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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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 혁명의 주체들
    4월 혁명의 주체들 이 글을 쓰는 오늘이 우연히 4월 19일이다. 4월 혁명이 일어나고 61년이 지났으며, 한국은 '4.19혁명'을 헌법에 새겨 넣었다. 3.1만세운동이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민중의 독립운동이었다면, 4.19혁명은 같은 해 치러진 3.15 선거 -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 - 에서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획책하면서 촉발했다. 부산,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자유당 정부는 폭력으로 탄압했고, 이 과정에서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사진이 부산일보에 보도되면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시민들의 규탄 시위를 폭력으로 저지하는 한편, 계엄령을 선포해 국민의 자유를 속박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한편, 깡패를 동원해 시위하는 국민에게 테러를 하는 악랄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경찰 역시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했고, 시민들은 경찰서를 습격해 총기를 탈취하고,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전쟁이 끝나고 불과 7년이 지난 상황에서, 내전에 가까운 혁명이 발발한 것은 오로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범죄가 원인이었으며, 일본 앞잡이였던 매국노를 정부 관리로 기용하고, 독립군과 애국지사를 홀대한 이승만 정권의 반민주적, 독재적 태도가 4.19혁명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 이 책은 4.19혁명 당시, 혁명에 참여한 여러 주체들을 분류하고, 그들의 참여와 역할, 혁명에 기여한 내용을 분석하고 있다. 4.19혁명을 말할 때 가장 널리 알려진 주체는 '학생'이다. 혁명 초기였던 3.15일 의거는 마산의 민주당 당원들이 앞장서 부정선거를 밝혀내면서 시작되었고, 여기에 시민, 학생이 동참했다. 이 시위에서 경찰이 총을 쐈고 7명의 시민, 학생이 사망했으며, 870명이 부상당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승만은 마산의 시위가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마산시민은 다시 시위를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서울에서도 고려대학교 학생을 시작으로 주요 대학의 학생들이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시작했고, 이승만 정권은 시민을 향해 폭력으로 맞서다 정권이 붕괴된 것이다. 01 4월혁명과 학생 / 오제연(성균관대학교) 1. 머리말 2. 4월혁명 당시 학생들의 존재 양태 3. 학생시위의 전개 과정과 시기별 양상 4. 학생시위의 조직적 특징 5. 맺음말 해방이 되고, 미군정 시기를 거쳐 1948년 정부를 수립한 이후, 정부는 교육 예산을 연평균 10.5% 사용하고 있었다. 즉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초등학생 취학률은 100%에 가까웠고, 중학생, 고등학생의 수도 15년 사이(1945-1960년) 10배 가까이 늘어났다. 4.19혁명의 주체는 '학생'이면서 특히 '고등학생'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서울에서 고려대학생이 시위를 시작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2월 28일 대구의 경북고, 대구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하면서 실질적인 4.19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4월 16까지도 전국의 도시에서 고등학생들이 시위의 주체가 되었고, 혁명의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다 4월 18일 서울에서 최초로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고, 이후 이승만이 하야 선언을 한 4월 26일까지도 대학생보다는 고등학생이 숫자에서도, 시위의 참여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학생들의 시위 양태는 2월 말에서 선거가 있던 3월 중순까지, 선거 이후, 그리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학생을 정치도구로 활용하지 말라는 주장에서, 공명선거, 선거부정 규탄으로 이어졌고, 이후 본격 혁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02 4월혁명과 도시빈민 / 하금철(한국학중앙연구원) 1. 머리말 2. ‘폐허의 도시’ 속에서 등장한 도시빈민 시위 3. 학교별 시위 본격화 이후―‘불량행위’로 해석되는 도시빈민 시위 4. 도시빈민의 범죄화 5. 맺음말 4.19혁명에서 도시빈민의 존재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위에 참여한 대중의 비율에서 도시빈민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연구다. 상식으로만 봐도 '도시빈민'은 당시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보편적 민중의 삶을 규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불과 7년이 지났을 뿐이고, 국토가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경제활동의 근거가 거의 없었던 민중은 당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도시빈민'의 형성은 전쟁 이후 예전부터 도시에서 살던 사람과 지방,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도시빈민은 지방,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고학생' 즉 스스로 돈을 벌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도시빈민'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통상적 기준으로 도시빈민은 경제적으로 하층민이며,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으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 있다. '도시빈민'에 관한 논의는 이후 80년대까지 중요한 주제로 논의되지만, 이 책의 연구에서 '도시빈민'의 혁명 참여가 나중에 어떻게 배신당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4.19혁명에 적극 참여한 도시빈민들이 상대적으로 엘리트이자 기득권 집단인 '학생 집단'과 분리되는 과정, 도시빈민의 혁명성이 범죄로 낙인 찍히면서 혁명의 동력이 차단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4.19혁명으로 정권은 바뀌었지만, '민중의 국가'가 되지 못한 것을 두고 '미완의 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지도 논의의 대상이다. 03 4월혁명과 여성 / 홍석률(성신여자대학교) 1. 머리말 2. 기록에서 배제되는 여성들 3. 여학생의 민주항쟁 참여와 활동 4. 일반 여성들의 민주항쟁 참여 5. 맺음말 4.19혁명에서 여성의 참여를 기록한 내용이 적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혁명 과정에서 여성 - 중학생, 고등학생, 20대, 중년, 노인 여성 등 - 의 참여는 고르게 발견되고 있음에도 기존의 연구와 언론에서 여성이 혁명에 적극 참여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그 근저에 가부장제 사회, 남성우월주의,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의 사회활동은 남성에 비해 부차적으로 인식되어왔으며,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거나 돋보이는 역할에 대해서는 사회적 압력이 가해졌다. 즉, 여성은 남성에 종속적 역할로 머물러야 한다는 가부장제 사회적 인식이 보편성을 띄던 사회상황이었고, 이 시기 대중의 성 인식은 매우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어, 봉건적 수준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진보적 엘리트, 좌익 정당에서는 여성의 참정권, 남녀평등에 관한 정책을 내놓기도 하는 등 여성의 불리한 사회적 위치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중의 인식 수준은 진보적 여성관을 수용할 정도로 높지 않았다. 여성은 사회적 약자라는 점에서 도시빈민과 비슷하지만, 젠더로 구분하는 순간, 도시빈민보다 더 열악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물론 도시빈민 내부에서도 젠더의 구분이 가능하고, 도시빈민 여성은 최하위 존재로 규정되어 있다는 건 이미 연구결과로 드러난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4.19혁명에 적극 참여한 것은, 사회의 억압구조를 타파하려는 여성 일반의 집단의식이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04 4월혁명과 근대화 주체론의 변화 / 홍정완(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1. 머리말 2. 1950년대 한국사회의 근대화 담론과 주체 3. 4월혁명과 근대화 주체론의 변화 4. 맺음말 05 4월혁명의 담론과 주체 / 황병주(역사문제연구소) 1. 머리말 2. 혁명 담론의 추이 3. 혁명 주체론 4. 맺음말 06 4월혁명의 자유주의적 전유―『동아일보』와 『사상계』 비교를 중심으로 / 윤상현(경남대학교) 1. 머리말 2. 혁명의 과정과 주체―『동아일보』의 4월혁명 서사구조 3. 혁명의 성격 짓기―『사상계』 지식인혁명/정신혁명 4. 맺음말 4월 혁명을 두고 한국의 여러 계층과 이해 집단에서는 혁명의 성격을 다르게 해석, 규정하고 있다. 4월 혁명을 민중이 주도한 '민중 혁명'으로 볼 것인지, 학생이 주도한 엘리트 계층의 혁명인지, 혁명의 성격을 두고도 민주주의 혁명인지, 민권 혁명인지 등 당시 혁명 세력 내부에서도 이런 논의는 정리되지 않은 채 무수한 담론만 남기고 시간이 흘렀다. 4.19혁명을 통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이후 부르주아, 엘리트 계층과 민중은 분리되고, 민주주의보다 파시즘에 경도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등장하면서 곧바로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왜곡된 군부독재의 등장과 함께, 세계적으로는 제3세계에서 발생한 수많은 군부쿠데타의 연속선에 있었다는 세계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2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약소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새로운 국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군부의 개입으로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한국 역시 그런 제3세계 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부르주아, 엘리트 계층은 자신들이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고 있었고, 이들의 스피커인 언론과 잡지도 4.19혁명을 학생이 주도한 엘리트 혁명으로 교묘히 구성하고 있었다. 이는 분단 상황으로 남북이 긴장 상태에 있고, 미국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점, 세계적으로는 미국과 쏘련의 냉전이 고조되고, 민중의 역량이 성장하지 못하던 시점이었던 것을 감안했을 때, 세계사의 흐름에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 경제적 토대가 없는 상황에서, 시민민주주의의 확대는 엄두를 내기 어려웠고, 국민 개개인의 의식, 지적 수준이 함양되지 못한 60년대 초반의 한국상황에서도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이루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기린의 심장
    기린의 심장 첫번째 작품 '어느 시인의 죽음'을 읽으면서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SF 작품을 쓰는 작가인가?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 뻔하고 식상한 이야기인데, 이걸 소재로 쓰는 작가라면, SF문학의 트랜드를 잘 모르는 작가가 아닐까, 생각했다. 두번째 작품 '라하이나의 눈'을 읽으면서, SF와 자본주의의 모순을 잘 '동기화'했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가난한 노동자는 자본가, 부르주아의 욕망에 깔려-여기서는 살이 쪄-죽는다는 풍자다. 그러고 보니 첫번째 작품에서도 주인공 용천은 가난하고 평범한 학생이고, 그는 돈을 받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 때문에 외계인의 제물이 된다. 그렇게 제물로 선택되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제물로 바쳐지는 동안,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떵떵거리고 살아간다. 자신의 몸에 붙은 지방을 대신 운동하면서 빼주는 노동자들이 있는 것처럼. 세번째 작품 '기린의 심장'을 읽으면서 작가의 실력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을 느꼈다. 경찰관 K가 소설가인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한편의 꿈과 같은 이야기면서, 거대한 환타지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러브 크래프트의 상상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네번째 작품 '마왕의 변'에서는 환타지와 무협, 온라인 게임의 캐릭터와 스토리들이 뒤섞인 세계관이 등장한다. 마왕의 탄생과 그에 맞서는 용사, 탱커, 힐러 등은 명백히 게임 캐릭터들이고, 마왕의 전복적 태도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마왕은 스스로의 지위를 내려 놓고, 용사는 마왕이 된다. 이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면서 저주를 받는 '워크래프트'의 주인공 아서스가 떠오른다. 다섯번째 작품 '허물'을 읽으면서, 앞에서 읽었던 작품들은 그저 습작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뒤로 가면서 나오는 '하얀 바다', '경계', '연극의 시작', '25분' 모두에서 똑같이 느꼈으며, 이 작가가 이미 작가로 데뷔해 실력 있는 작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인터넷을 검색해도 '이성욱'이라는 작가(소설가)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이 작품집이 이성욱 작가의 데뷔작이라면, 심상치 않은 작가라고 생각했다. 작가에 관해 알 수 없는 이유는, 이 책을 출간한 '교유서가'에서 정식 출간한 책이 아닌, '가제본'을 보내주었기 때문이고, 이 가제본에는 작가에 관한 어떤 정보도 없었다. 작가에 관해 아무런 정보 없이 '블라인드' 독서를 한 것인데, 작품집 앞의 네 편과 뒤의 다섯 편은 장르가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 작가에게는 모든 작품이 자신의 상상에서 나오기 때문에 구분할 이유가 없지만, 한 권의 작품집에서 작품의 장르와 세계관이 이렇게 확실하게 구분되는 현상을 보면서 독자는 조금 어리둥절할 수 있을 듯하다. 작품집의 뒷부분에 있는 작품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는다. 아들이 갑자기 사고(또는 병)로 죽고(허물), 6년만에 어렵게 임신한 아이를 유산하고(하얀 바다), 암으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경계), 딸을 사고로 잃고(연극의 시작), 고양이 새끼들이 죽는다(25분). 즉,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또는 그것을 상징하는 동물을 잃게 되면서 오는 공허함과 외로움, 고독, 절망 등을 느낀다. 작가는 이들 인물들의 감정을 건조하게 드러내며, 별다른 설명 없이 인물의 상황만으로 그가 겪는 고통을 보여준다. '허물'에서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이 뱀으로 변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랑하고 결혼한다. 그리고 아들이 사고로 죽는다. 작품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아들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즉 단원고 학생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탁월한 장면은 두 사람(부부)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아들을 잃은 고통으로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이미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아내는 자살하고, 자살한 아내 앞에서 주인공은 놀라운 발견을 한다. 아내를 내리기 위해 안아든 순간 묘한 위화감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가벼웠습니다. 땅에 내려놓자 시신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기묘한 형태로 구겨졌습니다. 선생님, 그것은 허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내는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처와 슬픔으로 채워진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신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때 제가 본 것은 아내의 껍질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30년 전 그 숲을 떠올렸습니다. 슬픔과 행복이 없는, 경이와 생명으로 넘쳐나던 그 세계를 말입니다. 제 가슴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충만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이가 죽은 뒤 처음으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사고로 아들을 잃고, 절망과 슬픔을 견디지 못한 엄마도 세상을 버리고, 뒤이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그 공허와 절대 고독이 느껴지면서 나도 주인공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의 슬픔과 동기화되는 이 느낌이 나만의 생각일까. 우리 개개인의 삶은 행복, 즐거움, 아름다움보다는 고통, 절망, 고독 등의 힘든 감정과 힘든 나날의 연속이라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인생에서 어느 쪽을 더 많이 경험하는가에 따라 그 삶이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겠지만, 삶은 그것을 견디는 힘에 있지 않을까. 이 작품집은 과거의 전통적 작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한 상상력과 작가의 세계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준다. 어느 시인의 죽음 외계종족 '가브'의 먹이가 되는 '인간' 이야기 대수는 먹이감을 고르는 사람, 용천은 평범한 학생으로 가브의 제물이 된다. 라하이나의 눈 다른 사람과 물리적 동기화-달리는 사람-다른 사람의 칼로리를 대신 빼주는 인물 기린의 심장 경찰관 K가 들려준 이야기. 마음이 지워진 사람들이 작은 언덕에 묻히는 이야기. 마왕의 변 환타지와 게임, 무협지가 뒤섞인 단편. 마왕의 죽음과 용사가 마왕이 되는 이야기. 허물 편지 형식. 유서. 한 남자의 삶, 아내, 아들. 아들의 죽음과 아내의 자살. 자살한 아내의 몸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드러내는 뱀의 허물 같은 것. 하얀 바다 6년만에 임신한 아이를 유산한 아내. 아내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나. 나의 불륜. 경계 아내를 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수학선생 재인. 딸은 배우가 되겠다며 반대하는 아버지의 곁을 떠나고, 옛날 제자에게서 편지가 온다. 동성애자였다는. 딸을 데리러 간 촬영장에서 더러운 물을 뿌리는 현장을 보고 참지 못한 재인은 그 물을 마시고, 딸을 데리고 온다. 연극의 시작 불법 물건을 배달하는 영준. 어느 날 누군가에게 잡히고, 왜 잡혔는지 이유를 말하라는 노인을 본다. 지하철에 불을 지른 노숙자, 피해자 가운데 노인의 딸이 있었다. 25분 이시훈 중사는 장기복무 신청을 하고 기다리고 있다. 그는 나일을 사랑하지만 군대에서 행보관에게 밉보이고, 우연히 눈에 띈 고양이에게 먹이를 준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수 많은 인연과 우연이 겹치면서 이런 놀라운 이야기가 탄생한다. 우리의 삶에서 이런 기적같은 우연이 과연 어느 정도 확률로 일어날 수 있을까. 이 책은 뉘른베르크 법원의 현재 상황에서 그곳에 모인 세 사람 - 한스 프랑크, 허쉬 라우터파하트, 라파엘 렘킨 - 의 운명적 만남과 이 세 사람과 연결된 작가, 작가의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을 펼치면, 저자가 당부하는 말이 나온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리비우(Lviv)라는 걸 강조한다. 왜 중요한가는 이 책을 다 읽으면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되면서 이해한다. '리비우'는 현재 우크라이나 도시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지만, '리비우', 렘베르크, 리보프, 로보프 등으로 바뀌는데, 무려 여덟 번이나 도시 이름이 바뀐다. 이것은 이 도시가 현대사에서 그만큼 격렬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은 매우 '개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저자 필립 샌즈는 영국에 살며 국제인권법 교수이면서 1990년대 이후 발생한 국제형사재판에 참여하고 있는 법정 변호사기이도 하다. 즉, 그는 변호사이면서도 조금 특수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그가 변호사가 된 계기는 그의 외할아버지 '레온'의 권유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필립 샌즈는 어려서부터 파리에 살고 있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댁에 가끔 놀러가곤 했는데, 소박하고 검소하면서도 절제 있는 생활을 하는 두 분을 보면서 조금은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안에는 가족 사진이나 앨범이 전혀 없고, 유일하게 두 분의 결혼사진만 한 장 있었다. 유럽인들이 가족 사진을 자랑스럽게 벽에 많이 붙여놓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두 노인 부부의 집에는 그런 사진이 전혀 없었다는 것, 또한 자식을 비롯해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는 마치 금기처럼 여겨져 절대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어린 필립 샌즈는 의아하게 여긴다. 외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시고도 필립 샌즈는 자신의 가족 역사에 관해 일부러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우연한 계기가 찾아오는데, 그건 국제인권법 변호사라는 직업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인연의 연결고리가 걸린 거라고 봐야한다. 2010년, '리비우대학'에서 필립 샌즈를 초청한다. 그가 전공한 국제인권법에서 '인도에 반한 죄'와 '제노사이드'에 관해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필립 샌즈는 '리비우대학'이 있는 '리비우'를 떠올리면서 문득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고향이 그곳인데? 라고 생각한다. '리비우대학'에서 강의를 하려면 리비우와 연결고리가 있는 이야기를 준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외할아버지의 고향이 '리비우'였고, 그때부터 외할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는 외가의 집안 역사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레온(저자의 외할아버지)은 과거에 관해 일절 말하지 않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딸(저자의 엄마)에게 평생 가지고 있었던 자료를 맡겨 놓았다. 레온이 죽고, 필립 샌즈는 외할아버지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가족의 역사를 추적한다. 이때, 유럽의 장점이 드러난다. 유럽은 두 번의 세계 전쟁으로 많은 것이 파괴되었지만, 기록과 자료를 꼼꼼하게 남긴 덕분에 개인사를 복원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저자는 고인이 남긴 기본 자료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료를 찾아나서며, 이 자료를 찾는 과정이 스릴러처럼 손에 땀을 쥐면서 흥미롭다. 사진 한 장, 서명, 주소 한 줄로 시작하는 자료 찾기는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자랐으며, 유럽의 어느 지역으로 이동하고, 언제, 어떻게 지역에서 지역으로 옮겨다녔는지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마치 지금의 '구글 경로'처럼 흔적을 연결하면 한 사람의 궤적이 나타나는 것이다. 레온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레온의 부모는 핀카스, 말케였고, 장남 에밀, 둘째딸 구스타, 셋째딸 로라 그리고 에밀이다. 장남 에밀은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고, 구스타는 막스 그루버와 결혼해 세 명의 자식과 손자까지 본다. 셋째 로라도 베른하르트 로젠블룸과 결혼하고 아들을 낳지만 이 가족 모두가 레온을 제외하고 유대인수용소에서 사망한다. 1933년 1월, 당시 독일대통령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한다. 레온은 1937년 리타와 결혼하고, 1938년 3월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한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후, 오스트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유대인을 학살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레온과 가족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미국이나 다른 유럽지역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지만, 비엔나를 탈출한 것은 레온 혼자였다. 레온은 홀몸으로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다. 몇 달 뒤 어린 딸 루스가 파리에 도착하지만, 레온의 아내는 여전히 비엔나에 남았다가 3년 뒤에 기적같이 파리로 탈출한다. 아기였던 루스를 비엔나에서 파리까지 데리고 온 사람은 '미스 틸니'였는데, 이 미국인 선교사의 역할이 드러나면서 수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살렸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뉘른베르크 법원에서 핵심 이론인 '정의에 반한 죄' 개념을 주장한 라우터파하트는 레온의 어머니 말케가 태어난 주키에프에서 1897년에 태어났다. '제노사이드' 개념을 주장한 렘킨은 1900년 태어났고, 두 사람은 우연히 로보프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라우터파하트는 1923년 영국에 도착해 런던경치경제대학에 등록하고 빠르게 영어를 배웠다.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이후, 라우터파하트는 곧바로 '독일에서의 유대인 학대'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 1937년 라우터파하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국제법 담당 교수가 되고, 1939년 독일이 폴란드는 침략할 때, 라우터파하트는 미국을 방문해 2개월 동안 미국 전역의 15개 로스쿨과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강의를 한다. 1941년, 다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와 국제법 관련 책을 집필하는데, 1941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웰슬리대학에서 가을 학기를 보내는데, 마침 뉴욕의 '유대인위원회'가 원고료를 넉넉히 줄테니 국제인권법에 관한 책을 집필해 달라고 요청한다. 라우터파하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개인의 국제법적 권리장전에 관하여'를 주제로 책을 쓰겠다고 약속한다. 우연한 상황이었지만 1944년, 라파엘 렘킨이 쓴 '추축국의 유럽 점령지 통치'가 미국에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을 라우터파하트가 읽는다. 렘킨은 이 책에서 '제노사이드' 개념을 처음 주장하는데, 정작 라우터파하트는 이 개념을 지지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의견을 표출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 정부는 패전국인 추축국을 상대로 전범 재판을 위한 준비를 하는데, 이때 라우터파하트가 제안하는 '인도에 반하는 죄'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 뉘른베르크 법원의 최고 판사는 쏘련이었으며, 미국과 영국에서 제안한 '인도에 반하는 죄'에 관한 개념을 쏘련이 받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다. 전쟁 전과 전쟁 동안 민간인에게 자행된 살인, 말살, 노예화, 추방 및 기타 비인도적인 행위 : 또는 행위가 자행된 국가의 법 위반과는 관련 없이 재판소의 관할권 내에서 범죄의 실행 또는 범죄와 관련되어 정치, 민족 또는 종교적 이유로 자행된 학대 행위 렘킨은 1900년에 태어났고, 라우터파하트가 졸업한 로보프대학의 법학부를 라우터파하트보다 2년 늦게 들어갔으니 같은 과 후배였다. 이 사실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는데, 매우 신기한 우연으로 뉘른베르크 법원에서 두 사람의 국제법 논리가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 1926년 렘킨은 대학을 졸업하고 로보프에서 60마일 떨어진 브르제자니에서 법원 서기와 공판담당 검사로 근무한 다음, 바르샤바의 항소법원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을 때인 1933년 무렵에 렘킨은 검사로 6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렘킨은 집단학살, 반달리즘을 예방할 수 있는 보편적 사법권에 관한 리플렛을 썼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공격당한다. 렘킨은 검사를 그만두고 상법 분야 변호사로 전직해 평온하게 살아가려 하지만,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곧바로 폴란드를 침공하자 바르샤바를 떠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미국으로 탈출한다. 독일에 점령당한 폴란드에 독일 총독이 부임하는데, 그가 바로 이 책에서 중요한 인물인 한스 프랑크다. 렘킨은 미국으로 가기 전, 1940년, 스톡홀름에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칼 슐리터의 권유로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는 스웨덴어를 배웠고, 책을 쓸 수준이 되었다. 그는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스톡홀름 도서관에서 많은 자료를 모으고 히틀러와 그의 정당이 저지른 범죄 행위를 문서를 통해 분석하기 시작한다. 당시 독일을 비롯해 유럽에서 발행된 공문서들 상당수가 스톡홀름 중앙도서관으로 모이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운 우연이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계획은 아주 작은 법령부터 고쳐나가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국적을 박탈해 유대인이 무국적자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만든다. 이 조치는 유럽 전역에 적용하고, 유대인 표시인 '다윗의 별' 무늬를 옷에 달도록 했다. 그리고 '게토 설립'을 통해 유대인을 게토로 이주시킨다. 마침내 게토를 벗어난 유대인을 처형할 수 있는 법령을 만들어 학살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렘킨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맥더못 교수에게 교수 제안을 받는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기차로 이동하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일본 쓰루가-교토-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시애틀 항구에 도착한다. 미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가지 대륙을 가로지르는 긴 여정을 거쳐 그는 마침내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 도착한다. 렘킨은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카네기재단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서의 유대인 대량 살육'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나중에 '추축국의 유럽 점령지 통치'의 초안이 되고, 이 책을 1943년 11월에 완성하고 1944년 11월 출간한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미국의 주요 언론-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즈-에서 중요한 서평으로 다뤄지면서 미국 정부가 렘킨을 주목하게 된다. 이 책은 '인도에 반한 죄'와 '제노사이드'의 개념을 만든 두 학자 라우터파하트와 렘킨의 이론적 근원을 추적하는 내용이면서, 이 두 사람이 우연하게 '로보프대학'의 동문이자 유대인이고, 이 책의 저자의 할아버지와 같은 도시의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는 우연을 발견하는 내용이다. 더구나 저자인 필립 샌즈 역시 '국제인권법'을 전공한 교수로 라우터파하트와 렘킨과 같은 법학 전공자라는 점에서 두 학자의 평생을 추적하는데 적임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 학살'이라는 나찌의 범죄를 개인사적으로 추적, 접근한 '전쟁미시사'의 저작으로도 훌륭한 가치를 갖는다. 책은 '라우터파하트'와 '렘킨', '한스 프랑크'에 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지만, 저자의 가족에 관해서도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저자의 어머니인 루스가 아기 때 폴란드에서 런던으로 탈출할 때 도왔던 미국인 선교사, 할아버지 레온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았지만,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막스'와 동성애 관계일 수 있다는 암시, 저자와 배다른 남매인 줄 알았던 미국에 사는 산드라와의 이야기 등은 마치 스릴러 소설을 읽는 듯 긴박하고 숨막히는 내용이다. 이 책을 책임번역한 정철승 변호사는 현재 광복회와 민족문제연구소 고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 자신 독립운동가 윤기섭 선생의 외손자로 독립운동가 집안의 변호사다. 그가 국제인권법의 기원을 다룬 이 책을 책임번역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지만, 번역이 유려하고, 재미읽게 읽히는 것은 탁월한 번역과 역사에 깊은 이해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조기 평전
    조기 평전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가장 부러워 하는 글쓰기 방식이 '조기 평전'과 같은 형식이다. 하나의 주제를 갖되, 그 주제가 드러내는 모든 요소를 날실과 씨실을 엮듯, 즉 그물을 엮듯 엮어가면서 점차 확장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런 글쓰기는 글을 쓰는 사람은 괴롭지만, 읽는 사람에게는 매우 기분 좋은 경험을 하게 만든다. 작가는 박물학적, 백과전서적 지식을 섭렵해야 하며, 그렇게 얻은 지식과 자료와 정보를 면밀하게 계산해서 글로 풀어야 한다. 이 책 '조기 평전'은 조기 한 마리로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다. 제주도 서남쪽에서 시작해 서해 바다의 근해를 따라 이동하면서 압록강 근처 철산 용암포까지 올라갔다가 회귀하는 조기의 이동은 우리 민족의 삶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문명사, 경제사, 어업사, 인류사에 포함된다. 서해 바다에서 조기를 잡았다는 기록은 고려 때도 있었으니 이미 훨씬 오래 전부터 서해에서 조기 잡이는 이루어졌을 것이라 짐작한다. 서해의 남쪽부터 무수히 많은 섬들과 그 섬에서 사는 민중의 삶은 물고기를 잡아 곡식으로 바꿔 먹는 삶이었고, 서해안의 바닷가 마을에 사는 민중 역시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서해 남쪽의 섬 가거도부터 만재도, 흑산도, 안마도, 송이도, 위도, 개야도, 죽도, 연도, 어청도, 삽시도, 호도, 녹도, 외연도, 횡견도, 궁시도, 난도, 격렬비열도, 덕적도, 선갑도, 백아도, 울도, 연평도, 백령도, 대청도, 초도, 대화도까지 한반도 서쪽의 육지에서 가까운 섬들은 모두 조기 잡이와 깊은 연관이 있다. 역사적으로 조기는 임금에게 진상하는 물목 가운데 하나였으며, 조선시대에 조기는 흔한 생선이었다. 또한 조기의 크기도 지금보다 훨씬 커서 소금에 절인 조기는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맛도 좋아 인기 있는 생선이었다. 조기잡이는 일제강점기부터 구체적인 자료를 남기기 시작했는데, 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오는 어항의 객주들이 조기를 사들이는 양과 금액이 구체적으로 적시된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조기철이 되면 남해안의 어선은 물론이고 멀리 일본에서까지 조기를 잡으로 올 정도였으니 어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해도 조기의 어획량은 엄청났다. 조기와 관련해 펼쳐지는 이야기에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과 신하들의 상황, 한양까지 내려온 청나라 황제 앞에서 인조가 무릎을 꿇어야 했던 굴욕의 역사, 그리고 '조기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임경업 장군의 전설과 신격화가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임경업 장군이 '조기의 신'으로 추앙받게 되는 과정은 곧 억압받는 민중의 한과 정서가 당시 임경업 장군이 억울하게 처형당한 상황과 맞물리면서 신격화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칠산파시, 연평도파시 등 조기철 어업이 성황을 이루고, 각 섬과 포구에 조기가 넘치게 되면 덩달아 사람과 돈도 넘쳐흘렀다. 지나가던 개도 돈을 물고 다닐 정도로 흥청거렸을 정도라고 하니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설명하는 '파시'의 일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1930년대 중기의 일간지 기사에는 연평도의 파시풍을 현장감 있게 다룬 것들이 보인다. 우리 나라 3대 어장 중의 백미(白眉)로 유명한 연평도 조기어장에는 조기 안강망 어선 약 1,000척과 운반선 및 상선 약 1,000척이 몰려와 장관을 이루었고, 육상에는 성어기(盛漁期)의 어부의 상륙을 노려 급히 문을 연 요리점 30호, 카페 1호, 음식점 53호를 비롯하여 이발관 9호, 목욕탕 3호, 대서소 2호, 여인숙 5호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조기와 함께 연평도의 명물인 낭자군(娘子群)에서는 예기(藝妓) 5명, 작부 95명, 여급 3명, 합계 103명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조기를 쫓는 어부와 어부를 쫓는 낭자군이 뒤범벅이 되어 광복 후에도 조기어업은 주요 어업의 하나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지 않고 있었고, 파시도 예나 다름없이 열리고 있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파시(波市))] 지금 우리가 먹는 조기는 예전에 비하면 작은 크기다. 지금도 팔리고 있는 조기는 1cm 단위로 가격이 엄청나게 큰 차이를 보인다. 즉 큰 조기는 훨씬 비싸게 팔린다. 조기가 작은 이유는 오랜 남획 때문이며, 수탈 어업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조기 한 마리에서 우리는 역사를 관통하는 민중의 삶과 변화, 발전하는 어구, 조업 방식, 조기를 가공하는 방식, 조기를 비롯한 물고기의 생태와 상품(식품)으로의 유통과 식재료, 음식으로 끼친 영향 등을 배울 수 있다. '조기 평전'은 책 읽는 즐거움을 느끼고 누릴 수 있는 박물학적 지식이 가득한 책이다. 역사, 신화, 민담, 영웅서사까지 다양한 소재와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한 이 책을 많은 분이 읽기를 추천한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대한민국 대전환 100년의 조건
