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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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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시간
넷플릭스 시리즈. 엄청난 작품. 강력 추천. 고작 4부작이지만, 시나리오, 연출, 배우들의 연기 모두 완벽할 뿐 아니라 드라마가 다루는 주제도 신선하다. 4부작이면서 한 편마다 독립적 서사가 있고, 완결성을 갖추면서 네 편 전체에 흐르는 거대한 이야기가 마지막에 맞춰진다.
열세 살 소년 제이미는 어느 날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게 체포된다. 완전무장한 경찰기동대가 문을 부수고, 총을 겨냥한 채 가족들을 엎드리라고 소리치고, 소년의 방으로 들어가 체포하는데, 소년은 겁에 질려 바지에 오줌을 싼다. 경찰은 매우 심각한 상황처럼 행동하는데, 고작 소년 한 명을 잡으려고 자동소총에 중무장을 한 기동대가 출동하는 장면은 누가 봐도 지나쳐 보인다.
1편은 소년이 체포되는 장면부터 경찰서에 연행되어 필요한 조사를 받고 임시 구금되는 과정까지를 그린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매 순간과 과정이 핍진하고 치밀해서 보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장면이 이어진다. 경찰은 위협적으로 행동하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강력범죄자를 대하는 메뉴얼에 따른 행동이었다는 게 드러나고, 소년을 체포한 이후 경찰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미성년이면서 범죄용의자인 소년을 대한다.
경찰은 강력범죄 용의자로 제이미를 체포했지만, 그가 미성년이라는 점을 감안해 곧바로 보호자를 붙여주고, 아버지가 모든 조사에 참석하도록 한다. 그리고 간호사와 변호사를 불러 제이미에게서 채혈하고, 변호할 권리를 보장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과장 없이 건조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보여지는 영국 경찰의 모습을 보면서, 인권을 먼저 생각하는 경찰과 이런 문화를 만든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면으로 보면, 영국 경찰이 한 행동은 지나치고 융통성이 없어 보인다. 고작 열세 살 소년을 체포하려고 경찰기동대까지 투입하는 건 누가 봐도 지나쳐 보인다. 그저 사복 경찰 두 명이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소년은 안심시키면서 경찰서로 데리고 와도 아무 문제 없을 걸로 보이는데, 너무 매뉴얼에 얽매여 행동하는 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하면, 미성년이라고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강력범죄를 대하는 경찰의 태도가 일관하지 않게 되고, 매뉴얼에 따르지 않는 체포 절차는 그 자체로 위법한 행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할 수 있다.
제이미의 가족은 국선변호사를 선택한다. 가족변호사가 없다는 걸 확인한 경찰이 제이미의 가족에게 제안하고, 가족이 받아들이면서 국선변호사가 오는데, 발 빠르게 도착한 국선변호사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수행하고, 제이미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입회해 도움말을 준다. 이때 국선변호사가 제이미의 가족에게 하는 말 가운데, 아무리 강력범죄 용의자라 해도 미성년자에게는 채혈이나 지문 채취, 신체 검사 등을 다 하지는 않는데, 이런 검사를 다 하는 걸 보면 경찰이 강력한 증거를 가졌다고 봐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경험 많은 국선변호사는 제이미가 미성년자로 보호받아야 할 권리를 잘 알고, 그가 받는 조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 지 이미 알고 있다.
제이미는 경찰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거나 부인하는데, 경찰은 구체적 증거를 하나씩 보이면서 제이미가 자백하도록 만든다. 인스타그램에서 오고간 제이미와 그의 친구들의 사진과 댓글들, 사건이 발생한 날 CCTV에 찍힌 제이미의 동선과 장면들이 하나같이 제이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지만, 제이미는 끝까지 모른다고 말한다.
결국 경찰은 CCTV에서 확보한 동영상을 제이미와 변호사, 동석한 제이미의 아버지 앞에서 공개한다. 그 영상은 충격적이면서 제이미가 자기 행동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제이미는 끝까지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 부인한다. 하지만 제이미의 아버지, 국선변호사는 그 장면을 보고 제이미가 한 행동이 돌이킬 수 없는 범죄라는 걸 분명하게 인지한다.
그럼에도 제이미가 범행에 쓴 흉기인 칼이 발견되지 않았고, 제이미가 '친구'라고 보이는 케이티를 살해한 '동기'를 알 수 없는 경찰은 제이미의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다. 제이미는 경찰서 유치장에 일시 갇히게 되는데, 제이미는 가족과 멀어지면서 두려움과 공포와 슬픔이 뒤섞인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감정은 제이미의 가족도 마찬가지여서, 부모와 누나는 큰 충격을 받고, 불과 열세 살 아이가 '살인 혐의'로 체포된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2편은 수사 담당 경찰인 배스컴 경위와 프랭크 경사가 제이미가 다니는 학교를 방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이미 구체적 물증을 확보했지만, 범행에 쓴 흉기인 칼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칼의 행방과 제이미가 저지른 범행의 동기를 알아보려고 학교를 방문한 두 경찰은 학교의 도움으로 제이미의 친구들을 만난다.
하지만 제이미의 학급이나 친구들에게서는 어떤 정보도 알아내지 못한다. 2편에서 두 명의 경찰이 제이미가 다니는 학교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단지 제이미의 친구들을 만나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는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제이미는 지역의 공립학교를 다니는데, 학교에서는 끔찍한 냄새가 나고, 학생들(청소년)은 끊임없이 떠들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선생들은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고, 학생들을 윽박지른다.
이런 모습이 마치 편집되지 않은 필름처럼, 롱테이크로 이어지며 학교 건물 곳곳을 끊이지 않고 움직이며 보이고, 선생과 어른에게 대들고, 모욕하는 한편 자기들끼리로 패거리를 지어 약해 보이는 학생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인다. 청소년들은 어른을 믿지 않는다. 선생도 어른이고, 부모도 어른이지만 그들 모두 청소년들의 시각에서는 자기들을 짓밟고, 억누르고, 억압하는 나쁜 존재들로 비친다.
학교에서 따돌림은 당연한 일상이고,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은 누구에게도 이런 고통을 말하지 못한다. 그런 내용을 어른들 - 선생님, 부모님 등 - 에게 말하면, 그 다음에는 더 큰 괴롭힘과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 배스컴 경위의 아들 애덤도 제이미가 다니는 학교에 다니지만 학년은 두 학년이 높아서 제이미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애덤 역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였지만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못)는다. 배스컴 경위와 애덤의 에피소드는 2편에서 잠깐 등장하지만 깊은 감동을 준다. 배스컴에게 애덤은 친자식이 아니었고, 청소년인 애덤과 친밀하게 지낼 기회가 없었다. 부자 사이였지만 늘 어색한 사이였던 배스컴과 애덤은 제이미 사건을 계기로 가까워진다.
배스컴이 학교에서 제이미의 친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얻으려 하지만 실패하는데, 그건 배스컴을 비롯한 어른들이 청소년 문화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애덤이 배스컴을 따로 불러 청소년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애덤이 알려주는 청소년 또래 문화는 제이미 부모들도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고, 배스컴도 애덤이 알려줘 알 수 있었던 내용이었다. 애덤의 이야기를 듣고 배스컴은 자신이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자식인 애덤에게 얼마나 소통하려 노력하지 않고, 무관심했는가를 깨닫는다. 배스컴이 하교하는 애덤을 기다려 함께 밥 먹자고 하는 장면, 애덤이 '중국집에 가, 거기 맛있는 바비큐 소스 있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자식이 있는 부모라면 가슴 뭉클한 장면이다. 아이들은 늘 성장하고, 그 자체로 훌륭하다. 다만 부모, 어른들이 아이들의 진심을,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청소년 시기는 길들지 않은 야생마처럼 목적 없이 질주하는 때이기도 하다. 생물학적으로도 호르몬 작용이 왕성하고,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중간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불안하고 두려운 시기라는 점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3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모노드라마다. 제이미는 '청소년 보호훈련센터'에서 지내고, 체포된 지 7개월이 지났다. 교도소는 아니지만 미성년 범죄자들이나 여러 검사를 통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사람을 수용해 상담과 교화를 하는 곳인데, 제이미는 이 곳을 '정신병원'으로 인식한다.
제이미는 정기적으로 상담을 하는데, 상담사는 임상 심리학자가 맡고, 상담 내용은 재판에서 판사에게 제출되어 판결의 근거로 쓰인다. 따라서 제이미가 하는 말과 행동은 매우 중요하고, 임상 심리학자는 제이미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제이미를 찾은 임상 심리학자 애리스턴은 이미 제이미를 네 번 만났고, 이제 다섯 번째 만남이다.
애리스턴은 제이미가 좋아하는 핫초코와 치즈샌드위치를 건네며 우호적으로 대한다. 애리스턴이 묻고, 제이미가 대답하는 형식이지만, 애리스턴이 하는 질문은 제이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제이미는 여전히 자기가 케이티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명백한 증거가 있어도 끝까지 그 사실을 부인하는데, 그건 제이미가 자신이 한 행동이라고 인정하는 게 두렵고 끔찍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애리스턴은 질문을 던지면서 제이미가 케이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제이미가 생각하는 여성의 의미, 이성을 대하는 태도, 제이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데, 자연스럽게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 제이미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버지와 관계가 어떤지, 아버지의 취미, 친구들과 지내는 일상까지.
청소년인 제이미가 이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이성이 있는지, 데이트는 했는지, 성 지식은 있는지, 이성과 성적 접촉은 어디까지 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묻는다. 제이미는 이런 질문들이 낯설고,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질문이라 당황하기도 하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나 자기가 모욕적이라고 생각하는 질문에 짜증을 폭발하기도 한다.
임상 심리학자 애리스턴은 보통 체구의 여성으로, 제이미가 위협적인 행동을 할 때도 침착한 모습을 보이지만, 제이미의 돌발행동과 위협을 보고 느끼면서, 제이미가 또래 여자에게 느꼈던 감정과 심리 상태를 미루어 짐작한다. 즉 평소에는 온순하고 평범한 소년이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주체할 수 없게 폭발하는 청소년의 이상 심리상태를 보이고, 제이미에게는 그런 과잉 심리를 자극한 계기가 있었다는 걸 대화를 통해 알아낸다.
2편에서 배스컴 경위가 아들 애덤의 이야기를 듣고 알아낸 것처럼, 제이미가 말하는 학교에서 따돌림 특히 이성(여성) 사이에서 80대 20의 법칙이 작동하고, 한 번 배제된 남자 청소년은 그 집단에서 영원히 배제된다는 그들 사이의 따돌림 문화와 제이미의 잘못된 판단이 결합해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걸 알게 된다.
제이미는 집에서나 학교에서 조용한 학생이고, 온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학생이지만, 그의 내부에서 들끓고 있는 욕망과 욕구, 불안한 정서, 집단 속에서 소외당하는 괴로움과 이성(여성)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이 못 생겼다는 가스라이팅으로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제이미 내면에서 자라는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태도, 폭력에 의지하려는 강압적 태도 등이 범행을 저지른 또 다른 동기라는 걸 상담을 통해 드러낸다. 제이미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임상 심리학자 애리스턴은 제이미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서, 제이미의 아버지에 관해 질문할 때부터 불편한 모습을 보인 제이미의 심리를 읽는다.
제이미가 드러내는 폭력성은 그가 보고 자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으로 알 수 있다. 제이미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가족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지만, 자주 화를 내고, 기물을 부수는 행동을 통해 폭력을 발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이미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폭력에 위축된 상태였고, 학교에서는 무시당하고, 이성에게는 배제되는 존재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복합적 심리 상태에서 자기를 무시하고 집단 따돌림을 주도한 케이티에게 관심을 가졌지만, 돌아오는 건 냉정하고 모욕적인 비웃음 뿐이었다.
4편은 제이미 가족의 이야기다. 다시 몇 달이 흐르고, 제이미는 곧 정식 재판을 앞두고 있다. 제이미의 아버지 에디 생일날이고, 에디의 아내 만다는 에디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한다. 하지만 에디의 차에 누군가 페인트로 '강감법'이라고 써 놓았고, 가족의 평온은 깨진다. 세 식구는 철물점으로 가서 페인트를 구입해 차에 쓴 낙서를 지우는데, 이때 철물점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이 에디에게 제이미와 가족을 응원한다며 힘내라고 말한다. 좁은 지역사회에서 제이미 사건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제이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주로 남성 청년들로, 이들은 '인셀' 문화가 80대 20의 법칙을 통해 80%의 남성들은 여성에게 소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여성들이 집단으로 남성을 따돌리는 문화에 분노하고 있다. 제이미는 그런 남성으로, 자신을 대신해 여성을 응징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제이미를 옹호하고 응원하는 것이다.
만다는 차라리 여기를 떠나 리버풀로 돌아가자고 에디에게 말하지만, 에디는 돌아가면 오히려 더 힘들고 나빠질 것이라고 말한다. 에디의 생일을 축하하려던 하루는 불쾌하게 시작하지만 가족들은 철물점을 다녀오는 차안에서 옛날 추억을 이야기하며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제이미가 전화해 유죄를 인정하겠다는 말을 한다.
운전하며 스피커폰으로 가족 모두가 듣는 제이미와의 통화는 곤혹스럽고 마음이 무겁다. 지금까지 무죄를 주장했던 제이미였는데, 그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제이미가 재판에서 유죄를 인정하면 - 인정하지 않더라도 - 최소한 몇십 년에서 최고 무기징역을 살아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 눈앞에 있다.
에디, 만다, 사라는 저마다 비통한 심정이지만 일상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할 계획이었지만 포기한다. 에디와 만다는 제이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가 커가면서 점차 자기만의 벽을 만들고, 자신의 세계에 부모가 간섭하거나 침입하는 걸 경계하며 분노한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에디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으며 자랐다고 말한다. 심지어 허리띠로 채찍처럼 맞기도 했다는데, 그래서 더욱 자신이 아이를 낳으면 절대 때리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에디는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물리적 폭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다의 눈에 에디는 제이미의 우상이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아들의 우상이라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이 바라는 그런 멋진 모습이 아니었을 때, 아버지도 평범한 사람이고, 부족한 인간이라는 걸 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린 아이라서, 설명할 수도 없을 때, 아버지도 절망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어떻게 말하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른다. 아버지가 되는 것도 처음이고, 어린 아들을 키우는 것도 처음이기에,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또는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에게 정서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에디도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그는 노력했고, 애썼지만 아들 제이미는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가 되었다. 에디는 스스로 부끄럽다. 잘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당한 폭력은 당연했고, 자신은 더 나은 아버지, 가장이 되려고 노력했다.
영국의 중하층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에디는 배관공이 되었고, 나름 성실하게 살고 있다. 그는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가장이 되려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하는 사람이다. 딸은 이제 대학에 들어갔고, 아들은 중학교에 다니고, 먹고 살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되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무난한 일상을 영위하는 에디의 가족이었지만, 아들 제이미가 살인을 저지르고 어쩌면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에디는 아들 제이미에게 더 잘 해주지 못한 걸 후회한다. 더 다정하게, 더 따뜻하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놀고, 이야기 하는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한 걸 후회한다. 그가 울음을 삼키며 흘리는 눈물에는 아들을 향한 진한 사랑과 통한의 피가 섞여 있다.
자식을 둔 부모라면, 특히 아버지라면 이 드라마가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몰입하게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봤다. 내가 지금도 아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과 마음 깊은 곳에 죄책감을 갖고 있기 때문일 수 있지만, 내가 아들에게 최선을 다했는지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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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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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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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2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작품. 2024년 11월 개봉이니 최신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영화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데뷔작이면서, 고전 걸작 영화인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다. 두 영화 모두 법정 영화이면서 12명의 배심원이 등장하고, 처음에는 별다른 의심 없이 유죄라고 판단했던 용의자에 대한 판단이 한 사람의 배심원이 제기한 의문으로 시작해 판단이 달라지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얼핏 보면 두 영화는 매우 비슷한데, 영화의 알레고리는 사뭇 다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는 배심원 가운데 누구도 용의자와 관련 있는 인물은 없다. 다만, 배심원 가운데 8번 배심원이 처음부터 용의자가 무죄라고 판단하고, 유죄를 의심한다. '배심원 #2'에서는 제목처럼 2번 배심원이 유죄 평결이 절대 다수인 상황에서 이의를 제기한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1957년에 개봉한 흑백 영화이고, '배심원 #2'는 2024년에 개봉한 영화로 무려 67년의 간극이 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에 등장하는 12명의 배심원은 모두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걸 볼 수 있는데, 1950대 미국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반면 '배심원 #2'에는 오히려 백인 남성이 소수자로 등장한다. 여성, 흑인, 아시아인이 고르게 등장하고, 배심원장도 경험이 많은 여성이 맡는다.
두 영화는 매우 비슷한 형식을 보여주지만, 주제는 사뭇 다르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배심원이 고민하는 단 한 가지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을 때는 피고에게 유리하게 판결해야 한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로 정의할 수 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피고는 18살 멕시코인 청년이다. 즉, 백인 주류 사회에서 백인들이 유색인종이자 가난한 나라에서 온 청년을 단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고, 그들의 선택에 따라 18살 청년은 죽거나 살거나를 선택당하게 된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피고인 청년은 잠깐 모습을 드러낼 뿐, 그의 존재는 흉기로 아버지를 살해한 용의자로만 그려지고, 다른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 '배심원 #2'에서 피고인은 비가 내리는 늦은 밤, 술집에서 싸우고 먼저 나간 여자 친구를 뒤따라가 살해한 남자 친구이면서, 과거에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지른 품행이 나쁜 청년으로 그려진다.
'배심원 #2'에서 배심원들은 재판에 참여하며 피고인의 과거를 듣는다. 담당 검사는 다가온 선거를 통해 다시 선출되기를 바라고 있어, 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내야 하는 부담이 있다. 검사는 피고인이 여자 친구를 살해한 정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술집에 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이 싸우고 나가는 장면을 지켜보았고, 어떤 손님은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어 놓은 증거가 있어, 유죄의 근거가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피고의 변호인(국선변호인이다)은 검찰이 구체적, 물적 증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며, 오로지 정황 증거만으로 피고를 살인범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항변한다. '증거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현대 법정에서 물적 증거가 없이 오로지 정황 증거만으로 살인 행위가 인정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사례가 있다. 한국에서도 물증 없이 정황 증거만으로 살인 범죄를 판결하고 유죄를 선고한 재판이 있었는데, 그때의 정황은 '상식'을 가진 평범한 시민이라면 100% 동의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정황 증거라서 가능했다.
반면 '배심원 #2'에서의 정황 증거는 매우 모호하다. 폭우가 퍼붓는 저녁 시간에 비를 맞으며 술집에서 나간 여성이 도로를 걸어가고 있었고, 그날 밤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이틀 뒤 도로 옆 개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또한 그 여성이 술집 밖으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의 남자 친구가 여성을 따라 나가는 걸 많은 사람이 보았고, 밖에서 두 남녀가 싸우는 장면, 여성이 길을 따라 걷는 장면, 남성 역시 그 뒤를 따라가는 장면이 영상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 정황만으로도 검사는 피고인을 살인범으로 단정한다. 배심원 모두 물적 증거가 없어도 정황 증거만으로 피고인을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배심원 #2'가 '12인의 성난 사람들'과 다른 지점은 배심원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을 거라고 보이는 내용이 있어서다. 2번 배심원 '저스틴'은 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출산을 며칠 남기지 않은 만삭의 임산부 아내와 살고 있다. 그는 한때 알콜중독 상태였고, 중독에서 벗어나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는데, 그가 배심원으로 참여한 사건이 일어난 날, 같은 장소의 술집에서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술을 주문하고 앉아 있었으며, 여성과 남성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술집을 나와 빗속을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과정에서, 그는 운전하다 둔탁한 충격을 받고 차를 멈추지만, 사슴과 부딪쳤다고 생각하며 찌그러진 자동차를 수리한다. 그의 아내에게도 사슴과 부닥쳤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저스틴'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기 차에 부닥친 '무엇'인가가 사슴이 아니라, 술집에서 먼저 나간 여성이 아닐까 의심하고, 죄책감을 갖는다. 하지만 저스틴은 자기 눈으로 여성이 차에 치었거나, 자기가 여성을 쳤다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았기에, 의심을 하면서도 확신하지 못한다.
'저스틴'은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이다. 도덕적, 윤리적 기준이 평균 또는 그 이상이며,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좋은 사람이고, 양심에 위배되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다. 그는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변호사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고 법적 조언을 얻는다. 배심원의 평결 논의에서는 피고인이 진짜 범인이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는데, 저스틴은 무죄 추정의 원칙과 물적 증거의 불충분한 조건 등을 내세워 피고인이 진짜 범인이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스틴의 주장은 충분히 합리적이고, 타당한 논리이며, 배심원으로 올바른 태도로 보인다. 다만, 저스틴의 태도는 복합적 층위를 갖는데, 자기의 양심을 속일 수 없다는 내면의 목소리, 진짜 범인은 피고인도, 자신도 아닌 제3자일 수 있다는 판단, 자기가 저지른 범죄 행위를 합리화 하려는 모순적 태도 등이 다 포함되어 있다.
배심원단이 평결을 쉽게 내리지 못하면서, 재판은 기일이 늘어나고, 지방 검사 선거가 촉박한 상태에서 검사는 최대한 빨리 평결을 판단해 달라고 요청한다. 배심원단은 예외적으로 범행 장소를 답사하고, 배심원단 가운데 형사로 퇴직한 사람은 따로 증거를 수집하면서, 이 살인 사건이 사람 대 사람의 살인 사건이 아니라, 사망한 피해자가 어떤 차에 치인 뒤 유기된 사건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된다.
수집된 증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알게 된 저스틴은 갈등한다. 하지만 물적 증거들이 있어도, 그 증거들이 결정적으로 저스틴이 뺑소니를 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으며, 사망한 피해자가 어떤 과정으로 죽게 되었는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피고인은 검사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과거 행동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이번 여자 친구 사망 사건에 대해서는 절대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피고인의 태도를 보는 관객은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감옥에 갇힌 피고인이 여성을 살해하지 않았다면, 그 여성을 살해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여전히 감옥에 있는 용의자가 1순위이며, 배심원인 저스틴은 자기가 경험한 사건 당일의 경험에 근거해 자신의 범죄를 의심하는 상황이고, 이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사람이 범인일 수 있다. 즉 여성의 살해 사건에서 경우의 수는 세 가지가 되며, 지금 누구도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때 배심원이 해야 할 결정은 사건과 직접 관련 있는 용의자에 국한하므로, 두 가지의 경우 - 저스틴과 전혀 알 수 없는 사건이 있을 거라는 상황 - 는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결국 증거의 헛점을 찾아 용의자가 무죄라는 걸 입증하면서 배심원 사이의 날카로운 공방을 마무리하는 반면, '배심원 #2'에서는 배심원들 사이에서 논쟁이 오가면서도 결국 평결에는 합의한다. 여기서 배심원 저스틴이 갖는 개인적 양심의 문제와 함께 형사재판의 문제점을 함께 드러낸다. 피고인이 유죄 평결을 받는 결정적 이유는, 그가 여자 친구를 살해했다는 완벽한 증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살았던 과거의 행동이 원인이 된다. 즉, 어떤 범죄 용의자가 중요한 사건에서 범인으로 체포되고, 용의자로 지목되었을 때, 그 사건의 직접 증거가 없을 때, 그 사람의 과거 행적이 그의 현재를 규정하게 된다.
'배심원 #2'에서도 배심원들은 피고인의 과거 행적을 알게 되고, 그가 반사회적 태도와 행동을 했다는 것만으로 적개심을 갖는다. 이건 실제 범죄와 직접 관련이 없지만, 배심원의 평결에 결정적 단서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모두 묵인하면서도 인정한다. 우리가 '저스틴'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저스틴이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높은 확률로 범죄가 일어났던 그날 밤에 있었던 사고를 자백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용의자는 피해 여성의 남자 친구와 저스틴 두 사람이 될 것이고, 사건은 보다 폭 넓은 시각으로 전개되어, 사건의 실체가 입체적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저스틴은 오늘 내일 출산할 아내가 있고, 그 전에 이미 저스틴 부부는 쌍동이 아이를 잃었다. 부부에게 지울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과거가 있고, 지금 새로 태어날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나 부부의 지난 슬픔과 괴로움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누구도 저스틴에게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경찰에게 자백하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저스틴은 스스로 자백할 수 있을까? 그런 가운데 지금 체포되어 재판받는 살해 또는 사고로 죽은 여성의 남자 친구가 범인으로 확정되어 평생(무기징역) 감옥에 갇혀 살아야 하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모든 상황은 딜레마다. 피고인 자신이 살해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누구도 믿지 않고, 저스틴은 그날 밤 차에 무언가 부닥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물체가 죽은 여성이었는지, 사슴이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백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심지어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확신하고 기소한 검사까지도 마지막 평결에서 전혀 기뻐하지 않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건 검사가 판단하기에도 물적 증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정황 증거로만 살인 범죄의 범인을 확정했다는 걸 인정하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죄책감으로 마음이 불편하다는 걸 드러낸다.
사건의 실체가 모호하고 객관적 증거가 없을 때, 양심은 찔리지만 앙금을 남기며 현실을 외면해야 하는 경우는 누구나 겪는다. 평범한 사람도 하루에 여러 번 거짓말을 한다는 통계가 있다. 이때 거짓말은 의도했거나 악의적으로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소통의 방법으로써의 거짓말이다. 즉, 가족, 동료, 이웃, 지인 등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자연스러운 태도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저스틴이 겪는 갈등은 어쩌면 지나친 기우일 수 있다. 진짜 범인은 죽은 여성의 남자 친구이며, 그는 법의 심판을 받고 자기가 한 행위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양심을 가진 사람은 사건이 일어난 날, 바로 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괴롭고 두려울 수 있다. 그건 피고인이 만에 하나, 진짜 범인이 아닐 때, 죄도 없이 억울하게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 교도소에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온전히 누명으로 수 년, 수십 년 감옥에 갇혀 지내는 사람이 매우 많다는 통계가 있고,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는 사람도 많다. 현대의 형사 재판에 모순이 많다는 건 당연하고, 모든 나라에서 인종 차별, 성 차별, 돈과 권력의 여부에 따라 범죄의 유무, 형량의 높낮이가 달라지는 세상이기에,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경찰, 검사, 판사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다는 사실을 안다. 배심원들도 그 사실을 알지만, '때론 진실이 정의가 아니라는 걸 안다'고 말하고, 생각한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정의'를 선택할 가능성은 낮아지고, 심지어 '정의'를 외면하고 다수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선택하는 일도 발생한다. 다수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누군가 '개인'은 무고한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하고, 스티븐 킹의 소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처럼, 16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며 마침내 탈옥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배심원 #2'에서 저스틴의 집을 찾아온 검사의 얼굴 표정과 저스틴의 표정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지난 사건의 재판, 재판의 종결은 모두 하나의 과정이며,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라고 말하는 아주 짧은 장면이 영화 전체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진실은 알 수 없고, 정의는 구현되지 않을 것이며,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다수의 판단이 옳을 수도, 그릇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어 억울하게 죽어갈 수도 있다. 세상의 모순을 합리화 하자는 게 아니라, 그런 모순과 불합리에서 우리가 애써 노력해야 할 객관적 대안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이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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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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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주의란 무엇인가 - 짧은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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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주의란 무엇인가 - 짧은 버전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다 보면 시간이 흘렀어도 호기심 생기는 책이 가끔 있다. 이 책 '포스트식민주의란 무엇인가'를 보고, 꽤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읽어보니 역시 읽는 즐거움이 있다. 90년대 초에 '포스트모더니즘'이 한창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당시 세계 정세는 '쏘련'이 붕괴하면서 제국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나 세계 질서가 '팍스아메리카'로 재편되던 시기였다. 이때 공산주의 제국 쏘련의 해체는 당연하게 여겼지만, 정작 마르크스가 정의한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제국인 '미국'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비판이나 반체제적 행동이 보이지 않았다. (있었다 해도 극히 미미했을 정도라고 봐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기존 서구 문명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비판적 관점이라는 점에서, 서구 사회를 분석했던 이론적 틀로 쓰인 '구조주의' 역시 비판 대상이었고, '포스트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즉, 서구 사회가 쌓았던 근현대 문명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구조주의'가 있다면, 제1세계(중세 이후 현대까지 제국을 이룬 국가들)를 제외한 국가들이 제1국가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국가 모든 영역을 장악당하고 피압박 상태에서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 동안 억압, 착취, 강제당했던 상황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가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이다.
이때 분석의 주체는 당연히 '피압박자'가 된다. 하지만 '피압박자(피해자)'가 과연 압박의 주체(가해자)를 온전히 해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데, 이 문제를 다룬 '가야트리 스피박'은 '하위 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에서 '하위 주체' 즉 억압된 주체는 그람시가 주장한 '종속 계급'이자 통상적으로 '열등한 계층'이라고 정의하고, 이들이 가해 집단의 행위와 작동 원리를 완벽하게 분석, 해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식민의 경험을 가진 국가와 국민은 '포스트식민성'을 통해 자신들이 겪었던 억압의 본질에 관해 분석, 해석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프란츠 파농'과 '간디'를 대표적 인물로 볼 수 있다. 물론 간디의 '비폭력' 운동은 실패했고, 그가 가진 한계는 분명하게 나타났다. '프란츠 파농'은 안타깝게 일찍 사망했지만, 그가 정신과 의사로, 국가 또는 민족 단위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분석했다.
포스트식민주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사용하는 보편적 용어의 개념은 완전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휴머니즘'이 인류 보편적 '인류애'라고 해석하지만, 식민 상태에 놓인 민중과 노예(흑인 노예가 대표적이다)의 시각에서 '휴머니즘'은 폭력의 주체가 말하는 그들만의 '인류애'일 뿐이다. 결국 포스트식민주의는 기본 담론으로 보면 자본주의 비판 이론과 교집합한다. 제1세계가 착취하는 대상은 국가 폭력이 작동하는 방식이고, 자본주의는 개별 단위에서는 자본가-노동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착취이며,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국가가 제국주의로 발전하면서 국가 단위의 착취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포스트식민주의 자본주의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로 볼 수 있다.
한국도 세계의 자본 흐름으로 볼 때,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주권을 뺐긴 경험이 있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통상조약'이라는 이름은 외세가 침략하면서 그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협약을 의미하며,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 자본에 포획되어 서구 자본을 적극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들의 힘을 키워 주변 국가를 침략했다.
한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80년이다. 우리는 해방 두 3년 동안 미군정의 통치를 받았고, 뒤이어 민족끼리 갈라져 전쟁을 했으며, 수백 만 명의 국민이 죽었고, 국토가 완전히 폐허가 된 상태에서 불과 80년만에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인류 역사에서 한국이 유일하며, 앞으로도 나오기 거의 불가능한 역사적 사례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해방 이후 독재 권력이 30년 가까이 지배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 내부의 '포스트식민성'에 관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해방이 되었어도 여전히 지배 권력은 식민지배국이었던 일본을 위해 일했던 자들이어서 식민성에 관한 비판적 관점보다는 오히려 식민성이 유지, 강화되는 측면이 있었다. 식민의 경험은 집단의 의식 속에 깊게 자리 잡았고, 지식인들이 식민성을 해체, 분석, 비판하는 과정을 거쳐 대중에게 식민성의 부당함을 널리 알려야 했음에도, 한국에서는 식민성에 대한 비판이 약하게 작동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런 포스트식민성 즉 식민지성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채로 세계 최고 국가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 최고'의 의미는 단지 경제적 발전에만 있는 건 아니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겪으면서 한국 문화 전체가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K로 시작하는 모든 분야에서 세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우리가 경제적 성과를 이루고, 선진국 반열에 오르면서, 국민의 삶이 극적으로 향상된 것에서 시작한다. 경제적 풍요는 우리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다른 나라들과 대등하다는 인식이 집단(국민)에 자신감을 주었다. 앞뒤가 바뀌어 나타나기도 하는 현상으로, '한글'의 우수성에 관한 이야기가 K 즉 '한류'와 함께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K-한류를 누리는 바탕에는 '한글'이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외국에서 '한글'의 존재와 의미를 알기 어려운데, 우리 경제가 성장하고, 90년대부터 꾸준히 K 문화가 한국 바깥으로 퍼져나가면서 점차 '한글'의 존재와 의미를 외국 사람들도 알기 시작했다. 그건 한국이 1997년 외환 위기를 겪고, 그 과정을 극복하면서, 김대중 정부에서 광케이블을 전국에 실핏줄처럼 설치하자 PC방이 생기고, 마침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나오면서 한국이 '스타크래프트'의 최대 활성국이면서 수혜국이 되었다. 그렇게 인터넷의 발달, 민주정부의 지원, 코로나 팬데믹 때 세계적 OTT 넷플릭스를 타고 전세계에 퍼져나간 한국 드라마, 음악, 영화들이 K 문화가 세계에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은 '포스트식민성'에 관한 논의를 진지하게 집단으로 하지 않았지만,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적극적 활성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엄청난 문화 잠재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자연스럽게 '포스트식민성'을 극복했다고 본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창의성, 예술성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고, 우리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에 젖어 있었던 걸로 생각한다. 우리(제3세계)가 스스로를 '오리엔탈리즘'으로 바라보는 게 바로 '포스트식민주의'에서 주체가 스스로를 '대상화' 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분명 피해자인데, 가해자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봤던 것이다.
돌아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 이후 -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제외하고 - 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는 정부에서 한국은 꾸준한 경제 성장과 함께 K 문화 전반이 매우 가파르게 성장했다.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이 세계 1위를 하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그 해 세계의 모든 영화상을 휩쓸었던 건 결코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특히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한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을 확인했다.
