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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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G전자, 세계1위
    LG전자, 세계1위 LG전자 형, 축하해. 가전분야 세계 1위라니! 내가 얼마나 오랜동안 형을 응원했는지 모를 거야. 형이 금성사 '골드스타'로 라디오 만들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니까. 형이 '별셋'이 한테 매일 얻어터지고, 구박을 당해도 나는 꿋꿋하게 형을 응원했다고. '별셋'이는 일본 기술 빌려오고, 박정희 빽으로 한창 잘 나갔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형이 '별셋'이 뺨을 후려 갈길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국내에서는 '별셋'이 한테 당하고, 외국에 나가면 쏘니를 비롯해 일본의 가전제품 회사들이 거대한 산맥처럼 늘어서 있고, 미제는 왜 또 그렇게 물건을 잘 만드는지, 형이 주눅 들어서 하마터면 가전분야를 포기할 뻔 했잖아. 그래도 우리 민족이 또 끈기의 민족이잖아. 형이 그렇게 코피 흘리면서 처음에는 일본제품 베끼다가-괜찮아, 다들 그렇게 하잖아-어느새 일본 제품보다 뛰어난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잖아. 그게 90년대부터지. 형,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전제품은 전부 형이 만든 것만 써왔어. 이건 진심이야. 내 주변에도 가전제품은 언제나 금성, 골드스타만 쓰라고 늘 말했어. 내가 형을 좋아하는건, '별셋'이가 양아치처럼 굴기 때문에, 형이 좀 안쓰러워서 그런 마음도 있었지. 그런데, 솔직히, 형이 만든 물건이 '별셋'보다 더 낫더라. 그건 내 주변 가족, 친척, 지인들도 다 인정해. 그러니까, 형이 코피 터져가면서 만든 물건이 상당히 훌륭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찾아서 쓰는 거라고.세계 1위였던 미제 '월풀'을 앞섰으니, 이제 형은 국내에서는 '별셋'이 뺨을 후려치고, 일본 애들 소니, 미쯔비시, 도시바, 히다치 같은 애들도 무릎 꿇리고, 양코백이 월풀과 에디슨이 만든 제너럴 일렉트릭도 저만치 따돌렸잖아. 이건 정말 기분 좋은 사건이야.형, 그런데, 나는 좀 불만이 있어. 내가 형이 만든 물건 쓴다고 했잖아. 내가 집을 짓고 가전제품은 전부 형이 만든 '금성사', '골드스타'로 들여놨거든. 그리고 16년이 되었는데, 왜 고장이 안 나는 거야? 고장이 나야 신제품을 살 거 아냐? 게다가 조금 문제가 있어서 서비스 신청을 하면, 기사님은 왜 그렇게 빨리 와서 후딱 고쳐주고, 왜 그렇게 친절하고 싸게 고쳐주는 거지? 뭐 고칠 것도 거의 없었지만, 우리집 냉장고, 김치냉장고, 세탁기, 식기건조기, 광파오븐...입 아프다...대체 왜? 고장이 안 나는 거야? 이렇게 튼튼하게 만들면 형은 물건을 더 많이 팔 수 없어서 가난해야 할텐데, 이상하게 왜 매출은 자꾸 늘어나고, 영업이익도 비례해서 막 늘어나는 걸까? 난 정말 신기해.하여간 형, 구인회 아저씨가 '금성사'로 시작해서 오늘날 세계 1위의 최고 가전제품 회사가 된 건 형의 끊임없는 연구개발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해. 그래서 더 축하해. 아, 그런데, 형네 회사 홍보실 직원들은 좀 맞아야겠더라. 물건을 잘 만들어놓고 왜 홍보를 안 하지? 형네 제품 쓰는 우리같은 사람들이 물건 좋다고 막 떠들고 다니잖아. 홍보실은 제품이 좋은데도 오히려 감추느라 쉬쉬하던데? 그게 전략이라고? 와, 진심, 형네 홍보실 고단수네. 형이 만든 제품을 쓰는 건, 세계 1위 제품을 쓰는 거잖아. 내가 괜히 기분이 좋고 자랑하고 싶어진다. 한국 1위가 세계 1위인 거잖아. 나 국뽕 싫은데, 형은 진짜 칭찬해. 한 가지만 부탁할께. 형네 물건 만드는 노동자들 많잖아? 그리고 제품은 노동자의 손에서 나오는 거잖아? 기술개발, 디자인 전부 다. 그러니까 형네 회사 노동자들에게 월급도, 보너스도 좀 많이 주고, 돈 벌어서 이윤이 남으면 그 사람들 복지도 좀 신경 써주고 그러면 좋겠어. 그러면 나같은 사람들이 더 신나게 형이 만든 제품을 쓸 거야. 형, 진심으로 세계 1위 축하해. 앞으로 쭉 세계 1위를 유지하도록 응원할께. 아, 노트북도 형이 만든 '그램'을 써. 나 잘했지?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19금 토끼와 거북이
    19금 토끼와 거북이 야, 거북이 존만아. 너 오늘 백미터는 걸었냐? 크크크크크. 토끼 저 새끼는 오늘도 나를 놀린다. 땅바닥에 붙어 엉금거리며 걷는 나와 달리 토끼는 날렵하게 뛰어 빠르게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놀린다. 개새...아니 토새끼. 내가 150년을 사는 동안, 저 토끼 애새끼의 애비와 할애비도 나에게 똑같이 말했다. 저 새끼들은 할 말이 그것 밖에 없나보다. 나는 짐짓 화가 난 척 인상을 쓰고 짜증난 것처럼 말했다. 그래봐야 너는 나한테 지게 되어있어, 임마. 토끼가 눈을 동그랗게-가뜩이나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졌다-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비웃었다. 왜? 너는 네가 달리기를 잘 한다고, 빠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멍청이. 나는 토끼가 열받을 것을 기대하며 도발했다. 아니, 사실을 말했다. 내 할아버지-450년 전이다-가 저 토끼의 10대조 할아버지와 달리기 내기를 했을 때, 내 할아버지가 이겼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중간에 토끼가 낮잠을 잤다고 하는데, 이제와서 밝히는 사실이지만, 내 할아버지는 시합을 하기 전에 중간 쯤 나무 아래 당근을 여러 개 놓아두었다. 그건 당연히 토끼의 눈에 띄었고, 토끼는 당근을 맛있게 먹고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당근 속에 수면제를 넣은 것은 비밀로 하자. 토끼는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알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심판을 본 호랑이가 단호하게 거북이 손을 들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병신새끼, 거북이가 너를 속였다고 화를 내면, 거북이가 너보다 천 배도 느리게 걷는다는 걸 알면서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한 건, 신사다운 행동이냐? 너는 더 나쁜 새끼야. 토끼는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토끼는 거북이에게 원한을 가졌다. 달리기 시합을 하자는 말은 못하지만, 토끼는 늘 우리 부모, 내 옆을 지나면서 백 미터는 걸었냐고 놀렸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내가 토끼를 놀리자, 토끼는 화가 치밀었다. 그때는 우리 할아버지가 낮잠을 자서 그런 거거든. 이번에는 진짜 시합을 하자. 내가 지면 평생 네 하인이 되어서 먹이를 구해다 바칠께. 토끼가 화를 참지 못하고 떠들었다.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 하지만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웃기고 있네. 들판에서 그냥 달리면 말할 필요가 없잖아.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멍청아? 토끼는 멈칫하더니, 되물었다. 그래, 좋아. 그러면 네가 제안해. 어떤 방법이든 동의할테니까. 달리기 코스 중간에 호수를 헤엄쳐 건너는 걸 넣으면 나도 동의하지. 나는 아무래도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조금 짜증을 내며 말했다. 토끼는 동의했고, 우리는 호수가에서 가까운 느티나무 아래서 출발했다. 심판은 여우가 했는데, 그가 손을 내리기도 전에 토끼는 이미 호수로 달려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아무리 빨리 걸어도 엉금엉금 거릴 뿐이었다. 토끼는 이미 호수에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가 호수 절반 가까이 갔을 때서야 나는 겨우 호수의 물가에 다다랐다. 그리고, 물속으로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나는 육지에서는 엉금거리지만, 물에 들어가면 땅에서와는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모르는 동물과 사람이 많다. 토끼가 아무리 빨라도 물에서는 나보다 느리다. 속도는 역전되었고, 나는 곧 토끼를 따라잡았다. 하지만 토끼는 내가 바로 뒤에 붙은 줄 모른 채 신나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나는 토끼의 왼쪽 발을 물었다. 순간 토끼는 깜짝 놀랐고, 헤엄을 칠 수 없게 되자 놀라서 앞다리를 휘저으며 물을 마셨다. 나는 천천히 토끼의 뒷발을 물고 호수 아래로 들어갔다. 토끼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발버둥을 쳤다. 그는 몰랐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관상
    관상 나는 관상을 믿는 편이다. 관상을 바탕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것이 비과학적일 수 있지만, 인류의 오랜 역사에 비추어, 외모와 사람의 됨됨이가 경험치로 쌓여 사회적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터무니 없는 근거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풍수설도 비슷하다. 관상은 단지 외모만 말하는 건 아니다. 중국에서 오랜동안 관료를 선출할 때 기준이 되었던 '신언서판'은 조선에서도 그대로 적용했다. 지배계급에 속한 양반, 관료는 단지 '관상'에 그치지 않고, '신언서판'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 판단했는데, '관상'은 대중이 선택한 낮은 차원의 인물 평가기준이다. 조선에서 관료를 선출할 때 썼던 '신언서판'을 현대에 적용하면 임용직 공무원의 많은 부분, 선출직 공무원과 국회의원 등의 대부분은 기준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장담한다. 그런 점에서, 대의민주주의로 투표를 해서 시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은 인물의 됨됨이를 보고 선출하는 조선보다 차원이나 수준에서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도 그렇게 엄격한 기준으로 사람을 선출해도 당쟁과 간신이 속출하는 걸 보면, 그 평가가 대단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투표를 통해 선출한 자들이 보여주는 부패, 비리, 야비하고 역겨운 인성, 후안무치, 천박함, 악랄함 등은 조선의 관료들 뺨을 수백 대는 후려치고도 남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인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언론에 드러나는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범죄자가 된 사진을 보면, 그들의 관상이 하나같이 더럽고, 역겹게 생긴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범죄를 저질러서 관상이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이 이미 오래 전부터 범죄를 저지를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심리의 결과가 외모, 관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최근 국회의원 자리를 잃게 된 몇몇 인간의 관상을 보면, 처음 드는 생각이, '더럽고 역겹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사람의 외모가 갖는 저마다의 개성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냥 풍기는 느낌이 '역겹고 더럽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럴까. 사람이 수십 년을 살다보면, 어떤 형태로든 하나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예술가, 사업가, 기술자 등등 전문으로 배우고 일하는 분야가 있고, 그 분야의 전문가로 행세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만의 전문분야를 갖지 않으면서 권력을 잡은 자들은 권력을 개인의 영달과 재화를 취득하려는 도구로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비리를 저지른 자들이 결국 법의 심판을 받고 전과자가 된다. 마흔 이후의 얼굴에는 살아 온 사람의 흔적이 드러난다고 한다. 정우성처럼 잘 생겨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부모에게 물려받은 외모에서 자신이 말하고 행동한 결과들이 얼굴에 새겨지는 것이다. 눈빛, 표정, 주름, 말투, 입가의 처짐 등 얼굴이 변형되면서 달라지는 외모는 그 사람의 사고방식, 세계관, 가치관 등을 드러낸다. 부정적인 사람의 얼굴은 낯빛이 어둡고, 찡그리고 있으며, 입가가 처지고, 피부색이 어둡다. 얼굴이 지저분하고 매일 씻어도 더러워 보이며, 불결한 느낌이 드는 사람은 그의 내면도 그렇다. 말이 많은데 거의 쓸모 없는 말만 내뱉는 사람, 욕설을 하는 사람,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 탓만 하는 사람, 비아냥거리는 말만 하는 사람, 항상 비난이나 비판하는 말을 하는 사람, 무식하고 무지한 사람, 교양이 없는 사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 등은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쓰레기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집단이 있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집단은 교육수준으로만 보면 소위 일류대학 출신이 많은데, 관상을 보면 염천교 아래에서 밥을 빌어먹는 거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더럽고 역겨운 자들이 많다. 옷은 비싼 양복을 입고 다니지만, 그 껍데기에 감춘 내면은 비루하고, 추접하며, 야비한 근성을 가진 자들이다. 이런 인간들이 무리를 지어 권력을 찬탈하고, 국민의 대표라고 몰려나와 온갖 패악질과 야료를 부리고, 그들 개개인은 범죄와 비리를 저질러 사리사욕을 취하다 범죄자가 되고, 전과자가 된다. 그들의 관상을 보면, 나라를 망하게 할 상이며, 패가망신할 관상을 지니고 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인간의 스펙트럼
    인간의 스펙트럼 내가 누군가를 부러워했던 기억은 소년노동자로 일할 때였다. 우리집은 물난리로 쫄딱 망해서 누나가 살고 있는 산비탈 판자촌으로 이사했고, 나는 그곳에서 몇몇 공장을 전전하다 건설일용직노동자가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세상물정은 전혀 모르는 무지렁이였다. 변두리 동네에서 여의도, 잠실의 아파트 공사를 하러 다니려면 하루 서너 시간도 못 자고 출근과 퇴근에 서너 시간을 보내고-그때는 전철도 없었고, 버스를 서너번씩 갈아타고도 걸어다녀야 했다-하루 12시간의 노동을 해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베개가 코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면역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편도가 심하게 부어 침도 삼키지 못하게 되면, 동네 의원에서 마취도 하지 않고 의사가 메스로 곪은 부위를 찢어 피고름을 빼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방 공사를 하러 갔을 때, 그때의 그 기쁨은 이루 표현하기 어렵다. 공사현장에서 가까운 곳에 하숙집을 얻어 출퇴근을 했는데,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하숙집은 내 집처럼 편안했고, 하루 세 끼의 식사는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고 푸짐하게 먹은 적이 처음이었다. 하루 12시간 노동을 하고도 시간이 남았다. 빨래를 하고, 바느질을 하고도 시간이 남아서 기타도 배우고, 책도 읽을 수 있었다. 무려 책이라니. 나는 삼중당문고를 한 권씩 사모으며 지방 공사를 할 때마다 꾸준히 읽었고, 나중에는 삼중당문고에서 발행한 문고본은 거의 다 읽을 정도가 되었다. 지방 공사에 내려간 동료-라고하기에는 전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형들이었다. 하지만 경력은 내가 조금 앞서 있었다-형들은 서울 공사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형들이었는데, 오야지가 같아서 지방에도 함께 내려와 생활했다. 우연의 일치지만, 내게는 운명적인 우연이었던 것이, 그 두 명의 형들은 모두 서울이 고향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지금은 생활이 어려워 공사장에서 일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괜찮은 집에서 살았던 형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천둥벌거숭이로 세상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상식도 없었으며, 예절도 몰랐다. 두 명의 형들은 내게 형이자 부모의 롤모델이 되었다. 한 명은 아버지, 한 명은 엄마의 모델이었는데, 두 형의 성격이 또한 그랬다.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형은 유한공고-지금의 유한공전-자동차과를 졸업한, 스마트한 형이었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형은 부잣집 아들이어서 자유롭고 편안한 성격이었다. ‘노가다’ 현장에서 이런 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덕분에 나는 바느질도 배우고, 기타 치는 요령도 배웠으며, 사회성을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편안하게 생각한다. 두 형은 부잣집 아들들이 아니었지만, 너그럽고, 따뜻한 인성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나는 두 형들이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따뜻한 인성을 지닐 수 있을까, 궁금했고 신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 나이들면서 두 형처럼 따뜻한 인성을 지닌 인간이 되지 못했다. 나는 몹시 강퍅하고, 성마르며, 날카롭고, 독단이 심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이 되었다. 이제 생각하면, 어린 내가 왜 그렇게 공격적인 들개처럼 살았는가 짐작하는 면이 있다. 내 부모는 한국전쟁이 만든 기형적 가족의 하나였다. 아버지는 북쪽에서 내려왔고, 어머니는 남쪽에서 올라왔다. 서울은 복마전이었고, 아내가 있었던 아버지는 아내를 -이유를 알 수 없지만-버리고, 어머니는 남편의 외도로 남편과 딸 하나를 버리고 따로 떨어져 나왔다가 누군가의 주선으로 만났다. 12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림을 차렸고, 나와 내 동생이 태어났다. 우리는 도시빈민으로 살았고, 평생을 고생한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육성회비는 늘 낼 수 없었고,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부모는 부부싸움을 했고, 아버지는 집을 나갔으며, 엄마는 방에 연탄불을 피우고 다같이 죽자고 협박했다. 어린 나와 동생은 겁에 질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소년기가 지나가지도 못하고 소년노동자가 되었다. 내가 처음 만난 세상은 폭력이 일상이었다. 공장이든, 공사장이든 대부분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입에 쌍욕을 달고 다녔다. 그들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노동자들이었지만,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방 공사장을 떠돌다보면 깨끗한 하숙집에서 생활할 때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는 공사장 안에 허름한 숙소를 짓고, 단체 생활을 할 때가 있다. 수십 명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면 사람들의 면면이 보이는데, 선데이서울이라도 책을 읽는 사람은 가뭄에 콩나는 것보다 찾기 어려웠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함바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숙소 한쪽에 몰려서 도박을 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들에게서는 배울 점이 전혀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담배와 술이 끌리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끝까지 배우지 않은 건, 내 의지라기 보다는, 그냥 체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인데, 지금도 늘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과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는 것을 대견하게 생각한다. 나는 학교에 다니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거의 매일 삼중당문고를 읽었고, 일기를 썼다. 저녁마다 벌어지는 도박판에 끼지 않았고-딱 한 번 도박 자리에 끼었다가 형에게 혼나고 나서는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았다- 기타를 배웠으며, 아침, 저녁으로 음악(팝송)을 들었다. 약 4년 정도, 나는 전국의 공사장을 전전하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 아주 드물게 훌륭한 인성을 지난 형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99%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노가다꾼’들이었다. 그들은 돈이 생기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도박을 했다. 자기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공사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니라, 독서회에서 만난 사람에게서였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지하철 풍경
    지하철 풍경 -누가 기생충인가 출퇴근을 지하철로 한다.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로 계급을 분류하는 ‘박사장'의 말을 들은 뒤로, 한국 사람의 약 70% 가량이 지하철과 버스로 출퇴근을 할텐데, 그 냄새가 부르주아에게는 ‘피하고 싶은', ‘상대하고 싶지 않은' 지저분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라는 걸 알고는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사회든 다수에 속하는 것이 유리하고 편하다. 소수는 양쪽-가장 위, 가장 아래-에 포진해 있으며 증오와 동정의 대상으로 나뉜다. 가장 아래 속하는 소수자는 장애인, 독거노인, 소년가장 등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고, 증오의 대상은 ‘박사장' 같은 사람들이다. 박사장은 똑똑한 벤처기업가로, 정직하게 돈을 벌었는데, 왜? 그가 증오의 대상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겠다. 그 사람은 선량하고 성실한 ‘개인'일 수 있지만, 그가 ‘자본가'가 되는 순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의 존재가 갖는 원죄가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박사장'을 ‘스티브 잡스'로 바꿔도 좋다. 스티브 잡스는 뛰어난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세상에 없는 물건을 만들었다. 그는 공학적 기능이 전혀 없었고, 창고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모든 제품은 스티븐 워즈니악이 다 만들었지만, 세상의 찬사는 스티브 잡스가 차지했다. 세상에 없던 물건을 만들었다고 그가 선지자이자 앞서가는 벤처기업가로 칭송만 받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가 애플을 진두지휘할 때도 이미 중국의 애플 공장에서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문제가 심각했고, 자살하는 노동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이런 노동 문제를 제기할 때, 스티브 잡스를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지하철에 사람이 많아서, 나는 가방을 아래로 내려 손으로 잡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거의 모두-98% 정도-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무언가를 검색하고, SNS의 내용을 읽고, 문자나 카톡을 보내고, 게임을 한다. ‘문명의 이기는 활용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말을 나는 70년대 중반, 같이 일하던 형에게 들었다. 그때 ‘문명의 이기'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정도였다. 지금 사람들은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기계를 백만 원을 들여 구입하고, 그 기계를 쓰는 대가를 매월 지불하고 있다. 기계값, 통신비 등의 명목으로 적게는 2-3만원에서 많게는 10만원에 이르는 돈을 대기업 통신사에 지불한다. 권력을 가진 자(소수 집단)가 가장 바라는 것은 파편화된 개인들이다. 70년대 박정희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해서 거리에서 서너 명만 모여 있어도 경찰이 사람들을 쫓아버리곤 했다. 게다가 북한처럼 5호 담당제를 두어 한 사람이 다섯 가구를 감시하고, 밀고하는 제도까지 만들었다. 사람들이 모이고, 뭉치는 것이 독재자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분리 정책'은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개인의 파편화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성공하고 있다. 60-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대가족은 핵가족으로 바뀌었고, 기술문명의 결과로 핵가족은 다시 1인 가족으로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한 가족-4인 기준-에서 가장(아버지 또는 엄마)이 혼자 벌어도 네 명이 먹고 살았지만, ‘여성의 사회진출'이라는 명목과 여성들 스스로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여성 노동자의 비중이 커지고, 일자리도 많아지면서 노동시장은 남성중심 노동이 여성노동자와 경쟁하는 모습이 되었다. 자본은 여성노동자를 남성노동자에 비해 낮은 생산성을 보인다고해서 상대적으로 임금을 낮게 책정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법적 강제는 거의 사문화되었고, 여성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저임금과 낮은 지위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있다. 자본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출산은 인공수정을 통해 적정한 인구를 유지하도록 하고, 공장은 가능한 한 모두 자동화하며, 노동자는 노동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저임금을 유지, 고착하고, 산업예비군(실업자)는 일정 비율 존재하도록 강제해 노동자들이 자본에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든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고요하게 앉거나 서 있는 ‘지하철 냄새 나는' 나를 포함한 저 많은 사람들은, 대자본이 만든 ‘문명의 이기' 스마트폰을 들고, 역시 대기업 포털이 제공하는 뉴스나 드라마나, 동영상이나 게임을 보면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거의 로봇처럼 움직이고, 현실보다는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더 많이 관심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드라마 주인공들의 비현실적 사랑과, 게임 캐릭터에 몰입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본은 더 많은 돈을 벌고, 자본가는 더 부자가 된다. 그렇다고 ‘지하철 냄새 나는' 우리가 자본이 바라는대로 마냥 파편화되거나, 개인화, 개별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멍청하고 역겨운 허수아비 대통령을 쫓아냈고, 연인원 1천6백만 명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이것 역시 대자본이 만들어 파는 비싼 스마트폰을 통해 퍼져나갔고, 파편화된 사람들은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현실 세계에서 뭉쳤다. 자본이 바라는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바로 ‘시민의 역동성'이다. 많은 부분은 자본이 바라는 세상이다. 70% 넘는 시민들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에서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고, 일자리를 잃을까 늘 전전긍긍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를 하는 미성년 노동자의 숫자도 꾸준히 늘고 있다. 노동시장의 경쟁은 너무 치열해서 사교육비를 많이 투입해 유명한 대학에 입학해도 취업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대학은 취업학원처럼 바뀌었고, 대학을 수익사업을 하는 기업처럼 운영하며, 심지어 대기업이 대학을 인수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자본은 권력도 매수하거나 협조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평소 자본의 노예로 살아가지만, 거대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자본이 제공한 첨단 기기는 시민들이 단결하고 뭉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변한다. 우리가 믿을 것은 ‘시민의 역동성'이다. 잔잔해 보여도, 쓰나미는 거대한 높이로 저 멀리서 다가온다. 자본이 착취의 단맛을 즐기는 동안, 시민의 저항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날이 머지 않으리라.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배움의 사유화
