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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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은 혈투
    제목 : 사랑은 혈투작가 : 바스티앙 비베스출판 : 미메시스 바스티앙 비베스의 작품. 그래픽노블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사, 지문이 거의 없고, 빠르게 그린 듯한 데셍과 거칠지만 적절한 색감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사랑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판 제목은 '사랑의 혈투'지만 원제목은 '도살'이라고 한다. 제목이 잔혹하지만, 내용은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오해하고, 다시 사랑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수많은 나날을 함께 지내면서 때로는 오해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즐겁고, 기쁘게 지내는 연애의 과정을 단순한 그림이지만 생생한 묘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연애 초기, 연인은 헤어지기 아쉽고 떨어지고 싶지 않은 애틋한 장면이 보인다. 하지만 뒤를 이어 곧바로 수송기에서 낙하하기 직전의 군인 모습이 보이고, 낙하(연애)가 처음인 신병에게 선임병이 말한다. 저 아래(연애의 세계)에 '엄청난 살육'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충고한다.청년은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그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쁘다. 두 사람은 왈츠를 추는데, 이 춤이 곧 연애를 상징한다. 두 사람이 서로 호흡을 맞춰 춤을 추는 것은, 사랑하는 관계를 우아하고 아름답게 표현했다.두 사람은 사랑을 하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오해가 일어나고, 한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이런 일은 연애 기간이 지속되면서 가끔 일어나고, 두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육체에 상처를 입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남성이 여성을 몽둥이로 때리는 장면, 여성이 남성의 어깨를 칼로 찌르는 장면은 오해와 말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몸을 다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걸 보여준다.두 사람은 결국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이별 음식'을 선택하는데, 그들이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의 애틋함과 다정함은 이별의 메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어정쩡하게 헤어지고, 여자가 다시 다른 남자를 만나자, 연인이었던 남자는 여성에게 달려가 사랑을 구걸한다. 여자 역시 예전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새로 만난 남자를 버리고 달려가지만, 두 사람은 다시 서로에게 실망하고, 담담하게 헤어진다.사랑과 연애는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험이다. 요즘 청년들 사이에는 스무살, 서른살이 되어도 연애를 못해본 사람들이 있다는데, '모태 솔로'라고 자조하는 말이 나올 정도라면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청년 시기에 사랑과 연애를 많이 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성숙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청년들의 연애를 보면, 일부이긴 해도 상식에 어울리지 않는 찌질함과 위험한 모습이 보이는데, 연애하다 헤어진 사람을 스토킹하거나, 연애할 때 찍었던 사진과 영상을 온라인에 올리거나, 그걸로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협박하는 걸 보면서 연애를 올바르게 하지 못하는 사람의 미래를 짐작하게 한다.결혼은 이제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애하는 것은 선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삶에 큰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유전적으로, 남녀의 사랑은 자신과 가장 유전인자가 먼 사람을 선택하는 행위라고 한다. 즉, 유전적 친화관계가 멀수록 더 건강하고 우월한 유전자로 대를 이을 수 있기 때문에 유전자는 호르몬 분비를 통해 자신과 가장 다른 사람(이성)을 선택하게 되고, 그렇게 다른 사람이 만나 새로운 생명을 만들면, 건강한 유전자를 가진 2세가 태어나 유전자를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다.유전적으로 멀다고 해서, 두 사람의 성격이나 애정의 깊이에 거리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유전자가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것과는 달리, 사람은 자신의 취향과 감성, 지성에 따라 상대를 선택한다. 즉, 유전자와 사람의 이성이 복합적으로 상대방을 선택하는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정신병동 이야기
    제목 : 정신병동 이야기작가 : 대릴 커닝엄출판 : 이숲 작가는 정신병동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만화를 그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종류의 정신병이 비슷하지만 다 다르고, 복잡한 원인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정신병'의 공통점은 모두 '뇌'에서 발생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뇌에 관한 생물학, 유전학적 분석은 깊지 않지만, 상식으로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꽤 도움이 되겠다. 인간의 뇌는 수백만 년(약 700만년)에 걸쳐 느리게 진화하다 지금부터 약 20만년 전부터 급격하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가 공생하던 시기에 인류는 서서히 수렵 채취에서 정착, 농경 단계로 진입하게 되는데, 육식의 비율이 높아지고, 불을 이용한 화식이 늘면서 인류의 육체는 커지고 뇌 발달도 빠르게 진행했다.문제는,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갖게 되면서 시공간 개념을 이해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추상하며, 언어를 구사하는 복잡한 뇌 구조로 진화하면서 그만큼 문제가 생길 확률도 높아졌다. 복잡한 뇌기능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유전적 영향 등 선척적인 원인은 물론, 후천적 환경에 노출되면서도 쉽게 영향을 받아 이상이 발생한다. 정신병의 많은 부분은 선천적 원인에 있다고 하지만, 현대의 정신병은 후천적 요인의 비율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높다고 알고 있다.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그가 '자본'의 지배를 받지 않을 만큼 부르주아라면 문제가 없겠지만-자본의 노예로 생존하는 자체로 큰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생존을 위해 노동해야 하는 것부터 존재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는데, 여기에 수많은 경쟁 속에서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살아야 하고, 소음, 공해에 시달리며 육체와 정신이 늘 긴장과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면역계가 파괴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물질숭배 사회에서 인간은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건강하고 온전한 인간관계는 맺기 어려운 세상이 되면서, 개인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스스로 소외당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스트레스는 외부에서 충격을 주지만, 받아들이는 뇌에서는 뉴런, 스냅스, 호르몬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결국 물리적 자극을 통해 뇌를 변화시킨다. 우리가 보고, 듣고, 믿는 것이 완벽하지 않은 것은 뇌의 활동의 결과를 마치 '나'라는 존재가 판단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아'와 '뇌 기능'의 관계는 물리적으로 동일하지만, '이성적 의지'와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인류에게 '뇌'의 문제는 진화와 관련해 매우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소년의 마음 - 소복이
    제목 : 소년의 마음작가 : 소복이출판 : 사계절 소복이의 그림과 글을 퍽 좋아하는 나는, 소복이가 그린 책을 찾아 읽는다. 이 그래픽노블을 보면서, 소년의 마음에 감정이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나도 소년처럼 울었다.가족과 함께 있어도 행복하지 않았던 시절, 부모의 불화 속에서 늘 우울하고 외롭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때로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더 많이 혼자 철둑길의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어린이에게 집과 부모는 세계의 모든 것이고, 절대적이었는데, 그 세계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온 존재가 불행하다는 뜻이기도 하다.소복이는 이런 어린 소년의 마음을 잘 읽고 그려내고 있다. 소년은 슬프고, 외로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자신을 귀여워하고 사랑한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상상의 세계에서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여전히 소년을 사랑하고, 따뜻하게 안아준다. 그 힘으로 소년은 현실의 슬픔과 외로움을 견딘다.세상에 홀로 남겨졌다해도,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힘든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 소년에게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추억이 있고, 다행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지낸 사람은 부러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나이 들어도 원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확률이 높다. 가난하고 조금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그때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심하지는 않아도, 가끔 꿈속에서 나는 슬프고 외롭다. 어린이는 행복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정이 행복하지 않다면, 사회에서라도 어린이를 돌봐야 한다. 이 책의 주인공, 소년의 모습이 보편성을 얻는 것은,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많기 때문 아닐까.
    • 문화
    • 만화
    2021-09-24
  • 풀 - 김금숙
    제목 : 풀 작가 : 김금숙 출판 : 보리 김금숙 작가 작품. 그래픽노블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이렇게 과거의 기록을 남길 때다. 구술사의 경우,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구술자의 말을 글로 기록하게 되는데, 기록의 생생함을 글로만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글은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복원되지만, 독자의 상상은 독자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로 인해 제한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래픽노블처럼 글과 그림이 동시에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독자의 상상력을 확대하고, 고증의 완벽성이 관건이긴 하지만 독자의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또한 글만 읽을 때의 어려움을 그림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가독성을 높이고, 내용의 이해를 도우며, 책읽기의 즐거움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그래픽노블을 단순히 만화라고만 생각하면 큰 오판이다. 그림은 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으며, 글의 내용이 전달하고자 하는 원래의 목적을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이 작품은 일본군 성노예로 붙잡혔던 이옥선 할머니를 작가가 직접 인터뷰해서 그리고 쓴 작품이다. 이럴 때,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작가는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동질감을 갖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므로, 똑같은 소재라 해도 남성 작가가 접근하는 것보다는 훨씬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작가는 그림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붓과 먹을 이용한 흑백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흑백은 과거의 시간을 그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미지이며, 붓과 먹은 우리의 전통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 우리의 역사를 전통의 방식으로 다루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작가의 그림은 한국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과거의 시간에 채색을 하는 것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 잔인한 과거의 흔적을 묘사하는데 흑백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가는 일본군의 만행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의 마음을 묘사하는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그것은 이 역사적 사건에서 피해자가 주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를 가해자 중심으로 놓고 보면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간단한 예로, 박정희 정권에서 희생당한 인혁당 사건의 주인공들을 그릴 때도, 박정희 정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식과 인혁당 피해자와 가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분명하고 엄연하게 다르다. 역사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는 역사를 누구의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와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역사의 시각과 관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일본군 성노예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비틀릴 수밖에 없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일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도는 한국의 지식인 사이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이 사건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단지 포주와 창녀의 돈벌이로 왜곡, 격하시키는 발상은 일본이 늘 주장하고 바라는 관점이다. 이옥선 할머니의 경우, 당시 조선의 가난한 민중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일본의 수탈, 조선의 지배계급의 무능과 부패, 강대국에 침탈당하는 약소국의 비애, 식민지를 확대, 강화하는 제국주의의 발현 등 당시 역사의 총체적 사건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지와 편견, 왜곡된 지식으로 친일파가 되어버린 인간들의 역겨운 인식이 날뛰는 꼴을 볼 수 있다. 김금숙 작가의 작품으로 오멸 감독의 영화를 그래픽노블로 창작한 '지슬'이 있다. '지슬' 역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제주4.3을 피해자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작가는 붓과 먹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흑과 백이라는 단순함은 이미지의 강렬함과 함께 주제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일수록 컬러보다는 흑백이 어울리는 이유는, 다채로운 색으로 분산되는 독자의 시선을 작가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금숙 작가의 이 작품과 '지슬'도 그렇고, 박건웅 작가의 일련의 작품 - 짐승의 시간, 노근리 이야기 등 -도 흑백으로 창작되었다. 김금숙 작가의 작품 주제인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고, 제국주의 일본이 침략했던 나라에서는 공통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이 전쟁범죄는 인권과 가장 깊은 관계가 있고, 특히 여성의 성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세계여성운동과도 밀접하다. '풀'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편성을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영국 '가디언'의 2019 최고 그래픽노블, 프랑스 휴머니티 만화상 심사위원특별상,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2019 올해 최고의 만화 등으로 선정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전쟁범죄, 성노예 범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과 김금숙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일본군의 성범죄에 대한 증언을 외면하고 왜곡한다. 일본이 아무리 오리발을 내밀어도, 역사는 분명하게 진실을 증언하고 있으며, 세계의 상식은 일본의 범죄를 규탄하고 있다. 김금숙 작가의 이 작품이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고, 전쟁 범죄의 잔혹함을 증명하며,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서 더욱 뜻깊다. 한국의 만화가들 가운데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아버지의 노래
    아버지의 노래 김금숙 작가 작품.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가가 태어난 1970년의 농촌 마을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지배하던 시기였지만 전통적으로 조선의 농업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시골이다. 농촌 마을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를 겪고, 곧 이어 전쟁까지 겪으면서 격렬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도 농업의 근간을 잃지 않은 뿌리깊은 전통을 유지하는 곳이다. 그런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는 농사를 하는 부모님과 아홉 형제의 막내로 자란다. 기본적으로 건강한 가족 사이에서 자란 것을 작가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농사를 짓던 부모가 농사를 포기하고 서울로 이주하기로 작정한 것은, 70년대의 커다란 흐름과 관계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이후 경공업의 활성화와 수출 위주의 산업구조 개편을 통해 농업 위주의 나라에서 산업국가로 이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의 자본가들이 한국에 공장을 짓고, 값싼 노동자를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첫번째 방법이었으며, 여기에 10대의 여성 노동자들이 대량 투입되었다. 이들은 가난한 시골의 여성들로, 학교는 국민학교 졸업 또는 중학교 졸업이 전부인 여성들로, 집안의 경제에 도움이 되기 위해 어린 나이에 공장에 취직한 어린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 심지어는 철야로 일을 하며 노동력을 값싸게 공급했고, 자본가는 막대한 이윤을 챙길 수 있었다. 노동력 확보를 위해 시골의 젊은이를 도시로 불러오도록 하는 정책은 농촌을 구조적으로 수탈하는 방식이었으며, 가장 핵심은 쌀값을 올리지 않는 것이었다. 낮은 쌀값은 농민의 생계를 위협했고, 농민 특히 대지주가 아닌 빈농은 먹고 살기 위해 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부모님도 농업만으로는 먹고 살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자식들의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대학을 졸업하면 거의 전부 취업을 할 수 있었고, 취업은 곧 집안을 일으키는 것과 동일한 인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낸다고 '우골탑'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작가의 부모님은 이미 서울에 살고 있던 작가의 큰외삼촌(엄마의 남동생)에게 땅 판 돈을 맡기고 서울로 올라가지만 외삼촌은 그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 그로 인해 작가의 가족은 큰 어려움을 겪고, 도시빈민으로 전락한다. 도시 이주와 관련해 수많은 비슷한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흔하디 흔한 이야기지만, 가족의 배신으로 고통을 겪는건 언제나 분노를 일으킨다. 작가의 부모는 과일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힘들고 고생이 많은 나날이지만 대가족을 이루고 있던 작가의 가족은 서로 힘을 합해 어려움을 이겨나간다. 그 과정에서 이미 어른이 된 오빠와 언니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기로 한다. 어지간한 집안에서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내기는 쉽지 않았다. 막내였던 작가는 부모와 형제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고, 고향인 시골마을에서 대도시로 이주하면서 발생하는 괴리로 인해 정신적으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옮겨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다만 그런 환경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불만과 고통을 참으며 살아갈 뿐이다. 작가는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그 재능을 살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그렇게 작가가 한국을 떠나는 것은 가족과의 연대를 끊는 것이기도 하지만, 개인으로는 성장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고, 애틋하고 안쓰러운 가족의 아픔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작가는 가난하게 자랐지만 그늘지지 않고 밝고 쾌활하게 자랐음을 알 수 있는데, 가난해도 부모의 깊은 애정과 형제들의 우애가 이들을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자살도
