기의 불안과 공포, 분노를 정당화한다. 북한을 찬양하는 자들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한국전쟁에서 패한 이후, 남로당 계열의 공산주의자를 ‘미제의 앞잡이’라는 누명을 씌워 김일성이 모두 숙청했을 때도, 김일성이 옳다고 박수를 쳤다. 김일성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폐기하고, ‘주체사상’을 내걸었을 때도, 북한이 정통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봉건주의 국가로 퇴화하는 걸 보면서도, 무비판으로 북한을 찬양했다.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무조건적 신앙’을 요구하는 종교의 신도와 같다. 종교, 신앙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신은 절대적 권위와 힘을 가진 존재이며, 아무 근거 없이 신의 말을 믿고, 신의 권위에 복종한다. 북한(김일성)을 추종하는 자들은 맹목의 종교 미신을 믿는 자들과 똑같은 심리 상태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하고, 군사력은 세계6위, 국가경제력은 세계10위의 잘 사는 나라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북한 체제가 우월하다고 믿으며, 북한이 한국(남한)을 무력으로 해방 시킬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말하는 ‘종전 선언’이 의미 없다고 주장하며,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것으로 이미 실질적 ‘종전’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은 군사력으로 28위에 불과해 재래식 무기로 한국군과 상대가 될 수 없는 수준이다. 남북한의 경제, 군사력 수준을 객관으로 볼 능력도, 의지도 없는 무지한 인간들이 북한을 찬양하고, ‘종전 선언’에 반대하는 것이다. 3. ‘종전’을 둘러싼 주변국 반응 5 ‘종전’은 남북한의 뿌리 깊은 갈등과 대립의 원인이었던 ‘한국전쟁’을 끝내는 상징적 행위다. ‘한국전쟁’도 단지 남북한의 이념 문제가 아닌, 1945년 2차 세계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유럽과 미국으로 대표하는 자본주의 국가들과 쏘련과 중국으로 대표하는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 팽팽하게 대립한 이데올로기의 대리전쟁이라는 점에서, 한국전쟁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충돌 지점이자, ‘냉전’이 실제 전쟁으로 표출한 이념 전쟁이기도 했다. 남북한을 둘러싸고 있는 쏘련, 중국, 일본과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한국전쟁’은 명백히 강대국의 대리전쟁이자 동북아 패권 전쟁이었으며, 자칫 3차 세계전쟁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심각한 전쟁이었다. 실제 미군을 포함해 UN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는 무려 25개국에 이른다. ‘한국전쟁’ 발발 원인은, 김일성이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일으킨 게 발단이었지만,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쏘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을 만나 남한을 ‘공산화’하겠다는 계획을 설명했고,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았다. 김일성은 남한을 공격하면 남한 내부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봉기해 남한 내부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북한군과 협력하여 남한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이승만은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했던 지식인, 학생, 시민을 ‘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 가입시켰고, 전쟁이 한창일 때, 이들을 모두 학살했다. 이때 ‘빨갱이’ 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이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30만 명에 이른다. 1951년부터 ‘휴전 협정’이 시작되었지만, 정작 한국은 휴전 협정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전쟁은 한국에서 벌어졌는데, 휴전 협정에는 북한, 중국, 미국이 테이블에 앉아 회담을 했고, 주인공인 한국은 배제되었다. 이것은 이승만이 미국에 전시작전권을 양도한 것에 따른 결과로, 이때 이미 한국은 미국에 복속된 존재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70년이 넘었다. 전쟁 직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보다 더 가난했던 한국은 지금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군사력 세계 6위의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로 성장했다. 너무 가난했던 과거 한국은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지 못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한국은 우리의 미래와 우리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휴전 협정’은 미국, 중국, 북한의 사령관이 합의했다면, ‘종전 선언’은 남북한 지도자의 결단으로 가능하다. ‘종전 선언’을 둘러싸고 한국의 주변국이 보일 태도에 관해서 알아보자. 6 일본은 2차 세계전쟁의 패전국이고, 핵폭탄을 맞은 유일한 국가다. 나라가 초토화되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급속한 경제 회복, 경제 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은 자발적으로 미국의 애완견이 되어 미국의 도움으로 경제 발전을 이룩했고, 한때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 되기도 했다. 일본은 15세기부터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과 교역했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년, 정유년 전쟁’ 이전에 포르투갈로부터 화승총을 구입하고, 화승총 제작 기술을 배우면서, 무력에서 조선을 앞서기 시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내부의 호족들, 지방 토호 세력을 통일하면서, 내부의 불만을 바깥으로 표출시켜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목적과 당시 유럽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으로 몰려와 항구를 개방하고 교역을 확대하라는 압력을 받으면서, 가장 가까운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수립한다. 이미 ‘임진년 전쟁’ 이전부터 일본 남부의 바닷가에 살던 토호 세력들 가운데 조선의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와 노략질하는 일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지만, 국가 단위의 전쟁은 ‘임진년 전쟁’이 최초였다. 일본은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길을 내달라고 요구했고, 당연히 조선 조정은 일본의 요구에 반대했다. 7년에 걸친 전쟁에서, 일본은 초기 전투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곧 조선의 반격에 밀리기 시작하며 전쟁은 혼전 상태가 된다. 임진, 정유년 전쟁의 결과, 조선도 지배 계급의 몰락, 경제, 사회의 급격한 변화, 계급 구조의 약화 등 17세기에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원시적 태동과 상인 계급의 출현, 신분제 사회 구조의 변화 등을 겪지만, 조선 왕조는 끊이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 내부의 토호 세력들도 기세가 급격히 꺾이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게 된다. 일본은 조선과의 전쟁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 직전에 이르렀으며, 쇼군들의 권력 투쟁으로 일본 사회는 몹시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일본은, 독일과 영국을 모델 삼아 근대국가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첨단 기술을, 영국에서는 정치와 사회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 특유의 ‘천황제’에 근간한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데, ‘천황제’는 영국의 입헌군주제의 변형이며, 내각제를 바탕으로 한 수상이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는 건, 독일의 정치체제를 모방한 것이다. 일본이 곧바로 군국주의로 탈바꿈하게 되는 바탕에는 독일의 ‘철의 수상’ 비스마르크와 히틀러의 존재를 본받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부터 일본은 아시아 여러 나라를 폭력으로 점령하기 시작했고,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재화를 통해 일본 경제는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는 이미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남미 등의 국가를 침략해 식민지 침략으로 ‘원시적 자본’을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국가의 부를 축적한 일본은 더욱 야망을 키워 중국과 러시아까지 침공하게 된다. 2차 세계전쟁에서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된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국가를 재건하고, 한국과 북한의 이념 대립과 갈등 상황을 통해 아시아의 맹주로 자리 잡는다. 일본은 미국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두고, 외국의 기술을 도입해 미국과 유럽 시장에 저렴한 상품으로 수출해 돈을 벌기 시작했고, 이것은 나중에 한국 등 후발주자이자 제3 국가의 성장 모델이 된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조선, 대한제국, 한국으로 이어지는 한반도를 어떻게든 침략하거나 정치, 경제적으로 식민지 상태로 지배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일본은 ‘섬’이라는 지리적, 물리적, 지정학적 위치를 벗어나려는 강렬한 본능이 있으며, 그 본능의 밑바닥에는 일본이 아주 오래전부터 지진, 화산으로 심각한 자연재해의 피해를 본 경험이 누적된 것도 있다. 한국과 북한이 ‘종전 선언’을 하게 되면, 곧바로 평화, 화해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고,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하는 것도 일본에게는 불안하지만, 남북한이 경제공동체로 엮이면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로 성장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 아시아의 맹주로 자처하는 일본이 한국에게 추월당하고, 일본이 한국보다 경제,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서 뒤처지게 되는 현상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은 한국과 북한이 긴장과 갈등으로 군비 경쟁을 지속하면서, 나라의 재화를 낭비하고, 내부 문제에 신경 쓰느라 국제 관계에 소홀하기를 바라고 있다. 특히 남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일본에게는 가장 좋은 상황이다. 남북한이 전쟁하면, 일본은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고, 마당 쓸고 돈 줍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석오조의 이익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선 선언’을 가장 반대하고, 싫어하고, 훼방을 놓을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북한 ‘종전 선언’을 반대할 것이며,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통로를 가동해 ‘종전 선언 반대’ 전략을 펼칠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 우파, 매파, 한국의 수구, 친일매국 집단 – 정당, 언론, 학계 등 –을 총동원할 것으로 보인다. 7 미국은 보수, 우파, 매파 진영에서 남북한 ‘종전 선언’을 반대하고 있다. 특히 무기 자본의 로비를 받는 매파 집단은 남북한 ‘종전 선언’을 극렬 반대하며, 북한과의 대화, 협상, 협의도 거부한 상태다. 미국은 과거 쿠바에게 했던 강력한 경제 제재를 북한에게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으며, 북한을 말려 죽이는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 미국이 ‘종전 선언’에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남북한이 화해하고, 교류를 시작하면 동북아시아에서 긴장이 사라진다. 이것은 미국에게 두 가지 이유에서 나쁜 징조인데, 1) 중국을 견제하는 완충지대로써 한국의 지형적 위치가 의미를 잃는 것, 2) 남북한이 군사적 긴장을 유지할 때 얻게 되는 무기 판매와 미군 주둔으로 얻는 경제적 이익이 사라진다. 과거 중국은 인구만 많을 뿐, 경제, 군사 분야에서는 미국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우스운 상대였다. 하지만 현재의 중국은 미국,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 3위의 군사 대국이고, 경제력도 머지않아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할 정도로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뤘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은 역시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군사 대국이 되었는데, 군사 분야, 핵폭탄 보유, 과학 기술 분야 등에서 미국을 턱밑까지 쫓아온 것은 분명하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동맹으로 일본을 키웠고, 한국을 먹잇감으로 내놓는 것이 전략이었는데, 일본은 경제, 군사 분야에서 한국에 따라잡히고, 한국은 스스로 경제, 군사 강국이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동북아시아 동맹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고, 남북한의 ‘종전 선언’이 미국이 바라는 그림은 아니지만, 한국이 자주적 전략을 펼칠 때, 강력하게 반대, 제재할 명분과 수단이 마땅치 않다. 과거에는 미국이 한국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수단으로 경제(수입, 수출, 금융)적 압력을 썼지만, 한국의 수출 다변화 정책으로 미국과의 무역은 14.5%에 불과해서 예전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한국은 중국과 홍콩, 대만을 합해 약 35%에 이를 정도로 비중이 높아진 것을 감안하면, 미국의 입김은 약할 수밖에 없고, ‘종전 선언’을 반대할 명분도, 설득력도 약하다. 8 중국은 전통적으로 한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중국이 사회주의국가 체제를 유지하지만, 경제는 자본주의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중국과 한국은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군사적 대립이나 긴장 관계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중국과 북한은 ‘혈맹’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놓인 북한을 적극 지원하는 것도 중국이다. 국경선을 맞대고 있어 교류가 쉽고, 지린성(길림성)은 조선족 자치주여서 중국과 남북한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중국공산당은 혁명 과정에서 한국(그때는 남북한 구분이 없었다) 공산당의 지원을 받았고, 한국 공산당원들은 중국 혁명에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그래서 ‘한국전쟁’ 때 중국공산당은 ‘인민해방군’을 파병했으며, 김일성을 적극 후원했다. 1990년 이후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하면서, 중국은 거대한 경제시장이자 무역 상대국으로, 중요한 국가가 되었다. 중국은 덩샤오핑이 주창한 ‘흑묘백묘론’을 토대로 시장경제(자본주의 경제)를 받아들였고, 원시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공장’, ‘세계의 굴뚝’이라는 말을 들으며, 중국 인민을 저임금 노동자로 경제시장에 방출했다. 남북한의 ‘종전 선언’이 중국에 어떤 형식으로든 직접 영향을 끼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이 불편하게 여기는 건, 미국이 남한(한국)에 군사기지를 확장하는 것이고, 미국이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려는 압박 때문인데, 이것은 중국과 러시아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과거 쏘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이 온통 발칵 뒤집혔던 사건을 돌이켜보면, 중국과 러시아의 턱밑에 있는 한국에 미국의 미사일 기지가 생기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 않은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남북한 ‘종전 선언’이 한편에서는 미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중국과 러시아에게도 긍정적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즉, 남북한이 평화를 유지하고, 경제 교류를 시작하면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 상태가 사라지고, 이것은 곧 미국의 패권이 직접 작용할 원인이 제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국은 남북한 ‘종전 선언’에 적극 찬성하지 않아도, 강하게 반대하지도 않을 것으로 보인다. 9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한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고종이 ‘아관파천’을 했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일부는 사회주의자로, 쏘련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레닌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일제강점기 때 쏘련 영토로 이주했던 한국인들을 연해주로 강제 이주한 것과 대한항공 007 여객기를 격추한 사건처럼 분명히 한국과 한국 국민에게 잘못한 점도 있었다. 한국은 러시아와 1990년에 국가간 수교를 맺었으며, 이후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구 쏘련 체제가 무너지면서 시장경제(자본주의 경제)를 받아들였고, ‘쏘비에트 연방’이었을 때보다는 국력이 훨씬 약해진 상태다. 1990년 이전까지 러시아는 ‘쏘비에트 연방’의 사회주의 국가였고, 한국은 해방 이후 1990년 무렵까지 독재 정권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노태우 정부에서 한러 수교가 이루어지고, 한국은 러시아에 30억 달러를 빌려주는 등 경제 협력을 이어 나갔다. 러시아는 구 쏘련 시절 보유한 군사 무기 기술과 항공 우주 기술의 노하우를 한국에 제공하는 등 한국을 직간접으로 지원하면서 미국, 중국과는 또 다른 의미의 동맹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시베리아에서 생산하는 천연가스를 한국까지 연결하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고, 한국에서 출발하는 막대한 수출 컨테이너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유럽으로 오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즉, 경제적 측면에서 러시아는 ‘남북한 종전 선언’이 남북한 경제 교류 확대는 물론, 러시아에게도 직접 이익이 될 거라고 기대하는데, 충분히 근거 있다고 본다. 4. ‘종전’ 이후 나타나는 구체적 현실 10 ‘종전’이 확정되면, 남북한은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되며, 군비 경쟁과 군사적 긴장에서 놓여나게 된다. 70년 동안 남북한을 내리누르던 폭력과 증오의 먹구름이 걷히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이전까지 남북한은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고, 국내적으로는 독재정권이 분단 상황을 정권 유지에 악용한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주변 국가-미국, 중국, 쏘련, 일본-의 압력으로 적대적 관계를 청산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한은 더 이상 무력, 폭력에 의한 상호 침략이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가능한 대화를 통해 남북문제를 해결할 것을 천명했다. 2000년 이후 남북한은 사실상 종전 상태였으나, 국제법에 따른 종전은 아니었고, 여전히 주변국의 견제와 참견으로 ‘종전 선언’은 명문화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종전 선언’으로 남북한 관계가 하루아침에 급격히 달라지지는 않겠으나, 빠르게 변화할 부문이 있고, 남북한 정권의 의도와 다르게, 국민의 요구가 남북 상황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빨리 바꿔놓을 수 있다는 예상도 할 수 있다. ‘종전’은 곧바로 한국에서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70년 동안 남북한이 견원지간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가 ‘국가보안법’ 때문이었다. 독재정권이 만든 이 악법은 민주정부에서는 사문화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공포정치의 잔재로 남아 있다. 한국은 현재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서 운용하고 있으며, 북한과 다양한 경로와 형태로 접촉할 수 있고, 남북한 주민의 직접 교류도 가능하다. ‘종전’이 되면, 보다 적극적인 남북교류 법령이 개정, 제정되어 남북한을 오가는 장벽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11 철도와 도로, 통신, 방송의 회복 ‘종전’ 이후, 가장 먼저 나타나는 구체적 효과는 막혔던 도로와 철도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이미 개성공단을 운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도로 복구는 빠르게 이뤄질 것이고, 철도는 남북한의 표준 규격이 맞지 않아, 현재 한국 기술자들이 북한에서 철도 규격을 통일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남북한 철도 연결은 곧바로 시베리아 철도, 만주 철도, 몽골 철도의 연결로 이어지며, 물류의 획기적 변화를 뜻한다. 수출입 물동량이 화물선이 아닌, 기차를 통해 이동하면, 물류 기간,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는 매우 고무적인 현실이다. 북한 역시 한국에서 오가는 철도 물동량의 통관비만 받아도 막대한 수입이 되며, 이후 남북한 인적 교류가 시작하면, 한국 관광객이 북한은 물론 시베리아, 만주, 몽골 기차를 타고 북한을 지나가면서 지불하는 통관비로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남북한 철도 연결과 시베리아 철도까지 이어진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폭넓은 효과가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유럽행 기차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몰려든 여행객들이 많을 것이다. 한국보다 위도가 아래쪽인 아시아 나라들은 유럽으로 가는 길이 여객선이나 여객기뿐이다. 기차를 타고 유럽을 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한반도를 거쳐 러시아의 광활한 대륙을 지나 유럽으로 가는 여행길이 열린다면, 남북한은 물론 러시아에게 큰 경제적 이익을 줄 것이다. 반대로, 유럽인들도 아시아로 오는 길이 기차를 타고 오갈 수 있다면, 비행기로 이동할 때 누릴 수 없는, 색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어 매력으로 여길 것이다. 한국(남북한)은 이렇게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심 국가, 포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리적, 지형적 조건을 갖춘 나라여서, 경제 성장은 물론, 지금 한국의 문화, 예술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처럼, 물류, 여행 역시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의 통신망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 최초로 5G 서비스를 시작했고, 정보통신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달리고 있다. 한국의 정보통신망 기술이 북한에 빠르게 설치되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김대중 정부 때, 외환 위기 상황에서도 정부는 시골 구석까지 광케이블을 설치했다. 그때는 예산 낭비라고 야당의 비난을 받았지만, 이 정보통신 인프라가 결국 한국을 정보통신, IT산업의 첨단 국가로 발돋움하는 디딤돌이 되었다는 건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것처럼, 한국 기업들은 빠르게 북한의 시골 구석까지 꼼꼼하게 광케이블을 설치할 것이고, 초고속 통신망이 설치되면 남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정보의 격차는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여기에, 토목 공사 실력과 수준 역시 세계 최고인 한국 기업들은 북한의 모든 도로를 한국의 도로처럼 깨끗하고 안전하게 시공하고, 동서남북의 고속도로를 거미줄처럼 만들어 놓을 것이다. 이때 북한 주민들은 노동력을 제공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 통신망과 도로가 개설되면, 역시 세계 최고의 물류 산업인 택배가 북한 전 지역으로 흘러가면서 몸에 혈관을 따라 피가 흐르는 것처럼, 북한 경제가 생생하게 살아난다. 우리는 북한 방송을 거의 못 보거나 볼 생각도 하지 않지만, 북한 주민들은 한국의 음악, 드라마, 영화를 자주 본다고 한다. 문화와 예술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의 사회주의 문화가 수준 낮다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의 다양성, 예술적 완성도 등을 볼 때, 한국(남한) 문화가 북한으로 흘러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종전’ 이후 남북한 주민의 교류가 시작되면, 무엇보다 방송(라디오, TV)을 개방하는 과정이 필연이라고 본다. 즉, 남북한 주민 누구든 남한과 북한에서 방송하는 내용을 원하는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북한 주민의 경우, 인터넷이 개방되면, 인터넷으로 더 많은 정보를 검색할 수 있기 때문에, 남북한의 동화 과정은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빠르게 진행할 것으로 본다. 12 여행, 관광의 시작 ‘종전’ 이후 한국에서 가장 큰 기대 효과는, 북한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금강산 관광’처럼 초기에는 제한적 공간만 여행할 수 있겠지만, 범위는 점차 넓어진다. 당장 떠오르는 장소는 금강산, 개성, 백두산, 원산, 함흥 등 유명한 도시로 시작해, 동해안의 해수욕장을 개방하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DMZ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관리하며, 이곳을 세계적 환경 지역으로 만들어, 입장료 수입을 엄청나게 올릴 수 있으므로, 이 지역은 남북한은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환경 보호구역, 생태 탐방 지역으로 알려진다. 한국의 기업은 북한에 인프라 투자를 하고, 호텔, 리조트 같은 대규모 시설을 짓는다. 이렇게 관광, 여행, 위락 시설이 생기면, 북한 주민들을 고용해 남북한이 공동으로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가 생성된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지점은, 한국(남한)의 자본이 북한을 잠식하고, 북한은 노동력만 제공하고,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 착취당하는 구조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남북한의 경제력은 매우 심한 편차라서 북한과의 경제 교류도 시간적 여유를 두고,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 한국(남한) 주민들이 북한을 여행할 때도, 과거 동남아시아에서 보인 추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 북한 주민은 2등 국민도 아니며,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단지 경제력이 한국보다 낮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 우리가 함부로 해서는 결코 안 되는 한민족이다. 초기에는 예상하지 못한 사고도 발생할 것이고, 상호 오해가 생겨서 티격태격할 경우도 있겠으나, 큰틀에서 한민족인 남북한은 자연스럽게 동화할 것으로 확신한다. 13 남북한 국민의 상호 왕래 ‘종전’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남북한 주민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과정이 생긴다. 남북한 주민은 각자 여권을 가지고 국경을 통과할 수 있으며, 상대 국가에서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다. 이미 방송과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여행에는 제약이 거의 없다. 이때는 이미 남북 이산가족은 자유롭게 만나고, 왕래하고 있고, 남북한 정치체제만 다를 뿐, 사실상 통일에 가까운 상태로 남북한은 경제를 비롯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한다. ‘종전’은 남북한이 가야 할 필연적 과정이며, 한민족 역사의 회복이자, 분열과 고통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상징적 행위다. ‘종전’은 한민족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를 바탕으로 화합, 성장하는 계기가 되며, 한국이 미래로 전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다. ‘종전’을 반대하는 집단과 개인은 역사의 순리를 거스르는 어리석고 멍청한 존재이거나 악랄한 의도를 가진 내부의 적이며, 외부 세력이라면 남북한의 평화, 통일을 반대하는 적대 세력이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세 번의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한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상호 호혜, 협력한다는 기본 전제에 동의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종전 선언’을 하면, 다음 정부인 이재명 정부에서는 ‘종전’ 이후 북한과 공동 사업을 구체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게 된다. 남북한 상호 교류는 두 나라의 경제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국가경쟁력, 국방, 내수 산업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이기도 하다. 이제 주변 국가의 반응을 살피지 말고, 남북한이 적극 상호 이익을 위해 ‘종전’해야 한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는 건 당연한 권리다. 남북한 ‘종전’ 발표를 기다린다.
