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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철수 의원께
    안철수 의원께 날마다 뉴스에 오르내리는 안철수 의원을 보면서, 언론의 포화상태가 이제는 도를 넘어서고 있고, 그로 인해 여론도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 이어지는 변곡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에 입문한 이후, 지금까지 안철수 의원을 지켜보면서 갖게 된 제 생각을 정리하고, 안철수 의원께 한 두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가 알던 예전의 안철수 대표와 지금의 안철수 의원은 사뭇 다른 사람입니다. 물론 예전과 지금의 역할, 입지, 철학 등이 같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됨'입니다. 그 사람의 ‘기본'과 ‘철학'이 바뀌게 되면, 말과 행동이 바뀌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심각하게 오해를 하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안철수 의원의 중심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흔들리지 않고 있다면, 언론이 아무리 찧고까불어도 걱정이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안철수 의원을 보면서, 예전의 그 담담하고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만 그럴까요? 안철수 의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지금은 휴간을 결정한 컴퓨터 잡지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서 했던 한 워크샵에서였죠. 1박2일의 그 행사에는 당시 유명한 프로그래머들이 대부분 참석했고, 저는 프로그래머는 아니었지만, 그 잡지의 부록을 기획하고 글을 쓰던 입장이어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의 앞자리에서 안철수 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그 뒤로 안철수 님이 ‘안철수연구소'를 세우고, 본격 IT사업을 시작한 1999년에 저도 ‘안철수연구소'에 입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안철수 님과 창업 멤머 가운데 저와 친분이 있었던 분들의 도움이었음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때의 안철수와 지금의 안철수가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변하는 것 자체는 필연이지만, 어떻게 변하는가는 상당부분 개인의 의지가 반영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재직하던 1999년부터 2005년까지는 회사도 크게 성장하던 시기였고, 직원들도 20, 30명 정도에서 400명이 넘어가는 중견기업으로 매우 빠르게 커가고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다른 직원들도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컸고, ‘안철수연구소', ‘안랩'에서 일한다는 것에 긍지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직원들 뿐 아니라 ‘안랩'을 바라보는 많은 국민들의 시선 또한 그러했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당시 코스닥 열풍이 불면서, ‘안철수연구소'가 코스닥 상장만 하면 돈방석에 앉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다들 떠들어 대던 때에도, 올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겠다는 안철수 대표님의 발언으로 사람들은 더욱 놀라면서 안철수 대표님을 존경하게 되었구요. 안철수 대표님은 대외 활동이 많아지기 전까지는 회사 안에서 스스럼 없이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도 같이 먹는 소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자본가니, 경영자니 하는 그런 살벌한 단어가 아닌,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한 한 사람의 개발자로서, 한국 컴퓨터 업계에 도움이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일정부분 희생한 의학도로서 성실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안철수 대표님의 진심과 마음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제가 회사에서 퇴직한 이후, 오히려 회사 내부의 사정을 직원일 때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게 되면서, 저는 안철수 대표님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의 장막'이 안철수 대표님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증거를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퇴직하는 과정에서 직접 겪었던 일과, 그 이후에 가까운 벗들에게서 듣게 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면, 안철수 대표님의 이미지는 외부에서 만들어진 것이긴 해도, 실재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자신의 입맛에 맛는 말만을 하기를 바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폭군 아래 간신들이 존재하는 것은, 간신들 때문에 폭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간신들과 폭군이 서로 교감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날, 안철수 의원이 정치 입문 당시의 그 깨끗하고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이미지가 사라지고 ‘간철수', ‘강철수' 같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참담한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단지 반대파들의 마타도어 뿐일까요? 안철수 의원의 행보는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라에 중요한 사건들이 터졌을 때, 그것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거나 행동한 경우를 거의 볼 수 없었고, 지금 박근혜 정부가 보여주는 반민주, 반인권, 반노동의 상황에서도 어떠한 반대 주장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정치가라면, 그것도 대통령 후보로 강력하게 거론되는 정치가라면 현재 대두되고 있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과 행동을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세월호 참사 사건도 그렇고, 매번 광화문과 시청에서 열리는 민중집회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리가 여당도 아니고, 야당의 자리이며, 현재 정권이 인민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몰아가고 있음에도 민중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여전히 내부의 권력투쟁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고통 받는 인민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대통령이 되면 다 해결할께'라는 생각이라면 그것이 예전에 박근혜가 말한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김장 담그기에 가서 앞치마를 두르고 김치나 먹고 오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한다면, 예전의 썩어빠진 정치가들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고, 안철수 의원 개인이나 한국정치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겁니다. 문재인 대표와의 권력투쟁은 안철수 의원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백의종군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필요한 방법이고, 무엇보다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전국을 돌면서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많은 사람들, 노인, 여성, 어린이, 장애인, 농어민,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만나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지금의 싸움을 멈추고, 혈혈단신으로 ‘하방'하시기를 권합니다. 튼튼한 신발을 신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걸어서 이 나라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 보시길 권합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 나라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 바꿔야 하는지 진심으로 배우시길 권합니다. 기존의 정치가들이 보여주는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모리배 같은 모습들은 우리가 바라는 정치가의 모습이 아닙니다. 끼리끼리 담합하고, 자신들을 위한 법을 제정하고, 가진 자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고, 돈과 권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정권과 국회의원들이 바로 이 나라를 망치는 주범들입니다. 그런 곳에서 뛰쳐나와 오히려 거친 광야에서 외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것입니다. 자신의 정치를 하려면,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가의 철학은 책상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 거리에서, 시장에서, 노동현장에서, 시골의 논밭에서, 어촌의 바닷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전히 안철수 의원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기에 이렇게 쓴소리를 하게 됩니다만,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그나마 남은 잔불 같은 애정도 거둬들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가 아니라 ‘인민'에게 중요한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 칼럼
    • 백건우
    2021-07-30
  • 진보세력은 부르주아 정당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진보세력은 부르주아 정당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지리멸렬. 지금의 부르주아 정당-여당인 새누리당은 명확히 인민의 적이므로 여기서는 제외하고, 상대적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새정련)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한다-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다. 게다가 진보를 표방하는 야당인 정의당 역시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보수세력은 부패로 망하고, 진보세력은 분열로 망한다는 명제는 한편으로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야비한 음모가 감춰진 마타도어에 불과함을 인식해야 한다. 각종 선거를 치르면서 드러나는 투표 결과를 보면, 한국의 진보세력은 대체로 약 7% 정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 결과는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는 다르게 드러나는데, 선거의 특성 때문임은 당연하다. 정당에 대한 지지도는 새누리당이 약 35%대, 새정치민주연합이 31%대라고 대략 확인할 수 있는데, 지지 정당이 없거나 어떤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부동층이 약 27-30% 이상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에서 중요한 사건이 갑자기 떠오를 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대체로 진보적인 편이다.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인민의 시각을 보라. 광우병 사태 때나 한미FTA 당시를 떠올려 보면, 정당의 지지도와는 관계 없이 인민들은 자연스럽게 진보적인 태도를 보이게 마련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사안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결정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1987년, 1988년의 민주화 투쟁을 돌아보면, 억눌렸던 노동자, 인민의 분노가 한꺼번에 표출될 때, 사회가 어떻게 바뀌는가를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지금 야당(새정련)의 행태는 인민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정치권력의 내분으로만 이어지고 있다. 국회로 대표되는 정치권력의 정당 싸움은 인민의 삶과 멀어진 상태이고, 그들이 인민의 삶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인민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많은 부분, 수구 정당인 반동 여당을 지지하는 세력-기업을 비롯한 한국의 약 35% 가까운 사람들-이 지금의 부패하고 부도덕하며 반민족적인 사회를 만든 것은 분명하고, 그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들이지만, 그에 맞서는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세력들의 분열로 적들이 발호할 기회를 준 것 역시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약 70%에 가까운 부르주아 정당 지지자들과 지배세력은 모든 문제를 자신들에게 향하도록 하고, 자신들만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세력이라고 여론을 형성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 부르주아 정당과 지지자들은 진보적인 테제들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들을 언급하며, 정당과 정치가 개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싸우는 척 할 뿐이다. 이들 사이에서 진보세력은 나름 고군분투를 하고 있지만, 그들은 인민들이 보기에 무능한 세력으로 찍혀 있다. 대중들은 무능한 진보세력보다는 부패하거나 기회주의적이어도 능력 있는 정당을 선호한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기대하기로는, 범진보세력의 연합을 갖추기 바란다. 물론 그런 연합을 위해서는 공통의 테제가 있어야 할 것이고, 조금 느슨하더라도 진보적 사회구조를 만들어 가기 위한 제도들을 공유하고, 야당을 지지하는 인민들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제도들을 만들어 널리 알리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야당(새정련)에 대한 기대나 미련을 완전히 떨쳐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진보세력의 일부 명망가들은 부르주아 정당의 권력에 편입하기 위해 역겨운 짓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없지 않다. 진보세력이 만들어 내는 진보적 가치, 테제들은 무능하고 게으른 야당을 뒤에서 채찍으로 모는 효과를 낸다. 반대로 지금 당장 영향력이 있는 야당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기 시작하면, 진보세력이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뿐더러, 진보세력의 분열과 고사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 명망가-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사람들-에게 기대하게 된다. 그들이 단지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진보적 가치를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철학, 세계관, 진보적 태도를 눈여겨 봐야 한다. 정치에서도 '스타'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스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사실 '스타'를 만드는 것도 인민이고, 명망가를 우리의 지도자로 추대하는 것도 인민이다. 우리는 세력 관계를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명망가들이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기준에 맞는 명망가를 찾아서, 우리를 이끌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세력은 제대로 된 '스타'를 아직도 만들지 못한 상태이고, 부르주아 정당에서 활동하는 명망가들에게 기대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것은 진보세력의 무능을 드러내는 상징적 현상이기도 하다. 물론 현실적으로 진보세력 내부에서 대중에게 인기있는 정치가나 명망가를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에 부르주아 정당의 인기 정치가에게 기대하고, 그들로 하여금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도록 만드는 전술은 이해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문재인이나 안철수와 같은 유명인은 그들이 권력을 갖고 있고, 그 권력을 이용해 인민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의 정치철학, 세계관을 들여다 보면-그럴 필요도 없이 지금 당장의 행동만을 봐도-그들이 인민의 뜻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반면, 같은 부르주아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박원순 서울시장의 경우는 다르다. 앞의 두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인민과 직접 만나지 않는 자리에 있다면, 뒤의 두 사람은 행정가로서 구체적인 살림을 꾸리고 집행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인민의 삶에 매우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정치철학을 구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보세력의 대표적 아이콘이라면 역시 '노동조합'이다. 한국에서는 민주노총이 있고, 민주노총은 수 많은 진보세력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단체임에도 그들의 역량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진보세력이 탄압 받고, 세력을 확장할 기회와 여유가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진보세력의 중심에 서서 한국 전체의 진보세력을 이끌고, 조직하며, 연대하고, 연합해야 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능함은 반드시 외부의 요인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개인이나 조직은 그 위상에 걸맞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민주노총의 지리멸렬은 한국 전체 진보세력의 지리멸렬을 상징하고 있고, 그들의 무능은 한국 진보세력의 무능을 상징한다. 