    자살도 '홀리랜드'의 작가 코우지 모리의 작품. 열일곱 권으로 완간. 한국에서는 '아일랜드'로 번역 출판. 전작인 '홀리랜드'도 주인공을 비롯해 등장인물과 배경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사회에서 일탈된 '비정상'의 인간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 개개인이 비정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발생하고, '홀리랜드'나 이 만화의 주인공들도 사회의 경쟁과 구조 속에서 발생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홀리랜드'에서는 주로 학교의 불량배들과 따돌림과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등장했다. 기존의 시스템에서 '불량배'들은 도태된 인간들을 말한다. 학교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을 만드는 곳이고,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청소년은 '불량품'이라고 낙인찍힌다. 즉, 청소년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감성은 억압당하고, 획일화된 프로그램 안에 갇히게 됨으로써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큰 그림으로 보면 체제의 희생자들이다. 억압기제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탈하거나 폭발하는 것인데, 가해자는 자신들보다 더 약한 존재를 괴롭힘으로써 억압의 스트레스 강도를 낮추려한다. 따라서 학교폭력의 피해자는 이중의 고통을 받으며 억압의 강도가 커지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이던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자살도'에서는 수많은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한 인간들이다. 그들이 살던 사회는 경쟁과 억압이 일상화된 사회이며, 누군가를 끊임없이 짓밟고 올라서지 못하면 짓밟혀 가라앉게 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려서부터 일방 폭력(가정폭력, 성폭력)에 노출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자아가 형성되기 전부터 심각한 폭력에 시달린 사람들이라 일방적 피해자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사회에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가해자들의 논리에 시달린다. 자살도에 버려진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행운아들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들에게 생존의 이유도, 생존의 열정도 없다는 점에서, 그들이 살아있다는 건 오히려 불행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에서는 자살미수자들을 무인도에 버리는데, 그곳에서 자살을 하든, 서로를 죽이든, 아니면 섬에서 굶어죽든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명백히 국가가 저지르는 범죄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음에도 무인도에 유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자살자들은 섬에 내리는 즉시 모두 자살을 해야 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결국 자살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섬에 버려진 사람들은 무정부 상태에 놓여진 무리이고, 그들은 스스로 처음부터 새로운 삶의 기준을 만들어가야 한다. 누군가 앞장서야 하고, 각자 역할을 해야하며, 서로 돕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자살은 혼자 결정하면 되지만, 살기 위해서는 협동하고, 의논하고, 노동하고, 일정한 규칙을 만들어 적응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정부가 예상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섬에 버려지는 상황을 그린 작품은 '배틀로얄'이나 '파리대왕'처럼 극단적 상황을 보여주는 내용이 있지만, 이 만화는 상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주인공 '세이'는 작가의 전작인 '홀리랜드'에서 주인공 '유우'와 비슷하다. 세이도 어떤 이유에선지 자살을 시도하지만 살아남는데, '유우'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면 '세이'처럼 되었을 것이다. 세이는 의지도 약하고, 마음도 여린 사람인데, '자살도'에 들어와 오히려 삶의 의지가 강해지고, 자신의 능력을 발견한다. '유우'가 스스로 연습한 복싱을 통해 집안에서 바깥으로 나가게 되고, 결국 강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구도를 갖고 있다. '자살도'에서는 크게 두 집단이 대립하는데, 이는 인류의 발전단계에서 씨족-부족의 단계에서 발생하는 전투와 약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투와 약탈은 식량과 노예의 확보가 목적이다. 무인도에 버려진 이들도 인류의 초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이들의 대립은 일정한 생산성이 확보될 때까지 계속된다. 초기에는 식량 확보에 급급했던 자살자들은 조금씩 먹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들이 살아남아야 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관한 해답을 얻는다. 그것은 알고보면 매우 쉬운 내용이지만, 그들에게는 놀라운 깨달음이었고,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홀리랜드
    홀리랜드 코우지 모리의 데뷔작이자 출세작. 한국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열여덟 권으로 완간했다.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건 아니지만 개성이 있고, 일본 주류 만화와 다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이 만화는 일본에서 히트작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리 널리 알려지진 않은 걸로 안다. 이 만화를 그린 코우지 모리가 한동안 방황하면서 겪었던 사건을 바탕에 깔고 있어서 꽤 생생한 느낌이 드는 '거리의 싸움꾼' 만화다. 주인공은 카미시로 유우라는 고등학생이다. 그는 중학교 때 심하게 따돌림을 당하고, 학교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학교도 자주 가지 않고, 집에서도 가족과 대화하지 않으며 방안에서만 지내던 히키코모리였다. 그러던 그가 '아프지 않게 맞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것이 복싱 교본을 보고 따라하기를 하면서였다. 그는 하루에 5천번씩 스트레이트 연습을 할 정도로 집중하는데, 그가 밤에 길거리에서 '불량배 사냥꾼'이 된 것은 그의 내면에 응어리진 분노때문이다. 유우는 독학으로 배운 복싱 기술로 불량배를 몇 명 때려눕히지만, 그의 앞에 나타나는 강자들을 상대하기에는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 이 만화는 그래서 영웅설화의 과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영웅은 좌절하는 인간이며, 고통과 고난의 과정을 겪고 무사히 귀환하거나 누군가를 살린다. 유우는 시대에 버림받고, 민중에게 버림받은 영웅이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자 애를 쓰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적은 너무 많고, 강하기 때문이다. 이때 영웅을 돕는 인물이 등장한다. 카네다 신이치가 그의 정신적 동반자라면 이자와 마사키는 유우의 성장을 돕는 멘토이자 앞서가는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유우는 이자와 마사키를 만난 이후 늘 그를 동경하고 존경한다. 그의 롤모델이 된 것이다. 이자와 마사키 역시 유우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다. 두 사람은 전혀 모르던 사이지만,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유우는 자신이 싸워 이기거나 진 상대를 찾아가 그들의 장점을 배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이 진짜 강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인데, 유우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유우의 친구인 카네다나 이자와는 유우의 내면이 강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유우가 중학생 때 따돌림을 당하고, 동급생이나 상급생들에게 얻어 맞고 돈을 빼앗긴 것은 그가 육체적으로 약하다기 보다는 폭력에 대응할 마음의 자세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자와 마사키도 마찬가지여서, 전국대회에 나갈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복싱선수였던 이자와였지만, 규칙이 없는 길거리 폭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유우는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불량배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본격 길거리 싸움꾼의 삶을 만들어간다. 학교에서 불량배라 해도 길거리에서 1대 1로 싸움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유우는 여러 학교에서 주먹깨나 쓴다는 일진들을 상대로 1대 1로 싸워 그들을 때려눕힌다. 그가 배운 것은 복싱이지만 레슬링, 공수도, 복싱, 검도 등 여러 분야의 강자들을 상대하면서 성장한다. 소재는 거리의 싸움이지만 당연히 성장만화이고, 약자, 패배자였던 한 소년이 어떻게 성장하는가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작가인 코우지 모리는 키 183센티미터, 몸무게 85킬로그램으로 운동을 좋아하고 잘 하는 사람이다. 그가 만화가로 데뷔하기 전, 일시적으로 방황하던 때, 길거리 싸움을 경험했고, 그의 친구이자 유명한 만화가인 미우라 켄타로가 코우지 모리에게 힘들었던 시기를 만화로 그려보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이 만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주인공 카미시로 유우는 선량하고 유약한 청소년이지만, 워낙 괴롭힘을 심하게 당해서 스스로 히키코모리가 되고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그가 우연히 복싱의 기본을 배우게 되면서 길거리로 나오고, 불량배를 때려눕힐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는데,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 이야기는 발전적으로 그려지지만 정작 유우의 가족들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주인공과 가족 사이가 여전히 소원하고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짐작한다. 부모는 의외로 잔소리도 하지 않고, 염려하는 마음이지만 유우의 생활에 참견하지 않는다. 즉 상당히 방임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이 유우에게는 부모가 무관심하고 애정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을 듯하다. 그래도 유우가 스스로 밤거리로 나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쳑하게 된 것도 가족의 방임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는데, 불꽃같이 타올랐던 유우와 그의 친구들의 밤거리 생활도 학교를 졸업하면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게 되고, 유우를 비롯해 몇몇은 여전히 거리의 전설로 회자된다. 학교를 졸업한-어쩌면 졸업하지 못한-유우의 삶은 어떻게 될까. 적어도 그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히키코모리의 트라우마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많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때려눕힌 실력자이며, 스스로 강자의 반열에 올랐음을 확인했다. 그러니 과거에 발목이 잡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자기의 길을 걸어갈 것으로 기대한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스트리트 페인터
    스트리트 페인터 [3그램]의 작가인 수신지 작가의 작품. 작가의 자전적 작품으로,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던 시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림체가 동글동글 귀엽다. [3그램]도 그렇고 이 만화도 표지만 봤을 때는 외국 작가의 작품인 줄 알았다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한국 작가라는 걸 알았다. 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초상화나 캐리커쳐를 그려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만화에도 그런 천태만상이 드러나지만, 사람은 많은 경우 상식적이고 좋은 사람들이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 때문에 사회는 흙탕물이 된다. 옛말처럼,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을 흐린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기적이고, 자신의 안위를 가장 먼저 살핀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이기심을 조금씩 누르고,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생존확률을 높이고, 자손을 더 많이 퍼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생존률을 떨어뜨리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은 미대에 다니는 대학생으로, 아르바이트 삼아 거리 화가에 지원한다. 구청에서 마련한 장소에서 비교적 편하게 자리를 잡지만 경험이 없어서 다른 거리 화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람들의 얼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때 보여주는 사람들의 반응이 퍽 다채롭다. 시각을 조금 달리해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거리의 화가들에게 자신의 초상화나 캐리커쳐를 그리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화가의 시선이 아닌, 일반 시민의 눈으로 바라보면, 비록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지만 그들의 재능을 높이 산다는 것이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에 대한 선망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같은 '거리의 화가'라 해도 우리가 농담처럼 말하는 '몽마르뜨의 화가'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나도 프랑스 여행 때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림 그리는 거리의 화가들을 지켜봤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삶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적인 관광지인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거리의 화가'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지고,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더 자유롭게 자리잡고 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림 뿐아니라 음악도 그렇고, 판토마임이나 연극, 춤, 노래도 그렇다. 모든 예술행위를 하는 예술가들이 거리에서, 공연장에서 보다 활발하고 자유롭고, 마음 놓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따로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일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3그램
    3그램 미메시스 그래픽 노블. 작가가 경험한 암 투병기를 그리고 있다. 20대 여성으로 난소암을 발견하고 투병 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말한다. 물론 정작 작가는 그 시기를 결코 담담하게 보낼 수는 없었겠지만, 지금은 완치되어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으니 만화를 보는 독자는 안심하고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다. 암투병과 관련해 감동적인 만화는 김보통 작가의 '아만자'를 들 수 있다. 그에 비해 이 만화는 상대적으로 담담하고 편안하다. 작가가 자신의 암 투병 과정을 과장하지 않고, 희망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암이라는 병은 여전히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이미지다. 주인공은 퍽 운이 좋아서 암이 3기였지만 전이가 안 된 상태로 수술을 할 수 있었고, 현대의학이 암을 불치병이 아닌, 난치병 수준으로 낮추는 훌륭한 성과를 이뤘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암'은 현대의학에서 가장 위험한 병으로 알려졌다. '암'은 세포가 비정상으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인체의 세포들이 적절한 통제를 통해 세포의 생성과 성장, 소멸의 과정이 이뤄지는데, '암'은 세포의 일부가 비정상적으로 재생산을 빠르게 진행하는 것으로, 신체의 통제에서 벗어난 활동이다. '암'은 유전적 요소도 있지만 후천적 환경에 의해 발병할 확률이 더 높으며, 음식과 공기, 생활습관이 암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졌다. 인체의 온도가 1도 올라갈 때마다 암세포가 줄어들 확률은 커지고, 육식보다는 채식, 발효음식을 먹는 것이 암을 예방, 치료하는데 좋다고 알려졌다. 내가 아는 사람은 대장암 3기였는데, 몇 년의 암치료를 통해 완치했다. 그는 암이 발생하기 전에는 술과 담배, 육식을 날마다 했고, 그렇게 수 십년의 시간이 흐르자 암이 발생했다. 그는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삶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그는 암치료를 하면서 마치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거쳤다. 술, 담배는 물론 고기도 거의 먹지 않았고,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하면서 시골로 이사해 하루 종일 산을 걸어다녔으며, 미역국과 물김치, 채소샐러드만을 먹었다. 그 과정에서 살도 많이 빠졌고, 암은 재발하지 않았다. 물론 가장 큰 항암의 요소는 병원의 치료였지만, 그에 걸맞는 운동, 음식, 체질개선 등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했기 때문에 건강을 찾을수 있었다. 유전적 요인 때문에 암에 걸리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더 많은 경우가 현대생활의 문제 때문에 발생하고 있으니 '암'을 현대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은 자연식이 아닌, 공장제품일 경우가 더 많고, 육식의 비중이 평균치인 15%-이것은 인간의 치아를 기준으로 산정한 것이다-보다 높기 때문에 과대한 육식은 건강에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유기농 제품만을 먹자는 말은 아니다. 공장제품은 적게 먹을수록 좋지만 유기농만을 고집하는 것도 지나친 태도다. 암은 초기에 발견할수록 완치 확률이 높아지고, 암의 발병률이 높은 것은, 암을 진단하는 기술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암'은 현대의학으로 극복 가능한 수준까지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암'으로 죽는다해도 그것은 자신의 삶이 만든 결과이므로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말자.
    • 문화
    • 만화
    2021-09-24
  • 자꾸 생각나
    자꾸 생각나 미메시스의 그래픽 노블. 만화책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만화가 예전과는 다른 갈래가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만화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며 창작물이지만, 그동안은 수준이 낮은 장르로 여겨왔다. 이것은 만화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다. 소설도 흔히 삼류소설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준이 낮은 모든 창작물은 비주류로 묶여 천대받아왔다. 그러던 만화가 언젠가부터 '그래픽 노블'로 분류되면서 당당하게 고급한 예술작품으로 팔리고 있다. 같은 만화임에 분명하지만 소위 말하는 '대본소 만화'나 '공장 만화'가 아니라 '작가주의' 만화를 지향하기 때문이고, 그만큼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래픽 노블은 특히 유럽에서 창작이 활발하다. 미국여행 때, 서점에 들러서 그래픽 노블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기대보다' 종류가 많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유럽과 한국, 중동,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의 그래픽 노블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어서, 나처럼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 아닐까 한다. 그래픽 노블의 장점은 소설과 만화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이야기)의 구조와 만화(그림)의 수준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수준이 낮으면 그래픽 노블의 자격을 잃게 된다. 모든 만화가 다 '그래픽 노블'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야기와 그림의 수준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에서 핵심은 '그래픽' 즉 그림이다. 그림과 이야기가 모두 훌륭해야 하지만, 그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없다. 그래픽 노블 작가는 만화가와 소설가를 섞어 놓은 듯한, 그 둘의 장점을 모두 갖춘 부러운 존재들이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래픽 노블 작가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들의 능력이 퍽 부럽다. 이 만화는 송아람 작가의 장편 그래픽 노블이다. 웹툰으로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었는데, 그래서인지 만화의 특징인 네모칸이 없다. 게다가 무려 600쪽이 넘는 분량이어서 만화지만 읽기가 만만찮다. 내용은 청춘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다룬 것인데, 주인공들이 만화가들이어서 자전적 요소가 있어 보인다. 만화 주인공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하고 진지한 시간들이겠지만, 시간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독자인 내 눈에는 찌질해 보인다. 청춘의 찌질함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리려 했다. 생각해보면, 청춘의 지난 날은 아름답기 보다는 찌질했다. 자의식 과잉과 편견, 심각한 자기애, 오해와 독단 등의 감정이 분출되었고, 감정적으로 미숙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우습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작품은 영화를 만드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보인다. 즉 솔직한 감정 표현들이 민망하고 불편하지만 그런 감정과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청춘들에게는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포르투갈
    포르투갈 잘 만든 양장본에 두툼한 두께의 이 그래픽 노블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그림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그래픽 노블의 특징이자 장점인 그림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그래픽 노블을 선택하는 가장 큰 요소는 그림이다.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림이 수준 이하라면 보고 싶지 않다. 반대로 내용은 별로인데 그림이 훌륭하다면 그것은 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래픽 노블에서 최우선 요소는 역시 그림이다. 지은이는 월트디즈니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고, 이후 만화가로 전업하면서 유명한 만화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책만 봐도 말할 필요 없이 최고의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삼부작으로 구성되었고, 주인공 시몽 뮈샤는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만화가지만 작가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 있고, 삼대로 이어지는 집안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잔잔하면서도 애틋하게 그려지고 있다. 주인공 시몽은 만화가로 작품집도 발표한 작가지만 심각한 슬럼프 상태에 있다. 그는 애인과의 사이도 벌어지고, 세상 일이 심드렁하고, 삶의 의지도 박약한 상태로 침체되어 있는데, 포르투갈에서 열린 작은 만화축제에 참가한 다음, 포르투갈과 자신의 끈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프랑스 사람으로 살아왔던 시몽에게 포르투갈에 자신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 할아버지의 고향이자 뿌리가 포르투갈이라는 사실은 뜻밖의 사실로 다가오고, 마음이 끌리는 걸 느끼게 된다. 그동안 가족들과도 소원하게 지내온 주인공은 사촌의 결혼식을 계기로 프랑스를 벗어나 포르투갈에서 한동안 지낼 생각을 하게 되고, 그동안 만나지 않았던 사촌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포르투갈은 프랑스에서 멀지 않지만, 중간에 스페인이라는 큰 나라가 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처럼 보인다. 포르투갈도 중세 유럽의 식민지 개척 시기에는 강력한 국가였지만 지금은 유럽에서는 힘이 많이 빠진 중진국이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선진국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쇠퇴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라의 여건이야 어떻든 이 만화에서는 포르투갈의 평범한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중진국 수준이지만 이들은 소박하고 낙천적인 성향으로 낯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친절하게 대하고 있는 걸 보여준다. 주인공 시몽은 자신의 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의 역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도 조금은 더 가까워지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들-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사촌들과도 쉽게 한 식구처럼 가까워진다. 이런 현상은 포르투갈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따뜻한 환대와 열린 마음, 가족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들의 문화 덕분이기도 한데,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 느끼지 못한 따뜻한 분위기가 시몽의 태도와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시몽의 할아버지는 형제가 프랑스로 취업 이민을 위해 고향 포르투갈을 떠났고,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시몽의 할아버지인 아벨은 프랑스에서 사망한다. 아벨의 동생이자 시몽에게는 작은할아버지인 마뉴엘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고, 두 집안은 그때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반전은 주인공 집안인 무샤의 집안이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를 알려주는 전설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전쟁을 하던 시기에 포르투갈의 한 마을에 스페인 기사들이 찾아오고, 한 아이를 재워달라고 부탁하고 기사들은 떠나간다. 그 아이는 혼자 남게 되고, 그 마을에서 자라 농부가 되는데, 그가 바로 '무샤' 집안의 조상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로만 본다면 '무샤'집안의 뿌리는 스페인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마지막 이야기는 퍽 낭만적이고 애틋해서 찡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며 감동이 더하는 이 그래픽 노블은 여러 번을 봐도 좋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유료 서비스
