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군대폭력의 기원


한국 군대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다른 어느 나라 군대의 폭력보다 잔혹하고 악랄하다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동의할 것이다. 1980년대 초반에 준전방에서 30개월 군복무를 한 내 경험으로도 군대 폭력은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했다.


한국 군대는 왜 이렇게 폭력적인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일본강점기의 일본군대 영향이라고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한다. 많은 부분 사실이다. 일본군은 조선을 점령하고, 조선인을 군대에 강제로 끌고가서 전쟁에 끌어들였다. 군대에서 조선인은 2등 국민으로 취급받았고, 폭언, 폭력을 휘둘렀다. 해방 후에도 이런 부정적 전통은 이어졌는데, 일본군대의 장교였던 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고나서 일본군의 잔재는 고스란히 한국군으로 이어졌다. 일본군대에서 폭언, 폭력을 배운 조선군인들은 해방되고 한국군의 탄생에 깊이 관여했으며, 그들이 군대의 주요한 위치에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한 남한의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 미국 군정의 복합 요인이 한국 사회와 군대에서 친일파가 판치는 세상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한국군의 더러운 전통은 일본군대에서 온 것이지만, 일본군대의 폭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군대에서 폭력이 발생한 이유는 당연히 전투와 관계가 깊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전투는 소총을 들고 싸워도 매우 원시적이고 미개한 방식이었다. 소총이 발명된 15세기 이후, 소총을 보유한 군대는 칼과 활을 든 적들과 싸워서 높은 승률을 유지했다. 소총의 사거리가 활보다 훨씬 길고, 적군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기 때문에 소총부대는 당시 과학기술이 발달한 유럽의 일부 국가들과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가장 먼저 보유하고 있었다.


초기 소총은 '전장식'이어서 총알을 총구 쪽으로 넣어야 했다. 한 번에 한 발씩 사격할 수 있었고, 총을 한 번 쏜 다음에는 총열을 닦고, 총알을 넣어 장전할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빨라야 20-30초였는데, 이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다. 칼과 활을 가진 적들이 소총 부대를 향해 달려오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총부대는 2열, 3열로 서서, 1열이 총을 쏘고 재장전을 할 때, 2열이 다시 소총을 쏘고 장전을 하고, 3열이 소총을 쏘고 장전할 때 1열이 장전을 마치고 다시 발사하는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발사 속도의 간격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 경험이 적은 나이어린 군인들은 소총을 한 번 발사한 다음 장전을 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적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활을 쏘고, 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는데, 코앞까지 달려오는 적을 보면서도 장전을 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전열을 이탈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렇게 전열에서 이탈하는 군인을 막기 위해 구타가 시작된 것이다. 즉, 군대에서의 구타는 봉건시대의 유물이다. 서양의 군대들이 봉건시대를 벗어나면서 현대 군대에서는 더 이상 병사에 대한 구타가 존재할 이유도 없고, 구타가 범죄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그것은 인권의 신장과 함께 민주주의의 기본 인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근대, 봉건, 식민지의 군대 경험에서 벗어날 기회가 없었던 한국군은 일제군대의 경험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군부의 일본군에 대한 향수가 군대의 구타를 용인하고 존속하도록 했다. 결국 한국군은 지금도 전근대와 봉건, 일제군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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