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책의 가치


다른 건 몰라도, 책을 살 때만큼 마음이 흐믓할 때가 드물다. 책을 좋아하는 것이 타고나는 것은 아닐텐데,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만큼 책을 사들이는 것도 열심이다. 집에 있는 책의 대부분은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들인데, 출판사에게는 퍽 미안한 일이지만 새책을 살만큼 여유가 없기도 하고, 헌책방 찾아다니며 헌책을 고르는 재미가 남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을 구입할 때도 그렇지만, 집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은 다음, 가끔 책 뒷표지에서 책값을 확인할 때가 있는데, 정가 가격과 헌책 가격은 차이가 많다. 새책 가격 기준으로 볼 때, 많게는 60%에서 적게는 10%에 이르기까지 헌책 가격은 다양하다. 

새책을 살 때는 돈이 아깝다기 보다 주머니가 가벼워서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같은 책을 헌책으로 사면 부담이 없어서 왠지 마음이 가볍다. 이런 마음은 전형적인 '가난한 백수'의 마음이다. 

새책 값이든 헌책 값이든, 돈을 떠나서 책-대부분의 양서를 기준으로-한 권의 가치는 그 책이 가지고 있는 책값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즉, 우리가 아주 적은 돈으로 양질의 훌륭한 내용이 담긴 책을 한 권 살 수 있는 것은 책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 때문이다.

최근에 망설임없이 구입한 새책으로는 '자본'이 있는데, 5권 세트로 16만원을 주면서도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샀다. 이 책 세트는 강신준 교수가 독일어본을 완역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최초의 완역본이다. 마르크스의 역작,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쇄되고, 판매되고, 읽힌 책인 '자본'을 겨우 16만원에 살 수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놀라운 일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마니아로, 그가 쓴 작품들은 거의 다 가지고 있지만, 아직 구입하지 못한 몇 권이 있다.(최근에 구입했다. 무척 기쁘다.)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가 그것인데, 책값이 5만원이 넘어 선뜻 구입하기가 망설여졌다. 물론, 책의 내용에 비하면 책값은 정말 저렴하다는 걸 잘 안다. 그만큼 좋은 책들은 책값에 비해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캐나다에 사는 지인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기형적으로 책값이 싼 나라에 속한다고 한다. 책값이 싸다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그 바탕에는 지식노동자의 고혈을 짜내는 기형적인 출판산업이 있기 때문임을 안다면, 무조건 좋아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 지인과 나의 동감하는 내용이었다.

나도 글을 많이 썼고, 잡지사며, 출판사와도 일을 많이 해서 잘 알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원고료는 달라지지 않았다. 해마다 물가며 임금은 조금씩이라도 올라가는데, 유독 원고료만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저자' 노릇을 한다는 건,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다.

물론, 잘 나가는 필자들도 여럿 있겠지만, 수많은 잡지사에 글을 공급하는 '자유기고가'들, 다양한 실용서와 기획도서를 만드는 개인 필자들은 원고료와 인세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값이 싸다는 것은, 책의 가치를 낮게 인식한다는 것이고, 책과 관련된 모든 분야-필자, 출판사, 인쇄소, 제본소 등-를 공정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독자는 자신이 얻는 것에 비해 터무니 없이 낮은 값을 지불하려는 태도가 이기적인 태도임을 이해해야 한다.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을 높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좋은 책에 대해서 합리적인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책 한 권 속에는 필자의 노하우가 응축되어 있고, 출판사 직원의 노고가 들어 있으며, 인쇄노동자들의 땀이 배어 있다는 것을 넓게 살펴봤으면 한다. 나부터도 책 한 권 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하는데, 백수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되니 어쩔 수가 없다.

책에 관해 생각하면서, 앞으로는 책을 읽고나면 평점을-개인적으로-부여하고, 책값과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작업을 해볼까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책들은 책값에 비해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증명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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