    • 칼럼
    • 백건우
    2021-12-13
  • 존경하는 최교수님께
    존경하는 최교수님께 어제 교수님 블로그에 올리신 '나는 왜 윤석열 후보를 미는가'를 읽었습니다. 이 글은 교수님이 쓰신 글에 대한 반론이자, 공개 편지입니다. 서술의 근거는 교수님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제가 가진 생각을 더해 주장을 개진하겠습니다. 공개 편지인 만큼 형식과 내용은 자유롭고 편한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이 글은 교수님은 물론, 교수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보수' 진영에 계신 분들도 읽어보시길 희망합니다. 1 '존경하는 최교수님께'라고 쓴 인사말은 의례적 수식어가 아닙니다. 이웃 사는 저는 평소 최교수님을 자주 뵙고, 함께 식사도 하고, 산행도 하는 '동무'라서 교수님을 비교적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의 정치 성향은 '보수'가 틀림없습니다만, 박근혜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에도 참석하셨고, 탄핵에 찬성하신 분입니다. 최교수님은 박근혜를 선택했지만, 박근혜가 잘못한 것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하셨습니다. 최교수님은 스스로 노력해 많은 어려움을 딛고 대학교수가 되셨고, 정년퇴직하신 지금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진정한 학자이십니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성실하고 겸손하며, 사회의 규범을 잘 지키는 시민으로 모범이 되는 분입니다. 가난하게 자라 자수성가로 대학교수가 되셨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2년을 복무했으며, 개신교도로 신앙생활도 신실하게 하고 계십니다.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시고, 측은지심을 가지셨으며, 자신에게 향하는 쓴소리, 비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넓은 이해의 마음을 가진 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최교수님 수준이라면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분열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합리적 토론이 가능한 '보수'라면 좌우의 날개를 함께 펴고 날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보수'라고 하는 사람 또는 집단을 보면 '극우'에 가깝고, 과거 파시즘을 신봉하는 어리석은 미치광이 수준입니다. '보수' 집회에 참가하면서 일장기를 들고, 일본을 찬양하면서 우리나라가 망해야 한다는 망언을 퍼붓는 사람들을 '보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상식 있는 시민들이 소위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비웃고, 비난, 비판하는 근거는, '보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선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식하고 무지하다는 걸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은 '정보'로 흘러넘치지만,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람의 생각은 편향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2 교수님께서는 '개신교 신자로서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를 지지'했다고 하셨습니다. 정치인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같은 종교를 믿기 때문에 선택한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정치인이 특정 종교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신앙 때문에 정치 행위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런 정치인은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종교는 개인의 신념일 뿐이고, 그래야 합니다.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자신이 믿는 종교를 일반화하려는 것은 제정일치 사회에서나 있었던 미개한 폭력입니다. 자신의 신앙(종교)과 정치 행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치인은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들이 대통령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대통령으로 해서는 안 되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명박과 박근혜를 선택한 교수님과 ‘보수’의 안목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3 교수님은 글에서 '이승만은 반공, 박정희는 경제, 김영삼은 민주화, 김대중은 개방'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승만이 '반공'을 한 것은 맞습니다만, 이승만이 저지른 수많은 범죄와 패악에 관해서 침묵하시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입니다만,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보여준 행보, 말과 행동은 친일매국노이자 한국 정치와 사회를 피로 물들인 독재자의 전형이었습니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고, 남한 총선거와 대통령선거를 통해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의 정치 상황은 남북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이승만이 '반공'을 '국시'로 삼은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만, 남북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던 김구 선생, 여운형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이자 현실 정치인들을 암살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승만을 '국부'로 찬양한다는 것은 역사의식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이라는 반공단체를 만들어 과거 '좌익'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가입시킨 다음, 전쟁이 한창일 때 국군특무대를 중심으로 보도연맹원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진짜 빨갱이'들이 아니었고, 한때 좌익이었거나,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배급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가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설령 과거에 '좌익'이었다 해도, 단지 과거의 전력만을 보고 학살한다는 것은 엄연한 범죄인데, 이승만은 이들이 최소 10만 명에서, 많게는 20만 명이 학살당하는 걸 묵인했습니다.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을 주도했고, 대통령을 영구집권하려는 망상을 가졌으며, 3.15부정선거의 당사자입니다. 결국 4.19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했으나,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과거 친일매국노를 관직에 앉히는 등 친일파를 옹호하고, '반민특위'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려 한국이 친일파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진정한 '보수'라면 친일매국노를 처단하라고 주장해야 할 것인데, 그것을 반대한 이승만을 찬양하는 것은 상식과 정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4 소위 '보수'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박정희를 높게 평가합니다. 박정희가 가난했던 한국을 구제했고, 보릿고개를 없앴으며,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일견 타당합니다.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의도를 생각해 보면,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가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 봅니다. 즉, 자신이 피와 땀을 흘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현실이 불쾌하고 마땅치 않은 것입니다. 이는 자신과 박정희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인데, '보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젊었을 때 흘렸던 땀과 눈물은 그 자체로 고귀하고 훌륭합니다. 그들은 굳이 박정희를 들먹이지 않아도 스스로 한국 사회를 일으킨 주역이며, 한국 사회의 진정한 주인입니다. 그러니 박정희를 우상화하지 않아도 '보수'의 애국과 땀의 결과는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사람들은 박정희의 정체에 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정희는 한때 남로당원이었으며, 그의 형 박상희는 '보수'들이 말하는 '진짜 빨갱이'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박상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당시 좌익,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는 대개 지식인이 많았고, 일제강점기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한 방법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역시 형 박상희의 영향을 받아 남로당에 가입했고, 비밀조직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보수'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저주를 퍼붓는 '빨갱이'가 바로 박정희와 그의 형 박상희입니다. 박정희가 전향했으니 그만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박정희는 남로당원인 것이 발각되어 체포되자 자신의 조직과 동료를 고발하는 대가로 살아남았습니다. 좌익의 입장에서 보면 박정희는 변절자, 배신자인 것입니다. 박정희는 자신의 '빨갱이' 경력을 지우려고 더욱 강하게 '반공'을 부르짖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좌익, 공산주의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지식인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수'만 모르는 걸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요? 한국에서 '보수'의 특징은,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지하고 무식하기 때문에 올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없고, 올바른 역사관이 없으므로 눈앞의 현상만 보고 판단하게 됩니다. 따라서 역사의 물줄기, 역사에서 정의, 민주주의, 민중의 힘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지배자의 말을 믿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한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던 1960년을 전후해서, 제3세계-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수없이 많은 군부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즉, 박정희의 군부쿠데타는 그 시기에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저개발국가에서 벌어진 이 세계적 사건 가운데 '성공한 쿠데타'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은, 쿠데타 자체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쿠데타는 성공했어도, 그 주역들이 시민의 동의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낸 경우는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쿠데타 세력의 종말이 모두 법의 처벌을 받았다는 점에서, 군부 쿠데타는 불법이며, 역사적이든, 정치적이든 범죄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박정희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부하에 의해 사살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김재규가 역모를 한 것으로 치부하면 답을 알 수 없습니다. 박정희는 청와대에서 일본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일본군가를 부르며 그걸 즐겼던 친일매국노였습니다. 일본과 일본군에 대한 향수를 끝까지 갖고 있었고,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한때 만주군에서 독립운동가를 '토벌'하는 자리에 있기도 했습니다. 그걸 부끄럽거나 죄스러워하기는 커녕, 친일매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자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에 분노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가 아니겠습니까. 박정희가 죽을 때도 주색잡기를 하던 자리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박정희는 죽기 전까지 무려 200여 명의 여성을 비밀 안가로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채홍사 노릇을 한 부하가 직접 증언했고, 박정희의 마지막 순간에도 두 명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소위 '보수'에서는 이런 박정희를 두고 '남자라면'이라거나 '사생활은 건드리지 말라'거나, '대통령이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식으로 본질을 회피하려 합니다. 대통령이 주색잡기에 빠져 있는 걸 비판하지는 못할 망정, 그걸 옹호하는 것이 과연 '보수'입니까? 그건 최소한의 인간도 못 되는 되먹지 못한 양아치일 뿐입니다. 5 교수님께서는 이명박을 선택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선택을 이제는 후회하고 계신 걸로 압니다. 박근혜도 마찬가지죠. 이명박은 희대의 범죄자입니다. 그가 개신교도에 교회의 장로라는 타이틀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교수님께서도 이제는 아셨을 겁니다. 한국사회에서 개신교는 이제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교인의 숫자는 줄어들고, 대형교회의 목사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세습을 통해 철저한 자본주의의 물질만능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보여주어야 할 선행과 이타심은 이미 사라졌고, 교회는 비즈니스의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교회 특히 개신교에 대한 비판에 관해서는 교수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한국개신교가 얼마나 부패했고, 사회의 독버섯이 되었는가는 개신교 전체가 보여주는 악행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종교가 사회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과 역할에 관해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미약하지만, 개신교 내부에서도 진정한 종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신실한 목회자와 신도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같은 사기꾼, 범죄자가 단지 '개신교도'라는 것 때문에 그를 대통령이 되도록 한 수많은 개신교도들은 이제 자기 발등을 찍어야 합니다. 그런 통절한 자기반성을 해도 부족한 마당에 이제 다시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를 선택하고, 다시 윤석열을 선택한다는 건, 이명박과 박근혜의 범죄에서 아무런 비판과 반성이 없다는 걸 드러내는 태도입니다. 한국에서 직업별 성범죄 1위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매우 불명예스럽지만, 한국 교계에서는 이런 현상을 두고 공식 사과나 반성의 태도를 보인 적이 있던가요? 말로는 사회의 소금이 되겠다고 하면서, 정작 가장 나쁜 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르는 목사가 존재하는 '개신교'는 한국 사회 발전의 걸림돌일 뿐입니다. 이명박은 대통령의 권력을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데 써먹은 악질 가운데서도 악질입니다. 4대강 사업으로 32조 원에 달하는 국민의 피같은 세금이 사라졌고, '자원외교'라는 명목으로 또 20조 원의 세금을 탕진했습니다. 이 국민의 돈은 이명박 측근에게 돌아갔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세금을 들여 환경을 망치고, 그 피해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환경의 중요성을 모른다면, 이명박이 얼마나 악랄한 짓을 했는지 모를 것이고, 환경감수성이 무딘 것 또한 '보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6 교수님께서 윤석열을 지지하는 까닭은, 윤석열이 문재인정부에서 '피해자'라는 인식 때문인 걸로 압니다. 교수님께서 찾아보시는 정보의 대부분을 소위 '보수언론'에서 얻고 있는데, 이런 편향이 정보의 왜곡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진정한 ‘보수’라면 조선일보는 폐간시켜야 하는 대상입니다.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친일, 매국을 했으며 ‘천황폐하 만세’, 한국전쟁 때는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른 반역자들입니다. 보수가 친일매국, 반공을 용인한다면 그것이 애국자이고 ‘보수’입니까? 윤석열을 두고도 객관의 사실을 외면하거나 알지 못하면서, 단지 문재인정부가 싫어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는 인간을 지지한다는 건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윤석열은 그 자신도 이미 심각한 범죄혐의가 있고, 그의 아내도 논문 표절 문제와 경력 위조, 주가 조작 혐의 등 온갖 파렴치한 범죄혐의가 있습니다. 게다가 윤석열의 장모는 이미 범죄를 저질러 법의 처벌을 받고 감옥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조국 교수의 가족에게 적용해 본다면, ‘보수’의 입장이 얼마나 무원칙하고 악의적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조국 교수의 아내가 윤석열 아내와 같은 혐의를 가졌다면, 교수님께서는 얼마나 분노하시겠습니까? 조국 교수의 장모가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갔다면 얼마나 분통을 터트리겠습니까? 윤석열은 조국 교수와 그 가족을 멸문할 정도로 잔혹하게 학살한 당사자입니다. 그런데 윤석열이 문재인정부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면, 현재 상황을 객관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로 윤석열 후보가 결정되었습니다. 투표 내용을 보니 윤석열 후보는 60대 이상의 당원에게 큰 지지를 얻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나이 많은 분들이 윤석열을 지지하는 심리를 살펴보면, 박근혜를 감옥에 보낸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도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복수심’이 작용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60대 이상의 세대에서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자 박정희와 육영수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자신들의 딸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 심리적 동기화가 있었기에,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어도, 박근혜가 무능하고 불법을 저질러 탄핵당해 감옥에 갔어도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60대 이상 세대가 윤석열을 지지하는 건 이성적, 지성적 판단이나 합리적, 논리적 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닌, 감정과 감성을 바탕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를 반드시 이성적, 합리적 판단으로만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겠습니다만, 나라의 미래를 넓고 멀리 바라본다면 이런 감정적 대응과 근시안적 판단은 분명 우리 사회, 성장하는 청년 세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7 교수님께서는 이재명 후보를 두고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제가 교수님을 안타까워하는 점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교수님께서는 과거 대통령을 선택하신 것이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건 교수님의 안목-최소한 정치인을 선택하는 안목-이 많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이명박, 박근혜를 선택한 것이 그 증거이고, 교수님의 정치적 눈높이가 낮다는 걸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재명 후보는 몹시 가난한 화전민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도 끼니를 걱정하며 살았고, 국민학교를 마치고 성남으로 이주해 소년노동자로 살았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어릴 적, 이재명 후보만큼은 아니지만 가난하게 사셨으니 이재명 후보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공감하실 걸로 압니다. 반면 윤석열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줄곧 금수저로 자랐습니다. 사회학에서 '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보수화(부자와 지배자의 논리를 옹호)하는가'를 두고 분석한 내용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오로지 먹고사느라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합니다. 그들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나 올바른 역사, 정의에 관해 배울 수 있는 여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지한 상태에 머물 확률이 매우 높고, 무지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재명 후보도 대학에 들어가 깨우치기 전까지,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광주5.18민주화투쟁'을 보고는 사회 불순분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거라고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 역시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위대한 지도자가 '서거'했다고 슬퍼하며 일기장에 쓴 걸 기억합니다. 그때 제 나이 불과 스무 살이었습니다. 이재명 후보가 공장 노동자에서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대학에 진학해 법률을 공부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서 노무현 변호사의 웅변을 듣고 인권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은 한 사람의 눈물겨운 생존의 분투기이자, 무지에서 각성으로 이어지는 올바른 역사 속 인간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스스로 엄격한 삶을 사셨기에,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다는 걸 저는 압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시각에서는 '보수'라면 당연히 그렇게 스스로 엄격하고, 부끄럼 없는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삶을 기준점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보수'보다는 '진보'가 교수님과 더 잘 어울립니다. 한국사회에서 '보수'는 돈과 권력을 향해 덤벼드는 불나방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재명 후보가 성남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내용과 성남시장으로 당선되어 행정을 펼친 것, 경기도지사로 경기도의 행정을 펼친 것을 객관의 눈으로, 냉정하게 바라보시고 평가해 보시길 권합니다. 과거 성남시장이었던 자들과 경기도지사가 벌인 짓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방자치를 망치고, 개인의 권력을 사유화하고, 뇌물을 받아 먹은 것은 현 '국민의힘' 쪽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객관적 증거와 자료를 외면하면서까지 훌륭한 행정을 펼친 이재명 후보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보수'의 태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보수'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정파적 이해관계 때문에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면, 자기 양심을 속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루합니까. 8 이제 윤석열과 이재명의 실력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사회를 개혁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했고, 대통령의 실력과 능력이 매우 중요한 조건입니다. 대통령은 행정수반이고, 대통령을 둘러싼, 즉 대통령이 임명한 가까운 인재들이 대통령의 행정 목표를 위해 실무를 집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대통령의 국정 철학은 한 나라의 틀을 만들어 가는 중요한 실질적 요소입니다. 윤석열은 아홉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그 뒤로 약 26년 동안 검사로 일했습니다. 최근 ‘국민의힘’ 대통령 예비후보 토론회를 보셔서 아시겠습니다만, 윤석열은 기본 상식과 지식,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이 거의 없는, 무지와 무식을 드러냈습니다. 윤석열은 ‘대통령 혼자 모든 걸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재를 뽑아 쓰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대통령은 왜 있으며, 자신이 대통령이 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로지 ‘권력’ 그 자체를 탐욕하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강하게 갖습니다. 이재명과 윤석열의 가장 큰 차이는, ‘권력’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이재명은 ‘권력’을 ‘일을 더 잘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고 있지만, 윤석열은 ‘권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권력’을 잡으면 그것을 마구 휘두를 생각만 하는 윤석열은 전두환, ‘광주민주화운동’ 발언 등을 종합할 때, 그 자신이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되고픈 욕망으로 가득한 인물입니다. 이재명은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치면서 ‘행정의 달인’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좌우의 이념이 아닌, 실용주의자로, 오로지 한국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하겠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재명 후보가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의 역할을 엉터리로 했다면 지금 전국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반면 윤석열 후보는 조국, 추미애 장관에게 항명하고, 검찰을 사조직화해서 징계를 받게 되자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문재인정부와 적대적 관계를 설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정부를 비판한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기존 정치인에게 식상한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윤석열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만큼 ‘보수’ 진영에는 능력 있는 인물이 없었다는 걸 반증합니다. 윤석열 후보가 검사 26년의 경력말고 그가 보여준 행정 능력이나 정치력, 정치, 행정철학에 관해 최교수님께서 아는 것이 있습니까? 윤석열을 객관적으로 검증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국민의힘’ 토론회에서도 윤석열은 무식하고 무지하다는 것만 드러났을 뿐입니다. 이미 박근혜가 현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로 선택될 때도 이명박과 경쟁하면서 이명박에게 졌고, 박근혜의 실력이 아닌,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박정희, 육영수 딸이라는 ‘불쌍한 자식’ 코스프레로 노인 세대의 감성적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무능하고 무식하고, 무지한 박근혜는 최순실의 수렴청정의 허수아비, 괴뢰가 되어 나라를 망가뜨렸고, 지금 감옥에 갔습니다. 윤석열은 그런 박근혜의 무지, 무식과 윤석열의 아내의 수렴청정, 전두환의 폭력적 독재가 결합해 박근혜보다 더 나쁜 결과를 만들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래도 윤석열을 지지하시겠습니까? 9 최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보수’의 개념은 ‘건강한 애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보수’의 행태를 잘 보시면, ‘건강한 애국’이 아닌, 극우 파시즘과 천박한 양아치가 결합한 망나니의 모습인 걸 아실 겁니다. 교수님이 그런 집단을 지지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보수’는 무엇보다 상식과 합리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걸로 압니다. 광화문 앞에서 시위하는 소위 ‘태극기부대’는 성조기와 일장기, 이스라엘국기를 흔들며 문재인정부 타도를 외칩니다. 오로지 문재인정부가 싫다는 이유로 친일매국도 서슴치 않는 것이 ‘보수’입니까? 대형교회 목사들이 마이크를 잡고 문재인정부를 비난하고 직접 정치에 개입합니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사라진 지 오랩니다. 그들이 문재인정부를 ‘빨갱이’, ‘좌파’라고 비난하는 건 아무 근거가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부패하고, 부익부빈익빈, 강자독식, 권력과 금력이 결합한 강자카르텔, 부패카르텔을 형성해 사회의 부를 독식하려는 자들이 깨끗하고 합리적인 정부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입니다. 교수님께서 지지하는 ‘보수’ 집단인 ‘국민의힘’의 역사적 태동과 성장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신다면 결코 그들을 지지하지 않으실 걸로 압니다. 교수님께서 이미 어릴 때부터 개신교도로 성장하신 것이 교수님의 정체성을 구성했으므로, 그걸 부인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놓인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아브로락사스의 알’처럼, 진정한 자기 개혁은 미몽의 세계에서 깨어나 역사의 진실을 마주할 때 가능합니다. 이승만 이후부터 박근혜까지 이어온 ‘국민의힘’의 과거는 독재, 쿠데타, 무능의 정부였습니다. 이건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윤석열 후보는 그런 정당의 후보로, 과거의 망령을 소환하고 있으며, 이미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을 다시 공포와 독재,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함량 미달의 천박한 후보입니다. 교수님 세대가 피와 땀으로 일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더 성장, 발전시킨 집단이 누구입니까?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민주당의 흐름이 ‘국민의힘’ 쪽 흐름보다 훨씬 긍정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으실 겁니다. 그리고 그런 민주주의의 확대, 경제 성장, 인권, 환경, 복지, 예술의 성장을 이끌어 갈 적임자가 바로 이재명 후보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과거로 퇴행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윤석열 후보를 선택하면 대한민국은 과거로 퇴행하는 것이고, 이재명 후보를 선택하면 미래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교수님께서 올바른 선택을 하실 거라 믿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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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3
  • 허균(許筠)의 시를 바로 잡다
    허균(許筠)의 시를 바로 잡다 호정(湖亭)-허균(許筠) 煙嵐交翠蕩湖光(연람교취탕호광) :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細踏秋花入竹房(세답추화입죽방) :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頭白八年重到此(두백팔년중도차) : 머리 센 지 팔 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畫船無意載紅粧(화선무의재홍장) :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이 시는 허균이 외지에서 벼슬을 하거나, 귀양에서 8년만에 집에 돌아온 소회를 적은 것으로, 허균의 심정이 잘 드러난 시로 읽힌다. 하지만, 이 시를 여기 번역한 그대로 읽으면 아무 감흥이 없다. 시를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허균 생가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허균이 쓴 시를 번역하면 아래 네 줄에 불과하다. 1)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2)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3)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4)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허균은 시를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으로 써왔다. 그의 다른 시를 보면, 일상에서 벌어진 일을 그대로 기록하는, 생생한 현실감과 현장감이 보이는데,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추상적 느낌이 강하다. 1)연에서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이라고 했다. 안개는 주로 아침에 피어오른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현상은 대기와 물의 온도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데, 허균의 집 바로 옆이 경포호여서 이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봄, 가을, 초겨울 아침이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남기'는 어떨까. 남기는 안개와는 또 다르다. 남기는 호수보다는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옅은 안개나 구름같은 부연 현상을 말하는데, 허균의 집에서는 저 멀리 태백산맥 줄기가 보인다. 그 산줄기에 아침, 저녁으로 남기가 드리우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호수의 물결이 넘실댄다는 표현은 원문과 약간 다른데, 호수에 빛이 넘실거리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우리말로 '윤슬'이다. 빛을 받은 호수의 표면에 비늘같은 햇살이 반짝거리는 것이다. 2)연에서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고 했으니, 1)연에서의 호수는 가을 호수다. 즉 안개와 남기는 가을의 아침에 바라보이는 풍경임을 알 수 있다. '가을 꽃 밟고 밟아'라는 표현은 좀 과격하다. 여기서 느낌은 '세답' 즉 조심스럽게 집밖의 길에 떨어진 꽃을 밟았다고 보는 것이 좋다. 실제로 혀균의 생가 바로 옆에는 아주 넓은 소나무 숲이 있는데, 이곳이 예전에는 허균의 개인 도서관이 있던 '호서장서각' 자리다. 허균은 집에 있을 때 책이 무려 1만권이나 되는 여기 장서각에 와서 책을 읽으며 근처를 산책하곤 했는데, 8년만에 돌아온 그의 감회가 어떨까는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는다. 3)연에서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왔다고 했다. 허균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만, 벼슬을 다섯 차례하고, 세 차례의 유배를 겪었다. 그의 삶이 파란만장한 것은 그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광해군이 그를 아껴 요직에 앉히려 했으나, 허균의 자유로운 영혼은 종종 그의 반대파 수구세력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가 유배지 또는 벼슬에서 8년만에 고향 집에 돌아왔으니 마음은 허허롭고, 시원하며, 쇠굴레를 벗은듯 몸과 마음이 가볍지 않을까. 4)연은 그래서 그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라는 내용은 그러나 이 시에서 가장 난해한 문장이다. 이 문장의 뜻을 모르면 이 시의 느낌도, 맛도 알 수 없는데, 학교에서는 이 시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이 마지막 문장은 그가 아직은 죽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그림배'는 '붉은 단장'과 연결된다. 즉, '붉은 단장'은 상여를 말하니, 상여를 실은 배는 울긋불긋한 그림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림배'는 상여를 실은 배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홍장'이 사람의 이름이라면 내용은 완전히 달라진다. 실제로 강릉에는 경포호와 관련한 옛날 이야기에 '홍장'이라는 기생의 이름이 나온다. ------- 경포8경 가운데 5경으로 홍장야우(紅粧夜雨)가 있다. 홍장은 조선 초기에 석간 조운흘 부사가 강릉에 있을 즈음 부예기로 있었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모 감찰사가 강릉을 순방했을 때, 부사는 호수에다 배를 띄어놓고 부예기 홍장을 불러놓 고 가야금을 켜며 감찰사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미모가 뛰어난 홍장은 그날 밤 감찰사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그 감찰사는 뒷날 홍장과 석별하면서 몇 개월 후에 다시 오겠다고 언약을 남기고 떠나간다. 그러나 한 번 가신님은 소식이 없다. 그리움에 사무친 홍장은 감찰사와 뱃놀이하며 즐겁게 놀던 호수에 나가 넋을 잃고 앉아서 탄식 하고 있는데, 이때 자욱한 안개사이로 감찰사의 환상이 나타나 홍장을 부른다. 홍장은 깜짝 놀라면서 너무 반가워 그쪽으로 달려가다 그만 호수에 빠져 죽는다. 이때부터 이 바위를 홍장 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안개낀 비 오는 날 밤이면 여인의 구슬픈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고 전한다. 꽃배에 임을 싣고 가야금에 흥을 돋우며 술 한 잔 기울이던 옛 선조들의 풍류정신을 회상하기 위 한 기념으로서의 일경이다. 그렇다면, '그림배'는 '꽃배'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꽃배'와 '홍장'은 바로 위의 이야기처럼 경포호에서 양반들이 놀던 풍경인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연의 해석은, '홍장을 꽃배에 싣고 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가 되겠다. 즉, 세파에 시달리다 고향에 돌아오니 풍류를 즐기며 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 아닐까. 따라서, 위의 시를 재해석해 번역하면 아래의 내용이 된다. 1)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 물안개 옅은 구름, 호수에 반짝거리는 윤슬 2)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 가을 꽃 조심히 디뎌가며 대나무 방에 들다 3)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 흰머리되어 팔년, 다시 여기 와보니 4)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 홍장을 꽃배에 싣고 나들이 갈 마음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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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1-12-13
  • 부조리와 만화