    대한민국 대전환 100년의 조건 내가 경제학 기초를 처음 공부한 건 군대에서 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스무살 중반이었다. 그때 소모임은 사회과학을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짰는데, 우리 모임의 학습을 이끌던 선배 둘은 모두 성대를 다니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성대 학생운동 그룹은 PD 진영으로 알려졌고, NL이 중심이었던 서울대와는 다르게 마르크스, 레닌 이론을 주로 학습했다. 수준은 당연히 기초적 내용이었고, 우리는 매주 한 권씩 책을 읽고 토론했다. 그때 읽었던 책 가운데 최종식의 '서양경제사론'과 박현채 교수의 '한국 농업문제의 새로운 인식',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같은 경제 관련 책을 읽었다. 이밖에도 일본 번역서 가운데 경제 관련 사회과학 책들을 읽었고, 제3세계 관련 책도 몇 권 있었다. 이때 읽은 내용에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할 뿐 아니라, 인류의 발전을 물적 토대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책이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였다. 이 책은 1933년 출판되었는데, 당시로는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원시, 고대사회 경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즉, 우리가 신화로만 알고 있는 단군 신화의 내용이 부족과 부족 사이의 투쟁과 결합이었으며, 당시의 부족이 정착생활을 하며 농업을 하던 부족들이었다는 내용인데, 지금이야 쉽게 수긍할 수 있지만, 사회과학 공부를 처음 하던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 뒤로 경제학 공부는 더 깊게 하지 못했고, 한국의 경제학자들 가운데 마르크스 경제학을 하는 학자들도 드물고, 그 이론을 펼치기에는 당시 한국사회가 군부독재 상황이어서 여의치 못한 것도 있었다. 그러다 '정운영'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한겨레신문을 통해 알게 된 정운영 선생님은 그 뒤로도 방송에서도 볼 수 있었고, 중앙일보에서도 칼럼을 꾸준히 써서 그의 글을 읽는 즐거움과 행복함이 있었다. 정운영 선생님은 지금도 그 분을 능가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미문'이다. 글을 잘 쓴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데, 더구나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건 예사 재능으로는 흉내내지 못하는 영역이다. 나는 지금도 정운영 선생님의 책을 읽곤 하는데 - 오늘도 헌책방에서 갖고 있지 못한 책을 발견하고 주문했다 - 글을 읽을 때면 정운영 선생님의 생전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고, 대학에서 강의도 했지만, 한국의 엄혹한 상황에서 자신의 뜻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다. 최배근 교수님을 알게 된 건 '김어준의 뉴스공장' 덕분이다. 그 전까지 솔직히 나는 한국의 경제학자들에 관심이 없었고, 주로 외국 학자 가운데 한국에 책으로 번역되어 있는 학자들을 조금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가운데 E.K. 헌트의 책을 통해 세계 자본주의 흐름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기초를 배울 수 있었다. 경제학과 경제학자의 개론에 관해서는 여러 권을 읽어서 큰 줄기는 알고 있었지만, 경제학, 정치경제학의 깊이와 구체적인 면면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는, 수박 겉핥기의 독서였다. 라디오에서 최배근 교수님이 한국 경제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평소 내가 가졌던 생각과 거의 99%의 씽크로율을 느끼게 된 것이 신기했다. 방송으로만 알게 된 최배근 교수님은 약간 투박한 말투와 독특한 어미의 활용이 인상 깊었는데, 그의 책을 구입할 생각까지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최근에 최배근 교수님이 쓴 '대한민국 대전화 100년의 조건'을 구입해 읽어봤다. 책의 내용은 차치하고, 책날개에 있는 프로필을 보면서 많이 놀랐다. 최배근 교수의 경력은 매우 화려했다. 2010년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의 '세계 100대 교수', '세계 100대 교육자', 21세기의 탁월한 지식인 2,000명'에 선정되었으며, 2017년, 2018년 연속으로 마르퀴즈 후즈 후의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나만 그동안 최배근 교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나보다. 이 책 '대한민국 대전화 100년의 조건'도 처음에는 큰 기대하지 않고 구입했다. 경제학자가 한국을 분석한 이론서니까 조금 딱딱할 것이고, 각종 통계 자료와 경제학 용어들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재미로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무엇보다 쉬운 언어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좋았고,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며, 하고자 하는 발언의 내용을 두괄식으로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어서 나처럼 경제를 잘 모르는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서문에서, 한국은 21세기를 '새로운 처음'을 맞닥뜨리는 나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1) IT 및 인터넷 혁명에서 데이터 혁명으로 진행하는 기술 혁명 2) 기후변화 문제와 신재생 에너지 문제 3) 남북한이 반드시 연결되고 통합되어야 하는 문제를 짚고 있다. 본문의 앞부분에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제기를 하는데, 21세기의 시작은 1) 2001년 9.11테러 2) 신종 바이러스의 습격 3)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 4) 2011년 지진, 쓰나미와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꼽고 있다. 이 책은 누구나 한번쯤 한국 경제,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쉽고 재미있게 읽으며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쉽고 재미있다고 해서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각종 자료들은 가장 최근의 국제 공식 통계들이어서 경제를 이해하는데 필수 내용이며, 사람들과 경제 이야기를 하거나, 토론을 할 때 이 책의 내용이 매우 훌륭한 근거 자료로 뒷받침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쭉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가졌던 경제학에 관한 선입견이 상당히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최배근 교수님이 말하는 경제는 결코 어렵지 않으며, 전문가만 알고 있는 내용도 아니었다. 경제는 모든 국민이 먹고 사는 문제를 다루는 것인데, 경제전문가라고 행세하는 사람들은 복잡한 이론과 언변으로 대중을 무지하게 만들고 있다. 전문가라면 오히려 알기 쉬운 말로 대중에게 현재의 상황과 문제를 올바르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기존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엘리트주의에 빠진 경제학자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경제학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최배근 교수는 경제를 왜곡하는 전문가들과 언론에 맞서 일당백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가 독도와 관련해 일본의 왜곡, 선동에 대해 일당백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한국의 경제학자들 가운데 드물게 정의롭고 양심적인 학자임을 알 수 있다. 촛불 시민이라면 이런 학자들을 보호하고 실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수구, 반동, 매국노들이 많기 때문이다. 많은 분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양망일기
    양망일기 지은이 하동현 선장이자 작가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하동현 작가와 우연히 겹치는 인연이 있다. 우리는 같은 해에 태어났고, 하 선장이 배를 탈 무렵, 나는 군대에서 전역하고 '현대해양'에 입사했다. 이 책이 '현대해양'에서 연재한 글이라는 것 역시 우연이다. '현대해양'에서는 짧은 기간 일했지만, 그때 나는 우리나라의 바다 관련 정책과 산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느꼈다. 우리는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땅을 가지고 있지만, 해양 관련 정책과 산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하다. 해양 관련 산업은 대중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다양하고 중요하다. 현재 한국의 조선산업은 세계 1위이며 기술과 수주 실적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한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구조조정과 기술혁신을 통해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바다 산업에는 원양어업과 연근해어업이 있고, 양식업이 있다. 또한 바다를 활용하는 해양레저, 스포츠 산업도 중요하다. 여기에 바다를 의지해 살아가는 많은 어민들의 삶이 있고, 바다에서 나오는 먹거리는 우리 양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그 중요성은 말할 나위 없다. 이렇게 중요한 바다 관련 산업을 지원하는 정부의 정책과 예산, 제도는 많이 부족하고, 어민의 삶을 지금보다 더 낫게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생각보다 느리다. 이런 큰 흐름이 문화, 예술에서도 나타난다. 바다, 해양의 중요성이 높음에도 대중의 관심이 적은 이유는 정부의 지원과 홍보가 부족하고, 언론도 중요하지 않게 여기며, 바다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바다, 해양을 다루는 예술가들이 드물고, 그 현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런 가운데 드물지만 훌륭한 성과를 보이는 현장 작가들이 나타나는데, 소설 '남극해'를 쓴 이윤길 선장과 이 책 '양망일기'를 쓴 하동현 선장이 바로 그들이다. 배를 타고 세계를 누비며 조업을 하고, 세계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한 이들 뱃사람들이 남긴 기록은 그 자체로 새로운 영역의 예술 세계다. 이 책 '양망일기'는 하동현 선장의 산문집으로, 그가 바다에서 생활하며 겪은 다양한 경험을 유려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다 생활의 기록만으로도 신기한 이야기가 많아서 읽는 즐거움이 크다. 바다와 해양을 모르는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새로운 상식도 많이 알 수 있으며, 무엇보다 하 선장이 겪은 많은 에피소드가 마치 소설처럼 신기하고 놀랍다. 이 책은 하 선장의 개인적 경험과 기록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넓은 의미에서 한국 해양산업의 다양한 모습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한때 한국산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었다. 1960년, 1970년대는 한국의 경제가 경공업 위주로 편재되어 있었고, 노동력을 집중하는 산업에서 강세를 보였다. 이때 이미 한국은 수출 위주의 산업 구조를 확정하고, 노동력 집중 산업인 섬유, 전자, 건설 등에 집중 투자하고 있었다. 원양어업도 이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독일에 간호사, 광부들이 파견되었고, 중동 지역에 건설노동자들이 파견되어 외화를 벌었다. 80년대 이후 중화학 공업에서 백색 가전, 반도체, 첨단 IT 산업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동 집약적 산업은 자연스럽게 축소되었고, 이들이 한국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바다'는 여전히 첨단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영역이다. 다른 분야 산업이 위축되고 하향길을 걸어도 '바다'와 관련한 해양 산업은 첨단 IT 산업과 궤를 같이 한다. 이런 사실 역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양망일기'는 독자를 낯선 세계로 안내한다. 육지에 사는 사람이 막연하게 동경하는 바다, 수평선이 보이고,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파도가 철썩이고, 바다 낚시를 하고, 해녀들이 바다 밑에서 건져올린 해산물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낭만이 아닌, 진짜 바다, 거칠고 두려운 파도가 일렁이고, 빙하가 살아 움직이고, 폭풍이 휘몰아치고, 무더위와 갈증을 견뎌야 하고, 바다 위,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 위에서 몇 달을 견디며 생활해야 하는 진짜 바다를 이야기한다. 항구와 공항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과의 짧은 인연, 망망대해 바다 위에서 벌어진 칼부림, 해양에서 쓰이는 전문용어와 그 유래, 세계 여러나라를 다니며 겪은 낭만과 음식, 부족한 물을 아껴쓰는 지혜, 바다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일반인들의 편견과 무지를 대하는 태도 등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진솔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양산문'이라는 분야도 한국문학에서는 매우 드물고 귀하다. 문학의 다양성과 폭넓은 영역을 포괄하기 위해서라도 해양, 바다와 관련한 글이 지금보다 더 많이 발표되기를 바라는데, 단지 '해양문학'이라는 고정되고, 제한된 영역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바다와 해양이 스며들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제 농업과 어업의 역사를 잃어가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IT사회로 발전, 이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만, 우리의 뿌리가 되는 농업과 어업을 소홀하게 여길 수는 없다. 세상이 아무리 첨단으로 발전해도 우리의 근원이자 뿌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바다는 우리의 삼면에 있고, 가장 중요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곳이며, 산업면으로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곳이다. 바다와 관련한 더 많은 이야기, 다양한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작가가 꾸준히 배출되기를 바라며, 해양문학으로는 1세대에 해당하는 하동현 작가의 신선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독자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무신론자의 시대
    무신론자의 시대 제목이 '무신론자의 시대'인데, 원문 제목은 The Age of Nothing: How We Have Sought To Live Since The Death of God 이다. '무의 시대 : 신의 죽음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작가는 '신의 죽음'을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기준으로 삼는다. 즉,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19세기 이후의 세계는 신이 없는 사회, 신의 존재가 무의미한 사회를 어떻게 살아왔을까 살펴본다. 니체가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발표한 이후, 그가 제시한 '초인'의 개념은 서양에서 수천 년 이어져 온 '신', '하나님'의 개념을 대체할만한 놀라운 개념이었다. 과거 종교가 지배하던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종교는 자본의 힘에 밀려나 절대적 권위를 잃게 된다. 종교는 자본에 기생하거나, 자본의 비위를 맞추며 생존하는 방법을 찾는데, 이는 '종교의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종교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에서 영혼의 구원을 받고자 교회나 성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빈곤과 생존의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종교를 갖는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나타난다. 다만, 미국의 상황과 다른 나라는 사뭇 다른 형태를 보이는데, 미국에서는 종교(기독교, 개신교)를 갖고,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반해, 다른 나라에서는 종교(기독교,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삶이 조금 더 나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주장은 당시(19세기)의 사회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시기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필두로 수많은 과학적 발견, 발명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우주론, 천문학, 물리학 등 정교한 과학 이론의 등장으로 인간의 사고 영역과 지적 확장이 다른 어느 시기보다 빠르게 넓어지던 때였다. 따라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그동안 인류가 살아오면서 가졌던 관념과 무지를 벗어나 이성의 시대로 진입하는 선언이었으며, 종교(와 종교지도자)가 억압하고 있었던 종교 이외의 다양한 삶 - 쾌락, 예술, 문화, 오락, 과학 등 - 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는 프로이트와 융이 정신분석학을 하나의 학문 체계로 세우면서 인간의 정신과 심리가 과학적으로 분석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류의 무지와 몽매에서 탄생한 종교는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지만, 새로운 개념으로 바뀌는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서양에서 두 번의 전쟁 - 1차, 2차 세계전쟁 - 은 서양(유럽)의 기존 관념과 질서를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재조직, 재구축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전쟁을 겪은 유럽인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신이 없는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전후 '실존주의 철학'이 등장하고, 기존의 '신'은 부정된다. 이 책은 '종교' 또는 '신'이 하나의 절대적 믿음으로의 신앙 체계이자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이었던 과거와 달리 근현대의 유럽과 미국에서 '신'이 사라지게 된 원인과 계기를 밝히고, '신'이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신'과 '종교'를 이해하고 새롭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지성사의 흐름을 말하고 있다. 여기 기록된 담론은 '거대 서사'를 이루며, 근현대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이론과 현상을 근거로 한다. 역사, 철학, 문학, 과학, 예술(미술, 음악, 건축),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 마약 등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과 자료가 언급되고 있어서 유럽과 미국의 지성사의 흐름이나 담론을 이해하기에 꼭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이렇게 방대한 서사는 '종교'와 '신'의 존재가 무의미해진 사회에서 그것을 대체하거나 새롭게 해석하거나, 무의미하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종교'와 '신'이라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다만 '종교' 또는 '신'의 존재가 과거와는 다르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근현대사의 유럽에서 그것(종교, 신)을 대체하는 이론과 다양한 분야의 활동이 곧 '현대'를 구성하는 것이다. 과학은 진화론 이후 우주의 탄생(빅뱅)과 지구의 생성, 생명의 탄생, 초기 박테리아에서 진화를 거듭해 현생 인류의 등장까지가 과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만큼 탄탄한 논리를 갖추게 되고, 자본주의 이후 그것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인 공산주의의 등장은 '무신론'을 더욱 강화화고 확장했다. 과거의 '종교' 또는 '신'이 인간의 개성과 인권을 억누르고 통제했다면, 종교가 권위와 힘을 잃은 근현대에서 개인의 성장과 '개인성'의 등장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근대 이전까지 '개인'은 물리적으로 존재했으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의식되지 않는' 존재였다. '개인'이 역사적 존재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종교' 또는 '신'의 존재는 더욱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종교(신)를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예전에는 아무런 혼동 없이 뒤섞여 있었다면, 세계 전쟁 이후 마치 원심분리가 되는 것처럼 뚜렷하게 사회 속에서 구분되기 시작했다. 종교나 신의 존재 없이 스스로의 존재만으로 살아가는 '개인'이 대부분이지만, 종교 또는 신을 믿는 사람들은 다시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종교와 신을 내걸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 - 종교사업자 - 과 빈곤 또는 무지에서 오는 불안으로 종교를 찾거나 신을 믿는 사람들이다. 빈곤과 무지, 불안으로 종교를 찾거나 신을 믿는 사람들은 종교사업자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 그들의 숙주가 된다. 종교사업자들은 고대에 탄생한 종교와 신을 내걸고 그들의 대리자로 자처한다. 이들은 신도들의 헌금을 모아 큰 규모의 집회장 - 교회, 성당, 사찰, 사원 등 -을 짓고, 더 많은 숙주를 끌어모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는 '자본'의 논리와 똑같이 작동한다. 자본가는 생산수단(토지, 공장, 원료)을 갖고 노동자를 고용해 '상품'을 만든다. 이때 노동자의 잉여노동(자신의 임금만큼 노동한 것 이외의 노동시간)으로 생산한 상품을 판매해 이윤을 가져간다. 종교사업자는 생산수단(교회, 성당, 사찰, 사원 등)을 보유하고 신도를 끌어모은다. 종교사업자 - 목사, 신부, 중, 랍비 등 -는 신도들에게 신의 대리자로 '신의 말씀'을 들려주는 서비스(상품)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헌금을 받는다. 근대 이후 200년은 자본주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책에서 논의하는 기본 전제는 신의 존재가 과학에 의해 합리적으로 배제되는 상황에서도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는 걸 바탕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중세 뿐아니라 근현대에도 종교로 인한 전쟁과 학살은 하루도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종교 원리주의자, 근본주의자들이 벌이는 살육이 인류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고, 차별과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종교(신)가 힘을 잃으면 윤리적, 도덕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거라는 종교주의자들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을 뿐아니라 악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진화론을 비롯한 생물학, 우주학 등 실험, 관측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면 무지에서 벗어나 합리성을 획득하고, 합리적 이성은 합리적 도덕과 윤리관을 갖추게 됨을 알 수 있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는 조선 영조, 정조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자본주의와는 다르게 '민주주의'는 외부에서 이식된 시기가 명백하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해방되면서 한국(남한)을 점령한 미군에 의해 서양의 민주주의 형식이 도입되었다. 이 책은 '한국 민주주의 100년' 시리즈의 2편으로, 한국에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뿌리 내리는 과정에서 우리(한국인)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으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를 여러 분야의 활동을 통해 알아보고 있다. 이 책은 아래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민주주의의 핵심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민주주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올바른 역사를 배우고, 관점을 바르게 갖추는 데도 도움이 되는 책이다. 민주주의에서 '자유', '평등'은 빼놓을 수 없는 가치인데, 한국에서 '자유'의 개념이 처음 들어온 것은 근대였으며, '자유'는 민주주의가 확립되기 이전부터 이미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길 만큼의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에서 '평등' 개념은 '자유'만큼이나 중요하지만, 한국에서 '평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개념과 실천으로는 존재했으나 헌법을 비롯한 법률로는 늦게 등장했다. '평등'이라는 단어 대신 '균등', '공정' 같은 단어들이 대신했으나 이제는 '불평등'한 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민주주의적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세계 어느 나라의 헌법보다 민주주의를 강조한 문장이라는 점에서, 한국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일찍부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민주국'이자 '공화국'이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 개념이 중복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지만, 헌법 제1조에 담긴 가치는 군사정권에서 시민들의 투쟁과 대통령을 탄핵한 촛불시민의 민주주의 행동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토지는 '지주주의'와 '지공주의'로 크게 나뉘는데, 토지는 공동체 전체의 재산이어서 특정한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지공주의'이고, 토지도 다른 재산처럼 개인이 완벽하게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지주주의'다. 과거 고려와 조선에서는 개인의 토지 소유의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가, 점차 왕족, 양반, 관료를 중심으로 토지 소유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대한제국에서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자, 일본은 '지주주의'를 전면적으로 확대했고, 이것이 현재 한국의 '지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일본은 한국을 영구히 지배하려는 야욕을 갖고 한국의 땅을 미세하게 분할해 일본인에게 판매할 목적을 갖고 토지조사사업을 벌였으며, 이 시기에 많은 한국인이 자기 땅을 빼앗겼다. 해방이 되고 일시적으로 농지개혁을 통해 농민에게 땅을 돌려주는 일이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 이후 부동산 개발을 통해 토지는 철저히 사유화된다. 토지 공개념을 도입하려는 정부 - 노무현, 문재인 정부 - 는 기득권과 부동산 욕망으로 가득한 개인들의 저항을 받게 되고, 보편적 토지공개념의 도입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모범이 되는 나라다. 그것은 한국의 근현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한국의 국민은 지배계급, 지배권력에 맞서 자기의 권리와 민주주의의 확보를 위해 피와 눈물, 땀을 흘리며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민주주의 국가로 널리 알려진 것도 17세기에 있었던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매우 컸다. 하지만 프랑스는 제국으로 수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착취한 범죄를 저지른 나라다. 반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으나 3.1만세운동을 비롯해 무장 독립투쟁을 끈질기게 이어왔으며, 해방 이후 친일파, 매국노들이 권력을 잡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싸웠다. 4.19혁명,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민주화 투쟁, 전두환의 군부쿠데타에 맞선 광주민주항쟁, 1987년, 1988년 노동자와 국민 대투쟁,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시킨 1600만 명의 촛불시위 등 한국 현대사는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였다. 한국현대사에서 정당 정치는 민주주의 발전의 변화를 확인하는 아이콘이다. 한국에서는 정부를 수립한 이후 다당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정권에서 정당은 권력의 직접 조종을 받는 괴뢰집단인 경우가 많았고, 권력자의 의지와 의도를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한 집단이었다. 특히 박정희가 만든 공화당은 박정희 정권의 지속, 독재 권력의 유지를 위한 도구였으며, 공화당 이후 전두환이 이름을 바꾼 민정당 이래 공화당의 정치 이념을 이어받은 정당은 수구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수구 집단의 정당이 주류였던 사회에서 다양한 정당이 등장하는 사회로 발전한 것이 곧 민주주의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받아 '양당제'를 기본으로 유지하고 있지만, 2000년 이후 거대 양당 이외에도 소수 정당이 다양한 형태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현재 녹색당, 노동당, 민중당, 사회당 등 자본주의 질서에 반대하는 정당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는 시민의 민주주의 활동이 그만큼 활발하다는 것을 뜻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성착취가 지난 100년 동안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 개략하는 내용은 민주주의 학습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도 성차별, 성불평등은 마치 터부처럼 여겨졌다. 우리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 성노예(위안부) 범죄를 강력하게 규탄하면서도 지난 100년 한국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른 구조적, 제도적 성범죄, 성착취에 관해서는 짐짓 모른 체하며 살아왔다. 여성의 인권과 권리가 확장된 것은 민주주의가 확대되어가면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여성의 피눈물과 여성의 권리는 물론 보편적 인권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성폭력, 성착취가 문제되는 것은 한국사회가 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 체제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남성들은 태생적 우월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권리는 그들 스스로 지킬 만큼의 힘(사회적 권력)이 부족했고, 권력을 가진 남성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각종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여성을 억압했다. '미투'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했지만,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스스로 밝힘으로써, 피해자가 비난당하는 이중의 차별과 폭력에서 벗어나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의 법적,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묻는 능동적 행동을 시작했다. 학생운동은 1919년 3.1만세운동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이후 한국 민주주의 운동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야이기도 하다. 특히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부터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의 산실로, 민주주의 투쟁과 함께 노동운동,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이념의 도입과 전개의 마당으로 학생운동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교에서 민주주의 운동의 역사를 배우지 못한 학생이나, 30대 이하의 청년들은 이 책에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꽤 많이 발견할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은 사회과학 서적이나 정치경제학 같은 책을 즐겨 읽지 않는 시대여서 이런 주제가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책의 내용은 상당히 쉽게 씌여졌고, 교양으로 읽기에 적당한 수준이라 특히 청년이 읽기를 권한다. 서문: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의 변화_김동춘 1부한국민주주의의 가치와 지향 1장 자유 대 자유, 저항과 반동의 역사를 넘어서 _문지영 2장 평등과 균등의 길항, 또는 연대 _이나미 3장 헌법 제1조의 기원과 변화로 본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 _정상호 4장 한국의 토지소유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변천해 왔을까?: 지주주의와 지공주의의 갈등과 대립을 중심으로 _전강수 2부 민주주의 문화에 대한 성찰 5장 한국 저항문화의 전통과 변화: 3·1운동에서 촛불집회까지, 1919~2019 _신진욱 6장 한국 정치 100년, 정당조직문화의 변화 _서복경 7장 미투 100년, 성폭력을 넘어 민주주의로 가는 길 _김아람 8장 이념서클을 통해서 본 학생운동 조직문화의 변화 _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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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3-08-26
  • 2030 축의 전환
