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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남자
    두 남자 1966년, 프라하의 나로드니가의 도로 옆에 있는 카페 루브르. 2층에 카페가 있는 건물은 고딕 양식의 7층 건물로 창문 주위에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었다. 도로쪽 정면에서 보면 5층처럼 보이지만, 옆면에서 보면 7층 건물이었다. 건물 끝에서 도로가 갈라지고, 트렘이 건물을 따라 휘어돌아가고 있었다. 전쟁 중에도 건물은 비교적 온전했고, 도로를 따라 주변으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건물 앞 도로는 포석이 깔린 길로, 최초의 도로는 로마시대에 생겼다. 로마군은 지금의 체코를 점령하면서 가장 먼저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때 마차 두 대가 지나다닐 수 있는 너비인 4.9미터의 도로를 돌을 깔아 만든 것이다. 이후 도로는 조금씩 넓어졌고, 전쟁이 끝나고 지금처럼 자동차가 왕복하고, 양쪽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프라하 시내에서 주요한 도로가 되었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좁고 긴 카페 내부는 작은 탁자들이 벽을 따라 놓여 있고, 가운데 줄도 탁자가 놓였다. 저녁시간이어서 식사를 하는 사람과 차를 마시는 사람이 반씩 섞여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중년의 사내는 카페에 들어서면서 빠르게 실내를 둘러봤다. 몸에 밴 습관인듯, 자연스럽고 빠른 행동이었다. 사내는 주변을 곁눈질하며 안쪽으로 걸어들어가 빈 자리에 앉았다. 그의 외투는 낡았고, 안경은 어색해 보였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 그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서툰 영어로 주문했다. 하지만 웨이터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사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이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주제넘지만,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노인의 영어도 유창하지는 않았다. 밝은 은발 아래로 깊고 어두운 눈빛이 침착하게 가라앉아 보이는 표정의 노인은 가볍게 웃음을 물고 있었다. 그의 테이블에는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아, 고맙습니다." 노인은 사내가 주문하는 내용을 웨이터에게 독일어로 통역해주었다. 사내는 노인에게 인사했다.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은 크고 맑았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시가케이스를 꺼내 열고는 시가 한 개피를 노인에게 권했다. "고맙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노인은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글을 쓰다말고 노인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행을 오셨나보군요." 노인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고 있습니다." 웨이터가 식전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왔다. 검은빵과 흰빵이 각각 두 조각씩 들어 있고, 바질이 올려진 버터가 작은 컵에 담겨 있었다. 사내는 벌써 두 달 가까이 프라하에서 지내고 있지만, 늘 밥을 먹을 때마다 그의 고향 아르헨티나와 영혼의 고향인 쿠바를 떠올렸다. 그곳의 민중들은 감자조차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남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보고 느꼈던 감정과 쿠바에서 피델과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무장투쟁을 하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일상은 마치 부르주아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마음이 편치않았다. 웨이터가 음식 접시를 들고 왔다. 월도프 샐러드, 굴라쉬, 스비치코바. 월도프 샐러드는 사과, 호두, 포도, 양배추를 마요네즈에 버무렸다. 스비치코바는 소고기 안심과 크네들리키 빵을 소스에 곁들어 먹는 음식으로, 빵이 부드럽고 소스는 잼처럼 달콤했다. 굴라쉬는 쇠고기 스프처럼 걸죽한 국물에 쫀득한 빵을 찍어먹는 음식이었다. 사내의 입맛에도 음식은 맛있었다. 지구 반대편의 대륙에서 먹던 음식과는 사뭇 달랐지만, 체코의 음식은 소박하면서도 깊이가 있었다. 사내는 밥을 먹으면서도 가끔 카페의 문쪽을 바라보고, 주위를 둘러봤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웨이터가 가져온 커피를 마시며 쿠바산 시가를 피우자 사내는 비로소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는 다시는 쿠바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콩고에서 실패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든 곳이 프라하였다. 적어도 거의 모든 사람은 그가 콩고에서 사라져 프라하로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내는 시가를 피우며 옆 자리의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커피를 조금씩 마시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노인께서는 글 쓰는 일을 하십니까?" 사내가 묻자 노인은 고개를 조금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저 취미로 쓰고 있다오. 평생을 보험회사에 다니다 퇴직하니 시간도 있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젊어서부터 종이에 무언가를 쓰는 일이 전부라서 말이오. 선생도 소설 좋아하시오?" "네, 좋아합니다. 그러고보니 여기 프라하에 오니 랑게르의 소설이 생각나는군요. 그가 작년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차페크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쓴 희곡에서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작가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카프카가 좋더군요. 제 고향에서도 카프카의 작품은 번역 출판을 했는데, '성'과 '소송', '실종자' 같은 소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인께서도 소설을 쓰시나요?" 사내의 말을 듣고 있던 노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떤 남자가 아침에 일어나니 벌레로 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오. 그런데 선생은 고향이 먼 곳인가요?" "네, 아르헨티나가 고향입니다. 지금은 사업 때문에 아프리카에 왔다가 잠시 이곳에 들렀습니다. 작년에는 알제리에서 머물렀고, 올해는 콩고에 머물다 왔습니다. 떠돌이 장사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륙과 대륙을 옮겨다니다니,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그려. 나는 고작해야 유럽의 몇 나라밖에는 다니질 못했다오. 이제는 늙어서 그나마도 갈 능력이 안 되고 말이오. 고향이 아르헨티나라고 하니 생각납니다만, 몇 해 전에 쿠바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소.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하던데, 미국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죠?" "미국은 쿠바 뿐아니라 남미 여러 나라에서 이미 악랄한 짓을 벌이고 있습니다. 유럽과는 차원이 다르죠.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을 지배하는 건 미국의 자본가들이니까요. 콜롬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처음 땅에 발을 디딘 것이 쿠바였고, 아프리카 노예와 중국, 일본, 한국에서 이민노동자가 밀물처럼 들어온 곳도 쿠바였습니다. 사탕수수로 돈을 번 미국자본가들이 빨대를 꼽고 단물만 빨아먹는 거죠. 게다가 쿠바의 호텔 카지노는 미국의 마피아가 지배하고 있고, 남미에서 생산한 마약을 쿠바를 거쳐 미국 본토로 실어나르는 중간기지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죠.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민중이 당하는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고, 지금 잘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가 세계 여러 나라의 혁명에 큰 관심이 없다는 건 아쉬운 점이죠." "역시 사업을 하는 분이라 세계 정세를 잘 알고 있군요. 나는 그런 정치적인 문제들은 잘 모릅니다만, 쿠바 혁명으로 미국이 좀 곤란해진 듯 하군요. 코밑에 쏘련의 친구가 자리잡게 되었으니 말이오." "미국 뿐아니라 언젠가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자본가를 끌어내려 다수의 민중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사내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이제 막 단편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끝냈다. 제목은 '변신'이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고양이, 외계에서 오다
    고양이, 외계에서 오다 사람들은 고양이를 좋아한다. 이제는 스스로 고양이의 '집사'가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고양이는 도도하고 건방진 태도로 자신의 집안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집사가 마련한 음식을 먹는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스스로 똥오줌을 잘 가리고, 늘 깨끗하게 자신을 돌보며,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즐, 일부러 돌봐주려 하지 않아도 되고, 방에 고양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생활이 풍요롭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고양이의 시크한 눈빛과 태도는 강아지의 애틋한 눈빛과 달라서 오히려 매력으로 느낀다. 소리없이 다가왔다 사라지는 고요한 움직임, 밤이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어둠에 묻혀 가만히 어둠을 응시하는 침묵, 창문 바깥으로 훌쩍 사라졌다 나타나곤 하지만, 정작 어디에 다녀왔는지 알 수 없는 신비함이 고양이를 더욱 매력있게 만든다. 사람들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정작 고양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존재인지는 알지 못한다. 고양이를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고양이과' 동물로 분류하고 있지만, 그건 과학자들의 명백한 오류다. 고양이는 호랑이나 사자와는 완전히 다른 동물이자, 고양이는 '동물'이 아니다. 고양이가 '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양이는 인간들과 섞여 살고 있지만, 약 20만년 전 우주에서 지구에 도착한 생체로봇이다. 고양이를 지구로 보낸건 당연 다른 별에 살고 있는 지성이 있는 존재였는데, 목적은 지구 탐사였다. 이들은 지구에서 약 10광년 떨어진 은하계의 가장자리에 있는 별에 살고 있고,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보다 빠르게 진화했다. 그들의 과학기술이 다른 행성으로 탐사를 나설 정도로 발달하기는 했어도,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별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항성간 시뮬레이션을 통해 지구를 발견했고, 지구에 생명이 살고 있을 확률이 90%가 넘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당시 지구의 대기는 그들이 호흡하기에는 위험할 정도로 산소농도가 높았다. 지구의 산소농도는 약 12%로,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였다. 산소농도가 가장 높을 때는 약20%였고, 이때 많은 생물이 멸종했다. 산소농도는 매우 급격하게 증가했다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어서 지구에서 진화는 산소농도가 높을 때는 거대생물체가 나타났고, 산소농도가 줄어들면서 생명체들의 크기는 조금씩 작아졌다. 외계 행성인이 살고 있는 별의 산소농도는 약 2%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대신 질소의 농도가 지구보다 높았다. 이산화탄소의 농도 역시 지구보다 훨씬 높아서 이 별의 생물은 크기가 작았다. 외계 행성인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별보다 나은 환경의 별을 찾기 위해 생체로봇을 개발했고, 작고 귀여운 동물을 만들었다. 그들은 작은 우주선에 생체로봇을 태워 지구로 보냈고, 지구에 도착한 아홉마리의 생체로봇-우리가 '고양이'라고 부르는-은 지구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외계 행성인은 생체로봇에 발신기를 장착했기 때문에 이들의 움직임은 지구에서 외계 행성인이 살고 있는 별로 전해졌다. 그들은 약 20만년 전부터 인류를 관찰해 왔고, 생체로봇의 눈을 통해 인류의 진화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깬석기시대의 미개인류부터 현재의 인류까지 관찰하고 있으며, 그 관찰 데이터는 그들의 '서버'(우리가 말하는 컴퓨터 서버와는 다른)에 저장되고 있다. 집안에서 고양이는 인간의 생활을 관찰하고, 그들의 모습을 전송하는데, 그것은 지금 우리가 CCTV를 보는 것처럼 사생활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어도 정작 인간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생체로봇(고양이)은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서 극지방을 제외한 지구 전체에 퍼져나갔고, 그들이 수집하는 정보는 외계 행성인이 즐기는 라이브 엔터테인먼트로 자리잡았다. 그들은 인류가 미개할 때, 수렵과 채취로 생존하던 때부터 인간들이 저지른 온갖 행위와 지극한 사생활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고양이라고 불리는 생체로봇이 자기 자신의 사생활을 외계인에게 생중계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외계인은 그 생방송을 보면서 재미있어 한다는 것을. 고양이가 낮에 잠을 자는 것은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함이고, 밤에 활동하는 것은 보다 많은 정보를 수집하려는 행동이다. 지구에서 전파탐지기에 잡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전파의 정체가 바로 이들 고양, 아니 생체로봇들이 외계로 발신하는 전파라는 것을 히틀러 정권의 독일과학자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미군에 의해 사살당하고, 자료는 모두 폐기되었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극소수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고양이의 눈빛이 기분나쁘다고 말하는데, 고양이의 눈빛을 본능적으로 카메라로 인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행성에서 10만년 전에 도착한 외계인으로, 지구인과 똑같은 외모를 하고 있지만, 이들이 지구에 온 목적은 고양이와 같다. 지구에 미개인들이 살던 때부터 이들 역시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고양이의 정체를 어렴풋 알고 있었다. 이들, 외계지구인들은 고양이가 자신의 정체를 다른 행성으로 전달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고 있기 때문에, 고양, 아니 생체로봇을 쫓아내거나, 고양이가 없는 곳으로 옮겨다닌다. 고양이는 지구에 완벽하게 적응했고, 번성하고 있으며, 인간을 매개로 지구 전역에 퍼져나갔다. 지구 환경을 알 수 있는 정보가 이미 충분히 외계 행성으로 전달된 지금, 외계인은 산소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머지않아 지구를 방문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들은 지구가 비교적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불과 수천 명에 불과했던 인간이 70억명으로 늘어난 것은 의아하게 생각하고, 인간의 증가를 조절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구에 살 수 있는 적절한 인간 개체는 약 5억 명 정도라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다. 그것은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고양이의 숫자와 비슷한데, 고양이와 인간을 일대 일로 매칭해 관리할 수 있으며, 지구 환경의 컨디션이 최적을 유지하는 조건에 맞기 때문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김연아, 평창동계올림픽 그리고 문재인
    김연아, 평창동계올림픽 그리고 문재인 평창동계올림픽이 한창이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김연아 선수가 많은 노력과 고생을 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올림픽 유치는 한 나라 전체의 영향력 있는 기관과 협회, 정치인들이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동계스포츠의 최고 스타인 김연아의 등장은 화룡점정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 동계스포츠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관계자들은 김연아에게 큰 빚을 졌다. 초기에 나는 동계올림픽 유치에 반대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는데, 강원도가 동계올림픽 준비를 위해 평창의 원시림을 마구잡이로 파헤쳐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겨울 한 달도 안 되는 올림픽 때문에 수백년된 나무들이 모두 사라지고, 다시 복구하려면 수백년이 걸려야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또한 동계올림픽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확률도 매우 높았다. 동계올림픽 유치는 2001년부터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계속 실패하다가 2011년이 되어서야 평창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니 동계올림픽 유치 자체를 두고 문제 삼을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 추진된 과정을 보면, 강원도에서 자연을 망가뜨리는 것이 거의 확실하고, 또 천문학적인 국민 세금이 투입된 다음,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폐허로 변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몹시 걱정스러웠기 때문이고, 그 우려는 지금도 여전하다. 하계올림픽을 개최한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도,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되곤 한다. 가장 최근에 브라질의 하계올림픽이 끝나고, 경기장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한국은 동계올림픽 시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국민의 세금이 낭비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한국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것은 좋은 일이고 환영할 일이다. 이번 개막식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한 것이 있는데, 만일 박근혜가 탄핵당하지 않고 그대로 대통령이었다면, 동계올림픽 개막식 최종 점화자가 최순실과 최순실 딸이었을 거라고, 정유라가 말타고 점화했을 거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개막식 최종 점화자가 김연아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만일 김연아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최종 점화를 했다면 나는 그 이후로 평창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을 부정했을 것이다. 그만큼 김연아는 동계올림픽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젊은 인재이자, 국민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아이콘이기도 하다. 평창의 자연이 망가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동계올림픽을 지지하는 것은 김연아와 문재인대통령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가장 많은 일을 하고, 그 일들이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매우 크고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 올 것이기 때문이다. 김연아는 한국사람의 마음에 자부심과 자신감을 심어 주었고, 한국의 동계스포츠가 세계 최고의 수준임을 널리 알렸다. 스포츠 선수로서 김연아는 뛰어넘을 수 없는 기록을 세웠고, 한국과 세계 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웠다. 개인으로 김연아는 후배 선수를 키우고, 동계스포츠를 널리 알리며, 사회의 약자,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말과 행동으로 국민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키고, 드러내지 않고 많은 돈을 사회에 기부해 어려운 사람을 도왔으며, 한국스포츠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훌륭한 인재다. 촛불 혁명으로 박근혜를 파면하고, 국민은 새로운 대통령으로 문재인을 선택했다. 그리고 문재인대통령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동안 전 정권이 저지른 부정과 부패를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청산하고 있다. 마침 문재인 정부일 때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렸으니 우리로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전 정권에서 올림픽을 치렀다면 지금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극우, 수구집단은 문재인 정부와 김연아를 비난하고 있다. 그들의 발악은 극우, 수구집단의 입지가 벼랑 끝에 몰려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제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발악을 할수록 문재인 정부는 일을 잘 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우리 촛불 시민들이 청소해야 할 대상이 뚜렷해진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평창동계올림픽으로 인해 강원도의 수백년 자연은 파괴되었지만,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과 북한이 극적으로 교류하고, 평화와 통일의 기운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평화, 통일과 자연의 훼손을 맞바꿔야 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평화, 통일을 선택할 것이다. 망가진 자연은 앞으로 더욱 복구에 힘쓰고, 우리 한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평화와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본다. 한국과 북한의 평화, 통일을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일본이다. 미국은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한국의 분단을 강제하고 있지만, 일본은 일본의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국과 북한의 평화, 통일을 방해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북한과 평화협상과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 머지않아 일본과 전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국과 북한의 연대는 정치외교적으로도 필연적인 과정이다. 한국에서 김연아와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는 세력은 오로지 극우, 수구꼴통들과 친일파들 뿐이다. 이들은 반민족, 반애국의 민족반역자들로, 철저하게 색출해서 처단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도 잘못을 하겠지만, 지금은 비난이 아니라 적절한 비판이 필요할 때이고, 문재인 정부를 쓰러뜨리려는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할 때다. 한국에서 김연아 같은 인물이 나오는 것은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더 자주 일어날 수 있도록 모든 분야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적극 추진할 일이다. 학교 성적이나 수능, 대학 운운하는 후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천재는 틀 속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http://marupress.tistory.com/2499 [知天命에 살림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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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건우
    2021-09-21
  • 30년대, 70년대, 2천년대의 백수
    30년대, 70년대, 2천년대의 백수 책을 읽고 음악을 듣다 보면 시대를 뛰어 넘어 비슷한 정서, 공감대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 역사, 정치, 경제의 환경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개인에게는 시간을 뛰어 넘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난한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떤 면이 비슷한지 작품과 가사를 통해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1930년대를 살았던 작가 이상이 쓴 수필 가운데 '권태'의 한 부분이다. 이 수필을 쓸 때의 이상은 폐병으로 평안도의 배천(백천)온천으로 요양을 온 상황이다. 그는 몸과 마음을 편하게 쉬어야 하고, 병을 다스려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몹시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온천 주변의 풍경과 자신의 처지를 찬찬히 들여다 보게 된다. 방을 얻어 살고 있는 배천온천 마을은 한적한 시골이어서 외부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마을 주민들은 농사를 짓는 농부들로 대개 무지한 민중이다. 지식인인 이상은 날마다 읽던 신문이나 잡지도 읽지 못하고, 라디오도 듣지 못해 마치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일 것이다. 권태-이상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넓다란 백지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나는 최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 보다. 최서방의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시나 지난 후니까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최서방의 조카를 깨워가지고 장기를 한 판 벌이기로 한다. 최서방의 조카와 열 번 두면 열 번 내가 이긴다.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둔다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다. 나는 개울 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나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다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 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내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보는 재간도 없으리다. 나는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유치한 곡예의 역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 본다.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구십구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이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포리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작가 이상의 시대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무능한 상태를 드러낸 것이라면, 그 이후 격렬한 정치 상황-해방, 분단, 한국전쟁, 군사쿠데타-이 지나고, 군부독재가 된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청년의 삶은 어떤가를 천재 싱어송라이터 한대수는 자신의 삶-어마어마한 집안이지만 불행했던 가족사-과 시대를 관통하는 삶을 관조하는 가사를 써서 노래한다. 군부독재는 청년의 꿈을 짓밟고, 분단 상황을 악용하면서 병영국가를 유지하고자 온갖 폭력을 휘두른다. 획일화된 잣대로 청년의 창의성과 가능성을 억압하고, 규격된 틀에 넣어 군부독재를 찬양하도록 쇄뇌시킨다. 그런 독재 상황에서도 예술가는 의미 없는 노래를 부르는 듯 하면서 독재정권을 비웃는다. 하루아침-한대수 1. 하루아침 눈뜨니 기분이 이상해서 시간은 11시 반 아 ! 피곤하구나 ? 소주나 한잔마시고 소주나 두잔마시고 소주나 석잔마시고 일어났다. 2. 할말도 하나없이 갈데도 없어서 뒤에 있는 언덕을 아 ! 올라가면서 소리를 한번지르고 노래를 한번 부르니 옆에 있는 나무가 사라지더라 3. 배는 조금 고프고 눈은 본것 없어서 광복동에 들어가 아! 국수나 한그릇 마시고 빠문 앞에 기대에 치마 구경하다가 하품 네번 하고서 집으로 왔다 4. 방문을 열고보니 반겨주는 개미셋 안녕하세요 한선생 하고 인사를 하네 소주나 한잔마시고 소주나 두잔마시고 소주나 석잔마시고 잠을 잤다 독재자가 총에 맞아 죽고, 또 다른 독재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일정한 수준의 민주주의 공간이 확보된 시기인 2천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은 군부독재의 억압에서는 벗어났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군부독재의 억압과 탄압은 분명하게 눈에 보이지만, 자본의 착취와 억업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취업하기가 어렵고, 최저임금을 받아서는 생활할 수 없고, 월세는 비싸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청년 실업자들이 늘어나는 시대에 백수로 살아가는 청년의 삶은 장기하가 노래하는 것처럼 비참하다. 이 시대가 국민소득이 2만불이 넘어서 3만불을 향해 가는 시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싸구려 커피-장기하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슥 지나가도 무거운 매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본다 아직 덜 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질 않다 수만 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 빈 나를 잠근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하고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뭐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있는 물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 비가 내리면 처마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 보며는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 비가 그쳐도 히끄무르죽죽한 저게 하늘이라고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건지 저거는 뭔가 하늘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너무 낮게 머리카락에 거의 닿게 조금만 뛰어도 정수리를 꿍하고 찧을 것 같은데 벽장 속 제습제는 벌써 꽉 차 있으나 마나 모기 때려잡다 번진 피가 묻은 거울을 볼 때마다 어우 약간 놀라 제멋대로 구부러진 칫솔 갖다 이빨을 닦다 보며는 잇몸에 피가 나게 닦아도 당최 치석은 빠져나올 줄을 몰라 언제 땄는지도 모르는 미지근한 콜라가 담긴 캔을 입에 가져가 한 모금 아뿔싸 담배꽁초가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 해가 뜨기도 전에 지는 이런 상황은 뭔가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슥 지나가도 무거운 매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본다 아직 덜 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질 않다 수만 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 빈 나를 잠근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하고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진짜 라이브의 놀라움과 감동