지금의 단계에서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 역시, 진보세력이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보세력 내부에도 조직에 빌붙어 기생하는 기생충들이 꽤 있기 때문에, 이런 쓰레기를 먼저 청소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보적인 인물이라고 해서 이름을 내걸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취하는 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한때는 386이니 486이니 해대면서 권력의 단맛을 빨아 먹던 자들이 이제는 노회하게 정치꾼으로 표변해 진보세력의 사회적 역할에 걸림돌이 되는 자들이 꽤 있다. 부르주아 정당과 거래하기 보다는, 그들을 압박하고, 진보적인 가치를 구현하지 못하는 자들은 대열에서 쫓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진보적 가치란, 현 단계에 맞는 대중적 수준임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우리는 노동시간의 단축, 사회보장의 확대, 기업의 특혜 말소, 평등한 법의 구현, 세금의 공정하고 평등한 납부와 사용에 관한 감시, 각종 사회의 특혜 폐지,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완전한 구현, 경제범죄에 대한 가중처벌 등 현 단계에서의 진보적 가치를 꾸준히 주장하고, 그것에 동의하는 정치가를 끌어들여야 하며, 무지한 대중을 교육시켜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내부 투쟁은 자본가들이 가장 원하는 방식이다. 노동계급 내부에서 분열을 조장하고, 노동자를 갈라서게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바이고, 실제로 '노동귀족'이라는 말로 이미 노동자의 분열은 현실이 되었다. 무지한 노동자에 대한 교육과 무지한 인민에 대한 교육은 진보세력에서 반드시 추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전술이기도 한데, 이걸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대중은 어리석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대중은 '우중'이라고도 한다. 어리석은 무리라는 뜻이다. 그들이 저절로 똑똑해질 거라고 믿는 것은, 어느날 원숭이가 인간으로 바뀐다는 주장하고 똑같은, 멍청한 말이다. 요약하자면, 진보세력은 핵심 테제를 공유하는 수준에서 연합해야 하며, 부르주아 정당과 정치가를 압박해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도록 하고, 인민에 대한 교육을 구체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요즘의 한국 정치나 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어보인다. 이제는 노예처럼 변해버린 인민들은 죽기 직전까지 내몰리면서도 항의 한번 못하는 병신이 되어 버렸고, 가진 자들은 채찍을 더 심하게 내리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분노하지 않는 인민은 '자유로운 시민'이 아니라 단지 노예일 뿐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30
  • 꽁트_매국노 사냥꾼
    <꽁뜨> 매국노 사냥꾼 BMW 820D가 미끄러지듯 호텔 입구에 들어왔다. 도어맨이 재빠르게 뒷문을 열자, 중절모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다른 문에서도 남자들이 내렸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짙은 선그라스를 쓰고 있었다. 중절모는 도어맨에게 팁을 건냈다. 도어맨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차를 호텔 앞 가장 좋은 자리에 세웠다. 중절모를 쓴 남자가 앞장 섰고,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세 남자는 호텔 로비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프론트에 도착한 남자는 점잖고 교양 있는 태도로 '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물었다. 프론트 직원은 조금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졌다. 회장님의 거처는 1급 비밀에 해당하는 내용이어서 누구에게도 알려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은 여느 손님과는 달라보였다. '회장님 거처는 저희도 모릅니다만...' 직원은 지배인이 지시한대로 일단 모범답안을 말했다. 그러자 중절모에 선그라스를 쓴 남자는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팻말을 꺼내 보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701호실. 우리도 알고 있어요. 거짓말 하면, 그 대가가 어떤지 몸으로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자기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남자의 말에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왔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하면 안 됩니다. 아셨죠?' 남자들은 프론트를 떠나 엘리베이터 쪽으러 걸어갔다. 키가 크고, 군살이 없이 마른 몸매에 짙은 선그라스를 쓴 남자들이라면...직원은 회장이 있는 수트룸의 호출 버튼에 손을 가져갔지만, 누르지는 못했다. 1701호 객실은 호텔에서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네 개의 수트룸 가운데 하나로, 17층은 전체가 비어 있고, 오직 회장만이 사용하고 있었다. 다른 수트룸이 차는 경우는, 회장이 초대한 사람이거나, 정치계의 거물이 요청하는 경우, 외국의 귀빈인 경우 외에는 예외가 없었다. 17층 엘리베이터 앞에는 경호원 두 명이 24시간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17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세 남자가 내리자 경호원이 다가왔다. '아, 손님, 여기는 객실이 없습니다. 잘못 올라오신 듯 한데, 다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경호원이 친절하게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세 남자는 1701호를 향해 걸어갔다. 경호원은 놀라서 세 남자 앞으로 달려와 가로 막았다. 그들의 허리에는 가스총이 매달려 있었다. 중절모는 다시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팻말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자 경호원들은 멈칫,하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중절모 뒤에 서 있던 두 남자는 양복 저고리를 슬쩍 열어보였다. 그들의 허리에는 권총 손잡이가 보였다. 경호원들은 복도 옆으로 붙어섰고, 세 남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1701호 앞으로 다가갔다. 중절모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중절모는 조금 세게 다시 두드렸다. 몇 초가 지나고, 안에서 '무슨 일이야?' 하는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중절모는 온몸으로 문을 강하게 밀어부쳤다. 그 충격으로 안에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나뒹굴었다. 중절모는 객실로 뛰어 들어 회장을 찾았다. 다른 남자가 넘어진 회장의 비서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며 거실로 들어갔다. 비서는 비명을 질렀다. 회장은 침실에 있다가 비서의 비명을 듣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침실에는 젊은 여자가 벌거벗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대체...' 회장은 허리 아래에 큰 수건을 두르고,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는 침실에서 거실로 나오다 세 남자를 발견했고, 그 자리에 멈췄다. '뭐야, 당신들!' 회장이 소리질렀다. 비서는 문에 맞고 넘어지면서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를 봐서인지, 아니면 정말 아파서인지 비서는 회장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때, 비서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가 주먹으로 비서의 얼굴을 강타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비서는 소리를 질렀지만 곧 멈췄다. 소리를 지르면 계속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서의 얼굴은 뭉개지고 피로 범벅이 되었다. 코뼈가 부러졌고, 이빨이 몇 개 부러져 입에서 튀어 나왔다. 눈두덩도 부어올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비서의 꼴을 보면서 회장은 선뜻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중절모가 턱으로 회장에게 소파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회장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소파에 가서 앉았다. 회장 맞은편에 중절모가 앉았고, 두 남자는 팔짱을 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놀라게 해드려서 미안합니다.' 중절모가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짙은 선그라스 뒤쪽에 있어 어떤 표정인지 회장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중절모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것으로 보아 그가 희미하게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이해하면, 우리도 조용히 사라지겠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이상한 짓을 하면, 그때는 회장님은 물론, 이 호텔 전체의 손님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지하주차장에 폭탄을 장착한 차가 있으니까요.' 중절모는 나즈막히 이야기했고, 놀라운 말이었지만 회장은 믿지 않았다. 저런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공갈협박이나 하는 놈들은 모두 사기꾼 개자식들 뿐이라는 것을 회장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믿지 않으실테고, 설령 호텔이 다 폭발해도 회장님만 살아 있으면 아무 문제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중절모는 회장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여전히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저희도 회장님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 점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대체 용건이 뭐요...' 회장은 이 남자들이 정부에서 온 사람들인지, 강도들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전화하셔서, 5만원짜리 현금으로 50억원을 가방에 넣어 호텔 현관 앞에 있는 검은색 베엠베 트렁크에 넣으라고 하세요. 저희 용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지만, 당장 50억원을 어떻게...' 회장은 일단 버텨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회장의 눈에서 별이 번쩍거렸다. 중절모가 회장의 따귀를 힘껏 때린 것이다. 회장의 왼쪽 뺨이 시뻘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회장은 아픈 것보다 치욕스러웠다. 평생 누구에게 단 한 번도 손찌검을 당한 적이 없는 귀한 몸으로 자란 자신이었다. 누구나 자기 앞에서는 벌벌 떨며, 허리를 굽히고,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 정치가들도 권력을 앞세워 큰소리를 쳐도 뒤에서는 자기에게 굽신거리고,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돈은 권력보다 더 힘이 강하다는 것을 회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황제같은 자신이 범죄자들에게 뺨을 맞았다는 것이 원통하고 참혹한 기분이었다. '자, 지금부터 1분 안에 우리가 바라는대로 되지 않으면, 그때는 조금 더 짜릿한 맛을 보게 될 겁니다.' 중절모는 여전히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눈빛은 서리처럼 차가울 것이라고 회장은 생각하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호텔 재정 담당은 전화를 받았고, 금고에서 현금으로 50억원을 꺼내, 가방 두 개에 나눠 담아 호텔 앞에 서 있는 BMW 트렁크에 실었다. 재정 담당은 회장의 전화가 낯설지도 않았고, 이렇게 현금을 싣고 나가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중절모가 전화를 받았다. 로비에서 기다리던 또 한 명의 남자가 일이 무사히 진행되었음을 알렸다. 중절모는 전화를 끊고, 회장을 바라보았다. '잘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저희가 직접 오지 않고 전화를 드릴테니, 그때도 지금처럼 똑같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시간 이후에 경찰에게 전화를 하거나, 잘 아는 국회의원이나 정보부 따까리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도 아까웠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모욕한 이 범죄자를 꼭 잡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 중절모는 일어서 문 쪽으로 걸어가다 발을 멈추고 회장을 돌아보았다. '아, 회장님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후작이었죠. 그때 일본으로부터 돈을 꽤 많이 하사받았고, 땅이며, 건물이며 각종 예술품까지, 고대광실에서 떵떵거리고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말을 마친 중절모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모자를 살짝 들어올리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회장은 떨리는 다리를 끌고 중절모가 떨어뜨린 종이를 집으러 갔다. 그 종이를 본 회장은 바닥에 철썩 주저 앉았다. 그 종이는 회장의 손자와 손녀들 사진이었다.
    • 칼럼
    • 백건우
    2021-07-30
  • 매실액은 설탕물, 매실씨는 독극물?
    매실액은 설탕물, 매실씨는 독극물? 아침에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보다, 어떤 페친이 링크한 글을 봤다. 그 페친은 그 글을 근거로, 자신이 평소 생각했던 '매실액은 설탕물'이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뭔가 석연치 않은 듯 해서 찾아보았다. 페친이 링크한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한기호라는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이었는데, 그 글의 시작은 '어느 분이 다음의 사실을 알려주셨다'로 시작한다. 즉,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들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사실인지, 과학적 근거와 증거가 있는 글인지에 대해서는 한기호 역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게다가 '누군가에게 들었다'라고 말을 하면서 본문에서는 '이계호 교수'라는 이름이 계속 나왔다. 구글 검색을 해보니 이계호 교수는 충남대 화학과 교수이고, 그가 운영하는 '태초먹거리 학교'라는 건강과 관련한 사업을 하고 있었으며, 한기호가 쓴 글의 내용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아래 링크 참조) http://www.kunkang.co.kr/q/home/sub1.php… 이 내용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바로 매실액이 설탕물이며, 매실씨에서 독이 나온다는 주장이었다. 대학교수, 그것도 화학과 교수가 하는 말이니 그 말이 옳다고 믿을 수는 있다.하지만, 그 내용을 무조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지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 아닐까.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왜 그럴까? 저 말이 과연 사실일까? 반대 되는 이론은 없을까?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우선, 다른 내용은 차치하고 매실액과 관련한 내용만 살펴보자. 이계호 교수는 매실액이 50%의 설탕과 50%의 매실로 담그기 때문에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설탕물'이라고 말한다. 또한 매실씨에서는 청산가리와 같은 독이 나온다고 말한다. 일정부분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실과 설탕이 50%씩 만나서 발효를 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이계호 교수가 무식해서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것일까? 매실씨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매실과 설탕이 만나 발효를 하는 화학반응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다당에서 단당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이계호 교수도 '다당'의 문제점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다당을 모를 리 없다. 화학과 교수아닌가.설탕이 건강에 나쁘다고 하는 것은, 설탕이 다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탕과 매실이 섞여 발효를 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이때 시간은 3년 이상을 말한다-다당 성분이 단당화되면서 처음 투입했던 '설탕'은 화학적으로 사라지게 된다.매실씨에 있다는 독 역시, 매실과 설탕의 화학적 변화와 함께 삼투압 현상으로 인해 매실액이 초기에는 내부에 있던 매실액이 밖으로 나오고(매실이 쪼그라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역시 3년 이상이다-밖으로 나와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 매실액은 다시 매실의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역삼투압이다.이 과정에서 매실씨에 있다는 독은 자연스럽게 중화된다. 게다가 매실씨에 있는 독으로 죽으려면, 먼저 매실을 배가 터지게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리하자면, 매실발효액을 담을 때, 통상 100일이 아니라, 3년 이상을 발효, 숙성해야 한다고 내가 늘 주장한 것처럼, 일정한 시간 이상이 필요하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출판마케팅이나 하는 한기호 같은 사람이 '누군가에게서 들은' 별로 근거도 없고, 자신 조차도 모르는 주장을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퍼나른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는 지식인이 아니었나? 