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한국 팝의 고고학 - 1970




1970년을 기억하는 건 쉽지 않다. 기억은 파편으로 남았고, 나는 그때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는 열 살이었고, 마포의 기찻길 아래, 루핑을 얹은 판잣집에서 살았다. 국민학교 2학년 무렵이었고,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읽다가 한글을 깨쳤다.


집앞으로 문안(사대문 안쪽)에서 흘러나온 개천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흑백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가진 집이 하나였다. 우리집에는 배터리를 고무줄로 묶은 금성 라디오가 유일한 가전제품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연속극이 나오고, '전설따라 삼천리'가 나왔다.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무서운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동네 꼬마들은 따로 배우지 않았어도 '유행가'를 알고 있었다. 우리들은 동요를 부르지 않았고, 남진의 '님과 함께'를 신나게 불렀다. 맹인 가수 이용복의 노래들, 신중현의 '미인',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봄비', '거짓말이야'를 뜻도 모르고 불렀다.


1971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나는 꼬마였고, 정치를 몰랐지만 아버지에게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대요.'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쉿, 그런 말 하는 거 아냐'라고 하셨고, 1979년, 박정희는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나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 일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라고 썼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쉽게 알 수 없는 한국음악의 팝 계열 음악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했다. '가왕' 조용필이 1971년 처음으로 '가수왕' 상을 받은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70년대 최고의 대중잡지였던 '썬데이서울'이 주최한 '썬데이서울컵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조용필은 최이철, 김대환과 함께 '김트리오'를 결성해 출전했고, '가수왕' 상을 받는다.


70년대는 듀엣, 트리오 같은 그룹이 많이 나타났고, 그들의 노래가 유행했다. 키보이스, 키브러더스, 히식스, 영사운드, 템페스트, 사월과 오월, 어니언스 같은 그룹의 노래는 라디오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마을에 유일하게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서는 오후5시에 시작하는 방송 시간에 맞춰 입장료 10원을 받고 꼬마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엄마를 졸라 10원을 받아 텔레비전을 보러 달려갔다. 일본 만화영화를 그대로 가져온 '뱀, 베라, 베로', '타이거 마스크', '밀림의 왕자 레오'를 봤고, 동네 누나들은 남진과 나훈아의 팬으로 갈려 서로 '우리 오빠'가 최고라고 부르짖었다. 남진 오빠에게 시집가겠다는 누나가 수십 명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청년들이 부르는 노래를 금지했고, 긴 머리를 길거리에서 함부로 가위로 잘랐으며,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치마 길이를 재고, 경찰서로 끌고가 창피를 주었다. 청년들이 팝송을 부르고, 통기타를 치고, 한데 모여 음악 듣는 걸 두려워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천리마운동'을 시작하자 남쪽에서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으로 따라했다. 시골의 초가집을 벗겨내고 슬레이트 지붕을 덮었고, 마을 길을 넓히고, 북한의 '5호담당제'처럼, 마을 주민을 감시하도록 했다. 언론은 숨죽였고, 텔레비전에는 오락과 코미디만 넘쳤다.




1974년 여름, 한여름 폭우가 개울을 넘고, 집으로 물이 넘실대면서 우리 가족은 한밤중에 보따리를 싸서 철둑으로 도망했다. 날이 밝고, 철둑길에서 바라본 동네는 온통 물바다였다. 지붕만 남은 우리집은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고, 머지 않아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름으로 속절 없이 헐렸다.


우리 가족은 서울의 변두리 산동네, 큰누나가 살고 있는 산비탈 단칸방에서 월세를 살았다. 나는 소년노동자가 되었고, 더 이상 유행가를 따라부르지 않았다. 공장 몇 곳과 식당을 전전하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가다꾼'이 되어 지방 공사장을 떠돌았다. 그때 이정선의 '섬소년'을 들었고,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외웠다.


하루 노동을 마치고 하숙집에 돌아와 카세트 라디오에서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 사월과오월의 '등불', 어니언스의 '편지', '저별과 달을', 영사운드의 '등불'을 들었다. 




대중은 알 수 없는, 가요계 인맥과 가수들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은 특히 팝을 중심으로 청년 가수들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어 70년대 청년문화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기 한국의 팝은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을 직접 받고 있었고, 가수들도 미군부대에서 노래하길 바랐다. 미군부대에서 이름을 얻은 가수와 밴드, 그룹이 방송과 연예계로 진출하는 수순이 자연스러웠다.