    이윤의 사유화, 권력의 사유화, 배움의 사유화 3 배움의 사유화 지식은 축적된 경험에서 나온다. 개인의 경험만으로는 한계가 많으므로, 한 집단을 구성하는 무리는 각자의 경험을 공유한다. 문자를 발명하기 전의 인류는 경험과 지혜가 많은 노인을 존경하고 따랐다. 오래도록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가 많은 위험을 겪었음에도 살아남았음을 말하는 것이고, 오래 생존하는 능력은 경외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노인은 무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자신의 지식, 경험, 지혜를 모두 후손에게 가르쳤다. 문자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구전을 통해 대를 이어 같은 정보를 전달했고, 구전은 곧 노래가 되었고, 시가 되었다. 그리고 문자를 발명하고 그 노래와 시는 점토판, 거북껍질, 대나무, 갈대잎 등에 새겨졌다. 초기 문자는 지배자의 언어로 기록되었고, 문자는 소수 지배그룹의 전유물이었다. 문자를 쓰고 해독하는 것은 특권이었으며, 지배계급은 문자를 독점하고, 민중은 문자에서 소외되었다. 문자를 사용하지 않던 오랜 시기-고대 이전까지의 인류-와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지만, 일부 지배세력만 특권으로 사용하던 시기-점토문자부터 활판 인쇄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합리성은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와 의심 그리고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로 단정할 수 없는 많은 요소-직립보행, 도구의 사용, 불 이용, 집단화, 유아화 등-들의 결합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수만 년 전 인류가 깬석기에서 간석기로 발전한 것만을 두고 봐도 그것은 혁명적 변화, 발전이었다. 돌과 돌을 부딪쳐 깨뜨려 날카로운 면을 쓰던 인류가 돌을 갈아서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고 날카롭고, 작은 도구를 만들게 되면서 식량 채집, 수렵이 더 쉬우면서 많이 수확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기술을 발견, 발명한 소수의 인류는 자기가 알게 된 정보를 곧바로 같은 무리에게 전파했다. 이런 이타적 행위는 작은 단위의 무리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생존해야 자신도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배움은 누구도 사유화를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공유하고 평등하게 나누던 시기였다. 지식의 사유화는 ‘지식의 전문화’, ‘지식의 세분화’와 관련 있다. 잉여생산물의 발생으로 모든 사람이 일하지 않고도 일부-무리의 우두머리 그룹-는 잉여생산물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식량 생산에 모든 사람이 투입되지 않고, 일부는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권력의 발생, 계급의 분화, 지식의 전문화는 식량으로 대표하는 물질적 토대 위에서 발생했고, 권력자와 지식인은 지배계급으로 분리되어 특권을 누리기 시작했다. 권력에 부역하는 지식인을 ‘어용’이라고 칭한 것은, 그들의 존재가 민중의 이익보다는 권력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근대 민주주의 이전 시기까지 지식인은 거의 모두 ‘어용’이었다. 민주주의-다수 민중이 주인인 체제-개념이 없던 때의 민중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다중’에 불과했으며, 가르치고 이끌어야 하는 낮은 수준과 차원의 군중에 불과했다. 지식과 정보의 보편화를 두고 두 가지 시각이 있는데, 하나는 지배자의 시각이고, 하나는 민중의 시각이다. 세계 최초의 목판과 활판은 모두 고려에서 나왔다. 이 시기 인쇄술의 발달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데 그쳤다. 어느 시기에 새로운 문물이 발견, 발명되었을 때, 역사가는 그 시대를 통치하던 지배 권력의 능력이거나 그의 지도력이거나, 그의 선한 의지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지배계급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역사다. 반면, 그 시기의 새로운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기층 민중의 역량이 성장하면서 분출하는 시대적 필연성으로 해석하는 민중의 시각이 있다. 이 양쪽의 극단에서 변증법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두 계급-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해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사회는 변화, 발전하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에서 지배 문자는 중국에서 도입한 ‘한문’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 삼국시대 이전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한문이 도입되었고, 이후 향찰과 이두가 쓰였으나 공식 문서와 경전은 순수한 한문으로만 기록했다. 문자의 예속은 곧 정신과 사상의 예속을 필연으로 드러낸다. 지식인은 집단이 축적한 경험과 지식, 지혜의 열매를 먹고 자란 사람이다. 그가 지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노력도 분명 있지만, 사회적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집단이든 수백, 수천년의 축적되어 온 그 집단의 지식과 경험이 사회 체제를 구성하고 있고, 개인은 그 사회가 만든 규범과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장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능력이 만든 물건을 감사하며 사용한다. 적어도 중세까지 ‘장인’은 한 사람의 인생을 들인 숙련과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하면서 포드 시스템이 도입되고,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면서 ‘장인’의 존재는 축소되었고, 사회적 인정도 약해졌다. 대부분의 노동은 단순, 반복, 일부에 국한되었고, 기계가 인간 노동의 영역을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는 일차적으로 노동에서 소외된 이후 이제 그 노동의 효용성 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식인은 공장노동자와 달리 지식을 체득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중세의 ‘장인’이 도제 방식으로 십 년, 그 이상의 시간을 철저한 훈련을 통해 ‘마이스터’로 성장하는 것처럼, 지식인의 성장 역시 일종의 도제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이미 2천년 전에도 학문을 하려는 사람은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며 유명한 스승 아래로 들어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며 공부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피타고라스가 그랬으며 공자가 그러했다. 이런 도제 방식은 학문을 연마하는 것이 ‘장인’이 되는 것처럼 오랜 시간 속에서 정신과 마음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교육 체계를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지식인이 탄생하는 과정은 학문을 시작한 본인이 재능과 노력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지식인을 키워내는 사회의 지원과 누적한 학문의 결과물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의 결과인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독점하는 방식인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에서 지식인 교육은 교육의 결과물을 사유화하도록 강요한다. 어느 시대나 비슷하지만, 근대의 교육은 사회주의의 경우 체제에 복무하도록 하는 이념적 성격이 강하고, 자본주의는 자본의 이윤에 복무하는 적정한 지식을 배우도록 설계되었다. 즉 우리가 배우는 초중고대학교의 커리큘럼은 그 체제를 살아가는 시민이 알아야 할 기본 교양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지식은 체제 유지를 위해 선택된 정보를 가공한 것으로, 권력과 자본의 의도가 개입된 것임을 전제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는 권력과 결탁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는 지식을 받아들이도록 교육한다. 다만 교육의 성격과 특성에 따라 자본주의 내부에서도 자본의 본질을 파헤치고 드러내 비판하는 학문을 배울 수 있지만, 그것으로 생존하는 지식인은 극히 드물다. 유치원부터 체제와 자본의 논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성장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체제를 공기처럼 흡입하고 몸에 익숙하게 된다. 대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내재한 심각한 결함과 부정적 요소들은 교묘히 은폐되는데, 대부분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기 때문이며, 비판적 시각을 가졌다 해도, 체제와 자본의 강력한 권력 앞에서 개인은 무기력하다. 체제 순응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직업을 갖고 노동자가 되며, 일부가 지식인으로 편입한다. 지식인의 과정은 사무직 노동자가 되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지식인의 대우 역시 사무직 노동자보다 나아야 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사무직, 전문직 노동자들도 재벌,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가 되면 빠르게 중산층으로 편입할 수 있는 혜택을 받는다. 지식인 또는 지식노동자는 더 이상 도제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고, 공교육과 사교육 제도에서 대량 생산되기 때문에 가치가 낮아진다. 대학에서 석사, 박사 과정이 지식인이 되는 과정인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대학원은 취업준비생의 경력쌓기용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학문에 전념하려는 예비 지식인이라도 경쟁이 치열해 이 과정을 마치고 지식인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지식노동자는 자신이 배운 지식을 일정한 가격으로 환산해 판매한다. 지식도 하나의 상품이므로 화페와 교환, 판매할 수 있다. 이때 지식 시장에서 수요가 많으면 비싼 가격에 판매할 수 있지만, 경쟁자가 많으면 지식 상품의 가격은 낮아진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의 효용가치 분포와 같은 곡선을 그린다. 한국처럼 제도와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집단에서는 지식인이 아니면서도 권한 이상의 권력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방식은 정규교육이 체제와 제도를 갖추고 있지만, 특별한 경우, 한꺼번에 여러 개의 사다리를 한 번에 뛰어오를 수 있는 제도도 갖고 있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최근까지 ‘사법시험’을 비롯한 모든 공무원 시험은 학력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이런 제도는 한편으로 평등한 정책으로 옹호할 수 있으나, 책만 읽고 외워서 합격하면 평생 우월한 지위와 특권을 누리고 산다는 점에서 과정의 불합리를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이 사유화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지식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개인이 투자해야 하는 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근대국가는 국민을 위해 공교육 제도를 마련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가와 자본이 서로의 이해에 맞는 커리큘럼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공교육에서 정부가 개인에게 학비의 일부를 지원하는 것은 복지 서비스의 하나로, 자본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정 과정-한국에서는 최근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었다가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바뀐다-의 학습이 필요한 것은, 노동 시장으로 진출하는 청년 노동자들이 노동자로 일하면서 기본으로 갖추어야 할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육만으로는 노동 시장에 진입하는 것이 어려울 만큼 노동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경쟁에서 앞서가기 위해 단위 가족은 학생에게 사교육비를 투입한다. 사교육 시장은 연간 20조에 이를 만큼 거대하고, 사교육이 공교육에 직접 영향을 끼칠 만큼 위협이 되었지만, 공교육은 사교육 시장에 어떠한 대처도 하지 못한다. 사교육은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고 있고, 막대한 이윤이 오가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지식인-또는 사이비 지식인-이 갖는 두 가지 착각은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지식을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이 들인 노력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교수가 되거나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투입한 막대한 교육비-공교육비와 사교육비-를 자기의 부모가 모두 부담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두 가지의 추론을 통해 지식인이 된 자신의 입지는 오로지 자신만이 누려야 할 권리이자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런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자본주의가 바라는 바는 가족의 해체, 공동체의 파괴, 개인의 파편화, 노동의 소외, 이윤의 독점이다. 자본이 이런 현상을 원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든다기 보다는, 자본의 속성이 이런 필연을 만든다고 봐야 한다. 즉,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개인을 최대한 착취하려 하고, 착취를 위한 작동기제가 가족의 해체, 파편화, 실업예비군(실업자)의 일정 비율 유지 등이다. 따라서 노동 시장은 매우 격렬한 경쟁이 유지되고, 이 경쟁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려면 사교육을 통해 더 많은 지식을 더 빨리 쌓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밟아 전문가, 지식인이 되거나 권력을 갖게 된 개인은 자신의 ‘자본’-지식-을 사유화한다. 즉, 자신의 지식으로 얻게 되는 이익을 독점하려 하는 것이다. 대학교수, 화가, 작가, 기자, 의사, 검사, 판사 등 전문직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을 상품으로 보유하며 높은 값으로 판매하는데,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건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강의를 하거나, 작품을 만들거나, 책을 쓰거나, 사회적 특권이 보장되는 직업-판사, 검사, 의사, 교수 등-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상품으로 만들거나 활용해서 이익을 가져간다. 전문직 지식인이라 해도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고 교육한 경우-국립교육기관에서 장학생으로-그렇게 탄생하는 전문직 지식인은 국가가 지정하는 공공서비스에서 일정 기간 복무해야 한다. 쿠바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럴 경우 전문직 지식인은 영리 활동을 하지 못하므로 큰돈을 벌 수는 없지만, 국민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공유한다는 보람을 갖는다. 대학교수, 변호사, 검사, 판사, 의사, 기자 같은 전문직 지식인이 사회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은, 그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정당하다거나 옳다는 말은 아니다. 형식은 다르지만, 환경미화원이나 가정주부도 전문직 지식인 못지않은 사회적 영향력이 있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런 효용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뿐이다. 전문직 지식인이 되면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이 상류층으로 향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들은 경쟁에서 앞선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갖는다. 하지만 이들의 직업이 다른 직업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는 없으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합의-라고 말하지만, 권력과 자본의 담합과 시장 경쟁의 원리-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환경미화원과 가정주부에게 더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하는 것 역시 사회적 합의로 가능하다. 많은 정치인 가운데 전문직 지식인이 많은 것은 그들이 정치계에 진입하는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며, 정치가로 변신하면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할 수 있다는 사회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신분 이동을 통해 경제적 이익과 권력을 확대하려는 이들의 의도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전문 지식을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사유화하는 지식인을 더 이상 만들지 않으려면 배움의 과정을 공공화해야 한다. 모든 교육은 정부가 예산으로 지원하고-곧, 국민이 낸 세금이다-고등학교 이상의 고급 교육을 희망하는 사람은, 반드시 일정 기간-10년 이상-정부가 지정한 곳에서 자신이 받은 혜택-교육비와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도록 해야 한다. 한편으로, 고급 교육-대학 이상-을 받지 않은 다수의 청년들이 받는 임금과 고급 교육을 받은 지식인의 임금 격차가 최대 3배 이상을 넘지 않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사회의 기본이 되는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법률이 존재하는데 왠 규칙이냐고 하겠지만, 법률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임금이 최대 10배 이하여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주인인 세상이고, 자본가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만든다. 그리고 그 법을 만드는 자들이 바로 지식인들이고, 지식인은 자본가가 나눠주는 이윤의 일부를 가져가기 때문에, 자본가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모든 단위 사업장의 노동조합과 산별노조에서 자본가와 협상해 자본가와 노동자의 임금이 최대 10배를 넘지 못한다는 규칙을 만들지 않는 이상, 미국처럼 파산 직전에 있는 기업이라도 회장은 일년에 천억원의 돈을 가져가고, 노동자는 5천만원을 가져가는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국에도 어떤 항공사 회장이 불법을 저지르고도 퇴직하면서 최대 5천억원의 퇴직금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회사의 노동자는 심각한 직업병에 시달리면서도 연봉이 몇천만 원에 불과했다. 의사는 한 달 월급이 어지간한 중소기업 노동자의 일년치 연봉에 해당한다. 판사나 검사로 일하다 변호사가 되면, 자문료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일억 원씩 받는 세상이다. 그들은 분명 전문지식인들이고, 자기가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가는 명확하다. 전문지식인은 자신이 배운 지식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유화하기도 하지만, 자본가의 사적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정권은 몇 년마다 바뀌지만, 자본가는 망하지 않는 한, 자본가가 죽기까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자본은 대를 이어 세습할 수 있으며, 자본의 세습에 대해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이 강해질수록, 자본은 사회의 상층부-지식인 계층, 부르주아-를 매수한다. 지식을 사유화한 전문지식인은 이런 자본의 매수에 쉽게 넘어가고, 그들은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 우리는 사회의 심각한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비틀린 현상을 바로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체제는 공고하고, 사람들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으며, 무엇보다 ‘자본’과 ‘지식’과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를 장악한 자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권력의 사유화
    2 권력의 사유화 권력은 집단에서 나온다. 초기의 권력은 동물처럼 살아가던 시기의 물리적 폭력이었다. 힘이 강한 자가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은 동물의 진화와 생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류가 동물의 단계를 벗어나면서, 권력은 ‘지혜’를 가진 자에게로 옮겨갔다. 한 무리의 씨족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자, 무리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먹이를 쉽고 많이 구할 수 있으며, 무리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자는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그들은 수렵, 채집 경제에서 무리가 모아 온 식량을 재분배할 권한을 가졌고, 무리가 이동할 때 가장 앞장섰으며, 천적의 공격을 예상해 길을 돌아가거나, 천적과 마주쳤을 때 무리가 힘을 모아 방어할 수 있는 지혜를 내놓았다. 무리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우두머리를 존경하고 그의 지도에 따랐다.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지은 농산물에서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게 되고, 무리의 우두머리는 농사를 짓지 않고 잉여생산물의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가져갔다. 우두머리는 농사와 전쟁, 질병에서 무리를 구하는 제사장으로 변신하고, 불가사의한 자연의 변화와 무리의 죽음을 설명하는 초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무리에게 말한다. 그렇게 한 무리에서 권력을 독점하는 과정은 잉여생산물의 발생과 시작을 함께 한다. 오늘날 권력은 대의민주주의에서 나오지만, 권력을 가진 자의 대부분은 권력을 사유화한다. 권력의 독점은 최근까지 지속되었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것은 자본주의의 시작과 함께 한다. 봉건제와 왕정의 폐지에 앞장선 것은 다름 아닌 신흥 부르주아였으며,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었다. 자본주의의 발생과 함께 부르주아와 노동자는 동시에 탄생했지만, 역사는 ‘자본주의’와 ‘자본가’를 주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본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에 대항하는 필연적 계급이지만 권력의 관계는 이전 체제-노예제, 농노제, 봉건제-와 다르지 않다. 앞선 체제에서도 권력의 독점은 집단의 10%가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이 소유한 폭력집단(군대)이 체제를 보호하고 유지했다. 오늘날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무리는 합법의 틀이라는 명목으로 강력한 폭력집단-경찰, 군대-을 운용한다. 민주주의 체제는 형식적으로 삼권 분립의 형태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 삼권을 장악한 권력은 서로를 견제하는 역할을 부여했지만, 내부적으로 권력의 유지와 독점, 권력을 사용한 사적 이익의 추구를 공유한다. 이 명제가 절대적이지는 않고, 어떤 성향의 그룹이 권력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사유화가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하고 명백한 사실은, 권력을 장악하는 그룹(정당)의 목적은 ‘권력의 쟁취’ 자체가 목적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자 관심이다. 그들이 지지자 그룹-다수의 시민-을 위한 많은 복지 정책과 경제, 사회, 문화 정책을 펼치는 것은 두 가지 목표가 합치하기 때문이다. 즉, 대 국민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면 그 집단이 자신들을 계속 지지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으므로, 국민에게는 편익을, 자신의 그룹에게는 권력의 지속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되는 것이다. 반면 소수 그룹이 권력을 장악한 다음, 대 국민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기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함께 하는 소수의 지배그룹-여기서는 재벌, 대기업이라고 하자-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경우가 바로 권력의 사유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의 사유화는 거의 대부분 경제적 이익과 깊은 관련이 있고, 권력과 재물은 상호 보완 관계를 유지한다. 이들 그룹은 사회적 이익을 공유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혼인을 통해 혈연으로 연결되어 권력과 금력을 공고하게 유지한다. 한국현대사에서 권력의 사유화는 드라마틱하게 드러났으며, 세계의 다양한 징후들을 시기별로 목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에 해당한다. 해방 이후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의 탈을 쓰고 외국에서 귀국해 초대 대통령이 된다. 그는 이미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을 했지만, 그때 탄핵되었고, 그의 독립운동 태도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이 임시정부와 많은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이승만은 유창한 영어와 미국과의 인연으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자신이 민주주의 공화국의 대통령이라는 직무를 망각하고,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처럼 행동했다. 그는 가장 먼저 정치적 경쟁자인 김구, 여운형, 김성수 등을 암살했고, 친일매국노를 처벌하려는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를 매국경찰(일제강점기 시기 경찰이었던 조선인)을 앞세워 폭력으로 해산했다. 이승만의 뒤에는 언제나 미군정이 있었고, 미군정은 미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 미국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었으니, 이승만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장 먼저 대전으로 도망했고, 심지어 일본으로 망명해 그곳에 망명정부를 꾸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자신은 몰래 도망하면서 서울 시민에게는 끝까지 사수하라는 방송을 내보내고, 한강 철교를 폭격해 수많은 민중이 아군의 폭탄에 죽도록 만들었다. 보도연맹,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수십만 명에서 백만 명 이상의 청년을 학살하거나 굶겨 죽인 것도 이승만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이라는 야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의 권력을 오만하게 누리다 결국 4.19혁명으로 자리에서 쫓겨나 하와이에서 죽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제3세계에서는 빈번하게 군부쿠데타가 발생했다. 이 현상은 마치 연쇄 폭발처럼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동사다발로 발생했는데, 군부쿠데타의 발생 원인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면서 저개발국가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쿠데타를 일으킨 대부분 세력은 미국의 이익에 복무했고, 그들 뒤에는 미국의 정보기관 CIA가 있었다. 제3세계 나라의 장교들 일부는 미국의 군사기지로 유학을 와서 훈련을 받았고, 미국으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했고,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는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믿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1961년,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를 모의하고, 권력을 잡고 있던 민주당을 폭력으로 제압해 권력을 찬탈한다. 박정희는 쿠데타가 실패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쿠데타를 일으킨 명분을 만들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가고, 민주당이 집권했으나 정세는 불안하고, 경제 역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정희는 집권당이 무능하다고 공격했고, 폭력을 동원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몇몇 정책을 실행에 옮긴다. 