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세월의 설거지




안정효 작가와는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세월의 어느 지점에서 인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안정효 작가 고향은 서울 마포구 공덕동 434번지인데, 내 고향은 공덕동 432번지였다. 번지수만 보면 이웃이다. 다만 안정효 작가는 나보다 꼭 스무살 연상으로, 거의 한 세대에 가까운 어른이다.


그의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마포가 배경이며, 고등학교 시절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안정효는 이미 중학 1년 때부터 영화광이었으며, 그의 삶에서 영화는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도 '유명한 번역가'에서 출발해 '실천문학'에 연재된 '전쟁과 도시'를 읽으면서였다. 


안정효는 이미 대학생 때부터 영어를 잘 하기로 유명한 학생이었고, 졸업하기 전에 이미 영자 신문사에 취업했다. 그는 번역을 업으로 삼기 전인 학생 때 영어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그 소설을 미국에서 출판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여러 번 미국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며 작품 출판을 시도했으나 결코 쉽지 않았다.




이 책 '세월의 설거지'는 안정효의 자서전이다. 다만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자신을 대상화한 것은 상황을 보다 객관으로 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짐작했다. 1인칭 '나'로 이야기를 풀어가다보면 직접 말하기 괴로운 장면이 많고, 뒤로 갈수록 자기 자랑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완화하는 방식이 3인칭 서술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안정효는 1941년에 태어났으니 해방과 전쟁을 어릴 때 겪었다. 어릴 때 겪은 전쟁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그의 가족이 마포에서 안양으로, 다시 할머니가 계시는 소사(부천)에서 전쟁을 겪고 집(마포)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어린이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작가의 가족은 전쟁 때 불에 탄 집을 아버지가 스스로 지었으며, 가게를 서너 개 만들어 세를 놓을 정도였다. 그 동네에서는 그나마 사는 형편이 나은 가족이었다. 전쟁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1950대 중반부터 작가의 집은 부자는 아니어도 굶지는 않는 생활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내용은, 작가의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석공으로 일하러 다녔는데, 석공이 쓰는 연장을 벼르는 대장간을 집에 설치해 놓을 정도였다. 집도 직접 지을 정도로 손재주도 좋은 작가의 아버지는 성실하고 재주 있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어느 순간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아버지가 된다.


나도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을 자주 보면서 자랐다. 두 사람은 육탄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동네가 떠들썩하게 욕설이 난무하고, 집안의 살림이 날아다녔다. 그래도 아버지는 점잖은 편이고, 어머니를 때리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비난했으며 그럴만한 이유도 충분했다. 어릴 때 부모가 싸우는 장면만 보고 자란 나도 트라우마가 생기는데, 아버지의 일방적 폭력을 겪어야 했던 작가의 어머니와 자식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함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문제는, 작가의 아버지가 아내를 구타하는 시기가 아이들이 어릴 때만이 아니라 자식들이 모두 자라서 청년이 되었을 때도 여전했다는 것이다. 자식이 어릴 때는 아버지의 권위와 물리적 폭력에 저항하기 어렵다고 해도, 청년이 된 상황에서 아버지의 폭력을 저지할 수 있었음에도 여전히 어머니는 폭력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부부싸움을 하던 아버지에게 대든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었고, 아버지는 무능했다. 나는 어머니 편에서 아버지를 비난했고, 아버지를 증오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작가의 아버지에 비하면 더 없이 선량한 인간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거의 대부분은 작가의 글쓰기와 관련한 내용이다. 작가는 중고등학생 때는 만화를 그렸고, 대학생이 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다재다능하고 머리 좋은 인물이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지망할 계획도 있었지만 친구의 권유로 서강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해서는 곧바로 영어를 다른 친구보다 월등히 잘 하는 학생이 되었다. 영어를 잘 하는 것으로 작가의 삶은 큰 줄기가 결정되었다.


영어를 잘 했기 때문에 영자 신문사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브리태니커 편집부장이 되었으며, 한국 최초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마침내 자기 소설을 미국에서 영어로 출판하게 되었다.


'하얀 전쟁'과 '은마'가 미국 소호출판사에서 출판되고, 영어권에서 호평을 받은 것은 물론, '뉴욕타임스'의 서평란에 큰 지면으로 소개된 것은 한국작가 가운데 안정효 작가가 최초다. 하지만 이런 기록도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높이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때가 전두환 군부독재 시기라는 특성도 있었으나, '번역가 안정효'를 '작가 안정효'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고 본다.




작가 안정효는 50세 이후부터 창작 활동이 더 활발했다. 그의 작품은 한국문학에서 의미 있는 부분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가 너무 유명한 번역가로 알려진 것이 오히려 '소설가'로 진입하는 장벽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문학사에서 작가 가운데 영어를 뛰어나게 잘 하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그 가운데 최고가 안정효 작가가 아닐까. 과거 남조선 노동당원이자 미군정에서 근무했던 설정식도 영어를 잘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는 너무 짧은 삶을 살았고, 미국에서 영어를 배우지 않은 한국인이 직접 영어로 쓴 소설로 미국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안정효 작가가 아직까지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해방과 전쟁을 겪은 세대이며, 폐허인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과정을 직접 몸으로 겪은 인물이다.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고, 가난하던 시기에 대학을 다녔으며, 당시 한국 문학, 문화계의 첨단을 달리는 소수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삶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하게 기록된 생생한 기록이며, 그 자신이 이룬 많은 성과 역시 우리 문화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 자서전은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개인의 삶이자,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견이며, 한국문학과 영문학의 화학적 결합을 목격하는 현장이고 한국문학이 나갈 미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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