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제목 : 중동, 만들어진 역사

작가 : 장 피에르 필리유/디비드 베

출판 : 다른


한국(사람)은 미국과 유럽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고 있지만, 중동, 아프리카, 남미 국가들의 역사는 잘 모르거나 배우려 하지 않는 지적(知的)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 왜 그럴까. 미국과 유럽이 강대국이고, 정치, 경제 분야에서도 세계의 흐름을 좌우하는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과도 정치, 경제에서 긴밀한 관련이 있기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에 정치,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한편으로 치우쳐 있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미국의 시각'으로 편중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수입하는 원유의 약 80%는 중동에서 오고 있다. 한국은 70년대 중동의 건설현장에 진출해 많은 기업과 노동자가 뜨거운 사막에서 땀흘려 일해 나라의 부를 키웠다. 한국도 강대국 틈새에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 있지만, 중동 지역은 유럽 열강과 미국 등 패권국가들 틈새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굴욕적 위치에 놓여 있다. 

중동이 평화롭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곧바로 한국에도 영향이 미친다. 제3차 중동-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자 원유 가격이 급등했고, 한국의 휘발유, 경유 가격이 폭등했던 전력이 있었다. 우리가 중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중동의 민주주의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원유 가격 뿐 아니라, 중동 여러 국가가 과거의 우리처럼 약소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의 폭압 아래 36년 동안 지배당한 기억을 잊지 않듯 중동의 여러 나라도 강대국의 폭압으로 부족과 민족이 서로 갈등하고 적대 관계가 되고, 증오하도록 만든 역사가 있다. 그 역사를 올바르게 알고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중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강대국의 논리를 따라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그래픽노블은 3부작으로 구성했다. 추천사(김재영 프레시안 기자)에도 썼듯이 이 책의 내용은 1) 어떤 과정을 거쳐 미국이 중동지역에 개입했고, 2) 중동의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미국이 어떻게 중동 독재자와 손을 잡았으며, 3)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가 어떤 문제와 갈등을 낳았는가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미국이 영국과 전쟁해서 독립한 직후부터 중동 지역의 분쟁에 개입해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과정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였다. 민중의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한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도 이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미국의 침략사는 미국이 독립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이 책의 중요한 미덕이다.


1부 1783~1953년, 열강이 만든 중동

1. 옛날이야기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해지는 서사시를 다루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로 알려진 이 오래된 이야기는 수메르의 도시 국가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의 영웅담을 그리고 있다. 길가메시는 신과 인간이 섞인 초인이다. 그는 강력하지만 백성을 억누르는 독재자였다. 이를 보고 천신 아누와 모신 아루루가 엔키두라는 강력한 인간을 만들지만, 길가메시는 엔키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삼나무 숲을 지키는 괴물 훔바바를 죽이는 원정을 떠나 마침내 훔바바를 죽이고 돌아온다.

길가메시는 여신 아슈타르의 유혹을 뿌리치자 아슈타르는 아버지 아누에게 길가메시를 징벌하기 위해 '하늘의 황소'를 내려달라고 요청한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하늘의 황소'도 죽인다. 그러자 신들이 엔키두를 죽였고, 길가메시는 충격을 받고 길을 떠나 영생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인간 우트나피시팀과 그의 아내를 찾아나서서 그들을 만나 대홍수에 대해 듣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다시 우르크로 돌아온다.

수메르의 전설은 기독교 설화에도 도입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기독교에서 '노아의 방주'로 알려진 대홍수 이야기는 수메르 전설로 알려졌으며, 내용도 거의 같다. 이라크에서 발견한 수메르 유적 가운데 석판이 있는데, '독수리 전승비'라고 불리는 이 석판의 한쪽에는 적들의 시체를 쌓아 승리를 기념하는 그림이 있는데, 2004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국 병사들이 이라크 정치범을 쌓아놓고 사진을 찍어 크게 문제된 적이 있었다. 역사는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2. 해적과의 싸움

15세기 이후 이슬람 진영은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수많은 전쟁과 전투를 치르는데, 기독교 쪽에서는 이것을 '십자군 전쟁'이라고 말하고, 이슬람 쪽에서는 '지하드 전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쪽에서 '십자군 전쟁'이라고 명명한 것은 18세기에 등장하는데, 기독교(가톨릭) 집단이 이슬람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초부터였다. '십자군 전쟁'에서 가톨릭 쪽의 내부 상황은 단지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 뿐 아니라 가톨릭 내부의 갈등과 긴장, 위협 요소를 바깥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여기에 귀족과 시민 계급의 불만을 무마하는 한편,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경제적 이익을 보기 위한 가톨릭과 각 나라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다.