겉으로는 부랑아, 깡패를 단속하고 치안을 강화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들과 함께 진보적 인사들, 쿠데타를 비판하는 사람들, 노동조합원, 사회주의자, 지식인 등을 억압하고 격리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비판 세력을 압살한 다음, 북한의 김일성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열등한 자신의 위치를 만회하기 위해 북한의 정책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은 남한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념과 체제,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남한을 앞서 있었다. 박정희는 불법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새마을운동(북한의 천리마운동의 복사판)을 추진했으며, 미국과 일본의 지원을 받아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농촌에 있던 청년을 도시로 유입시키고, 쌀 가격을 낮게 유지해 노동자의 저임금이 가능하도록 정책을 가져갔다. 당시 인구의 절대 비중을 차지하던 농촌 인구 가운데 청년들은 도시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버는 수입이 농사를 지어 버는 수입보다 많았으므로,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공장과 서비스업으로 진출했다. 이로 인해 도시는 팽창하고, 도시 외곽으로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빈민촌이 형성되었다. 2000년대까지 도시의 외곽에 존재한 판자촌은 도시빈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이는 지금도 제3세계-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박정희는 절대 권력을 추구했고, 자신의 권력의 임기를 제한 없이 누리기 위한 초법적 조치를 강행했지만, 결국 측근의 총에 맞아 죽었다. 박정희는 미국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두고, 미국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했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비참하게 죽었다. 권력의 사유화가 드러내는 가장 극적인 장면이 바로 ‘독재자의 주검’이다. 이는 역사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히틀러, 무솔리니, 카다피, 후세인, 이디 아민, 차우셰스쿠를 비롯한 독재자들의 주검이 보여주는 비참한 모습이 증명한다.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고, 권력 공백이 생긴 틈을 노려 전두환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쿠데타를 두 번 일으키는데, 첫 번은 12월 12일 군부를 동원해 무력으로 정부를 뒤엎은 쿠데타고, 두 번째는 5월 18일, 광주에서 광주시민을 학살, 살육한 것이다. 12월 12일 군사반란으로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은 전국에서 군사반란 세력에 저항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끔찍한 내란 음모를 기획한다. 전두환은 경상도와 전라도 가운데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를 제외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인 목포에서 내란을 일으키도록 기획하려 했지만, 목포는 인구가 너무 적어서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고 전라남도의 중심인 광주를 선택한다. 이 내란 기획은 전두환 일당이 자신들의 폭력, 반란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었으며, 전두환은 광주 시민을 학살하려는 기획안에 ‘굿 아이디어’라고 싸인을 했다. 전두환은 베트남 참전을 했고, 베트남에서도 교전했던 북베트남 민주공화국 군인은 물론, 일반 베트남 국민들도 잔인하게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자였다. 전두환은 광주시민도 베트남 국민을 잔혹하게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전두환은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손으로 대장 진급을 하고, 마침내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집권하던 7년은 박정희 정권 18년에서 이어지는 군부독재 25년이었으며, 전두환은 권력을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써먹었다. 전두환은 재벌에게 돈을 뜯어내는 한편, 특혜를 주었고, 자본이 권력에 종속하도록 만들었다. 자본은 피해자 행세를 했지만, 전두환 일당에게 돈을 바치고 그보다 더 큰 이익과 특혜를 가져갔다. 전두환은 자신과 그의 일당의 이익을 위해 군사반란을 일으켰고, 권력을 찬탈했으며,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이후 권력을 휘둘러 막대한 금전적 이익을 챙겼다. 철저한 권력의 사유화 사례다. 박정희, 전두환이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찬탈, 사유화했다면 이명박과 박근혜의 경우는 형식적 민주주의 결과에 따른 민간 독재의 사례다. 이명박은 사기 전과 14범의 범죄자였지만, 그는 이미지 세탁을 통해 서울시장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이명박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만들었다. 정부가 해야 하는 많은 대국민 서비스 가운데 국민의 복지를 축소하고, 토건과 건설 비중을 높여 세금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쓰이도록 만들고, 그 돈의 일부를 빼돌렸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외국투자를 가장해 국민 세금을 외국으로 빼돌렸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결국 이명박은 감옥으로 갔고, 그는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할 범죄를 저질렀다.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으로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의 권력을 알고 지내는 최순실에게 위임해서 국민 투표로 선출하지 않은 개인이 권력을 사유화하도록 만들었다. 박근혜는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멍청이였지만, 그의 권력을 대리한 최순실은 박근혜의 권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써먹었다. 결국 박근혜도, 최순실도 감옥에 갔다. 그들의 공통점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이 자신의 고유한 권리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것이 오만함에 근거했든, 멍청해서 그렇든, 평균 이하의 인격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권력의 사유화 목적은 금전적 이익을 취하려는 데 있다. 권력을 찬탈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무수한 미사여구를 내뱉지만, 그들의 결론은 물질적 부를 획득하려는 데 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이윤의 사유화
    이윤의 사유화, 권력의 사유화, 배움의 사유화 1 이윤의 사유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땅, 공장, 기계, 재료를 소유한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해 임금을 주고 상품을 생산한다. 노동자는 시간당 임금을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고, 그렇게 생산한 '상품'은 시장에서 판매된다. 자본가가 투자한 땅, 공장, 기계, 재료에다 노동자의 '노동력'이 결합해 상품이 완성되고, '이윤'은 노동자가 투입하는 시간에서 발생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즉, 상품 가격이 1만원이라면, 자본가는 생산단가를 7천원에 만들어 3천원의 이윤을 갖는다. 생산단가 7천원에는 자본가가 가지고 있는 땅, 공장, 기계, 재료비와 기회비용, 감가상각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노동자의 임금-의료보혐료,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이 포함되었거나 또는 포함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도 들어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주어야 할 임금에서 자신의 이윤을 가져간다. 즉,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설명은 마르크스의 '자본'에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윤의 사유화-자본가가 모든 이윤을 독점하는-는 자본주의 체제를 이루는 두 개의 기둥-착취와 이윤-가운데 하나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스스로 노력하고, 경쟁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제도가 자본주의이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평등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무능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유능한 사람들만 고생하는 것이 공산주의라고. 그들은 정확히 틀렸다. 자본주의에서 경쟁은 절대 공정하지 않으면, 소수의 자본가가 발생하는 이윤의 90% 이상을 가져가는 구조로 짜여졌다. 이런 사실은 이미 200년 이상의 통계와 빈익빈, 부익부의 집중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달러일 때, 몇몇 자본가는 100달러짜리 지폐에 불을 붙여 시가 담배를 피웠다. 그 돈이면 100명의 노동자가 1달러씩을 더 받을 수 있지만, 자본가는 돈을 불에 태워 버릴지언정 노동자에게는 임금을 많이 주려 하지 않았다. 19세기까지도 영국에서는 아동노동이 심각했다. 불과 8살짜리 어린이가 하루 14시간을 햇빛이 들지 않는 탄광에서 석탄 캐는 일을 했고, 그들의 수명은 스무 살을 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80년대까지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에 하루 18시간 이상 노동했고, 전태일 열사의 일기에는 여성 노동자의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자본주의가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말한다면, 왜 자본가는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협박하고, 린치하고, 살해하는가. 미국의 노동조합이 처절하게 깨져나간 이유는, 자본가들이 마피아와 조직폭력단을 동원해 노동조합 조합원과 지도자를 린치를 하고, 살해했기 때문이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고생하거나 죽었을 때, 그 기업의 대표가 잘못을 인정하고 충분한 보상을 한 적이 있는가. 아니, 그 전에,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공장의 환경을 만들기는 했던가. 공사장에서도 노동자들이 추락하거나 부상을 당해 죽어가고 있다. 노동자는 단지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 부속품으로 쓰일 뿐,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지금은 주5일, 하루 8시간 노동제가 형식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과거에는 노동시간이 보통 12시간, 많으면 14시간에서 16시간이었다. 12시간 맞교대(주야간) 노동도 일상이었고, 그런 삶을 사는 노동자는 '자신의 삶'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이윤의 사유화는 그래서 악마의 제도다.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자는 딱 세 부류다. 자신이 자본가여서, 이 체제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와 그런 자본가의 똥구멍을 핥아주면서 먹고 사는 사이비 지식인들, 그리고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고 멍청한 인간들이 그들이다. 하지만, '어리석고 멍청한' 인간을 마냥 비난하는 건 옳지 않다. 자본(가)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인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파편화시킨다. 노동자는 노동에서 소외되고, 대가족은 핵가족으로 분열하며, 핵가족은 1인 가족으로 쪼개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며,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도록 만들고,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자본주의의 본질 즉 착취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 단계를 지나,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는 한 가족(가정)의 가장 혼자 노동을 해서도 가족 모두가 먹고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1950년대 미국의 (백인)가정은 평균 가족 수가 4-5명일 때, 가장(주로 남성, 아버지, 남편)이 직장에 다니며 받은 월급으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었고, 포드에서 생산한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노동계급이었지만 자신들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아주 짧은 시기, 이런 현상이 있었다. 가장이 혼자 벌어서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임금이 높아서라기 보다는 4-5명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에 물가가 비교적 쌌기 때문이다. 물가를 통제하는 것은 정부인데, 정부는 자본가의 이해를 대리하거나 그들과 공생하므로 가장 먼저 농수산물 가격을 낮게 유지해서 노동자들의 식생활을 보장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본(가)은 노동의 수요가 증가하자 여성노동자의 고용을 적극 활용한다. 여기에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대한 열망이 결합하면서 여성 노동자의 수요는 급격히 늘어나고, 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저임금 구조는 고착한다. 더구나 어느 나라에서나 여성은 남성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으며 차별당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진급에 불이익을 받는다. 여성은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남성 노동자보다는 덜 하지만,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거나 단순, 반복 노동으로 오히려 육체적 소모가 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노동자가 증가하면서 임금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이제 가정에서는 부부가 노동을 하고, 아이들은 탁아소,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 맡기게 된다. 가사 노동에 관한 정당한 평가와 경제적 지불을 하지 않는 것은 자본의 전략이다. 가사 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연간 약 8천만원의 임금에 해당한다는 보고가 있지만, 가사 노동을 주로 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인정은 매우 미미한데, 이것은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제는 부부의 노동으로도 부족해서 고등학생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교육 문제로 들어가면 자본(가)이 얼마나 철저하게 계급화, 서열화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소위 명문고, 명문대를 규정한 것은 누구인가. 왜 사교육은 공교육을 앞지르고, 공교육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는가. 왜 대학에 진학하려고 안간힘을 쓰는가. 그리고 수 많은 탈락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물음은 곧바로 자본주의의 본질에 잇닿아 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유치원'이라는 형태로 차별과 경쟁을 시작하면서 부모는 자식을 더 좋은 학교, 다른 아이들보다 더 우월한 경쟁 상태에 놓이도록 수입의 절반을 쏟아붓는다. 유치원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초등학교에서는 여러 개의 학원을 뺑뺑이 돌리며 선행 학습을 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일류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고액 과외와 쪽집게 과외를 시킨다. 그렇게 들어가는 사교육비는 한 해 무려 20조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돈을 쏟아부어도 소위 일류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95% 이상의 대학생들의 삶은 여전히 비참하다. 그들은 취업을 위해 취업고시 준비를 해야 하고, 대학등록금을 대출받은 학생은 사회에 진입하기 전부터 이미 빚더미를 안고 출발해야 한다.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25%가 넘는데, 이들 대부분이 청년이거나 노인들이다. 이들이 매월 내야 하는 임대료는 건물주의 수입이 되고, 가난한 사람을 더욱 착취하는 임대소득자에 대한 강력한 세금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토지와 건물을 소유한 자본가는 아주 적은 세금만 내고 막대한 이윤을 가져가는 구조가 바로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수 많은 사람들의 등에 빨대를 꼽고 피를 빨아먹는 소수의 거인이 있다고 보면 된다. 자본(가)은 그렇다고 노예제처럼 노골적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착취하지는 않는다. 발달하는 과학기술과 세련한 문화예술의 힘을 빌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텔레비전에서는 늘 행복하고 재미있는 내용을 방송하고, 인터넷에는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컨텐츠가 무료로 제공된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꿈꾸고,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상상한다. 다만 그들의 꿈과 희망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나영석 피디의 의도
    나영석 피디의 의도 -스페인하숙을 보고 집에 텔레비전 없이 지낸 시간이 15년이다. 여기 집을 짓고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아예 텔레비전을 들여놓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고, 무엇보다 광고가 너무 많아서 두 가지 면에서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있다.현재 텔레비전에서 편성해 방송하는 내용들의 99.9%는 안 봐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내용일 뿐아니라, 오히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텔레비전 방송의 편성은 사회의 체제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의 숫자는 많지만, 거기에서 방송하는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거나, 연예인들이 나와서 잡담을 하거나, 연예인들이 나와서 밥을 먹거나 여행을 한다. 그리고 광고를 한다. 시청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리모콘으로 어느 방송국을 선택해도 광고를 피할 수 없다. 홈쇼핑 방송은 마치 일반 방송처럼 상품 판매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제작해 방송하고, 사람들은 상업광고 방송을 보면서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전화번호를 누른다.텔레비전에 몰입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태도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할 수 있는 행위는 무언가를 먹는 것 말고는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뜨개질은 할 수 있지만, 생각하거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지는 못한다. 텔레비전에서 내보내는 정보가 머리를 채우면, 다른 정보를 받아들일 여유가 사라진다. 뇌는 그 정보의 질을 판단하지 못한다. 정보가 고급인지, 쓰레기인지를 판별하는 것은 '이성'인데, '이성'의 발달은 오랜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편차가 크다. 결국 텔레비전의 대부분 쓰레기같은 정보가 뇌를 통해 들어오면, 뇌는 그것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저장과 삭제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니, 쓰레기 정보가 들어가면, 그가 알게 되는 정보는 쓰레기일 수밖에 없다.텔레비전 대신 그 시간만큼 책-당연히 좋은 책-을 읽는다면,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1인당 독서량이 1년에 한 권이 채 안된다는 통계가 있는 걸 보면, 한국사람 대부분은 책을 읽는 대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집에 텔레비전도 없고, 방송 프로그램에 관심도 없지만, 그래도 가끔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생기는데, 이번에는 '스페인 하숙'이다. 나영석 피디가 예전에 만들었던 일련의 프로그램들-삼시세끼, 윤식당-을 봤는데, 이 프로그램 역시 그가 만들었다. 나영석 피디의 이 작품들은 기존의 프로그램과는 조금 다르 면이 있다. 나영석 피디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별도의 분석이 필요하고, 흥미로운 지점이 있는데,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스페인 하숙'이 기존의 '삼시세끼'와 '윤식당'을 콜라보한 것이라는 세간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삼시세끼'의 성공은 프로그램 포맷이 신선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배우 차승원과 유해진의 찰떡궁합이 빚어낸 환상의 조합 때문이었다. '스페인 하숙' 역시 차승원과 유해진의 콤비가 절대적 영향을 끼치고, 차승원이 만드는 요리와 유해진의 설비가 결합했으며, 두 사람의 태도가 마치 부부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다시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차승원이 요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관행에 따르면 '여성' 또는 '주부'의 역할을 맡는다. 반대로 유해진은 주로 바깥 일을 하면서 '남성'의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남성이기 때문에 동성의 관계 즉 성소수자들의 역할 분담 같은 느낌도 주게 된다. 이것은 나영석 피디나 제작진이 의도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리얼리티 방송을 분석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상징적 의미이기도 하다.'스페인 하숙'에서 차승원, 유해진 두 사람의 요리와 설비가 내용의 핵심을 이루지만, 하숙집 있는 곳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것은 단지 순례를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숙을 하겠다는 의도에서 확장해, '길을 떠나 낯선 곳에 서 있고자 하는 사람들 로망'이라는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은 기획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꾼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방송은 그런 많은 사람의 욕망을 반영하고, 상품(프로그램)으로 만들어 판매(방송)한다. 떠나는 것에 대한 로망과 함께, 떠났을 때 생기는 향수병과 귀향의 욕망 또한 만만치 않으며, 사람은 이 이중의 감정으로 갈등을 일으킨다. 여기에 향수를 일으키는 고향의 음식이 등장하거나, 낯선 사람들의 낯선 음식에 관한 반응은 그 음식에 익숙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영석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선정적이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에 담긴 시대의 욕망을 정확히 읽고 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마약을 긍정으로 소비하는 사회
    마약을 긍정으로 소비하는 사회 언제부터인가 한국사회는 '마약'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뉴스나 여론은 분명 '마약'이 사회에 해로운 물건이고, 마약을 소비하는 사람을 범죄자로 규정해 인신을 구속한다. 지금까지 마약은 부르주아 세계는 물론이고 서민의 삶에도 깊숙히 침투했다는 증거는 상당히 많다. 마약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현대 이전에는 주로 '진통제'로 쓰였기에 마약이 큰 문제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마약은 천연재료에서 추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학물질로 제조하면서 종류와 양이 급격히 늘어났다. 마약은 범죄집단에게 가장 큰 부의 근원이 되었다. 마약이 사람들 사이로 흘러들어가면서, 마약은 사람들의 정상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범죄집단은 과거에 총과 칼 같은 무기로 자신들이 원하는 돈을 빼았앗지만, 이제는 마약으로 더 쉽고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마약 공급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마약 카르텔의 힘이 그 사회의 공권력을 능가할 정도가 되고, 마약 범죄집단을 소탕하려고 내전 수준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마약은 '적당히 즐기는' 수준으로 통제가 가능하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마약'이라는 단어를 붙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약은 반드시 중독을 일으킨다. 약물에 중독된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가지 못한다. 처음 마약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의지였겠지만-강제로 또는 모른 채 마약중독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중독이 된 다음에는 자신의 의지로 중독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의 공통 의견이다. 마약이 '불법'으로 규정되면서도 끊임없이 유통되는 것은 그것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수요를 만들어 내는 범죄집단의 의지와 의도 때문이다. 마약을 생산, 유통, 판매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마약은 일반 상품과는 차원이 다른 부가가치를 만들어 낸다. 즉,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생필품의 가격은 정부가 적절하게 통제하고, 경쟁의 원리에 의해 가격이 폭등할 확률이 매우 낮다. 하지만 마약은 'All or Nothing'이다. 마약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쓸모 없는 물건이지만, 마약 중독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 반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마약의 가격은 필요한 사람에게 무한대의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마약을 공급하는 쪽에서는 초기 투자를 통해 중독자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일단 중독이 되면 반대로 중독자가 공급자에게 매달리는 현상을 보인다. 한국사회에서 법률은 마약의 제조, 유통, 공급,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그것이 불법일 경우는 다른 어떤 범죄보다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다. 그만큼 마약으로 인한 사회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에서 '마약'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약김밥' '마약베개' '마약매트리스' '마약국수' 등 마약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그 물건이나 음식이 더 맛있거나 훌륭한 제품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광고라고 보기에는 몹시 위험한 현상이다. '마약'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하면, 자라나는 세대는 마약에 거부감을 갖지 않게 되고, 마약으로 큰 돈을 버는 범죄집단의 유혹에 쉽게 노출되며, 마약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어떤 음식이나 물건 앞에 '마약'을 붙이는 순간, 그 광고는 거짓, 과장 광고에 해당한다. 그 음식이나 물건에 진짜 '마약'이 들어있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거짓 광고한 것이고, 사회에서 범죄로 규정한 마약을 '좋은 것'으로 포장한 왜곡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마약을 앞에 붙이는 단어를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에서 출연하는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걸 들을 수 있는데, 그들의 언행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별 생각 없이 말을 한다는 걸 반증한다. 연예인이든 일반인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라도 방송에서는 잘못된 언행을 바로 잡거나, 드러나지 않도록 편집해야 하는데도 방송국의 관련자들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경우를 보기 드물다. 언어(말과 글)는 무의식을 반영한다. '마약00'을 별 생각 없이 쓰는 사람은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서 마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각종 광고에서 '마약00'은 이윤을 위한 업자들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을 의도해서 드러내는 것이므로, 정부는 이런 광고에 대해서는 강력한 규제를 해야 한다. 방송과 언론에서는 '마약00'을 쓰는 출연자를 제재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하며, 마약의 불법성, 중독성, 거대한 사회적 비용의 낭비를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 한국은 더 이상 마약에서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아주 작은 틈으로 시작해 댐이 붕괴하듯, 마약을 긍정으로 소비하는 단어가 마약 중독 사회를 불러올 수 있다. 지나친 걱정이라고? 그러면 좋겠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3
