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블랙 에코 - 해리보슈 시리즈 1


마이클 코넬리의 장편 데뷔작. 이 작품에 대한 상찬은 다른 곳에서도 많으니, 읽으면서 느낀 몇 가지 아쉬운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로스엔젤레스 경찰국 소속 형사 '해리 보슈'는 불우한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엄마는 매춘부로 알려졌는데, 나중에 거리에서 강간살인 사건의 피해자로 죽는다. 이후 해리는 위탁가정에서 지내며 불우한 청소년 시기를 거쳐 베트남 파병 군인이 된다.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와 경찰이 되었고, 그는 형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언론의 관심을 받고, TV시리즈에 이름을 빌려주어 돈을 벌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경찰청 본부에서 헐리우드 경찰서로 좌천된다. 이 작품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우연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우연'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고 연결되며, 사건의 배경이 된다. 살인사건 목격자 샤키가 동굴 입구에 있었다는 건 필연이라고 하자. 그가 그 시간에 누군가 사체를 유기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과연 필연일까. 그리고 피해자 메도우스 사체가 그 동굴로 유기되는 건 필연이라고 하자. 메도우스와 해리가 베트남에서 같은 부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전우였다는 건 어떤가. 이건 너무 기막힌 우연 아닌가.

그리고 하필 왜 이때 메도우스는 살해당했으며, 사금고와 은행을 터는 사건이 발생하는 시기가 이때였으며, 왜 이런 사건이 벌어진 걸까.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던 FBI의 팀장 루크가 베트남에 있었다는 것, 해리의 베트남 동료들이 이 사건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 등은 모두 우연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범죄를 기획했다면, 메도우스가 돈이 궁해 금고를 털었을 때 나온 팔찌를 전당포에 파는 일이 없도록 기획자이자 책임자-지금은 루크라고 해두자-가 면밀히 지켜보고, 관리했을 것이다.

수백만 달러의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큰돈이 될만한 재물을 손에 넣었으면서도 정작 그들은 모두 가난하게 지냈다.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들이 돈이 없어 다시 범죄를 저지르거나, 실수를 해서 범죄 행위가 들통날 것은 예상했다면, 오히려 루크는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이들을 전부 죽이는 것이 더 안전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은 메도우스, 해리, 그리고 베트남에서 같은 소대였던 동료들, FBI 팀장 루크까지 모두 베트남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FBI 요원이자 해리의 동료인 엘리노어 위시까지도 베트남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엘리노어의 오빠도 베트남 파병 군인이었으며, 베트남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고향인 LA에 돌아와서 살해당한다.

20년 전, 베트남 파병 군인이었던 메도우스의 죽음으로 시작한 사건은 20년 전, 베트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미국의 패전과 철수, 베트남에서 미군과 월맹군이 뒷거래로 마약을 팔고, 미국으로 밀반입했던 내용이 드러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이 베트남에서의 패전으로 쫓기게 된 월맹군 일부가 수백만 달러를 다이아몬드로 바꿔서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엘리노어 위시의 오빠가 살해당한 것도 베트남에서 마약을 가지고 들어와서 몫돈을 벌려는 목적 때문에 그런 것이고, 메도우스가 죽은 것도, 이들을 모두 죽게 만든 것도 루크의 탐욕과 함께, 루크를 은밀하게 조종한 엘리노어 위시의 ‘작전’ 때문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건의 기획이 엘리노어 위시의 철저한 계획이라는 것인데, 변수는 오로지 해리 보슈이 등장 뿐이었다. 하필 해리 보슈가 헐리우드 경찰서 소속으로 좌천되었고, 하필 그날, 메도우스가 살해당한 날 당직을 섰으며, 하필 그 시간에 동굴 근처에 있던 샤키가 재빠르게 사체가 있다고 전화했을까.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좀 불편하다. 사건의 세부적 묘사, 경찰서, 로스엔젤레스의 시가지와 풍경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 주요 인물의 심리와 갈등을 면밀하게 그린 것은 높게 평가하지만,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우연’이 작동하는 것은 작품의 무게와 깊이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과 비교하면, 이 작품은 훨씬 ‘말랑말랑’하다. 즉, 하드보일드하지 않다는 뜻이다. 해리 보슈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외롭고 고독한 인물이며, 동료 경찰과도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외톨이지만, 그것이 ‘하드보일드’한 인간은 아니다. 해리가 FBI 요원 엘리노어 위시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걸 보면, 그의 내면이 메말라 있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해리는 다정한 부모, 따뜻한 가정, 사이 좋은 형제, 남매가 있는 가정에서 살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런 환경을 부러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환경으로 들어가는 걸 두려워한다. 행복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동경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내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해리는 금욕적 인간으로, 자신을 잘 통제하지만, 그 자기억제의 내면에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마약, 폭력 등에 노출될 수 있을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베트남에서 그런 경험을 했고, 베트남에서의 공포와 충격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수많은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전쟁 트라우마(PTSD)로 고향에 돌아와 마약, 알콜중독 등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다. 해리 보슈 역시 그들 가운데 한 명이며, 억세게 운 좋게 살아 남은 경우에 속한다.

해리는 동물적 감각과 탁월한 추리로 사건의 본질을 향해 가지만, 그가 동료 메도우스를 기억하고, 베트남 동료와 베트남에서 벌어진 마약 밀거래, 베트남 군인과 미군의 공모로 수백만 달러의 다이아몬드가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과정, FBI 요원 루크와 위시의 연결고리 등을 모두 밝혀내는 것은 그가 베트남 참전 군인으로, 그와 가까운 동료가 죽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필 그가 근무하는 지역에서, 근무하는 시간에.


고전적인 스릴러, 추리, 첩보 소설에서는 주인공(경찰, 사립탐정 등)이 피해자와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다. 주인공은 제3자의 입장에서, 피해자와 그 주변 사람들을 탐문, 수사하면서 범인을 찾아낸다. 범인은 당연히 피해자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으며,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는 인물이거나, 너무 가까워서 범인이라고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인물일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처음부터 우연이 개입하고, 그 우연은 작품 곳곳에서 단서를 제공하며, 결국 마지막까지 우연이 개입한 필연으로 종결된다. 읽기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마치 잘 닦아 놓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이랄까, 미로를 찾아 헤매는 불안과 호기심이 거의 들지 않았다. 심지어 소설 초반에 루크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고, 그 짐작은 들어맞았다.

이 소설은 분명 재미있지만, 아쉬움도 많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작가의 장편 데뷔작이어서 어쩌면 이런 ‘우연’이 옥에 티로 작용한 것일 수 있다. 앞으로 해리 보슈 시리즈를 계속 읽어가다보면 작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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