    진짜 라이브의 놀라움과 감동 -우리동네음악회 166회 '라 보엠' 공연 내가 사는 양평의 서종면에는 시골의 면 단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자랑거리가 몇 개 있다. '면 단위'라고 하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얼른 감이 잡히지 않을테니 먼저 지역의 단위에 관해 간략하게 알아보자. 시골의 '면'은 서울의 '동'과 같은 개념이다. 행정구역을 구분할 때, 시-군/구-읍면동의 순서로 내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종로구 혜화동'이라고 할 때, 혜화동에서도 통/반으로 다시 구분한다. 면에서 OO리로 나누는데, 통/리가 같은 개념이다. 대도시에서 '동' 단위에는 꽤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적게는 몇 만 명에서 많으면 십만 명도 훨씬 넘는 사람들이 하나의 동에 살고 있는데, 시골에서는 '면' 단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다. 내가 사는 서종면의 경우 전국에서 면 단위 인구로는 상위권에 속하는데도 인구1만 명이 채 안 된다. 이 가운데 최근 10년 전부터 외지-도시-에서 들어 온 사람들의 비중이 꾸준히 늘어 이제는 절반을 넘은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원래 살던 주민들은 점차 줄어들고, 유입되는 인구는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인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반갑고 좋은 현상이다. 이것은 서종면이 있는 지리적 이점도 작용하고 있다. 서종면은 양평군에서도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양수리(양서면)과 함께 서울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여기에 서울-춘천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 제2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머잖아 강남과 직접 연결되는 고속도로까지 개통할 예정이어서 양평 특히 서종면은 입지 조건이 좋은 곳에 속한다. 서종면은 인구 1만 명이 안 되는 적은 지역에서도 문화예술 활동이 활발하기로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문화예술인의 숫자는 수백 명에 이르는데, 이는 인구밀도의 비례로 보면 전국 최고다. 이들이 모여서 '서종사람들'이라는 문화모임을 만든 것이 벌써 17년 전이었고, 이들의 노력으로 어제까지 모두 166회의 공연을 마친 '우리동네음악회'가 진행되고 있다. 1년에 적게는 7-8회, 많으면 10-11회의 공연을 하는 '우리동네음악회'는 면 단위에서 진행하는 행사로는 내용과 형식 면에서 훌륭한 편이다. 나는 이 공연을 2003년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40회 중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공연을 하는 예술가, 연주자들은 대부분 대도시의 큰 공연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이곳 시골의 작고 허름한 공연장에 왔는데, 그들은 초라할 정도로 작은 공연장에서도 최선을 다해 공연을 했고, 관객과 직접 교감을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지금도 공연장은 같은 곳이지만, 초기의 공연장은 면사무소 2층의 강당 겸 회의실에서 무대랄 것도 없이 접이식 의자만 놓고 공연을 했다. 방음은 전혀 안 되었고, 조명, 음향 모두 형편 없었다. 하지만 연주자들과 공연을 하는 분들은 참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고, 주민들 역시 열렬하게 호응했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오고 있어서, 주민들의 꾸준한 참여가 '우리동네음악회'의 원동력인 것만은 틀림없다. 면사무소 2층 강당은 그 뒤로 꾸준히 리모델링을 하면서 좋아졌는데, 어제 공연을 가보니, 예전보다 확실히 좋아졌고, 많이 달라졌다. 무대, 조명, 음향, 방음, 냉난방 시설이 이제는 어느 정도 갖춰졌고, 소극장으로 손색이 없어보였다. '우리동네음악회' 공연의 특징은 좁은 공간이어서 따로 음향 시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전에 몇 번 공연장에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하고 공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느낌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마이크와 스피커를 써야 할 정도로 넓은 공연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소극장만의 특별한 분위기가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마이크와 스피커를 쓰는 것은 오히려 공연을 망치게 되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공연은 별도의 증폭 장치가 없는, 공연자의 생생한 목소리와 악기 소리를 관객이 직접 가까운 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우리동네음악회'의 가장 큰 장점이자,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어제 공연은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 가운데 중요한 노래 몇 곡을 뽑아 오페라 가수들이 연기와 함께 노래했는데, 무대와 객석의 거리는 1미터 정도로 가까웠고, 눈높이에서 공연을 하기 때문에 가수들의 호흡과 목소리, 표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생생한 라이브, 진짜 라이브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다른 곳에서는 거의 없을 것으로 안다. 대극장 공연에서는 마이크를 쓰기 때문에 가수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마이크를 통해 들어간 음이 앰프에서 증폭되어 스피커로 나오는 과정에서 진짜 목소리는 사라지고, 증폭된 목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즉, 그런 공연도 분명 라이브임에 틀림없지만, 가수나 악기의 소리를 가공하지 않은 완벽한 라이브는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우리동네음악회'의 공연을 '진짜 라이브'라고 부르고 싶다. 오랫동안 수련한 연주자의 목소리나 악기 소리는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어제 들었던 오페라 가수들의 목소리, 소프라노, 바리톤의 그 오랜 시간 다듬어지고 훈련된 목소리의 연주는 오로지 피아노 반주만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었고, 좁은 공연장을 울리는 풍부한 성량과 매끄럽고 윤기가 흐르는 목소리의 결은 관객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켰다. 오페라 '라 보엠'은 당연히 푸치니의 언어인 이탈리아어로 공연했고, 관객은 가수가 노래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극소수의 사람은 이해하고 있겠지만) 하지만 대사를 이해하지 못했어도, 가수가 노래하는 감정과 노래의 운율만으로도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으니, 음악이 갖는 놀라운 힘이 바로 공감이라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팝송이든 클래식이든 가사를 전부 이해하지 못하고 들어도, 그 음악이 들려주는 감정은 관객에게 느낌으로 전달된다. 특히 이렇게 작은 무대에서 관객과 아주 가까이 만나서 들려주는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직접적이다. 여주인공 미미가 병으로 죽을 때, 미미의 그 슬픈 노래와 그의 연인 로돌포의 애절한 노래는 가사를 몰라도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나도 이곳에서 여러 공연을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린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러시아남성합창단의 공연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관객은 적게는 70여명에서 많으면 200여명까지 공연에 따라 다르지만, 공연의 열기나 재미는 매번 다르다. 어제 공연인 '라 보엠'도 짧은 시간에 몇 곡 안 되는 노래였지만, 라 보엠 전체를 잘 축약해서 보여주었고, 오페라에 관한 관심과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출처: http://marupress.tistory.com/2460 [知天命에 살림을 배우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shooting의 남성적 상징 의미
    shooting의 남성적 상징 의미 슛, 슈팅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단순하게는 총을 쏘다, 공을 차다 같은 일반적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이 단어와 함께 동반하는 행위를 들여다 보면, 이 단어가 남성적인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고, 남성적 행위를 상징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잠시 푸코의 의미체계를 살펴보자. 푸코는 말한다. 병원, 학교, 감옥, 군대는 모두 동일한 체계(시스템)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런 통찰은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운 감각이며, 권력과 개인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논리다. 이렇듯, 서로 크게 상관 없을 것 같은 개념을 가져와 특징과 공통점을 하나로 묶어내는 작업은 구조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고 중요하다. 슈팅의 사회적 의미와 남성적 상징 의미는 어떻게 드러날까. 슈팅이라는 단어가 왜 남성적인 단어이며, 그것이 단지 남성적인데 그치지 않고 폭력적인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보자. 축구에서 공을 상대방 골대를 향해 찰 때 사람들은 '슛'이라거나 '슈팅'이라고 말한다. 사전적 의미다. 주로 구기 종목의 스포츠에서 득점을 하려고 골이나 바스켓을 향해 공을 차거나 던져 넣는 것을 말한다. 농구에서 골을 넣을 때도 '슛'이라고 한다. 스포츠는 필연적으로 강력한 경쟁과 투쟁을 합법화한 게임이니 오래 전부터 있었던 씨족, 부족 사이의 전쟁과 근현대의 전쟁을 순화해 스포츠로 경쟁하도록 만든 것이어서 '슛'이 살상 무기를 발사하는 것과 같은 단어임에도 스포츠에서는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총을 발사할 때도 '슛'이라고 한다. '슈팅 게임'이라고 할 때, '슛'은 총을 쏘는 것을 의미한다. 사격은 필연적으로 뭇 생명을 죽이는 행위다. 스포츠에서도 사격이 따로 있지만,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는 실제로 사람들을 죽이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군인들은 총을 쏘고, 총알은 날아가서 사람들을 죽인다. 그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맞으면 '적군'을 사살했다고 좋아한다.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터에 군인으로 나가서 총질을 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남성들이다. 고대 모계사회가 한동안 지속되다 인류의 정착, 농사의 발견,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고,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면서부터 육체적으로 강한 남성이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인류가 벌인 모든 전쟁과 학살과 범죄는 거의 대부분 남성들이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슛'은 남성들의 폭력적 행위를 상징하는 단어가 된다. 단지 전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섹스에서 보여주는 태도 또한 그러하다. 남성은 튀어나온 성기를 가지고 있고, 성기에서 정액이 '발사'된다. 이때, 발사되는 정액은 '슛'으로 표현한다. 인류의 거의 모든 시기에서 섹스에 관해 남성은 능동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고, 여성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것은 명백히 남여의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며, 남성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성적 태도는 '슛'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현대에 들어와서 고전적 의미-총을 쏘는-의 '슛'이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바로 카메라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행위가 '슛'을 대신하고 있다. 카메라는 그 자체로 총과 매우 비슷한 형태와 상징을 보유하고 있는 물건이며, 피사체를 겨냥한다는 점에서는 총과 똑같다. 다만 카메라는 피사체를 죽이지 않을 뿐이다. 카메라를 찍는 사람은 셔터를 누르는 행위를 '슛'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전쟁이나 스포츠를 거쳐 새로운 문화로 이전하는 남성적 행위의 변형된 상징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사진을 남성만 찍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남성성이 내재해 있는 행위를 여성이 한다고 해서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즉 여성이 카메라로 피사체를 향해 셔터를 누르는 것도 '슛'이며, 그 행위는 여성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남성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상징으로 굳어진 행위는 하나의 의미체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 '슛'은 '쏘다'라는 의미처럼, 기본적으로 공격적이다. 남성의 공격성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데, 개인으로는 여성과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드러나고 집단으로는 하나의 패거리가 다른 패거리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경우, 국가 단위에서는 전쟁이라는 형태로 남성의 폭력성이 발현된다. 이때 이들이 보여주는 행위는 모두 '슛'이다. 즉, 무언가를 향해 '쏘는' 행위인데, 남성의 손에 무기가 들려 있을 때는 살상이 일어나고, 스포츠일 때는 격렬한 경쟁과 아드레날린의 폭발이, 자동차를 탔을 때는 폭주와 난폭 운전으로 드러나게 된다. 도로에서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달려가는 자동차는 그 자체로 '슛'이다. 즉 어디론가 발사된 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성(성)은 매우 목적지향의 성향을 갖고 있다. 남성(성)이 인류의 진화와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된 것임은 의심할 나위 없지만, 남성(성)의 일부는 부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발현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태도가 그렇고,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발현되는 현상들-폭력성, 호전성, 편협함, 일방성, 야만성, 단순성-은 남성의 긍정적 역할과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인류 전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현대에서 '슛'은 거의 모든 남성에게 있어 인터넷과 게임으로 수렴하고 있다. 게임을 하는 인구의 다수는 남성이고, 남성들은 게임에서 온갖 무기를 사용해 게임 캐릭터를 죽인다. 즉 그들은 마우스와 키보드로 '슛'을 쏘고 있는 것이다. 남성의 본능과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이 게임을 통해 발현되는 것은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남성(성)을 강요-즉 폭력성을 강요-하고, 남성이 사회에서 받는 구조적 억압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방식으로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사회에서는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물리적 폭력, 성추행, 성폭력-은 오히려 심각한 수위에 이르고 있는데, 남성들이 인터넷 게임에서 캐릭터를 사살하는 것이 남성의 폭력성을 완화한다고 볼 수는 없다. 남성우월주의 사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체제는 남성에게도 강한 압박을 주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그 체제의 주인이고,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이지만 자본(가)은 또 다른 자본(가)과 강력한 경쟁을 해야 하므로, 그들끼리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즉,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남성들은 그 자체로 기득권이지만 남성들끼리의 경쟁이 심하기 때문에 그들 역시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물론 이런 기득권 세력의 경쟁과 스트레스를 약자들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어느 체제-자본주의든, 남성우월주의-든 피해자와 약자는 물론이고, 기득권자들도 그 체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슛'에 열광한다.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살육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약자들의 고통을 히히덕거리며 즐긴다. 스포츠 시합에서 경쟁을 즐기고, 섹스 산업에 깊이 참여하며, 여성을 대상화하고, 자기과시와 경쟁,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행위들, 카메라로 피사체를 찍으며 좋아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속에는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돌아온 탕자'는 용서해야 하는가?
    '돌아온 탕자'는 용서해야 하는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기독교 성경 가운데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어떤 부자 노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먼 지역으로 떠나 그곳에서 방탕하게 지내다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치기를 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더니 아버지가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극진하게 맞이하여 기뻐한다는 내용이다. 이때 큰아들이 들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니 집안이 잔치를 한다고 떠들썩해서 무슨 일인가 의아했는데, 동생이 돌아와서 소를 잡고 잔치를 한다는 말을 듣고는 화를 냈지만, 아버지는 큰아들을 말리면서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쁘게 생각하라고 타일렀다. 이후 큰아들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요즘 말로 하자면 '왓 더 퍽'이 되겠다. 아버지 재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써서 받아 나간 동생 새끼가 신나게 즐기다가 돈 떨어지니까 다시 집으로 기어들어온 것을 본 형은 머리에서 스팀이 올라온다. 자기는 동생이 나간 다음에도 줄곧 집안의 일꾼들과 똑같이 아침에 일어나서 밭으로, 농장으로 돌아다니며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 쓰고 일을 하고 돌아오는 생활을 했는데, 약아빠지고 교활한 동생 새끼는 재산을 받아서 신나게 즐기다가 뻔뻔하게 기어들어왔으니 얼마나 화가 나고 짜증이 나겠는가.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 이야기가 야훼를 믿지 않는 이방인이 신에게 귀화하는 은유라고 말하고 있는데, 신의 자비로움과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비유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낮은 것이 사실이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최근 일부 언론에서 보도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이 이야기와 매우 흡사해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다. 어떤 교장에게 두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들이 모두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했다. 그 아이들은 학교 교장이던 엄마에게, 더 이상 학교에 가라고 하면 죽어버리겠다고 할 정도로 학교를 증오했는데, 공교육 시스템의 핵심에 있던 교장은 그런 두 자식의 장래가 몹시 걱정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두 아이가 학교를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게 된 원인이 바로 엄마인 교장에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아이들을 점수 기계로 만들면서 악랄하게 학대했다. 물론 자신이 아이들을 얼마나 학대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겠지만. 결국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 전까지 강요하지 않는 요령을 배웠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을 때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 그렇게 아이 둘은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책으로 써서 냈다. 그것도 '반성문'이라는 제목까지 넣어가면서. 이런 책을 내는 의도는 '나는 이렇게 좋고 훌륭한 엄마다'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싶은 인정욕구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지난 태도를 반성한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훌륭하게 자리 잡은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것이 더 클 것이다. 나는 이런 책을 쓴 사람이 바로 '돌아온 탕자'라고 본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병신같은 탕자 즉 부자의 둘째 아들로 살아가다 죽는다. 그들은 어리석어서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멍청한지도 모른다. 자식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 부모들이 바로 그들이다. 죽으나 사나 학교에 가야하고,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학원 뺑뺑이를 돌리고, 서울대학교를 가야 하고, 판검사가 되야 하는 것이 이들 '탕자' 같은 부모들이다. 이렇게 어리석고 멍청하고 병신같은 부모들은 그대로 '탕자'로 살다 죽는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극히 일부가 바로 이 교장처럼, 한국 교육의 잘못된 시스템을 인정하고, 자식의 선택을 존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식이 건강하게 성장하면 언론에서는 그런 부모를 칭송하고 찬양한다. 바로 '돌아온 탕자'가 되는 것이다. 가장 열받는 것은-아니, 열받을 일도 없지만-늘 한국 교육 시스템의 왜곡을 비판하면서 독립적으로 자식을 키운 부모들이다. 이들은 '돌아온 탕자'의 형처럼, 늘 변함없이 자식의 삶을 지지하고 학교 교육에 연연하지 않으며, 올바른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하는 부모들과 학생들이다. 정말 잘 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쪽에서 열심히 살아가는데, 온갖 병신짓을 하던 인간들이 어떤 이유로 개과천선을 했다고 해서 마치 대단한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을 보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부모와 학생들이 보기에 한심하고 역겹기만 하다. 자식을 도구로 생각하던 부모가 마침내 개과천선을 해서, 그것도 자식이 죽겠다고 최후의 통첩을 날리고, 무수한 고통과 저항을 통해 부모의 의도를 무력화한 다음에서야 마지못해 자식을 인정한 다음에야 문제가 바로 자신(부모)에게 있다는 걸 깨달은 부모가 마치 대단한 발견을 한 것인양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것은 역겨움을 일으킨다. 그가 변하게 된 것이 자식들의 저항에 의해서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자식들이 만약 기존의 삶에서 소위 일류대학에 들어갔다면 과연 새로운 삶의 방향에 대해서 눈꼽만큼이라도 생각을 해봤을까? 결국 타의에 의한 마지못한 깨달음을 어떻게든 합리화하기 위해 마치 자기가 새로운 삶을 발견하고 깨달은 것처럼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다른 쪽에서 항상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말이다. 출처: http://marupress.tistory.com/2458 [知天命에 살림을 배우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민주노총과 전교조
    민주노총과 전교조 민주노총이 청와대의 초청을 거절한 것과 그 이유를 두고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며칠 상황을 지켜보다가 민주노총의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어느 쪽의 잘잘못을 떠나 민주노총이 청와대의 초청에 응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노총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청와대의 초청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대중에게 충분히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노총은 조직의 논리가 우선일 수 있고, 노동계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생각을 의식할 이유도 없겠지만, 민주노총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적어도 페이스북에서는-조직의 논리에 함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민주노총이 한국 노동계를 대표하는 단체인지, 한국노동운동을 이끌고 있는 주역인지, 한국 노동계급의 혁명성을 추동하는 전위적 단체인지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이것은 현재 법외노조 상태인 전교조에게도 하는 똑같은 질문이기도 하다. 통계 자료를 보면,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율은 10% 정도다. 전체 노동자의 10%만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말이다. 노동인구가 2천만명일 때, 노동조합원은 약 200만명이다. 그 가운데 한국노총이 50%인 100만명, 민주노총이 40%인 80만명, 양대 노총에 미가입조합원이 10%로 20만명 정도로 대략할 수 있다. 즉, 한국의 노동자 2천만명 가운데 불과 80만명만이 민주노총의 조합원일 뿐이다. 불과 4%의 조합원을 가진 노동조합이 과연 한국노동운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 숫자로만 본다면 이는 전혀 의미 없는 주장이지만, 민주노총은 한국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진보적인 뿌리를 가진 유일한 단체라는 점에서 노동운동의 대표성을 부여받고 있다. 민주노총은 1920년대 일제시대부터 발생한 노동운동의 성과를 이어받았고,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 군부독재 상황에서도 노동자의 계급적 모순의 해결과 한국의 정치, 사회상황의 민주주의적 개선을 위해 가장 앞장 서서 가열차게 싸워왔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으로, 사회사적으로 민주노총의 대표성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민주노총은 예전의 계급적 투쟁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가 전체적으로 민주화의 진전을 보이고, 정치적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는 큰 문제 없이 자리잡으면서, 자본의 폭압 또한 시민민주주의의 힘에 의해 일정 부분 양보하는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전에는 노동계와 노동운동이 사회의 변화와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가장 핵심의 역량이고 중심 노릇을 했지만, 이제는 시민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의식이 저변이 넓어지면서 상대적으로 노동계급의 지도성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노동계급의 지도적 역량이 급격히 위축된 이유는 노동자와 대표조직인 노동조합이 시대의 흐름을 올바르게 읽어내지 못하고,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고립의 원인은 스스로 변화하려 하지 않는 오만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학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들이 배우려 하지 않고, 노동자를 조직하는 노동조합이 조합원을 교육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지 않아서 무식하고 무지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 노동운동의 퇴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무식하다. 단언컨대, 한국의 노동자들은 공부하지 않는다. 그들이 현장에서 단순조립을 하는 노동자건, 강남의 최고 좋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무직 노동자건 자신이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노동자의 사회역사적 임무가 무엇인지를 공부하는 노동자는 1%도 안된다는 사실을 장담할 수 있다. 최소한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가 한 달에 한 권의 책만 사 읽어도 무려 200만권의 책이 팔리게 되고, 한국출판시장이 불황으로 허덕인다는 말은 사라질 것이다. 노동자들은 퇴근하고 술집에 가서 몇 만원, 몇 십만원의 술을 마시면서도 한 달에 한 권 1만원의 책값은 지불하지 않는다. 하루 한 갑의 담배값으로 5천원씩 한달에 15만원은 아무 생각없이 지불해도, 한달에 한권 1만원의 책값은 지불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공부하지 않는 노동자는 역사의 주인도 아니며, 변혁의 추동자도 아니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핵심 세력도 아니다. 그저 멍청한 자본의 노예에 불과할 뿐이다. 민주노총은 과연 노동자의 교육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스스로 물어보기 바란다. 또 하나,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의 조합원들 가운데 권위적이고 부패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들이 '노동귀족'이라는 말로 비판하는 수구집단의 주장에 대해 매우 모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알지만, 양대 노총이 '노동귀족'으로 불리는 이유 또한 분명히 있다는 것을 양대노총의 지도부가 모를 리 없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대기업의 하부 노동조합에서 조합원으로 가입한 노동자가 현장에서 노동을 하다 대의원으로 선출되자 더 이상 현장에서 노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회사에서 극진한 대우를 해 주고, 깨끗한 옷을 입고, 손에 기름때를 묻히지 않으며, 저녁에는 노동조합 간부나 회사의 관리직 직원들과 함과 함께 비싼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단지 단위 노동조합의 대의원일 뿐인데도 이런 대우를 받게 되니 그 노동자는 노동권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새삼 깨달으면서 다시는 현장노동을 하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대의원과 노동조합 임원 선거 때가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돈과 술수를 쓰게 된다. 이 이야기는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한국의 대기업 노동조합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명한 현실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상당부분 부패했고, 노동자들의 정신은 썩었다. 한국노총이든 민주노총이든 이런 비판에 대해 '아니다'라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본가와 수구집단이 민주노총을 공격하는 빌미를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지도부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정파들이 갈라지고, 내부투쟁이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노선투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부의 투쟁으로 인해 계급투쟁과 사회변혁의 동력까지도 내부로 붕괴되는 상황이라면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민주노총이 산하 조합과 조합원들에게 노동계급의 의식을 고양하고,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변혁의 주체라는 것을 끊임없이 교육하려 하지 않고, 단지 조직의 논리에 매몰되어 임금인상 따위-여기서 '따위'는 계급투쟁에 비하면 지극히 낮은 수준이라는 비유다-에나 역량을 소비하는 태도가 몹시 마땅치 않다. 이번 청와대 초청 거부 상황도 그렇다. 문재인 정부가 한국의 정치사에서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합법, 민주정부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그들이 문재인 정부와 대립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민주노총은 자신들의 논리를 내세우며 자신들이 옳고, 청와대가 잘못했기 때문에 초청을 거부했다고 주장하지만, 대중은 결코 민주노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중의 정서가 시대의 흐름에 얼마나 중요한가는 촛불혁명으르 보면서 배웠을텐데, 민주노총은 여전히 잘 모르는 듯 하다. 대중은 이렇게 생각한다. 민주노총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오히려 몸을 낮추고 조용히 있다가 민주정부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기가 살아서 사사건건 훼방이나 놓고 있다고 말이다. 민주노총의 입장에서는, 이 말이 올바르지 않고, 왜곡되었으며, 몹시 분개할 내용이라 해도 이런 이미지가 대중의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주노총이 전략적으로 판단한다면, 지금 문재인 정부와 함께 손을 잡고 적폐세력인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세력을 먼저 다 때려잡은 다음, 자본(가)을 압박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성과를 얻어내는 것이 올바른 과정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한때 한국의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핵심세력이었고, 민주주의의 견친세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두 단체는 역사적으로 올바른 일을 했고, 그 자체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민주노총과 전교조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부패하거나 정파투쟁으로 동력을 소모하는 것은 그만큼 충분히 비판받아야 한다. 더구나 조합원의 낮은 의식수준은 시민 일반의 평균보다 낮은 지식과 사회성으로 인해 오히려 사회변혁에 방해가 되고 있다. 노동자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노동자의 계급성을 각성하지 않고는 지금 민주노총과 전교조가 아무리 강한 주장을 한들, 먹히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비난만 받게 될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출처: http://marupress.tistory.com/2450 [知天命에 살림을 배우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비행기 좌석의 계급성
