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도바리


1980년을 배경으로 주인공 대학생이 경찰에 쫓기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니는 '운동권 대학생'을 이 책의 제목처럼 '도바리'라고 했다. 물론 운동권 대학생 뿐 아니라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수배자가 되었고, 잡히지 않으려 '도바리'를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때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고비를 맞고 있었는데,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지금은 '광주민주화운동'이 공식 인정된 명칭이지만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르던 그때는 '광주사태'라고 했다. 모든 언론에서는 광주에 무장간첩이 내려와 시민을 학살하고 있다는 새빨간 거짓뉴스를 퍼뜨렸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운 것이 바로 그때의 언론이었고, 그 언론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산다. 물론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도 잘 먹고 잘 산다. 이런 걸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만화의 주인공 김인권은 운동권 학생으로 수배자가 되어 남쪽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그는 '소설가'라고 말하고 작은 마을에서 민박을 하거나, 마음 좋은 노인을 만나 '조카' 노릇을 하며 일도 하고 밥도 얻어먹는다. 그가 찾아다니는 시골의 작은 마을들에는 대개 선량하고 순박한 주민들이 많았지만, 조금 더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도 온갖 타락한 인간관계와 권력구조가 개인과 작은 집단을 억압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결국 거대한 악인 군부쿠데타 세력을 없애면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던 김인권은 자신이 보고 느낀 현실에 절망하고, 경찰에 체포당한다. 80년대 '운동권'은 그때로는 비장하고 고결한 정신으로 적(쿠데타 세력)과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한없이 유치하고 비뚤어진 태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운동권 세력-은 적어도 군부쿠데타에 정면으로 맞섰으며, 이 나라를 다수의 민중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80년대는 여전히 전근대와 봉건의 의식이 많이 남아 있었고, 변증법적 유물론과 마르크스, 레닌을 부르짖는 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봉건적,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질서에 젖어 있던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들(운동권)은 민주주의의 시민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군부쿠데타 세력과 싸워야 했고, 모든 역량은 '반독재, 민주화'의 깃발 아래로 모여야 했다.

결국 전두환이 장기집권의 꿈을 포기하고, 노태우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88년 올림픽이 열리고,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문민정부'라는 타이틀을 세울 때까지, 막연하지만 온몸을 던져 싸운 그때의 20대 청년들의 피와 땀과 눈물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주인공은 수배자로 도망다니면서 민중 속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폭력을 보며 좌절하는 한편, 후배인 우광진이 전남도청에 남아 쿠데타 세력과 마지막 전투를 치를 때까지의 일기를 보면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당대(80년대)의 역사적 의미를 뼈저리게 느낀다. 지금 우리가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박근혜를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한 것이 한국의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고, 우리가 직접 만들어 냈다는 것을 가슴 절절하게 느끼는 것처럼, 80년대의 청년들 역시 자신들이 지금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묵직하게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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