    부조리와 만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 [괴물들] 예술은 현실의 부조리를 어떻게 표현하며, 어느 수준까지 담아낼 수 있고, 얼마나 강력하게 발언할 수 있을까. 수 많은 예술가들이 당대의 현실에 침묵하지 않고 현실의 부조리함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내고, 작품을 통해 발언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한국에서의 학살',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처형' 같은 작품은 작가의 신념과 작품의 사실성이 직접 드러난 경우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1980년 한국에서 크게 일어났던 '민중문학', '민중미술', '민중음악'이 같은 사례에 든다. 이 시기-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시기-참여 예술은 문학, 미술, 음악 등 전방위에 걸쳐 펼쳐졌으며 그때만 해도 '민중만화'라는 규정은 없었으나 만화의 형태로 현실을 반영, 고발하는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어느 사회든 정치적 억압이 강한 독재 정권일수록 그에 대한 반발도 같은 크기로 일어난다. 1970년대 칠레에서 군부독재가 철권 통치를 하면서 수많은 학생, 노동자, 지식인을 살해할 때, 현실을 비판하는 노래를 불렀던 빅토르 하라는 군부독재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다. 1980년대 한국에서도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 청년, 노동자, 지식인들이 감옥으로 끌려가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그럴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투쟁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그때 예술가들이 쓰고, 그리고, 불렀던 예술 작품들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진전하면서 점차 '독재 시기의 특성'으로 남게 되었고, 오늘날 더 이상 소비되지 않는 '예술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1970년대, 1980년대에 활약했던 민중 예술가들의 작품을 1세대라고 한다면, 90년대를 지나 현재의 예술가들은 2세대, 3세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다. '제3세계'로 불리던 나라들은 대개 비슷한 민주주의 경로를 걷고 있는데, 군부독재의 출현과 몰락 역시 비슷하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현실의 부조리는 민주주의의 직접적 파괴-쿠데타, 독재-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의 껍데기를 하고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왜곡된 정치와 '신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로 불리는 자본주의의 첨단 기법이 국민을 얼마나 심하게 착취하고 있는지, 부의 극단적 편중과 빈익빈 부익부의 편차로 인한 사회 갈등, 민족과 인종, 종교가 달라서 오는 갈등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이런 시각으로 볼 때, 만화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작가가 '조 사코'와 ‘박건웅’이다. 조 사코는 '코믹 저널리스트'라는 독특한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만화(그래픽노블)라는 형식에 시사(국제문제, 정치, 경제, 인종, 분쟁 등)를 담아 기록한 것으로, 기존의 글로만 기록했던 저널리즘의 지평을 확대하고, 대중에게 하나의 주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역시 '가자 지구'에서 1956년 11월 12일에 발생한 이스라엘군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현재 시점과 과거 상황을 오가며 이 사건의 배경과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형식은 만화지만 영상으로 그대로 옮겨도 될 만큼 형식미도 뛰어나다. 작가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과정과 어렵게 만난 학살생존자 또는 그의 가족, 친척들의 구술을 통해 과거를 재현한다. 1956년 11월 12일,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지만, 그 사건이 있기까지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은 간단치 않다. 이 시점(1956년)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점령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유대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은 2차 세계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 가운데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가 유대인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가 없었던 유대인들을 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유대인들에게 내주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당한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1948년이고, 이때부터 중동 지역에 분쟁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중동의 대부분 국가는 이슬람을 종교로 갖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종교인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종교적 갈등과 함께 영토 분쟁도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인 아베드와 함께 다니며 5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그때의 생존자를 찾아나섰고, 그 과정을 최대한 면밀히 기록한다. 그가 조사와 취재를 위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있을 때도 역시 이스라엘군에 의한 침탈과 학살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50년 전과 현재가 똑같다고 말한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에 무차별 폭격을 해서 팔레스타인 사람 1,417명이 죽었는데, 이 가운데 352명은 어린이였다. 5,300명이 부상당했으며 시가지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조금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대체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미쳐날뛰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고,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오히려 화를 내야 함에도, 이스라엘은 폭력으로 이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 유대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갈등을 고려한다 해도,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저 미치광이의 태도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1956년에 일어난 가자 지구 학살 사건만 해도, 유대인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히틀러에게 당한 집단학살의 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였는데도, 유대인들은 독일군이 저지른 야만적 행위만큼이나 악랄한 집단 학살을 저지른다. 대체 왜? 분쟁의 불씨를 만든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고,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떠돌아 다닌 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물리적 형태의 '국가'가 절실했다. 결국 피해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오랜 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고, 멀쩡한 자기 집을 어느 날 갑자기 뺐기고, 자기 집에서 쫓겨난 황당한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유대인이 점령지를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거주지는 극적으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1948년에 비하면 1/10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영역에서, 그것도 지리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서로 오가지도 못하는 강제된 분단의 처지에 놓여 있고, 가자 지구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곳은 이스라엘군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어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한국에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 근현대사의 비극, 가해자의 논리로 위장되어 있는 진실을 탐구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만화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서 박건웅 작가는 일관성 있는 작품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 속 부조리를 파헤치고 있다. '괴물'은 박건웅 작가의 신작이다. 그가 오랜 시간 그렸던 단편을 모았다.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외국의 작가들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창작하는 경향이 높다. 그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데, 한국현대사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격동적이고, 드라마틱하며, 격렬한 과정을 겪었던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대개 70년대, 80년대에 태어나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가 있었으며,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부패, 권력자의 오만과 폭력을 눈으로 보며 자랐다. 여기에 대학시절의 학생운동, 사회에 나와 시민운동을 경험하면서 정치의식이 발달하고, 민주주의 학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작가의 작품에 스며들었다. 작가의 경험은 작품세계에 직접 영향을 준다. 특히 그래픽노블이 갖는 장르적 특성은 작가의 자기 서사가 강하고 깊다는 데 있는데, 박건웅을 비롯해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한국현대사와 자기 서사를 일치하는 경향이 많다. 이건 퍽 우연이지만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모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픽노블 작가는 강하고 깊은 자기 서사와 함께 개성 있는 그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나 기호보다는 이미지가 그래픽노블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지가 핵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다른 그래픽노블 작가들과 분명한 변별을 보여준다. 강렬한 흑백의 이미지와 판화 같은 날카로운 선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불 때'처럼 무채색 유화의 분위기가 나는 그림도 있다. 전체적으로 흑백의 강렬함 속에서 날카로운 풍자를 드러내는 작가의 작품은, 작품의 주제와 이미지의 형식이 완벽하게 결합한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박건웅 작가가 소재로 삼는 작품들 가운데는 읽기 불편하고, 힘든 작품이 꽤 많다. 이건 물론 작가의 책임이 아니라, 한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현대사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잔악하며, 끔찍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이미지로 그려야 하므로, 독자보다 오히려 더 큰 트라우마를 겪을 것으로 보는데, 그래서 독자는 박건웅의 작품을 쉽게 읽어나가지 못하게 된다. 작품 '문신'은 단편이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고통스럽다. 한 칸, 한 칸의 이미지가 마치 칼날처럼 몸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일본군이 조선의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은 인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범죄였다. 이런 내용을 심각한 논문이 아닌, 그래픽노블로 본다는 것은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작품집은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 그린 것과, 당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 보면서 만든 작품을 모았다. 단편이지만, 마치 연작처럼 작품의 내용과 수준이 일관되고,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만화비평지 [지금, 만화] 12호에 실린 저의 만화비평입니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만화비평으로 보는 두 컷 만화
    만화비평으로 보는 두 컷 만화 팔로우하고 있는 '재수의 연습장' 작가가 어제 올린 그림을 보고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고 잊어버렸다. 오늘 보니, 이 그림을 두고 엄청난 반응이 쏟아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 그림 아래 달린 댓글과 오늘 작가가 다시 올린 해명과 그 글에 달린 댓글을 읽으면서, 가능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을 해봤다. 어디가,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걸까. 두 컷으로 나뉜 그림은 대사가 없는 윗 그림과 대사가 있는 아래 그림으로 나뉜다. 상황은 딱 한 가지가 달라졌다. 윗 그림에서 작가 부부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중년 남성의 뒷모습이 아래 그림에서 얼굴과 상반신이 약간 돌아간 상태로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은 '코로나19' 상황이어서 마스크를 한 채 뛰고 있다. 이들이 이미 한참 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근거는, 아래 그림에서 독자의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온 여성의 얼굴에 땀이 흐르고, 숨이 내뱉고 있음을 보여주는 입김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두 여성은 반팔 티셔츠에 바지는 어두운 계열의 운동복을 입었는데, 이 하의가 요즘 여성들이 많이 입는 '레깅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달리기를 하려면 운동복이 편해야 하므로 트레이닝복이나 레깅스를 입는 것이 상식으로는 맞다. 따라서 여기서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이 입은 옷, 특히 하의는 어느 정도 몸에 붙는 트레이닝복이나 레깅스라고 전제하자. 아래 그림에서 대사를 하는 사람은 작가 부부다. 행위(몸을 움직이고 시선이 바뀌는 행위)는 중년 남성(개저씨 또는 할저씨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단어의 선택은 명백히 의도된 것으로, 혐오를 조장하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다. 남성들이 된장녀, 김치녀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이 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판단한 것은 작가 부부다. 이때, 우리는 주체와 객체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제3의 주체에 관해 각자의 입장과 주장을 해석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주체'는 달리기를 하는 두 명의 여성이다. 달리기를 하는 여성은 주위 사람의 시선을 딱히 의식하지 않거나, 알고 있어도 무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젊은 여성이고, 몸의 굴곡이 보이는 옷을 입었기 때문에 뭇남성의 시선을 받을 거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두 여성이 달리기를 하는 것도 오늘 처음이 아닐 것이고, 이미 한국에서 젊은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물적, 성적 대상화'되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매초, 매순간마다 그것을 의식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큰틀에서 여성의 '성적 대상화'는 분명 사회적 문제라는 명제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이 순간, 두 여성이 달리기를 하면서 작가 앞을 지나가는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두 여성은 앞에서 다가오는 중년 남성의 존재를 의식하지만, 그 남성이 특별히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더구나 그 남성 뒤에 부부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우산을 쓰고 따라오고 있어서 신변에 위협을 받을 거라고 생각할 가능성은 매우, 매우 낮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은 자연스럽게 중년 남성과 작가 부부의 옆을 달리면서 지나간다. 이때 작가 부부 앞에 있던 중년 남성의 시선이 달리던 두 여성을 향해 움직인다. 중년 남성은 '객체'다. 즉, '주체'가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고, 본래의 의지 - 여기서는 앞으로 쭉 걸어가는 것이 중년 남성의 본래 의지다 - 와는 상관 없는 행동을 하게 되므로, 중년 남성은 주체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반응하는 '객체'로써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스트루프 효과'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은 두 가지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1) 의식적이고 능동적이며 의도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2) 무의식적이고 수동적이며 의도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있는데, 이것은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일 때, 가능한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려는 작용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속 중년 남성은 왜 '스트루프 효과'를 일으키는 것인가가 핵심 질문이 되어야 한다. 여성(남성)을 바라보면 자동으로 시선이 돌아가는 이유와 원리는 무엇인가? 단순히 남성(여성)들이 여성(남성)을 '성적 대상화'하기 때문일까? '스트루프 효과'의 진화심리학적 분석을 하기 전에 먼저, 아래 그림의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자. 중년 남성은 달리기를 하는 두 여성을 따라가며 보고 있다. 이 남성의 시선으로 보자면, 저기 앞쪽에서 두 여성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한 때부터 줄곧 두 여성을 보고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적어도 20미터 앞쪽에서부터는 여성들의 몸매가 보이기 시작할테니 적어도 중년 남성이 고개를 돌리기 몇 초 전부터 여성들을 보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후 두 여성이 중년 남성의 곁을 지나쳐 갈 때 중년 남성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두 여성을 쫓아갔고, 그래서 고개가 돌아간 것이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이해할 것이다. 이제 중년 남성의 '행위'를 두고 해석 가능한 주장을 펼쳐보면 아래와 같다. 1.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고 폭력이며 '성추행'이다. 2. 중년 남성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중년 남성을 비난하는 사람은 1번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고, 단지 시선이 머물렀다고 해서 그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거나 혐오하는 것 자체가 남성혐오, 세대혐오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번에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주체'와 '객체'의 자리에 상반되는 인물을 놓아봄으로써 우선 '상식'의 선에서 이 문제의 반대 논리를 제공할 수 있다. 즉, 명제를 아래처럼 바꿔보면 이렇다. 1. 중년 여성이 젊은 남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고 폭력이며 '성추행'이다. 2. 중년 여성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앞에서 1번에 동의한 사람이라면 이 명제에서도 당연히 1번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2번에 동의한 사람은 이번에도 역시 2번에 동의할 것이다. 그것이 '상식'이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 1. 정우성이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그 옆을 지나가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2. 정우성이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그 옆을 지나가던 20대 여성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위의 명제에서 중년 여성과 20대 여성은 정우성을 '시선강간'하고, 그 자체가 폭력이며 '성추행'을 한 것인가? 아래 두 컷 만화에서 중년 남성의 시선을 '시선강간' 또는 '성추행'으로 바라보는 것은 '주체'나 '객체'가 아닌 '제3의 주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데, '제3의 주체'가 발화하는 순간, '주체'와 '객체'는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낙인 찍힌다. '제3의 주체'가 발화한 내용을 보면, '객체'의 행위만으로 '객체'의 존재를 비난한다. 근거는 오직 '객체'의 시선이 움직이는 '행위'뿐이다. 과연 '제3의 주체'는 '객체'의 행위만으로 그를 단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객체'가 동성애자라면? '객체'가 지나가는 두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제3의 주체'가 발화한 내용은 전적으로 '제3의 주체'의 심리적 반응이고, 그것은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중년 남성' 일반 또는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중년 남성'에 대한 적대적 고정 관념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3의 주체' 가운데 남성은 이 그림의 작가로 보여지는데, 아내가 하는 말을 들으며 동조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데, 1) 아내의 발화 내용에 동의하는 것과 2) 아내의 발화 내용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아내의 말을 존중하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작가(남성이다)는 아내의 발화 내용 또는 아내의 일방적 주장에 동조하고 있으므로 왜곡된 페미니즘에 동의하고 있거나, 왜곡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아내의 입장에 동의한다는 점에서 비주체적 인물이다. 이제 '스트루프 효과'의 진화심리학적 내용을 살펴보자. 아래 그림에서는 '중년 남성'이 '20대 여성'을 바라보는 상황으로 특정되어 있지만, 거리를 걷다보면, 사람들은 곧잘 고개를 옆으로 돌려 - 각도의 차이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5도, 10도, 15도...180도까지 - 사람을 볼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 모든 시선을 '시선강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기 때문에 '시선강간'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아래 그림의 중년 남성이 달리는 여성을 바라보면서 '내 딸하고 나이가 비슷한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마스크를 하고 달리려면 숨쉬기가 힘들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선강간'이라는 단어도 극렬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만든 용어로, 남성들의 시선이 불쾌함을 넘어 '눈으로 하는 강간'이라는 매우 폭력적 표현으로 '남성 시선'을 규정하고 있다. 이때 '시선강간'에 해당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지속성(시간), 표현(특정 부위, 위, 아래로 훑는 듯한 시선)인가에 따라 '시선희롱', '시선추행', '시선강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여성이 남성을 바라볼 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 사람(특히 남성)이 사람(특히 여성)을 바라보는 심리적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1) 남성은 성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2) 성적인 독점욕을 가지고 있으며, 3) 젊고 건강한 이성을 선택하려 하고, 4) 시각적인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로 규정할 수 있다.[D. 시먼스, <섹슈얼리티의 진화>] 남성은 여성에 대해 '성적으로 독점하고 싶어하는 경향'과 함께 '성적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욕구도 있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진화론과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진화심리학의 이론적 근거로 아래 그림의 '객체'인 중년 남성을 옹호하거나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심리 상태나 무의식적 행동에 대한 분명한 의도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단지 고개를 돌려 달리는 여성들을 바라본 행위만으로 잠재적 또는 실질적 성범죄 가해자로 예단하는 '제3의 주체'의 발화 내용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내용-진화심리학 이론-을 아래 그림의 '중년 남성'이 알고 있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 인지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개가 돌아갔을 수 있다. 그렇게 '180도' 고개를 꺾어 뛰어가는 여성을 보는 남성이 반드시 그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했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다. 보통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가서 바라본 대상은 그만큼 빨리 잊혀지기 때문인데, 우리가 보통 '성적 대상화'라고 할 때,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라고 말하는 건 명백한 왜곡이고 비틀린 주장이다. 누군가가 '성적 대상'이 되려면 시선을 포함한 물리적 접촉과 함께 '성적 행위'의 매개 또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위에서 진화심리학의 4) 시각적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가 곧 모든 것이 '성', '섹스'에만 집중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진화 단계에서 남성은 주로 수렵을 했기 때문에 움직이는 물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것이 오늘날,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 1), 2), 3)의 내용이 본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래 두 컷 만화에서 '제3의 주체'가 발화하는 내용은 앞의 맥락이 삭제되어 있고, '객체'인 중년 남성의 의도가 배제되어 있으며, '제3의 주체'가 가진 명백한 확증편향과 선입견, 예단 그리고 중년 남성에 대한 편견으로 혐오 발언을 하고 있다.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오직 '시선강간' 한 가지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는 만큼이나 못 생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간과 기회도 많다는 것이 발표되었다. 즉, 남성은 꼭 아름다운 여성만 보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못 생긴 여성도 여성이니까 '성적 대상화'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건 그냥 자신의 경험에 미루어 짐작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것은 '시선강간'을 하려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극히, 매우 극히 드물게 그런 변태 남성도 있겠지만, 대부분 남성은 여성을 바라보고 곧바로 자기가 갈 길을 가며, 자기가 바라본 여성에 대해서도 곧바로 잊는다. 그런 점에서 아래의 두 컷 만화는 특히 '중년 남성'의 시선으로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선강간'이고 '성추행'이라는 뉘앙스로 남성 혐오 발언을 하고 있고, 이것은 명백하게 '제3의 주체'가 주관적 판단 오류 내지는 악의적 왜곡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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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화
    2021-12-13
  •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제목 :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작가 : 조 사코 출판 : 글논그림밭 만화책이지만,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것이 괴로울 정도로, 이 만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정면에서 그리고 있다. 우리는 중동의 역사에 대해 많은 부분 무지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들과 우리의 접점이 약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너무 심하게 미국과 유럽 쪽 역사에 편향된 교육만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동 뿐이랴. 아프리카의 역사는 어떤가. 우리가 수단이나 나미비아, 탄자니아 같은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강자의 역사, 승리한 자의 기록, 편향과 왜곡으로 점철된 역사일 뿐임을 새삼 깨닫는다. 예를 들어, 미국의 역사를 말할 때도 우리는 미국의 '백인'들이 기록한 역사를 읽고, 판단한다. 미국인-주로 백인-들이 가장 충격적인 책으로 꼽는 것이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인데, 미국인의 주류인 백인들도 '미국민중사'에서 말하는 역사의 내용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그렇듯, 어느 나라의 역사든 기록은 왜곡되고, 편향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는 어떤가. 심지어 자기나라의 역사조차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려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하물며 세계사라니. 결국 이런 역사 공부를 하려면 혼자 책을 찾아 읽는 방법 외에는 없다. 올바른 세계관을 갖기 위한 가장 첫번째 단계는 '역사'를 올바르게 공부하는 것이다. 역사를 모르거나 배우지 않거나, 잘못 배우면, 그 위에 쌓는 지식은 모두 잘못될 수밖에 없다. 이 만화책에서 작가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기억하지 않거나, 기억에서 멀어진 1956년의 학살 사건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든다.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사람, 남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수 백 명을 학살한 사건인데, 이런 처참한 학살 행위가 UN보고서에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1947년 이후 오늘날,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미국과 영국이라는 강대국이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의 여러나라들도 같은 이슬람 국가인 팔레스타인을 돕지 못하거나, 않는 이유는 그들 내부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즉,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와 결탁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집권층이 존재하는 나라는 '친서방' 국가로 분류되고, '반미, 반유럽'을 외치는 나라들은 미국에 의해 '테러국가'로 낙인 찍히고 미군의 침략에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는 운명을 갖는 것이다. 거대한 역사는 추상적이지만, 이렇게 개인의 운명을 다루는 미시적 역사 기록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의 입장이라면 과연 어떨까.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와 비교하면 어떨까. 저항하다 죽는 것과 굴종으로 살아가는 것, 오로지 그 두 가지 방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때,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까. 당신은. 조 사코는 '코믹 저널리스트'라는 독특한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만화(그래픽노블)라는 형식에 시사(국제문제, 정치, 경제, 인종, 분쟁 등)를 담아 기록한 것으로, 기존의 글로만 기록했던 저널리즘의 지평을 확대하고, 대중에게 하나의 주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역시 '가자 지구'에서 1956년 11월 12일에 발생한 이스라엘군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현재 시점과 과거 상황을 오가며 이 사건의 배경과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형식은 만화지만 영상으로 그대로 옮겨도 될 만큼 형식미도 뛰어나다. 작가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과정과 어렵게 만난 학살생존자 또는 그의 가족, 친척들의 구술을 통해 과거를 재현한다. 1956년 11월 12일,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지만, 그 사건이 있기까지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은 간단치 않다. 이 시점(1956년)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점령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유대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은 2차 세계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 가운데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가 유대인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가 없었던 유대인들을 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유대인들에게 내주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당한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1948년이고, 이때부터 중동 지역에 분쟁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중동의 대부분 국가는 이슬람을 종교로 갖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종교인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종교적 갈등과 함께 영토 분쟁도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이집트의 국내 정치 상황과 이슬람 패권주의, 이집트와 영국, 프랑스, 미국 사이에 벌어진 수에즈 운하 국유화 사건, 이집트 내부의 이슬람 근본주의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정치적 긴장, 범 이슬람 진영과 범 친미 진영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 등 복잡한 양상이 바탕에 깔려 있지만, 궁극적인 원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기존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동에서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고, 여기에 이스라엘은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을 든든한 배경으로 업고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과 전쟁을 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다. 자신들이 살던 땅을 유대인들에게 뺐긴 것도 억울한데, 이집트와 이스라엘 전쟁 때 이스라엘군에 쫓겨 어쩔 수 없이 가자 지구로 들어온 사람들은 허허벌판에서 움막을 짓고 살아야 했다. 마치 한국에서 남북한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땅에서 거지처럼 살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들은 자신의 집, 재산을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맨손으로 가자 지구로 들어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마져도 이스라엘군의 감시와 통제, 예측할 수 없는 학살로 인한 공포 속에서 늘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극우파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이들 극우파는 주변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보다는 폭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했고, 11월 2일 가자 지구를 침략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군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인 남성들을 밖으로 끌어내 아무 이유 없이 집단 학살을 시작했고, 학살당한 사람은 최소 수백 명에 이른다. 생존자의 증언, 생존자 가족, 친지, 이웃의 증언, 학살당한 가족, 친지, 이웃, 친구의 증언이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기록되기 시작한다.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인 아베드와 함께 다니며 5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그때의 생존자를 찾아나섰고, 그 과정을 최대한 면밀히 기록한다. 그가 조사와 취재를 위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있을 때도 역시 이스라엘군에 의한 침탈과 학살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50년 전과 현재가 똑같다고 말한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에 무차별 폭격을 해서 팔레스타인 사람 1,417명이 죽었는데, 이 가운데 352명은 어린이였다. 5,300명이 부상당했으며 시가지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조금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대체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미쳐날뛰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고,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오히려 화를 내야 함에도, 이스라엘은 폭력으로 이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 유대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갈등을 고려한다 해도,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저 미치광이의 태도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1956년에 일어난 가자 지구 학살 사건만 해도, 유대인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히틀러에게 당한 집단학살의 트라우마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상태였는데도, 유대인들은 독일군이 저지른 야만적 행위만큼이나 악랄한 집단 학살을 저지른다. 대체 왜? 분쟁의 불씨를 만든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고, 유대인은 수천 년 동안 떠돌아 다닌 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물리적 형태의 '국가'가 절실했다. 결국 피해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오랜 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고, 멀쩡한 자기 집을 어느 날 갑자기 뺐기고, 자기 집에서 쫓겨난 황당한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유대인이 점령지를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거주지는 극적으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1948년에 비하면 1/10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영역에서, 그것도 지리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서로 오가지도 못하는 강제된 분단의 처지에 놓여 있고, 가자 지구를 비롯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곳은 이스라엘군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어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자면, 일본군이 지금 서울 면적에 한국인 5천만 명을 집어 넣고, 서울 외곽 경계에 높은 담장을 두르고, 서울에서 나가거나 들어올 때마다 검문, 검색을 하며, 아무런 통지 없이 출입문을 닫아 걸고 몇날 며칠을 통행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필품도 부족하고, 인구 밀도는 엄청나게 높고, 경제 활동이랄 것도 없어서 거의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고,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한 빈곤층이 90%에 이르고, 상하수도를 비롯한 기반 시설이 붕괴되어 거의 원시상태에 가까운 삶이라면, 폭동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 일본군과 싸우고, 자살폭탄테러를 하는 것이 최후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누구를 원망하게 될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놓여 있는 현재의 삶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방 사회 즉 제국주의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몸부림을 '테러'로 규정한다. 그리고는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대등한 상태에서 '분쟁'을 하고, 전쟁을 하고 있다고 떠들고 있다. 현실은 이스라엘의 일방적 폭행과 폭력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나가고 있으며, 지난 60년 동안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악의적으로 왜곡,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과거 유대 민족처럼 '국가'가 없고, 중동 지역에 흩어져 살던 민족이어서 지금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들의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고, 가해자 이스라엘의 악행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누구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의 팔레스타인 현실은 실재하는 지옥이라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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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3
  •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제목 : 홀-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작가 : 김홍모 출판 : 창비 7년, 아직도 세월호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부는 왜 존재하는 걸까. 정부는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던 2014년 4월 16일. 그 이후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침몰의 사실을 밝히라는 시민의 비통한 목소리를 폭력으로 탄압하고, 언론과 정치권 역시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도,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시민들(일부를 제외하고)이 세월호 참사와 희생자, 유가족을 끌어안고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각오로 7년을 버텼다. 무능하고 천박하며, 악랄하고 야비한 박근혜 정부를 촛불로 끌어내린 시민은 문재인 정부를 세우고, 국회의석도 민주당에 180석을 밀어주었지만, 정부와 여당은 집권하고 무려 4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명백히 촛불시민에 대한 배신이며, 역사의 정의를 거스르는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 씨와 그의 가족, 다른 생존자들을 인터뷰해서 완성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위해 세월호 참사 관련 영상과 자료를 거의 모두 찾아봤으며, 시나리오를 완성할 때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도 세월호 참사 이후 그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참사는 기억하되 참사의 디테일은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희생자의 얼굴을 바라보면, 나 역시 그 깊은 고통과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세월호 참사를 알리려고 스스로 그 고통과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와 사실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용기이며 많은 시민에게 희망을 주는 행동이다. 1부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학생과 시민을 구한 '민용'의 증언을 토대로 한 내용. 민용은 세월호에 트럭을 싣고 인천에서 제주를 오가는 트럭기사로, 세월호 참사 당일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남아 학생과 시민을 구한 의인이다. 하지만 정부와 언론은 민용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민용은 배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민용에게 세상은 단순하다. 거짓말 하는 것은 나쁘고, 어려움에 놓여 있는 사람은 도와주어야 하며, 특히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최선을 다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정부는 국민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며, 대통령과 장관, 공무원은 국민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상식적인 사람이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대통령을 비롯해 공무원, 경찰, 언론 등 정부를 구성하는 모든 분야에서 거짓말과 회유, 협박을 하며 민용을 압박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 그는 정부의 존재가 거대한 악마의 모습 그 자체였다. 2부 민용의 딸 안나는 고등학생이다. 인천에서 제주로 수학여행을 오던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2학년이었고, 그 학생들을 구하다 몸과 마음이 망가진 아버지 민용을 옆에서 지켜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아버지는 자책과 트라우마로 우을증을 앓고, 자해를 해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간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안나는 친구들과 함께 '세월호 기억 플래시몹'을 준비한다. 안나와 친구들은 고3으로 수험공부를 해야 했지만, 그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의 일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제주신성여고, 제주여고, 중앙여고, 제주일고, 대기고 학생들과 연합해 플래시몹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대학에 진학한 안나는 언니 나연과 같은 '응급구조학과'를 전공한다. 언니 나연이 '응급구조학과'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었지만, 안나가 '응급구조학과'를 선택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세월호에서 많은 학생, 시민의 목숨을 구한 것이 안나는 많이 자랑스럽다. 3부 세월호 생존자 민용과 그의 가족, 아내와 두 딸(나연, 안나)은 민용을 지켜보며 함께 괴로워한다. 민용은 세월호 참사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몇 번의 자해를 하며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를 안전하게 구하라는 말을 하지만, 정부와 주위 사람들은 오히려 민용을 비난한다. 희생자 가족은 말할 것도 없지만, 생존자와 생존자 가족들의 삶도 세월호 참사 당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세월호 침몰의 사실을 밝히고, 희생자, 유가족, 생존자, 생존자 가족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치료가 절실함에도 박근혜 정부는 그들을 '빨갱이' 취급했으며, 패륜집단인 '일베'는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를 모욕하고 조롱하는데도 정부는 그걸 방관하고, 심지어 조장했다. 그것이 박근혜 정권의 정체성이었다면,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런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지만, 이런 패륜집단과 악랄한 반인륜 발언을 하는 자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의 역사에서 그 전과 이후를 가를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이 완전하게 사실이 드러나고, 원인을 제공한 자들, 가해자들이 모두 처벌받고, 희생자, 유가족, 생존자, 생존자 가족이 납득할 만한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받지 않는 한, 절대 끝날 수 없는, 끝나서도 안 되는 사건이다.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아 김홍모 작가의 '홀'이 나온 것이 세월호 참사의 사실을 밝히는 데 작은 밑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문밖의 사람들
