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허균(許筠)의 시를 바로 잡다

 

 

호정(湖亭)-허균(許筠)


煙嵐交翠蕩湖光(연람교취탕호광) :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細踏秋花入竹房(세답추화입죽방) :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頭白八年重到此(두백팔년중도차) :

머리 센 지 팔 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畫船無意載紅粧(화선무의재홍장) :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이 시는 허균이 외지에서 벼슬을 하거나, 귀양에서 8년만에 집에 돌아온 소회를 적은 것으로, 허균의 심정이 잘 드러난 시로 읽힌다. 하지만, 이 시를 여기 번역한 그대로 읽으면 아무 감흥이 없다. 시를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허균 생가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허균이 쓴 시를 번역하면 아래 네 줄에 불과하다.


1)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2)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3)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4)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허균은 시를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으로 써왔다. 그의 다른 시를 보면, 일상에서 벌어진 일을 그대로 기록하는, 생생한 현실감과 현장감이 보이는데,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추상적 느낌이 강하다.

1)연에서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이라고 했다. 안개는 주로 아침에 피어오른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현상은 대기와 물의 온도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데, 허균의 집 바로 옆이 경포호여서 이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봄, 가을, 초겨울 아침이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남기'는 어떨까. 남기는 안개와는 또 다르다. 남기는 호수보다는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옅은 안개나 구름같은 부연 현상을 말하는데, 허균의 집에서는 저 멀리 태백산맥 줄기가 보인다. 그 산줄기에 아침, 저녁으로 남기가 드리우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호수의 물결이 넘실댄다는 표현은 원문과 약간 다른데, 호수에 빛이 넘실거리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우리말로 '윤슬'이다. 빛을 받은 호수의 표면에 비늘같은 햇살이 반짝거리는 것이다.

2)연에서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고 했으니, 1)연에서의 호수는 가을 호수다. 즉 안개와 남기는 가을의 아침에 바라보이는 풍경임을 알 수 있다. '가을 꽃 밟고 밟아'라는 표현은 좀 과격하다. 여기서 느낌은 '세답' 즉 조심스럽게 집밖의 길에 떨어진 꽃을 밟았다고 보는 것이 좋다. 실제로 혀균의 생가 바로 옆에는 아주 넓은 소나무 숲이 있는데, 이곳이 예전에는 허균의 개인 도서관이 있던 '호서장서각' 자리다. 허균은 집에 있을 때 책이 무려 1만권이나 되는 여기 장서각에 와서 책을 읽으며 근처를 산책하곤 했는데, 8년만에 돌아온 그의 감회가 어떨까는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는다.

3)연에서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왔다고 했다. 허균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만, 벼슬을 다섯 차례하고, 세 차례의 유배를 겪었다. 그의 삶이 파란만장한 것은 그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광해군이 그를 아껴 요직에 앉히려 했으나, 허균의 자유로운 영혼은 종종 그의 반대파 수구세력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가 유배지 또는 벼슬에서 8년만에 고향 집에 돌아왔으니 마음은 허허롭고, 시원하며, 쇠굴레를 벗은듯 몸과 마음이 가볍지 않을까.

4)연은 그래서 그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다.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라는 내용은 그러나 이 시에서 가장 난해한 문장이다. 이 문장의 뜻을 모르면 이 시의 느낌도, 맛도 알 수 없는데, 학교에서는 이 시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이 마지막 문장은 그가 아직은 죽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그림배'는 '붉은 단장'과 연결된다. 즉, '붉은 단장'은 상여를 말하니, 상여를 실은 배는 울긋불긋한 그림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림배'는 상여를 실은 배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홍장'이 사람의 이름이라면 내용은 완전히 달라진다. 실제로 강릉에는 경포호와 관련한 옛날 이야기에 '홍장'이라는 기생의 이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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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8경 가운데 5경으로 홍장야우(紅粧夜雨)가 있다.

홍장은 조선 초기에 석간 조운흘 부사가 강릉에 있을 즈음 부예기로 있었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모 감찰사가 강릉을 순방했을 때, 부사는 호수에다 배를 띄어놓고 부예기 홍장을 불러놓 고 가야금을 켜며 감찰사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미모가 뛰어난 홍장은 그날 밤 감찰사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그 감찰사는 뒷날 홍장과 석별하면서 몇 개월 후에 다시 오겠다고 언약을 남기고 떠나간다.

그러나 한 번 가신님은 소식이 없다.

그리움에 사무친 홍장은 감찰사와 뱃놀이하며 즐겁게 놀던 호수에 나가 넋을 잃고 앉아서 탄식 하고 있는데, 이때 자욱한 안개사이로 감찰사의 환상이 나타나 홍장을 부른다.

홍장은 깜짝 놀라면서 너무 반가워 그쪽으로 달려가다 그만 호수에 빠져 죽는다.

이때부터 이 바위를 홍장 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안개낀 비 오는 날 밤이면 여인의 구슬픈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고 전한다.

꽃배에 임을 싣고 가야금에 흥을 돋우며 술 한 잔 기울이던 옛 선조들의 풍류정신을 회상하기 위 한 기념으로서의 일경이다.     

그렇다면, '그림배'는 '꽃배'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꽃배'와 '홍장'은 바로 위의 이야기처럼 경포호에서 양반들이 놀던 풍경인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연의 해석은, '홍장을 꽃배에 싣고 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가 되겠다. 즉, 세파에 시달리다 고향에 돌아오니 풍류를 즐기며 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 아닐까.

따라서, 위의 시를 재해석해 번역하면 아래의 내용이 된다.


1) 안개와 남기 푸른고, 호수물결 넘실 / 물안개 옅은 구름, 호수에 반짝거리는 윤슬

2) 가을 꽃 밟고 밟아 대나무 방에 들었다 / 가을 꽃 조심히 디뎌가며 대나무 방에 들다

3) 머리 센 지 팔년 만에 다시 이곳에 와 / 흰머리되어 팔년, 다시 여기 와보니

4) 그림배에 붉은 단장 싣고 갈 뜻 없도다 / 홍장을 꽃배에 싣고 나들이 갈 마음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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