    비행기 좌석의 계급성 비행기를 탈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비행기 좌석처럼 천민자본주의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현상도 드물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이런 노골적이고 전면적인 차별은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돈의 많고 적음이 곧 계급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누군가 벤츠를 타고, 누군가 마티즈를 탄다고 했을 때, 그 차이는 오로지 돈 한 가지 뿐이다. 거기에서 그 사람의 지식, 인격, 품성, 도덕성, 양심 등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같은 이유에서 아파트 평수가 그렇고, 유명 메이커의 소비가 그렇고, 문화의 향유가 그렇다. 물론 돈이 많다고 해서 자신의 무식과 천박함까지 세련되게 바꿀 수는 없다. 자본가와 부르주아는 대개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세련된 문화를 익혀 오기 때문에 그들은 '돈도 많은 것들이 착하기까지 하다'는 말을 듣는다. 게다가 교양 있고, 품위까지 있어 보이니 자본가와 부르주아는 사회를 이끌 '지도층'이 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경우, 자본가와 부르주아들은 천박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그들이 발딛고 서 있는 바탕이 바로 '돈'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성과 교양과 철학을 바탕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라면 이런 이야기는 할 이유가 없겠지만, 그들이 '돈'을 바탕으로 서 있다는 전제와 역사적 배경에는 민중의 피를 빨아서 만든 부의 탑이 있다. 그것을 경제용어로 '착취'와 '이윤'이라고 말하고,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부의 원천을 '잉여노동'으로 봤다. 어떤 표현이든 자본가는 민중의 고혈을 짜내 그것으로 더 큰 집과 더 좋은 차와 더 좋은 사치품을 소유하고, 그 돈으로 권력을 사거나, 권력을 향유한다. 상징적으로, 같은 공간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비행기 좌석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지배, 피지배 계급의 존재임을 선명하게 인식하도록 만들고, 비싼 자리에 앉아 가는 사람들에게는 정신적 우월감과 지배계급의 여유를 갖도록 하고, 일반석에 앉은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무능력에 대한 자책을 느끼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니까 돈 많은 사람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크고 넓은 좌석에 앉아 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덩지가 큰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함부로 때려도 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무지하고 멍청한 말이다. 즉, 눈으로 보이는 현상만을 두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본질을 모르거나, 은폐하는 것이어서 어느 쪽이든 다 나쁘다. 한때 비행기를 타는 승객들 가운데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은 비행기 표 가격을 더 받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때 '첫번째 계급'과 '사업용 계급'의 좌석은 예외였다. 즉 가장 가난한 좌석인 '경제적 좌석'의 표를 사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몸무게 비용을 더 받겠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자본의 일반적 착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정책이었다. 비행기 좌석의 계급성은 똑같은 목적지를 가는 비행기 내부에 세 단계의 차별 공간을 두어, 좌석, 서비스, 음식 등을 차별하는 것이 문제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가장 낮은 단계의 서민용 좌석이 사람이 앉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좁다는 데 있다. 항공사는 어떻게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제적 좌석'의 숫자를 최대로 늘린다. 반면 이윤이 많이 발생하는 '첫번째 계급'의 좌석은 매우 넓고 쾌적하다. 이들이 지불하는 비용이 '경제적 좌석'에 비해 적게는 5배에서 많게는 10에 이른다는 걸 계산할 때, 그들이 차지하는 공간 역시 그에 상응하는 것이 자본의 논리에 맞는다. 항공사로서는 '경제적 좌석'의 사람들이 많은 것보다 '첫번째 계급'의 좌석이나 '사업용 계급'의 좌석이 더 많이 팔리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결국 자본의 체제, 자본의 구조가 깨지지 않는다면, 이런 차별과 계급성의 적나라한 풍경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대형 비행기 안에 차별하는 좌석이 없이, 모든 좌석이 사람이 쾌적하게 여행할 수 있는 넓이로 만들어지고, 돈의 많고 적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나의 목적지로 가는 모든 사람들이 우월감이나 수치심 없이 비행기에 앉아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여행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결코 환상도,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비행기 좌석의 계급성을 사람들이 자각하고, 바로 그 '계급'을 소멸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일부터 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불합리한 제도와 차별과 불공평한 것들이 끊임없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려보자. 앞부분부터 꼬리까지 철저하게 계급으로 나뉘어 있는 생존열차에는 앞에서 말한 비행기와 똑같은 구조로 사람들이 계급에 따라 살고 있다. 그것을 '상상'이라고 말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생각을 조금만 비약한다면, 우리가 타고 다니는 전철에도 비행기 좌석과 같은 제도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10개의 전철 차량에서 앞부분 1개는 가장 비싸고 고급한 전철비를 받는 대신, 온갖 최고급 음식과 술, 음료수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 승무원이 서비스를 한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여성비하 문제는 잠시 접어두자) 그리고 그 다음으로 2개의 객차는 비행기의 '비즈니스석'에 해당하는 서비스를 한다고 가정하자. 나머지 7개의 객차는 '이코노미석'이라고 하자. 비행기는 왜 당연하고, 전철은 왜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전철이 너무나 서민적이어서? 아니면 전철은 너무 멀리 다니지 않고 도시 하나만 돌아다니니까? 그런 이유라면 충분한 반론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여전히 '자본'에 대해 잘 모르거나 순진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점들인데, '자본'은 이윤을 창출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어떤 사업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자본의 속성이 바로 이윤추구이기 때문이다. 전철을 돈에 따른 차별화 서비스로 만든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처음에는 웃긴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면 몹시 고통스러울 것이다. 정부(국가)는 돈이 되기만 하면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담배 산업도 '독점'으로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들인다. 정부나 자본이 정의롭거나 지혜롭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들은 무수히 많다. 전철의 차별화 서비스가 마땅치 않고, 기괴하고,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비행기는 왜 그래야 하는가? 왜 비행기는 좌석을 차별화하고, 전철은 차별화하지 않으며, 극장의 좌석은 일률적이지만 공연장의 좌석은 왜 로얄석과 VIP석과 일반석으로 나뉘어 액수의 차이를 두어야 하는가. 공연장이 좌석의 위치에 따라 더 잘 보이는 이유 하나 만으로 차별을 두는 것이라면 극장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비행기가 서비스(전체)의 차이에 따라 항공요금에 차이가 있는 것이라면 전철도 같은 논리로 그렇게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상식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자본'이 추구하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사회윤리나 도덕성과는 커다란 괴리를 보인다. 그것은 자본이 작동하는 논리가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비행기 좌석에 차별을 두어 돈을 다르게 받는 것은 항공사의 이윤 추구 행위 때문이다. 항공사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모든 좌석을 똑같은 비율로 만들고, 항공료를 똑같이 받으면 항공사는 적자가 발생한다. 즉 '첫번째 계급'과 '사업용 계급' 좌석을 만들어 이들에게 많은 돈을 받고, '경제적 계급' 좌석의 비용을 낮추는 것이 오히려 서민들에게 이익이다,라고. 얼핏 들으면 맞는 소리로 들린다. 그것이 자본 시스템 속에서 굴러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하지만 이런 주장은 헛점이 많다. 비행기표를 구입할 때 제 값을 다 주고 구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좌석이든 할인을 한 가격으로 구입하게 되며, 항공사의 논리대로 좌석 차별과 항공료의 차별을 두지 않으면 항공사가 적자라는 논리는 쉽게 반박된다. 오히려 좌석을 넓히고, 차별 좌석을 없애고, 항공료를 합리적 가격으로 받으면 항공사는 적자를 면할 수 있을 것이고, 사람들은 훨씬 쾌적하게 비행기를 타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 좌석의 차별과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비행기를 타는 일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훠스트 클라스를 타고 다녀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체제 내적 적응을 생각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논리에 늘 이용당하거나 자기 중심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비행기 좌석은 지금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비인간성, 계급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아이콘이다. 높은 계급의 좌석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불만이 없겠지만,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한줌도 안되는 것들이다. 출처: http://marupress.tistory.com/2430 [知天命에 살림을 배우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노무현 대통령님께
    노무현 대통령님께 믿고 싶지 않습니다. 믿을 수도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이 서거했다는 말을 23일 아침,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당연히, 루머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제가 살고 있는 양평군의 군청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조문을 했습니다. 돌아가신 것을 믿지 않고, 마음에서도 떠나 보낼 수 없는 분이었지만, 더 늦으면 조문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사흘, 인터넷에서, 거리에서 많은 시민들이, 네티즌들이 한 마음으로 마음 아파하고, 깊이 슬퍼하며 눈물 흘리고, 가슴을 치는 것을 보며, 먹먹한 마음으로 바라만 봤습니다. 글을 쓸 수도 없었고, 음악도 들을 수 없었고, 웃을 수는 더욱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무현 대통령님에 대한 그리움이, 애틋함이,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갑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님에게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한나라당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 노무현에 대해서는 변함없이 애정과 존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오늘까지, 언론을 통해 알고 있고, 각종 매체에 나온 모습을 보며 그 참된 인간성만은 진실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극우 세력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무시하고, 비하하고, 비웃고, 깔보고, 비아냥거리고, 조롱하고, 악다구니를 할 때도 ‘노무현’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극우 파시스트들은 노무현 대통령님의 죽음을 비웃고 있습니다. 김동길이라는 늙은이, 조갑제라는 인간사냥꾼을 비롯해 소위 권력과 금력을 가졌다는 자들은 ‘상고 출신’의 대통령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나는 믿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죽음은 단순한 ‘자살’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가 이미 보았던 숭고한 죽음의 예를 들 때, 앞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도 포함될 것입니다. 1970년에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애쓰다 분신한 전태일 열사, 1973년에 미국의 사주를 받은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맞서 총을 들고 싸우다 마지막 순간에 권총으로 자살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비록 총을 들지는 않았지만,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극우 파시스트 세력에 맞서 온몸을 던져 항거하신 것임을 잘 압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인터넷에는 예전 노무현 대통령님의 여러 사진과 동영상, 음성 등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사진, 동영상, 음성은 하나같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모습, 불의에 항거하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담은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 지도자의 모습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님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따뜻한 웃음과 정이 넘치는 말,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하는 유머, 권위를 버리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깊은 정, 무수한 역경을 딛고 일어서 평범한 서민들에게 큰 힘이 되었던 의지,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해 보이지 않지만 사회의 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님이 더욱 간절히 보고 싶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죽음과 함께 이 나라의 민주주의도 죽었습니다. 이승만의 독재, 박정희 군사독재,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독재, 김영삼의 나라 망치기까지 한국 현대사는 피투성이였습니다. 극우 파시스트들은 이 시기를 ‘좋았던 시절’이라고 말합니다. 국민들이 피를 빨리고, 가난과 사회적 고통 때문에 무수히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극우 파시스트들이 바로 그 서민들이 선택한 대통령을 죽인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으로 탄생한 노무현 정부를 ‘좌익 정권’이라고 왜곡하며 끊임없이 딴지를 걸었던 바로 그 세력이 노무현 대통령을 죽인 것이고, 민주주의를 죽인 것입니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와 맞서 싸우기 전에 마지막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박해 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살아 있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살아 남은 자들의 몫입니다. 이 나라에서 억압과 폭력과 통제가 판을 치는 한, 극우 파시스트 세력이 득세하는 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님을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이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 진보 진영에서도 많은 비판이 나왔습니다. 저 역시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 가운데 일부 불만스러운 내용이 있었고,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인간 노무현’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대통령 혼자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의지와 철학이 훌륭해도 실제 적용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통령 노무현이 들어야 하는 비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외로웠을 것입니다. 더더욱 죄송하고 미안한 것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 봉하 마을로 돌아온 이후, 극우 파시스트들의 악랄하고 집요한 공격을 막아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책임은 아니겠지만, 노무현 대통령님이 세상을 떠난 지금, 너무도 깊이 후회되고 마음 아픕니다. 소위 진보 진영이라고 해서 ‘개량주의자 노무현’ 따위는 거들떠도 안 본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데올로기를 떠나 우리는 인간과 인간으로, 사람 사이의 따뜻한 관계를 먼저 맺었어야 했는데, 모든 것을 먼저 따지고, 이론화하고, 논쟁을 하고, 흑백을 가려야 하고, 선명성을 드러내야 하는 강박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비록 세계관이 다르다 해도, 저는 노무현 대통령님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온화한 웃음 속에 깃든 뚝심을 느끼며, 생각만 많고 말만 살아 있는 소위 ‘지식인’이라는 것들과는 다른,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님의 삶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억울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님과 함께 민주주의도 떠나보내야 하는 비통함 때문에 더더욱 보내드리기 어렵습니다.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 먹먹함을 어찌해야 할까요. 깊은 밤, 인터넷에서 보이는 노무현 대통령님의 모습을 보며 눈물이 흐릅니다. 정의로운 대통령, 서민을 위한 대통령, 인정 많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대통령을 죽인 자들이 음침한 곳에서 웃고 있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죽음은 끝이지만, 시작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죽음은 현재의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지만, 역사에서는 시작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죽음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시작하는 기폭제가 될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믿어야만 마음이 덜 아픕니다. 부디 평안하시길 마음 깊이 빌고 빕니다. 출처: http://marupress.tistory.com/2314 [知天命에 살림을 배우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공기가 다르다
    공기가 다르다 5월 9일과 10일 사이에 세상에 기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내가 숨쉬는 공기가 달라진 것이다. 그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10년 전부터 엊그제인 5월 9일까지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 질식할 것 같은 공기였다. 총체적 무능과 부패가 만연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세상이었는데, 어제부터는 공기가 싹 바뀌어서 왠지 상쾌하다. 우리의 일상을 내리누르는 무겁고 답답한 공기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이 내뿜는 타락한 오염의 공기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취하고, 국민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권력자들 때문에 우리는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아왔다. 다행히도 지난 연말 대통령과 그 측근의 비리가 드러나고, 촛불시민이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다. 모두의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대통령은 좋은 사람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대통령 측근 가운데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인물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진보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다수의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고, 직전의 두 대통령 이명박과 박근혜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인물이다. 한국정치사에서 손꼽을 수 있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뒤를 이어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고, 적폐를 청산하고, 정의와 불평등을 상당부분 해소할 능력이 있는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았다. 그래서 아침이면 몸과 마음이 가볍다. 예전에는 마음 속에 묵직한 덩어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아픔이나 고민이 아닌, 사회가 만든 깊은 우울과 절망의 덩어리였던 것이다. 정권이 바뀌고,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자, 그 역겨운 덩어리가 눈녹듯 사라졌다. 내 개인의 고민이나 아픔이야 혼자 감당하면 되지만, 세월호 참사처럼 온 국민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남는 사건이 떳떳하게 밝혀지지 않고, 권력자가 사건을 은폐하고, 피해자와 그 가족을 오히려 음해하고, 온 세상에 억울한 국민들이 넘쳐나게 만드는 나라에서, 혼자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억울함과 슬픔은 국가가 보듬고 해결하는 것이 상식이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으려 노력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인데,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그런 인간적인 정부를 만나지 못했고, 오로지 국민 스스로 슬픔과 고통을 삭여야 했다. 이제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정부가 탄생했으니, 우리의 사회적 아픔과 억울함과 비통함은 정부에 맡기자. 그리고 우리는 보다 나은 세상의 청사진을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마음을 모으자. 지난 적폐 정권을 여전히 지지하는 일부 어리석고 멍청한 국민이 있지만, 그들도 좋은 세상의 혜택을 입는 국민이 될 것이고, 정의와 진보는 모두에게 고르게 손길을 내민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만이 이 나라가 가야 할 미래이다. 대통령 임기 첫날부터 청와대의 참모진을 발표하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했던 상식과 촛불의 민심이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수구집단, 적폐세력들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빨갱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상식적이고 올바르며 건강한 시민의식을 가졌는지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대의적인 의미에서, 민주사회에 동참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자들은 함께 하겠지만, 촛불민심이 뽑은 정부를 끝까지 음해하고, 발호하는 적폐세력은 과감하게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것이 정치인이든 언론이든 결코 용서하거나 좌시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지, 반동과 반역, 음해, 발호까지 용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득권을 누리던 검찰, 일부 부패언론, 재벌 등 수구기득권 세력에 대한 엄정한 개혁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뿜어내는 부패의 연기가 국민의 가슴을 썩게 만들었다. 이제는 맑고 깨끗한 공기로 바꿔서 마음껏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새로운 정부에 바라는 바 크다. 출처: http://marupress.tistory.com/2311 [知天命에 살림을 배우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거시와 미시
    거시와 미시 오래 전, 중학과정의 미술시간에 무뚝뚝하고 날카로웠던 미술선생이 '미시미'와 '거시미'에 관해 설명한 내용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쉬운 개념이지만, 열 네살의 어린 나이에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신기하고 놀라웠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최근 어떤 페미니스트의 글을 읽으면서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극좌' 편향을 가진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이 보여주는 비판의 일반화 오류를 발견하고, 그것을 나에게 적용해 보았다. 내가 전투적 페미니즘에서 불편함을 느낀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내가 남성이고, '원죄적 기득권'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홍준표가 자서전에서 밝힌 것처럼, 여성 모르게 돼지흥분제를 술에 타 먹여 성추행, 성폭행을 하려는 시도를 두고,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남성들이 그러한 본성, 본능을 내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남성'은 잠재 성범죄자이며, 여성의 적이라는 주장을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에 대한 적대적 분노를 이해하고 공감한다. 물론 내가 아무리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해도 그 수준은 지극히 낮을 수밖에 없고, 여성의 입장에서는 '조족지혈'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렇다해도, 남성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원죄적 기득권'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 말고, 적극적으로 여성을 억압, 수탈, 학대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상황을 조금 바꿔서 생각해 보자. 노예제 사회에서 흑인 노예들은 백인에 종속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백인노예주들은 흑인노예를 착취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고, 호의호식하며 대를 이어 떵떵거리고 산다. 하지만 백인들 가운데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돈 많은 농장주도 있지만, 흑인노예들과 크게 처지가 다르지 않은 가난한 백인 농민, 노동자도 있다. 즉, 남성 중심의 사회, 남성가부장제 사회에서 많은 남성들은 노동자, 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어항 속에 들어 있는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젠더적 불평등과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예제 사회에서 가난한 백인이라도 흑인노예가 당하는 처절한 억압과 착취의 고통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여성의 존재는 가부장제사회, 노예제사회에서는 백인농장주>백인여성>흑인남성>흑인여성의 순서로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존재인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자본가>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남성>여성의 순서로 착취와 억압의 밀도는 높아지게 된다. 이런 논리로 볼 때, 인류의 초기, 모계사회를 제외하면 여성은 약자 가운데서도 가장 약자의 존재로 자리매김해 왔던 만큼, 지금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이 보이는 극단적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 현상을 들여다 볼 때,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관점을 혼동하거나, 무시하게 되는 순간, 합리적이고 정당한 논리는 사라지고 극단적인 주장만이 난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극우집단에서 가장 많이 주장하는 단어가 '종북좌파'다. 이는 '종북'과 '좌파'가 분명 다름에도 무지한 대중을 선동하는데 유용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변별하지 않고 뭉뚱그려 사용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남성 모두가 여성을 혐오하고, 학대하고, 성적 대상으로 삼고, 성추행과 성폭행을 공모하는 것이 아님은 전투적 페미니스트는 물론이고 평범한 여성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극소수의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은 세상의 모든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고 젠더적 공격을 가한다. 그렇게 하면 선명성은 확실하게 살아나지만 실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레닌은 '좌익소아병'을 경계하면서, 극단으로 치우칠수록 자기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의 사회적 입지, 인식의 개선, 동등한 인권의 확보, 젠더로서 받는 불평등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적'인 남성들 가운데도 여성의 동지가 되려는 사람들은 많다. 반대로 같은 여성이면서도 여성의 '적'인 동성들도 많다. 이런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운동도 아니거니와 어리석거나 무지한 소수의 고립된 행동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치루면서, 다섯 개의 정당은 자신들의 후보를 돋보이기 위해 상대방 후보와 정당을 공격했는데, 그 과정에서도 거시적 태도와 미시적 태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전략적, 전술적 실수를 많이 저지르는 것을 봤다.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는 적대적 후보는 홍준표가 유일하다. 하지만 홍준표를 제외한 다른 후보들도 문재인 후보를 공격했다. 그것도 선거공약이나 비전과 같은 구체적이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 아니라, 인신공격이 대부분이었으니, 홍준표 후보처럼 앙시앵 레짐 체제의 청산대상이라면 인신공격을 비롯해 어떠한 마타도어도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보수'나 '진보'로 표방하는 후보들이 홍준표 후보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태도였다. 문재인 정권에서 어떤 사안을 두고 거시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사회의 기조와 흐름이 지난 10년의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다는 흐름이 읽힐 때, 정권이 표방하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하지만 아주 작은 사안까지 꼬투리를 잡아 정권을 흔드는 것은 과연 누구에게 이로운 행위일까. 나는 지난 노무현 정권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잊을 수가 없다. 노무현 정권은 역대 가장 진보적이고 민주주의적 정권이었음에도 수구집단은 물론 진보진영에서도 조금의 정치적 배려나 인간적 온기 없이 오로지 가차없이 날카로운 비판과 비난의 화살을 날렸고, 그 결과 노무현 정권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수구집단의 승리로 끝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타의적 자살을 하고 말았다. 우리가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을 나누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권력을 향해 돌팔매를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만든 정권을 우리가 끌어내리고, 상처를 입히고, 수구집단에 제물로 바치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성운동에서도 동지적 관계를 지향하는 남성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운동을 도구로 삼아 여남평등의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뿐, 남성들과의 연대나 사회의 본질적 변혁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지적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하고, 거시적 관점에서 비판해야 할 것과, 미시적 관점에서 비판해야 할 사안을 구분하며, 적(수구반동집단)에 대항해서는 연합, 연대를 강화하고, 내부적으로는 건전한 비판과 우호적 연대를 키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여성운동이든, 정치권이든, 국제사회의 외교든 한결 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출처: http://marupress.tistory.com/2310 [知天命에 살림을 배우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한국 노동운동의 참담한 실패
