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만화와 영화의 화학적 결합

-이동은, 정이용의 《환절기》, 《당신의 부탁》


만화는 영화보다 훨씬 오래된 예술형식이다. 영화는 현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탄생한 예술이지만, 만화는 원시시대부터 있었던 그림에서 나왔다. 현대만화의 시작은 19세기 초반이라고 하지만, 사람을 비롯해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과장, 축소, 비약, 간략화 한 이미지는 이미 그 자체로 만화적이다. 

늦게 출현한 영화는 서사에서 만화와 소설에게 빚지고 있는데, 그건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서사의 역사가 짧기도 하고, 서사의 다양성, 양적 측면에서도 영화는 만화나 소설을 따라가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영화의 탄생 이후 수 많은 영화가 만화와 소설을 원작으로 새롭게 해석되어 나왔으며, 이럴 경우 관객은 원작 만화(또는 소설)와 영화를 비교하거나 다르게 해석한 부분을 흥미롭게 느낄 수 있다.

영화가 특히 만화와 더 가까울 수 있는 건, 영화도 문학의 한 갈래인 희곡(시나리오)을 거쳐 스토리보드(만화)를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이미 서사(시나리오)를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가 스토리보드로 기능하기 때문에, 만화를 영화로 옮기는 것이 훨씬 쉽다.

그런 면에서 작가 이동은, 정이용의 작품은 만화의 영화화에 매우 친근한 작품들이다. 원작 만화의 글을 쓴 작가이자 두 영화의 감독인 이동은은 영화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한 작가여서, 이 두 원작 만화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영화적 관점으로 그려지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영화로 만들 때, 별도의 시나리오 작업이 거의 필요 없을 만큼 그 자체로 시나리오이자 스토리보드가 된다. 

'기생충'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도 학생 때 학보에 만화를 그렸고,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스토리보드로 옮긴 것을 보면, 만화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만화와 영화는 '스토리보드'라는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두 작품에서 영화는 원작 만화의 줄거리를 거의 비슷하게 따라가지만, 시간의 흐름을 조금씩 바꿔 놓았다. 만화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작동하지만 짧게 등장하는 내용이 영화에서는 생략되기도 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서사를 강하게 압축해 놓았고, 이것을 아주 조금씩 풀어놓으면서 독자(관객)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여백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이런 장치는 만화에서 장점이 된다. 어차피 만화는 정적인 예술이고, 칸과 칸 사이를 메우는 것은 독자의 상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화가 영화로 옮겨오면 상황은 달라지고, 달라져야 한다. 만화의 한 컷, 한 화면이 상징하는 의미는 영화에서 똑같이 반복하기 어렵다. 영화는 필름일 경우, 1초에 24프레임이 움직이고 있고, 대사와 음악, 효과음 등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만화 또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때로 성공하거나 실패하는데, 그건 원작의 성공 여부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영화는 자신의 언어와 문법이 있음을 의미한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만화 원작의 모티프를 보다 강렬하게 '영화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환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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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미영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미영의 아들 수현은 고등학생이고, 어느 날, 그는 친구 용준을 집으로 데려온다.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배경과 상황이 있지만,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미영은 외아들 수현과 함께 살고 있지만, 사실 그의 남편은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수현이 사고를 당하고 드물게 한국에 오지만, 그에게는 이미 필리핀에 다른 여자가 있다. 미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살이에 초연한 사람처럼, 위자료만 주면 이혼해주겠다고 말한다. 미영의 남편도 미안해 하기는 해도 미영의 제안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자기와 아들을 배신한 남편이지만 뺨 한 대도 때리지 못할 정도로 여린 심성을 가진 사람이 미영이다.

미영은 아들 수현이 교통사고로 코마 상태가 된 것이 용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용준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다. 미영이 놓여 있는 상황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다. 아들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까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그걸 모두 견뎌야 하는 미영은 누구보다 괴로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미영은 이 모든 상황을 이겨낸다. 그가 강한 사람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놓여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고통과 괴로움이 견딜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뀐다.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그건 곧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는 것이므로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미영은 남편을 놓아주고, 용준을 용서하면서 마음이 편해진다. 아들 수현이 동성애자라는 것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용준과 함께 한 시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었고, 마음이 움직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용준은 미영의 친아들이 아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용준은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부모가 불화하고, 결국 엄마는 자살하고, 아버지와는 혈연을 끊게 되고, 가족들과도 멀어지게 되는 경험을 한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성 정체성으로 가족 모두가 불행해지는 걸 보고 겪으면서, 그 모든 상황과 결과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현까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 상태에 놓이면서 용준의 죄책감은 커졌고,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하지만 용준은 자살보다는 다시 살아서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빚을 갚으려 한다. 그의 노력은 결국 미영의 마음을 움직이고, 용준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가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동기가 된다.

등장인물 가운데 미영 말고는 모두 남성이고, 미영의 남편, 아들 수현, 용준 등은 미영의 '타자'이자 미영의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이면서, 미영이 돌봐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미약한 존재들이다. 미영은 남자들을 돌봐야 하는 '엄마'이자 자기 자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운전도 배우고, 끊임 없이 사회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프로메테우스형 인물이다.

'엄마'는 불완전한 존재인 자식을 돌보면서 힘들고 괴롭기도 하지만, '자식'의 존재만으로 근원적 기쁨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미영은 미숙한 남자들을 돌보면서 그것이 단순한 고통, 괴로움이 아닌, 그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수현이 기적처럼 깨어나면서 미영의 삶도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온다. 