    제목 : 문밖의 사람들 작가 : 김성희, 김수박 출판 : 보리 1988년 무렵에 나는 구로공단에 있는 영세한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삼미금속'이라는 회사였는데, 도금 공장이었다. 일당을 많이 벌려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것이 나았고, 군대 입대 전에는 3년 정도 배관공으로 일을 한 경력도 있어서 나는 공사현장이나 매형이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파견 노동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는 중동 건설 붐이 일고 있었고, 몇 년만 다녀오면 집을 한 채 마련할 수 있을 정도여서 인기가 높았다. 나는 그런 기회를 잡았지만,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중동에 가지 못했다. 구로공단의 영세한 공장에 들어가게 된 것은 내 밥벌이도 있었지만, 그때 함께 공부하던 선배들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70년대 후반부터 알게 된 독서회는 번성했고, 내가 살던 지역에 새로운 독서회가 생기면서, 그곳에서 선배, 친구들을 만났다. 이들 가운데 극소수가 따로 '스터디'를 했는데, 사회과학 공부였다. 나는 정규 학교를 다닌 것이 국민학교가 전부였으므로 이때만큼 열심히, 깊이 있게 공부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검정고시로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대학에 진학할 생각도 있었지만, 선배들은 대학보다는 현장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나는 대학생이 아니었으므로 '위장취업'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노동자였고, 이미 몇몇 공장을 전전하고 있었다. 휴대용 가스렌지를 조립하는 공장, 텔레비전 케이스에 필름을 씌우는 공장 등을 거치면서 저녁에 집에 돌아와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제1회 전태일문학상에 당선되었고, 나는 '노동자 작가'가 되었다. 그래도 삶은 달라지지 않았고, 올림픽이 열린다는 그 해에도 도금 공장에 다니며, 삶은 어둡고 무거웠다.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었지만, 노동자의 의식은 낮았고, 회사의 감시는 심했다. 도금공장에는 황산, 염산 원액과 시안화나트륨(청산가리), 시안화칼륨 등 독극물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심지어 시안화나트륨은 작은 흰색 덩어리인데, 드럼통으로 가득 우리들이 옷을 갈아 입는 탈의식에 놓여 있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청산가리를 가지고 나갈 수 있었다. 염산, 황산, 시안화나트륨, 시안화칼륨 등 독극물을 취급하면서도 우리는 고무장화와 고무장갑만 끼었을 뿐, 보호안경도 없었다. 그 용액이 눈에 튀어 들어가면 물로 씻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일하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문송면 군이 수은중독으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렇게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면서도 노동자들은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쉬는 날 등산도 하고, 가끔 야근을 하지 않을 때는 저녁도 먹으면서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 슬쩍 떠봤지만, 그들도 이 공장에서 오래 일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영세한 공장에서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고가 지금, 경제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파견노동자, 하청노동자, 비정규노동자 등으로 더 잘게 쪼개져 차별당하는 노동자의 현실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정치는 군사독재에서 민주정부로 진보했지만, 노동자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성장하고, 수출이 세계 10위권이고, 국민총생산, 국가총생산, 1인당 국민소득 등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노동자의 소득도 증가하고,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으며, 개인의 절대적 삶의 환경도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이 성장하고, 자본가와 부르주아가 가져가는 부의 크기에 비하면, 노동자들의 몫은 상대적으로 더 작아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즉, 사회의 부가 커지면 거의 대부분을 소수의 자본가와 부르주아가 차지하고, 다수의 노동자는 아주 적은 몫을 나눠 갖는 것이다. 이것을 서양 자본주의에서는 '신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한국은 특히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빈부의 격차는 더 극심하게 벌어지고, 노동자의 고용 불안정이 깊어졌다. 정규직, 비정규직, 하청, 파견 노동자 등으로 세분화한 것도 외환 위기 이후부터였다. 이렇게 노동자의 고용 환경이 나빠지면서 노동자의 삶은 더 불안정하고, 임금 격차는 커지게 되었다. 자본은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본능이고,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여기기 때문에, 노동자의 죽음을 하찮게 여긴다. 이 작품에서 메탄올 독성으로 실명하게 된 여섯 명의 청년 노동자들도 자본의 이윤 추구에 소모품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역사는 민주주의로 발전하면서 인권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 인권의 확대로 인해 노동시간은 줄어들고, 각종 차별은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으며, 노동 환경도 개선되고 있다. 주5일 노동, 최저임금제 등 노동자의 권익이 향상되는 것도 시대의 당연한 흐름이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은 서양의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노동자의 처지가 매우 열악하고, 자본의 착취가 악랄한 현실이다. 자본가의 범죄는 가볍게 처벌되고,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인 파업은 무겁게 처벌된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해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이 고전적 형태의 자본 축적에 관한 해석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금융자본의 진화로 자본의 축적은 더 다양하게 발전하고, 노동자의 착취도 세련되게 바뀌었다. 여기에 노동자도 인간으로의 욕망을 가진 존재라서 이기심, 경쟁 같은 자본주의의 특성에 쉽게 빠지게 된다. 괴물이 된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건 민주주의와 인권, 복지를 바탕으로 하는 정부의 통제와 제도적 장치다.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고, 자본(가)의 범법 행위를 미리 감시하는 구조를 만들고, 자본가가 범죄를 저지르면 강하게 처벌하는 법률을 만드는 등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있지만, 그런 일을 하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을 자본이 매수하는 방식으로 길들여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여기에 사법부까지 매수하면서 자본은 모든 권력을 길들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인은 자본가다. 그들은 막강한 자본으로 국가를 장악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노동자는 다수지만 가진 것은 오직 '머릿수' 뿐이다.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통해 자본가와 힘겨루기를 하지만, 사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는 전진기지 역할을 해야 하며,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의 혁명을 통해 끝장난다는 것이 고전적 혁명이론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한 존재다. 평등하지는 않지만, 동등한 존재임에도 노동자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간다. 인류의 역사가 불평등과 차별의 역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 보편의 평등과 인권이 확대되고, 부의 집중과 편향도 줄어들어드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기 위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리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상황에 놓인 노동자들과 노동자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위험한 공장에 취업하고, 파견노동자가 된다. 공장은 하청, 재하청으로 내려오는 구조로 생산단가가 깎이고, 영세공장의 자본가는 최소한의 임금에서 이윤을 남기려고 독극물을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쓰게 된다. 산재를 당한 노동자들을 돕는 단체의 일꾼들 역시 열악한 처지에 있지만, 이들은 한결 같이 어려운 처지의 노동자와 함께 한다. 올바른 국가라면 이들 일꾼들이 하는 일은 모두 정부의 기관에서 해야 할 일이다. 정부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와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단체를 만들어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최저 임금 이하의 '생존비'를 받으며 일하면서도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에게만 기대야 하는 걸까. 한국 그래픽노블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놓치지 않고 천착한다는 점에서, 김성희, 박수박 작가를 비롯한 그래픽노블 작가들의 성과가 놀랍고, 대단하다. 다른 장르보다 그래픽노블이 갖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화 장르가 기존의 '오락물'이라는 선입견을 떨치고, 깊이 있고 진지한 장르일 수 있다는 걸 그래픽노블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다. 만화는 현실을 조금 떨어져서 보는 효과가 있다. 소설은 상상을 통해, 영화는 미장센을 통해 리얼리즘을 구축한다. 만화는 단순화한 선으로 사물을 표현하기에 실제 현실 세계가 아닌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비현실성은 독자가 작품 속 세계와 현재(실제 세계)의 중간에서 작품과 현실을 오가며 비교, 판단할 수 있는 거리를 두게 만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지금, 현재 일어난 사건이지만 마치 1970년대, 1980년대 일어난 사건처럼 보인다. 그만큼 비정상적 사건이라는 뜻이다. 내용에도 나오지만, 후진국에서조차 일어나지 않는 미개한 수준의 사건이라는 뜻인데, 자본가와 관리자들이 화학물질을 다루는 기본의 기본 조차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고, 그 원인은 오로지 '단가'를 맞추기 위한 것이며, '단가'를 맞춘다는 것은 영세 자본가가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비현실적 사건과 상황을 표현하는 김성희 작가의 그림은 디테일이 많이 생략된 단순한 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단순한 듯 보이는 그림은 오히려 실사화보다 작품의 내용에 몰입하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구체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는 장면에서는 디테일이 살아난다. 67쪽과 89쪽에 등장하는 박근혜의 그림은 다르다. 같은 인물을 실제 인물과 매우 비슷하게 그리거나, 만화화 해서 표현하는 것은 작가가 그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픈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노블은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그림과 함께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는 기능도 있다. 이 작품 역시 언론에 보도되기는 했지만, 실제 내용 전체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김성희, 김수박 작가는 밀도 있는 취재를 통해 사건의 시작, 피해 노동자 개인의 삶, 노동자를 돕는 단체와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영세기업과 대기업의 태도 등 이 사건을 둘러싼 노동자와 자본의 이해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어린 학생들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수업 재료로도 훌륭한 교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레드 로자
    제목 : 레드 로자 작가 : 케이트 에반스 출판 : 산처럼 80년대, 사회과학 공부를 할 때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몰랐다. 시간이 지나서 '레닌보다 뛰어난 이론가'였던 로자의 평전을 읽었다. 로자의 비범함은 물론이지만, 당시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의 비겁한 태도를 보면서, 유럽에서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로자가 살던 시대는 '혁명의 시대'였다. 로자는 1871년, 폴란드의 도시 자모시치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는 폴라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우크라이나 국경 쪽으로 붙은 도시였고, 유대인들이 전체 주민의 약 30%를 차지할 만큼 많았다. 현재의 자모시치 구 시가지는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모시치 시는 폴란드의 귀족이었던 얀 자모이스키가 16세기에 세운 도시로, 서유럽과 북유럽을 연결하는 무역로에 세운 도시다. 도시 설계는 이탈리아 건축가 베르난도 모란도가 했으며,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양식을 적용한 아름다운 도시로 이름이 있다. 로자는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자유롭고 진보적인 성향이어서 유대인의 율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폴라드인'의 정체성을 갖도록 자식을 키웠으며, 부자는 아니었지만 자식들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부모였다. 그런 부모에게서 막내로 태어난 로자는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고,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다. 하지만 다섯 살 무렵, 그는 한쪽 다리가 뒤틀리며 키도 자라지 않아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았다. 로자는 여성, 장애인, 유대인이라는 여러 겹의 차별과 억압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그의 지성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에 자기의 사상을 널리 알릴 만큼 뛰어났다. 로자가 세 살되는 해, 1873년에 로자의 가족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이주한다. 바르샤바 역시 유대인 인구가 전체의 약 30%에 이를 정도로 많았고, 로자는 중산층 집안에서 자유롭게 성장했다. 로자가 성장하던 바르샤바는 폴란드, 독일,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도시였으며, 유대인 공동체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자의 부모는 유대인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특정한 종교나 정파에 소속하지 않은, 진보적 시민으로 살아갔다. 이런 환경에서 로자는 폴란드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까지 네 개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었다. 이런 재능은 로자의 장애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육체적 장애로 인한 제한된 자유를 확장하기 위해 로자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우연의 일치지만,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도 1871년, 로자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그는 천식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을 평생 앓았다. 마르셀도 육제적 장애를 지닌 채 글을 쓰기 시작했고,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남겼다. 재능 있는 사람은 스스로 빛을 낸다. 비록 육체가 자유롭지 못하다 해도, 지성까지 장애를 갖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들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로자는 불과 아홉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독일어로 쓴 시와 산문들을 번역하고, 자신의 글을 써서 바르샤바에서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에 실린다. 1881년 3월 1일, 러시에서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파' 단원들에게 암살당한다. 이들 무정부주의자들 가운데 폴란드인 '이그나치 리니에비에드츠키'가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압제에 있었던 폴란드인들은 속으로 환호했지만,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암살단원 가운데는 러시아 여성 '소피아 페로프스카야'도 있었고, 그녀는 이 그룹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재판을 통해 이들은 모두 사형당하고, 로자는 그들의 소식을 신문을 통해 들으면서, 여성 혁명가의 삶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로자가 중학생이던 1883년 무렵, 처음으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 시기에도 '프롤레타리아 당'에서 활동하던 혁명가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특히 여성 혁명가의 체포와 죽음은 로자에게 특별한 충격을 주었다. 1885년에 '프롤레타리아 당' 당원이자 혁명가인 여성 두명, 19살의 마리아 보후스제비치와 로살리아 펠센하르트가 경찰에 체포되어 죽고, 1886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당' 지도부 네 명이 바르샤바 성채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로자는 자신도 뭔가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15살 무렵 '프롤레타리아 당'에 가입한다. 로자가 '혁명가'의 삶을 선택한 것은 시대적 소명을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인으로 러시아 제국에 압제를 당하는 조국의 현실, 수많은 진보 지식인, 학생들의 반제국 투쟁, 로자가 다니는 학교에서 겪었던 차별, 여성의 사회적 제약,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의 고통 등 여러 겹의 구조적 모순이 로자를 내리 눌렀고, 로자는 그런 차별과 억압에 정면으로 저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6살의 로자는 이미 차르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으며, 그는 이때 마르크스, 엥겔스의 자적을 읽기 시작했다. 비밀 조직이었던 '프롤레타리아 당'과 나중에 결성한 '폴란드 노동자 연맹' 등에 대한 경찰의 감시와 탄압은 심해지고, 1888년, 17살이 된 로자는 여권을 만들어 스위스로 탈출한다. 불과 5년 전, 마르크스가 영국에서 사망했다. 로자는 취리히대학 철학과에 등록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수강한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물론, 다윈의 진화론을 비롯해 수학, 생물학 등 과학 분야의 지식을 쌓아간다. 사회주의자가 가져야 할 덕목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분야가 바로 '과학'이다. 과학과 철학은 철저하게 이성적 활동이며, 과학은 특히 객관적 근거가 증명되어야 하는 엄격한 분야여서 논리와 분석, 구조를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자, 사회주의자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학문이기도 했다. 스위스, 취리히에는 이미 정착한 선배 혁명가들이 많았고, 그는 폴란드 혁명가들은 물론, 러시아, 독일의 유명한 혁명가들의 흔적을 찾았고, 그들을 만나 교류했다. 그는 1893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제3차 대회'에서 발언하며 선배, 동료 혁명가들로부터 진짜 혁명가로 인정받는다. 1898년, 독일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바르샤바로 가서 혁명에 동참했다. 이때부터 로자의 고난이 시작된다. 러시아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갇혔으며, 1911년에는 인터내셔널 사회주의국의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1915년에는 다시 독일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된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경찰의 감시를 받는 '보호관찰' 대상자였음에도 급진 좌파 단체인 '스파르타쿠스'의 지도부로 참여하게 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레닌의 지도로 성공하면서 1918년에는 독일공산당 창립 총회에서 연설하고, 1919년, 운명의 그해에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배후로 체포되어 학살당한다. 혁명의 시기,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깃발을 내걸고 투쟁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당대를 가장 앞서 가는 지성인들이었다. 다수의 민중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들은 목숨을 걸로 투쟁했으며, 그들이 살았던 당대는 제국주의 폭력이 세상을 망치고 있었다. 진보적 지성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당연히 반제국주의였으며, 사회주의 이론은 그들의 무기였다. 로자는 독일 야경단에 잡혀 살해당하기 전까지 네 권의 책을 썼다. '자본의 축적'은 1913년에 쓴 저작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설명하고 있는 자본의 축적 과정을 자본과 제국주의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러시아 혁명' 등의 저작을 남긴 로자는 유대인, 여성, 장애인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난 사회주의자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다. 그가 가진 불리함 때문에 여전히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악마의 일기
    제목 : 악마의 일기 작가 : 박건웅 출판 : 우리나비 잠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책을 읽고 자는 습관이 있는데, 어제는 막 도착한 이 책을 손에 들었다. 몇 페이지만 읽으려다 그만 다 읽고 말았다. 80년대 중반 그러니까 20대 중반에 선배들과 사회과학 공부를 할 때 정치, 경제, 철학, 역사를 집중해서 공부했는데, 한국근현대사도 그때 기본을 배웠다. 한국 역사-통사-를 처음 배울 때, '민중사'의 관점으로 배우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지배자의 관점으로 쓴 역사이거나, 친일 역사의 관점으로 쓴 역사를 배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정치와 뗄 수 없으며, 정치는 경제와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는 걸 바탕에 깔고 공부해야 한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1984년 동학혁명부터 1987년 노동자대투쟁까지-를 올바르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결코 일베충이나 친일매국노가 될 수 없다. 지금 일베충과 친일매국노, 민족반역자들이 날뛰는 건, 그들이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학교 교육이 그만큼 부실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학교 교육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 건 영어, 수학 따위가 아니라 역사여야 한다. 일제강점기 시기 친일매국노의 범죄와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한 항쟁, 해방 이후 이승만 도당의 독재와 만행을 가르치지 않았기에 비뚤어진 역사인식을 가진 일베충과 매국노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아직도 전체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이승만 정권의 최대 학살 사건이자 한국현대사에게 가장 비극적인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에 벌어졌지만, 이 학살 사건과 한줄로 연결되는 또 다른 학살 사건인 '제주4.3'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1947년 3월부터 시작된 제주4.3 봉기는 제주 경찰이 3.1만세운동 기념식에서 무고한 시민에게 총을 쏴 학살한 사건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제주도에는 인구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갔던 제주도민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1947년 무렵 약 30만 명에 이르렀던 제주도민 가운데 당연히 다양한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공산주의자, 남로당원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에서 남로당을 '토벌'한다는 목적을 갖고 군대를 투입했고, 이건 다시 1948년 '여수, 순천 사건'으로 연결된다. 즉, 1950년 6월 25일, 공식적으로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던 한국전쟁과 그 직후 벌어졌던 '보도연맹 학살 사건' 이전에 이승만과 극우집단은 대구10.1 사건(1946년), 제주4.3(1947년), 여수, 순천 사건(1948년) 등 일련의 조선노동당과 공산주의자, 진보적 지식인, 노동자들이 일으킨 봉기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미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 노동자, 지식인은 물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전력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보도연맹'을 조직한다. 보도연맹을 기획, 관리한 자들은 한때 좌익 활동을 하다 전향한 배신자들과 극우, 친일매국노, 북한에서 내려온 개신교도 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이 주도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예비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불법 체포해 감옥이나 큰 건물에 몰아 넣었고, 그렇게 잡아온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악마의 일기'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그린 그래픽노블이다. 이 작품의 원작은 박만순 선생님의 저작 '기억전쟁'임을 작가가 밝히고 있다. 작품은 여러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이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다락방 해방 창고 이름 목총 닭 귀신 외무덤 삼형제 두 얼굴 굴 호환 만세 순이 만남 기억 증언 작품의 형식을 보면, 작가는 그림 형식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창고'부터 '순이'까지는 의도적으로 어린이가 그린 듯한, 서툰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부분은 실제 학살 장면이 등장하고,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의 만행이 잔혹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많아서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림을 서툴게 표현함으로써 공포를 누그러뜨리지만, 어린이의 시각으로 보는 듯한 솔직함으로 이승만 정부가 국민을 어떻게 학살했는지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창고'에서 '순이'까지 보도연맹 학살의 직접 내용은 한 소년의 일기처럼 기록되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그림일기를 쓴 형식을 따라 윗부분에는 그림을 그리고, 아래는 내용을 적는 형식이다. 그림은 단순하고, 내용은 짧고 간략하게 생략되어 있지만, 독자는 오히려 그 간략한 형식의 그림과 짧은 내용만으로도 사건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앞부분 '다락방'과 '해방'에서는 주인공 '육삼이'의 이야기와 그가 '악마'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일제강점기 시기, 어린이였던 육삼이는 햇볕을 보면 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는 병이 있어 다락방에서 지낸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자, 아버지가 목사였지만 몸에 666 문신을 새기고 나왔다고 해서 부모도 그를 '악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육삼이는 가장 친한 친구 필순이와 사이 좋게 지내면서 행복한 시기를 보내지만, 자기 뜻과는 상관 없이 보도연맹 가입자들 속에 묻혀 들어가 군인에게 학살당하고, '악마'로 부활한다. 그리고 그는 '창고'부터 '순이'까지 이승만 정부가 저지른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목격하고, '만남'에서 전쟁이 끝나고 4.19혁명이 일어난 이후,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을 찾아간다. 이승만은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후 박정희 군사쿠데타, 전두환 군사쿠데타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가 압축되어 나타나고, 1987년 민주항쟁이 그려진다. '기억'에서는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이 나오고, 세월호 참사가 기록된다. 악마가 된 육삼이는 자신이 살았던 고향에 가 보지만, 고향은 골프장으로, 아파트로, 모텔로, 대형 교회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육삼이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666이 사실은 999 즉 '은하철도 999'의 철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기의 보금자리였던 다락방 속으로 들어가 엄마를 만난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영혼으로 사라진 육삼이를 보도연맹 발굴단이 학살당한 사람들이 묻힌 곳을 파헤쳐 육삼이의 유골을 발견한다. '증언'에서는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학살한 당사자 가운데 용기 있는 한 사람의 증언을 통해,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에서 치밀하게 기획하고 실행한 계획된 학살 사건이라는 것을 밝힌다. 박건웅 작가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꾸준히 그래픽노블로 작업하고 있다. '꽃' '노근리 이야기' '홍이 이야기' '어느 혁명가의 삶' '짐승의 시간' '그해 봄' '제시 이야기' '예안송' '아리랑' 그리고 이 작품 '악마의 일기'까지 어느 한 작품 소홀할 수 없는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대목을 그리고 있다. 나는 박건웅 작가의 작품을 초, 중, 고등학교 역사 교재로 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역사책을 읽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픽노블로 만든 작품들은 청소년이 읽기 쉽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 교훈을 배울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정식 교재로 쓰지 못한다면, 보조 교재로 청소년들이 꼭 한번씩은 읽을 수 있도록 학교도서관에 배치하고, 선생님들이 추천해서 - 사실, 선생님들이 먼저 읽어야 한다 - 청소년들이 이 일련의 작품들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갖기 바란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만화와 영화의 화학적 결합
    만화와 영화의 화학적 결합 -이동은, 정이용의 《환절기》, 《당신의 부탁》 만화는 영화보다 훨씬 오래된 예술형식이다. 영화는 현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탄생한 예술이지만, 만화는 원시시대부터 있었던 그림에서 나왔다. 현대만화의 시작은 19세기 초반이라고 하지만, 사람을 비롯해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과장, 축소, 비약, 간략화 한 이미지는 이미 그 자체로 만화적이다. 늦게 출현한 영화는 서사에서 만화와 소설에게 빚지고 있는데, 그건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서사의 역사가 짧기도 하고, 서사의 다양성, 양적 측면에서도 영화는 만화나 소설을 따라가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영화의 탄생 이후 수 많은 영화가 만화와 소설을 원작으로 새롭게 해석되어 나왔으며, 이럴 경우 관객은 원작 만화(또는 소설)와 영화를 비교하거나 다르게 해석한 부분을 흥미롭게 느낄 수 있다. 영화가 특히 만화와 더 가까울 수 있는 건, 영화도 문학의 한 갈래인 희곡(시나리오)을 거쳐 스토리보드(만화)를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이미 서사(시나리오)를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가 스토리보드로 기능하기 때문에, 만화를 영화로 옮기는 것이 훨씬 쉽다. 그런 면에서 작가 이동은, 정이용의 작품은 만화의 영화화에 매우 친근한 작품들이다. 원작 만화의 글을 쓴 작가이자 두 영화의 감독인 이동은은 영화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한 작가여서, 이 두 원작 만화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영화적 관점으로 그려지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영화로 만들 때, 별도의 시나리오 작업이 거의 필요 없을 만큼 그 자체로 시나리오이자 스토리보드가 된다. '기생충'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도 학생 때 학보에 만화를 그렸고,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스토리보드로 옮긴 것을 보면, 만화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만화와 영화는 '스토리보드'라는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두 작품에서 영화는 원작 만화의 줄거리를 거의 비슷하게 따라가지만, 시간의 흐름을 조금씩 바꿔 놓았다. 만화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작동하지만 짧게 등장하는 내용이 영화에서는 생략되기도 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서사를 강하게 압축해 놓았고, 이것을 아주 조금씩 풀어놓으면서 독자(관객)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여백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이런 장치는 만화에서 장점이 된다. 어차피 만화는 정적인 예술이고, 칸과 칸 사이를 메우는 것은 독자의 상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화가 영화로 옮겨오면 상황은 달라지고, 달라져야 한다. 만화의 한 컷, 한 화면이 상징하는 의미는 영화에서 똑같이 반복하기 어렵다. 영화는 필름일 경우, 1초에 24프레임이 움직이고 있고, 대사와 음악, 효과음 등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만화 또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때로 성공하거나 실패하는데, 그건 원작의 성공 여부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영화는 자신의 언어와 문법이 있음을 의미한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만화 원작의 모티프를 보다 강렬하게 '영화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환절기》 이야기는 미영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미영의 아들 수현은 고등학생이고, 어느 날, 그는 친구 용준을 집으로 데려온다.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배경과 상황이 있지만,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미영은 외아들 수현과 함께 살고 있지만, 사실 그의 남편은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수현이 사고를 당하고 드물게 한국에 오지만, 그에게는 이미 필리핀에 다른 여자가 있다. 미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살이에 초연한 사람처럼, 위자료만 주면 이혼해주겠다고 말한다. 미영의 남편도 미안해 하기는 해도 미영의 제안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자기와 아들을 배신한 남편이지만 뺨 한 대도 때리지 못할 정도로 여린 심성을 가진 사람이 미영이다. 미영은 아들 수현이 교통사고로 코마 상태가 된 것이 용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용준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다. 미영이 놓여 있는 상황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다. 아들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까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걸 모두 견뎌야 하는 미영은 누구보다 괴로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미영은 이 모든 상황을 이겨낸다. 그가 강한 사람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놓여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고통과 괴로움이 견딜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뀐다.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그건 곧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는 것이므로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미영은 남편을 놓아주고, 용준을 용서하면서 마음이 편해진다. 아들 수현이 동성애자라는 것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용준과 함께 한 시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었고, 마음이 움직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용준은 미영의 친아들이 아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용준은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부모가 불화하고, 결국 엄마는 자살하고, 아버지와는 혈연을 끊게 되고, 가족들과도 멀어지게 되는 경험을 한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성 정체성으로 가족 모두가 불행해지는 걸 보고 겪으면서, 그 모든 상황과 결과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현까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 상태에 놓이면서 용준의 죄책감은 커졌고,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하지만 용준은 자살보다는 다시 살아서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빚을 갚으려 한다. 그의 노력은 결국 미영의 마음을 움직이고, 용준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가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동기가 된다. 등장인물 가운데 미영 말고는 모두 남성이고, 미영의 남편, 아들 수현, 용준 등은 미영의 '타자'이자 미영의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이면서, 미영이 돌봐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미약한 존재들이다. 미영은 남자들을 돌봐야 하는 '엄마'이자 자기 자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운전도 배우고, 끊임 없이 사회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프로메테우스형 인물이다. '엄마'는 불완전한 존재인 자식을 돌보면서 힘들고 괴롭기도 하지만, '자식'의 존재만으로 근원적 기쁨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미영은 미숙한 남자들을 돌보면서 그것이 단순한 고통, 괴로움이 아닌, 그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수현이 기적처럼 깨어나면서 미영의 삶도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온다. 수현의 사고 이후, 수현과 용준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느낀 불편함도 수현이 깨어난 이후, 미영과 용준의 관계는 어느새 엄마와 아들의 관계로 바뀌고, 수현과 용준은 오히려 서먹해진다. 두 사람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열려 있다. 중요한 건, 미영이 아들을 하나 더 얻었다는 것이다. 불쑥 청년인 아들을 얻은 것처럼, 미영도 용준을 만나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진정한 '엄마'로 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신의 부탁》 어느 날, 효진에게 시동생이 찾아와 죽은 남편과 전 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할머니와 살던 종욱은 할머니가 치매로 병원에 입원하자 오갈 데가 없어지고, 결국 종욱은 효진의 집으로 들어간다. 종욱은 생모를 찾지만, 생모를 만나서는 생모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한다. 종욱의 생모는 죽었고, 어릴 때 자신을 키워준 사람은 계모였다. 종욱도 자기가 찾는 '엄마'가 생모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린 자기를 두고 떠난 이유를 알고 싶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여섯 살의 종욱에게는 그 사람이 '엄마'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가족을 이루는 방식은 모두 우연처럼 찾아온다. 효진에게 종욱이, 종욱에게는 여자친구의 뜻하지 않은 임신이 그렇다. 이들은 혈연이 아니지만, 기꺼이 가족이 되기를 바란다. 효진은 죽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혈육은 아니지만 종욱을 받아들인다. 종욱의 상황에서 보면, 생모는 얼굴도 모를 때 죽었고, 기억하는 엄마는 생모가 아닌 계모였으며, 그 계모마져도 여섯 살 때 자기를 떠났다. 종욱의 아버지 즉 효진의 남편은 종욱을 자기 어머니에게 맡기고 효진과 결혼해 살았으니, 이 가족의 가장 큰 피해자는 종욱과 그의 할머니인 걸 알 수 있다. 종욱은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 자기를 버리고 떠난 계모를 어떻게든 만나고자 한 것도 생모가 아님을 알면서도, 어린 자신을 떠난 이유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려서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고아 의식은 평생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효진은 그런 종욱의 마음을 헤아리고, 종욱도 효진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종욱이 여자친구의 임신과 출산에 적극 개입하는 것도 그런 트라우마의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종욱이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출산한 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어렸을 때 종욱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연이겠지만, 효진이나 《환절기》에서 미영도 고등학생 남자아이를 아들로 받아들인다. 고등학생 청소년은 곧 성인이 되는 경계에 있다. 이들은 이미 성인의 세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성인 흉내를 내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미숙한 면이 많아서 자주 세계와 충돌한다. 어른들이 만든 강고한 세계 - 사회질서와 구조 - 에 저항하는 한편,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 하는 청소년은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프로락사스와 같은 존재다. 종욱이 여자친구가 낳은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려 하지만,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갓난아이의 입양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렇다. 현실은 냉정하고 무섭게 타산적이다. 종욱이 가진 낭만적 이상이 현실과 충돌하면서, 좌절하는 과정은 곧 그가 사회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자, 이상과 낭만이 깨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종욱에게 합리적 조언을 하는 효진과 자기 아이를 입양시키는 종욱의 여자친구는 오히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대응하는 능력이 있다. 무모하고 낭만적이지만 종욱은 '책임'이라는 의무를 다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건 자신의 트라우마도 있지만, '남성성'의 한 특징으로 보인다. 효진이나 미영이 의도하지 않은 '아들'을 만나고, 모자의 인연을 만들지만, 이들은 오래지 않아 다시 헤어져야 할 인연이거나 이미 따로 살고 있다. 혈육이든 아니든 가족도 '개인'의 집합이며, 독립해 살기 시작하면 가족은 분화한다. 효진이 종욱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때, 종욱이 곧 성인이 되어 독립할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두 작품의 주인공 미영과 효진은 처음부터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기에도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고,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들이닥쳤을 때, 그 상황을 거부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인다. 이 '수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여성성' - 이걸 '모성'이라고 표현하기는 애매하다 -의 발현이고, 다른 하나는 가부장사회 체제에 길들여진 여성의 순치된 모습이다. 이 두 상황을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형태로든 두 모습은 혼재되어 있어서, 여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영이 수현과 용준의 동성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용준의 아버지가 끝내 용준을 용서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된다. 용준의 가족은 용준을 버리지만, 미영은 용준을 아들로 받아들인다. 효진 역시 죽은 남편이 전 아내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아들로 받아들인다. '가족'은 피를 나눈 혈연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더 넓은 의미의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 가부장사회의 혜택을 직접 받는 '남성(아버지)'이 아니라, 오히려 그 체제의 피해자인 여성(엄마)이라는 점에서, 미래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유연한 '여성성'이 주도하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할 수 있다. 미영과 효진은 낯선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의 삶을 확장하고, 성장한다. 서사의 흐름만 보면 미영과 효진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듯 하지만, 그건 마치 물이 사물을 포용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감싸안는 것과 같다. 자연은 흐름을 거스르지 않듯, '여성성'이 가진 본성도 그런 것이 아닐까. 약하고, 가여운 존재를 포용하고 감싸안는 따뜻함을 통해 자기의 외연을 확장하는 유연함을 두 작품은 잘 그리고 있다. 만화나 영화의 서사는 다시 문학과 만난다. 우리는 칸으로 나뉜 그림(만화)과 움직이는 그림(영화)의 이야기를 보면서 감동하는데, 표현 형식만 다를 뿐, 서사는 기본적으로 '문학'이다. 즉, 프랑시스 라까생의 표현대로 문학은 '쓰여진 문학', 만화는 '그려진 문학'이고 여기에 영화는 '움직이는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동은, 정이용의 작품에서 문학을 느낄 수 있는 건, 서로 다른 형식에서 '문학'의 본질을 느끼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프랑시스 라까생(1998), 《제9의 예술만화》, 하늘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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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3