  • 나는 누굴까
    나 이 글을 쓰는 나는 사회적 기준에서 평범, 평균보다 낮은 정도의 수준이다. 즉, 우리 사회에서 평범하고 평균의 삶을 사는 사람들보다 부족하고 어리석게 살았다. 그 기준을 두고 말하자면 꽤나 복잡하겠지만, 경제적인 면, 학벌이나 인맥 등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을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학력도 보잘 것 없고, 가난하게 자랐고, 그래서 사회의 인맥도 거의 없다. 이런 사실은 2003년 지금 살고 있는 시골로 내려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그래서 평균 이하의 내가 열등감에 휩싸여 있다거나,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다. 전체로 봐서는 평균 이하지만 한두 가지는 평균보다 조금 웃도는 것이 있으니 이렇게 글도 쓰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또 말한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족이나 친구 등 주위 사람이라고. ‘나’의 본모습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나’는 나를 주관으로 보고 있고, 주위 사람은 나를 객관으로 보고 있다. 나를 바라보며 해석하는 것은 나 자신이거나 주위 사람이거나 모두 정확하게 보겠지만 일부만을 보고 있을 것이다. 50년 넘게 살다보니 내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이 첫 번째 인식이고, ‘나’의 존재에 대한 이중성, 불명확성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두 번째 인식이다. 내가 ‘나’라는 것은 알겠고, 내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잘 하는 것, 못 하는 것,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고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의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내용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전혀 생각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내 경험이나 생각으로 미루어, 사람들은 저마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거나, 말할 수 없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말하기 난감한, 말을 꺼내기 어려운, 두려운, 거북한, 자존심 상하는 내용이기도 할 것이고, 말을 꺼내본들 다른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절박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나만 유별나고 중뿔나게 고민과 갈등과 속앓이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유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보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의식은 모두 유치하고 가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저마다 짊어질 수 있는 만큼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모두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치가 있다고 해서 모두 알곡처럼 쓸만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듯이 꼭 필요한 사람, 있으면 좋은 사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 필요 없는 사람 등으로 나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인간을 ‘도구’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므로 사람의 가치를 낮게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만, 어떤 사회에서건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사람들도 유형이 다양한데,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범죄자부터 단순한 잉여 인간까지 ‘쓸모없는’ 인간들은 필연으로 생기기 마련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씀하신 분도 있지만, ‘인간(人間)’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나이 들어 더 잘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변한다. 나이에 따라 외모가 바뀌듯이,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많아지면서 눈으로 보는 사물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판단과 이해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고, 늘 회의(懷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스무 살 중반에 시작한 공부로 인해 내 삶의 전반기와 후반기가 분명하게 갈리는 경험을 했다. 삶의 전반기가 유아에서 청소년의 시기였다면 후반기는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첫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다음 단계가 서른 중반에 결혼을 하고, 자식을 얻은 것이라고 하겠다. 작은 단계로 나누면 더 많아지겠지만,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면 나는 끊임없이 어리석음을 깨닫는, 어리석은 자신을 돌이키고, 반성하고, 후회하고, 다짐하는 시간들이었다. 나이가 많아진다고 저절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력이 높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현명하거나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상태로 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들이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없다. 다수의 사람들은 나이 들어도 어리석고 한심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시간을 소비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에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개인의 삶이 높은 문화 수준을 영위하며, 지성과 예술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걱정하지 않고 지내야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의료, 교육, 주거가 그것이다. 몸이 아프면 누구나 걱정없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입원할 수 있어야 하고, 4살부터 대학까지, 또는 평생 교육까지 입학금, 등록금 걱정 없이 다닐 수 있어야 한다. 집을 마련하기 위해 평생 은행빚을 얻어 쓰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도 없어야 한다. 말하기 쉬워서 세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이 세 가지를 해결하려면 사회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즉, 현재의 착취구조형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행복은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글쎄...’하면서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잃을 것이 전혀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선뜻 옳다고 말하지 못한다.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 사고방식’에 쇄뇌되어 왔기 때문에, 행복한 조건들이 눈앞에 있어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새고 있어 다시 본래의 ‘나’로 돌아오면, 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욕망 덩어리의 인간이자, 인간의 탐욕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끼는 존재다. ‘개인’의 자유와 결정과 책임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소수의 사람들이 부자로 살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난하게 사는, 공빈공락共貧共樂의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불편한 까닭
    불편한 까닭 '막노동 부모를 둔 아나운서 딸'이라는 제목으로 공유되는 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물론 나도 읽었다. 사람들은 이 글에 감동했다면서 공유하고, 글쓴이를 칭찬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왜일까. 여성이 아나운서가 된다는 건,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 전문직으로 사회에서 일하는 건 아나운서 뿐아니라 훨씬 폭넓고 다양하기 때문에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특히 도드라지는 여성의 성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개천에서' 자란 자신(여성)이 '용'이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그것이 막노동을 하는 부모의 덕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것이 한국의 전통 이데올로기인 유교적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올바른 태도인데, 왜 내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걸까. 아나운서가 된 여성은 자신을 키워주신 부모님이 배우지 못한 분이고, 평생을 막노동을 하며 자식을 키우셨다고 했다. 그런 부모를 보며 여성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공부하고, 집안일을 하고, 고생하는 부모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올바르게 살아야 하고, 좋은 직업과 신분의 상승을 이루어야 한다고 다짐했노라고 말한다. 자신이 아나운서가 되었을 때, 주변의 동료들 집안이 대개 의사, 교수의 부모를 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자신의 부모 직업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말한다. 글의 내용에서 흠잡을 부분은 없다. 문제는 이 글을 쓴 의도에 있다.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의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글을 쓴 전직 아나운서 여성은 자신을 키운 부모님을 고맙게 생각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을지 모른다. 하지만, 글에서 읽히는건, 자신의 부모, 그것도 배우지 못한 부모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스스로 '개천에서 난 용'이라고 지칭할 때, 그건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왜 자신을 '개천에서 난 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자신의 부모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자신이 그 부모의 삶에서 많이 벗어나 '용'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의도였을까. 자신의 부모는 비록 지금도 '개천'에 있지만, 자신은 그 '개천'에서 벗어났고, 지금은 '용'이 되어 더러운 개천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으니, 그런 우월감을 드러내고 싶어서였을까. 세상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지금도 무수히 많은 부모들이 '개천'에서 살고 있고, 그 분들은 여전히 한글도 잘 모르고, 말하고, 글쓰기를 잘 못한다. 시골에 사는 부모들은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고, 산나물을 채취하고, 비닐하우스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다. 그 분들에게는 그런 삶이 너무나 당연해서 자신들이 '개천'에서 사는 줄 조차 인식,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도시에서 막노동을 하며 사는 삶이 '개천'에서 사는 삶이라는 규정은 누가 하는 걸까. 이 여성은 너무도 도식적이고 고정적으로 배우지 못하고,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개천'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런 삶에서는 무조건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를 포함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부모가 국민학교도 나오지 못한 분들이지만, 나는 내 부모가 '개천'에서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학력과 경제력을 기준으로 '개천'과 '용'을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그 여성이 철저하게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되어 있고, 사회를 보는 시각이 흑백으로만 보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세상-자본주의 사회-이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고 해서, 나 자신까지 그런 체제의 구조와 논리를 내면화하여, 자기 부모의 삶과 자기의 삶을 구분 짓고, '개천'과 '용'으로 나누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거의 본능적으로 그 여성의 글이 불편했다. 전직 아나운서 여성의 글은 반듯하고 올바른 전통사회의 이념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수의 지지와 응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민중' 그 자체인 부모-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부모-를 대상화하고 그 분들의 삶을 소외시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 내 부모부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분들이다.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지인, 친구, 친척들의 부모님 역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분들이다. 그러니 우리의 부모들 가운데 대부분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분들인데, 그들의 자식들은 거의 모두 부모들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전직 아나운서 여성의 부모님만 특별한 경우도 아니고,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 '더 열심히' 살아온 것이 이 여성뿐만도 아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삶을 마치 특별한 것처럼 '개천에서 난 용'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미화'한 글이 불편한 건 나만 그런 걸까.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심석희 선수를 응원합니다.
    심석희 선수를 응원합니다. '대한민국의 천재 쇼트트랙 선수'라는 극찬을 받은 심석희 선수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씁니다. 비인기종목 스포츠인 동계스포츠 쇼트트랙에서 뛰어난 재능과 실력으로 청년의 열정과 투혼을 보여준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얼음 위를 달리는 심석희 선수의 모습은 빠르고, 날카로우며, 부드럽고, 유연한 최고의 쇼트트랙 선수였습니다. 경쟁하는 선수를 앞지르며 가장 먼저 결승선에 도달할 때의 그 환희와 벅찬 감정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는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같은 감정을 느끼며 기뻐하고 환호했습니다. 엘리트 스포츠선수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심석희 선수는 여러 번 보여주었고, 그렇게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감동했습니다.심석희 선수를 비롯한 동료 선수들의 팀워크와 동료애, 경쟁하는 팀과 선두를 다투는 전략과 전술의 흐름, 탁월한 기량으로 경쟁 선수를 앞지르며 달려나가는 놀라운 순발력은 저절로 감탄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심석희 선수가 지금까지 이룩한 수많은 신기록들은 나이 어린 선수가 해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대단하고, 훌륭한 기록들입니다. 한국의 동계스포츠 쇼트트랙이 다른 나라보다 뛰어나다고 알려졌지만, 심석희 선수는 그 가운데서도 특별한 선수입니다.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청소년 올림픽, 주니어 세계선수권 등에서 금메달만 무려 21개를 획득했고, 지금도 여전히 기량이 성장하고 있는 놀라운 선수입니다. 심석희 선수는 한국의 보물입니다. 지금도 최고의 쇼트트랙 선수이며, 미래의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그러니 심석희 선수. 앞으로도 한국의 빙상스포츠, 쇼트트랙의 미래를 위해 힘써주시길 바랍니다. 심석희 선수를 바라보며, 심석희 선수를 롤모델 삼아 열심히 노력하는 후배 선수들을 위해 심석희 선수의 능력을 펼쳐주시기 바랍니다. 심석희 선수가 보여준 용기에 진심으로 박수와 응원을 보냅니다. 그동안 겪었던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이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만, 세상은 모두 심석희 선수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심석희 선수의 아픔에 공감하며,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냅니다. 생각해보니, 심석희 선수는 제 아들보다 한 살이 많더군요. 심석희 선수처럼 훌륭하고 대견한 딸을 둔 부모님은 얼마나 자랑스러울까요.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흐믓하고, 대견합니다. 심석희 선수는 사랑하는 부모님의 딸이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딸입니다. 마음을 담아 응원합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19금 마리아
    19금 마리아 나귀를 끌고 하루 거리에 있는 아풀라에서 돌아온 요셉이 창고에 목공 도구를 정리하고 있을 때, 못보던 어린아이가 찾아왔다. 요아킴이 보자고 전하랍니다. 그러잖아도 보름이나 나사렛을 떠나 있어서 돌아오는대로 곧 장인이 될 요아킴을 찾아갈 생각이었던 요셉은 일부러 심부름 하는 아이를 시켜 보자고 한 것이 의아했다. 요아킴은 점잖은 사람으로, 그의 딸과 혼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요셉은 내심 반가웠다. 창고 정리를 마치고, 우물에서 길어온 물로 간단하게 목욕을 하고, 옷을 새로 갈아입은 뒤, 빵 한덩이를 가지고 요아킴의 집으로 향했다. 요아킴은 마을에서 비교적 부유한 집안으로, 수십 마리의 말과 수레를 가지고 사람을 부려 나사렛은 물론 멀리 다마스커스, 예루살렘, 베르세바, 텔아비브까지 다니며 교역을 하는 상인이었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이 없는 것을 두고 늘 한숨을 쉬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었다. 요아킴 어르신, 평안하셨습니까. 요셉이 집안으로 들어서 인사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요아킴이 반갑게 일어났다. 어서오게. 이번에는 어디에서 일하고 왔나? 요아킴이 요셉을 반대편 소파로 안내하며 물었다. 네, 아풀라에서 다르한 씨 마굿간을 지었습니다. 이번에 말을 두 마리 더 샀는데, 마굿간이 좁아서 옆으로 늘리는 작업을 했습니다. 요아킴은 요셉의 말을 들으며 그에게 물을 따라 주었다. 요셉은 요아킴이 따라주는 물을 마셨다. 물이 달고 맛있었다. 요셉은 낡은 옷을 입었지만 체격이 좋고, 근육이 발달했다. 그가 목수로 일하면서 단련된 단단하고 구릿빛으로 반들거리는 갈색의 피부를 가진 것이 보기 좋았다. 마을에서 목수 요셉은 성실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가난한 목수였지만 요아킴이 자기 딸과 혼인시키기로 작정한 까닭이 그 이유였다. 요셉이 말을 끝내고 잠시 말이 끊겼다. 요아킴은 바닥을 바라보다 무겁게 고개를 들고 요셉을 바라봤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요셉은 내심 혼인에 관해 이야기할 것으로 짐작했다. 마리아가 임신했네. 요아킴의 말을 듣고 요셉은 순간,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자네에게 숨길 수 없는 일이니, 솔직하게 말하겠네. 딸을 바르게 살피지 못한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으니, 나를 원망하게. 자네 얼굴을 볼 면목이 없네. 요아킴은 요셉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요셉은 당황해서 요아킴을 부축해 일으켰다. 어르신, 이렇게까지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당황한 요셉은 마음 속에서 분노와 의아함이 들끓는 걸 참으며 물었다. 상대가 어떤 남자인지는 아시나요? 요아킴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요아킴이야말로 요셉보다 더한 마음이었지만, 하나뿐인 딸이고, 애지중지 기른 고명딸이어서 어떻게도 할 수 없었다.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은 아내 안나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다. 아내에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요아킴은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제가 마리아와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요셉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자네도 그럴 권리가 있으니까. 자네가 원한다면 파혼을 하겠네. 죄많은 딸을 둔 애비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면목 없을 뿐이네. 요셉은 안채로 들어가 마리아가 지내는 작지만 깨끗한 방 앞에서 마리아를 불렀다. 그러자 안에서 안나가 나왔다. 어서오게. 자네가 올 줄 알고 있었네. 지금은 자네가 몹시 화가 났겠지만, 마리아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주길 바라네. 안나가 바깥채로 나가고, 요셉이 마리아의 방으로 들어섰다. 마리아는 양털로 짠 러그 위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불로 배를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버님에게 말씀들었소. 어찌된 일인지 내게 설명해줄 수 있겠소? 요셉이 마리아를 보며 물었다. 마리아는 요셉을 잠깐 바라보고 다시 눈을 아래로 향했다. 거기 좀 앉으세요. 마리아가 말했고, 요셉은 마리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실내는 시원했다. 당신이 나와 혼인하지 않아도 좋아요. 나도 팔려가는 것처럼 억지로 혼인하고 싶지 않고요. 내가 임신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대가 누구라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말할 수 없어요. 당신이 파혼하겠다면 그것으로 나와의 인연은 끝나는 것이고, 나와 혼인하겠다면 내가 임신한 것에 대해 더 이상 묻지 말아줘요.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변명은 하지 않겠어요. 요셉은 마리아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처녀가 임신하면 돌로 처죽여도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요셉의 생각은 달랐다. 게다가 요아킴은 마리아와 혼인하면 지참금을 넉넉하게 주겠노라고 귀뜸했다. 요셉은 가난한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지참금이 필요했다.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를 잘 하기 바라오. 요셉은 마리아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두 달 뒤, 날이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할 때, 요셉은 당나귀에 마리아를 태우고 베들레헴으로 떠났다. 베들레헴에 새집을 짓는 일을 시작해서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야 한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아이를 낳으면 소문이 퍼지게 될 것이 두려워서 멀리 떨어진 베를레헴으로 갈 것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요셉은 베들레헴에서 집을 지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요셉과 다른 목수들 몇이 합류해 두 달 정도 집을 짓기로 했다. 요셉이 간단한 살림도구를 수레에 싣고, 양털로 짠 담요를 두른 마리아를 태우고 천천히 나사렛을 떠나 예루살렘을 지날 때 마리아가 진통을 시작했다. 하늘은 흐리고, 눈발이 조금 휘날리고 있었다. 요셉은 마리아가 몸을 풀 장소를 찾았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있고, 당나귀의 발걸음은 느렸다. 하는 수 없이 요셉은 길가에 있는 마굿간 앞에 당나귀를 세우고, 마리아를 부축해 마굿간의 짚더미 위에 눕혔다. 진통을 하던 마리아는 힘겹게 아이를 낳았는데, 쌍동이였다. 딸이 먼저 나왔고, 잠시 뒤에 아들이 나왔다. 요셉은 아이들을 받으며 눈물이 나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수준 낮은 인간들이 있다
