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9-26(일)
 

건강일기-004


두 달의 시간


채혈, 위내시경, CT 촬영을 하고 일주일 뒤에 담당 의사선생님을 만났다. 의사선생님을 만나기 직전에 긴장감이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의사선생님의 말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침내, 내 이름이 불렸고, 나는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내도 걱정이 되어 함께 왔는데, 나는 의사 앞 빈 의자에 앉았고, 아내는 내 뒤에 서 있었다.

의사선생님이 앉아 있는 책상에는 모니터 두 대가 보였고, 거기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미지가 보였다. 의사선생님은 모니터를 보면서 설명했다. 간의 표면이 울퉁불퉁한 것은 이미 간경화가 많이 진행된 것이다, 간에 결절도 여러 개 보이는데, 이미지로만 보면 상태가 조금 나빠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단 약으로 치료하면서 경과를 보자고 했다. 그때까지 의사선생님은 간 상태에 관해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한 가지만 궁금했다. '간암은 아닌 거죠?' 의사선생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 간암은 아니고 간경변입니다.'

그 말 한 마디를 듣는 것이 내 삶에서 변곡점을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진료실에서 나와 간호사와 다음 진료 일정을 잡았다. 두 달. 간경변 치료제 두 달치 처방전을 받아 나오면서, 아내와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내는 '다행이다'라며 깊은 숨을 내쉬었고, 오늘 검사 결과를 알기까지의 지난 일주일 동안 몹시 스트레스를 받았노라고 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얼마나 졸렬하게 살아왔는가를 반성했다. 나는 이기적으로 살았다. 내 존재가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내가 부모에게 불효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삶에 큰 미련이 없었고, 죽음은 언제든 가까이 있으며, 가족에게 나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아들은 내가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나는 바닷가 모래알처럼 아무 존재감 없이 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약 60년을 살아오면서 남긴 것은 쓸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 억울할 것도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아내와 아들은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누나가 둘이나 있고, 그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건 도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은 내 건강을 깊이 염려하고 있었고, 심지어 아들은 만약 내가 간암이라면 자기 간을 이식할 거라고, 엄마에게만 몰래 말했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무명인이지만, 가족에게는 '특별한' 존재였다. 가족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을 하기 어렵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족은 서로에게 살갑게 대하기 보다는 무심하게 대한다. 심지어 부모는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고, 자식은 부모를 원망하거나 반항한다.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사소한 일로 다투거나 미운 감정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은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 때, 가족 가운데 누군가 고통을 당할 때 서로를 끌어 안고, 단단하게 뭉친다. 내가 간경변 진단을 받기 전까지의 삶은 무난한 삶이었다. 


내 삶은 결혼 전과 후로 나뉜다. 결혼 전까지 내 삶이 거친 황야를 떠도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결혼한 다음부터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안정한 삶을 살았다. 이 모든 건 아내 덕이었고, 나는 그걸 늘 기억하며 살아왔다.

결혼 초기에 직장 생활을 몇 년하고 도시에서 시골로 이주한 이후 나는 줄곧 지역 사회에서 크고 작은 일을 했다. 지역에서 일한다는 건 봉사를 한다는 뜻이다. 돈을 받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내 돈을 쓰면서 봉사를 하는 것이 지역 사회에서의 일이다.

나는 '주민자치위원'으로 시작해 내가 사는 마을의 이장도 하고, 지역의 몇몇 단체에서도 일했고, 지금도 일하고 있다. 군 단위 전체 인구가 불과 12만 명에 불과하고, 내가 사는 면 인구도 1만 명인 작은 지역에서 일하는 건, 내가 가진 작은 능력을 투입하는 것이다.

지역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내가 든든한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를 부럽게 생각한다. 나는 백수가 분명하지만, 시골에 정착하면서 늘 바빴다. 대부분은 내가 사서 고생하는 일을 저지르기 때문이지만, 지방으로 내려온 이후 나 스스로 가진 생각 가운데 하나는, 지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해 내가 가진 작은 능력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아이가 '어린이 집'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병설유치원, 시골의 분교를 거치고, 청년이 될 때까지 나는 지역에서 일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내가 가진 별 것 아닌 능력이 도움이 된다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시골에서 한 20년쯤 사니 이제서야 지역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와 사람들과도 낯설지 않게 인사할 정도가 되었다. 그동안 보낸 시간은 지역을 이해하고, 배우는 시간이었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초반에는 의욕이 앞서서 지역의 상황에 맞지 않는 제안이나 주장을 해서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름 보람된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만든 적도 몇 번 있어서 그간의 시간이 낭비였던 것은 아니다. 면 단위 주민자치 소식지를 최초로 기획, 편집, 제작해서 지금도 발행하고 있고, 마을 홈페이지, 면 단위 홈페이지도 처음으로 만들어 자료를 올려보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당시만 해도 너무 앞서나가서인지,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결국 사라졌고, 현재는 새로운 방식으로 지역의 일을 해나가고 있다.

내 본업은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시골에 정착하고 소설을 쓰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활동이 거의 없는 겨울 몇 달 동안 장편 소설 한 편을 쓰는 것으로 작정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서너 편의 장편을 쓴 것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써놓기만 하고 그만이었다.

스스로 삼류 작가라고 생각해서, 어디에서 '작가'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고, 누가 나를 작가라고 알아봐 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나마 2010년부터 시작한 페이스북이 밖으로 향한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아내와 돌아오는 길에 문호리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쌀국수. 일주일 전, 병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갔던 날도 돌아오면서 쌀국수를 먹었다. 일주일 전에는 불안한 마음으로 쌀국수를 먹었다면, 이번에는 안심하는 마음으로 쌀국수를 먹었다.

두 달치 약을 받았고, 내 일상에서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약을 전혀 먹지 않고 살았다. 퍽 건강한 편이었고, 내가 건강한 것은 모두 어머니 덕이라고 감사하며 살았다. 어머니 생전에 들었던 이야기로, 나는 네 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었다고 했다. 세 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으니, 아마도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퍽 건강하게 살았고,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할 때마다 고맙다고 혼잣말을 한다.

쌀국수를 맛있게 먹고 집에 돌아와 예전처럼 일상을 보냈다. 다음 병원갈 때까지 두 달의 시간이 있었고, 그때가 4월이었다. 의사선생님은 지나가는 말처럼 '음식은 싱겁게 먹고, 운동하고, 체중을 좀 줄이고...'라고 했지만, 나는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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