    유료 서비스 이 만화는 '성매매'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질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선진국인 캐나다에서는 이런 '성매매'가 많은 부분 합법이어서 우리 사회와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성매매'는 남성이나 여성-거의 대부분은 여성-의 성착취라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합리화할 수 없다. 작가이자 이 만화의 주인공인 채스터 브라운의 주장대로 '성매매의 합법화', '성매매의 자유화'가 이루어진다 해도, 성을 파는 사람은 늘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작가의 발상은 순진한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성매매'를 하기 시작한 것은 섹스 없이 한 집에서 살던 여자친구가 새로운 남자친구가 같은 집에서 동거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느낀 이후였다. 작가의 동료들이 그 점을 지적하면서 '너의 내면에 여성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쌓여 있다'고 말하지만 작가(주인공)는 이 주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은 지극히 정상이고, 평온한 심리 상태이며, 여성에 대한 어떠한 분노나 환멸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의식에 자리잡은 감정까지 사람이 알 수는 없다. 트라우마가 왜 생기겠는가. '성매매'를 시작하는 과정을 보면 주인공이 아무리 자신의 처지를 부정해도 '여성에 대한 환멸과 분노'의 감정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만화의 내용은 철저하게 남성 주인공의 입장과 시각에서만 바라보고 있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성매매 여성들은 모두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며, 남성의 시각으로 재단당하고 평가된다. 즉, 여성이 '인간'으로서 동등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의 인식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우며 여성을 존중하는 평균 이상의 지식인이라 해도 '성매매'를 바라보는 시각만큼은 여전히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의 틀 안에 갇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매매를 하는 여성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지만, 그 여성들이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솔직하게 말했을까는 알 수 없다.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성매매가 아무리 합법이라 해도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 책을 두고 수 많은 매체와 인물들이 이 책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작가이자 주인공의 경험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만화는 한 남성의 성매매 경험담이므로, 남성의 시각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주인공의 경험과 시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성매매 여성의 입장에서 수 많은 성매매 남성들의 태도를 바라보는 만화책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빨간 풍선
    빨간 풍선 작가는 '빨간 풍선'이라고 써 놓고, 영어 제목은 'The Purple Balloon'이라고 썼다. 의도한 것일까? 이 작품집에 들어 있는 내용은 삶의 아이러니를 그리고 있고,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하지만 쉽게 잊어버리기는 어려운, 삶의 찌꺼기, 잔해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만화가는 소설가가 갖지 못한 위대한 장점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소설가는 글로만 자신의 상상을 표현하지만, 만화가는 소설가의 글솜씨와 그보다 더 멋진 그림으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구축하기 때문에, 내게 만화가는 소설가보다 더 위대한 존재다. 내가 '그래픽 노블'을 좋아하는 이유는, '만화'라는 형식을 빌려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표현하고, 공감을 얻는 창작을 하기 때문이다. 단지 소설만이었다면 세상은 얼마나 심심했을까. 물론 소설은 그 나름대로의 재미와 세계가 충분히 있다는 건 알고 있고, 나 자신, 소설을 쓰고 있는 입장에서 소설보다 만화가 더 좋다고 고백을 하는 건 조금 굴욕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기꺼이 '그래픽 노블'을 쓰고 그리는 만화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 만화는 한국의 많은 '만화작가'들 가운데 한 명인 김수박 작가의 작품집이다. 이 만화에 실려 있는 만화는 만화가게에서 무협지를 넘기듯 1초에 한 장씩 넘기는 그런 만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김수박 작가의 만화 뿐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모든 '그래픽 노블' 작가들의 작품은 작품 전체를 아울러 깊이와 철학을 발견하는 재미로 천천히, 한컷 한컷 글과 그림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번째 작품인 '개변기'는 상황 자체가 끔찍하다. 이 만화는 개에 대한 극단적 혐오를 드러내고 있어서 동물보호단체나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본다면-그런데, 이 만화를 그런 사람들이 안 봤을 리 없을텐데,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것도 이상하다-결코 지나치지 않을 내용이다. 하지만, 이 만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를 혐오하는 나'가 아니라, '개와 같은 인간을 싫어하는 나'이기 때문에, 여기서 변기에 빠진 개는 우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 같은 인간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소심한 복수는 그 '개와 같은 인간들'을 변기에 쓸어 넣고, 온갖 화학물질을 들이부어 잔인하게 없애버리는 것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온갖 화학물질을 투입해 막힌 변기가 뚫리는 날, 나는 친구들을 불러 떠들썩한 파티를 연다. 변기에 쓸려 내려간 개에 대해 일말의 연민도 없다는 점에서 '나'는 싸이코패스처럼 보이지만, '개같은 인간들'에게 동정이나 연민의 마음을 갖지 못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감정 아니던가. 일곱번째 작품인 '첫사랑'은 사랑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역겨운 것인가를 잘 드러낸다. 모든 첫사랑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첫사랑의 풋풋하고 애틋한 감정이 시간이 지나 그것을 다시 마주했을 때, 예전의 시간에 갇혀 있던 '첫사랑'과 시간이 흘러 지금 많이 변한 내 모습에서 오는 심한 괴리감이 구토를 일으킬 정도가 된다. 여기서, 변한 것은 '첫사랑'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변한 것을 모르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첫사랑'과의 만남이 결국 '섹스'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의도했던, 생각하지 않았던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역겨운 현실이라는 것에 '나'는 자기환멸을 느낀다. 만화를 읽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다. 만화를 많이 좋아하는 나는 이런 '그래픽 노블'이 풍성해지고 다양해지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제는 볼 만한 만화책이 없어서 고민이 아니라, 너무 많은데 사볼 돈이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도바리
    도바리 1980년을 배경으로 주인공 대학생이 경찰에 쫓기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니는 '운동권 대학생'을 이 책의 제목처럼 '도바리'라고 했다. 물론 운동권 대학생 뿐 아니라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수배자가 되었고, 잡히지 않으려 '도바리'를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때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고비를 맞고 있었는데,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지금은 '광주민주화운동'이 공식 인정된 명칭이지만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르던 그때는 '광주사태'라고 했다. 모든 언론에서는 광주에 무장간첩이 내려와 시민을 학살하고 있다는 새빨간 거짓뉴스를 퍼뜨렸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운 것이 바로 그때의 언론이었고, 그 언론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산다. 물론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도 잘 먹고 잘 산다. 이런 걸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만화의 주인공 김인권은 운동권 학생으로 수배자가 되어 남쪽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그는 '소설가'라고 말하고 작은 마을에서 민박을 하거나, 마음 좋은 노인을 만나 '조카' 노릇을 하며 일도 하고 밥도 얻어먹는다. 그가 찾아다니는 시골의 작은 마을들에는 대개 선량하고 순박한 주민들이 많았지만, 조금 더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도 온갖 타락한 인간관계와 권력구조가 개인과 작은 집단을 억압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결국 거대한 악인 군부쿠데타 세력을 없애면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던 김인권은 자신이 보고 느낀 현실에 절망하고, 경찰에 체포당한다. 80년대 '운동권'은 그때로는 비장하고 고결한 정신으로 적(쿠데타 세력)과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한없이 유치하고 비뚤어진 태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운동권 세력-은 적어도 군부쿠데타에 정면으로 맞섰으며, 이 나라를 다수의 민중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80년대는 여전히 전근대와 봉건의 의식이 많이 남아 있었고, 변증법적 유물론과 마르크스, 레닌을 부르짖는 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봉건적,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질서에 젖어 있던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들(운동권)은 민주주의의 시민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군부쿠데타 세력과 싸워야 했고, 모든 역량은 '반독재, 민주화'의 깃발 아래로 모여야 했다. 결국 전두환이 장기집권의 꿈을 포기하고, 노태우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88년 올림픽이 열리고,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문민정부'라는 타이틀을 세울 때까지, 막연하지만 온몸을 던져 싸운 그때의 20대 청년들의 피와 땀과 눈물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주인공은 수배자로 도망다니면서 민중 속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폭력을 보며 좌절하는 한편, 후배인 우광진이 전남도청에 남아 쿠데타 세력과 마지막 전투를 치를 때까지의 일기를 보면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당대(80년대)의 역사적 의미를 뼈저리게 느낀다. 지금 우리가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박근혜를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한 것이 한국의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고, 우리가 직접 만들어 냈다는 것을 가슴 절절하게 느끼는 것처럼, 80년대의 청년들 역시 자신들이 지금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묵직하게 느끼고 있었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피부색깔 꿀색
    피부색깔 꿀색 입양아의 자전적 이야기. 이 만화를 그린 주인공 전정식은 다섯 살 때 고아원에서 스웨덴의 한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면서, 과장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고,가능한 있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국은 지금도 어린이를 외국으로 입양 보내는 나라이고, 외국의 가정에 입양된 어린이들이 성장하면서 겪은 많은 이야기들이 한국에 알려지고 있다. 입양의 문제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입양아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아니면 내가 잘 모르고 있거나) 입양아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소수 가운데서도 소수의 문제라 사회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어쩌다 외국에서 입양아로 성장한 사람이 유명해지는 경우는 긍정적인 부분만 강조하기 위해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입양아가 갖게 되는 심리적 혼란과 자아 정체성의 불안에 관해서는 이해는 하지만 공감하기는 어렵다. 그런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깊고 끈질기게 자신의 삶을 끌어당기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만화에서도 구체적으로 뿌리가 뽑힌 자신의 모습을 여러 번 그리고 있는데, '엄마'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는 그 사람의 온 생애를 불안하게 만든다. '엄마 부재'에 관한 불안은 나도 어렸을 때 느낀 적이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 아무도 없었다. 배가 몹시 고팠지만 먹을 것은 없었고, 낡은 찬장에는 신김치만 한 그릇 있었다. 신김치를 먹고 물을 바가지로 들이키고 나서 동네에 뛰어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땅거미가 질 때까지 놀다 들어와도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혹시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뱃속에서 설움이 복받쳤고, 눈물이 흘렀다. 엄마가 없다는 상상만으로도 서러움이 복받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 책의 저자가 가졌을 막막함과 서러움과 불안과 허무함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백인 사회에서 백인 부모를 둔 동양인 아이의 삶이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혹독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선진국의 성숙한 시민의식과 물질적 풍요로움이 한국에서 고아로 자랐을 때 받았을 가난과 열악한 환경을 어느 정도는 상쇄할 수 있을 거라 위안을 삼을 수는 있겠지만, 뿌리가 없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입양아들이 그렇듯, 주인공도 나이가 들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한국을 방문한다. 어머니에 대한 하염없는 그리움을 간직한 채 희미한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기대하지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입양아들 가운데는 친엄마를 만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주인공은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이 만화는 더욱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고, 입양아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솔직하게 질문하고 있다. 가난하지만 부모 밑에서 자란 내가 행복하다고 느낄 정도로, 주인공이 겪는 뿌리 없는 삶의 고통은 헤아리기 어렵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팔레스타인 - 조 사코
    팔레스타인 - 조 사코 한 권의 만화로 팔레스타인의 삶을 이렇게 깊이 있고 절절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소설이나 논문, 사회과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독자를 끌어당기기 어려운 심각하고 진지한 현실을 객관으로 바라보면서도 고통, 슬픔, 분노, 웃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공감을 얻는 작가의 능력은 탁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수구반동 집단이 집회를 할 때 미국국기와 이스라엘국기를 들고 나타난다. 이들은 특정한 종교를 교조주의적으로 신봉하는 미개한 존재들인데, 이스라엘이 '반기독교'라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는 무지하고 멍청한 인간들의 집단이라고 봐도 좋다. 하여간, 그런 이스라엘이 제2('이'라고 읽으면 안 되고, '투'라고 읽어야 대통령 후보 자격이 있다.)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미국과 유럽의 비호, 특별히)영국의 비호 아래 지금의 땅을 점령해 유대인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세웠는데, 문제는 이미 그 땅에서 오래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폭력으로 쫓아냈다는 것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꼴이고, 그들이 그렇게 당했다고 사방팔방 떠들어 대던 '유대인 학살'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악랄한 방법으로 시전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막강한 자본을 동원해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반면, 정작 진짜 피해자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국제사회에 호소할 힘조차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다. 그들이 놓여 있는 처지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으며, 일상적으로 유대인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어린이, 여성, 노약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 만화에서, 유대인의 폭력은 말할 것도 없이 심각하고 전쟁범죄이며 반인륜의 행동이지만,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여성과 어린이처럼 사회적 약자가 이중, 삼중의 억압과 폭력을 당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된 타도의 대상은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사회적 약자의 희생이 강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목적이 정당하다고 수단이 무시된다면, 우리가 그동안 겪었던 진보진영 내부의 봉건잔재와 가부장적 폐해, 남성우월주의가 또다른 폭력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유대인과의 전쟁 때문에 팔레스타인 내부의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말하는 건 전형적인 억압사회의 태도다. 이슬람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봉건적 억압이 사라지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 문제는 단지 이스라엘과의 전쟁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 국가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얽혀 분열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뒤에 국제깡패 미국이 총칼로 무장하고 있는 상태에서,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팔레스타인이 해방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전체의 민주주의의 발전은 필수 요건이다. 조금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이든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이든 현재의 분쟁을 있게 한 것은 결국 종교 때문이다. 그들은 동일한 신을 믿으면서도 서로를 학살하지 못해 안달하는 중이고, 거의 대부분의 학살은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삶보다 존재하지도 않는 신의 존재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한, 이런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할 것이다.
    • 문화
    • 만화
    2021-09-24
  •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제목 :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작가 : 박건웅 출판 : 북멘토 박건웅은 작품은 대개 충격적이고 놀라운 작품들이다. 그 이유는, 그가 한국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가가, 시사만평을 그리는 것도 아닌데, 유독 한국현대사의 핵심만을 다루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다. 게다가 박건웅의 작품은 미학적으로도 훌륭하다. 그의 그림과 표현 방식은 많은 경우 판화적 표현 기법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흑백 판화는 표현의 강렬함과 함께 이미지가 드러내는 상징성이 탁월한 기법이다. 흑백 그림은 박건웅의 작품에서 특히 '흑과 백' 즉 '선과 악'의 구도이자 '적과 아군'을 상징하며, '생과 사'를 드러내는가 하면,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게 하고, '지옥과 천국'을 상징하기도 한다. 흑백 그림은 잔혹하고 처참한 사실적 묘사를 지우는 대신, 역사와 진실에 더욱 주목할 수 있도록 만든다. 최용탁의 단편소설을 만화로 표현했는데, 원작의 생생한 언어들을 장면마다 살려내는 박건웅의 그림은, 세계의 많은 그래픽 노블 가운데서 특히 역사를 다루고 있는 그래픽 노블 가운데서는 가장 탁월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계의 현대사에서 학살과 관련한 사건은 무수히 많고, 그 피해자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한국에서 벌어진 여러 건의 양민학살은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했다. 이 만화는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남한에서 발생한 이 학살은 친일극우정권이 벌인 극악한 범죄의 일부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고 있으며, 친일(사실은 매국)정권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감추기 위해 가능한 역사교과서에서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비틀고 있다. 사실이나 진실을 들여다 보는 것은 때로 고통이다. 그저 모르고 살거나, 되도록 기억하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통스럽고 괴로운 역사일수록 우리는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되풀이하고, 친일매국노들과 수구반동 집단이 권력을 잡으면, 이런 양민학살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남한과 북한은 분단된 상태로 '휴전' 중이며, 사상 탄압은 변하지 않았고, 반대파를 '빨갱이'로, '좌익'으로 매도하고 그들을 폭력으로 단죄하는 것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세상에서 이 만화는 과거의 참혹함을 되새기자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한국 상황이 극단적으로 변할 것을 경계하는 뜻도 담고 있다. '정적(정치적 반대자)'이라는 이유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치 파리를 죽이듯 양민을 학살하는 정권이 여전하지 않은가.