    수준 낮은 인간들이 있다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설명할 때, 과학에서는 '차원'을 말한다. 1차원은 점, 2차원은 선, 3차원은 면, 4차원은 3차원에 시간을 더한 것이다. 인간은 분명 4차원을 살아가고 있지만, 4차원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3차원을 이해한다. 아주 어린아이도 3차원의 삶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즉 바닥을 걷고, 벽을 구분하며, 공간을 입체로 인지하는 능력이 있다. 이런 능력은 태어나서 배운 것이 아니라, 이미 유전자로 물려받은 공감각 능력이고 본능으로 알고 있다. 반면, 작은 곤충을 보면 3차원 공간에 살고 있지만 인간이 보기에 매우 단순하고 의미 없는 행동을 할 뿐이다. 곤충류는 사람이 얼마든지 쉽게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움직임이 뻔히 보인다. 인간은 곤충의 생명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다. 같은 인간이라도 사람에게는 수준이 있다. 인간은 평등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존재'가 평등하다고 해서 개개인의 수준에 차이가 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고, 바로 그 수준 차이 때문에 사회에 계층이 발생하는 것이다. 계층은 계급과는 다른 개념이고, 계급 사회에서도, 계급이 사라진 사회에서도 계층은 존재할 것이다. 단,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계층에 속한 집단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준 낮은 인간'이란 개인을 말한다. 그리고 수준 낮은 인간들이 모인 집단이 존재한다. '수준이 낮다'는 개념은 논리적, 과학적 근거가 있는 표현일까. '수준이 낮다'는 문장만으로도 여러 종류의 철학적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사회적 합의에 필요한 논쟁을 이끌어 낼 수 있을 정도다. 천천히 질문을 따라가보자. 우선, '수준'의 개념과 정의는 무엇일까. '수준이 낮다'고 할 때, 당연히 수준이 높은 상대적 개념이 있을테고, 높고 낮은 것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이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수준'의 개념은 개인의 세계관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지만, 다시 '세계관'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즉 '세계관'은 무엇이며, 세계관에도 높고 낮은 것이 있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개인의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가치관'은 개인의 주관적 성격이 강하므로 사회에서 합의한 기준을 놓고 판단해야 한다. 가치관보다 넓고 다양한 개념으로 개인의 사상을 규정하는 것이 '세계관'이라면, '수준'을 규정하는 것은 결국 '세계관'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세계관은 그 사람의 출생부터 부모의 성향, 성장 과정, 교육의 정도, 살면서 겪은 다양하고 결정적 경험들에서 만들어진다. 단 한 사람도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수준이 높은 사람과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갈린다. 또한 수준 차이는 언제나 상대적 개념이어서, 사회에 존재하는 수준 낮은 사람들을 솎아내면, 다시 전체 집단에서 일정 부분의 수준 낮은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수준 낮은 인간이란, 바꿔 말하면 반민주, 비도덕, 비윤리적 인간이다. 즉 세계관이 건강하지 않은 인간을 말한다. 이들의 특징은 공동의 윤리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고, 정의보다는 이익과 손해를 계산해서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인다. 세계관의 기준이 '나의 이익'에 있기 때문에 이들 수준 낮은 인간은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친일매국을 해도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선택한다. 그들은 '양심'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수준이 낮은 인간은 싸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성향을 갖고 있다. 이들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데, 그 본능은 자신의 생존이다. 이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적극 옹호하고 지지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약육강식의 논리를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수준 낮은 인간이 볼 때, 가장 위대한 인간형은 '자본가'다. 자본가는 이윤을 추구하는 이념의 화신이다.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자본가이며, 그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다.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 낮은 사람은 주어진 환경-자본주의 체제-을 절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이 공산주의 사회나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가장 열렬한 체제옹호자로 변신하게 된다. 이들은 루쉰이 말한 '아Q'와 닮은 유형이다. 이들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한편 권력-부패한 권력-의 냄새를 맡는 본능이 있다. 부패한 권력에 기대는 심리는 자신의 내부가 단단하지 못해서 스스로 생각하거나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강한 힘에 의존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가난하게 자라서 배우지 못한 무지랭이 인민이 있고,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능력은 안 되는 어리석은 인민이 있고, 교육을 많이 받고 사회에서 엘리트 집단에 속한 사람이지만, 뇌회로에 문제가 있어 도덕과 윤리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민이 있고, 엘리트 집단의 일부는 자신이 반사회 범죄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거짓말과 조작을 하는 인민이 있다. 가장 단순한 예로, 공중도덕을 지키자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 집단이 약속한 이 최소한의 규율 조차도 지키지 않는 인간들이 바로 수준 낮은 인간인 것이다. 거리에서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리고,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리는 행위는 분명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필요없는 사회비용을 지불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낮은 수준은 적은 사회적 비용만 치루면 되지만, 지식과 권력으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은 국가 재정에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 사회의 뿌리를 썩게 만들고, 사회의 줄기를 무너뜨리는 거대한 범죄를 저지른다. 지난 9년간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바로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악하고 저열하며, 야비한 공작과 탐욕으로 나라를 이렇게 망가뜨린 것을 확인했다. 수준 낮은 인간은 우물안 개구리와 같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가 고작 우물 위 동그란 하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굴 속에 사는 원시인들과 본질에서 같다. 그들은 외부의 충격에 공포를 느끼며, 자신과 다른 모든 것에 두려움을 갖고 공격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무지가 곧 공포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수준 낮은 인간의 특성은 무지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지함은 학교 교육을 말하는 게 아니다. 수준이 낮다는 건 천박하다는 뜻이고, 천박함은 학교 교육과 아무 관련이 없다. 촛불이 만든 정부를 헐뜯고 모함하는 야당의 국회의원들, 이명박, 박근혜를 옹호하는 수구꼴통들, 정부보조금을 자기돈처럼 마음대로 쓰는, 정부보조금을 받는 사립기관의 기관장들, 하버드대학을 나온 어떤 인간, 방송국 기자로 인터뷰를 조작한 어떤 전 기자, 만화를 그리는 어떤 만화가,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헐뜨는 여자들 그리고 일베충들이 바로 수준이 낮은 천박한 것들이다. 문제는, 수준 낮은 인간들이 자신을 대표하는 더 수준 낮은 인간을 국회에 보낸다는 것이다. 수준 낮은 인간들의 유형은 다양하지만, 그들이 발생하는 경로는 몇 가지 있다. 태어날 때부터 어리석은 인간이 있다. 그것이 그의 탓은 아니지만, 뇌 활동이 부진하게 태어난 것이다. 이들은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매우 한정되어 있어, 태생적으로 지능과 사고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성장 과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 학대당한 사람의 일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일부에서 수준 낮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의 내면이 황폐한 것을 외부에서 충족하려 한다. 그것이 파괴적이고 공격적 성향으로 드러나며, 자연히 민주주의, 자유, 평화, 평등과 같은 개념에 적대감을 보인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이나 인격이 폄훼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의도적으로 천박한 역할로 돌아서는 사람이 있다. 김문순대나 이재오, 변모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명예욕과 권력욕이 큰 사람이지만 그것을 충족할 방법을 정상의 방법으로 찾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반대의 길로 들어섰다. 민주주의가 힘들고 위대한 점은, 이런 수준 낮은 인간들까지 다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독재국가라면 이런 인간들은 쉽게 처리할 방법이 있을 것이지만,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라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로 존중한다. 그래서 국가의 생산성과 효율성은 매우 낮아서, 개인당 지출하는 비용대 효율이 낮다. 수준 높은 시민이 수준 낮은 인간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이재명은 개혁의 리트머스 시험지
    이재명은 개혁의 리트머스 시험지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여러 방향에서 날아오는 날카로운 화살을 막아내고 있다. '점'으로 대표되는 점부선, 점지영, 점용석 등의 합동 공격으로, 이것은 점부선이 '나는 이재명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떠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보통의 사람은 자신이 불륜을 저질렀다면, 그것을 숨기려고 노력한다. 자발적이고 의도적으로 자기의 불륜 사실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 숨기려고 할 것이다. 그런 사실을 드러내서 자기에게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판단하지 않는 한. 그렇다면 점부선은 자신이 이재명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것이 현재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간통죄가 사라졌으므로 간통으로 인한 형사처벌은 불가능하지만, 현직 경기도지사인 이재명지사가 점부선과 간통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도덕적, 윤리적, 정치적으로 결정타를 맞게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점부선이 처음 그 주장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부인해 왔으며, 점부선이 내미는 지금까지의 주장과 증거자료들은 거짓과 가짜로 드러났다. 단 하나라도 간통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었다면 이재명지사는 이미 정치생명은 물론 인간 이재명으로도 끝장이 났을 것이다. 대단한 증거라도 있는 듯 떠벌이는 저 세 명의 점씨들은 온갖 추잡한 언행으로 이재명지사의 인격을 모욕하고,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재명지사를 싫어하거나 정치적 반대자들이 똥파리처럼 달라붙어 동조한다. 다른 방향에서, 문재인대통령을 지지하는 친문, 극문 세력들이 이재명지사를 공격한다. 그들은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이재명지사가 문재인대통령을 비난하고, 심하게 공격해 인격적으로 모욕했다고 생각하고 주장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이재명지사의 언행이 정도를 지나쳤고, 예의에 어긋났으며, 올바르지 않은 처신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이재명지사는 이런 지난 날의 언행과 처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도 잘못했으며 부끄럽고, 후회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인간 이재명의 한계는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언행이 가볍고, 말 실수를 할 때가 있으며, 스스로 후회할 행동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재명지사가 가진 몇 가지 단점들을 보완할 많은 장점이 있다. 그는 솔직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며,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정치를 하거나, 행정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국회에는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썩은 쓰레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문재인대통령을 지지하는 척 하면서 이재명지사를 비난하고, 그를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자들의 정체는 수구반동집단이며, 설령 진짜 문재인대통령 지지자라 해도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이다. 지금 전선은 문재인대통령을 중심으로 개혁 집단과 자유당으로 대표되는 수구반동매국집단의 전쟁이다. 이런 엄중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편에서 서로 총질을 해대는 자는, 같은 편이 아니라 적의 간첩이거나 적군이다. 다른 방면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날카롭지는 않아도 충격이 강하다. 가장 이윤에 민감한 재벌, 자본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재명지사가 아파트 가격 원가 공개를 비롯해 정부 입찰 담합, 페이퍼컴퍼니 단속 등 당장 경기도민에게 이익이 되는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재벌과 대기업, 토건호족들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다. 이미 성남시장 때부터 해오던 이런 일련의 개혁을 경기도로 확대하는 것은 이재명의 정체성과 일치하며, 일관성 있는 추진이다. 그가 100만 성남시장에서 1300만 경기도지사가 되면서 그의 업무의 중요도는 무려 13배가 더 커진 것이다. 그만큼 그가 움직이는 시간은 1시간이 무려 1300만 시간에 해당할 정도로 비중이 있고, 중요한 자리다. 이재명을 비난하는 인간들 대부분은 스스로 썩었거나, 썩은 쓰레기들을 비호하거나, 이 사회가 지금처럼 계속 썩어 있기를 바라는 퇴행적이고, 부패한 인간들이다. 이재명의 존재 의미는 '개혁'에 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그가 성남시장 때부터 일관하는 '개혁'을 부르짖고 있고, 개혁만이 우리나라가 살 길이라고 외친다. 개혁은, 적폐를 청산하고, 합법과 상식이 통하는 투명한 사회 제도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본 가운데 기본인데,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이 기본을 바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원칙에 충실하고, 기본을 세우려는 이재명을 악의적으로 비난, 왜곡, 공격하는 자들의 정체는 과연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적폐세력이며, 민주주의의 적들이고, 수구반동매국노들이다. 이재명을 쓰러뜨리면 곧바로 문재인대통령에게 똑같은 화살이 날아갈 것이다. 지금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장판교에 선 장비처럼, 몰려오는 적들을 혼자 막아내고 있다. 이재명 뒤에는 문재인대통령이 있으며, 문재인대통령 뒤에는 우리민족의 미래가 걸린 개혁과 민주주의, 평화통일이 있다. 적들은 이재명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문재인대통령 뒤에 있는 개혁, 민주주의, 평화통일을 죽이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앞날이며, 우리 국민 대부분의 소망과 열망을 죽이는 가장 위험한 상황이며, 적폐세력이 노리는 궁극의 목적이다. 적폐세력, 수구반동매국집단이 벌이는 이 악랄한 선동과 폭력에 맞서 싸우는 것은 이재명 경기도자사를 지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비루한 인간
    비루한 인간 점심을 먹고, 문호리에 있는 단골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 각자 자기가 알고 있는 기이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평소 내가 생각했던 인간 유형이 떠올랐고, 그건 지금 사회에서 하나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해 정리했다. 한 인간이 있다. 50대 초반의 남성이다. 실업률이 높고 비정규직, 임시직 비율이 높은 한국에서 중견 기업의 정규직 사원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연봉은 1억원 정도로 높은 편이고,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가 물려받은 재산이 있어서 어느 지방도시에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 상위 5%이내에 들어갈 만큼 꽤 부유한 사람이라고 인정할만하다. 여기에, 좋은 대학을 나왔고, 외모도 멀쩡해서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다고 봐도 좋은데, 그는 50대에 미혼이다. 밥을 먹을 때는 값싼 식당을 주로 찾고, 공기밥을 공짜로 주는 식당에서 밥을 두 그릇씩 먹는다. 자동차는 소유하지 않고,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그 자체로는 훌륭하지만, 자동차로 쓰는 돈이 아까워서다. 그가 결혼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여자가 자신의 재산을 보고 결혼해서 결국 자기 재산을 뺐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가 가진 지식과 배경과 재산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는 무능하다.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는 의지도, 의욕도 없다. 그는 늘 업무에서 배재당하고, 좌천되어 지방으로 전전했으며, 회사가 좋아서 해고를 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정년까지 무능함으로 버틴다. 그가 받아가는 연봉이면 일을 아주 잘 하는 신입사원 세 명을 새로 고용할 수 있지만, 재산도 많은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판단할 능력이 없어 끝까지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또 한 인간이 있다. 그도 50대 초반의 남성인데, 강남에서 사채업을 하고 있다. 그가 주무르는 돈만 몇 백억 단위이며, 그가 가지고 있는 빌딩만 여러 채가 있다. 이 정도면 누구나 그가 한국에서 상위 0.1%에 속하는 자본가이자 부르주아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의 첫 인상은 노숙자다. 싸구려 나일론 잠바(점퍼라는 단어도 고급해서 어울리지 않는다)를 걸치고, 바닥이 닳은 낡은 신발을 신고, 싸구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자동차도 물론 없다. 그도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앞에 말한 남자와 똑같다. 여자가 자기의 재산을 강탈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아예 여자를 만나지도 않는다. 이 두 인간형은 매우 비슷하다. 두 사람은 물론 어떠한 관계도 없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두 사람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두 사람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이런 인간 유형을 '비루한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비루한 인간은 무지하고 가난한 인간이 아니다. 위의 두 인간은 매우 부유하고, 경제적으로는 상위1% 안에 들어가는 인간이고, 대학을 나온(사채업자의 학력은 알 수 없다) 인간이지만, 그들에게서 나는 느낌은, 노숙자나 거지, 부랑자들에게서 나는 더럽고 역겨우며 구역질나는 냄새다. 즉, 이런 인간 유형은 천성적으로 비루한 인간으로 타고난 것이다. 나는 결정론을 믿지 않으므로 '천성적'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 단어의 의미는 그가 태어나서 자랄 때의 성장 과정과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비루한 인간 유형 가운데 보통의 한국사람이라면(어린이들을 제외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다. 바로 이명박이다. 이명박은 운이 좋아서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가 비루한 인간이라는데는 변함이 없다. 대통령인데 비루한 인간이라면 아이러니하지만, 그런 경우는 의외로 많다. 한국에서 재벌들을 보면, 마약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온갖 천박한 갑질을 하는 사건을 너무나 자주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자본가이긴 하지만, 그건 단지 자본을 많이 소유했다는 것일뿐, 그 자본가의 품성이 고결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루한 인간의 반대는 고결한 인간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착각하는 것이, 돈이 많거나, 많이 배운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길 때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돈이 많거나 지식이 많다는 것과 고결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무 관련이 없다. 아주 드물게 부르주아에게서 그런 자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건 훌륭한 배경과 환경이 그런 인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즉, 고결한 인간은 돈과 지식과 직접 관련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명박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근근이 자랐다. 그가 그렇게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신이 어렸을 때 겪은 가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돈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다. 그가 많은 돈을 벌어서 자신과 가족을 위해 풍요롭게 사용한다면 그건 그 자체로 나쁘지 않고, 그가 사회를 위해 돈을 쓴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이명박은 오로지 돈을 '모으기만' 했다.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데, '돈에 환장하는' 집착은 정신적으로 심한 결핍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인간이다. 어려서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타인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즉 정서가 안정되고, 다른 사람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은 '사랑'이 무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자랐다. 단지 가난 때문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가난해도 자식을 사랑하고, 가족이 화목한 집안이 얼마나 많은가. 이명박은 4명이 개고기를 먹으러 가면 2인분을 주문해서 혼자 다 먹는다고 했다. 식탐 역시 돈을 탐하는 것과 똑같은 심리다. 그가 아주 적은 돈이라도 쓰지 않으려 하는 심리는, 악착같이 돈을 끌어모아야만 마음이 편한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오면서 모든 과정을 축재, 즉 돈을 모으는 데 쏟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쌓아놓으면서 마음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메우려 했던 것이다. 이명박은 그의 외모만큼이나 내면도 천박하다. 배움이 짧고, 평생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기 때문에 지식이 없고, 지식이 없으니 말하려는 내용이 없고, 사용하는 단어와 어휘가 적다. 그가 개신교도로 교회에 열심으로 출석해 기도를 한 것은, 그가 신의 존재나 종교의 깊이를 알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의 지식인이 모여서 나누는 잡담을 5분 이상 이어가지 못하는 무식한 인간이고, 특히 과학, 자연, 환경, 역사, 철학 등에는 놀라울 정도로 무지, 무식한 인간이다. 결국 이런 인간들이 비루한 인간의 전형을 이룬다. 한국에는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비루한 인간'일까.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간이 '비루한 인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가들 가운데도 언론에 보도되어 알려진 것들만도 엄청 많지 않은가. 자식이 술집에서 싸웠다고 가죽장갑에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자본가, 천박한 욕설과 말투로 고용한 사람들에게 생지랄을 떠는 자본가를 보라. 그들은 천성이 비루하고 천한 인간들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고용된 노동자들 가운데 오히려 고귀한 인간들이 더 많다. 확률적으로도 그렇다.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비율은 전체의 약 10%에 불과하지만, 노동자와 서민은 90%이기 때문이다. 고귀한 인간은 여러 형태로 드러난다. 누군가 위험에 놓였을 때 서슴없이 도와주는 사람들, 자신의 이해와 관계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사람들, 가진 것이 적어도 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고귀한 사람들이다. 돈을 쌓아놓고도 쓸 줄 모르고, 더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자들이 비루한 인간이라면,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고귀한 인간이다.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할 많은 이유 가운데 비루한 인간이 오로지 돈만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도 한몫을 한다. 이제 비루하고 천박한 인간들이 자신의 위치에 맞도록 재배치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꽁뜨-꼰대의 최후
    꽁뜨-꼰대의 최후 출근시간이 지난 2호선 전철에는 서 있는 사람이 드물고, 많은 사람들은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보고 있었고, 젊은 사람들은 이어폰을 연결해 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했다. 덜컹거리는 전철의 흔들림과 정차하고 출발하는 전철역에서의 안내방송이 규칙적으로 들릴 뿐, 전철 안은 조용했다. 전철이 사당역에 멈추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사람들이 전철에 올라타고, 문이 닫히고, 다시 전철이 움직였다. 조용한 공기가 찢어지듯 파열한 것은 전철이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이도 어린 게 어른을 보면 일어나야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쏠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 있는 남자였고, 나이는 60대로 보였다. 그는 등산복 바지와 조끼를 입었고, 손에 작은 태극기를 들었다. 검은색 선글래스를 쓰고 있어서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처진 입술, 더부룩한 수염, 꺼칠한 피부를 보면 그가 가난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남자의 앞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그 여학생은 갑자기 자신의 발을 툭툭 건드리며 강압적인 목소리와 태도로 서 있는 늙은 남자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부드럽던 전철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걱정과 호기심 어린 눈길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말이야,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단 말이야. 늙은 남자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 그의 귀에 문제가 있는 듯 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은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난감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여학생은 그러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았고, 희미한 웃음을 띄면서 조용히 말했다. 제가 왜 일어나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보시죠. 여학생의 당돌하지만 똑부러지는 말에 늙은 남자는 조금 당황한 몸짓이 보였다.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상체가 약간 뒤로 움직였다. 그건 전철의 흔들림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싸움에서 밀렸다는 반응일 수 있었다. 하지만 늙은 남자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맞받았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도리니까,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기본 예의이고, 상식이 아닌가. 늙은 남자는 자신의 논리적 주장에 스스로 만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학생 옆에 앉아 있던 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학생은 동방예의지국의 전통과 예의범절로 공격하는 늙은 남자의 주장에 패배해 곧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학생은 조금의 흐트럼짐도 없이 늙은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동방예의지국과 어른을 공경하는 것과 제가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직접적인 관련이 어디에 있는지 근거를 대보시죠. 이제는 자리에 앉을 거라고 기대했던 늙은 남자가 순간 휘청하는 느낌을 받았다. 싸가지 없는 젊은 여자가 따박따박 말대꾸 하면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정수리에서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늙은 남자는 명치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너는 부모도 없냐.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이 앞에 있으면 얼른 자리를 양보해야지. 부모가 그렇게 싸가지 없게 행동하라고 가르치던. 늙은 남자는 감정이 북받쳐서 목소리가 더 커졌다. 이제 전철 안 모든 사람들이 이 상황을 모를 수 없게 되었다. 늙은 남자는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눈길에 경멸과 짜증이 묻어 있다는 걸 모르는 듯 했다. 여학생은 옆에 앉은 노인을 슬쩍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내 여학생이 졌다. 늙은 남자는 득의양양, 거만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여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늙은 남자가 섰던 자리,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전철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여학생 옆에 앉았던 노인이 일어났다. 도착지가 되어 내리는 줄 알았던 노인은 조금 전 자리에 앉은 늙은 남자 앞에 섰다. 여학생은 노인이 일어난 자리, 늙은 남자의 옆자리에 앉았고, 여학생의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은 앉아 있는 늙은 남자의 발을 툭 찼다. 늙은 남자는 순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노인은 다시 말했다. 조용하게. 아니, 노인장 내리시는 거 아니셨나요. 늙은 남자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지만, 선글래스를 써서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 시커먼 안경 벗어. 나이도 어린 새끼가 어른 앞에서 까만 안경을 쓰고 있는 게 어른에 대한 예의야.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지만, 노인은 또박또박 알아들을 수 있게 말했다. 늙은 남자는 당황한 몸짓을 숨기지 못했지만, 노인의 말을 무시했다. 아니, 노인께서 왜 시비를 거십니까. 그냥 자리에 앉아 계시면 되잖아요. 내 맘이야. 선글라스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 새끼야.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철 안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점잖게 생긴 노인의 입에서 저런 거친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도 신기하고 놀라운 장면이었다. 에이, 씨발, 늙었으면 곱게 늙을 것이지, 왜 시비를 걸고 그러는 거야. 늙은 남자는 이제 노인의 말에 반발하고, 물리적 대응을 각오하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노인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마르고 약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태극기가 긴장으로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상황은 곧 끝났다. 여학생이 다시 일어섰고, 노인은 자리에 앉았다. 늙은 남자는 득의만면, 자신이 이겼음을 느끼고, 기분이 좋았다고 느끼는 순간, 눈앞에서 불이 번쩍거렸다. 그리고 전철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 날카로운 소리에 본능적으로 눈이 한 곳으로 향했다. 여학생의 손바닥이 늙은 남자의 뺨을 풀스윙으로 때리고 허공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장면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번 빠르고 강하게 반복되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늙은 남자의 뺨은 이내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상황에 늙은 남자는 어리둥절했다. 그 사이 이번에는 둔탁한 타격이 턱과 가슴에 연거푸 퍼부어졌다. 너무 빠르고 강한 타격이었고, 갑작스러워서 늙은 남자는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타격으로 인한 통증이 양쪽 뺨과 턱, 가슴에서 폭탄처럼 터지자 본능처럼 벌떡 일어나 여학생을 공격했다. 하지만 여학생은 날렵했고, 유연했으며, 부드러웠다. 그의 손과 발은 마치 춤을 추듯,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늙은 남자는 온몸에 타격을 입고 바닥에 쓰러졌다. 늙은 남자는 자기가 이렇게 비참하게 처맞고 있는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전철 안에 있는 사람들의 비웃음이 선명하게 들렸다. 그가 들고 있던 태극기가 찢어졌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19금 장화홍련