    2030 축의 전환 불과 10년 사이에 일어날 변화를 예측한 책이다. 저자 마우로 기예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이 앞으로 10년 사이에 벌어지는 극적인 변화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되는 나라라고 말한다. 우리로서는 기분 좋은 전망이다. 한국은 이미 세계에서 문화 컨텐츠 - K팝, 영화, 드라마 - 로 인지도가 높은 나라이며, 삼성 스마트폰, 엘지의 백색 가전으로도 세계 최고 입지를 굳히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더 신경 써야 할 것을 말했는데, 1) 노년층의 시간제 일자리 확보를 위한 정책 개발, 2) 여성의 창의력을 적극 활용하는 정책, 3) 세계화, 국제 무역, 이민을 받아들이는 정책 등 세 가지를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실행한다면, 한국의 입지는 더욱 튼튼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모두 8장으로 구성했고, 각 장은 앞으로 변하게 될 사회 변화에서 핵심이 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제목의 특징만 보면, 1) 여성과 출산, 2) 노인 세대의 활약, 3) 새로운 중산층의 탄생, 4) 더 강하고 부유한 여성, 5) 도시의 기능과 역할, 6) 과학기술의 발달로 바뀌는 세상, 7) 소유보다는 공유 경제, 8) 암호 화폐의 미래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성과 출산의 문제는, 현재 세계 인구가 80억 명에 가깝게 꾸준히 늘어났지만, 앞으로 인구는 줄어들고 출산율은 낮아진다. 인구가 늘어나는 지역은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뿐이며, 그 외 모든 지역에서는 인구가 꾸준히 줄어들게 된다.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 여성의 사회, 경제 활동이 활발하게 되는 것과 반비례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일자리, 임금 수준, 주거 문제, 물가인상률 등 사회적 압력이 클수록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인구가 줄어드는 선진국, 중진국에서는 이민자를 적극 받아들이는 정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과거 미국에서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그 이민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례를 들고 있다. 노인 세대가 경제 활동의 주체가 되는 시기를 2030년대로 보고 있는데, 그때가 되면 세계 인구에서 60세 이상 인구가 35억 명이 되며, 이는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깝다. 뿐만 아니라 이 60세 이상 노인 세대는 다른 세대들과 비교해서 최대 23배 이상 재산이 많은 부자 세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실버 세대가 주류가 되는 사회에서는 제품, 서비스도 달라지며 실버 세대를 위한 건강 및 가사 관리 서비스 산업, 여가 시간을 활용하는 오락 산업, 삶의 질을 높여주는 산업이 발달하게 된다. 노인을 위한 도우미 로봇 산업, 인공지능 분야가 발달하고, 금융과 자산관리 서비스도 활발해 진다. 무엇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의료 기술의 발달로 건강한 노인이 많아지면서 여가 시간을 적당한 수준의 노동으로 일하기 바라는 노인이 늘어나 '노인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회적 과제가 된다. 중산층 기준은 각 나라의 경제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연간 1만5천 달러에서 15만 달러 사이의 수입이 있는 가정을 중산층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미국을 비롯한 유럽 선진국에서 이런 중산층이 가장 두터웠으나, 이미 아시아의 한국, 중국, 인도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이런 수준에 도달했으며, 중산층의 소비 패턴이 달라지고 있다. 이미 선진국인 유럽과 미국의 중산층을 '기존 중산층'이라고 한다면,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 경제적 부의 확대로 나타나는 '신흥 중산층'은 과거의 중산층과 다른 소비 성향을 보인다. 이들은 '기존 중산층'에 비해 나이가 젊고, 인구가 많으며, 새로운 문물에 적극적 태도를 보인다. 반면 '기존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은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밀리거나 경제가 쇠퇴하면서 중산층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자연스럽게 '기본소득'이라는 경제, 복지정책의 도입을 검토하게 된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이지만, 2030년이 된다고 해도 현재의 상황 - 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 사회, 여성 차별 사회 - 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한다. 여성이 주체적 삶을 선택할수록 비혼이 늘어나며, 출산율은 낮아지고, 인구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이어지는데, 이것은 여성이 여전히 사회에서 억압과 피해를 당하는 입장임을 보여주는 상황이다. 남녀의 전통적 사회적 관계가 변하고, 능력 있는 여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주도권을 갖게 되는 비중은 늘어나며, 여성 전체의 재화도 꾸준히 증가한다. 여성의 경제 활동은 산업의 변화를 일으키는데, 여성 위주의 상품, 서비스가 발달하게 된다. 도시 지역은 지구 전체의 토지에서 1%에 불과하지만 전체 인구의 55%가 모여 사는 밀집 지역이다. 도시는 전세계 에너지 생산량의 75%를 소비하는 지역이며 탄소 가스 배출량은 전체의 80%를 차지해서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지역이다. 도시 지역의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서 2017년에 인구 1천만 명이 넘는 도시가 29곳이었다면 2030년이 되면 43곳으로 늘어나고 그 가운데 14곳은 인구가 2천만 명이 넘게 된다. 도시는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도시에 사는 전세계 1%의 부유층이 모든 부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도시 인구의 30%는 빈곤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문제들 - 환경오염, 물 부족, 탄소 가스 배출, 쓰레기 배출, 빈부 격차 등 - 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과학 기술의 발달을 기대하고 있다. 인공지능, 자율주행, 3D 프린터, 사물인터넷, 가상현실, 나노 기술, 전자책 등 기술의 발달이 자원을 절약하고, 적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돕기 때문에 예전처럼 대량 소비와 대량 쓰레기를 발생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개인이 소유하던 관념에서 벗어나 함께 쓰는 경제로 변환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원을 절약한다. 공유주택 개념인 에어비앤비, 공유차량 개념의 우버를 비롯해 자산을 공유하는 사업 아이템과 공공 부문에서 공유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이런 '공유' 개념이 확산하는 것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인식되었던 '사적 소유'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핵심이랄 수 있는 '사적 소유'가 자연스럽게 붕괴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사회적 진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공유와 협력이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으로 자리 잡게 되면, 여기에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일자리'와 같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경제와 복지 정책이 합류하면서 사회는 긍정적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미래의 경제 활동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암호화폐를 사용하게 되고, 암호 화폐는 기존의 화폐와는 다르게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추적할 수 있어 긍정적 효과를 발생한다. 블록 체인 기술은 암호 화폐 뿐 아니라 모든 정부, 공공기관, 기업의 문서에 적용해 투명성을 확보하고, 지적 재산권, 무역 거래 등에서 위조를 방지하며, 총기를 규제할 수 있고, 빈곤 퇴치에 도움을 주며, 환경 보호에 긍정적 역할을 한다. 즉,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 데 블록 체인 기반의 기술이 적용되면서 세계는 디지털 사회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된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 세계적인 작가 잭 런던이 한국에 왔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다. 잭 런던은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신문사의 의뢰를 받고 종군기자 자격으로 미국에서 일본에 도착한다. 잭 런던이 시모노세키에서 인천(제물포)에 도착한 시기는 1904년 2월 초. 러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이었다. 이 시기는 한국의 역사에게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고, 조선정부는 일본과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다. 자기 나라의 백성을 죽여달라고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다. 전봉준을 우두머리로 한 동학혁명군이 전주 백산에서 봉기해 한양을 향해 진격하다 공주 우금치에서 결정적으로 일본군에 패배하고, 혁명의 흐름이 끊기면서 조선은 급격하게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공격해 패퇴시키고, 현실적으로 조선을 지배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곧바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일본 본토에 있는 군대를 조선으로 이동한다. 일본 군대는 일본에서 배를 통해 인천(제물포)에 도착한 다음, 기차를 타고 한양으로 들어왔다. 한양에 집결한 일본 군대는 걸어서 북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는데, 잭 런던도 일본군이 진행하는 경로를 그대로 따라갔다. 잭 런던은 조선에서 활동하기 위해 통역할 사람을 구했는데, 조선인 통역, 일본인 통역을 각각 구하고, 필요한 물품과 돈을 실어야 하는 말도 몇 필 구입한다. 잭 런던이 한양에서 출발해 평양을 거쳐 의주와 만주까지 다녀오는 동안 겪었던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미국인 잭 런던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잭 런던의 눈에 비친 조선과 조선사람은 그리 훌륭하지도 않고, 멋진 모습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과장 없이 담담하게 기술한 그의 표현을 보면, 조선인은 거의 모두 흰옷을 입고 있으며, '왜놈'들보다 체구가 크고 근육이 발달한 건장한 민족이었다. 하지만 진취성이 부족하고 비능률적인 민족이라고 봤는데,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 상황에, 외국의 군대가 침략한 분위기에서 가난하고 선량한 백성들이 겁에 질리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비쳤을 거라고 보인다. 잭 런던은 일본군이 행군하는 모습, 일본군이 마을에 들어가 숙박하는 장면을 보면서 일본군대가 조용하고,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군인들이라고 묘사했다. 일본군대가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 시기의 일본군대는 체계가 잘 잡혔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군인들도 장기간 행군을 통해 발에 부상이 많이 발생하자 고생하는 군인들을 치료하는 일본 군의관이 '그 정도는 참고 견뎌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병사들의 부상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장면은 뒤에서도 잭 런던이 일본인의 정체성과 본질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잭 런던은 일본인의 속성을 두고 '집단주의', '전체주의'라고 단정했다. 일본인은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집단 속에서만 자기들이 존재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일본이 '천황'이라는 존재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며, '천황'의 명령에 따라 죽음까지도 당연히 받아들이며, 이것이 결국 나중에 일본이 '군국주의', '전체주의'로 나아가게 되는 원인이라는 것을 이때 이미 알아본 것이다. 잭 런던이 본 조선은 가난하고, 사람들은 어리석으며, 비능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잭 런던이 당시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의도적 편견이 있던 것은 아니고, 눈에 보이는대로 묘사한 것이기에 당시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고집하면서 외국과의 교류와 개방을 늦게 하는 바람에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늦어졌다. 결국 새로운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보다 조선의 개혁, 개발이 늦어지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인데, 이는 일본의 침략 야욕과 함께 당시 조선의 정책과 정치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잭 런던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방문했고, 조선 사람들의 괴로운 모습을 보았다. 결국 1910년, 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뺐겼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으며 해방이 될 때까지 36년을 노예로 전락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불과 50년만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잭 런던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한국인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면서 크게 놀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도 놀랄 만큼, 우리는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 일어섰다. 잭 런던이 1904년의 몇 달을 기록한 이 책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과거의 아픔을 잊지 말고, 자만하지 않도록 하는 기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문화
    • 독서
    2023-08-26
  • 사흘 그리고 한 인생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장편소설. 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 곧바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빠른 전개와 속도감 있는 문장, 심리 스릴러의 긴장이 팽팽하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주인공의 눈에 비치는 가족과 이웃의 모습이 재해석되고 있다. 작가는 시작하면서 독자를 향해 묵직하게 한방을 날린다. 겨우 열두 살인 주인공 앙투안이 여섯 살이던 옆집의 꼬마, 귀엽고 자기를 잘 따르던 착한 꼬마 레미를 살해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아이를 살해한 것을 보면 싸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앙투안이 레미를 살해한 이유를 억지로 들어 변명하자면, 레미의 집에서 키우고 있는 개 윌리스는 앙투안을 매우 잘 따랐다. 앙투안이 혼자 숲속에서 오두막을 짓거나 혼자 시간을 보낼 때, 윌리스는 친구처럼 가깝게 앙투안 옆을 지켜주었고, 외로운 앙투안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런 윌리스가 우연히 교통사로를 당해 다쳤고, 윌리스의 주인이자 레미의 아버지인 데스메트는 고통으로 죽어가는 윌리스를 위해 총을 쏴서 절명시킨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 포대에 넣어둔다. 이 장면을 지켜본 앙투안은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던 순간에 숲속으로 레미가 찾아왔고, 앙투안은 슬픔과 분노로 발작을 일으켜 레미에게 그의 아버지 데스메트를 투사해 죽이게 된 것이다. 물론 이건 변명이고 합리화다. 한순간의 발작으로 좋아하는 레미를 죽인 앙투안은 자기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깨닫는다. 그는 레미의 주검을 은폐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엄마에게 거짓말한다. 그날 오후부터 레미의 부모는 아이가 실종되었다고 경찰에 신고하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마을 근처를 수색한다. 레미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앙투안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레미의 부모, 경찰이 앙투안에게 레미의 행방을 묻지만, 앙투안은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이 곧 들통나 자기는 감옥에 갈 거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레미가 실종되고 이틀 뒤부터 마을에는 어마어마한 태풍과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마을은 쑥대밭이 된다. 큰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레미의 실종이 안타깝지만, 수색에 나설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레미의 실종 사건은 시간 속으로 묻힌다. 앙투안이 레미를 죽인 후, 몇 번이고 자백할 마음을 먹고, 심지어 자살할 생각까지 했으며, 끊임 없이 스스로 자책하고, 벌을 받게 될 것을 상상하면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앙투안은 싸이코패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고등학교를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진학하며서 마을을 떠난다. 단 한 순간도 마을에 있고 싶지 않았고, 마을을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맹세까지 했다. 하지만, 앙투안의 맹세는 깨진다. 마을을 떠나고 12년이 지난 뒤, 앙투안은 다시 집을 찾는다. 마을 주민인 르메르시에 씨의 60회 생일 파티였는데, 그는 앙투안의 엄마를 고용한 사람이기도 했다. 앙투안은 여자친구가 있고, 지금은 인턴으로 의사가 되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12년만에 돌아온 마을은 이미 많은 것이 변했다. 이웃이던 레미의 가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고, 레미의 아버지는 뇌출혈로 사망했다. 앙투안은 엄마의 부탁으로 하루 마을을 찾았는데, 이날 저녁에 우연히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에밀리를 만나 갑작스럽운 섹스를 한다. 그리고 12년 전, 앙투안이 레미를 살해했던 그 숲이 재개발된다는 뉴스를 본다. 앙투안은 숲이 재개발되면 레미의 시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다시 범인을 찾는 수사가 시작되면 자기가 체포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마을을 떠나 여자친구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지만, 몇 달이 지나 갑자기 에밀리가 찾아와 앙투안에게 임신했다고 말하고, 앙투안은 에밀리에게 낙태를 하라고 애원하지만, 에밀리의 아버지는 유전자 검사를 해서라도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낼 거라고 소리친다. 그때, 레미가 묻혀 있는 숲속에서 아이의 형해를 발견하고, 아이의 것이 아닌 머리카락을 발견했으며, 그 머리카락의 유전자를 검사하면 범인을 찾아낼 수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앙투안은 유전자 검사의 덫에 걸리고, 에밀리와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앙투안은 마을을 영원히 떠나고 싶었으나, 오히려 영원히 마을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는 에밀리와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으며, 마을 의사가 되어 마을 주민을 진료하고 있었다. 에밀리는 앙투안과 그랬던 것처럼, 아무 남자하고 불꽃같은 섹스를 하면서 살았고, 아이의 아버지가 앙투안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앙투안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며칠 동안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무의식 상태에서 갑자기 소리를 지르던 그녀가 몇 사람의 이름을 불렀는데, '앙드레'라는 이름을 앙투안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마을 병원에서 진료를 보다 '안드레이 코발스키' 씨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그가 '앙드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코발스키 씨는 곧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다고 말하며, 앙투안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앙투안은 열두 살 때, 발작을 일으켜 레미를 살해했던 그 당시, 도로를 지나다 우연히 발견한 자동차가 코발스키 씨의 차라는 걸 떠올렸고, 엄마가 코마 상태에서 '앙드레'를 애타게 불렀던 것을 결합하면서, 진실을 알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다. 앙투안은 한순간의 실수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그의 삶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앙투안은 17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것도 아주 우연한 계기로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사람이 누구인지, 누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 가득한 인생의 쓴맛에 대해.
    • 문화
    • 독서
    2023-01-19
  • 파친코
    파친코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애플TV'에서 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2018년에 발표했고, 지금 촬영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 소설이 미국에서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었고,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소설이 미국의 주류 문학계에서 주목받는 현상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인은 미국에서 소수민족이며, 그리 주목받지 못한 대상으로 100년을 살았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과 일본 거주는 20세기 초반의 비극적 역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의 기원이 있다. 1910년,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 조선인의 삶은 고통과 울분, 비통의 연속이었다.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려던 조선인들은 가까운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하와이, 쿠바, 멕시코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가는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났다. 이렇게 떠난 조선인은 인종차별과 하층 노동자로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한국인에게 근현대사의 시작은 비극이었다. 동학혁명이 일본군의 폭력에 무너지면서 민중의 삶은 짓밟히기 시작했고, 그것은 조선왕조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참혹한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당시 조선의 근현대사 배경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부산의 영도 바닷가에 살던 이름 없는 가난한 어부 부부에게 온전치 못한 몸을 지닌 아들 '훈'이 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더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 양진이 부부로 맺어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훈'이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몸은 튼튼했고, 듬직하고 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너무 가난해서 입 하나를 덜기 위해 시집 온 양진은 시부모와 함께 힘든 시간을 지내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삶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선자가 태어나고, 선자는 튼튼하고 야무진 여성으로 성장한다. 이 작품은 4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 세대는 드라마틱하게 다른 삶을 살지만 등장인물들이 일본에 정착하면서 살게 된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재일조선인', 일본사회에서의 소수자로 당하는 차별, 멸시의 구조다. 주인공들이 일본에서 자기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일본의 '재일조선인' 정책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사회적 공모가 강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의 구성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가난한 조국 조선을 자발적이든, 강제로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디아스포라적 삶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실존적'이든 '이념적'이든 '경계인의 삶'으로 존재하고 있다. 역사 속의 집단이자 개인으로 디아스포라이면서 경계적 존재로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재일조선인이 공통점을 갖는다. 유럽에는 '집시'도 있으나 그들은 단일한 민족 정체성을 갖지 못한 집단 유랑민이라는 점에서 유대인과는 또 다르다. 작품 제목인 '파친코'는 '재일조선인'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는 마치 유대인을 상징하는 단어로 '고리대금업자'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 두 경우 모두 그 집단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직업이 아니며, 사회에서 천대와 멸시를 받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작품의 제목인 '파친코'와 작품의 등장인물에서 여성의 삶은 서로 만나는 지점이 없다. 즉, 이 작품은 여성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제목은 '재일조선인' 가운데서도 남성이 운영하는 '파친코'로 되어 있어 제목과 내용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이것을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상징성에 무게를 두었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여성 서사를 다루고 있다. 작가가 여성이어서 여성의 삶에 보다 공감과 깊이를 더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사회적 약자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의 삶을 구원하는 구원자적 존재로 등장한다. 여성은 늘 남성의 그늘, 발 아래, 뒤치닥꺼리, 조력자, 보조자 등으로 존재하지만, 길게 보면 남성을 품고, 기르고, 키우고, 성장시키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작품에서도 양진은 가난한 집 막내딸로 굶주리는 삶을 살다, 나이가 많고, 몸도 성치 않은 어부의 아들 '김훈'의 아내가 된다. 다행히 김훈은 장애가 있지만,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어서 양진은 가난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딸인 선자는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엄마와 두 사람의 일하는 여성과 함께 하숙을 치면서 성장한다. 선자가 고한수를 만나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평양에서 온 백이삭 목사의 도움으로 결혼식을 하고 정식으로 백이삭의 아내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면서, '재일조선인' 1세대의 삶이 시작된다. 백이삭의 형 백요셉은 이미 그의 아내 이경희와 함께 일본에서 정착했고, 이경희는 선자를 동생처럼 여기며 끈끈한 연대와 우정을 쌓아간다. 고한수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고 세 딸을 두었고, 그의 장인은 야쿠자 두목이었던 것이 나중에 드러난다. 고한수 역시 장인의 야쿠자 조직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는 평생 야쿠자로 살면서 돈과 권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선자의 남편 백이삭은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2년의 옥살이 끝에 결국 숨을 거둔다. 백요셉 역시 미군의 폭격에 화상을 입고 고생하다 죽는데, 남성들이 이렇게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도 '재일조선인'의 비극이라는 것을 작가는 드라마틱한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남성(남편)의 부재로 곤란한 생계를 꾸리는 건 여성들이다. 경희와 선자는 김치 파는 행상을 시작으로 집안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김치는 맛있다는 소문이 나고, 김창호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이들의 김치를 전부 구입하겠다며 두 사람을 식당 주방에서 직접 김치를 담그게 한다. 시간이 지나서 김창호의 뒤에 고한수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만, 설령 일찍 알았다 해도 경희와 선자는 그 주문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희와 선자에게는 아들 노아와 모자수가 있었다. 두 아이를 건강하고 떳떳하게 키우는 것이 삶의 전부이자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은, 아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고통도, 굴욕도 참을 수 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성장하는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는 평생 힘겹게 일하는 엄마와 큰엄마를 보면서 엇나갈 수 없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곧 조국의 부재이기도 하다. 나라를 잃은 민족, 조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디아스포라의 존재인 이들 '재일조선인'은 끊임 없이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버지' 고한수는 노아에게 고통의 근원이다. 이미 아내와 딸이 있는 그는 어린 선자를 좋아하고, 임신시켜 선자의 인생을 망친다. 그렇게 태어난 노아는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불행이며,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백이삭이 죽은 이후, 존재할 수 없는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 아버지가 사회에서 가장 비난받는 야쿠자라는 이유로, 자기의 삶을 방기한다. 이삭의 비극은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 결과일까, 아니면 야쿠자를 부모로 둔 자식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절망과 자포자기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이삭의 자살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뿌리내리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노아는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그의 삶도 모순적이긴 마찬가지다. 그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파친코 가게에 취업해 많은 돈을 벌면서 '아버지' 고한수가 보내준 학비를 다 갚고, 어머니에게도 많은 돈을 보낸 이후에도 그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여럿 낳아 기르면서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삶을 스스로 끝내는 것은,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애초에 결혼할 마음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이삭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건 분명하다. 아내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 극단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한다 해도, 이삭의 결정을 존중할 수는 있지 않을까. 모자수는 우연하게 파친코 업계에 발을 들여 놓지만, 이 역시 그의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주류에 속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의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사회에서 강하게 밀려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럴 때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위험하거나 더럽거나 불법한 일일 수밖에 없다. 모자수를 파친코로 끌어들인 사람 역시 재일조선인 고로 씨였다. 성실하고 머리가 뛰어난 모자수는 빠르게 일을 배우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 빠르게 성장한다. 그는 고로 씨의 도움으로 파친코를 직접 경영할 뿐 아니라 가게도 늘리면서 막대한 돈을 벌기 시작한다. 모자수의 아내 유미는 모자수의 단골 양복점에서 일하던 미싱공이었으나 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는 걸 꿈꾸던 여성이었다. 모자수와 결혼해 아들 솔로몬을 낳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데, 이런 크고작은 비극이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솔로몬은 부자 아버지인 모자수 덕으로 어려서부터 국제유치원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하지만 미국에서 공부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인 상사에게 이용당하고 해고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으면서, 솔로몬은 아버지가 하는 파친코 업계에서 일을 하겠다고 자청한다. '재일조선인' 4세대인 솔로몬이라면 자기가 원하는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버지가 파친코로 돈을 벌어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고, 원한다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솔로몬의 위치였다. 하지만 솔로몬은 일본에 눌러 앉는다. 솔로몬은 할머니와 엄마, 아버지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자신 역시 '재일조선인'으로 3년 마다 지문을 등록해야 하는 차별을 당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재일조선인'이라 해도, 일본 사회에서 늘 변두리, 울타리 너머에 존재하는 이방인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부모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온 솔로몬 같은 청년 세대가 '재일조선인'으로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결심은, 차별과 멸시의 땅, 고통과 비난이 발목을 잡는 일본 사회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불행한 역사를 만든 일본이 상상하지 못한 존재였지만, 일본 내부의 모순을 뚫고 성장하는 기형적 존재이면서, 한편으로 일본인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과거 침략과 범죄 역사의 살아 있는 증거이자 증인이며, 조선인의 의지와 투지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존재 그 자체다. '재일조선인'의 존재는 일본의 내부적 모순을 드러내는 한편, 모순을 첨단, 극대화하는 존재로 작동한다. 일본은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으며,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일본의 과거 전쟁범죄는 사라지지 않고 유효하며, '재일조선인'을 차별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것으로 일본인의 저열함, 야비함, 악랄함을 증명하기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일본 양심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작동하고 있다. 작품에서 '재일조선인' 인물들 가운데 기독교와 관련한 내용이 많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다. 작품에서 백이삭과 선자가 만나는 대목은 어색하지 않다. 백이삭은 평양의 부잣집 둘째 아들로, 목사가 되어 일본에 있는 교회로 목회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일본에는 이미 그의 형 백요셉이 아내와 함께 정착했고, 이삭을 불러들인 것이다. 백요셉이 일본으로 가는 과정에서 선자의 부모가 하는 하숙집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었고, 요셉은 그 하숙집을 소개한 것이다. 그렇게 이삭과 선자가 만나는데, 선자는 이미 임신을 했고, 아버지인 고한수가 유부남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선자는 고한수와 결별한다. 선자는 이삭의 헌신에 감동하고, 진심으로 이삭을 사랑하지만, 이삭은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당하고 일찍 사망한다. 이삭의 아들은 노아, 모자수이고, 모자수의 아들은 솔로몬이다. 일본은 기독교가 극히 미미한 존재인데, '재일조선인'으로 조선사람의 흔한 이름이 아닌, 성경에 나오는 이름을 차용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백이삭과 백요셉이 평양에서 온 기독교인이라는 점은, 미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 평양은 미국 개신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으로, 당시 조선에서 기독교가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 하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우고, 조선사람을 교육시켰다. 교육과 목회는 서로 떨어지지 않았고, 공부를 잘 하는 조선인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공부하도록 돕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의 근대화에 미국 개신교는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으며, 재미교포 작가인 이민진 작가는 작품 취재를 통해 '재일조선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이 시기 평양의 개신교도를 취재했거나 자료를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읽으면서 독특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가 재미교포로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가서 성장한 사람이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기 때문에, 한글 문장과는 사뭇 다른 영어 문장으로 작품을 썼고, 그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면서 한국소설을 읽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내용은 분명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한국인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문장은 한국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구조로 짜여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의식구조는 이미 '미국인'으로 확고히 정립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그가 모국인 한국과 한국의 역사, 한국인의 고난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다는 건 퍽 높게 평가하면서, 이민진 작가의 영어 소설이 한국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세계 문학의 보편성을 획득하기에 필요한 문장구조가 서양(미국)식으로 짜여지고 있는 것은 흥미를 갖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라고 본다.
