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과학, 역사, 철학, 예술


핀란드에서는 학교 교육과목을 모두 없앴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육과 관련해 늘 생각하던 내용을 조금 정리했다. 나는 현재의 학교 교육을 혐오한다. 한국의 학교 교육 뿐 아니라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교과서 중심의 학습 내용을 증오한다.


나는 학교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해서 오히려 제도교육의 억압을 덜 받은, 그래서 스스로 공부하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 늦게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푸코의 지적처럼, 학교는 감옥과 같다. 근대의 집단시설인 병원, 감옥, 학교는 동일체라는 것을 푸코는 명징하게 증명한 바 있다. 근대(1700년대부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많은 것을 발명한다. 중세를 거치면서 인간의 이성이 깨어나고,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문명이 개화하면서 인간의 삶은 옛날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게 분화하기 시작했다. 계급은 그 전부터 존재했지만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계급의 대립은 날카롭고 격렬하게 변화했다. 자본주의의 착취가 잔혹할 때, 그 속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탄생하고, 이념의 대립과 과학기술은 새로운 기술의 무기화로 종종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로 농경사회였던 중세 이전의 시대에는 피지배계급, 착취당하는 자들은 문자를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지식인들이 곧 지배자였고, 문자를 아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무지렁이'들은 땅을 파고, 소, 돼지를 기르고, 물건을 만들고, 집을 짓는 일을 했다. 그들은 신의 대리인(교황)을 두려워했고, 봉건 영주와 왕에게 무릎을 꿇었다. 지식이 없었기에 그들이 아는 세계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자본주의는 기술의 혁명과 함께 시작되었고, 기계의 도입과 대량생산, 노동자의 노동이 이윤의 핵심이었다. 노동자들은 배우지 못했고, 글도 몰랐으며, 매우 어리거나, 어리석은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기계를 움직이고, 설명서를 읽고, 작업지시서를 읽어야 할 필요가 생기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도 글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최초의 학교는 노동자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것은 결코 자본가의 시혜나 너그러움, 인류애가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자본가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노동자를 교육시킨 것이고, 공장 노동에 필요한 만큼의 지식만을 가르쳤다. 근대의 계몽주의는 무지와 몽매의 상태에 놓여 있던 민중이 스스로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진보적 지식인과 시대의 요구-자본가의 이윤 추구와 과학기술, 이성의 발달-에 의해 폭넓게 확산하게 된다.


자본가에 의한 교육의 시작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진보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도 봉건제를 딛고 일어서는 과정에서 부르주아와 자본가의 역할이 혁명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설파한 바 있듯이, 무지렁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이 제도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교육을 받아 읽고 쓰기가 가능해지면서 사회의 진보가 더 빠르고 넓게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의 새로운 주인으로 떠오른 자본가는 구시대의 권력자들이었던 봉건 왕족들과 귀족, 종교집단의 권력자들과 같은 고민에 빠진다. 즉 민중을 억압하고, 그들을 통제하며, 자신들의 이익과 이윤을 위한 도구이자 소모품으로 쓰고자 하는 필요를 갖게 되는 것이다. 봉건시대 이전까지의 권력자들은 신정일치를 통해 민중을 어리석은 상태에 가두고, 비교적 수월하게 통제, 억압할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 시대에는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봉건적 전통에 따라 봉건노예를 부리듯 하루 16시간의 노동과 아동노동, 여성노동이 당연했고, 노동자의 평균 생존연령이 30대를 넘기지 못할 정도였다. 진보적 지식인과 노동자, 민중의 저항으로 노동시간은 단축되고, 아동노동은 금지되었으며-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지만-노동시간은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과잉노동의 시대다.


