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제목 : 포르투갈

작가 : 시릴 페드로사

출판 : 미메시스


잘 만든 양장본에 두툼한 두께의 이 그래픽 노블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그림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그래픽 노블의 특징이자 장점인 그림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그래픽 노블을 선택하는 가장 큰 요소는 그림이다.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림이 수준 이하라면 보고 싶지 않다. 반대로 내용은 별로인데 그림이 훌륭하다면 그것은 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래픽 노블에서 최우선 요소는 역시 그림이다.

지은이는 월트디즈니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고, 이후 만화가로 전업하면서 유명한 만화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책만 봐도 말할 필요 없이 최고의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삼부작으로 구성되었고, 주인공 시몽 뮈샤는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만화가지만 작가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 있고, 삼대로 이어지는 집안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잔잔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지고 있다.


시몽 이야기

주인공 시몽은 만화가로 작품집도 발표한 작가지만 심각한 슬럼프 상태에 있다. 그는 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세상 일이 심드렁하고, 삶의 의지도 박약한 상태로 침체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간다. 그의 애인 끌레르는 집을 사서 한 곳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시몽은 정착할 마음이 없어 갈등을 일으킨다. 시몽은 포르투갈에서 열린 작은 만화축제에 참가한 다음, 포르투갈과 자신의 끈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프랑스 사람으로 살아왔던 시몽에게 포르투갈에 자신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 할아버지의 고향이자 뿌리가 포르투갈이라는 사실은 뜻밖의 사실로 다가오고, 마음이 끌리는 걸 느끼게 된다. 그동안 가족들과도 소원하게 지내온 주인공은 사촌의 결혼식을 계기로 프랑스를 벗어나 포르투갈에서 한동안 지낼 생각을 하게 되고, 그동안 만나지 않았던 사촌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모든 일에 의욕도 없고, 미래를 설계하지도 않는 시몽을 보면서 끌레르는 결국 시몽의 곁을 떠난다. 시몽의 태도는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외로움을 느끼며 정서적, 정신적으로 결핍 상태에 놓어 있으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그는 심리상담을 하지만, 그것도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상담사도 포기한다. 시몽은 감정, 정서적으로 자기애가 과잉인 상태로 보인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자신도 모른다. 부모를 잃은 결핍인지, 고향이 없어서 겪는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한 원초적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 관한 허무 때문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장의 이야기

장은 시몽의 아버지다. 둘은 서로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자주 만나지 않는다. 형의 딸(조카) 아네스의 결혼식에 가는 걸 두고도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망설이다 결국 참석하기로 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퍽 낯설다. 가족의 결혼식이라면 당연히 참석하는 걸로 생각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이들은 철저히 자기의 삶을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는 걸 볼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장은 아들 시몽과 함께 조카 아네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르고뉴를 찾는다. 사돈댁은 부르고뉴에서 포도농장을 크게 경영하고 있었고, 와인을 생산하는 넉넉한 집안이었다. 결혼식의 하객은 주로 신랑 쪽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신부 쪽은 몇 명에 불과했다. 장은 조카의 결혼식에서 형과 누나를 만난다. 장의 형제들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장과 그의 누나는 부모님이 장남인 장의 형을 편애했다고 기억한다. 결혼식을 계기로 남매들이 만나서 이야기 할 기회를 갖게 되고, 이들이 계획에 없던 소풍을 나가면서, 돌아오는 길에 차가 고장나고, 비까지 내려 차 안에 갖힌 상태로 오래 전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함께 따라간 시몽은 큰아버지, 고모,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의 시대와 할아버지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 된 이야기를 처음으로 다양하게 들을 기회를 맞는다.

시몽은 끌레르와 헤어지는 것을 인정하고, 두 사람은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아벨의 이야기

시몽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지금도 그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포르투갈로 간다. 그곳에서 사촌의 집에 머물며 의뢰받은 작업도 하고, 할아버지의 고향과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들을 만나며 천천히 자신의 뿌리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촌이 묵으라고 한 집은 오래 전, 할아버지 아벨과 그의 동생 마뉴엘이 직접 지은 집이었고, 지금도 '무샤' 성을 가진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시몽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란 프랑스 사람으로, 언어도 프랑스어만 할 줄 알았지만, 자신의 뿌리가 포르투갈이라는 것, 포르투갈어가 낯설지 않다는 걸 느낀다.