    • 문화
    • 독서
    2023-01-19
  • 벗 - 백남룡
    벗 - 백남룡 북한 문학 작품을 처음 읽은 건 군복무 하던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이 왜곡되었어도 그 언저리였던 건 분명하다. 그러니까 82년을 전후한 시기였고, 나는 부대 근처에서 그 책을 발견했다. 내가 복무하던 부대는 화천에서 산양리를 거쳐 민통선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포병대대였다. 부대 주변으로 가끔 북한에서 보낸 삐라가 떨어지곤 했다. 삐라를 주워도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관물대에서 북한 삐라가 나오면 말할 것도 없이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가거나, 최소한 군대 영창이라도 가게 될테니, 삐라를 발견하면 주워서 보고를 하던지, 그냥 두고 지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가 주운 삐라에 실린 단편소설은 어린 소년과 기차 그리고 김일성 장군이 나오는 내용이었다. 단편 내용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으로, 북한 문학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감동 코드가 들어 있었다. 그 단편이 언제 창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제 읽은 백남룡의 소설 '벗'과 한 줄기로 연결되는 공통점이 있다. 이 작품은 1988년에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소설의 무대는 80년대 중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정진우 판사는 이혼 전문 판사로 복무하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 한 젊은 여성이 찾아온다. 채순희는 도 예술단의 성악 배우, 중음 가수(메조 소프라노)로 복무하는 예술노동자다. 그이는 정진우 판사에게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고, 이혼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정진우 판사는 채순희의 배우자인 리석춘의 의견과 주장도 들어봐야 해서 저녁에 자기 아파트로 리석춘을 부른다. 리석춘은 아내 채순희와 처음 만난 때부터 갈등을 일으키게 된 계기와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초산군에 있는 철제일용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채순희는 도시에 있는 강안공장에서 파견을 온 리석춘을 만나게 된다. 리석춘은 한 달을 기한으로 공장에 선반기와 후라이스, 원통연마반들을 설치해주고 운전공들의 기능 양성까지 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리석춘은 채순희를 발견하고 첫눈에 반한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했고, 아들 호남이도 낳아 키우고 있다. 채순희와 리석춘이 말하는 이혼 이유는 '생활 리듬'이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우리식 표현으로는 '성격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진우 판사는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각자 주장하는 내용을 귀기울여 듣는다. 리석춘이 일하는 공장을 찾아가 리석춘의 선배 노동자를 만나 리석춘이 어떤 사람인가를 듣고, 채순희가 복무하고 있는 도 예술단장을 만나 채순희에 관해 동료들의 평가를 경청한다. 이 과정에서 정진우 판사와 그의 아내 한은옥의 상황도 등장한다. 두 사람은 대학에서 우연히 만났다. 법률 공부를 하는 정진우와 생물학을 전공한 한은옥이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정진우의 동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진우는 한은옥이 외진 시골의 가난한 마을에서 유학을 온 학생이고, 그가 마을을 위해 남새(채소) 육성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연인이자 동지적 관계로 호감을 갖고 결혼한다. 정진우는 곧 판사로 복무하고, 한은옥은 학부 때부터 연구해 온 남새(채소) 연구를 계속하는데, 물이 귀하고 온도가 낮은 고향 연수덕에서 남새를 재배할 수 있도록 육종 연구를 무려 20년 가까이 해오고 있다. 정진우는 자주 집을 비우고 출장 가는 아내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도 있고, 외로울 때도 있지만, 채순희, 리석춘 이혼 사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아내 은옥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자기의 이기적인 태도를 반성하고, 아내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걸 느끼게 된다. 소설은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채순희와 리석춘이 결국 이혼을 하게 될지, 아니면 정진우의 바람대로 다시 마음을 돌이켜 서로를 이해하고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갈지 독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채순희가 바라는 남편 리석춘의 모습과 리석춘이 바라는 아내 채순희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왜 다른지를 서정적으로 그리기 때문에, 독자는 희망과 긍정의 마음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게 된다. 이 작품의 특징은 서너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먼저, 이 소설에는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소설의 '우상화'와 '위대한 지도자'에 관한 충성에 관한 내용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이건 매우 특이하게 보이는데, 북한문학이 80년대 이전보다 사상적으로 훨씬 유연하고 자유로워진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다만, 정진우를 비롯해 주인공들이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떠올릴 때, '당과 조국'을 위해 복무한다는 것, 개인의 삶의 존재 의미는 '당과 조국'의 이익에 있다는 정도가 이 소설이 북한소설이라고 생각되는 표현 수위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1988년인데, 소설을 읽어보면 한국(남한)의 60년대, 70년대 풍경이 떠오른다.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50대 이상-이라면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풍경과 언어-작가가 구사하는 문장과 작품의 주인공들이 하는 대화-가 60년대, 70년대의 한국 풍경과 매우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남한에서 60년대, 70년대 개봉한 영화를 보면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때만 해도 북한(평안도)과 경기(서울 포함)의 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가의 언어는 부드럽고 순하다. 문장은 소박하고 대화는 은근하며, 마음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의 성향에 따른 개성이 아니라, 북한의 체제가 보여주는 환경의 영향이라고 본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주체적'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고, '개인'보다는 '당과 조국'을 마음에 품은 개인들의 공동체로 묶인 집단의 정서를 내재하고 있다. 북한에서 '판사'는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존재가 아니다. 정진우 판사는 단지 법률을 배운 지식인으로, 법적 판단을 하는 사람일 뿐, 공장 노동자, 예술단 성악 노동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노동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으며, '노동자'는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갖고 있다. 이것은 북한 체제의 특수성에서 오는 모습이지만, 남한과 비교하면 극적으로 다르다. 남한의 판사는 스스로 최고의 엘리트라고 생각하며, 평범한 노동자를 깔보고 함부로 대한다. 이런 모습만 보면 '인간 중심'의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 어느 쪽이 더 평등하고 우월한가를 알 수 있다. 북한에도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은 있다. 이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자기 조국(북한)을 탈출해서 다른 나라로 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 자본주의적 탐욕에 이끌려 조국을 배신한 사람도 있다고 본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인물 - 채림 -이 있는데, 정진우 판사는 채림의 범죄 사실을 발견하고 호되게 질책한다. 채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가 재산을 원상복구하는 선에서 가벼운 징계를 받는데, 북한과 같은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행동을 하면, 그 집단은 내부에 균열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의 지배집단에서는 '개인주의'를 가장 경계하고, 이기적, 탐욕적 행위를 강하게 처벌한다. 정진우 판사는 채순희에게는 예술가가 갖는 허영심을 개인화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즉, 자기가 갖고 있는 재능-성악 가수-을 기예로써가 아닌, 그 노래를 듣는 노동자, 인민의 삶과 결합해 노동자, 인민이 예술단원의 노래를 통해 '당과 조국'을 더욱 깊이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공장의 선반노동자 리석춘에게는 '헌신성'만으로는 위대한 노동자가 될 수 없다고 충고한다. 아내 채순희가 바라는대로 현재의 조건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주체적으로 하는 능동적 노동자로 거듭나지 않으면 '당과 조국'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고 충고한다. 이런 정진우의 주장은, 북한(노동당)이 과거에 가졌던 보수적 태도를 버리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현실적 이유와 맞물리는 내용이다. 즉, 채순희와 리석춘의 불화는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데서 오는 나태와 무기력이 원인이었고, 이것을 깨닫고 새로운 마음과 정신으로 스스로 능동적인 노동자로 발전하도록 노력하는 순간, 두 사람의 불화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남북한 문학을 통틀어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한다. 소설 내용도 좋지만, 북한 체제가 보여주는 특수함, 북한 인민이 '당과 조국'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프랑스 독자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경험일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독자들도 이 작품을 읽기 권한다.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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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1
  • 남극해 - 이윤길
    남극해 - 이윤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익명이다. 작가는 본능적으로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던 걸까. 박 기관장, 강 사장, 장 선장, 1기관사, 조기장 '심근수'만 유일하게 이름이 나오지만, 정작 그는 조선족 조리장에게 살해당한다. 선원들의 익명은 그들의 운명을 상징한다. 그들이 탄 배의 이름이 '피닉스호'라는 것에서, 그들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43년이나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빈 작가의 경험과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귀중한 소설이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이면서도 올바른 해양정책이나 해양문학이 뿌리 내리지 못한 기형적 형태를 갖고 있는데, 특히 '해양문학'은 저변이 좁고 얕아서 하나의 장르나 범주로 구분하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부박하다. 작품은 원양어업, 그것도 대서양이나 북태평양이 아닌, 남극해로 떠나는 원양어업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피닉스호'는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을 출발한다. 갑자기 빈 자리가 된 기관장을 부산에 사는 박 기관장을 불러야 했고, 그가 부산에서 뉴질랜드로 오는 길이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웰링턴을 출발한 피닉스호는 남위 60도까지 내려오면서 남극수렴선까지 오는데만 20일이 걸린다. 이 기간동안 배에서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박 기관장의 과거 회상이 나오고, 강 사장이 '피닉스호'를 끌고 다시 바다로 나오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급격하게 바뀌는 날씨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배는 큰 문제 없이 남극해로 향하고, 피닉스호는 남태평양에서 대권항해를 하며 '케이프 혼'을 지나 사우스 셰틀랜드 제도(이곳에 킹 조지섬이 있다)를 통과하면서 웨들해로 들어선다. 소설의 중반부터 피닉스호 선원들은 조업을 시작한다. 이들이 잡는 물고기는 '남극이빨고기'로 값이 비싼 물고기다. 그만큼 잡기 어렵고,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한번 출항에 만선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강한 유혹이 있는 어업이기도 하다. 다국적 선원으로 구성된 피닉스호의 선원들과 선주를 비롯한 선장, 기관장 등이 모두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일종의 '외인부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소설에서 다수의 선원들은 배경으로 처리되고, 박 기관장, 강 사장, 장 선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점이 조금 아쉽다. 선원들이 서른 명이 넘기 때문에, 이들을 소설에서 모두 소개하거나, 이들의 서사를 나열하는 것이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적어도 대표적인 인물 몇 명의 서사를 풀어 놓으면서, 주인공 세 사람의 서사와 얽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 중반까지는 피닉스호가 출발해서 남극해로 들어서기까지 과정을 그리고 있다. 원양어선에서 일어나는 일은 독자에게 낯설기 때문에, 작가는 친절하게 상황과 내용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결코 지루하지 않다. 허먼 멜빌의 '백경'이 그렇게 두꺼운 소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선원에 관한 설명을 가능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 기록이 당대의 선원의 삶과 배에서의 생활, 배의 기능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기록으로의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된다. 이렇듯, 작가는 구체적인 사건-투승과 양승-이 발생하기 전에 선원들과 배의 운명을 가능한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피닉스호가 웨들해에 들어서면서부터 시투(첫번째 시험 투승)를 할 때부터는 팽팽한 긴장을 느낄 수 있는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바뀐다. 끊임없이 떠내려오는 유빙과 싸워야 하고, 심해 1,000미터 아래 살고 있는 남극이빨고기를 낚아 올려야 하는 부담과 압박으로 선주는 물론 선장 이하 모든 선원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날카로운 남극의 바닷물을 뒤집어 쓰면서 고통스러운 육체노동을 하는 장면은, 원양어업의 고단한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피닉스호 조업을 나선 이후, 네 번의 사고가 발생한다. 출항 초기에 선원 아만의 손가락 부상, 조기장 심근수의 부친상, 조선족 조리장의 살인 그리고 피닉스호의 운명을 가르는 기관실 화재가 그것이다. 이 사건들이 하나의 인과로 묶이지는 않지만, 주인공 박 기관장은 피닉스호에 타는 순간, 자신이 다시는 육지에 발을 디디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받는다. 아니, 좀 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육지에 발을 디디고 싶지 않다는 의지인지 모른다. 그는 배의 엔진을 수리하는 기술자로 먹고 살았지만, 자신이 선원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그가 육지에서의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것은, 육지-현실-의 삶이 자신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는데, 그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육지가 '현실'이라면, 바다는 '이상'이자 '희망'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선연'을 떠난다. 그가 이미 아내와 이혼한 것처럼, 그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육지에서 사업하며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인간의 욕망과 이기, 탐욕에 환멸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고, 돈도 벌 수 있었음에도, 강 사장이 자기를 부르자, 모든 것을 버리고 - 심지어 사랑하는 어머니마저도 홀로 두고 - 바다로 나온 것이다. 독자는 한국문학에서 낯선 해양문학인 이 작품을 읽으면서 바다, 원양어업, 뱃사람, 남극에 대해 풍부한 상식을 얻을 수 있다. 가능하다면 구글 지도를 펼쳐놓고, 이 작품에 나오는 지명을 찾아보면서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케이프 혼'을 돌아 '사우스셰틀랜드 제도'로 지나면 곧바로 웨들해가 나오는데, '웨들해'는 실제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섬'까지 빨리 가도 5일이나 걸리는 거리인데, 지도에서 보면 그 거리가 실감난다. 가장 가까운 곳에 '킹 조지 섬'이 있고, 이곳에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과학기지가 있다. 작가는 현직 선장으로 세계의 모든 바다를 누빈 풍부한 경험으로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바다를 그리고 있어서 작품의 사실성을 핍진하게 채우고 있다. 이런 바다의 묘사들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라는 점에서, 해양문학은 '르뽀르따주'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피닉스호의 운명은 너무 갑작스럽고 우연하게 결정되는데, 그것이 매우 사실적이라 해도, '소설적 완결성'을 말할 때는 아쉬움이 있다. 실제 벌어진 사건으로 선상 반란과 선상 살해사건 등이 언론에서도 보도된 바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선원(조리장)의 살해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 살인 사건과 피닉스호의 운명은 직접 관련이 없다. 차라리 심각한 살인사건과 피닉스호의 운명을 연결지을 수 있는 새로운 사건을 도입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원들은 모두 익명으로 등장하며, 주인공들과 사건의 배경으로만 보이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선원들의 갈등과 선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피닉스호의 운명을 가름하는 것이었다면 좀 더 드라마틱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앞부분에 선원들 가운데 몇 명이라도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국 문학에서 해양문학은 퍽 귀한 존재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인간의 삶도 보편성을 띄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바다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나오는 인간의 행동은 육지에서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과는 분명 다르며, 그 다름이 특별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해양문학의 저변이 넓어지고, 작품이 깊어지면 바다와 바닷사람, 섬, 어촌, 어업을 바라보는 뭇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고,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남극해'는 바다와 바닷사람의 삶을 과장하지 않고 보여주며, 뱃사람의 고독, 외로움, 바다와 인간의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군대에서 전역하고, 사회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이 해양 전문 잡지사였다. 1985년 무렵이었는데, 그때는 해양, 어촌, 수산물 등을 다루는 잡지가 한국에 두 개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 월간 잡지를 발행하는 한 곳이었다. 편집부 직원 두 명과 서무직원 한 명이 근무하는 잡지사는 열악했고, 사장은 잡지에 실을 광고를 가져오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때의 짧은 경험으로, 한국 정부가 바다에 기울이는 정책, 제도, 지원이 형편 없다는 걸 알았고, 한국이 경제, 문화, 산업적으로 시장을 키우려면 반드시 바다와 관련한 정책에 큰 관심과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 한국의 대기업 조선소는 세계 1위의 수주율을 기록하고 있는데, 바다와 관련한 산업은 보통 사람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할 뿐 아니라, 경제적 가치도 매우 높고, 규모도 크다. 양식업, 근해조업, 원양어업 등 수산업은 물론이고, 어촌의 현대화, 어촌의 콘텐츠를 살려 소프트웨어 산업으로 육성하며, 수천 개의 섬을 역사, 문화 자원으로 삼아 지역 발전의 밑거름이 되게 만들 수 있는 방안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바다 산업은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해양수산부는 정부 부처에서도 힘이 약한 기관이고, 예산도 많지 않아서 필요한 사업을 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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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1
  • 블랙 에코 - 해리보슈 시리즈 1
    블랙 에코 - 해리보슈 시리즈 1 마이클 코넬리의 장편 데뷔작. 이 작품에 대한 상찬은 다른 곳에서도 많으니, 읽으면서 느낀 몇 가지 아쉬운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로스엔젤레스 경찰국 소속 형사 '해리 보슈'는 불우한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엄마는 매춘부로 알려졌는데, 나중에 거리에서 강간살인 사건의 피해자로 죽는다. 이후 해리는 위탁가정에서 지내며 불우한 청소년 시기를 거쳐 베트남 파병 군인이 된다.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와 경찰이 되었고, 그는 형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언론의 관심을 받고, TV시리즈에 이름을 빌려주어 돈을 벌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경찰청 본부에서 헐리우드 경찰서로 좌천된다. 이 작품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우연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우연'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고 연결되며, 사건의 배경이 된다. 살인사건 목격자 샤키가 동굴 입구에 있었다는 건 필연이라고 하자. 그가 그 시간에 누군가 사체를 유기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과연 필연일까. 그리고 피해자 메도우스 사체가 그 동굴로 유기되는 건 필연이라고 하자. 메도우스와 해리가 베트남에서 같은 부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전우였다는 건 어떤가. 이건 너무 기막힌 우연 아닌가. 그리고 하필 왜 이때 메도우스는 살해당했으며, 사금고와 은행을 터는 사건이 발생하는 시기가 이때였으며, 왜 이런 사건이 벌어진 걸까.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던 FBI의 팀장 루크가 베트남에 있었다는 것, 해리의 베트남 동료들이 이 사건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 등은 모두 우연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범죄를 기획했다면, 메도우스가 돈이 궁해 금고를 털었을 때 나온 팔찌를 전당포에 파는 일이 없도록 기획자이자 책임자-지금은 루크라고 해두자-가 면밀히 지켜보고, 관리했을 것이다. 수백만 달러의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큰돈이 될만한 재물을 손에 넣었으면서도 정작 그들은 모두 가난하게 지냈다.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들이 돈이 없어 다시 범죄를 저지르거나, 실수를 해서 범죄 행위가 들통날 것은 예상했다면, 오히려 루크는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이들을 전부 죽이는 것이 더 안전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은 메도우스, 해리, 그리고 베트남에서 같은 소대였던 동료들, FBI 팀장 루크까지 모두 베트남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FBI 요원이자 해리의 동료인 엘리노어 위시까지도 베트남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엘리노어의 오빠도 베트남 파병 군인이었으며, 베트남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고향인 LA에 돌아와서 살해당한다. 20년 전, 베트남 파병 군인이었던 메도우스의 죽음으로 시작한 사건은 20년 전, 베트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미국의 패전과 철수, 베트남에서 미군과 월맹군이 뒷거래로 마약을 팔고, 미국으로 밀반입했던 내용이 드러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이 베트남에서의 패전으로 쫓기게 된 월맹군 일부가 수백만 달러를 다이아몬드로 바꿔서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엘리노어 위시의 오빠가 살해당한 것도 베트남에서 마약을 가지고 들어와서 몫돈을 벌려는 목적 때문에 그런 것이고, 메도우스가 죽은 것도, 이들을 모두 죽게 만든 것도 루크의 탐욕과 함께, 루크를 은밀하게 조종한 엘리노어 위시의 ‘작전’ 때문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건의 기획이 엘리노어 위시의 철저한 계획이라는 것인데, 변수는 오로지 해리 보슈이 등장 뿐이었다. 하필 해리 보슈가 헐리우드 경찰서 소속으로 좌천되었고, 하필 그날, 메도우스가 살해당한 날 당직을 섰으며, 하필 그 시간에 동굴 근처에 있던 샤키가 재빠르게 사체가 있다고 전화했을까.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좀 불편하다. 사건의 세부적 묘사, 경찰서, 로스엔젤레스의 시가지와 풍경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 주요 인물의 심리와 갈등을 면밀하게 그린 것은 높게 평가하지만,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우연’이 작동하는 것은 작품의 무게와 깊이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과 비교하면, 이 작품은 훨씬 ‘말랑말랑’하다. 즉, 하드보일드하지 않다는 뜻이다. 해리 보슈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외롭고 고독한 인물이며, 동료 경찰과도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외톨이지만, 그것이 ‘하드보일드’한 인간은 아니다. 해리가 FBI 요원 엘리노어 위시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걸 보면, 그의 내면이 메말라 있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해리는 다정한 부모, 따뜻한 가정, 사이 좋은 형제, 남매가 있는 가정에서 살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런 환경을 부러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환경으로 들어가는 걸 두려워한다. 행복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동경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내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해리는 금욕적 인간으로, 자신을 잘 통제하지만, 그 자기억제의 내면에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마약, 폭력 등에 노출될 수 있을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베트남에서 그런 경험을 했고, 베트남에서의 공포와 충격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수많은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전쟁 트라우마(PTSD)로 고향에 돌아와 마약, 알콜중독 등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다. 해리 보슈 역시 그들 가운데 한 명이며, 억세게 운 좋게 살아 남은 경우에 속한다. 해리는 동물적 감각과 탁월한 추리로 사건의 본질을 향해 가지만, 그가 동료 메도우스를 기억하고, 베트남 동료와 베트남에서 벌어진 마약 밀거래, 베트남 군인과 미군의 공모로 수백만 달러의 다이아몬드가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과정, FBI 요원 루크와 위시의 연결고리 등을 모두 밝혀내는 것은 그가 베트남 참전 군인으로, 그와 가까운 동료가 죽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필 그가 근무하는 지역에서, 근무하는 시간에. 고전적인 스릴러, 추리, 첩보 소설에서는 주인공(경찰, 사립탐정 등)이 피해자와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다. 주인공은 제3자의 입장에서, 피해자와 그 주변 사람들을 탐문, 수사하면서 범인을 찾아낸다. 범인은 당연히 피해자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으며,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는 인물이거나, 너무 가까워서 범인이라고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인물일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처음부터 우연이 개입하고, 그 우연은 작품 곳곳에서 단서를 제공하며, 결국 마지막까지 우연이 개입한 필연으로 종결된다. 읽기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마치 잘 닦아 놓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이랄까, 미로를 찾아 헤매는 불안과 호기심이 거의 들지 않았다. 심지어 소설 초반에 루크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고, 그 짐작은 들어맞았다. 이 소설은 분명 재미있지만, 아쉬움도 많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작가의 장편 데뷔작이어서 어쩌면 이런 ‘우연’이 옥에 티로 작용한 것일 수 있다. 앞으로 해리 보슈 시리즈를 계속 읽어가다보면 작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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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1
  • 냄새 - 코가 뇌에게 전하는 말
    냄새 - 코가 뇌에게 전하는 말 흥미로운 주제를 만났다. '후각'은 일상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는 감각을 말한다. 우리는 늘, 언제, 어디서나 냄새를 맡으며, 냄새를 구분하고, 좋은 냄새, 나쁜 냄새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험을 통해 익숙한 냄새는 기억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냄새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오래 기억으로 보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에서 '후각'은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었다. 1991년 린다 벅과 리처드 액설이 '후각 수용체 유전자'를 발견하면서 후각은 주류 분자생물학과 신경과학의 한 분야로 떠올랐다. 이 책에서 '후각'은 역사, 철학, 신경과학, 심리학을 통해 접근하고 있다. 이 책이 생물학 또는 신경과학 정도로 언급될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을 깨고, 역사, 철학, 심리학이 동원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의아하면서 뜻밖이었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이력도 특이한데, '냄새 감각의 형성: 후각 이론에서의 분류와 모델적 사고'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인디애나 대학교 블루밍턴 과학사 및 과학철학과 인지과학 연구소 조교수이며, 자신을 '인지과학자 그리고 과학, 기술 및 감각을 연구하는 경험 철학자이자 역사가'로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조합의 학문 융합인데, 이렇게 자유롭고 폭넓은 학문 영역을 오가며 연구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후각은 시각, 청각과 함께 감각기관의 하나이며, 감각기관은 서로 다른 매질을 통해 뇌에 신호를 전달한다. 이 책에서도 앞부분에 간략하게 도식화되어 있지만, 감각기관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이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었던 후각 또는 냄새와 관련한 정보가 이렇게 풍부하고 복잡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 책에서도 설명하고 있지만, '후각'과 '냄새'는 서로 깊은 관련이 있으면서도 분명하게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개념이다. 후각은 후각 수용체가 존재하는 감각 기관이다. 즉, 동물을 물리적으로 구성하는 무수한 세포들 가운데 냄새를 맡고, 냄새의 정보를 분석해 뇌로 보내는 기관이다. '냄새'는 화학적으로 접근하면 분자의 활동이다. 냄새를 발산하는 물질의 종류에 따라 냄새가 달라지며, 거의 모든 냄새는 적게는 수십 가지, 많게는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분자의 결합(유기화합)물로 이루어져 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후각 또는 냄새는 과학 영역에서 단지 생물학에 국한하지 않고, 발생학, 인지과학, 심리학, 철학 등의 영역으로 확대되었으며, 후각과 냄새, 뇌의 상호 작용이 완전히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고대부터 지금까지 철학, 문학, 과학에서 다루고 있는 후각과 냄새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 있다. 1장. 코의 역사 42 냄새를 과학적으로 접근한 역사는 서양(유럽)의 경우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냄새에 관한 최초의 가설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바탕한다. 흙, 물, 공기, 불의 네 원소는 우주를 이루는 기본 물질로 인식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냄새가 구체적 실체를 벗어나 중간적이고 혼성적인 특징을 지녔다고 분석했다. 즉, 기본 원소인 흙, 물, 공기, 불 그 자체는 냄새가 아니며, 이들 원소가 물리적 운동을 하고, 물질적 전환을 치른 다음에 나타나는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과 감각 능력에 대해]에서 냄새가 이동하는 데 필요한 매질이 있다고 추론하고, 냄새는 파동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는 냄새의 치료 효과를 연구했는데, 그의 저서 [식물 연구 및 냄새와 기후 징후에 관한 소론]에서 액체의 풍미를 달고, 기름지고, 시고, 아리고, 톡 쏘고, 짜고, 쓰고, 시큼한 맛으로 분류했으나 이는 정확히 말하면, 냄새와 맛 즉 후각과 미각이 혼합된 표현이고, 냄새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했다. 유럽에서 중세에는 냄새도 종교적 가치관을 부여해 선악으로 구분했다. 유쾌한 냄새와 도덕적 미덕을 나쁜 냄새 및 악덕과 대비시켰다. 냄새는 영적 질서의 명백한 신호로서 자연의 법칙을 드러낸다고 믿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포함한 다수의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냄새의 파동 이론을 믿었다. 하지만 파동이 어떻게 매개물로 작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18세기 유럽에서 생물분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를 폰 린네는 동식물 분류의 체계를 세웠고, 냄새도 일곱 가지로 나누었다. 스위스의 해부학자이자 현대 생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브레히트 폰 할러는 냄새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바뀔 수 있다는 데 흥미를 느꼈고, 세 가지 냄새 범주와 하위 범주를 구분했다. 네덜란드의 생리학자 헨드릭 즈바르데마케르는 [냄새의 생리학]에서 순수한 냄새, 혼합 냄새(들숨 냄새), 향미를 돋우는 냄새(날숨 냄새)로 구분하고, 냄새와 색채를 비교했다. 냄새의 근대 이론 시작은 18세기 유럽에서 말 오줌을 관찰하면서였다. 프랑스 화학자 앙투안 프랑수아 푸르크루아와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가 말 오줌을 분석해 원인 물질이 '요소'임을 밝혔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독일 과학자 프리드리히 뵐러는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합성했다. 19세기 들어서면서 합성화학의 발전은 산업화와 결합해 놀라운 성과를 보인다. 합성 화합물은 향수 제조, 식품산업에 폭넓게 쓰이기 시작했다. 20세기 이전 냄새의 과학은 냄새를 발산하는 물질에 집중되었고, 20세기 들어서면서 '후각'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관심이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적으로 나타났다. 2장. 현대적 의미의 후각, 갈림길에서 92 1991년 린다 벅과 리처드 액설이 '후각 수용체'를 발견한 것은 후각 연구의 새로운 역사를 연 사건이었다. 후각 수용체는 집단의 크기, 발견 방식, 실험적 역할이라는 이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용체 유전자가 알려지면서 과학자들은 비로소 후각을 담당하는 뇌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후각계의 유전자 발현 패턴을 확인하고, 후각계의 신경 조직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3장. 코를 사유하다 128 냄새와 후각을 연구하면 여섯 가지 답이 나온다. 화학자는 분자의 냄새를 결정하는 세부 구조를, 생물학자는 유기체의 신호 기능을, 신경과학자는 냄새의 행동기능이 뇌에서 발화하는 신경 활동으로 귀결된다고, 인지심리학자는 냄새 경험에서 기억과 언어, 학습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보자고, 철학자는 냄새가 종종 의식을 무의식적인 지각과 구분하는 미묘한 경계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인간에게는 후각으로 맛을 느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들숨 냄새와 날숨 냄새가 그것이다. 들숨 냄새는 다른 동물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냄새를 맡고 숨을 들이쉴 때 느끼는 감각이며, 이는 후각을 가진 포유류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반면 날숨 냄새는 인간만 가지고 있는 특이한 감각이며, 이 두 가지 방식으로 느끼는 냄새와 맛의 차이는 인류가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여러 음식에서 맛과 냄새가 다른 경우가 있는데, 좋은 점은, 냄새와 맛을 각각 다르게 구분함으로써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를 늘릴 수 있으며, 부패한 음식을 더 정확하게 구분해 건강을 지킬 수 있다. 유전학은 냄새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 유전체에 후각 유전자가 무척 많고 돌연변이도 흔히 발견된다. 후각의 유전적 변이가 냄새 지각의 개인차를 반영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거의 모든 냄새는 혼합물이다.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수백 개의 분자들이 섞여 우리가 맡는 냄새가 된다. 커피 향에는 약 655개, 차에는 467개의 휘발성 성분이 있고, 딸기에는 약 360개, 토마토에는 약 400개의 방향족 화합물이 존재한다. 4장. 냄새, 기억, 행동 178 냄새는 기억 속 경험과 연결된 모든 종류의 표상에 대한 통로 역할을 한다. 다른 감각에 비해 냄새는 기억을 불러내는 힘이 크다. 냄새는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현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기억은 획일적이지 않아서 다층적인 인지와 신경 매커니즘이 작동하며 냄새 기억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냄새 자체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냄새와 관련된 기억이다. 후각은 학습을 통해 인지되며, 태아일 때부터 후각은 학습과 경험을 통해 냄새의 기억을 저장한다. 우리 몸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냄새는 특정한 질병과 관련이 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례가 있듯, 냄새는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사회적 단서를 전달한다. 5장. 공기를 타고, 코에서 뇌로 214 인간 및 포유류의 휴각계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양쪽 콧구멍의 호흡 속도가 달라지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인 '비주기'가 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해도, 우리의 두 콧구멍은 다른 속도로 숨쉬고 있는 것이다. 코의 한쪽은 늘 조금씩 막혀 있다. 그래서 한쪽 콧구멍은 다른 쪽 콧구멍보다 공기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조금 느리다. 공기 흐름을 변화시킴으로써 코는 무척 다양한 냄새를 감지할 수 있다. 냄새를 맡으려고 코를 킁킁거리는 행위는 뇌 영역에서 진동 리듬이 어떻게 연동되는가에 영향을 미친다. 숨을 쉴 때마다 후각계에서 재설정된 진동이 있는데, 이는 신경 활성의 시간적 조정을 일컫는다. 6장. 분자를 넘어 지각으로 242 우리는 후각계가 물리적 특성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또는 뇌가 냄새에서 어떻게 의미소를 뽑아내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예일대학의 신경과학자 찰리 그리어는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후각계의 화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직도 냄새와 연관된 리간드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후각 수용체와 상호작용하는지 모르고 있다. 다른 체성감각계, 즉 뜨거움, 차가움, 압력, 시각, 청각 등의 수용체는 잘 알고 있으며 이들은 후각 수용체보다 비교적 단순하다. 냄새 혼합물에서, 코는 골라내고 뇌는 측정한다. 측정이라는 이 개념은 말초신경계에서 이미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 첫째는 후각계 보정이다. 뇌가 환경 속에서 냄새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변화량을 평가하고, 새로운 것을 감지하며, 두드러진 점을 인식할 기준이 필요하다. 둘째는, 후각계는 냄새 이미지를 재구성하기 전에, 받아들인 표본 정보를 여러 조각으로 쪼갠다. 후각계는 냄새 화합물들의 비율을 패턴 인식의 형태로 받아들인다. 7장. 후각 망울의 정체 288 1996년 컬럼비아 대학 연구원이던 페터르 몸바르츠는 후각계가 수용체에서 무작위로 입력되는 정보를 다루기 위해 독특한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의 냄새 물질은 망울 활성의 특정한 패턴과 짝을 이루어 냄새가 다르면 패턴도 다른 양상을 보였다. 후각 감각 신경세포의 축삭도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후각 감각 신경세포는 유전적으로 미리 만들어진 지도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신경세포의 후각 수용체를 전부 없애면, 신경세포는 다른 수용체를 이용해 후각 수용체를 만든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발생학적 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후각 망울과 토리가 상황에 따라 가변적으로 생성되고 있다는 것만 알아낸 셈이다. 8장. 냄새를 측정하다 332 후각 자극은 환경 속에서 발생하고 구조적으로 다양하다는 면에서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후각은 매우 불규칙한 자극에 노출된 채 작업 중심적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이다. 후각의 자극 정보는 처음엔 여러 조각으로 분해되고, 그 다음에는 각자의 비중에 따라 서로 결합되어 전체적인 감각 인상을 형성한다. 중추신경계는 이런 후각 신호의 광범위한 분포와 통합을 다중 병렬 프로세스로 구조화하고 지배한다. 후각에서 신경 표상은 개별적이다. 냄새의 정체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위상 지도는 없다. 후각의 신경 표현은 고정된 표상이기보다, 개별적인 표상으로 작동한다. 후각에서 지각 공간은 경험 공간으로 연산된다. 냄새 감각은 변화하는 혼합물이라는 정황 속에서 정보를 평가하는 역동적 척도로 작용한다. 9장. 지각의 기술 366 다른 감각과 비교할 때 후각은 지각 편차가 큰 편이다. 후각 지각의 편차는 냄새 암호화(수용체 수준) 원리와 신호 통합(중추신경계 처리 과정)의 연산 방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후각에서의 지각 편차는 주관적 왜곡이라고 얼렁뚱당 넘어갈 그런 종류의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후각계 기능의 독특한 특징일 뿐이다. 냄새가 다의적인 것은 의도된 것이다. 후각 자극은 다양한 냄새 물질과 여러 가지 느낌을 의미하는 신호로 작용한다. 후각에서의 개념적 군집화는 본질적으로 비선형적이다. 그것은 물질 분류와 지각 범주가 근저에서부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런 측면에서, 후각 기준은 서로 교차되기도 하며 모호하다. 다시 말해, 선형적이지 않다. 이 리뷰는 세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으로 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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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9