    • 문화
    • 만화
    2021-09-24
  • 건강일기_007
    건강일기_007 석달 동안 7kg을 감량했다.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는 적게 감량했지만, 3개월 기간으로 보면 무리하지 않은, 정상적 감량에 해당한다. 처음 몸무게를 줄이겠다고 했을 때, 76.5kg이었는데, 오늘 아침 몸무게는 69.5kg이었으니 60kg대로 내려온 것만으로도 50%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하루 한 시간 정도 근력운동과 유산소운동을 하면 확실히 체중 감량에 효과가 있다. 운동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건 차이가 크다. 아직 의학적 검사를 하지 않아서 정확한 결과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 체중이 빠지면서 뱃살이 조금 들어가고, 혈압이 조금 내려간 걸 느낀다. 뱃살은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며, 혈압은 가끔 병원에 갈 일이 있거나 코로나19 예방접종을 하러 가서 잰 기록을 보고 알게 된 것으로, 예전 몸무게로는 고혈압 판정을 받을 정도까지 올라가 있었다면, 지금은 정상 범주로 내려온 걸 알 수 있었다. 운동과 함께 음식도 나름 조심하면서 먹었는데, 과식은 거의 하지 않았고, 점심 한 끼도 잡곡밥 위주로 먹고, 적게 먹으려 노력했다. 음식을 적게 먹어도 생활하는데 아무 지장도, 어려움도 없었으며 가장 지키고 싶었던 원칙은 저녁7시 이후에는 물 외에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저녁부터 다음날 점심까지 음식물을 먹지 않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다만, 7kg을 감량했어도 확연하게 달라진 것은 없다. 뱃살은 여전히 나와 있고, 겉으로 보기에 많이 달라보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꾸준히 운동과 음식 조절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분명하다. 특히 나이 들면서 체중 조절을 하지 못하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음식을 적게 먹을 것, 꾸준히 운동할 것,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흡연을 하지 말 것, 술을 지나치게 마시지 말 것 등 기본 상식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건강한 몸이 아니어서 특히 이 원칙을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고, 체중 관리와 음식 조절을 평생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건강에 문제가 없었다면 나는 운동과 체중 조절을 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고, 그건 지금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높다. 그러니 지금 건강이 나빠진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서비스 비용과 노동의 가치
    서비스 비용과 노동의 가치 엊그제 냉장고 액정 화면에 에러 메시지가 뜨면서 냉동 기능이 안 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마침내 고장이 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래, 이 정도면 오래 잘 썼지'라고 수긍했다. 냉장고를 비롯해 우리집에서 쓰고 있는 가전제품은 집을 짓고 모두 새 물건으로 장만한 것으로, 이제 17년째 쓰고 있다. 가전제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엘지(LG)전자 제품이다. 나는 엘지전자와 아무 인연이 없지만, 가전제품은 엘지전자가 가장 훌륭하다는 건 알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때도 망설임 없이 엘지 제품을 추천하는데, 그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엘지 제품이 17년만에 고장이 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우선 냉장고를 앞으로 조금 끌어낸 다음, 전기 콘센트에서 냉장고 전원을 빼서 다시 끼웠더니 액정의 에러 메시지는 사라지고, 정상 화면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정상인지, 고장인지 알 수 없어서 온라인으로 서비스 신청을 했다. 온라인 접수에서는 가까운 날짜가 없었고, 가장 빠른 날짜가 8월 20일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어 일단 신청을 해두었는데, 이틀이 지나서 서비스 기사가 전화를 했다. 기사는 매우 친절하게, 냉장고와 냉동실의 상태를 물었고, 냉동실 안쪽 벽면에 성애가 끼었다면, 그 성애 때문에 냉동 기능이 떨어질 수 있으니 가능하다면 냉동실을 비우고, 하루 정도 말리면 냉동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서비스 기사의 말대로 하면 기사가 우리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기사는 다른 곳을 방문할 수 있으니 서로 좋은 방법이고, 나에게는 더 좋은 일이다. 서비스 기사는 자신이 돈을 벌 수 있음에도 그 기회보다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조언을 해 준 것이다. 나는 서비스 기사에게, 그래도 시간이 되면 방문해 달라고 했다. 냉장고는 다시 정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전문가의 진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비스 신청을 하고 이틀이 지나서-공식적으로는 무려 10일 뒤에 방문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우리집을 방문한 기사는 냉장고를 살펴보더니 이상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니, 냉장고(냉동실)는 고장난 것이 아니었고, 성애 때문도 아니고, 문이 약간 덜 닫혀서 발생한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다. 기사는 냉장고 뿐 아니라, 다른 제품에도 문제가 없는지 물었고, 세탁기의 배수 장치를 확인해 주었다. 가전제품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우리집에 있는 가전제품은 모두 엘지전자 제품이고,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장 없이 쓰고 있다. 제품을 잘 만들고, 오래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기업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사는 출장비를 받아야 한다고 했고, 기꺼이 출장비를 지불했다. 1만8천원. 어떤 사람은 이 돈도 비싸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나는 이 출장비가 싸다고 생각한다. 1만8천원을 지불하면, 최고의 기술자가 산골까지 찾아와 고장난 제품을 고쳐준다. 지난번 에어컨(이 에어컨은 엘지전자 제품이 아니었다)이 고장났을 때는 몹시 급한 상황이어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개인 수리업자에게 부탁했는데, 양평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개인 수리업자는 우리집에 와서 몇천 원 하는 센서 부품을 교체하고 5만원을 받았다. 물론, 나는 그것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엘지전자의 출장 서비스 기사도 개인사업자에게 위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즉, 기사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사업자'인 것이다. 과거에는 서비스 기사가 엘지전자에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였지만, 지금은 위탁회사가 있던지, 아니면 개인사업자로 바뀐 것으로 아는데, 그들은 최대한 많이 집집을 방문해 고장난 제품을 수리하고, 출장비와 부품비를 청구해서 매출을 올려야 하며, 그 와중에 '친절함'에 관한 평가까지 신경 써야 한다. 우리는 전자제품의 출장서비스를 당연하게 여긴다. 출장비 받는 것을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조금만 늦거나, 친절하지 않으면 마구 항의를 하거나 크레임을 걸어서 서비스 기사를 못 살게 굴고, 불이익을 받도록 만든다. 이건 음식 배달을 하는 음식점과 배달 서비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택배 회사와 택배 기사에 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 '고객이 왕'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바탕으로, 모든 서비스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몹시 권위적이고 '갑'의 위치에 있다는 듯 말하고 행동한다. 물론, 이런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 소수의 사람들이 사회 분위기를 흐리고, 서비스 노동자를 괴롭게 만든다. 한국에서는 노동자의 가치가 매우 낮게 평가되고 있다. 기술자, 전문서비스를 하는 노동자들은 그들이 하는 노동에 비해 적은 대가를 받고 있으며,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자본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노동자의 가치가 적은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노동자에 대한 일반의 인식과 대우 역시 합당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도 큰 문제가 된다. 사회 전체가 노동의 중요성, 노동의 역할, 노동의 가치에 대해 합리적 합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동자 또는 기술자를 바라보고, 대하는 시선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전문직 기술자, 노동자에 대해 따로 배우지 않으며, 사회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주로 '사'로 끝나는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같은 직종을 높은 가치로 여기도록 학습하고 주입하는 교육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외의 모든 직업과 기술에 대해서는 하찮게 여기는 풍토가 생겨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히 일부 자본가와 부르주아를 제외하면 모든 사람은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노동의 종류와 강도가 다를 뿐,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은 곧 자기의 직업, 업무를 뜻한다. 누구든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그 일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 단순 반복 노동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객의 요구가 모두 달라서, 그 요구에 맞춰야 하는 까다롭고 복잡한 노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적으로 하찮게 여기는 직업이나 직종이라 해도 그 일 자체가 하찮거나 쓸모가 적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천대받는 직업, 직종이 사회에서는 더 귀하고, 소중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쓰레기를 치우는 노동자는 사회적 지위나 대중의 직업 인식에서는 하위에 속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상위에 속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상식적이고, 올바른 사회라면 사회의 구성원들이 꺼리는 일을 맡아서 하는 노동자에게는 그에 걸맞는 임금과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노동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내가 하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노동도 역시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존중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갑질'이 발생하는 건 '노동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일을 하는 노동자의 수고를 고맙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오는 현상이다. 노동을 단지 수단으로만 여기도록 가르치고, 노동자 특히 육체노동자는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이어서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인식을 공공연하게 대중 매체의 드라마나 커뮤니티에서 발언하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노동을 바라보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천박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노동' 그 자체와 노동자를 대하는 인식이 무지하고 천박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학력, 경제적 부와 관계 없이 인성이 비뚤어진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들이다. 사회구성원 가운데 일정 비율로 싸이코패스, 사회부적응자, 인성이 나쁜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건 교육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복지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다. 다만, 이런 사람들에게 패널티를 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서, 노동자가 부당하게 갑질을 당하지 않도록 사회적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 '노동은 신성하다'고 말한다. 노동이 신성하려면, 노동의 결과가 그만큼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성한 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노동을 하는 노동자의 대우에 따라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을 뿐이다. 즉, 노동의 의미도 자본주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인간성과 윤리, 도덕성마져도 '자본주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범죄를 저질러서 부자가 되었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인물로 바라보는 것이 그런 예의 하나인데, 물질만능, 화폐숭배의 사회는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는 사회이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 먹어도 된다는 논리가 통용되는 사회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내고, 복지를 강화하고, 편의시설을 확충하는 것은 이런 약육강식, 정글의 논리가 옳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평범하고 많은 우리의 이웃을 존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 가족 가운데 누군가는 반드시 노동을 하며 돈을 벌고 있고, 노동하는 사람은 다시 누군가에게 '을'의 입장에 놓이게 되어 있다. 가족이 다른 사람에게 '갑질'을 당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다른 노동자에게 '갑질'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좋다고 생각할까.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건강일기-006
    건강일기-006 운동 방식을 바꾸다 6월 7일부터 7월 17일까지 약 40일 정도를 매일 3,000개 이상 줄넘기를 했다. 그러면서 음식을 줄이고, 밀가루와 튀긴 음식, 간식,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식이나 음료 등을 먹지 않아서 그런지 그 사이에 약 6kg이 줄어서 다이어트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30일이 지나면서 몸무게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 운동과 음식도 거의 변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몸무게가 줄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운동이 부족하거나, 근육 운동을 그동안 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는 판단을 했다. 줄넘기는 유산소 운동이고, 복부의 내장 지방과 몸무게를 줄이려면 유산소 운동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근력 운동에 관해 아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아들은 혼자 연구해서-물론, 인터넷으로 정보를 많이 찾아봤겠지만-다이어트를 성공한 경험이 있어서 운동에 관해서는 나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이건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들이 알려준 근력 운동 방식은 아래와 같다. 1. 런지 25회 양 다리 2. 푸쉬업 적당히 가능한 만큼 (10 ~ 30회 중 선택) 3. 스쿼트 25회 4. 플랭크 1분 5. 복부운동 30회 이게 1 루틴. 루틴 하나를 1~2회 하면 됨 아들이 알려준 운동은 요즘 많이 하는 '홈트레이닝'의 여러 과정 가운데 근력 운동 부분이고, 여기에다 트레드밀에서 걷기와 달리기를 병행하는 방법도 있었다. 나는 위의 과정에다 '풀업(턱걸이)'도 하려고 문틀 턱걸이를 주문했다. '풀업'은 최근 조국 교수가 SNS에 동영상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응원과 지지의 릴레이 풀업 영상을 올리면서 화제가 되었는데, 팔 근육 운동에도 도움이 많이 될 듯 하고, 전체 근육 운동에서 비어 있는 부분 같아서 '풀업'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월 18일부터 줄넘기는 중단하고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아들이 알려준대로 런지, 푸시업, 스쿼트, 플랭크, 복부운동 순서로 했는데, 이 과정을 세 번 반복했다. 줄넘기 3천 번 한 것 만큼, 아니 그 이상 힘들었다. 줄넘기를 하면 숨이 차고 땀을 많이 흘리지만 샤워를 하고나면 몸이 개운하고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면, 이 운동을 하고 나면, 온몸의 근육이 꿈틀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처음 근육 운동을 해서 그런 듯 한데, 힘도 많이 들고, 근육을 더 많이 움직이는 건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땀이 많이 나고, 숨이 차는 것도 줄넘기할 때 못지 않았다. 그만큼 근육 운동이 힘들다는 것이고,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는 증거겠다. 이 운동이 좋은 점은 아주 덥거나 추운 날에도 집안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줄넘기만 해도 늘 바깥에서 하는데, 봄부터 가을까지는 할 수 있지만, 겨울에는 어렵고 또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못하기 때문에 조금 걱정스러웠는데, 집안에서 근육 운동을 해보니 충분히 효과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마다 빼먹지 않고 운동을 하는 건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석달을 목표로 운동하고 있는데, 두달 동안 나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운동했다. 7월 18일부터 근력운동을 했으니 오늘(8월 7일)까지 21일 동안 근력운동을 했다. 아래 식단표를 보면 조금 특이한 부분이 보이는데, 운동을 마치고 배가 많이 고파서 참외를 두 개 또는 작은 참외는 세 개를 먹었다. 다른 과일을 먹을 수도 있지만, 내가 참외를 가장 좋아하고, 참외를 먹으면 소화 기능에 도움이 된다는 경험이 있고, 참외는 칼로리가 낮아서 두 개, 세 개를 먹어도 칼로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점심은 칼로리 걱정하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다 먹었다. 다만 밀가루 음식, 튀긴 음식, 설탕과 당류가 많이 들어간 음식, 공장에서 만든 음식은 조심하려고 노력했다. 밀가루 음식을 제외하니 먹을 수 있는 음식 종류가 매우 적다는 걸 새삼 느꼈다. 국수 종류를 평소에도 좋아해서 자주 먹었는데, 두 달 동안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먹었고, 튀긴 음식은 더욱 적게 먹었다. 하루 기초대사량이 대략 1600kcal 정도라면, 하루 두 끼를 먹어도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다만 칼로리가 적은 음식과 소화가 잘 되고, 식이섬유가 많은 음식을 먹는 것이 관건인데, 이런 음식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채소, 생선, 과일이다. 여기에 육류도 빼놓을 수 없는데, 고기를 먹더라도 구워서 먹는 것보다는 삶아서 먹는 방식으로 바꿨다. 근력운동을 시작한 7월 18일부터 8월 7일까지 몸무게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운동량이 적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고, 운동량과 음식의 칼로리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몸무게가 줄어들지 않는 거라고 판단했다. 내 키에 적당한 몸무게는 61kg 정도인데, 그럴려면 9kg을 더 감량해야 한다. 8월 말까지는 무리하지 않고 4-5kg 정도를 감량할 계획인데, 그러자면 조금 더 배가 고픈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저녁 6시 이후에 음식을 먹지 않고 다음 날 아침까지 빈속으로 있으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많이 나는데, 이 소리가 들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 몸이 그만큼 건강해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탐하려는 유혹을 얼마나 잘 견디는가와 근력운동을 비롯한 운동량과 시간을 좀 더 늘리는 것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바깥 온도가 높기도 하고, '코로나19' 상황이라서 야외 활동이나 야외 운동을 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인데,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은 실내에서 근력운동 시간을 늘리는 것 뿐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자본, 앙시앙 레짐, 반동의 총공격