    한국 노동운동의 참담한 실패 최근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이 조합원 투표를 통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분리하는 데 찬성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기아자동차 전체 노동자의 약 9%가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하는데, 이들은 이제 노동자의 노동자로 더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상급노조인 금속노조에서는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이런 투표와 그 결과가 '불법'은 아니기 때문에 징계하지 않겠다고 했다. '불법'이 아니니까 괜찮다는 말은 사기와 기만, 부패와 비리로 가득한 수구 정당의 대변인이나 할 수 있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소위 민주노총이라는 곳에서도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노동운동이 언제부터 '합법'의 영역에서 이루어져 왔는지 궁금하다. 한국은 노동운동이 단 한번도 올바르게 꽃피운 적이 없는 나라다. 역사적으로 기념할 1987-88년 노동자대투쟁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대기업 노동조합의 부패와 기득권의 옹호로 인해 '전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노동해방의 기치는 이미 완벽하게 사라졌고, '잃는 것은 노예의 사슬이고, 얻는 것은 노동해방'이라는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기꺼운 자부심 역시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자본과 적당히 타협하고, 야합하면서 자신들의 밥그릇을 더 키워가는 대기업 노동조합과 극히 소수의 정규직 노동조합만이 있을 뿐이다.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그나마 10%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대기업 노동조합이 조직력과 자금력에서 전체 조직을 좌우할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어려서 '소년 노동자'로 성장해 공장과 공사장을 전전하며 내 '노동력'을 자본에 팔아 먹고 살았던 경력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의 노동자는 여전히 나에게 동지적 연대감을 갖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열하고-물론 그것이 노동자의 탓은 아니지만-자본의 분열책동으로 갈라진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못하고 내부의 분열을 키우며, 차별과 갈등을 키우는 장면들을 보면서 노동자의 조직인 노동조합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노동조합이 무능하고 부패하게 된 이유는 당연히 그 안에 있는 노동자들의 의식이 썩어가기 때문이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역사와 노동운동의 이념, 자본주의의 필연적 모순, 노동자의 역사적 의무 등에 관한 교육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적어도 80년대에는 수 많은 사회과학 서적으로 자발적 공부를 하던 노동자들이 많았다. 당시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워낙 엄혹하기도 했거니와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주의의 투사로서 노동자는 대학생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었다. 노동자가 마르크스와 레닌을 공부하지 않고, 메이데이 투쟁의 역사적 사실인 시카고 노동자 대투쟁에 관해 공부하지 않고, 미국 노동운동의 피비린 현장을 들여다 보지도 않고, 레닌이 지도한 볼쉐비키가 어떻게 공장에서 노동자를 결집하고, 그들과 함께 학습하며, 러시아 혁명을 이끌어 갔는지도 배우지 않고,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지도 않고 감히 '노동운동'을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대기업 노동조합의 대의원이 되면, 현장에서 노동을 하지 않게 되고, 노동을 하지 않는 노동자는 더 이상 '노동자'의 의식을 갖지 않게 되므로, 그는 노조정치꾼으로 변하게 된다. 노동조합 내부에서도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쳐서 내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돌리는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이며, 자본보다 더 악랄한 분열과 편가르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대기업 노동조합 위원장이 되면 대형 승용차에 기사까지 두고 날마다 고급 술집에서 양주를 마시며, 회사의 간부들과 뒷거래를 해서 자신과 측근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이익을 배신한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 2500만 노동자들 가운데 불과 250만 명의 노동자만이 노동조합에 가입된 상태에서, 그마져도 건강한 노동조합의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노동조합의 임원들이 또 하나의 부패한 권력으로 떠오른 지금, 한국에서 노동운동은 명맥이 거의 끊겼다고 봐도 좋을 지경이 되었다.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 함몰된 것을 마르크스나 레닌은 가장 위험한 상태라고 경계했다. 그것은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에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노동자의 정신이 썩어가고, 자본주의의 체제에 순응하는 노예의 상태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필연적으로 '반자본주의'운동이며, 반자본주의 운동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는 혁명적인 운동을 말한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노동조합이 과연 있는가? 자본의 앞잡이인 권력기관(정부)의 폭력조직(경찰과 검찰)에 잡혀들어가 학살당하는 노동자가 80년대 이후 나온 적이 있는가? 자본이 던져 준 약간의 먹이를 두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그야말로 진흙탕 속의 개들과 같은 모습이 지금의 한국 노동운동의 현주소는 아닌가?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적인 노동자들-대개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은 절반도 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면서 상대적 우월감을 갖는다면, 그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인간쓰레기이며, 노예가 노예를 보면서 비웃는 꼴이다. 나는 이미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지지를 끊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어도, 더 이상 '동지적 연대'를 느끼지는 못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투쟁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한국에서 '귀족'처럼 살아가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 외에 모든 노동자는 개처럼 목줄이 매여 끌려다니다 비참하게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비웃고 있으며, 자본과 자본의 앞잡이 언론들은 그런 노동자 내부의 갈등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다는 것 역시 노동자들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자신들이 노예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지 않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그저 영원히 노예로 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단지 조금 형편이 나은 노예로 산다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일년에 단 한권의 책도 읽지 않는 노동자들이 저녁이면 술집으로 몰려가 술을 마시고, 프로야구 이야기나, 드라마 이야기나, 부르주아 정당의 정치인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현실이다. 공장에서, 현장에서 불평불만을 터뜨릴 줄은 알면서도 동지와 함께 노동자의 처지와 자본의 모순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책을 읽지도, 공부를 하지도 않는 노동자들이 과연 자신의 현 상황을 어떻게 올바로 인식할 수 있으며, 개선과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 평생 노예로 만족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인간들이 과연 자신을 '노동자'라고 말할 자격이나 있을까? 그들은 그냥 개돼지나 다름없는 존재들이다. 출처: http://marupress.tistory.com/2302 [知天命에 살림을 배우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제19대 대통령이 결정된 이후
    제19대 대통령이 결정된 이후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몇 번의 후보토론회를 방송으로 지켜본 다음, 이 사안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생각을 기록한다. 나는 지금과 같은 정치판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정치나 정치인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고, 거의 말하지도 않지만,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만은 사실이니, 싫다고 외면하는 것이 옳은 태도도 아니다. 지금은 모든 언론과 네트즌들이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 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조금 바꿔서 5월 9일 저녁, 대통령이 결정된 이후를 생각해 본다.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고, 그 후보가 되었을 때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좋지 않을지를 내 기준으로 평가해 보는 것이다. 나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지만, 위의 다섯 후보가운데 세 명은 내 관심권에서 완전히 사라진 사람이고, 두 사람이 그나마 '차악'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1.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우리 사회는 비교적 안정 국면으로 들어설 확률이 다른 후보들보다 높아 보인다. '문재인 정권'은 '대통령 문재인'과 '민주당'이라는 두 개의 관점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는데, '대통령 문재인'은 부족함이 많다. 그는 스스로도 밝혔듯, 진보정당에 비해 자신이 내 건 공약이 덜 진보적이라는 한계를 알고 있다. 예전 '노무현 정권'이 사실은 '삼성공화국'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는 것 역시 그의 한계다. '노무현 정권'에서 실세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사람인 만큼, 국제정세를 비롯해 국내외의 여러 현안들에 대해서는 다른 후보들보다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문재인 철학'이라고 할만한 그의 통치 철학이나 세계관이 뚜렷해 보이지 않는 단점이 있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은 그 자신, 민주화운동을 했던 진보적인 인물이며, 상식에 기반한 건전한 사고방식과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해 비교적 관심을 갖고 있는 좋은 대통령임에 틀림없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주었던 카리스마는 없는 것 같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망가뜨린 환경과 경제 분야를 어느 정도 추스리고, 국가의 운영체제를 정상 범주에 올려 놓는 것이 그의 역할로 보이며, 거기까지만 해도 상당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과연 얼마나 단호하게 4대강 사기꾼 이명박과 국정농단과 무능, 부패의 화신인 박근혜를 처벌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예전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국민대화합' 차원에서 사면했고, 그것이 오늘날 여전히 악의 뿌리가 살아 있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주장한 것처럼, 친일매판세력을 단호하게 응징하고, 이명박과 박근혜는 물론 그 주위에 기생해서 나라를 좀먹고 썩게 만든 잔당들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의 평가는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명박과 박근혜의 사기와 농단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조중동을 포함한 썩은 언론들이다. 국론을 분열하고, 기득권을 장악하려는 기존 언론을 해체하지 않으면 한국 사회는 더 이상 민주주의로 전진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문재인 대통령'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재벌과 대기업의 이익에 앞장 서는 순간, 그를 지지했던 많은 국민은 배신감을 느낄 것이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재벌 개혁과 대기업의 횡포를 근절하라는 것이 국민의 명령이었고, 그것이 진보정당의 후보지만 지지율이 낮은 심상정 후보가 더 마땅한 인물임을 알면서도 문재인을 선택한 이유였다. 단지 '무난한 정권'으로 남으려는 태도가 보인다면, 그것 역시 무능한 정권임을 증명하는 것임을 '문재인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적폐를 청산하고, 쓰레기 언론사를 청소하며, 재벌과 대기업을 개혁하고, 사회 전반에 부정과 부패를 쓸어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정권이 투명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정권이 들어설 것이고, 상식에 기반한 한국사회가 될 것이다. 내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는 이 정도지만, 과연 어느 정도의 개혁을 보여줄 지 궁금하다. 2. 홍준표 대통령 돼지흥분제를 여성에게 몰래 먹여 성폭행을 하려는 친구를 도와 준 것에 대해서 '오래 된 일이고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는 그가 대통령이 되면, 이 사회는 남성들이 여성을 공공연하게 성추행, 성폭행하는 사회가 될 지도 모른다. 지금도 한국사회는 남성이 여성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가해하고 있는데, 대통령이라는 자의 전력이 '성폭행 모의범'이라면 과연 그 세상은 어떨까. 전과 14범의 이명박이 '경제 대통령'이라고 사기를 치고 당선된 이후, 5년 동안 한국사회를 얼마나 망가뜨리고,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거나 빼돌리고, 국가를 수익사업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부를 쌓았는지 국민은 똑똑히 보고 알고 있다. 그 결과 4대강은 완전히 썩어서, 다음 정권에서는 4대강 공사를 완전히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이 나온 상황이다. 홍준표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신의가 없고, 말이 허황되며,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믿음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서민을 위한 대통령'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서민을 위한 정책을 거의 없고 재벌과 대기업을 위한 정책을 펴는 대통령이어서 국민은 제2의 이명박 정권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보수'라는 말이 결코 나쁜 말이 아님에도, 홍준표 대통령은 '보수'를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수구'로 규정하고 있다. '보수'와 '수구'는 완전히 다르다. 홍준표 대통령은 '수구' 즉 극우 집단을 대표하며, 그의 뿌리는 새누리-신한국-민정당-공화당으로 이어지는 친일매국 군사독재에 있다.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 학살정권의 뿌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홍준표 대통령이 과연 미래의 한국 사회를 건강하고 상식적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이 된다. 대통령으로서의 비전과 철학, 세계관도 보이지 않고, 즉흥적으로 말하고, 자신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정책을 결정할 사람으로 보여, 비유하자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이미 파면된 박근혜 대통령을 섞어 놓은 듯한 행보를 보일 것으로 판단되며, 그의 오락가락하는 행보로 인해 한국 사회는 평정을 찾지 못하고, 늘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게 될 것이고, 주변 국가로부터 조롱이나 받는 존재 즉 루쉰이 말하는 '아Q'같은 존재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3. 안철수 대통령 개인의 인기를 바탕으로 급조한 정당에서 대통령이 되었으니 지지기반도 약하고, 존재감도 희미하다. 대통령이 되기 위한 폭넓은 공부를 한 적이 없으므로 그 역시 대통령 업무를 수행할 뛰어난 자질이나 능력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가 얻은 대중적 인기는 '안철수'라는 개인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안철수보다 못한 인물들이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 호감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작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다른 정당들이 협조를 하지 않고, 국민의당 내부에서도 박지원을 비롯한 노회하고 부패한 인물들이 끊임없이 안철수 대통령을 흔들기 때문에, 자신만의 국정철학을 펼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선거 과정에서 보여 준 그의 민낯은 그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성공신화의 아우라를 완전히 벗겨냈으며, '개인 안철수'는 금수저로 시작해 운이 좋아서 성공한 벤처 사장의 이미지에 머무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보여 준 정치활동의 과정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으며, 신선하지도, 새롭지도, 혁신적이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한국사회에 신선하고 새로운 바람이 불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친재벌, 친대기업 정책이 강화될 것이고, 이것은 안철수 대통령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명박과 박근혜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진부한 보수 정권의 탄생일 뿐임을 국민들이 기억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4. 유승민 대통령 '합리적 보수'를 내세운 유승민 대통령은 한국사회를 어느 정도 안정된 사회로 만들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는 비교적 합리적인 인물이고, 정치권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국정 운영도 무난하게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를 보수적인 분위기로 바꿔갈 것이고, 기업과 서민 모두를 아우르는 정책을 펼칠 것으로 보여 국정 지지도는 평균 정도를 보이겠지만, 그가 가진 한계는 뚜렷하다. 유승민 대통령은 합리적인 부분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얻겠지만, 그가 가진 선입견 또는 편견 때문에 그의 보수성 즉 비합리성이 드러나는 순간, 사회는 분열과 갈등이 생기게 된다. 즉 유승민 대통령이 개혁적인 정책을 '합리적인 이유'로 펴는 순간, 보수 진영에서는 그를 공격할 것이고, 보수적인 정책을 실행하려고 하면, 진보 진영에서 그를 공격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일 확률이 높다. '합리적 보수'는 언듯 듣기에 좋은 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국민은 이미 알고 있다. 보수에게서도 표를 얻고, 진보 진영 또는 중도 진영에서도 표를 얻으려는 의도로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한국사회의 성격에서 본다면, 어떤 정책이든 무조건 왼쪽으로 가는 것이 올바른 태도다. 그것은 지난 10년 동안 이명박과 박근혜가 한국사회를 너무나 많이 오른쪽으로 돌려 놓았기 때문에 그렇다. 즉 어떤 정책을 펴든 조금은 개혁적인 정책이어야만 한국 사회가 그나마 중간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추진한다면 '합리적 보수'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있지만, 그렇지 않고 '보수'의 눈치를 보고, 보수의 기득권에 영합하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순간 유승민 대통령 역시 이전 정권과 다르지 않음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유승민 대통령도 국회 의석수가 적은 정당에 지지 기반도 좁은 편이어서 운신의 폭이 넓지 못한 것 또한 그가 펼칠 정책에 한계와 어려움이 많음을 예고한다. 그럼에도 그가 무난한 대통령, 원만한 대통령으로 남으려면 서민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책을 펼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테다. 5. 심상정 대통령 대통령 후보 토론 때부터 그는 똑똑하고 실력 있는 대통령이 될 거라는 예상은 많은 사람들이 했다. 하지만 워낙 작은 정당이고, 지지율 또한 낮은 상황에서 진보 정책을 들고 나온 것은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뚜렷한 한계와 부담을 갖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심상정 대통령은 젠더로서는 '여성'이지만 이미 우리는 한 '여성 대통령'에 너무나도 심하게 질렸기 때문에, '여성 대통령'이 누려야 할 모든 좋은 점을 심상정 대통령은 전혀 누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다. 심상정 대통령은 자신의 성별과 관계 없이, 여성이라는 편견이나 동정론 또한 개의치 않고,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수 많은 정책을 일사분란하게 펼쳐 나가게 될 것이다. 심상정 대통령은 이미 오랜 정당 생활을 통해 입법 과정부터 정당의 운영,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존재에 관한 구체적인 현실, 소외당하고 가난한 서민과 노동자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 자신이 겪었던 일인만큼 사회 전반에 가로 놓인 불평등과 차별, 억압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뛸 것으로 기대되는 대통령이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사회가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쳤으며, 운동장은 심하게 재벌과 대기업 쪽으로 기울었다는 인식을 하고 있으므로, 이를 바로 잡고 보편적 복지와 평등한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해 상당 부분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이런 진보 정책을 펼치기 위해 연합 정권을 구성하고 이재명 성남시장을 비롯해 전국의 인재를 중요한 자리에 배치해 개혁의 속도를 빠르게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이때 수구 집단의 일정한 반발이 예상되지만, 그것은 국민 대부분이 친일매국노 처단과 그 재산의 환수, 이명박과 박근혜의 사기와 국정농단의 비리를 캐고 그들이 숨긴 재산을 환수하는 일들이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심상정 대통령의 지지율은 후반으로 갈수록 높아질 가능성이 많다. 출처: http://marupress.tistory.com/2299 [知天命에 살림을 배우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박근혜 구속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박근혜 구속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구속한 것은 온전히 국민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고 평화롭지만 힘차게 싸운 결과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그 전에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박근혜 정권의 무능이 국민 모두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2016년부터는 박근혜와 샴쌍둥이처럼 행동했던 최순실과 그 일당의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면서 박근혜 정권이 단지 무능할 뿐 아니라 말할 수 없이 부패하고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국민은 날카롭고도 지혜롭게 문제의 심각함을 확인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광화문 광장을 비롯해 전국의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에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비리를 참을 수 없노라 외쳤고, 그 뜨겁고도 진지한 함성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를 움직였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부패행위는 감출래야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썩은내가 진동했고, 부패기득권 세력은 사실을 왜곡하며 박근혜와 최순실의 부정, 비리, 무능을 감추려 안간힘을 썼다. 여기에 여전히 부패기득권과 밀착한 썩은 언론들의 행태로 인해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 과정인가를 시민 모두는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는 '공정한 언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반드시 필요한가를 '손석희'를 상징으로 하는 JTBC의 언론보도를 통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언론이 공정하고 바르게만 보도한다면 세상의 부패와 비리, 친일매국노의 발호는 많이 줄어들 것이지만, 지금 이 나라는 오래된 부패, 친일매국노 세력들의 적폐로 인해 뿌리까지 썩은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들 시민들은 이명박의 사대강 사기와 무능으로 학습되었고, 이명박 정권보다 더 무능하고 부패한 박근혜 정권을 겪으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겠다는 위기의식을 심각하게 느끼게 되었다. 전국의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이 2천만 명에 가깝고,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여론이 80%에 이른다는 사실은, 국민의 극히 일부인 기득권 세력을 제외하면 국민 대부분이 박근혜 정권과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박근혜로 대표되는 친일매국 부패기득권 세력의 국정농단은 멀게는 일제강점기 시기의 친일매국노 집단부터 시작해 이승만의 독재체제,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쿠데타와 독재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의 뿌리 깊은 악의 세력들이 이제 막 정의의 심판을 받는 첫 단계에 들어섰음을 뜻한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과 구속수감은 한국현대사에서 중대한 사건이며, 의미 있는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의 구속이 지금까지의 부패세력과 적폐를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단초를 연 것이며, 부패기득권 세력이라는 기둥의 줄기를 막 자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부패기득권, 친일매국노 집단의 뿌리는 여전히 살아 있고, 그들은 우리 나라, 우리 사회를 돈과 권력으로 지배하고 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며, 지금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약 10%의 집단이 박근혜를 옹호하고, 촛불을 시민을 비난하며, '종북좌파'라는 말로 건강한 시민정신을 매도하고 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박근혜 정권에서 권력을 이용해 불법으로 돈을 뜯어낸 최순실 일당의 체포는 물론, 그들이 뜯어낸 돈과 재산을 모두 찾아서 국고로 환수하고, 박근혜 정권에서 뇌물을 바쳐 더 큰 이익을 얻으려던 일부 재벌에 대한 강력한 세무조사와 범죄혐의를 밝혀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이명박 정권에서 벌어진 비리를 밝히는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해 이명박과 그 일당의 비리를 낱낱이 밝혀야 하는 것도 당연한 순서다. 한국현대사에서 이명박과 박근혜 일당이 저지른 비리와 부패, 무능, 온갖 사기와 도둑질을 완벽하게 밝히고, 응분의 처리를 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은 매우 엄중하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고, 북한과 적대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를 지키며 국민의 복지와 건강,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이 놓여 있는데, 국민의 뜻을 받들어 적폐를 청산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으며, 법과 정의를 수호하고, 불법과 불평등을 가차없이 때려잡는 국민의 대리인이 나와야 할 때다.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국민의 건강한 정신을 좀먹고, 나라의 곳간을 훔쳐먹는 부패세력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이때, 박근혜 한 명이 구속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음험하고 야비하며, 악랄하고 파렴치한 도둑질과 사기, 친일매국 행위가 중단되지는 않는다. 법이 정의로운 힘으로 운용이 될 때, 부패와 친일매국 행위는 줄어들 것이고, 정의로운 법을 휘두르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국민의 단결하는 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헌법에도 있듯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인류의 변곡점
    인류의 변곡점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항상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게 된다. 역사를 가능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과 자세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시대의 흐름을 주관적으로만 판단하면 역사에 매몰되기 쉽고, 역사적 사건을 과장, 왜곡, 축소하는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지금까지 역사와 경제학에서 연구되어 알려진 인류 문명의 발달을 보면 원시공동체-수렵, 채취-정착, 농경-잉여 생산물의 발생-계급의 발생-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노예제-농노제-산업혁명-자본주의의 탄생 등으로 정리할 수 있고, 깬 석기-간석기-청동기-철기-문자-화약-종이-인쇄-총-비행기-로켓-핵 등의 기술문명이 인류의 삶과 문화를 근본에서 바꿔왔다. 역사를 돌이켜 바라보면, 인류에게 역사의 변곡점이 될 만한 사건들은 많았고,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대한 문명의 회오리에 휘말려 힘든 삶을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이런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자연스럽게 적응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과 수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가치 없이 스러져 가곤 했다. 청동기가 발명되던 시기에 간석기로 대항하던 씨족들은 거의 멸족이 되었을 것이고, 철기가 도래하던 때에는 청동기로 대항하던 부족들이 멸족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패배한 부족들은 노예가 되어 고통을 받으며 살아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지주들이나 상인들이 자본가 대열에 합류하면서 여기에서 도태된 귀족들이나 농노들은 노동자로 편입되어 가장 비참한 상태로 내몰리게 된다. 즉, 역사의 질적 변화, 거대한 역사의 급류가 몰아칠 때, 소수를 제외한 거의 다수의 사람들은 피해자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오늘날까지 인류에게는 많은 변곡점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인류를 멸종으로 몰고 갈 위협적인 문제나 상황은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던 과정은 인류의 비극적 역사로 기록이 되었지만, 그것은 인류가 문명의 발달 과정을 통해 어쩌면 필연적으로 겪게 되었던 과정일 수도 있었다. 인류는 여전히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행동을 하는 ‘동물’이며, 집단의 광기와 몰지성의 야만이 현대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 지금보다 더 오래 전의 인류에게 합리적 이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변곡점은 단지 자본주의의 폐해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멸종을 걱정할 만큼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정치경제학으로 풀어 ‘계급투쟁’의 역사로 기술한 칼 마르크스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실존적으로 ‘계급 사회’에 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자본주의의 노예’인 노동자의 처지라는 것을 명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그만큼 영악하고 지능적이라는 뜻도 된다. 그 교활함이 자본주의를 번성케 했고, 자본가가 착취를 통해 거대한 이윤을 올릴 수 있는 수단이며, 대중을 무지의 상태로 유지하도록 끊임없이 강제하는 힘이기도 하다. 노예제-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시기가 인류에게 변곡점이었듯이 자본주의-(새로운 체제)로의 이행 역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변곡점이다. 우리는 아직 충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정점에 다다렀거나 정점에서 조금씩 내려오는 지점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예상은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다가 올 미래 사회를 충분히 인지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살아본 적 없는 사회를 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북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회 체제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적절히 섞어 놓은 듯 하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 체제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 바로 ‘핵’ 문제다. 현대 역사의 변곡점이라면 인류가 핵을 개발하고, 그것을 전쟁무기로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비전쟁무기라고는 해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핵발전소를 짓고 운용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고 해도, 지금 인류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그 무기는 인류를 멸종에 이르게 할 정도로 강력하며 충분히 위협적이다. 인류가 진화를 시작하고 약 200만년이 흐른 오늘 날, 인류는 멸종의 위기에 놓여 있다. 이것을 단순히 정치적 레토릭으로 여기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현대 국가들은 불과 60년 전까지 세계 전쟁을 치렀고, 국지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구 위의 어느 지역에서 단 하루도 총성이 멈춘 날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게다가 국가간 긴장은 꾸준히 높아지고, 인구 증가의 과잉, 식량 문제, 에너지 문제, 환경 문제 등 인류가 만들어 낸 전지구적 문제들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한다는 아이러니와 함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핵발전소를 운용한다는 것은, 인류의 지성이 여전히 낮은 수준의 소수에게 떠맡겨져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뛰어난 지성의 합리적인 사람들도 많지만, 그들은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하거나, 권력을 쟁취하는데 실패했다. 대신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인간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그들의 잘못된 결정에 의해 인류는 핵전쟁의 위협과 핵폭발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핵발전소의 문제는 곧바로 핵폭탄의 문제와 직결되며, 어느 것이든 그것의 운용을 결정하는 자들이 지성인이 아니라는 문제 와 설령 그들이 ‘지성인’이라 해도 아이러니는 계속된다. 멍청하고 폭력적인 자들이 핵무기나 핵발전소를 운용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지성인’은 용인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인류는 물질 문명을 꾸준히 발달해 왔다. 그 이면에는 전쟁과 살육의 어두운 역사가 드리워 있고, 착취와 폭력의 야만이 새겨져 있다. 그럼에도 인류는 어둠에서 밝은 면으로 조금씩 이동해 왔으며, 야만에서 이성의 정신으로 깨어왔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가공할 핵폭탄과 핵발전소는 이런 인류의 노력과 의지를 한 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공포의 무기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책임질 수 없는 말로 핵의 안전을 말하는 자들은, 몇 푼의 돈에 영혼을 파는 노예보다 못한 저열한 인간들일 뿐이다. 극소수의 악당들 때문에 인류의 미래가 멸종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8-30
  • 왜 모병제인가?