그런 글만 보면 상당히 무식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는 사람, 자기의 주관적 판단과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함부로 떠는 것을 보면,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는 인터넷이 때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 발효액, 효소, 청, 액기스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오류들 때문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용어정리를 자청하고 나섰다.사람들은, 별 다른 생각없이 남들이 쓰는 단어를 따라 쓰는 경향이 있다.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강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늘은 발효와 관련된 용어 가운데, 우리가 가장 많이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들을 골라서 알아보겠다.요즘 매실 발효액을 많이 담는 시절이다. 매실 뿐 아니라 어떤 것이든 발효액으로 담글 수 있는데,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식품이 매실이니, 매실을 예로 들어 잘못된 용어를 정리한다.매실청 : 이 단어는 어디에도 없는, 이상한 조합의 단어이다. 국립국어원의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정확하게 이 용어를 쓰려면 '매실조청'으로 써야 한다. '조청'이란, <엿 따위를 고는 과정에서 묽게 고아서 굳지 않은 엿.¶ 떡을 조청에 찍어 먹다/조청을 묻혀 강정을 만들다/초여는 목이 타는지 행랑채로 이어진 설렁줄을 당겨 조청에 미숫가루를 타 내오게 하여 놋대접이 넘치게 들이켜기도 했다.≪이문구, 오자룡≫> 처럼, 꿀과 비슷한 점액질의 액체와 고체 중간 정도를 말한다.사람들은 '매실청'을 '매실액' 또는 '매실발효액'과 같은 용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조청'은 한문으로 '造淸'으로 쓴다. 따라서 '매실청'이라고 할 때의 '청'은 조청의 '청'에서 온 것이다.매실액기스 : '액기스'는 '진액'으로 바꿔 말하거나 표기하는 것이 좋다. 즉 '매실진액'으로 말하면 알아듣기도 쉽고, 어느 정도 올바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적확한' 표현은 아니다.매실효소 : 이 단어도 많이 쓰고 있는데, 가장 잘못 쓰는 단어이기도 하다. '효소'의 본디 뜻을 모르는 사람이 일본에서 건너온 '효소'라는 단어를 '발효액'에다 붙여 쓰는 바람에 오히려 혼동이 심해졌다. '효소'는 모든 생물의 세포 안에 들어 있는 촉매제를 말한다. 외부에서 효소를 마시거나 주입한다고 해서, 그 효소가 우리몸에 작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효소'는 매우 한정된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므로, 만일 누가 '매실효소' 어쩌구 하면서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100% 사기꾼이거나 거짓말장이거나 무식한 자라고 할 수 있다.매실발효액 : 지금으로는, 이 단어가 가장 정확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매실 뿐 아니라, 미생물이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발효를 통해 살아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생명체는 그 개체 하나하나가 거대한 발효공장이며, 발효는 미생물이 유기화합물을 분해하여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매실의 경우, 매실과 설탕이 섞이면서 매실 속에 있는 미생물이 설탕을 먹이로 삼아 유기화학적 반응을 일으키고, 설탕물이 매실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삼투압 현상을 통해 매실이 갖고 있던 진액을 끌어내어 매실의 효능이 담긴 물을 마시게 되는 것이다.매실 뿐 아니라, 흔히 '산야초효소'라고 하는 것도 완전히 잘못된 표현인데, '효소'는 모두 '발효액'으로 바꿔 부르고, 표기해야 한다. 인터넷이 정보를 빠르고 널리 알리는 도구지만, 잘못된 정보까지도 빠르게 확산시키는 부작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 대부분은 엉터리 이론으로 혹세무민하는 경우가 많고, 올바른 이론을 모르는 대중들은 이런 자칭 전문가에게 미혹되어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다.우선, 용어부터 정확하게 알고, 모든 발효의 근본 원리를 되묻는 것에서 발효의 올바른 공부는 시작될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조차문(弔車文)-쏘렌토
    조차문 - 쏘렌토를 추모(追慕)하며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양평(陽平) 사는 모씨(某氏)는 두어자 글로써 차자(車者)에게 고(告)하노니, 인간 남녀(人間男女)의 발을 대신해 종요로운 것이 차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한 바이로다. 이 차는 여러 종류의 차들 가운데 SUV라는 물건(物件)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많은 곳을 두루 다닌지 우금(于今) 십 여 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心身)을 겨우 진정(鎭定)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너를 처음 만난 것이 2003년 11월 25일,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구나. 수서역 앞에 있던 회사 건물 앞에서 너를 처음 만났지. 너를 운전하며 시골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이 생생하구나. 그때 우리는 도시의 아파트에서 시골로 이주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너보다 한참 형님인 프로엑센트가 아픈 몸을 이끌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때였지. 너는 튼튼하고 강한 힘으로 우리의 새로운 식구가 되어 우리 가족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지. 네가 우리집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엑센트는 명을 다하고 세상을 떴구나. 너는 한 해에 3만km 이상을 달리면서, 회사와 집, 전국의 여러 곳을 두루 다녔다. 충청도 아산의 조부모님 묘소는 한 해 두 번 이상 정기적으로 다녔고, 천안, 아산 등에 사시는 고모님을 정기적으로 찾아뵈었고,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제주도의 곳곳을 두루 다니며 아름다운 경치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구나. 너는 튼튼하고 힘이 세서 물건도 많이 싣고 다니고, 네 바퀴를 동시에 굴리는 능력이 있어 눈길에도, 얼음판에도, 경사가 가파른 산길에도 씩씩하게 다닐 수 있어서 믿음직했다. 너는 멀리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우리와 함께 다녔고, 멀고 가까운 길을 늘 함께 다녔지. 우리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중요한 시기를 함께 보냈다. 하지만, 세월의 무서움을 비껴갈 수 없어, 지난 2015년 8월, 너는 인천공항 가는 고속도로에서 바퀴축이 부러지는 큰 사고가 나고 말았다. 그동안 험한 길도 많이 다니다보니 차 밑부분이 많이 삭은 것을 미쳐 발견하지 못했구나. 그동안 때가 되면 엔진오일도 정기적으로 갈아주고, 각종 소모품도 정품으로 갈아주면서 너를 잘 보살피려 노력했지만, 너의 밑바닥 부분을 소홀히 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안타깝고 애처롭다. 너와 함께 한 지 이미 12년이 지났고, 38만km를 달렸으니, 그동안 함께 했던 애틋한 정이 있으니 아깝다 쏘렌토여, 어여쁘다 쏘렌토여, 너는 미묘(微妙)한 품질(品質)과 특별(特別)한 재치(才致)를 가졌으니, 자동차 중(中)의 명물(名物)이요, 철중(鐵中)의 쟁쟁(錚錚)이라. 민첩(敏捷)하고 날래기는 백대(百代)의 협객(俠客)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萬古)의 충절(忠節)이라. 추호(秋毫) 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두렷한 귀는 소리를 듣는 듯한지라. 그 민첩하고 신기(神奇)함은 귀신(鬼神)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이 미칠 바리요. 무죄(無罪)한 너를 보내려니,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누를 한(恨)하며 누를 원(怨)하리요. 능란(能爛)한 성품(性品)과 공교(工巧)한 재질을 나의 힘으로 어찌 다시 바라리요. 절묘(絶妙)한 의형(儀形)은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稟才)는 심회(心懷)가 삭막(索莫)하다. 네 비록 물건(物件)이나 무심(無心)ㅎ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平生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년고락(百年苦樂)과 일시 생사(一時生死)를 한 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쏘렌토여.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조차문(弔車文)
    조차문(弔車文) - 프로엑센트를 추모(追慕)하며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양평(陽平) 사는 모씨(某氏)는 두어자 글로써 차자(車者)에게 고(告)하노니, 인간 남녀(人間男女)의 발을 대신해 종요로운 것이 차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한 바이로다. 이 차는 여러 종류의 차들 가운데 작은 물건(物件)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많은 곳을 두루 다닌지 우금(于今) 십 여 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心身)을 겨우 진정(鎭定)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이십여 년 전(年前)에 지금의 아내가 나와 결혼하기 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최초로 구입한 차였으니, 그 인연이 또한 남다르다. 백색의 날렵한 몸체에 반짝이는 두 눈과 탐스러운 엉덩이를 한 귀엽고 예쁜 너를 처음 봤을 때가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았구나. 결혼 전, 저 멀리 오서산을 다녀오는 여행길에서 아내, 아니 그때는 멋쟁이 아가씨였던 그녀와 단 둘이 앉아 고속도로를 달리던 기억이 아직도 삼삼하구나. 나는 운전면허를 취득한 다음, 아내의 도움으로 너를 운전하며 초보운전 시절을 보냈고, 우리가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갈 때에도 너를 운전하며 대관령 고개를 넘었던 기억이 어제 같구나. 그때 처음으로 다른 차가 너에게 달려들어 너는 왼쪽 눈이 튀어나오는 중상을 입었더랬지. 생전 처음 당하는 교통사고로 우리도 몹시 당황하고, 너 또한 그 아픔과 충격으로 한동안 몸살을 앓았지. 하얗고 깨끗한 너의 몸은 늘 단정해서 어디에 있어도 귀엽고 단아했단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눈비를 맞기도 했고, 날마다 막히는 출퇴근 고속도로에서 차가 너무 막혀 스트레스를 받아 우리가 다투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지. 임신한 아내를 태우고 열 달을 무사히 출퇴근한 다음, 아이를 낳으러 산부인과에 갈 때도 너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였다.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강화도로, 강원도로 여행을 다닐 때는 뒷좌석에 아기 시트를 매고 아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차 안에서 보냈구나. 그 아이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너는 이제 세상에 없어도, 사진 속에 남은 너와 아기의 모습은 언제나 애틋하고 행복해 보인단다. 연애와 결혼, 신혼여행, 임신과 출산, 갓난아이, 그렇게 우리가 한 가정을 꾸리고, 가족이 늘어나고, 어머니와 함께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갈 때, 너는 항상 우리와 함께 했던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우리는 늘 너를 대견하고 고맙게 생각했단다. 신혼여행 때 불의의 사고를 당한 일 말고는 사고 한 번 없이 무사히 십여 년을 함께 다녔고, 우리가 도시의 아파트에서 시골의 작은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도 한동안 함께 있었지. 그러다 2003년 11월, 새로운 차를 집에 들이게 되었고, 그 뒤로 너는 조금씩 아픈 몸 때문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구나.결국 2005년, 친척에게 잠시 양도를 했으나, 머지 않아 너의 생명이 다하니, 그렇게 무심하게 너를 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무죄(無罪)한 너를 폐차하게 되니,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누를 한(恨)하며 누를 원(怨)하리요. 능란(能爛)한 성품(性品)과 공교(工巧)한 재질을 나의 힘으로 어찌 다시 바라리요. 절묘(絶妙)한 의형(儀形)은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稟才)는 심회(心懷)가 삭막(索莫)하다. 네 비록 물건(物件)이나 무심(無心)ㅎ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平生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년고락(百年苦樂)과 일시 생사(一時生死)를 한 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프로액센트여.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천규석을 읽는다
    천규석을 읽는다 천규석은 농부다. 우리나라에 이제 약 300만 명도 안 되는, 인구의 6%에 불과한 ‘농부’ 가운데 한 명이다. 한국의 농부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고, 가장 노령화된 집단이기도 하다. 농가 인구의 고령화는 31.8%로 우리나라 평균인 11.3%에 비하면 무려 세 배가 높다. 천규석은 늙은 농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급진적이며 단호하고 날카롭다. 그의 주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몽상가’, ‘비현실주의자’, ‘정신나간 늙은이’로 매도한다. 천규석의 선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도 그를 ‘이상주의자’라고 부르는 데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천규석은 비타협적이며 논쟁적인 인물이다. 천규석은 오래 전부터 한국의 농업이 살 길에 대해 부르짖었지만, 그것은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은 줄어들고, 늙었으며,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농업이 살아남기 위해 기업농, 대규모 영농 복합단지, 단위 면적 당 생산을 늘리기 위한 화학비료와 농약의 사용, 단일 작물의 대량 생산, 공장 방식의 작물 재배, 유전자 변형 등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변해가는 것에 대해 천규석은 격렬하게 반대한다. 천규석의 급진적이고 격렬한 주장을 뒤집어 생각하면, 반자본, 반경쟁, 반도시, 반물질주의다.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자본주의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전복적인 주장이며, 자본주의를 극복해야만 가능한 또 다른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천규석의 주장은 자본주의에서 태어난 노동운동의 한계조차도 뛰어넘는 급진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편협하고 근시안적인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에 대한 강력한 질타이기도 하다. 6%의 사람들에게도 읽히지 않는 천규석의 주장이 왜 옳으며, 지금 우리가 천규석을 읽지 않으면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게 될 지를 그의 저작을 통해 알아보자. 천규석은 현재 일곱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땅덩이와 밥상 [창작과비평] 땅 사랑 당신 사랑 [명경]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실천문학] 쌀과 민주주의 [녹색평론]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실천문학] 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리도 못 가 발병 난다 [실천문학] 윤리적 소비 [실천문학] 천규석은 일관되게 한국의 농업을 비판한다. 그것은 잘못된 정부의 정책일 때도 있고, 농사를 짓는 농민들일 때도 있다. 현재 한국의 농업은 법, 제도, 정책, 행정, 농사 기술, 농사를 짓는 농민의 생각 등 모든 면에서 잘못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알만한 사람들은 한국의 농업이 피폐해지는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고 있다. 한국 농업은 구조적인 문제이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부분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농업과 농민을 희생시키며 추진된 ‘근대화’라는 것은 천규석의 주장대로 전면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비판만 한다면, 많은 학자들이 하듯 그도 한 명의 비판적 이론가에 머물 뿐이다. 하지만 천규석은 대학을 마치고 고향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는 명망가도 아니고, 활동가도 아니며, 지식인연 하지도 않는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한국의 농업과 농민의 삶과, 농사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체제와 정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시작했다. 그의 말은 곧 그의 삶이며, 그의 몸짓은 곧 그의 언어이다.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에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농사와 농민을 가까이 하게 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시골에서 살며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농민들은 소위 ‘관행농’이라는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70년대 이후 농기계의 도입,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면서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을 경험한 농민들은 당연하게 화학비료를 논밭에 퍼붓고, 제초제와 농약을 살포하는 것이 농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양평 지역은 그나마 농약과 비료를 쏟아 붓는 관행농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 곳임에도 유기농 인증을 받지 않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유기농 인증은 각종 농약 사용을 3년 이상 사용하지 않은 땅의 토질을 검사해 합격해야만 받을 수 있는데, 여기에도 여전히 문제는 있다. 유기농 인증을 받은 농가에는 혜택이 많이 돌아가므로 군청과 농업기술센터에서는 농민에게 유기농 인증을 받으라고 권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농민은 자신들이 먹는 농산물에는 농약을 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농약을 치더라도 최소한으로 줄인다. 따로 유기농 인증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급형 농사를 짓는 소농의 경우, 한 해 먹고 남은 농산물을 알음알음으로 팔아 가용으로 쓰는데, 이들에게 유기농이란 의미가 없다. 