    자본, 앙시앙 레짐, 반동의 총공격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국 내부의 계급 이익을 둘러싼 신경전이 팽팽하게 전개되고 있다. 사회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 주로 수구 반동을 지지하는 사람들 - 은 특정한 정당 또는 후보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서 비난하는 경향이 많은데, 지금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큰틀은 크게 세 가지로 봐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고위 관료였던 윤석열과 최재형이 국민의힘에 입당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면서, 현재 정부의 관료들이 가진 가치관,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기도 하다. 국민의힘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승만의 자유당,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정당에 뿌리를 둔 매국반동쿠데타토착왜구정당이다. 국민의힘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단 한번도 반성하거나 사죄한 적이 없으며, 자기의 뿌리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는 자들이 모인 정당이다. 즉, 그들은 스스로 매국반동쿠데타토착왜구라는 걸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당에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윤석열과 최재형은 그들이 속했던 관료 집단에서 수장을 했던 자들로, 그 집단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즉, 한국의 관료집단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보수화, 수구화, 과거지향적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표를 내고 뛰쳐나오지는 않았지만, 기재부의 홍남기 같은 자 역시 수구적 사고방식을 가진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들 관료들의 사상적 기반과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이 철저하게 '자본종속적'이라는 데 있다. 재정을 직접 다루는 홍남기의 경우, 그가 결사적으로 전국민 재난지원금에 반대하고, 끝까지 차등 지급을 고수하는 것은 정부 재정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정부 재정과 운용에 관해서는 이미 최배근, 정균승 교수 등 학자들에 의해 완벽하게 논파당했기 때문에 홍남기는 반론을 제기하기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를 들이대며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에 반대하는 것은 홍남기류의 인간들이 정부 내부에서 문재인정부에 타격을 입히려는 정치행위인 것이다. 이들 무능하고 퇴행적 관료들과 국민의힘이 반개혁적, 반동적 행위를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배경에는 '자본'이 있다. '자본'은 본능적으로 '깨끗한 정부'를 싫어한다. 역사적으로 자본의 형성과 축적 과정을 보면, 자본은 '착취'와 '경쟁'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착취'와 '경쟁'이 쉬운 환경을 만들어야 자본의 이윤을 확대할 수 있다. 즉,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일수록 '자본'은 먹거리가 많아지고, 이윤을 축적하기 쉽다. 선진복지 국가의 좋은 예로 드는 북유럽 국가들도 '자본'이 존재하는데, 그러면 북유럽 국가들도 부정부패가 만연한 국가냐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국민의 민도가 높은 나라는 국민과 정부, 자본의 합의와 견제에 의해 '자본'이 '비교적 깨끗한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자본'도 이윤추구를 위해 범죄를 저지를 엄두를 쉽게 내지 못한다. 즉,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이 높을수록 '자본'에 의한 범죄는 억제되는 것이다.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 되었지만, 과거 반민주, 반노동, 반인권 제도와 인식이 상당히 남아 있다. 국민의힘이 여전히 30% 남짓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상징적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갈등을 두고 정당끼리의 권력투쟁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국민의힘은 구체제(앙시앙 레짐)의 뿌리이며, 국민의힘 의원들은 그 부패한 나무의 열매이며,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인간들은 그 부패한 나무의 잎사귀들이다.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가장 먼저 부정부패의 뿌리이자 과거 반민주, 쿠데타, 친일매국 세력인 국민의힘을 뿌리채 뽑아버려야 한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최재형 같은 구체제 신봉자들이 집결하는 최후의 보루이며, 그 성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은 뒤에서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자본'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깨어 있는 시민들이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시민의 힘이 정권을 창출하고 정권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커졌다. 국민의힘이 '자본'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겨우 30% 정도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 시민의 단결한 힘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고위 관료 출신의 윤석열, 최재형은 국민의힘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는 자들이다. 이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간 것은 다행이며, 전선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민주당은 내부의 적을 찾아내 제거해야 한다. 민주당의 대통령 예비후보 가운데 국민의힘과 정체성을 같이 하는 자들이 있다. 이낙연, 정세균, 박용진 같은 자들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은 민주당에 몸을 담고 있을 뿐, 국민의힘에 있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인물들이다. 민주당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정당이지만, 촛불시민은 민주당을 진보적 영역으로 견인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재명, 추미애 후보가 가장 적극적이고 앞장 서 민주당의 개혁성을 이끌고 있고, 젊은 의원들이 힘을 싣고 있다. 민주당이 사는 길은 국민의힘으로 대표하는 앙시앙 레짐, 수구반동, 자본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적들과 싸워 피를 흘릴수록 촛불시민은 더욱 강하게 민주당을 지원할 것이다. 민주당 내부에는 여전히 상당수 '수박'들이 존재한다. 이들 기회주의자, 출세주의자를 걸러내고, 민주주의 가치를 담은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것이 민주당이 권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금 한국에는 안타깝게도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다. 사회주의 정당, 공산주의 정당 같은 '진짜'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못하는 상황은 이해하면서도 안타까운데, 지금까지 이런 역할을 한 것이 '민주노총'이었다. 하지만 민주노총 역시 계급투쟁을 포기하고, 경제투쟁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더 이상 반자본주의 투쟁을 이끌 집단은 한국사회 내부에는 없다고 판단한다. 현실적으로 현재 한국사회에서 진보적, 개혁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수준은 문재인정부가 최선이다. '문재인'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과제를 하나씩 해결하고, 민주적 테제를 확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문재인정부의 뒤를 이을 정부는 반드시 문재인정부의 정체성을 이어가야 한다. 물론 내용적으로는 그보다 한발 앞서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재인대통령은 몹시 신중하고 강한 책임감을 가진 분이라 적과의 싸움에서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었다면, 다음 대통령은 손에 피를 묻힐 것을 각오해야 한다. 문재인정부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인 개혁과제 가운데 다음 정권에서는 반드시 끝장을 봐야 하는 것이 바로 검찰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 교육개혁, 부동산개혁, 노동개혁이다. 이 과제는 시간을 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므로, 다음 대통령은 온몸에 피칠갑을 할 각오를 하고 앞장서야 한다. 이런 각오가 없는 사람은 대통령 후보로 나와서도 안 되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내 살을 내주고 적의 뼈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 그럴 정도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실력이 있는 사람만이 다음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 사람을 이재명이라고 생각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건강일기-005
    건강일기-005 운동 시작 약을 먹는 두 달 동안 그나마 조심한 건 과식, 야식, 술이었다. 술은 체질이 맞지 않아 거의 먹지 않았지만, 아주 드물게 한 잔 마실 때가 있었다. 모임이나 집에서도 저녁에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전부인데, 간경변 진단을 받은 다음부터는 술을 완전히 끊었다. 내 오랜 식습관은 아침을 먹지 않고, 점심과 저녁을 먹는 것인데, 중간에 간식을 항상 먹었다. 계속 살이 찌는 원인은 소비하는 칼로리보다 먹는 칼로리가 많기 때문인 건 상식이다. 먹는 것 이상으로 움직여서 칼로리를 소모하면 살은 찌지 않는다. 이런 상식을 알면서도 생활에서는 실행이 어려운데, 내 경우도 그렇다. 그나마 몸무게가 75-76kg에서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내 신체 조건에서 적당한 몸무게는 60-65kg 정도인데, 최소 10kg에서 많게는 15kg을 줄여야 했다. 4월 초에서 6월 초까지 두 달 동안은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불규칙하게 걷기를 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이 들면 식탐도 줄어들 줄 알았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먹고 싶은 것이 많았고, 한 끼를 먹을 때마다 충분히 포만할 때까지 먹었다. 나중에 운동을 하면서 깨달은 거지만, 그동안 나는 매 끼의 음식량이 많았고, 하루 두 끼를 먹는다고 하지만 그 사이와 저녁에 간식을 먹는 것 때문에 절대 살이 빠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 끼를 먹을 때도 음식의 내용과 질을 고려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의사선생님은 '싱겁게 먹고, 간식, 야식을 먹지 말고, 국물 음식도 가능한 먹지 말고, 밀가루 음식, 흰쌀밥도 가능한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지만, 이 상황이 바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건 내 의지가 약하기도 했고, 지금 약을 먹고 있으니 음식을 조절하지 않고도 간 상태가 좋아지는지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다만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는 건 의식을 하면서 먹었다. 매일 간략하게 메모를 하는데, 점심과 저녁에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도 기록하고 있다. 병원에서 두 달치 약 처방을 받아 약을 먹는 기간 동안에 먹었던 음식은 그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간식과 야식이 줄어들긴 했다. 4월 말부터는 참외를 주문해서 먹기 시작했다. 나는 참외를 퍽 좋아하는데, 해마다 참외가 나오기 시작하면 10kg짜리 참외를 주문한다. 단, 참외값이 비싸므로 '흠과'를 주문하는데, 이 '흠과'의 종류도 참외 크기에 따라 '소, 중, 대'로 나뉜다. 나는 '대과'를 주문해서 먹는데, 기간에 따라 참외값이 변하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다. 4월 말에 참외 10kg 흠과의 가격은 약 3만8천원이지만 가격은 점차 내려간다. 2만6천원이 되었다가 7월이 되면 1만6천원까지 내려가는데, 참외가 한창 많이 나올 때라서 똑같은 참외라도 값이 싸진다. 참외는 거의 나 혼자 먹는데, 작년(2020년)에는 여름 한철에 내가 먹은 참외가 60kg이었다. 4월에서 6월까지도 참외를 먹었다. 참외는 칼로리가 낮고, 소화도 잘 되며, 포만을 느낄 수 있는 과일이어서 밥을 좀 적게 먹을 수 있지 않을가 하는 기대를 가졌다. 몸의 변화를 가장 쉽고 빠르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체중을 확인하는 것이다. 약을 먹는 두 달 동안 따로 몸무게를 측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몸무게는 거의 변화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5월 말에 아산병원에서 채혈하고, 일주일 뒤인 6월 7일, 다시 의사선생님을 만났다. 의사선생님은 피 검사 결과를 보면서, 지난 두 달 사이에 변화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건강을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는 비난처럼 들렸고,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의사선생님은 그런 의미로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지난 두 달 사이 내가 건강을 위해 노력한 것이 없다는 건 분명했고, 그래서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의사선생님은 다시 똑같은 약을 3개월치 처방해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생활이 지금과는 달라야 한다는 자각을 했고, 운동과 절식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다음 날부터 운동을 시작했는데, 내가 선택한 운동은 줄넘기였다. 그 전까지는 주로 걷거나 트레드밀에서 뛰는 운동이 전부였는데, 그런 방법으로는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6월 8일부터 줄넘기를 시작했다. 운동 목표는 하루 3,000개. 왜 3천 개를 해야 하는지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 정도는 해야 운동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번에는 나 자신에게 핑계를 대지 않고, 무조건 하기로 다짐했다. 첫날 줄넘기는 2,000번을 했는데, 운동을 전혀 하지 않던 몸이라 첫날 줄넘기는 엉망이었다. 한번에 넘는 횟수도 열 번을 넘기지 못했고, 무릎 안쪽, 허벅지, 종아리, 발 전체가 다 아팠다. 줄넘기를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줄넘기를 할 때 요령도 몰랐고, 어떤 곳에서 줄넘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도 몰랐다. 줄넘기를 하는 장소는 처음에 풀밭, 데크 등에서 해보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집앞 도로가 아스팔트여서 그곳에서 줄넘기가 비교적 잘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줄넘기를 할 때 복장과 신발도 어떤 것이 좋은지 몰라서 고생했다. 처음에는 달리기용 신발을 신고 줄넘기를 해봤는데, 자꾸 발에 줄이 걸려서 멈췄다. 그러다 바닥이 평평하고 운전할 때 신기 편한 가벼운 신발을 신고 줄넘기를 하자 줄이 걸리지 않고 좋았다. 줄넘기를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첫 날은 2,000개를 하고, 둘째날부터는 계속 3,000개 이상을 했다. 일주일 동안 무릎 안쪽, 허벅지 등이 아팠지만, 처음 작정한 것처럼, 핑계 대지 않고 날마다 줄넘기를 했다. 운동하는 첫날 몸무게를 쟀을 때, 76.5kg이 나갔다. 몸은 무겁고, 배는 출렁거리고, 다리는 아팠지만, 나 자신에게 다시 실망하는 것보는 아픈 것이 나았다. 처음 줄넘기를 할 때는 열 개, 스무 개를 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차츰 발에 걸리지 않고 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백 번을 넘길 때는 감격스러웠다.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 스무날이 지나면서 줄넘기는 백 번, 이백 번을 한 번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줄넘기 운동 시간도 처음에는 3천 번을 하려면 한 시간이 훨씬 넘어서 약 80분 정도를 해야 마칠 수 있었지만 점차 시간이 단축되어 한 달 뒤에는 3천 번 줄넘기 시간이 약 40분대로 줄어들었다. 줄넘기와 함께 음식도 가능한 적게 먹으려 노력했다. 매일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자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했고, 아침에 운동을 하면 몸무게와 줄넘기 횟수를 기록했다. 점심은 여느 때와 똑같이 먹었고, 간식과 야식을 먹지 않았으며, 저녁은 적게 먹었다. 저녁을 적게 먹고 잠을 자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크게 들리는데, 저녁부터 다음날 점심을 먹기 전까지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듣는 것이 기분 좋았다. 그리고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흰쌀밥 대신 잡곡밥으로 바뀐 것이다. 밥은 늘 잡곡밥을 먹고, 배가 많이 고프면 참외 한 개를 먹거나, 참외로 저녁밥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 줄넘기를 3천 개씩 하고, 잡곡밥을 먹고, 밀가루 음식은 거의 먹지 않고, 인스탄트 음식,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식도 거의 먹지 않으며, 저녁은 간단하게 먹으면서 몸무게의 변화를 기록하니 처음 며칠은 변화가 없던 몸무게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76.5kg에서 꼭 한 달이 지난 7월 7일에는 70.9kg으로 약 6kg이 줄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면서, 다음 병원에 갈 동안인 3개월 사이에 몸무게를 적어도 10kg 이상은 줄여야겠다고 결심했고, 목표 체중은 63kg으로 설정했다. 한 달이 지나서 6kg 정도를 줄였으니 3개월이면 이론적으로 18kg을 줄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또 실제로 그렇게 몸무게가 줄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다. 다행인건, 내가 운동과 절식을 시작할 때, 가족 모두 나처럼 운동과 절식을 함께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에 동의하고, 점심은 잡곡밥을 중심으로 고기도 먹고, 저녁은 샐러드를 먹기로 했다. 나는 저녁에 먹을 샐러드 재료를 구상했다. 양상추, 새싹, 방울토마토, 피망, 오이 등 채소를 준비하고, 단백질은 닭가슴살을 준비했다. 샐러드용 소스는 따로 준비하지 않고, 올리브오일을 뿌려 먹었는데, 의외로 맛있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우연히 '인바디 체중계'를 싸게 구입할 수 있어서, 스마트폰과 연동해 날마다 체중을 비롯해 여러 가지 신체 지수를 측정하는데, 우리집 거실에는 체중계 두 개가 나란히 있어서, 체중계에 각각 올라가 몸무게의 변화를 확인한다. 몸무게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가장 적게 나가는데, 아침과 저녁 사이에 몸무게 변화는 많게는 2kg까지도 차이가 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달이 지나면서 몸무게가 6kg쯤 빠졌지만 70kg 초반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정체기가 시작되었다. 문제가 생겼다고 느꼈고,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건강일기-004
    건강일기-004 두 달의 시간 채혈, 위내시경, CT 촬영을 하고 일주일 뒤에 담당 의사선생님을 만났다. 의사선생님을 만나기 직전에 긴장감이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의사선생님의 말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침내, 내 이름이 불렸고, 나는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내도 걱정이 되어 함께 왔는데, 나는 의사 앞 빈 의자에 앉았고, 아내는 내 뒤에 서 있었다. 의사선생님이 앉아 있는 책상에는 모니터 두 대가 보였고, 거기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미지가 보였다. 의사선생님은 모니터를 보면서 설명했다. 간의 표면이 울퉁불퉁한 것은 이미 간경화가 많이 진행된 것이다, 간에 결절도 여러 개 보이는데, 이미지로만 보면 상태가 조금 나빠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단 약으로 치료하면서 경과를 보자고 했다. 그때까지 의사선생님은 간 상태에 관해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한 가지만 궁금했다. '간암은 아닌 거죠?' 의사선생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 간암은 아니고 간경변입니다.' 그 말 한 마디를 듣는 것이 내 삶에서 변곡점을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진료실에서 나와 간호사와 다음 진료 일정을 잡았다. 두 달. 간경변 치료제 두 달치 처방전을 받아 나오면서, 아내와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내는 '다행이다'라며 깊은 숨을 내쉬었고, 오늘 검사 결과를 알기까지의 지난 일주일 동안 몹시 스트레스를 받았노라고 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얼마나 졸렬하게 살아왔는가를 반성했다. 나는 이기적으로 살았다. 내 존재가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내가 부모에게 불효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삶에 큰 미련이 없었고, 죽음은 언제든 가까이 있으며, 가족에게 나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아들은 내가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나는 바닷가 모래알처럼 아무 존재감 없이 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약 60년을 살아오면서 남긴 것은 쓸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 억울할 것도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아내와 아들은 물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누나가 둘이나 있고, 그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건 도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은 내 건강을 깊이 염려하고 있었고, 심지어 아들은 만약 내가 간암이라면 자기 간을 이식할 거라고, 엄마에게만 몰래 말했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무명인이지만, 가족에게는 '특별한' 존재였다. 가족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을 하기 어렵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족은 서로에게 살갑게 대하기 보다는 무심하게 대한다. 심지어 부모는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고, 자식은 부모를 원망하거나 반항한다.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사소한 일로 다투거나 미운 감정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은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 때, 가족 가운데 누군가 고통을 당할 때 서로를 끌어 안고, 단단하게 뭉친다. 내가 간경변 진단을 받기 전까지의 삶은 무난한 삶이었다. 내 삶은 결혼 전과 후로 나뉜다. 결혼 전까지 내 삶이 거친 황야를 떠도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결혼한 다음부터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안정한 삶을 살았다. 이 모든 건 아내 덕이었고, 나는 그걸 늘 기억하며 살아왔다. 결혼 초기에 직장 생활을 몇 년하고 도시에서 시골로 이주한 이후 나는 줄곧 지역 사회에서 크고 작은 일을 했다. 지역에서 일한다는 건 봉사를 한다는 뜻이다. 돈을 받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내 돈을 쓰면서 봉사를 하는 것이 지역 사회에서의 일이다. 나는 '주민자치위원'으로 시작해 내가 사는 마을의 이장도 하고, 지역의 몇몇 단체에서도 일했고, 지금도 일하고 있다. 군 단위 전체 인구가 불과 12만 명에 불과하고, 내가 사는 면 인구도 1만 명인 작은 지역에서 일하는 건, 내가 가진 작은 능력을 투입하는 것이다. 지역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내가 든든한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를 부럽게 생각한다. 나는 백수가 분명하지만, 시골에 정착하면서 늘 바빴다. 대부분은 내가 사서 고생하는 일을 저지르기 때문이지만, 지방으로 내려온 이후 나 스스로 가진 생각 가운데 하나는, 지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해 내가 가진 작은 능력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아이가 '어린이 집'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병설유치원, 시골의 분교를 거치고, 청년이 될 때까지 나는 지역에서 일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내가 가진 별 것 아닌 능력이 도움이 된다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시골에서 한 20년쯤 사니 이제서야 지역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와 사람들과도 낯설지 않게 인사할 정도가 되었다. 그동안 보낸 시간은 지역을 이해하고, 배우는 시간이었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초반에는 의욕이 앞서서 지역의 상황에 맞지 않는 제안이나 주장을 해서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름 보람된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만든 적도 몇 번 있어서 그간의 시간이 낭비였던 것은 아니다. 면 단위 주민자치 소식지를 최초로 기획, 편집, 제작해서 지금도 발행하고 있고, 마을 홈페이지, 면 단위 홈페이지도 처음으로 만들어 자료를 올려보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당시만 해도 너무 앞서나가서인지,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결국 사라졌고, 현재는 새로운 방식으로 지역의 일을 해나가고 있다. 내 본업은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시골에 정착하고 소설을 쓰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활동이 거의 없는 겨울 몇 달 동안 장편 소설 한 편을 쓰는 것으로 작정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서너 편의 장편을 쓴 것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써놓기만 하고 그만이었다. 스스로 삼류 작가라고 생각해서, 어디에서 '작가'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고, 누가 나를 작가라고 알아봐 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나마 2010년부터 시작한 페이스북이 밖으로 향한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아내와 돌아오는 길에 문호리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쌀국수. 일주일 전, 병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갔던 날도 돌아오면서 쌀국수를 먹었다. 일주일 전에는 불안한 마음으로 쌀국수를 먹었다면, 이번에는 안심하는 마음으로 쌀국수를 먹었다. 두 달치 약을 받았고, 내 일상에서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약을 전혀 먹지 않고 살았다. 퍽 건강한 편이었고, 내가 건강한 것은 모두 어머니 덕이라고 감사하며 살았다. 어머니 생전에 들었던 이야기로, 나는 네 살까지 어머니 젖을 먹었다고 했다. 세 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으니, 아마도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퍽 건강하게 살았고,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할 때마다 고맙다고 혼잣말을 한다. 쌀국수를 맛있게 먹고 집에 돌아와 예전처럼 일상을 보냈다. 다음 병원갈 때까지 두 달의 시간이 있었고, 그때가 4월이었다. 의사선생님은 지나가는 말처럼 '음식은 싱겁게 먹고, 운동하고, 체중을 좀 줄이고...'라고 했지만, 나는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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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건우
    2021-09-24
  • 건강일기-003