  • 타오르는 마음 - 이두온
    타오르는 마음 - 이두온 한국소설, 특히 최근 발간한 소설은 퍽 오랜만에 읽는다. 나도 소설을 쓰는 자칭 3류 소설가지만, 한국소설에 희망이 있을까,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이 든 사람이라면, 과거의 작품(1920년대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문학)에 익숙해 있어서 현대문학 즉 20대, 30대 작가의 작품이 낯설 수밖에 없다. 그 낯섦을 긍정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그런 면을 발견할 수도 있고, 자신의 기준으로 봐서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예전의 작품을 많이 읽었고, 익숙하며, 그 문학에서 배웠다. 문학은 시대를 드러내는 수단이자 표현이며,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는 당대 사회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80년대 문학을 시작했고, 그 시기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였다. 한국문학은 시대별로 해방문학, 전쟁문학, 분단문학, 개발문학, 노동문학 등의 분류들이 있고, 어느 시기에 활동한 작가인가에 따라 작품의 성향이 드러났다. 90년대 이후 나타난 작가들은 과거보다 훨씬 자유로운 상상을 바탕으로 창작물을 내놓기 시작했고, 탈이념, 탈권위, 탈민족, 탈집단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상황이지만, 작가의 자유와 창작의 무제한, 상상의 확대는 90년대 이후에서야 겨우 자리잡기 시작했다. 창작의 자유가 확대되고, 작가의 상상력이 극대화하며, 모든 억압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작가의 창작물이 높은 수준을 보이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나는 과거의 문학이 거둔 성과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문학 작품에서 한국현대문학의 최고 작품을 손꼽을 수 있다고 믿지만, 40대 이하, 청년들이 보는 한국현대문학의 기준은 다를 것으로 본다. 이런 기준으로 이두온의 작품을 읽었다. 나는 스티븐 킹의 작품을 대부분 좋아한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며, 인간의 다면성, 혼재성, 다중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독자로 하여금 감동하고, 감정 이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스티븐 킹의 작품에 등장하는 악인의 내면은 공포와 악으로 가득하지만, 이걸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 등으로 분석하면 우리 인간이 겪고 있는 수많은 정신적 문제의 다면성이 드러난다. 즉, 작품에서 인물의 행동에는 반드시 정신적 활동의 결과이며, 정신적 활동의 내면에는 그가 살면서 겪은 깊은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는 걸 독자는 알게 된다. 이두온의 작품은 과거의 기준으로 보면 '장르 소설'이다. 이런 분류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런 분류를 유지했던 과거 문학의 기준은 오늘날 비판하고 극복해야 한다. 과거 '순수문학'이나 '참여문학'으로 나누고, SF소설, 스릴러소설, 탐정소설, 추리소설 등은 소설의 주류로 인정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문학평론가들도 이런 작품들을 평론하지 않았고, '주류문학'을 주도하는 계간지에서도 '장르문학'에 해당하는 작품은 취급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장르문학'은 철저히 소외당해왔다. 반면, 일본에서는 추리소설, 스릴러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추리소설, 스릴러소설, 하드보일드소설 등이 편견 없이 독자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었다. 이런 외국 작품들이 번역되어 출간되면서 한국독자는 문학의 다양성을 누릴 수 있고, '장르문학'이 결코 변두리, 주변부 문학이 아닌, 본격 문학 작품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세계문학을 봐도 셰익스피어가 높게 평가되고 있지만,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의 작품 역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작품이며, 과학 소설을 쓴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들은 문학 뿐아니라 영화, 과학 분야까지 폭넓은 영향을 끼치는 작품이다. 한국처럼 문학을 협소하게 규정하는 나라는 없을 듯하다. 한국문학에서 장르문학을 차별하는 건 문단 내부의 권위적 태도와 권력 관계, 차별을 통해 권력과 권위를 유지하려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태도의 결과다. 이두온의 작품-타오르는 마음-의 배경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작품 속 세계가 모호한 것은 작가의 의도한 것이며, 그것은 구체적 세계와 유리되어 있음을 뜻한다. 현실세계에 구축하는 작품과 비현실세계에 구축하는 작품은 장단점이 분명한데, 모호한 세계는 그곳,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즉, 장소나 세계보다는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국적을 알 수 없는 이름이다. 위도, 밴나, 나조, 오기 같은 이름은 국적이 불분명하다. 이름의 모호함 역시 그 개인의 정체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이들은 세상에 있는 누구를 대치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결국 작품 속 세계는 지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마을과 그 마을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호함'은 보편성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개별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 이 작품의 많은 장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고, 알고 있으니 내가 느끼는 단점과 아쉬움을 중심으로 보자면, 무엇보다 인물의 개성, 정체성의 핍진함이 부족하다.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행동이 극단적일수록 이유는 더욱 선명하고 확실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인물이 현재 보여주는 행동은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 아주 느리게 변화하다가 어느 순간 질적 변화가 발생하는 순간이 있으며, 그 계기를 통해 이전과 이후 인물의 존재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이때 작가는 인물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련의 흐름이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해 온 것이라는 걸 독자에게 보여주고 설명해야 한다. 그 과정이 장황하지 않아도, 독자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티븐 킹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독자의 공감을 충분히 끌어낸다. 즉, 개인 서사의 축적과 중첩을 통해 독자의 기억을 속이는 것이다. 위도가 사불을 보는 것이나 밴나가 오기를 보는 것은 그들의 트라우마가 그만큼 깊다는 뜻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작은 마을에서 발견된 여섯 구의 시체와 이들을 죽인 연쇄살인마가 중요하게 등장하지만, 연쇄살인마를 찾는 것은 일종의 맥거핀이다. 이 작품은 위도와 밴나의 싸움이 핵심인 듯 보이다가 어느 순간 마을의 거대한 음모가 드러난다. 이 구조는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틀이다. 그렇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이 진자' 또는 윤태호의 '이끼'에서 볼 수 있었던 구조와 비슷하다. 서사의 핍진함과 개인 서사의 축적이 균형을 이루며 완벽한 조화로 성장하는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라면, 이두온의 작품에서 인물의 성장은 핍진성이 떨어진다. 조금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등장인물들은 뒷부분의 사건을 위해 소모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위도나 밴나는 캐릭터 자체로 매력적인데, 이들 인물의 서사를 핍진하게 축적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또한 주변 인물로만 드러나는 밴나의 아버지나 고모부 등의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더 많이 드러내고, 삶의 구체성을 띄어야만 마지막 부분에서 마을 전체의 음모가 설득력이 생길 것으로 보는데, 마을 전체의 욕망은 드러내지만, 주민 개개인의 욕망이나 탐욕, 갈등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건 서사의 축적이 부족했다는 걸 의미한다. 내가 생각하는 단점들은 이 작품의 장점에 비하면 지극히 지엽적이고 부분적이다. 한국문학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는 걸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나도 데뷔작은 노동소설이었지만, 첫 장편은 인터넷 해커를 다룬 작품이었으며, 그 뒤로도 '장르소설'로 불리는 소설을 쓰고 있다. 이제 이런 구분에서 자유롭고, 독자들이 이런 장르를 구분하지 않으며, 재미있는 작품을 찾는다는 건 바람직하다. 다만, 작가는 재미있는 작품을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한편으로 '문학'의 본령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좀 억지스러운 비유를 들자면, 같은 나체를 찍거나 그릴 때, 그것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작가의 세게관, 철학에 의해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고, 포르노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문학'이라는 것 역시 작가의 세계관, 철학에 따라 '문학'이 될 수도 있고,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이 소설은 내가 생각하는 예전의 문학 작품과는 분명 다르지만, 한국문학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고, 젊은 작가의 창작욕구를 자극할 것으로 기대한다. 문학의 낯선 형식은 위험한 도전이지만,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길을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히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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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9
  •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원작과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원작과 영화 수많은 영화가 소설 또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소설과 만화는 영화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닌 예술 장르이고, 이미 검증된 서사의 깊이가 두텁게 펼쳐져 있어, 영화의 소재로 매우 훌륭하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끊이지 않는 샘물과도 같다. 좋은 영화는 순수한 창작이든,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든 훌륭하지만, 문학에서 가져 온 서사를 다듬는 것이 보다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원작을 직접 가져오지 않아도, 영화감독을 비롯한 제작자들은 이미 수많은 예술 분야에서 영감을 받기 마련이며, 이런 폭넓은 확장이 영화 예술의 외연과 철학을 단단하게 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 그 자체만 즐기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가 어떤 원작에 기대고 있을 때, 그 원작을 일부러 찾아보는 것은 나름 재미와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영화 '쇼생크 탈출'이나 '대부'는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다. 스티븐 킹의 소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이 영화는 불멸의 명작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부' 역시 미국 마피아의 내부를 깊숙이 취재해 쓴 마리오 푸조의 소설로, 이 영화는 후속 영화를 생각하지 않고 만들었지만, 영화가 크게 흥행하면서 2부, 3부까지 이어지게 된다. 영화를 볼 때, 원작이 있는 경우, 원작 소설이나 만화를 먼저 보고 영화를 보는 경우는 드물다. 영화가 재미있어서 살펴보니 원작 소설, 만화가 있다면 그것을 나중에 찾아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가 그렇다. 또한,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언급한 책을 일부러 찾아보는 사람도 있을텐데, 최근에 본 영화 '더 이퀄라이저 2'에서 주인공 로버트(덴젤 워싱턴)가 읽는 책이 '세상과 나 사이'라는 에세이인데, 미국의 흑인 작가 타네히시 코츠가 쓴 책으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흑인의 정체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를 보고, 원작 소설이 있는지 찾아봤더니, 마침 한국에서 번역 출판한 책이었고, 곧바로 책을 주문해 도착하자마자 읽었다.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도 원작의 내용과 다를 수밖에 없다. 소설이나 만화를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체의 구성과 서사를 완전히 해체한 다음, 다시 조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서사의 일부는 삭제되고, 일부는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인물은 사라지거나 새롭게 해석된다. 장편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장편소설 한 권에 들어 있는 서사의 폭과 깊이는 물론, 인물의 복합적이고 다층적 존재감을 영화에서 온전하게 전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극히 제한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를 볼 때,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오히려 재미가 덜하다고 느낄 확률이 높다. 그것은 소설만이 가능한 서사의 풍성함, 핍진성, 다층적, 중의적 해석, 상상력 등이 영화에서는 극히 일부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도 나오지만, 소설에서 시간의 흐름은 무려 20년에 이른다. 1945년, 오하이오 미드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윌러드 러셀은 고향인 웨스트 버지니아의 콜크리트로 가는 길에, 중간 기착점에서 잠깐 쉬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는 우스스푼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샬럿을 처음 보고 반한다. 영화는 원작 소설의 흐름을 가능한 따라가고 있어서, 관객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시간의 흐름과 이야기의 전개를 놓칠 수 있고, 인물들의 현재와 과거가 뒤섞을 수 있으니 조금 복잡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은 이런 시간의 뒤바뀜과 인물의 등장과 퇴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영화에서는 배경으로만 잠깐씩 보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사는 지역이 어떤 곳인지 관객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오하이오주의 녹켐스티프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콜크리트가 어떤 곳인지 훨씬 자세하게 이해하게 되면서, 이 서사의 배경을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구글 지도로 소설의 무대를 찾아봤다. 오하이오주의 남부에 있는 녹켐스티프는 대도시인 콜롬버스에서 남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시골이다. 윌러드가 샬럿과 결혼해 살기 시작한 1950년대에 마을 인구가 고작 400명 정도에 불과했고, 전기도 아직 들어오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런 사정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콜크리크도 마찬가지여서, 석탄 탄광인 지역이어서 주민 남성 대부분이 탄광에서 일하는 이곳은 오하이오주, 켄터키주, 버지니아주, 웨스트버지니아주의 경계에 있는 깡촌이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교육 수준이 낮고, 매우 가난하며, 백인이든 흑인이든 자신의 삶이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들이 가장 가까운 대도시에 나가는 경우는 평생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사건'이고, 떠나고 싶어도 수중에 가진 돈이 없어 떠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윌러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 군복을 입고 귀향하는 도중, 오하이오주 미드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렸다가, 우드스푼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샬럿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는 잠깐 고향인 콜크리크에 와서 어머니와 외삼촌을 만난 다음, 다시 미드로 돌아가 샬럿에게 청혼하고, 두 사람은 결혼한 다음, 녹켐스티프에 정착한다. 윌러드가 고향에 갔을 때, 그의 어머니 에마는 윌러드의 신부감을 점찍어 두었는데,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헬렌이었다. 헬렌의 가족은 집에 불이 나서 모두 사망하고 헬렌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헬렌은 못생겼고, 윌러드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우연이지만, 교회의 부흥사로 나타난 로이에게 반한 헬렌은 로이와 결혼한다. 윌러드와 샬럿은 사내아이를 갖게 되고 - 이 아이가 바로 주인공 '아빈'이다. 아빈은 1948년생 - 아빈이 아홉 살 되던 1957년, 샬럿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윌러드도 샬럿을 따라 자살한다. 아빈은 결국 윌러드의 고향집, 할머니와 외삼촌이 사는 콜크리트로 가게 된다. 콜크리트에서도 헬렌은 교회부흥사 로이와 결혼해 딸을 하나 낳는데, 이 딸, 레노라를 아빈의 할머니 에마에게 맡기고 남편 로이와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가 로이에게 살해당한다. 로이는 왜 아름다운 자기 아내를 죽였을까. 영화에서는 단지 로이가 미치광이로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로이의 사촌이자 하반신 불구인 시어도어의 역할이 매우 크게 드러난다. 시어도어는 로이와 헬렌의 사이를 질투하고, 로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시기했으며, 행복한 사람들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비틀린 인물이지만, 영화에서는 매우 수동적으로만 그려진다. 로이 역시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고, 종교에 집착한 나머지 정신이 돌아 자기가 죽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시어도어의 충동질로 로이는 아내 헬렌을 죽인 다음 되살릴 거라고 장담하지만, 현실은 단지 그들이 살인자로 쫓기게 된다. 영화에서 삭제된 내용 가운데, 윌러드의 자살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윌러드가 사는 집의 주인은 변호사인 핸리 던랩인데, 그의 아내 이디스는 마치 창녀처럼 아무 남자나 집으로 끌어들여 섹스를 한다. 이미 그 지역에서 이디스는 창녀로 소문이 파다했고, 핸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한다. 매월 월세를 내러 사무실로 오는 윌러드에게 핸리는 제안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집 뒤쪽의 5만평 땅을 다 주겠다고. 정확한 제안 내용을 말하지 않았기에 윌러드는 오히려 핸리를 의심하고, 마침내 핸리를 살해한다. 핸리의 주검이 발견되고, 핸리 살인범으로 그의 아내 이디스와 흑인 정원사가 범인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이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윌러드의 아내 샬럿이 암으로 사망하자 윌러드도 자살하는데, 이는 샬럿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어린 아빈은 알 리가 없었다. 콜크리크에서 아빈과 레노라가 할머니 에마와 외삼촌 어스켈의 보호 아래 생활하던 시기는 아빈의 아버지가 자살한 1958년 이후 계속되었다. 아빈과 레노라는 마치 남매처럼 살았는데, 아빈은 레노라를 잘 보호해주고 있었다. 에마와 러스켈, 아빈, 레노라는 마을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고,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았다. 교회 목사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병이 들어 요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목사의 조카가 대신 목회를 볼 것이라고 설명한다. 새로 부임한 프레스턴 티가딘은 목사가 아니었다. 그는 전도사였으며 어린 여자 신도를 유혹해 섹스를 하는 섹스광이자 사악한 인물이었다. 순진한 레노라가 프레스턴의 그루밍에 넘어가 노리개가 되었고, 결국 임신하게 된다. 프레스턴은 레노라 뿐아니라 다른 어린 여자들도 그루밍으로 유혹해 자신의 성노리개로 삼았다. 레노라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프레스턴을 찾아가 애원하지만 프레스턴은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레노라가 자살하자, 아빈은 프레스턴의 뒤를 오래 추적하며 증거를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프레스턴을 살해하고 고향을 떠난다. 아빈은 어렸을 때 살았던 오하이오주 녹켐스티프를 찾아가는데, 중간에 차가 고장나 팔아버리고 히치하이킹을 한다. 이 과정에서 사진 찍는 연쇄살인마 부부 칼 핸더슨과 샌디 핸더슨을 만난다. 이 두 사람은 우연이지만, 샌디가 우드스푼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잠깐 일할 때 만났다. 그리고 샌디의 오빠는 미드에서 부보안관으로 일하고 있는 리 보데커였다. 칼 핸더슨은 타고난 싸이코패스였으며, 그가 아빈의 손에 죽을 때까지 무려 26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칼과 샌디가 살해당하고, 리 보데커가 그들(칼과 샌디)의 집을 찾아가 집안을 수색하다 발견한 사진들을 보면서 알게 된다. 칼과 샌디의 '모델' - 제물이 되는 사람 -로 찍힌 사람 가운데 운이 좋아서 살아난 사람이 바로 '로이'다. 자기 아내 헬렌을 죽이고 시어도어와 함께 남쪽 플로리다로 도망한 로이는 시어도어가 병으로 죽자 딸 레로라가 보고 싶고, 자기가 아내 헬렌을 죽인 것을 참회하고 자수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히치하이킹을 하다 우연히 칼과 샌디의 차를 타게 된 것이다. 아빈은 자기를 죽이려던 칼과 샌디를 정당방위로 죽이고, 그가 어릴 때 살았던 녹켐스티프를 찾는다. 샌디의 오빠이자 부보안관 리 보데커는 콜크리트의 경찰에게서 전도사 프레스턴이 살해당했으며, 그를 죽인 용의자가 아빈일 거라고 알려준다. 리 보데커는 아빈을 잡기 위해 예전 아빈의 집으로 찾아가고, 그곳에서 아빈을 만나지만 아빈의 총에 맞아 죽는다. 리 보데커는 이미 부패한 경찰이며, 미드의 포주 테이터 브라운에게 돈을 받고 다른 사람을 청부살해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즉, 리 보데커는 경찰로서 하면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기에, 그가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모든 사건의 배경에 짙게 깔리는 것은 '종교'와 '살인'이다. 모든 인물은 교회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고, 이들에게 '하나님' 또는 '목사'는 절대 존재로 군림한다. 윌러드도 신을 믿지 않았지만, 아내 샬럿이 암에 걸리자 종교에 집착하고 광기를 보인다. 그는 짐승을 잡아 자기가 만든 제단에 피를 뿌리고, 짐승을 제물로 바쳐 아내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 행위가 마치 원시종교의 주술처럼 보이지만, 윌러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종교 또는 교회와 관련해 이들은 맹목이며, 절대 권위에 복종하는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전도사 프레스턴 티가딘이 자기 아내를 비롯해 모두 어린 여성들을 그루밍으로 정복해 성노리개로 삼는 것을 보면, 이들의 타락은 본질적으로 종교 자체에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여기에 싸이코패스에 연쇄살인마 칼 핸더슨과 그의 아내 샌디의 행동은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성향이다. 성도착자이자 살인광 칼 핸더슨은 그러나 자기 어머니가 오랜 투병으로 사망할 때까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카메라에 담기는 피사체가 특별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사람을 살해하기 직전과 직후의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면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인물이다. 두 곳의 시골을 배경으로, 주인공 아빈의 행적을 따라가면, 아빈은 오하이오주 미드의 녹켐스티프에서 태어나 자랐고, 소년이 된 이후 아버지의 고향인 웨스트버지니아주 콜크리크에서 성장했으며, 그곳에서 전도사를 살해하고 다시 고향인 녹켐스티프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에게 조금씩 인연이 있지만, 그 인연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들 자기의 삶을 살아가기에도 바쁘고, 모든 일들은 마치 우연처럼 일어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아빈이 다시 히치하이킹을 하고, 차 안에서 조는 장면이 보이는데, 이때 운전을 하는 사람이 그 악명 높은 찰스 맨슨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 장면이지만, 찰스 맨슨은 감옥에 있다가 1967년에 석방되는데, 그의 고향이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라는 것, 아빈이 마지막에 신시내티로 간다고 말하는 것에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소설을 꼭 읽기를 권한다. 영화에서는 알 수 없는 서사의 핍진함이 훨씬 재미있고, 인물의 성격과 그들이 행동하는 배경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작가의 문장이 하드보일드 스릴러라는 걸 알 수 있다. 더구나 작가 도널드 레이 플록은 이 작품이 첫번째 장편소설이고, 단편집까지 해봐야 겨우 두 권째 소설인데, 이미 세계적 작가로 명성을 얻고 있다. 그것도 무려 57세의 나이임에도. 그러니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나이를 생각할 이유는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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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9
  • 별들의 감옥 - 고경숙 소설집
    별들의 감옥 - 고경숙 소설집 마당의 우편함에서 우편물을 꺼내보니 예상 못한 우편물이 있었다. 책봉투였고, 나에게 책을 보냈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의외의 우편물이었다. 꺼내보니 소설집이다. 출판사가 보냈을까, 저자가 직접 보냈을까. 책표지 다음 장에 내 이름을 쓴 저자의 친필과 인장이 찍혀 있었다. 저자께서 직접 보내주신 책이다. 하지만 나는 고경숙 작가를 잘 모른다. 작가 소개를 읽어보니 아뿔사, 임헌영 선생님 사모님이셨다. 존경하는 임헌영 선생님은 문학평론가시니 잘 알고 있었지만, 사모님께서 소설을 여러 편 발표하신 작가라는 걸 몰랐다. 죄송할 따름이다. 문단의 말석에 있는 나에게 책을 보내주신 고마움에 보답하는 길은 오로지 책을 잘 읽는 것이라 생각해서 성심껏 책을 읽었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여성 서사'다. 특히 여성이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인 남성가부장제 사회,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성장하는 여성을 다루고 있는 독특한 소설들이다. 여성 작가라면 돌아갈 수 없는 페미니즘에 관한 직접적 언급이 없음에도 이 소설은 깊이 있는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으며, 7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사회참여의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작품들에는 작가 자신의 삶과 경험, 시간과 지혜가 투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운명이 오로지 자신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듯이, 외부에서 들이닥치는 강렬한 경험이 또한 개인을 성장시키기도 한다. 다만 그것은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경험일 때가 많으며, 고난의 시간을 견디는 그 자체가 이미 시대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는 원하지 않았지만,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의의 사회에서 개인이 선택해야 하는 양심의 문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을 깨닫고, 자신이 모르던 세상을 알기 위해 배우는 자세를 갖춘다. 우리가 살았던 과거의 시대는 불의의 시대였다. 독재가 시민을 억압했고, 이념의 틀에 개인을 가뒀다. 독재에 저항한 지식인은 삶이 망가지는 고통을 당했고, 설 자리를 빼앗았다. 지식인이 저항의 당사자로 시대의 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적지 않지만, 수십 년의 삶을 지식인의 배우자로 살면서 겪은 참담함과 애통함을 여성 서사로 기록한 작품을 만나는 건 퍽 드문 경우인데, 이 소설집은 그런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지금 한국에서는 70년대, 80년대의 독재정권과 그에 투쟁했던 역사를 다루는 서사가 부족할 뿐 아니라, 청년들은 특히 모르기도 하지만, 적극 알려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한때 '운동권 후일담'이 유행했던 시기에 이미 운동권이었던 일부 사람들의 행태에 부정적인 모습이 있었던 것도 한 원인이겠지만, 그때라도 이 작품집처럼 목소리 높이지 않으면서도 사회와 지식인의 불화를 온전하게 다룬 작품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늦게 출간된 것은 아쉽지만, 이제라도 세상에 나왔으니 퍽 다행한 일이다. 어머니의 천국 ______ 009 오윤수는 장년의 남성으로 건설업을 하는 중소기업가이기도 하다. 그는 직접 지방 현장에 내려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는데, 아내의 전화를 받는다. 노환이 깊어진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당장 집으로 올라가야 했지만 현장도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불안한 마음으로 일을 하다 결국 늦은 밤, 기차를 타고 상경한다. 썰렁한 기차에 앉아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윤수는 오래 전 일을 떠올린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윤수는 인민군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갔다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집으로 돌아온다. 텅 빈 서울에서 어머니는 집을 지키고 있었고, 윤수는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겨우 살아났다. 하지만 그의 두 동생 윤태, 윤호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인민군에게 잡혀갔는지, 자발적으로 월북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고 윤수는 작은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겨우 식솔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전쟁 끝나고 30년이 지났을 때, 그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닥쳤는데, 정보기관에서 윤수를 호출해 동생들의 행방을 캐물었다. 정작 아무 것도 모르는 윤수는 동생들이 살아있다는 것,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왔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상봉의 기대를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정보기관도 더 이상 윤수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을 때, 윤수는 정보기관을 찾아가 동생들 소식을 물었지만, 그들은 어떤 사실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텔레비전 방송에서 이산가족찾기를 시작하자 생사를 알 수 없는 두 아들의 이름을 크게 쓴 현수막을 만들어 출연했다. 윤수는 처음에 극구 말렸으나 어머니의 깊은 한을 외면할 수 없어 여의도 방송국 앞에서 두 동생의 이름이 쓰인 현수막을 만들고,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여전히 잃어버린 두 자식을 그리워했다. 그들이 북한에 있었다면 남쪽으로 내려오지 말고 차라리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잃어버린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평생을 산 것도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어머니는 정보기관에서 두 아들이 간첩이라고 닥달하는 고통까지 당하며 살았다. 소설에서 이념 문제나 전쟁의 이야기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지만 배경으로 깔려 있다.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 전쟁이었고,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 이 소설의 단서가 되는 역사적 사실은 고경숙 작가의 남편, 임헌영 선생님의 과거 역사와 닮은 부분이 많다. 임헌영 선생님의 아버님이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사형당했고, 형은 실종되었다가 나중에서야 북한에 살고 있다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된다. 임헌영 선생님과 가족은 한국전쟁의 직접 피해자이며,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이자 반공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한국현대사의 질곡과 비극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가족이기도 하다. 고경숙 작가 역시 남편인 임헌영 선생의 사회활동으로 독재정권에서 많은 고통을 받은 분으로, 이런 가족사가 작품의 배경이자 창작의 동기가 되었다. 푸른 배낭을 멘 남자 ______ 031 푸른 배낭을 메고 등산복을 입은 남자는 남편 현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불쑥 어디론가 사라져 한 달, 두 달 소식이 없을 때가 있었다. 사복을 입은 정보경찰 여럿이 세영의 집을 감시하며 여러 날이 지나도 현우가 돌아오지 않자, 경찰은 세영을 연행해 '서빙고'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경찰에게 뺨을 맞으며 수모를 당하면서도 남편 현우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기에,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남편의 형이 월북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세영의 삼촌 두 명도 월북했다고 정보경찰은 우겼다. 며칠 뒤, 현우는 경찰에 잡혔고, 세영도 다시 '서빙고'에 끌려가 최조를 당했다. 현우는 간첩사건의 한 사람으로 신문과 방송에 알려졌으나 그렇게 엄청난 사건치고는 우습게도 반년 뒤에 현우는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난 현우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현우는 불쑥 집을 떠났고,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현우를 빨갱이라고 비난했으며, 집안을 들쑤셔 쑥대밭을 만들었다. 경찰은 집을 점령하고 주인행세를 했으며, 현우의 행방을 쫓으려 세영의 모든 친인척을 괴롭혔다. 그런 와중에 세영은 씩씩하게 직장(대학 행정실)에 출근했지만 학교에서는 휴가를 쓰라고 배려했다. 신문에서는 '자생공산게릴라'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으로 검거자, 수배자 명단이 있었다. 현우는 수배자 명단에 있었다. 그렇게 경찰이 집을 점거하고 엿새가 지나서 현우가 세영에게 전화해 자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비겁하게 숨는 것보다 당당하게 독재정권에 맞서겠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현우가 집으로 돌아와 경찰에게 잡히고, 세영은 아이들을 앞세워 아버지에게 인사를 시켰다. 잡혀가는 사람은 당당했고, 보내는 사람은 담담했다.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리라. 이 소설 역시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다. 남편인 임헌영 선생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정보기관에 잡혀갔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모두 국군보안사나 정보기관에서 조작한 것으로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 시기에 시퍼런 독재정권의 폭압으로 수많은 민주시민, 지식인, 학생, 노동자가 억울한 죽음과 감옥에 갇히는 일은 일상이었다. 이 작품은 고통을 당하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그의 배우자가 겪는 고통과 슬픔, 희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박정희가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후, 18년 독재를 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영구집권을 획책한 것에 대해 지금도 박정희를 훌륭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역사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박정희가 가난한 한국을 일으켰다고 믿는다. 오히려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으로 한국을 민주국가로 만든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과 눈물이 지금의 한국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5박 6일 ______ 065 구치소에 갇혀 있는 남편에게 영치금을 예치하고 직장(대학 행정실)으로 돌아오던 진영은 학교에서 곧바로 정보기관원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와 '서빙고'의 유치장에 갇힌다. 대학은 휴교령이 내렸고, 경찰, 정보기관원이 대학 곳곳에 상주하며 시위하는 학생을 폭행해 체포하고 있었다. 남편이 감옥에 갇히고 직장에서 진영의 위치도 불안한 처지여서 진영은 총장을 찾아가 어떤 자리라도 좋으니 다닐 수 있게만 해달라, 늙은 시어머니와 자식 셋의 목숨이 달렸다고 호소해 겨우 쫓겨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진영을 취조하러 들어 온 경찰은 시위 학생에 관한 배후로 진영을 꼽았다. 그러면서 직장에서 사표를 내라고 강압했다. 남편은 빨갱이로 이미 감옥에 있고, 진영이 남편에게 빨갱이 교육을 받아 지금 학생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것이 경찰의 논리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죽고, 곧바로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일으킨 쿠데타로 나라는 벌집을 쑤신 듯했다. 대학에서는 대학생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시위를 하고 있었고, 진영의 남편은 이미 구속되어 감옥에 있었으나 대학 시위와 관련해 정보기관에서는 대학교수와 행정직원들을 잡아와 사표를 쓰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진영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면서도 끝내 사표는 쓸 수 없다고 버텼다. 이미 구치장에 들어온 수백 명의 교수와 교직원들 거의 모두는 사표를 쓰고 석방되었고, 진영처럼 사표를 쓰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경찰은 진영의 집을 불법수색해 진영의 일기장을 가져왔고, 진영은 그들의 악행에 의식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며 저항했다. 결국 경찰은 '각서'라는 형태로 경찰이 불러주는대로 진영이 작성한 서류를 받고 석방했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난 1980년 7월 24일부터 29일까지 진영이 겪은 일이었다. 