라디오 방송에서 팝송이나 대중가요를 내보내고, 진행자가 DJ(디스크자키)로 인기 연예인이 되고, 방송국으로 엽서와 편지가 무더기로 보내지던 시절이었다. 70년대 중반, 영화계에서는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라는 특이한 장르가 등장했다. 독재정권이 체제에 부정적인 문화를 거세하고, 대중을 어리석은 상태로 만드는 '우민화 정책'을 쓰면서 '벗기는 영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75년이 되면서 신중현 '미인', 김정호 '하얀 나비', 김세환 '사랑하는 마음', 둘다섯 '긴머리 소녀', 윤항기 '이거야 정말', 송창식 '왜 불러', 윤형주 '어제 내린 비', 검은 나비 '당신은 몰라' 같은 노래들이 히트곡이었다. 


나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이런 노래들은 들었지만, 흥겹게 따라 부르고 싶은 상태가 아니었다. 가난과 노동으로 삶은 피곤하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한달에 하루나 이틀을 겨우 쉴 수 있었고, 거의 매일 잔업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 조치'를 발표하고, 많은 연예인들이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거나 화면에서, 방송에서 사라졌다. 내 삶 뿐아니라 사회 전체가 암울하고 답답하던 시기였다. '금지곡'이 늘어나고, 가수, 연예인들의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 가요와 영화는 정부기관의 심의를 받아야 했고, 창작의 자율과 상상력은 억압당했다.




1976년 2월, 나는 매형을 따라 건설노동자가 되었다. '노가다'라고 업신여기는 직업이었지만, 공장보다 임금이 많았고, 공장처럼 한 자리에서 기계 부속품처럼 반복작업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일은 힘들었지만 자율성이 있어서 할만 했다.


송대관의 '해뜰 날'이 방송과 거리에 울려 퍼졌다. 내 인생에서도 '쨍 하고 해뜰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싶었다. 최헌의 '오동잎'이 거리를 휩쓸 때, 나는 경남 울주의 새로운 공단을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저 아래, 부산에서 파도를 일으키며 서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1977년, 1978년에도 나는 지방을 전전하며 '노가다'를 뛰었다. 경남 울주, 마산, 창원, 전남 광주, 충청 신탄진, 강원 속초의 건설 현장에서 때로는 하숙집에서 편하게 잠자고, 맛있는 밥을 먹으며 일하다, 때로는 현장의 허름한 숙소에서 잠자고 현장 식당에서 맛없는 밥을 먹으며 일했다.


세상은 내게 따뜻하지도, 호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가수들은 명멸했고, 그룹사운드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카세트 녹음기가 첨단 기기로 나타났고, '공테이프'를 사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녹음했다. 그때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다.


이 무렵 처음 '대학가요제'가 열렸고, 대학생 그룹과 개인의 신선한 노래가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그동안 기성 가수들의 노래에 싫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대학생의 음악에 환호를 보냈다. 샌드페블스 '나 어떡해' 블랙테트라 '구름과 나' 활주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같은 음악들은 청년의 감성을 흔들었다.


그리고 '산울림'이 등장했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놀라운 그룹이 등장했다고 사람들은 흥분했다. '산울림'의 신선한 충격은 오래 이어졌다. 




1979년, 나는 지방에서 올라와 독서회 활동을 시작했고,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고 있었으며 삼중당 문고를 열심히 읽었다. 이때 혜은이, 이은하, 윤시내 같은 여성 가수들이 도드라졌다. 그룹사운드의 음악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끊이지 않고 나왔다. 활주로, 블랙테트라, 샌드페블스, 휘버스, 작은 거인, 장남들, 벗님들, 블루드래곤 같은 그룹사운드의 음악은 한국 팝 음악의 70년대 열매이자, 80년대를 여는 서곡이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 독재가 막을 내렸다. 박정희는 부하가 쏜 총에 맞아 죽었고,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 책은 그 시대를 기억하는 가수, 연주자들, 음악 제작자, 프로듀서, 작곡가 등의 인터뷰가 많이 실려 있어서 음악의 흐름과 가수를 비롯한 음악 관련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풍성하고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음악이 탄생하는 과정이 얼마나 다양하고 긴밀한 인간 관계를 통해 일어나는가를 잘 알 수 있고, 가수, 작곡가, 연주자들이 선의를 가진 협업을 통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신기하고 흐믓하다. 모든 것이 아날로그이던 시대, 아날로그의 투박하지만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포크와 팝 음악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녹슬지 않고 싱싱하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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