쌀농사는 우렁이 농법(이 농법에 대해서도 천규석은 날카롭게 지적한다)으로 하고, 밭농사는 주로 고추, 마늘, 깨, 콩 등인데, 농약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고추의 경우는 농약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소출을 위해 몇 차례의 농약을 뿌리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쉽게 ‘유기농’을 말하지만, 천규석의 기준으로 볼 때 한국에서의 ‘유기농’은 대부분 거짓이다. ‘유기농’을 한다면서 비닐하우스에서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은 오직 천규석 뿐이다. 어느 지역을 가 봐도 유기농을 한다면서 비닐하우스에서 밭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지역 또한 마찬가지다. 심지어 유기농을 몇 십 년째 하고 있는 농민도 비닐하우스에서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밭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매도하긴 어려운 부분이 있다. 농사지을 땅이 좁아서 단위 당 소출을 많이 생산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수도 있고, 특수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변명들이 모두 구차하게 들리는 것은, 천규석의 말이 옳기 때문이다. 지금 도시에 공급되고 있는 채소는 농약과 복합비료 범벅이다. 특히 비닐하우스에서 짓는 작물은 그 안에 닭똥, 복합비료, 농약투성이며, 비닐하우스 내부에서 채소와 농민 모두 농약에 중독된 상태라고 고발한다. 천규석은 한국 농업과 관련한 모든 부문을 두드린다. 농사를 짓기 위해 가장 핵심이 되는 씨앗의 출처는 다국적 곡물자본인 카길, AMD, 루이 드뢰피스, 몬샌토 등에 종속되어 있고, 모든 동물의 사료와 식품의 주원료인 옥수수 역시 곡물자본을 통해 수입 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다. 수입 사료를 먹은 소, 돼지, 닭의 분뇨로 비료를 만들어 그것을 밭에 뿌리고, 수입한 씨앗으로 식물을 키워 먹는 상황을 많은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식량 자급율이 겨우 26%에 불과하고, 그나마 쌀을 제외하면 겨우 2.5%의 먹거리 자급률이니, 이것은 한 나라의 농업이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인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정부는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기조로 값싼 노동력의 수급을 위해 구조적 이농(離農)을 유도했다. 농산물 가격의 통제를 통해 도시 노동자의 저임금 구조를 고착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라는 현재에도 농업의 자본과 도시에 의해 수탈, 착취당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기업농, 대농 위주의 농업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우루과이라운드, WTO, FTA 체제에서 산업경쟁력 위주의 정책을 일관하고 있으며, 농업의 피해와 포기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한국 농업의 총체적 문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농사의 기초가 되는 씨앗, 비료, 농약, 퇴비 등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강요된 농산물 가격의 낮은 가격은 농사를 기계화, 개별화 노동으로 전락시켰다. 70년대부터 시작된 비료, 농약에 의존하는 화학농업이 농사를 망치고 있다. 여러 단계를 거치는 농산물의 유통 경로는 농민을 착취하는 구조다. 현재의 농협은 농민을 이용해 돈을 버는 금융기관이자 유통회사일 뿐이다. 정부는 농토의 비율을 계속 줄이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농지를 쉽게 매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농민이 농산물 가공업을 쉽게 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농민은 농협을 통해 농사빚을 지고 헤어날 길이 없는데, 이는 구조적인 문제다. 외국 농산물의 수입으로 쌀과 농산물 가격의 폭락은 노동자의 저임금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농촌문화와 생산문화의 파괴주범은 도시의 상업주의적 소비문화와 제국주의적 속성 때문이다. 식량(먹거리)을 수입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발상은 민족과 국가의 존립을 포기하는 것이다.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 노동력의 공급원이 되는 농산물 저가격 구조,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는 제도를 타파해야 한다. 한국의 대표 자본가 모임인 전경련의 한 자본가는 한국의 모든 농업을 폐지하고 그 땅에 반도체 공장을 지어 수출하고 쌀은 수입해서 먹고 살자는 말을 했다. 자본가에게 농업은 쓸데없이 땅이나 차지하고 있는 애물단지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농업은 한 나라를 유지하는 근본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문화와 예술의 탄생지이며, 생태계를 유지하고, 중금속 오염과 수질 오염 등을 정화하는 자연치유 능력까지 갖춘 생명 공생 과정이다. 천규석은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 ‘진정한 노동해방도 도시와 공장 안에서 노동자가 자본가나 경영자와 평등해지는 것이 아니고, 지속 불가능한 이 공업산업사회를 해체하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촌공동체를 다시 만들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노동운동의 목표이자 진보 운동의 목적이기도 한 자본주의 해체와 그 대안 사회의 구현을 뛰어넘어 ‘인간 해방’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규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를 ‘순진한 몽상가’라거나 ‘현실을 모르는 낭만주의자’라거나 ‘이상주의자’라는 딱지를 쉽게 붙인다. 천규석이 주장하는 사회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내용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천규석은 일관된 주장을 펼쳐 왔다. 비료, 농약, 제초제로 망가지는 땅은 화학농, 유기농을 넘어 생명공동체 농업으로 이행해야 한다. 노동자에게 생활공동체, 조합운동을 확대하자. 계절식, 완전식, 조화식, 소식의 자연건강식과 생명공동체가 대안이다. 이웃공동체와 공동체 생활양식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증산을 위해 비료, 농약의 과다 사용이 문제이며, 식량이 부족하면 공동체로 나누는 지혜가 필요하다. 유기농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농민 자신의 생산축소, 도시인의 소비축소, 모든 사람의 욕망축소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유기농공동체 운동은 인간이 욕망축소에 기초한 자급자족적, 공동체적, 지속적인 삶 운동이며, 공생적인 농업문화의 주체성과 자존심의 부활 운동이다. 천규석은 여러 사람과 함께 만든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 공동체’의 발기문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1) 모든 생명은 유기적 연관 속에서 더불어 무한하게 공생한다. 2) 비료 농약 생활하수 공장폐수 대기오염과 산성비, 오존층 파괴, 지구 온실화 등의 복합오염에 죽어가는 땅을 살린다. 3) 무농약 저공해 계절농산물의 직거래를 원칙으로 한다. 4) 농촌과 도시가 함께 사는 삶이다. 5)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6) 한살림 농사는 이웃 농민과 두레로 지어야 한다. 7) 돈많은 사람의 개인건강식을 위한 유통업소가 아니다. 8) 한살림 물품은 가격이 아닌, 생명가치로 따진다. 9) 물품 이용은 5세대 이상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 봉사자를 통해 공동구매한다. 10) 이웃과 대화를 통한 자기변화를 거듭해야 한다. 11) 자원을 절약하고 재생 순환시키는 구체적 생활실천을 한다. 12) 쓰레기 없는 세상을 지향한다. 13) 스스로 공생을 실천하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린 세계이다. 14) 이웃 생명을 위한 자율적 봉사와 희생을 도모한다. 15) 생명의 유일한 도리이자 의무이다. 16) 민족주체의 밥상공동체다. ‘한살림 공동체’를 위한 내용이지만, 천규석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잘 정리한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천규석은 농사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내용도 있다. 미래의 공동체 농장을 운영하기 위한 실천적 원칙들인데, 아래와 같다. 1) 자연적으로 생산되는 재료로 농장을 유지(자연농법) 2) 동물을 키워 퇴비를 자력으로 생산 3) 가축은 그 농장에서 나오는 식물로 사육 4) 재배되는 식물의 다양화(공생농법) 5) 유기물질의 순환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6) 토지 내의 규소의 순환을 강화 7) 토양, 동물, 식물의 균형적 상태를 유지 8) 파괴된 환경이 복구되어야 한다 9) 잡초와 해충을 제거하기 위해 윤작을 한다 10) 풍토 기후에 맞는 적지 계절농을 해야 한다 이와 함께, 공동체 농장을 유지하는 철학적 원칙도 제시했다. 1) 너무 많은 시간 육체적 노동에 혹사당하지 말라 2) 농장을 위해 외부로부터 구입하는 물품을 최대한으로 줄이라 3) 농업을 돈이 아닌 정신적인 면을 더 중시하는 독창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을 하라 이와 같은 원칙들은 천규석이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기준이다. 천규석은 ‘소농’, ‘가족농’, ‘소규모 공동체’, ‘자급자족형 공동체’, ‘두레농’, ‘공생농두레’ ‘지역자급자치공동체’ 등 비슷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천규석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분명한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 소농을 확대한다. 소농 한 가구는 도시의 스무 가구와 농산물을 직거래 한다. * 소농은 두레로 확대한다. 두레의 다섯 가구는 공동생산과 함께 도시의 이백 가구와 농산물을 직거래 한다. * 농사는 완벽한 순환농으로 한다. 퇴비도 자체 생산, 쓰레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 모든 학교(유치원부터 대학까지)와 학교급식을 농가(농두레)와 직거래 한다. * 노동조합이 있는 곳부터 공장, 기업의 식당에 농가(농두레)와 직거래 한다. * 도시에서 귀농하는 젊은이들을 농두레에서 흡수해 농사를 가르친 후 함께 농두레에 참여하거나 독립 소농으로 자립한다. * 도시의 조직-노동조합, 시민단체, 동호회, 회사원(들), 향우회, 동창회, 아파트 부녀회, 주민단체 등-은 농촌에 있는 땅을 매입해 그 지역의 농두레에 농사를 맡긴다. * 농두레에서 지은 농산물은 위에서 말한 도시의 조직에서 직거래로 공동구매한다. * 농산물 가공 역시 농민이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 여기서 천규석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에너지 자급과 관련해 필자가 자급자족공동체 공부를 하면서 나름대로 준비한 것이 ‘태양광 발전’, ‘지열 발전’, ‘풍력 발전’이었다. 기존의 화석연료의 반생태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그마져도 곧 고갈될 날이 머지않았으니 당연히 자연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천규석은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자급자치공동체’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 체제 옹호자들은 수출을 해서 먹고 사는 현재의 상황을 모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말할 것이다. 천규석의 주장대로라면 백 년 전 사회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진보며, 인간다운 삶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 대부분도 미래의 전망에서 ‘농업’을 배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는 농업의 미래를 바탕에 놓지 않고 대안 사회를 말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또다른 연속이며, 모래성 위에 쌓는 건물과 같다. 천규석은 지금과 같은 국가간 무역이나 심지어 공정무역이라고 불리는 중개무역 조차도 ‘국제분업에 의한 비자급적 시장 수탈을 공정무역의 이름을 빌려 옛 식민지 땅에서 현재와 미래까지도 계속 연장 확대하려는 신식민지주의의 논리일 뿐’이라고 말한다. 물론, 천규석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는 많다. 현재의 강고한 자본주의 구조를 극소수의 공동체 운동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회의와, 외국과의 무역을 줄여간다 해도 국민 모두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역량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며, 삶의 질은 담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우리가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국가 단위의 자급자족 모델은 쿠바다. 쿠바는 미국의 무역제재로 인해 스스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결과 식량자급률 95%를 이루며 자급자족의 사회를 만들었다. 그것도 화학농이 아닌 소농 위주의 유기농으로. 하지만 우리는 분단 상황이고,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의 힘에 의해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못 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쿠바와 엄연히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고, 안타깝게도 그 조건이 몹시 불리하고 열악한 상황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천규석을 읽어야 하고, 천규석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미래의 패러다임이 너무도 분명하게 ‘농업’으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21세기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에너지와 식량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파괴로 인한 피해만으로도 과학기술을 부르짖는 자들의 말로가 어떤가를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고층빌딩, 첨단 가전제품, 자동차, 비행기, 인터넷, 텔레비전, 냉장고, 대형매장 등 생활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재에 비해 천규석의 공동체는 분명 낯설고 힘든 세상이다. 물자는 흔하지 않고, 마트에도 상품은 넘쳐나지 않을 것이며, 도시는 축소되고, 도시의 온갖 소비적 상업은 거의 사라질 것이다.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의 욕망과 소비,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사라지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새로운 공동체 문화가 탄생할 것이다.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발적 노동을 하고, 자신과 공동체를 위한 봉사와 자기 수련, 학습과 취미 생활이 늘어나고, 경쟁이 사라진 공간에는 협동과 화합의 문화, 예술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도 민중들의 자발적 공동체는 ‘두레’로 나타났고, 작은 공동체와 마을 단위의 두레는 자급자치를 바탕으로 다른 공동체와 다른 마을과 연대하면서 지역문화를 꽃피웠다. 역사는 달라도 인간의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경쟁이 아닌 공동체이며, 두레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바탕으로 강고하게 번창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체제의 한계가 뚜렷이 보이듯, 그 종말도 머지않았음을 천규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 천규석의 ‘공생농두레’는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철저한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노동에서 해방되는 길,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 인간으로 독립해 스스로 먹거리와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자급자립공동체를 꿈꾸는 것만으로도 희망의 빛을 발견하는 것이고, 대안 사회를 꿈꾸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불온하다면 천규석은 불온하다. 그 불온함은 자본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두려움의 표현이고, 무지와 이기심에서 나오는 불안함의 표현이다. 자신이 가진 알량한 기득권이나 약간의 물질적 자산을 잃는 것이 불안하고 두려워서 ‘진정한 진보’로 나아가지 못하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사람들이 많은 것 또한 현실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얻는 교훈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 같아도 이미 그 수명은 다 해가고 있고, 지구의 한정된 자원을 수탈한 결과 번성할 것만 같던 자본주의 체제는 곧 정점을 지나 추락하게 되고, 대안 사회가 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때 천규석은 모두가 다함께 사는 사회, 인간 뿐 아니라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아니,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대안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면 천규석은 비현실적 인간이다.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걷고, 아무도 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두 가지로 부른다. 멍청한 사람이거나 선지자거나. 천규석은 멍청한 사람일까, 선지자일까. 우리 사회에서 노구의 몸으로 홀로 ‘자급자족두레공동체’를 외치는 사람은 천규석 뿐이다. 그의 목소리는 작지만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와 같고, 폭풍우를 몰고 오는 한 점 구름 같은 존재다. 그가 이 땅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참고문헌 이 땅덩이와 밥상, 천규석, [창작과비평] 땅 사랑 당신 사랑, 천규석, [명경]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천규석, [실천문학] 쌀과 민주주의, 천규석, [녹색평론]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천규석, [실천문학] 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리도 못 가 발병 난다, 천규석, [실천문학] 윤리적 소비, 천규석, [실천문학] 녹색평론 농민신문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애플은 삼성과 다를까?