작가의 삶을 거의 그대로 쓴 작품으로, 작가는 이 시기에 숙명여대 행정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작품에서도 남편이 이미 감옥에 있다고 나오는데, 1979년에 정보기관은 '남민전 사건'을 조작해서 민주인사를 간첩으로 조작 발표했다. 작가는 현실 생활에서도 늙으신 시어머니와 세 자녀를 책임진 가장이었으며, 대학에서도, 정보기관, 경찰에서도 작가가 대학에서 사표를 쓰고 나가도록 위협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매몰하지 않고, 당시 시대상황, 군부쿠데타 이후 대학에서 벌어진 활화산같은 시위 상황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대학교수 일부가 보여주는 파렴치하고 야비하며 비겁한 모습도 있고, 이름 없이 사라진 억울한 학생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이 작품은 소위 '후일담 소설'이라고 알려진, 한때 운동권의 가장자리에 있던 사람이 쓴 가짜 이야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솔하고 진실하다. 두 번째 실수 ______ 101 그녀는 3년 전, 성당 앞을 지나다 우연히 '비행청소년 자원봉사 교육프로그램'을 보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는 자원봉사로 보호관찰소에 있는 청소년을 상담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병호를 만났다. 병호는 17살고, 중학교 3학년 때 교사 폭행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어떤 사람의 턱뼈를 부숴서 소년원에서 장기 보호관찰을 선고받았다. 병호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그녀가 자기 이야기를 하며 편하게 대하자 자기가 학교에서 선생을 폭행한 이유와 그날의 상황을 자세하게 말한다. 중학교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며 사는 그녀는 마흔의 나이지만 아직 미혼이다. 그녀는 병호를 만나지 못하고 병호의 여자친구가 일하는 술집을 찾아가 '미수'를 만난다. 병호가 어떤 남자의 턱뼈를 부순 것도 미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미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술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미수가 들려주는 병호의 처지는 처참했다.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에 엄마는 병이 들어 아프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상습적으로 엄마를 폭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미수 역시 자의반 타의반 집을 나왔는데, 그의 아버지는 미수를 없는 자식으로 치고,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고 했다. 그녀는 그녀대로 아픈 과거가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고, 임신을 했지만 남자는 아이를 낳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아기를 낳았지만 부모의 극렬한 반대로 아기는 어딘가로 입양하고, 그녀는 그런 기억을 지우고 살아가고 있었다. 병호는 분식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틀이나 출근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병호의 집을 찾아갔다. 병호는 아픈 엄마를 간호하고 있었고, 그녀는 병호와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고 돌아왔다. 병호에게는 누나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폭행과 알콜중독이 싫어서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며칠 뒤, 병호가 사는 마을의 파출소에서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가보니 병호가 아버지를 폭행해 소년원에 갔다고 알려주었고, 그녀는 병호를 면회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공부를 계속하라고 말했다. 보호관찰관은 더 이상 병호와 상담하는 것은 그만두고 다른 상담자를 소개하겠다고 알려왔다. 그녀는 상담에 실패한 것일까. 봄바람 부는 날 ______ 131 동생 찬식의 결혼식이 있는 날, 찬옥은 홀어머니에게 지금의 남편 윤서를 소개할 때가 떠오른다. 윤서는 아버지가 월북했다고 솔직하게 말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찬옥의 집안에서도 이미 동생 찬식이 감옥에서 만난 동기생과 결혼했으며, 삼촌들이 전쟁 때 사라진 것이 자진 월북인지, 납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던 것을 기억했다. 아버지는 찬옥이 열 여섯 살에 사망했는데, 토목기사로 작은 회사를 운영하며 건실하게 살았지만 그의 두 동생과 일찍 헤어졌다는 것, 아래 동생은 좌익활동을 하다 월북하고, 막내는 붙잡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이 평생 한이 되었다. 장남 찬호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공부를 해서 좋은 직장에 다녔지만 막내 찬식은 대학에서 열렬한 운동권 학생이 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다. 찬식의 어머니도 찬식의 신부가 될 명주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찬식의 단호한 태도와 형 찬호의 설득으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진행했다. 하지만 찬식이 명주의 부모님을 만나러 갔을 때는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 명주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달리 보기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 과외선생인 대학생 언니에게서 청계천에서 분신한 노동자 이야기를 들은 이후였다. 명주는 이후 야학을 하며 청계천의 작은 공장에서 일했다. 찬옥이 사돈이 될 명주의 어머니를 만나 전후 이야기를 들어보니 명주의 집안에서는 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명주가 선택한 삶, 대학도 졸업하지 않고,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가난하게 사는 것을 선택한 삶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찬식과 명주의 모교 운동장에서 열린 민주결혼식에는 찬옥의 남편 친구들, 찬식의 동지 선후배들로 하객은 넘쳐났다. 명주의 부모님은 끝내 참석하지 않은 채 결혼식이 진행되었고, 한창 길놀이를 하던 때, 명주의 부모님이 도착했다. '민주결혼식'은 이제 80년대 풍경이 되었다. 나도 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합정동의 한 수도원에서 열린 그 결혼식은 결혼식장에서 하는 '웨딩'과는 본질에서 달랐다. 이렇게 아름답고 신나는 결혼식을 왜 하지 않고, 마치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내듯 결혼식장을 빌려 뷔페식으로만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열렬한 학생운동을 하던 그 선배는 군대에서 만난 선임이었는데, 전역을 하고 퍽 오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어렵게 만나서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낸다. 한때 운동권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소수는 정치권으로 진입해 자신의 이념과 가치관을 버리고 출세의 욕망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도 있지만, 많은 청년들은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때의 열정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새가 된 아이 ______ 149 텔레비전에서 과거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선생들이 시위하는 장면을 본 나는 12년 전, 고등학교 3학년 때를 떠올린다. 학교 주인은 교장이고 이사장은 교장 부인, 교장의 동생이 이사, 학생주임과 선생 몇이 친족으로 얽힌 사학에서 군대보다 더 심한 검열과 폭력, 억압이 일상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감방 동기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책을 훔치는 택주를 알게 되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둘은 여자친구가 없고, 좋아하는 책이 비슷해서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는 비밀독서회가 있었는데, 곽선생이 병가를 내고 임시교사로 온 여선생이 이어서 독서회를 운영했다. 학교에서는 대학진학 외에는 모든 것을 불법으로 단정했기 때문에, 독서회는 자연히 비밀모임이 되었고, 학교가 아닌, 근처 교회에서 열렸다. 그 회원 명단에 인표가 있었다. 학원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재학생과 졸업생의 주도로 일어났지만 그 시위 과정에서 택주가 선생에게 끌려갔다. 나는 그날 저녁 택주네 집을 찾아가 택주를 만났지만 택주는 일부러 모른 채했다. 강남의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나나 택주 같은 아이들은 거지 취급을 당했다. 선생들은 대놓고 학생들을 차별했으며, 부잣집 아이들에게는 아부를 했다. 학교에서 시위가 있고 사흘이 지나서, 선생이 나에게 지하교련실로 내려가라고 했다. 그곳에는 지난 시위에 참가했거나 그런 혐의를 받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학생주임에게 폭행을 당하고 자술서를 쓰고 겨우 풀려났지만, 그 다음 날, 다시 악질 선생인 권영두에게 혼자 불려가 다음 날부터 독방에서 취조를 당하게 된다. 나는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와서 아버지가 항의까지 했지만, 권영두는 비밀독서회에 대해 추궁했다. 택주는 새벽에 찾아와 끝까지 비밀을 지키자고 다짐했지만, 그 다음 날, 학교에서는 다시 나를 불렀고, 나는 택주가 쓴 일기장의 복사본이 그곳에 있는 걸 보고, 택주가 경찰에 잡혔다고 생각하고 교무실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택주 어머니가 있었고, 택주의 일기장은 택주 어머니가 자진해서 학교에 가져온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내가 시위를 주동한 주모자로 낙인 찍었고, 비밀독서회를 지도한 여선생 신정미 선생이나 나의 아버지가 선동했다고 없는 말을 지어냈다. 그리고 다른 학교에 전학이라도 하려면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하라는 말에, 나는 오기가 생겨 거칠게 항의했다. 그때 학교에서 학생이 투신했다는 말이 들렸고, 그 현장에서 발견된 사람은 택주였다. 슬픈 청첩장 ______ 187 뜻밖에 인혜의 아들 수민이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받았다. 어릴 때 둘도 없이 친했던 인혜였지만, 그는 아들의 결혼식에도 부르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밖 이층 양옥집은 내 학급 반장의 집이자 도장학사의 집이기도 했다. 반장은 아버지의 위세를 믿고 시건방진 행동을 했는데, 어느 날, 인혜에게 칠판에 한자를 써보라고 놀리다 인혜에게 뺨을 맞는다. 반장은 뺨을 맞고 나뒹굴었고, 히스테리를 일으켰으며, 선생은 인혜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나는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먼저 가겠다고 하자 인혜는 화를 내며 다시는 나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우리는 서먹하게 지냈고,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친하게 지내다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면서 서로 다른 대학을 다녔지만 주말이면 자취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혜는 미국 유학을 가겠다고 했지만 갑자기 결혼을 했고, 나도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다. 남편들은 우연히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었고, 그때 서울 외곽에 언론인을 위한 집단주거지이 생겨 같은 동네에 이웃하며 살았다. 하지만 남편 윤조가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회사에서도 강제 해직당하고 투쟁하고 있을 무렵, 인혜는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윤조의 행동이 위험하다는 말을 했다. 인혜가 내게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졌고, 남편이 감옥에 갇힌 뒤 인혜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때 나는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남편 친구의 도움으로 작은 출판사에서 임시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인혜는 나에게 윤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자기의 남편이 나와의 인연을 끊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난하게 살았어도 지금 대통령 덕분으로 이렇게나마 살게 된 거라고 말했다. 그 이후 31년 동안 잊고 살았지만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인혜의 남편도 기자였고, 군사정권을 옹호하던 신문사의 간부가 되어 있었다. 결혼식 전에 전화를 여러 번 해도 닿지 않았지만 나는 결혼식장을 찾아갔다. 인혜를 만날 기대를 했으나 그날 인혜는 없었다. 알아보니 인혜는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병원의 접수계에서 인혜의 이름을 찾았지만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병원으로 옮겼을까해서 원무과로 가던 길에 인혜를 쏙 빼닮은 인혜의 딸 수진이를 만났다. 인혜는 방금 숨을 거두었고, 내가 아들의 결혼식을 봐서 다행이라고 했다. 별들의 감옥 ______ 209 승재는 엄마가 자는 틈을 노려 엄마 지갑에서 돈을 빼내다 엄마 순미에게 들킨다. 명서는 아파트 단지에 새벽 신문을 돌리는데, 순미도 신문을 돌리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일을 한다. 명서는 얼마 전, 회사에서 해고당했지만 말을 못하고 있었다. 벌초를 핑계로 아들 승재와 길을 나선 명서는 승재가 엄마 지갑에서 돈을 훔치고, 학교에서도 성적이 하위권이라는 말을 듣고 승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승재가 부모의 돈을 몰래 훔친 이면에는 친구 종하의 탁구채가 있었다. 부잣집인 종하네는 종하의 형이 탁구를 좋아해 집에 탁구대 일습이 있는데, 종하의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 온 비싼 탁구채를 종하가 승재에게 하루 빌려주었고, 비싼 탁구채를 아끼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탁구채를 망가뜨리게 되자, 종하는 승재에게 돈을 갚으라며 폭행까지 했다. 결국 집에서 몰래 돈을 훔쳐 갚기 시작했고, 들켜서 아버지에게 털어놓았다. 승재네는 아버지 명서가 회사에 다닐 때만 해도 중산층은 되었지만, 강남에 살 만큼 부자는 아니었다. 엄마 순미가 승재 교육을 핑계로 무리해서 강남으로 이사했고, 어떻게든 일류대학에 진학하라고 과외까지 시키고 있었다. 명서가 순미에게 회사에서 해고되었다고 밝히자 당장 승재 교육 문제를 들고 나왔다. 명서는 어차피 명예퇴직은 예상했었고, 이제는 가난하게 살아도 부자들 쫓다가 가랑이 찢어지는 짓을 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때 승재에게 전화가 오고, 종하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며 엉엉 울었다. 명서와 순미는 승재에게 침착하라고, 곧 도착한다고 말하며 벌떡 일어난다. 악연 ______ 231 서용주를 아느냐고 경찰에게 전화가 왔고, 나는 그와의 인연을 떠올린다. 중학생 때 단짝이었던 용주였다. 둘 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고, 용주는 친척집에서, 나는 오빠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다. 용주는 일찍 서울로 올라와 식모로 일하면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해 은행에 취직했고,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내가 일찍 남자를 만나 결혼한 이후 용주와의 연락을 끊었다. 용주를 다시 본 건 내가 월세, 전세를 전전하다 단독주택을 장만해 입주하고 동네 마트에 갔을 때였다. 점원과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는 여자가 용주였다. 남편은 회사에서 승승장구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들어왔고, 그럴 때마다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은행에 넣으라고 했다. 나는 용주를 본 이후 용주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은행에 다닐 때 용주는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둘 다 같은 은행 직원이었고, 한 남자는 부잣집, 한 남자는 시골 출신의 촌티가 나는 남자였다. 우연히 아이의 학교 육성회에서 옛날 중고등학생 때 친구를 만났고, 그 친구로부터 용주가 나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곧바로 용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용주를 만난 것은 '살롱'이란 곳이었고, 그곳에서 용주는 유명하다는 패션디자이너를 소개했다. 그날 비싼 옷을 맞추고, 용주에게서 투자를 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러다 패션디자이너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면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용주와 셋이 밥을 먹으며 투자를 하라는 패션디자이너와 용주의 말을 믿고 거액을 투자한 나는 처음 몇 달은 쏠쏠한 배당금 수입으로 행복했지만 어느 날, 배당금이 끊겼고, 용주도, 패션디자이너도 연락이 끊겼다. 그 와중에 남편의 회사가 압수수색을 당하고, 남편 영도가 지명수배가 되었다가 경찰에 잡혔다. 남편이 가져다 준 비자금을 내가 모두 사기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경찰은 그 사기꾼도 체포했다. 남편 영도가 출소하고 몇 년이 지나서 갑자기 용주가 집으로 찾아왔다. 용주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지만 나는 냉정하게 외면했지만, 나중에 용주가 알려 준 주소로 몇 번 송금을 하기는 했다. 용주는 자살했고, 그의 아들은 절도범으로 소년원에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꼭 찾아가겠노라고 말한다. 대법원 판례 ______ 253 용미는 아버지 삼우제를 지내고 가족들 모임에 가는 길이다. 큰오빠는 택배 회사를 차려 돈을 벌고, 둘째 오빠는 박사가 되었고, 막내 용필은 학업을 중단하고 영화를 하겠다고 하다 아버지의 병환 수발을 위해 집으로 들어왔다. 용미는 작은 출판사를 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다. 가족이 모인 목적은,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남은 부의금을 어떻게 할 것이냐였다. 아버지는 생전에 자식들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눠주었고, 아내에게도 집과 얼마의 저축도 남겼다. 하지만 의논도 하기 전에 어머니는 마음이 상해서 방으로 들어가고, 형제들끼리 돈의 나눔을 두고 언쟁이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 용미의 언니 용화가 대법원 판례를 들어가며 알아서 해결하겠노라고 했고, 다음 날, 은행으로 입금된 돈과 함께 '대법원 판례'를 메일로 보냈다. 그 여름의 귀환 ______ 267 미국에 사는 강희는 딸 승주와 함께 한국에 왔다. 친구 희원이 마중 나왔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촛불시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희가 한국에 온 이유는 죽은 남편의 묘를 파묘해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기 위함이었다. 강희, 희원, 주명이 모처럼 식당에 모였다. 이들은 대학 동기로 학생운동을 했고, 주명은 학교교수의 고자질로 경찰에 잡혀 들어가고, 복학생 진우는 주명을 구하려다 오히려 후배들을 모두 경찰에 넘기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1년 뒤 대부분 석방되었지만 진우는 4년을 더 감옥에 있었고, 감옥에 나와서도 선후배의 비난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 진우를 마지막까지 지킨 건 강희였다. 진우와 강희 사이에 딸 승주가 생겼고, 진우가 사망한 다음, 처가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이민한 오빠와 어머니가 있는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했다. 셋은 밥을 먹으며 우연히 주명과 진우를 잡아가라고 악다구니하던 교수가 지금 양평의 어느 요양원에 있다는 소식을 이야기했고, 한번 만나보자고 했다. 그들이 요양원을 찾아가 늙은 교수를 만났지만,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소리를 질렀다. 셋이 인사동 골목의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촛불시위에 참석했던 희원의 아들이 전화했다. 시위대에 떠밀려 승주가 다쳤다는 내용이었다. 셋은 병원에 도착해 승주를 보니 다리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휴가는 내내 깁스를 하며 지내야 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 가는 길, 승주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살겠다고 말한다. 강희는 철없는 소리라고 말하지만, 주명의 전화를 받고 자신도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올 것 같은 예감을 느낀다.
    • 문화
    • 독서
    2023-01-09
  • 뇌의 진화, 신의 출현
    뇌의 진화, 신의 출현 진화론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다윈부터였고, 다윈은 신학을 깊이 공부하기도 했지만, 진화론을 공부하고, 나이가 들면서 자발적으로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후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생물학은 물론 물리학, 천문학에서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들을 무수히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신을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하고, 과학이 제기한 문제와 증거를 부정한다.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진화론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신의 존재가 없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신-특히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과학과 진화론에 관한 책을 읽지 않거나 알려진 진화의 증거를 부정한다. 이 책은 그동안 수없이 발표된 진화이론에서도 특히 뇌의 진화에 초점을 맞추어 인류의 진화에서 뇌의 역할을 다루고 있다. 뇌의 진화와 신의 출현은 인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한데, 신의 존재와 창조를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책의 모든 근거를 부정할 것이지만, 신을 믿는 사람들이 부정한다고 해서 객관적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을 믿으며 과학의 증거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고 거짓과 위선과 왜곡의 암흑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불행할 뿐이다. 이 책은 뇌의 진화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인류의 진화에서 뇌의 역할은 어떠한지, 뇌의 발달과 함께 이성(지각)과 자기객관화, 시공간의 감각, 죽음의 인식, 죽은 조상에 관한 제사와 예식의 발달, 조상신의 등장, 토테이즘의 발달, 절대신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인류의 뇌는 지금도 진화를 계속하고 있으며, 인류의 뇌 발달과 이성의 발달은 결국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에 인류가 만든 '신'의 존재를 스스로 사라지게 만들 것임을 예고한다. 1부 신이 만들어지기까지 1. 호모하빌리스: 더 영리한 자아 읽은 내용을 시간의 순서대로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포유류는 지금부터 약 2억년 전에 지구에 나타났다. 그 뒤로 1억4천만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으며, 이 시기는 백악기, 쥐라기 같은 거대 파충류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지금부터 약 6천5백만년 전, 지구 바깥에서 날아온 소행성이 충돌하면서 거대 파충류는 절멸하고, 작은 체구의 포유류가 급격하게 진화하기 시작한다. 포유류는 다양하게 분화했고, 약 6천만년 전에 최초의 영장류가 출현했다. 이후 영장류는 수백 종으로 늘어나고 현재도 235종이 존재하고 있다. 약 3천만년 전에 신대륙원숭이라고 알려진 집단이 독자적인 진화의 길을 걸었고, 약 2천5백만년 전에는 구대륙원숭이가 같은 길을 걸었다. 인류와 가장 가까운 대형 유인원은 오랑우탄, 고릴라가 독자적으로 진화하면서 약 1천8백만년 전부터 분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약 6백만년 전에 우리와 가장 가까운 조상이 침팬지에서 갈라져 나왔다. 인류의 직접 조상인 호모하빌리스는 약 230-140만년 사이에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의 뇌용량은 그 전의 유인원보다 약 50% 더 컸다고 한다. 최초의 유인원 조상이 등장해서 약 4백만년이 흐르고 등장한 이들은 정교한 깬석기를 만들 줄 알았으며, 집단생활을 했다. 뇌 크기의 변화는 집단생활과 변증법적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이며, 호모하빌리스의 초기에 소수의 집단생활을 통해 협업이 발생하고, 생존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수명이 늘어나고, 먹거리의 확보도 독자적 활동보다는 소수집단의 활동이 유리한 것이 경험으로 축적되어 집단생활이 쭉 이어지면서 집단생활에 필요한 뇌 활동이 뇌의 크기를 크게 만들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인류의 뇌가 왜 갑자기 커졌는지 분명한 원인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의 인류는 다른 유인원보다 똑똑했지만, '자기 의식'을 갖지 못했기에 이성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2. 호모에렉투스: 인식하는 자아 호모에렉투스는 약 180만년 전부터 30만년 전까지 150만년 정도 존재한 인류다. 이 시기에 약 50만년 정도 호모하빌리스와 공존하던 기간이 있었고, 호모하빌리스, 호모에렉투스를 비롯해 다른 인종이 더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호모에렉투스의 가장 큰 특징은 최초로 불을 사용한 인류라는 점이다. 불의 사용은 약 79만년 전부터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으며 40만년 전에는 인류가 불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다. 이런 증거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호모에렉투스가 불을 사용했으며, 이것은 인류의 진화에서 매우 획기적이고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한다. 호모에렉투스는 호모하빌리스보다 뇌의 크기가 더 컸고, 도구를 다루는 솜씨도 더 정교했다. 이들은 돌의 양쪽에 날을 세우는 돌도끼를 만들었으며, 나무창과 돌촉을 만들어 사냥했다. 이들이 집단생활을 했다는 것은 명확한 증거가 있고, 돌도끼, 돌창의 사용은 인류보다 큰 동물-들소, 야생마, 사슴, 곰, 코끼리 등-을 사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대형 동물의 사냥과 불을 연결하면, 이들이 동물의 고기를 불에 익혀 먹었음을 알 수 있고, 동물의 가족과 뼈를 이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익힌 고기를 먹으면 소화가 더 잘 되고, 체중이 늘어난다. 과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날고기만 먹인 쥐보다 익힌 고기를 먹은 쥐는 몸무게가 평균 29% 더 증가했다고 한다. 불에 익힌 고기는 세균과 기생충을 죽이고, 먹기 편하며, 맛도 더 좋았기 때문에 호모에렉투스의 체구는 이전 인류보다 더 컸다. 불은 인류가 추운 곳에서 견딜 수 있도록 했고, 다른 동물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으며, 음식을 익혀 먹어 건강에 도움이 되어 생존력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들판이나 동굴에서 불을 밝히면서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노동하는 시간도 함께 늘어났다. 이들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사냥에 필요한 도구는 물론, 동물의 뼈를 가공해 작은 바늘까지 만들 정도로 점차 손의 기능이 섬세하게 진화한다. 불을 사용하면서 호모에렉투스는 아프리카를 떠나 북쪽으로 이동하는데, 이들이 '북경원인'과 '자바원인'이다. 이들이 집단생활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대륙 이동인데,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아프리카보다 추운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불로 어둠을 밝히며, 음식을 조리해 먹으며 북쪽으로 이동했다. 집단생활을 했다는 것은 이들이 '자아 인식' 단계에서 임계점을 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즉,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자아 인식' 단계가 있어야만 '나'와 '너'를 인지하고, 협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집단이 사냥을 할 때, 먹이를 나눌 때, 여느 동물처럼 '나'만을 생각한다면 집단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미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사용할 줄 아는 인류였기에 집단생활을 하는 단계에서는 이미 '자기 인식'이 어느 정도 뇌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3. 옛 호모사피엔스(네안데르탈인): 공감하는 자아 호모에렉투스가 존재하던 시기인 약 70만년 전에 인류는 다시 여러 종으로 진화했고, 이들이 지역에 따라 '호모하이델베르겐시스', '호모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로테시엔시스', '호모플로렌시스', '데니소바인' 등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네안데르탈인'은 약 23만년 전부터 4만년 전까지 존재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들은 이전 인류인 호모에렉투스보다 뇌 용량이 훨씬 컸으며-1480입방센티미터-이 크기는 현생 인류보다 크다. 체격도 커서 키는 평균 165센티미터, 몸무게는 약 84킬로미터로 당당했다. 유럽 지역에 살던 이들은 추위를 견뎌야했기에 불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주로 동굴에서 살았다. 이들은 동물의 털가죽으로 보온하고 집단사냥을 했으며 물고기와 새도 잡아먹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뇌와 체격이 커지긴 했지만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이전 인류보다 월등하게 발달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들이 이전 인류와 다른 점은 집단생활을 하면서 함께 생활하는 동료를 돌보는 행동을 했으며, 죽은 동료를 매장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만의 생존이 아닌, 함께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나 아닌' 동료의 상태를 돌보고, 주검을 매장한다는 의미는, '타인과의 공감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이런 공감은 '자이인식이 발달하지 않고서는 타인에 대한 인식이 발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이들은 자아인식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동발달 단계에서도 2세에 자아를 인식하고, 4세가 되면 타인에 대한 인식이 생긴다고 한다. 타인에 대한 인식은 '내가 나와 타인을 생각하는 인지공감'을 타인도 나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동물들은 무리를 짓되,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없다. 오로지 인류만이 '자아와 타인의 자아'를 공감한다.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정서가 발달하면서 '신'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심리적 싹이 트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미 인류는 무수히 많은 자연현상을 보면서 살았지만, 그것이 왜,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런 현상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설명하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절대적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는 '신'의 존재는 어떤 형태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4. 초기 호모사피엔스: 성찰하는 자아 10만년 전부터 인류는 구멍 뚫린 조개껍데기 목걸이로 치장할 줄 알았고, 불에 달군 다음 떼어낸 세련된 석기와 깬석기가 아닌 간석기(돌을 갈아서 날카롭게 만든 무기나 도구)를 만들었으며, 활과 화살도 만들어 사용했다. 초기 호모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떠나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이 아프리카를 떠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산 폭발이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이들은 오만, 이란, 파키스탄, 인도를 거쳐 말레이반도로 내려가서 미얀마, 태국, 말레이시아를 거쳐 인도네시아로 들어갔고, 여기서 배를 만들어 파푸아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진출했다. 이때가 약 5만년 전이었으며 해안선을 따라간 집단과 또 다른 집단은 북쪽으로 올라가 러시아 쪽으로 가서 유럽과 아시아로 다시 나뉘어 진출했다. 이들은 세련된 도구, 구멍 뚫린 조개껍데기, 몸에 맞춘 의복, 적토에 새긴 음각, 동물과 비슷하게 조형한 바위, 배를 이용한 바다 항해를 할 정도로 지능이 높아졌고, 조직적인 집단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인류는 '자기객관화' 즉 현대심리학용어로 '이차 순위 마음심리' 상태에 도달한다. '나'를 '나'로 인식하는 것이 일차 순위 마음심리라면, '나'를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동발달에서도 6살 정도가 되어야 가능하다. 자기를 객관화한다는 것은 자기성찰을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자기성찰과 언어의 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류가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면 자기성찰, 자기객관화가 이루어진 이후라는 것은 분명하다. 언어의 발달 역시 더디게 이루어지므로, 약 5만년 전부터 인류의 이성이 자기성찰을 시작했다면, 이 시기에 언어도 원시적 상태로 등장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자기 성찰은 '단지 아는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 단지 아는 것을 넘어서 자기가 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초기 호모사피엔스는 6살 아이 정도의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인류는 무생물이나 자연현상에 인격을 부여해 의인화하는 성향을 보여왔다. 초자연현상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고 생각했고, 동료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자연의 형태와 현상에는 저마다 생명이 있다고 믿는 토테미즘의 탄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아직 '신'은 인류의 뇌에서 출현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으며, 인류가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해야 가능한 영역이었다. 5. 현생 호모사피엔스: 시간 속의 자아 이제 우리 인류의 직접 조상인 현생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한다. 약 6만년 전, 아프리카에 존재한 그들은 동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파푸아뉴기니, 서쪽으로는 유럽까지 퍼져나갔다. 이들이 바로 직전의 인류와 다른 점은 돌로 만든 도구가 아닌, 동물의 뼈로 만든 도구를 썼다는 점이다. 동물의 뼈는 돌보다 훨씬 가공하기 어렵지만, 세밀하게 가공할 수 있었고, 작은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시기의 인류는 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낚시바늘, 밧줄, 그물, 바구니 등을 만들었고, 램프를 만들어 불을 켜 사용했다.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가 매우 발달했고, 무덤에 넣는 부장품의 종류와 형태도 세련되었으며 다양했다. 또한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예술활동을 꼽는다. 동굴의 채색벽화가 가장 유명하지만, 판화, 점토모형, 조각 등 여러 종류의 예술품이 발견되었다. 4만년-1만5천년 사이에 인류는 매우 다양한 형태의 예술행위를 기록했고, 이 시기에 인류는 '자전적 기억'을 갖게 된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 미래 행동을 예상, 예측, 계획하는 능력으로, 삶의 지평이 엄청나게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집단 사냥은 더욱 계획적으로 바뀌어 치밀한 전략으로 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고, 사냥의 성공 확률도 높아졌다. 인류는 더 많은 집단이 모여 큰 무리를 이루며 살기 시작했고, 그 바탕에는 성공 확률이 높은 사냥 덕분에 먹거리가 충분히 확보된 것과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다음에 더 나은 방식으로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자기 성찰과 자전적 기억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이해하게 되면서, 가장 구체적으로 맞닥뜨린 경험은 '죽음'이었다. 죽음은 그동안 인류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으며,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의 인간도 그렇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은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보편적이며 피할 수 없는 불안'이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현생 인류는 몹시 당혹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움직이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한다. 그 전에는 방치한 주검이 동물에게 먹혔지만, 자기와 타인을 구분하면서 동료의 죽음을 방치하지 않고 매장을 했으며,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죽음과 꿈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현생 인류는 꿈에 의미를 부여할 능력이 생겼다. 이미 훨씬 전의 인류도 꿈을 꾸었겠지만, 꿈을 인지하고 해석할 능력이 없었던데 반해, 현생 인류는 자각과 성찰, 자전적 기억을 통해 꿈을 해석할 수 있게 되고, 이는 곧 다른 사람의 죽음과 꿈을 연결해 해석하는 방식으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꿈은 죽은 사람과 만나는 통로였으며, 이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영혼이 존재하고, 영혼의 존재는 곧 신의 등장을 예고한다. 2부 신의 출현 6. 조상과 농경: 영적인 자아 약 1만2천년 전부터 인류는 새로운 도약을 한다. 수렵채집에서 정착생활과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농사를 짓는 건 필연적으로 한 곳에 모여 정착생활을 했다는 증거다. 이 무렵에는 이미 대규모 주거집단이 형성되었고, 늑대를 길들여 개로 키우기 시작했고, 다른 동물도 가축화해서 기르고 있었다. 주거가 안정되고, 집단 거주시설이 늘어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때 가장 필요한 건 서로간의 의사소통이었다. 이때 이미 기초적인 언어 사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원시적 종교형태인 토템이 등장했다. 종교의 시작은 조상숭배일 것으로 추정하며, 죽음의 공포를 넘어, 죽은 조상의 영혼이 자신을 지켜준다는 믿음을 간직하기 시작했고, 그런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주술과 종교행위가 시작되었다. 조상숭배는 이동 생활을 할 때는 무덤을 만들거나 죽음을 기억할 만한 동기가 부족해서 불가능한 행위였지만, 정착생활을 하고, 농사를 짓고, 농업생산성이 높아져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된 인류가 꿈과 결합한 죽은 선조의 영혼을 받들기 시작하고, 죽은 자를 매장하면서 많은 부장품을 넣고, 집단의 우두머리가 죽으면 특별히 돌을 높여(고인돌) 쌓아 추모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다 마침내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기 시작한다. 약 8천년 전, 원래 인간이었던 집단의 존경받는 사람이 죽자 사람들은 그의 훌륭한 점을 기리기 시작한다. 농사를 잘 짓거나, 사냥을 잘 하는 그 선조는 후세의 존경을 받으며 서서히 신격화한다. 자연현상도 마찬가지로 비나 바람, 천둥, 태풍 등도 인격화를 거쳐 신격화한다. 조상의 혼령과 신은 초기에 정확히 구분되지 않았고, 초자연현상과 신의 결합도 미미한 정도였다. 원시부족이 혼령을 구분하는 방식은 다양했으며, 좋은 혼령과 나쁜 혼령을 구분했고, 좋은 혼령은 조상의 혼령이며, 나쁜 혼령은 주로 불길한 자연현상에 대입했다. 잉여 농산물이 발생하면서, 집단 내부에서는 위계질서가 발생했고, 이것이 계급의 시작인 것은 마르크스가 밝혔다. 이때 가장 높은 계급은 제사장으로, 조상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었다. 제사장은 잉여 농산물을 공물로 받아 생활하므로 노동을 하지 않는 최초의 인류였고, 조상신들 가운데서도 위계를 만들어 가장 높은 조상의 혼령이 곧 '신'이 되었다. 7. 정부와 신들: 유신론적 자아 현재 과학이 밝힌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신'의 존재는 6천5백년 전 메소포타미아에 존재한 물의 신 '엔키'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해 기록한 최초의 신이기도 하다.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최초의 문명이 탄생한 곳으로 알려졌고, 한 지역에 최대 3만5천 명이 거주할 만큼 큰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이 지역은 물이 가장 귀해서 최초의 신이 '물의 신'인 것은 필연적이다. 이 시기에는 '물의 신' 외에도 '풍요의 신', '죽음의 신'처럼 다양한 신이 존재했고 이들을 위한 사당이 있었다. 이때는 이미 농업을 비롯해 다양한 직업이 나타났고, 경제 활동이 활발했다.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집단의 우두머리(왕)는 권력과 재물을 독차지했고, 이들은 거대한 신전을 지어 조상을 신처럼 숭배했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신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이들이 만든 신들은 그리스 신의 모델이었으며, 온전히 인격체를 가진 '인격신'이었다. 신을 모시는 사원과 제사장은 권위를 가졌고, 이들은 넓은 땅을 소유해 그곳에서 많은 잉여 농산물을 거뒀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원 주변에 사는 농민들이었으며, 이들은 사원에 종속되었다. 메소포타미아처럼 스스로 문명을 일으킨 곳이 바로 이집트와 중국 등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거의 동시에 문명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충분한 고고학적 자료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다. 이집트에서도 수 많은 신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농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른 지역도 농업이 문명의 시작이었으므로, 신의 발명은 농사와 관련이 관련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농사와 함께 인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죽음을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죽음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기에 가장 신비하고 두려운 현상이었다. 이것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매개자가 필요했고, 죽음을 초월하는 존재 즉 신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부족국가에서 도시국가로, 다시 더 큰 규모의 집단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으로 사라진 집단과 승리한 집단에서는 신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지거나 더 위대해졌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고, 거대한 도시가 발생하며, 지배자들은 예전보다 훨씬 강력한 신의 존재가 필요했다. 권력자는 신의 대리인으로 행세하며, 권력을 휘두르고, 신의 이름으로 집단을 지배했다. 2천8백년 전에서 2천2백년 사이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종교가 탄생했다. 유교, 힌두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가 나왔고, 유대교는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나뉜다. 종교가 발달하는 원인은 다섯 가지 측면이 있는데, 1) 죽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2) 심리적 지원, 물리적 보호, 사회복지, 일자리, 경제적 향상의 기회를 제공하며, 3) 정치적 지배와 연계하고, 4) 추종자들의 경제, 정치, 군사적 성공에 의해 결정되며, 5) 오래된 종교의 신들과 신학을 차용해서 일어난다. 유대-기독교의 '인류 창조', '대홍수', '바벨탑' 등은 메소포타미아 종교에서 가져 온 것이다. 또한 '유일신'과 '동정녀'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차용한 것이다. 8. 신의 기원에 대한 다른 이론들 찰스 다윈은 '만물에 스며든 영적 힘에 대한 믿음은 보편적인 것으로 보이며, 영적 힘에 대한 믿음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쉽게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추론하기까지 인류의 추론 능력에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약 1만년 전이고, 이후 인류는 급격하게 신을 만들었다. 농업과 정착생활로 삶이 안정되면서 조상숭배가 발생하고, 인류의 인지 능력과 자각의 발달로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되자,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조상의 영혼을 신격화했다. 또한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신도 늘어나고, 전쟁을 통해 신의 존재는 사라지거나 통합되거나 더 큰 힘을 갖게 되었다. 뇌 과학에서 밝힌 이런 일련의 진화 과정 이외에도 몇 가지 이론들이 있는데, 사회적 이론으로 에밀 뒤르켐은 신과 종교의 기원이 사회구조와 제도에 있다고 했다. '친사회적 행동 이론'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선한 행동을 한다는 것으로, 마음이론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심리적 이론과 위안 이론'은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가 제시했다. 심리적 위안을 얻고자 하는 욕구에서 신과 종교가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패턴 추구 이론'은 지적, 인지적 위안을 준다. 종교는 체계적인 의인화, 즉 인간이 아닌 사물이나 사건에 인간적 특징을 부여하는 것으로, 의인화는 종교적 경험의 핵심이라는 주장이다. '신경학적 이론'은 종교나 신을 믿는 것이 뇌의 특정한 활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뇌의 특정부위를 자극하면 유체 이탈 경험을 비롯해 다양한 비현실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증명되었다. '유전적 이론'은 신과 종교를 믿는 것이 유전적 요인에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이론은 너무 쉽게 반박당했다. 신은 진화의 산물일까, 부산물일까를 놓고 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인류의 진화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적응하는 것이 생존할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반면 신은 인류 진화와 뇌 진화의 부산물이라는 주장에서, 신이 자전적 기억 획득의 부산물이며, 신의 출현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종교가 뒤따랐다는 입장이다. 어떤 이론이든,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 인류가 믿는 신은 고작해야 지구 전체도 아니고, 자기 부족의 삶에만 있었다는 것을 보면, '신'은 분명 인류가 창조한 것이 맞다. 또한 어떤 신이든 '인격신'인 것을 보면, 인류가 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류가 자신을 닮은 신을 만든 것도 분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 신은 뇌의 발달을 포함한 인류의 진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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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3-01-09