한국이 K-방산, K-조선, K-항공우주 같은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여전히 불균등과 불균형한 발전을 하고 있고, 불안한 요소가 많이 보인다. 한국은 불과 80년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대 선진국으로 급성장하면서 부작용도 많지만, 한국인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사실에 매우 자부심을 갖는다. 이건 우리 부모, 조부모 세대가 겪은 식민지의 기억과 불행을 자식 세대에서 훌륭하게 극복했다는 뜻이다.
수 많은 제3세계는 지금도 '포스트식민주의'에 관한 구체적 논의가 필요하고, 시간이 흘렀어도 '포스트식민성'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라도 많다. 한국은 '포스트식민주의'와 관련해 가장 큰 문제는 '분단 체제'다. 남북 분단의 직접 원인은 2차 세계전쟁 이후 발생한 '냉전'의 결과로, 미국과 쏘련의 이념 전쟁을 대리한 국지전의 성격이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민족과 나라가 궤멸하고, 분단 체제로 오랜 시간 적대적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다른 나라가 겪지 못하는 '포스트식민성'을 한국은 특별한 형태로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발생하는 부정적인 사건들, 권력과 엘리트 집단의 범죄, 왜곡된 사교육 문제, 특정 종교 집단의 부패와 반지성 행위 등 사회의 어두운 면이 나타나는 건 우리가 '포스트식민성'을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증거라고 본다. 과거 독재 정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행동으로 드러냈지만, 이후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확보된 다음에는 개인의 욕망에 충실한 반응을 보였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예가 대표적인데, 이후 박근혜, 윤석열을 선출한 건 우리가 가진 '포스트식민성'이 최악의 형태로 발현한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한편으로 '포스트식민성'을 극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최악의 '포스트식민성'을 드러내는 모순된 행동을 하는데, '포스트식민성'의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고, 그 뿌리에서 자란 전근대적 피식민주의자들이 친미, 친일을 부르짖는 집단과 개인이고, 권력을 사유화 하고, 독재의 향수에 집착하는 엘리트 집단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포스트식민성'을 극복하려면 이런 집단을 온전히 해체하고, 소멸시켜야 한다.
우리가 '포스트식민성'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면, 온전히 민중(국민, 백성, 민초, 인민, 시민 등 어떤 단어를 써도 좋다)의 역량을 바탕으로 스스로 극복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포스트식민성'의 잔재는 기득권 세력, 권력 집단, 부르주아 엘리트 계층의 발생과 유지 과정에서 그들이 친일, 친미 집단으로 자발적으로 변신하고, 권력과 부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배, 엘리트 계층은 '포스트식민성'을 유지하는 게 그들에게 이익이 됐지만, 기층 민중에게는 '포스트식민성'이 족쇄로 작동하고 있었기에, 기득권 세력과 갈등, 대립, 투쟁하면서 '포스트식민성'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포스트식민성'을 극복했다는 객관적, 물적 조건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현상은 억압자(가해자)였던 일본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각종 통계 수치에서 여전히 세계 5위권의 선진강대국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 일본과 현재 일본은 사뭇 다른 걸 알 수 있다. 일본은 한때 아시아 국가 전체 GDP의 약 60%를 차지한 때가 있었다. 또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60년에서 70년대에 가장 큰 경제적 격차가 있었고, 이때 일본은 경제 지표에서 한국보다 약 40배 이상 앞서 있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가는 일본이었고, 일본은 경제 대국은 물론 문화 산업에서도 서구에 널리 알려졌다. 일본은 2차 세계전쟁에서 패전국이었지만 같은 패전국인 독일처럼 많은 걸 잃지 않았고, 미국의 지원으로 빠르게 성장했으며,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전쟁 특수로 경제 호황의 발판을 만들고, 도쿄올림픽 이후 빠르게 경제 성장을 이룬다.
일본은 16세기 이후 서구 국가들에 의한 개방과 교류로 발 빠르게 근대화를 이루었고, 두 번의 결정적 판단 - 16세기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통한 무기 수입 및 교역, 19세기의 유신 - 을 통해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 국가로 발전했고, 이후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국가를 정복했다. 당연한 결과로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했으며, 다른 제국주의와는 다르게 '군국주의'이면서 '제국주의'인 국가로 변신하는데, 이는 일본의 역사에서 무사 집단이 지배 집단이었던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지역 방위의 전초기지로 여기고, 최대의 미군 기지와 함께 일본을 공산주의 국가와 대결하는 동맹, 파트너로 대우했다. 일본은 몇 가지 조건 - 1억 명 이상의 인구, 태평양에 인접한 국토, 천황 중심의 지배구조 등 - 에서 미국이 아시아의 대리인으로 내세우기 좋은 조건을 갖췄고, 일본은 미국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가파르게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렇게 80년대까지 초고속 성장을 이루면서, 마침내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이때 일본은 미국 GDP의 68%까지 도달하는 거대한 몸집이 되었다.
미국은 턱밑까지 쫓아온 일본을 견제하려고 미국 달러와 엔화의 환율을 조정하는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의 가치를 낮추고, 엔화의 가치를 높이는 협상을 했다. '플라자 합의'에 참여한 국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다섯 나라였다. 이 협상을 통해 엔화 가치는 두 배(250엔에서 120엔)로 커졌고, 일본은 대외적으로는 수출 경쟁력이 낮아지는 한편, 국내에서는 '엔고 시대'를 맞이하면서 경제를 살리는 방안으로 '양적 완화' 즉 돈을 많이 풀어 통화량을 늘리는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은 주로 부동산, 주식 등으로 몰리면서 일본의 부동산 자산이 급등하고 90년대 이후 '버블 경제'가 꺼지면서 내리막 길을 걷게 된다.
한국은 일본과 비교해 거의 모든 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졌지만, 높은 교육열, 저임금 노동-경공업에서 중공업-첨단 산업으로 이행, 외래 문화의 수입에서 자기 문화를 생산하는 문화 생산국으로 변신 등 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한국은 독재를 겪으면서 민주주의를 만드는 방법과 과정을 스스로 터득했으며, 배고픔과 가난의 고통을 겪은 부모 세대와 풍요로운 중산층의 삶으로 시작한 청년 세대가 공존한다.
한국이 빠른 시간에 경제 성장, 문화 발전을 이룬 밑바탕에는 '한글'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국민 문맹율이 0%대에 수렴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글'은 그만큼 배우기 쉽고, '한글'로 쓴 글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한국의 산업 발전에서 고급 노동자를 생산하는 과정에 '한글'이 필수적 요소였다는 사실은 대부분 간과한다.
일본이 미국의 기술 하청국가로 출발한 것처럼, 한국도 처음에는 일본의 기술 하청국가로 시작했지만, 점차 독자적 기술을 확보하면서 일본과 기술 경쟁을 할 정도에 이르렀다. 자동차를 비롯한 조선, 항공, 중공업 분야 등 실물 경제의 발전도 놀랍지만, 한국이 가진 '소프트 파워' 즉 문화 산업의 힘은 오히려 실물 경제보다 더 파장이 크고 오래 간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대중 정부 때, 일본 문화 시장을 개방한다는 정부 발표에 반대 여론이 훨씬 많고 강했다. 그때까지 미국, 유럽 등의 대중 문화를 수입하는 건 아무렇지 않게 여겼지만, 일본 대중 문화는 극렬하게 반대했는데, 그건 일본 제국주의와 우리의 식민지 경험에서 비롯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 정부는 일본 문화를 개방했고, 결과는 싱겁게 드러났다. 일본 문화에 빠져 허우적거릴 줄 알았던 한국인은 오히려 일본 문화에 관심이 적었고, 일부 분야(애니메이션 등)에서 취미를 갖게 되는 사례가 있을 뿐이었다.
반대로, 한국의 대중 문화가 일본으로 스며들면서, 일본은 그동안 전혀 몰랐던 한국의 대중 문화를 보고, 들으면서 충격을 받는다. 일본에서 '한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 상품이 2002년에 방송된 '겨울연가'인데, 그 전에 1995년에 '신바람 이박사'가 일본 소니뮤직을 통해 일본으로 진출하면서 엄청나게 성공한다. '겨울연가'는 일본 중년 여성의 트라우마를 건드렸고, 중년 여성들이 한국 대중 문화 특히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기 시작하면서 '한류'는 점차 일본에서 서서히 확산한다.
지금 일본 기성세대가 가장 큰 충격을 받는 사건은, 한국 대중 문화가 일본에 깊게 스며든다는 정도가 아니라, 일본 청소년,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한글'을 배우려는 열풍이 불기 때문이다. 일본의 기성세대는 한국을 여전히 가난한 나라, 못 사는 나라, 일본에게 지배당한 나라로 기억하지만, 30대 이하는 그런 우월감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90년대 이후 한국은 잘 사는 나라, 다양한 문화 산업이 성공한 나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 청년들이 '한글'을 자발적으로 배우려는 건 한국의 드라마, 영화, 음악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없는 정서적, 문화적 풍요로움과 고급함, 세련된 이미지가 한국에는 있다. '문화'는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기에 한국에서도 일본 문화를 받아들여 누리는 건 당연하듯이, 일본에서 한국 문화가 스며드는 현상은 일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한글'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타났다. 이건 한국이 '포스트식민성'을 극복한 뚜렷한 증거가 된다.
김구 선생님이 말씀대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는 문화강국의 꿈을 지금 우리가 이루고 있다.
'포스트식민성'을 극복하는 건 경제를 필두로 국방, 스포츠 등 다양하지만 가장 큰 힘은 역시 문화의 힘이다. 한국 문화가 세계에 널리 퍼질수록, 특히 우리를 강압으로 지배한 일본에 한국 문화가 깊게 스며들수록, 우리는 '포스트식민성'을 극복하고, 역사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제3세계'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스스로 '포스트식민성'을 극복하고, 경제, 문화, 예술의 독립을 이룬 보기 드문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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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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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의 고양이 - 마츠모토 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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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의 고양이 - 마츠모토 타이요
천재작가 마츠모토 타이요는 그의 최근 작품 '루브르의 고양이'로 두 번째 '아이스너상'을 받았다. 루브르 박물관에 사는 고양이들과 그곳에서 일하는 가이드, 학예사, 복원사, 경비원 등의 인물이 서로 인연을 맺으며 그림과 개인의 삶이 깊은 관계를 맺는 이야기다. 고양이들이 종종 의인화 하는 장면을 보면, 이 작품은 주인공 고양이 '눈송이'의 성장 드라마이면서, 헤어진 가족에 대한 신화적 해석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의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회화가 등장하는데,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하지 않는 그림이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림이다. '루브르의 고양이' 책 앞부분에 두 페이지로 원화를 사진으로 옮겼는데, 이 그림은 여느 그림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사랑의 신의 죽음'이고, 작가는 '앙리 르랑베르'인데, 또 다른 이름이 등장한다. 이 그림에 개입한 또 한 명의 작가는 '앙뚜안 카롱'이다. 하나의 작품에 두 명의 작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건 어딘가 석연치 않다.
만화에서 세실은 루브르 박문관 가이드로 일한다. 가장 인기 많은 '모나리자'를 비롯 많은 작품을 관람객에게 설명하는 일인데, 그는 아버지가 갑작스레 병을 앓게 되면서 아버지를 간호하려고 다니던 학교(보자르 : 프랑스 국립미술학교)를 마치지 못한다. 이후 세실은 학업을 마치지 못한 걸로 보인다. 그는 미술 분야를 공부해 대학에 남거나, 미술관, 박물관 등에서 학예사로 일하거나 그림 복원사로 일하는 등 계획이 있었겠지만, 그는 루브르 박물관 가이드로 일한다. 세실의 내면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이 있겠으나 현실을 차분하게 살아간다. 세실은 루브르 박물관을 떠나 규모는 작지만 전문적인 미술관에서 일하고 싶어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고, 그는 약간의 실망감을 간직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마르셀은 무려 50년을 근무한 노인으로, 그의 증조할아버지도 루브르에서 복원 목수로 일했던, 루브르와 인연이 깊은 노인이다. 마르셀은 어릴 때부터 간직한 비밀이 있는데, 그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비밀을 세실에게 털어 놓는다. 자기 누나 아리에타가 어릴 때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였다. 마르셀의 이야기는 누구도 믿기 어려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세실은 마르셀의 말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는 루브르가 소장한 모든 회화를 담은 도록을 마르셀에게 건넨다. 그동안 마르셀이 누나가 들어간 그림을 발견할 수 없었던 건, 그 그림이 전시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그림은 도록에 실려 있었고, 그림 제목은 '사랑의 신의 죽음'이었다. 세실은 이 그림의 행방을 사무실에 문의했고, 그림은 복원 작업을 하려고 복원사 샤를 드 몽바롱의 작업실에 있다는 걸 알아냈다. 세실은 샤를 드 몽바롱의 작업실을 찾아간다. 몹시 까다로운 성격의 몽바롱은 약속 없이 찾아온 세실을 예외적으로 만나는데, 알고보니 예전 '보자르'에서 몽바롱이 교수로 회화 복원 강의를 할 때 세실이 학생이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세실은 '사랑의 신의 죽음'을 보고 싶다고 말하고, 루브르의 야간 경비원 마르셀의 사연을 몽바롱에게 들려준다.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서 핀잔을 들을 걸로 생각했던 세실은 몽바롱에게 뜻밖의 말을 듣는다. 몽바롱 역시 오래 전에 루브르에서 '그림출입자'의 존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으며, 그들은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세실이 마르셀에게 누나 아리에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온전히 믿지 않았지만, 몽바롱이 마르셀의 이야기를 인정하면서, 마르셀의 환상, 착각으로 여겼던 이야기는 이제 현실의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몽바롱은 세실을 '사랑의 신의 죽음'이 보관된 곳으로 안내하고, 그림을 보여준다. 세실은 데리고 온 고양이 '눈송이'를 그곳에 내려 놓고 나와 문을 닫고 조용히 '눈송이'를 지켜본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사랑의 신의 죽음' 앞에서 그림을 바라보던 '눈송이'는 어느 순간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듯 보이면서 사라진다. '눈송이'는 그림 속 세상으로 들어가고, 천사의 안내를 받아 아리에타를 만난다.
루브르 박물관 건물 꼭대기 다락방에는 고양이들이 산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공간에 고양이들은 거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간다. 고양이들이 사는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은 야간경비원 마르셀이 유일하다. 고양이들도 마르셀이 오는 걸 환영한다. 마르셀은 고양이 먹이를 가져오고, 대를 이어 살아오는 고양이들을 보살핀다. 프랑스에서 건물 꼭대기나 지붕에 사는 고양이는 '프랑스혁명'의 원인으로 알려졌다. 로버트 단턴이 쓴 '고양이 대학살'을 보면,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 빠리의 인쇄업자와 인쇄노동자들의 일상에서 인쇄노동자들의 형편 없는 노동 조건과 천대받는 일상이 있었고, 부르주아들이 기르는 고양이와 떠돌이 고양이들이 밤새 울어대면서 잠을 못 잔 노동자들이 고양이를 잡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부르주아가 기르는 고양이를 학살하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 부르주아의 악행을 응징하려는 감정이 쌓이고, 개돼지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던 노동자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된다.
루브르 박물관 옥탑에 고양이가 살고 있다는 건 자연스러운 설정인데, 고양이는 세계 여러 대륙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갖는다. 고양이는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고, 매우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사람이 사는 공간과 자연을 오가며 생활하며,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의심을 받고, 지옥의 전령이라는 상징이 있으며, 마녀의 심부름꾼이면서 영원히 죽지 않는 동물로 알려졌다. 이 만화에서 고양이들은 자주 '의인화' 한다. 고양이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건, 사람을 고양이로 바꿨다는 말과 상통한다. 이때 사람이 되는 고양이나, 고양이가 되는 사람은 외모만 다를 뿐, 그들이 놓인 사회적 위치는 동일하다. 고양이들이 옥탑에 사는 건, 가난한 도시빈민을 상징한다.
옥탑방 고양이는 도시빈민이면서 가족이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진 개인들이다. 이들은 사회에서 탈락된 고양이(사람)들이고, 모르는 고양이(사람)들이 모여 유사 가족을 이룬다. 고양이의 세계나 사람의 세계나 주류에서 밀려나 사회에서 도태, 탈락되어 변방으로 밀려나는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무리를 이룬다. 루브르 박물관 옥탑에 사는 고양이들 사이에서 막내 '눈송이'는 성장하지 않는다. 그건 50년 전,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는 마르셀의 누나 아리에타도 마찬가지였다. 성장하지 않는 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현실에 사는 걸 부정하는 상징적 태도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에서 주인공 오스카가 성장을 멈추는 것도 추악한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눈송이나 아리에타는 모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존재들이며,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의 인식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걸 인지하고,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한다. 눈송이도 어릴 때 버림받았고, 아리에타의 가족사는 나오지 않지만, 루브르 박물관과 인연이 깊은 마르셀의 집안이라서 그의 증조할아버지부터 줄곧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하는 부모를 따라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가능성이 많다. 아리에타가 가진 신비한 능력은 '그림 출입자'라는 존재인데, 그림과 대화하고,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복원사 몽바롱도 전해 들어 알고 있다.
세실은 '그림 출입자'의 존재를 몰랐지만, 마르셀의 말을 들은 이후 그의 누나 아리에타가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믿고, 마르셀이 기억하는 그림을 찾는다. 그 그림이 바로 '사랑의 신의 죽음'이었고, 그 작품을 복원하려는 몽바롱을 찾아가는 길에 쇠약해진 눈송이를 데려간다. 이건 세실이 의도한 것으로, 마르셀이 하는 말을 듣고 문득 마르셀의 누나 아리에타와 고양이 눈송이의 모습이 매우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도 자라지 않는 몸집, 날이갈수록 야위어가는 모습에서 어쩌면 눈송이가 '그림 출입자'의 능력을 가진 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세실의 예상대로 몽바롱의 복원 작업실에서 눈송이는 갑자기 날뛰는데, 몽바롱과 세실이 '사랑의 신의 죽음'이 보관된 창고에 눈송이를 들여보내고, 세실은 조용히 눈송이를 지켜본다. 눈송이는 오래도록 그림을 바라보다 마침내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서 사라진다. 그림 속으로 들어간 눈송이는 사람으로 바뀌고, 그곳에서 아리에타를 만난다. 아리에타는 오래 전부터 눈송이를 불렀고, 눈송이는 어디선가 들리는 그 목소리 주인공을 마침내 만난다.
아리에타는 눈송이에게 말한다. '이곳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꿈'과 같은 곳이라고. 그는 눈송이를 만나기 전까지 잊고 있었던 동생 마르셀을 기억한다. 그림 속에서 아리에타는 행복하고, 과거를 모두 잊었으며, 산들거리는 바람과 맛있는 음식과 천사들의 노래를 들으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간다. 눈송이도 이곳이 행복과 즐거움만 있는 곳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눈송이는 자기를 살려주고 대신 죽은 '톱날'을 만나고, 영원히 함께 살자는 아리에타의 말에도 '춥고 냄새나는 그곳'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리에타도 함께 그림 밖 세계로 가자고 말하지만, 아리에타는 끝내 그곳에 남겠다며 목에 차고 있던 회중시계를 눈송이에게 건낸다. 동생 마르셀에게 전해 달라고.
눈송이는 루브르 박물관 야간경비원 마르셀의 어릴 때 기억을 현실(현재)로 끌어내는 존재다. 그는 마르셀의 누나 아리에타가 준 회중시계를 목에 걸로 그림 밖으로 나왔으며, 전설처럼 떠돌던 '그림 출입자'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확인시켰다. 현실과 마법이 혼재되는 상황에서, 마르셀의 기억은 마법으로 존재했지만, 눈송이로 인해 현실(현재)이 된다. 그 결정적 물증은 아리에타가 가지고 있던 회중시계였고, 마르셀은 그 시계를 가슴에 품으며 회환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아리에타는 끝내 밖으로 나오길 포기한다. 아리에타에게 현실은 사랑하는 동생 마르셀을 만나는 것보다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리에타는 동생 마르셀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지만 동생 마르셀이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었어도 아리에타는 그림 속에서 여전히 어린 아리에타로 살아간다. 아리에타는 '피터팬 컴플렉스'가 있었던 걸까. 성장을 스스로 멈추는 사람은 외부의 환경이 바뀌는 것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장 안온한 상태에 머무르고 싶어하지만, 외부의 시련을 겪으며 사람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장하고, 점차 인격을 완성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성장하기를 포기한 아리에타를 비난할 수는 없다. '피터팬 컴플렉스'를 가진 사람들 역시 그들만의 고통이 있을 것이고, 외부의 압박과 압력에 짓눌린 상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너는 왜 그러냐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누구도 아리에타나 오스카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리에타는 눈송이를 통해 자기가 가졌던 회중시계를 동생 마르셀에게 보낸다. 누나 아리에타가 마르셀을 잊지 않았다고,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고. 50년이 지난 회중시계는 초침이 움직이고, 잘 작동한다. 이 회중시계는 마르셀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로 이어지는 가족의 핏줄을 상징한다. 마르셀은 어릴 때 누나가 사라지면서 가족(핏줄)이 끊겼다고 생각했고, 평생 외로움에 시달렸다. 이제 노인이 된 마르셀은 누나가 지녔던 회중시계를 되찾고, 시계의 초침을 통해 아리에타와 연결되며, 다시 핏줄이 이어지는 걸 느끼고는 감격한다.
마르셀은 누나 아리에타가 어떤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고 기억하고 있었으며,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를 세실에게 털어 놓았다. 세실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축제 행렬처럼 보이고, 어린이들이 즐겁게 행진하는' 그림을 찾기 시작한다. 사무실 직원들의 도움과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 도록을 통해 마침내 '사랑의 신의 죽음'이 마르셀이 말한 작품이라는 걸 알아낸 세실은 도록 속 그림을 마르셀에게 보여주고, 마르셀도 바로 그 그림이라고 확인한다.
'사랑의 신의 죽음'은 널리 알려진 작품도 아니고, 그림을 그린 작가 역시 유명한 작가들이 아니었다. 이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작가가 두 사람이라는 데 있다. 하나의 그림에 작가가 두 사람이라면, 공동 창작이거나 협업의 형태였을 걸로 예상하는데, 두 사람은 나이 차가 약 30년 가까이 나서 한 세대가 다른 작가다. 르네상스가 한창이던 16세기, 1550년에 프랑스에서 앙리 르람베르가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예술가 가문이었고, 아버지 루이 르람베르는 조각가, 석공이었고, 형제들인 루이1세 르람베르와 피에르 르람베르도 조각가로 활동했다. 앙리 르람베르가 화가로 활동한 시기는 발견된 기록으로 1568년에서 1570년 사이로 보이는데, 퐁텐블로 성에서 발견한 그의 작품이 근거로 남아 있다. 이때 앙리 르람베르는 불과 스무 살 안팎의 청년이었다.
퐁텐블로 성은 빠리 근교에 있는 궁전으로 역대 프랑스 왕들이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 주변에 있는 퐁텐블로 숲은 12세기부터 프랑스 왕들의 사냥터로 쓰였으며, 16세기 초까지 왕들의 별장이었던 곳에 프랑수아 1세가 별장을 헐고 지금의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을 지을 때,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초빙한 걸로 알려졌다.
앙리 르람베르가 이 궁전에 작품을 남겼다면, 궁전을 짓는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앙리 르람베르의 재능이 매우 뛰어났다는 걸 알 수 있는 증거는 그가 20대인 1573에서 1576년 사이에 '거장 화가'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빠리 외곽에 살던 그는 '거장 화가'가 된 이후 1586년에 빠리로 이주했고, 1588년에 결혼했다. '사랑의 신의 죽음'은 앙리 르람베르가 서른 살이던 1580년 완성했는데, 이 그림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다.
1566년에 디안 드 푸아티에(1499-1566)가 사망한다. 명문 귀족의 딸로 태어난 디안은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재능을 갖춘 재원이었는데,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자기보다 무려 서른아홉 살이 많은 영주 루이 드 브레제와 결혼했다. 결혼하고 16년이 지나서 루이 드 브레제가 사망하자 디안은 서른한 살에 과부가 되었다. 남편이 죽고나서 디안은 검은색과 흰색 옷만 입었는데, 디안의 미모가 출중해 정숙하면서도 신비로운 이미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디안'은 '다이나', '다이애나'와 같은 이름이어서 이후 많은 화가들이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를 그릴 때, '디안'의 외모를 모델로 삼았다.
'디안'은 왕실로 들어가 왕비를 비롯한 왕실 여성들의 시녀로 일했는데, 시녀라는 말이 낮은 계급으로 보여도, 귀족 여성만이 일할 수 있는 특권 직업이었다. '디안'은 왕실 여성들의 시녀로 일하는 한편, 어린 '앙리 2세(1519-1559)'의 교육도 맡았는데, '디안'과 '앙리 2세'의 나이 차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앙리 2세'는 1533년에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와 결혼하는데, 5년 뒤인 1538년 무렵부터 '앙리 2세'와 '디안'이 왕과 왕의 정부(情婦, 情夫)로 위치가 바뀌었다. 정식 왕비는 카트린이었지만, 실제 왕비의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디안'이라고 할 정도로 왕인 '앙리 2세'에게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심지어 왕비 카트린이 낳은 아이의 교육도 '디안'이 했을 정도였다. '앙리 2세'가 사망하면서 디안의 권력도 모두 바람처럼 사라지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큰 고생을 하지 않고 편안한 말년을 보내다 사망했다. '디안'의 죽음이 '사랑의 신의 죽음'의 모티프가 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있다. 이 이야기를 시로 쓴 사람이 '피에르 드 몽사르(1524-1585)'인데, 시인 그룹 '플레야드파'의 리더이기도 한 그는 여러 권의 시집을 냈고, 특히 사랑과 연애를 다룬 시가 뛰어났다. 피에르 드 롱사르의 시 가운데 '앙리 2세'와 '디안'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내용이 있는데, 앙리 르람베르는 피에르 드 롱사르의 시와 '디안'의 죽음을 모티프로 '사랑의 신의 죽음'을 그렸을 거라고 추측한다.
앙리 르람베르가 서른 살 무렵에 그린 이 작품에 '앙투안 카론'이라는 또 한 명의 작가가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앙투안 카론은 1521년에 태어나 앙리 르람베르보다 스물아홉 살이 많다. 앙투안 카론은 20대 때인 1540년대에 퐁텐블로 궁전에서 스승 프리마티초 밑에서 일했다. 나중에 '앙리 2세'의 부인인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앙리 2세'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직접 모신 화가였다. 카트린이 이탈리아의 명문 귀족인 '메디치' 가문이라는 건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왕족, 귀족의 혼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앙투안 카론은 60세 무렵에 '사랑의 신의 죽음'을 그리는데, 이때 이미 원작을 그린 '앙리 르람베르'의 작품이 있었을 걸로 추측한다. 앙리 르람베르가 이 그림을 그린 때가 서른 살 무렵인 1580년이고, 앙투안 카론은 60세 무렵이었으니 두 사람은 퐁텐블로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걸로 보인다. 나이는 앙투안 카론이 아버지뻘이었으니 당연히 어른이었지만, 앙리 르람베르의 재능이 탁월하다는 걸 앙투안 카론이 알아봤을 것이다.
현대의 분류에서는 두 사람이 공동 창작한 것으로 기록하는데,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 '루브르의 고양이'에서는 그림 뒷면에 Attribue a Henri Lerambert, collaborateur Antoine Caron 이라고 기록했다. 즉, '앙리 르람베르'가 그렸고, '앙투안 카론'이 협력, 협업자로 함께 했다는 말이다. 이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전시를 거의 하지 않았거나 아주 드물게 했을 걸로 보인다. 만화에서 루브르 박물관 가이드인 세실도 이 그림의 존재를 처음에는 잘 몰랐다. 그건 '사랑의 신의 죽음'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았다는 걸 뜻하고, 박물관 가이드인 세실도 모를 만큼 유명한 작품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츠모토 타이요는 왜 '사랑의 신의 죽음'을 '루브르의 고양이'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끌어온 걸까. 이 그림은 르네상스 회화에서도 독특한 장면이다. '사랑의 신' 즉 큐피드가 죽었고, 큐피드의 장례 행렬이라는 설정에서, '신'을 죽이거나, '신'이 죽었다는 설정은 그동안 중세 사람들의 인식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림을 보자. 잘 다져진 흙길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고, 왼쪽과 오른쪽에는 각각 건물을 배치했다. 이 건물은 원근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그림은 2차원 평면이지만 마치 3차원 공간처럼 입체감을 갖는다.
왼쪽 건물은 그림 전체에서 약 1/3 정도를 차지하는 큰 건물이고, 건물의 끝부분만 보인다. 2층에는 장례 행렬을 지켜보는 귀족들, 주로 귀족 여성들의 모습이 보이고, 아래쪽에는 남성 집단이 장례 행렬을 뒤따르고 있다. 건물은 보이지 않지만, 왼쪽으로 긴 회랑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지금 장례 행렬은 건물의 긴 회랑을 막 빠져나왔다. 장례 행렬을 따르는 남성들 역시 귀족들이며 가장 앞장 선 노인은 머리에 면류관을 썼고 이 장례를 주관하는 인물로 보인다.
장례 행렬을 이루는 무리는 모두 어린 천사들이고, 등에 날개가 달린 걸 볼 수 있다. 앞장 선 아기 천사들은 손에 긴 봉을 들었는데, 이 기다란 막대기 끝에 폭죽이 달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아기 천사들은 자유롭게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다. 이들의 표정을 보면 이 행렬이 장례식이 아니라 마치 축제처럼 보인다. 행렬의 끝에 네 명의 어린 천사들이 관을 메고 가는데, 큐피드는 관 안에 있지 않고, 관 위에 누워 있다. 아리에타는 이 행렬에서 큐피드가 사실은 죽지 않았고, 죽은 척 할 뿐이라고 눈송이에게 말한다. 이 장면은 장례식 흉내를 내고 있을 뿐, 실제로는 축제라는 말이다.
그걸 알 수 있는 건 장례 행렬 양 옆으로 구경을 나온 사람들의 표정이다. 사람들은 행렬을 보며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거나 손짓을 하는데, 슬퍼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아기 천사는 물론, 행렬 옆에 있는 아이들 모두 발가벗었다. 발가벗은 아이는 천진난만함, 순진무구함을 상징하며, 죄를 짓지 않은 순결한 영혼을 의미한다. 이 행렬이 향하는 곳은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인데, 건물 앞에 사람들이 모여 행렬이 다가오길 기다린다. 건물 꼭대기에 등신상으로 천사의 동상이 서 있는데, 이 동상은 왼쪽 하늘에 수레에 탄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제우스 신을 바라보고 있다. '아폴로도로스 신화집'에도 '제우스는 날개 달린 말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와 벼락을 던지고'라는 문장이 있듯, 제우스는 황금 수레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다. 이 황금 수레는 두 마리의 비둘기가 끈으로 연결되어 끄는 형태인데, 비둘기는 순결함을 상징하며, '생명의 재생을 상징하는 새'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비둘기는 큐피드가 '페리스테라'라는 요정을 비둘기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그림에서 비둘기 두 마리가 제우스 수레를 끌고 있다는 건 '사랑의 신의 죽음'이라는 주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 '신'이 죽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이 그림의 핵심 주제인데, 그래서 영어 작품 제목에는 'Allegory'가 추가되었다. 이 작품(사랑의 신의 죽음) 전체가 하나의 우화이자 풍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앞의 설명처럼 '디안 드 푸아티에'의 죽음을 풍자했을 수 있고, 르네상스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새로운 정신을 드러낸 것일 수 있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작품을 빌려와 루브르 박물관 옥탑에 사는 고양이와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그림 침입자'의 존재를 등장시켜 한 편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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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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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조선일보' 칼럼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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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조선일보' 칼럼을 읽고
유현준이 조선일보에 쓴 칼럼을 읽고, 칼럼 내용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이런 글에 학식 있는 분들은 관심을 가질 이유도, 수준도 안 되기에, 나 같은 삼류 작가가 관심을 갖고 짚어주어야 한다. 나는 비록 삼류지만, 그동안 유현준의 글을 열심히 읽은 독자들이나, 유현준의 글이 무슨 내용인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잘 몰랐던 분, 나보다 지식이 얕은 분이라면 지금부터 내 글이 도움이 될 걸로 본다. 유현준이 쓴 본문은 일부러 찾아 읽을 가치가 없으므로 권하지 않는다. 나는 본문을 다 읽고, 그 본문의 일부를 인용하겠지만, 독자께서는 '조선일보'를 찾아가서 조회 수를 올려주지 않았으면 한다.
유현준은 '건축에서는 그것을 어려운 말로 '컨텍스트'를 고려한다고 말한다'고 썼다. 아하, 건축 분야에서는 '컨텍스트'라는 단어가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니까, 유현준 자신은 건축 분야에서 어려운 단어를 쓸 수 있는 꽤 박식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걸 처음부터 '어필'하고 있다. '컨텍스트'는 '맥락'이다. 이게 어려운 말인가? 모든 상황에는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어려운 말인가? '맥락'이라는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 이걸 굳이 '컨텍스트'라고 쓰면서 심지어 건축 분야에서는 '어려운 말'이란다. 시작부터 웃긴다.
유현준은 중국의 경제적 성장과 위상의 변화가 '배경의 변화'라고 말하면서 '국내 사건의 의미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이후 그가 주장하는 모든 한국에서의 문제점의 원인이 중국에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국에서 주52시간제와 워라벨의 흐름을 두고 '중국 공산당이 가장 좋아할 일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일반 분야에서 노동시간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창의적 기술 분야에서는 없어져야 할 법이다'라고도 말한다. 유현준은 '주52시간제'를 지극히 당연하게 여긴다. 이것부터 잘못인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창의적 기술분야'에서는 '주52시간제'를 없애고 더 많은 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래서 일부러 찾아봤다. 미국 자료를 찾아보니, 미국에서 평균 주당 노동시간은 40시간이 채 안 된다.
