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소확행'이 불편한 까닭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8포 세대에게 미래의 거창한 계획은 불가능한 꿈이기에 차라리 그런 꿈조차 무모하니까 일찌감치 포기하고, 일상의 작고 사사로운 것들에서 행복을 찾자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조물주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건물주'가 초등학생의 꿈이 되어버린 세상은, 삶의 목표를 오로지 '자본의 확장'에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무한 질주의 레이스에 뛰어들게 만든다. 그 가운데 99.9%가 도태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뛰어든다. 전부를 얻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잃는 사회 구조가 원인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므로 자의 반, 타의 반-구조적 모순이 더 크다고 보는 나는 타의의 비중이 훨씬 높다고 보지만, 경쟁을 통해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이 구조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죽음의 레이스에 뛰어드는 것이다.

'소확행'은 두 가지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모순을 외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착취 구조를 모른 채, 일찌감치 경쟁을 포기하고 자본의 노예로 근근히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경우가 하나이고, 그런 행위 자체가 자신들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자본주의 체제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둘은 하나의 행동에서 발발하는 중의적 결과로 드러나며,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자본의 착취구조에서 가장 아래 속하는 피착취계급이며, 자본이 쉽게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며, 자본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노예가 되는 어리석은 시민의 모습이다.

'소확행'은 개인의 노력과 의지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 개인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사회적 계층구조가 너무 높아서 한 단계를 뛰어오르기에는 제약이 너무 많고, 도약이 불가능하며, 그런 도약과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차단하고 있다는 말이다.

누가 그러는 걸까. 누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걸까. 마치 '소확행'이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이상적인 삶'이라고 치장하고 미화하는 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말에 쉽게 속는다. 비판 없이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선민의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노예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어리석은 인간은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자본의 착취구조가 엄연한 상황에서,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분명하게 주장하지도 못하는 노예 상태를 무지해서 모르거나, 일찌감치 포기하고 자발적 노예가 된 사람들이 마치 발목에 감겨 있는 쇠사슬에 광을 내듯이 '소확행'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를 착취하고, 돈과 시간으로 옭아매고,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는 자본은 그러나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근사한 레스토랑과 명품 매장과 따끈한 신제품과 맛집과 거대한 쇼핑몰과 예쁜 인테리어와 기능성 화장품과 유명 메이커와 브랜드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소비하고픈 개인의 욕구와 욕망을 자본은 '돈'과 '시간'으로 통제한다. 원하는 것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이 없으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개인의 욕망과 욕구를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더라도, 더 이상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리게 된 피착취계급(90%의 노동자, 학생, 청년, 서민)은 자신들의 노력과 의지로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람쥐 체바퀴 돌아가듯 한 자리만 맴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본이 원하는 것은 무한 경쟁이지만, 이제는 그런 경쟁에서 스스로 도태되기를 선택한다. 이런 행동은 논리적 깨달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경쟁을 멈춘 사람들은 최소한의 조건으로 살아가야 하므로 생존이 어렵지만, 무한 경쟁을 하다 죽으나, 가난하되 마음 편하게 살다 죽으나 결국 마찬가지 결과에 이른다는 것을 아는 순간,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다. 이것은 자본에게 위기의 순간이다.

'소확행'은 마치 새로운 트렌드를 소비하는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포장되고 있지만,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청년 세대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자포자기 삶의 형식이다. 물질소비의 수준이 절대 비교에서 과거(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 온 청년 세대는 자본의 억압과 통제에 맞서 싸울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더욱 거세게 자본과 맞붙어 깨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노동생산성이 증가하고, 빈익빈 부익부의 균열이 커지면서 상대적 빈부의 체감은 과거에 비해 두드러지지만, 절대 빈곤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근근히 먹고 살 수는 있으나, 자신들이 지하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빠져나올 수 없는 삶, 깊은 우물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미로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는 삶을 떠올리면, 죽음 이외의 다른 삶은 오로지 고통 뿐이다.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생각하는 것을 멈춰야 하고, 현실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찾아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소확행'이다.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진정으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려면, 그 사회는 무엇이든 꿈꾸고 도전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지금의 현실은 자본의 억압과 착취의 그늘에서 시들어가는 청년 세대의 자학적 반어법이 '소확행'이라는 걸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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