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훈민정음 창제의 다른 해석

 

얼마 전, 우연히 어떤 동영상을 하나 봤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말하면서 ‘훈민정음 창제'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강의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찾아보니 ‘설민석'이라는 사람이고, 한국사를 강의하는 학원 강사라고 했다.


한국사를 공부했고, 학원에서도 강의를 하고 있으니 그가 말하는 것이 틀리지는 않겠지만, 짧은 동영상을 보면서 역사의 핵심 즉 훈민정음이 창제되는 동기와 배경에 관한 내용에서 깊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설민석이 말하는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쓴 것처럼,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으니 불쌍한 백성들이 글을 읽고 쓰기에 어려움이 많아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제 설민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정리한 서울대학교 박갑수 교수의 글을 아래에 인용한다. 조금 길지만 많은 사람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관해서는 이 내용으로 배웠으리라 생각하기에,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에 관한 내용을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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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창제의 배경    


한글 창제의 두드러진 동기의 하나는 민족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민족적 자주정신(自主精神)이다. 


이는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서 벗어나 문화적으로 독립을 해야겠다는 자주정신이 발로된 것이다.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몇몇 민족은 이미 이 문화권에서 벗어나고자 민족문자를 만든 바 있다. 요(遼) 나라를 세운 거란(契丹)은 한자에 대항하여 920년 대소(大小) 거란문자를 만들었고,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女眞)은 1119년 대소 여진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원(元)나라를 세운 몽고(蒙古)는 1269년 파스파문자를 제정ㆍ반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한글 창제도 이러한 일련의 탈 한문화(脫漢文化)의 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등의 정음창제 반대상소는 이 탈 한문화에 반기를 든 것이다. 최만리 등은 세종 26년 언문(諺文)을 제작한 것이 지극히 신묘하여 만물을 창조하고, 지혜를 운전함이 지극히 뛰어나나, 좁은 소견에 의심되는 것이 있다 하며 6개조를 들어 장문의 언문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 6개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과 동문동궤(同文同軌)의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제함으로 저들이 비난하면 사대모화(事大慕華)의 도리에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중국 본토에서는 지방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는데, 몽고, 서하(西夏), 여진, 일본이 문자를 만든 것은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다. 


셋째, 언문의 사용은 학문을 돌보지 않게 하고, 사리판단을 못하게 할 것이니, 학문에 손해를 끼치고 정치에 이로운 것이 없는 언문의 제정은 옳지 않다. 


넷째, 언문을 사용하게 되면 형옥(刑獄)에 공평을 기할 수 있다 하나, 형옥의 잘잘못은 초사(招辭)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옥리(獄吏)의 태도에 달린 것이다.  


다섯째, 일은 서두르지 말고, 공론을 거쳐 해야 하는데, 급할 것이 없는 언문 제작을 행재(行在)에서까지 급급하게 하여 성궁(聖躬)을 조섭하는 때 번거롭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섯째, 동궁(東宮)이 성학(聖學)에 잠심하여 이를 더욱 궁구하여야 하는데, 언문 제작에 날이 맞도록 때를 보내니 이는 학문을 닦는 데 손실이 된다.    


이상과 같은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최만리를 무슨 대역죄(大逆罪)나 저지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은 위에 보인 바와 같이 당시 기득권층인 사대부(士大夫)의 보수적인 생각을 대변한 것뿐이다. 