    애플은 삼성과 다를까? 지난 10월 말, 경향신문에 삼성과 애플의 3분기 실적 발표가 있었다. 삼성은 매출액이 52조 1800억원, 영업이익이 8조 1200억원이었고, 애플은 매출액이 39조 4500억원, 영업이익이 12조원이라고 했다. 영업이익에서 온갖 경비를 빼야 순이익이 나오므로, 이 돈이 다 삼성이나 애플의 주머니로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한 분기(3개월)에 저 정도의 돈을 벌었다는 건 어떻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삼성은 여전히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반노동자’ 기업이다.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노동자의 권리, 노동자의 인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삼성반도체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죽어나가고 있어도 삼성은 물론, 이 사회도 무신경하기만 하다. 그리고 애플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세계 곳곳에 있는데, 얼마 전, 애플 제품을 생산하는 중국의 ‘폭스콘’이라는 회사에서 어린이 노동과 장시간 노동이 문제가 되었다. 삼성은 우리나라 기업이고, 삼성의 변화에 따라 우리나라의 경제는 물론, 정치까지 흔들릴 정도다. 심지어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우리들 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재벌 기업인 것이다. 반면 애플은 미국 기업이다. 얼마 전, 스티브 잡스가 병으로 사망하자, 세계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를 추모했다. 나 역시 스티브 잡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만일 삼성 이건희 회장이 사망했다면, 내가 스티브 잡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듯, 그렇게 추모했을까? 여기서, 많은 사람은 이율배반의 태도를 갖게 된다. 애플은 기업이고, 기업은 ‘이윤’을 발생시키기 위해 노동자를 착취한다. ‘착취’라는 말이 잔인한 단어 같지만, ‘착취’라는 말 외에는 어떤 단어로도 기업의 생존을 설명할 수 없다. 스티브 잡스는 자본가였을까? 이건희 회장이 자본가라는 말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고 동의하겠지만, 스티브 잡스는 자본가? 경영자(CEO)? 과연 정체가 뭘까? 왜 우리는 자본가는 비난하고, 한 회사를 이끌며, 회사의 이윤을 극대화 한 스티브 잡스는 비난하지 않는 걸까? 한 가지 질문. 선량한 자본가는 정말 존재할까? ‘선량한 자본가’라는 문장은 ‘선량한 살인자’와 같은 뜻으로, ‘말이 되지 않는 문장(비문)’이다. 자본가 개인의 성향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자본가의 속성 때문이다.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지 않으면 존재할 의미도, 이유도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이고 본질이다. 기업들끼리 경쟁을 하는 것도,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적당히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경쟁의 논리’ 즉, 자본의 논리가 학교 교육은 물론, 사회 곳곳에 모두 적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다. 학교에서 성적으로 경쟁하고, 개인은 개인끼리, 조직은 조직끼리, 기업은 기업끼리 치열하게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논리로 노동자들은 피땀을 흘리며 쥐어 짜이고 있다. 노동시간은 길어지고, 컨베이어 벨트는 더 빨리 돌아가고, 노동자 숫자는 줄이고, 임금은 줄어드는 현상이 왜 생길까? 그것도 경쟁 때문이다. 노동자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먹고 살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결국 노동자들도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 하고, 노동시장에는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자본가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요구해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스티브 잡스가 ‘자본가’가 아닌 ‘혁신적 리더’라고도 한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연봉도 1달러 밖에 받지 않고, 대단한 부를 누리는 다른 자본가와는 다르다고 한다. 자신이 청렴하고, 부자가 아니라고 해서,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이 ‘자본가’라는 말을 피해갈 수는 없다. 이미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애플의 제품을 생산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기업들에게 원가를 줄이라는 요구를 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고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원가 절감’이라는 말은, 제품을 생산하는 비용을 줄이라는 뜻인데, 원료비와 기계에 들어가는 비용 외에는 노동자의 임금 뿐이다. 그리고 원료비와 기계에서 ‘이윤’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노동자의 ‘노동’에서 이윤이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는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배웠다. 물론, 혁신적인 기술 개발로 재료와 공장 설비에서 원가를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원가 절감’을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라는 말과 같다. 애플과 거래하던 중국의 ‘폭스콘’은 이윤이 겨우 1%에 불과했지만, 거기서도 더 낮추라는 요구를 애플에게 들었다고 했다. 애플과 거래하는 국내의 한 기업은 심지어 0.004%의 원가를 절감하라는 요구까지 받았다고 했다. 하청 업체에 단돈 1원이라도 적게 주면, 그 돈은 결국 삼성이나 애플과 같은 대기업, 원청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간다.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의 임금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문제지만, 이윤의 대부분은 자본가와 주주들-대주주들-에게 집중되므로, 앞에서 쓴 3분기 실적의 대부분도 불과 몇몇 사람들에게 집중된다는 뜻이다. 결국, 애플도 삼성과 다를 바 없는 기업이고, 그들도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해서 자본가와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 장사를 하는 장사꾼이라는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문, 방송에서 애플의 신제품을 사려고 애플 매장 앞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애플 제품을 들고 환호하는 소비자를 인터뷰하며 애플 제품이 놀라운 신기술의 집합체라고 보도하는 동안,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은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기업의 본분은 '깨끗한 돈'을 버는 것이다
    기업의 본분은 ‘깨끗한 돈’을 버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 기업이 경제활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하고 옳은 주장 같지만, 이는 왜곡된 주장이다. 기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한다. 그리고 법에 따라 정당한 세금을 내야 한다. 단순하고 명쾌한 과정이다. 다만,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과정에서 온갖 탈법과 불법을 저지르는 경우가 문제인 것이다. 이윤 추구를 위한 활동이 불법으로 이루어지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모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기업이 힘들고 어렵게 번 돈을 사회에 내 놓을 때는 좋은 뜻을 가진 경우도 있지만, 대개 권력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은 이윤의 사회 환원을 위해 탈법, 불법을 통해 돈을 긁어모아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다. 예전에 안철수 교수도 주장한 바가 있듯이, 기업의 역할은 깨끗하게 번 돈으로 세금을 정당하게 내면 되는 것이다. 정부는 기업의 이윤추구를 위한 제도 정비를 통해 탈법, 불법을 저지르면 기업이 망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정당한 경제활동을 통해 세금을 납부하는 것만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 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니, 대기업 자본가의 개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느니 하는 요식행위가 오히려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정부가 세금을 정확하게 걷고, 탈세에 대해서는 미국처럼 ‘쪽박’을 찬다는 엄정함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그렇게 걷힌 세금을 알뜰하게 쓴다면 지금의 예산으로도 우리나라는 훌륭한 복지국가가 될 것을 확신한다. 기업 역시, 돈을 버는 과정이 투명해야 하는 것은 물론, 기업이 고용한 노동자에 대해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인정하고, 충분한 임금과 사회 수준에 걸맞는 복지 제도를 갖춰야 한다. 노동자의 피땀을 빨아 먹는 흡혈귀와 같은 모습이 바로 '자본가의 얼굴'임을 자본가 스스로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기업이 고용한 노동자에게 충분한 임금과 복지를 제공하면, 그 노동자는 다시 받은 임금을 생활비, 문화비, 여가활동비 등으로 쓰게 되어 사회 전체가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게 된다. 기업, 특히 주식회사의 경우 자본가나 전문경영인은 '주주의 이익'을 가장 우선하고 있는데, 주주의 이익을 위해 실제 이윤을 창출하는 노동자의 임금, 복지 등을 소홀하게 한다면 '깨끗한 돈'을 번다고 할 수 없다. 깨끗한 돈이란, 제품(또는 서비스)의 제조 단계부터 그 과정이 투명하고,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가 사회 수준에 걸맞아야 하며, 노동조합 활동의 인정, 아동 노동력 착취의 근절, 이주노동자나 여성노동자의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 가난한 나라의 노동력과 원자재를 착취하지 않는 공정한 무역 등 고려해야 할 내용이 많다. 그래서 까다롭고 힘들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잘 지키는 것이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상생'의 길이며, 자본주의가 진화하는 길임을 자본가들은 알아야 한다. 일반 시민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도 기업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쯤으로 여기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기업에 대한 정당한 감시와 비판은 지금보다 더욱 날카로워야 하지만, 기업이 깨끗한 돈을 벌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편으로는 기업으로 하여금 권력이나 사회에 눈치보지 않도록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아야 한다. 기업의 왜곡된 지배구조, 2세, 3세로 이어지는 세습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비판하고 바꾸도록 해야 하지만, 기부금이니 찬조금이니 성금이니 하는 따위의 ‘코묻은 돈’을 빼앗는 것 같은 치사함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돈이면 만사형통’이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고, 실제 사회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자본주의 나라라도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기업의 투명한 경영과 정당한 세금 납부, 모든 국민들의 높은 세금 부담률을 통해 교육, 의료, 육아 등의 분야에서 획기적인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 박노자 교수의 출산기가 그것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여당의 예산 날치기와 같은 폭거는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세금을 정당하게 걷는 만큼 그것을 사용하는 것도 낱낱이 밝혀야 하는 것이다. 국민의 ‘피묻은 돈’을 주머니돈처럼 함부로 쓰는 것 자체가 범죄행위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업이 정당한 방법을 통해 번 ‘깨끗한 돈’은 그에 상응하는 세금을 내는 과정을 통해 인정하자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는 천박하고 몰염치한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천민자본주의 국가에서 ‘깨끗한 돈’을 만들 수 있는 제도와 감시와 시스템이 갖춰지려면 많은 시간과 혹독한 시련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자본 흐름의 투명성을 담보하고, 지하경제를 (거의 완벽하게) 조세 정책의 거름망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정부의 역할이다. 이윤의 흐름이 불법과 탈법의 지하수로 흘러나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소수 기득권자와 자본가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면, 그 책임은 과연 누가 져야 할까. 투명한 과정을 거쳐 깨끗한 부를 축적할 때, 우리는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기업 경영이 투명하면 사회가 투명해진다. 기업이 정직하면 사회가 정직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허파와 같은 역할이다.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실 것인지, 오염된 공기를 마실 것인지에 따라, 몸 전체가 건강할 수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교황을 저주하는 개신교
    교황을 저주하는 개신교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개신교 집단의 저주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무신론자가 보는 이번 사태는 한편의 희극이자 흥미진진한 종교전쟁이기도 하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결국 다수의 인간들이 믿는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형편없는 비이성적 도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유럽계 교황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어도, 그의 출신은 여전히 이탈리아다. 역대 교황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교황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인간적인 면에서도 그는 수 억명의 가톨릭 교도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이른바 '구교'가 가지고 있는 보수적 틀을 깨고, 성소수자, 제3세계 인민의 굶주림, 강대국의 폭력,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 물론, 그 역시도 체제 내적인 발언이긴 하지만 - 하는 것을 보면서, 그나마 불교 다음으로 가톨릭이 비교적 양심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다. 그래서일까. 성서근본주의자들인 한국의 개신교 집단의 이성-그들에게 '이성'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겠지만-을 잃고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기독교에서는 구교든 신교든 같은 '성경'으로 신을 믿는다. 그들이 믿는 신은 유대인들의 민족신인 야훼이며, 무슬림이 믿는 알라이며, 러시아의 동방정교회며, 영국의 성공회다. 그 전에는 이집트와 중동의 고대신화에서 비롯한 태양신이었으며, 그 신은 결국 인간의 무지가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이다. 즉, 수 천년 전에 무지하고 미개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이미지를 지금, 과학문명이 발달한 현대의 인간들이 그것을 '신'이라고 칭하며 역시 다수의 무지한 인간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과학기술문명은 최근 수 천년 사이에 우주여행을 할 정도로 발달했지만, 인간들의 지성과 지혜는 그렇지 못한 이중성을 띄고 있고, 그것이 바로 불행의 근원이기도 하다. 수 천년 전의 미개한 인간은 자연 현상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신'을 믿었지만, 오늘날의 유신론자들은 스스로의 미개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덜 진화한 인간들이기에 신을 믿는다. 그리고, 그런 종교사업을 통해, 어떤 자들은 돈과 권력을 얻기도 한다. 한국의 개신교가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의 개신교도 미국의 개신교 영향을 듬뿍 받았기에 종교식민지로 종속된 종교부역자들이 더욱 근본주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친일파가 일본놈들보다 더 악랄했던 것을 보라. 필연적으로, 종교를 사업으로 여기는 자들은 반자본주의적 발언을 하는 교황이 마땅치 않은 것이 당연하고, 무지와 몽매의 상태에 있어야 할 신도들이 종교와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 할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어떤 목사는 교황을 두고 사탄이니 악마니 하는 발언을 했다. 아무리 가톨릭이 싫고, 자신들의 정체-사기꾼, 개독, 종교장사꾼-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다 해도, 동업자에게 하는 말 치고는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한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요단강을 건너갔다.' 개신교에서 교황을 사탄, 악마라고 비난하는 것은 개신교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으며, 개신교가 한국에서 종교가 아닌, 종교장사를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교황의 '약간' 진보적인 태도에도 이렇게 더러운 본색을 드러내며 야만적인 행패를 부리는데, 하물며 진짜 사회주의적, 아니 북유럽의 복지국가적 태도를 보이기만 해도 한국 개신교의 목사들은 마치 미친개처럼 으르렁거리며 자신들의 사업을 방해하는 사람을 물어뜯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개신교가 유지된다는 것은, 그들의 먹잇감인 멍청하고 어리석고, 미개하며 정신적으로 진화가 덜 된 인간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증거다. 교황이 한국에 와서 이런 미개한 상황을 직접 확인하는 것도 큰 소득이겠다. 어떻든, 같은 신을 믿는 자들이 미치광이라는 것을 확인하면, 조금 더 진보적인 태도를 보일테니까.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숙주나물 공장에서의 사흘