    왜 모병제인가? 모병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병역의 의무가 평등하지 않다. 이것은 헌법 위반이다. -금수저는 모두 군대에서 빠지고, 흙수저들만 군대에 가게 된다 -자원 입대하려는 청년들이 없을 것이다 -모병을 하면 지금보다 월급을 많이 줘야 하는데, 예산이 부족하다 이외에도 모병제를 반대하는 주장들은 더 있지만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수준 이하의 주장들이 많아서 여기서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위의 내용은 모병제를 반대하는 대표적인 논리라고 봐도 좋겠다. 모병제가 왜 필요한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질문을 바꿔, '왜 징병제인가?'라고 먼저 묻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도 당연하게 병역의 의무를 징병제로만 받아들였고, 그것도 20대의 남성만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징병으로 일반 병사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정당한 것인지부터 의문을 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병역법은 분명 '평등한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현실은 어떤가? 돈과 권력이 있는 집안의 청년들은 서민 가정의 청년들보다 병역 기피율이 월등하게 높다. 이것이 단지 우연일까? 차별없는 징병제라고 말하는 것은 정부와 군부의 레토릭일 뿐이다. 현실은 전혀 평등하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이것이 모병제로 가야 하는 첫번째 이유다. 언론에서 군인과 관련한 사건, 사고를 검색하면 의외로 많이 나온다. 병사가 자살하거나 구타를 당해 죽거나, 따돌림을 당하거나,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도 올바르게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하는 내용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여군들의 경우 상관에 의해 성추행,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비일비재하다. 대체 어느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따위 역겹고 추잡하며 악랄한 사건들이 거의 날마다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현재의 군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군대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어서 파시즘적 폭력으로 운영,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런 폭력으 문제가 모병제로 가야 하는 두번째 이유다. 군대의 방위산업 비리는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는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인데도 여전히 온갖 비리가 판을 치고 있고, 뿌리 뽑히지 않고 있다. 물론 비리를 저지르는 자들은 소수지만, 그들이 주무르는 국가예산은 조 단위여서 국민의 피인 혈세가 밑빠진 독에 물붓기로 흘러나가고 있고, 국가의 방위를 핑계로 몇몇 반역자들이 배를 불리고 있는 상황이다. 모병제와 고위 장교들이 벌이는 방산비리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병제가 되면 병사평의회가 생기고, 병사들이 입고, 먹고, 쓰는 모든 군수물자와 병기들을 병사들이 직접 검사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된다. 지금처럼 병사들이 단지 전쟁의 소모품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는 고위 장교들이 저지르는 비리를 고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것이 모병제로 가야 하는 세번째 이유다. 이제, 모병제를 반대하는 논리에 맞서, 모병제를 해야 하는 이유와 가능한 방식을 알아보자. 헌법 제39조 ①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병역법 제3조 ① 대한민국 국민인 남자는 헌법과 이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여자는 지원에 의하여 현역에 한하여 복무할 수 있다. 위의 헌법과 병역법을 보면, 헌법에서는 '모든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했는데, 병역법에는 '대한민국 국민인 남자'만을 병역의무자로 지정하고 있다. 이 두 법은 모순으로 보인다. 모병제로 전환하려면 이 내용을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국회에서 모병제 검토를 위한 위원회를 만들어 사회의 변화에 따르는 장단점을 비교하고,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책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모병제가 되면 금수저는 모두 군대에 가지 않고, 가난한 집안 청년들만 군대에 가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일정 부분 동의하는 내용이다. 이 주장은 얼핏보면 '평등한 징병'이 더 정의로운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우리의 현실은 이미 병역 문제에서 매우 불평등하다는 것을 감추려는 얄팍한 주장이기도 하다. 위의 모병제 반대 논리의 많은 부분은 사실 '돈'과 관련되어 있다. 금수저 청년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 것부터 자원 입대를 하려는 청년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 예산이 부족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나로 뭉뚱그려서 '국방 예산'이 부족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현재 국방 예산은 국가 예산의 약 14%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그 금액은 약 39조원 정도다. 국방 예산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국방 예산이 국가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반대로 꾸준히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현재 한국군은 약 63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직업군인을 제외하고 일반 징병된 병사는 전체 인구의 약 10% 정도에 달하는 50만명에 이른다. 50만명의 병사가 월 평균 15만원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1년에 지급되는 돈은 약 9천억원 정도다. 여기서 전제할 것은, 음식, 피복, 장비 등 병사들을 위한 제반 지원비용은 모두 제외한다. 이것들은 징병제든 모병제든 병사에게 동일하게 제공해야 하는 지원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징병제와 모병제에서 가장 큰 차이가 결국 월급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여간 병사의 월급은 전체 국방예산에서 3%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금액이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무리 징병제라 해도 정부가 법률로 정한 최저임금에서 훨씬 미치지 못하는 돈을 월급이라고 받으면서 청년들은 '국가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반면 고위 장교들은 연봉이 1억이 넘고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다. 군인연금은 특수연금이어서 국민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 매월 내는 국민연금에서 매달 받는 금액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국민의 혈세로 군인연금을 해마다 1조원이 넘는 돈을 지원하고 있다. 이것 역시 매우 불합리한 상황이다. 젊은 청년들은 '국방의 의무'라고 끌고가서 거의 공짜로 부려먹으면서, 장교들은 거액의 연봉과 연금을 받으며 호의호식하는데, 전쟁이 나면 과연 병사들이 자신의 나라를 위해 싸우려 들까? 정의롭지 못하고, 부패한 군대에서 병사들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모병제를 해야 하는 것이다. 모병제를 하기 위해서는 군대의 개혁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군대가 부패하고 비리가 만연한 상태에서는 모병제를 하기 어렵다. 직업 군인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직업 군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상당히 많이 빼앗기기 때문에 강력하게 저항할 것이고, 국회에서 제도적인 장치를 갖추지 않고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특히 고급 장교들의 숫자를 지금의 절반 정도로 줄여야 한다. 우리나라는 장교의 숫자가 필요 이상으로 많기 때문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 역시 천문학적으로 많아진다. 군대의 개혁은 장교의 숫자를 줄이고 정예화해야 한다. 장교들도 해마다 체력 측정을 해서 병사들이 받는 유격훈련보다 혹독한 상황에서 시험을 거쳐 통과해야 진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계급이 높아질수록 배가 나오고, 달리기도 못하는 장교들이 많은데, 군인이라면 당연히 일정 수준 이상의 체력을 갖추는 것이 의무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배에 기름이 낀 장교들을 모두 솎아내고, 이어서 공부하지 않는 장교들도 솎아내야 한다. 장교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계급이 올라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 자들이 많은데, 멍청한 인간들이 계급장을 달고 큰소리치면서 지휘관으로 있는 것은 국방에 큰 위협이 되는 요소다. 모병제의 핵심은 병사의 숫자를 줄이되 정예화하고, 군대의 무기를 자동화, 정예화한다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교와 하사관도 숫자를 줄이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키워서 일당백의 실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전은 백병전을 벌이거나 숫자로 압도하는 전투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따라서 병사가 50만 명이라도 허수아비같은 병사들이라면 전쟁에 쓸모가 없는 것이고, 30만명이라도 정예 군인이라면 자동화 무기와 함께 50만명 이상의 화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방위산업 비리 예산은 조 단위가 넘어가고 있다. 여러 곳에서 줄줄 새고 있는 국방 예산을 바로 잡고, 투명하고 공정한 무기 계약과 국산 무기의 개발을 통해 예산을 절감하면 모병제에 필요한 예산은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다. 모병제로 30만명의 병사를 운용한다고 가정하고, 병사 한 명에게 연3천만원의 연봉을 지급한다고 했을 때, 국방예산에서 지출되는 돈은 9조원이다. 전체 국방예산의 약 38% 정도인데, 나는 병사들의 월급 총액이 국방예산에서 30%-40%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지급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모병제는 '애국심'을 현실적인 가치로 환산하는 것이니 그 가치가 청년들에게 외면당하거나 무시당할 정도로 낮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모병제가 되었을 때, 군대에 자원하지 않는 청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금수저 집안의 청년들은 어쩌면 당연히(?) 군대에 가지 않을텐데, 너무 불공평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그럴 것이다. 모병제가 되고, 병사의 연봉이 3천만원이라고 해도 여전히 군대에 가지 않겠다는 청년은 많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복무제도가 필요한 것이고, 그것도 안 되면 거액의 배상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 결국 돈이 많은 집안이라면 자식의 기회비용으로 돈과 시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이고, 비용을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면 기꺼이 돈을 낼 것이다. 군대에 가지 않을 경우 배상금을 내는 것은 순수한 모병제와는 거리가 있지만, 한국적 현실에서 충분히 고려해 볼만한 제도다. 이렇게 모이는 돈은 모병제로 입대한 병사의 월급으로 쓰면 된다. 아마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모병제를 하면 가난한 집 청년들만 입대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것인가? 모병제에서도 병역의 의무를 마친 청년에게는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일정한 혜택을 주어야 한다. 미군도 병사가 전역하면 사회에서 지원하는 제도가 많이 있다. 가난한 집안의 청년들이 군대에서 돈을 벌고, 사회에 나와서 혜택을 받아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잘못된 제도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징병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기기 싫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대를 개혁하는 것도 싫고, 방산비리로 마음껏 저지르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또한 병사를 소모품으로 여기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자들이다. 군대의 민주주의와 투명성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자들이 징병제를 주장하고 모병제를 반대하는 것이다. 모병제가 되면 병사들은 자율적인 '병사평의회'를 만들어 군대 생활을 자율적으로 통제하고, 장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장교들은 계급에 따른 명령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업무에 한해서일뿐,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부당한 명령은 내릴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군대에서의 폭력은 사라지게 되고, 병사의 자율성은 높아지게 된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군대는 여전히 미개한 일본제국주의의 군대를 답습하고 있다. 지금의 군대에서는 청년들이 온갖 폭력과 야만을 배워서 사회에 나오게 되고, 민주시민의 소양을 쌓을 기회가 근본부터 차단되어 있다. 모병제를 통해 병사들이 모두 평등한 위치에서 민주적인 소통을 통해 군대 문화를 바꿔야 할 필요가 매우 크다. 모병제로 가는 길이 멀고 험하겠지만,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라면, 당연히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 칼럼
    • 백건우
    2021-08-30
  • 그랜드 마스터 클래스 2017에 다녀와서
    그랜드 마스터 클래스 2017에 다녀와서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모두 14명의 강사의 강연을 들었다. 올 겨울 들어 서울도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강연을 듣기 위해 모였고, 우리 가족도 이틀 연속 서울 나들이를 했다. 사실, 이 강연의 핵심은 리처드 도킨스였다. 물론 다른 강사들도 한국에서는 널리 알려진 분들이 많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이번에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고 했다. 존경하는 리처드 도킨스를 가까이서 보고, 그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을 듯 해서 기꺼이 이틀의 강연을 모두 듣기로 했다. 강사와 주제, 강의 시간은 아래 표와 같다. 첫날 아침, 집에서 9시에 출발해 세종대학교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였다. 입구에 티켓 부스가 있었고, 이미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날씨가 추웠고 영하 8도쯤 되었다. 우리도 줄을 따라 섰는데, 줄을 서서 거의 30분 가까이 지나서야 티켓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시간에도 우리 뒤쪽으로 줄을 서는 사람들은 더 늘어났고, 11시 시작에 맞추기는 어려워 보였다. 관객을 아침부터 추위에 떨게 하고, 이렇다 할 대책도 세우지 않은 주최측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항의하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결국 시작 시간인 11시에서 20분을 넘겨 강연이 시작되었고, 이 행사를 주관한 '마이크임팩트'라는 회사의 대표라는 사람이 나와서 사과를 했다. 강사들의 강의 사이에 강사를 소개하고, 이 행사를 안내하는 사회자가 바로 '마이크임팩트'의 대표라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큰 행사를 주관하는 회사의 대표치고는 나이가 젊어보였고, 말하는 태도나 내용이 많이 부족해 보였다. 차라리 전문 사회자나 어느 정도 이름있는 사람을 사회자로 내세우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이 강의는 처음에 경희대학교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나중에 장소가 바뀌었다. 세종대학교 강당에서 열렸는데, 수용인원이 경희대 강당보다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었다. 즉, 처음 계획보다 인원이 적어서 장소를 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메모한 것을 아래에 적어본다. 나의 주관적 기록이므로 강사의 강의 내용과 다를 수 있다. 1강 : 최진석 교수(서강대 철학과) : 왜 배우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배운다. 삶의 모든 과정이 배움이다. 생존을 위해 배우고, 배움이 커질수록 생활의 질과 양이 높아진다. 배움은 내가 자유롭기 위해 필요하다. 배울수록 자기주도권이 커져서 생존력이 증가하고 자유로워진다. 배우지 못하면 종속적인 삶을 살게 된다. 최초의 배움은 '구분하기'였다. 구분을 통해 생존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것이 경험으로 발전해 인류의 지식시스템으로 전승되었다. 개인의 생존 뿐 아니라 집단의 생존률을 높이기 위해서도 지식의 공유는 필요했다. 배움이란 지식을 통해 내면의 영역을 확장해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것이다. 문명사회의 모든 지식은 기존에 존재했던 문제를 해결한 결과이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발견하는 사람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지식은 윤리적이고 공적이다. 기존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답'을 찾으려고 한다. '앎'은 과거지향적이다. 기존의 앎을 바탕으로 모르는 것으로 넘어가는 발버둥치기가 중요하다. 모르는 영역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고 지적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용기이며 모험이다. 모든 지적 활동은 도전이다. 2강 : 정재승 교수 : 왜 미신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 인류는 겁장이의 후손이다. 미신을 믿는 것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불안감에서 시작한다. 확률과 통계의 눈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 과학적 사고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전에 두 개의 강의를 듣고 점심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세종대 근처에 있는 서브웨이 샌드위치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서브웨이 샌드위치 첫날 점심은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었다. 미국에서 먹었던 경험으로, 샌드위치가 비교적 맛있다는 평가에 기대어, 그리고 빠른 시간에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주문해서 먹었다. 물론 나쁘지 않았다.샌드위치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을 주문하는 사람이 직접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자 장점인데, 미국에서는 이 과정이 더 복잡해서 영어를 잘 못하면 주문하기가 어렵다. 물론 미국에서 주문할 때도 샌드위치 번호를 입력하면, '전부 넣어주세요'라고 말하면 되긴 하지만, 세세하게 주문하기는 어렵다.자기의 기호에 맞게 먹으려면 미국에서는 영어를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자유로우니 그게 재미있다. 샌드위치와 샐러드, 음료수까지 주문해서 먹었다. 사람들이 많고 시간이 촉박해서 조금 급하게 먹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오후의 강연에서 은희경&신영철과 김경철의 강연은 거의 내용이 없어서 조금 졸았다. 5강 : 오찬호(사회학자) : 우리는 각자도생의 삶을 벗어날 수 있는가 연대를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암울한 사회를 암울하다고 말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좋은 사회란 '대단한 결심' 없이 평범하게 살아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보장되는 사회를 말한다. 경쟁의 심화, 금기의 확대, 더 폭력적, 허세적, 과잉과 위축의 확대, 불안의 확대, 그럴수록 연대의 필요성은 커진다. 6강 : 조국 교수 : 대한민국의 재화는 정의롭게 분배되고 있는가 재화는 돈 뿐 아니라 지위, 영향력 등을 말한다. 한국은 재봉건화의 사회로 변하고 있으며 세습 자본주의 체제로 나아가고 있다. 정의는 사회제도의 제1덕목이다. 용이 아니어도 살만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7강 : 이어령 교수 : 언어의 힘으로 내일을 바꿀 수 있는가 표현의 다름이 사람의 태도를 바꾸게 한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말이다. 말의 중요성, 말은 '문화유전자'다. 한국말의 다양성과 우리 말의 생존이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푸챠오 첫날 강의가 끝나고 저녁. 서울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하남에 있는 단골 중국음식점 푸챠오에 들러 저녁 식사를 했다. 푸챠오 사장님하고는 우리 동네에서 중국음식점 '팔선생'을 할 때부터 알고 지내니 10년이 넘었다.문호리에 있을 때는 자주 갔는데, 하남으로 옮기고 나서는 그리 자주 가지 못하고 있다. 어제도 퍽 오랜만에 간 것이다.우리가 좋아하는 음식 꿔바로우하고 동파육을 주문하고, 각자 볶음밥, 짜장면, 딴푸면을 주문했다. 중국음식은 푸짐하게 먹어야 맛있다. 맛있게 먹고 나니 사장님이 직접 내린 커피를 주셨다. 커피도 맛있게 마시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왔다. 강연 둘쨋날. 아침에 도착해 세종대학 학생회관 분식집에서 먹은 음식. 떡볶이 세트 세종대학교 학생회관 안에 있는 분식집에서 먹은 떡볶이 세트. 떡볶이, 튀김, 순대가 나왔는데, 분식으로는 먹을만 했다. 아침으로는 양이 조금 많은 듯 했는데도 둘이 다 먹었다.공간은 좁은데 사람은 많았다. 어느 여성께서 조금 넓은 자리를 우리에게 양보해 주셔서 고맙게 인사하고 앉았다. 좋은 분들에게 배려를 받는 것은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나도 기회가 되면 다른 분에게 그런 배려를 해드릴테다. 1강 : 이수정 교수(범죄심리학) : 무엇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만드는가. 인간은 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가. 범죄원인론 설명. 고전주의는 오류. 실증주의, 베카리아의 이론 실증주의-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원인론 사회학적 원인-물리적인 도시 환경, 공동화, 슬럼화, 공동체 해체 심리학적 원인-소외감, 경쟁, 욕망의 충족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 프로이트의 이론 사회생물학-DNA로 환원-뇌로 귀결-뇌과학 에드워드 윌슨-본성은 선악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즉 성선설과 성악설의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 뇌과학의 발달로 예비범죄자의 뇌구조를 미리 알 수 있고, 뇌의 활성화는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의 교육, 사회(학교를 비롯한 공조직)화 과정을 통해 자율적인 통제가 가능해지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어릴 때의 환경 때문이거나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경우도 있다. 자율 통제가 불가능하면 타율 통제를 통해서라도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2강 : 김진명 소설가 : 어떤 힘을 기를 것인가 외면의 힘-현실, 돈, 권력, 외모. 외면의 힘을 키우다보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되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내면의 힘-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교육이 해결하지 못한다.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라멘 점심. 어제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기 전에 바로 옆에 있는 이 라멘집을 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샌드위치를 선택했다. 오늘은 라멘집에 들어갔는데,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았다.일본 라멘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물론 국물 베이스는 몇 가지로 비슷하지만 그 위에 올라가는 토핑이 다양하고, 면이 다르기 때문에 종류가 기하급수로 많아지게 되었다.나는 베트남쌀국수를 더 좋아하지만, 일본 라멘도 퍽 좋아한다. 라멘에는 한국의 면요리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한 맛이 있다.오늘 먹은 라멘도 국물이 진하고 구수해서 먹을만 했다. 3강 : 강신주(철학자) : 죽음에 미소지을 수 있는가 가장 큰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 폭주하는 기관차. 미래는 더 나빠질 수 있다. 죽음에 전전긍긍하지 마라. 꽃은 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지 못할 것을 걱정한다. 고개 돌리지 말고 죽음에 직면하라. 살아 있으니까 죽는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스스로 감당하라. 4강 : 하지현(정신과의사) : 불안은 사라질 수 있는가 불안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안은 당연한 기제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반응이다. 우울은 과거의 시간을 반추하는 것이고, 불안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며, 공포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고, 짜증은 불안과 우울의 상태에서 건드릴 때 반응하는 것이다. 비교, 부러움, 경쟁심은 불안의 원천이다. 짜증은 이제 그만하라는 신호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고 통제하면서 살아야 한다. 5강 : 송호근(사회학자) : 우리는 시민인가 사회는 이타적 유전자가 필요하다. 동류의식, 공감, 공명 광화문 광장은 정치적 공간이다. 유림의 공론 장소 교양시민-비판의식이 있는 시민. 교양시민+경제시민=자유민주주의의 쌍두마차 시민정치-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을 때 시작한다. 인지적 시민성은 높지만 참여적 시민성은 낮다 자치단체를 중심으로 '민회'의 구성이 필요하다. 6강 : 전우용(역사학자) : 인간은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람이 동물과 이별한 때는 인류에게 추상적 관념이 발생한 다음부터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신-인간과 동물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척도 7강 : 리처드 도킨스 : 진화는 어떻게 예측 가능한가? 리처드 도킨스의 강연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의 이론은 이미 한국에 번역된 그의 책을 모두 읽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므로, 그의 모습과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이 특별한 시간이었다. 인류의 멸종은 확실하다는 그의 전제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가 바라보는 진화의 관점 역시 신뢰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한국에 처음 온 것이어서 더욱 뜻깊은 시간이었다. 물론 이 날의 강연 이전에 이미 다른 곳에서 강연을 했고, 또 이 강연 이후에도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자이자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를 열렬히 반기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책을 읽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잔치국수 이틀의 행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호리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일요일 저녁이어서 식당들이 일찍 문을 닫았다. 8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이 동네는 이미 한밤중이다.버스종점 앞에 있는 국수집엘 갔더니 막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괜찮다고 하셔서 우리는 잔치국수와 비빔국수와 주먹밥과 못난이 김밥을 주문했다.소박한 국수로 저녁식사를 했지만, 이것도 좋았다.