그리고 여기 덧붙일 것은 한글 창제자(創製者)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는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참여하고, 세종을 보필한 것으로 일러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종대왕을 비롯한 동궁(東宮)과 진양대군(세조), 안평대군 등 왕자들이 참여하여 왕가사업(王家事業)으로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러기에 세종실록(世宗實錄)에 한글 창제에 관한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세종 25년(1443) 12월 30일조에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是謂訓民正音”이란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렇게 정음 창제가 은밀히 진행된 것은 최만리 등의 반대상소에 보이는 바와 같이 당시 수구파 문인들의 반발이 거세고, 명(明)나라와의 유대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염려한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학사들은 창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관여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정음을 반포한 정음과 같은 이름의 책 “訓民正音” 해례본 제작에 참여한 것이다. 세종실록에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29일조에 “훈민정음성(訓民正音成)”이라 보이는 것이 이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정인지 서문에는 연기(年紀)가 “正統十一年 九月上澣”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한 것은 이 정인지의 서문에 따라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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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수의 글에서 핵심은 ‘기득권층인 사대부의 보수적인 생각을 대변한 것'이다. 즉 설민석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해 그 시기의 기득권 세력은 당연히 반대를 했던 것이고, 세종대왕은 그런 기득권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쌍한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이 대전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왕조 중심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즉, 권력을 가진 자가 기록한 문서의 내용만을 가지고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매우 쉽고 편리한 방법이고, 또한 자료도 풍부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크게 의심하지 않고 따르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배자 또는 기득권 세력이 백성이 단지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 것은 합리적 이유가 될 수 없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 말이 중국(한자)과 달라서 가여운 백성들이 글자를 읽고 쓸 수 없다'는 것은 언듯보면 백성들을 위한 말일 수 있지만, 지배자의 논리, 지배자의 언어로 포장된 껍질을 벗기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표피적 분석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을 하고 있는 정해랑의 글이 ‘훈민정음’ 창제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 글을 읽어보면 설민석이나 박갑수의 글과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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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창제의 취지를 애민 사상의 구현에서 찾습니다. 어지에서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여삐(가엾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성의 불편함 때문에 한글을 만들었다고만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를 결심한 시기는 조선 왕조가 하루가 다르게 번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이 닦아 놓은 기반 위에서 순탄하게 통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정적도 없었고,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갈등도 아버지의 도움으로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종에게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왕권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는 아버지 세대에 거의 정리되었지만 민중과의 관계는 그에게 새로이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호패법이나 5가작통법을 시행하면서 민중에 대한 통제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틀일 뿐이었고, 내용을 채워야 할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민중들은 고려 시대의 민중들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습니다. 고려 중기 뒤로 숱한 농민, 천민 봉기와 봉건 귀족의 부패와 동요를 겪었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저항 의식이 꽤나 높았습니다. 또한 조선 왕조 자신도 무력을 빌려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민중을 구태의연한 강압으로만 통치하다가는 또 다른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의식, 정치의식이 성장한 민중들은 고려 시대 이후 소멸한 향찰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향찰은 한문 자체와는 아무 관계없이 국어의 형태 요소뿐 아니라 의미 요소에 이르기까지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하는 전면적인 표기 체계로서, 삼국시대 이래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문자였습니다.


그런데 향찰이 고려 시대에 문벌 귀족들에게 배척 당하다가 사라지고 말면서 민중들은 문자 생활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무신 정변 이후 귀족 사회가 붕괴하면서 사회의식. 정치의식이 성장한 민중들이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갈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한글은 이러한 민중의 요구와 세종의 필요가 맞물리면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사학자는 한글을 `민중의 전리품`이라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한 세종의 통찰력이 뛰어난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창제된 한글은 민중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나 지배층에 포섭하기 위한 교화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원래 통치하는 세력은 통치 받는 사람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모두 쓰는 법입니다. 한글은 이 양 측면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앞에서 본 `한글 고비`에서 한글로 쓰인 부분은 한글이 백성들에게 지배층의 경고를 알리는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한글이 채찍으로 쓰인 것이지요. 반면에 통치 세력이 쓰는 당근은 얼마큼 경제적 이익을 던져 주거나 지배 세력의 사상으로 포섭하는 방식입니다.


조선 왕조는 과전법과 양인 신분 찾아주기 따위로 민중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얼마간 당근으로서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상으로 포섭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고려 시대까지 지배 세력의 사상은 불교라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므로 민중을 지배 세력의 사상으로 포섭하는 것은 문자 없이도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지배 세력의 사상으로 삼았습니다. 성리학은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양식만으로 사상을 전파할 수 없었습니다. 성리학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민중이 문자를 배워 성리학의 가르침을 이해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의 민중들은 대부분 문맹이었습니다.


민중들에게 새삼스럽게 한자를 가르쳐서 성리학을 배우게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한글은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필요에도 부응하기 위해 새로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민중의 교화 수단으로 쓰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한글은 만들 때부터 그 목적대로 주로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는 선전물이라고 할 수 있는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들을 출판하고 성리학 교재를 번역하는 데 쓰였습니다. 그밖에도 농업서적이나 기술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일에도 쓰였지만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한글은 본래부터 양반과 민중 모두가 쓰는 전국민의 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민과 천민들의 글이었고, 상민과 천민들을 지배 세력이 사상적으로 가르치고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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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레바퀴는 ‘왕조'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당대의 민중들의 요구가 어떠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역사가를 비롯해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 자세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대중에게 역사를 강의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천박한 내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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