    숙주나물 공장에서의 사흘 1 추석을 앞두고 형제같이 지내는 동무의 부탁으로 숙주나물 공장에서 일했다. 명절(추석, 설) 앞이면 늘 많은 물량을 내보내야 하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하다고 한다. 단 사흘만 일하기 때문에 일손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 점도 있을 듯 하다. 첫 날, 아침에 두 동무를 만나 개군면에 있는 순대국집에서 식사를 하고, 양평에서 약 30분 정도 달려 이천의 어느 한적한 마을 외곽에 자리잡은 숙주나물 공장에 도착했다. 판넬로 만든, 근처의 여느 공장들과 똑같이 생긴 푸른지붕의 공장은 그리 크지 않았고, 콘크리트가 깔린 마당은 깨끗했다. 숙주나물 공장의 사장이 동무의 친구였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장화로 갈아 신고, 장갑을 낀 다음-작업복을 갈아 입거나 하지 않고-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우리가 처음 한 일은, 박스로 포장된 숙주나물을 공장 바깥에 쌓았다가 트럭에 옮겨 싣는 일이었고, 이 일이 끝자자 공장 안으로 들어가 각자 주어진 일을 했는데, 나는 첫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거의 대부분 숙주나물을 큰 통에 싣는 작업을 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숙주나물 공장의 구조를 먼저 살펴보면, 공장 내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가장 넓게 자리를 차지한 곳은 숙주나물이 자라는 공간이다. 가운데 작업 공간의 양쪽이 모두 숙주나물이 자라는 창고 같은 공간인데, 왼쪽에 두 곳, 오른쪽에 한 곳이 있고, 한 곳의 넓이는 약 50평 정도 되어 보였다. 설날 전에는 모든 공간에서 숙주가 자란다고 하는데, 추석 때는 두 곳에서만 숙주가 자라고 있었고, 예전보다 물량이 줄었다고 한다. 숙주는 녹두로 만든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녹두는 거의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원산지 표기가 되어 있다. 녹두를 먼저 살균 소독한 다음 배양하는데, 바닥에 놓인 녹두가 콩나물처럼 자라기 시작하면, 계속 위로 솟아올라 수 십 층의 두께로 쌓인다고 한다. 숙주가 자라는 공간은 어둡고, 사람 머리 위의 높이에서 자동으로 물을 뿌리는 장치가 되어 있어, 계속 물을 뿌려주기 때문에 숙주는 밤낮으로 자라게 된다. 이렇게 자란 숙주나물을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 밖으로 가져오면, 스테인레스로 만든 수조에 넣는다. 숙주나물을 가공하는 기계 설비는 매우 간단하게 되어 있다. 이 공장에서는 ㄱ자 모양으로 꺾인 기계 설비였는데, 이와 비슷한 콩나물 공장에 가보니, 더 간단한 일자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숙주나물을 물 속에 담가 녹두 껍질을 제거하는데, 이때 계속 많은 물이 수조로 들어간다. 즉 지하수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수조에서 숙주를 풀어헤치면 녹두 껍질이 먼저 가라앉고, 풀어진 녹두는 두 개의 철망을 지나면서 이물질을 털어낸다. 그리고 물기를 털어내는 바이브레이터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일정한 중량이 되면 비닐 봉투에 담기는데, 나는 바로 이곳, 비닐 봉투에 담기는 곳 옆에 서서 숙주 나물이 담긴 비닐 봉투를 다시 옆의 큰 통에 담아 놓는 일을 했다. 중량대로 담긴 숙주나물 비닐 봉투는 박스 포장을 하는 곳으로 이동하고, 박스에 담긴 다음 곧바로 납품을 하게 된다. 숙주나물을 비닐 봉투에 담는 작업은 상품을 '찍어 내는' 과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 숙주 나물이 농산물(1차 상품)이긴 하지만, 공장에서 생산되는 순간, 더 이상 '1차 상품으로서의 농산물'이 아닌, 대량 생산되는 '2차 상품'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숙주 나물을 생산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은 숙주 나물을 비닐 봉투에 담는 곳이다. 이곳은 매일 아침마다 하루의 물량표가 붙어 있고, 그 물량에 따라 일정한 용량-1, 2, 3.5, 4, 5, 6, 8, 10kg-을 비닐 봉투에 담는 작업이다. 용량이 작은 것은 약 3초마다 하나씩 상품이 나오고, 용량이 커도 15초면 하나의 상품이 나온다. 즉,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 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숙주 나물이 봉투에 담겨 나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루 약 9시간 정도 꾸준히 나온다. 모든 과정은 지극히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어서 머리를 쓸 이유도, 필요도 없다. 1kg짜리 숙주 나물 100개, 3.5kg짜리 숙주 나물 50개, 10kg짜리 숙주 나물 80개... 무게는 자주 바뀌고, 그것을 세팅하고 숙주 나물을 비닐 봉투에 담는 작업을 체구가 작은 베트남 여성 노동자가 맡아 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생산된 다양한 비닐봉투를 커다란 통에 담는 일을 했는데, 나오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통에 담는 것도 몸을 빠르게 놀려야 했다. 통이 가득 차면 박스에 담는 곳에서 통을 가져간다. 비닐 봉투를 박스에 담는 작업은 베트남 남성 노동자가 맡아서 했는데, 박스를 접는 손이 매우 빨랐다. 박스 작업은 밴딩 기계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박스를 접고 비닐 봉투를 넣은 다음 곧바로 밴딩 기계에서 밴딩을 한 다음 수동 컨베어벨트 위로 밀어 놓으면 박스를 쌓는 사람들이 출입구 쪽에 박스를 쌓아두게 된다. 박스 작업은 속도가 매우 빨라서, 봉투에 넣는 작업이 박스 작업을 따라가지 못한다. 작업 과정에서 조금씩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에 개입해 이러저러한 일들을 끊임없이 한다. 공장 청소도 매우 중요한데, 식품을 다루는 공장이라서 깨끗하긴 하지만, 일을 하다보면 숙주 나물의 잔해와 박스, 포장끈 등 지저분한 것들이 생긴다. 작업하는 중간 중간, 이런 쓰레기들을 빠르게 처리하면서 공장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빠질 수 없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일이 힘들다기 보다는 무엇보다 단순 반복의 지루함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집에 있을 때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서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였는데, 공장에서 일을 하니, 한 시간, 아니 십 분이 지나가는 것도 아주 길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이 공장에서는 일을 늦게 시작하고 늦게 끝냈다. 아침 9시가 넘어서야 일을 시작하고, 11시 조금 지나면 간식 시간을 주었다. 빵, 토스트, 음료수, 과일 등이 매일 조금씩 바뀌면서 나왔고, 간식과 매 끼니 식사는 사장의 부인이 직접 만들어 주었다. 간식을 먹고 나서 점심은 오후 2시에 먹었다. 일의 성격을 보면, 이런 방식의 시간 배치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너무 단순하고 반복적이어서 노동자들이 몹시 지루하게 시간을 느끼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도 했을 것이다. 3 이주 노동자. 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모두 베트남 노동자들이다. 모두 네 명. 한국 노동자는 한 명. 현장에서 고정으로 일하는 사람은 이렇게 다섯 명이고, 그외 시간에 관계 없이 나타나서 일하는 사람이 두어 명 있었고, 상품(박스)을 물류 회사로 실어가는 트럭 기사가 있다. 즉, 생산을 맡은 노동자는 베트남에서 온 젊은 노동자들이 전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들은 이곳 공장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생활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쉬는 날이 있다고 하는데, 명절처럼 바쁜 날이 아니면 통상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 또는 6시까지 노동한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말을 간간이 들어보면, 이들은 회사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으로 약 12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를 받는 듯 하다. 베트남 노동자의 신분은 '산업연수생'이라는 공식 명칭이 있고, 정부에서 정해 준 월급의 기준이 있는 듯 하다. 월급 120만원이라면, 한국에서 최저 생활을 유지하기에도 급급하겠지만, 먹여주고, 재워주는 비용을 감안하면, 이들이 받는 임금 수준이 터무니 없이 낮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절대 임금 기준으로 보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영세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보다는 낮게 유지할 수 있으므로, '산업연수생'을 고용하는 것은 분명 자본가에게 유리하다. 이주 노동자나 외국인 '산업연수생'을 고용하도록 만드는 것은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려는 영세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가)의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노동시장에 뛰어 드는 노동자들이 3D 직장을 싫어한다는 언론의 보도나 방송이 자주 나오는데, 노동시장을 왜곡하는 것은 정작 자본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노동자라 하더라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 임금 120만원이면 일하려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생각인데, 내가 너무 순진한 걸까? 저임금 노동시장에 뛰어드는 한국 노동자가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최저임금이 150만원이 안 되는 상황에서 하루 세 끼의 식사와 잠자리가 무상으로 제공된다면, 그 노동시장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본'은 국적이 없다. 따라서 '민족'이나 '인종'과 같은 경계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노동자'는 '인종'과 '언어'에 의해 그 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노동자는 높은 임금을 쫓아 국경을 넘는다. 멕시코 노동자가 미국으로 이동하고, 아시아의 노동자들이 한국과 일본 등으로 이주하는 것이 그렇다. 이주 노동자의 활용은,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의 경쟁을 부추겨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고, 노동시장을 통제하는 효과가 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경쟁자가 늘어나서 임금이 낮아지고 노동의 강도가 높아지는 불안한 상황이 조성된다. 4 영세 자본가. 자본가 역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국적'과 '인종'에 관계 없이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면, 자본가는 자본가들끼리 이윤을 놓고 경쟁한다. 특히 소규모 영세 자본가의 경우, 그들은 안팎으로 압박에 시달린다.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의 노동으로 상품을 생산하도록 모든 기반 시설을 마련해야 하며, 임금, 복지, 사고 등 다양한 변수에 대비해야 한다. 밖으로는 같은 영세 자본가와 경쟁해 시장을 확보, 확대, 유지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고, 최대의 이윤을 위한 적정한 상품 가격과 품질을 유지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숙주 나물 공장의 예를 들면, 공장을 마련하고, 생산 설비를 갖추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즉 누구나 '영세 자본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상품을 판매할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고, 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 영세 자본가에게 '안정'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규모가 크던 작던, 자본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사업을 한다. 자본주의가 '이윤'을 토대로, '경쟁'을 매개로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며, '자본가'에게도 적용되는 시스템이다. 물론, 경쟁에서 살아남은 1%의 자본가는 이런 시스템이 마음에 들 것이고, 만족스러울 것이다. 결국 우리는 1%의 '자본가'들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차 농산물인 숙주 나물을 한 명의 자본가가 생산하는 것이 몹시 낯설고 이상하게 보인다. 이런 농산물이라면 오히려 시골의 마을에서 '협동조합'을 만들어 생산하는 것이 훨씬 사회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텐데, 자본의 힘이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많은 부분을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생산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음에도, '영세 자본가'가 더 자주, 더 많이 출현하는 것은 '자본'이 주는 매력이 위험(리스크)을 뛰어 넘기 때문이다. 이 공장의 사장도, 자신이 공장을 운영하면서 얻는 이익이 위험보다 크기 때문에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공장을 운영하는 것일테다. 하지만 외부 환경의 변화-정부의 정책, 시장의 변동, 거래처의 상황 등-에 의해 영세 자본가는 한 순간에 실업자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럼에도 창업을 하는 영세 자본가는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위험을 극복하고 얻는 열매가 더 크고 달콤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5 공장에서 사흘 노동을 하고 나서, 근육통과 두통으로 조금 고생했다. 덕분에 몸무게도 조금 빠졌고, 사용하지 않던 근육들을 많이 사용해서 저절로 운동을 했다. 하루 9시간을 꼬박 서서 일하고, 단순 반복 작업으로 지루함에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가장 끔찍하다. 사람은 기계의 부품이 아니다. 마치 기계 부품처럼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인간의 역할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하루 16시간 노동부터 아동노동-심지어 4살짜리까지-과 위험한 노동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인간의 노동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노동'이 인간의 존재를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된다. 단순 반복의 지루한 노동일수록 노동 시간을 짧게 해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이 하는 노동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하며, 인간의 삶에 기여해야 하며, 인간의 존재를 빛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노동'의 의미이자 가치인 것을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나는 줄곧 주4일 노동과 하루 6시간 노동을 주장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가능하다. 주5일 노동이 현실인 사회에서 이런 논의가 활발하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지금은 자본의 위세에 눌려 노동자가 위축되어 있는 상황임에 틀림 없지만,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주4일 노동, 하루 6시간 노동을 주장해야 한다. '노동'의 주체가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똑같은 노동 시간을 일했지만, 한국 사람인 나는, 베트남 노동자보다 약 2배의 임금을 받았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편도선이 붓다