    건강일기-003 아산병원 병원에 올 때까지 일주일 동안 늘 해오던 일상이 이어졌다. 가능한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과거에 내가 이래서 지금 이렇게 되었다는 후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를 말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고,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리려 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은 오로지 내 책임이 맞다. 그래서 가족과 친구, 지인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검사를 하는 날에도 혼자 가려했지만, 아내가 휴가를 내고 동행했다. 아산병원은 인연이 있는 병원이다. 병동도 낯익고, 우리 가족이 도움을 많이 받은 곳이라 마음은 편했다. 오전9시에 도착해 진료 접수를 하고, 마을 내과에서 받은 진료의뢰서와 초음파화면을 담은 CD를 제출하고 '간담도센터'로 갔다. 담당의사 선생님 진료실 앞에서 기다려 면담을 할 때, 의사는 이미 내가 제출한 초음파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기본적인 질문을 몇 가지 했고, 나는 간략하게 대답했다. B형 바이러스 보균을 처음 알게 된 건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20대라고 했고, 건강검진을 언제 했느냐는 질문에 꽤 오래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의사는 초음파 화면을 가리키며, 화면에 보이는 작은 점과 흰색 띠를 짚어가며 암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먼저 기본적인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면담 시간은 짧았고, 우리는 진료실 밖으로 나와 간호사에게 오늘 검사를 할 수 있는지 알아봤다. 나는 어제 오후부터 줄곧 금식을 하고 있었고, 오늘 검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큰 병원에서 곧바로 원하는 검사를 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편이다. 간호사는 상황을 확인하더니 검사 시간을 확인해 주었다. 채혈은 오전에, 위내시경과 CT촬영은 오후에 하기로 했다. 곧바로 채혈실로 가서 채혈을 했다. 열흘 사이에 피검사를 세 번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키와 몸무게를 쟀고, 피를 뽑았다. 며칠 사이에 세 번 피를 뽑으면서 느낀 건, 간호사의 숙련도에 따라 주사가 따갑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다른 곳도 비교적 아프지 않게 채혈했지만, 아산병원 간호사의 채혈은 조금 더 부드러웠다. 채혈하고 위내시경을 할 때까지는 시간이 약 2시간 정도 남아서 병원 바깥의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마침 벚꽃이 활짝 피었고, 바람이 불면 벚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봄이 한창일 때, 병원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고, 나처럼 뜻밖의 소식을 듣고 황망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봄이었지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고, 세상이 흐린 하늘처럼 우울했다. 나와 아내는 별다른 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주위의 벤치에는 사람들이 앉았다 떠나가고, 점심 무렵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료진들도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러 나왔다. 그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 오기 며칠 전, 군대 동기 모임을 했다. 내년이면 만40년이 되는 군대 동기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은 다섯 명이 모인다. 그 가운데 세 명이 양평에 살고 있어서 모임이 잘 유지되고 있다. 평택에 살고 있는 동기가 내년이면 정년 퇴직을 하고, 올해는 휴식년을 보내고 있어 우리를 초대했다. 우리는 삽교천에서 꽃게찜과 새조개 샤브샤브를 먹고, 당진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오후에는 당구를 치고, 저녁까지 맛있게 먹고 헤어졌다. 전화한 동기는 내가 병원에 검사하러 온 걸 알고 있었고, 걱정이 되어 전화했다. 동기는 올해 대학원에 진학했고,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동기들 모두 건강했으나 최근 조금씩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곧바로 위내시경 검사하는 곳에 접수하고 기다렸다. 한국에서 가장 큰 병원이라 아무리 빨리 진행해도 한 과정에 최소 한 시간은 걸린다. 사람들도 많고, 필요한 처치를 해야 하고, 의료진이 처리해야 할 업무도 많으니 그만큼 기다리는 건 당연하다. 위내시경을 하기 전에 팔에 주사를 맞았다. 위 운동을 둔하게 하는 약물이라고 했다. 며칠 전 건강검진을 하던 곳에서는 이런 주사를 맞지 않았는데, 그만큼 큰 병원이 갖는 장점이 있었다. 조금 기다리니 이름을 불렀고, 진료실에 들어가 의료진이 시키는대로 했다. 먼저 입을 벌리면 입안에 뿌리는 마취제를 뿌렸다. 그리고 침상에 비스듬히 누우면 되는데, 나는 이번에도 '비진정 내시경'을 선택했다. 몹시 괴로운 건 알지만 수면내시경보다 시간이 짧고, 곧바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내시경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는 어쩔 수 없이 구역질이 나왔지만, 그 뒤로는 참을만 했다. 이것 역시 지난 건강검진 때보다 부드러웠다. 더구나 이번에는 십이지장까지 내시경이 내려갔는데, 처치를 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친절하게 옆에서 설명해주면서 호흡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구역질은 한번만 했고, 참을만 했다. 그렇게 위내시경 검사를 마치고 CT촬영하는 곳을 찾아갔다. CT는 태어나서 처음 찍는다. 찍을 일이 없다는 건 운이 좋다는 뜻이었고, 지금 CT를 찍는 건 그 운이 다했다는 뜻이다. CT를 찍기 전에 조영제를 주입하려는 목적으로 손등에 주사기를 꼽는다. CT를 찍는 문 앞에는 조영제로 인한 각종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었다. CT를 찍기 전에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 입고, 순서를 기다리다 촬영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이름, 생년월일을 말하고-이 과정은 모든 처치 과정에서 항상 반복했다-기계의 침상에 누웠다. 헤드폰을 씌워주었는데, 그곳에서 CT를 조작하는 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촬영을 하는 중간에 조영제를 주입했고,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CT를 찍을 때도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참고를 반복했다. 약 10분 정도 누워서 CT촬영을 하고 나오니 이날 해야 할 검사를 모두 마쳤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 입고, 왼손 손등에는 주사바늘을 뽑아 지혈을 한 탈지면을 붙이고, 오른쪽 손목에는 검사를 받는 환자의 코드가 찍힌 팔찌를 낀 채 병원을 나왔다. 오후의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서울의 도로는 자동차로 가득했다. 어제 점심을 먹은 이후 오늘 오후까지 만24시간이 넘도록 물 한 방울 마시지 않았다. 오늘 아산병원에서 검사를 다시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어서 미리 준비를 한 것이다. 나는 퍽 운이 좋아서(?) 오늘 필요한 검사를 다 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호리에 들러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었다. 오늘은 금요일인데, 조금 특이한 현상이 있었다. 병원에서 오후3시 무렵 올림픽대로를 따라 집으로 오는데, 서울 바깥쪽에서 들어오는 차들이 평일 아침 출근길보다 훨씬 많아서 도로가 차로 막혔다. 우리가 가는 길도 차가 많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막히지 않고 잘 빠져나갔는데, 서종IC를 빠져나와 문호리 쪽으로 들어서자 차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거북이처럼 기어가기 시작했다. 평일 오후에 자동차가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보는 현상이다. 이 행렬은 우리가 늦은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양방향으로 계속되었다. 벚꽃이 피어서일까. 벚꽃이 피기 시작했고, 이번 주말이 절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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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건우
    2021-09-24
  • 건강일기-002
    건강일기-002 발병 오랜동안 '건강검진'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몇 가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 살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건강하게 태어나서 지금까지 비교적 건강하게 살았다. 10대 중후반에 편도선염으로 몇 차례 몹시 고생했는데, 그때는 어린 나이에 너무 심한 육체 노동을 하는 바람에 면역력이 약해져서 편도선염이 여러 번 발생한 것이다. 편도에 염증이 생기면, 열이 심하게 오르고 목으로 물을 삼키는 것도 고통스럽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마취도 하지 않고 메스로 염증 부위를 찢은 다음 고름을 빼내고 약을 발라주었는데, 그렇게만 해도 곧바로 열이 가라앉고 살 것 같았다. 20대 이후로는 편도선염이 발생하지 않았고, 병원에 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내 몸에 B형 바이러스가 있다는 말은 젊었을 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고, 알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B형 바이러스가 활성화되면 간경변으로, 간암으로 발전한다는 상식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다. 30대 후반에 '안철수연구소'에 입사해서 약 6년 직장생활을 할 때, 건강검진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B형 바이러스 항체가 생겼다'는 말을 들은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더욱 그 뒤로 안심하고 지냈다. 문제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둔 이후 지금까지 중간에 한 번 건강검진을 받고 그 뒤로 몇 년 동안 내가 자발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다는 데 있다. 건강검진을 받을 기회는 많았으나 딱히 의심할 만한 증상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생략한 것이다. 2021년 3월 25일, 건강검진을 받았다. 강남에 있는 KMI에서 했는데, 건강검진의 순서가 그렇듯 키, 몸무게, 혈압, 체지방 등을 확인하고, 피검사를 비롯해 몇 가지 검사를 순서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복부초음파 검사실에서 검사를 받던 중, 검사를 하던 분이 잠시 나갔다 다른 분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 분은 초음파 검사를 하면서 나에게 초음파 화면을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간은 표면이 매끄러운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내 간은 울퉁불퉁하게 보였고, 곳곳에 하얀 점과 긴 크랙이 보였다. 이걸 '결절'이라고 했다. 검사를 하는 분이 신중하게 말했다. 간경변 소견이 보인다. 가능한 빨리 내과에 가보시라. 건강검진하면서 가장 괴로운 순간은 위내시경할 때다. 보통 수면내시경을 하는데, 나는 비수면내시경을 선택했다. 비수면내시경의 괴로운 경험이 떠오르는 걸 보니 과거에도 이런 방식으로 위내시경 검사를 한 것이 기억났다. 입안에 마취제를 뿌리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내시경이 목을 통해 위로 들어가는 과정을 겪는 것은 매우 괴로운 시간이다. 몇 번의 헛구역질을 해야 하고, 검사를 받고나면 기진맥진하게 된다. 그렇게 12시쯤 모든 검사가 끝나고, 아내와 점심을 먹었다. 당연히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아내에게 '간경변 소견이 보인다'고 말할 때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것도 가벼운 정도가 아니고, 초음파 검사를 하는 분이 하는 말의 뉘앙스를 들어보면 간경변의 상태가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건강검진을 하는 날, 오전과 오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내 몸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간이 굳어가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태평하게 살았다. 그러다 검진을 통해 간이 굳어졌다는 사실을 알면서, 심각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나의 태도는 플라톤주의를 떠올린다. 나는 오전이나 오후나 변하지 않은 존재지만, 나의 의식은 오전과 오후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바뀌었다. 실재하는 나는 과연 어느 쪽일까. 아무 걱정 없던 오전의 나, 병변이 발견되어 온통 근심과 걱정, 공포의 감정에 휩싸인 나는 본질에서 서로 다르지 않지만, 그 둘은 극명하게 나뉘는 존재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상황이 달라짐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건 얄팍한 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생은 길고,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며, 매 순간 흔들리고, 출렁거리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렇게 결정적 상황이 발생하면 그 사람의 본성, 품성이 드러나게 된다. 복잡한 심정이었지만 아내와 점심은 맛있게 먹었다. 내가 건강검진을 받은 KMI는 아내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가까운 곳이었고, 그 중간에 한식당이 있어서 우리는 갈치조림을 먹었다. 오후에는 내내 강남 알라딘 중고서점에 있었다. 책을 고르며 보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서점에서 4시간 정도 책구경을 하고, 나와서 강남역에서 선릉역까지 걸었다. 퇴근 시간 무렵이어서 사람도 많았고, 도로는 차로 가득하고, 사람이 다니는 길에도 전동킥보드를 탄 사람들이 마구 질주했다. 걷다가 역삼역 근처에서 '서브웨이'에 들러 샌드위치를 포장했다. 서울에 나오면 우리 마을에서는 사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든다. 조금 더 걸어가니 '노브랜드' 햄버거 가게가 보였다. 그냥 갈까 하다 매장에 들러 햄버거를 주문했다. 조금 기다리니 로봇이 햄버거가 든 봉투를 싣고 와서는 주문번호를 번쩍거리며 알려준다. 기계에서 주문하고, 로봇이 가져다 주는 햄버거를 받아보니, 사람의 노동이 줄어들고 있음을 실감한다. 저녁은 서울에서 구입한 서브웨이 샌드위치와 노브랜드 햄버거를 먹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우울했다. 밤에 인터넷에서 '간경변'과 '간암'에 관한 정보를 검색해서 읽었다. 단순한 '간경변'이라면 희망을 가져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간암'은 차원이 달랐다. 5년 생존율이 20%에 불과하니, 다른 암과 비교해도 확률이 낮은 편이다. 3월 26일. 오전에 양평읍내 있는 내과를 찾아갔다. 우리 가족이 다 찾는 내과여서 의사선생님도 안면이 있다. 시골 읍내의 병원은 오전에 사람이 많다. 한참을 기다려 의사를 만나, 어제 건강검진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를 했다. 의사는 피검사와 초음파검사를 다시 해보자고 했다. 다시 피를 뽑고, 한참을 기다려 복부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초음파검사를 하면서 B형 바이러스 보균자인지, 술담배를 하는지, 건강검진을 언제 했는지 등을 물었다. 그러면서 초음파 화면을 보여주며, 간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검은 물결이 일렁이는 화면에는 깨끗하지 않은 표면이 보였고, 약간 하얗게 보이는 작은 점과 역시 하얀 긴 띠가 보였다. 그 화면은 내게 오래된 흑백 영화처럼 보였고, 백남준의 설치미술에서 보이는 작은 모니터의 전파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몸속의 장기가 디지털 이미지로 바뀌어 화면으로 보여지는 것은 내 육체의 탈아날로그 이미지였으며, 그 화면에서 발견하는 병변은 육체를 좀 먹는 세포의 활동이었다. 그 세포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고, 내 몸에서 태어나 자란 세포였다. 최초에 외부에서 들어온 바이러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싸우던 세포들이 어느 순간 내 몸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초음파검사의 결과를 본 의사는 어두운 얼굴로 '간경변이 온 건 확실하고, 그보다 예후가 더 나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간경변인지, 간암인지 알려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의사는 '지금은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능한 빨리 아산병원으로 연결해 줄테니 가보시라'고 말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일어서서 나오는데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의사의 말과 표정을 미루어 짐작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간경변보다 예후가 나쁘다면 간암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호사에게 아산병원에 예약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간호사는 아산병원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아주었다. 4월 2일. 아산병원 가는 날까지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여전히 건강했고, 내 몸속에서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부조리한 느낌이었다. 다음 날부터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그 전에도 아침에 걷기를 했지만, 이제는 병변을 알았으니 게을러지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이 생겼다. 내 생각, 느낌은 글을 써서 페이스북에 올렸다. 비 내리는 길을 걸었다. 일요일이지만 비 내리니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우산에 듣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적한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생각은 관념의 바다에서 튀어오르는 물방울 같은 것이어서, 방울이 튀어올랐다 다시 떨어져 형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도 무수히 튀어올랐다 사라진다. 나의 불성실한 태도로 건강을 잃었다. 앞으로 어려운 나날이 계속될 것으로 짐작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방인'의 뫼르소가 지극히 '현대적 인간'이자 자기 존재를 온전히 인정한 '리얼리즘'의 전형적 인물로 본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인물들은 거대한 서사의 격랑에 휩쓸리며 신과 자연과 자신의 관계로 괴로워하는 존재라면, 카뮈의 인물들은 외부의 힘과 관계 없이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는데 담담한 태도를 보인다. 이는 카뮈가 '시지프 신화'를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개인)의 의지일 뿐이다. 그런 태도는 불교적이기도 하다. 지금의 현실(결과)은 과거에 내가 했던 행위들의 집적(원인)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총체적 삶이기 때문이다. 카뮈의 말처럼, 삶은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욕망과 그것을 이룰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부조리한 삶이다. 카뮈는 그런 인간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되 주어진 결과는 쿨하게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부조리한 삶을 살았고, 뫼르소의 감정에 완벽하게 동화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 뒷집 사시는 어르신께서 췌장암 판정을 받았을 때,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고 며칠만에 돌아가셨다. 그의 아들이 그 병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의사였음에도. 나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선배가 작년에 갑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내 나이였으며, 예후도 없이 갑자기 발병했고, 스스로 죽음을 판단했다. 두 분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뫼르소의 태도를 보면서, 담담한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의지의 표현인가를 알게 된다. 봄비는 뭇생명을 깨우고, 자연은 해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모든 생명은 아름답고 고귀하다. 그렇기에 스러지는 생명 또한 의연하고 겸손한 모습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건강일기-001
    건강일기-001 들어가는 글 이 글은 수많은 투병환자가 쓴 투병기 가운데 하나다. 그 가운데서도 간 건강을 잃은 사람이 자신의 건강 상태를 의학적 변화와 함께 심정적 변화를 기록한 투병기다. 모든 사람은 '개별성'의 존재라는 점에서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의 확률은 0%와 100%일 뿐이다. 나는 0%(건강한 사람)에서 '갑자기', '느닷없이' 100%(건강하지 못한 사람)로 바뀌었다.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나는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는 불과 며칠 전, 병원에서 '간경변 환자'로 확진되었으며, '간경변보다 예후가 나쁠 것'이라는 암시를 받아서 '간암'의 확률을 예상해야 하는 '환자'다. 이제 막 병변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기록을 시작한 것은, 이 기록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고, 기억이 생생할 때부터 기록하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병원에서 처치를 받고, 약물을 투여하며, 심각하면 수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미 '정상'이었을 때의 기대수명보다는 훨씬 줄어들 것은 확실해서, 한국남성의 평균수명인 76세에 도달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한다. 나는 글쓰는 것을 업으로 삼았고, 지금도 날마다 돈이 되지 않는 글을 열심히 쓰는 편이다. 나 자신을 객관으로 기술하는 작업은 쉽지 않지만, 감정에 치우지지 않도록 노력하되, 나의 주관, 개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변화를 기록할 생각이다. 본격 투병을 하게 되면 글을 쓰지 못할 수 있을 것이고, 이 글은 결국 미완으로 남게 될 것이지만, 발병부터 치료 과정을 기록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내가 서 있는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으로 바라보는 것과 이 글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그래서 이 글은 '나는 이렇게 완치했다'는 말은 하지 못할 확률이 크다. 섣부른 희망이나, '투병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아는 척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나 자신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할 것이며,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내 감정을 충실하게 기록하려 노력할 것이다. 나도 이 글(연재)이 길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최근 내가 겪은 두 분의 죽음을 보면서, 이 글이 짧아질 수 있겠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한 분은 아흔 두 살의 어르신으로, 췌장암을 발견하고 병원에 입원했으나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받아들이셨고, 다른 한 분은 작년, 내 나이(60세)에 말기암이 발견되어 약 4개월을 투병하다 돌아가셨다. 연세 많은 어르신의 단호한 결심은 존경스럽고, 갑자기 말기암으로 돌아가신 선배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선배와 거의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 놀랍고, 기이하다. 선배 역시 자신의 투병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지만, 돌아가신 두 분처럼 단호하고 담백한 성격이 아니라서 이렇게 지저분한 변명을 남기고 있다. 그건 어쩌면 마음 속에서 생존을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 아닐까, 그걸 부정하지 않는다. 죽음은 두렵다. 건강할 때도 '죽음'은 막연한 공포였지만, 건강을 돌보지 않아 최악의 상황이 되었을 때, 죽음은 더 이상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체를 가진 존재로 내 앞에 서 있음을 절절하게 느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낭떠러지를 걷는 듯한 긴장과 매 순간의 절박함이다. 그 처절함은 어떤 말이나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며, 누구나 실제 눈앞에 닥칠 때만 알 수 있는 감정이다. 그렇다고 병을 발견하고 투병을 하는 기간이 내내 죽음과 맞닥뜨리는 공포와 고통의 시간일 수는 없다. 그동안 살아왔던 관성으로 과거가 현재를 밀고 가는 시간과 현재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중첩하면서 투병하는 사람의 감정은 공포, 절망, 비관, 슬픔, 고통와 같은 비극의 감정과 눈 앞에 있는 현실에서 반응하는 감정을 오가는 양가 감정을 갖게 된다. 검사를 받고, 의사의 소견을 듣고, 처치를 하고, 수술을 하게 되면 자신의 삶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비관적 감정으로 괴롭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투병하기 전과 같은 생활을 하면 슬그머니 희망의 감정이 살아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다만 죽음까지 얼마나 만족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달라진다. 죽음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행복하게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고, 천수를 누리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병을 앓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특히 나이가 젊은 사람일수록 살아야 할 나날이 많아서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든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이제 60세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사회에 조금은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어느날 갑자기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선고를 들었을 때, 충격, 절망, 좌절, 슬픔 같은 감정이 밀려오는 건 당연하다. 마음의 평정을 찾는 건 쉽지 않고, 복잡한 감정들이 변덕스럽게 바뀌는 걸 느꼈다. 이 뒤섞인 감정의 변화는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간경변 결과를 알기 전에 3회까지 써 놓은 글입니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대로 두었습니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연민과 공감 그리고 정의