기독교 세계(유럽)에서는 11세기부터 16세기 르네상스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암흑시대'라고 했는데, 그 말은, 가톨릭의 위세가 너무 강해서 종교적 억압이 유럽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고, 이에 따라 과학, 문화, 예술, 경제 등 사회 모든 분야가 발달하지 못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반면, 이슬람은 그리스의 발달한 과학, 수학, 철학을 받아들여 문명의 꽃을 피우던 시기였고, 영토도 확장되었다. 

십자군은 11세기 초 기독교도로 구성한 정예 군대가 출전한 것을 제외하면, 이후 15세기까지 점차 약탈을 목적으로 온갖 부랑자, 범죄자들이 병사로 나섰다. 더 이상 종교적 명분은 성립하지 않았고, 영토 확장과 약탈이 주를 이루었다.

중세 이슬람 진영과 기독교 진영은 바다에서도 격렬하게 전쟁을 했는데, 양쪽 모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일을 하거나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노역을 했다. 19세기 초가 되면서 두 진영은 평화조약을 맺어 더 이상 해적이 상대 배를 침탈하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해군력이 약한 덴마크,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은 이슬람 해적에게 인질로 잡혀 몸값을 지불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미국이 독립한 직후, 영국은 미국이 영군 해군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제리에 알렸고, 알제리(이슬람 진영) 해적은 미국 상선을 나포해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미국 독립 직후에 발생했으며, 미국은 인구가 불과 300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였다. 미국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었다.

미국은 인질로 잡힌 미국인을 구하기 위해 영국 런던에서 트리폴리의 특사와 회담을 했다. 이때 참석한 미국 대표는 존 애덤스(영국 주재 미국대사), 토머스 제퍼슨(프랑스 주재 미국대사)였다. 하지만 이 회담은 결렬되었다. 1785년에 이어 1796년에도 이슬람 해적은 미국 선박을 나포해 선원을 노예로 삼았다.  1797년 존 애덤스가 미국대통령(제 2대)이 되자 미국 정부는 국가 전체 예산의 20%에 해당하는 돈을 이슬람 해적에게 주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1801년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슬람 진영에서 요구하는 돈의 액수가 커지자 평화조약을 파기했다. 그리고 미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트리폴리의 파샤(지배자)를 처단하겠다며 함대를 출전했다. 미국이 세계 전쟁에 나선 시작이었다. 1803년부터 시작한 미국 함대의 트리폴리 공격은 무려 네 차례나 있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이 중동 지역에 자연스럽게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권력자의 내분 때문이었다. 1793년 알리 카라만리가 죽으면서 장남 하산을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셋째 아들 유스프가 맏형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다음 둘째 형 하메트를 추방하고 그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하메트는 이집트로 도망가서 미국 정부에 왕위를 찾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미국은 하메트와 함께 트리폴리로 진격했지만 유스프와 협상을 통해 평화조약을 맺고 전투를 끝냈다. 이후에도 미국 선박은 알제리 해적에게 여러 번 나포당했고, 1812년 미국과 영국이 전쟁을 시작해서 1815년 정전협정을 했다. 이후 미국은 1815년 알제리를 침략해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는다. 19세기 초부터 미국은 대륙의 서쪽으로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당시 영국령, 프랑스령, 스페인령 영토를 무력으로 빼앗거나 돈을 주고 매입하면서 땅을 확장했으며, 해군은 중동을 비롯해 유럽, 아프리카 등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시아 진출은 1844년 청나라와 불평등 통상조약을 맺었고, 1854년 일본과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은 1866년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온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 미국 선원을 처형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1871년 한국 군사작전, 미-한 전쟁, 조선 원정 등으로 부르고 있다.


