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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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지도층 좋아하네
    '사회지도층' 좋아하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집단'인 것만은 분명한데, 언론도, 정치계도, 일반인들도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언론에서 '사회지도층' 운운하며 나올 때를 보면, 거의 정치계, 경제계의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나,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등 '사'자 들어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사회지도층'에는 이 두 분야 외에도 문화, 예술계를 비롯해 농업, 산업계 전반도 포함하겠지만, 정확하게 그 범위나 직위 등에 관해 합의된 내용은 없다. 더구나 '법적'으로 규정된 내용은 더더구나 없다.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는, 독재정권 시대에 인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던 비민주적이고 오만한 권력의 시선이 담겨 있는 단어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과 평등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할 때,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이 나라의 민주화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는 물론이거니와 소위 '언론'에서 규정하는 그 '사회지도층'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사회'를 '지도'하는 '층'의 자격이 되는지 조차 전혀 믿을 수 없다. 인민들 누구도 어떤 계층이나 직업에 대해 '사회를 지도'하라고 위임한 적이 없으며, 그들의 지도를 받고 싶은 마음도, 이유도 전혀 없다는 것을 먼저 기억하자. 그럼에도 어떤 직업군의 특정한 부류들이 스스로를 '지도층'이라고 여기며 권력이나 여론을 주도하겠다고 나선다면, 그 자체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행동이므로, 인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그런 자들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언론에 보도되는 '지능범죄'의 주체를 보면, 거의 대부분 언론에서 지칭하는 '사회지도층'이 많다. 우리나라의 '재벌'이라는 자들이 저지른 범죄는 거액의 횡령, 배임 등 심각한 경제사범이 많고, 이들이 미국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하루아침에 파산해서 길거리에 깡통을 차고 나앉거나 수 십년씩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 중대 범죄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권력과 결탁해 항상 풀려나곤 한다. 최근에도 비밀창고에 현금을 140억원이나 숨겨놓은 의사가 있었는데, 의사 직업도 '사회지도층'에 해당하므로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평범한 인민이 저지르는 소소한 범죄에 비해 훨씬 무겁게 처벌을 받아야 함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긴, 판사나 검사 등도 모두 동류의 '사회지도층'이니 서로서로 봐주기를 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 하나의 '층'인 것은 분명하다. 권력과 금력을 장악한 자들을 '사회지도층'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와 민주주의의 파괴 행위는 '반국가적' 행동이며 북한과 대치한 상황에서 나라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이적행위'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권력과 금력을 이용해 특권을 누릴 때는 '사회지도층'이라는 단어를 달콤하게 여기면서, 정작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자연인'으로 변명하려는 그들의 이중인격은 그들이 도덕적이거나 양심적인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임을 웅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므로 개인에게 어떤 특권이나 권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이므로 정확하게는 '계급'이 존재한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그것이다. 이 두 계급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인민'으로 불러도 될 것이다. 물론 '인민'의 범주에는 '자본가 계급'에 가까운 인민도 있을 것이고, '노동자 계급'에 가까운 인민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쁘띠 브루주아'나 '룸펜'으로 표현했지만, 어쨌든 1%의 '자본가'와 5%의 '자본가 계급'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노동자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회지도층'은 결국 이들 5%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회'를 '지도'하는 것이 아닌, 인민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우리는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비민주적인 단어인 '사회지도층'이라는 말은 결코 사용하도록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요즘 결혼식
    요즘 결혼식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지인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갔다. 결혼식장은 강남에 있었고,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니, 흔한 '웨딩홀' 보다는 고급한 장소인 듯 했다. 결혼식을 보고 나서, 우리나라의 결혼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요즘은 '웨딩홀'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대중적이고 서민들이 결혼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생겨서, 돈 있는 사람들은 최고급 호텔에서도 결혼식을 많이 하고, '웨딩'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지 않은, 고급한 장소를 찾는다고 한다. 특히 권력자, 재벌, 연예인 등이 결혼식을 하는 곳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을 부러워 하는 것부터 내가 보기에는 이상하다. 사람들은 흔히, 결혼식은 '일생에 한 번' 하는 행사이니, 추억에 남고, 하객들에게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성대하고 화려하게 보이길 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 이혼율이 30%를 넘는 세상에서, '일생에 한 번'이라는 말은 이미 현실을 왜곡하는 말이다. 돈이 얼마가 들던,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호화결혼이건 사치결혼이건 말릴 이유가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결혼을 '두 사람 만의 행복을 위한'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이 나라에서 결혼은 집안과 집안, 족벌과 족벌, 학연과 지연, 혈연이 결합하는 과정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결혼은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한 의식'을 넘어, 집안과 집안의 자존심 대결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과시용 행사이며, 최대한 많은 하객을 끌어모아 축의금 명목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경제 행위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글을 쓰는 나 역시, 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도 강남에서 결혼식을 했고,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돌렸으며, 축의금을 받아 결혼식 비용을 치렀다. 생각해 보면 참 못났다. 