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남극해 - 이윤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익명이다. 작가는 본능적으로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던 걸까. 박 기관장, 강 사장, 장 선장, 1기관사, 조기장 '심근수'만 유일하게 이름이 나오지만, 정작 그는 조선족 조리장에게 살해당한다.

선원들의 익명은 그들의 운명을 상징한다. 그들이 탄 배의 이름이 '피닉스호'라는 것에서, 그들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43년이나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빈 작가의 경험과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귀중한 소설이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이면서도 올바른 해양정책이나 해양문학이 뿌리 내리지 못한 기형적 형태를 갖고 있는데, 특히 '해양문학'은 저변이 좁고 얕아서 하나의 장르나 범주로 구분하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부박하다.


작품은 원양어업, 그것도 대서양이나 북태평양이 아닌, 남극해로 떠나는 원양어업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피닉스호'는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을 출발한다. 갑자기 빈 자리가 된 기관장을 부산에 사는 박 기관장을 불러야 했고, 그가 부산에서 뉴질랜드로 오는 길이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웰링턴을 출발한 피닉스호는 남위 60도까지 내려오면서 남극수렴선까지 오는데만 20일이 걸린다. 이 기간동안 배에서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박 기관장의 과거 회상이 나오고, 강 사장이 '피닉스호'를 끌고 다시 바다로 나오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급격하게 바뀌는 날씨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배는 큰 문제 없이 남극해로 향하고, 피닉스호는 남태평양에서 대권항해를 하며 '케이프 혼'을 지나 사우스 셰틀랜드 제도(이곳에 킹 조지섬이 있다)를 통과하면서 웨들해로 들어선다.

소설의 중반부터 피닉스호 선원들은 조업을 시작한다. 이들이 잡는 물고기는 '남극이빨고기'로 값이 비싼 물고기다. 그만큼 잡기 어렵고,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한번 출항에 만선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강한 유혹이 있는 어업이기도 하다.

다국적 선원으로 구성된 피닉스호의 선원들과 선주를 비롯한 선장, 기관장 등이 모두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일종의 '외인부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소설에서 다수의 선원들은 배경으로 처리되고, 박 기관장, 강 사장, 장 선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점이 조금 아쉽다.

선원들이 서른 명이 넘기 때문에, 이들을 소설에서 모두 소개하거나, 이들의 서사를 나열하는 것이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적어도 대표적인 인물 몇 명의 서사를 풀어 놓으면서, 주인공 세 사람의 서사와 얽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 중반까지는 피닉스호가 출발해서 남극해로 들어서기까지 과정을 그리고 있다. 원양어선에서 일어나는 일은 독자에게 낯설기 때문에, 작가는 친절하게 상황과 내용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결코 지루하지 않다.

허먼 멜빌의 '백경'이 그렇게 두꺼운 소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선원에 관한 설명을 가능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 기록이 당대의 선원의 삶과 배에서의 생활, 배의 기능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기록으로의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된다.

이렇듯, 작가는 구체적인 사건-투승과 양승-이 발생하기 전에 선원들과 배의 운명을 가능한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피닉스호가 웨들해에 들어서면서부터 시투(첫번째 시험 투승)를 할 때부터는 팽팽한 긴장을 느낄 수 있는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바뀐다.

끊임없이 떠내려오는 유빙과 싸워야 하고, 심해 1,000미터 아래 살고 있는 남극이빨고기를 낚아 올려야 하는 부담과 압박으로 선주는 물론 선장 이하 모든 선원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날카로운 남극의 바닷물을 뒤집어 쓰면서 고통스러운 육체노동을 하는 장면은, 원양어업의 고단한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피닉스호 조업을 나선 이후, 네 번의 사고가 발생한다. 출항 초기에 선원 아만의 손가락 부상, 조기장 심근수의 부친상, 조선족 조리장의 살인 그리고 피닉스호의 운명을 가르는 기관실 화재가 그것이다.

이 사건들이 하나의 인과로 묶이지는 않지만, 주인공 박 기관장은 피닉스호에 타는 순간, 자신이 다시는 육지에 발을 디디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받는다. 아니, 좀 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육지에 발을 디디고 싶지 않다는 의지인지 모른다.