  • 아리랑 - 혁명가 김산의 이야기
    제목 : 아리랑 작가 : 박건웅 출판 : 동녘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영웅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재능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시대에 조응하는 인간이며, 역사에 온몸을 내던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김산은 열다섯 살에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집을 떠난다. 지금의 중학생 정도의 어린 소년이 조국의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혁명가가 된다. 소년이 일본경찰과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다. 조선공산당이 1921년에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김산의 행동은 자생적 공산주의자 1세대에 해당한다. 김산은 당시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판단하고 있던 것처럼, 중국공산당의 혁명과 함께 해야만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크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갈라졌으며 그 안에서도 여러 분파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장투쟁 계열에서도 개별적 테러를 활용했던 민족주의 계열과 군대를 양성해 일본과 전쟁을 하겠다는 전투부대 조직은 목적은 같았으나 행동이 달랐고, 그들도 중국공산당과 쏘련공산당으로 각각 협력 세력이 나뉘었다. 아무리 간단하게 요약해도 당시 독립운동의 갈래는 매우 복잡했으며, 각 파벌의 갈등은 동지가 아닌, 적과 같은 미움과 증오를 띄기도 했다. 여기에 중국으로 숨어든 일본의 조선인 밀정이 독립운동가를 납치, 살해하는 경우도 많았고, 멀쩡하게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일제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사상의 굳건함을 잃지 않고, 혁명가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잊지 않고 일관된 투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서양에서는 체 게바라를 대표적 혁명가로 손꼽지만, 김산의 삶은 체 게바라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혁명과 독립을 위해 싸웠다. 쿠바 혁명을 비롯한 남미의 혁명이 미제국주의와 자본을 뒤엎는 혁명이었다면, 김산이 살았던 시대의 혁명은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띈다. 한국의 일제식민지 상황에서 독립하는 절대 과제와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혁명까지 이뤄야 하는 공산주의 혁명의 의무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산은 중국 곳곳에서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군벌들과 싸우며, 크고 작은 도시에서 일시적으로 혁명에 성공해 해방구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중국공산당은 언제나 열세에 있었으며, 군벌에 쫓기고 있었다. 이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에서 패퇴하면서 대장정을 시작한다. 대장정을 시작할 때 10만 명이던 사람은 연안에 도착했을 때 90% 가까이 사망하게 된다. 30년대 중반의 중국공산당은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연안에서 다시 터전을 다진 중국공산당은 마침내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다. 김산은 중국혁명의 성공도, 한국의 독립도 못 본 채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삼십대의 짧은 살았던 한 혁명가의 삶은 님 웨일스의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남았다. 님 웨일스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짜 혁명가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쟁을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남북한의 분단과 체제로 인해 인정받지 못하거나, 왜곡되는 현실이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혁명가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고, 북한에서는 민족주의 계열, 남조선노동당, 중국공산당과 협력했던 혁명가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결국 만주와 중국, 쏘련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역사에서 잊혀졌거나 지워진 상태다. 약소국의 혁명가는 시작부터 비극적 운명을 내재하고 있다. 조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서 큰 나라의 혁명을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곤혹스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들 혁명가는 현실의 고난을 피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신화와 창작에서 영웅은 고향을 떠나 고난의 길을 따라 모험을 하고, 더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현실의 혁명가는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전전하며 끝모를 고통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다. 그리고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혁명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억울하게 죽은 혁명가들은 기록에도 남아 있지 못하다. 님 웨일스의 남편 에드가 스노우는 모택동을 만나 '중국의 붉은 별'을 써서 서양에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알린 인물이고, 님 웨일스 역시 한국공산주의자이자 중국공산당원 장지락(김산)을 인터뷰해 당시 한국공산주의자들과 혁명에 관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은 매우 중요한 기록이지만 한국에서는 한때 금서였다. 독재정권은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장지락(김산)의 일생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제는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과거의 혁명가를 잊어버렸다. 박건웅 작가는 활자에 갇혀 있던 혁명가 김산을 깨웠다. 박건웅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흑백 판화 기법의 그림은 강렬한 내용처럼 강한 이미지로 당대의 이야기를 표현한다. 김산의 삶은 스스로 혁명가로서의 자각과 오랜 훈련으로,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의 고통을 극복하며 살아가지만, 늘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혁명가라도 인간적인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고, 평범한 행복을 누릴 기회도 있었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이미 결심한 김산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행복조차도 부담스러워한다. 그 누구도 김산의 삶을 강제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스스로 선택한 혁명가의 삶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높은 도덕성과 신념, 의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다루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하지만 이름 없이 스러진 수많은 혁명가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북한의 분단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의 자취까지 분단되는 부작용을 만들었으며, 역사에 기록될 기회조차 갖지 못한 훌륭한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이 많다. '아리랑'은 정부나 단체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닌, 님 웨일스와 장지락이 만나 대화를 하며 기록한 내용이라 공인받지 못한 기록이지만, 개인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기록하고, 당대의 세밀한 묘사가 풍부하게 살아 있다는 점에서 높은 사료적 가치가 있다. 님 웨일스의 글을 읽기 부담스럽다면, 박건웅 작가가 그래픽노블로 그린 이 작품을 권한다. 글만 읽을 때보다 훨씬 이해도 잘 되고 재미있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삶과 중국의 혁명 과정까지 알 수 있어 독립운동사 자료로 꼭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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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3
  • 엉클어진 기억
    제목 : 엉클어진 기억 작가 : 사라 레빗 출판 : 우리나비 가족 가운데 누군가 치매(알츠하이머)를 앓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많은 사람들은 부모가 치매를 앓아도 그 고통과 괴로움을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 점에서 사라 레빗은 조금 특별하다. 그는 그림과 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픽노블에서 작가가 자기와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 흔하다. 작가는 개인적 체험과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지만, 그 경험은 재해석되고, 보편화한다. 작가는 엄마가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을 알고나서 기록을 시작한다. 작가의 엄마는 불과 52세에 치매가 진행되는데, 모든 검사를 하고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보통 알츠하이머는 뇌 속에 이상 단백질(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 타우 단백질)이 쌓이면서 뇌 신경세포가 서서히 죽어가는 퇴행성 신경질환이다. 또한 21번 염색체에 있는 아밀로이드 전구단백질(APP) 유전자에 돌연별이가 있다면, 65세 이전에 치매가 나타나며, 이것을 '조발성 가족성 알츠하이머병'이라고 한다. 작가의 엄마가 바로 이 병(조발성 가족성 알츠하이머병)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14번 염색체에 있는 PS1, PS2 유전자의 돌연변이도 같은 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뇌조직 검사가 있었지만, 작가의 가족은 그 검사를 포기한다. 어떻게도 엄마의 치매 진행을 막을 수 없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의 변화만 따라가면, 인간이 아무리 지성과 이성의 동물이라도 물리적으로 뇌가 망가지는 병에 걸리면, 지성과 이성이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인간이 '동물'로서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날 때는 뇌의 퇴화가 진행하면서다. 이성과 의지가 사라지고 본능만 남게 될 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인간'으로 존재했던 과거는 분명하지만, 뇌의 퇴화는 과거와 (치매를 앓고 있는) 현재를 단절한다. 연속성이 사라지고, 가족의 얼굴과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그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지만, 사회적 기준으로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건 우리가 잘 아는 '좀비'와 비슷하다. 좀비는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이성과 지성이 사라지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다. 우리는 '좀비'를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형체는 인간이되, 존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한다. 자기 의지와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자신을 짧은 순간, 정신이 온전할 때 알아채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질병은 치매(알츠하이머)가 유일하다. 가장 가까운 가족도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습관적으로 하던 행동조차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기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작가의 엄마는 전형적인 진행을 보이는데, 처음에는 기억이 사라지고, 언어가 사라지며, 근력도 사라지고, 시력은 정상이어도 사물을 구분하지 못하며, 시공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판단력이 사라지며, 망상에 시달리고, 우울증이 나타나고, 감정의 변화가 급격하고, 밤이 되면 더욱 난폭해지고 가출한다. 치매를 앓는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이 겪는 고통 역시 만만치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서히 인간성을 잃어가는 걸 지켜보는 건 어쩌면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일 수 있다. 그렇기에 '아무르'에서 주인공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는 식물인간이 된 제자를 코치가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이다. 서양에서 먼저 '안락사'와 '존엄사'를 논의하기 시작한 건, 동양의 가족주의보다는 좀 더 개인주의가 발달했기 때문인데, 작가의 가족은 최대한 가족이 함께 지내며 돌보다 마지막 순간에 요양원 입원을 결정한다. 이들도 환자를 요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비인간적이고, 책임을 떠넘기는 비윤리적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족 가운데 한 명이 오래 병을 앓고 있거나, 치매로 인간성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요양원에 맡기는 것이 해결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작가의 가족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간병인이 도와준다. 간병인이 있어 가족은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치매(알츠하이머)는 단지 뇌 질환이 아니라, 육체 전체가 기능이 떨어지고, 퇴화하면서 서서히 죽는 병이다. 작가의 엄마도 병이 발견되고 불과 6년밖에 살지 못했다. 그 시간동안 가족들은 아내가, 엄마가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나빠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슬픔, 고통, 비탄, 분노, 좌절, 절망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서 늘 우울하거나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고, 순간, 순간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있었다. 이러한 모든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엄마가 운명하고 나서도 투병 기간의 기억이 가족을 더 가깝고 깊게 유대감을 갖도록 작용한다. 인간성이 파괴되는 병을 앓아야 하는 건 비극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주관적으로 표현하거나 객관화하지 못한다. 가족들은 병을 앓는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환자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이해하지만, 자신에게 내재화하지 못한다. 이 거리는 가족의 사랑으로 좁힐 수 있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다. 아무리 피를 나누고, 부모와 자식 사이라 해도, 개별적 존재가 갖는 자기 정체성과 독립성이 있고, 이들은 독립적 존재로 다른 환경과 생각, 가치관,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성인이 된 가족은 서로에게 타인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직접 경험한 시간과 사건을 그렸다. 독자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감정과 함께 두려움을 느낀다. 내 가족 가운데 누군가 치매에 걸린다면 어떻게 할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이기에 이 작품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현실은 작품보다 훨씬 고통스럽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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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화
    2021-12-13
  • 메즈 예게른
    제목 : 메즈 예게른 작가 : 파울로 코시 출판 : 미메시스 오스만 투르크(터키)가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을 학살한 사건은 의외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15년에 일어난 이 학살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세계사적 범죄였음에도 그동안 조직적으로 은폐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터키는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그런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터키가 '한국전쟁' 때 한국에 참전해서 함께 싸웠기 때문에, 우리의 우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터키는 아르메니아인을 무려 150만 명이나 학살한 이후, 어떠한 사과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한국군은 베트남 인민을 학살했다. 학살한 증거는 너무 많아서 말이 필요 없을 정도지만, 한국정부는 여전히 '공식 사과'와 그에 따르는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약소 민족이나 인종을 차별하고 학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국제사회의 관례'라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미개하다는 것은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휴머니즘이나 도덕성, 양심 등에 관해 더 이상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과 그 일당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저지른 범죄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했던가?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터키 정부도, 시간이 얼마가 지났던-올해가 터키가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자신들이 저지른 학살 범죄를 공식 인정하고, 아르메니아인에게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 시간이 흘렀다고, 범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나 터키라는 나라가 소멸되고, 민족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다른 민족, 국가의 노예로 전락한 상태라면 모를까, 주권을 가진 나라라면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터키를 전혀 '형제'로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독일보다 더 질이 나쁜 학살국가로 인식하고, 터키에 대한 태도를 부정적으로 견지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국현대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사죄가 없는 이상, 한국 역시 학살국가로 인정하는 것처럼. 이 학살 만행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가 된 사건과 관련 있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항제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아가 세르비아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가혹한 요구조건으로 최후 통첩을 보낸다. 그 요구조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모든 반(反)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할 것. 암살에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할 것. 반(反)오스트리아 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할 것. 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를 조사하는 데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로 들어가 도울 것을 허용할 것. 오스트리아로서는 보스니아가 이 조건을 다 들어준다해도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분리 독립을 원하는 보스니아의 주장을 오스트리아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황태자 암살사건을 계기로 보스니아를 침공해 본때를 보여줄 작정이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단순히 오스트리아와 보스니아의 국지전에 머물지 않고, 독일이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 오스만 트루크(나중에 터키공화국)였다. 이때 아르메니아인은 터키 남동부와 러시아 영토에 걸쳐 살아가고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령과 러시아 제국령에 걸쳐 살아가던 아르메니아 사람들 가운데 오스만 제국령에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이 학살당하게 된다. 이유는 단순했다. 오스만 제국이 독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러시아는 적대국이 되었고, 러시아 령과 오스만 령에 걸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독립을 위해 러시아를 도울 수 있다는 가정 때문이었다.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오스만의 지배자들이었고, 가뜩이나 자국의 영토에서 살아가던 아르메니아인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그 핑계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한국에서도 전쟁 기간에 양민학살이 많았지만, 특히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극우 권력이 진보 성향의 인민을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30만 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지금도 진상규명이 진행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곧바로 진보 성향의 시민을 체포해 학살했다. 그들이 잠재적 적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은 민족대 민족이었지만, 한국의 보도연맹 학살은 같은 민족이 단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지른 만행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광기가 민족이나 이념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터키가 저지른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을 두고, 히틀러도 지적했다. 세계의 누가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그것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동기와 합리화를 제공했으며, 소위 민주주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유럽과 미국 등의 백인 중심국가에서도 소수민족이자 약자인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에 관해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은 학살 장면을 재현하지 않는다. 물론 잔혹한 장면이 있지만, 참혹함을 소비하거나 관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살의 배경을 들여다본다. 터키의 '청년 쿠르드당'은 쿠데타에 성공한 이후, 세 명에게 권력을 몰아준다. 이들이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지휘했고, 동맹국인 독일마져도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항의할 정도였으나, 터키의 권력자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아르메니아인 여성, 아이까지 모두 사막으로 내몰아 잔악하게 학살하고 강간 살해한다. 인류의 집단 학살은 인류 초기부터 있었던 현상이다. 처음에는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살육을 저질렀지만, 이후 전투에서 이긴 부족은 진 부족을 노예로 삼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종교적 이유, 이념의 이유, 인종의 이유만으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인류는 동족을 대량 학살하는 잔혹한 동물이다. 인류가 이성과 지능을 가진 고등동물이라고 말하지만, 맹목으로 기울어진 광기와 편집증은 동족을 잔혹하게 살해하면서도 죄의식을 갖지 않게 만든다.
    • 문화
    • 만화
    2021-12-13
  •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제목 :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작가 : 김금숙 출판 : 서해문집 이 작품은 정철훈이 쓴 '소설 김알렉산드라'를 바탕으로 김금숙 작가가 창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성남문화재단'과 '성남시'에서 지원하는 웹툰 작업의 하나였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리즈를 '다음 웹툰'에 여러 작가가 연재하고 있다. 이 작품도 '다음 웹툰'에서 연재한 내용을 모두 볼 수 있다. 원작자인 정철훈은 1996년에 '김알렉산드라 평전(필담)'을 먼저 펴냈고, 이후 2009년 실천문학사에서 장편소설로도 발간했다.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는 특별한 존재로 알려졌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바롭스크 마르크스가 24번지에 있는 그의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17~1918년 이 건물에서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이 일하였다. 그는 볼셰비키당 시위원회 사무국원이며 하바롭스키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기도 하였다. 1918년 그는 영웅적으로 죽었다. 김알렉산드라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이자 볼쉐비키였으며, 역시 한국인 최초로 레닌과 면담한 공산주의자이다.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시작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발발한 직후, 자생적-여기서 '자생적'이라는 단어는 온전히 독자적으로 조직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과 일본공산주의 활동의 영향을 조선의 진보지식인들도 알고 있었고,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 으로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기로 보면,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에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기 전에 동북지역에서 활동한 최초의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의 활동은 쏘련공산당에도 도움이 되었다. 김알렉산드라의 존재는 조선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중국과 러시아 하바롭스크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상해에서 활동하는 임시정부 그룹,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그룹,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그룹인데, 임시정부에서는 공산주의자와 결별해 민족주의의 길을 걷고, 만주 지역에서도 무장투쟁으로 나아간 그룹과 민족주의 계열로 갈라진다. 무장투쟁을 선택한 그룹은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공산주의와 협력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했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독립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반면 김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힘겹게 살아온 김알렉산드라의 아버지와 그녀 자신의 삶은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차별과 억울함을 당하는 동포들을 보면서, 조선의 독립은 물론, 인간 해방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게 된다. 김알렉산드라의 운명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닮았다. 로자 역시 유대인과 여성, 장애인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공산주의자로 활동했으며, 그의 이론과 의지는 레닌을 능가할 정도로 위대했다고 알려졌지만, 그녀의 최후는 비참했다. 두 여성 공산주의자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두 여성이 공산주의자로서 매우 헌신적이었으며, 유능했고, 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김알렉산드라가 나라를 잃은 조선의 가난한 노동자의 딸이었다면, 로자는 폴란드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김알렉산드라는 로자보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삶 자체가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이었고, 로자는 그가 의용대에게 암살당하기 전에 이미 세 권의 뛰어난 책을 쓸 정도로 훌륭한 지성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공산주의자로 오래 활동하지 못했다. 김알렉산드라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기간이 불과 2년에 불과했고, 로자도 암살당할 때의 나이가 47세였다. 그럼에도 두 여성이 공산주의 역사에 남긴 족적과 의미는 훨씬 크다. 여성이 억압과 차별을 당하던 시기에, 남성보다 더 진보적이고 유능하게 활동한 여성 공산주의자들이 많겠지만, 당시 한국에서 김알렉산드라의 존재는 한국역사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기록해야 할 인물이다. 아래는 '시사저널'에 실린 내용으로, 김알렉산드라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 다음은 이인섭씨의 알렉산드라 김 전기 첫회로, 사형 장면과 유년 시절부터 10월혁명 전후 시기까지의 부분이다. 적 · 백군 내전 시기의 활동, 체포 및 재판 장면은 제217호에, 연해주 빨치산 조직표와 명단은 제218호에 싣는다<편집자> 사형 1918년 9월(조선력으로 8월15일 추석) 피로 물든 것 같은 아무릎 강이 옆으로 흐르는 하바로프스크 공원. 높다란 모자를 쓰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외투를 입은 키 큰 칼므이크인들(칼뫼코브가 이끌던 코사크 부대의 부대원들)이 모인 가운데 백군 사형집행인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지도자들로 소비에트 · 당 간부들, 그리고 우수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적군 병사들과 전에 이 공원에서 연주를 하였던 음악인들, 이만역 준투에 가담하였던 수십명의 소비에트 애국자들을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였다. 칼므이크인 사형집행인들은 혁명가들의 눈을 흰헝겊 조각으로 가리고 절벽에서 총살한 후 아무르 강에다 집어던졌다. 그때 총살된 치쉰, 벨로우스, 네페로프 등 동지들 속에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 동지도 있었다. 집행인이 알헥산드라의 눈을 가리자, 그는 눈에서 흰 천을 벗겨내고 선 다음과 같이 소리높여 이야기했다. “나는 35분간 연설할 권리가 있다. 나는 자기 조국을 훔치거나 배신한 자가 아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이며 조선의 혁명이다. 내 스스로 죽을 장소를 고르겠다. ”(이 이야기는 알렉산드라의 두 번째 남편 B.B. 오가이의 큰 딸 올가바실리예비치 오가이에 의해 알려졌다). 그는 천천히 todrr에 잠겨 열세 걸음을 걸었다. 무라비요프의 동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절벽에 멈추어 서서 사형에 대한 공포의 기색도 없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조용히 몸을 돌렸다. “존경하고 친애하는 동지들 남성들 여성들 노인과 젊은이들이여. 오늘 우리늬 적이 많은 우리의 애국자들과 나의 전우들과 그리고 나의 생명을 앗아가지만,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수행하던 과업은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조선의 후손들이여 ! 지금 내가 걸음은 바로 조선의 열세 개의 도입니다. 각각의 도에 공산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모든 장애 · 바람 · 폭풍을 극복하여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 주며, 자본가들과 지주들에게는 죽음을 가져다 주는 기적의 꽃을 피워라. 조선 13도의 젊은이들이여, 그 꽃을 손에 들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여라. 그것은 그대들의 자랑이 되리라. 여러분 모두는 우리의 후예들이 조선을 해방시키고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하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조선독립 만세 ! / 소비에트 만세 ! 볼셰비키당 만세 !/ 세계 혁명 만세 !” 총성이 울렸고,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의 시신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투쟁을 호소하던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던 절벽 아래로 떨어져 아무르 강에 잠겼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두려움을 몰랐다. 그의 대단함은 조선 청년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 대단함은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에게강한 인상을 주었고 우리의 적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칼므이크인 집행인 율리네스코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조선의 영웅이자 극동위원회의 위원이며 개화된 여성이었던 그는 죽었다. 전세계 근로자들의 자유를 위한 활동 때문에 사형집행인의 총 한방에 죽었다.”(선집《극동에서의 혁명》, 모스크바, 1923,160항 참조).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사, 소련공산당 고참당원, 우랄노동자동맹(1917)의 조직자, 재소 조선의 사회주의자 당원이었다. 유년시절 알렉산드라는 1888년 (3월1일께) 극동 연해주 수이푼의 포크롭스키 라이온(면)의 시넬니코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나게 영리했고, 용감하고 온화한 성품이었다. 두 살 때인 1890년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는 계모 밑에서 학대를 받다가, 다섯 살 때인 1893년 하얼빈의 아버지에게로 가 같이 살게 되었다. 아버지 페트로비치 김은 북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중국군사철도 건설 현장에서 한국어와 중국어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자이자 그들의 성공적인 투쟁의 지도자였다. 아버지 표트르 김은 사랑하는 딸 슈라(알렉산드라의 애칭)에게 늘 다음과 같이 얘기하곤 했다.“사랑하는 딸아, 네가 커서 일을 하게 될 때 나처럼 항상 노동자 편에 서서 일을 해야 한단다.”아홀살 때인 1897년 하얼빈 시에서 소학교에 다닐 때 그에게 커다란 슬픔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죽었던 것이다. 표트프 김이 죽자, 그를 존경하던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 수천의 노동자가 파업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어버지가 죽은 뒤 알렉산드라는 폴안드인 마르크 이오시포비치 스탄케배치의 집에서 살다가 열 살 때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오빠 추푸로프 페트로비치 김에게 갔다. 그곳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립 학교를 마쳤다. 그는 학교 도서과에서 체르니세프스키 · 게르첸 · 도브롤류보프 · 플레하노프 그리고 다른 혁명적 작가들의 저작을 공부하였다. 젊은 시절 열여섯살 때인 1904년 알렉산드라는 동창생인 폴란드인 마르크 아오시포비치 스탄케이비치에게 시집을 갔다. 이 일은 조선인 사회에 많은 소문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그가 외국인과 결혼한 최초의 조선인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 마르크 이오시포비치는 무위도식에 술과 도박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인간이었다. 결국 스무살 때인 1908년 남편과 이론한 알렉산드라는 그 행에 태어난 아들 비야체슬라프 마르코비치를 데리고 하얼빈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스물한살 때인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러시아어 교사였던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오가이와 재혼했다. 1910년 두 번째 아들 보리스가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늘 혁명 활동을 꿈꾸었다. 남편 오가이는 아내를 가사에서 해방시켜 혁명 활동을 위한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정치 활동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전쟁에 가담한 제정 러시아는 노동대중을 동원하였다. 도시와마을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등 노인과 여성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징집되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김병학이라는 비열한 청부업자가 있었다. 이 자는 선금으로 1만루블을 받고 조선인 노동자 1천여 명을 고용하여 우랄 지방의 나제즈진 벌목장으로 데려갔다. 하얼빈에서도 3천~4천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바로 이 나제즈진 벌목장에 동원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산드라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고인이 된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다고판단한 것이다. 