    19금 장화홍련 더는 참을 수 없어. 아버지라는 새끼는 내가 그렇게 말해도 믿지 않고, 계모라는 쌍년은 나를 죽이려고 벌써 몇 번이나 음모를 꾸미고, 실행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겨우 살아남았어. 나를 죽이면 동생 홍련도 죽일 게 뻔하지. 이제, 저 쌍년과 그 아들 새끼를 죽일 거야. 계모년은 내가 외간 남자와 사통을 해서 애까지 낳았다고 음해했지. 쥐를 잡아서 껍질을 벗기고 그걸 내가 낳은 아이라고 아버지에게 보여주면서, 집안 망신을 시킨 나를 죽여야 한다고. 씨발년. 내가 순순히 당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동안 그렇게 당하면서도 참았던건, 홍련이 때문이었어. 불쌍한 홍련이는 내가 아니면 아무도 지켜줄 사람이 없거든. 계모년이 데려온 애새끼 장쇠라는 놈은 더럽게 못 생긴 데다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새끼로, 제 애미 말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따르는 놈이야. 그 새끼가 나를 강간하려고 했었고, 죽이려는 시도도 했지만, 다행히 옆집 할머니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어. 공포에 떨면서도 관아에 고발할 수 없었던 것은,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지. 그때부터 밥을 먹을 때는 항상 은가락지를 국에 넣어서 색깔이 변하는지 확인하고 먹지. 계모년에게는 애새끼가 셋인데, 모두 사내 새끼들이야.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이미 장쇠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 뒤로 둘을 낳았는데, 홍련이보다 어린 애들이지. 그 애새끼들에게는 안됐지만, 계모년은 이제 더 이상 밥을 처먹지 못할 거야. 나는 절대 그 쌍년을 용서할 수 없거든. 우리 엄마, 홍련이 낳고 죽은 우리 엄마가 홍련이를 낳을 때 출산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 들은 이야기는 달랐어. 엄마와 계모년인 허씨는 어려서 동무였다고 하더군. 허씨년은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를 질투하고, 시샘했는데, 그건 외모를 비롯해서 모든 면에서 우리 엄마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대. 우리 엄마는 외모도 예쁘고, 몸가짐도 반듯하고, 바느질도 잘 하고, 음식도 잘 만드는 '양가집 규수'였던데 반해 허씨년은 어릴 때부터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남자들하고 어울려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던 년이라더군. 엄마가 결혼하고 나를 낳고, 3년 뒤에 홍련을 낳았을 때, 친정엄마가 없던 우리 엄마를 돌봐주겠다고 했던 게 허씨년이라는 거야. 감이 오지. 그 쌍년이 우리 엄마를 살해한 거야. 미역국에 독을 넣었을 수도 있고, 목을 졸라서 죽였을 수도 있겠지. 이 사실을 알려준 건 옆집 할머니였어. 할머니는 항상 우리 자매를 지켜보고 있었지. 나는 어려서 그 할머니가 조금 이상했지만, 이제는 할머니가 너무 고마워. 내가 말귀를 알아 들을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진실을 말해 주신 거야.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모르겠어. 이 비밀을 알기 전에도 나는 늘 생명이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어. 허씨년하고 그 아들놈이 우리 자매를 죽일 거라는 느낌말이야. 우리 자매를 죽여야만 아버지 재산을 전부 그것들이 차지하지 않겠어. 나는 홍련이와 함께 낮에는 거의 산에 가서 살았어. 집에 있으면 위험했기 때문이지. 산에 간 이유는 위험으로부터 도피할 목적도 있었지만, 홍련이와 함께 체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 더 중요한 이유였어. 우리는 산을 오르고, 무거운 바위를 들고, 나뭇가지를 들고 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스스로 훈련을 했어.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어지간한 남자들은 우습게 보일 정도로 근육과 체력이 단단해졌지. 늘 풍성한 치마를 입고, 몸이 드러나지 않아서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내 스스로 자신감이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지. 어제, 허씨년이 쥐의 껍질을 벗겨서 내가 외간 남자와 사통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거짓말을 했고, 아버지는 나를 방에 가뒀어. 아마도 허씨년은 나를 그냥두지 않을 거야. 장쇠 새끼를 시켜서 나를 죽이려 하겠지. 하지만, 이렇게 당할 수는 없지. 그 쌍년놈들을 내가 먼저 본때를 보여주겠어. 헛간에는 시퍼렇게 잘 벼려둔 낫도 있고, 장롱에 숨겨둔 작은 손도끼도 있으니까. 이제 남자 옷으로 변복만 하면 돼. 엄마를 죽인 허씨년은 산 채로 팔다리를 잘라서 돼지우리에 처넣고, 장쇠 새끼는 눈깔을 빼고,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잘라 버릴 거야. 나와 홍련이를 건드리는 년놈은 누구를 막론하고 제 명에 죽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저 뒷산 우물 속에 처박힌 년놈이 몇이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를테지만 말이야.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꽁뜨-감옥에서 부친 편지
    꽁뜨-감옥에서 부친 편지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아들 시형 보아라 나는 이 안에서 잘 지내고 있다. 하루 세 끼 잘 먹고, 성경도 날마다 읽으며 우리 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여기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로지 성경 뿐이다. 생각할수록, 내가 주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지 않았다면 이 환란을 어떻게 견뎠을지 생각하면 끔찍하다. 너도 교회 열심히 나가고, 성경도 매일 빼놓지 말고 꼭 읽기 바란다. 나는 이제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과 환란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오늘 세속의 법은 내게 유죄를 선고하고 벌금 130억원과 15년을 감옥에 갇혀 있으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내가 죄 없는 순진한 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70년 평생은 정직과 청렴의 세월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전지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늘 순결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이 세상의 소금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서울시장이었을 때는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했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나라를 하나님께 봉헌했다. 하나님의 세계를 이 땅에서 이룰 수만 있다면, 서울이든, 한국이든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바칠 것이다. 내가 이 안에 있는 동안 어머니 잘 모시고, 가족들 두루 잘 돌보고, 너도 이제 가장으로서 정직하고 청렴하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선한 목자가 되기를 바란다. -동부구치소에서 애비가 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나는 잘 있소. 나보다 당신이 더 고생이 많은 줄 잘 압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 하나님의 품안에서 신심을 다해 영적 부부로 거듭났으니 그 어찌 고맙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소. 옥바라지 하느라 고생하는 당신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오. 옛날 독립투사들의 아내가 드렇듯, 정의로운 길에는 늘 환란과 핍박이 가로 막고 있을 뿐이오. 당신과 내가 한평생 살면서 정직과 청렴으로 외길을 걸었지만, 세상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구려. 예수님도 사막을 40일이나 헤매며 진리를 구했듯, 우리도 이 고난의 시간을 주 하나님이 주신 영광의 시간을 발견할 수 있는 값진 기회라 생각하고, 꿋꿋하게 견뎌 나갑시다. 나 없는 동안 당신이 집안의 가솔들 잘 돌보고, 무엇보다 당신 건강에 유의해서 머지 않아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납시다. 지금은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는 예수의 심정으로,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내게 주어진 역사의 수난이라고 생각하고, 이 고난이 끝날 때, 우리에게는 더 큰 영광과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질 것이라고 믿고 있소. 그날이 올 때까지 부디 당신도 하나님의 보살핌 속에서 건강하길 바라오. 진심으로 아버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어린양에게 주님의 축복과 은혜를 내려주소서. 이 좁은 골방에 갇혀 교도관이 가져다 주는 밥을 먹으면서 독방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생각나기는 개뿔, 아이 씨발 개좆같네. 아무 죄 없는 나를 15년이나 감옥에 가둬놓겠다는 저 빨갱이 새끼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왜 아무도 나서지를 않는 거냐고. 내 덕분에 잘 먹고 살던 새끼들도 언제 봤냐는 듯이 아는 척도 안 하고, 배신 때리는 더러운 새끼들, 내가 나가면 너희들은 다 죽었어. 시형이, 이 새끼도 미국에서 미국 검찰 조사받는다는데, 옛날에 무성이 사위하고 마약 했다는 소문이 나돌던데, 미국에서 걸리는 거 아냐? 미국에서 탈세하면 국세청에서 탈탈 턴다고, 미국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 국세청이라던데, 이제 내가 대통령도 아니고, 너를 도와 줄 수도 없잖냐. 마누라는 발가락에다 다이아몬드 반지 끼워서 들어오다 들통나서 씨발, 있는대로 쪽팔리고, 대통령 마누라가 말도 천박하게 해서 사람들한테 비웃음이나 당하고, 밀수한다고 뒤에서 욕이나 얻어먹고, 아이 진짜 씨발, 무슨 집구석이 이렇게 더럽고 추접하냐. 아무리 내가 돈이 많고 대통령까지 하면 뭐하냐고. 집안이 천하고 무식한 것들만 넘치는데. 저것들은 밖에서 잘 먹고 잘 살겠지. 씨발, 왜 나만 여기 혼자 들어와서 이 고생인지 진짜 개좆같아서 못 참겠다. 하나님인지 씨발, 그리스인지 그렇게 열심히 믿어도 아무 소용없잖아.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이 좁은 독방이 왠말이냐고. 그 좋아하는 보신탕도 못 먹고, 아랫 것들에게 욕하면서 재떨이도 못 던지고, 테니스도 못 치고, 예쁜 여자가 있는 사우나도 못 가고. 아, 진짜 죽겠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냐고.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노인의 날
    노인의 날 구글 캘린더에 일정을 입력하다 오늘이 ’노인의 날‘인 걸 알았다. ’노인의 날‘이지만 특별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노인들이 각양각색의 옷과 장신구를 하고 거리를 행진한다든가, 지역별로 노인이 주인되어 주민들과 함께 하는 축제를 연다든가 하는 행사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노인을 공경하는 의미에서 ’노인의 날‘을 제정했겠으나, 실속도, 형식도 보이지 않는 이런 날을 왜 제정했는지 의아하다. 한국도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고, 노인 인구가 청년, 어린이 인구보다 더 많아지는 역피라미드 사회로 바뀌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문제는 노인의 질적 구성이다. 이렇게 말하면 듣는 노인들 기분이 좋지 않겠지만, 노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노인의 정치, 이념적 성향의 분류는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작동하므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노인은 일제강점기, 광복, 한국전쟁, 분단, 군사쿠데타를 모두 겪은, 가장 드라마틱한 세대다. 아직 노인이라고 말하기 이른 내 세대(50대)만 해도 저 모든 경험을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군사쿠데타를 두 개나 겪었고, 어린 시절을 독재사회에서 자랐다. 전근대적인 가부장제와 함께 병영문화, 일본 제국주의 문화를 바탕으로 격심한 남녀차별과 가부장의 폭력,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살아왔으니 우리 세대의 남성들도 무지와 미개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은데 하물려 우리 부모 세대인 지금의 노인들을 어떨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노인 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모르는 것을 배우고, 새로운 지식을 얻고, 비록 간접 경험일지라도 다양한 정보를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하지 않는다. 노인 세대가 ’꼰대‘라고 멸칭을 당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려는 자세가 없는 사람은 마음이 열려 있지 않은 사람이다. 즉, 스스로의 동굴 속에 갇혀 바깥에서 비추는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미개인인 것이다. 노인들 가운데 존경할 만한 분도 분명 있다. 내 주위에도 얼마 전 돌아가신 어르신은 퇴직한 교장 선생님이셨는데, 정치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일상에서는 인자하고 합리적이고 너그러운 분이셨다. 우리 뒷집 사시는 최교수님도 보수적이지만 마음이 열려 있고, 늘 대화하고,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실수한 것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비판을 받아들이는 멋진 분이시다. 나는 지역의 일을 하면서 노인들을 자주 만나는데, 내가 만나는 노인들은 보수적이기는 해도 젊은 사람과 말이 통하는, 생각이 유연한 분들이 많다. 그럼에도 소위 ’태극기 부대‘의 주류를 이루는 노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이 정치적 확신에서 오는 자발적 행동인지, 아니면 사회에서 고립되어 마땅한 탈출구를 찾을 수 없기에 유일하게 받아주는 곳이 태극기 부대여서 그런지 궁금하다. 노인이 된다는 건 단지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 들고, 늙어가고 결국 죽지만, 몸은 비록 늙어가도 정신은 늘 청년처럼 젊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노인이 되면 삶의 지혜가 생긴다고 하는데, 그것도 젊어서부터 그런 삶을 지향한 사람에게나 있을 법한 이야기일 뿐, 배우지 못하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노인은 젊었을 때 쓰레기였던 인간이 다만 늙은 쓰레기가 될 뿐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대부분 무지하고, 가난한 노인들은 정부가 보살피고 돌봐야 할 대상이다. 노인은 젊어서 열심히 살았고, 그들의 노동이 나라를 유지하고,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인이 벼슬은 아니다. 지하철도 무료, 노약자석도 지정, 거의 모든 공공 시설의 입장료도 무료로 노인을 우대하는 정책은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노인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것이다. 노인들은 이런 무료 정책을 좋아하겠지만, 올바른 생각을 하는 노인이라면, 자신이 누리는 그 무료의 혜택이 자식, 손자 세대의 등골을 빼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고, 자신의 특혜를 조금이라도 내려 놓고, 최소한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옳은 태도다. 정부는 노인에게 생활비도 안 되는 연금을 지급할 것이 아니라, 기본소득을 지원하면서, 노인들이 지하철 요금을 비롯해 지금까지 무료로 이용하던 시설에 대해 정당하게 할인된 비용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노인이 되어서 자존심과 자부심조차 내팽개치고 무조건 노인이니까 무료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세대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다. 노인 세대가 매우 고생을 많이 한 세대니까, 이제 그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누구도 노인 세대에게 고생을 떠맡기거나 떠넘기지 않았다. 노인들이 살아온 세상이 그랬던 것 뿐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지금 청년세대가 겪는 극심한 실업, 취업 문제에 대해 노인들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노인 세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면, 세대간 갈등은 더 격렬해질 것이고, 노인들이 존경받을 거라는 기대는 접는 것이 좋다. 오히려 지금 노인은 젊은 세대에게 ’꼰대‘라고 경멸당하고, 비아냥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태극기 부대‘의 노인들 아니던가. 노인이 앞장서서 양보하고, 스스로 공부하고, 젊은 세대의 모범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 취급을 당하는 것은 필연이다. 내가 속한 세대도 머지 않아 노인 세대에 편입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불과 십여년 남았다. 우리가 노인이 되면 전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임산부에게 쌍욕을 하거나, 태극기를 들고 나가서 패륜을 저지르는 그런 천박하고 양아치 같은 늙은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문화 생활을 좀 더 하고,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고, 지역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뒷집 최교수님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혼자서 어린이 놀이터에 나가 잡초를 뽑는 노인이 되고 싶다. 노인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용하게 일상의 평안함을 만들어 가는 사람인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소확행'이 불편한 까닭
    '소확행'이 불편한 까닭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8포 세대에게 미래의 거창한 계획은 불가능한 꿈이기에 차라리 그런 꿈조차 무모하니까 일찌감치 포기하고, 일상의 작고 사사로운 것들에서 행복을 찾자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조물주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건물주'가 초등학생의 꿈이 되어버린 세상은, 삶의 목표를 오로지 '자본의 확장'에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무한 질주의 레이스에 뛰어들게 만든다. 그 가운데 99.9%가 도태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뛰어든다. 전부를 얻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잃는 사회 구조가 원인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므로 자의 반, 타의 반-구조적 모순이 더 크다고 보는 나는 타의의 비중이 훨씬 높다고 보지만, 경쟁을 통해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이 구조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죽음의 레이스에 뛰어드는 것이다. '소확행'은 두 가지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모순을 외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착취 구조를 모른 채, 일찌감치 경쟁을 포기하고 자본의 노예로 근근히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경우가 하나이고, 그런 행위 자체가 자신들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자본주의 체제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둘은 하나의 행동에서 발발하는 중의적 결과로 드러나며,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자본의 착취구조에서 가장 아래 속하는 피착취계급이며, 자본이 쉽게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며, 자본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노예가 되는 어리석은 시민의 모습이다. '소확행'은 개인의 노력과 의지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 개인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사회적 계층구조가 너무 높아서 한 단계를 뛰어오르기에는 제약이 너무 많고, 도약이 불가능하며, 그런 도약과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차단하고 있다는 말이다. 누가 그러는 걸까. 누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걸까. 마치 '소확행'이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이상적인 삶'이라고 치장하고 미화하는 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말에 쉽게 속는다. 비판 없이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선민의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노예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어리석은 인간은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자본의 착취구조가 엄연한 상황에서,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분명하게 주장하지도 못하는 노예 상태를 무지해서 모르거나, 일찌감치 포기하고 자발적 노예가 된 사람들이 마치 발목에 감겨 있는 쇠사슬에 광을 내듯이 '소확행'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를 착취하고, 돈과 시간으로 옭아매고,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는 자본은 그러나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근사한 레스토랑과 명품 매장과 따끈한 신제품과 맛집과 거대한 쇼핑몰과 예쁜 인테리어와 기능성 화장품과 유명 메이커와 브랜드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소비하고픈 개인의 욕구와 욕망을 자본은 '돈'과 '시간'으로 통제한다. 원하는 것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이 없으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개인의 욕망과 욕구를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더라도, 더 이상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리게 된 피착취계급(90%의 노동자, 학생, 청년, 서민)은 자신들의 노력과 의지로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람쥐 체바퀴 돌아가듯 한 자리만 맴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본이 원하는 것은 무한 경쟁이지만, 이제는 그런 경쟁에서 스스로 도태되기를 선택한다. 이런 행동은 논리적 깨달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경쟁을 멈춘 사람들은 최소한의 조건으로 살아가야 하므로 생존이 어렵지만, 무한 경쟁을 하다 죽으나, 가난하되 마음 편하게 살다 죽으나 결국 마찬가지 결과에 이른다는 것을 아는 순간,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다. 이것은 자본에게 위기의 순간이다. '소확행'은 마치 새로운 트렌드를 소비하는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포장되고 있지만,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청년 세대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자포자기 삶의 형식이다. 물질소비의 수준이 절대 비교에서 과거(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 온 청년 세대는 자본의 억압과 통제에 맞서 싸울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더욱 거세게 자본과 맞붙어 깨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노동생산성이 증가하고, 빈익빈 부익부의 균열이 커지면서 상대적 빈부의 체감은 과거에 비해 두드러지지만, 절대 빈곤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근근히 먹고 살 수는 있으나, 자신들이 지하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빠져나올 수 없는 삶, 깊은 우물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미로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는 삶을 떠올리면, 죽음 이외의 다른 삶은 오로지 고통 뿐이다.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생각하는 것을 멈춰야 하고, 현실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찾아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소확행'이다.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진정으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려면, 그 사회는 무엇이든 꿈꾸고 도전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지금의 현실은 자본의 억압과 착취의 그늘에서 시들어가는 청년 세대의 자학적 반어법이 '소확행'이라는 걸로 이해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숙주나물 공장에서의 사흘
