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제목 : 홍이 이야기

작가 : 박건웅

출판 : 새만화책


박건웅의 만화는 무겁다. 아니, 무거운 주제를 선택한다. 그 무게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박건웅의 그림은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보기 드문 그림이다. 마치 박수근의 그림을 보는 듯한, 무채색의 굵은 선은 언듯 판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그림이 모두 어두운 것은 아니지만, 역사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늘 무겁고, 어둡고, 무채색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그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들 - 제주 4.3 항쟁, 한국 전쟁, 이념적 인간형 등 - 이 모두 무겁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만화의 한 컷, 한 컷이 마치 작품처럼 완성도를 높였고, 짧지만 강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짧은 이야기로, 본문이 불과 36쪽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이야기 소재는 작가의 후배(제주도가 고향인)가 제공했다. 후배가 쓴 이야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고 슬픈 내용이어서 이런 사건이 실제 벌어졌는지 믿고 싶지 않을 정도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봉화가 오르고, 제주도의 좌익 진영은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봉기했다. 미국은 친일파보다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좌익의 존재를 더 껄끄럽고 두렵게 여기고 있었기에, 친일파를 앞세워 좌익을 척결하려는 전략을 구사했다. 제주4.3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이 작품의 뒷부분에 박찬식 제주4.3연구소장님이 글을 썼다. 박건웅 작가의 그래픽노블과 함께 박찬식 소장님의 글을 읽으면 제주4.3과 관련한 큰 줄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홍이는 말을 하지 못한다. 홍이는 마을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마을 앞 작은 오름에 올라 바깥에서 노란개(군인)나 검은개(경찰)가 쳐들어 오는지 온종일 지키고 있다. 이들이 오면 홍이는 깃대를 쓰러뜨리고, 나팔을 분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깊이 숨어 안전하다.

홍이가 사는 중산간 마을은 미군정의 군인과 경찰이 좌익을 토벌한다고 자주 드나들었고, 죄 없는 홍이의 이웃 아저씨, 삼촌들이 잡혀가 죽어서 시체만 돌아오곤 했다. 드물게 산에서 무장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깊은 밤을 도와 내려오기도 했다. 그들은 마을 주민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먹을 것을 가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홍이가 동생 영이와 오름에 올랐고, 홍이는 배고픈 동생을 위해 먹을 것을 찾다 그만 노란개와 검은개가 마을로 들이닥치는 걸 놓치고 말았다. 노란개와 검은개는 닥치는대로 마을 주민을 학살했다. 영이도, 홍이의 부모도, 이웃 아저씨와 아주머니, 삼촌과 어린아이들까지. 그리고 홍이도 나팔을 불지 못하고 소리는 저 멀리 하늘로 퍼져나갔다.

이 작품은 김금숙 작가의 '지슬'(오멸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원작)과 맥을 같이한다. '지슬'에 등장하는 중산간 주민들도 정부군과 경찰 토벌대에 쫓겨 더 깊은 산의 동굴로 들어간다. 당시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은 좌익 무장투쟁단이 아닌, 평범한 마을주민들도 모두 '적'으로 규정해 학살했다. 이것은 명백히 전쟁범죄이며, 동족학살범죄였지만 아직도 제주민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은 물론,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 만화계에서 박건웅은 작가주의 만화가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미 그가 생산한 작품들이 보여주는 역사의식과 사회성은 어떤 작가들보다 강렬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초기 작품들이 절판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책들이 재출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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