우리는 못 났으되, 요즘 젊은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심해진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결혼식장은 더 호화로워졌고, 결혼식 비용은 더 늘어났으며, 결혼과 관련한 혼수, 집 장만, 신혼여행 등 관련 상품들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결혼식을 하고도 무려 30%가 넘는 부부가 이혼을 한다는 것은, 그 결혼식이 얼마나 성대하건 상관 없이,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부부의 시작이 화려한 결혼식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돈을 들여 눈부시게 화려한 결혼식을 한다고 그들이 더 행복한 인생을 살지도 않을 것이며, 고급 아파트와 자동차와 최신 가전제품으로 치장을 한 집에서 산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부부보다 394.75%만큼 행복할 거라는 수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평상복을 입고, 가까운 공원에서, 구리반지를 서로 나눠 끼는 것만으로 결혼식을 한다해서, 그 부부가 눈물겹게 가난한 인생을 살아가란 법도 없을테고, 가난해서 불행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돈이 많아서 그 돈을 마음껏 쓰겠다는 데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하객이나 친지, 친구의 이목을 두려워해서 빚을 내서라도 호화 결혼식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결혼식은 불과 20여분 남짓이면 끝이 나는데, 결혼식장을 치장한 그 많은 꽃들이며 화환이며, 온갖 장식들은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큰 돈이 들어간 것이다. 불과 1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그 많은 돈을 들여 치장한 것도 그렇고, 하객 식사 대접에 1인당 5만원에서 13만원까지 하는 코스요리를 선택하는 것도,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옳다고는 못하겠다. 돈이 많아서 내 마음대로 돈을 쓰겠다는 심보는, 힘이 센 아이가 아무 생각없이 약한 아이를 때리면서도 '내 맘이야'라고 소리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돈이 많을수록 겸양하고, 사회와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위화감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을 써야 할 일이다. 하지만, 요즘 이 나라의 현실을 보면, 가진 자는 오로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에 급급하고, 중산층은 또한 더 많이 가진 자를 쫓아가기에 급급하고, 서민들은 중산층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겉으로 보이는 물질적인 부를 향해 일로매진할 뿐이니, 가난이 곳 죄이며, 불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가난해도 당당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젊음이 보고 싶다. 부자라도 겸양하고 이웃을 위해 배려하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최고의 가치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자본보다 인간의 마음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9
  • 책의 가치
    책의 가치 다른 건 몰라도, 책을 살 때만큼 마음이 흐믓할 때가 드물다. 책을 좋아하는 것이 타고나는 것은 아닐텐데,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만큼 책을 사들이는 것도 열심이다. 집에 있는 책의 대부분은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들인데, 출판사에게는 퍽 미안한 일이지만 새책을 살만큼 여유가 없기도 하고, 헌책방 찾아다니며 헌책을 고르는 재미가 남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을 구입할 때도 그렇지만, 집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은 다음, 가끔 책 뒷표지에서 책값을 확인할 때가 있는데, 정가 가격과 헌책 가격은 차이가 많다. 새책 가격 기준으로 볼 때, 많게는 60%에서 적게는 10%에 이르기까지 헌책 가격은 다양하다. 새책을 살 때는 돈이 아깝다기 보다 주머니가 가벼워서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같은 책을 헌책으로 사면 부담이 없어서 왠지 마음이 가볍다. 이런 마음은 전형적인 '가난한 백수'의 마음이다. 새책 값이든 헌책 값이든, 돈을 떠나서 책-대부분의 양서를 기준으로-한 권의 가치는 그 책이 가지고 있는 책값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즉, 우리가 아주 적은 돈으로 양질의 훌륭한 내용이 담긴 책을 한 권 살 수 있는 것은 책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 때문이다. 최근에 망설임없이 구입한 새책으로는 '자본'이 있는데, 5권 세트로 16만원을 주면서도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샀다. 이 책 세트는 강신준 교수가 독일어본을 완역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최초의 완역본이다. 마르크스의 역작,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쇄되고, 판매되고, 읽힌 책인 '자본'을 겨우 16만원에 살 수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놀라운 일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마니아로, 그가 쓴 작품들은 거의 다 가지고 있지만, 아직 구입하지 못한 몇 권이 있다.(최근에 구입했다. 무척 기쁘다.)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가 그것인데, 책값이 5만원이 넘어 선뜻 구입하기가 망설여졌다. 물론, 책의 내용에 비하면 책값은 정말 저렴하다는 걸 잘 안다. 그만큼 좋은 책들은 책값에 비해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캐나다에 사는 지인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기형적으로 책값이 싼 나라에 속한다고 한다. 책값이 싸다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그 바탕에는 지식노동자의 고혈을 짜내는 기형적인 출판산업이 있기 때문임을 안다면, 무조건 좋아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 지인과 나의 동감하는 내용이었다. 나도 글을 많이 썼고, 잡지사며, 출판사와도 일을 많이 해서 잘 알지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원고료는 달라지지 않았다. 해마다 물가며 임금은 조금씩이라도 올라가는데, 유독 원고료만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저자' 노릇을 한다는 건,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다. 물론, 잘 나가는 필자들도 여럿 있겠지만, 수많은 잡지사에 글을 공급하는 '자유기고가'들, 다양한 실용서와 기획도서를 만드는 개인 필자들은 원고료와 인세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값이 싸다는 것은, 책의 가치를 낮게 인식한다는 것이고, 책과 관련된 모든 분야-필자, 출판사, 인쇄소, 제본소 등-를 공정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독자는 자신이 얻는 것에 비해 터무니 없이 낮은 값을 지불하려는 태도가 이기적인 태도임을 이해해야 한다.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을 높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좋은 책에 대해서 합리적인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책 한 권 속에는 필자의 노하우가 응축되어 있고, 출판사 직원의 노고가 들어 있으며, 인쇄노동자들의 땀이 배어 있다는 것을 넓게 살펴봤으면 한다. 나부터도 책 한 권 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하는데, 백수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되니 어쩔 수가 없다. 책에 관해 생각하면서, 앞으로는 책을 읽고나면 평점을-개인적으로-부여하고, 책값과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작업을 해볼까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책들은 책값에 비해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증명될 것으로 확신한다.
    • 칼럼
    • 백건우
    20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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