    • 칼럼
    • 백건우
    2021-08-30
  • 시민은 물인가, 불인가
    시민은 물인가, 불인가 지난 11월 26일, 광화문과 시청, 종로 일대에서 약 150만 명이 모이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미 네 번의 집회가 평화적으로 열렸고, 이날 역시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내용은 평화롭고, 따뜻했으며, 서로의 믿음과 지혜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마침 첫 눈이 내리고, 날씨는 차가웠지만 그렇기에 혹시 집회에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해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 나왔다. 나 한 사람 쯤이야, 하는 마음이 아니라, 나 혼자라도 나간다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 무려 150만 명이었다. 언론에서는 경찰과 충돌하지 않고, 다친 사람 한 명 없으며, 길거리의 쓰레기까지 깨끗하게 치우는 시민들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고, 또 실제로도 그렇지만, '평화집회'가 목적이 아님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광장에 모이는 이유는, 부정과 부패, 비리와 범죄를 저지른 현직 대통령과 그의 사사로운 인간관계로 얽힌 자들의 범죄를 끝장내기 위해서다. 당장은 범죄자 대통령을 자리에서 쫓아내고, 검찰을 압박해 엄정하고 투명한 수사가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광장에 모이는 이유인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백만명, 이백만명이 광장에 모인들, 대통령은 꼼작하지 않고,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데, 촛불집회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예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1985년부터 88년까지, 나는 이른바 '가투'에 자주 나갔다. 선배들을 따라서 화염병과 보도블록을 깨서 전경들과 백골단에게 던졌다. 최루탄이 쏟아지고, 물리력에서 밀리는 우리들은 백골단의 폭력을 피해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많은 동지들이 전경과 백골단에 잡혀 몰매를 맞고 끌려갔다. 경찰 최루탄에 맞고 목숨을 잃은 이한열 열사 사건 이후, 학생과 노동자들 뿐 아니라, 시민들이 본격 반정부투쟁에 나섰고, 마침내 87, 88년의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면서 우리는 가슴 뻐근한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그 승리의 열매를 다시 부르주아 정당에게 빼앗긴 것은 역사적 오류였음을 인정하지만, 이제는 그런 과거를 거울 삼아 다시는 시민의 승리를 부르주아 정당에게 선물로 건네주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가투'라는 말도 사라졌고, 대신 '촛불집회'가 대신하고 있다. 내가 던졌던 '꽃병', '몰로토프 칵테일', '화염병'이라는 단어도 사라졌고, 그보다는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퍼포먼스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아름답고, 신나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거리에 나오는 이유가, 저 썩어문드러진 대통령과 지배집단을 끝장내는 것이고, 우리가 즐겁고 신나는 퍼포먼스만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는 이제 다섯 번의 기회를 부패한 대통령과 지배집단에게 주었다. 자신의 발로 스스로 내려오기를. 우리는 평화롭게 행진했고, 우리의 목소리를 가능한 온건하게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저들, 부패한 대통령과 지배집단은 평화로운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있다. 애써 무시하고나,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시민이 잠시 맡긴 권력을 사유화하고, 그 권력을 이용해 더러운 짓을 일삼은 무리들은 대통령도, 집권여당도 그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스스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평화'롭지만은 않은 100만명이 될 것이고, '촛불'보다는 '횃불'을 들 것이며, 단지 함성이었던 시민의 힘은 거대한 급류가 되어 청와대와 국회를 쓸어버릴 것이다. 옛말에 불난 자리에는 남은 것이 있어도, 물 지나간 자리에는 남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만큼 유순해 보이는 물은 한번 난폭해지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은 물이 될 수도 있고, 불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인내가 어디까지일지 대통령과 지배집단은 시험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인내의 끝에서, 프랑스 혁명보다 더 격렬한 폭력과 잔혹함이 거리에 넘쳐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협박이라고? 어떻게 받아들여도 좋다. 봉건왕조였던 조선시대에도 민중은 잔학한 벼슬아치를 징치하는데 서슴치 않았다. 악랄한 벼슬아치의 악행을 참다참다 견디지 못할 때, 민중은 집에 있는 낫과 쇠스랑을 들고 관청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악덕 벼슬아치를 무릎 꿇리고, 그 죄를 낱낱이 알린 다음, 목을 베어 큰 거리에 내걸었다. 그것이 민중의 힘이다. 민주주의 시대라고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오히려 민주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시민이 주인인 나라에서, 잠시 맡긴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고, 제왕적 권력인양 착각하는 대통령과 지배집단에게는 프랑스 혁명의 길로틴이나 그보다 더한 응징의 방법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은 횃불을 들 수 있고, 화염병도 얼마든지 던질 수 있으며, 5.18 광주민중항쟁처럼, 시민군이 직접 총을 들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역사적 경험이 있고, 역사에서 모두 승리한 기록들이다. 우리를 이기려는 권력이 있다면, 그것은 곧바로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경고한다. 우리들 시민은 물이고, 불이다. 칼이 누구의 손에 있느냐에 따라 요리를 할 수도 있고, 피를 볼 수도 있는 것처럼, 물이 평화롭게 흐를 수도 있고, 불이 아름답게 빛날 수도 있다. 하지만 물이 급류가 되고, 불이 횃불로 타오르게 될 때, 범죄자 대통령과 지배집단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8-30
  • 11월 12일 100만명 집회 참관기
    11월 12일 100만명 집회 참관기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집회에 참석했다. 대통령의 무능과 비리, 비선실세라고 하는 박근혜 주변의 사이비 무당과 그 친인척이 국정을 농단하고, 그것을 함께 저지른 박근혜 대통령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평범한 소시민인 나도 참을 수 없었다. 나처럼,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은 생각이 들고, 그들도 폭발하려는 화를 겨우 참으며 오늘 집회에 와서 대통령 하야, 퇴진, 탄핵을 목이 쉬도록 외칠 것으로 기대했다. 오전에 집에서 나와 양수역에서 전철을 타고 왕십리역에서 내렸다. 12시 무렵이었는데, 왕십리역에서 광화문까지 걷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왕십리역에서 광화문까지 몇 번 걸었기 때문에 걷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기분 좋았다. '왕십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생긴 것으로 고려 때 무신인 이성계가 쿠데타로 정권을 뒤집고 왕이 된 이후, 새로운 나라의 수도를 정하기 위해 많은 곳을 알아보러 다녔는데, 지금의 서울이 조선의 서울이 된 것과 '왕십리' 지명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성계의 모사이기도 했던 무학대사가 지금의 왕십리 근처에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왕십리의 위치도 수도로 정하기에 괜찮아 보였지만, 그 노인은 무학대사에게 이곳에서 십리를 더 가라(왕십리)고 말했다. 무학대사가 걸어서 10리를 더 가보니 지금의 광화문 뒤쪽이 천하의 명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지금의 서울을 수도로 정했다고 한다. 광화문과 경복궁은 왕십리에서 걸어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데, 거리로는 5km 조금 넘는다. 그러니 '왕십리'라는 말이 허황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왕십리에서 광화문을 향해 길을 걷다보면 가장 먼저 곱창거리를 만날 수 있다. 거리 양쪽으로 곱창집이 줄지어 있는데, 이곳은 예전의 마장동 도축시장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마장동 도축시장은 고기전문 도소매 시장으로 유명하다. 마장동 옆의 왕십리는 자연스럽게 도축 부산물을 유통, 소비하는 식당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왕십리 곱창 골목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상왕십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지금은 천지개벽을 했다. 뉴타운 개발로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예전의 낙후된 주택가는 사라지고, 높고 근사한 아파트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는 재래시장인 '중앙시장'이 있고, 그 옆으로 주방기구 전문 시장 골목이 있다. 주방기구 도소매, 중고 매매 시장인 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큰 주방기구 가게가 밀집한 곳이다. 이곳은 청계천과도 맞닿아 있는데, 청계천을 건너면 예전 황학동 도깨비 시장이 이쪽으로 옮겨온 것을 볼 수 있다. 예전 황학동 도깨비 시장은 이제 아파트 개발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고층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도깨비 시장은 동묘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골목을 따라 퍼져나가 있는데, 주말에는 노점상의 숫자도 평일보다 몇 배 늘어나고, 찾는 사람도 그 이상 많다. 도깨비 시장을 둘러보는 것만도 하루 종일 걸릴 정도로 서울에서는 가장 큰 중고 시장이다. 오후3시 무렵부터 종로 거리는 자동차가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종로2가 파고다 공원 네거리부터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고, 경찰은 자동차를 우회하도록 통제했다.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이미 시청 앞 광장에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었다. 종로3가부터 자동차가 없는 대로를 걷기 시작해 시청 쪽으로 향했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시청역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물밀 듯 밀려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시청 일대는 떠밀려 다녀야 할 정도였다. 시청에서 광화문까지 그 넓은 도로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청 근처에는 여러 단체에서 크고 작은 집회를 하고 있었고, 시청 광장에서는 민주노총이 주관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전국에서 올라 온 많은 노동조합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우렁차게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오늘 집회에 100만명이 참가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사회관계망을 통해 퍼져나가고, 언론에서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 역시 어떻게든 역사적인 순간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듯 했다. 4시 무렵, 시청 광장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자리를 잡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광화문 방향으로 사람들이 서로 몸과 몸이 닿은 상태로 물결처럼 밀려 올라갔다. 광화문 네거리는 한국에서 가장 넓은 도로라고 할 수 있는데, 시청에서 광화문이 있는 곳까지 일직선의 도로가 인도, 차도 모두 사람으로 가득찼다. 시청역에서 광화문까지는 약 1km인데, 다음 지도에서 거리를 재보면, 인도와 도로를 포함해 약 50미터가 나온다. 인체공학에 의해 사람의 어깨 너비를 50cm로 잡고 사람들이 일렬로 50미터를 나란히 서면 5000/50이 되고, 약 100명 정도가 설 수 있다. 이 숫자는 아주 보수적으로 잡은 것인데, 실제로 이 날 모인 사람들은 어깨가 완전히 맞닿았고, 앞뒤로도 밀착한 상태임을 감안해야 한다. 사람의 앞뒤 간격은 거의 공간이 없을 정도로 바짝 붙어서 상대방의 등과 내 가슴이 한뼘 정도밖에 안되므로 1인의 앞뒤간격을 40cm로 잡아보자. 이것 역시 매우 보수적으로 계산한 것이다. 사람들이 완전히 밀착한 상태로 움직이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좁은 공간에 있었다. 그러면 100,000/40이 된다. 그러면 1km의 거리에 한줄로 서는 사람은 약 2500명이 되고, 가로, 세로 사람이 들어차면 이론적으로 25만 명이 서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방금 말했지만, 이것은 아주 보수적인 계산이어서 시청역부터 광화문까지 직선도로를 직사각형으로만 잘라서 계산했을 때의 사람 숫자다. 여기서 추가해야 할 내용이 많다. 우선 시청역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인데, 예전에 월드컵을 할 때,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붉은악마들의 숫자를 1백만 명이라고 보도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실제로 1백만 명은 안 되었을 것이라고 보여지지만, 11월 12일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시청 광장은 물론 시청을 둘러싸고 빽빽하게 들어 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청계광장에서도 집회를 하고 있었고, 대학로를 비롯해 곳곳에서 서로 다른 단체들이 독자적으로 집회를 한 다음, 광화문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시청역과 광화문역에서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 올라오고 있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으니, 이날 집회 참가자가 1백만 명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과장하지 않은 숫자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1백만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보였다. 나도 사람들 틈에서 계속 떠밀려 올라가다 광화문 네거리 도로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른쪽으로는 광화문 우체국 건물이 있고, 길 건너편으로 교보문고가 보이는 자리였다. 정면으로 이순신 동상이 보이고, 멀리 청와대 뒷산이 아주 잘 보이는 곳이다. 대형 화면에서는 시청 광장에서 하는 공연이 보였고, 거대한 스피커에서 말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고, 스피커끼리의 간섭이 있어 명료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5시가 넘으면서 해가 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구호와 함성을 내뿜었다. 어둠이 깃들면서 광화문 네거리 일대는 가로등과 광고간판 덕분에 대낮처럼 밝았다. 서울의 도시가 이렇게 밝을 줄은 몰랐다. 마치 대낮 같은 느낌이었다. 대형 화면에서는 김제동, 김미화, 도올 김용옥 등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크라잉 넛, 정태춘, 이승환 등 가수들도 공연을 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화장실을 가는 것도 큰 일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거의 움직일 수가 없었고, 어디를 가도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거대한 상여가 시청 쪽에서 광화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근혜 퇴진을 알리는 상여는 사람들의 물결을 가르며 천천히 전진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과 구호가 시청쪽부터 광화문 방향으로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거대하게 밀려왔다. 그 함성은 청와대까지 충분히 들리고도 남을 정도로 컸으며, 그 거대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감동이었다. 광화문역은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어서 통로가 사람의 물결 그 자체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저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떠밀리듯 걸어야 했다. 세종대왕 동상 뒤쪽에도 대형 화면이 있어서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화면을 보며 촛불을 들고 있었다. 이곳은 스피커 상태가 좋아서 공연하는 소리가 잘 들렸다. 광화문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조명이 들어온 광화문을 정면에서 찍었다. 이곳에서 양쪽 도로로도 사람들이 많았는데, 광화문부터 청와대가 있는 곳까지 경찰버스가 차벽을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경찰버스에 '박근혜 하야', '박근혜 퇴진', '하야하라' 같은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또한 작은 단위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고, 공연도 하는 등 민주주의 사회에서 성숙한 시민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광화문을 등지고 시청 쪽을 바라보면 직선으로 시청까지 보인다. 이 긴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곳, 세종문화회관 앞쪽 도로의 가운데에서 광화문 쪽을 보고 찍은 사진인데, 촛불을 켜고 공연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도로를 가득 메운 것을 볼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 뒤쪽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이 따로 모여 집회를 하고 있었고, 경복궁 역 근처에서는 청와대로 진진하려는 노동단체와 시민들이 모여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곳곳에 시민 자유발언대가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을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말이 들렸다. 도로에는 백묵으로 박근혜 퇴진, 박근혜 하야, 새누리당 해체, 같은 글을 쓰는 사람들도 많았다. 세종문화회관 1층 로비도 열려서 사람들이 이곳에서 쉬고 있었고, 세종문화회관 뒤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날 시청역과 광화문역에 찍힌 지하철 이용자가 1백만 명을 넘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본다. 나처럼 시청역이나 광화문역에서 내리지 않고, 다른 곳에서 걸어오는 사람들도 많이 봤기 때문에 이들까지 합하면 1백만 명은 훌쩍 넘는다. 경찰이나 보수언론에서는 집회 참가자의 숫자를 줄이려고 애쓰지만, 그런 파렴치한 수법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자발적으로 모였다. 지금 이 나라가 너무도 한심하고 위태롭기 때문에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온 것이다. 무능하고 부패하고 어리석고 야비한 정권과 집권여당을 시민의 손으로 바로 잡겠다고 나선 것이고, 위기 때마다 국민은 이렇게 힘을 모아서 역사를 바로 잡았다. 바로 오늘 11월 12일이 그런 역사적인 날이었다.