2024년 10월 미국 민간 비농업 일자리에 종사하는 모든 직원의 평균 근무 시간은 34.3시간으로 시장 예상치인 34.2시간을 약간 상회했습니다. 제조업에서 평균 근무 시간은 39.9시간으로 거의 변동이 없었고, 초과 근무 시간은 0.1시간 감소하여 2.8시간이었습니다.<트레이딩 이코노믹스 자료>
유현준처럼 단 한 번도 노동자로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은 '노동시간'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른다. 그는 지금 건축사 사무소를 운영하는 걸로 아는데,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이 주 몇 시간 노동을 하는지는 알고 있을까? 그리고 노동하는 시간에 합당한 임금과 처우는 올바르게 지불하고 있을까? 유현준의 사고방식은 당연히 '자본가'의 사고방식이고, 그는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사람이다. 그 자신,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동시간이 길고, 임금은 적게 주는 사회를 '가장 좋은' 사회로 인식하고 있는 건 자연스럽다.
지금 한국은 '주52시간제'가 아니라 '주40시간제' 또는 '주4일제', '주32시간제'를 사회적 의제로 내놓고 토론해야 하는 사회다. 유현준의 사고방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이겠지만, 한국의 생산성은 이미 선진국에 이르렀으며, 국가와 사회가 만든 '부의 총량'을 얼마나 공평하고 현명하게 나누는가를 고민하는 나라가 되었다.
무조건 오래 일하는 것만이 바람직한 사회라는 전근대적, 독재적 발상을 하는 인간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고, 유현준 역시 그런 70년대식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로 보인다.
유현준은 노동시간을 말하다 갑자기 투표권으로 말을 바꾼다. 2005년부터 영주권을 획득한 외국인은 한국에서 거주를 3년 이상 하면 지방선거에 투표할 권리를 준다는 내용을 두고, '국내 외국인의 80%가 중국인이다. 이 역시 중국 공산당이 제일 좋아할 법안이다'라고 말한다. 영주권을 획득하고도 3년이 지난 외국인이 지방선거 투표를 하는 게 '중국 공산당이 좋아할 법안'이라는 주장은 대체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지 황당하고 놀랍다.
그런데, 유현준의 이 말도 사실이 아니다. 유현준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썼거나, 의도적으로 또는 악의적으로 가짜 내용을 썼다. 경향신문에서 2024년 10월 24일 보도한 내용을 보자.
국내 거주 외국인주민 수 246만명···총인구 4.8%로 '역대 최다'
주요 국적별 구성비는 중국(한국계) 27.5%, 베트남 12.8%, 중국 11.4%, 태국 9.9% 순이다. 베트남 국적자의 비율은 2022년(약 21만명·11.9%)보다 1%p 가까이 늘어 중국 국적자 비율을 앞섰다.
외국인주민 중 한국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193만5150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18만2804명(10.4%) 증가했다. 주요 국적별 구성비는 중국(한국계) 27.5%, 베트남 12.8%, 중국 11.4%, 태국 9.9% 순이다. 베트남 국적자의 비율은 2022년(약 21만명·11.9%)보다 1%p 가까이 늘어 중국 국적자 비율을 앞섰다.
한국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1만681명(4.8%) 증가한 23만4506명이다. 출신 국가별로는 중국(한국계) 10만1995명(43.5%), 베트남 5만4696명(23.3%), 중국 4만2513명(18.1%), 필리핀 1만543명(4.5%), 캄보디아 5252명(2.3%) 순이다.<경향신문 2024년 10월 24일자 내용>
유현준이 말한대로 '국내 외국인의 80%가 중국인'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순수 중국인은 11.4%에 불과하고, 조선족을 합해도 39%에 불과하다. 유현준은 중국 공산당을 강조하려고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1분도 걸리지 않는 검색을 하지 않고 엉터리 글을 쓴 것이다. 이 정도면 '칼럼'이 아니라 사기에 가깝다.
유현준은 또 멋대로 논리를 건너 뛰어, 반일 감정을 갖는 것이 '중국 공산당과 북한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역사를 잊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고 하면서 항상 일제강점기 이야기만 한다. 그러면서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주로 만든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블록에 남아 있으려면 극동아시아에서 일본과의 협력이 중요하다. 둘을 갈라지게 하는 것 역시 중국 공산당과 북한이 좋아하는 일이다.'(유현준)
유현준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는 게 좋다는 의미인지, 나쁘다는 의미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블록에 남아 있는 것과 일본과의 협력이 중요한 것이 어떻게 등치되는 논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이 재무장해서 대한민국을 침략하려는 의도가 있을 때도 일본과 협력해야 하는 건지,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어 온갖 국가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일말의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는 일본을 비판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인지, 유현준의 글쓰기는 모호해서 읽는 사람에게 짜증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면서 결국 일본과 한국을 갈라지게 하는 것이 중국 공산당과 북한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현준의 앞의 글이 갖는 의미는, 한국이 일본을 너무 비난하지 말고, 일본과 한국이 극동아시아에서 사이 좋게 지내는 게 필요하고, 일본과 한국이 사이 좋게 지내면, 중국 공산당과 북한이 '나빠할 일'이니까, 한국은 일본과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가해자(일본)가 사과도 하지 않는데, 피해자(한국)이 먼저 가서 손내밀고 친하게 지내자는 건 속도 없는 멍청이나 하는 짓이다. 유현준은 어디가서 한 대 맞으면 때린 사람에게 먼저 가서 손 내밀고 '내가 맞아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으로 봐도 좋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가까이 위치한 남미 국가들이 공산주의로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CIA(중앙정보국)를 동원해 친미 정권을 수립하려 노력했다. 1990년대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 부자가 된 중국 공산당이 넘치는 돈과 많은 인구를 이용해 가장 가까운 나라 대한민국에 그런 일을 안 할까?(유현준)
유현준은 중국을 비난하려고 미국의 국가범죄를 끌어들인다. 오호, 그러고 보니 유현준이 '반미주의자'라는 건 이번에 알았다. 이것도 CIA에 유현준을 신고해야 할 내용이니 유현준은 앞으로 미국 갈 생각은 버려야겠다. 2차 세계전쟁 이후 '냉전'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으로 대표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쏘련으로 대표하는 사회주의 체제는 세계 곳곳에서 충돌했다. 1950년 한국전쟁 역시 이런 '냉전'의 한 과정에서 벌어진 세계사적 사건이었고,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벌어졌던 수 많은 군부 쿠데타와 혁명, 반혁명 사태들의 이면에는 체제를 유지하려는 미국과 쏘련의 힘이 작용했고,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 역시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유현준은 미국이 세계 약소국을 상대로 친미 정권을 만들면서 벌였던 그 잔혹하고 끔찍한 국가범죄를 중국공산당이 한국을 대상으로 '공산화'를 위한 전략, 전술을 구사할 거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즉,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고,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을 마치 일어날 것처럼 호도하는 것이다. 이건 유현준이 중국 공산당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일까? 중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했고, 정치체제만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는데, 중국 공산당이 한국을 대체 어떻게 만들 수 있기에 저렇게까지 호들갑과 오두방정을 떨면서 중국 공산당을 무서워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국내에는 그런 중국과 북한의 지원을 받아서 정책을 만들고 사회운동을 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의 목표는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좀먹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간첩 행위라고 부른다. 물론 겉으로는 민주, 인권, 약자 보호, 워라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것이다.(유현준)
유현준은 이제 선 넘는 발언을 한다. 국내에 중국과 북한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는 간첩이 있다고 말한다. 유현준은 이 말에 책임져야 한다. 유현준은 그러면서 '민주, 인권, 약자 보호, 워라벨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지금 한국에서 민주를 말하고, 인권을 말하고, 약자 보호를 말하고, 워라벨을 말하는 사람이 결국 중국과 북한의 지원을 받는 간첩이라는 뜻인데, 유현준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명확하게 책임져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윤석열도 이와 거의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러니까, 유현준의 말은 윤석열이 한 말과 거의 같은 내용이고, 윤석열과 비슷한 사고구조를 가졌다고 봐도 좋다.
유현준의 말은 1970년대 독재 체제에서나 나올 법한, 전근대적이고, 독재적이며, 매우 폭력적인 발언이다. 유현준의 사고방식은, 독재체제에서 독재자가 마음대로 사람을 체포하고, 사살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누구나 끌고가서 사살해도 좋은, 그런 나라가 되길 바란다. 민주주의, 인권, 약자 보호와 같은 개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진 법으로 보호하고 장려하는 개념이다. 약자는 사회의 제도로 보호받고, 누구나 평등한 법에 의해 보호받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인데, 유현준은 그런 민주, 인권, 약자 보호를 공산주의 체제와 동일시 하며, 공산주의가 곧 절대악이므로, 민주, 인권, 약자 보호도 절대악이라는 나찌의 이분법식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정치는 적을 만들어야 시작된다. 건국 초기 우리나라 정치 지형에서 적은 북한이었다. 수십 년 지나자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뉘어서 싸웠다. 정치가들은 그것으로 먹고살았다. 1990년대 들어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어 싸우는 구도로 바뀌었다.(유현준)
유현준은 역사의 흐름에서 본질을 읽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것은 미국으로 대표하는 체제와 소련, 중국으로 대표하는 체제가 남북한의 분단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와 목적 때문이라고 하자.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뉘어서 싸웠다는 표현은, 두 지역이 자발적으로 서로 감정을 갖고 싸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쓰면 안 된다. 두 지역이 갈등을 일으키도록 부추기고, 여론 조작을 한 당사자가 바로 박정희라는 사실은 왜 말하지 않는가. 즉, 지역 갈등은 박정희와 집권 세력이 악의적이고 의도적으로 분열을 획책, 조장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지, 경상도, 전라도가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고, 그래서 서로 싸웠다고 말하는 건, 본질을 호도하는 악의적 주장이다.
또한 1990년대 들어서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어 싸우는 구도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엉터리 주장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곧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를 상징하는 단어다. 자본주의 체제를 운용하는 나라들은 처음부터 자본가와 프롤레탈리아가 대립,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그 갈등의 정도가 아주 적게 나타날 수도 있고, 격렬하게 나타날 수도 있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게 자본주의 체제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이자 한계이기 때문이다.
유현준은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와 과정을 잘 모르는 게 분명하다. 일개 건축사인 주제에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발언하려고 하는 태도는 꼴같잖다. 자기가 하는 건축 분야 일도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주제에 세상 모든 사안에 대해, 더군다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조차 왜곡하며 어설픈 주장을 하는 걸 보면, 이런 '칼럼'을 쓰는 유현준의 수준은 물론, 이런 '칼럼'을 싣는 '조선일보'의 수준이 얼마나 천박하고 한심한가를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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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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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최교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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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최교수님께
어제 교수님 블로그에 올리신 '나는 왜 윤석열 후보를 미는가'를 읽었습니다. 이 글은 교수님이 쓰신 글에 대한 반론이자, 공개 편지입니다. 서술의 근거는 교수님의 글을 기본으로 하고, 제가 가진 생각을 더해 주장을 개진하겠습니다. 공개 편지인 만큼 형식과 내용은 자유롭고 편한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이 글은 교수님은 물론, 교수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보수' 진영에 계신 분들도 읽어보시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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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최교수님께'라고 쓴 인사말은 의례적 수식어가 아닙니다. 이웃 사는 저는 평소 최교수님을 자주 뵙고, 함께 식사도 하고, 산행도 하는 '동무'라서 교수님을 비교적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의 정치 성향은 '보수'가 틀림없습니다만, 박근혜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에도 참석하셨고, 탄핵에 찬성하신 분입니다. 최교수님은 박근혜를 선택했지만, 박근혜가 잘못한 것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하셨습니다.
최교수님은 스스로 노력해 많은 어려움을 딛고 대학교수가 되셨고, 정년퇴직하신 지금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진정한 학자이십니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성실하고 겸손하며, 사회의 규범을 잘 지키는 시민으로 모범이 되는 분입니다.
가난하게 자라 자수성가로 대학교수가 되셨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2년을 복무했으며, 개신교도로 신앙생활도 신실하게 하고 계십니다.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시고, 측은지심을 가지셨으며, 자신에게 향하는 쓴소리, 비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넓은 이해의 마음을 가진 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최교수님 수준이라면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분열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합리적 토론이 가능한 '보수'라면 좌우의 날개를 함께 펴고 날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보수'라고 하는 사람 또는 집단을 보면 '극우'에 가깝고, 과거 파시즘을 신봉하는 어리석은 미치광이 수준입니다. '보수' 집회에 참가하면서 일장기를 들고, 일본을 찬양하면서 우리나라가 망해야 한다는 망언을 퍼붓는 사람들을 '보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상식 있는 시민들이 소위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비웃고, 비난, 비판하는 근거는, '보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선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식하고 무지하다는 걸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은 '정보'로 흘러넘치지만,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람의 생각은 편향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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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서는 '개신교 신자로서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를 지지'했다고 하셨습니다. 정치인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같은 종교를 믿기 때문에 선택한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정치인이 특정 종교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신앙 때문에 정치 행위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런 정치인은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종교는 개인의 신념일 뿐이고, 그래야 합니다.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자신이 믿는 종교를 일반화하려는 것은 제정일치 사회에서나 있었던 미개한 폭력입니다. 자신의 신앙(종교)과 정치 행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치인은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들이 대통령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대통령으로 해서는 안 되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명박과 박근혜를 선택한 교수님과 ‘보수’의 안목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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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은 글에서 '이승만은 반공, 박정희는 경제, 김영삼은 민주화, 김대중은 개방'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승만이 '반공'을 한 것은 맞습니다만, 이승만이 저지른 수많은 범죄와 패악에 관해서 침묵하시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입니다만,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보여준 행보, 말과 행동은 친일매국노이자 한국 정치와 사회를 피로 물들인 독재자의 전형이었습니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고, 남한 총선거와 대통령선거를 통해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의 정치 상황은 남북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이승만이 '반공'을 '국시'로 삼은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만, 남북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던 김구 선생, 여운형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이자 현실 정치인들을 암살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승만을 '국부'로 찬양한다는 것은 역사의식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이라는 반공단체를 만들어 과거 '좌익'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가입시킨 다음, 전쟁이 한창일 때 국군특무대를 중심으로 보도연맹원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진짜 빨갱이'들이 아니었고, 한때 좌익이었거나,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배급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가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설령 과거에 '좌익'이었다 해도, 단지 과거의 전력만을 보고 학살한다는 것은 엄연한 범죄인데, 이승만은 이들이 최소 10만 명에서, 많게는 20만 명이 학살당하는 걸 묵인했습니다.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을 주도했고, 대통령을 영구집권하려는 망상을 가졌으며, 3.15부정선거의 당사자입니다. 결국 4.19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했으나,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과거 친일매국노를 관직에 앉히는 등 친일파를 옹호하고, '반민특위'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려 한국이 친일파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진정한 '보수'라면 친일매국노를 처단하라고 주장해야 할 것인데, 그것을 반대한 이승만을 찬양하는 것은 상식과 정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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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보수'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박정희를 높게 평가합니다. 박정희가 가난했던 한국을 구제했고, 보릿고개를 없앴으며,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일견 타당합니다.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의도를 생각해 보면,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가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 봅니다. 즉, 자신이 피와 땀을 흘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현실이 불쾌하고 마땅치 않은 것입니다.
이는 자신과 박정희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인데, '보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젊었을 때 흘렸던 땀과 눈물은 그 자체로 고귀하고 훌륭합니다. 그들은 굳이 박정희를 들먹이지 않아도 스스로 한국 사회를 일으킨 주역이며, 한국 사회의 진정한 주인입니다. 그러니 박정희를 우상화하지 않아도 '보수'의 애국과 땀의 결과는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사람들은 박정희의 정체에 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정희는 한때 남로당원이었으며, 그의 형 박상희는 '보수'들이 말하는 '진짜 빨갱이'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박상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당시 좌익,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는 대개 지식인이 많았고, 일제강점기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한 방법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역시 형 박상희의 영향을 받아 남로당에 가입했고, 비밀조직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보수'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저주를 퍼붓는 '빨갱이'가 바로 박정희와 그의 형 박상희입니다. 박정희가 전향했으니 그만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박정희는 남로당원인 것이 발각되어 체포되자 자신의 조직과 동료를 고발하는 대가로 살아남았습니다. 좌익의 입장에서 보면 박정희는 변절자, 배신자인 것입니다.
박정희는 자신의 '빨갱이' 경력을 지우려고 더욱 강하게 '반공'을 부르짖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좌익, 공산주의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지식인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수'만 모르는 걸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요?
한국에서 '보수'의 특징은,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지하고 무식하기 때문에 올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없고, 올바른 역사관이 없으므로 눈앞의 현상만 보고 판단하게 됩니다. 따라서 역사의 물줄기, 역사에서 정의, 민주주의, 민중의 힘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지배자의 말을 믿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한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던 1960년을 전후해서, 제3세계-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수없이 많은 군부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즉, 박정희의 군부쿠데타는 그 시기에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저개발국가에서 벌어진 이 세계적 사건 가운데 '성공한 쿠데타'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은, 쿠데타 자체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쿠데타는 성공했어도, 그 주역들이 시민의 동의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낸 경우는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쿠데타 세력의 종말이 모두 법의 처벌을 받았다는 점에서, 군부 쿠데타는 불법이며, 역사적이든, 정치적이든 범죄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박정희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부하에 의해 사살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김재규가 역모를 한 것으로 치부하면 답을 알 수 없습니다. 박정희는 청와대에서 일본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일본군가를 부르며 그걸 즐겼던 친일매국노였습니다. 일본과 일본군에 대한 향수를 끝까지 갖고 있었고,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한때 만주군에서 독립운동가를 '토벌'하는 자리에 있기도 했습니다. 그걸 부끄럽거나 죄스러워하기는 커녕, 친일매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자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에 분노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가 아니겠습니까.
박정희가 죽을 때도 주색잡기를 하던 자리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박정희는 죽기 전까지 무려 200여 명의 여성을 비밀 안가로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채홍사 노릇을 한 부하가 직접 증언했고, 박정희의 마지막 순간에도 두 명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소위 '보수'에서는 이런 박정희를 두고 '남자라면'이라거나 '사생활은 건드리지 말라'거나, '대통령이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식으로 본질을 회피하려 합니다. 대통령이 주색잡기에 빠져 있는 걸 비판하지는 못할 망정, 그걸 옹호하는 것이 과연 '보수'입니까? 그건 최소한의 인간도 못 되는 되먹지 못한 양아치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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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서는 이명박을 선택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선택을 이제는 후회하고 계신 걸로 압니다. 박근혜도 마찬가지죠. 이명박은 희대의 범죄자입니다. 그가 개신교도에 교회의 장로라는 타이틀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교수님께서도 이제는 아셨을 겁니다. 한국사회에서 개신교는 이제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교인의 숫자는 줄어들고, 대형교회의 목사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세습을 통해 철저한 자본주의의 물질만능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보여주어야 할 선행과 이타심은 이미 사라졌고, 교회는 비즈니스의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교회 특히 개신교에 대한 비판에 관해서는 교수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한국개신교가 얼마나 부패했고, 사회의 독버섯이 되었는가는 개신교 전체가 보여주는 악행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종교가 사회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과 역할에 관해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미약하지만, 개신교 내부에서도 진정한 종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신실한 목회자와 신도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같은 사기꾼, 범죄자가 단지 '개신교도'라는 것 때문에 그를 대통령이 되도록 한 수많은 개신교도들은 이제 자기 발등을 찍어야 합니다. 그런 통절한 자기반성을 해도 부족한 마당에 이제 다시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를 선택하고, 다시 윤석열을 선택한다는 건, 이명박과 박근혜의 범죄에서 아무런 비판과 반성이 없다는 걸 드러내는 태도입니다.
한국에서 직업별 성범죄 1위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매우 불명예스럽지만, 한국 교계에서는 이런 현상을 두고 공식 사과나 반성의 태도를 보인 적이 있던가요? 말로는 사회의 소금이 되겠다고 하면서, 정작 가장 나쁜 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르는 목사가 존재하는 '개신교'는 한국 사회 발전의 걸림돌일 뿐입니다.
이명박은 대통령의 권력을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데 써먹은 악질 가운데서도 악질입니다. 4대강 사업으로 32조 원에 달하는 국민의 피같은 세금이 사라졌고, '자원외교'라는 명목으로 또 20조 원의 세금을 탕진했습니다. 이 국민의 돈은 이명박 측근에게 돌아갔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세금을 들여 환경을 망치고, 그 피해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환경의 중요성을 모른다면, 이명박이 얼마나 악랄한 짓을 했는지 모를 것이고, 환경감수성이 무딘 것 또한 '보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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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서 윤석열을 지지하는 까닭은, 윤석열이 문재인정부에서 '피해자'라는 인식 때문인 걸로 압니다. 교수님께서 찾아보시는 정보의 대부분을 소위 '보수언론'에서 얻고 있는데, 이런 편향이 정보의 왜곡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진정한 ‘보수’라면 조선일보는 폐간시켜야 하는 대상입니다.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친일, 매국을 했으며 ‘천황폐하 만세’, 한국전쟁 때는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른 반역자들입니다. 보수가 친일매국, 반공을 용인한다면 그것이 애국자이고 ‘보수’입니까?
윤석열을 두고도 객관의 사실을 외면하거나 알지 못하면서, 단지 문재인정부가 싫어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는 인간을 지지한다는 건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윤석열은 그 자신도 이미 심각한 범죄혐의가 있고, 그의 아내도 논문 표절 문제와 경력 위조, 주가 조작 혐의 등 온갖 파렴치한 범죄혐의가 있습니다. 게다가 윤석열의 장모는 이미 범죄를 저질러 법의 처벌을 받고 감옥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조국 교수의 가족에게 적용해 본다면, ‘보수’의 입장이 얼마나 무원칙하고 악의적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조국 교수의 아내가 윤석열 아내와 같은 혐의를 가졌다면, 교수님께서는 얼마나 분노하시겠습니까? 조국 교수의 장모가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갔다면 얼마나 분통을 터트리겠습니까?
윤석열은 조국 교수와 그 가족을 멸문할 정도로 잔혹하게 학살한 당사자입니다. 그런데 윤석열이 문재인정부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면, 현재 상황을 객관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로 윤석열 후보가 결정되었습니다. 투표 내용을 보니 윤석열 후보는 60대 이상의 당원에게 큰 지지를 얻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나이 많은 분들이 윤석열을 지지하는 심리를 살펴보면, 박근혜를 감옥에 보낸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도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복수심’이 작용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60대 이상의 세대에서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자 박정희와 육영수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자신들의 딸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 심리적 동기화가 있었기에,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어도, 박근혜가 무능하고 불법을 저질러 탄핵당해 감옥에 갔어도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60대 이상 세대가 윤석열을 지지하는 건 이성적, 지성적 판단이나 합리적, 논리적 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닌, 감정과 감성을 바탕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를 반드시 이성적, 합리적 판단으로만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겠습니다만, 나라의 미래를 넓고 멀리 바라본다면 이런 감정적 대응과 근시안적 판단은 분명 우리 사회, 성장하는 청년 세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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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서는 이재명 후보를 두고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제가 교수님을 안타까워하는 점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교수님께서는 과거 대통령을 선택하신 것이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건 교수님의 안목-최소한 정치인을 선택하는 안목-이 많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이명박, 박근혜를 선택한 것이 그 증거이고, 교수님의 정치적 눈높이가 낮다는 걸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재명 후보는 몹시 가난한 화전민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도 끼니를 걱정하며 살았고, 국민학교를 마치고 성남으로 이주해 소년노동자로 살았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어릴 적, 이재명 후보만큼은 아니지만 가난하게 사셨으니 이재명 후보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공감하실 걸로 압니다. 반면 윤석열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줄곧 금수저로 자랐습니다. 사회학에서 '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보수화(부자와 지배자의 논리를 옹호)하는가'를 두고 분석한 내용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오로지 먹고사느라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합니다. 그들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나 올바른 역사, 정의에 관해 배울 수 있는 여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지한 상태에 머물 확률이 매우 높고, 무지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재명 후보도 대학에 들어가 깨우치기 전까지,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광주5.18민주화투쟁'을 보고는 사회 불순분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거라고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 역시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위대한 지도자가 '서거'했다고 슬퍼하며 일기장에 쓴 걸 기억합니다. 그때 제 나이 불과 스무 살이었습니다.
이재명 후보가 공장 노동자에서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대학에 진학해 법률을 공부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서 노무현 변호사의 웅변을 듣고 인권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은 한 사람의 눈물겨운 생존의 분투기이자, 무지에서 각성으로 이어지는 올바른 역사 속 인간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스스로 엄격한 삶을 사셨기에,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다는 걸 저는 압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시각에서는 '보수'라면 당연히 그렇게 스스로 엄격하고, 부끄럼 없는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삶을 기준점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보수'보다는 '진보'가 교수님과 더 잘 어울립니다. 한국사회에서 '보수'는 돈과 권력을 향해 덤벼드는 불나방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재명 후보가 성남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내용과 성남시장으로 당선되어 행정을 펼친 것, 경기도지사로 경기도의 행정을 펼친 것을 객관의 눈으로, 냉정하게 바라보시고 평가해 보시길 권합니다. 과거 성남시장이었던 자들과 경기도지사가 벌인 짓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방자치를 망치고, 개인의 권력을 사유화하고, 뇌물을 받아 먹은 것은 현 '국민의힘' 쪽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객관적 증거와 자료를 외면하면서까지 훌륭한 행정을 펼친 이재명 후보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보수'의 태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보수'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정파적 이해관계 때문에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면, 자기 양심을 속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루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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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윤석열과 이재명의 실력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사회를 개혁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했고, 대통령의 실력과 능력이 매우 중요한 조건입니다.
대통령은 행정수반이고, 대통령을 둘러싼, 즉 대통령이 임명한 가까운 인재들이 대통령의 행정 목표를 위해 실무를 집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대통령의 국정 철학은 한 나라의 틀을 만들어 가는 중요한 실질적 요소입니다.
윤석열은 아홉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그 뒤로 약 26년 동안 검사로 일했습니다. 최근 ‘국민의힘’ 대통령 예비후보 토론회를 보셔서 아시겠습니다만, 윤석열은 기본 상식과 지식,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이 거의 없는, 무지와 무식을 드러냈습니다.
윤석열은 ‘대통령 혼자 모든 걸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재를 뽑아 쓰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대통령은 왜 있으며, 자신이 대통령이 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로지 ‘권력’ 그 자체를 탐욕하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강하게 갖습니다.
이재명과 윤석열의 가장 큰 차이는, ‘권력’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이재명은 ‘권력’을 ‘일을 더 잘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고 있지만, 윤석열은 ‘권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권력’을 잡으면 그것을 마구 휘두를 생각만 하는 윤석열은 전두환, ‘광주민주화운동’ 발언 등을 종합할 때, 그 자신이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되고픈 욕망으로 가득한 인물입니다.
이재명은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치면서 ‘행정의 달인’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좌우의 이념이 아닌, 실용주의자로, 오로지 한국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하겠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재명 후보가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의 역할을 엉터리로 했다면 지금 전국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반면 윤석열 후보는 조국, 추미애 장관에게 항명하고, 검찰을 사조직화해서 징계를 받게 되자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문재인정부와 적대적 관계를 설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정부를 비판한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기존 정치인에게 식상한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윤석열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만큼 ‘보수’ 진영에는 능력 있는 인물이 없었다는 걸 반증합니다.
윤석열 후보가 검사 26년의 경력말고 그가 보여준 행정 능력이나 정치력, 정치, 행정철학에 관해 최교수님께서 아는 것이 있습니까? 윤석열을 객관적으로 검증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국민의힘’ 토론회에서도 윤석열은 무식하고 무지하다는 것만 드러났을 뿐입니다.
이미 박근혜가 현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로 선택될 때도 이명박과 경쟁하면서 이명박에게 졌고, 박근혜의 실력이 아닌,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박정희, 육영수 딸이라는 ‘불쌍한 자식’ 코스프레로 노인 세대의 감성적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무능하고 무식하고, 무지한 박근혜는 최순실의 수렴청정의 허수아비, 괴뢰가 되어 나라를 망가뜨렸고, 지금 감옥에 갔습니다.
윤석열은 그런 박근혜의 무지, 무식과 윤석열의 아내의 수렴청정, 전두환의 폭력적 독재가 결합해 박근혜보다 더 나쁜 결과를 만들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래도 윤석열을 지지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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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보수’의 개념은 ‘건강한 애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보수’의 행태를 잘 보시면, ‘건강한 애국’이 아닌, 극우 파시즘과 천박한 양아치가 결합한 망나니의 모습인 걸 아실 겁니다.
교수님이 그런 집단을 지지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보수’는 무엇보다 상식과 합리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걸로 압니다. 광화문 앞에서 시위하는 소위 ‘태극기부대’는 성조기와 일장기, 이스라엘국기를 흔들며 문재인정부 타도를 외칩니다. 오로지 문재인정부가 싫다는 이유로 친일매국도 서슴치 않는 것이 ‘보수’입니까?
대형교회 목사들이 마이크를 잡고 문재인정부를 비난하고 직접 정치에 개입합니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사라진 지 오랩니다. 그들이 문재인정부를 ‘빨갱이’, ‘좌파’라고 비난하는 건 아무 근거가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부패하고, 부익부빈익빈, 강자독식, 권력과 금력이 결합한 강자카르텔, 부패카르텔을 형성해 사회의 부를 독식하려는 자들이 깨끗하고 합리적인 정부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입니다.
교수님께서 지지하는 ‘보수’ 집단인 ‘국민의힘’의 역사적 태동과 성장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신다면 결코 그들을 지지하지 않으실 걸로 압니다. 교수님께서 이미 어릴 때부터 개신교도로 성장하신 것이 교수님의 정체성을 구성했으므로, 그걸 부인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놓인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아브로락사스의 알’처럼, 진정한 자기 개혁은 미몽의 세계에서 깨어나 역사의 진실을 마주할 때 가능합니다. 이승만 이후부터 박근혜까지 이어온 ‘국민의힘’의 과거는 독재, 쿠데타, 무능의 정부였습니다. 이건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윤석열 후보는 그런 정당의 후보로, 과거의 망령을 소환하고 있으며, 이미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을 다시 공포와 독재,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함량 미달의 천박한 후보입니다.
교수님 세대가 피와 땀으로 일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더 성장, 발전시킨 집단이 누구입니까?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민주당의 흐름이 ‘국민의힘’ 쪽 흐름보다 훨씬 긍정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으실 겁니다.
그리고 그런 민주주의의 확대, 경제 성장, 인권, 환경, 복지, 예술의 성장을 이끌어 갈 적임자가 바로 이재명 후보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과거로 퇴행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윤석열 후보를 선택하면 대한민국은 과거로 퇴행하는 것이고, 이재명 후보를 선택하면 미래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교수님께서 올바른 선택을 하실 거라 믿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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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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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파는 집 - 스티븐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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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파는 집 - 스티븐 킹
장편소설. 1천 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이지만,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스티븐 킹의 특징이자 장점인 인물 개개인에 대한 서사의 핍진성은 여전히 놀라운데, 작품을 관통하는 서사는 빈약한 편이다. 소설 앞부분에 릴런드 곤트가 등장하고, 그가 잡화점을 시작하면서 이 서사의 끝부분이 보이는 건 나만의 관찰력은 아닐 것이다.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가 아니라, '그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모든 종류의 부정적 감정이 주인공이다. 탐욕, 이기심, 경쟁심, 질투, 시기, 분노, 차별, 불만 같은 부정적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런 감정은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언더 더 돔'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체스터밀이 거대한 투명 돔으로 갇히면서 발생하는 마을 주민 사이의 갈등과 폭력을 그린 소설인데, 양상이 조금 다를 뿐, 캐슬록에서 벌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폭력은 근본에서 같다.
캐슬록은 작은 시골 마을로 사람들이 조금씩은 알고 지낸다. 시골에 살면 한다리 건너 누구네 집에 사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도시처럼 익명으로 살기 어렵다. 마을 행사에도 참여해야 하고, 친하게 지내면 밥도 같이 먹게 된다.
차라리 도시처럼 철저히 익명으로 살아가면 상대에 관해 모르고, 알고 싶지 않고 관심을 끊고 살면 사건이 발생할 확률도 낮아진다. 대신 도시에서의 삶은 고립되어 외롭고 쓸쓸한 삶이 될 확률이 높다. 어느 쪽 삶을 선택하는지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핵심은, 사람과 가까워지면 감정을 나누게 되고, 그 감정의 교류가 꼭 좋은 쪽으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게 이 소설의 배경이다.
인간이 모여 살면서 좋은 점도 많지만, 필연적으로 경쟁, 질투, 이기심 같은 감정이 나타났다. 이건 한 개체가 생존할 때 필요하기 때문에 발현된 것이며, 부정적 감정이지만 반드시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다. 경쟁, 질투, 이기심 등의 감정은 다른 개체보다 내가 더 노력하고, 성장하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건 곧 경쟁하는 동성들 사이에서 우수하고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이성을 만날 기회가 많아지는 걸 의미한다.