    숙주나물 공장에서의 사흘 1 추석을 앞두고 형제같이 지내는 동무의 부탁으로 숙주나물 공장에서 일했다. 명절(추석, 설) 앞이면 늘 많은 물량을 내보내야 하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하다고 한다. 단 사흘만 일하기 때문에 일손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 점도 있을 듯 하다. 첫 날, 아침에 두 동무를 만나 개군면에 있는 순대국집에서 식사를 하고, 양평에서 약 30분 정도 달려 이천의 어느 한적한 마을 외곽에 자리잡은 숙주나물 공장에 도착했다. 판넬로 만든, 근처의 여느 공장들과 똑같이 생긴 푸른지붕의 공장은 그리 크지 않았고, 콘크리트가 깔린 마당은 깨끗했다. 숙주나물 공장의 사장이 동무의 친구였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장화로 갈아 신고, 장갑을 낀 다음-작업복을 갈아 입거나 하지 않고-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우리가 처음 한 일은, 박스로 포장된 숙주나물을 공장 바깥에 쌓았다가 트럭에 옮겨 싣는 일이었고, 이 일이 끝자자 공장 안으로 들어가 각자 주어진 일을 했는데, 나는 첫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거의 대부분 숙주나물을 큰 통에 싣는 작업을 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숙주나물 공장의 구조를 먼저 살펴보면, 공장 내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가장 넓게 자리를 차지한 곳은 숙주나물이 자라는 공간이다. 가운데 작업 공간의 양쪽이 모두 숙주나물이 자라는 창고 같은 공간인데, 왼쪽에 두 곳, 오른쪽에 한 곳이 있고, 한 곳의 넓이는 약 50평 정도 되어 보였다. 설날 전에는 모든 공간에서 숙주가 자란다고 하는데, 추석 때는 두 곳에서만 숙주가 자라고 있었고, 예전보다 물량이 줄었다고 한다. 숙주는 녹두로 만든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녹두는 거의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원산지 표기가 되어 있다. 녹두를 먼저 살균 소독한 다음 배양하는데, 바닥에 놓인 녹두가 콩나물처럼 자라기 시작하면, 계속 위로 솟아올라 수 십 층의 두께로 쌓인다고 한다. 숙주가 자라는 공간은 어둡고, 사람 머리 위의 높이에서 자동으로 물을 뿌리는 장치가 되어 있어, 계속 물을 뿌려주기 때문에 숙주는 밤낮으로 자라게 된다. 이렇게 자란 숙주나물을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 밖으로 가져오면, 스테인레스로 만든 수조에 넣는다. 숙주나물을 가공하는 기계 설비는 매우 간단하게 되어 있다. 이 공장에서는 ㄱ자 모양으로 꺾인 기계 설비였는데, 이와 비슷한 콩나물 공장에 가보니, 더 간단한 일자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숙주나물을 물 속에 담가 녹두 껍질을 제거하는데, 이때 계속 많은 물이 수조로 들어간다. 즉 지하수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수조에서 숙주를 풀어헤치면 녹두 껍질이 먼저 가라앉고, 풀어진 녹두는 두 개의 철망을 지나면서 이물질을 털어낸다. 그리고 물기를 털어내는 바이브레이터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일정한 중량이 되면 비닐 봉투에 담기는데, 나는 바로 이곳, 비닐 봉투에 담기는 곳 옆에 서서 숙주 나물이 담긴 비닐 봉투를 다시 옆의 큰 통에 담아 놓는 일을 했다. 중량대로 담긴 숙주나물 비닐 봉투는 박스 포장을 하는 곳으로 이동하고, 박스에 담긴 다음 곧바로 납품을 하게 된다. 숙주나물을 비닐 봉투에 담는 작업은 상품을 '찍어 내는' 과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 숙주 나물이 농산물(1차 상품)이긴 하지만, 공장에서 생산되는 순간, 더 이상 '1차 상품으로서의 농산물'이 아닌, 대량 생산되는 '2차 상품'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숙주 나물을 생산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은 숙주 나물을 비닐 봉투에 담는 곳이다. 이곳은 매일 아침마다 하루의 물량표가 붙어 있고, 그 물량에 따라 일정한 용량-1, 2, 3.5, 4, 5, 6, 8, 10kg-을 비닐 봉투에 담는 작업이다. 용량이 작은 것은 약 3초마다 하나씩 상품이 나오고, 용량이 커도 15초면 하나의 상품이 나온다. 즉,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 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숙주 나물이 봉투에 담겨 나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루 약 9시간 정도 꾸준히 나온다. 모든 과정은 지극히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어서 머리를 쓸 이유도, 필요도 없다. 1kg짜리 숙주 나물 100개, 3.5kg짜리 숙주 나물 50개, 10kg짜리 숙주 나물 80개... 무게는 자주 바뀌고, 그것을 세팅하고 숙주 나물을 비닐 봉투에 담는 작업을 체구가 작은 베트남 여성 노동자가 맡아 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생산된 다양한 비닐봉투를 커다란 통에 담는 일을 했는데, 나오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통에 담는 것도 몸을 빠르게 놀려야 했다. 통이 가득 차면 박스에 담는 곳에서 통을 가져간다. 비닐 봉투를 박스에 담는 작업은 베트남 남성 노동자가 맡아서 했는데, 박스를 접는 손이 매우 빨랐다. 박스 작업은 밴딩 기계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박스를 접고 비닐 봉투를 넣은 다음 곧바로 밴딩 기계에서 밴딩을 한 다음 수동 컨베어벨트 위로 밀어 놓으면 박스를 쌓는 사람들이 출입구 쪽에 박스를 쌓아두게 된다. 박스 작업은 속도가 매우 빨라서, 봉투에 넣는 작업이 박스 작업을 따라가지 못한다. 작업 과정에서 조금씩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에 개입해 이러저러한 일들을 끊임없이 한다. 공장 청소도 매우 중요한데, 식품을 다루는 공장이라서 깨끗하긴 하지만, 일을 하다보면 숙주 나물의 잔해와 박스, 포장끈 등 지저분한 것들이 생긴다. 작업하는 중간 중간, 이런 쓰레기들을 빠르게 처리하면서 공장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빠질 수 없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일이 힘들다기 보다는 무엇보다 단순 반복의 지루함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집에 있을 때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서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였는데, 공장에서 일을 하니, 한 시간, 아니 십 분이 지나가는 것도 아주 길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이 공장에서는 일을 늦게 시작하고 늦게 끝냈다. 아침 9시가 넘어서야 일을 시작하고, 11시 조금 지나면 간식 시간을 주었다. 빵, 토스트, 음료수, 과일 등이 매일 조금씩 바뀌면서 나왔고, 간식과 매 끼니 식사는 사장의 부인이 직접 만들어 주었다. 간식을 먹고 나서 점심은 오후 2시에 먹었다. 일의 성격을 보면, 이런 방식의 시간 배치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너무 단순하고 반복적이어서 노동자들이 몹시 지루하게 시간을 느끼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도 했을 것이다. 3 이주 노동자. 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모두 베트남 노동자들이다. 모두 네 명. 한국 노동자는 한 명. 현장에서 고정으로 일하는 사람은 이렇게 다섯 명이고, 그외 시간에 관계 없이 나타나서 일하는 사람이 두어 명 있었고, 상품(박스)을 물류 회사로 실어가는 트럭 기사가 있다. 즉, 생산을 맡은 노동자는 베트남에서 온 젊은 노동자들이 전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들은 이곳 공장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생활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쉬는 날이 있다고 하는데, 명절처럼 바쁜 날이 아니면 통상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 또는 6시까지 노동한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말을 간간이 들어보면, 이들은 회사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으로 약 12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를 받는 듯 하다. 베트남 노동자의 신분은 '산업연수생'이라는 공식 명칭이 있고, 정부에서 정해 준 월급의 기준이 있는 듯 하다. 월급 120만원이라면, 한국에서 최저 생활을 유지하기에도 급급하겠지만, 먹여주고, 재워주는 비용을 감안하면, 이들이 받는 임금 수준이 터무니 없이 낮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절대 임금 기준으로 보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영세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보다는 낮게 유지할 수 있으므로, '산업연수생'을 고용하는 것은 분명 자본가에게 유리하다. 이주 노동자나 외국인 '산업연수생'을 고용하도록 만드는 것은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려는 영세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가)의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노동시장에 뛰어 드는 노동자들이 3D 직장을 싫어한다는 언론의 보도나 방송이 자주 나오는데, 노동시장을 왜곡하는 것은 정작 자본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노동자라 하더라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 임금 120만원이면 일하려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생각인데, 내가 너무 순진한 걸까? 저임금 노동시장에 뛰어드는 한국 노동자가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최저임금이 150만원이 안 되는 상황에서 하루 세 끼의 식사와 잠자리가 무상으로 제공된다면, 그 노동시장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본'은 국적이 없다. 따라서 '민족'이나 '인종'과 같은 경계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노동자'는 '인종'과 '언어'에 의해 그 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노동자는 높은 임금을 쫓아 국경을 넘는다. 멕시코 노동자가 미국으로 이동하고, 아시아의 노동자들이 한국과 일본 등으로 이주하는 것이 그렇다. 이주 노동자의 활용은,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의 경쟁을 부추겨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고, 노동시장을 통제하는 효과가 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경쟁자가 늘어나서 임금이 낮아지고 노동의 강도가 높아지는 불안한 상황이 조성된다. 4 영세 자본가. 자본가 역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국적'과 '인종'에 관계 없이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면, 자본가는 자본가들끼리 이윤을 놓고 경쟁한다. 특히 소규모 영세 자본가의 경우, 그들은 안팎으로 압박에 시달린다.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의 노동으로 상품을 생산하도록 모든 기반 시설을 마련해야 하며, 임금, 복지, 사고 등 다양한 변수에 대비해야 한다. 밖으로는 같은 영세 자본가와 경쟁해 시장을 확보, 확대, 유지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고, 최대의 이윤을 위한 적정한 상품 가격과 품질을 유지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숙주 나물 공장의 예를 들면, 공장을 마련하고, 생산 설비를 갖추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즉 누구나 '영세 자본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상품을 판매할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고, 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 영세 자본가에게 '안정'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규모가 크던 작던, 자본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사업을 한다. 자본주의가 '이윤'을 토대로, '경쟁'을 매개로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며, '자본가'에게도 적용되는 시스템이다. 물론, 경쟁에서 살아남은 1%의 자본가는 이런 시스템이 마음에 들 것이고, 만족스러울 것이다. 결국 우리는 1%의 '자본가'들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차 농산물인 숙주 나물을 한 명의 자본가가 생산하는 것이 몹시 낯설고 이상하게 보인다. 이런 농산물이라면 오히려 시골의 마을에서 '협동조합'을 만들어 생산하는 것이 훨씬 사회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텐데, 자본의 힘이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많은 부분을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생산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음에도, '영세 자본가'가 더 자주, 더 많이 출현하는 것은 '자본'이 주는 매력이 위험(리스크)을 뛰어 넘기 때문이다. 이 공장의 사장도, 자신이 공장을 운영하면서 얻는 이익이 위험보다 크기 때문에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공장을 운영하는 것일테다. 하지만 외부 환경의 변화-정부의 정책, 시장의 변동, 거래처의 상황 등-에 의해 영세 자본가는 한 순간에 실업자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럼에도 창업을 하는 영세 자본가는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위험을 극복하고 얻는 열매가 더 크고 달콤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5 공장에서 사흘 노동을 하고 나서, 근육통과 두통으로 조금 고생했다. 덕분에 몸무게도 조금 빠졌고, 사용하지 않던 근육들을 많이 사용해서 저절로 운동을 했다. 하루 9시간을 꼬박 서서 일하고, 단순 반복 작업으로 지루함에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가장 끔찍하다. 사람은 기계의 부품이 아니다. 마치 기계 부품처럼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인간의 역할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하루 16시간 노동부터 아동노동-심지어 4살짜리까지-과 위험한 노동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인간의 노동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노동'이 인간의 존재를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된다. 단순 반복의 지루한 노동일수록 노동 시간을 짧게 해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이 하는 노동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하며, 인간의 삶에 기여해야 하며, 인간의 존재를 빛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노동'의 의미이자 가치인 것을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나는 줄곧 주4일 노동과 하루 6시간 노동을 주장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가능하다. 주5일 노동이 현실인 사회에서 이런 논의가 활발하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지금은 자본의 위세에 눌려 노동자가 위축되어 있는 상황임에 틀림 없지만,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주4일 노동, 하루 6시간 노동을 주장해야 한다. '노동'의 주체가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똑같은 노동 시간을 일했지만, 한국 사람인 나는, 베트남 노동자보다 약 2배의 임금을 받았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나를 들여다보면
    나를 들여다보면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내 성격을 두고 아내가 걱정 담긴 얼굴을 할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런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한다. 거절하지 못하는 대상은 주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다. 즉,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관계에서 나는 주로 상대방에게 실망 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분석한다. 그리고 그런 나의 심리적 태도는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과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챌 수 있다. 그런 태도는 자존감이 낮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나는 원인을 찾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려서 우리집에는 세 마리의 소가 살고 있었다. 1913년의 아버지, 1925년의 어머니, 1961년의 나까지 모두 세 명이었다. 실향민 아버지는 전처와 성장한 자식이 셋이나 있었고, 남편과 헤어지면서 두 딸까지 전남편에게 떠맡긴 어머니는 이웃의 소개로 나의 아버지를 만나 살기 시작했고 나와 동생을 낳았다. 가난했던 늙은 부부는 경제적 어려움과 맞지 않는 성격과 거친 삶을 살아오면서 걍퍅해진 성정으로 서로를 닥달하고, 비난하고, 악다구니를 해댔다. 가난은 그 자체로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도시빈민의 문제는 빈곤으로 인한 고통 뿐 아니라 정서적 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어려서 똑같이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어도 시골이라는 환경이 주는 정서적 풍요로움이 내면에 자리 잡고 있어, 도시 생활을 하더라도 시골의 정서가 그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고,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까지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것에 늘 절망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서울이 내 고향일 수는 없었다. 내가 살던 마포의 철둑 아래 무허가 판잣집은 물에 잠긴 다음 헐렸다. 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다. 이런 박탈감은 집을 마련하기 전까지 30년 넘게 이어졌다. 도시빈민으로 자란 것은 선택의 여지가 매우 좁은 삶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재명 경기도지사나 조영학 형처럼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뛰어난 인물이 되는 분들도 없지 않지만, 그런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그래서, 나의 현재를 변명하거나 합리화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내가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만 자랐다면, 정상적으로 학교 교육을 마쳤다면 지금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지금의 나를 후회하거나, 과거를 한탄하는 것은 아니다. 과정이야 어떻든, 지금 내가 바라보는 것은,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우울과 연민이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왜곡된 사랑을 받으며 자란 경우, 아이는 심리적, 정서적 왜곡과 결핍이 발생한다. 그런 심리상태는 자신보다 어른에게 잘 보이고 싶은 행동으로 나타나고, 열등감의 원인이 된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아버지에게 관심을 얻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으로 이상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마츠코는 성인이 되어서도 자존감, 독립적 사고와 의지가 부족해서 결국 비참한 삶을 살지만, 이런 극단적 사례가 아니어도 주변에서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성인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비교적 독립적으로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데, 우리의 삶이라는 게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제외하면 껍데기만 남는 것이니, 내게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하다. 빈곤, 소년노동자, 무학이라는 세 가지의 존재 조건은 나의 내면에 뿌리 깊은 열등감을 생산했다.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데 거의 3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대부분의 도움은 아내에게서 받았다. 아내는 연인이자, 친구이고, 같은 길을 가는 동지이자 스승이다.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나는 지금도 아내에게 빚지고 있다. 단호하지 못한 내 성격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가족에게는 데면데면하면서 남들에게는 호의적인 나의 모순적 태도 때문에 가족이 실망하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당연히 가족을 가장 사랑하고, 마음 쓰지만,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나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청년기에 읽은 책 가운데 '케네디가의 가정교육'인가 하는 책에서, 중산층 이상의, 좋은 가정교육을 받은 아이는 남의 집에 가서 음식을 대접받을 때, '싫다'라거나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었다. 즉, 상대방의 제안에 부정적인 답변을 하는 사람은 가정교육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설명이었다. 이런 내용을 읽고나서 내 생각과 행동이 바뀌었는데, 그 뒤로는 어디를 가서, 누군가에게 대접받을 일이 있으면 '네,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등으로 인사를 했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음을 그때 알았다.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전인격이며, 살아온 환경과 그 사람을 둘러싼 부모, 형제, 자매, 친척, 이웃,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생각하면, 나이 들수록 언행을 스스로 되돌아 살펴야 함을 알 수 있다. 나는 내 인격의 그릇이 작다는 걸 안다. 종지만큼인지, 대접만큼인지 모르지만, 우물 속에서도 파란 하늘은 보인다. 그 보이는 만큼의 하늘이 내게는 세상의 전부겠지만, 더 이상 욕심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것, 오직 그 정도 아닐까.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프레임을 주도하라
    프레임을 주도하라 우리의 일상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야는 주로 정치 쪽이다. 사람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정치가들의 말에 대해 비판, 비난하면서도 정치가 우리의 삶을 규정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직간접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온라인이 발달하면서, 대의정치가 이제는 거의 직접정치로 진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온라인으로 정책을 곧바로 발표하고, 공무원과 회의하는 것도 생중계로 내보낸다. 이것은 경기도민에 대한 직접정치에 다름아니다. 미국대통령 트럼프도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정책을 발표한다. 이제는 정치가 소수의 정치가들이 주무르는 전유물이 아님은 분명하다. 물론 시민이 국회의원처럼 입법을 할 수는 없으니 한계는 있지만, 적어도 온라인에서 특정 정당, 정치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고, 개인의 발언은 온라인에서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합해지고 커지게 된다. 한국정치의 수준은 매우 미개한데, 그 미개함의 원인은 한국현대사의 비극과 맞물려 있다. 해방 이후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친일, 매국노 집단이 권력을 잡은 이후, 군부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가 한국사회의 현대화를 억압했고, 김영삼, 김대중으로 이어지는 부르주아 정당 역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군부독재 집단은 정치를 통해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하고, 국가를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국민의 수준이 낮아서 독재세력에게 표를 던지고, 그들의 탐욕을 눈감아 준 것도 한심한 노릇이지만, 지연, 학연, 혈연과 같은 비개인적이고, 비민주적인 인식의 틀이 지금도 바뀌지 않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개인이나 집단에게는 모든 현상을 '이익'과 '손해'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므로 갈등의 요소가 없다. 독재 집단에서 이어온 정당과 정치인이 그렇기 때문에 늘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진보'라고 생각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이익'이나 '손해'라는 즉물적 관점을 윤리적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수구 집단의 말과 행동은 늘 치졸하고, 탐욕적이며, 즉물적이고,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해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촛불에 반대한 세력, 집단은 우리 사회의 진보와 미래를 가로막는 적폐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옳고, 역사적으로 정당한 판단이다. 그렇기에 수구 반동 집단이나 개인이 반동적, 패륜적 언행을 할 때는 그것을 참지 않고 가차없이 비판, 비난한다. 이때, 수구 반동 집단(개인)과 싸우는 진보 정당이나 정치인, 촛불 시민이 빠지기 쉬운 것이 바로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다. 수구 반동 집단(개인)의 언행은 당연히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인식이나 가치관, 세계관이 퇴행적이고, 반동이며, 문재인 정부를 반대하고, 촛불 시민이 이룩한 진보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구 반동 집단(개인)이 말하는 것을 반박하거나 비판, 비난하기 위해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그들의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많은 경우, 수구 반동 집단(개인)의 언행은 반박하거나 비판할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다. 예를 들어 자유당 홍준표나 김성태, 김무성 같은 대가리급의 말이 언론을 통해 거론되면,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다. 그들의 말은 논리가 없기 때문에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것을 비판하려는 시도는 쓸데없는 힘만 뺄 뿐이다. 오히려 야비하고 악의적인 수구 반동 집단의 언행은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이 좋다. 비판이든 비난이든 상대방의 언어를 다시 말하는 것은 그들의 프레임에 갇히는 결과는 가져온다. 김성태가 출산정려 정책으로 1억원을 준다고 말할 때, 그것은 두 가지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자유당이 출산장려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선심성 발언을 통해 정당 홍보와 함께 지지율을 올리려는 것이고, 여당에 대해 정책의 우월성을 드러내 수구언론에게 스피커를 만들어 주려는 의도다. 둘째는 정부가 그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정부를 공격하는 빌미를 만드는 것이고, 만에 하나, 정부가 그 정책을 받아들이면 재정적으로 파산하게 되므로 정부의 무능과 정책 실패를 비난하기 위한 계략이 숨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성태가 주장하는 내용을 비판, 비난하려면 김성태의 주장이 황당하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김성태의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악랄하고 야비한 계략에 대해 강력한 비난을 해야 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언어나 주장이 아니라, 우리의 주장과 언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적을 이기려면 적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우아함은 부르주아의 전유물인가