    연민과 공감 그리고 정의 현대판 '낙양의 종이값을 올리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조국의 시간]이 현재 판매 20만부, 인쇄 30만부를 넘어섰는데, 책을 주문하고 받아보지 못한 분이 많아서 실질 판매부수는 오늘까지 이미 30만부가 넘은 것으로 보인다. (고일석 기자의 글 참조) 출판사는 종이 구하랴, 인쇄소 확보하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글을 올리고, 나는 예약판매를 구입했음에도 1판2쇄를 받았고, 어제 다시 추가 구입한 책은 1판 23쇄였다. 불과 열흘도 안 되어 23쇄였고, 지금도 계속 새로운 쇄를 찍어내고 있으니 신기록을 쓰고 있다. 출판사(라고 하지만 사실은 대표인 김언호 선생)는 이럴줄 몰랐다고 말하지만, 조금 쓴소리를 한다면, 이럴줄 몰랐다면 조국 전 장관을 둘러싼 지금의 현상과 기류를 올바로 읽지 못했다는 것이고, 촛불시민의 뜨거운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니 좀 서운하고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출판사의 이런 부족한 대응이 오히려 [조국의 시간]에 대한 관심을 증폭하고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으니 오히려 좋은 결과가 되었다. 인터넷에서도 [조국의 시간]을 한꺼번에 주문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구입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책이 초기에 많이 팔리고 관심이 줄어들기 보다는, 꾸준히 판매되어 베스트셀러는 물론, 스터디셀러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적들'은 [조국의 시간]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자 온갖 시비와 더러운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조국의 시간]을 비난, 조롱하는 것은 결국 조국 전 장관을 향한 것이므로, 이들의 비난, 조롱, 폄훼 같은 것들은 이미 짐작했던 바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대붕'이 등장한다. 대붕의 한쪽 날개만으로도 바다를 가릴 정도로 크고, 온힘을 다해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고 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조국 전 장관을 두고 벌어지는 '멸문지화'의 능욕은 '대붕'을 잡으려는 잡새떼의 공격으로 볼 수 있다. 사냥꾼 '검찰새'는 온갖 무기로 조국 전 장관과 가족을 공격했다. 그것들이 사용한 무기는 비유하자면 화살, 창, 도끼, 칼 같은 것들이고, 이것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대붕의 날개를 찢으려 했다. 여기에 '기자새'들이 가세해, 한꺼번에 수십, 수백, 수천개의 펜촉을 날리는 공격으로 무려 100만 개의 펜촉을 날려 대붕의 날개를 꺾으려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야당새'들은 '검찰새', '기자새'와 내통하면서 대붕이 가는 길을 알려주고, 곳곳에 함정을 파두었다. 그렇게 '적들'의 공격을 받은 대붕은 피를 흘리며, 날개가 꺾일 수도 있는 절망의 순간도 있었으나, 그들보다 더 많은 촛불이 바다로 향하는 길에 빛을 밝히며 대붕을 응원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대붕은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촛불의 응원과 격려에 힘입어 '적들'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적들'은 악랄하고, 저열하며, 천박하고, 야비하다. 그들의 심성은 일찍이 비뚤어졌고, 오로지 세속의 돈과 권력을 탐하느라 눈이 멀었다. 그들은 시궁창에서 살며, 썩은 음식을 먹고, 죽은 쥐와 오물덩어리 사이에서 잠을 잔다. 그들은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로를 죽이고, 폭행하고, 가진 것을 빼앗고, 뒤돌아서면 뒤통수를 때린다. '적들'은 대붕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두려워한다. 고귀하고, 깨끗한 대붕이 하늘을 날아가는 순간, 시궁창에 사는 자신들의 모습이 더욱 초라하고, 더럽게 보이며, 참을 수 없이 비참하고, 스스로가 한심해 보이기 때문이다. 온갖 더러운 오물 사이에 사느라 질병에 시달리고, 기괴하게 변형된 '적들'은 반듯하고 깨끗한 '사람'을 보는 것이 비참하다. '검찰새'는 권력을 가졌지만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고, '기자새'는 사실을 밝혀야 하지만 돈을 좇느라 눈이 멀고, '야당새'는 오래 전부터 사악한 집단에서 나온 것들이라 근본이 더럽고 야비하고 타락한 존재들이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권력도, 돈도 없었지만, 오로지 깨끗한 마음, 하늘을 날아오르는 대붕의 뜻에 공감하는 마음, '적들'에게 공격당하는 대붕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연민의 마음으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촛불 하나는 약하지만,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촛불은 어두운 밤을 밝히고, '적들'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런 촛불시민들이 [조국의 시간]을 구입하면서 '낙양의 종이값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조국의 시간] 한 권은 하나의 촛불이다. [조국의 시간]을 구입하는 것은 한 조각의 정의를 만드는 것이다. 한 조각, 한 조각의 정의가 모여 정의로운 탑이 되고, 그 탑은 거대한 촛불처럼 불길이 타오르며 '적들'을 물리칠 것이다. 우리가 구입하는 한 권의 [조국의 시간]은 단지 책 한 권이 아니라, 한국현대사에서 '적폐', '적의 무리'를 짓밟아 올바른 정의를 세우는 과정이다. 책은 조국 교수가 썼으나, 역사를 만드는 것은 촛불시민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박준영 변호사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
    박준영 변호사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 내가 왜 이 글을 쓰고 있어야 하는지 참 답답하지만, 그동안 박준영 변호사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막연하지만 답답했던 느낌을 방금 올라온 그의 글 '인간의 존엄성 3'을 읽고서야 뚜렷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왕이면 같은 변호사인 분이 박준영 변호사의 글을 논리적으로 비판해주면 좋겠는데, 우선 내가 참을 수 없는 부분만이라도 언급하려 한다. 박준영 변호사의 글 '인간의 존엄성 3'은 조금 긴 글인데,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만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김학의는 '형사 사법 분야'와 '인권 분야'에서 '약자'다. -피해 여성들이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과장했음에도 변명도 못했다. -긴급 출금 자체가 불법이다. -김학의는 '검찰 개혁', '여성 운동',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의 부각'의 목적에 쓰여지는 '병약한 개'다. -공소시효 제도가 있다. -김학의는 사회적 존재로서 사형당했다. 이 내용 외에 박준영 변호사는 자신의 논리를 펼치기 위해 몇 가지 적당하지 않거나 잘못된 예를 들었다.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신영복의 '담론'에서 '가장 병약한 개'의 사례 -평소에 얼굴을 감추고 다닌 김학의 -김학의 주변 사람들도 의심의 대상이 되어서 미안한 김학의 -이사를 여러번 한 김학의 -검찰 개혁, 여성 운동, 고위 공직자의 일탈 행동의 표본으로 이용당한 김학의 -별장 접대는 15년 전, 공소시효 제도가 있다 -지난 10년 동안 사회적 지탄, 실추된 명예, 가족과 주변 사람의 고통, 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형사책임보다 가볍지 않다 -헌법재판관 조승형의 의견 -사회생활이 사실상 불가능해 사회적 살인을 당한 김학의 -정치권, 시민단체, 언론이 갖가지 목적으로 김학의를 이용 -김학의의 1심 최종진술 박준영 변호사(이하 '박준영')의 글은 크게 두 가자로 구분할 수 있다. 법을 다루는 변호사로서 바라보는 시각과 보통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그것이다. 이건 다시 '법 논리'의 시각과 '감성'의 시각으로 치환해도 동일한데, 이것이 박준영의 주장이 비논리적이고 몰역사적이며 감정에 치우쳐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박준영은 김학의가 '형사 사법 분야'와 '인권 분야'에서 '약자'라고 말한다. 그가 주장하는 근거는 위의 정리한 내용에 모두 들어 있다. 먼저, 박준영이 '전가의 보도'처럼 말하는 '법조항'에서 '공소시효'에 관해 말해보자. '공소시효'란 범죄행위가 종료한 후 일정한 기간이 지날 때까지 그 범죄에 대하여 기소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국가의 소추권 및 형벌권을 소멸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공소시효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재판의 공정성', '처벌의 필요성', '공적 비용', '형벌권의 소멸시효' 같은 이론들이 이를 뒷받침 한다. 공소시효는 사회적 필요에 따라 유기적으로 존재하거나 사라지고, 기간도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등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박준영은 '공소시효'가 절대 기분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나는 그가 변호사이기 때문에 직업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소시효는 결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독일에서는 전쟁범죄자를 추적하고 처벌하는데 지금도 전담 부서를 두고 맹렬히 전범자의 뒤를 쫓고 있다. 이미 1천 명이 넘는 전범자들을 추적해 체포, 처벌했거나 그 과정에서 고령으로 사망하는 전범자들이 나오고 있다. 전쟁범죄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건 박준영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쟁범죄에 준하는 인륜의 파괴하는 범죄는 한국에서도 공소시효를 없애고 있는 과정에 있다. 이것 역시 박준영이 모를 리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공소시효'를 근거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은 옹색할 뿐 아니라 비겁한 태도인 것이다. 김학의가 검찰 개혁, 여성 운동, 고위 공직자의 일탈 행동의 표본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주장은 결과를 원인에 꿰어 맞추는 견강부회의 논리다. 김학의는 '범죄자'다. 이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고, 구체적으로 '현행법'을 위반한 범죄자이면서 동시에 공직자의 윤리를 훼손한 비윤리적 공직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명확하게 법의 처벌은 물론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지탄도 함께 받아야 한다. 박준영이 말하듯, 김학의가 다른 조직들의 필요에 따라 이용당하는 존재라는 건, 김학의가 저지른 범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비논리적 연결이다. 김학의가 저지른 범죄를 두고 다른 어떤 조직에서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그것을 이용하든 그걸 두고 김학의의 범죄를 변호할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박준영의 긴 글에서 법적 논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감정'이다. 변호사가 법적 논리로 김학의를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김학의가 '형사 사법 분야'와 '인권 분야'에서 '약자'라는 감정에 호소한다. 김학의가 '약자'라는 말에 동의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포괄적 의미에서 '약자'라는 주장 역시 타당하지 않다. 김학의는 학생 때부터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검사였고, 한국의 1% 안에 드는 최고 엘리트 계층이며, 고위 공직자이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인물이다. 그런 김학의가 범죄를 저지른 이후 갑자기 사회적 '약자'가 되었다니, 그 말이 과연 합리적인가? 박준영이 예로 들은 내용들은 적절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다. 신영복이나 조승형의 글을 인용한다고 해서 김학의가 저지른 범죄가 가벼워지거나 사라지는가? 더구나 박준영은 김학의의 처지를 감정적, 감성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평소에 얼굴을 감추고 다닌 김학의, 이사를 여러번 한 김학의, 실추된 명예, 사회적 지탄, 사회적 살인 같은 문장으로 김학의의 처지를 옹호하고 있는데, 보자, 대체 이 모든 결과들을 만든 것이 누구인가? 원인이 어디에서 왔고, 원인을 만든 사람이 누구이며, 김학의가 지금 놓여 있는 범죄자, 사회적 지탄, 실추한 명예는 과연 누가 한 행위의 결과인가? 박준영은 계속 결과론으로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고 있으며, 이것은 주제에 관한 논거와 주장에서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 이상하다. 김학의는 범죄를 저질렀고, 자신이 한 '행위'로 인해 처벌받았으며,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고, 얼굴을 감추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도망다니듯 이사를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받은 사회적 지탄과 실추된 명예가 '사회적 살인'이라고 말한 건 박준영이다. 누가 김학의를 사회적으로 살인했는가? 김학의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정당한 사법적 처벌을 받지도 않았다. 그것은 김학의가 과거 가졌던 막강한 검찰 권력의 비호 때문이었으며, 지금도 검찰은 선별적으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걸 박준영도 잘 알 것이다. 박준영은 '재심 변호사'로 알려졌고, 누구보다 인권을 옹호하는 변호사로도 유명하다. 나 역시 박준영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는 것을 지지하지만, 김학의와 관련해서 박준영은 경주마처럼 시야를 가린 채 뛰고 있는 '법 기술자'로서의 변호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전제는 옳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는 돈과 권력에 의해 매우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며, 김학의는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쪽에 서 있는 권력자다. '인권'은 보편적이며 특정한 계급, 계층의 이해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옳지만, 김학의보다 더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야 한다. 어차피 모든 정의나 윤리나 도덕, 법률은 동시에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학의 같은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권력형 범죄자의 '인권'을 옹호하기 보다는-김학의는 스스로 돈과 권력이 있으므로 알아서 잘 자신을 변호할 것이다-사회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인권'을 더 챙기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겠는가. 나는 박준영이 쓴 '인간의 존엄성 3'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이든 자기의 전문 지식에 빠져 맹목이 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느낀다. 박준영은 분명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대로 행동하는 것이 나찌의 유대인 학살을 만들었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학살하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크메르 루즈가 자기 국민 수백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준영은 '권력자'는 아니지만, 자신이 배운 전문지식인 '법'으로 '법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법'은 '법조문'만이 전부라고 판단하고 해석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사라진다. '법'은 인류의 지난 과거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도구다. 법은 최소한의 윤리이면서 인류의 양심과 정의, 도덕의 지혜를 바탕으로 만든 하나의 '규칙'이며 보편적 상식에 근거한 사회적 합의여야 한다. 김학의 사건에서 가해자들을 비난하고, 처벌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그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인권과 신변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 역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과정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때, 피해자를 우선 보호하고, 배려하고, 그의 입장에 귀 기울이는 것이 법의 정신에도 옳바르다. 피해자들이 과거의 폭력과 피해에서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들이 안심할 정도의 사회적 배려가 있은 다음에, 가해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김학의 사건은 피해자들은 여전히 숨어 지내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데, 가해자인 김학의의 '인권'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된다는 것을 박준영을 정말 모르는 걸까. 그 피해자들이 김학의에 대해 사실 관계를 왜곡하고 과장했기 때문에 보호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김학의가 지난 10년 동안 '사회적 살인'을 당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한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박준영은 가해자에게 실제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폭력도 아니고 명확하지도 않은 '왜곡과 과장' 때문에 그들의 인권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닌가? 혹시, 박준영 자신이 김학의가 가진 권력에 과몰입해 '대리 권력자'로 감정 이입한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 당연히 박준영은 아니라고 부인하겠지만, 그가 한국의 '남성'이고 '변호사'인 것은 한국사회에서 기득권, 권력자의 위치에 있다는 걸 모르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나는 박준영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는 것을 지지하지만, 그가 지금 김학의 사건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 '법'을 미시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과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 세계관의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일수도 있겠으나, 지금 가해자인 김학의를 옹호하는 주장은 법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한겨레신문의 천박하고 야비한 행태
    한겨레신문의 천박하고 야비한 행태 어지간하면 그냥 못본 척하고 지나가려 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할 때의 정신을 완전히 잃고, 이제는 수많은 '기레기'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것처럼, '가난한 조중동'인 '한겨레'를 두고 쓴소리를 해봤자 내 입만 아프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우연히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한겨레' 논설위원 권혁철이 ['모병제는 진보' 도그마 경계해야]라는 논설을 읽고는 우선 한숨부터 나왔다. 한겨레 논설위원 수준이 이따위니까 그 밑에 기자들 수준은 말할 것도 없는 걸 알게 된다. 권혁철은 '모병제'가 진보진영이 찬성하고, 징병제는 보수 쪽에서 유지하기를 주장한다고 말했다. 우선 한국에 '보수'가 있는지부터 물어볼 일이다. 여기에 권혁철은 '모병제'가 '병역의 시장화 정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진보진영은 물, 전기, 가스, 철도, 의료, 교육 등 공공서비스의 시장논리를 반대하면서 왜 병역의 시장화 정책인 '모병제'에는 찬성하느냐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권혁철은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논리를 비튼다. 한국의 '신자본주의 체제'는 지난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급격하게 '시장화'했다. 전기, 가스, 교육, 통신 등이 이미 사유화 즉 '시장화'했는데,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권혁철이 똑바로 말을 하려면, '모병제'의 시장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장화'하고 있는 공공서비스 분야의 현실을 비판하고, 공공서비스의 시장화를 다시 원래의 공공재, 공공서비스로 돌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우선이다. 권혁철은 '모병제'를 반대하는 논리로 현재의 '징병제'는 [재벌 아들, 장관 아들, 국회의원 아들, 골목 가게 주인 아들, 비정규직 노동자 아들 구분 없이 모두 죽거나 다치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징병제'는 '무조건 평등하다'는 비현실적 전제를 들이댄 것이다. 권혁철은 한국의 '징병제'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진짜 모르는 걸까? 모른다면 신문사 논설위원씩이나 하고 있어서는 안 되고, 알고도 이런 말을 한다면 아주 악랄하고 야비한 인간이다. 지금 당장 국회의원 본인과 그 자식들의 병역 현황, 재벌들 본인과 그 자식들의 병역 현황을 살펴봐라. 평범한 서민과 그 자식들이 군복무를 한 것과 국회의원, 재벌과 그 자식들이 군복무한 통계를 보면, 비현실적인 결과가 나온다. 권혁철은 마치 '징병제'가 '평등한 사회'를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처럼 말하고 있는데, 징병제인 한국사회에서 가장 불평등한 징병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변명을 할까. 아, 법으로는 평등하다고? 법이 평등하니까 평등한 거라면,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해야 하는 판사의 범죄는? 검사의 범죄는? 사실보도를 하지 않는 기자 쓰레기들의 범죄는 대체 뭐라고 변명을 할지 참 궁금하다. 여기에, 지금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들 - 찾아봐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나라가 있다 -은 그러면 전부 도그마에 빠져 있는 건가? 아, 한국은 분단과 휴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서 징병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논리인가? 그렇다면 권혁철은 '북한'을 한국의 '주적'으로 보고 있는 건가? 그건 수구집단이나 하는 짓인데? 심지어 국방부에서도 '국방백서'에서 '북한'을 주적에서 제외했고, 한국의 국방에서 현재 '주적' 개념은 사라졌는데도 '징병제'를 해야 한다고? 게다가 한국의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특히 어린이, 청년 인구 감소율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실에 맞춰 국방부에서는 군인의 숫자보다는 무기 체계를 자동화, 기계화하는 방향으로 편성하고 있어서 군인의 숫자가 과거 60만 명을 웃돌던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권혁철은 군인의 숫자가 50만 명이 넘어야 하는 이유를 들면서 미국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들이댄다. '1994년 여름 1차 북핵 위기 때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석달 내 국군 사상자를 49만 명으로 시뮬레이션했다'고 말한다. 미국의 발표나 한국 보수(극우) 집단의 남북한 전쟁 비교는 당연히 편향되어 있다. 이런 일방적 자료를 근거로 들이대는건 쓰레기 언론들이나 하는 짓인데, 한겨레의 논설위원이 따라하고 있는 걸 보면, 어처구니가 없고, 한심할 뿐이다. 한국의 경제력은 북한보다 단순비교로도 30배가 넘는다. 국방력은 다르다고? 무기의 숫자나 군인의 숫자는 북한이 더 많다고? 알리의 주먹 한 방과 어린이의 주먹 100개를 비교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권혁철의 수준 이하의 '논설'을 읽고서도 못 본 척했다. 그러다 오늘 백기철 칼럼 '그 반성문이 어색했던 이유'를 읽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이 글을 쓴다. 백기철의 글도 일부러 찾아본 것이 아니고, 조국 전 장관이 페이스북에 공유했기에 읽었다. 백기철의 글은 고등학생의 독후감 수준도 안 되는 천박하고 너절한 글인데, 왜 그런지 보자. 백기철은 글에서 '조국 사태'라고 단정한다. '조국 사태'라니? 대체 조국 전 장관이 뭘, 어떻게 했는데 '사태'라고 하는 건가? 백기철이 말하는 '사태'의 내용은 이렇다. '자녀들 입학 과정에서 드러난 무리수,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처신 등은 형사 법정에서 면책된다 해도 도덕적, 역사적 책임에서까지 자유로울 순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직자든 개인이든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명백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뿐이다. 자녀들 입학 과정에서 드러난 무리수라니? 그게 대체 뭔 개 풀뜯어 먹는 소리인가? 자칭 언론인이라는 백기철은 명확한 근거도 없이 '무리수'라는 단어로 조국 전 장관을 비난하고 있는데, 이건 명백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 게다가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처신'이라니? 대체 어떤 처신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막연하고 두루뭉수리하게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말하면, 백기철은 언론인으로서 무리수를 두거나 부적절한 처신을 한다고 비판하면 뭐라고 대꾸할텐가? 백기철은 양비론을 들이댄다. '아마도 조국도 틀렸고, 윤석열도 틀렸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되먹지도 않은 양비론 따위를 들먹이면 자칭 진보적이고 균형잡힌 언론인으로 보이고 싶기는 한가보다. 윤석열 편은 들고 싶은데, 너무 노골적으로 편을 들면 안되니까 둘 다 비판하는 척 하면서 조국 전 장관을 떠 '까는' 거겠지. 그러면서 조국 전 장관에게 '결자해지'를 하라고 말한다. 조국 전 장관이 대체 뭘 잘못했다고 결자해지를 하라는 건가? 백기철의 이 문장을 받아서 조국 전 장관은 지난 2019년 8월 25일 '장관후보자 대국민 사과문'과 2019년 9월 2일 '기자간담회'에서의 발언 내용, 2019년 9월 6일 '인사청문회 모두 발언'을 통해 이미 충분하고도 넘치게 사과했다. 백기철은 조국 전 장관의 이런 사과의 내용을 알면서도 계속 추궁하고 비난하는 거라면 아주 저열하고 악랄한 인간이고, 모르고 했다면 무능한 기레기에 불과하다. 한겨레신문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나는 창간주주였지만, 한겨레신문과 인연을 끊었고, 무엇보다 한겨레신문을 창간했던 선배 기자들의 얼굴에 똥칠을 하고 있는 현재의 한겨레신문 구성원들의 면면이 더 없이 너절하고 역겹기만 하다. 조국 전 장관을 둘러싼 악의적인 언론의 보도와 검찰의 끊없는 괴롭힘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없는 비상식적, 비법률적, 비인간적 행위임에도, 자칭 언론인이라는 것들은 검찰과 한몸이 되어 조국 전 장관과 가족들 죽이기에 앞장섰다. 그것만으로도 한국언론사에서 언론쓰레기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추악한 게이트로 남게 될 것을 장담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 2021 보궐 선거의 의미
