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제목 : 풀

작가 : 김금숙

출판 : 보리


김금숙 작가 작품. 그래픽노블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이렇게 과거의 기록을 남길 때다. 구술사의 경우,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구술자의 말을 글로 기록하게 되는데, 기록의 생생함을 글로만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글은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복원되지만, 독자의 상상은 독자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로 인해 제한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래픽노블처럼 글과 그림이 동시에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독자의 상상력을 확대하고, 고증의 완벽성이 관건이긴 하지만 독자의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또한 글만 읽을 때의 어려움을 그림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가독성을 높이고, 내용의 이해를 도우며, 책읽기의 즐거움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그래픽노블을 단순히 만화라고만 생각하면 큰 오판이다. 그림은 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으며, 글의 내용이 전달하고자 하는 원래의 목적을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이 작품은 일본군 성노예로 붙잡혔던 이옥선 할머니를 작가가 직접 인터뷰해서 그리고 쓴 작품이다. 이럴 때,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작가는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동질감을 갖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므로, 똑같은 소재라 해도 남성 작가가 접근하는 것보다는 훨씬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작가는 그림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붓과 먹을 이용한 흑백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흑백은 과거의 시간을 그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미지이며, 붓과 먹은 우리의 전통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 우리의 역사를 전통의 방식으로 다루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작가의 그림은 한국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과거의 시간에 채색을 하는 것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 잔인한 과거의 흔적을 묘사하는데 흑백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가는 일본군의 만행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의 마음을 묘사하는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그것은 이 역사적 사건에서 피해자가 주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를 가해자 중심으로 놓고 보면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간단한 예로, 박정희 정권에서 희생당한 인혁당 사건의 주인공들을 그릴 때도, 박정희 정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식과 인혁당 피해자와 가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분명하고 엄연하게 다르다. 역사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는 역사를 누구의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와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역사의 시각과 관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일본군 성노예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비틀릴 수밖에 없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일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도는 한국의 지식인 사이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이 사건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단지 포주와 창녀의 돈벌이로 왜곡, 격하시키는 발상은 일본이 늘 주장하고 바라는 관점이다.

이옥선 할머니의 경우, 당시 조선의 가난한 민중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일본의 수탈, 조선의 지배계급의 무능과 부패, 강대국에 침탈당하는 약소국의 비애, 식민지를 확대, 강화하는 제국주의의 발현 등 당시 역사의 총체적 사건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지와 편견, 왜곡된 지식으로 친일파가 되어버린 인간들의 역겨운 인식이 날뛰는 꼴을 볼 수 있다. 


김금숙 작가의 작품으로 오멸 감독의 영화를 그래픽노블로 창작한 '지슬'이 있다. '지슬' 역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제주4.3을 피해자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작가는 붓과 먹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흑과 백이라는 단순함은 이미지의 강렬함과 함께 주제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일수록 컬러보다는 흑백이 어울리는 이유는, 다채로운 색으로 분산되는 독자의 시선을 작가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금숙 작가의 이 작품과 '지슬'도 그렇고, 박건웅 작가의 일련의 작품 - 짐승의 시간, 노근리 이야기 등 -도 흑백으로 창작되었다.

김금숙 작가의 작품 주제인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고, 제국주의 일본이 침략했던 나라에서는 공통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이 전쟁범죄는 인권과 가장 깊은 관계가 있고, 특히 여성의 성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세계여성운동과도 밀접하다. '풀'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편성을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영국 '가디언'의 2019 최고 그래픽노블, 프랑스 휴머니티 만화상 심사위원특별상,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2019 올해 최고의 만화 등으로 선정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전쟁범죄, 성노예 범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과 김금숙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일본군의 성범죄에 대한 증언을 외면하고 왜곡한다. 일본이 아무리 오리발을 내밀어도, 역사는 분명하게 진실을 증언하고 있으며, 세계의 상식은 일본의 범죄를 규탄하고 있다. 김금숙 작가의 이 작품이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고, 전쟁 범죄의 잔혹함을 증명하며,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서 더욱 뜻깊다. 한국의 만화가들 가운데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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