스물여섯살 때인 1914년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남겨두고, 우랄 지역 노동자들의 통역을 자원해 벌목 현장으로 떠났다. 우랄 지역 노동자들은 아버지아 일했던 중국군사철도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 도시 바깥으로 출입하거나서신 연락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중국인 용병 가운데서 뽑힌 경비병들이 노동자들을 감시했고, 파업이 일어날 경우 물자공급 중단, 심지어는 대량 학살까지 자행했다. 알렉산드라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사민당의 볼셰비키와 관계를 맺게 되어 그 당원이 되었다. 그는 볼셰비키파의 비합법적 저작물을 읽었으며, 그리하여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차를 체제타도 그리고 자본가와 지주 등 착취 계급을 박멸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수 있다고 더욱 굳게 확신했다. 알렉산드라는 일본의지배를 증오하는 젊은 조선인 애국자들이 볼셰비키 당원이 되기는 아직 이르지만, 그들로 일단의 정치 조직을 결성하는 일은 적적하다고 판단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빠르게 전개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때인 1917년 2월27일(신력으로 3월12일) 부르조아 민주혁명이 제정을 무너뜨렸다. 이 혁명의 결과 러시아에는 두 개의 권력이 나타났다. 하나는 자본가와 지주의 권력 확립을 지향하며 전쟁을 계속 수행하려는 멘셰비키와 사외혁명당이 이끄는 임시정부의 권력이었고, 또 하나는 전쟁을 중지하며‘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 아래 자본가와 지주의 권력을 일소하여는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의 프롤레타리아 권력이었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우랄을 비못한 각 지방에서도 2월혁명에 고무되어 대중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조선인 여성 알렉산드라는 1만여 명의 주민에게 계급투쟁과 민중해방운동을 호소하는 연설을 행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우리 5천 조선인 · 중국인 노동자들은 오늘부터 더 이상 제정러시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가 권력을 쥔 국가의 국민이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청부인들과 차르 권력 사이세 밎여진 불공정한 계약의 이행을 무조건 거부합니다. …” 그의 모든 말은 노동 대중의계급적 단결을 공고하게 하였고, 기업가들과 멘셰비키에 대한 적개심를 불러일으켰다. 이 날부터 전우랄에서 권력 쟁취를 위한 볼셰비키와 멘세비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저명한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서 가장 정력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많은 기업 · 공장 · 노동현장을 다니면서, 지하에 숨어 있었던 당의 사업을 합법화했고, 당세포들을 조직하였다. 그는 노동조합에 가입을 권유하는 사업과 노동 조합에 당 세포를 조직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부행하였다. 1917년 3월게 볼셰비키 조직인 우랄노동자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에는 중국인도 가입하여싸. 노동조합이나 지방 소비에트 회의, 볼세비키 지도자 선출을 위한 투표에서, 5천여 명이나 되는 조선인 · 중국인 노동자들읜 많은 투표권을 가졌으나, 러시아어를 몰랐기 때문에 항상 알렉산드라가 찬성표를 던지면 따라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우랄에서 알렉산드라 동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1917년 두 번이나 모스크바에 페테르부르그를 방문한였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무엇 때문에 그가 그곳을 다녀왔는지 관심 없었으나, 지금 추측컨대 그는 당 중앙위원회를 방문하여 레닌을 만났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또 누구를 만났으며, 어떠한 과제를 받았는지는 모른다. 1917년 7월에 알렉산드라는 옴스크로 가서 10일간 보냈다. 이 기간에 나는 그와 함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강령과 규약 그리고<동산당 선언>을 러시아어에서 조선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조선어로 불렀고 나는 받아 적었다. 알렉산드라는 우랄노동자동맹이라는 볼세비키 조직을 만들어내었고, 그후 극동으로 떠났다. 나는 그의 위임을 받아 당의 강령과 규약을 조선어로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시베리라의 여러 도시에서 사회주의 조직을 만들었다. 10월혁명 전후의 활동 당시 조선인들사이에는 포크롭스키 라이노(면)출신 조선인 여성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청부인 김병학이 팔아넘긴 노동자들을 해방시켰다는 소문이 벌써 돌고 있었다. 모든 조신인들은 알렉산드라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반겼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이 조선인 마을에서 발행되던 조선인 신문 <조선인신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벌목자의 고통스러운 작업으로부터 수천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노동자들을 해방시킨 수에 우랄에서 돌아온 알겍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은 우리 편집국을 내방하였다. 조선인 볼세비키인 그는 남자들보다 더 용감했으며,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이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바뀌어 나가도록 호소하고 있다.” 알렉산드라는 남편 오가이로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저명한 조선인 혁명가 이동휘가 자유 아무르 주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으며, 사할린을 거쳐 일본으로 호송될 것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이동휘의 석방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알렉산드라는 오성묵과 다른 이들과 함께, 러사아와 중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이민들과의 관계 설정에 노력하였다. 동시에 그는 볼세비키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활동하였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의 사실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알겍산드라는 아무르 역(현재의 라조역)의 당조직가인 무라비요프에 의해 선출된 대표로서, 1917년 10월18일(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지구(크라이) 당협의회에 참가했다. 그해 10월 사회주의대혁명 승리 후에 하바로프스크에 극동 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자 소비에트가 결성되자, 알렉산드라는 외교부장으로, 동시에 하바로프스크에 잇는 러시아사회주의노동당 한 조직의 서기로 선출되었다. 이 사실은 조선인 여성인 그가 러시아인 볼세비키들과 함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소비에트 극동 집행위훤회의 외교부장에 선출된 사실은, 극동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들에게는 대단한 기쁨이 되었으며, 또한 그들 사이에 커다란 정치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알렉산드라는 조선인들에겍서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는데,이는 그가 그들을 솔직하게 대했개 때문이었으며, 그가 중국어를 자유로이 구사 할 수 있어 모든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는 외교부장으로서 헝가리인 · 독일인 등 외국인에 대한 여권발급제도를 간소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항상 그에게 고마워했다. 알렉산드라는 서른살 때인 1918년 2월(러시아의 구력으로는 3 · 1운동이 2월에 일어난 것으로 된다)에 일어난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따라 혁명가들의 회합을 열기로 결정하였다. 회합에는 이동휘 양기탁 모동열 이동녕 등 조선 민족해방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들과 조선과 중국과 극동에서 온 수십명의 혁명 활동가들이 참석했다. 회합에서는 조선 혁명운동의 정세와 장래 과제들을 토론하였다. 이 모임에서 알렉산드라는 마르크스 · 레닌주의의 입장에서 함렌파(이동휘, 김닙 혹은 김립), 평양그룹(유동렬, 양기탁) 그리고 경성그룹 (이동녕) 등 조선민족해방운동에 존재하는 파벌주의를 비판하였다. 그의 연설이 있은 후 사적인 간담회에서 모든 이들은 분파싸움을 중지하자고 약속하였다. 그 후 조선 민족해방운동 문제를 계속하여 토론하던 중 참석자들의 일부(이동녕과 그으 지지자)가 ‘정의당’이란ㄴ 이름의 민족해방조직을 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글나 다른 일부는 조선해방운동을 사회주의운동으로 바꿀 것을 호소하였다. 3월28일 하바로프슼에서이동휘 유동열 이하녕 오성무(오성묵의 오기라고 여겨짐) 등이 한인사회당(조선인사회주의당)을 조직하였다. 이것은 조선혁명가들의 단결과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첫걸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은 알렉산드라가 민족해방투쟁에 관한 마르크스 이론에 얼마나 정통해 있었는가,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을 사회주의운동으로 전환시키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실천적으로 훌륭하게 실현시켰는지 확고하게 말해 주고 있다.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권력으로부터 비용를 할당받았다. 조직의 할동가 등은 현금 급룔ㄹ 받았고 <자유종>이라는 신문을 발간하였다. 군사학교가 설립되었다. 위훤회의 의장은 이동휘었다. 군사학교장 겸 군사부장은 유동렬, 부위원장은 오가이, 청년부 의장은 오성묵,<자유종>의 편집인은 김 립이었다. 나는 재정담당이었다.(계속)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이번 호 알렉산드라 김 전기 2부에는 적백내전 기간의 전투에서부터 체포되어 재판 받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다. 소련당국에 알렉산드라 김의 전기를 제출하고 난 뒤, 이인섭씨는 당시 소련 정부 당국자로부터 주요 부분에 대한 보충 질의를 받게 된다. 이에 대한 이인섭씨의 답변 문서 가운데 특히 그가 알렉산드라 김과 관련한 자료를 추적하게 된 과정이 부속 기사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 이인섭시 전기 이후 밝혀진 새로운 사실을 중심으로 알렉산드라 김의 가족과, 그의 사상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준 요인들을 작가 鄭棟柱씨가 분석했다. <편집자> 시민전쟁 한인사회당 창설 1주일 뒤인 1918년 4월5일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국제 간섭군이 상륙했다 백위군이 봉기한 것이다. 시민전쟁이 시작됐다. 알렌산드라가 맨 먼저 무기를 들었다. 그는 영어·프랑스어·일본어·중국어·한국어 그리고 러시아어로 무장간섭군에 대한 정항을 호소하였다. 자국과 전세계 근로자들에 대한 호소와 계급 투쟁 호소, 그리고 조국을 수호하자고 외치는 전단을 썼다. 그는 선전 활동을 정력적으로 벌였고, 각 지방으로 동지들을 파견하였는데, 중국인 순취우, 러시아인 벨로우스와B.골리온코 등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주민들을 적군으로 동원하는 일과, 사람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일에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알렉산드라는 과?성이 있었다. 그는 매우 진지하고 신중하며 용감했다. 그는 시작한 모든 일을 끝까지 해내었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고 동지들을 존중하였다. 항상 매우 열심히 일을 하여 동지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그들의 활동력을 끌어올렸다. 한인사회당 당원들은 순서에 따라 의무적으로 전선으로 향하였다. 많은 노동자, 일용 농부, 어부들이 자원해서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전선으로 나아갔다. 조선 청년 1백명 이상이 우수리 전선에서 전사했으며, 조선인 적군 부대는 고립되어 싸운 게 아니라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싸웠다. 많은 조선인이 이만과 비야젬스키 역의 격렬한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본 간섭군과 벌인 여러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 중 반이상이 조선인이었다. 18년 9월초 빨치산 부대가 ‘붉은 강’의 후퇴선에 주둔했을 때 조선인들은 겨우 10명 남짓했다. 알렉산드라의 지휘아래 중국인 둥지 순취우는 중국인 독립부대를 조직하였고, 이 부대는 만주의 하오헤 지구와 비야젬스키 역 지구에서 활동하였다. 19년 9월 하바로프스크 시는 전면 포위되었다. 붉은 강까지 이르는 우수리 전선은 일본군·백위군·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 점령되었다. 일본군이 스바보드느이 시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르 시를 점령하고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는 메르쿨로프가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 군사철도와 하얼빈은 백위군 장군인 호르바트가 장악하고 있었다. 코사크 대장 세메노프는 치타를 지배하고 있었다. 로프스크 시립공원 회의실에서 소비에트 및 당 활동가들의 회합이 열렸다. 이 회합에 소비에트의 아무르 주 집행위원회 의장인 무힌 동지가 참석하였다. 회의에서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전투 없이 철수할 것과 부대를 숲으로 이동해 빨치산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철수하는 소비에트와 당 활동가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도시를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첫번째 그룹은 육로로 아무르 주와 보도이보를 거쳐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고, 두번째 그룹은 아무르 강을 따라 배로 아무르 주와 보도이보를 거쳐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고, 두번째 그룹은 아무르 강을 따라 배로 아무르 중와 몽고 증부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나가서 모스크바와의 연락을 회복하기로 하였다. 회합 참석자들 중 일부가 백군을 화약고로 유인하여 화약고를 폭파할 것과, 우리 부대가 아무르 철교를 건넌 후에 철교를 폭파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이 제안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야만 한다. “적을 죽이기 위해 주민에게 고통을 주면 안되다” 알렉산드라는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말하는 동안 강당은 조용했고 사람들은 줄곧 그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지들, 우리는 시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철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시에서 펄수한 뒤에 우리 적들이 거주하게 되겠지만 인민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만약 화약고를 우리가 폭파하면 적들은 죽이겠지만, 주민들에게 고통을 줄것이며, 건물로 부서지게 됩니다. 전투 없이 시에서 퇴각한다는 우리 의 의도는 무익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르 강의 철교는 극동의 장대한 건설물이자 우리들의 자랑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그것을 파괴하면 내일 우리가 다시 건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폭파해야 합니까.” 알렉산드라의 제안에 따라 철교와 화약고는 파괴하지 않았다. 두번째 남편인 B.B. 오가이의 큰 딸 올가 바실리예브나의 말에 따르면, 오가이는 알렉산드라 김이 시를 떠나기 전에 아내에게 조선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가발로 조선 여자들의 머리 모양을 하여, 멀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에서 온 여자처럼 위장하라고 권하였다. 알렉산드라 김은 그 충고를 거절하였다. “소비에트 극동 집행위원회의 책임 간부로서 어떻게 그렇게 대중들로부터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알렌산드라 김은 오가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알렉산드라는 3백~4백명이나 되는 적국과 함께 ‘바론 코르프’호를 타고 하바로프스크를 떠났다. 이튿날 블라고베첸스크를 지나 거류지 예카테리노-니콜스크에 이르렀을 무렵 혁명을 배반한 아무르 소함대의 군함 두 척이 바론 코르프를 정지시키고 부장해제했다. 정박 통보가 없었다는 것이 구실이었다. 매수당한 바론 코르프흐 선장은 예카테리노-니콜스크측에 배를 넘기고 밤중에 도망하였다. 혁명의 배신자들에게 속은 승무원과 승객 들은 백군 코사크들에게 체포되었다. 조선인들과 함께 체포된 알렉산드라는 학교 건물에 구금되었다. 내가 이 학교를 지나가게 되었을 때, 체포된 조선인 중 한 사람이 내게 소리질렀다. “인섭아, 자네 어딜 가는가? 우리는 모두 여기 있네.” 이 말 때문에 나도 체포되었다. 나도 잡혀서 모두 함께 마당에 앉아 있었다. 김 립과 유돌렬이가 낙담하여 “우리는 보기 드문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알렉산드라는 “당신들은 정말 맹렬하게 일하지 않았는가. 직접 조선의 혁명을 보고 싶다. 괜찮지 않은가. 우리의 사업은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선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이룰 수 없다면 우리의 아들 딸들이 이룰 것이며, 그들이 못해낸다면 손자 손녀들이 해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후손들의 힘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우리는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나, 인섭은 그 때 장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나는 연해주와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잠시 생각한 뒤에 말했다. “…나는 그것을 말릴 수 없지만, 당신에게 더 큰 규모의 일, 동반구에서의 넓은 활동 영역을 맡기겠다. …총알 하나는 단 한 사람을 죽이지만 한장의 삐라는 적의 모든 군사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 …나는 선전 삐라와 조선어로 번역한 정치문서를 조선으로 보내는 것이 훈련되지 못한 활동가들을 지휘하는 것보다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사흘간 우리들은 그와 함께 창고에 있으면서 파업을 하달받았다. 나는 그에게 맡겨준 일을 꼭 수행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체포된 지 나흘째 되던 날 알렉산드라는 다른 장소에 따로 구금되었다. 우리는 그 마음에 14일간 감금되어 있었다. 그 후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었다. 알렉산드라·타쉰·네페도프 등은 각각 따로 호송되었다. 우리를 호송해온 배는 3일간 하바로프스크 부두에 정박해 있었는데 그곳으로 주민 수천명이 몰려들었다. 부두는 일본군 소대가 지키고 있었다. 체포된 러시아인 둥지들은 칼므이크인 백군 부대로 인도되어 시내로 호송되었다. 체포된 조선인 12명은 부두에 남았다. 코사크들은 우리 12명을 어떤 보상금이나 사례를 받고 일본군 손에 넘기려 하였다. 이 12명 가운데 조선에서 일본 군국주의와 싸우던 세 사람의 정치적 망명자가 있었다. 김 립, 이단열 그리고 나였는데 우리에게는 심각한 위험이 닥쳤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비상 사태가 벌어졌다. 백군들이 일본군 소대장에게 우리 12명을 접수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 때 일본군 소대장은 부두의 질서를 안정시키라는 명령을 수행하기에 바빠 백군의 제의는 예기치 못한 것이었고 불쾌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는 여권을 검사해 일본이 발급한 것이 아니면 체포된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증명서를 제출하였다. 그것은 중국 여권이었다. 그러자 일본 소대장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렇지, 우리 여권을 발급받은 자가 어떻게 볼셰비키가 되겠는가.” 그리고 일본어로 백군들을 욕하였다. “바카 ! ” 백군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나는 일본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슬그머니 해안으로 내려가 중국인들 사이에 숨어버렸다. 남은 두 조선인은 러시아인 동지들이 감금된 곳으로 보내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러시아인 동지들과 함께 나중에 석방되었다. 재판, 그리고 총살 백군들은 감옥에 격리수용되어 있던 알렉산드라 · 타쉰 · 네페도프 동지와, 당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다른 지도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알렉산드라는 법정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군사재판정을 공산주의 선전장으로, 적들을 고발하는 무대로 바꾸어 버렸다. 군사재판장은 알렉산드라에게 “당신은 조선인이므로 러시아의 국사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모든 것을 인정하고 뉘우친다면 당신을 석방하겠다”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분개하여 “인정하고 뉘우치라고? 나는 조선인 혁명가로서, 만약 조선 인민이 러시아 불셰비키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달성한다면 조선 민족도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당신은 내가 조선 출신으로서 이 전쟁에 참가한 것으로 여기는가 본데, 나는 러시아 영내에서 태어나 자랐다. 적군 병사들과 함께 이 전쟁에 참가한 수백명의 조선인은 모두 노동자·농민, 조선 애국자들이다. 그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것이 조선 민족을 해방에 이르게 해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열성적으로 이 전쟁에 참가한 것이다. 몇 달 후면 당신들은 만주에서, 조선에서, 극동 전역에서 손에 무기를 든 조선인들을 틀림없이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들에게 체포되었지만 내가 해온 혁명 사업은 어디서나 언제나 전개되고 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당신이 말하는 대로 ‘인정하고 뉘우친다’면, 나는 혁명을 배신하고 2천만 조선 민족 앞에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한 재판관이 “만약 여성으로서 당신이 재판관들에게 자기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여성으로서?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하고 있다. 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계급 투쟁에 나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다. 당신은 그 모든 여성에게 자기의 활동을 뉘우치라고 얘기할 수 없다. …몇년 뒤에 극동에서 조선에서 중국에서 전세계에서 여성들이 남자들과 나란히 인간 사회의 모든 생활에 걸쳐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참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해오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만의 여성 가운데서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 만약 이 세계의 억압받는 여성과 남성들이 자유를 위해서 봉기하여 승리를 거둔다면 전세계는 통일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그리고 사이 좋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기의 범죄를 뉘우친다면,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이다.” 재판관들은 모두 알렉산드라가 인정하고 뉘우치도록 강요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짐승 같은 고문을 당하고 가슴과 얼굴에 흉측한 상처를 입었다. 사형 집행후 일본 영사 다쿠치는 사법기관에 알렉산드라의 총살에 관한 정보를 요청하였다. 이 일은, 적국인 일본 당국도 알렉산드라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의 활동에 대하여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사건 이후에 하바로프스크 주민들은 그 지역의 아무르 강에서 고기를 낚지 않았다고 한다(이 부분은 올가 바실리예비치 오가이가 이야기한 것임).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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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1
  • 괴물들 - 박건웅 단편집
    제목 : 괴물들 작가 : 박건웅 출판 : 보리 박건웅 작가의 신작이다. 그가 오랜 시간 그렸던 단편을 모았다.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외국의 작가들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창작하는 경향이 높다. 그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데, 한국현대사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격동적이고, 드라마틱하며, 격렬한 과정을 겪었던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대개 70년대, 80년대에 태어나 민주주의를 학습할 기회가 있었으며,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부패, 권력자의 오만과 폭력을 눈으로 보며 자랐다. 여기에 대학시절의 학생운동, 사회에 나와 시민운동을 경험하면서 정치의식이 발달하고, 민주주의 학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작가의 작품에 스며들었다. 작가의 경험은 작품세계에 직접 영향을 준다. 특히 그래픽노블이 갖는 장르적 특성은 작가의 자기 서사가 강하고 깊다는 데 있는데, 박건웅을 비롯해 한국의 그래픽노블 작가들은 한국현대사와 자기 서사를 일치하는 경향이 많다. 이건 퍽 우연이지만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모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픽노블 작가는 강하고 깊은 자기 서사와 함께 개성 있는 그림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나 기호보다는 이미지가 그래픽노블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지가 핵심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박건웅 작가의 그림은 다른 그래픽노블 작가들과 분명한 변별을 보여준다. 강렬한 흑백의 이미지와 판화 같은 날카로운 선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불 때'처럼 무채색 유화의 분위기가 나는 그림도 있다. 전체적으로 흑백의 강렬함 속에서 날카로운 풍자를 드러내는 작가의 작품은, 작품의 주제와 이미지의 형식이 완벽하게 결합한 보기 드문 경우에 속한다. 박건웅 작가가 소재로 삼는 작품들 가운데는 읽기 불편하고, 힘든 작품이 꽤 많다. 이건 물론 작가의 책임이 아니라, 한국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현대사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잔악하며, 끔찍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이미지로 그려야 하므로, 독자보다 오히려 더 큰 트라우마를 겪을 것으로 보는데, 그래서 독자는 박건웅의 작품을 쉽게 읽어나가지 못하게 된다. 작품 '문신'은 단편이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고통스럽다. 한 칸, 한 칸의 이미지가 마치 칼날처럼 몸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일본군이 조선의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은 인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범죄였다. 이런 내용을 심각한 논문이 아닌, 그래픽노블로 본다는 것은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작품집은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작품과 관련해 그린 것과, 당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 보면서 만든 작품을 모았다. 단편이지만, 마치 연작처럼 작품의 내용과 수준이 일관되고,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은 자가 돌아왔다 보름달이 뜨던 날 오래전에 죽었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죽은 사람들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놀라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자들에게 자기 피를 주고 달콤한 빵을 얻어먹다 보니, 점차 피가 모자라게 된다. 죽은 자는 썩어서 흙이 되어야 하지만, 살아 돌아왔다는 것으로 이미 역사의 퇴행을 의미한다. 죽은 자가 산 자의 피를 마시고 생기를 찾을 때, 산 자들은 과거의 역사, 과거의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죽은 자가 내미는 빵은 과거의 유산이다. 빵을 먹는 것은, 미래로 나가지 못하는, 미래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퇴행의 의지를 드러낸다. 과거의 유산이 달콤할수록 불투명한 미래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죽은 자들이 살아오고, 죽은 자가 마을의 대표가 되고,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이 공급하는 달콤한 빵에 만족할 때, 마을은 쇠퇴하고 사람들은 유령처럼 변한다.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죽은 자들이 마을을 점령한다. 죽은 자와 타협하는 것은 곧 과거로의 퇴행이자 소멸의 시작이라는 걸, 작가는 우화처럼 말한다. 전해 내려오는 모든 우화는 시대의 본질을 담고 있으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후대의 몫이며, 우화는 항상 새롭게 해석된다. 넋 사람들이 쌍굴다리 밑에서 모여 있다. 목이 마르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되는데 동굴 입구에 미군들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굴에서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본다.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을 답사하고 그린 작품이다. 한 두 페이지를 넘겼을 때, 노근리 사건 이야기임을 알았다. 작가는 이미 '노근리 이야기'를 두 권으로 펴냈고, 이 단편은 노근리 학살 현장으로 답사를 다녀와서 그린 작품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노근리 철길 아래는 여전히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고, 죽은 넋은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삶과 죽음을 알지 못하는 것, 살았어도, 죽었어도 끊임없이 고통을 느껴야 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들은 목이 마르고, 잘려나간 팔다리를 보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한다. 어둡고, 춥고, 고통스러운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절망 속에서 이들은 누군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 나타난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낯선 말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나타나고, 고통과 절망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는 그들은 군복을 입은 해골이다. 자신들을 죽인 그 미군들이 죽어서 해골이 되어 나타나 다시 그들을 죽이려 한다. 그들은 페인트를 가져와 벽을 지운다. 그들이 쏜 총알이 벽에 무수히 박혀 있는 자국을 감추려 했던 것처럼, 죽은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지우려 하는 것이다. 미군은 죽은 자들을 다시 죽이고, 그들이 남긴 흔적을 지우고, 역사에서도 지우려 한다. 바람이 불 때 1980년 봄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친구로 헤어진다. 그 뒤 한 사람은 버스에 탄 시민으로, 다른 한 사람은 버스에 총을 쏘는 군인으로 만난다. 5.18 광주에 투입됐던 어느 공수부대원의 증언을 모티브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5.18 광주민중항쟁 시기에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광주에 살던 청춘 남녀는 서로에게 마음이 있지만, 남자는 군에 입대한다. 공수부대에 배치된 남자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고, 부대원들이 광주 외곽을 지나가는 버스에 집단 난사를 해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 모두를 학살한다.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한다는 연인은 버스를 타보라는 남자의 말을 듣고, 남자를 면회가기 위해 멀미를 참으며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 그날, 그 버스에 남자의 연인이 타고 있었다. 이 사건이 실제 있었던 일이었을까. 작가는 공수부대원의 증언으로 재구성했다. 연인들이 시민과 군인으로 만났다면, 그 군인은 광주에 폭동이 일어났고,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상관의 말을 믿었다면, 총을 쏜 군인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모르고 저지른 학살이라도 학살자의 죄를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현대사사의 비극 가운데 가장 큰 비극은 대부분 해방 이후에 국내에서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 많다. 그 군부의 상급자들은 거의 대부분 일제시대에도 군인이었으며, 친일파들이었다.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하고, 국민을 학살했으며, 독립운동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학살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거인 캄캄한 굴 속에서 살아가는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만났던 귀족과 거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을 사람들은 거인이 모든 것을 다 해 줄 것이라는 귀족의 유혹에 속아 넘어가고, 마을의 강은 점차 죽음의 강으로 변해 간다. 소박하게 살아가던 마을 주민에게 귀족이 찾아온다. 귀족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본(가)이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많다. 귀족은 지배자일 수도 있고, 엘리트일 수도 있으며, 이명박일 수도 있다. 그것들이 순박한 마을 주민을 꼬드기고, 욕망을 부추킬 때, 사람들은 그 욕망을 좇는다. 어리석고 무지한 대중은 그 자체로 죄악이다. 사기 치는 놈은 당연히 나쁘지만, 멍청하게 그 사기에 동조하고, 보이지 않는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 역시 사기꾼의 범죄에 가담하는 것이다. 민중이 언제나 옳거나 지혜롭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거의 대부분 어리석고 멍청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어리석은 민중은 조금씩 깨어났고, 지혜로워졌다. 욕망의 부추김에 수없이 속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무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이 데려온 거인은 탐욕과 욕망의 현현이다. 탐욕과 욕망은 추구할수록 커진다. 그것은 끝도 없이 자라며, 더 많은 것을 삼키고, 더 많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그 거인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에서 잠들어 있다. 언제든 어리석은 인간이 깨울 날을 기다리며. 거인과 소인 오래전부터 소인들은 거인에게 음식과 재물을 바치며 평생 살아왔다. 어느 날 더 바칠 것이 없어지자 거인은 소인들의 자식도 바치라고 요구한다. 결국 소인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 거인을 물리치고 새로운 왕을 뽑아 새로운 왕국을 만들지만, 왕은 또다시 거인이 되어 나타난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부터 존재는 스스로 작아진다. 거인과 소인은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존재다. 그것은 상대적이며,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거인은 권력자다. 아니, 권력자를 거인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리가 스스로 소인으로 만든다. 권력의 유무에 따라 인간의 존재가 거인과 소인으로 나뉘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걸 의미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규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권력을 준 것은 다수의 인민이지만,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과 '자기'를 일체화한다. 권력과 존재의 일체화는 개인을 권력의 화신으로 만든다. '개인'이 작아지지 않는 방법, 권력을 가진 자가 거인으로 보이지 않는 방법은 올바른 투표 뿐이라는 걸 작가는 우화로 말한다. 괴물들 아버지는 사막 너머에 괴물들이 살고 있으며 호시탐탐 마을을 위협하기 때문에 괴물들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괴물을 잡으러 사막 너머로 가, 괴물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그 자식을 인질로 데려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괴물을 잡으러 가자고 말한다. 괴물들은 작고 약했지만, 거대한 아버지는 그 괴물을 죽이고, 사로 잡아 마을로 데려온다. 그런데, 마을의 주민들과 잡아 온 괴물의 모습은 같다. 마을 주민들은 괴물을 잡아온 거인을 '나리', '아버지'라고 부른다. 나리가 잡아온 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배자는, 권력자는 자기가 다스리는 마을 사람과 똑같은 사람을 두고 '괴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때로 '빨갱이'이며, '종북'이며, '반미'이며, '친북'이며, '친중국'이며, '장애인'이며, '여성'이며, '페미니스트'이며, '성소수자'이며, '사회적 약자'들이다. 나리는 이런 소수자들을 '괴물'이라고 말하고, 이들을 혐오하도록 부추기고, 이들을 때려잡고, 이들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정작, 평범한 사람을 '괴물'이라고 말하는 '나리'는 눈이 하나인 진짜 '괴물'이다. 봄섬 태준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려운 집안 환경 속 고민을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밤하늘의 별은 반짝이는데 그 순간, 태준이는 어떻게 이 섬에 올 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 이야기를 기록한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 2016)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지금도 진행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학생의 이야기는, 한국현대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과 맥이 닿아 있다. 제주4.3, 노근리, 광주5.18로 이어지는 학살의 주범은 늘 권력이었고, 동족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노근리는 외국군(미군)이 피난하는 민중을 학살한 사건이었지만, 그것 역시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 탓이었으니, 이 땅의 민중은 늘 그렇게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존재였다. 세월호 참사는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에서 벌어진 그 모든 학살 사건의 정점이자, 마지막 사건이다. 이 사건을 만든 박근혜 정권의 뿌리는 저 멀리 일제강점기의 일본 관동군 소좌 박정희로 거슬러 올라가고, 독립군을 때려잡았던 조선일본군 박정희와 백선엽으로 시작해서, 해방 이후 조선의 민주주의자들을 암살하고, 때려잡던 일제 앞잡이 군인과 경찰로 이어지며,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망가뜨린 이승만을 거쳐 제주4.3에서 제주도 민중을 '어린아이도 모두 학살하라'고 명령한 이승만과 조병옥이를 비롯해 학살의 주범들이 권력을 쥐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좌우의 이념을 선택한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이후, 수없이 많은 민주주의 시민과 학생을 학살했다. 세월호 참사가 박근혜 정권에서 일어난 것은 필연이었다. 학살자를 아버지로 둔 박근혜는 대를 이어 권력을 잡았지만,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인간 허수아비였고, 최순실의 노리개가 되어 나라를 망가뜨렸다. 국민은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권력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해경은 학살 현장을 방조, 동조했다. 이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로지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진실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고, 학살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아파트 새로 지은 아파트 벽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주민들은 누가, 왜, 어떻게 시체로 발견되었는지보다 당장 아파트 값이 떨어질까 걱정부터 하는데…. 그 비밀을 추적하던 9층 남자는 마침내 아파트의 비밀을 알게 된다. 아파트공화국에 대한 통렬한 풍자. 아파트를 세우는 사람들은 노동자다. 저임금에 강도 높은 노동으로 공사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사고로 죽는다. 이렇게 죽는 노동자들은 거푸집에 버려져 콘크리트와 함께 묻히고, 비싸고 화려한 아파트가 준공되어, 은행빚을 왕창 얻은 중산층은 아파트를 사면 곧바로 2배, 3배 아파트 값이 뛸 것을 기대한다. 아파트에 대한 욕망은 사람의 생명보다 훨씬 강렬하다. 아파트 벽에 사람의 시체가 드러나도 '예술작품'이라고 견강부회하며 오히려 아파트의 가치를 높인다고 말하는 목사의 말은, 아파트 가격이 지상 최고의 가치이자, 욕망의 절정이라는 걸 잘 드러낸다.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들은 시체를 꺼내 국을 끓여 먹고, 살아 있는 사람도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른다.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 사회는 인간의 윤리, 도덕, 염치, 사랑이 사라진 사회다. 오로지 돈, 물질, 가치, 욕망이 전부인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반 평범한 국민이 가지고 있는 자산의 70%가 아파트라고 하니, 아파트 가격의 오르내림은 이들에게 목줄을 쥐고 있는 것과 같다. 아파트 가격의 80%까지 은행에서 빚을 얻어 매입하고, 매달 이자를 내고 있으니, 아파트 가격이 내려가면 이들은 빚더미에 앉게 되는 것이다. 이들,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욕망에 매달리도록 만든 것은 권력과 자본이다. 인간의 이기와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는 사람의 생명보다 아파트 가격이 더 중요하도록 만들었다. 서로를 잡아 먹어야 살아남는 자본주의의 잔혹함은 주민들이 또 다른 주민을 잡아 먹는 장면으로 드러난다. '식인'은 단지 오래된 관습이 아니라, 경쟁을 부추기고, 경쟁을 통해서만 살아남아야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드러낸다. 천국과 지옥 1 죽은 자들은 천국의 문 앞에서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결정된다. 하나님을 믿고 십일조를 해야만 천국으로 갈 수 있고, 돈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시간이 흘러 천국은 부패한 사람들로 가득해 살기 힘들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한 천국 사람들은 결국 지옥으로 향한다. 한국 개신교를 신랄하게 풍자한 내용. 천국과 지옥은 흑과 백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개신교의 맹점을 드러낸다. 세상이 오로지 천국과 지옥으로만 존재한다는 이 멍청하고 한심한 생각은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만든다. 조 아무개를 닮은 천사는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갈 지, 지옥으로 갈 지 선별한다. 