즉,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에서 경쟁, 질투, 이기심, 욕망, 시기의 감정이 발생하는 배경과 원인을 말할 때, 개체 또는 집단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둔다면, 그런 감정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부정적 감정을 개체(인간)가 좋은 쪽으로만 발현하거나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개체와 집단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부정적 감정'이라고 정의했다. '경쟁'의 경우는 꼭 부정적이지 않지만, '경쟁'하려는 의지와 행동에서 시기, 질투, 이기심 같은 부수적 감정이 나타나고, 이 바탕에 보다 본질적인 '탐욕'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캐슬록 마을에 어느 날 영업을 시작한 작은 상점 '니드풀 씽스(needful things)'가 사람들 눈에 띈다. 작은 마을이어서, 거리에 가게가 문을 열면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본다. 어떤 상품을 파는지, 누가 주인인지, 주인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그 가게를 드나드는지 등등.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그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구경하는데, 신기하게도 꼭 자기가 갖고 싶었던, 원하던 물건이 눈에 띈다. 모든 사람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욕망하는 물건을 찾아주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가게 주인 릴런드 곤트는 외지에서 온 사람이다.
여름 한 철 관광객이 잠시 머물다 가는 시골 마을에 외지에서 온 사람이 가게를 열었다는 자체도 뉴스거리가 되고, 그 사람이 파는 물건이 새 제품도 아닌, 골동품이라는 것도 신기한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가게에 별 생각 없이 들렀다 깜짝 놀란다. 마음이 설레고, 심장이 뛸 정도로 갖고 싶은 물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물건이라는 게 너무 소박하고 값싼 것들이라 다른 사람에게는 우습게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애착을 갖는 물건이 꼭 비싼 건 아니다. 소소하고 값싼 물건이라도 특히 집착하거나 애정을 듬뿍 담아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경우가 더 많다. '니드풀 씽스'에서 사람들은 그런 물건을 발견한다.
'니드풀 씽스'의 주인 릴런드 곤트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이 원하는 물건, 그들의 욕망을 충족하는 물건을 보여준다. 즉, 사람들은 자기의 호기심, 욕망을 충족해주는 사람에게 끌리며, 그런 사람의 말을 따른다고 반대로 해석할 수 있다.
작품에서도, 릴런드 곤트에게 물건을 싸게 산 사람들은 릴런드 곤트가 물건을 싸게 주는 대신 '가벼운 장난'을 하나 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이때 '가벼운 장난'은 물건을 산 사람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이 크지 않아 릴런드 곤트의 제안을 수락한다.
하지만, 사람이 연못에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에게는 목숨이 걸린 것처럼, 누군가 '가벼운 장난'으로 한 짓이, 어떤 사람에게는 목숨을 거는 행위라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가볍게 생각한다.
릴런드 곤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쟁, 이기심, 질투, 분노, 시기, 탐욕 같은 감정을 통제한다. 악마는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사기꾼은 99%의 진실을 말하며, 악마는 친절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초등학생 브라이언 러스크는 귀한 야구카드를 '니드풀 씽스'에서 싼값에 산다. 그리고 릴런드 곤트에게 '가벼운 장난'을 하나 해주면 야구카드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겠노라는 말을 듣는다. 어린이의 영혼까지도 아무런 가책없이 잡아먹는 악마라는 사실을 캐슬록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
쪽지, 편지, 애완견 살해, 돌멩이로 창문 깨기 같은,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장난'이 오해와 불신과 질투와 욕망에 사로 잡힌 사람들 사이에서 뇌관이 터지는 것처럼, 어느 순간 폭발하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결과를 드러낸다.
그렇게 캐슬록 사람들은 미쳐날뛰고, 마을 행정위원장 댄포스 키턴은 아내를 살해하고, 공사장에 보관하던 다이너마이트를 곳곳에 설치해 장례식장, 시청 건물, 다리를 폭파한다.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마을은 불에 타고, 미쳐 날뛰는 사람들로 캐슬록은 아비규환, 지옥이 된다.
마을 하나를 완전히 궤멸시키고 사라지는 릴런드 곤트의 정체는 독자가 상상하는 그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어느 정도 읽은 독자라면 작품 초반에 이미 정체를 알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보안관 앨런 팽본은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니드풀 씽스'의 주인 릴런드 곤트를 눈여겨 본다.
소설의 마지막은 앨런 팽본과 릴런드 곤트의 대결이 하이라이트지만, 인간 사이에 스며들어 인간을 파멸시키는 악마의 정체가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악마'는 외부에서 들어오는가, 아니면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 그 자체인가.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을 오해하고, 불신한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자기 목숨을 대신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사소한 가짜 편지 한 장으로 그 사람을 증오하는 감정이 든다면, 그건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인간의 감정은 너무 쉽고 빠르게 바뀔 수 있으며, 대부분의 인간은 어리석어서 외부의 작은 자극만으로도 사랑이 증오로 바뀔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현명한 사람은 이런 감정의 기복과 변화를 알아채고, 그 감정의 뿌리를 냉정하게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릴런드 곤트가 사람들의 부정적 감정을 충동해 폭력을 일으키지만, 외부의 개입이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가족, 이웃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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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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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서머스 - 스티븐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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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서머스 - 스티븐 킹
스티븐 킹의 소설을 나름 읽었고, 그의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말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어 원문이 아니어서, 그의 농담과 재치를 전부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말로 번역한 소설만으로도 스티븐 킹의 속내는 어지간히 알아서 짐작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스티븐 킹의 '글쓰기'에 관해 꽤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그의 다른 소설과 달리 '스티븐 킹의 글쓰기'라는 형식에 관해서 특히 잘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그의 소설들에서 소설의 내용 즉 '서사'와 인물에 흥미와 관심을 두었다면, 이 소설은 작가의 글쓰기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 작품에서 스티븐 킹은 주인공 빌리가 해야 하는 살인청부 암살, 암살 준비 과정에서 위장을 위한 작가의 삶, 작가 흉내를 내려다 진짜 작가처럼 글을 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빌리, 우연한 사건으로 알게 된 앨리스와의 만남, 암살 이후 벌어지는 진짜 이야기 등 모두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순차적으로 하나로 묶으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예전에는 거의 느끼지 못했거나, 약하게 느낀 정도였으나 이 작품에서는 스티븐 킹이 소설의 얼개를 짜는 방식이 눈에 훤하게 보였다. 그건 나를 포함한 독자를 완벽하게 속이지 못했다는 뜻이다. 즉, 이 작품의 얼개는 다른 작품보다 인위적이고,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빌리는 우연히 살인청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지만, 그가 매우 탁월한 솜씨를 보이면서 점차 몸값이 비싸진다. 그는 이제 살인청부의 세계에서 은퇴를 할 생각이었으나 일감을 주는 닉을 통해 이번 한 번만 하고 은퇴하라는 말을 듣는다. 마지막 한 번이고, 금액이 매우 커서 빌리는 내키지 않지만 일을 맡기로 결정한다.
빌리가 노리는 타겟이 법원 계단에 나타날 때까지 몇 달의 시간이 남아 있어서, 빌리는 그 주변에서 평범한 이웃들과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는 사무용 건물 한 칸을 임대해 그곳에서 글을 쓰고, 먹고 자는 집을 임대해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며 생활인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스티븐 킹은 왜 빌리가 '작가'로 모습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빌리가 '작가'의 모습으로 위장하게 되는 과정과 내용은 어쩌면 필연으로 보인다. 법원이 보이는 사무용 건물을 써야 하는데, 그 빌딩에 입주한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눠야 할 때, 빌리가 다른 전문직으로 일한 적이 없으므로, 가장 만만한 직업이 '작가'라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빌리를 '작가'로 위장한 다음, 스티븐 킹은 빌리가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쓰도록 만든다. 그래서 독자는 주인공 빌리가 스스로 쓰는 자전적 이야기를 읽는다. 즉, 작가인 스티븐 킹이 빌리의 과거를 말하지 않고, 작중 인물인 빌리가 직접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형식이다.
빌리는 책은 꾸준히 읽는 사람이지만, 글은 한번도 써본 적 없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이야기를 써보자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득히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글쓰기는 정신 치료에서 매우 긍정적 효과를 내는 방식이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식은 여럿 있지만, 글쓰기의 힘은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빌리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글을 쓰지만, 그는 자전적 소설을 쓰면서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즉, 스티븐 킹은 주인공 빌리를 통해 빌리가 스스로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하고, 그건 성공한다.
빌리의 과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행했다. 빌리는 아버지 없이 자라는데, 그건 스티븐 킹의 어린 시절과 같다. 엄마는 남자 친구를 자주 바꾸고, 품성이 나쁜 남자 친구를 만나 삶이 시궁창 같으면서도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빌리의 여동생 캐시가 엄마의 남자 친구에게 맞아 죽는 장면을 보았고, 그가 불과 아홉 살에 여동생을 죽인 남자를 총으로 쏴죽인다.
엄마는 술을 마시고, 질 나쁜 남자를 만나 결국 마약가지 하면서, 빌리는 위탁 가정에 맡겨지고, 그는 그곳에서 줄곧 생활하다 해병대 입대한다. 빌리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고, 불행한 기억만이 남았으며, 가족과의 행복, 즐거운 추억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빌리의 자전적 소설은 작품이 거의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가 쓴 소설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으며, 다만 실존하는 인물의 이름을 바꿨을 뿐이다. 빌리가 자전적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까지는 이해하지만, 글을 써본 적 없는 빌리가 꽤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너무 작위적이지 않을까?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빌리는 학교도 거의 다니지 않았고,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가 꾸준히 책을 읽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늘 책을 갖고 다니며, 시간을 내서 책을 읽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읽고 있던 책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었다. 이 책은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만들 때 모티프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빌리가 작품 속에서 자전적 소설을 쓸 때, 그 문장은 스티븐 킹의 문장이 아니라 빌리의 문장이므로 당연히 어설프고 미흡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우연히 만난 앨리스는 빌리가 쓴 소설을 읽고 재미있다고 말하고, 좋아한다. 그건 적어도 빌리가 자기의 지난 삶을 거짓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문장력이 부족해도 진솔함이 보이는 문장이라면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 책은 400페이지 두 권인데, 1권에서 암살 사건이 끝나면서, 진짜 이야기는 암살이 아니라는 걸 독자는 알게 된다. 그렇다면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2권에서는 암살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는 것도 짐작한다. 빌리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자전적 이야기는 1권에서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에 이어 해병대 입대, 이라크 파병과 전투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가 저격수로 발탁되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2권에서는 이라크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전우들이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내용들이 나오는데, 빌리는 어릴 때는 물론, 전쟁 트라우마까지 겪으면서 용케 사회 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우연한 사건으로 스무 살 아가씨 앨리스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만남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서사이자, 빌리의 삶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빌리는 앨리스가 성폭행을 당하고 죽기 직전에 그녀를 구하는데,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앨리스가 참혹하게 죽은 여동생 캐시와 동일시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즉, 앨리스를 지키는 것이 죽은 여동생 캐시를 지키지 못한 자기의 나약함에 대한 보상이라고 무의식에서 반응하는 것이다.
계획한대로 암살은 성공했지만, 빌리는 자기에게 일감을 준 사람들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혼자만의 탈출 계획을 만들어 탈출한다. 빌리가 암살한 사람은 범죄자로, '죽어 마땅한' 놈이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빌리 역시 다른 암살자와 조직의 타겟이 되어 쫓기는 몸이 된다.
자기 목에 60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는 걸 알게 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래선을 추적해 누가, 왜 자기를 죽이려는지 알아내는 것이 2권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이때 이 모든 과정을 우연히 만난 앨리스와 함께 하면서, 빌리와 앨리스의 우정은 깊어지고, 앨리스를 지키려는 빌리의 마음은 오빠나 아버지 같은 심정이 된다.
책 표지에 '하드보일드 누아르 스릴러'라고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살인청부를 하는 빌리는 '나쁜 놈만 죽인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고, '누아르'라고 할 만한 내용은 빌리가 죽인 범죄자와 관련 있는 언론 재벌 클라크와 그의 아들에 관한 내용 뿐이다. 빌리는 '하드보일드'하지도 않고, 작품의 내용은 '스릴러'하고도 거리가 있다.
빌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 과거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이 스티븐 킹이 가장 잘 하는 묘사인데, 그가 우연히 만난 앨리스에게 자기의 모든 걸 주는 과정에서, 스티븐 킹이 늘 보여주는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입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빌리는 아동성폭행, 아동성매매, 여성에 대한 성폭행, 성추행에 관해서는 일말의 용서가 없다. 그의 작품에서 이런 내용이 나오면 반드시 철저하게 응징, 복수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불행한 여성이 자기의 현실을 극복하고, 용기를 갖게 되는 장면, 여성이지만, 세상의 편견과 억압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당당하게 독립하려는 당찬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빌리는 자기의 과거를 스스로 지움으로써, 앨리스가 새롭게 출발하는 삶을 응원한다. 빌리가 쓴 자전적 소설은 빌리의 부재(不在)를 대신하는 그의 실체이며, 앨리스는 빌리가 쓴 소설을 이어받아 자기 이야기를 써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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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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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워크 – 리처드 바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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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워크 – 리처드 바크만
이제 막 마흔 살이 지난 도스는 세탁물 공장의 중간관리자로 일하는 백인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았다. 스무 살에 아내 매리를 만나 결혼했고, 부부 사이는 원만하며, 도시 외곽에 ‘내 집’을 갖고 있는 백인 중산층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사는 배경은 1973년과 1974년으로, 이때 미국은 몇 가지 중요한 외부적 사건으로 미국 사회가 시끄러운 상황이다. 이미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미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이었고, 의미 없는 전쟁에 미국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개죽음을 시킨다는 비판 여론이 폭발하고 있었다.
이런 시국에 1972년 11월 7일, 미국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닉슨이 선거에서 이겨 미국대통령이 되었다. 이때 닉슨은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재선이었으며, 1974년 8월 9일 대통령 자리에서 자진 사임하는 것으로 불명예 퇴진한다.
‘워터게이트’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닉슨의 측근들이 꾸민 ‘재선 공작’의 일부가 들통나면서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정치 사건이었다.
또한 1973년에서 1974년 기간에 중동에서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세계적으로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이 전쟁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뺐긴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되찾는 전쟁이었지만 결론은 다시 이스라엘이 이긴 전쟁이 되었다.
이스라엘 뒤에는 미국이 있었고,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중동 국가들(이집트, 시리아) 뒤에는 쏘련, 북한, 동독, 파키스탄, 레바논 등이 지원했다. 전쟁의 수단 가운데 하나로, 원유 가격을 인상하고, 원유 생산량을 줄이겠다는 중동 국가들(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OPEC 가입 국가)의 결의로 오일 쇼크가 시작되었고, 원유 가격은 약 3배 정도 폭등했다.
‘오일 쇼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는 미국과 유럽이었으며, 이 작품에서도 미국 사회에서 주유소에 휘발유와 경유가 제때 공급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내용이 나온다.
도스의 삶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그가 사는 마을이 새로 공사하는 고속도로에 편입되면서 사라질 처지가 되면서다. 주 정부는 동쪽에서 서쪽을 잇는 고속도로를 새로 건설하면서 도스가 사는 마을,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의 크지 않은 마을을 밀어버리고, 그 위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도록 설계했다.
이미 마을 주민 대부분은 보상금을 받고 마을을 떠났으며, 도스를 포함해 몇 집만 남았고, 그들도 곧 마을을 떠날 예정이었다. 오직 도스만이 마을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스의 아내는 당연히 보상금을 받고 다른 마을에 집을 매입해 떠나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도스는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속인다.
고속도로 신설 공사는 도스의 마을은 물론 그가 다니는 직장까지 영향을 끼치는데, 세탁 공장도 고속도로 공사 범위에 있어 철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스는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부지를 알아보고, 매입 결정을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공장부지 매입 계약을 하지 않으면서 결국 스스로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20년을 애정을 갖고 다닌 회사를 스스로 떠난다.
이 소설은 나에게 매우 ‘개인적인’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에 감정을 이입하게 하는 장치가 있는데, 도스가 자기 집에 집착하면서 집을 떠나지 않으려는 심리, 자기 집이 철거회사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무허가 건물이라고 시에서 파견한 용역들에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걸 보면서 느낀 슬픔과 분노가 되살아났다.
도스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간다. 그는 보상금을 받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며, 다니던 직장에서도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부지를 매입해 중간관리자로 일하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도스의 내면에서 그를 파멸로 이끄는 힘이 있었고, 그 정체가 정확히 무언지 알지 못하지만, 지금의 상태에서 앞으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막연한 느낌을 갖는다.
도스는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의 삶에 발목을 잡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도스가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것도, 그가 지키고 싶은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과거의 추억이 된 슬픔과 아픔이지만.
도스의 삶을 이해하려면 그의 과거를 들여다봐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별문제 없이 살아가는 도스와 매리 부부지만, 그들의 과거에는 자식을 잃은 깊은 슬픔과 아픔이 있었다. 도스의 행동이 때론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도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의 내면이 붕괴되는 과정을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도스의 일방적 행동으로 삶의 기반이 무너지면서 매리는 도스를 떠나고, 결국 이혼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 도스가 계획한 일련의 과정이라고 본다. 매리는 아직 삼십대 후반의 매력있는 여성이고,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도스는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을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도스는 매리를 실망시키고, 매리가 자기를 떠나도록 ‘연기’한다. 물론, 도스는 매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지만, 도스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만큼, 매리를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하는 갈등을 감수한다.
집을 철거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공사업체에서 보낸 변호사가 최후 통첩을 하러 방문한다. 도스는 보상금을 받겠다고 말하고, 그 돈을 받아 절반은 이혼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 매리에게 보내고, 절반은 자선 단체와 그가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보낸 젊은 여성 올리비아에게 보낸다.
도스가 스스로 파멸을 선택한 심리적 배경에는 어린 아들을 잃은 슬픔말고도, 그가 20년을 일한 회사가 주인이 바뀌면서 달라진 환경에도 있었다. 도스는 스무 살 무렵부터 이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고, 그때는 이 세탁 공장이 가족기업으로, 사장인 타킹턴 씨가 운영했으며, 나중에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회사를 운영했다.
도스는 이 회사에 다니며, 회사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대학 공부를 했고,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회사에 복귀해서 관리자가 되었다. 도스에게 이 회사는 단순한 ‘직장’의 의미를 넘어, 하나의 ‘가족’으로 여겨지는 존재였다.
도스의 마음을 흔든 또 하나의 사건은, 그와 오래 함께 일한 조지 워커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이었다. 좋은 동료를 잃은 슬픔도 깊었지만, 조지 워커의 형도 자살하고 말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우연이지만, 도스가 쇼핑몰에서 본 한 여성이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눈앞에서 사망하는 장면을 보았다.
이런 일련의 상황이 도스가 파멸을 선택하는데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즉, 도스의 마지막 행동까지는 매우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그의 행동을 이끌어낸 계기들은 어린 아들의 죽음, 아들과 추억이 얽힌 집의 철거, 서로 인사하며 지내던 이웃과 헤어짐, 회사의 이주와 경영진의 냉정함, 형제처럼 친한 동료의 죽음 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나타난 결과다.
이 소설은 공포, 호러, 스릴러 장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도스의 내면에서 들리는 또 다른 목소리가 도스의 분열적 정신상태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도스의 정신은 멀쩡하고, 자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스가 파멸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가 공포이며, 평범한 한 사람이 맞닥뜨리는 현실과 삶의 과정에서 겪는 슬픔과 고통이 바로 공포라는 걸 소설은 말하고 있다.
누구나 살면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가 있다. 옳지 않은 일을 보면서 모른체하며 넘어갈 수도 있지만, 도스처럼 옳지 않은 일을 바로 잡으려 자기 목숨을 던지는 사람도 드물지만 있다.
도스는 마을을 파괴하고 지나가는 고속도로 현장을 테러한다. 화염병을 만들어 장비와 컨테이너에 불을 지르고, 자기 집에 폭탄을 설치하고 경찰과 대치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으려 한다.
이런 시도는 성공하고, 언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지만,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 고속도로를 만들기로 결정한 건 주 정부였고, 국가(주 정부)권력은 늘 개인을 압도하고, 개인의 삶을 파괴해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소설을 쓴 작가 리처드 바크만은 미국 소설가로 다섯 권의 장편소설을 펴냈는데, 미국 문단과 독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한 서점 직원 스티브 브라운이 스티븐 킹의 소설 Voives와 리처드 바크만의 소설 Thinner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리처드 바크만’이 ‘스티븐 킹’일 거라는 강한 의심을 한다. 스티브는 리처드 바크만과 스티븐 킹의 저작권 대리인 같다는 걸 확인하고 리처드 바크만의 책을 펴낸 출판사에 확인해 결국 리처드 바크만이 스티븐 킹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밝힌다.
이 소설의 배경인 1973년, 1974년은 스티븐 킹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던 때와 같아서, 스티븐 킹은 ‘인간의 고통’, ‘개인의 고통’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였고, 이런 생각을 구현한 작품이 ‘로드워크’다.
스티븐 킹 소설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인데,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이며 정밀한 묘사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표현하는 심리 묘사가 그것이다. 이 두 방식은 픽션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현실감을 증폭하며,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한다. 마치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실성, 인물이 가진 개성과 자연스러운 심리의 변화를 이해하고 긍정하는 힘을 갖게 하는 심리 묘사에서 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하고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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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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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 스티븐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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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 스티븐 킹
혼령을 보고, 혼령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어떤 경험을 할까. 스티븐 킹은 이런 질문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고, 어머니와 살고 있는 제이미는 서너 살 때 이미 혼령을 보기 시작한다. 그는 너무 어려서 사람과 혼령을 구분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를 실제와 똑같이 보고, 대화까지 할 수 있다. 이 능력을 엄마인 티아가 알게 된 건 제이미가 여섯 살 무렵이고,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작은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아들의 능력을 인정한다.
제이미 엄마 티아는 저작권 대리 사무실을 운영하는데, 꽤 괜찮은 수입을 올리는 업체여서 넉넉한 생활을 한다. 외삼촌(제이미 엄마의 오빠)이 하던 저작권 대리 사업을 물려받아 꾸준히 성과를 내며 넉넉한 삶을 살던 티아와 제이미는 그러나 투자 사기를 당하면서 가진 재산을 모두 잃게 되고 한동안 어려운 생활을 한다.
제이미의 엄마 티아는 리즈와 연인 사이다. 엄마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제이미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리즈는 경찰이지만 마약 운반을 하는 부패한 경찰이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티아나 리즈 모두 2008년 모기지 사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고, 티아보다 리즈의 가족이 더 큰 피해를 당해 리즈가 경찰이면서도 마약을 운반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는 계기가 된다.
제이미는 혼령을 보는 특별한 재능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건에 말려들면서 끔찍한 경험을 한다. 물론 엄마를 위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작가의 혼령을 만나 쓰다 만 소설의 내용을 받아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끔찍한 경험을 더 많이 한다. 더구나 엄마의 연인이었던 경찰 리즈에게 납치당하면서 생명이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하는데, 기지를 발휘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난다.
제이미의 도움으로 엄마 티아는 저작권 대리업이 다시 좋아지고, 수입이 많아지면서 다시 안정적 생활을 하게 된다. 제이미의 외삼촌이자 엄마의 오빠인 해리가 요양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요양원에 간 제이미는 혼령 해리를 만난다. 그리고 묻지 말았어야 할 질문을 한다. 삼촌, 내 아빠가 누군지 아세요?
이 소설은 제이미의 성장소설이다. 제이미의 독백으로 진행하고, 제이미가 여섯 살 무렵부터 막 성년이 되는 열 여덟 살까지의 이야기 가운데 삶에서 중요한 경험을 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제이미는 이 이야기를 '공포 소설'이라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어린 제이미가 외부모인 엄마와 둘이 살면서 겪은 인생 이야기이면서 결코 바라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제이미의 슬픈 탄생과 성장의 이야기다. 제이미는 엄마와 비교적 넉넉하고 행복한 삶을 살며 성장하지만, 그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그는 깊은 딜레마에 빠진다. 즉,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놓인 딜레마와 같은, 결코 돌이킬 수도, 잊을 수도 없는 낙인을 가슴에 찍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제이미는 테리올트의 혼령이 사라지지 않고 자기를 따라다닌다는 걸 알게 된다. 폭탄을 건물에 설치해 많은 사람을 해치던 폭파범 테리올트는 정체가 드러나면서 자살하는데, 제이미는 형사 리즈의 강압으로 테리올트의 혼령을 보게 되고, 그에게 마지막으로 설치한 폭탄이 어디 있는지 알아낸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생명을 구했지만, 정작 테리올트의 혼령이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제이미의 뒤를 따라다니며 괴롭히자 제이미는 존경하는 버켓 교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다.
제이미는 테리올트의 혼령이 나타나자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먼저 다가가 그 혼령을 끌어안는다. 혼령을 지배하는 힘은 실체가 없었지만 마치 지구 밖 멀고 먼 외계에서 온 존재로 여겨진다. 그동안 제이미가 봤던 혼령들은 제이미가 묻는 말에 진실을 말했으며, 공격적이지 않고, 일주일쯤이면 혼령의 존재가 사라지지만, 테리올트의 혼령 내부에 또 다른 무언가 존재하고 있어 테리올트는 시간이 많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제이미가 보이지 않는 존재를 향해 달려들자 그 존재는 오히려 겁을 먹고 도망한다. 제이미는 그 존재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제이미가 부를 때면 언제든 나타나기로 약속한다. 버켓 교수는 제이미에게 말하길,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존재를 다시 불러내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 존재는 무얼까. 단순히 외계에서 온 불가항력의 존재일까. 그건 제이미의 정신 세계로 읽힌다. 아버지 없이 자란 제이미는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지만 여전히 아버지가 없는 정신적 허기를 느낀다. 아이에게 엄마는 하나의 우주, 절대 세계이면서 온전한 존재다. 그런 엄마가 로즈라는 동성의 연인과 사귀고, 사랑을 할 때, 제이미는 질투, 공포, 외로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제이미는 성장 과정에서 느낀 이 부정적 감정에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가 온다.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접어드는 질풍노도의 시기, 정신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면서도 쉽지 않은, 부모를 뛰어넘어 자기의 정체성과 자아의 독립을 이루어야 하는 시기가 닥치고, 제이미가 겪은 혼령과의 대화나 보이지 않는 끔찍한 존재와의 사투는 제이미가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독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힌다.
제이미가 알게된 출생의 비밀로 이 소설은 공포에서 잔혹극으로 변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비밀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한 사람의 삶과 존재를 규정하거나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제이미가 알게 된 비밀은 더욱 그 자신은 물론,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심각한 비밀이었고, 그걸 아는 순간 제이미의 삶은 근본에서 흔들린다. 그가 혼령을 보고, 혼령과 대화를 나누는 경험이 그의 삶을 뒤흔든 것처럼. 그 둘은 결국 같은 의미이며, 자기 정체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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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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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에서 - 스티븐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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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에서 - 스티븐 킹
스콧 캐리는 40대 백인 남성이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기획, 제작하는 프리랜서로 일하며,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다. 키는 190센티미터가 넘고 몸무게도 120킬로그램이 나가는 거구인데, 평범하고 선량한 남성이다. 이웃의 은퇴한 노인이자 의사였던 밥 엘리스와 친하게 지내는 스콧은 최근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말한다.
날마다 몸무게가 줄어들고 있다면 좋은 일일까. 어느 정도까지는 좋은 일이겠으나, 스콧에게 일어난 것처럼 감량이 멈추지 않고 날마다 조금씩 꾸준히 줄어드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오로지 '몸무게'만 줄어든다면.
스티븐 킹은 '몸무게가 줄어드는 남자'라는 아이디어로 짧은 소설을 한 편 썼다. 평소라면 이 정보 분량은 단편집 모음에 들어가는 게 맞을 정도다. 내용도 그렇고, 분량도 중편 수준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을 하나의 '장편'으로 펴낸 걸까.
스콧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심지어 행복하다고 느낀다. 비록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지만, 지금 하는 프리랜서 업무가 잘 풀려서 몫돈을 만졌고, 건강도 아무 문제 없고, 좋은 이웃들과 지내며, 나쁜 일이 일어나지도 않고 그럴 만한 꼬투리도 없다.
이웃에 사는 레즈비언 부부(가운데 남편 역할을 하는) 매콤과는 조금 불편한데, 그 집의 강아지들이 스콧의 마당 잔디밭에 똥을 싸기 때문이다. 스콧은 강아지와 산책할 때 목줄을 하고, 똥을 치워달라고 말한다. 매콤은 필요 이상으로 스콧에게 냉정하게 대한다.
레즈비언 부부인 매콤과 디어드리는 보스톤에서 이사온 '결혼한 레즈비언 부부'로, 이곳에 채식 식당을 열고 운영하고 있다. 음식은 맛있지만 보수적인 동네여서 레즈비언 부부를 곱게 바라보지 않고, 뒤에서 흉을 보거나 험담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스콧도 안다.
마을 축제의 하나로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스콧도 참가한다. 매콤은 다른 지역의 달리기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아마추어보다는 잘 달리는 실력인데, 스콧은 그런 매콤에게 내기를 하자고 요청한다. 스콧이 이기면 스콧의 집에서 채식 요리를 먹으며 이웃으로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 전부였다.
매콤이 보기에 거구의 중년 백인 남성인 스콧은 달리다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아 보였지만, 농담인줄 알면서도 그러자고 한다.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하고, 스콧은 처음에 천천히 뒤쳐지다가 조금씩 속도를 내며 앞으로 나간다. 결승선이 가까워지면서 폭우가 쏟아지고, 매콤을 추월하던 스콧은 넘어지려는 매콤을 부축해 일으켜 그가 결승선을 먼저 지나가도록 돕는다.
지역신문에 두 사람의 사진이 실리고, 문을 닫을 위기에 있었던 매콤과 디어드리의 식당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자리를 잡는다. 이들 매콤과 디어드리 레즈비언 부부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스콧이었고, 이제 그들은 스콧의 주방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이웃의 밥 엘리스 부부와도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친밀한 사이가 된다.
스콧은 그들에게 자기의 몸무게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고 밝히고, 곧 몸무게가 0에 수렴하면 자신은 떠난다고 말한다. 현대 의학으로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지만, 가장 가까운 이웃인 밥 엘리스 부부와 매콤 부부에게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마침내 스콧의 몸이 저절로 허공에 떠오를 정도가 되던 날, 스콧은 매콤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풍선을 잡고, 허리에는 폭죽을 매달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밥 엘리스 부부와 매콤 부부가 하늘로 올라가는 스콧을 지켜본다.
스콧은 왜 몸무게가 날마다 줄어들까. 스티븐 킹의 아이디어는 단순했을 걸로 본다. 날마다 몸무게가 줄어들다 마침내 0에 수렴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스콧은 자기 몸무게가 줄어드는 걸 보면서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암에 걸리지 않고, 병에 걸려 고통당하지 않고, 몸무게가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몸무게'는 육체적, 물질적 의미의 '몸무게'이기도 하지만, 스콧의 정신 연령일수도 있고, 존재의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일수도 있다. 스콧은 큰 고민 없이 사는 평범한 백인 중년 남성으로 보이지만, 그의 내면에서 '인생의 환희', '삶의 기쁨', '존재의 감동'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즉,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일상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스콧의 소멸은 스스로 지금의 현실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자신의 결정에 따른 결과다. 스콧이 자신의 소멸을 바라지 않아 보이지만, 그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온전히 인정한다. 날마다 몸무게가 줄어드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의 몸무게가 머지 않아 0에 수렴하면 자신이 소멸할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스콧에게 좋은 이웃이 있지만, 이웃은 본질에서 스콧의 삶을 붙드는 강력한 의미를 갖는 존재는 아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가족 사이에서도 자살하는 가족이 있는데, 아무리 가까운 가족도 '개인'의 존재에 관한 본질적 고민과 고통에 관해서는 교감하기 어렵다.
스콧이 어떤 외부의 영향이나 작용 없이 저절로 몸무게가 0에 수렴하는 현상은 온전히 스콧 내부에서 발생한 존재론적 문제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소설이 공포, 호러, 스릴러가 되려면 스콧의 몸무게가 0으로 수렴하는 원인과 과정에서 불가사의하거나 끔직한 일이 벌어져야 하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시 스콧의 상황을 객관의 눈으로 보자면, 스콧은 40대 백인 남성으로 몸집이 크다. 그는 혼자 살고, 가까운 이웃이 있지만 또래의 친구는 없다. 결혼했지만 이혼했고, 자녀는 두지 않은 걸로 나온다. 그에게 가족은 멀리 사는 고모가 한 분 계실 뿐이니 고아나 마찬가지다. 스콧은 외로운 남성이다.
천성은 착하고, 나름 밥벌이는 하지만, 여성에게 인기가 없고,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 스콧은 이렇게 살아가는 나날이 지겹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렇게 공허한 나날을 보내던 스콧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시한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게 암이든, 병이든, 자살이든 마찬가지다. 그는 결심했고, 세상을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그의 몸무게가 0으로 수렴하는 시간은 불과 두어 달. 그때까지 마음을 다스리며 이웃들과 즐거운 시간을 만들기로 작정한다.
이 작품을 홍보하는 전단지에서는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전에 없던 상냥함'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 작품은 고독한 삶을 살던 중년 남성의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록 스콧 자신이 선택한 마지막이긴 해도, 모든 마지막은 슬프고, 안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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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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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 스티븐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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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 스티븐 킹
해리건 씨의 전화기
크레이그는 아버지와 함께 작은 시골마을에서 산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고,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지만, 그의 마음에 깊은 슬픔이 일렁이고 있다. 스티븐 킹은 어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줄곧 형과 엄마, 세 식구가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이 소설에서는 엄마로 바꿨을 뿐, 그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크레이그는 마을에 이사 온 엄청난 부자로 은퇴한 해리건 씨를 알게 되고, 그의 집에서 책을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 소설이 독특한 점은, 그동안 IT와 관련해 거의 언급한 적이 없는 스티븐 킹이 아이폰, 아마존을 비롯한 첨단 정보산업과 미국 투자회사와 관련한 정보를 나열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해리건 씨가 은퇴하기 전 투자를 통해 억만장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배경에 깔아놓는다.