  • 음식의 제국
    음식의 제국 이 책은 음식으로 살펴보는 세계 문화, 역사, 문명, 식품의 역사다. 말하자면, 세계 문명사 전반을 다루고 있는 것과 같다. '음식의 제국'이라는 제목 때문에 기대를 한 책이지만, 결과는 좀 실망스럽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은, 내가 이 책의 의도와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저자들이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내가 이 책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맞겠지만, 그럼에도 내 수준에서 드는 의문은 이렇다. 저자들은 왜 '음식' 또는 '식품'을 '주체'로 상정했을까? 이 의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어나가기가 매우 불편했다. 이 책이 다루는 역사의 범위는 수메르 제국(기원전 7천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약 1만년의 역사다. 그리고 중국,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대륙, 중동, 아시아를 아우르는 지구 전체의 역사를 크거나 작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미시사'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거시사'와 함께 지역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내용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않고 있다. '음식' 또는 '식품'을 주체로 상정한 것은 내가 보기에는 명백한 오류라는 생각이다. 이유는, 그로 인해 역사를 '결과론'으로 시작해 '결과론'으로 끝내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이런 함정을 모르지 않을텐데, 왜 역사를 '결과론'으로 몰고 가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저자들의 오류를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저자들은 중세 유럽에서 농업의 혁명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했다. 수도승들이 농업에 종사하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품종을 만들면서 잉여 농산물이 생겨나고, 그것은 곧 수도원 주위의 농토를 매입하고, 농부들을 소작농으로 만들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역사의 극히 단편만을 묘사한 것이다. 중세는 갑자기 생겨난 시대도 아니고, 이미 그 이전 시기부터 쌓여 온 역사의 한 과정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중세의 농업 혁명-신기술의 발달-을 수도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절대 왕권과 종교의 위세에 눌려 살면서도 농업생산성을 키워온 그 시대의 농부들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이 당연하고 기본적인 순서라고 생각한다. '음식' 또는 '식품'을 역사의 주체로 상정한 순간, 거기에는 '인간'이 배제되고 소외된다. 음식을 만들고, 식품을 가공하고, 농어업, 축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농부, 어부의 노고는 사라지고 만다. 이 책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노동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또 하나의 의문은 '무계급성'이다. 적어도 역사를 다루는 저자라면, 인간의 역사는 곧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마르크스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계급투쟁 이론'이나 '사적 유물론' 또는 '변증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유사 이래의 역사가 계급으로 분화하고, 계급 사이의 갈등이 사회와 세계를 바꿔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음식이나 식품을 다루는 문제 역시 지극히 당연하게도 '계급성'은 어느 한 순간도 배제할 수 없는 핵심이다. 이 책에서는 유럽의 제국들이 식민지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폭력은 말하지 않고, 중세나 현대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 또는 자본가와 농민의 갈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을 '식량폭동'이라고 격하한다. 식량이나 식품에 관한 생산성의 증대는 많은 부분 착취와 관련되어 있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노예 노동이나 농노를 통한 생산성 증대는 말할 것도 없이 계급적 폭력의 결과였다. 이런 내용들이 이 책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전자 조작 식품(GMO)에 관한 것이다. 저자들이 의도적으로 빼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다루기에는 이 책의 내용이 적당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음식의 제국'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당연히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 다뤘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가장 실망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는데, 유전자 조작 식품을 다루지 않음으로 해서, 이 책은 반쪽짜리 책에 불과하고, 명성이 있다면, 스스로 먹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 다루지 않으려면, 이런 책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용기도 없이 음식으로 보는 세계문명사를 다루겠다고 나선 것이라면 만용이거나 사기에 불과하다. 이 책은 나름대로 배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책에는 없는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 아는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이 책만이 갖는 훌륭한 장점을 추려내기는 어렵다. 게다가 책의 구성이나 집필 내용이 너무 산만하고 복잡하게 되어 있어,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음에도 책을 읽어나가기가 어렵다. 무려 24쪽에 달하는 미주가 있지만, 그 많은 참고 문헌이 있음에도 내용은 뛰어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식품 제국'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저자들이 말하는 '식품 제국'의 실체는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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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9
  • 골든 아워 - 의사 이국종
    골든 아워 - 의사 이국종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닦느라 자주 책을 내려놔야 했다. 내가 사는 나라에, 이국종이라는 의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세상은 충분히 살아갈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국종은 이 두꺼운 두 권의 책에서 거의 웃지 않는다. 그가 방송에서 보이는 그 날카로우면서도 서늘한 무표정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고통스러운 의사의 삶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게 된 것도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이국종은 아덴만의 영웅이고, 판문점을 넘어 귀순한 북한 병사의 벌집이 된 몸을 살려 놓은 중증외과의사다.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국종을 이용해먹고 버렸으며, 관료들은 펜대를 굴리며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겼고, 그가 속한 병원은 그를 적자를 내는 쓸모없는 존재로 폄하하고 모욕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나갔다. 그의 본업인 외과의사로서, 목숨이 경각에 놓인 중증 환자들을 헬리콥터로 이송하며, 살을 가르고, 뼈를 자르고, 내장을 잘라 이으며 누군가의 가족인 환자의 목숨을 살려 놓았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삶의 끈을 놓고 세상을 떠나는 장면을 보면서, 죽은 사람과 그의 가족들의 슬픔과 아픔을 바라보고, 경험하면서 그의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졌다. 그는 헬리콥터를 타고 환자를 이송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몸이 망가져 갔고, 왼쪽 눈은 실명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몸이 무너져가고 있어도 그는 외과의사로서 환자를 살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한국의료 시스템에 중증외상센터를 구축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의 출세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다. 온갖 핍박과 수모를 감수하며 그가 선진국의 중증외상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것은 극심한 외상을 입는 사람들이 대부분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서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을 살릴수록 병원에 적자가 커지는 구조여서 이국종의 팀은 병원에서 미운오리새끼가 되고 말았다. 그는 너무나 오래, 너무 많이 분노하고, 체념했으며, 절망했다. 병원과 정부의 지원이 미약한 상황에서 이국종은 자신이 선진국에서 배운, 올바른 의료 체계를 한국에 도입하려는 의지가 나약해지고, 포기하게 될 것을 자주 생각한다. 의사도 인간이고 극한의 상황에 몰린 사람의 인내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 책은 의사 이국종이 겪은 16년의 기록이다. 그는 외과의사로서 늘 수술실에서 집도를 하는 주 업무를 하면서, 중증외과센터를 건립하려 추진하고 있고, 자신이 속한 병원에서는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다. 그와 함께 일하는 팀원들과 소방대원, 헬기 조종사 등 인명구조의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우리 사회의 영웅들 모습이 동시에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술실에 들어오는 수많은 환자들이 의사, 간호사들의 손길을 거쳐 생명을 되찾거나, 영원히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생생한 한국 사회의 현실이자 민낯이며 서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기도 했다. 이국종은 중증외상 환자가 발생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가 세월호 침몰 당시, 헬리콥터를 타고 세월호 바로 위에서 비행하던 장면에서 다시 울컥하며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금도 생각하기조차 힘든 4월 16일의 그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본 이국종은 수백명의 생명이 생매장 당하는 사회를 보면서, 의사로서, 한 사람으로 이 사회에 희망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가 끝가지 견디는 힘은 그와 함께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국종과 함께 하는 동료 의사, 간호사들, 소방관들, 비행사들 그리고 정직하고 유능한 공무원들이 있어 그가 견디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끝부분에 그들의 이름과 경력을 밝혀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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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3-01-09
  • 파인더스 키퍼스
    파인더스 키퍼스 스티븐 킹은 이 소설을 읽을 독자에게 '미저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도 좋아할 거라고 말했다. '미저리'는 한 작가와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팬의 이야기다. 하지만 '미저리'와는 다르게 매우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시간과 공간이 40년을 뛰어넘으며 이어진다. '미저리'처럼 숨막히는 스릴은 없지만, 이야기의 결말로 숨가쁘게 달려가는 것은 비슷하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다 읽을 때까지 책을 놓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다. 그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한때 유명했던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다. 그는 세 편의 시리즈 소설을 출판했고, 성공했으며, 독자의 눈에서 사라졌다. 발표하지 않은 작가의 작품을 훔치러 들어간 세 명의 도둑은 돈과 미발표 원고를 훔치고, 그 가운데 한 명이 다른 동료 두 명을 죽여 사건을 은폐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갇힌다. 40년의 시간이 흘러 가난한 한 소년은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이혼의 위기에 놓인 부모의 싸움을 듣기 싫어 집 뒤쪽 풀숲으로 우울한 마음을 달래러 갔다가 트렁크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2만 달러의 현금과 백 권이 넘는 노트가 들어 있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유명한 작품을 쓴 작가의 미발표 원고가. 소년과 그의 부모는 위기에서 살아남았고, 종신형을 받은 범인은 가석방이 되어-60대의 늙은이가 되어-그 트렁크를 찾기 위해 찾아온다. 이 소설은 '호지스' 시리즈의 하나로, 직전에 나온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주인공 '호지스'가 여기도 등장한다. 퇴직 경찰 호지스는 사실 이 소설에서 중심 인물은 아니다. 그는 소설의 뒷부분에 등장하고, 주인공 피트의 활약을 뒤에서 도와주는 정도에 그친다. 전작 '미스터 메르세데스'는 출판사 홍보가 너무 과해서 오히려 독자에게 실망을 준 면이 없지 않다. 반면 이 소설은 '미스터 메르세데스'보다 훨씬 뛰어나고 훌륭하다. 이 소설은 '미저리'에 이어 작가와 독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 어떤 관계로 남는 것이 좋으냐를 두고 벌이는 일종의 게임같은 내용이다. 작가는 자기가 쓴 작품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독자가 많기를 당연히 바란다. 하지만 독자는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에, 작가의 작품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 수준과 정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 작가는 미치광이 독자를 만날 수 있다. '미저리'가 그렇다. 이 소설에서는 미치광이를 넘어서 살인마 독자를 만난 것이다. 결국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독자가 마음대로 판단한 소설의 내용 때문에 살해당한다. 소설을 쓰고, 성공하지만 살해당하는 작가라면, 그런 작가와 독자는 악연이다. 스티븐 킹은 '리바이벌'에서 주인공이 기타를 연주하는 인물로 등장시켰고, 이 소설에서는 '작가'와 작품을 등장시켰다. 이것은 작가인 스티븐 킹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분야여서 글을 만들어 나가기 쉽다는 배경이 있다. 게다가 그의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지역은 그가 사는 메인주일 경우가 많다. 물론 캘리포니아처럼 남쪽 끝 지역도 나오지만, 그는 겨울이 일찍 찾아오고,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자연의 숲으로 둘러싸인 메인주를 소설의 배경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주인공은 고등학생 피터, 작가를 죽였지만 성폭행 혐의로 종신형을 받은 밸러미는 모두 작가 러스스타인의 작품을 지독하게 좋아한다. 밸러미는 결국 작가를 죽였고, 피터는 밸러미가 감춘 트렁크를 발견해 가족을 살린다. 마지막 장면도 퍽 상징적이다. 독자에게 작품은 어떤 의미일까. 목숨을 던져 갖고 싶을 정도라면,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숨마져도 해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미치광이일까. 그런 면에서 '욕망'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는 소설이기도 하다. 우리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어떤 기회가 되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탐욕스러운 웃음을 웃으며 꿈틀거릴 욕망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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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3-01-09
  • 리바이벌-스티븐 킹
    리바이벌-스티븐 킹 스티븐 킹의 소설은 서사를 축적하는 힘이 대단하다. 이야기의 겹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세밀하게 그린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던가. 등장인물들은 마치 실존하는 사람들처럼 살아 있다. 그들은 개성과 독특한 개성, 취미를 가졌으며 어린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동네 사람들을 거의 다 알고 지내며, 계절이 바뀌고, 무언가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너무도 평온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충격적 사건이 발생하고, 사람들의 인생은 달라진다. 누군가에게 생길 수 있는 일이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미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여섯 살, 제이미가 기억하는 찰스 목사의 가족 이야기가 그렇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제이미지만, 실제 주인공은 찰스 목사다. 제이미는 제이미대로의 삶을 살아왔고, 그는 운명적으로 찰스 목사를 만나도록 되어 있었을 뿐이다. 제이미 가족에게 일어난 일과 찰스 목사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커다란 비극이지만, 비극의 사건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눈은 냉정하리만치 담담하다. 그 자신,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돌아왔기 때문이리라. 60년대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주인공이 음악을 하면서, 70년대, 80년대 미국 락음악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티븐 킹 자신도 그룹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뮤지션이어서 소설의 주인공 제이미의 모습에 작가의 모습이 투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실질 주인공인 찰스 목사는 60년대 초반, 제이미 가족이 다니는 시골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하는데, 그는 삼십대 중반의 잘 생기고 성품이 좋은 목사였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와 이제 두 살된 아들이 있는데, 찰스 목사에게는 신과 동격인 가족이었다. 그만큼 사랑하는 존재였다. 찰스 목사는 목회자이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가 있었는데, 그건 전기를 연구하는 것이다. 전기를 연구하는 목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찰스 목사는 전기를 지독히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회와 가족 만큼이나 전기를 연구하는 일에 푹 빠져 살았다. 그리고 전기로 아픈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비극이 발생한 것은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찰스 목사의 아내와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한다. 충격을 받은 찰스 목사는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있다해도 인간의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선언하고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시간이 흘러 제이미의 가족들 가운데 제이미의 엄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형과 누나도 자신의 삶을 찾아 집을 떠나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제이미는 밴드에서 기타연주자로 활동하다 약물중독자가 되어 거리를 떠돌고, 몇십 년만에 우연히 찰스 목사를 다시 만난다. 찰스 목사는 이제 더 이상 목사가 아니었고,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마술쇼를 보여주는 마술사였다가, 시간이 지나서는 부흥 전도사로 등장해 기적의 치료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이 소설에서 '조이랜드'가 등장하는데, 이 이름은 스티븐 킹의 전작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제이미는 찰스 목사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찰스 목사가 궁극적으로 무슨 일을 하려는지 의문을 갖고 그가 부를 때마다 달려간다. 찰스 목사 역시 제이미가 자신의 연구에 증인이 되기를 바란다. 찰스 목사는 전기충격을 통해 몸과 정신이 아픈 사람을 수없이 고치는데, 그렇게 병이 나은 사람들 가운데 소수는 심각한 후유증을 겪으며 사고를 치고, 자살한다. 찰스 목사가 발견한 전기의 위대한 힘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살아 있는 사람도 전기충격을 통해 이승과 다른 세계를 발견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죽은 아내와 아이가 저승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이 소설은 호러나 스릴러를 본격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과 찰스 목사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이 소설을 좀 더 확대하면, 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찰스 목사는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신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러면서 찰스 목사는 그 자신이 신이 되려한다. 찰스 목사가 신의 현현이라면, 신에 의해 치료받고 나은 인간들 가운데 일부는 타락하게 되고, 타락한 인간은 지옥으로 간다. 제이미는 그것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것이다. 전기의 힘을 다루는 것(프랑켄슈타인)이며, 지옥의 문이 열린다(러브 크래프트)는 내용은 이미 다른 작가들이 다룬 내용인데, 스티븐 킹을 이것에 대한 오마주로 이 소설을 쓴 것으로 보인다. 순전히 소설을 읽는 재미만으로도 스티븐 킹의 소설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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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3-01-09
  • 제0호
    제0호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광고가 조금은 선정적이다. 이 소설은 나중에 쓰긴 했어도 이미 오래 전-[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발표한 이후-에 이미 소재를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출판사나 서점의 광고는 한결같이 '언론과 권력에 대한 풍자'라고 말하는데,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탈리아의 언론을 장악하고 총리가 되어 나라를 망가뜨린 베를루스코니와 그가 운영한 지저분하고 타락한 언론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움베르토 에코가 즐겨 사용하는 역사적 음모론이다. 소설의 시작도 그의 예전 작품들-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등-과 같은 구조를 보인다. 즉, 생존한 주인공이 위험에 놓인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사건을 회상,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문제를 해결하거나, 비극적 상황을 맞이하는 것이다. 결코 발행하지 않을 신문을 만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새로운 신문의 편집방향을 두고 갑론을박한다. 이들이 참고하는 기존 언론의 모습은 돈과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부패한 언론의 모습이다. 신문은 너무 고급스러워도 안 되고, 너무 천박해도 안 되고, 신문발행인이 고소당할 기사를 취급해서도 안 되고, 기사에 언급된 개인이나 단체가 공격할 때를 대비해 빠져나갈 뒷구멍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자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찾아 길거리로 나서고, 무언가 새롭고, 사회적 이목을 띌 수 있는 기사소재를 찾으러 다니는데, 이때 한 기자가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하고 주인공에게만 자신이 취재하고 있는 내용을 알린다. 그 내용은 무솔리니의 생존설과 관련된 음모론으로, 이 이야기는 움베르토 에코의 이 소설에서 매우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위키백과'에도 무솔리니 생존설 음모론이 떠 있는 바, 극히 일부의 독자는 움베르토 에코가 '위키백과'에서 소재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는 말이 있다. 물론 결코 그런 일은 없었지만, 무솔리니 생존설은 히틀러 생존설과 함께 거대한 음모론을 만들어냈다. 무솔리니는 1945년 4월 28일에 처형된 것이 아니라, 생존해서 아르헨티나로 갔으며 그곳에서 잘 살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이탈리아에서 70년대 발생한 쿠데카를 연결해 전후 이탈리아 공산당과 파시스트의 협력, 이탈리아 교황청과 아르헨티나 대교구가 무솔리니의 도피를 도왔다는 설, 여기에 유럽과 미국 정보국의 암약, 교황청 뒤에 숨어 있는 중세 비밀조직의 등장 등 온갖 음모설이 등장한다. 소설의 재미로 보면, 신문을 창간하겠다는 이야기보다는 무솔리니 생존설이 훨씬 재미있다. 두 이야기가 두 줄기로 흘러가고 있다가 마지막에 기자의 죽음으로 이야기는 하나로 모이지만,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를 생각하고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분명 실망할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면, 아주 천천히, 움베르토 에코가 설명하는 이 길고 긴 이야기를 곱씹으며 따라가는 독자라면 읽는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해서 '최후의 걸작'이라거나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소설도 움베르토 에코의 긴 농담에 불과하다. 그는 '장미의 이름'을 쓸 때부터, 그가 가지고 있는 박학으로 즐거운 농담을 한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열렬한 팬인 나도, 그의 농담에 즐거웠고, 행복했으며, 박학의 끝부분을 맛보았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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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3-01-09
  • 우리몸 오류보고서
    우리몸 오류보고서 과학책을 읽는 건 언제나 재미있고 즐겁다. 과학분야는 수학, 의학, 물리학, 천문학, 지구과학, 화학, 공학, 생물학 등 매우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지만, 이들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서로 다르지만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 모든 과학 분야를 하나로 아우르는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과학은 물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말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추상적인 세계를 다루는 것이 수학이다. 추상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수학도 궁극에서는 과학이 밝힌 엄밀한 사실과 일치하므로, 수학과 과학은 분리할 수 없다. 이제는 과학과 역사가 융합되어 '빅히스토리'가 하나의 뚜렷한 분야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빅뱅과 함께 우주의 탄생, 우주의 진화, 우리 은하계의 형성, 태양계의 탄생 그리고 태양계에 속한 지구의 생성, 지구의 역사, 지구에서 발생한 진화와 인류의 탄생,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체의 진화와 인류의 진화를 다루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예전이라면 서로 다른 교과서나 책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따로 배웠겠지만, 이제는 하나의 통일된 과정과 일관된 이론-진화론-을 바탕으로 배우고 있다. 과학책-과학지식-을 읽는 즐거움은, 인류가 지금까지 배우고, 체험하고, 익혀온 지식과 지성이 과학 지식으로 집적,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의 훌륭한 자산이며, 인류가 고도로 진화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류의 문제로 돌아오면, 인류의 진화가 매우 빠른 시간에-6백만년밖에 안 된다. 물론 생명의 진화는 약 36억년의 시간이 축적된 것이므로 결코 짧다고 하기는 어렵지만-이루어졌으므로 필연으로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유전자는 다양한 실패와 실수를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인류(정확히는 '인간종')가 진화하면서 발생한 유전자의 진화 과정에서 실패와 실수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인류의 진화는 또한 생명의 진화 과정이므로 지구의 진화와 지구에서 생명의 탄생, 진화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현생 인간종에서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면서 생물학적 조상을 찾아가는 과정을 가장 잘 다루고 있는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조상이야기]다. 즉,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을 통해 우리 인간이 너무도 당연하게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그것도 우연에 의한,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진화를 통해 지금의 우리가 있고, 진화-유전자의 활동-는 완전하지 않으므로 지금 현생 인간은 과거 진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필자 네이선 렌츠는 우리 몸을 들여다보면서, 진화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진화 과정에서 완전하지 못한 부분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차례는 아래와 같다. 머리말:자연의 실수들을 보라 1. 쓸데없는 뼈를 비롯한 해부학적 오류 2. 부실한 식사 3. 유전체의 정크 DNA 4. 호모 스테릴리스(Homo sterilis, 불임의 인간) 5. 신이 의사를 만든 이유 6. 뇌의 오류 후기:인류의 미래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도 이 책에는 있지만, 그보다 훨씬 자세하고 재미있다. 과학자이면서 전공자들이나 알고 있을 고급한 정보를 필자는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우리몸의 오류'라는 것은 진화를 전제한다. 진화가 없다면 모든 생물의 현재 상태는 완벽해야 한다. 즉, 생물체가 창조되었다면 처음부터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불완전하게 만들고, 나중에 진화한다는 가정이나 설명은 '오컴의 면도날 이론'에 어긋난다) 인간의 육체가 불완전한 상태라는 것은 인간(인류)이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도 계속 진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 지점, 인간의 육체가 불완전한 상태라는 것과 그 불완전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짚어가면서 과학적, 논리적, 진화적 설명을 이해하기 쉽게 곁들이고 있다. 이 책은 과학 지식과 상식으로도 재미있게 읽히지만, 매우 중요한 의학 지식도 들어 있어서, 단지 재미로만 읽는 것 외에 얻는 것이 많다. 2장 '부실한 식사'를 보면, 비타민C로 대표되는 필요한 원소들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의 육체에서 비타민C를 생성하지 못하는 것이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유전자의 선택이라는 것과 과학문명이 발달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수만년, 수십만년 전의 인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그렇다. 우리의 육체는 인류 문명의 진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문명과 기술, 과학은 매우 빠르게 진화하고 있지만,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구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먹는 음식들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질병-비만부터 암까지-의 원인이 음식에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몸은 기회가 되면 지방을 축적하도록 진화해 왔다. 구석기시대에는 음식이 충분하지 않았고 특히 육식을 거의 할 수 없었기에, 지방의 축적은 매우 중요한 진화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지방과 당류의 섭취가 매우 풍족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서-아프리카나 아시아 일부의 굶주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여기서는 잠깐 뒤로 미루자-과거의 유전자에 의해 지방이 축적되는 것을 막을 수 없어 비만이 쉽게 발생하는 것이다. 6장 '뇌의 오류'는 인간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패턴 가운데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오류들이 많은데, 그것 역시 인류가 생존을 위해 발생한 유전자의 진화다. 이 책을 포함해 뇌과학과 인지과학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인간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이것도 이 책에서 말하는 '확증편향'에 속한다) 지구에는 다양한 인종이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 사이에는 피부색 외에 다른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바로 이 피부색을 갖고 차별을 해왔다. 내가 분류하는 두 부류의 인간은 뇌과학에서 설명하는 '확증편향'과도 관련이 있는데, 흔히 '보수'와 '진보'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 물론 대규모 집단에 속한 사람을 두 가지로만 분류하는 것은 옳지 않고, 정확하지 않지만,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기회주의자'가 있겠다. 즉, 사회에는 진화를 믿고, 공동체의 선함, 평화, 우애를 지키고 유지하려는 집단이 있고, 반대로 진화를 믿지 않고, 분열, 폭력을 일으키려는 집단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갈팡질팡하는 기회주의집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분류는 개인의 지연, 학연, 혈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개인의 재산, 족보, 혈통과도 전혀 관련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이 두 분류(세 분류)는 사회적 진화를 설명할 때 인간의 뇌과학(뇌진화)와 연결해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후기'에 있었다. 필자는 인간의 진화를 말하면서 우주에서 인류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 과학이 밝힌 바로, 지구처럼 생명체가 존재하고, 고등한 생물이 진화하는 행성이 이론적으로는 천문학적으로 많고,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 안에서도 수천 개의 행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공적인 우주 전파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외계의 행성에서 진화한 고등생물이 이미 모두 멸종했거나, 아직 진화하지 못한 상태이며, 현재 인류도 머지않아 멸종하므로 앞으로도 외계의 고등생명체와 교류할 확률은 매우 낮을 거라는 설명이다. 이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충격이었다. 인류는 머지않아 멸종한다. 내부적으로 붕괴하거나(핵전쟁, 기후문제, 환경문제 등) 우주에서 날아오는 행성과 충돌할 가능성 등으로 인류의 멸종은 예고된 상태다. 그렇다면 태양계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 다른 행성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거나, 그들이 우리를 찾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진화가 서로 다르게 발생하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학 지식이 없는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유익한 내용이고, 진화의 과정과 관점, 진화의 역사와 의미를 공감할 수 있고, 진화에 관한 올바른 관점을 유지할 수 있다.