    편도선이 붓다 편도선이 부었다. 꽤 오랜만이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과 왼쪽 뒷머리에 전달되는 통증이 심각하다. 이 느낌은 오래 전에 자주 겪었던 바로 그 '편도선염'에서 오는 통증이라는 걸 나는 잘 안다. 30년도 훨씬 더 전에, 나는 자주 편도선이 부어 고통스러웠다. 침도 삼키지 못하고, 열까지 높아져 밤새 끙끙 앓다 병원에 가면, 의사는 마취도 하지 않고, 메스로 부어 있는 편도를 찢고 피고름을 빼냈다. 편도선이 붓는 이유는, 몸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편도선은 우리 몸의 건강을 점검하고,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따라서 편도선이 붓기 시작하면 그만큼 몸이 무리를 했으니 쉬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려서 그런 상식을 알 리 없었던 나는, 아니, 설령 알았다고 해도 그런 '몸의 경고'를 들을 만큼의 여유조차 없었기에 날마다 하루 12시간의 노동과 왕복 6시간의 출퇴근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새벽 첫 차를 타기 위해 일어나면, 베갯잇이 코피로 물들어 있었고, 세수를 할 때마다 세수대야는 붉은 핏물이 들었다. 그리고 편도선이 붓기 시작했다. 삶이 고통스럽다던가, 힘들다던가 하는 느낌 조차도 갖지 못할 만큼 어리석기도 했고, 살아가기에 급급했던 때여서, 편도선이 부을 때마다 죽을 만큼 힘든 육체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개돼지처럼 묵묵히 살아갔다. 우습게도, 죽을 만큼 힘들 때는 오히려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그때 의사는, 스무 살이 넘으면 편도선이 붓는 일은 거의 없을 거다,라고 말했다. 아직 어려서 면역력이 약했던 때, 힘겨운 육체노동을 했기 때문에 편도선이 자주 부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스무 살이 넘으면서 편도선이 붓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그때는 이미 힘에 겨운 육체노동에서도 벗어난 상태였다. 침을 삼키기 어려운 상태에서 오전에 병원에 가야하나, 더 참아볼까 고민하다 오후에 병원에 갔다. 의사는 먼저 부어 있는 편도선에 마취액을 뿌렸다. 몇 분을 기다려 의자에 앉자, 고름을 긁어낸다며 입을 벌리고 '아~~'소리를 내라고 했다. 의료기구가 입에 들어오자 욕지기가 났다. 본능적인 몸의 반응이다. 욕지기와 함께 눈물이 나왔다. 몇 번의 욕지기를 한 끝에 처치는 끝났다. 생각보다 쉽고 짧게 끝난 것이 신기했다. 의료기술이 발달한 것일까. 많이 아프지도 않았고, 시간도 짧았다. 메스로 편도선을 찢을 때의 그 통증과 뱉어낸 피고름의 끔찍한 형상을 기억했던 내게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주사를 맞고, 약국에서 약을 처방받아 와 약을 먹었다. 하루가 지나자 통증은 거의 사라졌고, 침을 삼키는 것도 부드러웠다. 현대의학의 혜택을 톡톡히 본 것이다. 이틑날 병원에 한 번 더 간 것은, 거의 의례적이었다. 이미 외과적 처치만으로도 상황은 끝난 것이고, 만일을 위해 소염 주사를 더 맞고, 약을 하루치 더 처방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편도선의 통증은 사라졌지만, 약을 먹고 나자 위가 쓰리고 아팠다. 약이 너무 독했나 보다. 간헐적으로 위를 훓고 지나가는 통증 때문에 새벽에도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목의 통증보다는 덜 하고, 참을 수는 있었지만, 위에서 느껴지는 묵직하고 간헐적인 통증도 꽤 고통을 주었다. 부모님에게 좋은 유전자를 물려 받아, 살면서 큰 병치레를 하지 않은 것을 늘 부모님께 감사한다. 가난하게 자라는 아이가 병치레까지 한다면 얼마나 살기 고역이었을까.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는 편도선이 붓는 것 말고는 병원에 가 본 일이 없고, 나이 들어서도 특별히 아픈 곳이 없으니 마음으로 늘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다. 다만, 한동안 편두통에 심하게 시달리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도 시나브로 사라지고, 이번에 편도선이 부은 것이 큰 사건이었다. 편두통이 심할 때는, 러시아 혁명 이후 많은 혁명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을 생각했다. 그들은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정치적 탄압이 아닌 다음에는 거의 지병 때문이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편두통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말한다면, 어리석다고 말하겠지만, 그만큼 인간은 질병 앞에 무기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편두통이든, 어떤 질병이든 견디기 힘든 선까지 치달으면 인간은 생존보다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존엄성을 지킬 수 있기도 하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건강하지 못하면 불행한 삶이다. 가난해도 건강한 사람은, 희망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건강하면서 어리석게 살아갈 것인가, 병약하면서 지혜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겠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존재의 기본은 '건강하게 생존'하는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일본의 군국주의화
    일본의 군국주의화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아래 쓴 내용은 사실에 기초했음을 밝힙니다. 일본의 급격한 군국주의 배경과 결과현재 상황-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후 일본 전역에 방사능 누출-아베 정권, '천황제' 부활을 공식적으로 선포(주권부활의 날)-중국과의 영토 분쟁 조장(센카쿠, 다오위다오) -한국과의 독도 분쟁 조장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 조장-도쿄지사, 이슬람 비하 발언일본의 아베 정권이 극우정권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이들의 행동이나 태도가 국수주의적이라는 것 역시 예상했던 상황이지만,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일본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극우, 군국화는 극우세력의 의지에 앞서, 일본이 처한 상황이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겠다. 물론 일본 정치가 극우와, 군국화 하는 것은 당연히 일본 국민의 의지가 반영된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빠르게 만들고 있는 외부 환경이 바로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건이다. 일본 정부와 언론에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에 대해 함구와 비공개로 사실을 숨기고 있으나, 상황의 심각함은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거짓말을 한다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후쿠시마를 중심으로 일본 동북부 전체는 방사능에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이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수산물은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되는 오염덩어리가 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현재 후쿠시마 핵발전소에 남아 있는 여러 기의 발전소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앞으로 발생할 지진에 의해 붕괴될 경우, 일본 동북부 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 전체가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초토화 된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사실과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 거짓말은 할 수 있지만, 방사능 피해로 인한 참담한 미래는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짧게는 몇 년, 적어도 20-30년 내에 일본에서는 무수한 기형생물, 기형인간들이 태어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일본에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일본 정부는, 일본이 스스로 붕괴하기 전에 전쟁이라도 벌려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기를 원하고 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국내의 심각한 사회적, 환경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일본 정부는, 전쟁만이 해결책이자 탈출구임을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무력을 증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웃 나라들과의 분쟁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무력이 준비되는대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한국(남한)을 침략할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일본이 침략했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다시 공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일본이 자기 혼자만의 의지로 전쟁을 일으키기는 어렵겠지만, 일본은 미국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알면서도 초기에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목적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전쟁에서 지는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 초기의 무차별적인 파괴와 학살로 세계의 분노를 유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시작되면 유엔은 다국적군을 구성해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저지하고, 일본 본토를 점령해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원하는 시나리오이다. 유엔에 의해 장악된 일본 사회는, 자신들의 비용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 방사능 오염 지역을 처리하게 될 것이고, 일본 국민을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게 만들 것이다. 일본 열도는 거의 비어 있게 되고, 인구 2억의 일본은 적게는 2-3천만 명에서 많아야 5천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게 되는 작은 나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일본 인구는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살게 되고, 각 나라마다 '일본촌'이 생기며, 그들은 초기에 3D 업종에서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나중에는 일본인 특유의 근면성과 아이디어로 그 나라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일본의 입지가 강화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유엔은 일본 열도 전체를 '관리, 감독'하게 되고, 시간이 많이 지나 방사능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지역부터 외국에 살던 일본인들의 재정착을 유도할 것이다. 문제는, 일본과 붙어 있는 한국의 경우, 일본에서 날아오는 방사능 피해가 지속적으로 늘어나지만,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가장 단적으로 '갑상선암'의 발생이 꾸준히 증가하게 되지만, 이것이 일본에서 날아온 방사능 때문인가를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에,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으면서도 항의를 하거나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 또한,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남한은 초토화되고, 남한의 경제, 사회 상태는 20-30년 정도 후퇴한다. 북한의 변수는, 남한이 일본에게 침략을 당했을 때, 남한을 도와 일본을 공격할 것인지, 아니면 초토화된 남한을 얕보고 다시 남한을 공격해 '북조선식 통일'을 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두 가지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북한은 생존하거나 소멸하게 될 운명에 놓인다. 일본의 처지를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문장이 바로 '불감청고소원'이다. 강렬하게 원하고는 있으나 차마 말은 하지 못하는 상태, 일본이 핵발전소 폭발로 인한 국가의 재난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하고 있으나, 자기들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고, 이대로 간다면, 일본은 방사능에 찌들어 기형인간들의 세상이 되고 만다.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은 전쟁을 불사할 것이고, 수 천만 명이 죽어도, 그들의 목적은 일본 열도를 벗어나는 것이니,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진화론과 창조설
    진화론과 창조설 자주 가는 어떤 게시판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에 관한 개신교도의 글을 읽었다. 창조론은 '론'이 아니다. 믿음이고 신앙이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고 믿는 믿음이지 과학적인 논쟁거리가 아니다. 한마디로 창조신앙이다. 그러므로 창조론이라 말하는 창조신앙과 과학의 귀납적 사고의 진화론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과학적으로 진화론이 완벽하게 증명이 된다고 해도 창조론(창조신앙)은 변하지 않는다. '창조론'을 '창조설'로 수정한 것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진화론'이 과학적 근거에 바탕한 '논리'라면, 기독교의 '창조설'은 말 그대로, 어떤 근거도 없이, 오로지 '설'로만 주장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즉, '창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제시할 수 없는 '자기모순'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진화론'에서도 무수한 오류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당연하다. 과학이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완벽한 적이 있었던가? 그런 순간은 이전에도 없었고, 인류가 멸종하는 순간까지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진화론'은 인류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한 가장 올바른 이해의 과정이며, 적어도 현생 인류의 수준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올바른 태도로 접근하고 있는 '지적 활동'이다. 반면, '창조설'은 어떤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주장을 있는 그대로 믿으라는 말은, 현재 한국(남북한)의 조상이 곰이었음을 그대로 인정하라는 말이다. 너는 인정할 수 있나? 우리 조상이 곰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한국인으로 기독교인 자들은 자신의 조상이 '곰'이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고 있나? '단군 설화'는 역사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대목이다. 이걸 두고 기독교도들은 '우상숭배'라고 한다. 대단한 자가당착이고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당연히 '단군'도 창조했을 것 아닌가?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는 또 다른 '우상숭배'가 아닌가? 세계 모든 민족에게서 발견되는 토템과 설화와 절대자의 존재는 그럼 어떻게 설명할 건가? 소위 '창조과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창조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이론과 논리를 체계화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창조과학'에서는 지구의 탄생과 인류의 출현을 지금부터 약 6천년 전이라고 주장한다. 역사를 조금만 배운 사람이라면, 이집트의 역사, 중국의 역사만 해도 이미 6천년은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것을 아니라고 박박 우긴다면, 대체 누가 잘못된 건가? 현대의 과학자들은 전부 바보 멍청이거나, 기독교도들이 믿는 신을 모욕하기 위해 일부러 '진화론'을 선택하게 된 건가? 오로지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해서? 진화론이 탄생한 것도 바로 '기독교 국가'에서였고, '진화론'을 가장 많이 연구하고, 진화론과 관련한 과학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도 바로 '기독교 국가'였다. 그렇다면, 진화론을 배출한 바로 그 '기독교 국가'에 가장 큰 문제와 모순이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가? 과학적으로 진화론이 완벽하게 증명된다고 해도 '창조설'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최소한의 상식과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현대 과학에서는 우주의 나이가 137억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생 인류의 출현은 약 4백만년 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창조과학'에서는 지구의 탄생이 불과 6천년 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6천년 전에 하루에 하나씩, 일주일만에(정확히는 6일만에) 빛과 태양과 지구와 인간과 모든 생물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인데, '창조설'을 믿는 사람들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어떻게 두 가지의 완벽하게 다른 이론을 정신적인 혼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옛날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었다고 믿었다가, 이제는 우리 은하계도 우주의 변방일 뿐이라는 사실까지 확인되었음에도, 여전히 '창조설'을 믿는 고학력자들의 머리 속에는 대체 어떤 생각이 들어 있을까? 또한, 자신들이 믿는 '창조설'은 그야말로 특정한 종교의 특정한 '주장'일 뿐이다. 헌데 그런 일방적인 주장을 공식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는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자신들이 스스로 '론'이 아니라 '설'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를, 현대 과학이 밝힌 '진화론'과 동등한 대접을 해달라는 것은 무모하고 무례한 요구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국의 기독교도들 가운데 95% 정도는 '진화론'이 무엇인지? '창조설'이 무엇인지조차 알 지 못하는, 올바로 설명조차 할 수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떤 종교이든 그 종교를 자신의 '기복'을 위한 활동으로 이해할 뿐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그럼에도, '창조설'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창조설'로 현대과학에 도전하는 행위는, 그들의 세속적 권력이 '합리성'과 '과학성'을 무시할 만큼 커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돈과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도 부족해서 대중의 '의식'까지 지배하려는 의도야말로,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자들의 음모인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사회지도층 좋아하네