예수를 믿은 사람,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회개했다는 사람, 돈이 많아서 뇌물을 바치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가난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 천국은 범죄자들, 사기꾼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가득 차고, 지옥은 가난한 사람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산다. 천국에서는 온갖 범죄가 일어나고, 서로를 죽이고, 악행이 벌어지면서 천국에 살던 사람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지옥으로 탈출한다. 차라리 지옥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천국은 타락하고, 멸망한다. 그렇게 지옥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지옥이 너무 평화롭고,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지옥은 화염이 불타고, 악마가 창과 칼로 사람들을 난도질 하는 것이었지만, 이 지옥은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타락하고 멸망한 천국을 버리고 지옥으로 내려 온 조 아무개 천사는 지옥에 다시 거대한-천국을 찌를 만한-교회를 짓고 신도를 모으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교회에 관심이 없다. 교회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지옥은 평화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진짜 '예수'가 살고 있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내려 온 예수가 그곳에 있는 것이다. 유령 학교에서 청소를 하는 청소 노동자들은 유령이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교수, 학생, 노동자가 계급으로 인식되는 학원 풍경 속에서, 청소 노동자들은 유령이 아닌 사람으로서 권리를 되찾으려 한다. 청소노동자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 불안정한 고용으로 고통당하는 청소노동자는 현장에서도 유령 취급을 받는다. 누구도 아는 척 하지 않고, 무시하는 하찮은 존재. 그들이 누구건, 교수, 대학생, 사무직 노동자들 모두, 청소노동자를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자신도 노동자이면서 청소노동자를 마치 벌레처럼, 노예처럼 여기는 그들의 시선은 천박하게 비뚤어져 있다. 신분제 사회는 인간을 차별하고, 등급화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주인이고, 노동을 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인 것이 당연하지만, 여기에 다시 신분제가 자리 잡는다. 교수는 월급을 받는 노동자가 분명하지만, 자신을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은 대부분 미래의 노동자가 되지만, 청소노동자를 외면한다. 노동자도 대기업 정규직, 대기업 비정규직, 중소기업 정규직, 중소기업 비정규직, 하청업체 비정규직 등등 무수히 많은 차별과 차등으로 서로를 구분하고, 혐오한다. 청소노동자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신분의 노동자다. 그런 그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순간, 유령이었던 청소노동자는 존재를 찾게 되고, 다른 노동자와 동등하게 노동자의 위치를 갖게 된다. 노동자는 단결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찾고, 실존의 인격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죄와 벌 술을 먹고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는 떳떳하게 살아가고, 성범죄 피해자는 사람들의 눈총과 속앓이로 더 움츠리고 숨어 지내야 하는 현실을 대비하여 보여 준다. 한국에서 성범죄는 매우 가볍게 처벌한다. 성범죄자의 95% 이상이 남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법부는 성범죄를 남성 범죄로 규정해도 좋은데, 남성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범죄에 관대한 한국의 법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성범죄를 부추기고, 남성의 성범죄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결국 사법부가 성범죄자인 남성들을 옹호하고 보호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일에는 소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뒤집어 보면, 성범죄 피해자의 95%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사법부까지 피해자인 여성을 보호하지 않는 현실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남성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 사회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천국과 지옥 2 지옥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던 예수가 지상이 살기 힘들다는 기도를 듣고 지상으로 향한다. 대형 교회와 작은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교회의 부조리함을 알게 된다. 지옥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예수는 자기를 팔아서 먹고 사는 목사와 대형교회를 보면서 절망한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과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예수를 팔아서 무지한 신도들의 등을 처먹는 목사와 교회가 매우 많고, 어리석은 신도들은 그런 목사와 교회를 아무 생각없이 추종한다. 신도들은 '신' 또는 '하나님' 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고, 목사의 말을 진리로 믿는다. 어리석은 신도와 탐욕에 찌든 목사가 만나서 소돔과 고모라의 막장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살아서 한국에 오면 노숙자 소리를 듣고, 사기꾼 소리를 듣게 된다. 예수를 등처먹는 목사가 나타나고, 예수는 목사에게 이용당하고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전락한다. '신'이라는 예수마져도 하찮게 만드는 한국 개신교의 탐욕과 욕망의 크기는 초대형 크기의 교회로 등장한다. 세계 최고 크기의 교회를 짓는 한국의 개신교는, 목사가 대를 이어가며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교회를 부동산 가치로 계산하는 철저한 물신주의를 따른다. 문신 열세 살 소녀는 어느 날 일본군에게 끌려가, 혜산시 군부대 막사에서 다른 소녀들과 함께 성노예로 지내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이토 다카시가 40년 동안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흑백의 단순한 형태로 그린 만화지만, 차마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하다. 일본군이 저지른 이 참혹한 만행은 필설로 표현하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잔혹하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주인공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서 온몸으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일제의 만행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일본은 한국의 성노예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다. 일본은 자기 나라 국민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일본군이 저지른 이 잔혹하고 악귀의 행위를 은폐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천벌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대로 일본의 만행을 더 널리 알리고, 성노예 피해자를 보호하고, 보살펴야 한다. 세균 지구에서 가장 하등한 동물로 취급되는 세균. 어느 날 이 세균을 믿기 힘들 정도 귀하게 대접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세균을 통나무에 넣고 이런저런 실험을 자행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잊히지 않는 실험이 있다. 일본군 731부대의 만행을 그린 내용. 일본군은 세균전을 준비하기 위해 세균실험을 하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조선인과 중국인을 잡아와 생체실험을 했다. 그 내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하고 참혹해서 필설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731부대에서만 일본군의 실험대상으로 약 1만 명의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 몽골인이 죽었고, 731부대가 개발한 세균을 중국에 투하해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세균 감염으로 죽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쓴다는 것부터, 그들이 저지른 악행은 나찌가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가스 학살보다 훨씬 더 잔혹한 행위였다. 일본은 끝내 이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여기서 만들어진 자료는 미군이 가져갔다. 미군 역시 731부대의 만행을 알았지만, 자료를 넘겨 받는 조건으로 전쟁범죄를 문제 삼지 않았으므로, 강대국의 논리는 정의보다는 자국의 이익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앞으로 10년 동안 긴 밤이 올 것이라는 예보가 나왔다. 밤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대통령은 모두가 긴 잠을 자야 한다고 대국민연설을 한다. 어느 날 모두가 잠든 피난소에 괴물이 나타나 사람 피를 빨아 먹는데, 그 모습을 잠들지 못한 소녀가 보게 된다. 침묵하는 대중은 권력에 잡혀 먹힌다. 권력은 낮은 밤으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으며, 밤이 되면 모습을 바꿔 괴물이 된다. 그들은 대중의 피 - 재산은 물론 가족, 이웃, 친구, 우정, 정의, 민주주의, 연대, 우애, 윤리, 도덕, 사랑 - 를 먹고 사는 존재다. 괴물을 막으려면 대중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서 행동하는 시민, 단결하고, 힘을 모으고, 합심해 괴물을 막겠다는 의지를 가진 대중은 괴물(권력)에 잡혀 먹히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번 괴물에게 잡혀 먹혔던 기억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 이명박 사기꾼, 박근혜 등 사악하거나 멍청한 권력에게 빛을 빼앗기고, 오랜 시간 잡아먹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대중은 깨어났고, 서로 힘을 모아 괴물을 물리쳤다. 촛불 집회가 그 생생한 기록이자 증거다. 우리는 촛불을 들어 어둠을 밝혔고, 괴물(권력)을 쫓아냈으며, 마침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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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1
  •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
    제목 :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 작가 : 유디트 바니스텐달 출판 : 미메시스 가족이 겪는 아픔과 슬픔을 잔잔하면서도 감동 있게 그려낸 그래픽노블. 한 가족의 구성원이 아버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품이 시작하기 전에 가족 관계도를 보여준다. 이 관계도를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이 가족이 어떻게 맺어졌는가를 독자가 미리 알기를 바라는 것이고, 이 작품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작품에는 모두 다섯 명의 가족 구성원이 나오지만, 작품에서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네 명이다. 루이즈는 너무 어려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귀여운 아기로만 등장한다. 주인공 다비드는 1946년생으로, 여행서적 전문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혼한 전처 율리아와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지만 둘 사이에서 낳은 미리암과는 가깝게 지낸다. 다비드는 파울라와 재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나이 차이가 열일곱 살이어서 딸 미리암과 새엄마는 불과 열세 살 차이여서 엄마라기보다는 언니 같은 느낌이다. 미리암은 혼자 아이를 출산하는데, 미리암의 딸 루이즈가 2000년 생인데, 다비드와 파울라의 딸 타마르는 1992년으로 불과 여덟 살 차이나는 이모와 조카 사이가 된다. 미리암과 타마르는 이복 자매면서 열여섯 살 차이가 난다. 이런 가족 관계를 바탕으로, 작품은 네 사람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다비드는 친구인 의사 조르지 앞에서 자신이 후두암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아직 어린 딸 타마르였다. 어린 딸을 두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다비드는 진한 슬픔이 차오른다. 다비드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유모였다. 유모는 쓰러진 다비드에게 나타나 용기를 주고, 희망을 심장에 넣어준다. 미리암 미리암은 2000년 4월,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인에서 혼자 아이를 출산한다.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서 루이즈를 낳는다. 미리암의 출산 방식은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산부인과에서 자연분만 또는 제왕절개술로 출산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미리암의 자연분만, 그것도 물속에서 아이를 낳는 방식은 특별하면서 아름답게 보인다. 아빠와 새엄마, 이복동생은 모두 미리암이 아기를 낳은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이를 낳고 미리암은 루이의 전화를 받는다. 루이즈의 아빠이기도 한 루이는 미리암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만났다. 그때 이미 루이는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미리암도 사랑한다고 했고, 두 사람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사랑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은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걷는데, 루이는 목수로 일을 하는데, 나무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고 했다. 미리암은 보도사진 작가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코소보 전쟁에 종군기자로 갔었다. 여기서 잠깐, 미리암이 갔던 코소보 전쟁에 관해 간략하게 알아보자. 코소보 전쟁은 내전의 성격이었지만 미군과 나토군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쟁으로 확산한 전쟁이다. 1998년 2월에 시작해 1999년 6월에 끝난 전쟁으로 알바니아계 준군사조직인 코소보해방군과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 정부군이 상대였다. 코소보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발상지로 세르비아 영토였으나 오스만 제국에게 전쟁에서 패하고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무슬림계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에 살기 시작하면서 알바니아인 비율이 높아졌고, 1974년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유고연방 내 자치주로 승격했다. 1980년, 티토가 죽고나서 1989년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세르비아 공화국에서 집권하자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라는 이유로 코소보의 자치를 박탈한다. 이 조치에 분노한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1995년 코소보해방군을 결성해 무장투쟁을 시작한다. 1998년 3월, 코소보해방군이 먼저 지역을 순찰하던 세르비아 경찰을 사살했고, 세르비아가 주세력이었던 유고연방은 정부군을 코소보로 파견해 코소보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미리암은 이 전쟁에 종군기자로 들어갔지만, 아이까지도 잔혹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보면서 트라우마가 생겼고, 더 이상 전쟁 사진을 찍지 않게 된다. 미리암이 루이즈를 낳고 집으로 돌아와 아빠 다비드를 만났을 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빠에게 그 말을 듣는 미리암의 손이 떨리고, 자러 들어갔던 타마르도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울면서 나온다. 미리암은 새엄마 파울라에게 아버지의 암 이야기를 꺼내지만, 파울라는 미리암에게 화를 낸다. 남편 다비드나 미리암 모두 너무 과묵해서 마음을 나누지 않는 것에 화가 난 것이다. 바싹 마른 아버지의 모습에서 해골이 된 아버지의 환영을 보고, 죽음의 사신과 춤을 추는 꿈을 꾼다. 타마르 타마르는 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5일 동안의 여행이지만 옆집 친구 맥스와 헤어지는 건 더 오랜 시간처럼 느껴진다. 타마르의 엄마 파울라는 남편에게 왜 같은 장소로만 여행을 하느냐고 묻지만 다비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 지난 5년의 세월이 다비드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시기에 지금의 아내 파울라를 만났고, 둘 사이에 타마르가 태어났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기 그 여행지에서 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다비드가 딸 타마르와 단 둘이 그 여행지로 떠나는 것도, 어린 딸에게 추억을 남겨주고 싶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소박한 소망은 아닐까 생각한다. 호수에 도착해 다비드는 낚시를 하고, 타마르는 수영을 한다. 물속으로 잠수한 타마르는 인어를 만난다. 타마르는 인어에게 멀리서 낚시하고 있는 아빠를 보여주며, 자기를 낳아준 사람이라고, 하지만 곧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 타마르는 아빠와 장을 보러 가고, 배를 타고 낚시로 물고기를 낚아 배에서 직접 구워 먹는 소소한 일상을 누린다. 맥스가 쓴 편지를 파울라가 풍선에 묶어 보내면, 호수 여행지에 있는 다비드가 받아서 요트 돛대 기둥에 묶어 놓고 타마르에게 편지가 왔다고 알려준다. 물론 진짜 편지는 우편을 통해서 오지만, 아이들의 꿈을 살려주는 어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 것도 정겹다. 타마르가 잠든 밤, 다비드는 선착장에 홀로 앉아 유모가 심어준 희망을 조금씩 꺼내보면서 기운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어린 딸을 생각하면 암으로 아픈 것보다 더 마음이 아리다. 타마르는 아빠와 둘이 배에서 잠을 자며, 별들이 쏟아질 것같은 하늘을 바라보다 묻는다. '영원하다'가 무슨 뜻이냐고. 세상은 모두 죽는다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두. 타마르는 호수의 인어와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와 맥스를 만난다.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맥스와 놀고 있던 타마르는 아빠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타마르는 작업실에 있던 엄마를 부르고, 구급차에 실려 다비드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다. 파울라 병원에 입원한 다비드의 상태를 보던 파울라는 주치의이자 다비드의 친구인 의사 조르지에게 남편의 상태에 관한 설명을 듣는다. 다비드의 후두암은 이미 온몸으로 퍼져 있었고, 앞으로 남은 기간이 길어야 6개월이라는 말을 듣는다. 퇴원한 다비드를 돌보며 자기 일-패브릭 디자이너-을 하는 파울라는 헬싱키에서 닷새간 객원 강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다비드나 옆집 맥스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며 헬싱키에 다녀오라고 말하지만, 남편이 언제 죽을까 애태우는 파울라는 다비드에게도, 맥스 엄마에게도 화를 낸다. 그는 슬프면 화가 난다고 했다. 다비드가 죽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은 파울라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헬싱키로 떠난다. 그는 호텔에 도착해 호수가 있는 곳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남편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노인에게서 건강했을 때 남편에게서 맡았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파울라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타마르는 이제 아홉살이 되었다. 파울라가 작업실에서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가족이 모두 사라졌다. 맥스 엄마는 모두 병원에 갔다고 말한다. 파울라가 병원에 도착해 다비드 병실에 들어섰을 때, 타마르 홀로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울라는 다비드의 마지막 순간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다비드 몸 상태가 조금 좋아질 때면 딸 타마르와 놀아주지만 그보다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약에 취해 깊이 잠들거나 통증으로 괴로워한다. 다비드는 이제 헛것을 본다. 딸 미리암이 헤어진 아내 율리아로 보인다. 다비드와 미리암의 대화를 들어보면, 다비드의 전 아내 율리아도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암 종양이 식도를 누르자 조르지는 후두를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후두를 제거하고, 말을 할 수 없는 다비드는 종이에 연필로 필담을 한다. 통증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다비드. 마지막으로 가족 모두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다비드는 친구 조르지에게 자신의 삶을 끝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한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바늘땀-정서적 학대에서 벗어나기
    제목 : 바늘땀 작가 : 데이비드 스몰 출판 : 미메시스 작가의 자전적 성장 이야기. 여섯 살부터 고등학생이 되어 집을 나올 때까지의 시간에서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주인공 소년과 가족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 사는 여섯 살 아이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데이비드는 방사선과 의사인 아버지 에드와 전업주부 엄마 베티, 형 테드, 넷이 한 식구로 살아가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막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한 중산층 가족으로 보이지만, 소년의 눈에 보이는 부모의 모습은 정상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엄마는 웃는 모습이 드물고, 한번 화가 나면 일주일, 한달씩 집안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곤 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퇴근하면 지하실에 매달아 놓은 샌드백을 두드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형 테드는 드럼을 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막내인 데이비드는 우울한 집안 분위기와 화를 참지 못해 난폭한 행동을 하는 엄마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꾀병을 앓았다. 데이비드는 대개 혼자였으며,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밖에서 혼자 놀거나, '앨리스와 이상한 나라의 마법사'에서 앨리스가 되는 꿈을 꾸며 앨리스 흉내를 내다 동네 아이들에게 게이, 호모, 변태, 기지배라는 놀림을 당하기도 한다. 봄방학 때, 아버지는 형 테드와 친가로 떠나고, 데이비드는 엄마를 따라 외가를 방문했다. 가족이 이렇게 갈라져서 각자의 부모를 만나러 가는 것도 신기하다. 어린 데이비드는 정확히 몰랐지만,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랐다. 다정다감하지도 않았고, 데이비드를 살뜰하게 보살피지도 않았다. 게다가 외가가 있는 인디애나 남동부까지 가는 동안 엄마는 마치 남의 집안 이야기처럼 당신의 가계에 관해 데이비드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 내용은 겨우 아홉살 아이가 듣기에는 잔인한 내용이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댄스파티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사랑했고, 외할머니가 임신하자 결혼하려 했지만 외할아버지의 부모님(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머피 부부)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두 사람은 집을 나와 집안 소유의 땅에 있는 오두막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아이(데이비드의 엄마)를 낳았지만, 아이의 심장은 오른쪽에 있었다. 데이비드의 엄마가 열 살 때 외할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사망했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증조할머니의 구박과 핍박이 심해지자 사유지를 떠나 코너스빌로 이사했고, 할머니는 가정부로 일하다 재혼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배수관 세정제를 마시고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성대가 타버려 목소리를 잃었다. 시간이 흘러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게 되었을 때, 집안에서 그녀가 훔친 물건이 쏟아져 나왔다. 포목점에 들를 때마다 물건을 훔쳤는데, 포목점에서는 증조할아버지에게 전화했고, 증조할아버지는 곧바로 돈을 지불했다. 데이비드가 기억하는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린 데이비드가 엄마를 따라 외가를 방문했을 때, 외할머니는 재혼해 존과 살고 있었다. 존 할아버지는 장의사에서 일했고, 마을 주민들과 잘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었다. 반면 외할머니는 괴팍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이상한 노인이었다. 데이비드는 엄마에게 할머니가 미친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엄마는 데이비드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태도와 엄마의 태도는 매우 비슷했다. 데이비드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집에서 병원 부인회 친목회가 열리곤 했는데, 외과의 남편을 둔 딜런 아주머니가 데이비드의 눈길을 끌었다. 딜런 아주머니가 방문할 때는 늘 우울하던 엄마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무렵, 데이비드의 목에 혹이 생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데이비드는 아버지가 일하는 병원에서 목에 생긴 혹을 검사하고, 열네 살에 혹 제거 수술을 받는다. 이 무렵은 데이비드의 아버지도 승진하고 수입도 많아져서 새 차를 구입하고, 집안 가구도 새 것으로 바꾸는 등 데이비드의 부모는 비교적 행복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수술은 간단하다고 했지만, 두 번을 했고, 첫 수술에서는 목소리가 잘 나왔지만, 두 번째 수술을 받고나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대의 한쪽과 편도선이 사라진 것이다. 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했고, 가족들은 모래알처럼 따로 놀았으며, 목소리를 잃은 데이비드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마치 유령같은 존재였다. 그러다 우연히 자기가 받은 혹 제거 수술이 사실은 후두암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가족 누구도 그 혹이 암이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수술을 받고 나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살았지만, 어쩌면 후두암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여전히 데이비드에게 냉랭했고, 가족들 사이에는 사랑이 없었다. 데이비드는 학교에 가지 않고 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며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의 차를 훔쳐타고 도망가다 잡혀서 유치장에 갇히기도 하고, 부모가 기숙학교에 강제로 전학시켰지만 세 번이나 탈출하다 퇴학당했다. 열 다섯 살이 되는 해, 데이비드는 문제 학생이 되어 심리상담을 받게 되는데, 그때 만난 상담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그 선생님-헤럴드 데이비드슨-은 데이비드에게 누구도 하지 않았던 말을 한다. "네 어머니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 말을 들은 데이비드는 충격을 받고, 그동안 쌓였던 마음의 응어리를 헤럴드 선생에게 풀어 놓는다. 데이비드는 부모에게 '방치형 학대'를 당했던 것이다. 부모의 학대는 자식에게 여러 형태로 드러나는데, 폭력을 쓰지 않는 학대도 있다는 걸 부모도, 아이도 모르는 상태로 지냈던 것이다. 데이비드는 심리상담을 하는 헤럴드 선생을 만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지만, 그의 가족은 서서히 그러나 그동안 쌓였던 불만, 부정, 냉대, 위선이 드러나면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가 어느 날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의 침실에서 그가 좋아했던 딜런 아주머니를 발견한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엄마의 냉랭한 시선과 마주치면서 그동안 겪었던 엄마의 냉대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한 것인지를 느낀다. 뒤 이어 외할머니가 존 할아버지를 지하실에 가두고 집에 불을 질러 주립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는 데이비드의 목에 암이 생긴 것은 자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 아버지는 데이비드가 어릴 때 필요 이상으로 방사선을 많이 쬐어 암이 발생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쩌면 죄책감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에 데이비드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고백했을 것이지만,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데이비드는 열여섯 살이 되자 집을 나와 따로 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디트로이트 외곽의 폐가에서 지냈는데, 이곳에는 집을 마련하지 못하거나 몰락해서 내몰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데이비드는 학업과 함께 그림을 열심히 그렸고,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예일 예술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뉴욕의 대학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그가 마지막으로 엄마를 만난 것은 서른 살이 되던 해, 엄마가 위독하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엄마는 아무 말없이 눈을 감았고, 데이비드도 애달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린 데이비드는 어려서 정서적 학대를 당하며 자랐다. 이걸 알게 된 것은 그가 열 다섯 살, 문제아로 심리상담을 받기 위해 헤럴드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였으니 어린 데이비드가 겪었을 심리적 고통을 생각하면 독자의 마음도 먹먹하고 답답해진다. 정서적 학대를 한 사람이 엄마와 아버지 모두 였을 걸로 생각하는데, 특히 엄마는 자신도 어려서 정서적 학대를 당하며 살았기 때문에 이미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결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데이비드의 외할머니는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지는데, 외할머니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이유는, 시부모(데이비드의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의 구박에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이 원인일 수 있다. 그때 외할머니는 임신한 상태였고, 임산부는 평상보다 훨씬 정서적, 육체적으로 민감하고 여린 상태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임산부를 더 따뜻하고 안락하게 보호해야 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이 할 일이지만, 외할머니의 시부모는 오히려 자식 내외를 거부하고, 구박하며, 못 살게 굴었다. 그렇게 나쁜 인성을 보였던 증조할머니는 결국 상습적으로 도둑질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그의 도벽은 역시 그의 집안 환경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집안 내력에 속된 말로 '나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한다. 외가 쪽으로 이렇게 좋지 않은 환경이 이어지면서 데이비드의 엄마, 외할머니, 증조할머니까지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어른들이 보이는 기이한 행동이 어린 데이비드에게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데이비드의 엄마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아마 오래 전-어쩌면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는 여성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 당할 각오를 해야하므로 평범한 여성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데이비드의 엄마 베티는 자신이 레즈비언으로 있을 때-딜런 아주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정상'의 인물로 돌아온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인할 때는 행복했던 것이다. 베티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에 남편도, 자식도 모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삶에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수 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았는지, 끝내 몰랐는지 작품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그 질문을 끝내 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기 아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부부라면 모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부는 아이를 낳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가족, 가정을 이루며 살았다. 베티가 죽은 다음에도 에디는 재혼해서 여든 네 살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정서적 학대를 당한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고 원만하게 사회생활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은데, 데이비드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고, 과거의 자신, 과거의 가족을 객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당시의 상황과 심리를 이해하고, 부정적 감정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다는 것, 그림을 매우 잘 그려서 그것으로 직업을 삼고, 학업을 마치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어려서 정서적 학대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은 것을 감안할 때,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면서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세 개의 그림자
    제목 : 세 개의 그림자 작가 : 시릴 페드로사 출판 : 미메시스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맞닥뜨렸으나, 그 운명을 거부해야 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는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신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가족-루이, 리즈, 조아킴-에게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이 나타난다. 이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그저 멀리서 가족을 지켜볼 뿐이다. 루이는 성실한 농부로 부지런히 농사 짓고 가족을 지키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평범한 사람이다. 아내 리즈도 남편과 아이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집을 돌보고, 살림을 맡아 하는 살뜰한 여성이다. 좋은 부모를 둔 조아킴은 구김살 없이 나날이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을 보낸다. 평화로운 풍경, 아름다운 자연이 집을 둘러싸고 있어 부족함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가족에게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은 누구일까. 루이와 리즈는 그들이 아들 조아킴을 데리러 온 사신이라고 믿는다. 루이는 그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려 대결을 펼치고 싶지만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리즈는 마을에 사는 주술사를 찾아가 부적을 써 오지만 역시 효험이 없다. 루이가 아들 조아킴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은 집을 떠나 죽음의 사신이 쫓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는 것 뿐이다. 다가올 운명을 피해 길을 떠나는 것은 전형적인 영웅의 서사이기도 하다. 영웅은 운명과 맞닥뜨려 운명과 싸워 이기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도 하지만, 운명과 맞서 싸워 처절하게 몰락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닥쳐올 운명을 알고 있다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운명을 피해 도망하는 것이겠다. 그렇게 루이는 아내 리즈를 집에 남겨둔 채, 아들 조아킴을 데리고 세 개의 그림자를 피해 길을 나선다. 그 길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영원한 길이라는 걸 이들도 알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이들의 아늑한 생활은 세 개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순간 깨졌고, 미래는 불안과 두려움이 지배할 것임을 예감한다. 신화적으로 본다면, 루이와 리즈는 인류의 앞선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세 개의 그림자 즉, 죽음, 자연, 질병에 맞서 후손의 생존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투쟁을 떠올리게 한다. 루이는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내놓고 배를 탈 수 있는 탑승권을 구입한다. 재산을 다 내놓고라도 세 개의 그림자로부터 멀리 도망쳐야 하는 절박함이 드러난다. 그 절박함은 곧 조아킴을 지키려는 굳건한 마음이기도 하다. 사흘을 건너야 하는 거대한 호수는 바다처럼 넓어서 비바람이 거세게 불고, 태풍이 몰아친다. 루이는 세 개의 그림자를 따돌렸다고 생각하지만, 배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루이는 살인자로 지목되어 조아킴과 함께 감옥에 갇힌다. 태풍으로 배가 가라앉고, 루이와 조아킴은 겨우 살아나는데, 두 사람을 구해 준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두 사람을 극진하게 구명한다. 죽을 고비를 넘긴 루이는 자신이 두려워했던 세 개의 그림자보다, 사랑하는 가족이 서로 떨어져 고생하는 것보다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소중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루이가 이미 건너온 호수를 다시 되짚어 돌아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자신을 구해준 노인은 조아킴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부여하겠다고 제안한다. 루이는 자신의 목숨과 조아킴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한다. 노인은 루이의 심장을 꺼내고, 조아킴을 지킬 수 있는 거대한 힘을 부여한다. 이 장면은 신화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루이의 심장 즉 '생명'의 상징을 꺼내는 것은 하나의 삶이 끝나는 걸 뜻한다. 루이가 한 명의 개체로서의 영웅이든, 어느 집단을 상징하든 그 집단, 세대, 영웅은 소멸하고, 그가 가진 힘과 권위가 다음 세대를 지키게 된다. 노인은 '절대자'이며, 앞선 세대를 끝내면서 뒤이어 오는 세대가 살아갈 환경을 부여한다. 앞선 세대의 희생에 의해 후손은 살아갈 여지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뒤이어 루이와 조아킴을 뒤따라오던 세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악, 재앙, 폭력, 질병과 같은 부정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시간, 행복, 슬픔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공포에 떨 만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루이가 세 개의 그림자 정체를 일찍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가족과 헤어지면서까지 힘겨운 길을 떠났을까. 심장을 내준 루이는 거대한 불멸의 존재로 변하고, 조아킴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는 자신의 몸도 지키지 못하고 쓰러진다. 루이는 인류의 역사를 의인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인류가 만드는 역사의 한 가운데를 지나며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의 생존 과정을 드러낸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조아킴(인류의 후손)은 세 개의 그림자와 함께 떠난다. 결국 인류가 지키려고 했던 소중한 것들은 인류의 힘으로 저지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다. 세 개의 그림자가 공포, 두려움, 재앙이든 시간, 행복, 슬픔이든 인류는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 결국 루이는 집으로 돌아가 리즈를 만나 두 딸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환상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루이가 말하는 동양의 격언, '일어서서 버텨라. 그리고 삶이 있는 곳에 머물러라.'는 말은 현실의 삶, 현재의 삶에 충실한 것이 인류 본연의 모습임을 깨닫게 한다. 작가의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그림은 이 이야기를 납득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흔히 사용하는 펜과 잉크가 아니라 붓펜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세필붓으로 매우 가는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붓선은 펜선보다 부드러우면서 선의 굵기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펜선으로는 톤의 느낌을 내기 어려운 반면, 붓선은 선의 강약과 얇고 두꺼움을 통해 짙거나 옅은 선과 면을 그릴 수 있어 톤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붓선은 선의 외곽 뿐아니라 면을 그리는데도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그리는 선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어 실력이 출중하다는 걸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디즈니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한 경력만 봐도 실력은 검증이 되었지만, 이야기와 그림이 잘 어울리고 있어서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 한국어 번역판에서 말풍선 안에 들어가는 대사의 글꼴도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손글씨 글꼴을 쓰고 있어서 작품의 품질을 높였다. 만약 말풍선 안의 활자를 보통 인쇄체 글꼴로 썼다면 그림과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포르투갈