자본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학교에서, 자본가가 원하는 내용의 교육을 받고, 자본가가 필요한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육이었다. 그와 함께 교육의 의미와 외연이 확장되어 갔고, 기초학문과 자연과학의 비중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학교는 정확하게 사회의 요구-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의 요구-만큼 교육 내용을 구성한다. 학교는 교과 과정도 그렇지만, 학교 자체가 자본주의의 축소판으로 작동한다. 즉 치열한 경쟁을 통해 진학하고, 치열한 성적 경쟁을 통해 학교와 직업, 직장의 순위가 결정되도록 만든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자본(가)의 일관된 요구이자 필연적 과정이다. 학교는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있는 한, 그 자체로 감옥이며 자본의 노예를 생산하는 생산 공장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비자본주의적 요소가 존재하고, 반자본 운동의 영향이 학교의 영역을 확장하고, 자유와 반자본, 학문의 역할을 바로 잡기도 하지만, 그것은 극히 드물고 소수의 영역에서만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초중고등학교는 대학교를 가기 위한 입시학원이며, 대학은 취업을 위한 입시학원이다.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뿐 아니라 여러 개의 학원을 전전하며 사교육을 받아야만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앞서갈 수 있다고 믿는다. 사교육 시장 또한 거대한 자본시장이며, 그 시장에 돈을 빼앗기는 것은 중산층과 서민들이다. 즉, 자신들의 임금에서 많은 부분을 아이의 사교육 비용으로 지출하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전혀 필요없는 비용이므로, 한국의 부모는 교육에서 이중 지출을 하는 것이다.


교육시스템을 완전히 바꾸려면 관련 법을 많이 바꾸거나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데, 자본의 앞잡이들인 입법기관의 국회의원들은 결코 그런 혁명적 과정에 동의하거나 동조하지 않는다. 경쟁과 착취는 자본의 기본이자 필수 요소다. 기득권자-자본가, 부르주아-는 물론 노동자 부모들도 자식이 경쟁을 통해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기를 기대한다. 즉, 부모의 욕망이 자본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 서민, 자영업자인 부모들의 의식이 낮은 단계에 있고, 계급적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민중의 다수는 어리석다. 역사는 조금씩 진보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빠르게 후퇴할 때도 많은데, 민중, 쁘띠 부르주아들의 의식이 균일하지 않고, 진보적 태도와 보수적 태도가 상황에 따라 바뀌며, 기본적으로 지식과 철학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당장 가능하지는 않지만,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어리석은 부모라도 자신들은 물론, 자식들에게 종교를 믿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특히 성인 이전의 청소년, 어린이에게 종교의 물이 들도록 하는 것은 가장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종교가 득세하는 사회는 무지와 몽매의 단계를 유지하려는 신정일치 사회와 자본의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사교육은 물론, 공교육도 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문제가 있다면 또래 아이들과의 교류가 학교나 학원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대안학교'가 현재 하나의 대안으로 작동하지만 나는 그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요즘은 온라인으로 얼마든지 또래 친구는 물론 다양한 사람을 사귈 수 있고, 그것을 오프라인으로 확장할 수 있으므로 학교나 학원이 대안이 되지 않아도 된다.


책을 읽히되, 과학, 역사, 철학, 예술에 관한 책을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이 좋다. 공교육의 교과서는 사회의 규범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기본 지식을 공통적으로, 표준화하여 가르치고 있다. 국가 단위의 조직에서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지식을 배우는 것은 좋지만, 국가주의, 애국주의, 자본의 노예가 되는 교육을 통해 개인의 의식을 제한하고, 일정한 틀에 가두는 부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공교육의 교과서가 아닌, 서점에서 파는 책 가운데 훌륭한 책을 가지고 주로 과학, 역사, 철학, 예술에 관해 공부하고 기초를 다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이론적 교육과 함께 어린이나 청소년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실질적 교육으로 집안 살림, 목공을 비롯한 다양한 기술교육, 농사, 임업, 산과 숲, 들에서 살고 있는 동식물에 대한 이해, 과학 기술의 응용, 인터넷 기술 등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보와 지식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


아이가 무려 12년(초중고) 동안 지옥같은 학교에서 경쟁과 비교를 당하며 끊임없이 모멸을 느끼고, 굴욕당하며, 수모를 견뎌야 하는 현실을 똑바로 들여다 봐야 한다. 어린시절, 청소년 시기는 한 사람의 삶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아름다운 시간을 고통과 비참함으로 보내야한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하다. 청소년 자살율이 세계1위인 한국은, 여전히 청소년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고, 근본적으로 학교를 철폐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BEST 뉴스

전체댓글 0

  • 94391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과학, 역사, 철학, 예술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