3. 석유의 시작

미국은 19세기부터 중동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했지만, 중동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중동과 아프리카는 유럽 여러 나라가 식민지를 만들거나 천연자원을 약탈하고, 그보다 앞서서는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을 폭력으로 끌고와 노예로 팔았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1939년 석유개발권을 협의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나온 원유가 최초로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복잡하고 격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1932년 '사우디 왕국'을 건국하고 이븐 사우드가 초대 국왕이 되었다. 사우디는 미국이 정권과 나라의 안위를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1945년 2월에 수에즈 운하로 이어지는 호수에 미국 구축함 USS 머피호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와 이븐 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비밀 회담을 벌였고, 이후 지금까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동의 여러 나라-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리비아 등과 미국이 긴장 관계, 적대 관계를 반복했던 것과 달리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에서 가장 확고한 친미 국가로 존재한다.


4. 쿠데타가 남긴 것들

1901년 오스트리아의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시는 페르시아(이란)에서 원유 탐사를 시작했고, 영국의 지원을 받아 '앵글로 페르시아 석유회사(APO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이후 영국 국영 석유회사(BPC)가 된다. 1914년 영국 정부는 APOC 지분의 51%를 확보했다. 영국은 이란의 남쪽, 쏘련은 이란의 북쪽 지역을 점령해서 각각 채굴권을 확보했다. 이란 왕은 채굴권을 팔아 돈을 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란에는 영국, 쏘련, 미국 등 강대국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주둔했다.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사데크가 총리로 등장하면서 원유 개발을 국유화했다. 그러자 외세(영국, 미국 등)는 모사데크를 축출하려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하자 미국은 이란의 왕에게 접근해 모사데크를 해임하라고 압력을 넣지만 샤가 회피하자 이란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 공작을 벌인다. 이 사태로 이란은 심각한 분열이 발생하고, 나라는 폭동이 일어나고 내전이 발발하는 사태에 이른다. 미국은 정보기관과 군대를 동원해 이란의 정부를 전복했고, 마침내 모사데크를 몰아냈다. 


2부 1953~1984년, 미국이 만든 중동

5. 6일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쏘련은 연합군이었다. 쏘련은 독일의 침략에 맞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꾸는 가장 영웅적인 전투를 치렀고, 독일군을 궤멸했다. 전투는 쏘련이 치렀고, 전쟁물자는 미국이 상당 부분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가 재편되면서, 미국은 강대국 쏘련이 중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우려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쏘련이 중동 여러 나라들과 협력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중동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집트의 가말 나세르는 1952년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제를 폐지하고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대통령이 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요르단, 시리아 등에서 지지를 받았지만 영국과 미국은 반 나세르 세력을 지원해 각 나라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거나 내전이 일어났다. 

미국 석유회사와 유대인은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를 강하게 반대했고, 나세르는 쏘련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45년 이후 유대인 시오니스트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일부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했지만 한편으로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프랑스에서 핵무기를 도입했다.

1967년에 미국은 이스라엘에 막대한 전쟁무기를 제공했고,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집트를 선제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은 전투기로 이집트를 급습해 이집트 전투기 대부분을 폭격했고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의 공군도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공격했고, 불과 6일만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쏘련이 이스라엘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서야 겨우 전쟁은 끝났다.


6. 두 전쟁 사이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요르단에서 점령한 땅에 살던 주민을 쫓아내고 자신들이 차지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은 여전히 이집트가 쏘련과 가깝게 지낼 것이라 판단해 이집트의 영향력을 줄이고, 중동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죽고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고, 시리아에서 알 아사드가 권력을 잡아 반 이스라엘 전선을 구축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의 닉슨은 이집트에 휴전을 제안했지만 사다트가 거부하자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다. 쏘련도 이집트와 시리아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다. 중동의 전쟁 상황과 미국, 쏘련의 개입을 두고 보던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왕은 미국에 석유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다른 중동 여러 나라들도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세계는 심각한 석유 파동을 겪게 된다.