해리건 씨는 크레이그에게 일 년에 네 번 카드를 보내는데, 그 속에 복권을 함께 넣었다. 우연히 그 복권이 당첨되었고, 해리건 씨는 당첨금을 애플 주식에 투자하라고 권한다. 이때 애플에서 막 '아이폰'이 나오기 시작했고, 크레이그는 생일선물로 '아이폰'을 받았으며, 해리건 씨에게 '아이폰'을 선물한다.
크레이그의 성장소설이면서, 해리건 씨와의 인연으로 발생하는 신비하고 놀라운 경험을 담고 있지만, 스토리는 진부하다. 다만 그동안 스티븐 킹의 놀라운 이야기 솜씨처럼, 이 소설도 읽는 즐거움이 있다. 매우 핍진하게 담겨진 에피소드는 서사의 사실성을 높이는 배경이 되고, '아이폰'의 등장, 억만장자의 죽음과 상속, 크레이그가 유산의 일부를 물려받는 행운, 물려받은 유산으로 '아마존'에 투자하는 내용 등에서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유머'는 다 읽을 수 있지만, 그건 지금에 와서는 조금 낡아버린 이야기가 되었다.
또한 크레이그가 해리건 씨의 장례식에서 죽은 해리건 씨의 옷에 그의 '아이폰'을 몰래 집어 넣은 다음, 시간이 지나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설정은 재미있지만, 충격적이지는 않다.
크레이그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모두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크레이그는 그것이 죽은 해리건 씨가 영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지만, 그건 미스터리로 남겨 둔다.
척의 일생
독특한 형식의 소설. 시간의 흐름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척 크란츠'의 짧은 삶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단편소설 세 편의 연작으로 구성했다. 각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은 공통점이 없으며, '척 크란츠'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마티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강력한 지진으로 캘리포니아의 아래쪽이 떨어져 나가면서 인터넷과 전기가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도시에도 거대한 씽크홀이 생기고,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듯한 분위기에서 도시의 광고판과 텔레비전, 인터넷에 모두 '척 크란츠'를 애도하는 광고가 뜬다.
'척 크란츠'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의 없다. 그럼에도 '척'은 도시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다. 마티는 고등학교 선생이고, 이혼한 아내 펠리샤와 잘 지내고 있다. 미국은 거대한 지진이 발생해 대륙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고, 지구 전체가 불안정한 상태로 그려진다.
두 번째 작품에서, 재러드 프랑크는 길거리 공연으로 드럼을 친다. 사람들이 거의 반응 없이 지나가고, 재러드가 조금 실망하고 있을 때, 양복을 입고 가방을 든 '척'이 그 앞을 지나가다 재러드를 보고 걸음을 멈추고 드럼 연주를 듣는다. 그러다 '척'은 혼자 춤을 추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조금씩 걸음을 멈추고 '척'의 춤과 재러드의 드럼 연주를 구경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구경을 하던 재니스가 '척'의 춤 상대가 되어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사이였음에도 완벽한 춤을 추며 구경하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다. 이 장면은 삶의 한 순간,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을 그린 것으로, '척'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 번째 작품에서, 척은 어릴 때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된다. 그는 친할머니,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며 학교에서 춤동아리에 들어가 춤을 배우고, 회계사가 되어 살아간다.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걸 지켜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깊은 슬픔의 시간을 보낸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 상실감, 안타까운 감정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지만, 그들의 내면에 일렁이는 슬픔의 감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본질의 감정이기에, 해결할 수 없고, 해소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 작품은 공포, 스릴러, 호러와 아무 관련이 없는, 담담하고 담백한 내용으로, '척'의 일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에 슬픔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피가 흐르는 곳에
'피가 흐르는 곳에 특종이 있다'는 언론계의 관용어에서 온 제목. 중편이라기에는 긴 편이고, 거의 짧은 장편 길이인데, 이야기는 단순하다. 한 초등학교에 소포가 배달되고, 그 소포에는 폭탄이 들어 있었으며, 폭탄이 터져 수십 명의 어린이가 죽고 다치게 된다.
당연히 모든 방송국과 언론사에서 학교 앞으로 취재를 나오고, 치열한 보도 경쟁, 속보 경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사립 탐정인 홀리 기브니는 텔레비전에서 리포트를 하는 체트 온도스키를 본다. CCTV에 찍힌 범인의 얼굴이 공개되고, 현상금이 걸리지만, 범인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홀리는 우연히 발견한 리포터 체트에게서 설명할 수 없지만,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참사 현장에서 보도하는 그의 태도나 현장을 중계하면서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에서 그가 참사를 '즐기고' 있다는 기괴한 느낌인데, 처음에는 홀리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체트가 폭탄을 배달한 범인과 같은 인물이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전혀 엉뚱하고 터무니없는 발상이었지만, 홀리는 그 의심을 갖고 체트의 과거를 조사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참사에 체트가 현장에 있었으며, 그가 참사를 일으켰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전직 경찰이자 범인의 몽타쥬를 그리는 일을 오래 했던 노인을 만나면서, 그 노인이 수십 년 동안 체트의 뒤를 추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가 모은 구체적 자료를 보면서 홀리의 직감이 옳았다는 걸 확인한다.
체트 온도스키는 분명 '인간'이지만, 그는 인간 이상의 존재이며,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작가는 체트 온도스키가 어떤 생명체인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제2의 인간'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종류의 인간은 자기 외모를 바꿔가면서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산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온 인간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외계에서 온 전혀 다른 생명체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체트가 외모를 바꾸는 장면이 딱 한 번 나오는데, 물리적인 몸뚱아리가 출렁거리며 외모를 바꾼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인간종일 수 있고, 외계 생명체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체트 온도스키라는 한 인간이 동시에 여러 사람으로 변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참사를 저지른 범인이라는 점이다. 크고 작은 폭탄 폭파 사건,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아닌, 인간과 다른 종이라는 설정에서 이 소설은 환타지 소설로 분류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참사를 보도하며 '즐거워 하는' 언론사의 본질을 비판한 것으로 본다.
즉, 언론은 '피가 흐르는 곳에'서 자기들의 먹이가 많다고 좋아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애통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즐겁고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참사 보도는 기본적으로 자극적이고, 사람들은 자극적인 뉴스를 좋아하며, 시청률이 높아지면 광고가 많이 들어오고, 광고가 많아지면 방송사, 언론사는 돈을 더 많이 벌게 되고, 언론 자본은 부자가 되며, 그곳에서 일하는 언론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 보너스를 받는다.
사회에서 비극이 더 많이 발생할수록 상대적으로 언론은 행복해지는 이 아이러니를 스티븐 킹은 '괴물'로 표현한 것이다.
쥐
드류 라슨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면서, 단편소설을 여섯 편 쓴 작가다. 그의 단편소설이 '타임'에 실릴 정도로 괜찮았는데, 장편소설을 쓰지 못한 컴플렉스가 있다. 그는 곧 안식년을 맞이하게 되고, 과거에 장편소설을 쓰려다 크게 실패한 경험이 있어 불안하지만, 어느 날, 문득 완벽한 장편소설 이야기가 떠오른다.
드류 라슨은 아내와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버지 때부터 쓰던 별장으로 가서 장편소설의 앞부분을 쓰기로 작정한다. 별장은 몹시 외진 곳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잡화점이 20km 떨어진 곳에 있고, 전화와 전기는 들어오지만 휴대전화는 사용할 수 없으며, 전기와 전화도 언제 끊길 지 알 수 없는 산골이다.
소설을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작가인 스티븐 킹이 이미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샤이닝'이 있고, '미저리' 역시 그렇다. 작가는 '글쓰기'가 곧 자기 정체성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매우 행복한 반면 그만큼의 무게로 공포와 두려움도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드류 라슨은 지난번 장편소설의 실패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이번에는 좋은 작품을 쓰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는 완벽하게 준비를 마치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산골 오두막에서,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한 소설의 이미지를 글로 옮긴다.
모든 것이 훌륭했고, 드류 라슨 자신도 이렇게까지 글이 잘 써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소설은 처음부터 훌륭하게 시작했다.
그러다 폭풍이 몰려오고, 집 주위 나무가 쓰러지면서 창고를 덮치고, 드류 라슨은 문앞에서 기절한 쥐를 발견한다. 쥐를 멀리 내던질 수도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드류 라슨은 쥐를 벽난로 앞에 놓아둔다. 그리고 다음 날, 쥐는 사라지고, 나흘 뒤부터 드류 라슨은 글쓰기에 문제가 생긴다. 처음 장편소설을 쓸 때처럼 트라우마가 작동한 것이다.
그때 쥐가 나타나 드류 라슨에게 제안한다. 소설을 완성하도록 돕겠다. 단, 소설을 완성하면 네가 좋아하는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 그래도 하겠는가. 드류 라슨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소설을 완성하고픈 욕심에 쥐와 거래한다.
작가의 욕망이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보다 크다는 걸 작품은 말한다. 사실 이런 소재는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평범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대단히 드라마틱하지도, 공포와 호러와 피가 튀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심심하다.
차라리 외딴 집에서 겪는 공포를 다룬 단편이었다면 어땠을까. 말하는 쥐와 거래한다는 내용은 동화처럼 읽힌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명을 잃는 건 우연이었지만, 드류 라슨은 죄책감을 갖는다. 삶은 그런 우연과 죄책감이 동시에 작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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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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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법고전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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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법고전 산책
법을 다룬 책, 그것도 100년, 200년 전의 법철학 책이 과연 재미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책을 펼친 나는 시작부터 깜짝 놀랐다. 우리가 가진 상식, 법을 다룬 책은 딱딱하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단숨에 깨뜨리는 내용이었다.
조국 교수는 친절하다.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도 말했지만, 조국 교수는 친절한 저자이면서, 알고보면 '츤데레'일지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격하고 조금은 냉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말이다.
이 책은 조국 교수가 예전에 강의한 내용을 수정, 보완한 책으로, 거의 새로 쓴 내용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한국 정치 현실에 관한 내용과 민주주의의 기본을 다룬 내용이 많아서 전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법의 기틀을 만들어 온 근대 법철학은 어지간한 지식의 기초가 쌓이지 않으면 혼자 책을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 책의 장점은 근대 법철학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저자가 재조직하면서, 그 시대의 배경, 역사적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법철학자의 이름은 다 알고 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의 근원과 내용의 의미, 역사적 배경에 관해서는 어렴풋했는데, 이 책을 읽고는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인 조국 교수도 말했지만, 이 책은 중학생, 고등학생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재미있게 썼다.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도록 권하면 좋겠다.
'프랑스 혁명'을 촉발한 장 자끄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시작으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존 로크의 '통치론',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토머스 페인의 '상식, '인권',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메디슨, 존 제이의 '페러랄리스트 페이퍼',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위한 변명', '크리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불복종', '존 브라운을 위한 청원',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 평화론'까지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정작 이들의 저서는 다 읽지 못한 나같은 불량한 독자를 위해 조국 교수는 중요한 문장까지 인용하며 법고전이 근대와 현대를 어떻게 열었는가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개인의 권리, 민주주의의 확대, 인권의 탄생, 인간을 도구가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보기 시작한 근대적 '휴머니즘'의 발전에는 이런 법고전을 통한 강력한 계몽과 사상의 실천이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셸 푸코가 쓴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이 떠올랐다.
법고전의 저자들이 큰틀에서 인간의 권리, 자유, 민주주의, 인권에 관해 디딤돌을 놓았다면, 미셸 푸코는 그 시대의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진 권력과 계급 갈등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포착했고, 서로 연관이 없을 것 같은 현상을 관찰하면서 본질에서 동일한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걸 밝힌다.
푸코는 병원과 감옥(수용소), 학교, 군대가 모두 동일한 시스템으로 작동한다는 걸 역사적 과정을 통해 확인한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설파하고 있을 때, 거리를 배회하는 정신병자들과 부랑자들은 교회(성당)의 비어 있는 공간에 갇히게 되고, 교회(성당)는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내 이들 정신병자들과 부랑자를 수용해 관리한다.
이렇게 시작된 '수용'과 '감금'의 역사는 '병원'을 탄생하는 계기가 되고, '감옥'의 원형이 된다. 중세에는 거리를 떠도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았어도 '수용'당하거나 '감금'되어도 그걸 항변할 인권이 없었고, '인권', '민주주의'의 개념이 없던 시대에는 '마녀사냥'이라는 명목으로 수십만 명의 여성을 교회가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악행을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했다.
이 책 '조국의 법고전 산책'은 유럽 중세의 극악한 사회 현상 이후 나타난 계몽의 결과물이 무언가를 알려준다. 즉 무소불위의 왕권, '마녀사냥'을 통해 돈벌이에 눈이 먼 교회(성당) 권력의 부패함, 광장에서 죄인 또는 죄인이라는 누명을 쓴 사람들을 한꺼번에 교수형을 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참혹함, 갓난 고아들에게 럼주를 먹여 수십, 수백 명의 고아를 살해하던 극악한 범죄 등을 본 지성인들이 미개한 사회를 계몽하고, 인간의 이성이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애쓴 결과물로 나온 책들이 바로 이 책에 등장하는 법고전 책들이다.
여기 등장하는 책들은 모두 당대에 진보적 테제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들이 온전히 독자적이고, 독립적으로 앞서 나간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 현상이 그렇듯, 이들 법고전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이미 누적된 민중(인민)의 투쟁이 있었고, 이 책의 저자들은 그런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발견하고 정리했다. 그들의 높은 안목과 철학이 한 권의 책으로 집약되고, 이 책은 다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민중의 삶을 위한 투쟁과 지성인의 저서가 변증적으로 상호 작용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책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이 책은 조국 교수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쓴 책이다. 수많은 책이 있지만, 읽어서 살이 되고, 뼈가 되는 책이 있는 반면, 종이만 낭비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살이 되고, 뼈가 되는 책이다. 조국 교수의 진심이 담긴 책이니 가능한 많은 사람이 읽고, 이 책에서 말하는 개인의 권리, 인권, 민주주의에 관해 자기 생각을 올곧게 세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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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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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명의 아주 짧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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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명의 아주 짧은 역사
제목이 정직하다. 지구의 역사에서 최초의 생명은 40억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인류의 역사는 아무리 길어봐야 고작 700만 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구과학이나 생물학, 진화를 다룬 전문서적이 아니다. 태양의 탄생과 이후 지구의 탄생부터 시작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책에는 어떠한 그림, 사진, 도표, 수식, 일러스트 등이 단 하나도 없다. 아, 도표는 몇 개가 있는데, 각 장의 끝에 연대표를 만들어 독자가 글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매우 어려운 자연과학을 다루고 있음에도 문장은 어렵지 않다.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고, 읽으면서 곧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저자 헨리 지는 매우 섬세하게 독자를 배려하면서 글을 썼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지구의 탄생, 최초의 생명, 고세균의 등장, 지의류, 이끼류의 진화, 지구 환경의 변화에 따른 생물의 진화와 멸종, 산소 농도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지구 환경과 생물의 생존 반응, 바다에서 생명의 진화 단계, 단세포의 출현과 단세포끼리의 포식과 공존, 다세포의 출현과 진화를 통한 복제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이 책의 뒷부분에 미주가 두껍게 모여 있는 건 어쩔 수 없으면서 필연적인 선택이다. 본문에는 미주 번호가 꽤 많은데, 이 미주를 함께 읽으면 책의 내용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독자들 가운데는 이런 미주를 챙겨 읽는 걸 귀찮아할 수도 있겠다.
동물의 출현은 약 6억 3,500만 년 전에 일어났는데, 지구가 탄생하고 약 40억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때까지 지구는 지구 자체의 변화와 진화를 끊임 없이 이루어 왔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지구는 가장 최근인 200만 년 전까지도 빙하기와 해빙기를 반복하면서 생물이 살아가기 힘든 별이었다.
하물며 6억 년 이전까지 지구는 대륙의 생성, 멘틀의 이동, 화산 폭발 활동, 우주에서 날아오는 행성과의 충돌, 지진, 용암 분출로 인한 육지의 발생과 바다의 출현, 지각판의 습입과 충돌로 인한 대륙의 융기와 함몰, 이산화탄소의 증가 또는 감소, 산소의 증가와 감소에 따른 대기 성분의 변화로 생물의 멸종과 진화 등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다양한 변화가 지구 자체의 진화를 이루고 있었다.
6억 년 전에 최초의 생명체들이 등장한 이후 5억 년 전 '오르도비스기'에 생물의 종류가 급격히 늘어났지만 빙하기가 시작하면서 그 다양한 생물 대부분이 멸종한다. 4억 년 전에 최초로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생물, 육상 식물이 등장하고 3억 5천만 년 전에 네 발을 가진 동물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혁명적 사건이 발생한다. 이 시기를 '데본기'라고 하는데, 데본기 말엽에 다시 생물 대멸종 시기가 있었다. 외부 행성 충돌로 인한 지구 환경의 급격한 변화때문으로 분석하는데, 이때 멸종한 동식물들이 현대에서 '석탄'으로 나타나서 이때를 '석탄기'라고 분류한다.
'석탄기'가 끝나고 지구 대륙은 판게아가 어느 정도 형성되는데, 멸종에서 살아남은 생물들이 번성했으나 2억 5천만 년 전인 '페름기' 말에 다시 대멸종이 일어나 생물의 90%가 지구에서 사라진다. '페름기'를 지나면서 초기 포유류가 등장한다.
지구는 판게아 대륙이 계속 갈라지고, 부닥치면서 대륙의 형태가 바뀌고, 대륙이 이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다시 2억여 년 전 '트라이아스기' 말에 대멸종이 다시 일어난다. 지구 자체의 급격한 변동과 외부 충격, 판게아의 이동과 대기의 변화에 따른 지구 환경으로 생물은 멸종과 진화를 반복한다.
'쥐라기'가 끝날 무렵, 그러니까 공룡 시대가 끝날 무렵 새의 조상이 나타나고, '쥐라기' 이후 '백악기'에 식물에서 꽃이 나타난다. 하지만 '백악기' 말에 다시 대멸종이 일어나고, 신생대로 들어서면서 빙하기가 시작한다.
백악기 대멸종이 끝나고 6천만 년 전, 고대 포유류와 공포새가 등장하고, 5천 5백만 년 전 영장류와 '현대' 포유류가 나타난다. 최초의 영장류는 700만 년 전에 나타났으며, 이후 영장류의 진화는 지구 역사에서 짧은 시간에 빠르게 진화하는 걸로 보인다.
이 책에서는 인류의 진화 단계를 거시적으로 살펴보고 있어 이해하기 쉬운데,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진화에서 보다 깊이,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지각의 발달, 뇌의 발달, 언어의 발달 같은 추상적 진화 과정을 더 공부해야 한다.
이 책은 지구의 변화, 진화와 함께 지구에서 탄생한 모든 생물의 진화와 인간의 진화를 함께 살펴보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그것도 자연과학을 잘 모르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그동안 연구로 밝혀진 최신 과학의 결과를 어려운 말로 하지 않고, 쉽게 설명하는데 있다. 따라서 독자는 이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다가 지구의 탄생, 지각, 용암, 대륙판과 같은 내용이 나올 때는 '지사학'과 관련한 책을 찾아 읽으면 좋고, 생명의 탄생, 생명의 진화와 관련해서는 '진화생물학' 관련 책을 찾아 읽기를 권한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자연과학을 한 권으로 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다른 분야로 나아가는 기초가 되는 자연과학 입문서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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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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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버지 - 옌롄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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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버지 - 옌롄커
옌롄커는 1959년에 태어났다. 중국이 혁명에 성공하고 불과 10년이 지났을 때였으니, 중국은 혁명의 소용돌이와 혼란, 봉건의 역사와 수천 년 이어지는 전통의 습속이 뒤섞이고 충돌하던 시기였다.
옌롄커는 60년대와 70년대를 시골에서 성장하는데, 어지간한 시골이 아니고 바러우산맥 아래쪽 몹시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린 궁핍한 산골 마을에서 자랐다. 중국공산당이 혁명을 성공하고, 도시에서는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던 시기였지만, 산골 마을은 변화가 크지 않았다.
옌롄커는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의 삶을 돌아보며 아버지 세대의 농민들이 살아온 삶과 중국 현대의 변화를 진솔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옌롄커는 혁명 이후의 세대지만 그의 부모 세대는 혁명 이전 세대로, 전통과 관습을 지키며 살아왔다.
혁명 이후에도 농민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으며, 언제나 도시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도시 노동자는 시간당 임금이 있고, 그 임금도 농촌보다 훨씬 높았다. 농촌에서는 온종일 일해도 도시 노동자의 10%에 불과한 임금을 받았다.
옌롄커의 아버지들은 전통 사회를 살아왔으며, 그들은 가족을 위해 헌신한다. 거친 음식을 먹고, 남루한 옷을 입으며, 온종일 논과 밭에서 땀흘려 일하고, 자식들이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며, 자식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돈을 모아 집을 짓고, 혼수를 마련한다.
그렇게 한평생 자식을 위해 일하고,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삶이자 운명이라 여겼다. 아버지들은 집안을 지켜야 하고, 가문을 위해 살아야 하며, 자식들을 위해 어떤 어려움도 견뎌야 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옌롄커가 자신의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에 관해 쓴 기록이다. 옌롄커가 작가가 되기까지, 그가 소설을 쓰게 된 배경과 그의 작품이 고향인 허난성을 배경으로 하는 농민들의 이야기와 자신이 오래 몸담았던 군대의 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오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옌롄커는 어릴 때부터 힘든 노동을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과 사촌 형제들의 삶도 돌아본다. 옌롄커는 대학 입학을 바랐으나 실패했고, 돈을 벌려고 작은아버지, 넷째 삼촌이 일하는 석회 공장에서 적은 임금을 받으며 노동을 했다.
70년대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수많은 지식인이 '반동',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 죽거나 일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되는데, 시골에서는 그런 영향과 분위기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변화의 물결에서 멀리 있었다.
옌롄커가 지식인을 경멸하고 싫어하는 이유도 그가 어릴 때 경험했던 사건 때문이었다. 그의 마을에도 도시에서 '하방'한 청년 지식인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청년이 동네 젊은 여성을 강간했지만 정작 강간한 청년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고, 강간당한 젊은 여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와 반대로, 시골 청년이 도시에서 온 젊은 지식인 여성을 강간하려다 미수로 그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때는 시골 청년이 잡혀 총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도시 사람과 농촌 사람을 드러내놓고 차별한 이 사건과 함께, '하방'한 청년 지식인들이 시골에서 노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키우던 닭과 양, 염소 등을 몰래 잡아 먹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도시의 청년 지식인들은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 않지만, 농민들을 경멸하고 하찮게 여긴다는 걸 옌롄커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느낀다.
옌롄커는 작가가 되기 전, 어릴 때부터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고, 몹시 힘든 노동을 오래도록 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이 어떻게 농사를 짓고 살았는지, 도시로 나간 넷째 삼촌이 공장에서 얼마나 힘든 노동을 하며 돈을 버는지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풍토에 분노하고 있었다.
옌롄커의 소설이 땅, 농사, 개인의 욕망, 인간의 존엄에 천착하고 있는 것도 그가 전통 시대를 살아온 부모 밑에서 농사와 노동을 했기 때문이며, 지식인의 허위를 어릴 때 발견한 경험으로 그는 '말'보다는 '행동'을 더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이 책은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옌롄커의 문학은 그가 탄생한 허난성의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며, 쌀과 땔감, 기름과 소금을 얻으려는 노동으로 가득하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중국 농민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옌롄커의 문학도 이해하기 어렵다.
옌롄커 자신은 농촌을 탈출해 도시에서 사는 지식인이 되었지만, 그의 작품에서 지식인과 도시인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지식인과 도시인은 노동하는 사람에게 기생하는 존재인데 오히려 그들은 농민을 경멸하고, 하찮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옌롄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특출한 사람이 없다. 지극히 평범하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장삼이사 가운데 하나다. 소설 속 인물들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지만 자기 운명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고난과 죽음이 닥쳐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꿋꿋하게 맞서 싸우는 개인의 모습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의 위대한 모습이다.
이들 평범하지만 위대한 인간의 모습은 산골에 사는 중국 농민이 모델이며, 작가의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 작가의 부모 세대가 모두 돌아가고, 중국의 현대에는 이런 강건하고 꿋굿한 인민의 전형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개혁개방' 시대 이후 태어난 중국인은 옌롄커의 작품에 등장하는 부모 세대의 고난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에서도 50년대, 60년대 태어난 세대가 지금 부모 세대이고, 그들의 자식 세대인 80년대 이후 세대는 부모 세대가 겪은 정치, 문화, 사회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옌롄커는 이런 중국의 세대가 겪는 서로 다른 경험의 이질성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자신이 부모 세대에게 배우고 얻은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가를 말함으로써, 중국의 젊은 세대가 '중국'이라는 나라와 민족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길 바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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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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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옌롄커 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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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옌롄커 중편집
연월일
바러우 산맥에 기대 사는 산골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흉작이 들어서다. 비가 내리지 않아 작물이 모두 타죽고, 땅이 갈라져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면서, 주민들은 바러우 산맥을 넘어 흉년을 피할 도시로 떠났다.
셴할아버지는 혼자 마을에 남아 어떻게든 옥수수를 지키려 한다. 눈 먼 개와 셴할아버지는 텅 빈 마을에서 식량을 구하려는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쥐구멍을 파내 쥐들이 모아 놓은 옥수수 알갱이를 찾아 먹다가, 옥수수 알갱이를 으깨 쥐를 잡아 먹으며 옥수수를 지키는 셴할아버지는, 중국 민중의 현현이자, 중국 인민의 영웅적 모습을 상징한다.
농민에게 자연은 극복할 수 없는 절대 존재다.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자연의 이치에 맞는 삶을 살아온 중국 농민들은 자연 앞에 겸손하고, 모든 삶의 근거와 존재와 뿌리를 자연에 맡기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셴할아버지처럼 닥쳐오는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쉽게 굴복하지 않고, 농민의 자존심을 잃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을 굳게 세우는 영웅 같은 인물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
이는 마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청새치를 잡아 돌아오는 길에 상어떼를 만나 사투를 벌이다 결국 청새치는 뼈만 남기고 노인은 지쳐 돌아오는데, 노인의 사투와 불굴의 의지가 인간의 존재 이유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셴할아버지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의 목숨도, 옥수수 한 자루의 생명도. 생명은 고귀하고 위대하기에,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생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건 생명을 지키고,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옥수수 한 알을 지키는 일이 온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중국 농민 뿐 아니라, 세계의 농민이라면 본질에서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다만 중국은 드넓은 대륙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고, 빈곤에 찌든 농민의 삶이 수천 년을 이어오면서, 대륙에서 겪을 수 있는 지역적, 물리적 경험을 축적해 왔고, 이런 경험들이 중국 농민의 삶을 규정하고 지배했다.
자연 재해 앞에서 불굴의 의지를 보이는 셴할아버지는 중국 인민의 보여주었던 조상(영웅)의 상징이며, 중국 인민이 바라는 이상적인 농민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 중국은 이런 '진짜' 농민이 사라졌다. 사회주의 중국의 치하에서 '진짜 농민'이 사라졌을 수 있고, 농업 생산성의 발달로 흉년을 고통스럽게 넘기지 않아도 되어,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일 수 있다.
옌롄커가 그리는 셴할아버지 같은 '진짜 농민'은 이미 과거의 인물이고, 역사가 된 이야기다. 셴할아버지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 체제에서 태어난 농민도 아니다. 중국 농민은 수천 년을 어떤 체제나 지배권력의 간섭에 지배당하지 않았다는 걸 옌롄커는 말한다.
중국 농민은 그 자체로 역사이자 인민이다. 오래 전부터 중국 왕조는 중국 인민을 지배했다고 착각했듯이, 중국공산당도 중국 인민을 통치하고 계도한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중국 인민은 물과 같아서, 권력과 지배자의 형태를 따라 흐를 뿐, 단 한번도 지배당한 적이 없었다.
골수
요우스터우는 자기 자식 네 명이 모두 간질병을 앓는 유전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요우스터우의 아내 요우쓰댁은 무책임하게 죽은 남편을 원망하며 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홀로 키운다.
한 여성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 단편이지만, 이 작품이야말로 중국인민, 중국여성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요우스터우의 할아버지도 간질병이 있었고, 이 병은 집안 내력이며 유전되고 있다. 이 말은, 중국 역사에서 남성가부장제, 남성 권력의 지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걸 뜻한다. 즉, 중국 역사의 전통은 남성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인데, 이런 제도는 곧 간질병, 유전병처럼 악질이다.
중국 혁명 이후 이런 남성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공산주의의 평등과 인권의 확산, 민주주의의 보편화로 과거 중국의 전통이었던 불행한 제도와 인습은 사라지게 된다. 즉, 요우스터우의 자살은 중국의 바람직하지 않은 전통, 관습을 상징한다.
요우쓰댁은 새로운 중국 인민을 상징한다. 중국 혁명 이후, 혁명 세례를 받으며 새롭게 태어나는 중국 인민은 진보적이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자기 삶을 개척한다.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도, 요우쓰댁은 후손(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삶을 개척한다.
저능아에다 간질이 있는 세 딸을 시집보내면서 집안의 재산과 곡식이 모두 사라지지만, 요우쓰댁은 후손들이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작품에서는 요우쓰댁이 세 딸과 아들의 간질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남편의 무덤에서 뼈를 파내 그 뼈를 달여 마시도록 하는데, 이는 중국의 전통, 관습의 부정적인 면을 제거하고, 혁명의 삶을 선택하는 것을 상징한다.
아버지의 뼈를 고아 먹은 자식들은 모두 간질병이 낫고, 저능아에서 정상의 인간으로 돌아온다. 인간 요우쓰댁으로 보면 자식을 향한 끝없는 모성을 보여주는 내용이자, 중국 인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천궁도
루류밍은 이제 막 죽어서 육신에서 혼이 빠져나와 자기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가족과 이웃들이 자기의 육신을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가는 장면을 보며, 그는 쓸쓸한 마음이 든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한다. 노인이 이끄는 곳은 루류밍이 살아서 살았던 세상과는 완전히 반대인 세상이었다.
루류밍은 산골 빈촌에서 태어났는데, 가뭄이 극심하던 때 태어나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글자도 모르고, 극빈한데다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저는 루류밍은 '무식하고 가난한 농민'이자, 중국 농민 다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 루류밍이 스물 여덟 살에 이웃 동네에 사는 열 여덟 살 여성 샤오주와 결혼을 하는데, 사기 결혼이나 다름 없었다. 샤오주의 집안도 가난해서, 결혼지참금으로 2천원을 받기로 했으나, 루류밍의 이모는 2천원을 주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루류밍은 결혼하면 어떻게든 2천원을 샤오주에게 갚기로 약속한다. 샤오주는 중국 역사의 상징이다.
루류밍은 고구마를 구워 팔고, 밭에서 채소를 길러 내다 팔며 조금씩 돈을 모은다. 촌장(권력자)의 비리를 눈 감아주는 대가로 돈을 받고, 촌장이 아내 샤오주에게 돈과 곡식을 주며 아내와 잠자리를 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화를 내지도, 복수를 하지도 못하는 무능하고 한심한 인간 루류밍은 끝까지 아내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고 닥치는대로 돈을 번다.
이웃 장씨의 아들이 저지른 죄를 대신 뒤집어 쓰는 조건으로 700위안을 받고 2년 동안 노동교화소에서 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 샤오주가 면회 오면 모아놓은 돈을 건넨다. 성실하게 복역한 결과, 루류밍은 8개월이나 일찍 퇴소할 수 있었고, 그가 집에 돌아오니 아내 샤오주는 촌장과 함께 그녀의 고향에 새집을 짓는다고 했다.
루류밍은 그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는데, 그가 샤오주를 위해 살았던 삶은 소나 말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나날이었다. 오로지 결혼할 때 한 약속을 지키려고 루류밍은 온갖 모욕과 굴욕과 마음의 깊은 상처와 육체의 고통을 견뎠지만, 끝내 자신을 버린 아내 샤오주에 대한 배신감으로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루류밍이 진짜 목숨을 내던지자, 그동안 루류밍의 고통과 굴욕을 지켜보며, 루류밍이 벌어온 돈을 쓰던 샤오주는 루류밍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가 자살하게 된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샤오주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루류밍의 마음을 이해할 때, 루류밍은 다시 이승으로 돌아온다. 중국 민중과 역사가 만나는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
결혼은 나의 할아버지와 했으나 진짜 사랑한 사람은 소작인이었던 리좡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할머니의 과거를 두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갈등을 빚는다.
이웃에 사는 리좡 할아버지가 한겨울에 얼어 죽고, 평생 혼자 살았고, 가족도 없는 리좡 할아버지를 위해 나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수의를 가져다 입히고, 장례를 치러준다.
리좡 할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할머니는 많이 슬퍼하고 상심해 건강을 잃는다.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리좡 할아버지 무덤 옆에 묻어달라고 부탁한다. 할머니와 리좡 할아버지는 어떤 관계였을까. 나의 할아버지는 결국 할머니의 유언을 지켜 리좡 할아버지 무덤 옆에 할머니를 묻는다.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리좡 할아버지와 할머니 무덤이 비에 쓸려 망가지고, 나의 아버지는 할머니의 무덤을 개장해 할아버지 옆으로 다시 모신다. 할머니는 평생 할아버지와 살았고, 자식을 낳았으며 원만한 삶을 살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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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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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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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유년
옌롄커 장편소설. 이 소설을 읽고 앞으로 10년 안에 옌롄커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노벨문학상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중국에서 모옌에 이어 옌롄커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중국문학은 세계문학의 주류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지 않을까.
특히 모옌과는 다르게 옌롄커의 작품은 중국사회를 매우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어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모옌이 받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된다. 중국 정부가 옌롄커 작품을 승인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중국공산당과 옌롄커는 서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노벨문학상 여부는 매우 상징적 사건이 된다.