    • 칼럼
    • 백건우
    2021-08-30
  • 공학적 역추론과 효용목적
    공학적 역추론과 효용목적 *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에덴 밖의 강]에서 가져왔습니다. 공학적 역추론은 다음과 같은 추론기술이다. 어떤 공학자가 처음 보는, 이해하지 못하는 물건 앞에 앉아 있다고 하자. 그는 그 물건이 어떤 목적을 위해 설계되었다고 가정을 한다. 그런 다음 그것이 어떤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지 알아 내기 위해 잘게 해부하고 분석한다.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하는 기계를 만든다면 이것처럼 만들어야 할까? 아니면 이것은 이렇고 그렇고 그런 일을 하도록 설계된 기계라고 설명하는 편이 더 나을까?' 계산자를 만드는 일은 최근까지도 기술자들이 선망하는 전문적인 기술이었다. 그 도구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전자기술시대에 그것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처럼 낡아 점차 사라지고 있다. 계산자를 발견한 미래의 고고학자가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의아해 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는 그것으로 직선을 그리거나, 빵에다 버터를 바를 때 사용하면 편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그 물건의 원래 용도라고 가정하는 것은 경제원리에 맞지 않는다. 단순히 직선을 그리거나 빵에 버터를 바르는 칼의 용도라면 자의중간에 움직이는 작은 자가 하나 더 있을 필요가 없다. 더욱이 거기에 그려진 눈금의 간격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교한 로그 눈금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꼼꼼하게 배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고고학자는 연구 끝에 전자계산기가 나오기 전에는 그 눈금을 곱셈과 나눗셈을 빠르게 할 수 있는 절묘한 기술에 이용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따라서 계산자의 미스터리는 모든 사물은 합리적이고 경제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가정을 사용한 공학적 역추론 과정에 의해 해결될 것이다. '효용목적'은 공학자들이 아니라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학술용어이다. 그것은 '어떤 것이 극대화하려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경제계획을 입안하는 사람이나 사회공학자는 어떤 것을 극대화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설계사나 진짜 공학자와 비슷하다. 실용주의자는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극대화하려는 사람이다(이 말은 실제보다 더 이성적인 것처럼 들린다). 이 대전제 아래 실용주의자는 단기간의 행복보다도 장기간의 안정성에 우선순위를 둔다. 실용주의자들은 '행복도'를 측정하는 기준을 무엇으로 하느냐로 의견을 달리한다. 즉, 경제적인 풍요, 직업에 대한 만족도, 문화생활 향유 정도를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관계를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로 의견이 나누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자신의 행복을 공공복지보다 우선하여 극대화하려 한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가 자신을 위할 때 전체의 행복이 극대화된다는 사이비 철학으로 자신들의 이기심을 합리화한다. 어떤 사람의 행동을 그 사람의 전생애에 걸쳐 조사해 보면, 그들의 효용목적을 공학적으로 역추적할 수 있다. 어떤 나라의 행정부가 하는 일을 조사해 공학적으로 역추론해 보면, 그 정부가 극대화하려는 것은 고용과 공공의 복지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나라에서는 그 효용목적이 대통령의 영구집권이거나, 특정한 통치집단의 이익, 제왕의 후궁 숫자, 중동의 안정, 또는 원유가격의 유지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대상이 하나 이상의 효용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개인이나 법인, 또는 정부가 극대화하려는 것이 언제나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뭔가를 극대화하려 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편이 안전하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것은 목적이 있다는 생각에 깊이 사로잡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어떤 대상의 효용목적이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총합이거나, 여러 가지 입력들에 의한 다른 복잡한 기능일 때에도 유효하다. ------------------------ 위의 내용을 일부러 타이핑 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유신론자들이 가지고 있는 '목적론'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가를 말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한국 정부(행정부)가 하고 있는 '효용목적'이 무엇을 위해 극대화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과학자들은-극소수를 제외하고-생명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쌓은 지성의 결과물인 과학적 방법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즉, 진화는 어떤 목적도 없으며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역시 다른 생물이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존재할 뿐이다. 다만 우리 인류는 '이성'이라는 독특한 뇌활동을 통해 자아, 타자, 자연, 우주를 인식하고 있고, 인공적인 기술문명을 발달시켰으며, 다른 동물이 하지 못하는 우주탐험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논리의 비약이며 과대망상이다. 모든 생물은 자신이 존재하는 만큼 진화했고, 가장 최고의 진화상태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지구에 살고 있는 천억의 생물은 지구에 존재했던 생명체의 1%에 불과하며, 99%는 진화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든 멸종했다. 따라서 현재의 생명체는 진화적으로 최적의 상태이며, 가장 우수한 종이 살아남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신의 창조' 같은 어처구니 없고 황당한 말을 믿지 않는다. 즉, 신을 믿고,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은 과학적 상식이 부족하거나, 의도적으로 과학지식을 외면하고 사기를 치는 자들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또한, 현재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이나 추구하는 정책 방향을 역으로 추적하면 현 정부의 '효용목적'을 알 수 있는데, 본문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현 정부는 '특정한 통치집단의 이익'에 매우 많은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사리사욕을 추구한다'는 말을 조금 어렵게 쓴 것일 뿐, 실제로는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의 이익에 정부가 적극 봉사할 뿐 아니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자들 가운데 '효용목적'을 아는 자들도 꽤 있을 것이지만, 그들이 현 정부의 극대화 노력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대개의 교수 또는 연구자들이라는 자들은 비겁할 뿐 아니라 곡학아세하고, 권력에 빌붙어 살아가는 기생충 같은 자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고, 그래서 더더욱 권력과 자본은 오만해지고 서민은 가난해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8-30
  • 사드 배치의 딜레마
    사드 배치의 딜레마 국방부의 갑작스러운 배치 결정으로 국내는 물론 주변국가와의 심각한 마찰이 예상되고 있다. 사드와 관련한 기본적인 흐름은 링크한 내용에 잘 나와 있으므로, 일단 기본 개념은 이 기사를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권력의 개로 전락한 언론매체에서는 결코 말하지 않는 문제가 있으니, 사드와 관련한 문제를 두고 핵심적인 문제만 짚어보자. 1. 사드가 진짜 필요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에는 사드와 같은 공대공 미사일은 쓸모가 없다. 이미 패트리어트 시스템을 도입한 상태이고, 미국 언론의 발표에 따르면 미군이 실제 전투에서 운용한 패트리어트 시스템은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즉, 피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매우 비싸게 도입한 군수장비인 패트리어트도 그 성능이 올바로 검증되지 않았으며, 미군의 경우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 것을 보면, 우리는 '국방'이라는 명분으로 심각한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사드는 미국에서도 검증된 바가 없으며 실제 전투에 참가한 적도 없는 무기체계다. 이 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록히드마틴은 거대 군수기업으로 끊임없는 무기 생산과 판매를 유지해야 하는 기업이다. 미군과 개발업체인 록히드마틴에서는 사드의 성능이 우수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테스트를 할 때와, 실전에서 상황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다 믿을 수 없다. 한국 뿐아니라 일본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사드의 도입을 계획하고 있다는 보도는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정하는 경우는 아직까지 없었다. 한반도는 고고도미사일을 방어할 만한 거리가 아닌 것도 사드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국방부와 미군의 주장은 북한에서 최근 개발한 대륙간 유도탄이 남한을 공격할 경우를 대비한다는 것이 명분이지만, JTBC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에서 쏜 고고도미사일이 남한으로 날아오는 속도와 사드가 그것을 레이더로 포착하고 방어하기 위해 발사하는 시간과 속도가 맞지 않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설령 사드가 완벽한 장비라고 가정해도, 1기에 6발을 장착할 수 있는 사드의 요격미사일은 북한에서 날아오는 동시다발적인 고고도미사일을 방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역시 북한의 고고도미사일을 걱정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전략이며, 사드 1기당 2조원+유지비를 투자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예산 낭비임이 틀림없다. 물론 2조원 전부를 한국군이 지불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초의 1기는 단지 미끼일 뿐이고, 앞으로 몇 기가 더 들어올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2. 왜 장소가 문제인가? 사드의 전격 도입과 함께 사드가 자리 잡을 위치를 놓고 갑논을박이 한창이다. 언론에서 정확하게 밝히지 않지만-JTBC에서만 유일하게 밝힌 것으로 안다-이 위치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왜 심각한가? 이런 질문을 먼저 해보자. 사드는 누구를 위해서 배치하는가? 우리 국민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순진한 사람이다. 사드는 미군을 위해 배치하는 것이고, 사드의 방어망은 미군 기지를 포함하고 있다. 위치의 후보지 가운데 평택, 음성, 경북 칠곡 등이 있는데, 칠곡은 평택에 있는 미군부대를 방어할 수 있지만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은 방어하지 못한다. 또한 사드가 평택이나 음성 등에 자리 잡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장사포 사정거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드가 북한의 장사포 사정거리에 들어가지 않아야 하고, 미군부대를 방어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장사포 사정거리에 들어가는 위치는 충청도까지에 이르니 논리적으로 말하면 충청도 이북으로는 사드를 배치할 수 없는 것이 맞다. 사드가 충청도 이남에 자리를 잡으면 평택의 미군기지는 방어할 수 있지만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은 사드의 방어권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런 사실을 수도권 주민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수도권 인구는 한국 인구의 거의 절반이나 된다. 수조 원, 그 이상의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심각한 사안을 단 며칠만에 결정한다는 것도 그렇고, 사드의 배치 자체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을 저들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결국 국민의 안위와는 크게 상관 없는 문제를 두고 권력의 입맛에 맞는 정책으로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한국 군대는 전시작전권도 없는 허수아비 군대이고, 군대의 비리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으로도 매우,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군대의 비리를 뿌리채 뽑아내고, 국방예산이 물빠진 독에 물붓는 것처럼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8-30
  • 생리대, 남성가부장 우월주의의 패배
    생리대, 남성가부장 우월주의의 패배 한국에서 뜬금없이 ‘생리대' 논쟁이 벌어진 것은, 이 사회의 저열함과 천박함, 극렬한 빈부격차와 착취, 빈곤의 현상이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애초 가난한 여학생들이 생리대를 구입할 돈이 없어서 깨끗한 생리대가 아닌, 여성의 몸에 해가 될 수 있는 대용품을 쓴 것이 밝혀지면서부터 생리대는 인권의 차원에서 언급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여성의 기본 인권과 관련한 이 문제에 대해 어처구니 없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 진정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생리대'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고 하는 어떤 남성 국회의원의 발언은 이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남성가부장 우월주의자들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생리' 또는 ‘생리대'라는 단어 조차 뭔가 께름칙하고, 거부감이 들며, 왠지 더럽고, 지저분하고, 불결하고, 터부로 여겨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단지 그 남성 국회의원 한 사람의 느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대부분의 남성들이 갖는 공통의 느낌일 것이다. 인류의 모든 남성은 생리를 멈춘 여성이 낳은 후손들이다. 자기 어머니가 생리를 하는 것을 상상하면 더럽고 불결한가? 자신의 딸이 생리를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역겨운 마음이 드는가? 남성가부장 우월주의자들에게 여성의 ‘생리'는 은밀하고 비밀스러워야 하며, 절대 백주대낮에 드러내 놓고 까발려서는 안 되는 터부였던 것이다. 왜? 여성의 ‘생리'가 불결하고 역겹기 때문에? 아니다. 폭력으로 여성을 억압하기 시작한 이래-인류의 초기 단계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잉여생산물이 나오고, 이른바 ‘재산' 즉 사유물이 발생하면서 그 사유물을 자식에게 남기려는 남성들의 본능적 의식이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이전하는 결과를 만들었으며, 상속 제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이를 선택하기 시작한 것 역시 남성의 지배에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남성들은 모계사회로 회귀하는 것에 본능적으로 강력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모계사회는 평등사회이며 공산주의 사회였다. 어머니는 있으되 아버지는 누군지 알 수 없고, 자식들은 집단에서 공동으로 키웠다. 모계사회는 다툼과 경쟁, 착취가 없는 사회였고, 평화롭고 이상적인 사회였다. 그것은 인류의 이상이었지만, 잉여생산물을 놓고 다툼이 발생하고, 물리적으로 강한 힘을 가졌던 남성들은 모계사회의 평화와 평등을 폭력으로 해체했고, 여성의 몸을 금기 속에 가두어두기 시작했다. 소위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은 여성의 신체와 정신을 억압하고, 폭력으로 짓밟으며,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오늘날 그 핵심은 변하지 않고 있다. 남성들은 여성보다 물리적 폭력에서 우위에 있으므로, 언제든 여성을 제압하고, 폭력을 휘둘러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더더욱 남성들의 비겁함과 나약함, 어리석음과 야만의 저열한 수준은 빛을 발하고 있다. 지금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생리대 논쟁은 사실 논쟁의 여지도 없으며, 지극히 당연하게 ‘생리대의 사회화'가 진작 이루어졌어야 하는 문제다. 즉 ‘생리대의 공공성'은 인권의 차원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그것이 소위 3만 달러 소득을 올리는 나라에서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는 못할 망정, ‘생리대'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고 주절거리는 멍청하고 한심한 수준의 인식을 보이는 것은, 이 나라의 남성들의 한 없이 병신스러운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날마다 수없이 일어나는 성추행, 성폭행은 거의 대부분 남성들이 가해자다. 남성에 비해 분명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공격하는 것은 단지 몇몇 인간쓰레기들의 일탈이 아니라, 여성을 여전히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 사회의 차별이 구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생리'가 문제가 되는 사회라면, 임신, 출산은 물론 육아, 가사노동, 직장생활 등 사회 전반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차별과 착취는 과연 어떠할 것인지 안 봐도 뻔히 알게 된다. 비겁하고 저열하며 천박하면서 폭력적이기만 한 이 사회의 남성들은 호랑이가 곶감 소리에 놀라 달아나듯, ‘생리대'라는 단어만 들어도 질겁을 하고 도망간다. 이참에 아예 여성들의 생리대를 사용하고 나서 그 생리대를 가방에 매달고 다니거나, 몸에 두르고 다니는 운동을 하면 어떨까 싶다. -물론 이건 절대로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다-남성들이 ‘생리대'를 보고 접근하지 않을테니, 대부분의 병신스러운 남성들에게는 생리대가 부적처럼 쓰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정부에서 생리대를 무상으로 공급-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교육처럼-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을 다시 주장하면서, 여성들이 더욱 당당하기를 기대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8-28
  • 아이들을 종교에서 구하라
    아이들을 종교에서 구하라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발명된 ‘정신적 위로 도구'다. 하지만 그 맹목성으로 인해 종교는 인류의 도그마가 되었다. 특히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경우-여기서 불교는 제외하자. 불교는 기본적으로 ‘철학'의 개념이며, 불교를 ‘종교'로 이용하는 자들은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사기꾼들이다-그들의 맹목은 극렬하다. 중동에 있는 한 부족신에서 시작된 유일신 종교는 2천년 전에 쓰여진 ‘교리'를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고 있다. 2천년이라는 시간 동안 인간의 지식, 과학문명의 발달, 경제적 생산성, 사회 체제 등 인류의 근본적인 하부구조가 변했음에도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2천년 전의 사고방식에 얽매어 있다. 유일신을 믿는 자들이 쓴 교리서는 2천년 전, 중동의 작은 부족의 지도자들이 만든 것으로, 그 교리의 핵심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인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으로, 지배계급, 지배계층의 논리가 집대성되어 있는 것이다. 간단한 예만 들어도,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교리서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이 시기는 청동기 시대에서 새로운 문명이 발생하던 시기로, 여기에 쓰인 문자는 당연히 후대의 작품이다. 주제로 돌아와서, 종교는 그 사회의 집단 윤리와 지도지침으로 작동했고, 미개했던 예전에는 종교가 인류의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었던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발달한 상황에서, 고대의 윤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무리인가를 ‘그들만' 모른다. 그들의 집단에서 어른들끼리 패륜 내용이 가득한 고대의 문서를 모여서 읽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들의 자식들 또는 어린이들은 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패륜과 온갖 범죄행위, 잔혹한 살육, 전쟁과 재난 이야기를 듣고, 보고, 배워야 한단 말인가. 유일신 종교를 믿는 성인들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볼 때, 그들의 교리서를 어린이들에게 배우도록 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행위이며 어린이 학대에 해당한다. 현대에서도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정신적으로 미숙하다는 것에 합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술, 담배, 성인영화, 마약 등을 사회적으로 격리하도록 하는 법까지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즉, 어린이와 청소년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미숙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극단적으로 유해한 유일신의 교리서는 당연히 접근 금지 목록에 들어가야 한다. 설령 교육용으로 읽힌다 해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설명하고, 올바른 내용을 알려주는 선생님이 가르쳐야 한다. 부모가 유일신을 믿는 교도라고 해서, 그의 자식들이 당연히 유일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잘못된 주장이다. 부모가 모두 훌륭할 수 없듯이, 그들이 믿는 종교가 누구에게나 훌륭할 수는 없다. 게다가 유일신을 믿는 부모 역시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 그 교리서에 어떤 내용이 써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자식들을 무조건 끌어들이는 것은 학대를 지나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다. 유엔의 ‘아동권리협약'에는 “아동이 인종적·민족적·종교적 집단 및 원주민 등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 평화, 관용, 성(性)의 평등 및 우정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유사회에서 책임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종교와 다른 사람들을 분리하고, 차별하고, 경쟁하고, 탄압하고 있다. 그들의 ‘믿음'은 매우 적대적이고 공격적이어서 자신들과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지옥에 떨어지라'고 외친다. 이런 것이 어린이들에게 과연 이해, 평화, 관용, 평등, 우정의 정신을 배우도록 하는 것인가? 어떤 종교든 만 19세가 되기 전까지는 부모의 강압에 의하거나 전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 해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특정한 이념이나 종교 신념을 강제당해서는 안 되고, 그것이 한 인간의 삶에 매우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종교는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면서 차츰 소멸되어 가고 있고, 또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종교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 발상은, 지성과 이성이 덜 발달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일 뿐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8-28
  • 훈민정음 창제의 다른 해석
    훈민정음 창제의 다른 해석 얼마 전, 우연히 어떤 동영상을 하나 봤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말하면서 ‘훈민정음 창제'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강의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찾아보니 ‘설민석'이라는 사람이고, 한국사를 강의하는 학원 강사라고 했다. 한국사를 공부했고, 학원에서도 강의를 하고 있으니 그가 말하는 것이 틀리지는 않겠지만, 짧은 동영상을 보면서 역사의 핵심 즉 훈민정음이 창제되는 동기와 배경에 관한 내용에서 깊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설민석이 말하는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쓴 것처럼,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으니 불쌍한 백성들이 글을 읽고 쓰기에 어려움이 많아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제 설민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정리한 서울대학교 박갑수 교수의 글을 아래에 인용한다. 조금 길지만 많은 사람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관해서는 이 내용으로 배웠으리라 생각하기에,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에 관한 내용을 옮겨 본다. ------------------------------------- 한글 창제의 배경 한글 창제의 두드러진 동기의 하나는 민족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민족적 자주정신(自主精神)이다. 이는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서 벗어나 문화적으로 독립을 해야겠다는 자주정신이 발로된 것이다.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몇몇 민족은 이미 이 문화권에서 벗어나고자 민족문자를 만든 바 있다. 요(遼) 나라를 세운 거란(契丹)은 한자에 대항하여 920년 대소(大小) 거란문자를 만들었고,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女眞)은 1119년 대소 여진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원(元)나라를 세운 몽고(蒙古)는 1269년 파스파문자를 제정ㆍ반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한글 창제도 이러한 일련의 탈 한문화(脫漢文化)의 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등의 정음창제 반대상소는 이 탈 한문화에 반기를 든 것이다. 최만리 등은 세종 26년 언문(諺文)을 제작한 것이 지극히 신묘하여 만물을 창조하고, 지혜를 운전함이 지극히 뛰어나나, 좁은 소견에 의심되는 것이 있다 하며 6개조를 들어 장문의 언문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 6개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과 동문동궤(同文同軌)의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제함으로 저들이 비난하면 사대모화(事大慕華)의 도리에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중국 본토에서는 지방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는데, 몽고, 서하(西夏), 여진, 일본이 문자를 만든 것은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다. 셋째, 언문의 사용은 학문을 돌보지 않게 하고, 사리판단을 못하게 할 것이니, 학문에 손해를 끼치고 정치에 이로운 것이 없는 언문의 제정은 옳지 않다. 넷째, 언문을 사용하게 되면 형옥(刑獄)에 공평을 기할 수 있다 하나, 형옥의 잘잘못은 초사(招辭)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옥리(獄吏)의 태도에 달린 것이다. 다섯째, 일은 서두르지 말고, 공론을 거쳐 해야 하는데, 급할 것이 없는 언문 제작을 행재(行在)에서까지 급급하게 하여 성궁(聖躬)을 조섭하는 때 번거롭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섯째, 동궁(東宮)이 성학(聖學)에 잠심하여 이를 더욱 궁구하여야 하는데, 언문 제작에 날이 맞도록 때를 보내니 이는 학문을 닦는 데 손실이 된다. 이상과 같은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최만리를 무슨 대역죄(大逆罪)나 저지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은 위에 보인 바와 같이 당시 기득권층인 사대부(士大夫)의 보수적인 생각을 대변한 것뿐이다. 그리고 여기 덧붙일 것은 한글 창제자(創製者)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는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참여하고, 세종을 보필한 것으로 일러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종대왕을 비롯한 동궁(東宮)과 진양대군(세조), 안평대군 등 왕자들이 참여하여 왕가사업(王家事業)으로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러기에 세종실록(世宗實錄)에 한글 창제에 관한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세종 25년(1443) 12월 30일조에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是謂訓民正音”이란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렇게 정음 창제가 은밀히 진행된 것은 최만리 등의 반대상소에 보이는 바와 같이 당시 수구파 문인들의 반발이 거세고, 명(明)나라와의 유대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염려한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학사들은 창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관여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정음을 반포한 정음과 같은 이름의 책 “訓民正音” 해례본 제작에 참여한 것이다. 세종실록에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29일조에 “훈민정음성(訓民正音成)”이라 보이는 것이 이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정인지 서문에는 연기(年紀)가 “正統十一年 九月上澣”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한 것은 이 정인지의 서문에 따라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 박갑수의 글에서 핵심은 ‘기득권층인 사대부의 보수적인 생각을 대변한 것'이다. 즉 설민석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해 그 시기의 기득권 세력은 당연히 반대를 했던 것이고, 세종대왕은 그런 기득권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쌍한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이 대전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왕조 중심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즉, 권력을 가진 자가 기록한 문서의 내용만을 가지고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매우 쉽고 편리한 방법이고, 또한 자료도 풍부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크게 의심하지 않고 따르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배자 또는 기득권 세력이 백성이 단지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 것은 합리적 이유가 될 수 없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 말이 중국(한자)과 달라서 가여운 백성들이 글자를 읽고 쓸 수 없다'는 것은 언듯보면 백성들을 위한 말일 수 있지만, 지배자의 논리, 지배자의 언어로 포장된 껍질을 벗기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표피적 분석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을 하고 있는 정해랑의 글이 ‘훈민정음’ 창제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 글을 읽어보면 설민석이나 박갑수의 글과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한글 창제의 취지를 애민 사상의 구현에서 찾습니다. 어지에서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여삐(가엾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성의 불편함 때문에 한글을 만들었다고만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를 결심한 시기는 조선 왕조가 하루가 다르게 번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이 닦아 놓은 기반 위에서 순탄하게 통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정적도 없었고,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갈등도 아버지의 도움으로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종에게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왕권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는 아버지 세대에 거의 정리되었지만 민중과의 관계는 그에게 새로이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호패법이나 5가작통법을 시행하면서 민중에 대한 통제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틀일 뿐이었고, 내용을 채워야 할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민중들은 고려 시대의 민중들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습니다. 고려 중기 뒤로 숱한 농민, 천민 봉기와 봉건 귀족의 부패와 동요를 겪었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저항 의식이 꽤나 높았습니다. 또한 조선 왕조 자신도 무력을 빌려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민중을 구태의연한 강압으로만 통치하다가는 또 다른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의식, 정치의식이 성장한 민중들은 고려 시대 이후 소멸한 향찰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향찰은 한문 자체와는 아무 관계없이 국어의 형태 요소뿐 아니라 의미 요소에 이르기까지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하는 전면적인 표기 체계로서, 삼국시대 이래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문자였습니다. 그런데 향찰이 고려 시대에 문벌 귀족들에게 배척 당하다가 사라지고 말면서 민중들은 문자 생활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무신 정변 이후 귀족 사회가 붕괴하면서 사회의식. 정치의식이 성장한 민중들이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갈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한글은 이러한 민중의 요구와 세종의 필요가 맞물리면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사학자는 한글을 `민중의 전리품`이라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한 세종의 통찰력이 뛰어난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창제된 한글은 민중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나 지배층에 포섭하기 위한 교화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원래 통치하는 세력은 통치 받는 사람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모두 쓰는 법입니다. 한글은 이 양 측면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앞에서 본 `한글 고비`에서 한글로 쓰인 부분은 한글이 백성들에게 지배층의 경고를 알리는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한글이 채찍으로 쓰인 것이지요. 반면에 통치 세력이 쓰는 당근은 얼마큼 경제적 이익을 던져 주거나 지배 세력의 사상으로 포섭하는 방식입니다. 조선 왕조는 과전법과 양인 신분 찾아주기 따위로 민중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얼마간 당근으로서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상으로 포섭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고려 시대까지 지배 세력의 사상은 불교라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므로 민중을 지배 세력의 사상으로 포섭하는 것은 문자 없이도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지배 세력의 사상으로 삼았습니다. 성리학은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양식만으로 사상을 전파할 수 없었습니다. 성리학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민중이 문자를 배워 성리학의 가르침을 이해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의 민중들은 대부분 문맹이었습니다. 민중들에게 새삼스럽게 한자를 가르쳐서 성리학을 배우게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한글은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필요에도 부응하기 위해 새로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민중의 교화 수단으로 쓰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한글은 만들 때부터 그 목적대로 주로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는 선전물이라고 할 수 있는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들을 출판하고 성리학 교재를 번역하는 데 쓰였습니다. 그밖에도 농업서적이나 기술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일에도 쓰였지만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한글은 본래부터 양반과 민중 모두가 쓰는 전국민의 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민과 천민들의 글이었고, 상민과 천민들을 지배 세력이 사상적으로 가르치고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 역사의 수레바퀴는 ‘왕조'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당대의 민중들의 요구가 어떠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역사가를 비롯해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 자세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대중에게 역사를 강의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천박한 내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8-02
  • 조영남 사태에 관한 멍청한 논리를 반박한다
    조영남 사태에 관한 멍청한 논리를 반박한다 짜증을 억누르며, 조영남 사태에 관한 멍청한 논리를 반박한다 먼저, 아래 링크의 한국일보 기고는 손이상이라는 문화운동가가 쓴 글이다. 이 글의 핵심은, '조씨에게 죄가 있다면 하청업체에 위탁한 제품에 자사 로고를 박아놓고 비싸게 파는 대기업에도 같은 죄가 적용되어야 한다. 노동자에게 헐값을 쥐여주고 만든 상품을 시장에 내다 파는 모든 회사도 같은 죄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http://hankookilbo.com/v/cc9461b5b4ea43bd9f506907844a60c1 손이상의 논리는, 예술작품에서 '대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로댕을 거론하고 있다. 이 주장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예술'이라는 단어를 '미술작품'에 한정하고 있고, 예술과 자본을 등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자, 손이상이 주장하는 논리가 엉터리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부분인데, 이제부터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예술행위에서 '대작'은 큰 문제가 아니다, 라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지 않으며, 소위 '관행'이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착취의 다른 이름이다. '대작'이 문제없다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소설을 쓰는 내가, 내 아이디어를 다른 작가에게 제공하고,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한 다음, 그렇게 나온 작품을 내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인가? 단지 내가 대작을 한 그 작가에게 정당한 원고료만 지불한다면? 맞나? 조영남의 '대작'이 문제 없다고 말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내가 한 말도 맞다고 해야지 논리적 일관성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예술'이라는 건, 행위가 아닌-행위는 즉 작가의 직접적인 창작행위를 말하는 것인데-아이디어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인가? 음악의 경우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를 작곡가에게 의뢰해 노래를 만들고, 작곡가에게 일정한 돈을 지불하면 그 노래는 내가 창작한 것이 되는가? 대체, 이런 방식의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뇌 구조가 정말 궁금하다. 대체 '예술가'라는 게 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개념에 대해서 생각은 해 본 걸까? '예술가'의 기본이 어떤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해 본 걸까, 매우 의심스럽다. 2. 예술 행위와 자본을 등치하는 오류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나갈 것이며, 이런 주장은 따라서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래서 더 나쁘다. 앞에서 '대작' 자체가 불법이며 '예술'이 아님을 반박한 것처럼, '대작'과 자본이 노동자를 고용해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노동자를 고용해 상품(또는 서비스)을 만들어 판매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합법적이며 정당하다고 주장한 사람이 누군가? 오로지 자본가들일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 자체로 불법이고, 정당하지 않다. (노예제와 농노제가 합법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그럼에도 손이상은 마치 자본주의가 합법적이고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 정당한 체제이자, 작동방식이라고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은, 자본이 절대적 힘의 우위를 갖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폭력으로 그 체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손이상은 자신이 자본주의 체제에 매몰되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손이상이 그 논거로 끌어온 진중권의 주장 역시 똑같은 오류를 갖고 있음을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위의 손이상의 글을 보면, 1)에서 이미 잘못된 논거로 2)를 주장하는 것이니, 그의 논리는 전제부터 잘못되었기에 결론은 당연히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 그만큼 낮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짜증이 나지만,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꼭 손이상(나는 그가 누군지도 모른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제발, 좀 모르면 배우고,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기 바란다.