    • 문화
    • 독서
    2023-01-09
  •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책]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북유럽의 정서는 '요 네스뵈'의 장편소설과 같다고 생각하는 내게, 스웨덴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은 낯설다. 그의 소설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해학적이며 해피엔딩이다. 요 네스뵈와 요나스 요나손의 거리는 마치 에베레스트와 동네 뒷산처럼 멀다. 높은 산을 오를 때는 폭풍우와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지만,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쁨은 남다르다. 동네 뒷산은 언제나 편하게 오를 수 있지만, 몇 번 오르면 지겨워진다. 그런 차이가 이들 사이에 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이 질리지 않는 이유는, 작가의 상상력을 독자가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오를 수 없는 산을 바라보는 것은 늘 경외감을 갖게 한다. 요 네스뵈도 비슷하다. 하지만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은 이미 두 권-'창문 너머...'와 이 책-을 읽었을 뿐인데 벌써 익숙해진다. 이와 매우 유사한 감정을 갖게 된 작가가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다. 그러고 보니 이름과 성이 같은 작가는 비슷한 점이 있나 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경우, 한국에 번역된 그의 첫번째 작품 '개미'를 읽고 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 나온 소설을 읽고는 중간에 포기하고 이후 쳐다보지도 않는다. 식상하기 때문이다. 너무 뻔한 주제와 소재로, 뻔한 결말을 도출하는 이야기에 독자들-특히 한국독자들-이 열광한다는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그 정도 작품에 열광하는 독자라면 그 수준이 어떨지 알만했다. 출판사의 마케팅이 뛰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명작도, 걸작도, 꼭 읽어야 할 올해의 소설도, 기억에 남을 소설도 아니다. 그냥 시간이 남는 사람이 가볍게 읽어치울 정도의 가벼운 소설이다. 대단한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얻을 만한 내용도 없다. 독자들의 수준이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두려워하고, 미하일 숄로호프의 대하소설을 찾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또스또예프스키의 소설들을 제목만 들어봤기 때문에 그나마 소설이라고 읽는 것이 이런 소설들-영화로 널리 알려진 작가의 작품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퍽 불행한 일이다. 카프카의 소설을 읽고, 이상의 시를 읽고, 강경애의 소설을 읽고, 그보다 더 많이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이 오히려 재미있는 소설을 더 많이 발견할 확률이 높다. 요나스 요나손보다 훨씬 풍자와 해학이 뛰어난 작가가 바로 김유정이다. 이렇게 말을 해도, 어떻든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읽지 않는 사람보다는 훨씬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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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2023-01-09
  • 의식의 흐름을 따라
    의식의 흐름을 따라 1 오늘은 하루 온종일 쉰다. 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쉰다. '쉰다'는 '쉬다'의 현재형으로, 무언가 하지 않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쉬는 날'은 일하지 않는 날을 뜻하며, '쉬는 곳'은 편하게 있는 장소를 말한다. '쉴 틈이 없다'는 매우 바빠서 한가한 틈이 없다는 말이고, '편히 쉬세요'는 몸으로 움직이는 행동(일, 노동) 뿐아니라 복잡한 마음까지도 내려놓고 기운을 부드럽게 다스리라는 뜻이다. 반면, '밥이 쉰다', '음식이 쉰다'처럼 음식이 부패하는 과정의 단계를 뜻하기도 하며, 소리를 많이 지르거나,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거칠거나 잘 나오지 않는 걸 '목이 쉬다'고 한다. 무엇보다, '쉬다'는 '숨을 쉬다'로 완결한다. 모든 생명은 숨을 쉬는 것으로 생명 활동을 이어가며, 숨을 쉬지 않게 되는 순간부터 생명체의 정체성을 잃는다. 나도 지금 숨을 쉬고 있어,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생각하며, 이렇게 글을 쓴다. 숨을 쉬는 건 살아가는 근원의 활동이지만, 한편 음식이 상하는 과정처럼, 생명 활동의 노화가 진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쉬다'의 활용이 생명 활동과 음식물이 상하는 과정을 함께 보고 있다는 점에서 선조의 지혜가 놀랍다. 2 페이스북에도, 대형 커뮤니티에도 온통 보기 싫은 내용만 올라온다. 크게 두 가지다. 굥, 콜걸, 그 일당이 저지르는 온갖 악다구니와 파렴치와 야비와 뻔뻔함이 그것이고, 민주당 내부에서 벌어지는 비틀린 페미니스트의 갑질과 개혁을 비웃고 자기 개인의 출세와 영리만을 추구하는 양아치들이 벌이는 극도의 혐오스러운 행위가 그것이다. 그들의 욕망과 욕구와 탐욕과 이기와 질투와 비루함의 결과로 조국 전 장관과 가족들이 처참하게 (정치, 사법적으로) 학살당했고, 이제 개혁을 주장하는 최강욱 의원을 살해하고 있다. 실력도, 능력도, 상식도 없는 비루한 것들이 얄팍한 권력을 잡자 동료를 학살하고, 적들과 손을 잡고 개혁을 질식시키고 있다. 너무 혐오스러워 구역질이 나온다. 무능한 자들이 권력을 갖게 되면, 마치 어린아이가 총알이 든 총을 가진 것처럼, 자기 제어, 통제를 하지 못한다. 비로 직전의 정부가 많은 부분 잘 했고, 또 많은 부분 잘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사악하거나 야비하거나 천박하지는 않았다. 지금 권력을 잡은 자들은 무능하고, 멍청하며, 사악하고, 야비하고, 천박하다. 올바른 역사관, 정치관, 세계관이 없으니 국가를 올바르게 운영할 능력이 없는 건 당연하고, 주변 강대국의 전술에 휘둘리며 국가의 이익을 뺐기기만 할 뿐이다. 무능하고 멍청한 권력자에게서 권력을 뺐어야 한다. 마치 총을 든 어린아이에게서 총을 뺐는 게 당연하듯. 3 백수가 이렇게 피곤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힘든 나날이다. 일주일에 두 번 하던 글쓰기 강의도 하나가 끝나고, 이제 마지막 강의만 남겨두고 있다. 시민단체 활동도 많은 일을 하는 건 아니나, 참여하는 자체로도 신경 쓸 일이 있고, 즐거운 한편 힘들기도 하다. 여기에 끝이 없는 집안 일과 안팎으로 소소하게 신경써야 하는 일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그런 일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간다. 이럴 때 부르주아가 부럽다. 돈이 많으면 돈으로 사람을 사서 내 시간을 대신할 수 있는 게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세상에 태어나 자랐으니 그 한계가 너무 명확해서, 자본가, 부르주아 아니면 노동자 계급에 속할 수밖에 없고, 확률통계상 90%에 해당하는 노동자 계급에 속하게 된 건 당연한 결과일테다. 내가 만약 10%에 속하는 자본가, 부르주아였다면 여기서 이런 한심한 말이나 늘어놓고 있지 않을텐데. 이상적 사회주의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루 4시간 사회를 위해 노동하고, 나머지는 나 자신의 창조적 삶을 위해 살아가는 사회, 모두가 고르게 평등하고, 빈부가 사라지고, 문화, 예술이 꽃피우고, 자본주의 폐해인 경쟁, 이기, 착취가 사라지고, 텔레비전에서 연애, 오락방송이 아닌, 깊이 있는 다큐멘터리와 문화, 예술 프로그램과 즐거운 토론으로 격조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회라면. 4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옳고 그름의 가치가 뒤섞이며, 상식과 윤리의 기준이 흔들리는 세상이다. 과거에도 그랬다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지금이 가장 심각하다. 경제 성장으로 나라와 개인의 부가 증가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확산하고, 과거에는 무심코 넘어가던 인권의 문제가 매우 세부적으로 나뉘면서, 각 세대, 집단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건 바람직하고 당연한 역사의 발전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편협, 악의, 이기, 무지한 자들의 선동과 만행으로 고결한 가치가 훼손되고, 더럽혀지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소수자 인권, 페미니즘이 약자의 무기로 작동하면서 선량한 시민을 해치는 흉기가 되는 꼴을 지금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축소하거나 제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옥석을 가려야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는 사람이 너무 많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개혁에 걸림돌이 된다는 걸 정확히 인지해야 하며, 그 방해물을 빠르게 제거하는 것도 개혁 시민이 해야 할 일이다. 5 카타르시스가 필요하다. 세상이 역겨울 정도로 참담하고 한심할 때, 나는 조용히 침잠한다. 책 읽고, 영화 보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세상으로 난 문을 닫는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 존재 의의가 있지만, 그 사회가 추잡하고, 역겨울 때는 잠시 몸을 숨길 필요가 있다. 다만, 몸을 숨길 수 없는 사람들, 어쩔 수 없이 힘들과 괴로운 나날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카타르시스 방법이 있을 걸로 믿는다. 일상을 무심히, 묵묵히 살아가는 건 지독한 세상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다. 밥 하고, 설거지 하고, 집안 정리, 청소하고, 책 읽고, 영화 보고, 음악 듣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나날이 당연하면서 치유의 시간이다. 마음 통하는 가족, 친구, 이웃과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시며 수다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고,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그런 시간 외에 그저 조용히 침잠하는 나날이지 않을까. 정치가 개인의 삶을 옥죄고, 불행하게 만들 때, 과거에는 거리로 뛰쳐나가 돌과 화염병을 던졌지만, 지금은 모두 두더쥐처럼 땅속으로 숨는다. 그런 비겁이 권력의 만행을 부추기고, 악행을 용인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나는 이기적 인간들이 싫다. 다른 사람의 피와 땀에 기생하는 자들, 열매만 따먹으려는 이기적이고 야비한 자들이 싫다. 그런 자들을 위해 내 피와 땀을 흘리기도 싫다. 6 누리호 2차 발사를 생중계로 봤다. 누리호가 힘차게 우주를 향해 날아오르는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뭉클하다. 우리에게는 우주가 있다. 우리는 '창백한 푸른 점'에 살고 있는 미미한 존재다. 무엇보다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
    • 칼럼
    • 백건우
    2023-01-08
  • 르네 마그리트의 '생존자'
    르네 마그리트의 '생존자' 이 그림만 보고는 어떤 작가가 그렸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나도 꽤 안다고 생각했던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이란 걸 알았을 때, 약간 충격 받았다. 이 작품은 보자마자 느낀 생각이 '초현실주의' 작품이 아닌 듯하다 였다. 하지만 다시 보고, 조금 더 생각하니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작품이었다. 피카소는 두 편의 '학살' 관련 작품을 그렸는데, 하나는 1937년에 그린 '게르니카'다. 자신의 고향인 스페인에서 내전이 발발했고, 쿠데타를 일으킨 프랑코는 선거에서 승리한 인민전선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시작했다. 프랑코는 독일 히틀러에게 도움을 청했고, 히틀러는 폭격기를 보내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그곳이 바로 '게르니카'였다.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는 독일 폭격기에서 쏟아부은 폭탄으로 소멸했고,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이때 학살당했다. 전쟁과 아무 관련이 없던 작은 시골 마을에 당시 독일에서 개발한 최신 무기를 실험하면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히틀러와 프랑코의 만행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당시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던 피카소에게 스페인 정부(인민전선)는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할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피카소는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진 학살을 뉴스를 통해 보고 들었고, 이 참혹한 역사를 그림으로 기록하겠다고 생각하고 작품을 만들었고, 지금 우리가 아는 '게르니카'가 되었다. 또 한 작품은 '한국전쟁'과 관련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피카소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작품을 완성한다.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이다. 1937년 '게르니카'를 그릴 때 피카소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고 공산당원이 된 피카소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반전을 주제로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이 작품이 '미군이 한국인을 학살'하는 장면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전쟁의 비극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피카소도 후기 작품이 '초현실주의'로 변화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데, 피카소의 초기, 중기, 후기 작품들의 변화는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도 초기, 중기, 후기 작품의 변화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데, 두 사람의 작품의 변화 양상은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이 추구하는 작품 세계는 비슷한 면이 있다. 피카소와 르네 마그리트는 모두 공산당원이었으며, 피카소는 프랑스에서, 르네 마그리트는 벨기에에서 공산당원이자 예술가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두 사람 모두 예술이 '선전선동의 도구'가 되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고, 예술의 독창성, 작가의 자유로운 작품 세계, 제한 없는 창작의 영역과 시도를 그 어떤 작가보다 강렬하게 추구했다. '반제 반파시즘'과 '일당 독재(스탈린)'에 대해 강한 거부감과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던 사람이 조지 오웰이었고, 그가 '동물농장'이나 '1984' 같은 뛰어난 소설로 독재와 반지성을 비판했다면, 피카소와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방식으로 현대(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작품은 'The Survivor', '생존자'라는 제목이다. 만약 이 그림에 제목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그림에서 어떤 걸 발견하고,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모든 창작물에서 '제목'은 또 하나의 '상징'이 된다.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그 자체로 철학과 언어학의 주제가 되었다. 미셸 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작품만으로 책 한 권을 쓸 정도였다. 이 작품은 1950년,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전시회를 위해 그린 작품으로, 이 작품이 전시되면서 평론가와 관객들 사이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작품을 들여다보자. 배경은 벽이다. 그것도 어느 평범한 가정집의 거실 또는 안방 같은 공간이거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만나는 전실일 수도 있다. 위쪽으로는 꽃무늬 벽지가 가지런하고 단아하게 새겨져 있고, 아래쪽에는 양각한 나무 판자가 매우 엄격한 문양으로 반복하고 있다. 피가 흥건히 흘러내리는 총이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고, 왼쪽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오른쪽에 총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개머리판이 있는 바닥은 원목마루가 깔려 있고, 총기에서 흘러내린 피가 마루에 흥건히 젖어들고 있다. 이 그림만 보면, '초현실주의'가 아닌, '리얼리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초현실'로 보이는 대상 또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리얼'한 작품에서 '초현실'을 느끼게 되는 요인은 무엇이고 왜일까. 우선, 평범한 일상-가정집의 벽면-에 비현실적 요소-피묻은 총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장면이 곧 '초현실'적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이런 장면을 평생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것은 그림 또는 사진 또는 영상에서나 볼 수 있는 '비현실'의 재현이며, 따라서 현실의 초월한다. 또 하나, '생존자'는 누구인가. 관객은 이 작품의 제목을 보고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작품 제목이 하나의 '상징'인 이유가 여기 있다. 관객은 작가가 부여한 작품 제목을 받아들이게 되고, 제목의 영향을 받아 자의적 해석을 한다. '생존자'는 누구인가. 이 총 자체가 '생존자'인가, 아니면 이 총을 가져온 어떤 사람이 생존자인가. 이 총은 사람을 상징하는 '의인화'한 대상은 아닌가. 저 피는 누구의 피일까. 이처럼 많은 질문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지만, 르네 마그리트는 자기 작품에 상징을 부여하는 걸 경계하고 경고했다. 즉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다'라는 게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르네 마그리트의 모든 '초현실주의' 작품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건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르네 마그리트는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한다. 정해진 답은 없지만, 호기심을 갖고, 현실에 관해 의문을 던지고, 질문하는 것은 관객이 할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르네 마그리트는 1차, 2차 세계전쟁을 겪은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가 정신병을 앓다 자살한 불우한 과거가 있지만, 좋은 아버지와 형제들 사이에서 건강하게 자랐고, 나이 들면서 벨기에 공산당에 가입해 공산당원으로도 활동할만큼 진보적 태도를 가졌다. 그의 작품 세계에 트라우마가 작용했을 거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이 작품 '생존자'는 세계 전쟁을 겪은 뒤 그가 가졌던 감정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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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건우
    2023-01-08
  • 문재인 대통령의 마지막 인터뷰
    문재인 대통령의 마지막 인터뷰 대통령의 인식과 주관은 뚜렷했다. 문재인 정부가 이룬 공과 과를 잘 알고 있었고, 훌륭한 성과가 묻힌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걸 느꼈다. 원칙주의자이자 합리적 보수의 인식을 가진 대통령은 한편으로 주관적 확신이 강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주길 바랐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억울하고 비참하게 살해당한 이후, 그 과정과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문재인 대통령이라면, 노무현의 꿈을 이룰 것이라고 당연히 믿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살해한 이명박을 감옥에 보낸 것까지는 좋았다. 이명박은 대통령 재임시절 분명히 범죄(뇌물, 횡령)를 저질렀고, 지금 죄값을 치르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보다 더 나쁜 것들이 일부 정치검찰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소환할 때, 창밖으로 내려다보며 비열하게 웃던 검사들을 보면서, 저들이 대통령을 발가락의 때처럼 여기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라면, 그런 정치 검찰을 때려잡고, 속시원하게 검찰 개혁을 하리라 믿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조국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으로 내정할 때, 비로소 검찰 개혁이 시작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상관인 법무부장관을 살해하는 걸 보면서도 끝까지 침묵할 때도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나름의 계획을 갖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국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경제는 선진국으로 진입했고, 특히 K-시리즈로 이어지는 팝, 영화, 춤, 패션, 음식 등 한국 문화 전반의 눈부신 성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성공했다. 하지만 국내 정치와 개혁 과제는 미진했다. 촛불항쟁으로 박근혜를 탄핵하고, 촛불정부로 시작한 문재인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국정과제는 '개혁'이었다. 그것도 강력하고 단호한 개혁이었다. 가장 먼저 검찰을 개혁하고, 언론을 개혁하는 것을 촛불시민은 바랐다. 진심으로 바랐다. 조국 전 장관과 가족이 정치 검찰과 그들의 개들에게 난도질 당하고 있을 때, 대통령은 뒷전에서 침묵했다. 나는 그 순간에도 문재인 대통령을 믿었다. 분명 무언가 내가 생각하지 못한, 한 차원 높은 수순을 만들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조국 전 장관과 가족이 갈갈이 찢기는 와중에, 촛불시민들이 안타까움과 분노로 치를 떨며 다시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었고, '조국'을 지키는 것이 곧 검찰 개혁이라는, '조국'이 개혁의 상징이 되어버리는 순간에도,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전 장관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훌륭한 인물,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마지막 인터뷰를 본 나는, 문재인 대통령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문재인을 과대평가했거나, 내가 가진 프레임에 맞춰 생각했거나, 나의 개혁의지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사했다. 그리고 실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원래' 점잖은 사람이고, 보수적 인물이며, 지극히 합리적 인물이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증오에 가까운 복수심과 뿌리를 뽑아야 하는 개혁의 의지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걸 몰랐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살해당하고, 노회찬 의원이 자살당하고, 박원순 시장이 자살당하는 걸 보면서, 적들에게도 똑같은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문재인 대통령이 해주길 바랐다. 자신의 오른팔인 조국 민정수석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할 때는, 그만한 각오를 했을 터이고, 검찰과 언론의 발호를 막을 계획을 세웠을 거라고 믿었다. 자신의 오른팔이던 장군이 전장에 나가 적진도 아닌, 아군의 진영에서 무수한 배신자들에게 난자당하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면, 그게 훌륭한 지도자일까. 오늘 마지막 인터뷰를 보면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는다. 그는 자신이 모시던 노무현 대통령의 비참한 죽음도 외면했고, 자기의 오른팔이던 조국 민정수석, 법무부장관과 그의 가족의 정치적 살해도 외면했다. 자신이 아무리 '원칙주의자'이고, '법치주의자'라고 강변해도, 우리 촛불시민이 바란 건, 그런 '원칙'과 '법치'가 아니었다. 칼을 든 범죄자 앞에서 '원칙'과 '법치'만 말하고, 당장 살해당하는 자기 가족을 외면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믿고 따르거나,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다. 촛불시민이 대통령제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인 '대통령'을 만들었을 때, 우리가 바란건 대통령이 권력을 휘둘러 날카롭고 확실한 개혁을 하길 바랐다. 경제, 외교, 문화를 잘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 재임 기간에 경제, 외교, 문화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반목과 불신과 증오와 폭력이 난무했다는 걸로 기억한다. 정치검찰과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을 살해했고, 노회찬 의원을 살해했으며, 박원순 시장을 살해했다. 그리고 이제 그 피묻은 칼날은 점잖기만 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할 것이다. 그때, 촛불을 들어 박근혜를 탄핵했던 시민들이 과연 문재인 대통령을 지켜줄까. 조국 전 장관과 가족이 저렇게 난도질당할 때 침묵했던 문재인 대통령, 억울하게 살해당한 노무현 대통령의 원한을 갚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 정치검찰과 쓰레기 언론을 개혁하지 못한 문재인 대통령. 나는 더 이상 문재인 대통령을 '존경'할 마음이 없다.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퇴임 후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자신을 믿고 따르던 장수들을 모른체 하는, 그런 대통령이 문재인이었다면, 그동안 내가 가졌던 존경의 마음을 철회한다.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바란다.
    • 칼럼
    • 백건우
    2023-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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