이 소설은 두 번 읽게 된다. 앞부분에서 독자는 조금 어리둥절하게 되는데, 끝까지 읽고 나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뒤부터 다시 읽게 된다. 그런 구조로 작품의 얼개를 짰다. 쉬운 예를 들면, 영화 '박하사탕'이 '나 돌아갈래'로 시작해서 점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인데, 이 소설이 바로 그렇다. 모두 5장으로 구성한 이 소설은 주인공 쓰마란과 란쓰스를 중심으로 산싱촌(三姓村) 사람들의 약 40년에 걸친 대하드라마를 그리고 있다.
산싱촌은 란, 두, 쓰마를 쓰는 세 성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허난성 서쪽 바러우산맥 골짜기에 있는 산골 마을이다. 공산당의 영향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한 탓에 이 산골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방식으로 생존한다.
40년
산싱촌 사람들은 마흔 살을 넘기지 못한다. 마흔 살을 넘겨 사는 걸 최고의 소원으로 생각할 정도로, 이 마을 사람들의 수명은 짧다. 이유는 모른다. 중국 정부는 알고 있지만 마을 주민들에게는 알려주지 않는다.
마흔 살이면 한창 인생의 꽃을 피우는 나이인데, 이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우리는 모두 죽지만, 마흔 살에 죽는 것과 여든 살에 죽는 건 사뭇 다르다.
게다가 그 죽음은 반드시 예고를 한다. 목구멍이 막히고, 목이 아픈 증상이 나타난다. 이 증상이 나타나면 짧게는 며칠에서 길어도 몇 달 안에 반드시 죽는다. 마을 주민의 소원은 쉰살, 예순살, 일흔살, 여든살까지 사는 것이다.
마을 주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려면 촌장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촌장은 주민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주거 이전의 자유'가 없다. 중국 정부의 방침이면서, 산싱촌 주민들의 암묵적 규칙이기도 하다. 산싱촌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이 모진 운명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한다.
농지와 수로
마을 촌장 쓰마샤오샤오는 마을 주민들이 일찍 죽는 원인을 농토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발상인데, 그들이 먹는 옥수수, 유채 같은 식물을 재배하는 땅이 오염되었다면, 땅을 뒤집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쓰마샤오샤오는 마을 공동 소유의 농지를 전부 뒤집어서 아래 흙을 위로 올리는 공사를 시작하는데, 각종 도구와 수레 등을 구입하려고 도시에 있는 교화원에 가서 허벅지 피부를 잘라 판매한다.
촌장의 명령과 독려로 마을 주민들은 땅을 뒤집는 대공사를 시작하지만, 마을 주민의 힘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공사였다. 촌장은 다른 지역에서 토지 정리 공사를 하고 있는 현의 주임 루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읍소한다.
겨우 주 주임의 마음을 돌려 마을의 농토를 뒤집어 엎고, 새로 정리하는 공사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란쓰스가 처녀를 루 주임에게 받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주인공 쓰마란과 란쓰스에게 심각한 문제가 된다.
어린 쓰마란이 스무 살이 넘어 촌장이 되자, 쓰마란은 아버지가 했던 땅 뒤집기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으로 마을 주민의 생명을 연장하는 방안을 고민하다, 멀리 있는 다른 마을에서 수로를 파 깨끗한 물을 산싱촌으로 끌어오기로 결심한다. 주민들이 단명하는 이유가 오염된 물을 마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수로를 파는 일이 그만큼 절실하다는 걸 주민들에게 알리고 설득한다.
땅을 뒤집는 공사나 수로를 파는 공사는 촌장이 마을 주민을 위해 결정한 사업이지만, 겉으로는 주민의 목숨을 연장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이 사업을 통해 촌장의 권력을 강화하고, 촌장의 권위와 권력을 휘두르는 동력이 된다.
피부, 인육 장사, 아동 살해
옌롄커의 소설은 원초적 충격이 있다. 모옌의 소설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모옌이 신화적, 서사적 충격이라면 옌롄커의 작품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적나라한 충격이다. 산싱촌 사람들은 마을 공사를 하기 전에 필요한 도구와 식량을 구입하는 방법으로 교화원에서 허벅지 피부를 잘라 판다. 화상 환자를 위해 피부 이식을 해야 하는 교화원에서는 피부를 팔고 싶은 사람들이 반가운데, 이때 피부 이식에 필요한 돈은 환자와 환자 가족이 부담한다. 따라서 돈 많은 환자에게 비싸게 피부를 잘라 팔 수 있다면 큰돈을 만지게 된다.
마을의 촌장들은 솔선수범하여 자기 허벅지 피부를 잘라 팔아 마을 기금으로 내놓는다. 마을 주민들도 성인 남성이라면 거의 모두 허벅지 피부를 잘라 팔아 마을 기금으로 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마을 기금으로 내지 않고, 그 돈을 들고 도시로 나가 장사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한다.
남자들이 허벅지 피부를 팔아 돈을 벌 때, 여자들은 큰 도시로 나가 몸을 팔아 돈을 번다. 주로 과부나 젊은 여성이 대상으로, 이들은 마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촌장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
란쓰스가 도시로 나가 인육장사를 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마오샤오샤오 촌장이 주도한 땅 뒤집기 공사 이후 오히려 옥수수 농사가 실패하고, 여기에 메뚜기떼가 습격하면서 흉년이 든다. 마을에서는 가지고 있는 곡식을 아껴먹지만, 식량이 다 떨어지자 촌장은 장애가 있는 어린이들을 산속으로 데려가 유기한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산 채로 까마귀에게 뜯어먹히고, 마을 주민들은 까마귀를 잡아 식량으로 먹는다.
촌장
세 명의 성씨가 살아가는 산싱촌은 촌장이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 두싱, 쓰마란, 란바이수이, 쓰마샤오샤오 등 촌장을 지내는 사람들은 마을 주민들이 마흔 살을 넘게 살 수 있는 방안을 내놓는다. 농사 짓는 땅을 뒤집거나, 먼 마을에서 깨끗한 물을 끌어온다는 계획을 제시하고, 그걸 실천에 옮기기 위해 스스로 허벅지 피부를 교화원에 판다.
권력자라고 뒤로 빠지거나, 말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산싱촌의 촌장은 자기가 가진 권력의 권한과 의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과 마을 주민의 재산, 노동력을 전부 동원해서 마을의 숙원사업을 진행하지만, 문제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다는 점이다. 산싱촌 사람들은 주민 모두의 운명을 걸고 엄청난 규모의 사업을 진행하지만, 그들이 하는 사업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기를 쓸수록 문제가 더 커지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쓰마란, 란쓰스
이 소설에서 쓰마란과 란쓰스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사이였고, 결혼을 약속했다. 아기 때 쓰마란은 란쓰스의 엄마 젖을 란쓰스와 같이 먹었고, 어려서 서로의 벗은 몸을 보여주었으며, 혼인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쓰마란은 마침내 촌장이 되고, 그의 아버지가 추진했던 수로 공사를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쓰마란은 교화원에서 허벅지 피부를 팔고, 란쓰스는 도시로 나가 인육장사를 한다.
쓰마란은 란쓰스를 좋아하지만, 아내는 두주추이를 맞았다. 세 사람의 관계는 애증으로 얽혔고, 이들은 불과 서른 중후반에 인연의 끈을 놓는다. 그 짧은 시간에 산싱촌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인간의 삶에서도 극단을 치닫고, 격렬하게 타오른다.
마을 주민들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집단으로 유기한 다음, 다시 격렬한 방사를 통해 다음 해 거의 모든 여성이 임신하고 출산한다. 아이들도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걸 어릴 때부터 온몸으로 느끼고, 체득한다.
중국 문학은 본질적으로 대륙의 물리적 크기와 다양성으로 다른 나라, 민족이 흉내내기 어려운 토대를 가지고 있다. 모옌의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고, 옌롄커의 소설에서도 보이는 특징은 이들이 중국 대륙의 물리적 환경과 조건을 작품에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땅과 강, 산맥이 만들어내는 서사가 있으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과 외세에 맞서 투쟁하는 상황은 거대한 역사이면서 생존의 기록이다. 중국은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대륙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중국의 고전은 중국 문학의 거름이며, 중국 민중의 삶은 그 자체로 역사이기에, 중국 작가들은 민중의 삶을 왜곡하지 않고 올바르게 기록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모옌이 중국의 전통, 신화, 역사를 바탕으로 민중의 삶을 긍정한다면, 옌롄커는 중국 민중의 삶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그들의 내면에 숨은 욕망과 탐욕, 삶의 의지를 찾아낸다.
옌롄커는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쓸 수밖에 없는 글'을 쓰는 작가로 알려졌다. 즉, 마음에서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글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허난성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어렵게 공부했고, 공산당원이긴 해도, 그가 중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고향의 가난한 주민들이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옌롄커는 중국의 현실을 비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중국과 중국인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작가가 해야 하는 역사적 의무를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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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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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고고학 -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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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고고학 - 1960
10대의 어느 한 때, 오래된 트로트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난영, 고복수, 남인수, 현인, 김종구 같은 가수들의 노래를 하염없이 들으며 마음이 좀 슬펐던 기억이 있다. 그땐 몰랐지만 아마도 '자기 연민'이 아니었을까.
소년 노동자로 살면서 나는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무지렁이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공장노동자, 건설노동자로 10대, 1970년대를 보냈고, 그때 라디오에서는 나훈아, 남진, 김추자, 최헌, 송창식, 어니언스, 패티김, 이은하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비록 몇 달이었지만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음악에 몰두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국민학교 다닐 때 동무들과 유행가를 부르며 마을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추억이 있다.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대중음악은 우리에게 유행가였고, 어린 우리는 동요보다 유행가를 더 많이 불렀다.
이 책은 '한국 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통해 들어온 음악과 당시 한국에서 불렸던 음악(민요)이 결합해 '트로트'라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이 분야는 지금도 '트롯'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생산하고, 소비한다. '트롯'과 함께 두 줄기 가운데 하나로 '팝'이 있는데,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 '한국 팝'은 전후, 여기서 '전후'는 1945년이 아니라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를 뜻한다. 미군이 한국에 상주하면서 미국의 대중음악이 이식되는 과정에서 '한국 팝'이 하나의 장르로 탄생한다.
미8군으로 상징하는 미군의 존재는 전쟁을 겪은 한국 민중에게 '나라를 구한 은인'이자, 굶주린 대중에게 곡식(밀가루, 설탕)을 가져다 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미지가 겹쳐 절대의 권위와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해방 직후 약 3년의 '미군정' 시기를 사람들은 잘 모른다. 미군은 한국 정치가를 배제하고, 그들이 직접 한국을 지배했던 시기가 있었다. 해방 직후 민족주의자인 여운형 등을 배제하고 이승만과 친일파 계열이 득세할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도 바로 미군이 정치적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해방 직후 '점령군'으로 한국에 '진주'했으며, 한국을 3년 동안 '미군정' 체제로 다스렸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해 '작은 3차대전'을 한반도에서 치른다.
이승만은 미군(맥아더 장군)에게 '전시작전지휘권'을 이양하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 역량이 형편 없다는 걸 인정하고, 외국군인 미군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긴 것이다.
'전시작전지휘권'은 한국이 세계 6위의 전투 능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음에도 아직 되찾지 못하고 있다. 주권 국가에서 '전시작전지휘권'을 외국에 넘겨준 경우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만큼 한국에서 미군의 존재 의미는 여전히 특별하다.
전후 가난이 극심하던 때, 대중음악을 하는 예술가들이 그나마 무대에 설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미8군으로 대표하는 미군부대의 무대였다. 미군은 세계 곳곳에 있는 미군을 위해 본토에서 순회공연팀을 만들어 공연을 하러 다녔는데, 냇 킹 콜, 조니 마티스, 진 러셀, 마릴린 먼로 같은 미국의 유명한 연예인이 한국의 미군부대에서 공연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미국 본토에서 직접 연예인들이 한국을 방문해 공연하는 건 물리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미군은 한국의 대중음악인을 훈련시켜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 미군은 까다로운 심사(오디션)을 통과한 한국 대중음악인에게 기회를 주었고, 이들은 피나는 노력과 훈련을 통해 미군들이 환호할 정도의 기량을 갖추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가수, 연주자, 작곡가들 대부분 미군 무대에서 활약한 사람들인 건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미군의 엄격한 오디션을 통과해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고, 미군부대의 무대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가수, 연주자, 작곡가들은 자신의 창작 능력보다는 미군이 요구하는 미국의 음악, 미군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노래하고 연주해야 했다. 즉, 한국 팝은 정확히 미군의 요구로 한국에 이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군부대의 무대는 특별했으며, 한국의 방송(라디오, 텔레비전) 무대는 '일반 무대'였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있었으나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여서, 가수, 연주자들은 전국에 있는 극장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극장은 대중이 가장 쉽고,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였고, 영화는 기본이 두 편으로 '동시상영'이었다.
가수와 연주자들은 영화 한 편이 끝나는 막간에 공연했으며, 이런 방식의 공연이 나중에 가수의 독자 공연으로 발전해 '리사이틀'이 되었다. '하춘화 리사이틀', '남진 리사이틀', '나훈아 리사이틀' 같은 제목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극장에서 공연했던 걸 어릴 때 극장의 간판으로 본 기억이 있다.
1960년대 한국에서 그룹, 중창단이 활발하게 탄생한 것도 미군 또는 미국의 대중음악 영향을 직접 받은 결과다. 미국에서도 1950년대, 1960년대 그룹이 많이 생겼는데, 우리에게 알려진 에벌리 브라더스를 비롯해 드리프터스, 문글로스, 플래터스, 브라더스 포, 사이먼앤카펑클, 더 벤처스, 비지스, 비틀즈가 50년대, 템테이션, 포시즌스, 비치보이스, 도어스, 마마스앤파파스, 스콜피언스, 잭슨스, 핑크 플로이드, CCR, 애니멀스 같은 밴드들이 60년대 초중반에 결성한다.
한국에서는 신중현의 '에드 훠'를 시작으로 '김시스터즈', 블루 벨스, 봉봉 사중창단, 자니 브라더스, 아리랑 브라더스, 멜로톤 트리오, 키보이스 등이 줄지어 나타났다. 이런 그룹 활동은 미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70년대로 오면서 듀엣이 또 하나의 특징으로 등장한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이후 한국은 독재 정권 체제에서 수출중심의 산업으로 재편한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1961년, KBS를 시작으로 1962년 MBC, 1964년 TBS 같은 민간 상업방송이 등장하면서 텔레비전의 영향은 급격히 커졌다.
대중음악이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전국의 극장을 돌며 공연하던 가수, 연주자들이 텔레비전에 등장해 '스타'가 되는 시기였다. 방송국은 컨텐츠가 많이 필요하던 때였고, 특히 대중음악을 하는 예술가의 쓰임이 폭발하듯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8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가수, 연주자들이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면서 한국의 대중문화는 트롯과 함께 블루스, 팝, 록 같은 다양한 음악이 대중음악의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독재 정권에서 나름 다양한 음악이 등장한다.
이 시기는 대중음악의 다양함과 폭발적 확산과 함께 독재 정권이 블랙리스트, 금지곡 지정으로 대중음악과 문화를 통제하고 억압했다. 대중가수를 통제하는 방식은 마약(대마초)과 가사 검열이었다. 독재 정권은 어리석은 짓이 분명한 검열과 블랙리스트를 휘두르며 대중예술을 통제, 억압했지만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박정희가 살해당하는 걸로 끝났다.
60년대는 대중음악 빅뱅의 시기였다. 2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에서 민요와 혼종으로 시작한 '트로트'는 '뽕짝'이라는 멸칭으로도 불렸으나, 지금은 '뽕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트롯'은 한때 팝송, 한국 팝, 록에 밀려 입지가 좁았으나 지금은 전성기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반면 50년대 시작한 한국 팝은 청년 문화와 결합하면서 독재 체제에 저항하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가 나타났다. 이때 한국 팝은 일본과 미국에서 유행하거나 발표된 노래를 '번안곡'이라는 이름으로 저작권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라 '표절'을 해도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던, 바람직하지 않은 시기였다.
'번안곡'으로 표절을 정당화하면서 나온 노래들이 방송에 나오고, 음반으로 제작되어 대중이 소비하는데, 60년대 말이 되면 한국 팝에서 창작 음악이 나타난다. 신중현은 일찌감치 한국 록의 창작으로 아무도 밟지 않은 영역을 개척하고 있었고, 미국 대중음악의 세례를 받은 한대수가 한국에서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개척했다.
한국 팝은 미군의 요구로 이식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스스로 자생,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중음악가들은 외국 음악을 받아들여 한국사람의 정서를 불어 넣어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번안곡'이라는 표절도 있었으나 이건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고, 창작 과정과 예술의 발달에 있어 필연의 과정이기도 하다.
60년대는 현대 한국 대중음악이 탄생하고 혼돈의 시기를 보낸 시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음악, 우리 고유의 민요, 미국에서 이식된 다양한 장르(팝, 록, 블루스, 로큰롤, 재즈 등)의 음악이 뒤섞였고, 독재 권력의 검열과 청년의 저항문화가 대립하면서 대중음악은 독특하게 발전한다.
이 책은 대중음악을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훌륭한 길잡이 노릇을 한다. 그것도 '한국 팝'이라는 장르의 역사와 인물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고, 예술가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결과를 만드는가를 볼 수 있다.
열악한 환경과 상황에서도 한국의 대중예술가들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창작과 예술을 위해 노력했고, 60년대의 활동을 밑거름으로 이후 대중예술은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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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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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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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렌커의 이 장편소설은 중국 공산당이 판매금지했다. 몇 가지 이유로 판매금지했는데,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를 한 걸로 본다. 중국 공산당은 '국가' 위에 있는 존재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진데, '공산당'이 먼저 생기고, 공산당이 국가 조직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의 공산당은 또한 군부와 뗄 수 없는 샴쌍동이 같은 존재다. 공산당이 곧 군부이고, 군부가 곧 공산당이다. 1924년, 중국공산당을 결성하고, 마오쩌둥이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면서, 이들은 곧바로 내전과 항일투쟁의 선봉에 서는데, 공산당과 당의 군사조직을 지휘하는 간부는 거의 모두 같은 인물이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당의 이념과 사상에 가장 투철하며, 당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용맹함과 헌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했고,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당하는 인민을 해방하는 걸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 공산당(의 지도부)이 보기에, 이 소설은 중국의 위대한 공산당의 존재와 역사와 역할을 폄훼하고 있으며,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을 모욕하고, 중국 붉은 군대의 명성에 먹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이 소설을 판매금지한 건 당연하다고 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중국공산당의 현재 모습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중국은 공산당 독재 사회이면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채택한 기형적 국가다. 등소평이 '흑묘백묘론'을 주창한 이후, 중국공산당은 인민의 부유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한다고 선언했고, 이후 실제 중국 인민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중국 전체의 부는 커졌지만,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는 계층은 공산당원 특히 고위 공산당원들이었다. 그들은 가진 권력으로 각종 이권에 개입했으며, 직접 자본가가 되거나, 자본가의 이익을 보장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받아 부를 축적했다.
공산당원과 비당원, 대도시 거주민과 시골 농민의 삶은 극단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크게 벌어졌고, 중국공산당은 가난한 농민과 인민을 착취해 배를 불린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다왕은 사단장 사택의 당번병이다. 그는 사단장과 그의 가족을 위해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텃밭을 가꾼다. 그는 이 보직을 얻으려 온몸을 내던져 사단장의 어린 아들과 놀아주었고, 여러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당번병이 되었다.
그는 모범병사였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음식도 잘 하는 병사로, 자타가 인정하는 붉은 군대의 인재였다. 그가 이렇게 훌륭한 모범병사가 될 수 있었던건 그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그가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굳게 약속했고, 장인어른에게 혈서까지 썼기 때문이다.
시골 무지랭이였던(중학교는 졸업했다) 우다왕은 이웃마을의 말단 관리 자오의 배려로 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산골 출신이 군에 입대한다는 건 대단한 출세였다. 고향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하루 세 끼의 식사에는 반드시 고기가 들어 있고, 군복은 깨끗했으며, 사상학습을 통해 폭넓은 지식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우다왕은 군대 생활에 만족하지만, 그에게는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가 있었다. 공산당에 입당해 당원이 되는 것, 군대에서 공을 세워 진급해 군 간부가 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목표는 장인어른인 자오와 약속한 내용으로 혈서까지 썼으며, 그의 아내에게도 맹세했다.
하지만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는 매우 어렵고, 우다왕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사단장 부인 류롄이 유혹하는 걸 뿌리칠 정도로 윤리, 도덕으로 무장한 인물이지만 '욕망' 앞에서 무너진다.
우다왕의 아내
자오어즈는 시골의 봉건적 분위기에서 자란 여성이다. 공산주의 사회라곤 해도 중국의 시골은 여전히 봉건의 요소가 많이 남아 있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인민은 마을 촌장과 당 간부의 지도에 따라 관습적으로 살아간다. 자오어즈는 아버지(자오)의 명령으로 우다왕과 결혼한다. 우다왕은 간경화로 죽어가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급하게 자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사랑의 감정이 있을리 없고, 일종의 정략 결혼이어서 우다왕이 아내와 아들에 대한 책임감과 류롄과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원인이 되는데, 자오어즈의 존재는 중국 농촌 여성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인다.
자오어즈는 신혼 첫날 밤, 우다왕에게 세 가지 약속을 지키라고 맹세하도록 한다. 첫 휴가 때 군복을 가져올 것, 매년 부대에서 공을 세울 것, 승진할 것이 그 내용이다. 이때 자오어즈의 태도는 개인의 삶을 공동체(집단)와 동일하게 여기는 인식을 보인다. 즉, 결혼과 부부라는 지극히 개인의 삶을 사회의 기준으로 치환해 객관화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이런 태도는 자오어즈가 어려서부터 배워온 사회주의 학습의 결과이며, 공산당은 개인의 삶을 계량화, 수치화, 통계화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 당원, 승진, 간부 - 결과에 집착하도록 교육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경쟁을 통해 물질과 부를 축적하는 행위와 비슷하며, 공산주의 사회는 개인의 희생, 집단 속의 개인, 개인의 영웅화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 인간을 만든다.
류렌
사단장의 아내로, 간호부대에서 근무하던 군인이었다. 사단장이 류렌을 보고 '찍었다'고 했으나, 류렌이 사단장을 선택했다고 봐야 한다. 사단장이 청혼했어도 정말 싫었다면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장은 류렌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사람으로, 훌륭한 군인이고, 지휘관인 건 분명하다.
류렌은 사단장에게는 두번째 부인이다. 사단장의 첫번째 부인과는 이혼했는데, 이 소설을 다 읽으면 독자가 사단장의 이혼에 관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류렌은 서른 살 초반의 여성으로, 사단장의 아내로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는데, 당번병 우다왕을 적극 유혹한다. 류렌의 알몸을 보고서도 유혹을 뿌리친 우다왕에게 당번병을 바꾸겠다고 협박한 건 류렌의 진심이었는지, 단지 공갈이었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류렌은 우다왕이 당번병으로 사택에 들어와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나름 깊은 인상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만약 사단장 당번병으로 키 작고 외모도 형편 없는 병사가 들어왔다면 류렌이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유혹했을까. 류렌의 입장에서 외모는 유혹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우연이지만 우다왕의 외모는 류렌의 기준에 합격했고, 여기에 우다왕의 개인적 문제까지 겹치면서 류렌의 의지가 관철된다.
사단장
1세대 공산당원으로 항일 전쟁과 내전을 겪으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진정한 투사다. 철저한 군인이지만 '개인'으로는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사단장은 작품에서도 거의 등장하지 않고, 등장해도 의미 있는 역할이 아니다. 그는 특수한 임무를 띄고 두 달 동안 출장을 떠나는데, 우다왕과 류렌은 이 기간 동안 아담과 이브가 된다.
작품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사단장이 사택을 비우면서 젊은 아내와 당번병 둘만 남는다는 걸 모를 리 없고, 신경 쓰지 않았을 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단장은 가장 믿는 부하에게 사택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수 있고, 아내 류렌과 우다왕이 수상한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류렌이 우다왕을 유혹하는게 사단장과 류렌의 합의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다. 사단장의 첫 부인과 이혼한 이유도, 첫 부인이 당번병과 불륜 관계였음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첫 부인이 임신을 하는 것으로 당번병과의 불륜을 허락했지만, 부인이 임신하지 않았거나, 못했기에 그 책임을 지고 이혼한 건 아닐까. 사단장은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말을 류렌이 우다왕에게 하는 건, 다시 두 가지 숨은 이유가 있다. 사단장이 성적으로 류렌을 만족시키지 못해 류렌은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불만과 함께 임신을 할 수 없어 아이를 낳지 못해, '엄마'가 될 수 없는 비극을 예상할 수 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소설의 제목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모택동의 감동적 연설의 제목이다. 중국공산당과 공산주의자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역사적 소명이자 당의 명령이라는 내용으로, 중국공산당이 '중국해방전쟁' 과정에서 물(인민)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물고기(공산당)를 비유하며, 인민 속으로 들어가 철저하게 인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단장 사택의 식탁에 놓여 있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패는 소설에서 몇 가지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우다왕은 군에서 배운 신념대로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 여기서 인민은 인민해방군이 보위해야 하는 중국 인민이지만, 구체적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이며, 사단장의 부인인 류렌이다.
우다왕은 정식으로 결혼한 아내 자오어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죄책감을 갖는다. 반면 불륜인 류렌에게는 그가 한번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데, 이 서로 다른 대상에게 서로 다른-윤리적으로 옳지 않은-감정을 느끼면서 스스로 혼란하다.
우다왕과 류렌의 관계 시작은 전형적인 계급 관계로 시작한다. 사단장 부인이라는 강력한 권력자 류렌은 사택 당번병 우다왕을 유혹할 때 주도적으로 행동하며, 우다왕이 거절하자 그를 쫓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며 우다왕이 굴복하도록 만든다.
이 권력 관계는 우다왕과 류렌이 육체 관계를 통해 계급이라는 사회적 권위를 내려놓으면서 점차 평등해지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짧은 관계가 끝나면 다시는 누나-동생 또는 애인이 될 수 없는 사이로, 계급 질서가 복원되는 게 두 사람에게는 비극이다.
류렌은 우다왕보다 네 살이 많아서, 사단장의 부인이기도 하지만 연상의 여성으로, 우다왕을 어리게 생각한다. 류렌이 먼저 '누나'라고 부르도록 하고, 우다왕은 '사모님'에서 '누님'으로 호칭을 바꾸는데, 이건 류렌과의 관계가 사회적 계급관계에서 개인적 관계로 전이하는 걸 의미한다.
사단장이 집을 비운 두 달 동안 두 사람은 마치 신혼부부처럼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데, 이 과정에서 류렌은 새로운 자극을 받으려는 행동으로 모택동의 부조, 글씨, 사진 등을 모두 파괴한다. 우다왕도 이 행위에 동참하며 스스로 반혁명분자라고, 총살당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두 사람은 사택의 출입문을 모두 안으로 걸어잠그고, 격렬한 애정 표현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택동의 이미지를 훼손하는데, 이건 개인의 욕망이 공산주의 이념보다 앞서고, 중요하다는 걸 드러내는 상징적 행위다. 이렇게 권위와 권력의 상징인 모택동의 이미지를 훼손하면서 두 사람은 정욕이 더 강해지는 걸 느끼고 격렬한 정사를 벌인다.
이 소설에서 '섹스'는 명백히 중국의 권위와 통제에 반발하는 상징의 행위다. '섹스'는 지극히 개인적 행위이며 국가나 공산당에서 개입할 수 없고, 개입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다. 우다왕과 류렌은 각자 배우자가 있는 기혼자이며, 중국공산당의 자부심인 인민해방군으로 인민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기혼자이자 중국공산당 당원이며 최고의 병사인 우다왕과 류렌은 중국공산당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하고 '개인의 욕망'을 충족한다.
사단장이 돌아오기 전, 류렌은 자기가 임신했다는 느낌을 받았고, 우다왕에게 집으로 휴가를 가라고 명령한다. 이제 다시 계급 관계가 복원되면서 우다왕은 '유사 사단장'의 지위에서 당번병의 위치로 돌아오지만, 그것만으로도 충격을 받는다.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와 아들을 만나도 크게 기쁘지 않고, 아내와 몸을 섞지도 않으며, 오로지 류렌을 생각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이라는 것과, 다시는 류렌을 만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다왕은 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에 시달린다.
반면 류렌은 우다왕에게 약속한대로 우다왕이 도시의 큰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할 수 있도록 처리했으며, 우다왕의 아내가 그렇게 바란대로 도시에서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류렌은 임신했고, 그 아이가 우다왕의 아이라는 건 오직 류렌 자신만 알 뿐이다. 우다왕도 류렌의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짐작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라는 원칙에 따라 그는 류렌에게 아이가 자기 아이라는 말을 묻지 않는다.
사단장은 인민해방군의 효율적 편재를 위해 스스로 자기 사단을 해체하기로 결정한다. 예하 부대들이 해체되거나 다른 부대로 편입하고, 많은 군인들이 군을 떠나 민간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다왕도 전역하고 도시의 큰 공장 공장장으로 일하게 되는데, 류렌이 약속을 지킨건 우다왕에게 커다란 선물이었다.
이야기는 15년이 지난 뒤에 우다왕이 류렌을 만나려 시도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는데, 두 사람은 결국 만나지 못한다. 아니, 류렌이 우다왕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 우다왕은 사택 근처에서 놀고 있는 열다섯 살 남짓한 사내아이를 오래 지켜보는데, 그 아이가 류렌의 아이인지는 확실치 않다.
중국의 현대가 개인의 욕망을 '공산주의'의 틀로 가두고 있다는 걸 비판, 풍자한 이 소설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사람이 욕망이라는 공통점으로, 그들만의 공간(사택)에서 사회에 반역한다는 내용으로 중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두 사람의 욕망은 순수하지만, 두 사람의 사회적 관계, 사회적 위치, 사회의 기준으로 구분되는 신분의 격차, 이념이 짓누르는 사회 분위기와 함께 개인의 욕망과 사회의 권력 관계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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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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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고고학 -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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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고고학 - 1970
1970년을 기억하는 건 쉽지 않다. 기억은 파편으로 남았고, 나는 그때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는 열 살이었고, 마포의 기찻길 아래, 루핑을 얹은 판잣집에서 살았다. 국민학교 2학년 무렵이었고,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읽다가 한글을 깨쳤다.
집앞으로 문안(사대문 안쪽)에서 흘러나온 개천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흑백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가진 집이 하나였다. 우리집에는 배터리를 고무줄로 묶은 금성 라디오가 유일한 가전제품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연속극이 나오고, '전설따라 삼천리'가 나왔다.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무서운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 꼬마들은 따로 배우지 않았어도 '유행가'를 알고 있었다. 우리들은 동요를 부르지 않았고, 남진의 '님과 함께'를 신나게 불렀다. 맹인 가수 이용복의 노래들, 신중현의 '미인',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봄비', '거짓말이야'를 뜻도 모르고 불렀다.
1971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나는 꼬마였고, 정치를 몰랐지만 아버지에게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대요.'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쉿, 그런 말 하는 거 아냐'라고 하셨고, 1979년, 박정희는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나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 일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라고 썼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쉽게 알 수 없는 한국음악의 팝 계열 음악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했다. '가왕' 조용필이 1971년 처음으로 '가수왕' 상을 받은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70년대 최고의 대중잡지였던 '썬데이서울'이 주최한 '썬데이서울컵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조용필은 최이철, 김대환과 함께 '김트리오'를 결성해 출전했고, '가수왕' 상을 받는다.
70년대는 듀엣, 트리오 같은 그룹이 많이 나타났고, 그들의 노래가 유행했다. 키보이스, 키브러더스, 히식스, 영사운드, 템페스트, 사월과 오월, 어니언스 같은 그룹의 노래는 라디오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마을에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서는 오후5시에 시작하는 방송 시간에 맞춰 입장료 10원을 받고 꼬마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엄마를 졸라 10원을 받아 텔레비전을 보러 달려갔다. 일본 만화영화를 그대로 가져온 '뱀, 베라, 베로', '타이거 마스크', '밀림의 왕자 레오'를 봤고, 동네 누나들은 남진과 나훈아의 팬으로 갈려 서로 '우리 오빠'가 최고라고 부르짖었다. 남진 오빠에게 시집가겠다는 누나가 수십 명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청년들이 부르는 노래를 금지했고, 긴 머리를 길거리에서 함부로 가위로 잘랐으며,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치마 길이를 재고, 경찰서로 끌고가 창피를 주었다. 청년들이 팝송을 부르고, 통기타를 치고, 한데 모여 음악 듣는 걸 두려워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천리마운동'을 시작하자 남쪽에서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으로 따라했다. 시골의 초가집을 벗겨내고 슬레이트 지붕을 덮었고, 마을 길을 넓히고, 북한의 '5호담당제'처럼, 마을 주민을 감시하도록 했다. 언론은 숨죽였고, 텔레비전에는 오락과 코미디만 넘쳤다.
1974년 여름, 한여름 폭우가 개울을 넘고, 집으로 물이 넘실대면서 우리 가족은 한밤중에 보따리를 싸서 철둑으로 도망했다. 날이 밝고, 철둑길에서 바라본 동네는 온통 물바다였다. 지붕만 남은 우리집은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고, 머지 않아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름으로 속절 없이 헐렸다.
우리 가족은 서울의 변두리 산동네, 큰누나가 살고 있는 산비탈 단칸방에서 월세를 살았다. 나는 소년노동자가 되었고, 더 이상 유행가를 따라부르지 않았다. 공장 몇 곳과 식당을 전전하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가다꾼'이 되어 지방 공사장을 떠돌았다. 그때 이정선의 '섬소년'을 들었고,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외웠다.