유엔은 이스라엘에 휴전하라고 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보였다. 그러자 쏘련이 무장하기 시작했고, 핵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보였다.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스라엘을 강하게 압박했고, 이스라엘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7. 1979년

미국은 이미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쓰라린 기억이 있었고, 중동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중동의 평화가 유지되길 원했다. 이 시기에 미국대통령은 지미 카터로 그는 이집트의 사다트와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를 미국으로 불러 비밀협상을 벌였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란에서는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혁명이 발발했다. 호메이니는 시아파 종교지도자로, 팔레비에 반대했다 쫓겨나 터키로 망명했으며 외국에서도 계속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이란으로 들여보내 이란 혁명을 일으켰다. 호메이니를 추종하는 학생들이 이란의 미국대사관을 습격해 미국인 인질 66명을 붙잡아 행진했다. 미국 정부는 미국에 있는 이란 자산을 동결하고, 이란에서 석유 수입을 중단했다. 인질들은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는 날 풀려났다.

이 해에 여러 이유로 쏘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다. 쏘련은 아프가니스탄의 권력자를 교체했지만, 반 쏘련을 외치는 민족주의 성향의 반란군(지하드)이 등장했다. 미국은 이 반란군을 지원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 빈 라덴이 이때 파키스탄에 들어와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8. 레바논 내전

레바논은 중동에서도 특이하게 이슬람보다 기독교 세력이 큰 지역이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원래 레바논 땅보다 더 넓은 지역-시리아 땅을 포함한-을 국경으로 설정했는데, 이것이 내전의 원인 가운데 한 요소로 작용했다.

여기에 초기에는 기독교도가 51%였던 지역이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30%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이슬람교도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종교적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1975년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베이루트의 교회를 습격해 기독교도를 살해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앞세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게릴라, 레바논까지 공격하도록 했다. 이스라엘,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두고 미국, 프랑스, 쏘련이 협상을 벌였고, 1982년 전투는 멈췄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원했고, 레이건은 이스라엘이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길 희망했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의 난민촌을 습격해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해 중동 지역을 분쟁과 전쟁 지역으로 만들었고, 쏘련도 시리아 뒤에서 반미, 반이스라엘 투쟁을 하는 아랍 민족주의 집단을 지원했다.


3부 1984~2013년, 새로운 질서와 싸움

1990년 이라크의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도 침공할 것을 두려워했고, 곧바로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 공격했다. 미국의 개입으로 중동 지역의 여러 나라가 반발하고,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에 맞서 이라크를 지원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연합국을 결성했는데, 중동지역에서는 시리아, 모로코, 이집트가 미국 편을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후세인을 반서구, 반미에 맞서는 영웅으로 칭송했다.

미국은 50만 명의 군인을 이라크에 투입했고, 그 전에 공중 폭격으로 이라크 전역을 폭격했다. 이라크군은 궤멸당했고, 후세인은 휴전협정에 싸인했다. 후세인은 전쟁에서 졌지만, 이라크에서는 반란군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끝까지 저항하자는 결의를 다진 강경파 집단이 반란을 주도했다. 하지만 후세인의 정부군이 반란군을 진압했고, 이때 많은 쿠르드족이 터키로 도망했다. 쿠르드족은 자기 민족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미국을 도왔다.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부는 오슬로에서 비밀 회담을 열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인정하는 협약을 했다. 하지만 하마스(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단체)는 이 협약을 거부하고, 대 이스라엘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고, 수단에서는 빈 라덴이 알카에다를 구축하고 있었다.

1998년 8월 빈 라덴은 케냐와 탄자니아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공격했다.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도 빈 라덴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미국 본토를 공격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미국의 클린턴은 성추문이 터지자 여론을 이라크로 돌렸다. 

2001년 미국에서 9.11 폭탄 테러가 발생했고, 미국은 빈 라덴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빈 라덴을 쫓는 한편,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을 체포, 처형했다. 이후 오바마 정부에서 빈 라덴을 추격해 끝내 빈 라덴도 사살했다. 

중동 지역의 분쟁과 내전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장한 면이 많다. 여기에 중동 지역의 복잡한 상황-종교, 인종, 국경 문제 등-이 겹치면서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석유가 나오는 지역이라는 특수성까지 결합해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도 시리아는 내전을 치르고 있으며, 같은 종교인 이슬람교도임에도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학살하고 있다. 종교적 극단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내전이라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터키, 러시아, 이스라엘 등 주변 국가들까지 끼어든 상황이다.

중동 지역에 언제 평화가 정착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너무 오랫동안 분쟁 지역이었고, 강대국의 먹이로 버려진 약소국가의 고통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도 '한국전쟁'이라는 참담한 경험을 이미 했으니,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것을 이 그래픽노블을 통해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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