    우아함은 부르주아의 전유물인가 이 문장이 뜬금없이 머리에서 떠올랐다. '우아하다'와 '부르주아'가 동시에 떠올랐다는 건, 내 잠재의식 속에 부르주아의 세계는 우아하다고 입력되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봉건사회를 뒤엎고 자본주의 사회를 열어재낀 시대의 선구자였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주인이자 지배계급이다. 부르주아 내부에 자본가가 있으며, 자본가는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에 속한다. 봉건 왕조를 폐기할 때의 부르주아는 진보적 집단이었으나, 자신이 사회의 주인, 지배계급으로 등극한 이후로는 급격히 보수화되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이 되었다. 부르주아의 '우아함'은 경제적 풍요로움에서 나온다.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경제는 노동자를 착취해서 잉여 생산물을 이윤으로 만드는 구조적 기술에서 나온다. 즉, 부르주아의 '우아함'은 노동자 계급의 피로 그린 명작인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의 '우아함'이 진정한 '우아함'인가에 대해 깊은 회의를 해야 한다. 중세에도 피렌체의 귀족 메디치 가문처럼, 금융과 제조업으로 돈을 번 귀족이 문화, 예술 분야에 집중 투자해 중세에서 르네상스의 번영을 일으킨 역할을 했던 경우도 있지만, 계급의 시각에서 보면 어느 시대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을 착취해서 부와 권력을 누렸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귀족들이 만든 문화, 예술도 마찬가지다. 문화, 예술을 발전시킨 것이 노예와 농노를 착취해서 그 잉여의 부로 만든 것임을 알게 되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노예, 농노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를 착취한 부르주아가 시대를 앞서가는 문화와 예술을 만드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몹시 회의적이다. 과거의 계급 시대에 노예, 농노를 지배했던 귀족의 문화가 기록되고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피지배계급의 문화와 예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절대 다수였던 피지배계급의 문화와 예술이 더 널리, 더 오래 전통적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노동자 계급, 민중의 문화와 예술의 생명력이 훨씬 오래 이어져 오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유럽에서 중세에 주로 귀족을 위해 만들었던 음악을 현대에서는 '클래식'이라는 장르로 듣고 있다. 어느 지방이든 그 지방에 살고 있는 민중에게는 일과 놀이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와 음악과 춤이 있다. 귀족을 위해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했던 작곡가, 연주가들 역시 그들의 출신은 노동자, 농민, 장인의 집안이었기에 음악적 영감은 민중의 음악에서 시작되었다. 귀족과 부르주아의 우아함이란, 물질 문명의 발전과 뗄 수 없다. 지배자들은 권력과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화려한 의상, 장신구, 거대한 건물, 복잡하고 까다로운 의례 등을 만들었다. 솜씨가 좋은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고, 조각상을 만들며, 권력자 자신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 시를 지어 낭송하도록 했다. 이런 행위의 근간에는 권력자와 왕족, 귀족, 부르주아들이 평민, 서민, 농노, 노예 즉 피지배계급과 차별화 하고, 뚜렷하게 구분 짓기 위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이런 차별화를 통해 자신들이 피지배계급의 야만성에서 벗어나 자신들은 우아하고 고귀하다는 자기만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중세까지는 귀족, 지배계급은 적어도 자기가 속한 집단, 지배계급의 우월함과 차별화를 위해 문화, 예술에 투자하고 고급지고 세련한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그것이 피지배계급을 착취한 결과였다 해도.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와 부르주아는 지배계급인 자신들과 피지배계급인 노동계급과의 차별성, 차이,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문화, 예술적인 투자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자본(가)은 초기 자본의 축적 시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의 확대에 집중했다. 그 결과는 어린이 노동(심지어 4살짜리도 탄광에서 일했다), 여성노동은 물론 하루 16시간-18시간 노동이 일상이었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영국에서 18세기, 19세기 초반의 노동자 평균수명은 30세도 안 되었다는 사실을 통계가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는 자본가의 이윤을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미국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달러일 때, 100달러짜리 지폐에 담배를 말아 피웠다. 겨우 한두 명의 자본가가 자신이 번 돈으로 미술품과 예술작품을 구입해 미술관, 박물관을 만들거나 정부에 기증해 미술관, 박물관을 설립하도록 도운 경우가 있다. 그것은 중세의 귀족들이 예술가들에게 직접 창작을 하도록 지원한 것과는 또 다른 경우이며, 그리 훌륭한 방식도 아니었다. '우아함'이 단지 생활 방식, 양식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금식기, 은식기에 노동자나 민중은 평생 한번 구경도 못한 식재료로 음식을 먹고, 최고급 명품으로 몸을 휘감고, 넓고 화려한 집에서 살고, 수십억 원짜리 자동차를 타고, 전용 제트비행기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그들이 '우아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어떤 자본가는 가죽장갑을 끼고, 야구방망이로 돈없고 힘없는 노동자를 구타하고, 어떤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끊임없이 욕설을 하며, 괴성을 지르고, 컵에 담긴 물을 끼얹기도 한다. 자본가나 부르주아의 인격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 즉, 돈과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그들의 인격도 고매하다는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아니, 평균의 확률에 따라, 인간의 일정 비율로 사악한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본가에게도 인간의 평균 비율에 맞는 사악한 인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자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돈과 권력을 갖게 되면, 그 사회적 힘을 휘두르게 된다. 자본과 권력은 개인에게 고유한 것이 결코 아님에도, 마치 돈과 권력과 자신(개인)을 동일하게 여기는 착각을 한다. 그것이 모든 권력적 비극의 근원이다. '우아함'은 오히려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노동자와 민중에게서 찾아보기 쉽다. 그들은 대부분 천박하고, 이기적으로 생각하며, 야비하고, 폭력적인 인간들이 많다. 그럼에도 민중의 문화와 예술이 오랜 시간을 이어오고, 민중의 예술이 세련하게 다듬어지며 오늘날 전통문화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보면, 개개인의 천박함과 야비함, 폭력성보다 집단의 지성이 큰 줄기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민족의 역사, 문화, 예술이든 그것을 만들고, 이어오는 것은 지배계급이 아니라 피지배계급, 노동자, 민중이었다. 음악, 춤, 노래, 그림, 공예, 도자기, 목공, 건축 등 모든 분야를 살펴보면, 그것을 있게 한 것은 결코 귀족이나 왕족이나 지배계급이 아니었다. 우리의 경우만 봐도 고려, 신라, 백제, 조선을 이어오며 만들고 다듬어 이어지는 전통은 매우 우아하고 단아하며 품격이 있다. '우아함'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 귀족, 부르주아, 자본가들은 피지배계급을 착취해 빼앗은 잉여물로 자신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을지 몰라도, 면면히 이어오는 정신의 전통을 만들지는 못했다. 반면 민중은 지배계급에게 무수히 빼앗기면서도 자신들의 정신을 이어오는 문화, 예술의 전통을 만들고, 다듬으며 발전시켰다. 진정한 우아함이란 이런 것을 말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어리석은 사람
    어리석은 사람 어리석음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지만, 나는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배움이 짧고, 세상의 이치를 잘 모르고, 알고 있는 것 조차도 올바로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리석음'이 지식의 천박함, 가치관과 세계관의 부재, 자신의 존재에 관한 인식의 부조화, 알고 있는 객관적 지식, 사실을 실행하지 못하는(않는) 의지 등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데, 어리석음은 기존의 학교 교육이나 지식의 많고 적음과 직접 관련은 없어 보인다. 어리석다의 반대 개념은 슬기롭다, 지혜롭다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 단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핵심은 개인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생각과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즉, 슬기롭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공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갖게 되고, 주위에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과 문제에 관해 그 현상이나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은 여러 유형이 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대개 이렇다.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리석다. 일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이 많다.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무지와 어리석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무지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은 대부분 무지하다. 지식이 많다고 해서 어리석지 않은 것은 아니다. 머리에 든 게 많은 먹물이라도,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지향하고 있는 경우, 대개는 어리석음으로 드러난다. 지식인이 어리석은 것은 무지로 인한 것이 아닌, 탐욕과 이기심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수의 지식인은 방향을 잘못 잡아서 자신이 가는 길이 어리석음의 길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다. 어리석은 자들이 모두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만,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이다. 흉악범을 포함한 범죄자들은 저마다 동기가 다른 범죄를 저지르지만, 어리석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해도, 어리석은 자들은 슬기로운 사람들과 다른 모습-비상식, 비도덕, 비윤리적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회에서 도드라진다. 어리석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으며,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교활하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이용당한다. 물론 슬기로운 사람은 교활하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속지 않는다. 슬기로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가 마치 낙인을 찍은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슬기로운 사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교활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돈을 뜯어낸다. 많은 경우, 어리석거나 슬기로운 것과 관련 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사람을 지배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사실을 모른다.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이 돈에 의해 노예처럼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바꾸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교활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런 매카니즘을 이용해 돈과 권력을 추구한다. 그것은 철저히 자신과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는 혈연, 지연, 학연만을 위해 추구하며, 돈과 권력을 향한 과정에서 방해되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한다. 슬기로운, 지혜로운 사람이 모두 선량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모두 악한은 아니다. 선량한 마음을 가진 어리석은 사람이 있고, 슬기로운 사람 가운데도 악하거나 욕망에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 있다. 맹인이 어느 날, 망막 세포가 살아나 눈을 뜨고 사물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귀가 들리지 않던 사람이 수술을 받고 보청기의 도움으로 세상의 소리가 들리게 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배움과 경험을 통해 어리석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기회와 시간은 있지만,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드물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으로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신, 종교와 같은 교활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만든 덫에 쉽게 걸려든다. 세상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많고, 비이성적인 판단과 행동이 집단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역사는 느리게 나아지거나 빠르게 후퇴하기도 한다. 다행히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의 슬기로운 사람들-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세상은 그나마 든든한 기둥을 받치고 있지만, 그외의 분야에서는 교활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돈과 권력을 목적으로 날뛰고 있어 슬기로운 사람들을 절망케 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2
  • 평범한 일상
    평범한 일상 오늘 전기 공사를 했다. 며칠 전, 거실과 서재의 천정에 크랙이 있던 곳에서 물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 방수공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콘크리트를 뚫던 드릴이 전기선을 건드린 것을 나중에 발견했다. 다행히 2층 전등 차단기만 떨어지고 있어서 조금 불편해도 며칠 참으며 지냈다. 어딘가에서 합선으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전기공사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돈보다는 귀찮아서 하기 싫은 일이다. 양평에 있는 전기업체 여러 곳에 전화를 했지만 모두 올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지역에서 알고 지내는 건축업자이자 같은 주민자치위원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자기가 아는 전기업자를 소개해 주겠노라고 했다. 처음 통화할 때 목소리가 낯익다 했더니 오전에 집에 도착한 사람은 아들의 초등학교 동창의 아버지였다. 당시 분교였던 학교에 입학생은 여섯 명이었고, 세 명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전교생이 스물여섯 명이던 학교에 여섯 명의 신입생은 대단한 환영을 받았고, 학교는 물론 마을 주민 모두가 기뻐했다. 쉬울 것 같던 전기공사는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거실에서 합선이 있을 거라고 예상해서 세 군데나 천정을 뚫었지만 합선이 일어나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고, 결국 서재 입구의 등을 떼어내고 천정을 뚫어 확인하고서야 서재 쪽에서 합선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문제가 있는 곳을 발견하고 서재를 제외한 2층 전체의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공사는 여기서 일단 마무리하고, 둘이 가까운 식당으로 점심을 먹고 와서 집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석고보드로 된 천정을 뚫으면서 바닥은 석고보드 가루와 부스러기로 온통 지저분했다. 빗자루로 쓸어담고, 물걸레 청소기로 바닥을 닦은 다음,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으러 갔다. 샤워를 하면서 '평범한 일상'에 관해 생각했다. '평범한 일상'이란 무얼 말하는 걸까. 무사, 무탈,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평범한 일상'일까. 곰곰 생각하니 '평범한' 일상이란 처음부터 없었다. 누군가 삶의 과정을 '평범'과 '비평범'으로 구분한 것은 삶을 깊이 있게 천착하지 못한 부박한 인식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시간의 비늘들은 매순간 반짝거리기 마련이다. 그것이 때로는 절망, 슬픔, 우울, 고통으로 반짝거릴 때가 있고, 기쁨, 행복, 즐거움으로 반짝거릴 때가 있을 뿐이다. 존 덴버의 노래도 있듯이 '어떤 날은 돌덩이일 때도, 어떤 날은 다이아몬드일 때'도 있는 것이다. '일상'은 나날이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익숙한 일들의 연속을 말하는 거지만, 사람들은 매일 다르게 살아간다. 다를 게 없을 것처럼 생각하는 일상도 매일이 다른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이 늘 새롭기 때문이다. 동쪽에서 뜨는 해가 늘 같은 태양이어도, 아침에 뜨는 해가 늘 새롭듯이, 우리의 삶도 매일이 같은 것처럼 살아가지만, 사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힘겨운 노동으로 지친 노동자의 하루는 극적인 변화가 없는 한 또 다시 힘든 노동의 하루가 되겠지만, 그 노동의 시간 속에서 노동자는 웃고, 울고,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우울하고, 불행하고, 절망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살아간다. 이것은 재벌이라해도 특별히 다르지 않다. 누구의 삶이든 사회적으로 놓인 처지와 계급의 위치와 경제적 부의 많고 적음이 다를 뿐, 희노애락을 느끼는 순간은 모두에게 있다. 자본주의 체제처럼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가 인간의 행, 불행을 단정짓는 핵심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문제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수의 노동자와 빈민이 체제의 근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의 일상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유는, 개인의 삶은 집단과 체제, 구조 속에서 존재가 많은 부분 강제되고,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자식은 자본가가 되고, 노동자의 자식은 노동자가 된다는 현실은, 개인이 무언가 되고자 하는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차단한다. 인류는 집단 생활을 시작하고 정착하면서부터, 정확히는 농업, 목축업 등을 통해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면서부터 계급 사회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적 한계 안에서 일상을 살아가지만,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은 평범하지 않다. 지배 권력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피지배 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을 만들고, 폭력기구(군대, 경찰 등)를 운용하며, 언론을 통해 계급의 이익을 세뇌시킨다. 피지배 계급은 지배 계급의 그런 폭력에 맞서 자신들의 자유와 평등과 권리를 확대하기 위해 투쟁한다. 이 자체로도 이미 '평범한 일상'이란 존재할 수 없는데, 이것이 '개인'의 단위로 내려가면 투사에서 반동까지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삶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경제적 부의 축적만을 두고 만족과 불만족을 표현한다면 재벌은 모두 만족해야 하겠지만, 그들에게도 불만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삶에 충분히 만족한다는 사람은 경제적 부, 경력, 경험, 사회적 지위, 자신의 능력이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정도 등의 다양한 요소들의 집합이 일정 수준에 이른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자기의 삶에 만족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거나 자아도취에 빠졌거나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다. 우리 일상의 비평범성은 우리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구조 속에 놓은 한계가 뚜렷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다람쥐 체바퀴 돌듯 사는 사람도 있고, 날마다 조금씩 다른, 발전적인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우리의 삶은 한계가 있고, 어느 순간 삶은 중단되고, 소멸되겠지만 살아서 활동하는 동안 평범하지 않은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19금 심청전
    19금 심청전 아버지라고 믿은 내가 미친년이지. 어려서 동냥젖으로 나를 키웠다고, 맹인으로 살면서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어린 딸자식을 애지중지 키웠다고,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아버지라는 인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잔소리에 자기 자랑을 늘어 놓으면서 부모 은혜를 갚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고, 귀에 굳은살이 앉도록 떠드는 꼴을 그때는 몰랐지. 어떤 사기꾼 새끼에게 속아서 쌀 삼백석을 살 만큼의 돈을 뜯기고는 갚을 길이 없으니, 뱃놈들에게 나를 팔아 넘긴 아버지라는 인간을 대체 어째야 한단 말이냐. 사정 모르는 이웃들은 아버지 눈 뜨게 한다고 공양미 삼백석에 인신 공양의 제물이 되었다고 나를 효녀라고 말하지만, 씨발, 효녀는 무슨 개뿔이 효녀냐고. 이제 겨우 열네 살짜리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 청춘이 아버지 눈 뜨게 한다고 내 목숨 바치는 게 효녀냐고! 쌀 삼백석에 눈을 뜰 리도 없지만, 설령 눈을 뜬다 해도 다 늙은 인간이 자식 목숨값으로 눈을 뜨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고 좋겠냐고, 씨발. 중국을 오가는 상선에 개끌려가듯, 형장으로 가는 사형수가 뒷걸음질치듯 끌려가니 뱃놈들이 어린 여자라고 추근거리고,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보시나 하고 가라고 치마 속으로 그 더러운 손을 집어넣질 않나, 썩은내나는 주둥이를 뺨에 대질 않나, 정말 원통하고 기가 막혀서 서러운 눈물만 흐르는구나. 깊은 밤, 이제 곧 죽을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갑판에서 선원들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인즉슨, 내 아버지 심학규는 봉사가 아니고, 맹인인 척 행세를 하며 살았다는 것이고, 쌀 삼백석은 도박을 하다 빚을 져서 빚대신 나를 팔아 넘겼다는 것이었다. 봉사가 아니면서도 봉사처럼 살았다면, 어려서 동냥젖을 먹일 때도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내놓고 젖먹이는 걸 다 봤다는 것이고, 내가 방에서 옷 갈아 입는 것도 다 봤다는 말이 아니냐. 아버지라는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 파렴치하고 야비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들리는 말이, 내 친엄마는 나를 낳고 죽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지어낸 말이고 이웃 마을에 사는 뺑덕이라는 여자가 내 친엄마라고? 뺑덕이네가 이미 남편이 있는데, 심학규하고 불륜을 저질러 낳은 아이가 바로 나라고? 아이고, 씨팔, 이게 왠 말이냐. 정말 구역질나서 못 듣겠네. 내가 그런 인간을 위해서 열 살부터 새벽에 일어나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하고, 밥을 얻어와 아버지를 섬겼으니, 내가 미친년이구나. 그렇다면 사기를 당했다는 그 쌀 삼백석이 바로 뺑덕이네하고 같이 살려고 나를 팔아 마련한 돈이고, 자식 팔아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저 심학규하고 뺑덕이 같은 괴물을 부모로 둔 나는 대체 무어란 말이냐. 이제 더 살고 싶지도 않고, 살아봐야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만 있을 뿐이로구나. 어려서부터 밑구녕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품팔이에 동냥에 하루를 넘기기가 괴롭기 이를데 없었는데, 이제 편안히 저 바다에 빠져 죽으면 물고기 밥이라도 되어 좋은 일을 하겠구나. 세상에 태어나 부모 사랑을 이슬 한 방울만큼도 받지 못하고, 지지리 궁상에 뼈저린 노동으로만 십여년을 살다 가니, 내 인생도 가련타.
    • 칼럼
    • 백건우
    2021-09-21
  • 19금 춘향전
    19금 춘향전 아이, 씨발. 변사또 새끼가 자꾸 수청들라는 걸 쌩깠더니 칼을 씌워서 감옥에 처박았네. 빈대하고 벼룩이 어찌나 물어뜯던지, 가려워 미치겠네. 오줌이 마려워도 방광이 터질 때까지 참아야 하고, 목물도 못하고, 머리도 감지 못해서 냄새나고, 아 짜증나 씨발 진짜. 몽룡이 이 새끼는 출세해서 양반부인으로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한양으로 튀더니 씨발새끼, 일년이 지나도록 꿩궈먹은 소식이고, 향단이 년은 방자 새끼하고 눈이 맞아서 옥바라지는 커녕 애새끼를 가졌다고 배를 뒤뚱거리면서 끙끙대며 자세나 하고...믿을 년놈 하나 없는 신세가 처량하구나. 변사또 씨발놈, 나이는 환갑도 넘은 늙은 꼰대새끼가 밝히기는 더럽고 지저분하게 밝히고 지랄이야. 꼭 쥐새끼처럼 생겨가지고 눈깔은 희번득거리고, 혓바닥은 날름거리고, 목소리를 간사한 새끼가 뇌물로 전라감사 자리를 얻어차더니 본전 뽑으려고 양반, 중인, 상놈 가릴 것 없이 불러다 볼기를 치고 돈을 뜯어내는 꼴이 아무래도 제 명에 죽지는 못하리라. 아는 기생 언니가 변사또 새끼 수청들러 들어갔다가 변태짓만 한다고, 재수 옴붙었다고 하더니, 씨발새끼, 힘도 없는 놈이 예쁜 여자만 보면 껄떡거리는 변태 쓰레기 인증을 하는구만. 옥에 갇혀 있으니 하루가 길고도 길구나. 보리밥에 짠지로 하루 한 끼를 먹으니 살이 빠져서 좋긴 한데, 빈대피로 난을 친 벽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고역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지나간 세월을 되새기고,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 괴로운 시간을 잊고자 하지만, 즐거움을 잠깐이고, 괴로웠던 시간은 길고도 오래구나. 몽룡이를 처음 만날 때의 설레이던 마음, 둘이 첫날 밤을 보내던 짜릿하고 쾌락으로 몸부림쳤던 밤은 잠깐이고, 몽룡이가 서울간다고 했을 때, 하늘이 무너질 듯 슬프고 서러웠지만, 공부해서 출세할 몽룡이를 붙들고 내 행복만 추구한다면, 남자의 앞길을 막는 것도 옳지 못한 일이고, 나 자신의 삶도 그것만으로 행복하지는 않을 듯 했다. 몽룡이가 서울 가서 다시는 나를 찾지 않는다 해도, 나는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몽룡이와 동침한 것은 오로지 나의 의지였으므로 그것으로 몽룡이를 원망할 마음은 없다. 이제 날이 밝으면 또 변사또 새끼가 동헌 마당으로 끌고 나가서 옷 위에 물을 뿌리고 주리를 틀거나 볼기를 치겠지. 하얀 모시옷에 물을 끼얹으면 속살이 다 드러나서 벌거벗은 것보다 더 선정적으로 보이는데, 변사또 개새끼는 이런 내 모습을 노골적으로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직 이팔청춘 젊은 여자의 몸이라 피어나는 목련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내 몸은 내가 봐도 탐스럽고 아름다운데, 저 늙은 변태 새끼의 눈에는 얼마나 황홀하게 보일까. 몽룡이도 나에게 첫눈에 홀딱 반한 첫번째가 바로 내 풍만한 몸 때문이었음을 잘 안다. 나 역시 단오 때 그네를 타는 이유가 멋진 선비를 만나기 위함이라는 걸 숨길 생각은 없다. 단오날이면 청포로 머리를 감고, 저고리도 일부러 짧게 만들어 속살이 언듯 비치도록 입고, 그네를 구를 때마다 속치마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도 의도한 바 있는 것이다. 몽룡이는 그런 나를 보고 한눈에 반해 집까지 쫓아왔고, 나도 그에 관한 소문을 이미 들은 터라 싫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몽룡이는 양반의 자제이고, 이미 서울에서 공부하는 명문집안 자식이니 관기의 딸인 나를 보러 올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리라. 늙은 사또 새끼는 내 몸을 탐하고, 멀리 떠난 님은 기약이 없고, 나는 여기 옥에 갇혀 내일을 기약할 수 없구나. 여자로 태어나 이렇게 남자 새끼들의 노리개로 수모를 당하다 제 명도 살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는구나. 여자가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세상은 언제나 오려나. 오늘도 달이 휘영하구나.
    • 칼럼
    • 백건우
    2021-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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