하루 노동을 마치고 하숙집에 돌아와 카세트 라디오에서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 사월과오월의 '등불', 어니언스의 '편지', '저별과 달을', 영사운드의 '등불'을 들었다.
대중은 알 수 없는, 가요계 인맥과 가수들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은 특히 팝을 중심으로 청년 가수들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어 70년대 청년문화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기 한국의 팝은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을 직접 받고 있었고, 가수들도 미군부대에서 노래하길 바랐다. 미군부대에서 이름을 얻은 가수와 밴드, 그룹이 방송과 연예계로 진출하는 수순이 자연스러웠다.
라디오 방송에서 팝송이나 대중가요를 내보내고, 진행자가 DJ(디스크자키)로 인기 연예인이 되고, 방송국으로 엽서와 편지가 무더기로 보내지던 시절이었다. 70년대 중반, 영화계에서는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라는 특이한 장르가 등장했다. 독재정권이 체제에 부정적인 문화를 거세하고, 대중을 어리석은 상태로 만드는 '우민화 정책'을 쓰면서 '벗기는 영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75년이 되면서 신중현 '미인', 김정호 '하얀 나비', 김세환 '사랑하는 마음', 둘다섯 '긴머리 소녀', 윤항기 '이거야 정말', 송창식 '왜 불러', 윤형주 '어제 내린 비', 검은 나비 '당신은 몰라' 같은 노래들이 히트곡이었다.
나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이런 노래들은 들었지만, 흥겹게 따라 부르고 싶은 상태가 아니었다. 가난과 노동으로 삶은 피곤하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한달에 하루나 이틀을 겨우 쉴 수 있었고, 거의 매일 잔업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 조치'를 발표하고, 많은 연예인들이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거나 화면에서, 방송에서 사라졌다. 내 삶 뿐아니라 사회 전체가 암울하고 답답하던 시기였다. '금지곡'이 늘어나고, 가수, 연예인들의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 가요와 영화는 정부기관의 심의를 받아야 했고, 창작의 자율과 상상력은 억압당했다.
1976년 2월, 나는 매형을 따라 건설노동자가 되었다. '노가다'라고 업신여기는 직업이었지만, 공장보다 임금이 많았고, 공장처럼 한 자리에서 기계 부속품처럼 반복작업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일은 힘들었지만 자율성이 있어서 할만 했다.
송대관의 '해뜰 날'이 방송과 거리에 울려 퍼졌다. 내 인생에서도 '쨍 하고 해뜰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싶었다. 최헌의 '오동잎'이 거리를 휩쓸 때, 나는 경남 울주의 새로운 공단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저 아래, 부산에서 파도를 일으키며 서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1977년, 1978년에도 나는 지방을 전전하며 '노가다'를 뛰었다. 경남 울주, 마산, 창원, 전남 광주, 충청 신탄진, 강원 속초의 건설 현장에서 때로는 하숙집에서 편하게 잠자고, 맛있는 밥을 먹으며 일하다, 때로는 현장의 허름한 숙소에서 잠자고 현장 식당에서 맛없는 밥을 먹으며 일했다.
세상은 내게 따뜻하지도, 호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가수들은 명멸했고, 그룹사운드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카세트 녹음기가 첨단 기기로 나타났고, '공테이프'를 사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녹음했다. 그때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다.
이 무렵 처음 '대학가요제'가 열렸고, 대학생 그룹과 개인의 신선한 노래가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그동안 기성 가수들의 노래에 싫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대학생의 음악에 환호를 보냈다. 샌드페블스 '나 어떡해' 블랙테트라 '구름과 나' 활주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같은 음악들은 청년의 감성을 흔들었다.
그리고 '산울림'이 등장했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놀라운 그룹이 등장했다고 사람들은 흥분했다. '산울림'의 신선한 충격은 오래 이어졌다.
1979년, 나는 지방에서 올라와 독서회 활동을 시작했고,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고 있었으며 삼중당 문고를 열심히 읽었다. 이때 혜은이, 이은하, 윤시내 같은 여성 가수들이 도드라졌다. 그룹사운드의 음악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끊이지 않고 나왔다. 활주로, 블랙테트라, 샌드페블스, 휘버스, 작은 거인, 장남들, 벗님들, 블루드래곤 같은 그룹사운드의 음악은 한국 팝 음악의 70년대 열매이자, 80년대를 여는 서곡이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 독재가 막을 내렸다. 박정희는 부하가 쏜 총에 맞아 죽었고,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 책은 그 시대를 기억하는 가수, 연주자들, 음악 제작자, 프로듀서, 작곡가 등의 인터뷰가 많이 실려 있어서 음악의 흐름과 가수를 비롯한 음악 관련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풍성하고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음악이 탄생하는 과정이 얼마나 다양하고 긴밀한 인간 관계를 통해 일어나는가를 잘 알 수 있고, 가수, 작곡가, 연주자들이 선의를 가진 협업을 통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신기하고 흐믓하다. 모든 것이 아날로그이던 시대, 아날로그의 투박하지만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포크와 팝 음악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녹슬지 않고 싱싱하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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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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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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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끝
옌롄커의 초기 작품. 중국문학에서 '신사실주의'를 만든 작품으로 알려졌고, 이 작품으로 옌롄커는 매우 위험한 상황까지 몰리는 탄압을 받았는데, 다행히 외국의 언론이 그를 살렸다. 중국정부는 옌롄커의 작품을 불온하다고 판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 소설은 단순하고 무겁지 않다. 현대 중국의 현실 가운데서 중국해방군 내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그것이 '불온'하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중국정부가 이 소설을 '불온' 딱지를 붙일 작정이었다면, 그것은 이 소설을 바라보는 중국정부의 관료들이 매우 편협하고, 스스로 잘못을 감추려는 불안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그냥 두었다면 이렇게 크게 난리가 나지 않았을텐데, 불구덩이를 함부로 쑤셔서 사건을 크게 만든 건 중국정부였다. 그래서 옌롄커의 이름은 더 널리 알려졌고, 그가 중국정부로부터 탄압당하는 작가라는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세계문학계에서 옌롄커의 이름은 확실히 각인되었다.
소설의 서사는 단순하다. 인민해방군 중대장 자오린과 정치지도원 가오바오신이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전우이며, 오랜동안 함께 복무한 처지라 서로를 형제처럼 가깝게 생각하고 있다. 두 사람은 승진에 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고향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베트남 전쟁 이후로 중국해방군은 심각한 전쟁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고 있으며, 날마다 훈련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의 삶에 심각한 고비가 닥친 건 총기보관소에 있던 자동소총 한 정이 사라진 이후였고, 두 사람이 총기를 찾으려 곳곳을 수색하지만 발견하지 못한다. 이 사건으로 문책을 당하게 될 경우를 예상하는 두 사람은 미묘한 신경전을 펼친다.
그러다 3중대 신임 병사 '샤를뤄'가 사라진 총기로 자살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어린 병사 '샤를뤄'의 자살을 둘러싼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상부에서는 병사 자살사건을 두고 중대장 자오린과 정치지도원 가오바오신을 문책하기로 결정한다.
자살 경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일주일 가까이 감금당해 한 방에서 생활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걸 느낀다.
'샤를뤄'의 자살 이후 오히려 상부에서는 두 사람을 심하게 문책하지 않고, 한 계급 강등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두 사람 모두 군대에 남게 되었으며, 벌점은 받았지만 더 노력해서 다시 진급하면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이 소설이 중국 현대문학에서 '신사실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서사의 사실성에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중국 현대문학 작품에서 이만큼의 '리얼리티'도 확보하지 못한 작품들이 발표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지만, 서사가 내재한 담론의 폭은 상당히 넓다. 군부 내부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한 것은 분명 충격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확률의 범위에 있다. 다만, 여기서 '샤를뤄'가 자살한 이유는 끝내 밝히지 못한다. 그의 부모도 아들 '샤를뤄'가 사회성이 부족해 보인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자살할 이유일 수는 없다.
중국 군대에서는 물리적 폭력, 따돌림 같은 건 생각하기 어려운데, 이는 인민해방군이 일본군이나 한국군처럼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제국주의 군대와는 다른,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탄생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은 중국 국가를 이루는 양대 산맥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공산당'의 지도와 '인민해방군'의 역할은 최우선 가치를 지닌다.
이 소설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오히려 군대 내부의 문제보다는 자오린이 끝내 버리지 못하는 '농민' 출신의 비애와 원한이다. 자오린은 가난한 시골마을의 농민으로 살다 어렵게 인민해방군에 입대한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농촌에서 유일한 탈출은 군인이 되는 것인데,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경쟁자들은 군대에 추천할 권한을 가진 촌장에게 뇌물을 주어야 한다.
자오린도 촌장이 새집을 짓는 곳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 일을 해주었고, 그의 친구가 경쟁을 포기하면서 군인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친구는 사고로 죽고, 친구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중대장이 된 이후 자오린은 휴가 다녀온 병사들이 가져온 작은 선물을 받는데, 그것이 뇌물은 아니지만, 병사들이 무언가를 가져다 바쳐야 한다는 중국 군대의 현실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최저 생활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 배급제도 1993년 이후부터 사라지고 중국 인민은 정부의 도움 없이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공산주의의 정체성이 사라지면서, 인민은 각자도생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 것이다.
자오린이 아내와 딸들을 어떻게든 영내로 불러들이려 한 것도 농촌에서는 먹고 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와 '농민공'이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도시에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라도 하지만, 시골에서는 안정적 수입이 없고, 빈민을 구제할 지방정부도 없으니 생존 문제가 심각하다.
옌롄커는 군대 내부의 문제를 꺼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농민의 가난한 삶과 그걸 방치하고 있는 중국정부의 무능 또는 무관심을 비판하고 있다. 자오린이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 가오바오신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군대를 떠나는 상황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단지 명예 때문이 아니다.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문제가 동지와의 오랜 우정도 포기할 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자오린은 상상하지 못한 인연을 만나는데, 그의 부대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상점의 회계 왕후이를 만나게 된 사건이다. 자오린은 마흔이 넘은 사내인데, 양귀비, 서시보다 더 아름다운 왕후이가 자오린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결혼해서 아내와 두 딸이 있는 자오린은 왕후이의 접근을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아름다움과 열정에 마음이 흔들린다.
인민해방군 장교가 불륜을 저지를 수 있다는 설정은 중국 현실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자오린은 끝내 자기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왕후이와의 만남은 열린 결말로 두지만, 중국 인민의 결혼과 연애, 이혼 같은 사생활이 중국 정부의 경직된 태도를 건드린 것으로 보인다.
옌롄커의 작품이 현대 중국을 살아가는 인민들의 구체적, 보편적 삶의 태도와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중국 인민의 비극성과 낙관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샤를뤄'의 죽음 이전과 이후에 보여주는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의 태도는 공산주의 사회 중국에서 개인이 가진 욕망의 표현과 '사회주의자'로서의 인민이 보여주어야 하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소총 도난 사건 이후와 '샤를뤄'의 자살 사건 이후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은 상대를 비난하면서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를 보인다. 전쟁터에서 서로의 목숨을 살려줄 정도로 진한 전우애를 가진 이들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 이익에 연연하며, 서로를 비난하는 태도는 그들이 공산주의로 무장한 사회주의자라 해도 개인의 욕망과 이익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존재라는 걸 말한다.
하지만 '샤를뤄' 자살 사건의 진상조사가 끝나고,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에 대해 한 계급 강등 정도로 사건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상대방의 처지를 옹호하고, 군대를 떠난다면 '내가 떠나겠다'고 말하면서, 동지를 위해 기꺼이 자기 미래를 양보하겠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이중적 태도는 인간이라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동안 중국사회는 '이상적 공산주의자'의 전형을 만들었고, 개인의 욕망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 이중성과 모순을 내재한 인간형을 무시하거나 부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옌롄커의 작품이 중국정부의 탄압을 받게 된 것도 중국정부가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직된 정책과 '좌파적 환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중국의 현실을 지나치지 않게 있는 그대로 반영한 점과 개인의 나약함, 이중성을 하나의 돌연한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소설 제목이 '샤를뤄'이고, 작품에서 신입 병사 '샤를뤄'가 자살하는 건 중의적이다. '그해 여름의 끝'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는 '여름해가 질 때'가 조금 더 느낌이 가까운데, 작품에서 '샤를뤄'가 남긴 긴 편지 내용이 바로 이 장면을 말한다. '샤를뤄'는 자살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긴 편지를 보내는데, 그가 묘사한 풍경은 누구도 본 적 없는 몽환적 분위기다. 부대 근처에 강이 없는데, '샤를뤄'는 붉게 타오르는 강을 묘사하고 있었다.
나중에,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이 징계를 당했지만, 다행히 두 사람 모두 군대에 남아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해지는 거리를 걸어 도달한 곳에서 본 풍경이 바로 '샤를뤄'가 편지에 쓴 그 풍경이 보이는 장소였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이 편지 내용과 똑같아서 충격을 받는다.
'샤를뤄'가 자살한 이유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 풍경, 중국의 거대한 대륙의 장엄하면서도 몽환적인 석양의 압도하는 자연의 힘과 경이로움이 '샤를뤄'를 죽음으로 이끈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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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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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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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기원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짧은 시간 살다 죽지만, 그 시간이 행복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이 들어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다. 현대 자연과학은 우주의 기원부터 인류의 진화까지 이론과 실험을 통해 많은 부분 밝혔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인류가 존재한 이후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선진국'에 속한 나라에서, 배 곯지 않고 사는 걸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구 인구의 50억 명은 지금도 가난과 굶주림,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며, 전쟁과 자연 재해로 고통받는 삶을 산다.
풍요로운 나라에 살아도 무지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많다. 인간이 만든 '신'을 믿으며, 어리석고 멍청하게 사는 사람도 많고, 눈앞의 쾌락을 추구하며 넓고 깊은 세상을 모른 채 사는 사람도 많다.
'개인'은 사회의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환경의 지배를 받는 나약한 존재다. 이런 한계를 안고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 '순수한 기쁨'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 그런 감정을 느꼈다.
다른 모든 학문은 인간의 실제 삶에 필요하거나 영향을 주고 받지만, 자연과학은 지금 우리의 삶과 직접 관련 없는 경우가 많다. 수학의 순수한 이론적 성취를 예로 들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리만 가설', 푸앵카레 추측', '골드바흐 추측' 같은 이론은 한평생 살면서 전혀 몰라도 되는 지식이다.
특히 이 책처럼 우주를 다룬 지식은 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내용이며, 모른다고 창피할 것도 없다. 우주, 별의 탄생과 죽음, 태양계, 원자, 양자 같은 이론과 지식은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 읽기에 어렵다. 자연과학은 기본이 어렵다. 이 분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이고 영역이다. 이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피보나치, 오일러, 갈루아, 가우스, 칸토어, 페렐만, 힐베르트, 리만, 와일스 같은 수학자,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닐스 보어, 프랑크, 패러데이, 뉴튼,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슈레딩거, 페르미, 케플러, 파인만 같은 물리학자 그리고 자연과학 각 분야마다 존재하는 무수한 천재들은 인류의 0.0001%도 안 되는 매우 뛰어난 존재들이며, 인류의 빛과 희망이다.
우리는 이들 천재가 만든 길을 따라가며, 그들이 만든 세계를 보고 놀라고 감탄한다. 우리는 그 세계를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들이 만든 세계가 우리의 생활을 놀랍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이 만든 세계는 우리 삶과 생활에 직접 이해관계가 없지만, 그 자체로 인간의 '이성 활동'의 놀라움과 순수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영역이다.
자연과학을 공부한 학자, 전문가가 나같은 평범한 사람을 위해 최대한 쉽게 쓴 자연과학 개론, 기초 입문서를 많이 출판하고 있다. 내가 자연과학 책을 읽기 시작한 건 2000년 초반부터인데, 이 시기가 한국출판계에서 자연과학 책을 본격 출간하던 때라고 알고 있다. 1990년대까지는 사회과학과 문학이 주류였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출판의 흐름에도 변화가 온 것이다.
가장 먼저 자연과학의 선두에 서서 대중을 이끈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이 책은 1980년대 초반에 출간했으니 이제 40년이 된 고전이지만, 여전히 잘 팔리고,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만큼 진화론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기적 유전자'를 시작으로 리처드 도킨스의 (한글로 번역한) 다른 책들을 다 읽고, 진화와 관련한 다른 책들, 수학, 물리학, 천문학, 우주와 관련한 책들을 꾸준히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다 어려웠지만, 어려워도 꾸준히 읽으니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고, 여전히 모르는 내용이라도 읽으려 노력한다.
이 책은 우주의 시작과 진화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우주가 138억년 전에 빅뱅으로 탄생했다는 건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에 우주로 올라간 제임스 웹 천체망원경으로 관찰하게 되면 또 어떤 놀라운 발견을 할 수 있을지 몹시 기대하는데, 지금의 과학으로도 빅뱅 이후 10의 -35초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추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더 놀라운건, 10의 -35초에서 -33초 사이에 가속팽창을 한 것까지 밝혔는데, 우리의 상상으로는 10의 -35초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가사의한 순간인데, 이걸 현대 인류의 과학이 포착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빛이 도달한 거리까지여서, 138억년의 시간이라고 알 뿐, 그보다 멀리 있는 우주는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우주가 여러 개인지, 닫혀 있는지, 몇 개의 차원인지 아직 모르는 것이 매우 많지만, 인류는 멸종하는 순간까지 우주의 비밀을 알려고 노력할 것이다.
옛날 브라운관 텔레비전에서 채널 사이에서 지직거리며 화면이 물결처럼 흔들리면서 잡음이 들리는데, 그게 바로 '우주복사'의 흔적이고, 138억년의 파동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우주와 아무 관련도 없지 않다는 걸 깨닫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가 우주에서 온 것이며, 우리가 죽어 육체가 사라지면 모두 원자가 되어 다시 우주로 돌아간다는 이 '과학적' 사고방식이야 말로 어떤 '종교'나 '신'보다도 더 아름답고 신비하지 않은가.
우주를 공부하는 건 '순수한 기쁨'을 얻는 지식이자, 삶을 겸손하게 살아가는 동기가 된다. 우리는 저 우주 속에서 '창백한 점'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날뛰어도 우주에서는 티끌보다 작은 존재로 살다, 바다의 파도 위에 잠깐 떠오른 물방울처럼 이내 사라지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우주를 바라보고, 우주를 생각하는 건, 내가 '인간'으로 진화한 동물의 후손이고, 말과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걸 깨달으면서, 더 없이 고맙고 행복하게 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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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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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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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먼저, 이 소설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은 창작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작가 옌렌커의 고향이 허난성인데, 공교롭게도 허난성에서 문제의 사건이 발생했다. 허난성은 인구는 많으나(9천6백만 명) 가난한 지역으로, 황허 남쪽 내륙의 농업 중심 지역이다. 여전히 봉건적 잔재가 많이 남아 있고, 70년대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의 기운이 남아 있는 곳이며, 70년대, 80년대 개혁, 개방,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혜택을 적게 받은 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 1990년대 초중반에 믿기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다.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는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가 창궐했다. 초기에 이 병에 걸리면 약도 없고, 고통스럽게 죽어간다는 보고가 있어서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특히 이 병이 동성애자에게 많다고 해서 동성애를 혐오하고 공격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타액과 피를 통해 전염된다고 알려진 '에이즈'는 미국과 유럽 즉 서방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생한 '타락한 윤리'의 결과라고 중국은 결론을 내렸다. 중국에서는 85년 6월에 최초의 에이즈 환자가 사망했는데, 그는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이 무렵 중국은 혈우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서 수입한 혈장을 검사하다 '인간면역 결핍바이러스(HIV)'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이 약은 이미 몇 사람의 환자에게 사용했고, 그들 가운데 네 명이 HIV에 감염된 것을 확인했다.
중국 정부는 서양의 '에이즈'에 맞서 꿩 먹고 알 먹는 전략을 개발한다. '깨끗한' 중국 인민의 피를 모아 중국에서 '깨끗한 혈장'을 만들어 제약회사에 팔면, 중국 경제도 살리고, 중국 인민에게도 경제적 이익이 발생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대도시 인민을 상대로 하지 않고, 아직까지 봉건적 잔재가 많고, 농촌의 유교적 질서가 남아 있으며, 가난한 농촌 지역 인민을 대상으로 이 전략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 첫번째 대상이 바로 '허난성' 지역 인민들이었다.
1990년, 중국 정부는 허난성 인민을 대상으로 채혈센터를 구축하고, 인민들에게 '매혈'할 것을 선전했다. 말이 선전이지 지역의 공산당 간부를 통해 할당량을 정하고, 혈액을 수집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물론 매혈을 하는 인민에게는 돈을 주었다. 허난성에 있는 117개 현에는 모두 400개가 넘는 채혈센터가 설립되었고, 이곳에서 인민들의 '피'를 돈을 주고 샀다. 이른바 '매혈경제'가 시작된 것이다. 500cc를 채혈하면 50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돈은 미국돈으로 약 8달러 정도, 한국돈으로 1만원 정도가 된다. 당시 허난성의 가난한 농가가 농사를 지어 1년에 버는 수입이 200달러가 안되었으니, 채혈 한번에 8달러라면 큰돈이었다.
중국 정부는 인민 한 사람이 한달에 2회까지만 매혈을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일주일에 1회, 많게는 3일마다 한번씩 매혈하는 사람도 있었다.
채혈센터는 허난성 정부가 세운 공식 센터가 있었지만, 시골 마을에는 사설 채혈센터가 많았다. 사설 채혈센터에서는 지역주민을 직접 찾아가 채혈을 했고, 그 피를 정부 채혈센터에 팔아 중간 이윤을 챙기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이때 사설 채혈센터는 바늘과 솜, 주사바늘 등을 재활용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의 피가 섞이게 되었고, 이것이 허난성에 '에이즈'가 퍼지는 원인이 된다.
중국 정부는 매혈하는 인민에게 돈을 주었지만, 그 돈은 피를 판 대가로는 너무 적었고, 인민을 속였다. 중국 정부는 인민의 피를 모아 제약회사에 팔았는데, 정부가 마치 브로커처럼 중간에서 인민을 속이고, 인민이 받아야 할 돈을 가로챈 것이다.
1995년이 되면서 중국 의료인들 가운데 양심적 의료인들이 '매혈경제'의 진실을 밝히기 시작한다. 특히 허난성 저우커우시의 감염질환 연구자인 왕슈핑은 매혈자들이 HIV, AIDS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시와 성 보건국에 보고하지만, 보건국은 왕슈핑의 보고를 묵살하고 왕슈핑을 해고한다. 왕슈핑이 베이징에 있는 국가보건성에 다시 샘플 재조사를 의뢰하자 중국 정부는 허난성의 모든 채혈센터를 폐쇄하기 시작했다.
1999년부터 '에이즈' 환자가 발생했고, 허난성에서 매혈을 한 인민은 약 300만 명에 이르며, 이들 가운데 적게는 60만 명에서 많게는 120만 명이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중국 당국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2001년이 되어서야 공식 인정했다.
이 소설, '딩씨 마을의 꿈'은 위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촌장 역할을 하는 딩수이양 노인의 맏손자인 딩샤오창인데, 딩샤오창은 이미 죽은 인물이다. 그것도 누군가 몰래 음식에 탄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딩샤오창이 죽은 건 그의 아버지 딩후이가 마을 주민을 속이고 오로지 돈벌이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결국 딩후이는 자신이 저지른 못된 짓의 대가로 아들이 독살당하는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반면 '딩씨' 집성촌의 큰 어른인 딩수이양 노인은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인물로, 마을 주민 모두의 행복과 권리를 위해 합리적이고 공평한 태도를 유지한다. 하지만 맏아들 딩후이가 시당 간부로 일하면서 사설 채혈센터를 운영하고, 관(시신을 넣는 관)을 공급하는 사업을 독점하면서 중간에서 많은 이윤을 챙기는 걸 보면서 아들 딩후이의 태도가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하고 비판한다.
딩수이양 노인은 전통적 중국 인민의 전형이다.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깨어 있는 중국 인민이 딩수이양 노인이지만, 그는 이미 다 늙어서 힘이 없다. 즉,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고 싶어도 힘이 부족한 것이다.
반면 맏아들 딩후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은다. 중앙 정부와 성, 시에서 '채혈센터'를 설립해 '매혈경제'를 일으키자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나서서 마을 주민을 설득해 피를 팔도록 한 사람이 바로 딩후이였다.
딩후이는 90년대 이후 개혁, 개방 경제를 상징하는 '자본주의적 인민형'의 상징이며, 지방의 말단 공산당원 가운데 부패한 공산당원의 전형이다. 딩후이는 마을 주민의 피를 모아 중간 이윤을 남기고 피를 넘겼으며, 에이즈에 걸린 환자가 죽으면 성 정부에서 무상으로 지급하는 관을 돈 받고 팔아서 이윤을 챙긴다. 여기에 '영혼 결혼'을 주선하면서 양쪽 가족에게서 다시 돈을 받는 등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으는데, 그렇게 모은 돈으로 딩후이는 도시에 거대한 호화주택을 짓고, 방마다 돈다발을 가득 쌓아놓고 있었다.
딩수이양 노인은 아들 딩후이에게 마을 사람들 앞에서 절하며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말한다. 딩후이가 채혈센터를 하면서 사람들이 피를 팔고, 그러다 에이즈에 걸렸으니 마땅히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 딩수이양 노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딩후이는 오히려 자기가 채혈센터를 세워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벌도록 해주었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야 한다면서 뻗댄다. 그렇게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두 사람은 불편한 관계가 된다. 이것은 중국의 현대사에서 '공산주의적 정신'과 '자본주의적 정신'의 대립, 갈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딩씨 마을'에서 열병 환자(에이즈 환자)가 늘어나자 딩수이양 노인은 환자들을 학교로 모아 한 곳에서 생활하도록 한다. 어차피 병에 걸린 사람들은 함께 있어도 서로를 전염시킬 염려가 없으니 한 곳에 모여 생활하는 것이 식량도 아끼고, 열병에 걸리지 않은 가족과 이웃에게도 좋기 때문이다. 이렇게 환자들이 학교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딩수이양의 둘째 아들 딩량과 딩수이양의 조카며느리 양링링이 눈이 맞아 불륜을 맺는다.
이 작품에서 많은 부분을 딩량과 양링링의 이야기에 할애하는데, 작가가 두 사람의 불륜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딩량과 양링링은 각자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배우자들은 열병에 걸리지 않았고, 공교롭게 딩량과 양링링만 열병에 걸려 학교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모두 젊고, 특히 양링링은 신혼을 막 지낸, 스물네 살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인데, 곧 열병으로 죽게된다는 현실이 몹시 비극적이다.
딩량은 사촌 동생의 아내인 양링링과 불륜을 저지르지만,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동안 사회적 관습에 얽매여 있던 인간 관계가 '열병'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깨지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인습과 도덕, 염치, 예의 같은 전통적 가치보다 그들 '개인'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여기에 두 사람은 어려서 각자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여의는데, 딩량은 양링링에게 '어머니'라고 부르고, 양링링은 딩량에게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들은 부부이면서 모자, 부녀, 오누이 관계가 된다. 이 호칭이 상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서, 독자도 이 부분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도덕적 고정관념에 충격을 받는다.
딩량과 양링링은 불륜이자 부부이고, 근친상간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전통적 유교문화, 도덕관념, 봉건적 질서 등에 대한 전복적 표현이다.
두 사람은 열병을 앓는 상태에서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존 배우자와 이혼하고, 정식 혼인을 해서 부부가 된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은 진심으로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거의 동시에 숨을 거두고, 딩량의 형 딩후이는 두 사람의 장례식을 화려하게 치른다. 왕이나 쓸만한 최고급 관에 고급의 부장품을 넣어 거대한 묘를 만들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묘는 도굴당하고, 관도 파헤쳐진다.
마을 주민들은 부정하게 돈을 번 딩후이를 응징하는 방법으로 딩량과 양링링의 묘를 파헤친 것이다. 부패한 관리 딩후이의 행동은 인민에게 증오의 대상이며, 기회만 되면 딩후이는 '뒤통수에서 칼을 맞을' 운명인 것이다.
딩수이양 노인은 마을 주민들이 딩후이를 원망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자기가 봐도 아들이지만 돈에 눈이 멀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딩수이양 노인은 아들 딩후이에게 마을 주민에게 사과하고, 부정하게 돈을 모으지 말라고 경고한다. 마을 주민 가운데는 딩후이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만나면 '뒤에서 칼을 꽂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딩후이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짜증나고, 자기가 하는 일이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에게 효도하겠다는 뜻에서 딩수이양 노인을 도시에 있는 자신의 호화주택으로 초대한다. 그곳에서 돈이 가득한 집을 본 딩수이양 노인은 아들 딩후이가 바른 삶을 살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딩후이는 독살당해 무덤에 묻힌 아들 딩샤오창(화자)의 영혼 결혼식을 하려고 무덤을 파헤쳐 다른 곳으로 가져가려 한다. 영혼 결혼식의 신부는 현의 당간부 딸로, 딩후이는 출세를 위해 죽은 아들까지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딩수이양 노인은 분노로 몸을 떨며 몽둥이를 집어들고 맏아들 딩후이의 뒤통수를 때려 살해한다. 그리고는 마을 주민들에게 '내가 딩후이를 때려죽였소'라고 부르짖는다.
전통적인 중국 인민인 딩수이양 노인은 자본주의의 폐해로 찌든 현대 중국인 딩후이를 살해한 것이다. 이것은 현대 중국의 모습이 중국 인민 다수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며, 현대 중국은 자본주의 경제 도입 이후 당과 간부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나라 전체가 썩어가고 있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는 걸 뜻한다.
옌롄커의 소설은 처음 읽었다. 그의 작품이 한국에 거의 모두 번역되어 있는 것도 이번에 알았는데, 이 소설 '딩씨 마을의 꿈'을 읽고, 옌롄커의 소설이 중국에서 판매금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다. 옌롄커의 소설은 그 이전 작가인 모옌의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 모옌도 중국현대사에서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입장이긴 해도, 중국 인민의 위대함, 중국공산당의 긍정적 면을 그리고 있는데, 옌롄커의 작품은 특히 현대 중국의 상황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어서 경직된 중국 정부의 권력자들에게는 몹시 불편한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예롄커의 작품은 현대 중국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는 새로운 형식의 문학이다. 그의 작품은 앞선 세대가 그린 '위대한 중국', '위대한 인민'의 뿌리는 잃지 않으면서,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중국공산당원의 부정, 부패, 정책의 오류, 경직된 제도, 권력의 남용, 자본주의 경제 도입 이후 발생하고 있는 심각한 빈부격차 등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현대 중국문학의 특징은 일당독재인 중국공산당 체제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혼재해서 발생하는 모순과 갈등을 중국현대사의 비극적 상황과 씨줄과 날줄로 엮어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데 있다. 위화의 '형제'도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인데, 중국 문학이 세계문학에서 차지하는 독특하고 고유한 위치도 중국의 이런 비대칭적 구조이기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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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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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설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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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설거지
안정효 작가와는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세월의 어느 지점에서 인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안정효 작가 고향은 서울 마포구 공덕동 434번지인데, 내 고향은 공덕동 432번지였다. 번지수만 보면 이웃이다. 다만 안정효 작가는 나보다 꼭 스무살 연상으로, 거의 한 세대에 가까운 어른이다.
그의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마포가 배경이며, 고등학교 시절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안정효는 이미 중학 1년 때부터 영화광이었으며, 그의 삶에서 영화는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도 '유명한 번역가'에서 출발해 '실천문학'에 연재된 '전쟁과 도시'를 읽으면서였다.
안정효는 이미 대학생 때부터 영어를 잘 하기로 유명한 학생이었고, 졸업하기 전에 이미 영자 신문사에 취업했다. 그는 번역을 업으로 삼기 전인 학생 때 영어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소설을 미국에서 출판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여러 번 미국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며 작품 출판을 시도했으나 결코 쉽지 않았다.
이 책 '세월의 설거지'는 안정효의 자서전이다. 다만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자신을 대상화한 것은 상황을 보다 객관으로 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짐작했다. 1인칭 '나'로 이야기를 풀어가다보면 직접 말하기 괴로운 장면이 많고, 뒤로 갈수록 자기 자랑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완화하는 방식이 3인칭 서술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안정효는 1941년에 태어났으니 해방과 전쟁을 어릴 때 겪었다. 어릴 때 겪은 전쟁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그의 가족이 마포에서 안양으로, 다시 할머니가 계시는 소사(부천)에서 전쟁을 겪고 집(마포)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어린이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작가의 가족은 전쟁 때 불에 탄 집을 아버지가 스스로 지었으며, 가게를 서너 개 만들어 세를 놓을 정도였다. 그 동네에서는 그나마 사는 형편이 나은 가족이었다. 전쟁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1950대 중반부터 작가의 집은 부자는 아니어도 굶지는 않는 생활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내용은, 작가의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석공으로 일하러 다녔는데, 석공이 쓰는 연장을 벼르는 대장간을 집에 설치해 놓을 정도였다. 집도 직접 지을 정도로 손재주도 좋은 작가의 아버지는 성실하고 재주 있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어느 순간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아버지가 된다.