    2021 보궐 선거의 의미 투표가 끝나고, 결과는 참담했다. 반민족, 반민주, 매국정당의 후보가 서울과 부산에서 모두 시장으로 당선되었고, 지자체의 시군의원도 15군데에서 13군데를 국민의힘에서 차지했다. 이 결과를 보면, '국민의힘'이 좋거나, 처음부터 지지했던 사람들이 투표한 것보다는 현 정권을 심판한다는 의미가 더 큰 걸로 보인다. 선거 결과에 관해 많은 사람들의 분석과 의미 부여가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해서 몇 가지 현상을 주목하며 이번 선거가 곧 있을 대통령 선거는 물론, 앞으로 한국사회에 끼칠 영향까지를 염두에 두고 정리했다. 1 민주당 민주당(열린민주당)의 초재선 의원 가운데는 꽤 훌륭한 재목이 있다. 당장 꼽아봐도 최강욱, 박주민, 고민정, 이재정, 김용민, 김종민, 손혜원, 백혜련 등이 있는데, 이들은 민주당에서도 유능하고 진보적 태도를 지니고 있어서 미래의 민주당을 끌어갈 인재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들 외에 민주당 대부분 의원이 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의 요구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에 무려 180석을 몰아준 시민들은 민주당원이 아니거나, 민주당이 마냥 예뻐서 투표한 것이 아니었다. 현실 정치에서 아주 나쁜 놈보다는 덜 나쁜 놈을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민주당을 선택한 것 뿐이다. 한국의 정치 지형은 왜곡된 양당 체제를 유지해 왔다. 이는 명백히 '미국식 민주주의'를 모방한 것이며, 이 모방은 애초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의 정치 간섭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의 양당제-다당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양당제-는 여당과 야당 즉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가장 완벽한 시스템이기도 하다. 따라서 적어도 '양당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공동의 이해 관계에 있으며, 이 체제의 수혜자라는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한편, 양당제를 깨뜨리기 위한 군소 정당, 진보 정당의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현실의 벽인 기득권 두 정당에 부딪쳐 아직까지 한국정치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군소 정당이 정치판을 혁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물적, 인적 자원의 뚜렷한 한계와 공고한 기득권의 제도적 틈을 뚫을 만한 무기(조직, 정책, 인물 등)가 부족한 때문이지만, 지금까지 군소 정당의 탄생과 소멸을 보면, 외부적 조건의 영향도 있지만 내부적으로 스스로 붕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따라서 '양당제'를 비판하면서도 그 양당제를 깨뜨릴만한 동력이 유지되었는가를 보면, 대표적으로 지금 '정의당'이 보여주는 비관적 현실처럼, 특히 진보정당에서조차 부르주아 정당인 민주당보다 덜 개혁적이고 시민의 요구와 역사적 과제를 잃어버린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양당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얻은 결과에 만족하며 촛불 시민의 개혁 요구를 꾸준히 묵살해왔다. 촛불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민주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무려 180석을 밀어주었던 촛불 시민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오로지 개혁, 개혁만이 우리의 미래를 살리는 길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박병석, 이낙연, 김종인 같은 인물들이 당의 지도부에서 개혁을 가로 막고 있었고, 이에 대해 민주당 의원들은 일부 초선의원을 제외하고 침묵하거나 암묵적 동의로 개혁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했다. 이들 반개혁 민주당 의원들은 전형적인 부르주아 의원들로, 촛불 시민의 개혁 요구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한국사회의 기득권 - 자본주의 체제와 부르주아의 기득권 -을 유지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자들이이다. 이들 반개혁 민주당 의원들은 본질에서 국민의힘 의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나라의 정의, 진보, 개혁, 보편적 복지 같은 촛불 시민의 시대적 요구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특권을 누리려는 지극히 부르주아적 이해를 추구하는 자들이다. 진보 성향의 촛불 시민은 딜레마에 놓여 있다. 민주당의 반개혁 태도에 분개하면서도 그렇다고 매국정당인 국민의힘을 지지할 수는 없으며, 군소 정당 가운데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당이 있는가를 찾아보면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즉, 개혁의 대안이 되는 정당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몹시 안타깝고 답답하다. 개혁의 대안이 보이지 않는 정치 현실에서, 민주당이 앞으로의 선거에서 계속 패한다 해도, 민주당 의원들은 여전히 기득권을 누릴 것이며, 의석 숫자가 줄어들 뿐, 이들이 누리는 특혜는 변하지 않는다. 즉, 민주당 다수 의원들은 세상이 반동으로 변하든 말든 자기의 삶에는 큰 영향이 없기 때문에 촛불 시민이 그렇게 목이 쉬고, 피눈물이 나도록 외치는 개혁의 목소리를 어디서 개가 짖는냐고 딴청하는 것이다. 2 욕망의 부활 이번 서울, 부산 시장 보궐선거는 서울과 부산에서 우연히 '성'과 관련한 문제로 시장이 자진 사퇴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 때문에 치뤄졌다. 부산시장 오거돈은 자신이 성추행했음을 명백히 밝히고 사퇴했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원순 서울시장은 성추행 혐의가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야당에서는 민주당 소속의 두 시장이 모두 '성' 추문으로 물러났다고 공격하고, 그 공격은 일정 부분 대중에게 먹혔다. 하지만 이번 선거의 결정적 패인은 '부동산' 문제였다. LH공사 직원들이 내부 정보를 빼돌려 개발 지역에서 땅투기를 하고,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본 것에 대해 시민들은 분노했고, 정부가 집값이 빠르게 상승하는 것을 막으려는 정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는 기득권 세력의 총공격이 선거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인 민주당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했다고 보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인 부동산 정책을 집권 초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을 때 추진했어야함에도 미적거렸고, 그나마도 어정쩡한 상태의 부동산 정책을 내놓는 바람에 대중의 불신을 자초한 것이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후보는 선거 과정을 통해 상당한 범죄 혐의가 드러났음에도 시장에 당선되었다. 이것은 과거 이명박이 전과14범이라는 타이틀을 갖고도 대통령에 당선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 역시 개혁 정부였던 노무현 정부가 반동, 수구, 기득권 세력의 공세에 밀려 개혁의 동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자신의 사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고, 국가의 재산을 사유화하다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있었던 두 인물이 바로 이번에 서울시장, 부산시장으로 당선된 오세훈과 박형준이다. 이들은 이명박의 휘하에서 이명박이 출세하도록 적극 도운 사람이다. 두 사람의 거짓말은 이명박의 태도와 매우 흡사한데, 일부러 배우지는 않았겠지만, 세 사람은 서로의 심리가 '동기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심리적 동기화'는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물론,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고, 사실과 거짓의 경계에서 인지부조화 상태를 의식하면서 욕망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의 자아를 분리해서 욕망을 좇는 자아를 키우고, 정직한 자아를 말려 죽이는 행위를 스스로 한다는 것이다. 이명박은 천박하고, 저열하며, 교활하고, 악랄하고, 야비하며, 음흉하고, 포악하며, 신의가 없는 인간이다. 그는 오로지 '돈'이 유일한 목적이자 목표이며, 주변의 인간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오, 박 두 사람 역시 이명박과 같은 정체성을 갖고 있다. 이들은 자연인으로의 개인이지만,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쌓인 친일, 친미, 매국, 매판, 사대, 천민자본주의의 아이콘이다. 이명박이 그 아이콘의 핵심이며, 두 사람은 이명박의 변형된 아이콘이다. 이명박, 박근혜가 감옥에 갇히고, 새 정부가 들어선지 불과 4년만에 대중은 이명박의 욕망을 다시 선택했다. 이명박과 그의 졸개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망을 채우기에 몰두했고, 부패한 관료, 언론이 그 욕망의 단맛을 즐겼으며, 무엇보다 이윤추구에 충실한 자본(가)이 이들을 끌어안았다.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고, 장밋빛 미래를 화려하게 늘어놓으며,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벌고, 사교육으로 일류대학에 진학하며, 모두들 의사, 변호사, 판사, 검사가 될 수 있다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미래를 찬송한다. 한국사회는 이미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여서 이들 가진자, 기득권자,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이 말하는 사회는 상위 1%의 강남 부자들과 그의 자식들에게나 해당하는 청사진일 뿐, '비강남'에 사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도 볼 수 없는 암담한 미래라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대중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고, 거짓말이라도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말을 들으려 한다. 교육공무원이 대중을 개, 돼지라고 말해도 그 말이 옳다고 판사가 판결하고, 대중은 이제 당연하게 개, 돼지가 되고 말았다. 자신이 개, 돼지라도 오로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끝없는 욕망의 추구와 무한 경쟁으로 내가 잘 사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못 사는 걸 보는 것이 낫다는 악에 바친 경쟁의 증오심으로, 남이 잘못되는 꼴을 보면서 기뻐하는 야비하고 악의에 찬 타락한 인간이 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번 선거였다. 3 오염된 미래 이번 선거가 개혁으로 가는 길에서 일시적 반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그렇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명박, 박근혜를 겪었고, 그 시기에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더욱 심각한 건 가치관의 타락이었다. 즉, 범죄를 저지르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해도 얼마든지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으며, 자라나는 세대는 이명박, 박근혜의 집권을 보면서 민주주의, 정의, 예의, 상식, 도덕, 평등, 배려, 공동체, 복지 같은 중요한 가치를 버리고 거짓말, 사기, 범죄, 욕망, 배신, 탐욕, 이기심, 배금주의, 물질만능, 돈, 부동산, 아파트 같은 비도덕적 행위를 정당하게 여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 천박하고 역겨운 욕망의 추구가 이명박에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불과 몇 년만에 이명박의 아바타인 오, 박 두 사람이 서울과 부산 시장에 당선되었다는 것은 이명박의 욕망이 여전히 한국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의미하며, 오와 박이 시장으로 있는 동안 서울과 부산은 다시 천박한 욕망의 도시로 타락할 것이 분명하다. 이는 젊은 세대가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기회를 잃는 것을 뜻하며, 사회에서 배우는 것이 협잡, 사기, 거짓말 같은 타락한 정신이라는 걸 말하고, 시대 정신이 오염되어 이 시기의 청년들 사상과 정신이 썩어가는 것을 뜻한다. 한국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올바른 매국노 청산을 하지 못했다. 일본 앞잡이로 부역했던 매국노들이 권력을 잡았고, 그들은 일본을 모방했으며, 일본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승만은 친일매국노들을 정부 요직에 기용했고, 박정희는 그 자신 일본군으로 일본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였으며, 군사반란을 일으킨 반역자였다. 여기에 전두환, 노태우까지 군사반란으로 이어진 기간을 보면 1948년 이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는 1993년까지 무려 45의 역사가 친일, 친미 매국 반동 세력이 한국을 지배했다. 그나마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가 과거를 청산하려 노력했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김영삼 정부 말기에 터진 외환금융위기(IMF사태)로 한국의 경제는 '신자본주의' 체제에 포획되어 그때부터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깊어지고, 비정규직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임시직 노동자, 단기직 노동자, 불안전 고용 노동자의 비율이 정규직 노동자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노동시장의 불안정은 곧바로 자본의 이윤으로 귀결된다. 불안정한 노동시장은 저임금 구조를 고착화하고, 노동시장의 경쟁을 격렬하게 하는 원인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부익부 빈익빈 격차를 더 크게 만든다. 가난한 노동자, 서민이 돈과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을 추종하고, 그들의 권력 의지를 지지하는 것은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에 해당한다. 피해자인 노동자, 서민은 자신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배를 불리는 자본가, 권력자, 부르주아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이것은 명백히 멍청하고 어리석은 행위가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 서민은 배우지 못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세상을 더 잘 살게 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다. 또한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노동자, 서민보다 더 교육을 많이 받고, 세상을 잘 이해하며, 더 똑똑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나라를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지배계급(자본가, 권력자, 기득권 집단(언론 등))의 전략은 잘 먹혀들었다. 권력을 가진 국회의원은 입법을 통해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법을 만들었으며, 자본가와 부르주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정책은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을 통해 널리 퍼진다. 노동자, 서민의 고통과 투쟁은 언론에서 거의 다루지 않으며,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계급 갈등, 계급 투쟁, 빈익빈 부익부의 모순,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착취, 권력과 자본이 벌이는 온갖 불법과 탈법, 범죄 행위는 언론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렇게 자본의 논리 - 이윤추구 - 에 충실한 기득권 세력(자본가, 부르주아, 권력자, 언론)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강력한 카르텔을 만들며 지배 집단으로 공고한 세력을 구축한다. 이들은 모든 것을 가졌다. 돈, 권력, 스피커까지. 이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고, 90%의 대중은 개돼지로 취급한다. 기득권 세력은 대중의 욕망을 부추기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욕망인 이기심과 경쟁을 사회의 기본 멘탈리티로 구조화한다. 그것이 한국에서는 부동산과 일류대학과 대기업 취업과 의사, 판사와 같은 '사'짜 직업군으로의 진출이다. 모든 방송의 드라마에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름다운 청춘남녀로 등장하고, 강남 출신의 연예인이 방송을 장악하고 있으며, 강남이 한국을 대표하고, 이들이 지니고 다니는 사치품이 '명품'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한다. 가난한 청년들은 자신의 현실보다는 손에 잡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인 이들 돈과 권력을 가진 부르주아 청년을 롤모델로 삼는다. 현실은 시궁창이면서 욕망은 강남 부르주아를 꿈꾸는 이들 청년들이 많아질수록 미래는 더욱 욕망으로 타락하고 오염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지금 오와 박의 당선으로 드러난 것이다. 4 혁신의 아이콘 문재인 정부 말기로 들어오면서 분명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개혁에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촛불 시민의 개혁 의지를 이어받아 탄생한 정권이었지만, 촛불 시민이 바라는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다. 무려 180석이나 몰아주었지만, 개혁 입법은 극히 미미했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드러내지도 못했다. 이것은 명백히 촛불 시민의 요구를 무시했거나 무능해서 반영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혁 의지가 높았다고 보는데, 대통령 혼자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하고, 법을 만드는 건 국회의 몫이니 집권 여당인 민주당이 개혁 의지가 부족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민주당 내부에는 반개혁 인물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다고 판단하는데, 그건 민주당의 원래 속성인 '부르주아 정당'의 뚜렷한 한계이기도 하다. 현 시점 - 서울시장, 부산시장의 패배 - 에서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지고 있다. 이번 두 도시 시장 선거의 승리로 '국민의힘'은 강력한 동력을 얻었으며,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런 빌미를 준 것은 민주당의 무능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민주당을 욕하거나, 실의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민주당에서 가장 개혁적 인물을 다음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야 한다. 이번 보궐선거가 민주당의 지난 4년 동안 개혁을 추진하지 않았던 무능과 게으름과 어리석음의 역풍이었던 것이 분명한 만큼,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가장 개혁적인 인물을 앞으로 내세워야 한다. 현재 민주당에서 가장 개혁적 인물은 단연코 이재명 경기도지사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과거를 살펴보면 그는 단 한번도 개혁의 전면에서 물러선 적이 없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비토하는 세력이 있고, 이재명을 시기, 질투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이재명은 민주당 내부에서 세력을 형성하지 않은 사람이며, 민주당의 계보에도 들어 있지 않다. 그가 인권변호사로 출발해 성남시장으로 성공적인 행정가를 증명해 보였으며, 그 결과 현재 경기도지사로 훌륭한 행정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민주당 내부에서 권력투쟁을 벌이는 것은 좋지만, 그들 내부의 더러운 권력투쟁으로 진정한 개혁가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비토하거나 다음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내세우지 않는다면 민주당은 '국민의힘'과 다르지 않은 더럽고 파렴치한 정당으로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을 경고한다. 지금 민주당이 실패한 부동산 정책, 주거 안정 정책, 일자리 정책, 기본 소득을 비롯한 경제, 복지 정책들을 성공시킬 수 있는 인물은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유일한다. 지금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인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대중의 타락한 욕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고, 그 지도자가 민주당에서 유일하게 이재명 경기도지사라는 점은 어쩌면 불행 중 다행이다. 나라의 근본인 정의, 자유, 평등, 민주주의, 보편적 복지 등을 올바르게 구현할 수 있는 경험과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 이재명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개혁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이재명을 지지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것만이 더러운 욕망으로 타락한 한국사회를 올바른 민주주의 사회로 만들 수 있는 최선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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