수현의 사고 이후, 수현과 용준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느낀 불편함도 수현이 깨어난 이후, 미영과 용준의 관계는 어느새 엄마와 아들의 관계로 바뀌고, 수현과 용준은 오히려 서먹해진다. 두 사람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열려 있다. 중요한 건, 미영이 아들을 하나 더 얻었다는 것이다. 불쑥 청년인 아들을 얻은 것처럼, 미영도 용준을 만나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진정한 '엄마'로 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신의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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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효진에게 시동생이 찾아와 죽은 남편과 전 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할머니와 살던 종욱은 할머니가 치매로 병원에 입원하자 오갈 데가 없어지고, 결국 종욱은 효진의 집으로 들어간다. 종욱은 생모를 찾지만, 생모를 만나서는 생모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한다. 종욱의 생모는 죽었고, 어릴 때 자신을 키워준 사람은 계모였다. 종욱도 자기가 찾는 '엄마'가 생모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린 자기를 두고 떠난 이유를 알고 싶었다고 말한다. 적어도 여섯 살의 종욱에게는 그 사람이 '엄마'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가족을 이루는 방식은 모두 우연처럼 찾아온다. 효진에게 종욱이, 종욱에게는 여자친구의 뜻하지 않은 임신이 그렇다. 이들은 혈연이 아니지만, 기꺼이 가족이 되기를 바란다. 효진은 죽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혈육은 아니지만 종욱을 받아들인다. 종욱의 상황에서 보면, 생모는 얼굴도 모를 때 죽었고, 기억하는 엄마는 생모가 아닌 계모였으며, 그 계모마져도 여섯 살 때 자기를 떠났다. 종욱의 아버지 즉 효진의 남편은 종욱을 자기 어머니에게 맡기고 효진과 결혼해 살았으니, 이 가족의 가장 큰 피해자는 종욱과 그의 할머니인 걸 알 수 있다.

종욱은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 자기를 버리고 떠난 계모를 어떻게든 만나고자 한 것도 생모가 아님을 알면서도, 어린 자신을 떠난 이유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려서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고아 의식은 평생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효진은 그런 종욱의 마음을 헤아리고, 종욱도 효진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종욱이 여자친구의 임신과 출산에 적극 개입하는 것도 그런 트라우마의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종욱이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출산한 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어렸을 때 종욱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연이겠지만, 효진이나 《환절기》에서 미영도 고등학생 남자아이를 아들로 받아들인다. 고등학생 청소년은 곧 성인이 되는 경계에 있다. 이들은 이미 성인의 세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성인 흉내를 내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미숙한 면이 많아서 자주 세계와 충돌한다. 어른들이 만든 강고한 세계 - 사회질서와 구조 - 에 저항하는 한편,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 하는 청소년은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프로락사스와 같은 존재다.

종욱이 여자친구가 낳은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려 하지만,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갓난아이의 입양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렇다. 현실은 냉정하고 무섭게 타산적이다. 종욱이 가진 낭만적 이상이 현실과 충돌하면서, 좌절하는 과정은 곧 그가 사회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자, 이상과 낭만이 깨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종욱에게 합리적 조언을 하는 효진과 자기 아이를 입양시키는 종욱의 여자친구는 오히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대응하는 능력이 있다. 무모하고 낭만적이지만 종욱은 '책임'이라는 의무를 다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건 자신의 트라우마도 있지만, '남성성'의 한 특징으로 보인다.

효진이나 미영이 의도하지 않은 '아들'을 만나고, 모자의 인연을 만들지만, 이들은 오래지 않아 다시 헤어져야 할 인연이거나 이미 따로 살고 있다. 혈육이든 아니든 가족도 '개인'의 집합이며, 독립해 살기 시작하면 가족은 분화한다. 효진이 종욱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때, 종욱이 곧 성인이 되어 독립할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두 작품의 주인공 미영과 효진은 처음부터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기에도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고,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들이닥쳤을 때, 그 상황을 거부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인다.

이 '수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여성성' - 이걸 '모성'이라고 표현하기는 애매하다 -의 발현이고, 다른 하나는 가부장사회 체제에 길들여진 여성의 순치된 모습이다. 이 두 상황을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형태로든 두 모습은 혼재되어 있어서, 여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영이 수현과 용준의 동성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용준의 아버지가 끝내 용준을 용서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된다. 용준의 가족은 용준을 버리지만, 미영은 용준을 아들로 받아들인다. 효진 역시 죽은 남편이 전 아내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아들로 받아들인다. 

'가족'은 피를 나눈 혈연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더 넓은 의미의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 가부장사회의 혜택을 직접 받는 '남성(아버지)'이 아니라, 오히려 그 체제의 피해자인 여성(엄마)이라는 점에서, 미래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유연한 '여성성'이 주도하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할 수 있다.

미영과 효진은 낯선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의 삶을 확장하고, 성장한다. 서사의 흐름만 보면 미영과 효진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듯 하지만, 그건 마치 물이 사물을 포용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감싸안는 것과 같다. 자연은 흐름을 거스르지 않듯, '여성성'이 가진 본성도 그런 것이 아닐까. 약하고, 가여운 존재를 포용하고 감싸안는 따뜻함을 통해 자기의 외연을 확장하는 유연함을 두 작품은 잘 그리고 있다.

만화나 영화의 서사는 다시 문학과 만난다. 우리는 칸으로 나뉜 그림(만화)과 움직이는 그림(영화)의 이야기를 보면서 감동하는데, 표현 형식만 다를 뿐, 서사는 기본적으로 '문학'이다. 즉, 프랑시스 라까생의 표현대로 문학은 '쓰여진 문학', 만화는 '그려진 문학'이고 여기에 영화는 '움직이는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동은, 정이용의 작품에서 문학을 느낄 수 있는 건, 서로 다른 형식에서 '문학'의 본질을 느끼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프랑시스 라까생(1998), 《제9의 예술만화》, 하늘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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