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제목 : 세 개의 그림자

작가 : 시릴 페드로사

출판 : 미메시스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맞닥뜨렸으나, 그 운명을 거부해야 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는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신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가족-루이, 리즈, 조아킴-에게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이 나타난다. 이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그저 멀리서 가족을 지켜볼 뿐이다. 루이는 성실한 농부로 부지런히 농사 짓고 가족을 지키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평범한 사람이다. 아내 리즈도 남편과 아이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집을 돌보고, 살림을 맡아 하는 살뜰한 여성이다. 좋은 부모를 둔 조아킴은 구김살 없이 나날이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을 보낸다. 평화로운 풍경, 아름다운 자연이 집을 둘러싸고 있어 부족함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가족에게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은 누구일까. 루이와 리즈는 그들이 아들 조아킴을 데리러 온 사신이라고 믿는다. 루이는 그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려 대결을 펼치고 싶지만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리즈는 마을에 사는 주술사를 찾아가 부적을 써 오지만 역시 효험이 없다. 루이가 아들 조아킴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은 집을 떠나 죽음의 사신이 쫓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는 것 뿐이다.

다가올 운명을 피해 길을 떠나는 것은 전형적인 영웅의 서사이기도 하다. 영웅은 운명과 맞닥뜨려 운명과 싸워 이기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도 하지만, 운명과 맞서 싸워 처절하게 몰락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닥쳐올 운명을 알고 있다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운명을 피해 도망하는 것이겠다.

그렇게 루이는 아내 리즈를 집에 남겨둔 채, 아들 조아킴을 데리고 세 개의 그림자를 피해 길을 나선다. 그 길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영원한 길이라는 걸 이들도 알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이들의 아늑한 생활은 세 개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순간 깨졌고, 미래는 불안과 두려움이 지배할 것임을 예감한다. 신화적으로 본다면, 루이와 리즈는 인류의 앞선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세 개의 그림자 즉, 죽음, 자연, 질병에 맞서 후손의 생존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투쟁을 떠올리게 한다. 

루이는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내놓고 배를 탈 수 있는 탑승권을 구입한다. 재산을 다 내놓고라도 세 개의 그림자로부터 멀리 도망쳐야 하는 절박함이 드러난다. 그 절박함은 곧 조아킴을 지키려는 굳건한 마음이기도 하다. 사흘을 건너야 하는 거대한 호수는 바다처럼 넓어서 비바람이 거세게 불고, 태풍이 몰아친다. 루이는 세 개의 그림자를 따돌렸다고 생각하지만, 배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루이는 살인자로 지목되어 조아킴과 함께 감옥에 갇힌다. 

태풍으로 배가 가라앉고, 루이와 조아킴은 겨우 살아나는데, 두 사람을 구해 준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두 사람을 극진하게 구명한다. 죽을 고비를 넘긴 루이는 자신이 두려워했던 세 개의 그림자보다, 사랑하는 가족이 서로 떨어져 고생하는 것보다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소중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루이가 이미 건너온 호수를 다시 되짚어 돌아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자신을 구해준 노인은 조아킴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부여하겠다고 제안한다. 루이는 자신의 목숨과 조아킴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한다. 노인은 루이의 심장을 꺼내고, 조아킴을 지킬 수 있는 거대한 힘을 부여한다. 이 장면은 신화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루이의 심장 즉 '생명'의 상징을 꺼내는 것은 하나의 삶이 끝나는 걸 뜻한다. 루이가 한 명의 개체로서의 영웅이든, 어느 집단을 상징하든 그 집단, 세대, 영웅은 소멸하고, 그가 가진 힘과 권위가 다음 세대를 지키게 된다. 노인은 '절대자'이며, 앞선 세대를 끝내면서 뒤이어 오는 세대가 살아갈 환경을 부여한다. 앞선 세대의 희생에 의해 후손은 살아갈 여지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뒤이어 루이와 조아킴을 뒤따라오던 세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악, 재앙, 폭력, 질병과 같은 부정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시간, 행복, 슬픔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공포에 떨 만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루이가 세 개의 그림자 정체를 일찍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가족과 헤어지면서까지 힘겨운 길을 떠났을까.

심장을 내준 루이는 거대한 불멸의 존재로 변하고, 조아킴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는 자신의 몸도 지키지 못하고 쓰러진다. 루이는 인류의 역사를 의인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인류가 만드는 역사의 한 가운데를 지나며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의 생존 과정을 드러낸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조아킴(인류의 후손)은 세 개의 그림자와 함께 떠난다. 결국 인류가 지키려고 했던 소중한 것들은 인류의 힘으로 저지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다. 세 개의 그림자가 공포, 두려움, 재앙이든 시간, 행복, 슬픔이든 인류는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 결국 루이는 집으로 돌아가 리즈를 만나 두 딸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환상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루이가 말하는 동양의 격언, '일어서서 버텨라. 그리고 삶이 있는 곳에 머물러라.'는 말은 현실의 삶, 현재의 삶에 충실한 것이 인류 본연의 모습임을 깨닫게 한다.


작가의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그림은 이 이야기를 납득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흔히 사용하는 펜과 잉크가 아니라 붓펜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세필붓으로 매우 가는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붓선은 펜선보다 부드러우면서 선의 굵기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펜선으로는 톤의 느낌을 내기 어려운 반면, 붓선은 선의 강약과 얇고 두꺼움을 통해 짙거나 옅은 선과 면을 그릴 수 있어 톤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붓선은 선의 외곽 뿐아니라 면을 그리는데도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그리는 선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어 실력이 출중하다는 걸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디즈니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한 경력만 봐도 실력은 검증이 되었지만, 이야기와 그림이 잘 어울리고 있어서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 한국어 번역판에서 말풍선 안에 들어가는 대사의 글꼴도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손글씨 글꼴을 쓰고 있어서 작품의 품질을 높였다. 만약 말풍선 안의 활자를 보통 인쇄체 글꼴로 썼다면 그림과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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