그는 배의 엔진을 수리하는 기술자로 먹고 살았지만, 자신이 선원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그가 육지에서의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것은, 육지-현실-의 삶이 자신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는데, 그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육지가 '현실'이라면, 바다는 '이상'이자 '희망'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선연'을 떠난다. 그가 이미 아내와 이혼한 것처럼, 그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육지에서 사업하며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인간의 욕망과 이기, 탐욕에 환멸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고, 돈도 벌 수 있었음에도, 강 사장이 자기를 부르자, 모든 것을 버리고 - 심지어 사랑하는 어머니마저도 홀로 두고 - 바다로 나온 것이다.


독자는 한국문학에서 낯선 해양문학인 이 작품을 읽으면서 바다, 원양어업, 뱃사람, 남극에 대해 풍부한 상식을 얻을 수 있다. 가능하다면 구글 지도를 펼쳐놓고, 이 작품에 나오는 지명을 찾아보면서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케이프 혼'을 돌아 '사우스셰틀랜드 제도'로 지나면 곧바로 웨들해가 나오는데, '웨들해'는 실제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섬'까지 빨리 가도 5일이나 걸리는 거리인데, 지도에서 보면 그 거리가 실감난다. 가장 가까운 곳에 '킹 조지 섬'이 있고, 이곳에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과학기지가 있다. 

작가는 현직 선장으로 세계의 모든 바다를 누빈 풍부한 경험으로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바다를 그리고 있어서 작품의 사실성을 핍진하게 채우고 있다. 이런 바다의 묘사들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라는 점에서, 해양문학은 '르뽀르따주'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피닉스호의 운명은 너무 갑작스럽고 우연하게 결정되는데, 그것이 매우 사실적이라 해도, '소설적 완결성'을 말할 때는 아쉬움이 있다. 실제 벌어진 사건으로 선상 반란과 선상 살해사건 등이 언론에서도 보도된 바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선원(조리장)의 살해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 살인 사건과 피닉스호의 운명은 직접 관련이 없다. 차라리 심각한 살인사건과 피닉스호의 운명을 연결지을 수 있는 새로운 사건을 도입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원들은 모두 익명으로 등장하며, 주인공들과 사건의 배경으로만 보이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선원들의 갈등과 선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피닉스호의 운명을 가름하는 것이었다면 좀 더 드라마틱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앞부분에 선원들 가운데 몇 명이라도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국 문학에서 해양문학은 퍽 귀한 존재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인간의 삶도 보편성을 띄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바다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나오는 인간의 행동은 육지에서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과는 분명 다르며, 그 다름이 특별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해양문학의 저변이 넓어지고, 작품이 깊어지면 바다와 바닷사람, 섬, 어촌, 어업을 바라보는 뭇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고,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남극해'는 바다와 바닷사람의 삶을 과장하지 않고 보여주며, 뱃사람의 고독, 외로움, 바다와 인간의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군대에서 전역하고, 사회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이 해양 전문 잡지사였다. 1985년 무렵이었는데, 그때는 해양, 어촌, 수산물 등을 다루는 잡지가 한국에 두 개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 월간 잡지를 발행하는 한 곳이었다. 편집부 직원 두 명과 서무직원 한 명이 근무하는 잡지사는 열악했고, 사장은 잡지에 실을 광고를 가져오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때의 짧은 경험으로, 한국 정부가 바다에 기울이는 정책, 제도, 지원이 형편 없다는 걸 알았고, 한국이 경제, 문화, 산업적으로 시장을 키우려면 반드시 바다와 관련한 정책에 큰 관심과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 한국의 대기업 조선소는 세계 1위의 수주율을 기록하고 있는데, 바다와 관련한 산업은 보통 사람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할 뿐 아니라, 경제적 가치도 매우 높고, 규모도 크다. 양식업, 근해조업, 원양어업 등 수산업은 물론이고, 어촌의 현대화, 어촌의 콘텐츠를 살려 소프트웨어 산업으로 육성하며, 수천 개의 섬을 역사, 문화 자원으로 삼아 지역 발전의 밑거름이 되게 만들 수 있는 방안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바다 산업은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해양수산부는 정부 부처에서도 힘이 약한 기관이고, 예산도 많지 않아서 필요한 사업을 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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