    '사회지도층' 좋아하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집단'인 것만은 분명한데, 언론도, 정치계도, 일반인들도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언론에서 '사회지도층' 운운하며 나올 때를 보면, 거의 정치계, 경제계의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나,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등 '사'자 들어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사회지도층'에는 이 두 분야 외에도 문화, 예술계를 비롯해 농업, 산업계 전반도 포함하겠지만, 정확하게 그 범위나 직위 등에 관해 합의된 내용은 없다. 더구나 '법적'으로 규정된 내용은 더더구나 없다.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는, 독재정권 시대에 인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던 비민주적이고 오만한 권력의 시선이 담겨 있는 단어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과 평등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할 때,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이 나라의 민주화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는 물론이거니와 소위 '언론'에서 규정하는 그 '사회지도층'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사회'를 '지도'하는 '층'의 자격이 되는지 조차 전혀 믿을 수 없다. 인민들 누구도 어떤 계층이나 직업에 대해 '사회를 지도'하라고 위임한 적이 없으며, 그들의 지도를 받고 싶은 마음도, 이유도 전혀 없다는 것을 먼저 기억하자. 그럼에도 어떤 직업군의 특정한 부류들이 스스로를 '지도층'이라고 여기며 권력이나 여론을 주도하겠다고 나선다면, 그 자체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행동이므로, 인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그런 자들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언론에 보도되는 '지능범죄'의 주체를 보면, 거의 대부분 언론에서 지칭하는 '사회지도층'이 많다. 우리나라의 '재벌'이라는 자들이 저지른 범죄는 거액의 횡령, 배임 등 심각한 경제사범이 많고, 이들이 미국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하루아침에 파산해서 길거리에 깡통을 차고 나앉거나 수 십년씩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 중대 범죄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권력과 결탁해 항상 풀려나곤 한다. 최근에도 비밀창고에 현금을 140억원이나 숨겨놓은 의사가 있었는데, 의사 직업도 '사회지도층'에 해당하므로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평범한 인민이 저지르는 소소한 범죄에 비해 훨씬 무겁게 처벌을 받아야 함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긴, 판사나 검사 등도 모두 동류의 '사회지도층'이니 서로서로 봐주기를 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 하나의 '층'인 것은 분명하다. 권력과 금력을 장악한 자들을 '사회지도층'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와 민주주의의 파괴 행위는 '반국가적' 행동이며 북한과 대치한 상황에서 나라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이적행위'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권력과 금력을 이용해 특권을 누릴 때는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를 달콤하게 여기면서, 정작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자연인'으로 변명하려는 그들의 이중인격은 그들이 도덕적이거나 양심적인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임을 웅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므로 개인에게 어떤 특권이나 권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이므로 정확하게는 '계급'이 존재한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그것이다. 이 두 계급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인민'으로 불러도 될 것이다. 물론 '인민'의 범주에는 '자본가 계급'에 가까운 인민도 있을 것이고, '노동자 계급'에 가까운 인민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쁘띠 브루주아'나 '룸펜'으로 표현했지만, 어쨌든 1%의 '자본가'와 5%의 '자본가 계급'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노동자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회지도층'은 결국 이들 5%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회'를 '지도'하는 것이 아닌, 인민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우리는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비민주적인 단어인 '사회지도층'이라는 말은 결코 사용하도록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요즘 결혼식
    요즘 결혼식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지인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갔다. 결혼식장은 강남에 있었고,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니, 흔한 '웨딩홀' 보다는 고급한 장소인 듯 했다. 결혼식을 보고 나서, 우리나라의 결혼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요즘은 '웨딩홀'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대중적이고 서민들이 결혼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생겨서, 돈 있는 사람들은 최고급 호텔에서도 결혼식을 많이 하고, '웨딩'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지 않은, 고급한 장소를 찾는다고 한다. 특히 권력자, 재벌, 연예인 등이 결혼식을 하는 곳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을 부러워 하는 것부터 내가 보기에는 이상하다. 사람들은 흔히, 결혼식은 '일생에 한 번' 하는 행사이니, 추억에 남고, 하객들에게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성대하고 화려하게 보이길 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 이혼율이 30%를 넘는 세상에서, '일생에 한 번'이라는 말은 이미 현실을 왜곡하는 말이다. 돈이 얼마가 들던,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호화결혼이건 사치결혼이건 말릴 이유가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결혼을 '두 사람 만의 행복을 위한'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이 나라에서 결혼은 집안과 집안, 족벌과 족벌, 학연과 지연, 혈연이 결합하는 과정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결혼은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한 의식'을 넘어, 집안과 집안의 자존심 대결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과시용 행사이며, 최대한 많은 하객을 끌어모아 축의금 명목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경제 행위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글을 쓰는 나 역시, 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도 강남에서 결혼식을 했고,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돌렸으며, 축의금을 받아 결혼식 비용을 치렀다. 생각해 보면 참 못났다. 우리는 못 났으되, 요즘 젊은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심해진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결혼식장은 더 호화로워졌고, 결혼식 비용은 더 늘어났으며, 결혼과 관련한 혼수, 집 장만, 신혼여행 등 관련 상품들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결혼식을 하고도 무려 30%가 넘는 부부가 이혼을 한다는 것은, 그 결혼식이 얼마나 성대하건 상관 없이,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부부의 시작이 화려한 결혼식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돈을 들여 눈부시게 화려한 결혼식을 한다고 그들이 더 행복한 인생을 살지도 않을 것이며, 고급 아파트와 자동차와 최신 가전제품으로 치장을 한 집에서 산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부부보다 394.75%만큼 행복할 거라는 수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평상복을 입고, 가까운 공원에서, 구리반지를 서로 나눠 끼는 것만으로 결혼식을 한다해서, 그 부부가 눈물겹게 가난한 인생을 살아가란 법도 없을테고, 가난해서 불행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돈이 많아서 그 돈을 마음껏 쓰겠다는 데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하객이나 친지, 친구의 이목을 두려워해서 빚을 내서라도 호화 결혼식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결혼식은 불과 20여분 남짓이면 끝이 나는데, 결혼식장을 치장한 그 많은 꽃들이며 화환이며, 온갖 장식들은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큰 돈이 들어간 것이다. 불과 1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그 많은 돈을 들여 치장한 것도 그렇고, 하객 식사 대접에 1인당 5만원에서 13만원까지 하는 코스요리를 선택하는 것도,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옳다고는 못하겠다. 돈이 많아서 내 마음대로 돈을 쓰겠다는 심보는, 힘이 센 아이가 아무 생각없이 약한 아이를 때리면서도 '내 맘이야'라고 소리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돈이 많을수록 겸양하고, 사회와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위화감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을 써야 할 일이다. 하지만, 요즘 이 나라의 현실을 보면, 가진 자는 오로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에 급급하고, 중산층은 또한 더 많이 가진 자를 쫓아가기에 급급하고, 서민들은 중산층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겉으로 보이는 물질적인 부를 향해 일로매진할 뿐이니, 가난이 곳 죄이며, 불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가난해도 당당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젊음이 보고 싶다. 부자라도 겸양하고 이웃을 위해 배려하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최고의 가치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자본보다 인간의 마음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책의 가치
    책의 가치 다른 건 몰라도, 책을 살 때만큼 마음이 흐믓할 때가 드물다. 책을 좋아하는 것이 타고나는 것은 아닐텐데,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만큼 책을 사들이는 것도 열심이다. 집에 있는 책의 대부분은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들인데, 출판사에게는 퍽 미안한 일이지만 새책을 살만큼 여유가 없기도 하고, 헌책방 찾아다니며 헌책을 고르는 재미가 남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을 구입할 때도 그렇지만, 집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은 다음, 가끔 책 뒷표지에서 책값을 확인할 때가 있는데, 정가 가격과 헌책 가격은 차이가 많다. 새책 가격 기준으로 볼 때, 많게는 60%에서 적게는 10%에 이르기까지 헌책 가격은 다양하다. 새책을 살 때는 돈이 아깝다기 보다 주머니가 가벼워서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같은 책을 헌책으로 사면 부담이 없어서 왠지 마음이 가볍다. 이런 마음은 전형적인 '가난한 백수'의 마음이다. 새책 값이든 헌책 값이든, 돈을 떠나서 책-대부분의 양서를 기준으로-한 권의 가치는 그 책이 가지고 있는 책값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즉, 우리가 아주 적은 돈으로 양질의 훌륭한 내용이 담긴 책을 한 권 살 수 있는 것은 책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 때문이다. 최근에 망설임없이 구입한 새책으로는 '자본'이 있는데, 5권 세트로 16만원을 주면서도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샀다. 이 책 세트는 강신준 교수가 독일어본을 완역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최초의 완역본이다. 마르크스의 역작,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쇄되고, 판매되고, 읽힌 책인 '자본'을 겨우 16만원에 살 수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놀라운 일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마니아로, 그가 쓴 작품들은 거의 다 가지고 있지만, 아직 구입하지 못한 몇 권이 있다.(최근에 구입했다. 무척 기쁘다.)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가 그것인데, 책값이 5만원이 넘어 선뜻 구입하기가 망설여졌다. 물론, 책의 내용에 비하면 책값은 정말 저렴하다는 걸 잘 안다. 그만큼 좋은 책들은 책값에 비해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캐나다에 사는 지인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기형적으로 책값이 싼 나라에 속한다고 한다. 책값이 싸다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그 바탕에는 지식노동자의 고혈을 짜내는 기형적인 출판산업이 있기 때문임을 안다면, 무조건 좋아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 지인과 나의 동감하는 내용이었다. 나도 글을 많이 썼고, 잡지사며, 출판사와도 일을 많이 해서 잘 알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원고료는 달라지지 않았다. 해마다 물가며 임금은 조금씩이라도 올라가는데, 유독 원고료만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저자' 노릇을 한다는 건,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다. 물론, 잘 나가는 필자들도 여럿 있겠지만, 수많은 잡지사에 글을 공급하는 '자유기고가'들, 다양한 실용서와 기획도서를 만드는 개인 필자들은 원고료와 인세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값이 싸다는 것은, 책의 가치를 낮게 인식한다는 것이고, 책과 관련된 모든 분야-필자, 출판사, 인쇄소, 제본소 등-를 공정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독자는 자신이 얻는 것에 비해 터무니 없이 낮은 값을 지불하려는 태도가 이기적인 태도임을 이해해야 한다.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을 높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좋은 책에 대해서 합리적인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책 한 권 속에는 필자의 노하우가 응축되어 있고, 출판사 직원의 노고가 들어 있으며, 인쇄노동자들의 땀이 배어 있다는 것을 넓게 살펴봤으면 한다. 나부터도 책 한 권 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하는데, 백수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되니 어쩔 수가 없다. 책에 관해 생각하면서, 앞으로는 책을 읽고나면 평점을-개인적으로-부여하고, 책값과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작업을 해볼까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책들은 책값에 비해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증명될 것으로 확신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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