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한국 팝의 고고학 - 1960




10대의 어느 한 때, 오래된 트로트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난영, 고복수, 남인수, 현인, 김종구 같은 가수들의 노래를 하염없이 들으며 마음이 좀 슬펐던 기억이 있다. 그땐 몰랐지만 아마도 '자기 연민'이 아니었을까. 


소년 노동자로 살면서 나는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무지렁이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공장노동자, 건설노동자로 10대, 1970년대를 보냈고, 그때 라디오에서는 나훈아, 남진, 김추자, 최헌, 송창식, 어니언스, 패티김, 이은하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비록 몇 달이었지만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음악에 몰두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국민학교 다닐 때 동무들과 유행가를 부르며 마을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추억이 있다.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대중음악은 우리에게 유행가였고, 어린 우리는 동요보다 유행가를 더 많이 불렀다.




이 책은 '한국 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통해 들어온 음악과 당시 한국에서 불렸던 음악(민요)이 결합해 '트로트'라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이 분야는 지금도 '트롯'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생산하고, 소비한다. '트롯'과 함께 두 줄기 가운데 하나로 '팝'이 있는데,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 '한국 팝'은 전후, 여기서 '전후'는 1945년이 아니라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를 뜻한다. 미군이 한국에 상주하면서 미국의 대중음악이 이식되는 과정에서 '한국 팝'이 하나의 장르로 탄생한다.


미8군으로 상징하는 미군의 존재는 전쟁을 겪은 한국 민중에게 '나라를 구한 은인'이자, 굶주린 대중에게 곡식(밀가루, 설탕)을 가져다 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미지가 겹쳐 절대의 권위와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해방 직후 약 3년의 '미군정' 시기를 사람들은 잘 모른다. 미군은 한국 정치가를 배제하고, 그들이 직접 한국을 지배했던 시기가 있었다. 해방 직후 민족주의자인 여운형 등을 배제하고 이승만과 친일파 계열이 득세할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도 바로 미군이 정치적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해방 직후 '점령군'으로 한국에 '진주'했으며, 한국을 3년 동안 '미군정' 체제로 다스렸고,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해 '작은 3차대전'을 한반도에서 치른다.


이승만은 미군(맥아더 장군)에게 '전시작전지휘권'을 이양하는데, 이것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 역량이 형편 없다는 걸 인정하고, 외국군인 미군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긴 것이다.


'전시작전지휘권'은 한국이 세계 6위의 전투 능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음에도 아직 되찾지 못하고 있다. 주권 국가에서 '전시작전지휘권'을 외국에 넘겨준 경우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만큼 한국에서 미군의 존재 의미는 여전히 특별하다.




전후 가난이 극심하던 때, 대중음악을 하는 예술가들이 그나마 무대에 설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미8군으로 대표하는 미군부대의 무대였다. 미군은 세계 곳곳에 있는 미군을 위해 본토에서 순회공연팀을 만들어 공연을 하러 다녔는데, 냇 킹 콜, 조니 마티스, 진 러셀, 마릴린 먼로 같은 미국의 유명한 연예인이 한국의 미군부대에서 공연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미국 본토에서 직접 연예인들이 한국을 방문해 공연하는 건 물리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미군은 한국의 대중음악인을 훈련시켜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 미군은 까다로운 심사(오디션)을 통과한 한국 대중음악인에게 기회를 주었고, 이들은 피나는 노력과 훈련을 통해 미군들이 환호할 정도의 기량을 갖추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가수, 연주자, 작곡가들 대부분 미군 무대에서 활약한 사람들인 건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미군의 엄격한 오디션을 통과해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고, 미군부대의 무대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가수, 연주자, 작곡가들은 자신의 창작 능력보다는 미군이 요구하는 미국의 음악, 미군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노래하고 연주해야 했다. 즉, 한국 팝은 정확히 미군의 요구로 한국에 이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군부대의 무대는 특별했으며, 한국의 방송(라디오, 텔레비전) 무대는 '일반 무대'였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있었으나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여서, 가수, 연주자들은 전국에 있는 극장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극장은 대중이 가장 쉽고,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였고, 영화는 기본이 두 편으로 '동시상영'이었다.


가수와 연주자들은 영화 한 편이 끝나는 막간에 공연했으며, 이런 방식의 공연이 나중에 가수의 독자 공연으로 발전해 '리사이틀'이 되었다. '하춘화 리사이틀', '남진 리사이틀', '나훈아 리사이틀' 같은 제목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극장에서 공연했던 걸 어릴 때 극장의 간판으로 본 기억이 있다.