나도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을 자주 보면서 자랐다. 두 사람은 육탄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동네가 떠들썩하게 욕설이 난무하고, 집안의 살림이 날아다녔다. 그래도 아버지는 점잖은 편이고, 어머니를 때리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비난했으며 그럴만한 이유도 충분했다. 어릴 때 부모가 싸우는 장면만 보고 자란 나도 트라우마가 생기는데, 아버지의 일방적 폭력을 겪어야 했던 작가의 어머니와 자식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함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문제는, 작가의 아버지가 아내를 구타하는 시기가 아이들이 어릴 때만이 아니라 자식들이 모두 자라서 청년이 되었을 때도 여전했다는 것이다. 자식이 어릴 때는 아버지의 권위와 물리적 폭력에 저항하기 어렵다고 해도, 청년이 된 상황에서 아버지의 폭력을 저지할 수 있었음에도 여전히 어머니는 폭력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부부싸움을 하던 아버지에게 대든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었고, 아버지는 무능했다. 나는 어머니 편에서 아버지를 비난했고, 아버지를 증오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작가의 아버지에 비하면 더 없이 선량한 인간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거의 대부분은 작가의 글쓰기와 관련한 내용이다. 작가는 중고등학생 때는 만화를 그렸고, 대학생이 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다재다능하고 머리 좋은 인물이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지망할 계획도 있었지만 친구의 권유로 서강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해서는 곧바로 영어를 다른 친구보다 월등히 잘 하는 학생이 되었다. 영어를 잘 하는 것으로 작가의 삶은 큰 줄기가 결정되었다.
영어를 잘 했기 때문에 영자 신문사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브리태니커 편집부장이 되었으며, 한국 최초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마침내 자기 소설을 미국에서 영어로 출판하게 되었다.
'하얀 전쟁'과 '은마'가 미국 소호출판사에서 출판되고, 영어권에서 호평을 받은 것은 물론, '뉴욕타임스'의 서평란에 큰 지면으로 소개된 것은 한국작가 가운데 안정효 작가가 최초다. 하지만 이런 기록도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높이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때가 전두환 군부독재 시기라는 특성도 있었으나, '번역가 안정효'를 '작가 안정효'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고 본다.
작가 안정효는 50세 이후부터 창작 활동이 더 활발했다. 그의 작품은 한국문학에서 의미 있는 부분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가 너무 유명한 번역가로 알려진 것이 오히려 '소설가'로 진입하는 장벽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문학사에서 작가 가운데 영어를 뛰어나게 잘 하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그 가운데 최고가 안정효 작가가 아닐까. 과거 남조선 노동당원이자 미군정에서 근무했던 설정식도 영어를 잘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는 너무 짧은 삶을 살았고, 미국에서 영어를 배우지 않은 한국인이 직접 영어로 쓴 소설로 미국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안정효 작가가 아직까지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해방과 전쟁을 겪은 세대이며, 폐허인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과정을 직접 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고, 가난하던 시기에 대학을 다녔으며, 당시 한국 문학, 문화계의 첨단을 달리는 소수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삶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하게 기록된 생생한 기록이며, 그 자신이 이룬 많은 성과 역시 우리 문화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 자서전은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개인의 삶이자,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견이며, 한국문학과 영문학의 화학적 결합을 목격하는 현장이고 한국문학이 나갈 미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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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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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 - 에리히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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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 - 에리히 프롬
한글 학교에 다니는 큰누나를 위해 쓰지 않고 모아 둔 공책(노트)를 정리하다 오래 된 노트에서 발견한 자료. 대략 35년쯤 전에 쓴 노트다. 에리히 프롬의 책을 읽고 정리한 내용인데, 한때 이렇게 꼼꼼하게 정리한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군 복무를 할 때, 30개월 동안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휴가나오면, 집에서 더블백에 책을 담아가서 다 읽고, 다시 나올 때 책을 짊어지고 나오기를 반복했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 행정병이어서,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고, 책 읽을 시간이 다른 병사보다는 조금 더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행정사무실(군수과)에서 혼자 있을 때,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심지어 판화도 찍고, 그림도 그렸다. 거기에 좋은 동기들이 있어서 나는 다행히 군대 트라우마는 거의 없는 편이다.
이 노트도 군대 있을 때였거나 그 직후일 때 쓴 내용이다. 이제 스캔했으니 원본은 다 버리고, 줄이고, 정리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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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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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 - 올리버 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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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 - 올리버 색스
올리버 색스의 책은 그의 자서전 '온 더 무브'를 가장 먼저 읽었다. 그의 삶 자체가 상당히 드라마틱하고 흥미롭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다큐멘터리 '올리버 색스, 그의 생애'를 통해 큰 줄기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는데, 이 책 '환각'은 그가 마지막으로 쓴 책이기도 하다.
수많은 환자들의 병력을 기록하면서, 올리버는 환자들의 증세와 실제 병명이 다르다는 걸 자주 발견하게 된다. 비슷한 증상처럼 보이는 병에도 원인이 사뭇 다르고, 질병의 부위, 정도에 따라 발현하는 증상이 다르게 나타나며, 환자 자신은 병리학적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의사가 환자를 깊이 관찰하고, 면담하고, 병증을 검사하면서 근본 원인을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뇌 기능에 이상 증상이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병증을 기록한 것으로,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환각'을 다루고 있다. '환각'은 어떤 경우든 뇌의 특정 지점에서 발생하는 전기적 작용의 결과물이다.
뇌과학의 발달은 지금까지 인류가 믿었던 모든 불가사의, 초자연 현상, 귀신, 유령, 신의 존재, 임사체험, 천국과 지옥, 악마 등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올리버는 이 책에서 열 다섯 종류의 환각 체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간의 뇌는 매우 섬세하게 발달해서, 뇌의 특정 부위가 조금만 비정상적 자극을 받으면 곧바로 반응한다.
'샤를보네 증후군'의 경우, 시각을 잃은 환자들이 보게 되는 환각으로, 실재 사람과 사물을 보는 것과 똑같은 환각이라고 한다. 시각을 잃어도 뇌는 이미지를 처리하려는 관성이 남아 있어서, 뇌에서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이때 이미지는 환자의 경험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즉 무작위로 이미지가 생성되며, 환자는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과 풍경 이미지를 보게 된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감각을 차단하면 환각, 환청, 환시를 보게 되는데, 이런 실험을 통해 실제 실험자들은 다양한 경험을 기록했다. 이때, 실명을 하지 않고도 단지 눈을 오래 감고만 있어도 '샤를보네 증후군' 현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망망대해를 오래 항해하는 선원, 사막을 건너는 모험가 등은 주위의 단조로움 때문에 환각을 볼 수 있다.
없는 냄새를 맡는 '후각 환각'도 있는데, 후각을 상실하거나 시각을 상실한 경우에도 후각 환각을 느끼게 된다. 환청은 정신질환을 앓지 않는, 정상인에게도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환청은 사람의 목소리, 음악 소리, 각종 기계음-초인종, 벨소리 등-처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다양한 원인으로 기인한다.
여러 종류의 마약, 간질 발작, 어릴 때 만나는 환영 등 무수히 많은 경우에 따라 사람은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보게 된다. 뇌의학은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면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를 알아가는 단계에 있고, 상당히 진전한 연구들이 발표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이런 면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동물도 꿈을 꾼다는 건 알려졌다. 하지만 인간처럼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면서 환각, 환영, 환청, 환후각 등을 경험할까 하는 것인데, 동물에게 마약 실험을 하면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 궁금하다. 동물은 지각이 없기 때문에 기억(인간처럼 저장된 기억)도 없으며, 시간의 순서를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동물에게는 환각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이런 다양한 뇌 반응이 나타나는건, 인간이 그만큼 복잡하면서 불완전하게 진화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진화 단계에서 동물과 똑같은 감각 반응만 있었다. 진화 단계에서 직립 보행, 도구 사용, 불의 사용과 익힌 음식의 섭취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류는 빠르게 변화했고, 외부의 위협과 자극에서 살아남는 과정에서도 운동 반응과 개념 같은 고차원 작용이 발생했다.
기억과 시간의 개념이 만들어지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인류는 '말'을 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뇌는 다른 신체부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뇌가 커지면서 저장하는 정보의 양도 많아지고,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인류의 감각 기관은 초기에 청각(소리)에 가장 크게 의존했으나 점차 시각(이미지)으로 옮겨가면서 청각과 후각 기능은 발달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시각이 발달했다. 이때 시각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서, 뇌는 시각 정보(이미지)를 분류해 비슷한 것들끼리 묶어서 범주화한 다음, 한꺼번에 인지하게 된다. 이런 범주화는 뇌의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려는 것과 정보 처리 속도를 빠르게 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인 알츠하이머, 파킨슨증, 뇌졸증, 치매 같은 병은 모두 뇌의 이상에서 발생하는 질병이다. 인류는 이제 암을 거의 극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암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 많은 데이터를 축적했고, 암세포만 죽이는 표적 약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뇌과학은 현대 의학과 과학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고 있는데, 뇌는 의학은 물론 심리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게 밝혀졌다. 뇌의 발달은 진화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분야이며, 정신분석학, 심리학과 더불어 인류 과학의 미래 영역이다.
올리버 색스는 이런 뇌과학 분야에서 가장 알려진 저자이며, 그 자신 환자들과 직접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찰한 결과를 정리해 대중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 뇌과학이 널리 알려지면 불필요한 미신이나 우상, 신, 귀신, 망령, 유령 같은 비합리적 존재의 발생 원인을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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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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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원작소설과 그래픽노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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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원작소설과 그래픽노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 한국에서 완역해 출판한 것은 2011년이다. 그 전까지 출판한 책은 전부 일본어 중역이거나 축약본이었다는 말이다. '완역본'이 출판되는 건 그 나라의 경제 수준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출판의 양과 질적 수준에 있어 한국출판계는 2000년 이후 그 전과 차원이 다른 도약을 했다고 본다.
출판하는 책의 수준이 높아진 것은 물론, 다양성, 깊이, 완성도 등 모든 면에서 출판계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더 나은 출판을 위해 노력한 출판인들의 피땀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한다.
'모비딕' 완역본은 7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다. 그것도 19세기 영어로 쓴 소설로, 미국 낭만주의 소설의 걸작 가운데 하나였지만, 100년 동안 인정받지 못한 '저주받은 걸작'이었던 소설을 완역한 것이다.
19세기 소설의 특징은 소설의 길이와 문장이 길고, 설명하려 들며, 백과전서식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찰스 디킨스부터 도스또예프스키 심지어 카프카까지도 만연체 문장을 쓰고 있다.
허먼 멜빌은 그가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는데,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소설에 반영하고 있다. 그는 포경선에서 일반선원으로 일했고, 해군에서도 복무했으며, 남태평양의 섬으로 탈출해 식인 원주민들과도 생활한 경험이 있다.
'모비 딕'에서도 관찰자이자 기록자인 이스마엘('이슈메일'이지만 구약에 나오는 이름이어서 '이스마엘'로 쓴다)이 선원이 되고자 뉴욕 넨터컷에 도착한 때부터 '피쿼드'호의 선원으로 계약하고 배가 출항할 때까지 무려 21장(142페이지)을 할애한다. 경장편 소설 한편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는 '고래'에 관한 사전적 기록과 여러 문헌에서 발췌한 고래의 기록을 보여준다. 그가 고래에 관해 공부하고, 참조한 자료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모비 딕'은 고래 '모비 딕'과 그를 쫓는 에이해브 선장의 집념을 그린 작품이다. 형식적으로는 바다, 고래, 선장, 선원, 뱃사람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 작품의 알레고리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번역자 김석희도 썼지만, 이 작품은 기독교 구약성경의 인물들을 차용하고 있다. 허먼의 집안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 집안이라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허먼이 사용한 등장 인물의 이름은 물론, 배 이름 '피쿼드'호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하녀 하갈에게 태어난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하녀 하갈과 통정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이스마엘'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게 되자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나 사막으로 간다. 사막에서 천사를 만난 모자는 이후 번성한다는 약속을 받고, 이스마엘은 현 아랍인의 조상이 되며, 이슬람의 쿠란에서도 초기 선지자로 기록하고 있다.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 역시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인데, 소설 속에서 '에이해브'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그의 부모가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었다고 한다. '에이해브'는 구약성경의 '열왕기'에 나오는 '아합'의 영어 이름인데,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왕이면서, 유대민족이 섬기는 신이 아닌, '바알'신을 섬기고 있었다. 결국 '아합'은 전쟁터에서 부상 당해 죽는다.
'피쿼드'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이름이다. 유럽에서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한 이후 불과 14년이 지난 1637년, 백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 최초의 전쟁이 발생했고, 백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서쪽으로 진출했는데, 그때 가장 먼저 절멸당한 부족이 '피쿼드' 부족이었다. 수천 명의 피쿼드 부족을 단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고 학살한 것은 백인들과 다른 인디언 부족이다. 허먼은 이런 백인의 범죄를 어떻게든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고, 자신의 작품 속에 '피쿼드'라는 이름을 새겼다.
원작 소설에서 허먼은 등장하는 주요 인물에 대해 자세한 묘사와 설명을 한다. 1인칭 화자인 '이스마엘'의 시각으로 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까이 지낸 '키퀘그'는 남태평양의 섬에서 온 '식인종'으로 그려지지만, 뛰어난 작살잡이인 키퀘그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같은 점이 많다. 1등 항해사 '스타벅'은 성실하고 이성적인 인물로, 다혈질이자 복수에 불타는 에이해브 선장이 전적으로 믿는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의 커피 회사 '스타벅스'는 바로 1등 항해사 '스타벅'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허먼은 소설에서 '고래학'이라는 소제목으로 고래에 관한 백과사전식 정리를 하고 있는데, 곳곳에 당시의 통계와 구체적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소설은 많은 부분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데, 미국의 포경업, 포경선의 구체적인 항해와 고래잡이, 향유고래를 잡아서 해체하고, 기름을 끓이고, 그렇게 모은 향유고래 기름을 팔아서 돈을 버는 구조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때, 포경선의 선주, 선장, 선원이 나누게 되는 수입의 비율부터, 포경선이 한번 출항할 때 드는 비용과 벌어들이는 수입의 총액으로 정상적인 포경선이 수십 명의 선원과 함께 고래잡이를 하고 돌아오면 적어도 몇백만 달러를 벌게 된다는 포경업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이 소설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19세기 낭만주의 소설의 특징인 만연체와 길고 장황한 설명 때문이지만, 서사가 단조로운 것이 더 큰 이유다. 700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이지만, 이스마엘이 키퀘그를 만나서 포경선에 올라 항해를 하고, 고래를 잡으러 가는 과정과 모비 딕을 만나 마지막 결투를 벌이는 것이 전부다. 그 과정에서 선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즉, 인물들이 거의 대부분 평면적이고 발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로써의 한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토프 샤부테의 그래픽노블 '모비 딕'은 원작 소설과는 다른 작품이다. 원작의 서사를 가져오되, 19세기의 풍경을 상상이 아닌, 실재 이미지로 재현한다. '모비 딕'을 읽는 독자는 원작에서 오로지 모든 풍경과 인물을 상상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그래픽노블 '모비 딕'에서는 작가 샤부테가 재현한 이미지 속에서 인물과 서사를 따라가기만 하는 편안함이 있다.
원작 소설과 그래픽노블은 서로 완전히 다르면서,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원작 소설에서 길고 장황한 묘사와 서술은 그래픽노블에서 몇 컷의 이미지로 설명한다. 소설에서 중요한 장면들이 그래픽노블에서 선택되며, 주요 인물의 운명을 쫓아간다. 그래픽노블 '모비 딕'만 읽어도 큰 줄기에서 서사는 이해할 수 있지만,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의 풍요로움은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두 작품은 서로 보완의 관계이며, 두 작품을 다 읽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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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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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길의 시집 두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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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길의 시집 두 권
주문진, 파도 시편
지금은 아니지만, 30년 전쯤, 한때 '시인'이라는 '것들'을 경멸한 적이 있었다. 내가 소설을 써서 그런 것은 아니고, 내 주변에 서성거리던 자칭 '시인'이라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덜 떨어지고, 현실 감각도 없었으며, 비루하고, 남의 눈치나 보며 살던 수준 낮은 인물들이었던 까닭이다.
그들이 끄적이던 '시'라는 것도 건강하지 못했으며, 밤낮 서로 몰려다니며 으슥한 술집에서 마담 몸이나 더듬는 파렴치한 종자라고 - 그들의 말을 들어 - 여겼기 때문이다. 더 역겨웠던 건, 그들이 '시'를 쓴답시고 예술가, 작가를 자처하며 자기들끼리 '아무개시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이름 없는 잡지에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시로 '등단'했다고 명함에 '시인'이라고 명토박아 다니는 꼴불견이었다.
그때 이미 문단에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무려 5만 명이 넘었는데, 동네 개가 물고가도 모를 만큼 길거리에 널린 것이 소위 '시인'들이었다. 이들 자칭 '시인'들의 특징이 있는데, 남자들은 도리우찌를 쓰고, 스카프를 목에 감았으며, 여자는 짙은 화장에 선글래스를 쓰고 다녔다. 전형적인 룸펜프롤레타리아와 유한마담이었으며, 그런 인식이 나에게 너무 강하게 들어박혀, 지금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이런 고정관념이 생기기 전까지, 나는 한동안 노동시를 썼으며, 노동운동과 노동문학 쪽에서 피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에, 뜬구름 잡는 언어유희나 해대는 룸펜프롤레타리아와 유한마담의 '시'라는 것이 몹시 역겨웠고, 거슬렸다.
물론, 그때도 이미 존경하는 시인들은 여럿 있었고, 그들의 시집은 지금도 내 의자에서 가장 가까운 책장에 꽂아놓고 틈틈이 읽는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시인'의 언어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시는 소설과 달라서, 문학을 모르는 사람은 '시'를 우습게 생각하기도 한다. 시는 짧은 글이고, 누구나 적당히 끄적이면 시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는 문학의 정수다. 소설처럼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독자의 심장을 찌른다. 시인이 쓰는 언어는 날카롭게 벼린 무기이며, 언어의 칼로 독자의 마음을 베는 것이다. 정지용, 이육사, 신동엽, 김수영, 김남주, 신경림 같은 시인이 위대한 것은, '언어'를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깃발처럼 휘날리며 죽어야 하는 운명이다. 시인이 시 쓰기를 포기하는 순간, 그의 운명 역시 소멸한다. 박노해, 김지하가 시를 쓰지 않으면서, 살아 있어도 이미 죽어버린 존재가 된 것처럼.
이윤길은 '시를 쓰는 뱃사람'이 아니라, '뱃사람으로 살면서 시를 쓰는' 사람이다. 즉, 머리(관념)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몸(현실)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의 시는 모두 노동시이자 생활시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현실 같은 원양어선의 현실, 남극바다와 유빙, 지구의 종말이 온 듯한 폭풍우와 파도를 직접 겪으며, 땀방울과 눈물로 얼룩진 손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새긴 것이 '파도 시편'이다.
60편의 시에는 한결같이 '파도'처럼 철썩이는 삶이 담겨 있다. 파도는 '어머니 눈물들(파도 9)'이며, '나의 참혹한 무덤(파도 12)'이다. 이윤길에게 삶은 '파도 넘어가는 뱃머리가 무저갱(파도 35)'이며, '시퍼런 악귀(파도 42)'다. 그는 배를 타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녔다. 바다는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은 '지구'가 아니라 '수구'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바다의 별에서 그는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다, 바닥이 단단한 땅을 딛으면 오히려 몸이 기울어지는 배사람이다.
그에게 땅(육지)은 다시 바다로 돌아가기 위한 임시 기착지이며, 중간 기항지이자, 불안정한 삶의 근거지다. 그 역시 거의 모든 사람처럼, 땅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의 고향은 바다다. 그가 태어난 주문진은 땅이라기 보다는 바다이며, 바다에 기대어 살고, 바다에서 주는 것을 받아먹으며 산다.
그의 기억은 땅보다는 바다에 더 가깝고, 그의 발길은 항구와 방파제와 일렁이는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배들로 향한다. 주문진 어항, 골목, 낮은 담장, 낡은 건물들 모두 그의 기억과 함께 하는 고향이다. 그는 가난한 고향의 배고픔과 고생을 기억하며, 세월이 흘러 달라진 주문진의 향수를 추억한다.
한번 바다로 나가면 몇 년씩 돌아오지 못하는 고향, 파도와 폭풍우와 빙하와 물고기와 처절한 싸움을 겪고 탈진해 돌아온 고향은 조금씩 달라지고, 그는 주문진이 달라지는 만큼 외로워진다.
시인은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하는 운명이다. '모비딕'에서 이스마엘이 에이해브 선장의 최후를 목격하고, 기록한 것처럼. 이윤길은 파도에 담긴 선원의 삶을 기록하고,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의 풍경을 기록한다. 그것은 누구도 모르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대개의 사람에게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겠지만, 이윤길에게는 그것이 곧 삶이고, 눈물이고, 감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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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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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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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좀머 씨 이야기]를 발표하고 5년 뒤인 1996년에 발표한 이 작품의 원제목은 [세 가지 이야기와 하나의 명상]인데, 한국에서는 [깊이에의 강요]로 출간했다.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 그리고 '...그리고 하나의 고찰'이 각 작품의 제목이다.
'깊이에의 강요'는 예술가와 평론가의 관계를 보여주지만, 본질에서는 작가의 자존감에 관한 내용이다. 전시회를 하는 젊고 재능 있는 작가에게 평론가가 칭찬의 말을 하면서 마지막에 '그렇지만 깊이가 조금 부족하다'는 말을 한다. 평론가의 말은 신문의 기고문으로도 실리고, 그 신문을 본 사람들은 젊고 재능 있는 작가를 볼 때마다 작품이 훌륭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렇지만 깊이가 조금 부족하다'는 말을 작가 뒤에서 은밀하게 주고 받았다. 작가는 그 말을 듣고 자기에게 '깊이'가 없다는 걸 느끼고, 어떻게 하면 '깊이'가 생길까를 고민하고, 공부하지만, 정작 '깊이'가 무엇인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작가는 창작을 멈추고, 자신에게 '깊이'가 없다는 것에 절망한다. 작가는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결국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젊고 아름다우며 재능 있는 작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악의적인 평론일까. 표면으로는 작가가 평론가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왜 평론가의 말에 그렇게까지 집착해야 했을까.
작가가 특별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누구나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들은 한 마디 말이 평생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는데, 작가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고 본다. 이 작가는 평론가의 말을 듣고, 마지막 문장이 불쾌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렸을 수 있겠지만, 그걸 무심하게 넘겼어야 했다. 대부분의 말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거나, 부식되어 사라지기 마련이다. 작가가 평론가의 마지막 문장을 되새기는 건,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것처럼, 하나의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창작하는 예술가에게 '깊이가 없다'는 말처럼 치명적인 말은 없지만, 단지 한 사람의 평론가가 한 말이 절대적일 수 없고, 때로 많은 사람들은 '깊이가 없는' 작품을 선호하기도 한다.
작가는 분명 창작의 영혼에 상처를 입었고, 다른 어떤 말로도 그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다. 평론가는 자기가 느낀대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 것이고, '깊이'를 극복하지 못한 건 온전히 작가의 의무이므로,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작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고, 작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다.
'승부'는 길거리에서 동네 사람들이 하는 체스판의 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동네 정자에 노인들, 아저씨들이 모여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면서 시간을 보내는 그런 장소처럼, 시골 마을 광장 한쪽에 있는 정자에서 막 체스 경기가 시작되는데, 한 노인은 마을 주민으로, 마을에서는 이길 사람이 없는 고수였고, 상대방은 젊은 사람으로,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그가 체스의 고수를 넘어 천재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두 사람을 둘러싼 마을 주민들 - 거의 다 아저씨거나 노인들이고, 체스 고수 노인이 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 이 두 사람의 체스 경기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마음으로는 낯선 청년을 응원한다. 수십 년, 마을 최강자로 군림한 노인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청년은 처음부터 예상하지 못한 수를 두며 고수 노인을 당황하게 만든다. 거침 없는 행보와 도발적인 행마, 좌충우돌하는 청년의 말들이 체스판을 날뛰고, 고수 노인은 청년의 공격을 막는 한편, 허점을 찾느라 골몰한다.
청년의 공격은 무모했으나, 그를 지켜보는 마을 주민들도, 고수 노인도 청년에게 무언가 감추고 있는 최후의 필살기가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체스판 위에 청년의 말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킹, 퀸, 비솦만이 남은 상태에서, 청년은 킹을 쓰러드리고 자리를 떠난다. 실망한 마을 주민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고수 노인만 남아 체스판을 챙기며, 청년과 두었던 체스를 머리에서 복기한다.
노인은 청년의 당당한 태도에 주눅들고 겁먹었다. 청년은 체스 천재가 아니고, 초심자에 불과한 실력이었는데, 노인은 단지 상대의 태도만 보고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노인은 지나치게 신중했고, 상대의 의중을 읽지 못했다. 체스는 이겼으되, 그는 청년에게 졌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는 체스를 두지 않겠노라고 결심한다.
이 작품은 '깊이에의 강요'와 비슷한 맥락이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상대방 또는 주위의 시선에 경도되거나 매몰되어 자신을 지키지 못한 노인의 이야기다.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깊이에의 강요] 주인공이 재능 있는 작가라는 것과 같지만, 노인은 시골 마을의 고수일 뿐, 자신의 실력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기에, 외부에서 온 청년의 실력을 모르면서 고수일 거라고 믿는다. 외부로부터 인정을 받아야한다는 강박이 노인을 겁에 질리게 만든 것이다.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중세를 배경으로, '픽션 히스토리'를 만든 작품이다. 작가의 특기이자 전공이기도 한 중세역사는 이미 그의 전작 [향수]에서 탁월하게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말하자면 '중세식 농담' 같은 작품이다. 장인 뮈사르는 금은 세공으로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사람으로, 나이 들어 시골에 장원을 꾸미고, 여유로운 노후를 즐기려는 성공한 인물이다.
그가 정원을 손질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조개로 인해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다른 지역에서도 돌조개가 발견되는지 확인하다, 나중에는 지구 표면 전체가 돌조개로 뒤덮여 있으며, 인류는 머지않아 돌조개로 뒤덮여 멸망할 거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뮈사르가 발견한 돌조개는 명백히 메타포(은유)다. 세상이 돌조개로 뒤덮인 것은 메말라가는 세상의 풍속과 인심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점점 경직되고, 보수적으로 변하고, 각박해지는 것을 두고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돌조개가 생기면서 즉 돌조개병이 들면서 몸과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돈도 많고, 명예까지 얻은 뮈사르가 이런 병에 걸렸을까.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고, 가난한 금세공사에서 수많은 하인을 부리는 영주가 된 사람이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누리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뜨게 된 걸까.
뮈사르는 '실존적 존재'에 관해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는 개인과 자아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이론적, 논리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못한 시기였고, 개인의 존재론적 고민, 존재의 철학적 고민에 관해 깊이 있는 공부나 토론을 할 수 있는 바탕이 거의 없었다.
뮈사르는 가난하게 자라서 많은 고생을 하고, 금공예사가 되어 귀족들, 왕족들을 위해 일하며 큰돈을 벌었고, 신분 상승을 위해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그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면서는 귀족들과 연회를 주최하면서 다양한 지식과 토론을 위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악착같이 노력한 덕분에 그는 귀족들도 인정하는 부와 명예를 갖게 된 것이다.
뮈사르는 자신의 삶에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졌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성공한 그의 삶에서도 만족하지 못한 것이 '실존적 고민'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존재하며, 자기가 성공한 이유가 단지 자신의 노력만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는 '인간들'의 계급적 분리, 빈부의 격차,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사는 농도들과 삶을 낭비하는 귀족, 왕족들을 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의문에 접근한다. 하지만 그때까지 누구도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은 없었고,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었다.
뮈사르에게 돈과 명예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의문과 질문에 답을 얻으려 세상 곳곳을 다녔고, 노력했으나 결국 아무 성과도 없었다. 그는 절망했고, 살아간다는 것이 더 이상 의미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고찰'은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인데, 글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게 공감할 내용이다. 범위를 좁혀서, 글 쓰는 사람들은 적어도 어려서부터 지금 - 50대 - 까지 많은 책을 읽었다. 그런데 어떤 책을 읽었다는 기억만 있을 뿐, 그 책의 내용은 대부분 잊어버린다.
책을 읽을 때는 기억해야 하거나, 참조해야 할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 그 옆 여백에 메모도 한다. 그렇게 책을 읽어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는다. 세월이 많이 흘러 우연히 책장을 보다 어떤 책 - 잊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했지만, 예전에 퍽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한 책 - 을 꺼내 읽다가 누군가 밑줄을 그은 구절을 발견한다. 그 옆의 메모도 본다. 그리고 그게 바로 자신이 오래 전에 했던 밑줄과 메모라는 걸 떠올린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은 스러지고, 우리가 읽고, 배운 것은 형해화한다. 그러므로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작가는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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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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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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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이 작품은 전작 [비둘기]를 발표하고 다시 3년이 지나서 발표한 작품이다. 제목과 달리 주인공은 소년이다. 소년의 눈으로 본 '좀머'라는 중년 남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나'는 열 살 무렵부터 열여섯 살까지 자신의 성장 이야기와 좀머 씨의 삶을 단편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쟁이 끝난 직후, 1945년 이후의 독일 작은 도시의 마을에서 보이는 평범한 풍경도 좋고,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는 소년의 이야기도 담담하면서 따뜻하다. 독일은 패전국이었으나 빠르게 경제를 회복하고 있었다.
소년은 나무타기를 좋아하고, 호수 가장자리 숲에서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 나이 또래에는 동무들끼리 어울려다니며 말썽도 부리고, 또래 집단에서 사회성을 키워야 하지만, 소년의 생활은 오히려 단조롭고 외로워 보인다. 그것이 소년 자신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또래 집단에 낄 수 없는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소년의 처지와 좀머 씨의 행동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둘이 모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 누군가의 방해를 받기 싫어한다는 것, 혼자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소년에게는 다섯 살 많은 형도 있고, 누나도 있었다. 그럼에도 소년은 늘 혼자 다닌다.
소년의 가족이 딱 한 번, 빗속을 걸어가는 좀머 씨를 태워주려 했으나, 좀머 씨는 '그러니 그냥 날 좀 내버려 두시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 일을 두고 소년의 가족은 좀머 씨가 '밀폐공포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몸에 경련이 일어나 걸을 때만 경련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항상 걷는 거라고 말한다.
좀머 씨가 마을에 들어온 것은 전쟁이 끝난 직후니까 1945년 하반기나 1946년 무렵이겠다. 좀머 씨는 아내와 함께 작은 방을 빌려 살았고, 살림은 아내가 책임지고 했다. 좀머 씨는 날마다 도시와 호숫가를 걸어다녔는데,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좀머 씨는 아마 독일군으로 복무했고, 패전하면서 소련군이나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풀려났을 수 있다. 아니면,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그가 극심한 PTSD(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를 겪는 사람일 수 있다. 군인이 아니었다면, 그가 전쟁 기간 가족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어떻든 그는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고, 오로지 혼자 떠돌아 다닌다.
사람들은 좀머 씨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지만, 모두 뜬소문일 뿐, 누구도 좀머 씨에 관해 아는 사람은 없다. 소년은 성장하고, 애틋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안타깝게 놓치고, 엄마의 자전거로 자전거를 배우고, 괴팍한 할머니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조금씩 성장한다.
그 사이, 소년은 몇 번 좀머 씨를 가까이 볼 기회가 있었다. 거리에서, 숲속에서, 호수에서. 하지만 단 한 번도 좀머 씨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좀머 씨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아예 말을 붙이지도 못하게 늘 바쁘게 걸어다녔다.
소년은 짝사랑하는 카롤리나에게 차이고 나무 위에 올라가 떨어져 죽으려 작정하는데, 마침 좀머 씨가 숲속으로 들어오는 걸 발견한다. 그렇게 소년은 좀머 씨의 출현으로 죽으려는 마음을 고쳐먹었고, 이후에도 거리에서, 호숫가에서 늘 바쁘게 걸어다니는 좀머 씨를 발견한다.
좀머 씨는 마을 주민들에게 일상이자 풍경이며, 습관이다. 어디에서나 좀머 씨는 발견되지만, 누구도 좀머 씨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없다. 좀머 씨는 존재하지만 또한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다. 좀머 씨에게 생활은 있었을까. 아내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집안 일을 하고, 장작을 쪼개거나 석탄을 나르고, 삐걱거리는 가구를 수리하고, 라디오를 들으며 흥얼거리는 따위의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은 좀머 씨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좀머 씨는 살아 있지만 동시에 죽은 존재다.
소년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마을에는 텔레비전을 들여 놓은 집이 많아지고, 부자들 몇몇은 이미 자가용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소년은 형의 자전거를 물려 받아 선수처럼 잘 타게 되었고, 소년의 삶도, 소년 가족 모두의 삶도 평범하지만 평온하고 행복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좀머 씨를 풍경처럼 인식하던 어느 날,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 소년은 밤길을 자전거로 달리다 체인이 벗겨져 수리를 하고, 손 닦을 낙엽을 주으러 숲으로 들어가다 호숫가에 서 있는 좀머 씨를 발견한다.
좀머 씨는 망설임 없이 호수 가운데로 걸어들어가고, 소년은 그 장면을 끝까지 지켜본다. 그리고 좀머 씨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돌고, 경찰이 수배 전단지를 돌리고, 수소문을 하지만, 누구도 좀머 씨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소년만 제외하고.
소년은 좀머 씨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소년 자신도 왜 그래야 했는지 분명하게는 몰랐지만, 좀머 씨의 마지막 모습을 말하는 것은, 좀머 씨를 모욕하는 거라고 느꼈다. 좀머 씨는 자신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소년은 머리보다 마음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면서 소년도 성장한다. 몸 뿐아니라 마음도. 이 작품은 소년의 성장 소설이면서, 독일 현대사의 비극을 몸으로 안고 살아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좀머 씨의 삶에는 비극적인 독일현대사가 있으며, 좀머 씨는 비극적 운명 속에 스러져간 이름 없는 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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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