할아버지 아벨을 잘 알고 있는 마을의 노인을 찾아 이야기를 듣고, 집앞 텃밭을 가꾸는 아주머니에게서도 할아버지의 동생 마뉴엘에 관해 이야기를 듣다가 그는 결정적인 내용을 알게 된다. '무샤' 집안의 뿌리는 스페인에서 온 무사들이 어린 아이를 마을에 놓고 떠난 사건에서 비롯했으며, 그 이름 모를 아이가 자신을 '무차초'라고 말해서 '무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샤' 집안의 시작이 된 그 아이는 이름도, 고향도 알 수 없었고, 오직 스페인에서 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아벨이 포르투갈을 떠난 것은 1930년대로, 포르투갈이 정치적으로 독재 상황이었고, 경제적으로도 몹시 어려운 시기여서 아벨과 마뉴엘은 먹고 살기 위해 프랑스로 일을 찾아 떠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벨은 프랑스에 그대로 남고, 동생 마뉴엘만 고향으로 돌아와 이후 고향을 지키며 살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시몽의 일상에서 시작해 점차 가족, 집안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점층적 서사를 보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친절한 설명은 없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관계, 감정, 살고 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시몽과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남매들은 자신들이 디아스포라적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포르투갈에 있고, 시몽의 할아버지대에 포르투갈에서 프랑스로 이주해 정착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드물게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신들에게도 '호적등본'을 떼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서 '외국인' 즉 '타자'로 보이게 되는 상황을 드러내며 복잡한 마음이 된다.

포르투갈은 프랑스에서 멀지 않지만, 중간에 스페인이라는 큰 나라가 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처럼 보인다. 포르투갈도 중세 유럽의 식민지 개척 시기에는 강력한 국가였지만 지금은 유럽에서는 힘이 많이 빠진 중진국이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선진국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쇠퇴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라의 여건이야 어떻든 이 만화에서는 포르투갈의 평범한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중진국 수준이지만 이들은 소박하고 낙천적인 성향으로 낯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친절하게 대하고 있는 걸 보여준다. 

주인공 시몽은 자신의 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의 역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도 조금은 더 가까워지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들-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사촌들과도 쉽게 한 식구처럼 가까워진다. 이런 현상은 포르투갈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따뜻한 환대와 열린 마음, 가족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들의 문화 덕분이기도 한데,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 느끼지 못한 따뜻한 분위기가 시몽의 태도와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시몽의 할아버지는 형제가 프랑스로 취업 이민을 위해 고향 포르투갈을 떠났고,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시몽의 할아버지인 아벨은 프랑스에서 사망한다. 아벨의 동생이자 시몽에게는 작은할아버지인 마뉴엘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고, 두 집안은 그때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반전은 주인공 집안인 무샤의 집안이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를 알려주는 전설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전쟁을 하던 시기에 포르투갈의 한 마을에 스페인 기사들이 찾아오고, 한 아이를 재워달라고 부탁하고 기사들은 떠나간다. 그 아이는 혼자 남게 되고, 그 마을에서 자라 농부가 되는데, 그가 바로 '무샤' 집안의 조상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로만 본다면 '무샤'집안의 뿌리는 스페인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마지막 이야기는 퍽 낭만적이고 애틋해서 찡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며 감동이 더하는 이 그래픽 노블은 여러 번을 봐도 좋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그림이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다. 작가 시릴 페드로사의 그림은 한컷 한컷이 뛰어난 일러스트 작품일 정도로 완성도가 높고 뛰어나다. 작품은 모두 채색이며, 수채화 작업으로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채색의 특징은 이야기의 구성과 깊은 관련이 있어서, 과거, 회상, 현재, 감정에 따라 채색의 톤을 달리해 이야기의 흐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채색의 톤은 약간 어둡게 가라앉아서 차분하고 우울한 느낌이다. 이것은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들의 마음을 채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이 주로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어, 탈색된 느낌으로 채색을 한 것은, 과거의 이야기를 이미지로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섬세한 펜선으로 꼼꼼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그 위에 여러 겹의 채색으로 배경을 입혔다. 

작품에서 시몽과 그의 가족이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포르투갈어를 외국어로 표기한 것은 작가가 의도한 역설이다. 포르투갈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 외국인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라 외국어인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를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한국인을 부모로 둔 사람이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한국을 방문해 한국어를 들었을 때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모국어와 자신의 정체성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를 이 작품에서도 시몽과 그의 사촌이 나누는 대화에서 볼 수 있다. 이때 개인의 정체성은 물리적 공간(지역)에 있는 것인지, 혈연(핏줄)에 있는 것인지를 철학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작품을 다 읽으면 시몽이 초반에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방황을 이해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가 보인 행동을 납득하기는 어렵다. 결국 그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는데, 관계의 파탄은 오로지 시몽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의 삶과 생각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어떤 행동, 행위의 결과만을 두고 판단할 뿐이다. 시몽이 보였던 행동은 어리석고 멍청하게도 보이지만, 그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삶의 경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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