    제목 : 포르투갈 작가 : 시릴 페드로사 출판 : 미메시스 잘 만든 양장본에 두툼한 두께의 이 그래픽 노블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그림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그래픽 노블의 특징이자 장점인 그림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그래픽 노블을 선택하는 가장 큰 요소는 그림이다.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림이 수준 이하라면 보고 싶지 않다. 반대로 내용은 별로인데 그림이 훌륭하다면 그것은 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래픽 노블에서 최우선 요소는 역시 그림이다. 지은이는 월트디즈니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고, 이후 만화가로 전업하면서 유명한 만화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책만 봐도 말할 필요 없이 최고의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삼부작으로 구성되었고, 주인공 시몽 뮈샤는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만화가지만 작가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 있고, 삼대로 이어지는 집안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잔잔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지고 있다. 시몽 이야기 주인공 시몽은 만화가로 작품집도 발표한 작가지만 심각한 슬럼프 상태에 있다. 그는 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세상 일이 심드렁하고, 삶의 의지도 박약한 상태로 침체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간다. 그의 애인 끌레르는 집을 사서 한 곳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시몽은 정착할 마음이 없어 갈등을 일으킨다. 시몽은 포르투갈에서 열린 작은 만화축제에 참가한 다음, 포르투갈과 자신의 끈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프랑스 사람으로 살아왔던 시몽에게 포르투갈에 자신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 할아버지의 고향이자 뿌리가 포르투갈이라는 사실은 뜻밖의 사실로 다가오고, 마음이 끌리는 걸 느끼게 된다. 그동안 가족들과도 소원하게 지내온 주인공은 사촌의 결혼식을 계기로 프랑스를 벗어나 포르투갈에서 한동안 지낼 생각을 하게 되고, 그동안 만나지 않았던 사촌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모든 일에 의욕도 없고, 미래를 설계하지도 않는 시몽을 보면서 끌레르는 결국 시몽의 곁을 떠난다. 시몽의 태도는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외로움을 느끼며 정서적, 정신적으로 결핍 상태에 놓어 있으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그는 심리상담을 하지만, 그것도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상담사도 포기한다. 시몽은 감정, 정서적으로 자기애가 과잉인 상태로 보인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자신도 모른다. 부모를 잃은 결핍인지, 고향이 없어서 겪는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한 원초적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 관한 허무 때문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장의 이야기 장은 시몽의 아버지다. 둘은 서로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자주 만나지 않는다. 형의 딸(조카) 아네스의 결혼식에 가는 걸 두고도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망설이다 결국 참석하기로 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퍽 낯설다. 가족의 결혼식이라면 당연히 참석하는 걸로 생각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이들은 철저히 자기의 삶을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는 걸 볼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장은 아들 시몽과 함께 조카 아네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르고뉴를 찾는다. 사돈댁은 부르고뉴에서 포도농장을 크게 경영하고 있었고, 와인을 생산하는 넉넉한 집안이었다. 결혼식의 하객은 주로 신랑 쪽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신부 쪽은 몇 명에 불과했다. 장은 조카의 결혼식에서 형과 누나를 만난다. 장의 형제들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장과 그의 누나는 부모님이 장남인 장의 형을 편애했다고 기억한다. 결혼식을 계기로 남매들이 만나서 이야기 할 기회를 갖게 되고, 이들이 계획에 없던 소풍을 나가면서, 돌아오는 길에 차가 고장나고, 비까지 내려 차 안에 갖힌 상태로 오래 전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함께 따라간 시몽은 큰아버지, 고모,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의 시대와 할아버지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 된 이야기를 처음으로 다양하게 들을 기회를 맞는다. 시몽은 끌레르와 헤어지는 것을 인정하고, 두 사람은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아벨의 이야기 시몽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지금도 그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포르투갈로 간다. 그곳에서 사촌의 집에 머물며 의뢰받은 작업도 하고, 할아버지의 고향과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들을 만나며 천천히 자신의 뿌리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촌이 묵으라고 한 집은 오래 전, 할아버지 아벨과 그의 동생 마뉴엘이 직접 지은 집이었고, 지금도 '무샤' 성을 가진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시몽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란 프랑스 사람으로, 언어도 프랑스어만 할 줄 알았지만, 자신의 뿌리가 포르투갈이라는 것, 포르투갈어가 낯설지 않다는 걸 느낀다. 할아버지 아벨을 잘 알고 있는 마을의 노인을 찾아 이야기를 듣고, 집앞 텃밭을 가꾸는 아주머니에게서도 할아버지의 동생 마뉴엘에 관해 이야기를 듣다가 그는 결정적인 내용을 알게 된다. '무샤' 집안의 뿌리는 스페인에서 온 무사들이 어린 아이를 마을에 놓고 떠난 사건에서 비롯했으며, 그 이름 모를 아이가 자신을 '무차초'라고 말해서 '무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샤' 집안의 시작이 된 그 아이는 이름도, 고향도 알 수 없었고, 오직 스페인에서 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아벨이 포르투갈을 떠난 것은 1930년대로, 포르투갈이 정치적으로 독재 상황이었고, 경제적으로도 몹시 어려운 시기여서 아벨과 마뉴엘은 먹고 살기 위해 프랑스로 일을 찾아 떠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벨은 프랑스에 그대로 남고, 동생 마뉴엘만 고향으로 돌아와 이후 고향을 지키며 살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시몽의 일상에서 시작해 점차 가족, 집안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점층적 서사를 보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친절한 설명은 없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관계, 감정, 살고 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시몽과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남매들은 자신들이 디아스포라적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포르투갈에 있고, 시몽의 할아버지대에 포르투갈에서 프랑스로 이주해 정착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드물게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신들에게도 '호적등본'을 떼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서 '외국인' 즉 '타자'로 보이게 되는 상황을 드러내며 복잡한 마음이 된다. 포르투갈은 프랑스에서 멀지 않지만, 중간에 스페인이라는 큰 나라가 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처럼 보인다. 포르투갈도 중세 유럽의 식민지 개척 시기에는 강력한 국가였지만 지금은 유럽에서는 힘이 많이 빠진 중진국이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선진국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쇠퇴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라의 여건이야 어떻든 이 만화에서는 포르투갈의 평범한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중진국 수준이지만 이들은 소박하고 낙천적인 성향으로 낯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친절하게 대하고 있는 걸 보여준다. 주인공 시몽은 자신의 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의 역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도 조금은 더 가까워지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들-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사촌들과도 쉽게 한 식구처럼 가까워진다. 이런 현상은 포르투갈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따뜻한 환대와 열린 마음, 가족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들의 문화 덕분이기도 한데,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 느끼지 못한 따뜻한 분위기가 시몽의 태도와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시몽의 할아버지는 형제가 프랑스로 취업 이민을 위해 고향 포르투갈을 떠났고,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시몽의 할아버지인 아벨은 프랑스에서 사망한다. 아벨의 동생이자 시몽에게는 작은할아버지인 마뉴엘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고, 두 집안은 그때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반전은 주인공 집안인 무샤의 집안이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를 알려주는 전설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전쟁을 하던 시기에 포르투갈의 한 마을에 스페인 기사들이 찾아오고, 한 아이를 재워달라고 부탁하고 기사들은 떠나간다. 그 아이는 혼자 남게 되고, 그 마을에서 자라 농부가 되는데, 그가 바로 '무샤' 집안의 조상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로만 본다면 '무샤'집안의 뿌리는 스페인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마지막 이야기는 퍽 낭만적이고 애틋해서 찡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며 감동이 더하는 이 그래픽 노블은 여러 번을 봐도 좋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그림이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다. 작가 시릴 페드로사의 그림은 한컷 한컷이 뛰어난 일러스트 작품일 정도로 완성도가 높고 뛰어나다. 작품은 모두 채색이며, 수채화 작업으로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채색의 특징은 이야기의 구성과 깊은 관련이 있어서, 과거, 회상, 현재, 감정에 따라 채색의 톤을 달리해 이야기의 흐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채색의 톤은 약간 어둡게 가라앉아서 차분하고 우울한 느낌이다. 이것은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들의 마음을 채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이 주로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어, 탈색된 느낌으로 채색을 한 것은, 과거의 이야기를 이미지로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섬세한 펜선으로 꼼꼼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그 위에 여러 겹의 채색으로 배경을 입혔다. 작품에서 시몽과 그의 가족이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포르투갈어를 외국어로 표기한 것은 작가가 의도한 역설이다. 포르투갈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외국인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라 외국어인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를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한국인을 부모로 둔 사람이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한국을 방문해 한국어를 들었을 때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모국어와 자신의 정체성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를 이 작품에서도 시몽과 그의 사촌이 나누는 대화에서 볼 수 있다. 이때 개인의 정체성은 물리적 공간(지역)에 있는 것인지, 혈연(핏줄)에 있는 것인지를 철학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작품을 다 읽으면 시몽이 초반에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방황을 이해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가 보인 행동을 납득하기는 어렵다. 결국 그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는데, 관계의 파탄은 오로지 시몽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의 삶과 생각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어떤 행동, 행위의 결과만을 두고 판단할 뿐이다. 시몽이 보였던 행동은 어리석고 멍청하게도 보이지만, 그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삶의 경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12-11
  • 중동, 만들어진 역사
    제목 : 중동, 만들어진 역사 작가 : 장 피에르 필리유/디비드 베 출판 : 다른 한국(사람)은 미국과 유럽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고 있지만, 중동, 아프리카, 남미 국가들의 역사는 잘 모르거나 배우려 하지 않는 지적(知的)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 왜 그럴까. 미국과 유럽이 강대국이고, 정치, 경제 분야에서도 세계의 흐름을 좌우하는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과도 정치, 경제에서 긴밀한 관련이 있기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에 정치,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한편으로 치우쳐 있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미국의 시각'으로 편중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수입하는 원유의 약 80%는 중동에서 오고 있다. 한국은 70년대 중동의 건설현장에 진출해 많은 기업과 노동자가 뜨거운 사막에서 땀흘려 일해 나라의 부를 키웠다. 한국도 강대국 틈새에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 있지만, 중동 지역은 유럽 열강과 미국 등 패권국가들 틈새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굴욕적 위치에 놓여 있다. 중동이 평화롭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곧바로 한국에도 영향이 미친다. 제3차 중동-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자 원유 가격이 급등했고, 한국의 휘발유, 경유 가격이 폭등했던 전력이 있었다. 우리가 중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중동의 민주주의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원유 가격 뿐 아니라, 중동 여러 국가가 과거의 우리처럼 약소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의 폭압 아래 36년 동안 지배당한 기억을 잊지 않듯 중동의 여러 나라도 강대국의 폭압으로 부족과 민족이 서로 갈등하고 적대 관계가 되고, 증오하도록 만든 역사가 있다. 그 역사를 올바르게 알고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중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강대국의 논리를 따라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그래픽노블은 3부작으로 구성했다. 추천사(김재영 프레시안 기자)에도 썼듯이 이 책의 내용은 1) 어떤 과정을 거쳐 미국이 중동지역에 개입했고, 2) 중동의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미국이 어떻게 중동 독재자와 손을 잡았으며, 3)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가 어떤 문제와 갈등을 낳았는가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미국이 영국과 전쟁해서 독립한 직후부터 중동 지역의 분쟁에 개입해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과정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였다. 민중의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한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도 이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미국의 침략사는 미국이 독립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이 책의 중요한 미덕이다. 1부 1783~1953년, 열강이 만든 중동 1. 옛날이야기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해지는 서사시를 다루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로 알려진 이 오래된 이야기는 수메르의 도시 국가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의 영웅담을 그리고 있다. 길가메시는 신과 인간이 섞인 초인이다. 그는 강력하지만 백성을 억누르는 독재자였다. 이를 보고 천신 아누와 모신 아루루가 엔키두라는 강력한 인간을 만들지만, 길가메시는 엔키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삼나무 숲을 지키는 괴물 훔바바를 죽이는 원정을 떠나 마침내 훔바바를 죽이고 돌아온다. 길가메시는 여신 아슈타르의 유혹을 뿌리치자 아슈타르는 아버지 아누에게 길가메시를 징벌하기 위해 '하늘의 황소'를 내려달라고 요청한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하늘의 황소'도 죽인다. 그러자 신들이 엔키두를 죽였고, 길가메시는 충격을 받고 길을 떠나 영생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인간 우트나피시팀과 그의 아내를 찾아나서서 그들을 만나 대홍수에 대해 듣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다시 우르크로 돌아온다. 수메르의 전설은 기독교 설화에도 도입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기독교에서 '노아의 방주'로 알려진 대홍수 이야기는 수메르 전설로 알려졌으며, 내용도 거의 같다. 이라크에서 발견한 수메르 유적 가운데 석판이 있는데, '독수리 전승비'라고 불리는 이 석판의 한쪽에는 적들의 시체를 쌓아 승리를 기념하는 그림이 있는데, 2004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국 병사들이 이라크 정치범을 쌓아놓고 사진을 찍어 크게 문제된 적이 있었다. 역사는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2. 해적과의 싸움 15세기 이후 이슬람 진영은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수많은 전쟁과 전투를 치르는데, 기독교 쪽에서는 이것을 '십자군 전쟁'이라고 말하고, 이슬람 쪽에서는 '지하드 전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쪽에서 '십자군 전쟁'이라고 명명한 것은 18세기에 등장하는데, 기독교(가톨릭) 집단이 이슬람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초부터였다. '십자군 전쟁'에서 가톨릭 쪽의 내부 상황은 단지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 뿐 아니라 가톨릭 내부의 갈등과 긴장, 위협 요소를 바깥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여기에 귀족과 시민 계급의 불만을 무마하는 한편,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경제적 이익을 보기 위한 가톨릭과 각 나라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다. 기독교 세계(유럽)에서는 11세기부터 16세기 르네상스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암흑시대'라고 했는데, 그 말은, 가톨릭의 위세가 너무 강해서 종교적 억압이 유럽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고, 이에 따라 과학, 문화, 예술, 경제 등 사회 모든 분야가 발달하지 못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반면, 이슬람은 그리스의 발달한 과학, 수학, 철학을 받아들여 문명의 꽃을 피우던 시기였고, 영토도 확장되었다. 십자군은 11세기 초 기독교도로 구성한 정예 군대가 출전한 것을 제외하면, 이후 15세기까지 점차 약탈을 목적으로 온갖 부랑자, 범죄자들이 병사로 나섰다. 더 이상 종교적 명분은 성립하지 않았고, 영토 확장과 약탈이 주를 이루었다. 중세 이슬람 진영과 기독교 진영은 바다에서도 격렬하게 전쟁을 했는데, 양쪽 모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일을 하거나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노역을 했다. 19세기 초가 되면서 두 진영은 평화조약을 맺어 더 이상 해적이 상대 배를 침탈하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해군력이 약한 덴마크,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은 이슬람 해적에게 인질로 잡혀 몸값을 지불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미국이 독립한 직후, 영국은 미국이 영군 해군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제리에 알렸고, 알제리(이슬람 진영) 해적은 미국 상선을 나포해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미국 독립 직후에 발생했으며, 미국은 인구가 불과 300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였다. 미국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었다. 미국은 인질로 잡힌 미국인을 구하기 위해 영국 런던에서 트리폴리의 특사와 회담을 했다. 이때 참석한 미국 대표는 존 애덤스(영국 주재 미국대사), 토머스 제퍼슨(프랑스 주재 미국대사)였다. 하지만 이 회담은 결렬되었다. 1785년에 이어 1796년에도 이슬람 해적은 미국 선박을 나포해 선원을 노예로 삼았다. 1797년 존 애덤스가 미국대통령(제 2대)이 되자 미국 정부는 국가 전체 예산의 20%에 해당하는 돈을 이슬람 해적에게 주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1801년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슬람 진영에서 요구하는 돈의 액수가 커지자 평화조약을 파기했다. 그리고 미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트리폴리의 파샤(지배자)를 처단하겠다며 함대를 출전했다. 미국이 세계 전쟁에 나선 시작이었다. 1803년부터 시작한 미국 함대의 트리폴리 공격은 무려 네 차례나 있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이 중동 지역에 자연스럽게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권력자의 내분 때문이었다. 1793년 알리 카라만리가 죽으면서 장남 하산을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셋째 아들 유스프가 맏형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다음 둘째 형 하메트를 추방하고 그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하메트는 이집트로 도망가서 미국 정부에 왕위를 찾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미국은 하메트와 함께 트리폴리로 진격했지만 유스프와 협상을 통해 평화조약을 맺고 전투를 끝냈다. 이후에도 미국 선박은 알제리 해적에게 여러 번 나포당했고, 1812년 미국과 영국이 전쟁을 시작해서 1815년 정전협정을 했다. 이후 미국은 1815년 알제리를 침략해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는다. 19세기 초부터 미국은 대륙의 서쪽으로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당시 영국령, 프랑스령, 스페인령 영토를 무력으로 빼앗거나 돈을 주고 매입하면서 땅을 확장했으며, 해군은 중동을 비롯해 유럽, 아프리카 등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시아 진출은 1844년 청나라와 불평등 통상조약을 맺었고, 1854년 일본과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은 1866년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온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 미국 선원을 처형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1871년 한국 군사작전, 미-한 전쟁, 조선 원정 등으로 부르고 있다. 3. 석유의 시작 미국은 19세기부터 중동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했지만, 중동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중동과 아프리카는 유럽 여러 나라가 식민지를 만들거나 천연자원을 약탈하고, 그보다 앞서서는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을 폭력으로 끌고와 노예로 팔았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1939년 석유개발권을 협의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나온 원유가 최초로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복잡하고 격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1932년 '사우디 왕국'을 건국하고 이븐 사우드가 초대 국왕이 되었다. 사우디는 미국이 정권과 나라의 안위를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1945년 2월에 수에즈 운하로 이어지는 호수에 미국 구축함 USS 머피호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와 이븐 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비밀 회담을 벌였고, 이후 지금까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동의 여러 나라-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리비아 등과 미국이 긴장 관계, 적대 관계를 반복했던 것과 달리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에서 가장 확고한 친미 국가로 존재한다. 4. 쿠데타가 남긴 것들 1901년 오스트리아의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시는 페르시아(이란)에서 원유 탐사를 시작했고, 영국의 지원을 받아 '앵글로 페르시아 석유회사(APO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이후 영국 국영 석유회사(BPC)가 된다. 1914년 영국 정부는 APOC 지분의 51%를 확보했다. 영국은 이란의 남쪽, 쏘련은 이란의 북쪽 지역을 점령해서 각각 채굴권을 확보했다. 이란 왕은 채굴권을 팔아 돈을 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란에는 영국, 쏘련, 미국 등 강대국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주둔했다.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사데크가 총리로 등장하면서 원유 개발을 국유화했다. 그러자 외세(영국, 미국 등)는 모사데크를 축출하려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하자 미국은 이란의 왕에게 접근해 모사데크를 해임하라고 압력을 넣지만 샤가 회피하자 이란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 공작을 벌인다. 이 사태로 이란은 심각한 분열이 발생하고, 나라는 폭동이 일어나고 내전이 발발하는 사태에 이른다. 미국은 정보기관과 군대를 동원해 이란의 정부를 전복했고, 마침내 모사데크를 몰아냈다. 2부 1953~1984년, 미국이 만든 중동 5. 6일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쏘련은 연합군이었다. 쏘련은 독일의 침략에 맞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꾸는 가장 영웅적인 전투를 치렀고, 독일군을 궤멸했다. 전투는 쏘련이 치렀고, 전쟁물자는 미국이 상당 부분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가 재편되면서, 미국은 강대국 쏘련이 중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우려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쏘련이 중동 여러 나라들과 협력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중동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집트의 가말 나세르는 1952년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제를 폐지하고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대통령이 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요르단, 시리아 등에서 지지를 받았지만 영국과 미국은 반 나세르 세력을 지원해 각 나라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거나 내전이 일어났다. 미국 석유회사와 유대인은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를 강하게 반대했고, 나세르는 쏘련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45년 이후 유대인 시오니스트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일부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했지만 한편으로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프랑스에서 핵무기를 도입했다. 1967년에 미국은 이스라엘에 막대한 전쟁무기를 제공했고,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집트를 선제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은 전투기로 이집트를 급습해 이집트 전투기 대부분을 폭격했고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의 공군도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공격했고, 불과 6일만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쏘련이 이스라엘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서야 겨우 전쟁은 끝났다. 6. 두 전쟁 사이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요르단에서 점령한 땅에 살던 주민을 쫓아내고 자신들이 차지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은 여전히 이집트가 쏘련과 가깝게 지낼 것이라 판단해 이집트의 영향력을 줄이고, 중동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죽고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고, 시리아에서 알 아사드가 권력을 잡아 반 이스라엘 전선을 구축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의 닉슨은 이집트에 휴전을 제안했지만 사다트가 거부하자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다. 쏘련도 이집트와 시리아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다. 중동의 전쟁 상황과 미국, 쏘련의 개입을 두고 보던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왕은 미국에 석유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다른 중동 여러 나라들도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세계는 심각한 석유 파동을 겪게 된다. 유엔은 이스라엘에 휴전하라고 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보였다. 그러자 쏘련이 무장하기 시작했고, 핵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보였다.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스라엘을 강하게 압박했고, 이스라엘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7. 1979년 미국은 이미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쓰라린 기억이 있었고, 중동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중동의 평화가 유지되길 원했다. 이 시기에 미국대통령은 지미 카터로 그는 이집트의 사다트와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를 미국으로 불러 비밀협상을 벌였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란에서는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혁명이 발발했다. 호메이니는 시아파 종교지도자로, 팔레비에 반대했다 쫓겨나 터키로 망명했으며 외국에서도 계속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이란으로 들여보내 이란 혁명을 일으켰다. 호메이니를 추종하는 학생들이 이란의 미국대사관을 습격해 미국인 인질 66명을 붙잡아 행진했다. 미국 정부는 미국에 있는 이란 자산을 동결하고, 이란에서 석유 수입을 중단했다. 인질들은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는 날 풀려났다. 이 해에 여러 이유로 쏘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다. 쏘련은 아프가니스탄의 권력자를 교체했지만, 반 쏘련을 외치는 민족주의 성향의 반란군(지하드)이 등장했다. 미국은 이 반란군을 지원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 빈 라덴이 이때 파키스탄에 들어와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8. 레바논 내전 레바논은 중동에서도 특이하게 이슬람보다 기독교 세력이 큰 지역이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원래 레바논 땅보다 더 넓은 지역-시리아 땅을 포함한-을 국경으로 설정했는데, 이것이 내전의 원인 가운데 한 요소로 작용했다. 여기에 초기에는 기독교도가 51%였던 지역이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30%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이슬람교도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종교적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1975년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베이루트의 교회를 습격해 기독교도를 살해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앞세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게릴라, 레바논까지 공격하도록 했다.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두고 미국, 프랑스, 쏘련이 협상을 벌였고, 1982년 전투는 멈췄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원했고, 레이건은 이스라엘이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길 희망했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의 난민촌을 습격해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해 중동 지역을 분쟁과 전쟁 지역으로 만들었고, 쏘련도 시리아 뒤에서 반미, 반이스라엘 투쟁을 하는 아랍 민족주의 집단을 지원했다. 3부 1984~2013년, 새로운 질서와 싸움 1990년 이라크의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도 침공할 것을 두려워했고, 곧바로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 공격했다. 미국의 개입으로 중동 지역의 여러 나라가 반발하고,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에 맞서 이라크를 지원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연합국을 결성했는데, 중동지역에서는 시리아, 모로코, 이집트가 미국 편을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후세인을 반서구, 반미에 맞서는 영웅으로 칭송했다. 미국은 50만 명의 군인을 이라크에 투입했고, 그 전에 공중 폭격으로 이라크 전역을 폭격했다. 이라크군은 궤멸당했고, 후세인은 휴전협정에 싸인했다. 후세인은 전쟁에서 졌지만, 이라크에서는 반란군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끝까지 저항하자는 결의를 다진 강경파 집단이 반란을 주도했다. 하지만 후세인의 정부군이 반란군을 진압했고, 이때 많은 쿠르드족이 터키로 도망했다. 쿠르드족은 자기 민족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미국을 도왔다.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부는 오슬로에서 비밀 회담을 열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인정하는 협약을 했다. 하지만 하마스(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단체)는 이 협약을 거부하고, 대 이스라엘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고, 수단에서는 빈 라덴이 알카에다를 구축하고 있었다. 1998년 8월 빈 라덴은 케냐와 탄자니아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공격했다.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도 빈 라덴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미국 본토를 공격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미국의 클린턴은 성추문이 터지자 여론을 이라크로 돌렸다. 2001년 미국에서 9.11 폭탄 테러가 발생했고, 미국은 빈 라덴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빈 라덴을 쫓는 한편,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을 체포, 처형했다. 이후 오바마 정부에서 빈 라덴을 추격해 끝내 빈 라덴도 사살했다. 중동 지역의 분쟁과 내전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장한 면이 많다. 여기에 중동 지역의 복잡한 상황-종교, 인종, 국경 문제 등-이 겹치면서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석유가 나오는 지역이라는 특수성까지 결합해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도 시리아는 내전을 치르고 있으며, 같은 종교인 이슬람교도임에도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학살하고 있다. 종교적 극단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내전이라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터키, 러시아, 이스라엘 등 주변 국가들까지 끼어든 상황이다. 중동 지역에 언제 평화가 정착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너무 오랫동안 분쟁 지역이었고, 강대국의 먹이로 버려진 약소국가의 고통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도 '한국전쟁'이라는 참담한 경험을 이미 했으니,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것을 이 그래픽노블을 통해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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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1
  • 홍이 이야기
    제목 : 홍이 이야기 작가 : 박건웅 출판 : 새만화책 박건웅의 만화는 무겁다. 아니, 무거운 주제를 선택한다. 그 무게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박건웅의 그림은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보기 드문 그림이다. 마치 박수근의 그림을 보는 듯한, 무채색의 굵은 선은 언듯 판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그림이 모두 어두운 것은 아니지만, 역사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늘 무겁고, 어둡고, 무채색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그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들 - 제주 4.3 항쟁, 한국 전쟁, 이념적 인간형 등 - 이 모두 무겁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만화의 한 컷, 한 컷이 마치 작품처럼 완성도를 높였고, 짧지만 강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짧은 이야기로, 본문이 불과 36쪽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이야기 소재는 작가의 후배(제주도가 고향인)가 제공했다. 후배가 쓴 이야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고 슬픈 내용이어서 이런 사건이 실제 벌어졌는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봉화가 오르고, 제주도의 좌익 진영은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봉기했다. 미국은 친일파보다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좌익의 존재를 더 껄끄럽고 두렵게 여기고 있었기에, 친일파를 앞세워 좌익을 척결하려는 전략을 구사했다. 제주4.3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이 작품의 뒷부분에 박찬식 제주4.3연구소장님이 글을 썼다. 박건웅 작가의 그래픽노블과 함께 박찬식 소장님의 글을 읽으면 제주4.3과 관련한 큰 줄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홍이는 말을 하지 못한다. 홍이는 마을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마을 앞 작은 오름에 올라 바깥에서 노란개(군인)나 검은개(경찰)가 쳐들어 오는지 온종일 지키고 있다. 이들이 오면 홍이는 깃대를 쓰러뜨리고, 나팔을 분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깊이 숨어 안전하다. 홍이가 사는 중산간 마을은 미군정의 군인과 경찰이 좌익을 토벌한다고 자주 드나들었고, 죄 없는 홍이의 이웃 아저씨, 삼촌들이 잡혀가 죽어서 시체만 돌아오곤 했다. 드물게 산에서 무장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깊은 밤을 도와 내려오기도 했다. 그들은 마을 주민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먹을 것을 가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홍이가 동생 영이와 오름에 올랐고, 홍이는 배고픈 동생을 위해 먹을 것을 찾다 그만 노란개와 검은개가 마을로 들이닥치는 걸 놓치고 말았다. 노란개와 검은개는 닥치는대로 마을 주민을 학살했다. 영이도, 홍이의 부모도, 이웃 아저씨와 아주머니, 삼촌과 어린아이들까지. 그리고 홍이도 나팔을 불지 못하고 소리는 저 멀리 하늘로 퍼져나갔다. 이 작품은 김금숙 작가의 '지슬'(오멸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원작)과 맥을 같이한다. '지슬'에 등장하는 중산간 주민들도 정부군과 경찰 토벌대에 쫓겨 더 깊은 산의 동굴로 들어간다. 당시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은 좌익 무장투쟁단이 아닌, 평범한 마을주민들도 모두 '적'으로 규정해 학살했다. 이것은 명백히 전쟁범죄이며, 동족학살범죄였지만 아직도 제주민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은 물론,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 만화계에서 박건웅은 작가주의 만화가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미 그가 생산한 작품들이 보여주는 역사의식과 사회성은 어떤 작가들보다 강렬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초기 작품들이 절판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책들이 재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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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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