    • 칼럼
    • 백건우
    2021-08-01
  • 새로운 형태의 도시빈민에 관하여
    새로운 형태의 도시빈민에 관하여 2000년 이후 한국에서 '도시빈민'에 관한 대중적인 개념과 연구는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드물게 '도시빈민'에 관한 연구가 진행 중이긴 하지만, 그것은 사회변화에 반영되지 못하고, 학문의 분야에서 머물러 있을 뿐으로, 고착된 사회문제의 개혁이나 변혁의 이론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아쉽다. '도시빈민' 문제는 한국 뿐 아니라 이른바 '제3세계' 전반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사회문제이며, 오늘날에는 경제선진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미국을 포함한 경제선진국에서는 슬럼가나 할렘, 노숙자 등을 '도시빈민'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언제부터인가 '도시빈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런 규정이나 개념을 학계, 언론에서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도시빈민'에 관한 사회학적, 계급적 분석은 이미 끝났거나, 아니면 '도시빈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인지 모르겠다. '도시빈민'은 '도시'와 '빈민'이 결합한 것으로, 산업사회의 짙은 그늘의 부정적 현상이며, 산업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특수한 존재들이다. '도시빈민'과 비교할 수 있는 '농촌빈민' 역시 최근의 사회학 주제로는 그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런 주제들은 인기도 없을 뿐 아니라, 학자들이 다루기에도 거북하고,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도시빈민의 발생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경로를 거친다. 그것은 이미 250년 전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도시빈민이 출현하게 되는 것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봉건사회의 농노, 농경시대의 경우 한 나라의 인민이 굶주리는 경우는 흔했지만 그들을 '빈민'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물론 봉건시대나 농경사회에서도 빈민은 존재했겠지만, 노동력이 부족했던 그때는 누구나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으면, 굶주림으로 죽지는 않았다. 생산력이 낮아 잉여수확물이 적었고, 지배계급이 착취 때문에 인민에게 돌아가는 식량의 양이 적었던 것이 문제였지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소외'의 문제는 심각한 편이 아니었다. (자본주의보다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한국에서 도시빈민의 출현은 군사독재정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이면서 폭력적인 경향으로 나타났다. 필연적인 이유는, 한국이라는 변방-강대국에 둘러 싸인-의 작은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고, 냉전체제에서 세계강대국인 미국 시장에 진출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과 자원이 거의 없는 나라에서 오로지 노동력만으로 수출을 통한 돈벌이를 하는 방법은 낮은 임금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르면서 매우 낮은 임금으로 경제선진국의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 노릇을 자처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까지 쏟아진 사회과학 서적들에서 이미 '도시빈민'에 관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끝났으니 여기서 말하는 건 필요없을 듯 하고, 2000년대 이후 논의가 없는 '도시빈민'이 2000년대 이전의 '도시빈민'과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겠다.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농촌에서 유입된 노동인구는 도시의 변두리나 공업단지 주변에 밀집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청년 노동자들이 기숙사에 거주하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면, 가족 단위로 이주한 농촌 인구는 도시 변두리에 정착해 저임금 노동시장에 편입되었다. 이미 도시에서 살고 있던 빈민은 도시재개발-자본의 이윤추구 사업-으로 밀려나 도시의 외곽 변두리로 이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달동네', '판자촌', '해방촌'과 같은 단어들이 이들을 상징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농촌인구와 도시인구의 비중은 꾸준히 반비례하면서, 지금은 도시 인구가 전체의 약 90%를 차지할 정도로 한국사회는 농촌사회에서 산업사회-정보화사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로 완전히 이행했고, 초기 도시이주 세대에서 한 세대가 지났다. 1960년대 국민소득이 200불에서 지금은 1만5천불까지 올라갔으니 그 사이 경제 발전은 수구집단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적'이라고 과장할 수도 있겠지만, 단지 결과만을 말하는 방식은 반민주, 반인권적 패륜임을 알아야 한다. 그 사이 노동자와 농민이 겪은 고통은 외면하고, 묵살하면서 오로지 권력자의 치적을 위해 결과를 과장하는 방식의 주장은 천박하고 저열하며 비열한 주장일 따름이다. 국민의 다수인 노동자와 농민이 피땀 흘려 경제를 일으켜 세웠지만, 정작 그들은 그렇게 쌓인 부를 나눠갖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의 착취와 억압으로 질식당했다. 박정희 군부독재가 18년, 전두환 군부독재가 7년, 노태우가 7년까지 모두 32년의 군사독재 기간 동안 경제는 성장했지만 그 열매는 극소수 자본과 권력에게 돌아갔다. 절대 빈곤을 벗어나고, 보릿고개가 사라진 것에 대해 노인 세대는 독재정권의 치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들-박정희와 전두환 일당-을 칭송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실제 일을 한 사람들은 바로 그들 자신임에도, 자신들이 일군 부를 착취한 자들을 은인으로 받드는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겪은 세대에게 전쟁의 공포는 독재정권보다 더 강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렇더라도 독재정권의 만행을 눈감고, 그들의 착취와 억압을 긍정하는 것은 전쟁의 공포와는 별개의 문제임을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 어떻든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1990년대 이후, 정권과 자본은 나라 곳간을 털어 먹고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세계 자본의 공격으로 인민의 삶은 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구제금융 사태 이후,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더욱 격렬해졌고, 권력과 자본은 샴쌍동이처럼 변신했다. 지금도 전통적 형태의 '도시빈민'은 존재하지만 외형적으로 도시빈민의 거주지는 대개 '재개발'되었고, 도시빈민은 '청년빈곤'이나 '청년실업' 등의 주제에 묻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대도시 변두리에 형성된 달동네, 판자촌은 민간 건설업자들에 의해 고층 아파트로 변하고, 그곳에 살던 도시빈민들은 더 먼 변두리로 밀려났다. 일부 운이 좋은 도시빈민은 영구임대주택이나 시영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삶까지 개선된 것은 아니다. 경제가 활성화되던 80년대는 일자리와 잉여 자본의 일부가 도시빈민에게도 돌아갔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중산층'의 위치까지 올라가기도 했지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이후 더욱 가속, 심화된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도시빈민은 '하우스푸어'와 '청년빈민'이 대표적이라고 본다. 하우스푸어는 부동산 개발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를 노리는 자본에 의해 먹잇감이 된 서민들이다. 그들도 부동산(주로 아파트)이 투자와 거대한 잉여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이라는 욕심을 가지고 뛰어든 잘못은 있지만, 근본적으로 국민을 상대로 부동산 투기라는 사기를 친 것은 정부의 책임이고, 정부와 밀착한 자본의 책임이다. 은행에서 거액의 융자금 즉 빚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그 이자를 갚아야 하는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이자의 압박과 원금 손실이라는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국민소득은 분명 증가하고 있었고, 최저임금 보장과 각종 복지 제도들이 좋아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껍데기는 화려하면서 알맹이는 없는 하우스푸어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90%이상의 대학진학율과 대학을 나온 고급인력의 취업난, 실업자의 양산은 정부와 자본의 무능과 계산된 의도로 인해 '청년빈곤'과 '청년실업'을 대량 발생하고 있다. 대학을 나와야 취업을 할 수 있다는 논리는, 대학이 하나의 시장-취업시장-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대학이라는 장사를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자본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또한 '청년실업' 문제는, 산업예비군(실업자)을 최대화 하는 것이 자본에게는 매우 유리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온 고급인력이 실업자로 존재하게 되면, 그들 자체의 경쟁이 격렬해지고, 경쟁은 단합보다는 분열을 조장하게 된다. 즉, 청년들이 뭉쳐서 자본에 대항하는 힘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임금 구조를 고착화 해, 고급인력을 싼 임금으로 쉽게 부릴 수 있으며, 해고의 위협이 상존하고,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의 단결을 방해하는 기능도 하게 된다. 자본으로서는 꿩 먹고, 알 먹고, 둥지털어 불 때는 일석 삼조 이상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1970년대의 도시빈민이 도시 변두리 지역 산동네, 판자촌에 거주하는 건설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들로 대표되었다면, 2000년대 도시빈민은 번듯한 아파트에 살면서 빚에 허덕거리고, 대학을 나와도 취직을 못하고 한숨 짓는 청년 노동자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격렬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친자본정부와 자본의 결합으로 발생하는 구조적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지 않는 한, 빈민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30
  • '상징'을 대하는 태도
    '상징'을 대하는 태도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박유하의 저서로 촉발된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의 상황은 현재 일본의 아베 정권의 본질과 정체를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무능한 정권이 아베 정권과 작당해 국제법에 어긋한 행위를 하면서,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이 뉴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저 하나의 '작품'이자 '상징'에 불과한(?) '소녀상'을 일본은 왜 두려워하는 걸까? 말할 것도 없이 '소녀상'이 일본군 성노예로 고통받은 우리 할머니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진실이 담긴 서류는 많은 사람들이 못볼 수도 있지만, 성노예 할머니를 상징하는 '소녀상'은 누구나 볼 수 있고, 그 상징을 볼 때마다 '성노예 할머니'를 떠올리고, 자연스럽게 일본의 악행과 야만성을 기억하게 된다. '상징'은 매우 강력한 기억의 응집임에 분명하다. '소녀상'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소녀상'과 '예수상' 모두 각기 다른 '사건'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소녀상'이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를 상징한 것이라면, '예수상'은 특정한 종교의 지도자를 상징한 것이다. 절에 있는 '불상' 역시 석가모니를 상징한 것이다. 시대와 상징은 다르지만, 사람들이 상징을 대하는 태도는 어떨까? '소녀상'은 사람들이 찾아와 모자를 씌워주고, 목도리를 둘러주며, 양말을 신기고, 꽃을 바친다. 작고 여린 소녀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당한 여성들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소녀상'은 단지 고통받는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와 역사를 하나로 만들고, 억압과 착취와 고통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통을 받기로는 '예수상'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를 '신'으로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옆구리를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예수'라는 인간을 바라보며 돈과 건강과 행운을 달라며 빈다. 두 상징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자발적이지만, '소녀상'은 사람들이 측은하고 가엽고, 애틋하게 생각해서 모자며 목도리며 양말이며 신발 등을 가져와 입히고 신기고 꽃을 바치는데 반해, '예수상'은 그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며 불쌍함을 느끼기는 커녕, 오히려 가학적 취미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참혹한 예수상을 소비한다. '소녀상'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사건에서 비롯한 것이고, 현대사는 여전히 우리 민족의 역사와 인민에게 직접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이 훨씬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래서 비록 '소녀상'이 금속으로 만든 물체이긴 해도,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담아 '소녀상'을 마치 인격체처럼 대하게 한다. '인격체'처럼 대하는 것은 '예수상'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를 신으로 믿는 사람들은 매우 추상적으로 예수상을 대한다. 그것은 전혀 감정적이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삶과 역사와는 전혀 관계 없는 중동의 한 부족에서 나온 우상을 섬기게 되면서, '신'을 믿는 것을 단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투영하고, 이기심과 욕심을 충족하려는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신도들 가운데 예수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십자가에 매달려 손과 발에 못이 박힌 고통스러운 한 인간을 보면서,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달파 하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예수상' 앞에서 엎드려 자기의 소원이나 실현할 수 없는 욕망을 빌어대는 사람들의 내면의 빈곤함과 추악함을 생각하면, 종교라는 것이 일종의 감정의 배설물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소녀상'은 우상화하거나 타자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살아 있는 역사로서, 우리가 늘 되새기고 잊지 말아야 할 치욕의 시간과 피해자인 조선의 여성들-우리의 누이들-의 아픔을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30
  • 정치를 소비하는 천박한 사회
    정치를 소비하는 천박한 사회 SNS의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많은 글들이 정치 또는 정치인 또는 정당에 관한 내용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자유이므로 그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정치’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 삼성전자의 백혈병 노동자,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 1천만명이 넘는 한국의 노동자들의 실태, 고령화 사회의 문제, 한국 농업의 근본적 문제, 환경과 재생에너지 문제, 교육, 복지 등 중요한 화두들이 참으로 많은데, 우리는 왜 부르주아 정당과 정치인에 관해 끊임없이 관심을 쏟아야 하고, 그것을 소비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무릇, 정치는 물 흐르듯 해야 한다고 했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란, 인민이 정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를 하는 자들이, 나라의 운영을 매끄럽고 또렷하게 한다면, 인민은 나라의 운영을 정치가들에게 맡기고, 자신의 생업과 문화, 예술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이것이 바람직한 나라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인민이 정당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정치인들의 부정과 비리에 대해 떠들기 시작하면, 그 나라는 이미 썩어가는 나라다. 지금 우리가 급하게 관심을 쏟아야 할 분야는, 일본과 중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긴급한 핵발전소의 폐기문제와 하루 세끼 먹거리의 재료들의 오염 문제들이 되어야 할텐데, 정작 중요한 사안들은 잊혀지고, 정치가와 정당의 시시콜콜한 내용들로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것은, 지배계급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지배계급과 그들의 도구인 언론의 행태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그들이 만들어가는 프레임에 놀아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지식이나 배움 정도, 부와 명예의 수준을 떠나 어리석고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개의 어리석은 인민들은, 지배계급이 만든 논리에 쉽게 함몰되며,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자신의 계급적 위치와는 관계 없이, 지배계급을 위해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일수록 그 경향이 강하고,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지배이데올로기의 마타도어를 잘 알면서도 그것을 정확하게 반대하지 않거나, 애매하게 대응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태도를 보인다. 물론 적극적으로 자본주의에 투항해 돈과 권력을 확보하려는 자발적 노예같은 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나의 국가, 또는 집단에서 정의롭고 비판적인 지식인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현상이다. 지금 한국사회가 바로 그렇고, 그래서 한국의 미래가 암담하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이며,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투항한 지식인들의 역겨운 행동을 비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당장 해야 할 일은, 지배계급의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부르주아 정당과 정치인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공동체, 협동조합, 기본소득의 지급, 복지의 확대와 같은 공공의 이익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정치와 정당, 정치인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드라마, 먹방 따위의 너절한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것은 스스로의 인격과 자존심을 망가뜨리는 것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사람들이고, 세월호 참사와 일제 성노예 할머니들에게 보여주는 우리의 태도를 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제발 부르주아 정당과 정치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고, 우리가 올바르고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에 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 칼럼
    • 백건우
    2021-07-30
  • 종교의 정체 또는 본질
    종교의 정체 또는 본질 사실, 종교의 정체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수 백 개의 나라와 인종, 민족은 다르지만 종교는 그런 경계를 허무로 어디든 스며들어 적시는 물과 같다. 현대까지 살아남은 종교는 대체로 기독교(구교, 신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 불교와 힌두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와는 성격이 다르다. 또한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같은 신을 믿고 있으니, 지금부터 하는 말의 주된 대상은 '기독교'가 될 것이다. 기독교도가 가장 난감한 부분은 '구약'과 '신약'의 내용이다. 분명 같은 종교에서 비롯한 '성서'라고 말하지만, 두 책의 내용은 도저히 하나의 종교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판이하다. 한국에서는 기독교 신자라고 해도 '구약'이나 '신약'을 다 읽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은 걸로 안다. 자신이 믿는 종교의 경전조차도 다 읽지 않는 것은 물론, 읽어도 그 뜻을 모르면서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종교인을 보면, 멍청하고 한심한 생각과 더불어 불쌍한 생각까지 든다. '구약'에 등장하는 신은 분노와 폭력의 신이다.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주장은 '하지 마라!'라는 명령이다. 무언가를 하면 신이 노여워하고, 그 대가로 벌을 받거나 추방당하거나 자손이 끊기거나, 악마에게 이용당한다는 말 뿐이다. 이걸 오로지 '신'이라는 절대자의 명령으로만 보면, 그 사람은 중세 이전에 사는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구약'은 2천년 전에 살던 사람들이 지켜야 할 사회적 규범과 계율들이었다. 당시 지도자들에게 인민들은 말할 수 없이 멍청하고 무지하며 답답한 족속들이었다. 이미 종교가 발생하고 제사장이 지배계급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인 인민들을 자신들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다뤄야 할 필요를 느꼈고, 당시 수준으로는 공포와 억압, 처벌, 협박 등이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온갖 자연현상들은 무지한 인민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고, 그것은 곧 '신'의 분노로 표현되었다. 좋은 일이 생기거나 풍년이 들면 신의 축복이라고 했고, 자식이 태어나거나 결혼을 하는 것도 축복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저주와 분노와 공포가 있어야만 했다. '구약'에서 말하는 '십계명'이라는 걸 보면, 그것이 '신'의 목소리인지, 지배자의 목소리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계명의 대부분은 지금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도덕규범에 불과하다. 현대인이라면 너무도 당연한 이런 내용이 당시에는 석판에서 새겨서 가르쳐야 할 만큼, 당시의 도덕규범이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더 웃기는 내용은,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돌판에 새겨 내려온 당시에도 이미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다니,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일상적이었는가를 말해 준다. 물론 이런 내용들은 모두 상징적인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창작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우리는 글자로 씌어진 내용이 아닌, 그 글이 상징하는 진짜 사건이 무엇인가를 분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단군 신화'의 경우, 기독교의 '구약'과 좋은 비교 자료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단군 신화'를 그저 하나의 '신화'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한 곳에 정착해 농사를 짓게 된 이후, 농경민족이 살아왔던 과정을 압축한 것으로, '단군 신화' 안에는 5천 년 전 당시의 세력 분포-호랑이족과 곰족-와 이들의 결합, 농사를 짓기 위한 자연 환경의 필요성과 다양한 직업의 생성 등이 비교적 잘 전달된 내용이다. 이런 내용은 이미 30년대에 경제학자 백남운에 의해 '조선사회사상사'에서 밝힌 내용으로, 신화를 유물론의 시각으로 분석하면 더 이상 '신화'라는 애매한 관념적 상상은 사라지고, 인류가 살았던 과정이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신약'에는 예수가 등장한다. '신약' 역시 예수라는 인물이 살았던 시기에서 이미 수 십년에서 수 백년의 시간을 두고 쓴 편지글을 나중에 종교지도자, 즉 지배계급이 모여 재편집한 내용이므로 당연히 창작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의 신은 '인격신'이라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창세기'에 신이 자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반대로 읽으면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닮은 '신'을 창조했다는 말과 똑같다. '인격신'은 이미 그리스, 로마 시대에 활발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유일신의 근원은 '태양숭배'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오로지 '기독교신자'들만 자신들이 믿는 신이 유일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아이시타인이 말했듯,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이성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이고 확장하면서, 더 이상 고루한 '인격신'의 존재는 필요 없게 되었다. 그는 오히려 모든 종교가 과학의 성과를 인정하고, 과학에 수렴할수록, 즉 '인격신'이 아닌, 진정한 우주의 아름다움을 찬양할수록 원시적 종교가 주는 어리석음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세상을 이성을 갖고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의 문명과 진보를 받아들이고, 인간이 만든 길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과거의 인류는 어리석었고, 무지했으며, 비이성적이었다. 그리고 비이성적인 행동은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종교로 인해 벌어지는 무수한 전쟁과 살육을 보라. 인간은 종교가 평화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하루도 끊이지 않는 분쟁과 학살의 근원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종교를 버리는 것만이 인류의 평화를 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며, 종교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인종차별, 학살, 종교분쟁, 사기, 편견 등이 인류 전체의 범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고, 과거로 퇴행하려는 악의적인 행위임을 종교인들은 알아야 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선량한 사람들이 많지만, 개인으로 선량함을 지키는 것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정의롭고 선한 사람은 종교가 없어도 그렇게 행동한다. 오히려 종교의 외피를 쓰고 파렴치한 짓을 일삼는 사람들이 인류에게는 해악인 것이다. 인격신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가를 알려면, 우주를 보라. 빛의 속도로 300억년을 가도 끝이 닿지 않는 무한한 우주 속에서 우리는 아주 '작고 푸른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당신이 믿는 그 신이 300억년이 넘는 우주를 만들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 바란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신은 처음부터 없었고, 인간이 만들었으며, 그렇게 만든 신조차도 이제는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이성을 가진 인간의 합리적인 태도다.
    • 칼럼
    • 백건우
    2021-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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