1960년대 한국에서 그룹, 중창단이 활발하게 탄생한 것도 미군 또는 미국의 대중음악 영향을 직접 받은 결과다. 미국에서도 1950년대, 1960년대 그룹이 많이 생겼는데, 우리에게 알려진 에벌리 브라더스를 비롯해 드리프터스, 문글로스, 플래터스, 브라더스 포, 사이먼앤카펑클, 더 벤처스, 비지스, 비틀즈가 50년대, 템테이션, 포시즌스, 비치보이스, 도어스, 마마스앤파파스, 스콜피언스, 잭슨스, 핑크 플로이드, CCR, 애니멀스 같은 밴드들이 60년대 초중반에 결성한다.


한국에서는 신중현의 '에드 훠'를 시작으로 '김시스터즈', 블루 벨스, 봉봉 사중창단, 자니 브라더스, 아리랑 브라더스, 멜로톤 트리오, 키보이스 등이 줄지어 나타났다. 이런 그룹 활동은 미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70년대로 오면서 듀엣이 또 하나의 특징으로 등장한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이후 한국은 독재 정권 체제에서 수출중심의 산업으로 재편한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1961년, KBS를 시작으로 1962년 MBC, 1964년 TBS 같은 민간 상업방송이 등장하면서 텔레비전의 영향은 급격히 커졌다.


대중음악이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전국의 극장을 돌며 공연하던 가수, 연주자들이 텔레비전에 등장해 '스타'가 되는 시기였다. 방송국은 컨텐츠가 많이 필요하던 때였고, 특히 대중음악을 하는 예술가의 쓰임이 폭발하듯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8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가수, 연주자들이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면서 한국의 대중문화는 트롯과 함께 블루스, 팝, 록 같은 다양한 음악이 대중음악의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독재 정권에서 나름 다양한 음악이 등장한다.


이 시기는 대중음악의 다양함과 폭발적 확산과 함께 독재 정권이 블랙리스트, 금지곡 지정으로 대중음악과 문화를 통제하고 억압했다. 대중가수를 통제하는 방식은 마약(대마초)과 가사 검열이었다. 독재 정권은 어리석은 짓이 분명한 검열과 블랙리스트를 휘두르며 대중예술을 통제, 억압했지만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박정희가 살해당하는 걸로 끝났다.




60년대는 대중음악 빅뱅의 시기였다. 2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에서 민요와 혼종으로 시작한 '트로트'는 '뽕짝'이라는 멸칭으로도 불렸으나, 지금은 '뽕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트롯'은 한때 팝송, 한국 팝, 록에 밀려 입지가 좁았으나 지금은 전성기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반면 50년대 시작한 한국 팝은 청년 문화와 결합하면서 독재 체제에 저항하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가 나타났다. 이때 한국 팝은 일본과 미국에서 유행하거나 발표된 노래를 '번안곡'이라는 이름으로 저작권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라 '표절'을 해도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던, 바람직하지 않은 시기였다.


'번안곡'으로 표절을 정당화하면서 나온 노래들이 방송에 나오고, 음반으로 제작되어 대중이 소비하는데, 60년대 말이 되면 한국 팝에서 창작 음악이 나타난다. 신중현은 일찌감치 한국 록의 창작으로 아무도 밟지 않은 영역을 개척하고 있었고, 미국 대중음악의 세례를 받은 한대수가 한국에서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개척했다.




한국 팝은 미군의 요구로 이식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스스로 자생,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중음악가들은 외국 음악을 받아들여 한국사람의 정서를 불어 넣어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번안곡'이라는 표절도 있었으나 이건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고, 창작 과정과 예술의 발달에 있어 필연의 과정이기도 하다.


60년대는 현대 한국 대중음악이 탄생하고 혼돈의 시기를 보낸 시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음악, 우리 고유의 민요, 미국에서 이식된 다양한 장르(팝, 록, 블루스, 로큰롤, 재즈 등)의 음악이 뒤섞였고, 독재 권력의 검열과 청년의 저항문화가 대립하면서 대중음악은 독특하게 발전한다.




이 책은 대중음악을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훌륭한 길잡이 노릇을 한다. 그것도 '한국 팝'이라는 장르의 역사와 인물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고, 예술가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결과를 만드는가를 볼 수 있다. 


열악한 환경과 상황에서도 한국의 대중예술가들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창작과 예술을 위해 노력했고, 60년대의 활동을 밑거름으로 이후 대중예술은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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